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Georgia Purdom
2009-09-03

가롯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How Did Judas Die?)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Judas Iscariot)는 목매어 죽었는가(마 27:5), 아니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는가?(행 1:18)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5)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8)

어떤 사람들은 마태와 누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 틀리게 기록하고 있음으로 이 구절들은 성경의 오류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마태는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는 같은 사건을 두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보행자가 자동차에 치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는 그 보행자는 자동차에 치어 죽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장면을 보지 못하고 이후에 그 장소에 도착한 검시관은 시체의 손상을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와 검시관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의사였던 누가는 목매어 죽은 이후에 발생한 일을 자세하게 묘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만약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내장이 터져 나왔다면 목매어 죽을 수 없다. 둘째,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내장이 터져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피부는 매우 강인하여서 심지어 복부가 칼에 찔린다 하더라도 내부 장기는 대게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유다가 단지 떨어져 죽은 것만으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는 보기 힘들다.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사체가 예루살렘의 뜨거운 태양아래 매달려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몸 안에 있던 세균들은 활발히 번식했을 것이고, 사체가 부패하면서 조직과 세포들을 파괴했을 것이다. 세균 대사의 한 부산물은 종종 가스(gas)이다. 부패하면서 생겨난 가스의 압력은 세포와 조직 밖인 복강 내부에 축적되어 높아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체는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또한, 조직의 부패는 피부의 약화와 손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유다의 사체는 부풀어진 풍선처럼 팽창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체는 땅에 떨어졌고(목매달았던 나뭇가지나 밧줄의 끊어짐으로 인해) 사체의 피부는 쉽게 파열되었고, 가스의 압력으로 배는 터졌고, 내부의 창자는 다 흘러나왔던 것이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단지 두 저자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5/25/contradictions-how-did-judas-die

출처 - AiG–U.S. 2009. 5. 2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14

참고 : 4713|4599|4663|4492|4608|4578|4540|4043|4480|4488|4452|4451|4450|4416|4414|4413|4399|4387|3208|3249|3233|3148|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25|2737|2530|2321|1793|1790|1756|522|3022|4514|4402|720|721|2330|4718|4723|4725|4726|4819

Bodie Hodge
2009-09-02

마태는 예수님 족보의 대 수를 잘못 계산하였는가? 

(Contradictions : Problems with Basic Math?

Was Matthew incapable of basic math in his genealogy?)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세 번의 열네 대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계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수는 모두 42명이 아니라, 41명이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마태복음 1장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복음 1:17)

이것을 논하기 전에,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절          아버지        아들  수
 아브라함(Abraham)
   2아브라함(Abraham)이삭(Isaac)   1
   2이삭(Isaac)야곱(Jacob, Israel)   2
   2야곱(Jacob, Israel)유다(Judah)   3
   3유다(Judah)베레스(Perez)   4
   3베레스(Perez)헤스론(Hezron)   5
   3헤스론(Hezron)람(Ram)   6
   4람(Ram)아미나답(Amminadab)   7
   4아미나답(Amminadab)나손(Nahshon)   8
   4나손(Nahshon)살몬(Salmon)   9
   5살몬(Salmon)보아스(Boaz)   10
   5보아스(Boaz)오벳(Obed)   11
   5오벳(Obed)이새(Jesse)   12
 다윗(David)
   6다윗(David)솔로몬(Solomon)   1
   7솔로몬(Solomon)르호보암(Rehoboam)   2
   7르호보암(Rehoboam)아비야(Abijah)   3
   7아비야(Abijah)아사(Asa)   4
   8아사(Asa)여호사밧(Jehoshaphat)   5
   8여호사밧(Jehoshaphat)요람(Joram)   6
   8요람(Joram)웃시야(Uzziah)   7
   9웃시야(Uzziah)요담(Jotham)   8
   9요담(Jotham)아하스(Ahaz)   9
   9아하스(Ahaz)히스기야(Hezekiah)   10
  10히스기야(Hezekiah)므낫세(Manasseh)   11
  10므낫세(Manasseh)아몬(Amon)   12
  10아몬(Amon)요시야(Josiah)   13
 여고냐(Jeconiah, 여호야긴, Jehoiachin)
  12여고냐(Jeconiah)스알디엘(Shealtiel)   1
  12스알디엘(Shealtiel)스룹바벨(Zerubbabel)   2
  13스룹바벨(Zerubbabel)아비훗(Abihud)   3
  13아비훗(Abihud)엘리아김(Eliakim)   4
  13엘리아김(Eliakim)아소르(Azor)   5
  14아소르(Azor)사독(Zadok)   6
  14사독(Zadok)아킴(Achim)   7
  14아킴(Achim)엘리웃(Eliud)   8
  15엘리웃(Eliud)엘르아살(Eleazar)   9
  15엘르아살(Eleazar)맛단(Matthan)   10
  15맛단(Matthan)야곱(Jacob)   11
  16야곱(Jacob)요셉(Joseph)   12
  16요셉(Joseph)요셉의 아내 마리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심.   13

마태복음 1:17절에서, 우리는 이 구절이 세 구분(division)으로 특별히 나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2.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3.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이 구절은 또한 그 구분이 누가복음 3장과 같은 족보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14대의 그룹들로 구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나뉘어진 14 대(generations)는 무엇인가? 총합이 14 대의 각각의 합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성경의 오류가 있는 것인가? 이들의 이름과 구분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거기에 그 답이 있다. 

첫 번째 구분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그 사이에 12 대를 합하여 모두 14 대가 된다.

두 번째 구분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이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계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고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약 여고냐도 계산에 포함되려면,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유대 사회에서 여고냐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고냐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가 구분의 명칭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여고냐(여호야긴)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왕에 있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왕하 24:8,9). 그래서 마태가 여고냐를 바벨론 포로 이전의 하나의 완전한 세대로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여고냐를 포함하지 않고) 14 대인 것이다.

마지막 구분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이다. 여고냐는 이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의 구분에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여기에 포함되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가 더 길었다. 그의 대를 포함할 때, 여고냐에서 그리스도까지는 14 대이다.  

따라서 마태가 각 열 네 대라고 기록한 것은 전적으로 정확했다. 마태의 분류를 사용해서, 다윗은 두 번 목록에 올랐고, 그의 기록은 주의 깊은 것이었다.

 

*참조 : 마태복음의 족보는 14대, 14대, 13대 인가? – 성경의 오류? (2017. 3. 18.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16/contradictions-problems-with-basic-math

출처 - AiG. 2009. 2. 1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13

참고 : 4599|4663|4492|4608|4578|4540|4043|4480|4488|4452|4451|4450|4416|4414|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3022|4514|4402

Headlines
2009-08-14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사라지고 있다. 

(Fertile Crescent Disappearing)


      2009. 8. 1일 - 문명과 제국들의 탄생 장소였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이 황량해져 가고 있는 중이다. New Scientist(2009. 7. 27)는 오늘날 터키에 있는 상류의 댐들로 인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수량이 평상 시의 1/4로 감소되어 이라크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한 걱정스런 이야기를 게재하였다. 강물 수량의 감소는 이들 지역에 이미 가뭄을 초래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하류 습지들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의 생태계 테러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는 잠시의 희망적 기간 후에, 다시 한번 위협에 처해있다는 것이다.(see 05/01/2003 and 06/06/2006). 과학자들은 최초의 제국들이 번성하였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땅들이 이번 세기 안에 사라져버릴 것으로 평가하였다.



수메르(Sumer), 아카드(Akkad), 우르(Ur), 키쉬(Kish), 바빌로니아(Babylonia), 아시리아(Assyria)... 많은 위대한 제국들이 이곳에서 흥망성쇠를 반복했다. 성경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위대한 왕들과 군대들이 이 지역을 통해 진군해갔다. 커다란 도시들이 출현하였고, 쇠락하였고, 이제는 잊혀져서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기다리며 먼지 아래에 묻혀있다. 강들 사이 숲이 우거졌던 비옥한 땅들이 사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치적 상황이 바뀌고, 협약들이 바뀌어져서, 강들이 광대한 이라크 사막 지대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리적 상황도 보장할 수 없다. 만약 제국들이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서 일어났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이라크의 제한적 조치가 풀려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최초 문명의 증거들을 발굴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진화론자들은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해온 해부학적으로 완전한 현대인이 적어도 4만년 동안 (또는 10만년이나 100만년 동안) 돌 판에 문자를 기록하지 못했으며, 도시를 만들지도 못했고, 말을 타거나, 농사를 짓거나,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가 문화와 문명, 그리고 많은 발명들이 갑자기 BC 3,000년 경에 폭발적으로 빠르게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노아 홍수 후에 성경적 시간 틀은 그 증거들과 조화된다(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표를 보라). 사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서나 호기심, 예술, 언어, 문화, 발명, 종교성, 무역, 폭력, 전쟁의 증거들이 발견된다. 수메르의 최초 문자 기록은 이미 경제적 거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 그곳에 사회경제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음을 가리킨다. 수십 수만 년이라는 진화론적 상상의 연대를 제거해버리고, 단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살펴보라. 그곳의 기념비적인 업적들은 그들이 완전한 능력을 가진 완전한 인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

출처 - CEH, 2009. 8. 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96

참고 : 303|3148|512|3372|4405|4409|4422|4608|3623|2740|528|2746

Bodie Hodge
2009-04-20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난 날은? 

: 예레미야 52:31과 열왕기하 25:27의 불일치는 성경의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Get out of Jail Twice)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렘 52:31)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왕하 25:27)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 주장되는 두 성경 구절의 불일치를 하나의 ”필사 오류(copyist mistake)”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숫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숫자들은 다른 사본들로부터 필사될 때, 실수가 일어나기 쉬울 수 있다. 사실 이 주장되는 성경의 오류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제시하고 있는 책이나 인터넷 등에서의 대답은 하나의 필사 오류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필사오류라고 가정하기 전에, 이 두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두 구절에서, 어떤 부분은 동일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동일하지 않다. 그 형태는 아래와 같다 :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이 지났고,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달에 (날짜)... (다른 구체적 정보)”.

만약 날짜가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진정한 오류가 될 수 있고, 아마도 하나의 필사 오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보들은 매우 동일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에 이것은 오류가 아닐 수 있고, 다른 정보들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이상의 다른 정보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레미야 52:31절은 바벨론 왕이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준 것이 25일 이었고,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열왕기하 25:27절은 바벨론 왕이 27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로 이 날짜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날들은 서로 다른 날을 말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 왕은 25일에 유다 여호야긴 왕을 석방하라는 포고를 내린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이 실제로 옥에서 나오는 데에 이틀이 걸렸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독자들이 언뜻 넘어갈 수도 있는 구절들까지도 훨씬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에도 어떤 죄수가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날 경우에, 실제로 그 사람이 교도소를 나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있다. 그 명령이 행정적 절차들을 거쳐야할 것이고, 서류 작업들이 이루어져야할 것이고... 등등. 그렇다면 2일의 시간은 비합리적인 기간이 아니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다. 성경의 모순이라고 주장되는 구절들이 있을 때, 우리는 먼저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그 구절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30/contradictions-get-out-of-jail-twice

출처 - AiG, 2009. 3. 3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99

참고 : 4578|4492|4043|4387|4480|4452|4399|3218|3166|3022|4514|4488|4450|4416|4414|4413|4402|4540|4608|4663|4713|4714|4718|4723|4725|4726|4868|4870|4872|4878|4982|4985|5094|5271|5275|5332|5394|5395|5402|5415|5440|5463|5514|5578|5625|5627|5628|5711|5723|5741|5753|5852|5861|5870|5882|5886|5889|5910|5985|5986|6044|6017

Roger Patterson
2009-02-05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모순되지 않는가? 

(Contradictions: A Time to Kill? 

Is it okay to kill, like David killing Goliath or Joshua eliminating Canaanites? )


”살인하지 말라” (출 20:13)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출 22: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 24:15-16)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레 24:17)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삼상 17:50)

이 명백해 보이는 모순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killing)과 살인하는 것(murder)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살인은 생명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죽이는 것은 불법적일 수도 있고, 합법적일 수도 있다. 사형(capital punishment)의 확립은 사실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하시면서 선언하셨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 9:5-6).

심지어 이 이전에도, 가인(Cain)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에 그를 죽이려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두려워하였다 (창 4:13–15).[1] 이 경우에서 성경은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항상 옳지 않은 것인지, 또는 악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인지에 관한 질문은 딜레마가 될 수 없다. 그 결정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취해서는 안 된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에서, 죽어야만 하는 죄들은 상세히 기술되어져 있다. 레위기 19장에는 그러한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명령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명령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이해해야한다. 성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범죄가 증인들에 의해서 분명히 확인되었을 때 만이다. 

성경의 처음 5권 책들의 저자로서, 모세는 모순적인 개념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된 것이라면, 한 사람이 사형을 집행했을 때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어떤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 때, 그도 사람을 죽였으므로 그도 역시 죽임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형시킨 다른 사람도 또한 다시 죽어야할 것이고, 인류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성경의 모순이라는 주장이 실제로는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허락된 많은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출 22:2) 문제가 되지 않고 허락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의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 그 민족과의 전쟁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경우가 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그 땅에 거주하는 민족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들의 범죄 목록은 근친상간, 아이 희생제물 등을 포함하여 레위기 1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자들에 대한 전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을 때에,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대행하는 자로서 그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허락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정당한 것이었다. 사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인해 분노하였고, 전투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골리앗을 자신의 손에 부치실 것을 믿고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거주 민족들과 벌이는 계속되는 전쟁들 중의 한 사례이다. 

하나님은 엄청난 죄악들을 범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도전했던 민족들과 개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의 방법으로 반복적으로 전쟁과 사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목적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하나의 처벌로서 죽이는 것을 정하셨다. 

이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한다.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단 하나의 죄도 죽을 만큼 큰 것이다(창 2:17).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모두 사형 선고를 언도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없었다면,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사형장에 길게 나있는 죽음의 행렬에 줄서있는 것이다. 살인이나 성경에 기록된 악한 죄들을 저지른 자들은 단지 그 줄의 앞쪽에 서있을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어떤 상황으로 이끄는 죄들을 미워하신다. 그 분의 거룩하신 본성과 그에 따른 죄에 대한 미워하심은 매우 드문 경우에서만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생명을 취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모색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이유들이 있을 때에만 생명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창조 시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죽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Footnotes
1. The Lord did protect Cain by placing a mark on him to prevent others from taking his life. After the Flood, things changed.

 

*참조 : Slings and stones
http://christiananswers.net/dictionary/sling.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9/contradictions-time-to-kill

출처 - AiG, 2008. 12. 2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32

참고 : 4514|4480|4452|4451|4450|4423|4416|4414|4413|4402|4401|4399|4395|4394|4391|4390|4387|4385|4381|4376|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932|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89|3654|3641|4663|4599|4713|4718|4723|4725|4726|4868|4870|4872|4878|4982|4985|5094|5271|5275|5332|5394|5395|5402|5415|5440|5463|5514|5578|5625|5627|5628|5711|5723|5741|5753|5852|5861|5870|5882|5886|5889|5910|5985|5986|6044|6017

Stacia McKeever
2009-01-21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팡이를 가지지 말아야 했는가? 

(Contradictions: A Staff or Not Did Jesus tell His disciples to take a staff?)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태복음 10:5–10)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마가복음 6:8–9)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누가복음 9:1–3)

이 동일한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그의 12 제자들에게 긴급한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다. 즉시 가서 유대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영어 번역본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가지고 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의 불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지팡이(staff)를 가지고 가야하는가, 아니면 안 가지고 가야하는가? 이 주제는 헬라어로 기록된 원래의 사본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연구해봄으로서 분명해질 수 있다.

마태복음에 사용된 ‘가지고(ktaomai) 라는 단어의 의미는 ”얻다 또는 획득하다(to get or acquire)”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당장 가도록 재촉하시면서, 다른 지팡이를 구할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갖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수고를 들여 준비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마가는 넓은 의미의 단어인 ‘airo’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들어 올리다 또는 집어 들다(lift or take up)”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마가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가기를 원하셨다는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지팡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지팡이를 구하려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은 신고 있던 신은 신고 가지만, 여벌의 신은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입고 있던 옷은 입고 가지만, 여벌의 옷은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가복음의 구절은 비록 마가복음에 있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마태복음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몇몇 학자들은 아마도 누가는 그의 정보를 대부분 마태복음에서 얻었으며, 마가복음은 접근할 수 없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제자들은 빠르게 출발해야한다는 그리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가지 말라는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는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해야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12/contradictions-a-staff-or-not

출처 - AiG. 2009. 1. 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14

참고 : 4480|4452|4451|4450|4423|4416|4414|4413|4402|4401|4399|4395|4394|4391|4390|4387|4385|4381|4376|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932|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89|3654|3641|3628|3633|3623|3589|3372|3311|3302|3289|3249|3242|3233|3220|3218|3208|3206|3204|3186|3170|3168|3166|3162|3155|3148|3101|3097|3065|3036|3022|3020|2996|2982|2970|2960|2942|2805|2797|2746|2737|2688|2643|2549|2545|2534|2530|2525|2515|2458|2425|2323|2321|2362|2030|1805|1793|1790|1756|1430|1412|1413

Stacia McKeever
2008-12-23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Contradictions: Two Ages at Once Just how old was Ahaziah anyway?)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왕하 8: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 (대하 22:2)

아하시야(Ahaziah)가 왕이 될 때에 나이는 22세 인가, 42세 인가? 이러한 불일치는 하나의 필사 오류(a copyist error) 때문이다. 아하시야의 진정한 나이는 더 자세한 조사들로부터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열왕기하 8:17절을 보면, 아하시야의 아버지 여호람은 32세에 왕이 되어, 8년 동안을 치리하였다.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니라”(왕하 8:17). 여호람이 죽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따라서 아들인 아하시야가 42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22세였다.  

구약의 사본들은 수작업을 통해 손으로 필사되었음을 기억하라. 필사오류는 성경의 진정한 모순의 증거가 아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15/contradictions-two-ages-at-once

출처 - Answers, 2008. 12. 1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88

참고 : 4043|4452|4451|4450|4416|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4480|4514|4540|4578|4608|4492|4663|4599|4713|4714

Steve Fazekas
2008-11-24

사랑의 하나님은 왜 여리고성 사람들의 진멸을 명하셨는가? 

(Contradictions : Slaughter at Jericho Could the loving God of the New Testament order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inhabitants of Jericho found in the Old Testament?)


     여리고(Jericho) 성에 거주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량학살(massacre)은 주의 깊은 독자들에게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고등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성경과 고고학적 자료들 사이에 충돌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과장되고 포장된 신화(myth)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신약성경의 신은 사랑, 관용, 인내의 신인 반면에,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변덕스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회유와 피의 희생을 요구했던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신론자들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전쟁광이고, 여성들과 천진난만한 아이들까지도 죽이는 잔인한 살인자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입증’하기 위해서 성경의 이 부분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커다란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예배와 존경을 강요하는 경배할만한 가치가 없는 신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도 이 성경 구절의 부끄러움 없는 적나라한 기록에 대해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 부분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이 세상의 존재하는 악 사이에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특별히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진멸하라고 말씀 부분에서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적에 전통적인 미국 복음성가를 노래하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전투를 하였네, 여리고, 여리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전투를 하였네, 성벽이 무너져 내렸네”

물론 주일학교에서 양각 나팔을 부는 흉내를 내면서 의자들 주위를 행진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좋은 사람들 편에 있었다. 반면에 여리고성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록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도시를 잃게 되는 악한 사람들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그 죽음의 행진에는 냉정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 연극에 새롭고 깊은 의미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그 구절을 숙고해보자 :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수 6:21)

비록 우리가 여러 면으로 해석해 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군대를 이끄는 여호수아의 발아래 짓밟히고 있는 여리고성 사람들이라는 딜레마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인 범죄로부터 피할 수 있게 해드리는 어떤 종류의 변형된 허락 또는 금지로 여길 수도 없어 보인다. 사실 그러한 행동은 특별한 목표를 가진 주의 깊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명령하셨고(신 7:2), 여호수아는 그것을 수행했다(수 6:21).

이 이야기의 배경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iniquity of the Ammorites)”으로 표현된 창세기 15:16절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나안 땅을 점령했던 민족들은 문화와 관습에 있어서 끔찍할 정도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세의 기록으로부터 하나님이 오랜 인내를 끝내시고 이제 행동을 하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중이셨음을 알 수 있다.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 18:25)

모세의 글들 여러 곳에서 아모리 족속은 팔레스타인(블레셋) 전체를 대표하는 족속으로 여호와께서 여기고 계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군다나 그들은 너무도 타락하여 마치 땅도 스스로 토하여낼 정도로 부패했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최근 우가릿(Ugarit)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그곳이 우상숭배, 남색, 수간, 마법, 아이 제물(child sacrifice) 등으로 가득했다는 것이 밝혀져 성경 기록을 확증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여리고의 각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우상숭배, 타락한 문화, 역병 등을 전해줄 수 있었다. 우리는 신명기 18:9–12절의 말씀을 어제 뉴스를 읽는 것처럼 무감동과 무관심 하에 읽어서는 안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9–12)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를 몰록(Molech, 몰렉) 신에게 불로 태워 드렸다. 유아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행위는 고대의 한 종족에 있었던 불행한 관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 스스로를 짐승들로 여기며 타락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던 비틀린 의식이었다. 가나안의 문화는 오늘날 낙태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그러한 수준의 종교적 행사가 아니었다.

여리고의 문제는 쉽게 풀려질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 분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계셨다. 모세에게 스스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분의 성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래 참으심, 공평, 자비, 인내 등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반사적인, 그리고 변덕스러운 행동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에 대한 우주적 권위를 가지고서,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때에 그 분의 뜻을 행하시는 창조주로서의 권리를 남겨두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주장했을 때 그랬다. 따라서 그 문제의 답은 성경에 나타나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특성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의한 대량학살이 정당성이 있었던 때가 일찌기 있었는가? 대답은 틀림없이 ‘예’이다. 왜냐하면 전 지구적인 홍수 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고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은 언젠가 심판하심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자(The Knowledge Of The Holy)’에서 토저(A. W. Tozer)는 말한다 :

”어느 곳에서든지 기독교 교회가 소멸되어가기 전에, 먼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신학에 있어서 부패가 일어난다. 교회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잘못된 대답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교회가 건전한 명목상의 교리를 고수하고 있을지라도, 실제적인 행동 교리들은 잘못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 신도들이 실제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음흉하고 치명적인 종류의 이단이다.”     

여기 바울 사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을 생각해보도록 하는데에 도전이 되고 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0/27/contradictions-slaughter-at-jericho

출처 - AiG–U.S. October 27, 200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63

참고 : 4452|4451|4450|4043|3218|3166|3065|3022|2688|4380|4204|3020|3162|2530|2321|1756|4387|4413|4399|4414|3403|3872

Bodie Hodge
2008-11-11

아벨은 양을 제물로 드렸으므로, 육식을 하고 있었는가?

 (Contradictions: Meat of the Matter. 

Was Abel eating meat soon after the curse when he wasn’t supposed to be (Genesis 1:29), 

since he kept the flocks and sacrificed an animal in Genesis 4:2–4?)


이 주장되는 모순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행동을 아벨(Abel)이 하고 있었다는 주장으로부터 온다. 관련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29)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2-4)

이것이 하나의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식물을 먹으라고 명령받았던 아벨이 제물(고기)을 먹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아벨이 의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창세기 1:29절에서 채식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1]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마 23:35)

그러므로 아벨이 고기를 먹었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의 모순이 아니다.

그러면 왜 아벨은 양들을 치고 있었을까? 우리는 양들로부터 털, 우유, 가죽, 죄를 위한 희생제물 등과 같은 많은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영양상태가 좋은 살찐 양은 다른 동물들 보다 훌륭한 털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아벨이 살찐 양을 희생하였을 때, 그는 가장 좋은 것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피의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피의 희생을(창 3:21), 그래서 그들의 죄를 덮으셨던 일을(히 9:22) 따라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구절은 아벨이 제물을 먹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아벨이 육식을 하였다고 가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으시기 위하여 (가죽옷을 얻기 위해) 동물들을 희생하였을 때, 아담과 하와가 그들을 먹었다고 볼 수 없다. 아벨은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따라했기 때문에, 그가 희생 제물을 먹었을 것이라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로 고기를 먹게 되었던 때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 직후에 방주에서 나와서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고 나서였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육식도 허락하셨다.(창 8:20-9:3). 비록 홍수로 멸망해버린 홍수 이전의 사람들 중 일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일찍부터 육식을 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Footnotes
It wasn’t until Genesis 9:3 that mankind was permitted to eat meat.

 

*참조 : The Scriptural advent of animal carnivor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5_1/j15_1_69-75.pdf

The carnivorous nature and suffering of animals
http://creation.com/the-carnivorous-nature-and-suffering-of-animal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0/08/contradictions-meat-of-the-matter

출처 - AiG, 2008. 10. 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51

참고 : 2200|2202|2245|2291|3046|5031|5903|5500|6145

Bodie Hodge
2008-11-10

성경은 라합의 거짓말을 칭찬하고 있는가? 

(Contradictions : A Righteous Lie? 

Why was Rahab praised for lying in James 2:25 

when lying is forbidden in the Ten Commandments?)


     이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을 탐지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정탐꾼들을 보내는 여호수아 2:1–16절에서 나온다. 라합(Rahab)은 정탐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들을 숨겨주며 추적자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하였다. 추적자들과 대화하는 동안에, 그녀는 정탐꾼들이 있는 곳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지붕에 숨겨준 후에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있었다. 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수 2:1)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수 2:3-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찌니라” (수 2:16)

야고보서 2장에서 라합의 행동은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5) 

첫째로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구절 어디에서도 정탐꾼들에 관해 거짓말을 한 라합의 행동이 칭찬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자를 접대하고 다른 길로 나가게 한 행동으로 칭찬받고 있었다. 또한 히브리서 11:31절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 것으로 칭찬받고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히 11:31).

다시 한번 그 구절에서도 거짓말에 대해서 칭찬하지 않았다. 라합은 그녀의 거짓말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행동으로 즉, 1)정탐꾼들을 유숙하게 해주었으며 2)안전한 방향으로 정탐꾼들을 보낸 행동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야고보는 그녀를 의로운 행동을 하였다고 간주한 것이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거짓말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다른 행동들이 의로웠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은 9번째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어떤 상황 하에서 하던지, 어떤 사람에 대하여 하던지 간에 하나님에 의해서 결코 묵인되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거짓말(righteous lie)’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그 당시에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제한적 이해를 기초로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의로운 행동을 하였다. 라합의 인생은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된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다. 한때 가나안의 사람으로 기생이었던 여자가 변화되어 시온의 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방인이었고 매춘부였던 라합이 보아스(룻의 남편)를 낳고, 다윗왕의 혈통으로 들어오게 되어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겸손을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었던 것이다 :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1/03/contradictions-a-righteous-lie

출처 - AiG, 2008. 11. 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50

참고 : 4414|4043|4413|4399|4387|3218|3166|3065|3022|2688|4380|4204|3020|3162|2530|2321|1756|4391|4385|3707|930|3148|3208|3233|3249|4402|4416|4451|4452|4488|4480|4514|4540|4578|4608|4492|4663|4599|471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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