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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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유종호
2005-08-01

대홍수 이후 시대 1


1. 대홍수 이후의 지구

대홍수 기간과 그 직후에 지구 위에서 생겼던 모든 재난을 감안해 볼 때, 대홍수 이후의 지구는 과연 어떠했을까?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다. 대홍수 이후 물이 빠진 세계는 그 전에 존재했던 아름답고 쾌적하고 풍성한 옛 모습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 위에 있던 수증기 층으로부터 지구상에 엄청나게 퍼부은 많은 양의 비와, 거칠고 파괴력을 가진 바람과 토네이도, 사이클론, 허리케인, 북극지역에서의 거의 순식간에 -130℃로 기온의 급강하, 해저 샘(깊음의 샘)들의 터짐, 땅덩어리와 산들의 융기, 화산과 지진에 의한 전 지구가 흔들림, 빠른 속도로 밀려와서 육지를 덮친 엄청난 높이의 파괴적인 해일, 부서지고 깨진 바윗돌과 온갖 잡탕들과 뒤섞여 버린 비옥한 토양 등... 이 모든 것들이 1, 2마일 또는 그 이상의 깊이로 새로운 퇴적층을 이루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지구에 살아남은 거민들을 위해 전혀 새로운 지구 환경을 만들었다.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비옥한 원시 토양은 아마도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 내외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미국의 새로운 땅으로 이민해서 유럽지방의 옛 지명들을 미국의 새 정착지에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와 그 후손들은 분명히 홍수 전부터 알고 있던 옛 지명들을 새로운 정착지에 부여했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지상의 물을 분리하시고 마른 땅을 드러나게 하셨을 때, 즉 대홍수 이전의 육지는 지금보다는 훨씬 넓었을 것이다. 대홍수 이전에는 기복이 덜하고 평평했던 지구 표면은 홍수 이후에는 궁창의 물이 쏟아져 내려서 험준한 산맥과 깊은 해저를 이루며 변형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해저 특히 대륙 인근의 대륙붕들은 옛날에는 마른 육지였을 것이다.

풍성하게 자라던 수많은 맛있는 과일들, 견과류, 딸기류, 손쉽게 구할 수 있던 각종 채소류들은 모두가 사라졌다. 그 전에 있던 삼림과 인공적인 거대한 문명의 산물들은 없어져 버렸다. 울퉁불퉁한 산들과 급하게 흐르는 강들이 인간들이 다니려고 하는 모든 길을 막아버려서 넘고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딴 행성에 온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달라진 것은 지구 표면만이 아니었다. 기후도 엄청나게 변했다. 그때까지는 궁창 위에서 보호막 역할을 하던 물 층이 그들을 보호하고 땅위에 알맞게 수분도 공급해 주었었는데, 이제는 온난하고 쾌적한 봄날 같은 기후는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혹서와 혹한과 무시무시한 폭풍우의 날씨가 반복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후와 직면하게 되었다. 젯드 기류를 따라 이동되는 고·저 기압체계는 하루하루의 날씨가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무쌍했다. 보호막 역할을 하던 물 층이 사라지자 당대 인간은 물론이요 자녀들과 후손들 그리고 동물들의 수명은 단축되었고, 마찬가지로 식물들의 수명도 현저히 단축되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뉘게 하시매(창1:7)” 이전에 궁창 위에 있던 물에 정영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일단 떨어진 이 물들은 지금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다시 하늘로 되돌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땅 덩이를 들어 올려(융기시켜) 산맥들을 형성하셨을 때, 동시에 모든 홍수 물들을 저장해 둘 처소를 만들기 위해 땅의 어떤 부분의 깊이는 낮추셨다. 

이것은 모두가 시편 104:5-8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데 즉,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8절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산은 솟아오르고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처소로 내려갔나이다.”이다. 진실로 노아와 그의 후손들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2.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틀림없이 그들은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가졌으며, 기술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르네 누어버겐은 <잃어버린 인종들에 대한 비밀, 1977>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 가족 등 소수의 생존자들은 대홍수 이전에 있었던 기술지식을 거의 보유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같은 책 p.2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는 바뀐 환경에 낯선 생존자들인 이 8명의 적은 집단이 홍수 이전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부문의 기술적 환경여건을 재생시키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기술 분야는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 많은 인구가 꼭 필요하다. 따라서 생존한 인간 가족들이 대홍수 이후 시대에 재건할 수 있었던 문명의 수준은 심각하게 낮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대형 3층 선박을 건조하고 있던 전 기간 동안(약 120년)에 그들이 능히 그들의 자손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추가적인 기술과 기능을 틀림없이 습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도급자들을 고용했다면 틀림없이 그들로부터 많은 기능을 배웠을 것이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350년 동안을 생존했는데, 창세기 10:1-4절에 보면 노아의 손자들과 증손들의 명단이 나와 있다. 이들과 증손들의 또 다른 후손들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홍수 이전부터 전수해 온 많은 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이런 기술로부터 고도의 기술과 발달된 애굽(이집트), 수메르,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문명들로 이어졌다. 우리는 애굽인들이 피라미드와 다른 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위해서 얼마나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이미 살펴본바 있다. 사실 창세기 10:8-10절에는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시작되었으며”라고 씌어 있다. 바벨과 시날과 니느웨는 수메르와 바벨론의 발달된 문명의 사람들에게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어떤 세대는 구약의 족보에서 가끔 그랬던 것처럼 생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지식은 그들의 후속 세대로 전수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홍수 이후 10대 손에 해당한다. 홍수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노아 자신도 홍수 이후에 350년 동안이나 살았고, 각 세대간 수 백년 씩이나 서로 겹쳐서 살았음으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분명코 여러 세대에 걸쳐 후손들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비록 바벨탑 이후의 민족과 부족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들에게 잘못 와전된 내용을 전하였지만, 이 사람들은 대홍수 이야기를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전의 역사에 관한 지식도 전해 주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히브리 민족은 아담과 하와 때로부터의 인류의 역사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지만, 수메르인들 조차도 대홍수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다소간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 우르의 아브라함 고향 마을로부터 1-2마일 북쪽에서 웰드-브룬더 탐험대는 BC 2100년 경 누르-닌수브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 웰드 프리즘을 발굴했다. 이 프리즘에는 대홍수 이전에 살았던 10명의 왕(성경에 있는 홍수 전 10족장들을 언급한 것임)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누르-닌수브르라는 사람에 관하여 르네 누어버겐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인종들의 비밀들> p.26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설명에서 그는 10명의 홍수 이전 왕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슬픈 말들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대홍수가 온 땅을 뒤덮었다.” 수메르 인들과 후기 바벨론 인들 그리고 앗시리아 인들은 대홍수 이전 시대를 우수한 문학적 자원으로 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바벨론의 한 왕은 “그가 대홍수 이전 시대의 작품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니느웨에서 대형 도서관을 발견한 앗수르 바니팔은 “대홍수 이전 시대의 대형 비문”에 관해서 언급했다. 그것은 대홍수 전·후의 문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것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발달된 이유는,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 뇌의 전용량을 온전히 사용하였던 반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우리 뇌의 용량의 1/6만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만일 노아와 어쩌면 도급자들과 함께 그의 세 아들들이 그렇게 큰 배를 지었다면, 그들과 후손들은 태평양 또는 최소한 아프리카와 남미를 횡단하는 배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테말라의 마야인들은 그곳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했던 최초의 인류라고 말했다.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950년 이상을 살았고, 노아는 홍수 이후로 350년을 더 살기는 했지만,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훨씬 단명했다. 궁창 위의 물 층이 오늘날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파 일부를 차단시키는 것을 도와줌으로서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장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가임(可妊) 연한에 관한 것이다. 그 때 여성들이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은 오늘날의 약 50세까지보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은 더 길었을 것이고, 대홍수 때까지 인구는 수십억 명에 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홍수 이후 단 기간 내에 인구는 한 나라를 이룰 만큼 증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창10:32절에 이르기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3. 바벨탑

위에 인용한 창10:32 직후, 창11:1,2절에는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시날 평지는 노아의 증손인 니므롯이 나라를 세웠던 땅이다 (창10:10). 역사적으로 시날은 바벨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


4. 대홍수와 바벨탑 사이의 기간

노아 시대와 바벨탑 사건 사이의 몇몇 족장들의 이름들이 창세기 10과 11장에서 빠져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의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불확실하다. 아마도 그 기간이 150년에서 350년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아브라함의 출생년도가 BC 2167년이라는 것을 기초로 할 때 대홍수는 BC 2460년에 발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바벨탑 사건은 대홍수 후 150년 내지 350년 기간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상의 다른 사건에서 미루어 대홍수와 바벨탑사건은 그보다도 수 세기 이르게 발생했을 수도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80

참고 :

유종호
2005-07-20

이 지구의 홍수 이전 역사, 지질학, 그리고 기후


       노아 시대에 있었던 가공할 홍수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홍수 이전에는 지구의 환경이 어떠했을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약 1,600여 년간의 인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홍수 이전 기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그와 같이 오랜 기간의 지리학과 기후였다.


1. 홍수 이전의 지표

지구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전 지각을 바꾸어 버린 격변적이고 파괴적인 대홍수가 있었던 시기 사이에 지구의 표면은 어떠했을까? 단정적인 어떤 것도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창세기 첫 장에 일반적인 암시가 있기는 하다. 창조의 여섯째 날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고 쓰여져 있다. 모든 것들이 ‘심히 좋았다‘는 단순한 사실은 이 땅 위에 산들이나 사막과 같은 극단적인 장애물들이 없어서 인간이 마음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중의 많은 양이 궁창 위에 수증기층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당시의 모든 육지는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막는 어떤 물리적인 장애물도 땅 위에 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제3일에 육지가 드러나게 하셨을 때, 그는 인간들이 별다른 장애물 없이 편하게 여행 다닐 수 있게 완만한 기복이 있는 땅을 창조하셨을 것 같다. 창 7:19-20에서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약 7m)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라고 홍수 때의 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산들이란 ”깊음의 샘들이 터진' 후의 오늘날의 산들보다 그 높이가 훨씬 낮았을 것이다. 그 때의 땅은 지구의 모든 구석들까지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짧은 시간 안에 전 지구 위에 쉽게 분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약 100년 이내에 지구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바다와 대양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물이 당시에는 궁창 위의 물 층에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음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육지가 지금보다는 더 많이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사람들이 편히 땅 위를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2. 홍수 이전의 기후

초기의 1,600 여년 동안에 사람들을 매우 기동성이 있고 활동적이고 부지런하게 했던 것들과 관련된 또 하나의 요소는 당시의 기후였다. 지구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을 보면 홍수 이전에는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를 포함하여 지구의 모든 곳이 일정하게 온난한 기후였음을 나타내준다.

오늘날과 같이 극단적인 기후나 무시무시한 폭풍우 같은 것은 없었다. 앨프레드 레윈클 교수는 그의 저서 <대홍수>라는 책 7쪽에서 앨프레드 월레이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후는 전 지구상에서 계속적으로 봄날처럼 온난하였다.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그렇게 따뜻한 기후가 가능했겠느냐는 것은 추측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기후가 실제로 계속해서 따뜻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화석과, 죽은 즉시 순간적으로 동결되어 완전한 상태로 원상이 보존된 채 시베리아 동토에서 발견되는 냉동동물들을 보면 명백하다. 화석은 오늘날에는 온난한 기후에서만 발견되는 동식물들의 것들이다. 오늘날처럼 다른 기후대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 오직 단일한 온난 기후대만 있었던 것 같다. 대홍수 이전에는 아마도 사막이나 양 극지방도 없었고 기후적으로나 물리적 장애물을 형성하는 로키산맥이나 히말라야산맥과 같은 높은 산들도 없었을 것이다. 육지는 낮고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에는 정글이나 오늘날 북미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 그리고 영국과 유럽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큰 대륙 사이에 바다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마도 인간들과 모든 종류의 동물들은 전 지구상에 쉽게 분포되었고, 노아 일행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각종 동물들은 방주를 짓고 있던 지역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아마도 많은 동물들은 방주를 타기 위해 수천 마일씩이나 이동해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 공중에 있었던 물 층

온 지구상의 기후가 그렇게도 아름답고 쾌적하고 온난했던 이유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던 물 층 때문이었다. 지구는 지금처럼 23.5도 기울지 않고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더라도 전 지구가 따뜻하게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태양은 지구의 모든 지역, 심지어 북극과 남극 지역까지도 균일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진화론자들마저도 한 때는 극지방도 따뜻하고 열대성 기후였다는 것을 믿고 있다.

소년시절부터 줄곧 나를 당혹스럽게 해온 창조 이야기에 관련된 한 가지는 둘째 날의 창조이다. 그것은 창1:6-7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물을 이렇게 나누셨다면 위의 물이 어디에 있었느냐가 문제다. 하나님은 분명히 둘째 날에 물을 나누실 때 오늘날 전 지구상에 있는 물을 약 2인치 이상의 두께로 펴셨을 것이다. 매우 많은 양의 물이 쾌적한 기후를 위한 방패 막을 형성하고 태양광선으로부터 전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물안개의 담요처럼 지구 위에 둘러 펼쳐졌을 것이다. 지구 위에 있던 많은 용량의 물은 지구를 둘러싸서 일종의 물 층 역할을 했고, 이 물 층이 많은 양의 태양열과 직사광선을 흡수했을 것이다. 태양열은 북극과 남극에까지도 항상 쾌적한 기후가 되도록 전 지구에 골고루 방산(放散)되었을 것이다. 이런 기후는 양치류와 같은 아열대성 식물들도 거기서 자랄 수 있게 했다.

존 윗콤과 헨리 모리스가 공저한 <창세기의 홍수>라는 책 256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즉;

"현재의 대기권에서 성층권은 매우 춥다. 그러나 성층권 위에는 기온이 쉽게 비등점 이상이 될 만큼 아주 따뜻하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만일 어떻게 하여 수증기가 성층권 위에 있었다면, 그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상부 대기권에 있는 이런 높은 온도는 밤낮으로 계속 유지된다. 그래서 밤에도 수증기가 응결될 가능성은 없다. [본서 240쪽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80마일 이상의 영역은 화씨 100도 이상으로 매우 뜨겁고 때로는 화씨 3,00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곳을 열권(熱圈)이라고 부른다. 물론 높은 온도는 많은 양의 수증기를 현상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필요조건이다.”

‘국제 지리의 해’ 프로그램과 인공위성 프로그램은 이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물들을 나누셨을 때 대기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공간(궁창) 위에 많은 양의 물을 두셨다. 이 공간은 그 위층에 있는 방대한 양의 물과 아래의 대양에 있는 방대한 양의 물을 분리하는데 사용되었다.


4. 대홍수 이전의 물 층의 온실효과

대홍수 이전의 물 층은 양극을 포함하는 전 지구상에 울창한 식물이 자라도록 했다. 또한 동물이나 인간들도 더 잘 생육할 수 있었다. 남극으로부터 겨우 1-2백마일 이내에 그곳을 무성하게 했던 울창한 식물과 숲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고, 북극으로부터 800마일 이내에 아열대성 숲과 다량의 야자나무잎 화석들이 발견되어 오고 있다. 뉴-시베리아 섬의 동토에서는 푸른 잎과 익은 과일이 달려있는 큰 과일나무 화석이 발견되었다.

홍수 이전에 있었던 이 물 층이 온실효과를 갖는다고 언급되는 이유는 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온실 안에서와 같은 작용을 하여 온실 안의 온도가 올라가는 이치이다. 수증기는 기온을 온난하게 유지해 줄 뿐만 아니라, 양극 사이의 전 지구 온도를 균일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온난한 기후대에서만 발견되는 동물과 식물의 잔해들이 극지방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또한 아프리카와 미국의 사막 지역에서도 이 땅이 예전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랐었고 한 때는 습도가 높고 수분공급이 잘 되어 크게 속성하는 나무들로 덮였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존 바커는 그의 1993년판 소책자 <창조>의 32쪽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물층의 단열효과로 인하여 적도와 극지방, 여름과 겨울, 밤과 낮 사이에 온도 차가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여러 기후조건은 보편적으로 거의 '열대성”이었다. 전 지구적인 온도차가 바람과 기상을 좌우하기 때문에 강풍이나 폭풍우 등은 없었을 것이고 대기는 오히려 싱싱한 식물들이 풍성하고 계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잔잔하고 다습하였을 것이다. 식물이 계속해서 울창하려면 아마도 대기 중에 훨씬 많은 탄산가스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환경이 온실효과를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5. 인간과 동물들을 보호해 준 온실효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들과 동물들은 초기의 그 보호적 물 층 하에서는 수명도 길고 건강하고 체구도 컸을 것이다. 몸을 부패시키고 쇠약하게 하고 해롭게 하며 생물체를 노화시키고 결국 죽게 하는 태양광선과 각종 유해파들이 물 층에 의해서 흡수 차단되어서, 그 결과 인간과 동물들은 굉장히 장수했고, 실제로 홍수 이전 대부분의 인간들은 거의 1,000살까지 살았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900세 이상 살았다는 사실이 족장들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나라들의 기록들과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창세기에만 그 기록들이 세밀하게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매우 얇은 막의 대기만이 태양에서 오는 치명적인 광선과 매우 유해한 혹서와 혹한으로부터 우리를 겨우 보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엷은 양의 수증기만이 우리의 기후를 조절해 준다. 또한 수증기는 지구의 외기권에 있는 보호적 오존층을 유지시켜 준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리의 지구가 그 보호적 오존층을 특히 남극의 상공에서 급속하게 잃어버리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6. 홍수 이전 사람들의 교만

홍수 전후의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되었었다는 사실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대영박물관이 공동으로 1922년 갈대야 우르에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수행했던 발굴들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발굴단은 레오나르드 우울리의 책임 하에 앞선 시대의 문명의 폐허 위에 건설한 많은 문명과 도시의 유물들을 발굴했다. 첫 번째 도시보다 훨씬 아래에서 그들은 대왕들과 왕비들의 무덤들이 포함되어 있는 깊은 구덩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금과 하늘 빛 청금석(lapis lazuli)과 다른 세공품의 유물들을 발견했다. 우울리는 그의 저서 <갈대아 우르>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그 유명한 우르의 금으로 만든 양날 단검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손잡이는 금 못으로 장식된 청금석으로 되어있었고 칼날은 금으로 된 기막히게 아름다운 무기였다.”

우울리는 계속해서 쓰고 있다.

"무덤의 내용은 매우 발달된 도시형 구조의 국가였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사회의 건축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는 기본적인 건축원리에 친숙하였다.”

이 모든 것들에 비추어 볼 때, 홍수 이전 사람들은 고도로 발달된 수준의 문화, 기술, 그리고 문명을 가지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위대한 수준의 문명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인류사에 황금기가 있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역사책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인간은 반인 반원 상태에서 출발하였고, 무지했고, 발달이 더뎠고, 번개로 인하여 시작하게 된 불의 사용 방법을 배우기까지 수백만 년이 걸린 미개인이었다고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가!

세상의 창조와 땅을 흩어놓았던 홍수 사이의 수백 년 동안에 유력하게 실재하던 조건들과 관련된 이런 배경들을 볼 때 우리는 확실하게 명백한 오만, 자만, 자존, 거만, 불손하고, 허풍떠는 기질,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더욱 분명해진 것 같은 자기 숭배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기질 등이 있지 않았나 상상할 수가 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비하면 진정한 낙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유쾌한 세계에서, 모든 종류의 정신적 능력과 재능과 방법론과 세상일에 우수한 사람들과 함께 인간의 몸으로 하는 모든 종류의 기능에 있어 모험심이 강하고 개명되고 숙달되며 수백 년의 수명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죽음의 공포 없이 사는 것이 그들 앞에 확실하게 가능했다.

우리는 그들이 전적으로 무시하고 도전했던, 그들의 창조자에 대항하여 인간이 가장한 오만과 도전을 쉽게 상상할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지구의 도처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오늘날의 남양군도의 기후도 비교적 거칠다고 할 만큼 기후는 온난하고 상쾌했다. 그들에게는 어떤 피난처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남아돌았고, "모든 것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우리가 다른 것과 다른 사람 특히 하나님이나 영원에 대하여 마음을 써야 하는가. 창4:23 이하에 보면 교만한 마음을 가진 라멕은 두 아내들인 아다와 씰라에게 다음과 같이 뽐냈다.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인간들이 그들 상호간에 대한 교만과 죄악 그리고 하나님을 반역한 1,600 여년 동안 거의 모든 인간들이 오직 자기 자신들만을 경배하기에 이르렀다. 창 6:1-6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땅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11-13에서 다음과 같이 다시 강조하고 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패괴하고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땅 위의 네피림, 고대의 용사, 유명한 사람 등으로 부르고 있으나,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부인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을 어떤 종류의 신에 대한 생각으로 유도할지도 모르는 여하한 우상들도 가지지 않았다. 우울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사람들이 종교성이 있다고 생각할만한 어떤 신의 모습이나 어떤 표상이나 장식이 있는 무덤은 단 한 기도 없었다.”

그들은 지혜와 능력과 힘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숭배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 Homo sapiens sapiens - 초(超) 지혜자이다.” 그들은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위대했으나, 그들의 마음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인간의 패역이 너무나도 심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모든 유익하고 좋은 것을 다 부셔버리기로 작정하셨다. 창 6:7-8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참조 : How Much Is Known About Climate History? (Headlines, 2008. 8. 1)
http://creationsafaris.com/crev200808.htm#20080801a
 

Hypercan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4_2/j14_2_123-127.pdf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60

참고 :

유종호
2005-07-19

성경에 기술된 인간의 초기 역사 4


8. 고도로 발달되고, 기술 지향적인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을까?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도 가장 완전하였고, 결함이 없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언어와  지구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과 광물들에 관한 가장 놀랄 만큼의 지식을 갖춘 영명한 지능을 부여받았다. 아담과 이브는 지구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또 그 모든 것들을 지배했다. 그들은 이런 능력과 천부적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만들어 주신 만물에 대하여 통치자로서, 주인으로서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창작할 수가 있었다. 아담은 틀림없이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장과 도구들을 즉시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불을 사용하기까지는 진화론자들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그렇게 수백만 년의 긴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생각과 말을 글로 표현하고 계산을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창4:17에 보면 아담의 아들인 가인은 두 번째의 세대인데 이미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아담의 후손이나 어쩌면 아담 자신이 직접 광물들을 캐내고 제련해서 모든 종류의 금속제 도구, 무기들, 현악기나 오르간형의 악기 등 금속으로 물건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쉽게 문명을 발달시키고 일찍이 초기 이집트인들이나 수메르인들이 지었던 것들보다 훨씬 우수한 건물들과 구조물들을 지을 수 있었다. 진화론자들이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전에 아담과 이브와 그들의 후손들은 연장들과 발명품들과 금속제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진화론자들이 수백만 년 전으로 소급된 인간들의 골동품들에 대해 기록하면서도 그들이 선사시대라고 명명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지능과 능력들이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았거나 오히려 우수했으리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폭풍우(이 지구에 전무후무하리만큼 그리고 지구가 통째로 뒤집힐 만큼의)로 인하여 경천동지할 정도로 격변적이고 흙탕으로 뒤덮였던 시기의 땅 위에 쌓인 수천 피트의 석회암 지층을 파내려 갈 수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당시에 존재했던 선진 문명에 접하고 엄청나게 경악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노아와 그의 자녀들(아마도 당시의 고용인들과 함께)이 이처럼 모든 격식들을 갖춘 3층 구조의 대형 방주를 지을 수 있었다고 믿기를 어려워한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가졌던 상당한 수학지식과 공구의 사용과 발달된 건축기술을 갖춘 조선과 설계 기술의 능력은 홍수 이후의 시대로 자연스럽게 전수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이 초기 이집트와 수메르에서 발견된 건축술과 문명이 홍수 이전의 기술과 건축술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전되었을 것이라는 이유이다.

이집트와 수메르와 기타 갑자기 출현한 경이로운 문명들은, 만일에 그들이 노아와 그의 자손들로부터 홍수 이전의 기술들을 전수 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전 세계적인 파괴적 홍수에서 파괴되어버린 문명이 이집트와 수메르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가장 단단한 화강암으로 된 피라미드와 조각품들과 조상(彫像)들과 스핑크스들,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 고도로 조직적인 정부, 모든 종류의 기능과 기술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인구가 수백만으로 증가되었고, 온 지구에 분포된 큰 집단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문화 문명을 달성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반 역사책이 인류의 역사를 반원(半猿), 반인, 미개인, 원시인, 야만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술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인류사에 있어 황금기였다.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진화론적 역사책은 인간을 오늘날의 가장 퇴보된 야만인들보다도 더 미개하고 무력하게 그리기를 좋아한다 (이 책의 세 번째 단락의 웨스트(W. West)로부터의 인용을 보라).

특히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홍수 이전에 단 하나의 언어만 있었던 이래 여러 기록들과 역사들은 구어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씌어진 기록들에 의해서도 전해져 내려 왔다. 홍수 이전에 사람이 생산했거나 지은 모든 것들은 홍수가 나서 파괴되어 버렸거나, 대부분은 바위가 되어버린 수백 내지 수천 피트 지하의 진흙 속에 묻혀 버렸기 때문에, 이 모든 기록들도 상실되었다. 그러나 홍수 이전의 모든 기록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자손들이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 받은 기술과 건축의 노하우뿐만 아니라, 홍수 이전 족장들의 명단, 그들의 나이, 그리고 자녀들에 관한 사항까지 다음 세대로 물려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이 홍수 이전의 자세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에덴동산에서 약속된 구세주인 “한 여자의 후손”의 조상들이 되었던 가장 중요한 몇몇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에 관한 사항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9. ‘오파츠 (OOPARTS)'

홍수 이전 문명이 번성하였다는 또 하나의 성경 외의 근거는 '오파츠(OOPARTS, Out Of Place ARTifactS,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유물, 또는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인공물)“에 관한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oopart'는 ”장외의' 인공물이다. 이 오파츠는 고고학자들이 고대 문명을 발굴할 때 발견한 인공물 혹은 물체들인데, 혹자들은 이것들이 틀림없이 이 사람들이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는 문명 이전 사람들의 장외 문명인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고고학자들은 르네 누어버겐(Rene Noorbergen) 저 1977년 판 <잃어버린 종족의 비밀들> 2쪽에 의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오파츠의 기술적 정교성이 그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어지는 고대인들의 발명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 오파츠가 인류 역사보다 훨씬 이전에 인간 기원의 슈퍼문명과 발전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같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의 그런 존재 가능성은 무엇인가? 인류역사에 오늘날 20세기 사회와 비견되거나 어쩌면 더욱 발달되었던 문명(들)이 존재했던 한 기간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4쪽에서 그는 내가 몇 단락 전에서 언급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자연계의 대격변(그는 대홍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은 홍수 이전 사람들을 매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술적 성취들도 철저히 파괴시켜 버렸다. 왜냐하면 이 엄청난 대 지각변동은 어떤 형태의 기계나 구조물도 확실하게 말살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그리고 그가 말한 많은 것 가운데 과학적(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는데) 언급이 21쪽에 있다. 즉:

“모든 인간을 파멸시켰던 홍수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은 고고학, 지질학, 전통적 역사, 그리고 성경적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계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분의 이런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나는 내가 책을 쓰면서 이것을 입수하기 전까지는 이 진술을 보지 못했다. 고고학 분야에서 진화론의 비논리성과 이집트 문명과 전통적인 세속 역사에서 그리고 바로 지금은 성경의 역사에 나와 있는 다른 발달된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저술한 것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의 주제 즉 지질학을 더 고려해야겠는데 이것은 노아의 홍수시대를 분석할 때 취급될 것이다.

거론된 몇몇 오파츠에는 1967년 콜로라도주 굴만 광산의 지하 120m에 있는 은 광맥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와 4인치 길이의 구리 화살촉이 있다. 매서추세츠주 도체스터 광산에서 1891년에 표면으로부터 4.5m 지하에 있는 견고한 암석에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꺼낸 금속제 화병도 또 다른 오파츠이다. 그 화병의 측면은 은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1891년 일리노이 주 모리슨빌에서는 정교한 솜씨로 된 금 사슬이, 둘로 쪼개진 석탄 덩어리에서 발견되었다. 그와 같은 많은 오파츠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건전지와 전기에 대한 당시의 노하우가 있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만일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인간보다도 훨씬 우수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신뢰를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기를 원한다면 위의 모든 것은 가능하다.

누어버겐은 그의 책 205쪽에서 요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정통 역사학자들의 주된 가정(우리의 문명이 원시적인 시작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는)은 지금은 매우 심각하게 도전 받을 수가 있다. 오파츠, 성경의 역사, 고고학, 지질학, 고생물학, 그리고 일반적인 상식들이 우리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의 초기 조상들이, 문명의 모든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를 능가하는 사회를 창조하셨다는 증거의 비중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


*참조 : 1.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이상한 유물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3
2. 고대문명들과 현대인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46
3. 오래된 지층 속에서 나오는 사람의 유물들과 발자국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28
4. 고대인의 신비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

 

10. 거대한 체구

홍수 이전 또는 아담 후의 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하여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거대한 체구이다. 우선 지구의 초기 시대의 동물들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나의 반 친구요 연구소 행정관인 힐버트 R 시글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진화? 퇴보? 어느 쪽?>의 22쪽에서

“최초로 창조된 동물과 식물은 유전학적 잠재력 때문뿐만 아니라 형태학적 관점에서도 우수하였다. 사실 과거의 척추동물들은 크기와 지능지수에 있어서나 급박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에 있어서도 매우 우수했다.”

누구나 거대한 공룡과 친숙하다. 공룡의 뼈 화석들이 있는 거대한 지층들이 세계의 곳곳에서 발견되어 오고 있다. 그들은 중서부 전역, 블렉 힐, 로키산맥 일대, 그리고 고비사막에서 발견되어 왔다. 콜로라도 주와 유타 주에 있는 국립 공룡 유적지에는 300마리 이상의 여러 종류의 공룡 뼈들이 발견되었다.

캐나다 앨버타의 붉은 사슴 계곡에는 수 천 마리에 이르는 26종의 공룡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것은 길이가 24-45m 이상이고, 어떤 거대한 공룡은 무게가 40톤이나 되었다.

대형 매머드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 발견되었다. 알래스카 코디액 곰을 마치 난쟁이처럼 보이게 하는 어떤 대형 곰들도 발견되었다. 당시의 조류들은 지금의 가장 큰 타조보다도 60cm나 더 큰 3m 였다. 어떤 조류들은 편 날개 길이가 7.5-9m 였고, 부피가 2 갤런, 지름이 28cm 크기의 알을 낳았다. 길이가 3.6m 되는 거북이도 발견되었다. 타조의 화석은 기린만큼 컸다. 박쥐 화석은 편 날개의 길이가 4.5m 였고 양(sheep) 만큼이나 컸다. 모든 거대 동물의 뼈 화석들은 모두 전 세계에 걸쳐 석회석과 암상(巖床)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초의 인류도 지금 보다는 훨씬 컸으리라고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중국에는 옛날에 오늘날 우리보다도 2배나 큰 사람들이 아름다운 땅에서 살았는데 자연의 법칙대로 살지 않아서 그 땅을 잃어버렸다는 우화가 있다. 창세기 6:4절은 홍수 직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 6:4).

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이집트)에서 귀환했을 때,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팔레스틴에서 만나게 되었던 사람들만큼 컸거나 그들보다도 더 컸을 것 같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3:33).

우리 모두는 다윗과 거인 골리앗 이야기에 친숙하다.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며 힘이 세고 영웅적이고 유명하고 걸출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대의 영웅이나 귀인으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숭이에서 온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에서 고도로 숙련되고 정교하고 발달되고 매우 유능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 “신화”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룻 무어가 1953년에 저술한 진화론 서적인 <인간, 시간 그리고 화석>에 대하여 언급고자 한다. 그녀는 그 책의 249쪽에서 자바에서 발견되어 1941년에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T. 바이덴라이히 박사에게 보내졌던 거대한 턱과 이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이덴라이히 박사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거인(네피림)의 턱뼈라고 믿었다. 그는 그 뼈를 영어로 “고대 자바의 거인” 이라는 단순한 뜻의 메간트로푸스 팔레오 자바니쿠스라고 명명했다. 그는 인간의 조상들은 실로 거인들이었으나, 이것은 진화론 사상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룻 무어는 상기한 그녀의 책 250-251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이덴라이히는 이 고대의 거인들이 엄청나게 거대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빨과 뼈들을 살아있는 동물들의 것과 비교하고 해부학적으로 신중하게 측정해 보고나서 그는 자바의 거인은 살아 있는 어떤 고릴라보다도 훨씬 컸고 중국의 거인은 1.5배나 컸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숫 고릴라의 두 배나 컸을 것이다! (‘당시에는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라는 창6:4의 성경 말씀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이덴라이히의 책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나는 이 모든 형태가 인간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고 그것이 추적될 수 있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인들에게까지 이른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거인들이 직접 인간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거인의 화석들은 자바나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류학자인 로버트 브룸에 의해서 트래시 바이덴라이히 박사에게 보고되었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이론과는 반대로 유사한 발견들을 보고한다. 1985년 11월 판 내셔날 지오그래픽은 629쪽에 괄목할만한 내용을 싣고 있다.

“키가 160cm인 트루카나 출신 소년은 같은 나이의 현대 소년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크다. 그는 180cm 까지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옷을 잘 어울리게 입고 낮은 이마와 튀어나온 광대뼈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으면, 그는 아마도 현대인의 군중 속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이 발견은 인류가 수천 년 넘게 성장해 왔다고 오랫동안 지녀왔던 생각과 모순되는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그 이전의 발견들을 연상시켜 준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우람했을지도 모른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은 최근에 상당히 적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실로 우리는 1백5십만년 전에 이미 현대인의 평균 체구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초기시대에 살았던 화려하고 거대한 이런 인간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의 거대한 체구야말로 이집트, 수메르, 프랑스, 영국, 이스터 섬들과 기타 지역에서 어떻게 그토록 어마어마한 빌딩과 석조물들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이 그들의 거대하고 억센 근육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번뜩거리는 기지를 마음껏 발휘하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읽고서 나는 가끔 할리우드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주목할 만한 화두를 놓쳤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내셔날 지오그래픽, 타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모든 신문 잡지, TV, 그리고 저술가들도 지구의 창조 이래 전 시대를 통해 최대 사건의 하나인 지구를 격변적으로 파괴한 대홍수와 인간의 구세주인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빼먹고 있다. 할리우드에게 지구 초기의 지적이고 고도로 기능적이고 발달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보다도 더 좋은 이야기가 있을까?



*참조 : 1. 과거 지구상에 거인들이 있었다 : 120 cm 크기의 사람 대퇴골의 발견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91

2. 팔룩시 강의 거인 발자국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89

3. 거인과 공룡이 함께? : 같이 나 있는 공룡과 사람의 발자국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17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7

참고 :

유종호
2005-07-18

성경에 기술된 인간의 초기 역사 3


6. 창세기의 첫 번째 4장들은 수백 년이 포함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들의 자녀, 손자, 증손자 등등 지구상의 첫 인류들과 관련하여 독자는 창세기의 앞부분인 2, 3, 4장들을 읽으면서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매우 짧은 기간에 발생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다뤄진 역사의 주된 목적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창조자 하나님을 배반하였는지,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로부터 어떻게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지와 구세주인 구원자가 오시게 될 후예들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분명히 상당한 기간이 빠져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위해 준비하신 집인 에덴동산에서 그들은 상당 기간 동안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금단의 과일을 먹음으로써 곧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진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으로 나누어서 관류하던 에덴동산에 대해서 알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광범위한 지역을 탐사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과 그들 및 후손들이 거주한 중동의 광활한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윌라 땅에서 금, 은, 보석이 발견된 것은 이 지역이 탐사되었고 따라서 상당한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아담과 이브의 창조됨,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그에 대한 배반, 하나님의 장중에서 사탄에게로 타락한 사건들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은 아담과 이브의 죄성을 이어받은 그들의 첫 아이를 임신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또한 창4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상당한 기간의 시간을 요한다. 이 형제는 둘 다 함께 성인으로 성장했고 그때까지 굉장히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아담과 이브는 창1:28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젊었을 때뿐만 아니라 나이를 많이 먹어가면서도 매우 많은 자녀를 두게 되었다. 다산성이었던 초기 인간들의 임신 기간은 현대인들의 50세보다도 훨씬 길었을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쉽게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했다. 가인과 아벨은 가인이 자기의 동생을 죽인 인류 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있기 전에, 그들의 가족과 함께 이미 가축을 사육하고 과일과 채소와 곡식을 재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창4:3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고 말한다.

우리의 첫 조상이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을 불순종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했지만,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또 한 번 하나님과 멀어지고 분리되는 사건이 생겼다.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 일가친척들과도 더욱 멀어지고 분리되었다. 살인으로 인하여 도망자가 되고 방랑자가 되는 저주가 그에게 내려졌다. 가인은 하나님께 이 형벌은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심하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표를 찍어 주면서 보호를 약속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가인의 후손 중에 첫 번째의 가장 뛰어난 자들과 그들이 종사하게 된 일들과 솜씨들이 언급되어 있다.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인의 아들은 이미 수많은 후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라 그 도시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창세기 4:18에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고 계속된다.

아담으로부터 5대손 또는 가인의 가계로 따져 증손자(만일 'begat' 이라는 단어가 구약 연대기에서 씌어진 방식 때문에 세대들이 빠지지 않았다면)에 관하여, 이 땅의 물질로 만든 큰 진보가 있었다는 큰 증거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라멕은 아다와 씰라라는 두 부인들을 두었는데, 그녀들은 라멕에서 딸들과 함께 유명한 세 아들들을 낳았다. 야발과 그 후손들은 짐승들을 치면서 장막에서 살았다. 유발과 그 후손들은 노래를 잘 부르고, 하프와 풍금과 아마도 다른 악기들을 잘 탔을 것이다. 두발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황동과 철로 금속제품을 열심히 만들고 구리와 주석으로도 제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발달된 금속제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가인의 자손들의 생활과 생각들은 점점 이 세상의 일과 향락을 지향했다. 아다는 “치장을 한 자”라는 뜻이고, 씰라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자“라는 뜻이며, 딸 나아마는 ”예쁜 자“라는 뜻임을 볼 때, 그의 부인들에게 주어진 이름에서도 이것을 엿볼 수 있다.

창세기 5장에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으로서 구세주인 여자의 씨가 나오게 될, 아담과 이브의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아들인 셋과 그의 자손들에 관한 기사가 계속된다. 그의 아들인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가 나온 후에 아담의 8대손인 또 다른 라멕에 이르게 된다. 이 라멕은 노아의 아버지이다. 만일 'begat' 이라는 단어의 광의적 적용으로 몇 세대가 누락되지 않았다면, 초기 세대들의 장수와 많은 다른 장수 세대와 겹치는 한 세대 때문에 아담과 노아 사이에는 약 1,650년 이상의 년차가 발생했다. 이때까지 하나님에 관한한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죄로부터 구세주를 믿는 자들과, 사람의 딸들(및 아들들) 또는 불신자들이라는 두 가지의 종족 또는 계층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라멕과 그의 아들 노아, 그리고 노아의 세 아들들 즉 셈, 함, 야벳을 언급한 후에 창세기 6:1-2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따라서 인간이 창조된 지 수 세기가 경과되는 동안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계보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들을 사람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시고 셋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셨다. 가인 족은 자기들의 조상을 닮아서 세속적이고 사악했다. 그들은 오래 전에 하나님을 저버렸고 그분께 저항했고 마치 오늘날의 진화론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분의 존재마저도 부인한 듯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반역적인 마음과 생각대로 살았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진화론자들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일컫기를 좋아하는 그러한 최초의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 인간의 능력을 숭배하는 자들, 교만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등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런 배신과 반항과 패역이 오늘날의 양상과 꼭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족과 믿는 자들 속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의 이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약 1,600년 정도 흘렀을 무렵에는 나중에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인구가 수백만으로 증가했고, 셋의 후손들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내를 선택함에 있어 영향을 미치는 세속적이며 육적인 고려들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셋 족속의 여인들도 틀림없이 가인 족 남성들에게 유혹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불경건한 이웃들의 영향을 받아서 결국 그들처럼 되었다. 사람의 딸들은 세상이 그들의 인생의 목표를 제공해야하는 모든 향락을 만들었고, 그들의 미모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유혹의 덫이 되었다. 이런 잡혼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의 자녀들처럼 불경건하고 독신적(瀆神的)이 되고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영웅 숭배자, 인간 숭배자가 되고 결국에는 진화론적 인간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보편적 도덕의 타락과 부패 등이 흘러넘쳐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퍼져나가는 악을 초래하였고, 결국 이 세상에 경건한 모든 것을 파괴하여 버렸다. 오늘날 전 세계로 요원의 불처럼 번지고 있는 AIDS와 거의 대부분 성적 문란을 통해 그들 자신들과 타인들에게 밀어 닥치는 치명적인 질병의 치료법을 정부가 해결해 주도록 아우성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자는 우리가 마치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유일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대홍수 직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하고 의심할 정도이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당시에 살아남았던 8명의 하나님의 사람들보다는 상당히 더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도 사악하고 독신적으로 변모한 아담의 후손들에 관하여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인간들의 강한 경향성에 더하여 수많은 요인들이 있어왔다.

분명코 당시의 땅은 홍수 이후보다는 훨씬 더 좋은 기후 조건 때문에 생산성이 매우 높았다. 육지는 잔잔한 안개로 적셔지고 날씨는 온화한 봄날 같았고 토양은 지극히 비옥해서 사람과 동물들은 필요한 모든 먹이들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참으로 편안한 생활이었다. 또 다른 요인은 인간에게 허용된 900세 이상 되는 수명이다. 당시의 인간들은 오늘날에는 허용되지 않은 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그들이 소유했던 엄청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창조주에 대한 관심을 쉽게 버릴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창조주가 계셨다는 사실 자체마저 망각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했다. 수백 년 동안 죽음을 보지 못한 이들 대부분은 그들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에 관한 한 외견상으로는 더욱 쉽게 반체제적 즉, 반하나님적, 하나님을 부인함, 하나님을 대항함 등으로 될 수 있었고, 부패하고 포악하고 패역적으로 되고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만 했던 것이다.


7. 대가족 수 - 수백만 명의 사람들

아담으로부터 대홍수까지의 인구수에 관련하여, 땅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넓게 개방된 공간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최소한 10명에서 많게는 50명 혹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5장에는 족장들마다 그들의 수가 매우 많음을 시사하면서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홍수가 있은 다음 오랜 후인 사사기 8:30절에서 우리는 기드온이 70명의 아들들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사기 12:9절에는 입산이 30명의 아들들과 30명의 딸들을 두었고, 12:14절에 압돈은 40명의 아들들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이스라엘 족속이 크게 번창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근래에도 한 가정 안에 10-15명의 자녀들이 있는 경우가 있다. 오하이오 주의 한 흑인 여자는 1946년에 27번째의 아이를 낳았다. 20명 이상의 자녀를 둔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홍수 이전에 대가족이 되게 한 또 다른 요인은 인간의 수명이 900세 이상이었고, 오늘날의 출산 연령을 훨씬 지난 후까지 자녀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을 때가 500세였다. 땅의 생산성이 매우 높고 이 지구에서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땅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는 대가족이 필요했다. 또한 그때는 기후 조건이 훨씬 이상적이고 땅이 비옥해서 식량은 풍부하고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과 사람들의 긴 수명 때문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구를 계산에 보면 대홍수 때까지 10억 내지 100억 명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담으로부터 대홍수까지 1,600년 이상이 걸렸다고 볼 때 오늘 날 만큼의 사람들이 살았을 수도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5

참고 :

유종호
2005-07-16

성경에 기술된 인간의 초기 역사 2


3. 창조와 대홍수 사이의 기간

이때의 사람들과 문명을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아담-이브에서 대홍수까지의 기간과 아브라함 시대까지는 얼마나 긴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의 많은 영어 성경의 난외주(欄外註)에는 특정 사건의 발생 시기를 말해주는 날짜들이 있다. 이 날자들은 아일랜드 주교였던 제임스 어셔(Ussher, 또는 Usher)에 의해서 계산되었고 1701년판 킹 제임스 번역본 성경에 수록되었다. 어셔는 BC 4,004년을 세계의 창조 년도로 보았고, 그 이후의 어떤 이들은 그 사건이 발생한 날짜의 시각까지도 기술한 바 있다. 진화론자들은 그와 같이 확정된 숫자를 비웃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주의 기원이 150억 년 전이고, 지구의 기원은 46억 년 전이며, 우주가 3분 동안에 빅뱅으로 만들어졌다고 선포하는 진화론자들의 생각에 비하면 그렇게 웃기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계속 논의될 것이다.

어셔는 구약성경에 있는 각기 다른 연대기(시간 간격에 관한 연구)의 날자들을 매우 복잡하게 더하고 빼고 함으로써 이 숫자들을 계산해 내었다. 어셔가 계산한 BC 4,004년은 마소라 학파가 펴낸 히브리어 판 구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과 사마리아 오경, 그리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족장들이 첫 아들들을 낳았을 때의 나이를 다르게 잡고 있다.

그래서 구약기간의 길이가 늘어났다. 70인 역은 그 기간을 1,466년으로, 요세푸스는 1201년으로, 사마리아 오경은 301년으로 잡는다. 이와 같이 다른 숫자들도 창조의 일자를 1,500년 이상으로 변경치 못한다. 계산에 넣어야할 또 다른 요소는 구약의 연대기에 있는 ‘begat’ (역자 주: ‘주로 아버지 기준으로 자식을 보다’라는 뜻) 이라는 단어의 용법이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구약 족장들의 연대에서 어셔는 begat 이라는 단어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같이 보이나, 한편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begat이 고손까지의 단순한 조상을 나타내는 광의로 사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마1:8의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라는 구절에도 있다. 그러나 구약 역대상 3:11-12에서 우리는 요람이 웃시야의 고조부임을 알 수 있는데, 마1:8에는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등의 이름이 빠져 있다. 요람은 아하시야의 아버지요, 아하시야는 요하스의 아버지요, 요아스는 아마샤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Uzziah와 Azariah라고도 불렸던 웃시야의 진짜 아버지는 아마샤였다.

유사한 경우가 창46:18에도 있는데, 거기에는 실바가 야곱에게서 자손 16명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 반면, 그녀의 손자들과 증손들이 16명 가운데 계상되어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신구약에 있는 계보의 목적은 주로 메시야 약속의 역사를 보여주고 아담과 이브로부터 여자에게서 날 약속된 씨인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까지의 후손들의 혈통을 보여주자는 데에 있었다.

이런 모든 편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창조 시기는 어셔가 제안한 BC 4,004년을 넘어 2,000년에서 1, 2백년을 넘기는 어렵다. 어떤 이는 창조의 년대를 BC 8,000년까지 잡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고도한 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에서 BC 3,500-4,000경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어떤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주장을 더욱 가능하고 그럴듯하게 해준다. 안트(Arndt) 교수는 1932년판 그의 저서 <성경의 난해 구절들(Bible Difficulties)> 51쪽에서 두 가지 시간 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 성경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연대기를 가능케 할 만큼의 정보를 우리에게 허락키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들의 연대기 계산치의 결과를 발표함에 있어 순수하고 겸허하게 말한다면......”

그래서 나는 구약 연대기의 기록들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겠다.


4. 초기 인간들의 매우 긴 수명

그러나 구약 족장들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는 그들이 오늘날 인간들의 수명의 10 내지 12배에 달하는 900세 이상을 향수하는 초 장수를 누렸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이런 결과로 아담은 7, 8세대 후손에게 천지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얘기를 직접 구전할 만큼 여러 세대가 동시대를 함께 살았다. 그는 9, 10세대 후손인 므두셀라나 라멕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들은 노아의 아들인 셈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셈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셔의 연대기에 따르면 2,100년 동안, 또는 세상 존재기간의 약 2/3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에 창조 기사는 이런 식으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단지 2세대를 통해 전해졌다. 

더구나 우리는 이렇게 고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씌어진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에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지는 기록과 역사들은 노아 때에 있었던 극도로 격렬하고 거칠고 진흙투성이의 파괴적인 홍수로 멸실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명심해야할 또 다른 사항은 이집트와 바벨론인들의 전통들이다. 그들은 각각 구약성경의 열 족장들과 유사한 10명의 왕들을 홍수 전 기간에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비록 이집트와 바벨론의 기록들에 있는 인간의 수명들이 지극히 높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홍수 이전 시대에 가족의 수장이나 통치자들로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성경의 기사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1977년 9월판 리더스 다이제스트 130쪽에 1922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을 시작했던 영국의 고고학자인 레오나드 우울리 경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우울리가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여러 학자들은 왕조의 핵심사인 소위 수메르 왕들의 목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홍수 이전에 통치했던 왕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무려 총 241,000년에 8 왕조가 더해진다. 연대기는 분명히 엉터리다”라고 우울리는 평했다.“

대홍수 이후의 수메르인들은 대홍수 이전 시대에 그들보다 앞서 존재했던 문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장수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어째서 그렇게도 장수할 수 있었는 지와 홍수 이후 사람들의 수명은 왜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더 단축되어 갔느냐는 것이다. 홍수 직후에는 그전 사람들에 비해 약 절반인 450년을 향수했다. 아브라함 시대까지는 수명이 175 세로 낮아졌다. 이에 대한 명백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때까지 지구를 둘러싸고 있던 보호적 물 층(궁창 위의 물)과 관련이 있다. 창1:6-7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과학자들은 이 물 층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장파장에 대하여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층은 또한 과학자들이 남극 상공의 오존층에 구멍이 생겨서 지구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하는 보호적 오존층을 결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 전에 물 층과 오존층이 지구에 내려오는 유해한 방사선을 막아주었다면 생물들은 더 건강하고 더 장수하며 홍수전의 생물들의 몸집이 훨씬 컸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처음에 창조되었던 상태의 전 지구에서는 인간들이 질병에 걸리거나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방사선의 양과 하나님이 내린 저주와 함께 다른 요소들이 더해져서 지구는 인간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고 수명을 감소케 하였을 것이다.


5. 성경에는 선사 시대가 없다.

창세기에 이름들이 올라있고 신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다시 거론되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해야겠다. 성경에 나와 있는 역사는 추정이나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선사 시대에 관하여 즐겨 언급하는 기간 동안에 있어서의 사람들의 실제 이름과 그들이 언제 살았으며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무엇을 하였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실제 역사는 놀라우리만큼 많다. 그리고 그것은 우둔하고 건조하고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까지 한 어떤 것들처럼 진부한 것이다. 눅3:23에서 시작되는 약 60세대의 족보 이야기에서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었고, 요셉은 헬리의, 헬리는 맛닷의 아들이었더라.” 등등. 그리고 그 장의 마지막 즈음(36절)에 이르러 “아(르)박삿은 셈의 아들이었더라” 라고 계속 쓰고 있다. 그러고 나서 창10:6-11로 거슬러 올라가 셈의 친척들이 나온다. 그의 친척들이란 동생인 함의 후손이요, 함의 아들들 중 하나의 이름은 구스요, 그의 아들은 니므롯이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셈의 조카의 아들이다. 이 니므롯에 관하여 창10:8-11에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라고 씌어있다. 바벨은 또한 바벨론이라고도 한다. 바벨론 또는 수메르는 세계의 역사책들이 시작되고 있는 곳이다. 이것이 그들의 실제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술은 니므롯의 5촌 할아버지이고 노아의 아들인 셈으로 이어진다. 눅3:36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혹이 선사 시대라고 부르는 곳으로 연결한다.

노아의 아들이었고, 라멕의 아들이었고, 므두셀라의 아들이었고, 에녹의 아들이었고, 야렛의 아들이었고, 마할랄렐의 아들이었고, 가이난의 아들이었고, 에노스의 아들이었고, 셋의 아들이었고, 아담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창조주)의 아들이었던 셈.

그리고 노아의 조상들은 거의 900세 이상을 살았다. 이것이 진화론자들이 무시하고 경멸하며, 그들이 관장하는 역사책에 없는 역사이다. 그러나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도 더 나은 소위 선사적인 역사 혹은 사실의 역사를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가질 수 있을까? 만약에 진화론자들이 창세기 첫 부분의 11장을, 진정한 과학자들이 진리 탐구를 위하여 실험실에서 하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고려해 보기만 한다면 그들은 창조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는 양식 있고 합리적인 유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육 현장으로부터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권리들을 위한 싸움에서 글로브를 벗을 때가 왔다. 성경을 온 나라의 지역학교가 채택케 함으로써가 아니라, 진화론자들의 종교적, 반종교적 신앙과 신념들을 학교에서 몰아냄으로써 말이다. 나는 교회와 국가의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한 법률을 만들지 말 것”을 규정한 (진화론자들의 종교 및 반 종교를 포함해서) 종교와 국가의 분리라고 하는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의 조항들에서 분리 문제를 다룰 때 이 사항을 언급하려고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추가적인 취급이 있을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3

참고 :

유종호
2005-07-15

성경에 기술된 인간의 초기 역사 1


1. 창세기의 처음 장들

진화론적 신념에 대해 배경을 제시한 후에, 그리고 고고학을 연구해 본 후에, 다음으로 창세기의 첫 장들에 기초하여 역사상 발생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와 태양과 달과 행성들과 별들과 퀘이사들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빅뱅과 블랙홀 등에 대하여 주장된 것들은 앞으로 계속해서 가볍게 집고 넘어갈 것이다.


아담과 이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창조를 비롯해서 우리는 이집트인과 수메르인 등 인간의 사실상의 시조였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을 위한 처소로서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준비하셨다. 이 지구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철두철미하게 완벽하였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름답고 안락하고 쾌적한 곳이었다. 창1:31에서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미세한 부분까지 완전하고 완벽하였으며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한 포기의 잡초나 한 그루의 엉겅퀴나 단 한 개의 가시나 기타 아담의 행복을 해칠 어떤 것도 없었다. 에덴동산은 가히 지상 낙원이었다. 땅은 아담의 소원과 쾌락과 안락과 소망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다 공급해 주었다. 사람과 동물들에게 충분한 양식이 있었고, 사람과 동물들 간에, 동물과 동물들 간에 생존경쟁도 없었다. 사막이나 추위나 불편한 영역 즉 아픔이나 죽음도 없었다. 오늘날 가장 즐겁고 안락하고 상쾌한 남양군도(태평양)도 당시의 전 지구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초기의 지구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성경은 창2:8-15에서 에덴동산을 아담과 이브에게 특별히 아름답고 안락하고 유쾌한 거처라고 묘사하면서 옷이 없어도 그들은 완벽하게 안락할 수 있다고 했다. 그곳은 금과 보석으로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을 것이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이 마치 우리 인간들이 서로 상의하고 심사숙고해서 말하듯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고 선언하셨다. 창1:26에 보면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최대의 지혜와 최고도의 솜씨를 그의 마지막 피조물에 쏟아 부으시는 듯하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모든 다른 피조물과는 달라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은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우두머리와 통치권자로서 다스릴 권위를 지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육체와 영혼, 하늘과 땅, 이 두 가지가 인간 속에 공존하고 있어서 사람은 이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준다. 하나님이 인격이듯이 인간도 그러하고 하나님이 의롭고 거룩하듯이 인간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님이듯이 사람도 모든 땅 위의 주가 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아담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었고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었으나, 그는 창조주의 지상적 형상이었고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는 육체를 가진 자로 흙으로 만들어져 그 땅에 속했으나 영혼을 가진 자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속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인 생명의 숨을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 자신의 영을 가진, 하늘과 땅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스러운 피조물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특이하고도 유일한 어떤 일을 하셨다. 그는 단순하게 명령을 발하셔서 사람이 완벽한 존재로 걸어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의 형체를 만드셨다. 그는 땅의 먼지로 된 진흙덩이를 취하시고 그것으로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판이한 경이로운 형상으로 신적인 피조물을 만드셨던 것이다. 인간을 두 발로 서서 걸으며 그의 얼굴은 앞과 위를 향하도록 만드셨다. 그 형상은 처음에는 생명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기를 그 속으로 불어넣자 그 생기가 전류처럼 온 몸으로 흘러 퍼졌다. 그의 눈으로는 보은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때 이 아름다운 형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신령한 빛이 있었고 평화와 안온함이 사방에서 그를 둘러쌓았고 그의 높은 이마는 위대한 생각들을 떠올렸고 그의 손으로는 가까이 있는 물건들을 능숙하게 이것저것 손댔다. 이 형상 속에는 동물적인 욕구의 거칠고 불합리한 충동 같은 것은 없었고, 어떤 행동들을 취하기 전에 그것을 심사숙고해 보는 차분하고 사려 깊은 사색가의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권자답게 그리고 근엄하게 다른 모든 피조물 중에 군림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단연 주인으로 인정되었다.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대화를 이 사람과 나누었다. 영혼이 없는 동물들을 그의 앞에 데려다 놓자 그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실체(정체)들을 알아보고 말하는 은사를 받아서 이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아담은 분명코 식물학(식물들)과 동물학(동물들)과 그 분류들을 망라하는 생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생존했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해박한 지식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만일 우리 시대의 최고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면, 모든 과목에서 100점 만점으로 학위를 받고 존재하는 모든 영예를 차지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식물학에 대해서 그에게 주신 결함이 없고 명민한 지각으로 그는 어떤 식물이 먹기에 좋고 나쁜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주위에 둘러주신 땅의 다른 나무와 식물들도 알았다.

그래서 동물학 분야에서도 들에 있는 모든 가축과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도 알아보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의 앞으로 오게 하셨을 때에 자기 언어로 이름을 지었다. 물론 바다의 고기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언급이 없지만 그는 분명히 그들도 다 알았을 것이고, 또한 분명히 땅의 광물들과 그들의 용도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손자들이 황동과 철을 가지고 제작을 했다는 기록이 창4:22에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라고 나온다.

모든 사람의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식물들, 동물들, 원소들과 광물들을 알았으나 그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책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현대의 모든 과학자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지상에 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해박했고 그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과학자 중의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모든 지혜 중 가장 큰 지혜는 자기의 기원에 대해 어떤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원숭이와 같은 피조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주 만물의 기원과 조직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박사학위에 해당하는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필요로 하지 않았던 유일한 박사학위는 의학박사였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어떤 질병이나 우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었다. 아담은 그의 뜻을 말로 알렸고 그의 생각을 표현했다. 또한 이 사람에게는 딴 어떤 피조물도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광활한 대지 위에 단 홀로 그러나 지금까지 살았던 누구보다도 당당하게서 있었다. 그에게는 자기의 즐거움과 행운을 함께 나눌만한 어떤 동반자도 없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한 번 더 있어 가로되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어 그에게 주리라”(창2:18)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을 넣어서 여자를 만드셨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자 아담은 그녀가 자기의 혈육이요 분신인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이브는 하나님의 손에서 나아올 때에 처녀(Miss)임과 동시에 유부녀(Mrs)였다. 영원한 우주는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며, 완숙하고, 우아하고, 다정하고, 완벽하고 왕비 같은 영원한 여인이다. 아담과 이브 안에는 어떠한 결함도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담과 이브와 견주어보면 다 변형되고 퇴화되었다. 상호간 경이로움과 함께 애모하는 가운데,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아름답고 지혜롭고 충성스러웠던 이 두 사람, 하나님이 친히 주례로써 부부로 맺어주셨던 이들은 자신들의 창조주 앞에 경건히 경배하며 서 있었고, 그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의 어마어마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천부(天賦)의 선물로 주신 이 땅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의 산물로서 성숙도는 분명히 오늘날의 20세 청년에 해당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단지 0살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치 창조 당시의 우주가 완숙한 상태였던 것과 같이, 완숙한 존재였다. 죄가 없었던 아담과 이브는 우환이나 질병이나 부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부패나 노쇠에 대한 어떤 증후도 없이 이 지상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경이롭던 이 두 사람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상이요 선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경이롭던 피조물인 이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육체가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든지 그들의 생각을 구성하고 그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기 위한 합리적인 마음과 능력을 부여받았다든지 등의 그런 단순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삼위일체의 인격적 하나님이 이 영광스러운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서로 의논하실 때에 결정된 핵심 사항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1:26) 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 요소들 중에 어느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동물들과 구분 지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인간을 가장 영화롭게 만드는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은 특별히 두 가지의 특성 즉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행복한 지식과 완벽한 의와 성결임을 안다. 사람에게는 이 땅의 것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도 부여되었다. 사람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적 사역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알고 또한 이해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무엇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지 완벽하게 알았다. 그가 하나님의 뜻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율법서를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인간은 그 뜻에 따라 살아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서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축복해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해 오직 행복하고 축복받고 화평한 관계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실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들에게 가장 달콤한 축복이요 고상한 희락의 근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완전한 거룩과 의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에는 의로웠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는 선했고 죄가 없었으며 완전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도 완전했다. 그러므로 아담과 이브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그 분을 피하려고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과 구별 짓는다. 인간과 원숭이와 다른 동물들 간에는 엄청난 차이들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물고기와 새들과 가축들과 다른 동물들과 기타 지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지배권을 갖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지상의 모든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창조되었다. 인간은 또한 영원히 살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결코 죽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그를 배반하게 되었고, 이때 이 모든 것은 바뀌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상 첫 죽음이 그들의 자녀들 중 하나(가인)가 다른 아들(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으로 인한 것이기는 했지만 아담과 이브는 육체적으로는 즉시 죽지 않았다. 정녕 죽어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처참한가! 그러나 아담과 그의 다른 후손들은 900세를 넘게 살면서 거의 1,000년을 죽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오래 살았다.


2. 아담의 타락과 홍수사건 사이의 지구

인간 문제를 더 계속적으로 다루기 전에 인간들이 살고 있던 지구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지구는 그 위에 내려진 저주 때문에 처음 상태와 같이 그렇게 완전하고 쾌적한 곳이 더 이상 아니었다. 창3:17-19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롬8:22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죄와 죽음이 그 세상에 들어왔어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마틴 루터는 ”그것은 그 다음 세상에 비하면 진정한 낙원이었다“고 말했다.

창조와 홍수 시대 사이의 지구에는 아직도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 남겨져 있었다. 낮의 안개가 땅을 적셨고 번개와 천둥과 우박과 토네이도와 같은 거센 폭풍우는 없었다. 오늘날 격렬한 천둥 번개 속에서 놀라 쩔쩔매는 것은 신앙이 없는 무신론자라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 지구의 육지는 낮았고 기복이 있어서 사람들은 쉽게 땅위 어느 곳으로든지 옮겨 다닐 수가 있었을 것이다. 토양은 기름지고 살이 깊고 열매를 많이 맺혔다.

그 증거는 대홍수 때에 함께 눌린 조밀했던 식물들로 형성되었다고 주장되는 석탄 광맥을 생각해 보면 명백하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의 윌리엄 윈스턴 교수는 그의 저서 <지구에 관한 새 이론(1969)>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홍수 이전의 지구는 현재보다 훨씬 비옥했고 식물도 매우 풍성했다. 땅은 부드럽고 연하고 수분도 풍부했다. 대홍수 이전의 공기는 다량의 짙은 수증기나 오랫동안 공중에 떠있는 구름 등도 없었다. 우리가 소나기라고 부르는, 한꺼번에 많은 양이 쏟아지는 큰 빗방울들도 없었다. 그러나 땅은 낮 동안에 올라갔다가 바로 그날 저녁에 대량으로 내려오는 잔잔한 안개와 수증기에 의해 적셔졌다. 그때의 세계는 거센 바람이나 폭풍우나 땅과 바다 위에 미치는 영향들과 함께 일으키는 교란 등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내린 이후에도 당시의 지구는 아직도 월등히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초기 사람들은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우수했던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51

참고 :

Russell Grigg
2005-05-21

애굽의 열 가지 재앙 2 : 여호와 대 애굽의 신들, 10 대 0

(The ten plagues of Egypt 2 : Yahweh 10, Egyptian deities 0)


출애굽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들을 애굽(이집트)에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출 3:8,19-20, 6:1,5)
2.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고 물은 바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출 5:2, 7:5, 8:22, 9:14)
3.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 (출6:7, 10:2)
4. 이 땅(earth)은 애굽 신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출 9:16,29, 11:7, 시 24:1)
5.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출12:12, 민33:4)


다음으로 이 재앙들이 애굽의 여러 신들에 대하여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재앙은 애굽인들이 생명의 근원으로 경배하고 있던 나일(Nile) 강 자체를 향하여 내려졌다. 이 재앙은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피로 변한 나일 강물은 그의 피로 여겨졌다) 등을 포함한 많은 강의 신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나일 강을 피(blood)로 변하게 하고, 물고기(Hathor와 Neith에 의해 보호받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들을 죽임으로, 모세는 애굽의 경배의 대상을 부끄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손으로만 생명이 유지됨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 재앙인 무수한 수의 개구리(frog) 재앙은 풍요로운 곡식(나일의 물로부터 유래된)과 다산의 상징인 애굽의 여신 헤퀫(Heqet)을 공격했다. 헤퀫은 보통 개구리 머리를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시스(Isis)는 또 다른 다산의 여신(fertility goddess)이었다. 개구리는 애굽인에게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굽의 여신들은 이들 생명의 상징들이 시체더미가 되어 썩어가는 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애굽의 술객들도 그들의 술법으로 피와 개구리의 재앙을 흉내 내었다 (출7:22, 8:7). 이것은 속임수 일수도 있지만, 악마의 기적들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과 같지는 않지만, 사단도 기적들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나님은 술객들이 이 두 가지 재앙을 흉내 내는 것은 허용하셨지만 되돌리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다.


세 번째 재앙인 땅의 티끌이 이(lice, or gnats or mosquitoes)로 변한 재앙은 땅의 모든 신(예로 Akhor)들에 임하였다.

이것과 네 번째 재앙인 파리(flies) 재앙은 케프리(Khepri) 라고 하는 그들이 좋아했던 쇠똥구리(scarab, dung beetle) 신에게도 임했다. 쇠똥을 땅에 묻는 쇠똥구리의 작업은 파리들이 쇠똥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막기 때문에, 파리 재앙은 쇠똥구리 신들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 것처럼, 이 신은 또한 하늘을 가로 질러 태양을 굴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생축(livestock, 이것들은 식량, 우유, 의복 및 운송을 제공한다)들의 악질 재앙은, 신성한 황소신 아피스(Apis), 암소 모양의 어머니 여신으로 다산의 상징인 하토르(Hathor), 다산의 상징인 황소신 므네비스(Mnevis), 암소 임에도 머리에 뿔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여왕 이시스(Isis)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 신들은 모두 무능한 사기꾼(imposters)들임이 드러난 것이다.

여섯 번째 독종의 재앙은 하이크(Hike)나 토쓰(Thoth, Imhotep) 등과 같은 마술과 치료의 신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술객들을 독종으로부터, 즉 여호와의 능력으로부터 막아줄 수 없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바람에 불려온) 재앙은 곡물들을 파괴하였고, 날씨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하늘 신들, 예를 들면 공기의 신인 슈(Shu), 습기의 신인 테프눗(Tefnut), 하늘의 신인 누트(Nut) 등과 같은 신들을 공격하였다. 곡물들의 손실은 초목, 농사, 수확의 신들, 예를 들어 겝(Geb), 셋(Seth) 등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애굽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 또는 아몬-라(Amon-Ra, 철자를 Re로 쓰기도 함)를 공격하였는데, 그 신들은 땅에 빛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호러스(Horus), 세커(Seker), 케프리(Khepri), 무트(Mut), 누트(Nut) 등과 같은 다른 하늘 신들도 무기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은 바로(Pharaoh)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애굽인들은 바로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Osiris) 신과 태양신의 화신(incarnation)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의 임무는 신들의 은총을 유지하고, 질서의 여신 마아트(Ma'at)의 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아들은 ‘신성한 통치자’의 자리를 계승할 자였고, 애굽 땅의 어떤 아들과도 다른 아들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만이 홀로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YHWH' or Johovah, the sacred name of the one true GOD (Exodus 3:14).
2. Cf. Revelation 13:14, 16:14, 19:20
3. The magicians could not copy the 3rd plague and said 'it is the finger of GOD[Elohim]'. They were not honoring Yahweh here, but acknowledging that there existed a greater spiritual power than their own. They had had prior experience of this when Aaron's staff became a 'serpent' (Hebrew; tanniym)and swallowed their staffs (Exodus 7:8-13).
4. The firstborn Israelite children were protected by the lambs' blood which God told them to sprinkle on the doorposts and lintels of their houses. This prefigured the sacrifi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his N.T. title of 'the Lamb of God' e.g. John 1:29.

 

*참조 : 1. 애굽의 열 가지 재앙 : 기적인가, 자연현상인가?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25

2. 모세를 찾아서 1, 2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12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13

3. The Plagues of Egypt
http://www.biblenews1.com/egypt/plagues2.html

4. The Ten Plagues of Egypt
http://www.bible-exposition.org/Ten Plagues.htm

5. Plagues of Egypt
http://www.livingbiblestudies.org/study/JT14/009.html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출처 - Creation 27(1):36-37, December 2004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43

참고 : 3148|3233|1412|1413|2323|2525|512|1805|3372|303|3249


David Down
2005-03-20

모세를 찾아서 1 (Searching for Moses)


     이집트 역사의 전통적인 연대기로 따지면 제 18대 왕조의 통치는 대략 BC 1550년부터 BC 1320년까지이다. 성경 연대기에 의하면 출애굽은 약 BC 1446년에 있었다. 그런데 제 18대 이집트 왕조의 기록 어디에서도 이집트를 휩쓸었다던 어마어마한 10대 재앙의 결과로 생겼을 대대적인 재해의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이 기간에 있었다는 이집트 군대의 괴멸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있었을 여호수아 휘하의 군대에 의한 팔레스타인 침공을 증명할만한 고고학적인 증거물도 없다.

이 문제의 해결은 이집트의 연대기를 몇 세기 삭감하여(축소하여) 찾을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제 12대 왕조를 모세와 출애굽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고보면 모세 당시에 수많은 유태인 노예의 존재, 피폐한 이집트, 그리고 유태인 노예의 돌연한 출국의 흔적 등을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연대기의 축소(reduction)는 이스라엘에 있는 고고학적 유물의 연대에 대한 해석에서도 고루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후기 청동기(Late Bronze Period)의 말기에 팔레스타인 침공이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전기 청동기 말기에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여리고의 성벽과 이질적인 문화를 지닌 낯선 민족이 침공한 증거가 있는바, 이 침공자는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군으로 식별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도전 (The Challenge to the Bible)

1995년 12월 18일판 타임(Time) 지에는 10계명이 새겨진 석판(石版)을 들고 있는 모세의 그림이 표지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 그림 한 복판에 성경은 사실인가, 아니면 가공인가?” 라는 질문이 가로로 쓰여 있었다. 이 기사의 주장은 이랬다.

”구약성경의 여러 내용들은 증거에 상충되든가, 아니면 여전히 충족치 못하다.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노예, 모세의 실존, 출애굽, 성지에 대한 여호수아의 침공 … 등등에 관한 증거가 그러한 예이다. 족히 6년 동안 여리고 유적을 발굴하였던 캐슬린 케년(Kathleen Kenyon)은 그 당시에 있었을 파괴의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p.54)

실제로 그녀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해당되는 BC 1400년 경에는 여리고 현지에 주민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1

”제반 자료들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분석하여 보면, BC 1580년과 BC 1400년 사이에는 무덤 양식과 고대 건축물에 있어서 양쪽 다 완전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당시에는 (at that time)’ 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이집트의 노예제도, 모세의 존재, 출애굽, 그리고 여호수아의 성지 정복에 관한 증거들은 풍부하다. Garstand 교수는 여리고에서 무너진 성벽들을 발굴하면서, 성이 있던 곳에 생겨난 언덕 밑에서 전 지역을 덮고 있는 두터운 잿더미 층(thick layer of ash)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방화한 화재로 인한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외각 성벽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었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들은 경사를 흘러내렸다… 맹위를 떨친 화재의 흔적은 역력하였다. 붉게 탄 벽돌들, 깨진 암석들, 검게 탄 목재들과 잿더미 등등이 그랬다. 불타 무너진 가옥의 잔해들은 성벽을 따라 땅바닥에 즐비하였다. 가옥 내부의 토기들은 무너져 내린 지붕에 깔려있었다.” 2

그렇지만 고고학자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시점(time)은 잘못된 것이었다.

”초기 발굴에서 발견한 그 방어벽은 후기 청동기 도읍의 것으로서, 그 파괴의 원인은 지진과 화재로 믿고 있었다. 최근의 발굴은 이 성벽들의 시기가 잘못 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성벽들은 실질적으로 초기 청동기 때의 것이었다.” 3

열왕기상 6:1에서 밝히고 있는 정보로부터 출애굽의 시기가 계산될 수 있다.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Ziv)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솔로몬이 BC 970년경에 즉위하였다는데 동의한다.4 그의 즉위 4차년은 BC 966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때를 기산(起算)하여 480년 전은 BC 1446년경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인정하는 전통적인 시기 산정에 따르면, 그 때는 이집트의 제 18대 왕조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집트의 연대기에 대한 수정 제안 (A Proposed Revision of Egyptian Chronology)

‘그 당시에’ 모세의 흔적이나, 이집트에 내려진 10대 재앙, 또는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의 연대기 계산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수정된 연대기 계산은 제 12대 왕조를 모세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조 기간에는 성경 기록을 지지하는 상황 증거들이 풍부하다.

제 12대 왕조의 말기에 재위하였던 왕들 중에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가 포함된다. 그의 석상에 묘사된 인상으로 보아, 그는 능히 백성들에게 냉엄한 노예제도를 시행하고도 남았을 잔악한 독재자로 생각된다. 그의 아들 아메넴헷(Amenemhet) 3세도 못지않게 잔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통치는 4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그의 통치 초기 어느 때에 탄생했을 것이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아메넴헷 4세로 불려졌던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왕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부왕을 추종하였든지, 아니면 부왕과 공동섭정을 하였던 것 같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메넴헷 4세는 모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메넴헷 4세는 아메넴헷 3세의 서거 이전에 신비롭게도 종적이 묘연해졌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소벡네페루(Sobekneferu) 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공주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만약에 그녀가 목욕하려 강가로 내려갔다던 바로(Pharaoh)의 딸이었다면, 강가로 갔던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그것은 공주의 방에 목욕시설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정(洗淨) 의식을 거행하고, 다산(多産)의 하신(河神)  하피(Hapi) 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그 곳에 내려왔을 것이다. 아기를 못 가졌던 그녀로서는 그와 같은 신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기 모세를 그 곳에서 발견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 아기가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쉽게 믿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5~6).

그러나 나이 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식한 모세는 이집트를 도망쳐야만 했다. 이 일로해서 왕위에 공백이 생겨 아메넴헷 3세가 서거하였을 때에는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공주 소벡네페루가 바로로 즉위하여 8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왕조도 끝나고, 뒤이어 제 13대 왕조가 대두하였다.


이스라엘 노예들 (The Israelite Slaves)

지난 15년간 나는 이집트의 연대기를 정정하기 위하여 애써왔다.7 그 결과로 페이윰(Faiyyum)의  카훔(Kahum)에 있는 12대 왕조의 피라미드들의 건설에 동원되었던 노예들이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노예로 언급된 셈족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15년 전만해도 나는 고고학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그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이다.

나보다 먼저 나의 정정내용과 동일한 정정을 임마누엘 벨리코브스키(Immanuel Velikovsky) 박사가 주장하였던 것은 물론이다.8 그리고 도노반 쿠빌(Donovan Courville) 박사도 같은 정정을 제안하였었다.9 그러나 그들은 고고학자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서, 그들의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무시되었었다. 하지만 그 때 이후에도 인정을 받는 고고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정정을 제안하고 있다.

1991년에 피터 제임스(Peter James)는 ‘암흑의 세기들(Centuries of Darkness)’ 라는 저서를 펴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이집트의 연대기는 250년을 삭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10 제임스는 저명한 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 교수의 머리말을 싣고 있는데, 렌프루 교수는 ‘연대기 개정이 진행 중’ (p. XVI)이라고 인정하면서 ‘역사는 새로 편찬돼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p. XIV). 데이비드 롤(David Rohl)은 1995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A Test of Time’ 에서 이집트의 연대기는 350년 삭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 이 주장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집트의 제 12대 왕조의 종말은 BC 15세기로 산정되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때가 대충 성경의 출애굽기의 시기에 해당된다. 그 때 카훈에 거주하면서 제 12대 왕조의 피라미드건축에 노력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노예들이 이스라엘 인들이었다.

성경연구학회(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소속 브라이언 우드(Bryan Wood) 교수는 카훈에 살고 있던 셈족 노예들이 틀림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12 그는 이 결론에 이르는데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는 출애굽기 12:40 에서 언급된 430년13,, 14 이라는 기간이, 갈라디아서 3:17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출애굽 당시까지의 전체기간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던 실질적인 기간이라고 결론 맺고 있다. 이 추정도 앞에서의 예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노예 시대를 제 12대 왕조 기간으로 산정한 것이다.

이 때의 증거들은 성경의 기록과 잘 들어맞는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애굽기 1:8~11).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은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Rosalie David) 박사는 그의 발굴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이 도시에는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집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리아나 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었을 그들의 고국은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들이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5

로잘리 데이비드나 플린더 페트리도 이 셈족 노예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걸 확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의 사건을 제 12대 왕조보다 수 세기 이후로 산정하는 전통적인 연대기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리는 또 다른 한 가지 흥미진진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원래는 옷가지나 다른 소유물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나무 상자들이 카훈(Kahun)에 있던 많은 가옥들의 방바닥 밑에서 발견되었다. 이 상자들은 아기들의 유골들이 담겨 있었는데, 때로는 한 상자 안에 2명 또는 3명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죽을 당시 아기들의 나이는 몇 개월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16

이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는 히브리인 조산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를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출애굽기 1:16). 조산원들은 이 명령을 무시하였던 결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수많은 산모들은 품속에서 빼앗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비탄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아기들을 상자에 넣어 살던 집 방바닥 밑에 묻었던 것 같다.17


페트리가 발견한 것 중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노예들이 돌연히 현장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로잘리 데이비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제왕의 피라미드 건설의 완공이 카훈 주민들이 연장과 가재도구를 일터나 집에 내버려둔 채 끝내 그 도시를 떠나야했던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

”이 최초의 카훈 거주가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옥들 안에 내버려진 일상용품들의 수량, 그리고 그 용도의 범위나 형태들의 다양성은 능히 그들의 이탈이 돌발적이며, 사전에 계획된 바 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9

그들의 이탈은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것이었다! 이보다 더 성경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41).

 

*참조 : The Exodus out of Egypt : Archaeology Confirms Biblical History

(홍해에서 발견된 전차 바퀴 사진을 볼 수 있음)
http://www.geocities.com/worldview_3/exodus.html

Biblical Archaeology : Evidence of the Exodus from Egypt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htm

Biblical Archaeology : The Date of the Exodus According to Ancient Writers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date.htm

 

*추천 : 성경의 역사성을 밝혀주고 있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1) ‘Patterns of Evidence: Exodus’
 https://www.youtube.com/watch?v=2skx69TxLXk

2) ‘The Exodus Revealed: Search for the Red Sea Crossing’
https://www.youtube.com/watch?v=9BQ_x0kaw7o
https://www.youtube.com/watch?v=yTnqRpXKcaQ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5/i1/moses.asp

출처 - TJ 15(1):53–57, April 2001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12

참고 : 1413|2323|2525|303|512|3148|3974|3945|3898|3872|3372|3233|2545|1805|4148|4100|4071|5402|5415|5463|5625|5627|5741|5852|5969|5985|6017|6066|6089|6179|6283|6351|6353|6387|6401|6432|6564

David Down
2005-03-20

모세를 찾아서 2 (Searching for Moses)


애굽에 내려진 10대 재앙 (The Ten Plagues on Egypt)

바로는 이집트 땅에 내려진 10 가지 파괴적인 재앙과 악질로 인해서, 모세의 요구대로 그의 노예들을 놓아주었다. (출애굽기 7~12장). 성스러운 나일강물은 피물로 변하였고, 모든 생축은 악질로 죽었으며, 번갯불은 가연성 물질들을 모두 태웠고, 우박이 내려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과일 나무를 꺾었으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남아있던 지상의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다. 이집트의 경제가 그토록 피폐했었다면, 어디엔가 그와 같은 국가적 대재난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이후에 풍미했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그  기록은 제 13대 왕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기록은 이렇다. 즉,

”아니, 그 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 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 아니, 그 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 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곡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20


출애굽기의 바로 (The Pharaoh of the Exodus)

제 12대 왕조의 말기를 통치하던 왕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 아메넴헷(Amenemhet) 3세, 그리고 소벡네페루(Sobekneferu) 여왕이다. (소벡네페루를 앞서 아메넴헷 4세로 알려진 모호한 인물을 여기에 포함시키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소벡네페루 여왕의 죽음과 함께 제 12대 왕조도 막을 내렸음은 그녀한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양자인 모세마저도 미디안(Midian)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제 12대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한참동안 불안정한 기간이 이어졌다. 14명의 왕이 숨가쁘게 대를 바꿨다. 초기에 속하는 왕들은 아마도 제 12대 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나일강의 삼각주 (the Delta)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 13대 왕조의 왕들은 삼각주의 북동 지역을 이미 통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기에 12대 왕조가 몰락하자, 곧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제 13대 왕조를 열었다.  (왕조[dynasties]라는 개념은 당시의 이집트의 관념이 아니었다. 그 개념은 나중에 마네토(Manetho)가 창안한 관념이다. 마네토는 BC 3세기에 살던 이집트의 승려로서 이집트 역사라는 기록을 남기고 왕들을 왕조 별로 분리시켜 계보를 만들었다).

온 이집트에 대한 통치권좌에 등극하기 위하여 이 왕들 간에는 맹렬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짧은 통치기간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을 초래케 했다. 이와 같은 정권쟁탈전은 네페호텝(Neferhotep) 1세의 즉위와 함께 가라앉아, 그의 재위 11년의 기간동안 상당부분 안정을 회복하였다.

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던 상대자 바로를 카섹엠르-네페호렙(Khasekemre-Neferhotep) 1세로 산정한다. 내가 그렇게 믿는 데는 페트리가 발견한 카훈에 있던 예전 왕들의 부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21 그런데 페트리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한 부적은 네페호텝의 것이었다. 이 네페호텝은 힉소스(Hyksos) 족이 이집트를 ‘전투 없이’ 점령하기 전에 이집트를 마지막으로 통치하였던 왕이었다. 전투 없이 점령하였다고? 이집트 군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홍해의 바다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기 14:28). 카섹엠르-네페호텝(Khasekemre-Neferhotep) 1세는 아마도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 것이다. 그의 미이라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드(Wood) 교수는 자기의 강의에서 창세기 47:11과 출애굽기 1:11, 12:37에서 언급되는 라암세스(라암셋, Rameses)의 이름을 ‘도로의 출입문’이라는 뜻을 가진 이집트의 단어 ‘RW3TY’22에 연관 시켰다. 그는 그것을 텔엘다바(Tell eld-Daba, (힉소스족의 수도인 Avaris)에 있는 새로운 인구 중심지의 Stratum d/222에 연결시킨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 맨프레드 비텍(Manfred Bietak)에 의해서 발굴되고 있는 현장이다. 비텍에 의하면 이 지층(stratum)에는 가나안(Canaan) 인들의 요소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우드 교수는 Stratum d/2가 이집트에 있었던 이스라엘인들과 연관시킨다.12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를 라암세스 2세로 산정하는 사람들은 ‘라암세스(Rameses)'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성경의 바로가 이 라암세스와 동일인임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라암세스가 출애굽기의 바로라고 하면, 그의 시체는 카이로 박물관이 아닌 홍해의 해저 바닥에 누어있어야 할 것인데, 그의 시체가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다. 우드의 주장은 라암세스의 이름을 성경의 구절에 연결시켜야할 필요성을 거부한다.


결론 (Conclusion)

만일 우리가 그 때 당시를 올바르게(맞게) 들여다본다면, 이집트에는 이스라엘 노예의 증거들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스라엘 노예들의 돌연한 실종, 10대 역병과 재앙으로 인한 이집트의 피폐, 이집트 군대의 괴멸, 등등─. 그래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당시(시점, time)가 중요한 요소이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출애굽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은 해보다 480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열왕기상 6:1). 이것으로 출애굽은 BC 1446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430년 앞선 때였기에 (출애굽기 12:40, 갈라디아서 3:16, 17), 그 때는 BC 1850년경이 된다. 노아의 선조의 시대로부터 창세기 12-13 장에 걸쳐서 주어진 연대들을 따져보면, 전 지구적인 대홍수는 427년 앞선 BC 2302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에 관한 대부분의 권위자들에 의하면 피라미드들은 BC 155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이집트 최초의 왕조는 BC 3100년경에 통치한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23

이와 같이 해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이집트의 연대기와 성경 기록과의 사이에 모순이 개재하게 된다. 이집트의 최초의 왕조는 물론 피라미드들의 건축도 대홍수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이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면,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이집트의 연대기에는 오류가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기에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안은 명백하다. 이집트 역사에서의 현재 통용되는 연대기를 인정하고 성경의 연대기를 거부하는 것은, 엿새 만에 완성하셨다는 창조의 기록을 포함하여 성경의 초기 기록의 잔여 부분에 대한 회의론에 문호를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의 오류가 증명되면, 성경 기록을 인정하는데 중요한 장애의 하나가 제거될 것이며, 그 때에 가서는 창세기 역사가 정당시 될 것이다.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은 현장 고고학자로서 매년 관광객 그룹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안내하고 있다. 관광여행의 마감 때 즈음해서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의 발굴 사역을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된다. 그의 발굴 사역은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의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다. 그는 'Diggins' 라는 월간 고고학 뉴스레터와 전 호주를 커버하는 신문 발행인을 통하여 보급하고 있는 'Archaeological Diggings' 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는 또한 Moscow Radio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 있는 10여 방송국을 넘는 방송국들을 통하여 주당 15분짜리 고고학 토크 쇼를 녹화한다. 그리고 시드니(Sydney) 소재 Wesley Mission에서 고고학 클럽을 매달 주관한다. 그는 시드니 라디오 방송국 2GB를 통하여 Gordon Moyer 박사에 의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References

1. Kenyon, K., Archaeology on the Holy Land, Praeger, New York, p. 198, 1964.

2. Garstang, J., The Story of Jericho, Marshall, Morgan and Scott, London-Edinburgh, p. 136, 1948. 

3. Kenyon, Ref. 1, p. 210.

4. Mazar, A., Archaeology and the Land of the Bible, Doubleday, New York, p. 369, 1992; Ben-Tor, A., The Archaeology of Ancient Israel, Yale University Press, p. 304, 1994. 

5. James, P. et al., Centuries of Darkness: A Challenge to the Conventional Chronology of the Old World Archaeology, Rutgers University Press, p. 318, 1991; Rohl, D., A Test of Time, Century Ltd, London, p. 143, 1995.

6. Edwards, I.E.S. et al.,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I, part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43, 1975; David, R., Ancient Egypt, Harper Collins, p. 20, 1988.

7. Diggings, Vol. 1, No. 3, p. 2, March 1985.

8. Velikovsky, I., Ages in Chaos, Doubleday, New York, 1952.

9. Courville, D.A., The Exodus Problem and its Ramifications, Challenge Books, Loma Linda, 1971.

10, James, Ref. 5, p. 318.

11.  Rohl, Ref. 5, p. 143.

12. Wood, B., New evidence for Israel in Egypt, Newsletter of the Horn Archaeological Museum, p. 3, Winter—Spring 1999.

13. There are two main schools of thought on the 430 years of Exodus 12:40. One regards the period as commencing with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or the beginning of slavery, and the other commenc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As translated in the KJV, the Exodus 12:40 text seems to suggest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but I consider the Hebrew in Exodus can be translated to support either view. I prefer to build on Galatians 3:17, which seems to place the period as beginn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Based on the ages of the patriarchs involved, I would consider it 215 years from the covenant with Abraham till Jacob entered Egypt and 215 years in Egypt. It is not possible to determine the years spent in slavery but, based on the pharaohs involved, I would think about 100 years.

14. See also: Beechick, R., Sojourn of the Jews; Williams, P., Reply to Beechick, Letters to the editor, TJ 15(1):60—61, 2001.

15. David, A.R., The Pyramid Builders of Ancient Egypt: A Modern Investigation of Pharaoh’s Workforce, Guild Publishing, London, p. 191, 1996.

16. David, Ref. 15, Plate 16.

17. If the sex of the babies could be determined to be all or mostly male, that would harmonise with Pharaoh’s edict to kill all the male babies. When Dr Rosalie David visited Australia two years ago, I asked her if the sex of the babies found by Petrie was known. She replied that unfortunately Petrie had only sent three skeletons to European museums and they have all been lost. None of them can be traced. Petrie buried the remainder of the skeletons in a sand dune, but no one knows which sand dune as he left no record of it.

18. David, Ref. 15, p. 195.

19. David, Ref. 15, p. 199.

20. Erman, A., Ipuwer Papyrus, Leiden Museum, quoted from The Ancient Egyptians, a source book of their writings, Harper and Row, New York, pp. 94—101, 1966.

21. The term scarab in archaeological reports refers to seals used for sealing documents though they were often used as ornaments. In either case, they were made of stone, metal or even pottery, with the shape of the scarab beetle on top and the name and title of the king engraved underneath, so when it was pressed down on the soft clay it left his seal impression. 

22. After archaeologists have completed their reports they identify the strata or layers of occupation from the bottom up, so that the lowest layer may be early bronze, the next up middle bronze, the next up late bronze and the top layers iron age or later. But when they first start digging they cannot know what lies beneath, so they number the strata from the top down numbering them 1, 2, 3 etc. These are likely to be later subdivided with letters, so d/2 would be the second layer down and the 4th (d) subdivision of that layer or stratum. 

23. Gardiner, Sir A., Egypt of the Pharaohs: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pp. 430, 434, 1964.

 

 

*참조 :

The Exodus out of Egypt : Archaeology Confirms Biblical History (홍해에서 발견된 전차 바퀴 사진을 볼 수 있음)
http://www.geocities.com/worldview_3/exodus.html

Biblical Archaeology : Evidence of the Exodus from Egypt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htm

Biblical Archaeology : The Date of the Exodus According to Ancient Writers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date.htm

Biblical Archaeology : Mt. Sinai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mtsinai.htm

Problems with ‘Searching for Moses’ articl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52-pro.pdf


*추천 : 성경의 역사성을 밝혀주고 있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1) ‘Patterns of Evidence: Exodus’
 https://www.youtube.com/watch?v=2skx69TxLXk

2) ‘The Exodus Revealed: Search for the Red Sea Crossing’
https://www.youtube.com/watch?v=9BQ_x0kaw7o
https://www.youtube.com/watch?v=yTnqRpXKcaQ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5/i1/moses.asp

출처 - TJ 15(1):53–57, April 2001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13

참고 : 1412|3945|3974|3898|3872|3707|3739|3783|3654|3623|3628|3641|3689|3249|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640|886|887|3633|3812|3302|3220|3218|3208|3206|3170|3166|3162|3065|3036|3022|3020|2996|2960|2805|2525|2643|2737|2530|2321|2688|2362|2030|1793|1790|1756|921|3233|3289|3372|3148|2746|2545|2515|2458|2323|1805|3731|3611|3398|3363|3264|3237|3135|3101|3097|2793|2796|2799|2552|2534|2432|2245|2135|1812|1798|939|910|3391|3216|3107|2678|2535|2527|2443|2346|3155|3055|3024|2330|3931

김창환
2004-10-29

갈릴레오 재판


도입

갈릴레오는 전제주의 정권의 악을 보여 주는 고전적인 실례로 남아 있다. 그는 독립적인 사고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고 고발당했다. 갈릴레오는 성경을 의심하였고, 자기만의 독립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거스렸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체계를 파괴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취하였다. 즉 그들은 그 불화의 씨를 원천 봉쇄하였던 것이다.1) - Colin A. Ronan

필자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6살부터 예수님을 만난 17살까지 대략 십 년간을 이성지상주의자로 살았다. 당시의 내가 이해한 과학과 종교의 - 특히 기독교와의 - 관계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 재판이었다. 그리고 그 재판 이야기가 내게 준 인상은 위 인용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비합리적이게도 성경을 신봉하는 교회가 분명한 사실을 보려하지 않으며 온갖 부당한 압제를 가하는 데 맞서 자유로운 과학 연구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희생당하였으나 결국 그가 옳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식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다시 과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불행한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나왔다.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자라나면서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는 선입견이 생길 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런 선입견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비단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뿌리깊은 생각 때문에 눌려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경우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한동안은 반지성적인 경향을 띄었었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과학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관해 흔히 말해지는 바가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는 반지성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하신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영성을, 한편으로는 지성을 추구하면서2) 그 두 가지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계속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러 자료를 찾아 볼 능력이 생긴 후에 재판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 보니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결론을 얻게 되었다. 자료 속에서 내가 본 갈릴레오의 모습은 압제자에 맞서는 투사의 모습도 아니었고,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주제넘게 성경의 진리에 도전한 교만한 인본주의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한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경과 I - 전향 

그의 단순한 관측은 하나하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의 기둥을 흔들어 놓았다. 갈릴레오는 이제, 자신의 눈으로, 그의 능력으로는 세어 볼 수 없는 무수한 항성들을 본 것이다. 우주는 무한한 것인가? 달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그는 보았다. 결국 실체에 있어서 천체와 지구 사이에는 아마도 차이가 없는 것인가? 은하수는 헤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다. 천체는 고귀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천체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지상의 과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 이러한 간단하고 우연한 관측들이 전통적인 독단론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시작은 하였으나, 아직 그 어떤 것도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에게 있어서는 그가 본 것이 그를 전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케플러는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으나 이제 망원경이 그를 설득시킨 것이다.3) - Daniel J. Boorstin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에 피사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에 피사대학에서 3년 기한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기한이 끝난 1592년에는 파두아대학에서 수학교수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언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597년 파두아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실제로 지지하였고 그 때 그가 집필중이던 '우주론; Cosmography'에서도 전통적인 우주론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표명하지 않았다.4) 하지만 1595년에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가정한 지구의 두 가지 원운동(자전과 공전)을 필요로 하는 조수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고안해내었고,5) 1597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공격하는 편지를 피사의 옛 동료에게 보냈다.6) 같은 해에 독일에서 온 한 방문자가 케플러의 첫 번째 책인 Cosmographic Secret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덕택에 일찍이 새로운 천문학을 받아들였다고 갈릴레오는 인정하였다.7) 그러나 케플러가 그에게 새로운 새계관에 대해 언급해 줄 것을 재촉했을 때 갈릴레오는 이것을 거부하였다.8) 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단지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 생각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실제로 맞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확신이 깊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깊이 확신하면서도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략 십 년간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적으로 변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9년, 망원경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곧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천체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이 망원경을 통해 관찰되었는데,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표면처럼 굴곡이 있으며,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이고, 태양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검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목성의 4개의 위성이 관측된 것이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고, 자기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다른 천체를 가진 지구와 같은 개체가 그 자신도 다른 천체를 회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10) 이러한 발견들은 1610년 3월에 '별의 사자; Starry messenger; Sidereus Nuncius'11)라는 24쪽짜리 책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금성의 위상과 겉보기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였다.12) 이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과 II - 비약 

......성경과 자연은 다같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전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며 후자는 신의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해서 집행한 것이다. 또한 이들을 일반 백성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절대적 진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말의 의미에 대하여)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 반면, 자연은 냉혹하고 불변하며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감추어진 이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이 그에게 주어진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 눈앞에 놓여진 물리적 결과나 또는 필요한 논증의 결론은 그 어떤 이유로도, 말이 또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구절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된다...... 두 개의 진리는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13) - Galileo Galilei

161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과학적 논쟁은 신학적 논쟁으로 비약된다. 처음으로 이 논쟁에 성직자를 끌어들인 것은 지오반니 마기니였는데 그는 젊고 열정적인 종교인이었던 프란체스코 시지를 자극하여, 행성은 단 일곱 개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준 종교적인 주장을 제기하고,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되는 달들은 환상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믿을 수 없는 책을 출판하게 하였다. 플로렌스의 철학자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11년에 이탈리아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반론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지구의 운동이 성경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인용문들로 마쳤다. 그는 '리가 Liga'라고 알려진 갈릴레오에 대항하는 은밀한 조직운동을 지도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갈릴레오가 순전히 과학적 논의에 의하여 패배될 수 없다면, '리가'는 그 전투를 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14) 

1613년 대공 코시모 2세가 베푸는 관례적 만찬 자리에서 비공식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거기서 코시모 보스타글리아 교수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카스텔리는 그날의 상황을 갈릴레오에게 자세히 써보냈다. 갈릴레오는 같은 해 성탄 직전에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 Letter to Castelli' 에서 과학자와 카톨릭 교도로서 자신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성경은 때때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적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물리적 결과에 관한 논쟁에 성경을 끌어들이는 일”에 대해 걱정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 - 성경과 자연의 책 -을 주셨는데, ”그 두 가지 진리는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하였다.15) 

1614년 12월 20일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교수들과 연관이 있는 도미니카파 수사 토마소 카키니 신부는 태양이 멈추었던 여호수아의 기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상은 이단에 매우 가깝다고 강하게 정죄하였다. 도미니카파 지도자가 공식적인 사과문을 보내오기는 하였으나 갈릴레오에 대한 반대는 점점 강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을 읽고 그 사본을 1615년 2월 7일에 로마로 보내면서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빛에 비추어서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을 짓밟는다...... 나는 갈릴레오주의자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다소 교활하고 건방지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신교의 성경 해석 때문에 사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민감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그 편지는 자기가 급히 쓴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대한 새로운 편지 '대공 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서신; 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을 써보냈다.16) 

로마에서는 위원회가 소집되어 로리니 신부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심의를 하였다. 단 며칠의 심의 후에 1616년 2월 24일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되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7) 달력이 그것에 기초해 있으므로 금지되지 않고 다만 '수정을 위하여 출판이 중지'되었다.18) 3월에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 앞에 소환되었고 '실제적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우주론으로서 옹호하는 일을 중단하도록 권고받았다. 갈릴레오가 이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는 논증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는 것만 금지되었을 뿐 유죄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의 책이 금서가 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 갈릴레오가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교황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대적들의 음모가 알려졌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켰으며,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서를 만들어달라는 갈릴레오의 요청에 따라,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개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는 취지의 사적인 편지를 주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되며 따라서 변호되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지적받기만 했다고 썼다.19)

 

경과 III - 재판

따라서 모든 추기경과 모든 신앙심 깊은 교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정당하게 나에게 품게 된 이 의심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면서, 진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으로 나는 맹세코 전기의 잘못과 이단, 그리고 거룩한 교회와 반대되는 모든 잘못과 이단을 버리고 저주하고 배척할 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으로나 글로 말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어떠한 이단이나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이 성스러운 교회 재판소 또는 내가 있을 곳의 어느 교회에나 고발하겠습니다......20) - Galileo Galilei

1623년 8월에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으며 그의 견해에 호의적인 마페오 바베리니가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1624년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따뜻하게 갈릴레오를 맞아주고 그의 새 책을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다섯 번이나 더 그를 만나주었다. 갈릴레오는 조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구의 운동에 관한 주제를 교묘하게 다시 끄집어내면서 적들의 악의와,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구를 하는가를 넌지시 이야기하였다. 갈릴레오는 1616년의 결정이 취소되기를 기대했지만 교황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지구의 운동이 가설로만 간주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조수 이론에 관하여 출판하여도 좋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내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에 따라 1624년부터 1630년까지 '대화; 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World Systems'를 집필하였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한 전문가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또 한 전문가가 제3의 중립적인 인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내용의 대화체로 되어있다.21) 갈릴레오는 1630년 5월에 출판 허가를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 허가가 난 것은 1631년 6월이었고, 1632년 2월에 초판 인쇄본을 대공에게 바쳤다. 그 책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8월에 판매가 금지되었고 10월 1일에는 갈릴레오가 로마로 소환되었다.22) 악명 높은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종교 재판소에 서명 없는 문건이 하나 접수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23) ”갈릴레오는 상기위원(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 성하와 교리 성성의 전체 회중의 이름으로, 전술한 견해 즉 태양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교리 성성이 그에 대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 금령에 대하여 갈릴레오 본인은 수락하였으며 순종하기로 약속하였다.”24) 이에 갈릴레오는 공적인 금령을 받은 바 없고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라는 말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적인 편지를 제출하였다. 재판의 초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한 말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후자에 관해서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거나 변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대한 반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이 약점이 있으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그가 자기들을 우롱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견지하고 변호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25) 

그리고 심의는 수주일 동안 더 지속되었다. 열 명의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황의 사촌이었던 프란체스코 바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4월 30일 갈릴레오는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고, 5월 10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가벼운 선고로 끝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후 결정을 위하여 더 높은 권위자들에게 올라갔을 때 상황은 갑자기 갈릴레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6월 16일에 선고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교리 성성의 심의회에서, 강한 이단의 의혹이 있는 것으로 선언되며, 따라서 성성이 정하는 대로 구금의 형에 처해지며, 어떤 형태로든지, 말로든지 글로든지, 지구의 운동과 태양의 정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그는 재범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대화'라고 명명된 책은 금지된다.”26) 최악의 결과였다.27)

 

불운 

과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그 둘 사이가 몹시 나쁘다거나 또는 무관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쁘다고 하는 생각을 심어 준 데에는 갈릴레오 사건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 연구는 이 사건이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종교가 진보적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과학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것은 다른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듯이,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개인적, 종교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빚어진 결과일 따름이라고 규정한다.28) - 김명자

어쩌면 이 절의 제목을 '불운'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불운'은 어느 정도는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갈릴레오가 로마 대학의 호의를 계속해서 받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공전을 포함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9)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릴레오에게는 토론상대자를 화나게 만들어 적으로 돌려버리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오반니 마기니는 1592년 피사대학의 교수 자리를 놓고 갈릴레오와 경쟁하였으나 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마기니는 갈릴레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는 '별의 사자'가 출간되었을 때 갈릴레오를 신랄하게 비판했을30)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직자를 논쟁에 끌어들였다.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04년 신성(new star)에 대한 자신의 책을 갈릴레오가 공격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1611년 부유물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갈릴레오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예수회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샤이너가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여 1612년에 보고서를 냈을 때 갈릴레오는 그 해석에 반대하여 '태양의 점들에 관한 서신; Letters on Sunspot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갈릴레오는 자기가 먼저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샤이너를 화나게 했으며, 다른 많은 예수회파 사람들도 기분이 상했다.31) 1618년 가을에 나타난 세 개의 혜성에 대해 오라지오 그라시 신부가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을 때, 갈릴레오는 거기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라시에 대해 다소간의 인격적인 모독도 주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갈릴레오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었던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샤이너와 그라시는 저 악명 높은 재판이 열리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2) 

이외에 정말 '불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대화'의 출판업무를 맡은 리카르디는 원고를 비스콘티에게 보냈는데, 비스콘티는 교황이 일찍 서거할 것이라고 예언한 모란디의 친구였다. 비스콘티와 모란디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갈릴레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갈릴레오는 문제의 예언에 대해 잘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지오반니 치암폴리는 갈릴레오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우르바누스 8세가 즉위할 때 바티칸의 훈령 비서관에 임명되어 갈릴레오에게 희망을 품게 한 인물로서34) '대화'의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스페인 주교 보르기아가 교황의 지위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추방되고 만다.35)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체시 백작은 '대화'가 승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세상을 떴다.36)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재판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1616년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확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불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16세기 이탈리아는 혼란스러웠다. 1527년 로마의 피침, 1530년 플로렌스 공화국의 몰락, 이탈리아에 대한 스페인의 통치, 이러한 혼란은 권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37) 오직 교황청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서 집안단속의 의미가 있었다. 갈릴레오가 성경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오의 '불운'에서 정점에 위치해있다. '대화'를 출판한 출판사는 물고기 세 마리가 그려진 그들의 통상인지를 찍었는데 이것이 교황의 세 조카에 대한 명예훼손에 대한 증거라는 말이 돌았다. 또한 '대화'에 등장하는 바보스러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교황을 풍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38) 예수회파는 '대화'가 수사학적 가면을 쓰고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힘있게 변호한다고 교황에게 말하였고, 또한 교황이 조소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국제 정치는 우르바누스 8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개신교도인 스웨덴 왕과의 비밀연합이 그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알려지게 되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지고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악용당했다. 국내에서는 갖가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여러 가지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은 속았다고 생각하며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위신을 회복하며 교회의 머리인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9) 그 결과는 갈릴레오의 지독한 '불운'이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

나아가서 나는 만약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따라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참된 증거가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증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설명할 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우리는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증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데, 이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체들 중에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구제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과, 실제로 태양이 중심에 있으며 지구가 천체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40) - Roberto Berlarmino

위에서 쓴 것처럼 1633년의 재판에서 초점이 된 것은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무엇을 말하였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어겼는가 하는 것과 '대화'가 교황이 허락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이 재판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성경과의 관계 같은 것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1616년이었고 그 때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벨라르미노 추기경이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위 인용문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는 아마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권위가 자명하고 확실한 추론과 배치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이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배치되는 것은 성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서 해설자가 성서에 부여하고 싶어했던 그 의미인 것이다. 즉 성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가 자의적인 믿음으로 성서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진리와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41) 

벨라르미노는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성경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2) 만약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확실히 증명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틀렸다고 단언해서는 안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과 양립하는 형태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성경해석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과학적 증명의 여부였다. 벨라르미노가 요구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단지 관측가능한 자료들을 짜 맞추기 위한 수학적 고안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참된 물리적 설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평가하는 가운데, 갈릴레오는 그 발견들이 지구의 운동을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철회하였고, 금성의 위상들을 예언하고 다른 많은 일들을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반대하는 주장들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의 논리 전개는 추론과 리트로덕션(오늘날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 : 각각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함에 따라 더욱 그럴 듯하게 되는 가설적 모델을 시험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다른 신학자들이 보기에 갈릴레오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이었으며,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임시적인 논거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강요할 만큼 힘이 없었다.43) - Charles E. Hummel

피에르 뒤앙(Pierre Duhem)이나 칼 포퍼(Karl Popper)같은 사람은 현대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실증주의에서 입각해 보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웠다고 주장하였다.44)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들, 즉 울퉁불퉁한 달 표면, 태양의 흑점, 목성의 4개의 위성, 금성의 위상변화와 같은 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반증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직접 입증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벨라르미노 추기경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정하면 현상이 더 잘 설명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올바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가르멜회 신부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 신부에게 쓴 편지의 사본을 입수한 갈릴레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의미하는 '증명'이란 단어의 의미로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증명을 고안하는 것이 갈릴레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1615년 말경에 갈릴레오는 마침내 조수의 운동을 통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증명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증명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45) 갈릴레오는 무역풍도 지구자전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제대로 된 증명을 구성할 만한 배경지식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46)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는 150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다. 연주시차와 푸코의 진자가 그것들로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발견들이다.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자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마음을 굳혔다. 그가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앙이나 포퍼가 갈릴레오가 틀렸다고 말하려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이 발달한 20세기를 지나온 우리는 물론 실증주의가 지지되기 어려운 과학철학임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확실히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철학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실제로 그것은 편견, 뿌리깊은 증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특수하고 집단적인 이익이 일차적 원인이 된 혼란스러운 난전이었다...... 교회 지성인들의 주요부는 갈릴레오 편이었다. 반면에 갈릴레오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자는 세속 사상에서 왔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교권자들 자신까지도 희생양이 된 그 구성의 결과가 비극이었다 - 그것은 모호하고도 상이한 인물들이 기묘한 연합을 이루어서 실행한 음모였다.47)

-- Giorgio de Santillana

갈릴레오 재판에 대하여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도 모든 면에서 철저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소 왜곡되기는 하였어도 모종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권위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은 정확하다. 다만 그 권위주의가 카톨릭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갈릴레오의 몰락을 몰고 온 진짜 권위주의는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과학의 조망이었다.” 4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유한하고 구형이라고 믿었으며, 지구는 그 중심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달 아래와 하늘을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달 아래 세상은 물, 불, 흙,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지상적 물체는 가변적이며 파괴될 수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한편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아래, 위로 움직이는데, 물과 흙은 아래로, 불과 공기는 위로 움직인다. ”자연적인 운동”은 내재적인 것으로 본래의 위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며, ”억지의 운동”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없어지면 물체는 ”자연적인 운동”을 하게된다. 한편 천체는 지상의 원소들보다 훨씬 우월한 제5원소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연적인 운동”ㅍ은 처음이나, 끝 또는 한계가 없는 완전한 형태의 원운동이다. '에테르'는 가변적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영원하다.49) 따라서 달 아래와 하늘은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50) 이 체계에 히파르쿠스는 이센트릭(eccentric)51)을, 아폴로니우스는 주전원(epicycle)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퀀트(equant)52)를 도입함으로써 관측자료와 맞출 수가 있었다.53)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받아들여 기독교화 하였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선 고대 이래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과 자리바꿈하여 한낱 행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옥의 위치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에 대한 사실적 기초를 위태롭게 했으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중심이었다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즉 그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 바깥에 신이 거주한다는 전통적인 우주 구조의 붕괴를 뜻했던 까닭에, 조화된 우주의 붕괴가 교리 자체에 손상을 입히게 됐던 것이다.” 54)

 

현 교황청의 입장55) 

오늘날과는 매우 동떨어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과 아주 오래된 우주론을 분리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의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 더구나 그 이론이 아직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 본질상 가톨릭 전통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으며 그 이론의 가르침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이러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는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처분으로 이끌어 가게 했습니다. 성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이러한 잘못은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56) - 폴 푸파르 추기경

1979년 11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에서 ”신학자, 학자, 사학자들에게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것과 오류가 어느 편에서 오든지 이 오류를 공정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내실 있는 조화에 대한 의혹을 척결할 것을 촉구”하였다.57) 이에 따라 1981년 7월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였다.58) 

추기경은 먼저 위원회의 기원, 구성, 목적, 조사방법, 참고한 문헌들에 대해 잠깐씩 언급한 다음,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을 설명하고 갈릴레오가 자신의 입장을 반박의 증거없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59) 그러나 갈릴레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 대한 납득할 만한 반론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상황이 명확해지자 1741년에는 갈릴레오 전집에 교회 인가가 부여되고, 1757년 판 금서목록에서는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이 삭제되었다고 하였다. 1820년에 천문학과 관련된 어떤 책의 교회인가가 거부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1822년 교황은 저자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사건도 간결하게 언급한다. 추기경이 설명하는 결론은 ”모든 소송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훌륭한 신앙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는 것과 지동설에 대해 ”그릇된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천문학 지식 영역의 과도기적 상황의 결과였으며, 우주론에 대한 주석학적 혼돈의 결과”라는 것이었다.60) 

이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서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진실한 신자이던 갈릴레오는 이 점에 대해 그의 반대파 신학자들보다 더 진지하고 예리했다”고 평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일으킨 혼란은 성서학에 있어서 인식론적 숙고를 촉구하여 결국 현대적 성서 해석에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부합되어야 함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들의 성찰에 참고할 점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수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들에 관해 규칙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였다.6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사건으로부터 두 개의 교훈을 끌어내었다. 먼저 그는 아인슈타인을 언급하면서 ”편파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관점을 뛰어넘어 서로를 포함하면서도 서로를 초월하는 더욱 폭 넓은 관점이 있음”을 첫 번째 교훈으로 꼽았다. 두 번째 교훈은 ”지식의 다양한 문화는 방법의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것으로서, ”지식에는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이성 스스로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두 영역이 있으며 이 두 영역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두 영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만나는 공통점이 있고 각 영역의 고유한 방법론들은 실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2)

 

신화가 되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 사건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 왔는데 그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그려 왔던 모습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발달에 대한 교회의 거부, 혹은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를 반대하던 '독단적' 반계몽주의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신화는 상당한 문화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신화는 훌륭한 신앙을 지닌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의 정신과 그 탐구의 규칙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그 사이에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극적인 상호간의 이해부족이 과학과 신앙 사이의 근본적 대립의 반영으로 해석되어졌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탐구로 이루어진 해명으로 이 불행한 오해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6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험멜은 과학자 갈릴레오와,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갈릴레오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좀 길게 인용해보자.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에 이미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갈릴레오는 편견과 권위에 대한 이성의 도전의 상징, 그리고 중세 신학의 깜깜한 의견들에 대항한 과학의 확실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최초의 과학사가들, 18세기 말기의 프랑스 백과전서파들은 갈릴레오의 연구를 옛 과학 방법과 새로운 과학 방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그리고 과거와 예리한 창조적 결별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이 과학자는 상징이었다. 그들은 갈릴레오를 암흑의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운 순교자의 전형과 해방자로 제시하였다.” 64) 

갈릴레오 이야기는 계몽주의를 선전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신뢰하며 계시를 거부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갈릴레오 재판에서 계시의 핍박을 받는 이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는 이미 갈릴레오가 옳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이성이 승리하였고 계시의 핍박은 부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성이 신앙과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들은 이 이야기를 계시를 핍박하여 추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 1832-1918)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책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전쟁사;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천오백년동안 묶어두고 있었다”고 썼다. 그보다 앞서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 1811-1882)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에서 ”사고의 절대적인 자유가 있어야 한다. 성직자는 그가 택한 영역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고 철학자를 탄압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썼다.65) 이러한 사고방식은 20세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는 저 유명한 재판의 중심인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재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속적인 평안의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나의 글 속에는 거룩한 교회에서 빗나감에 대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완전히 아는 나 자신의 양심의 증거가 있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이 대의에서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말을 할지라도, 아무도, 심지어 옛 교부들까지라도, 나만큼 많은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66)

 

결론

성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도 성서 해석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한다.67) - Galileo Galilei

하지만, 진리의 말씀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것만이 모세의 주장이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주시여, 주의 종을 살펴보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하오니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한 말씀에 다른 뜻이 전혀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혹 그때 모세의 의향에 다른 것이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태초에'라고 기록하면서 그는 창조의 첫 시간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같은 말에서 아직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무엇을 만들기 전에 창조의 의도만을 가진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말했건간에 당신의 위대한 종으로써 기록한 것인데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68) 

-- St. Augustinus

벨라르미노는 엄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 아니어서 이론은 종종 버려지기 마련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20세기 과학철학이 밝혀낸 것이므로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다. 험멜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성경의 과학적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런 논증으로 무장하고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을 공부하여, 회의주의적인 친구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과학적 법칙들은 개정되기도 하고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데서 그 신빙성의 근거를 찾게 되면, 그 과학적 이론이 묵은 것이 될 때, 결국 성경도 그 과학 이론과 함께 역사적 유물로 남고 말 것이다.”69)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해석을 가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어떠한 식으로든지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지만 내가 성경을 읽고 이해했을 때 내가 이해한 바가 오류가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70)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성경해석과 과학이론 둘 다 임시적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오히려 우리가 의혹의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과학이론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갈릴레오를 압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이론들, 예컨대 다윈주의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은 자연주의이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자연주의적이 아닌 과학을 상상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단죄한 것처럼, 오늘날 자연주의 체계(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 자체를 공격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1) Colin A. Ronan, Galileo (New York : G. P. Putnam's Sons, 1974), p.253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황영철 역,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IVP, 1991, p. 16에서 재인용. 되돌아가기

2) 이러한 표현은 마치 지성과 영성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줄 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되돌아가기

3) Daniel J. Boorstin, 이성범 역, 발견자들 II, 범양사출판부, 1987, p. 56. 되돌아가기

4) Ibid., p. 54. 되돌아가기

5)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되돌아가기

6) Daniel J. Boorstin, Op. Cit., pp. 54-55. 되돌아가기

7)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되돌아가기

8) Daniel J. Boorstin, Op. Cit., p. 55. 되돌아가기

9) Charles E. Hummel, Op. Cit., p. 104. 이런 것들은 그저 그런 발견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의하겠다. 되돌아가기

10) Daniel J. Boorstin, Op. Cit., p. 56. 되돌아가기

11) Hummel은 이 소책자는 '결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05.)고 한 반면, Boorstin은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동의한다는 것을 과감히 표명하였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56)고 한 것은 흥미롭다. 되돌아가기

12) Charles E. Hummel, Op. Cit., p. 105. 되돌아가기

13) Daniel J. Boorstin, Op. Cit., p. 59. 되돌아가기

14) Charles E. Hummel, Op. Cit., p. 107-108. 되돌아가기

15) Ibid., pp. 110-111. 되돌아가기

16) Ibid., pp. 111-112. 되돌아가기

17)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이다. 그 체계는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되돌아가기

18) Charles E. Hummel, Op. Cit., p. 127. 되돌아가기

19) Ibid., p. 130. 되돌아가기

20) Daniel J. Boorstin, Op. Cit., p. 64. 되돌아가기

2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주장은 바보스럽고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상상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Hummel은 갈릴레오가 '1616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권고에 대하여는 문자적으로는 순종하였지만 그 정신에는 순종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34.)고 표현하였고, Boorstin은 만약 이것이 '검열관을 속이기 워한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61.)라고 하였다. 되돌아가기

22)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4-136. 되돌아가기

23) 갈릴레오의 적대자가 꾸며낸 허위문서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김명자, 과학과 신앙, '과학사에서 본 카톨릭의 기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36. 되돌아가기

24) Giorgio de Santillana, The Crime of Galile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p. 262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14에서 재인용. 되돌아가기

25)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5. 되돌아가기

26) Ibid., pp. 136-137. 되돌아가기

27) Boor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6일로 기록된 교황의 선고는 모든 대안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었다.' Daniel J. Boorstin, Op. Cit., p. 63. 되돌아가기

28) 김명자, Op. Cit., pp. 31-32. 되돌아가기

29) Charles E. Hummel, Op. Cit., p. 133. 되돌아가기

30) Ibid., p. 105. 되돌아가기

31) Ibid., pp. 108-110. 되돌아가기

32) Ibid., pp. 131-133. 되돌아가기

33) 김명자, Op. Cit., pp. 35-36. 되돌아가기

34) Charles E. Hummel, Op. Cit., p. 132. 되돌아가기

35) 김명자, Op. Cit., p. 36. 되돌아가기

36) Charles E. Hummel, Op. Cit., p. 135. 되돌아가기

37) Ibid., pp. 121-122. 되돌아가기

38) Daniel J. Boorstin, Op. Cit., pp. 62-63. 되돌아가기

39)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142. 되돌아가기

40) Ibid., p. 128. 되돌아가기

41) 요한 바오로 2세, 과학과 신앙, '신앙과 이성은 결코 대립될 수 없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12. 되돌아가기

42) 폴 푸파르, 과학과 신앙, '갈릴레오 사건의 해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p. 18-19. 되돌아가기

43) Charles E. Hummel, Op. Cit., p. 129. 되돌아가기

44) Daniel J. Boorstin, Op. Cit., p. 60. 되돌아가기

45) 나는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해 바닷물은 한 방향으로 쏠린다. 버스가 출발할 때 몸이 뒤로 쏠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한편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해변이 바닷물이 쏠린 방향을 지날 때에 밀물이 되고, 그 반대 방향을 지날 때 썰물이 된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밀물은 지구의 정반대되는 위치에서 동시에 밀물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조수의 주기도 24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조수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뉴턴에 의해 주어졌으며 그 원인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되돌아가기

46) 폴 푸파르, Op. Cit., p. 19. 되돌아가기

47) Giorgio de Santillana, Op. Cit., pp. xii-xiii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 144에서 재인용. 되돌아가기

48) Charles E. Hummel, Op. Cit., p. 143. 되돌아가기

49) 이것이 울퉁불퉁한 달 표면이나, 태양의 흑점이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반증이 되는 이유이다. 목성의 4개의 위성을 사람들이 믿지 않은 이유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되돌아가기

50) Ibid., pp. 31-32. 되돌아가기

51) 행성의 원궤도의 중심이 지구와[또는 태양과] 일치하지 않고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984, p. 30-31. 되돌아가기

52) 행성이 원궤도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등속운동을 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그 각도에 있어서 등속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Op. Cit., p. 31. 되돌아가기

53) Charles E. Hummel, Op. Cit., pp. 40-43. 되돌아가기

54) 김명자, Op. Cit., p. 33. 되돌아가기

55) 필자는 개신교인이기는 하지만 카톨릭에 대해서 문제가 될만한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편견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되돌아가기

56) 폴 푸파르, Op. Cit., p. 21. 되돌아가기

5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9. 되돌아가기

58) 폴 푸파르, Op. Cit., p. 17. 되돌아가기

59) 여기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설명한 바는 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비슷하다. 되돌아가기

60) 폴 푸파르, Op. Cit., pp. 17-20. 되돌아가기

61)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p. 10-12. 되돌아가기

62) Ibid., pp. 13-14. 되돌아가기

63) Ibid., p. 13. 되돌아가기

64) Charles E. Hummel, Op. Cit., p. 113. 되돌아가기

65) Mark A. Kalthoff, Man and Creation, 'God and Creation: An Historical Look at Encounters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Hillsdale College Press, 1993, pp. 10-11. 되돌아가기

66) Charles E. Hummel, Op. Cit., p. 146. 되돌아가기

6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10. 되돌아가기

68) St. Augustinus, 오병학 임금선 공역, 참회록, 예찬사, 1991, p. 281. 되돌아가기

69) Charles E. Hummel, Op. Cit., pp. 21-22. 되돌아가기

70) 그렇다면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혹시 누군가가 물을지 모르겠다.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이 질문은 마치 과학이론의 절대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과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론이 실제 세계에 대한 완벽한 상황을 알려주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중요한 측면을 알려준다고 믿는다. 되돌아가기



출처 - 창조지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45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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