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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07-21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임을 믿는 성도들의 삶 

김무현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임을 믿는 성도들의 삶

지금까지 계속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과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미명아래 성경을 창조신화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견으로 기록된 역사책이나 도덕책 정도로 전락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진리입니다.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학문과 문화, 가치체계, 도덕 기준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그 기준을 두지 않으면, 우리의 가치관은 거짓된 이론이나 세속철학에 미혹되고, 그 삶도 세속화 해버릴 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우리나라에는  25%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하는데 사회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형 부정/사기 사건에 교회 직분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2%정도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고 짜게 유지시킵니다. 왜 25%나 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할까요? 그 주원인은 이원론적(삶 따로, 신앙 따로) 가치체계 속에서 모순된 삶을 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기독인들이 세상에서는 세속적 가치관, 진화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며(황금만능주의 아래), 육신적으로(쾌락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며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열왕기하 17:33)

세상 사람들과 신앙인들이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돈과 건물을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로마서 2:23-24)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전투에 임하십시오. 호세아 4: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또는 잊은 채로, 다른 어떠한 인간이 만들어 낸 논리나 가치체계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 지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6)

호세아 6:3과 6:6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3,6)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빌립보서 2:13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It is God who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according to his good purpose)”고 했습니다.

[적용]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요소가 있습니까? 아니면 형식적인 예배행위나 따로 신앙으로 눈먼 제사만 드리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15-16에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서 두 가지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이웃에게 빛들로 나타내며(마태복음 5:16), 생명의 말씀을 형제, 자매들에게 밝히고 있습니까? 그를 위해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말씀을 더 조명해 주시고 심어 달라고, 그리고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20

구약의 마지막 예언과 하나님의 침묵,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믿을만 한가? 

김무현


구약의 마지막 예언 (The Last Prophecy of Old Testament) 과 하나님의 침묵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이 말라기 3:1과 4:5-6절입니다. 말라기 4:5의 엘리야란 누구를 말합니까?(참고 마태복음 11:10-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라기 3:1)

“See, I will send my messenger, who will prepare the way before me. Then suddenly the Lord you are seeking will come to his temple;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ou desire, will come,” says the Lord Almighty. (Malachi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5-6)

이전에 한글 개역성경으로 말라기서를 공부할 때 말라기 3:1 말씀 때문에 혼란이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길을 예비하는 주님의 사자는 분명히 세례요한을 가리킬진데 새 언약을 주실 주님이 “그 전에 임하리니”라고 되어있어 왜 주님이 세례요한 전에 오신다고 잘못 예언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한동안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성경을 읽다가 문제의 “그 전에”라는 단어가 시간의 “before that time”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His temple)임을 깨닫게 되었고 역시 성경은 오류 없이 예언된 것임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한․영이 같이 있는 성경을 사용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더욱이 말라기 3:1 말씀은 예언의 이중적 조명이 내포되어 있음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에 홀연히 심판주로 재림하실 주님을 예표하기도 하니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1,13,14)

마가복음 1:2-4 절에서는 신약성경이 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을 성취시키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이사야서 40:3에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2-4)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적용 및 나눔] 신구약 중간기 400년 동안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침묵의 기간동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이 세계로 퍼지게 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즉,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먼저 헬라제국을 통하여 문명과 언어의 통일을 이루셨고, 로마제국을 통하여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길을 닦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 생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그래서 답답해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때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훈련시키시는 기간이라는 믿음 아래, 그 역경들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답답해하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함께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믿을만 한가?

당신은 한때 서점가를 휩쓸었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예언에 관한 책들을 읽으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그러한 것들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그 대부분의 내용은 뉴에이지 저자(New-Age writer)들에 의해서 상업적 목적으로 지극히 과장되고 왜곡되어 출판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스트라다무스가 독일에 히틀러(Hitler)의 이름과 출현을 예언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히틀러와 가장 근소한 이름 “Ister”에 근거한 것이며, 실제로는 유럽의 다뉴브강(River Danube)의 지류인 Ister River에 관한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몹시 과장하고 부풀린 것이지요. 물론 사람이 낸 몇 가지 예언이 확률적으로 우연히 맞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 성취는 확률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며, 그를 통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를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21-22에 예언의 신뢰성과 관련하여, 어떻게 가짜 선지자와 하나님의 선지자를 구별 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다른 종교 경전이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등이 성경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9

여리고 성에 관한 예언 

김무현


여리고 성에 관한 예언 (Prophecy at Jericho)


여호수아 6:26절에 어떠한 예언이 선포되었으며, 열왕기상 16:34절에 그 예언이 어떻게 정확히 이루어지는지 묵상해 보십시오.(참고: 계자=youngest son)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 6:26)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34)

여호수아 6:26에 여리고 성의 정복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아합 시대 벧엘 사람 히엘이 그 예언에 불순종하여 (열왕기상 16:34)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려다가, 여호수아서의 저주의 예언대로 정확히 첫째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습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까지도 강력하게 경고하시고 심한 처벌을 주셨을까? 여리고 성의 유적과 폐허는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후대에 남겨 놓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은 여호수아 4:6-7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여호수아 4:6-7)

최근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한 비교종교학자가 썼다는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며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비평한 책으로서, "창조나 노아의 방주나 아브라함이나 여리고 성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구약성경은 신화에 불과하며, 만일 선하신 신이라면 구원을 여러 다른 길로 베푸실 것이지, 성경대로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으로만 한정지을 리가 없다”는 식의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책을 보면서 신앙이 흔들리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4:4)

만일 그런 분들이 있다면 이 교재를 통하여 자신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한 책들은 대부분 일부 근거가 희박한 사실을 원하는 목적대로 그럴듯한 논리체계로 부풀려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의 대가 넬슨 글루엑 박사가 "성서의 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에 있어서 확실히 부정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발견들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라고 천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힌바 있습니다.

다음은 예일대학 고고학자 버로우스(Millar Burrows) 박사의 고백입니다.

"자유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과도한 의심은 그에 관한 데이터를 섬세하게 분석하여 유추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초월자를 전격적으로 배격하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고고학의 발견들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이 신뢰할만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세속학자들이나 자유신학자들은 애초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없다는 배경신념 하에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결론짓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편견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앤티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신뢰성을 더욱 강하게 해 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견도 예외는 아닙니다. 1999년 『Creation Ex Nihilo Journal』에 실린 성서고고학의 대가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굴들이 성경의 내용을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논문은 1900년대 초기와 중기에 독일과 영국의 탐사 팀 그리고 최근(1997) 이탈리아 탐사 팀에 의해 밝혀진 여리고 성 유적의 발굴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외벽과 내벽 두 겹으로 되어있으며(그림 참조),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성벽(retaining wall)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벽돌벽(mud-brick wall)을 세웠으며,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m 정도 되는 둑(embankment)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inner mud-brick wall)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난공불락의 구조를 가진 이중 벽의 성으로서 양식만 풍부하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는 그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3:1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에 도달한 시기가 추수가 거의 끝나 그 성안에 양식이 풍부한 때였음을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발굴된 여러 항아리들 속에 성경이 말한 대로 곡식이 가득 들어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렇게 양식이 풍부했던 난공불락의 성이 어떻게 그리 쉽게 함락되었을까?


여호수아 6:20절에 보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리 에너지(acoustic wave energy)는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사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발굴 팀(성경학자들이 아닌 세속학자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지진운동의 확실한 흔적들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 벽을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지진이 우연히 자연현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겠지만, 그와 같이 정확한 장소에 그리고 그렇게 정확한 시각에(온 이스라엘 백성이 합하여 소리 칠 때) 땅을 흔드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은 히브리 원어로는 "그 아래로 무너진지라 (fell beneath itself)”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외성벽(outer mud-brick wall)이 수직으로 솟아있는 그 밑의 기초성벽(retaining wall) 바깥으로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들은 바깥에서 사다리를 올려놓고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안쪽으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쪽으로 무너지면 그 무너진 돌들을 밟고 내려가  그 성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 성을 함락할 만한 사다리도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외성벽이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5m나 되는 수직 기초성벽을 올라갈 방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발굴 팀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특이하게도 기초 성벽 위의 진흙벽돌(outer mud-brick)들이 모두 그 아래의 기초성벽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무너져 내린 진흙벽돌들이 완만한 경사면(ramp)과 같은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계단처럼 쉽게 밟고 올라가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5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라고 되어있고 또한 6:20에도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The people went up into the city, every man straight before him(straight up and over)"(Joshua 6:20)라고 증거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 발굴 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북방의 외벽에는 집들이 그 벽에 붙여져 지어져 있었는데, 오직 한 부분만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라합의 집이 외 성벽에 붙어 지어져 있었으며 여리고 정복 시 라합의 가족들은 집 속에 들어가 살아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여호수아 6:22) 아마 그것이 라합이 살던 곳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또한, 여호수아 6:24에 보면,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발굴 팀에 의하면 땅을 파고 들어가면 1m 정도의 두께나 되는 탄재와 그 흔적들이 나오는 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장 특이한 사실은 그 탄 것들 중에 곡식이 가득 담긴 저장 항아리(storage jar)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만약 가나안 전쟁을 계속 치러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중요한 군량미를 다 태워 없애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상식적으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여호수아 6:17-18)

즉 여리고 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즉 우리가 취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쟁을 호르마(Hormah; dedicated by complete destruction)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역대하 20:15)

그와 같이 항아리에 가득 담긴 채 남아있는 탄 곡식의 유적은 성경이 모두 역사적 사실대로 기록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들을 분명히 후세에 남겨놓고 싶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의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 성경 비평학자들의 근거 없는 주관적 역사해석에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그 세속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도, 많은 경우, 오차가 있는 탄소 동위원소법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리가 사실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 앞에는 어떠한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성벽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참조 :  고고학으로 증명된 여리고 성의 기적 (youtube  동영상)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8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김무현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Cyrus)


여기서 참 이상한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이방의 왕인 바사왕 고레스는 아무 대가도 없이 오히려 보호까지 해 주면서 유대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을까요?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믿는 유대백성들이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니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정독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6-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45:1,2,13)

만약 고레스 왕이 위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들을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말씀으로부터 바벨론 성을 공략할 때 성 주위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이사야 44:27)과 놋쇠 문을 열어놓아(이사야 45:2) 그 난공불락의 성을 정복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며 “그(고레스)가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5:13).” 하시는 예언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경악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 때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가 이루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예언하셨음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고레스가 그 때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언들과 그것들의 성취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거부하십니까?

역대하 36:22-23와 에스라 1:1-11에 고레스에 관한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에스라 1:1-3,7)

유대 사람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돌려보내는데 무슨 대가나 조건이 있었습니까? 위의 예언들의 이중적 조명을 고려할 때, 고레스는 결국, 죄의 권세아래 종 되었던 우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 피로 구속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사단의 결박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니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역대하 20:6)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재로, 고레스 왕의 치정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칙령(decree)이 새겨진 돌기둥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을 한치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7)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7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한 예언

김무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Northern Israel and Southern Judah)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음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그의 성취에서 또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서 7:8-9을 읽어보십시오.

육십 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예: 호세아 4:16-17, 이사야 7:1-2). 이 예언은 아하스 왕 2년에(이사야 7:1, B.C. 734) 선포된 것으로 그로부터 65년 후인 므낫세 왕 22년에(역대하 33:11, B.C. 669) 그대로 성취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B.C. 722) 그 후 앗수르는 민족과 종교의 혼합정책을 실시하여(열왕기하 17:23-24)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 정책은 그 후 계속 진행되어 B.C. 669 앗수르의 오스납발(Ashurbanipal) 왕(에스라 4:9-10)이 수많은 이방 민족을 사마리아에 이주시킴으로써 이사야서에 예언된 것처럼 다시는 북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회복되지 못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바벨론 유수 기간 중 그 정체성을 보존하고 다시 돌아와 성전과 국가를 회복한 유다와 비교됩니다. 신약시대에 왜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호세아 13:1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6-7)

성경은 또한 유대의 멸망에 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유배되어 있다가 해방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25:11, 29:10). 특히 이 멸망을 선포하시며(열왕기하 22:16-17) 아직도 불순종하는 유대백성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예레미야 29:11~14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

유대의 바벨론 유수는 BC 605년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예레미야 46:2)에서 패한 여호아김 왕 때의 1차 포로로 시작됩니다. 그 후 BC 536년 스룹바벨을 인도자로 한 1차 귀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기간이 정확히 70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성경이 하나님(성령님)의 말씀대로 오류 없이 기록된 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그 후에 이루시는(요한복음 13:19) 과정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이나 천상 예배 등의 소망을 확신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다니엘 5:21하)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니엘 9:2을 읽어보십시오. 바벨론 유수의 70년이 거의 마칠 무렵에 1차 포로 때 청년으로 잡혀왔었던 다니엘도 이제는 많이 늙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던 도중, 그 25:11, 29:10 말씀을 발견하고는 그 70년의 연수가 거의 차서 이제는 드디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때가 가까이 왔구나(예레미야 29:14) 하고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 다니엘은 타락과 불순종으로 나라까지 잃었던 유대백성에 대해서 이렇게 다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니엘의  유대 민족을 위한 그 중보기도가 9장에 나옵니다.

당신은 다니엘과 같이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회개하는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다니엘의 자기백성에 대한 중보기도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유대민족의 장래에 관한 칠십 이레의 놀라운 비밀을 계시하여 주십니다(다니엘 9:21~27).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바벨론 유수 기간 중,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메대-바사 연합국에 의해서 B.C. 539년 바벨론은 멸망하고, 유대민족은 B.C. 536년 1차 귀환이 이루어지기까지 바사(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19:140) (Your promises have been throughly tested, and your servant loves them.)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5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김무현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The Final Prophecy To Be Fulfilled: The Christ's Return)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이나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상징적으로 막연하게 또는 조금 부정적인 시각(이단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 부분을 강조함으로)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과 우리의 믿음의 절정(climax)이며 모든 예언들의 마지막 성취이며 이 땅 위에서의 삶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영생에 관한 소망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성경이 얼마만큼 증거하고 예언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 성경은 30구절 당 1번 정도의 빈도수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 신약의 총 216장(chapter) 중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 27권의 신약 중 단지 4권만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인용이 없습니다. 신약전체의 1/20정도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됩니다.

• 구약의 선지서들뿐만 아니라, 욥기, 모세 오경, 시편 등에도 마지막 때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 예수님 자신도 재림에 대하여 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Josiah)

열왕기상 12장에서는 여로보암이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신상들을 만들어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느 익명의 선지자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포하십니다. 즉 열왕기상 13:1-2에는 먼 훗날 요시아의 탄생과 그의 생애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열왕기상 13:1-2)

이것은 요시아가 탄생하기 300년 전인 약 B.C. 930년에 예언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시편 139:16). 특별히 그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면서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그분은 그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간의 사건들을 다루십니다. 그분의 뜻은 예언된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 그분을 판단하려 하며 그분 앞에 무릎꿇고 굴복하기를 거절할까요? 왜 그분을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로, 왕 중의 왕으로 높이지 않는 것일까요?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열왕기상 13:1-2의 예언은 300년 후 열왕기하 23:15,16,20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어떻게 그 예언들이 성취되는지 정리해 보십시오.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열왕기하 23:15,16,20)

특히 열왕기하 22장에서는 그 동안 분실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분실되었다니 참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그 시대의 혼탁한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요시아의 개혁의 의지에 대해 기술한 23장 내용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요시아의 개혁은 느헤미야의 개혁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며 또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의 영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요시아의 개혁이 오늘날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이러한 영적 부흥과 삶의 변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4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예수님 사역의 모형 

김무현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예수님 사역의 모형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 The symbolism of ceremonial sacrifice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한 3대 명절은 유월절(Feast of Passover)[무교절(Feast of Unleavened Bread), 초실절(Feast of First Fruits: barley)], 칠칠절(Feast of Weeks)[맥추절(Feast of Harvest, the day of first fruits; wheat, 민수기 28:26), 오순절(Feast of Pentecost)], 초막절[수장절,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Feast of Ingathering, Day of Atonement, Day of Trumpets)]입니다. 레위기 23장을 정독하시고 이 절기들에 대해서 정리해 보십시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34:22)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신명기 16:13-15)

어느 미국의 중형교회 목사가 그 이웃에 있는 개척교회 목사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자기교회에서 성도들을 좀 보내고 싶은데, 무작정 교회를 옮기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합니다. 「레위기」강해 설교를 6개월 동안 하니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웃교회로 옮기더라는 것입니다. 성경 일독을 결심하고 창세기부터 시작할 때 이 레위기가 최대의 고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복음이나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고 선입견을 갖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성경말씀에는 필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 레위기에서도 많은 영적 보화를 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천국의 제자로서 구약과 신약을 열심히 연구하려는 성도에게는 풍성하도록 열린 눈과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신약)과 옛것(구약)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52)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너희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lasting ordinance)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며 그 가운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 절기들에서 우리는 3중적 의미(triple reference)를 찾아야 합니다. 즉 구약의 역사 속에서의 의미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언적/상징적 의미 또한 성도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즉, 단 한번의 완전한 제사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절기와 제사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념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찬으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통한 예언의 성취와 성도들의 삶에 대한 교훈과 같은 보화들을 캐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 119:160)

레위기 23장을 통한 여러 가지 교훈이 많이 있겠으나 이 장에서는 성경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나 에만 초점을 맞추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적/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가지 예 만 들겠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깊이 묵상하면서 각자 연구해 보십시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브리서 9:1)

정월 십 사일의 유월절(Passover)은 구약의 출애굽 전야에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안에 거함으로서 죄의 권세가 넘어갔다(pass over)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 12:5-18).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13)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1:29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어린양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월절 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피의 은혜와 보호 안에 거함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3-5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잡아죽일 것을 공모하되 명절(유월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월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자칫 민요(riot)가 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사태가 급전되고, 유래 없는 야밤의 날치기 불법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되며, 결국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사로잡히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그 날 밤에 사로잡혀 유월절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56)

즉, 아무리 세상의 권세자들이 회의를 하여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계획표를 만들어 논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시간표대로 세상의 모든 정황을 움직이시며 신실하게 그 분의 계획과 그 모든 언약들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무교절 기간 중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 무교병(unleavened bread)이란 누룩(yeast)없는 빵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마가복음 8:15)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함(가려짐)을 받을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3일 후(안식일 이튿날; 무교절 둘째 날) 첫 이삭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라고(요제, wave offering: waving a sheaf of barley before the Lord) 하셨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뒤 3일 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 첫 이삭을 통한 요제를 드린 날로부터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오십 일을 계수하여 칠칠절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7번 지난다 하여 칠칠절이요, 오십 일이므로 오순절(오=5, 순=10)이라고 불립니다. 이 날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 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모여서 기도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폭발적인 성령의 강림을 주신 날이기도 합니다(사도행전 2:1-4). 칠칠절을 기념함은 바로 이 신약시대의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올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드리게 되는 떡 2개(레위기 23:17)와 두 어린 양(레위기 23:20)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성자와 성령의 공동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절기들을 더 연구하심으로 그 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을 캐시고, 성경의 예언들은 반드시 성취되었고, 또,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오심으로 해서 신약시대에서는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찢겨진 살을 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로 성만찬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14-20, 고린도전서 11:23-29). 특히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리라.”를 묵상하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고 계십니까? 이사야서 11:9과 하박국 2:14에 기록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에 대한 비전과 흥분이 있습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3

성경예언의 이중적/삼중적 조명,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 

김무현

성경예언의 이중적/삼중적 조명 (Double/Triple Reference in Prophecy by the Holy Spirit)

성경의 예언에는 두 개의 사건이 한 곳으로 모여지며 하나의 예언이 다중적 성취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먼저의 성취는 나중의 더 큰 의미의 성취를 그림자처럼 조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구약의 예언 중에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메시아에 대해서 그렇게 혼동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1:2에 초림과 재림이 이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은혜의 해”는 예수님의 구속의 초림을 말하며 “신원의 날”은 심판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멀리서 조망했을 때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 BSF (Matthew) -

성경의 많은 예언들이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초림 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나 또 많은 경우에는 초림과 재림이 혼합되어 이중적 조명(double reference)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금방 이후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 초림과 재림 그 셋을 삼중적으로 조명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에는 앞으로 A.D. 70년경에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과 말세에 이 세상이 멸망될 것에 대한 예언이 섞여서 이중적 조명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성경 예언의 이중적, 삼중적 조명에 대한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Virgin Birth of Jesus)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만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씨로 이 땅에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잉태하셨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50년 전에, 오실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Isaiah 7:14, King James Translation)

'virgin'(헬라어로 '파르테노스')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알마(almah)는 일반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인(unmarried young woman)'을 의미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God with us,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아 예언(Messianic prophecy)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편,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예언은 이미 창세기 3:15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7:14와 일맥 상통하는 예언임을 보여줍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Satan)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Genesis 3:15, King James Translation)

사단이 동정녀에서 탄생한 예수 (her seed)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에는 치명타를 당할 것임을 암시한 내용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히브리 어느 문학서에서도 여자의 씨 ('her seed')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잉태케 하는 씨는 남자의 정자('his seed', 'the sperm of a man')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씨로부터 초자연적으로 탄생할 메시야에 대한 선포는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전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표현 방식 이었습니다.

성경비평가들은 이사야 7:14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것이 메시아적 예언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나 다른 여러 선지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성령의 이중적, 삼중적 조명(double and triple reference by Holy Spirit, 즉 가까이 이루어질 역사적 사건을 비추어서 앞으로 도래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예언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아하스 왕과 이사야 선지자가 아는 젊은 처녀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 여자가 그 후에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지었고 그와 관련하여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지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 사건을 통하여 훗날 다윗의 가계에 참 “임마누엘”되시는 메시아가 동정녀로부터 오실 것임을 이중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이중적이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이 예언이 아하스 왕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가계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not to King Ahaz but the house of David, the entire kingly line).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데 들을지어다. (이사야 7:13)

더욱이 마태복음 1:21-23에서 성경이 직접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이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리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1:22-23)


성경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만 가두어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5:1-11을 묵상하십시오.

•5절과 8절에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어떻게 바뀝니까?                                         

•왜 8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백했을까요?                                 

이 본문은 흔히 「베드로가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접어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큰 축복을 받았다」라는 주제로 설교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밤새도록 그물질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에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훌륭한 랍비로서(5절) 존경하던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습니다. 오랜 경험과 지식을 통하여 그 시간에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로 얼마 전, 더 잘 잡힐만한 시간과 장소에서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친 후였습니다.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베드로가 믿음으로 순종한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속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되뇌었을지 모릅니다. “흥 내가 이곳에서 어부생활 몇 십 년인데 목수인 당신이 무얼 안다고 그러시오? 전문가인 내가 이 시간에 깊은 곳에서 고기가 안 잡힐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랍비인 당신이 하라고 하니, 당신의 체면을 보아서 하는 척은 할 것이요!”하며 그물 하나를 마지못해 내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지도록 그리고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9절에 보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라고 되어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서 충격 받은 것을 보면 믿음으로 순종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5절과 비교하여 “주여(호칭이 바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즉 “예수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단지 당신을 전능하신 주님이 아닌 훌륭한 랍비 정도로 생각했었고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였을 때 당신을 정말 전능자로 인정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창조주인 메시아로 믿고 따르겠습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소위 지성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베드로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기는 믿는데 ‘선생’ 정도로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또는 그 일부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지식이나 상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십시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깊게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발견하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정말로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성경을 내 머리로 판단하며 정말 무시했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말씀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로 믿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습니다. 주여 나를 써주소서.”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1

성경의 예언과 성취 II

: 성경은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낸 종교경전이 아니다!

김무현


서언

제 5장에서는 수많은 성경의 예언과 성취 중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본 장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조금 더 공부한 후 그 외에 또 다른 여러 가지 구약의 예언과 성취들에 대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이사야 41:21-2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시대의 아니 또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신지 아닌지 재판을 한번 해 보자고 하십니다. 진화론을 믿고있는 과학자들에게 또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불신자들과 자유신학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대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 세계에 창조의 흔적을 남기셨으며(로마서 1:20),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또 그것을 역사 속에서 성취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지성인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잘 연구하여 확신으로 전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피조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종교적 경전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참 계시입니다. 만약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가 아니고, 어느 한 민족이 자기들의 역사와 생각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 하다면 성경적 세계관도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이 과를 공부하여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시편 46:10)


다음은 창조과학자이며 성경변증학자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박사의 간증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은 수백 종류나 되며 그 외의 증거들도 무척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며, 이것은 크리스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오류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속임수 곧 인기 있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으며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습니다. 사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40여 명의 성경 기록자들이 이 점에서 모두 잘못 되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였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학 서적이요, 가장 완전한 도덕 법전이며 또한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이 사람을 속이는 광신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진지한 마음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성경 기록자들의 주장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이모저모로 무려 3,000번이 넘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이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성취되어 오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예언을 했던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매우 오랜 후에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예언되어 있으며, 이 모든 예언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00가지가 넘는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그분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전 세계로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거짓 종교들을 포함한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성경과 같은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딕슨(Jeane Dixon)이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케이스(Edgar Cayce) 등의 거짓 예언자들은 애매 모호하며 허점 투성이인 예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과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들이며, 코란이나 논어 및 기타 비슷한 종교서적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규모가 어찌나 엄청난지 성경이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 주신 계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도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그 외 다른 고대 국가들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납니다. 참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확증된 것만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를 들자면,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많은 법칙들을 실험적으로 확증하기 오래 전부터 성경에는 이미 이런 것들이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사야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이사야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베드로후서 3:7), 물의 순환(전도서 1:7), 엄청나게 많은 별(예레미야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브리서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편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위기 17:11), 대기의 순환(전도서 1:6), 중력장(욥기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오류들을 지적하긴 했지만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모든 지적 사항들에 대해 언제나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해 왔습니다. 성경의 구조 역시 매우 놀라운 것으로 마땅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의 2천 년의 기간에 걸쳐 각기 다른 40명 남짓한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완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각각의 성경 기록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메시지가 결국에 가서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의 독특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연이나 공모로는 성경의 놀라운 구조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안에서 놀랍도록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구조와 대칭성과 복잡 미묘함 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게 전개되는 성경의 일괄된 주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의 창조와 구속(救贖)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는 이 말씀을 믿은 사람들의 간증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는 성경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이며, 성경의 교훈은 건전하며, 성경의 명령과 권고는 지혜로우며, 성경의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by Henry Morris, from www.inchristjesus.net)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김무현
2006-07-10

5. 성경의 예언과 성취 I - III. 토론 및 적용


III. 토론 및 적용

1) 확신을 가지고 증거 해야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증거 하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를 위하여 매일 매일의 성경묵상에 더 큰 믿음과 깨달음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만일 한시간 후에 사무실 동료인 불신자나 이슬람이나 불교신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믿지 않는 형제들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1-24과 2:13-14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1-24)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3-14)

[적용] 주위의 한 형제/자매를 선정하여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전도할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 형제/자매에게 나를 통하여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성령님께서 그 열매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2) 성경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How to defend the Bible?)

성경은 하나님의 참 계시이므로 그 자체가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수세기에 걸친 신랄한 비평의 포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참 진리의 말씀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효과적으로 중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비판과 공격에 대응하여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공하는 연구가 성경변증학(apologetics)입니다. 성경변증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전체의 일관성 (Consistency)

•예언의 성취 (Prophecy & fulfillment)

•부활의 역사성 (Historical evidence of resurrection)

•사도들의 변화와 순교 (Change/Martyrdom of disciples)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과 삶이 바뀜 (Christians' change of life)

본 장에서는 특히 수많은 성경의 예언과 성취 중 그 일부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27% 정도가 예언이며 그 예언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임의로 나온 예언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변증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당신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던 중 “참으로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참 계시이구나!”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 때가 있었습니까? 그 경험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8)

 

3) [적용] 얼마 전 요한계시록 내용을 중심으로 한 “Omega Code”라는 성서내용의 스릴러물 영화(biblical thriller movie)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못지 않은 작품이라는 선전에 기대가 컸었는데 기대만큼 영화가 잘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내용을 가지고 비슷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크리스천 100명이 열심히 노력하여 성경적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스티븐 스필버그 한 명을 전도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하고, 그 감동으로 그를 통하여 성경적 영화를 만들게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악가 조수미를 전도하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얼마나 큰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 12:3)

하나님 나라에서는 미국의 큰 부흥을 일으킨 무디에 대한 상급도 크겠지만 그 무디를 주일학교에서 회심케 한 이름 모를 주일학교 선생의 상급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디는 될 수 없더라도 무디가 될 사람을 전도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큰일 일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두메산골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여 작은 농촌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의 상급이, 대리석으로 장식된 대형교회의 목회자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마태복음 25:23)

•당신이 오늘날 감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10)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위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enlarge the territory), 그를 위하여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는 비기복적 야베스(Jabez)의 기도(역대상 4:10)가 매일 당신에게 있습니까?                    

•당신은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십니까?



성경적세계관세우기

출처 -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88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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