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1-02-18

고대의 포도주 제조 설비가 아라랏산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Ancient Winery Found Near Mount Ararat)

by Brian Thomas, Ph.D.


     최근에 한 연구팀은 고대의 포도즙 짜던 기구(winepress)를 역사적으로 노아의 방주가 도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아라랏산 근처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장소는 창세기 9장에 기록되어있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던 노아와 관련 됐을 수도 있는가?


성경에 의하면, 노아가 홍수 후에 한 최초의 활동 중 하나는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포도나무를 심고, 경작하고, 추수하고, 포도를 가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에, 방주에서 나온 창세기 9장 18절과 21절의 사건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기간이 흘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라랏 산으로부터 아르메니아의 아레니 근처의 포도주 양조장(winery)까지 대략 80km를 여행하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허락했을 수 있다.


그 포도주 양조장은 포도압착기, 발효통, 저장항아리, 포도주에 젖었던 도자기 조각, 심지어 컵과 마시는 그릇 등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최근인 19세기에 사용되던 포도주 짜던 방식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자들은 시들은 포도줄기와 씨앗들, 그리고 레드 와인의 색깔을 띠게 하는 화학물질인 말비딘(malvidin)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들의 발견을 고고학 저널(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게재하였고, 포도주(wine)는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의 불명료한 전이 기간인 구리 시대(Copper Age) 동안에 근동(Near Eastern)의 고원지대에서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를 인용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지는 ”고대 포도주 설비는 이전에 알려졌던 어떤 유사한 설비보다 적어도 천 년 이상 더 오래된 것이다”라고 보도하였다.[1]

노아가 이러한 특별한 포도주 제조 설비들과 친숙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경과 고고학 모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포도즙 짜는 설비가 노아 방주가 도착했던 지역에 위치한다는 사실에는 일치한다. 



References

1. Maugh II, T. H. Ancient winery found in Armenia. Los Angeles Times. Posted on latimes.com January 11, 2011, accessed January 11, 2011.
2. Barnard, H. et al. Chemical evidence for wine production around 4000 BCE in the Late Chalcolithic Near Eastern highlands.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November 30, 2010.
3. The evolutionary date assignments given to Copper Age deposits are not reliable, but there are evidences of the common use of copper in times past. For more on interpreting past 'ages,' see Sherwin, F. and B. Thomas. 2009. Understanding Evidence for the Biblical Timescale. Acts & Facts. 39 (4): 16-1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5879/ 

출처 - ICR, 2011. 1. 20.

미디어위원회
2010-03-19

성경의 근친 간의 결혼 금지는 모순인가? 

(Contradictions : Too Close for Comfort)

Gary Vaterlaus 


하나님은 근친 간의 결혼을 허락하셨는가, 금지하셨는가?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창세기 20:11,1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신명기 27:22) (또한 레위기 18:6~9절을 보라)

이 두 구절은 일부 사람들에게 명백히 모순처럼 보인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인 아브라함은 이복 누이와 결혼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누이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의 모순인가? 전혀 아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태초의 아담과 하와에서 출발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몇 명의 자녀들을 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가인, 아벨, 셋 외에도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4). 따라서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동생들과 결혼을 했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근친 간의 결혼을 금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일까? 확실히 아니다.

모세의 율법을 BC 1440년경 까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창조 이후로 2,500년 이상이 지난 시기이며,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도 400년 이상이 지난 시기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근친 간의 결혼을 금지시키신 이유는 무엇일까? The New Answers Book 책의 Cain’s Wife—Who Was She? 장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 

남녀 두 사람의 친족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들에 유사한 오류들이 더 많아진다. 그러므로 근친 간에는 그들의 유전자에 유사한 오류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들 두 사람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기는 그들 부모들로부터 각 한 세트의 유전자들을 물려받게 된다. 이 유전자들은 유사한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오류가 합쳐져서, 그 아이는 장애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일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처음 두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완벽했다. 하나님은 지으신 그 모든 것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하여(창 3:6) 죄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저주하셨다. 그래서 완벽했던 창조 세계는 쇠퇴되기 시작하였고, 고통과 죽음과 붕괴가 시작되었다.(롬 8:22).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이러한 쇠퇴는 살아있는 생물들의 유전자들에서 발생되는 모든 종류의 오류들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 모세의 시대에 이르러(2500여년이 지난 후), 쇠퇴된 유전적 오류들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양으로 축적되어졌고,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남매(그리고 근친) 간의 결혼을 금지시키실 필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레위기 18~20장)  

그래서 적절한 역사적, 신학적 문맥으로 성경을 연구해 볼 때, 성경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5/04/contradictions-too-close-for-comfort 

출처 - AiG, May 4, 2009.

미디어위원회
2010-03-17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면, 

어떻게 창조주가 될 수 있는가?

(Contradictions : The Firstborn Creator?)

Bodie Hodge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면(골 1:15), 어떻게 창조주가 될 수 있는가?(요 1:1~3). 이 성경 구절들은 서로 모순인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5~1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6,7)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히브리서 1:5,6)

먼저 확립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구절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피조물이신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불합리하다.

주장되는 모순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장자, firstborn over all of creation)”라는 어구와 ”낳았다(begetting)”라는 단어의 의미와 시점에 대한 부적절한 해석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 시점에서 일어난 ”최초로 창조된 실체”를 의미하는가? 절대적으로 아니다. 한 기독교 변증가는 ”처음 창조된(first created)”이란 뜻의 헬라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이 경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1] 

시편과 히브리서 구절의 문맥은 명백히 2000년 전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지상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 시점은 태초가 아니며, 주장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실존하시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을 숙고해 보라 :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시편 89:20, 27)

다윗에게 장자(firstborn)의 위치가 부여되었음을 주목하라!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장자가 아니라 막내이다. 이새의 장자는 엘리압이다(삼상 17:13). 그리고 시편 89:2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장자(firstborn)라는 칭호를 부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 31:9절에서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비록 그가 차남이지만 말이다.(창 41:51-52).

다윗과 에브라임처럼 예수님 또한 이 칭호를 부여받으셨다. 다윗과 에브라임은 분명히 처음 태어난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먼저 나신 이(장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으신 분인 것이다.

 

Footnotes

1. Matthew Slick, Col. 1:15, ”firstborn of all creation,” Christian Apologetics & Research Ministry Websit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6/01/contradictions-the-firstborn-creator 

출처 - AiG, June 1, 2009.

미디어위원회
2010-03-15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이라는 구절과 서로 모순되는가?

(Contradictions : Face to Face)

Bodie Hodge 


창세기 32:30절과 출애굽기 33:11절에 의하면, 야곱과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세기 32:30)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33:11)

그러나 출애굽기 33:20절, 요한복음 1:18, 요한복음 4:12절에는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성경비판가들의 주장처럼 성경의 모순인가?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애굽기 33:20)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한일서 4:12)

사람들은 이 구절들이 주장되는 성경의 모순들 중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모순은 없다. 한 성경 비판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A는 not-A와 동일할 수 없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면한 사람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오류가 분명하다” 그러나 자주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살피는데 실패하고 있다. ”A는 not-A와 동시에 그리고 똑같은 관계에서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장되는 두 구절, 즉 출애굽기 33:11절과 33:20절을 문맥들 속에서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구절들에는 서로 다른 시점(different time) 또는 다른 관계(different relationship) 속에서 쓰여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중요하다.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출애굽기 33:11절과 33:20절 사이에, 모세와 하나님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관계의 변화가 33장 18절과 19절에서 일어나 있다.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 시점에서, 모세는 주의 영광(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관계가 변화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모세에게 이미 나타내셨던 것처럼, 죄 많은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이라고 모세에게 알려주셨다. (또한 고린도전서 1:29절을 보라).

요한복음 1장에도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유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은 하나님의 충만(fullness, 따라서 그분의 영광)을 16절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아무도 (충만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빌립보서 2:8절과 요한복음 1장의 말씀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분을 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일서 4:12절은 요한의 이전 진술을 재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일관성이 있으며, 성경의 모순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과 대면하여 말할 수 있지만, 그 분의 영광 가운데서는(in his glory) 대면할 수 없다.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을 본다면, 죄 많은 사람은 죽을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7/13/contradictions-face-to-face 

출처 - AiG–U.S. July 13, 2009.

미디어위원회
2010-01-19

가장 오래된 히브리 문자가 해독됐다. 

: 성경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 

(Oldest Hebrew Text Deciphered)

David F. Coppedge


      2010. 1. 7. - 마침내 2008년에 발견되었던(11/16/2008, bullet 1) 고대 히브리어 도자기에 새겨진 글씨(Hebrew pottery inscription)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이 도자기 조각은 예루살렘 교외의 엘라(Elah) 계곡의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에서 발굴되었는데, 고대 히브리인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했던 원 가나안 문자가 기록된 5열의 문자열이 새겨져 있었다.) 대략 3000년 전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평가된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발견된 도자기 문자는 판독되었고,  PhysOrg(2010. 1. 7),  EurekAlert(2010. 1. 7)  등에서 문자 그림과 해석문과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Science Daily 지는 좀더 자세한 내용을 2010년 1월 8일 글에서 보도하고 있었다.

그 문자들을 해독한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University of Haifa)의 게르송(Gershon Galil) 교수는 그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 ”그것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적어도 성경 본문들의 일부는 오늘날의 연구들이 제시하고 있는 연대보다 수백년 이전에 쓰여졌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 증거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성경 역사에 대한 축소론자들의 해석을 완전히 기각시키고 있었다. EurekAlert 지는 말했다 : ”이것은 성경이나 그 부분들이 이러한 고대 시기 동안에는 쓰여졌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연구에 의한 성경의 작성 연대와 반대된다.” EurekAlert 기사에 의하면, 더 중요한 추론도 이끌어질 수 있다 : 

또한 게르송 교수는 그 새겨진 문자들이 유대(Judea)의 한 지방 마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주목했다. 만약 그러한 지방 마을에서도 필경사(scribes)들이 있었다면, 중심지역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필경사들은 훨씬 더 능숙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다윗 왕이 통치하던 기간인, 기원전 10세기 경에 문학적 본문들과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같은 복잡한 역사기록들을 쓸 수 있는 필사가들이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키르벳 케이야파에서 발견된 문장의 복잡성은 그 장소에서 발견된 인상적인 요새와 함께, 그 시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을 기각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자기에 새겨진 문자들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문자들은 성경 구절들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에 관한 표현들은 성경의 구절들과 유사하였다. 영어로 번역한 것은 이렇다. ”you shall not do [it], but worship the [Lord].  Judge the sla[ve] and the wid[ow].  Judge the orph[an] [and] the stranger. [Pl]ead for the infant; plead for the po[or and] the widow.  Rehabilitate [the poor] at the hands of the king.  Protect the po[or and] the slave; [supp]ort the stranger.” 이것은 성경 밖에서의 도덕적 표현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왕이 다윗 왕일 수 있을까?

Live Science(다윈에 충성하는 사이트)도 이 뉴스를 보도하면서, 이 발견이 구약성경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더 일찍 쓰여졌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히브리 성경은 BC 6세기 경에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히브리 문자에 의한 기록들이 그 이전으로 확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라라(Clara Moskowitz)는 썼다. ”그러나 이번 달에 과학자들이 발표한 새롭게 해독된 히브리 문자들은 4세기나 더 오래된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리고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증거이다. 이 발견에 관한 많은 링크들과 논평들이 있다. 더 많은 유익한 정보를 위해서는 Bible Places Blog를 클릭하여 살펴보라.

 


*관련기사 : 기원전 10세기, 다윗왕 때 작성된 성서발견…이전보다 4세기 앞서 (2010. 1. 18.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8/2010011801787.html

.성서 최초 작성시기는 B.C 10세기? (2010. 1. 16.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01/16/0903000000AKR20100116027900009.HTML

.성경 작성 BC 10세기부터? 最古 히브리어 글 발견 (2010. 1. 20. 크리스천투데이)
: 다윗왕 시대 것으로 확인… 구약 작성 연대 4세기 앞당겨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324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10/01/oldest_hebrew_text_deciphered/

출처 - CEH, 2010. 1. 7.

미디어위원회
2009-09-21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이유는?

(Contradictions : What’s in a Father’s Name?)

Bodie Hodge 


      왜 요셉(Joseph,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예수님의 부친)은 마태복음 1:16절과 누가복음 3:23절에서 다른 이름의 두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복음 3:23)

먼저 몇 가지 사전 설명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genealogy)는 완전한 계보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지 선택되어진 계보이다. 마태복음 1:17절에서 특별히 14대 씩으로 나뉘어져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는 완전한 계보라고 볼 수 없다.

이 두 족보는 다윗의 두 아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둘 다 아브라함까지 이어진다. 마태는 다윗을 통해 내려온,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온 왕의 계보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누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계속 추적을 하였다. 누가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아담으로부터 창조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그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두 족보 모두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는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as was supposed) 요셉의 아들이니...”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요셉의 두 아버지에 관해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사이의 차이는 꽤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추적하였고, 반면에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통해 추적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

마태가 요셉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여고냐(Jeconiah,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 때문이다. 그는 마태복음 1:11절에 등장한다.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그의 자손 중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게 되었다.(렘 22:30) 동정녀 탄생은 명백히 이것을 방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심장한 여성형 용어(feminine verbiage)의 사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마태가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를 족보의 마지막에서 언급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부모님에 대하여 여성형(feminine form)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족보.

누가복음 3장을 살펴보면, 족보의 목록은 마태복음의 족보(다말, 룻 등과 같은 몇몇 여인들을 포함)에서처럼 엄격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남자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면, 그러면 그녀는 목록에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족보에서 헬리(Heli)는 요셉의 아버지로서 기재되어져 있다. 헬리는 2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한 딸은 마리아였고, 다른 딸은 세베대의 부인(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이었다.(마 27:56, 요 19:25). 모세의 법에서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민 27:1–11, 36:1–12), 사위는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그 형태는 마태복음의 족보 형태와 다르다. 마태복음의 목록은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는지(begot, 그리스어로 gennao)로 표현되고 있다. (한글 성경은 ”낳고”로 번역됨).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그 형태는 다르다. 그곳에서 ”그 위는”(영어성경은 X is the son of Y)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son(아들)’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헬라어) 성경에는 없던 것이었다.(한글 성경에는 ”그 위는”으로 번역함). 단지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성경에서 삽입되어졌던 것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son’이 사용된 유일한 곳은 23절로서,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son)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는 구절이다.


누가는 매우 정확했다. 예수님은 헬리의 아들이었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누가는 그리스어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 기록이 성경적 오류라는 주장을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였으며(요셉의 이름은 물려받은 기업에 기인하여 기재됨),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족보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Footnotes
[1] Evangelicals have pointed out other explanations for this alleged contradiction. But for the sake of brevity, we went with the most common satisfactory explanation.


*참조 : Who Was Joseph’s Father in Jesus’ Genealogy?

https://apologeticspress.org/who-was-josephs-father/

The Genealogies of Matthew and Luke

https://apologeticspress.org/the-genealogies-of-matthew-and-luke-932/

Jesus’ family tree

https://creation.com/family-tree-of-jesus

On the genealogies of Jesus
http://www.christian-thinktank.com/fabprof4.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02/contradictions-whats-in-a-fathers-name 

출처 - AiG–U.S. 2009. 3. 2.

미디어위원회
2009-09-18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기간은 밤낮 사흘이 될 수 없는가?

(Contradictions : Three Days and Nights)

Paul F. Taylor 


      만약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밤낮 사흘(three days and nights)을 계셨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성 금요일과 부활하신 일요일 사이에서 적합시킬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들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안식일이 발생했었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목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해결책은 정말로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하루를 세는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에스더 4:16절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자기를 위하여 유대인들이 금식하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Neither eat nor drink for three days, night or day)”(에스더 4:16). 허락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단지 두 절 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삼일(the third day)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에스더 5:1). 만일 밤낮 삼 일을 오늘날 우리가 계산하는 방법으로 계산한다면, 에스더는 4번째 날이 될 때까지 왕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던 상황과 완전히 유사하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 28:1)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눅 24:5-7)  

만약 밤낮 사흘을 우리가 계산하는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예수님은 4번째 날에 부활하셨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들을 비교하여 볼 때,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의 사람들은 ‘3번째 날(the third day)‘은 ’3일 후(after three days)’와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이 계산했던 방법은 이것이다. 즉 부분적인 하루도 1일(one day)로서 계산했던 것이다. Christian Apologetics and Research Ministry(CARM)의 웹사이트에 있는 아래의 표는 그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다.[1]

1 일 (Day One)2 일 (Day Two)3 일 (Day Three)
목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금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금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토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토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일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
십자가에 달리심안식일부활


이 표는 예수님이 성 금요일에 돌아가셨음을 가리킨다. 그 날은 1 일(day one)이다. 예수님은 낮에 돌아가셨다할지라도, 1 일은 전날 밤과 낮을 포함한다. 그래서 금요일의 한 부분에서 시작하였지만, 그것은 첫 번째 밤과 낮으로 계산되어지는 것이다. 토요일은 2 일(day two)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 날은  3 일(day three)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의해서 사흘 밤낮이 되는 것이다.(장례 시의 3일장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을 3번째 날에 부활하셨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계산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계산 방법을 적용한다면, 사흘 밤낮이라는 성경적 문제와 관련하여 추정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Footnotes
[1] Christian Apologetics and Research Ministry, 'How Long Was Jesus Dead in the Tomb?” http://www.carm.org/diff/Matt12_40.htm.


*참조 : The Interval Between Christ’s Death & Resurrection

https://apologeticspress.org/the-interval-between-christs-death-and-resurrection-5977/

Did Jesus Rise “On” or “After” the Third Day?

https://apologeticspress.org/did-jesus-rise-on-or-after-the-third-day-75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6/29/contradictions-three-days-and-nights

출처 - AiG, 2009. 6. 29.

미디어위원회
2009-09-16

신명기의 마지막 장에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 책의 저자가 될 수 없는 것인가? 

(Contradictions : Dead Man Writing)

Roger Patterson 


      신명기(Deuteronomy)의 마지막 장인 (비교적 적은 12절로 된) 34장에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될 수 있는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신명기 34:1-12)

모세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오경(Pentateuch)의 저자로서 간주되고 있다.(신 31:24).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가 이들 책의 진정한 원저자라는 주장과 풍부한 증거들을 거부해왔다. 모세오경에는 우주 만물의 창조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스라엘)을 통한 택하신 민족의 부르심과 함께 모세의 삶과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 생활의 방황 끝에,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도자의 권위는 여호수아에게 넘겨졌다(신 31:23). 여호수아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새로운 땅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신 34:4)

모세는 약속의 땅을 본 후에 죽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묻혔다(신 34:5-6). 만약 모세가 죽었다면, 어떻게 그의 죽음을 기록한 신명기가 그가 쓴 책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구약의 책들이 기록되던 시기에, 책들은 두루마리(scrolls)로 쓰여졌다. 한 책의 끝과 다음 책의 시작은 명확한 구분을 가지지 않았다. 구약에 대한 현대 번역본들에서, 어떤 장의 마지막 구절이 다음 장의 첫 구절로 간주되는 많은 예들이 있다. 이것은 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 구분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완전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신명기의 마지막 장은 쉽게 여호수아의 첫 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추론되는 모순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신명기 33:29절에서 모세의 마지막 축복의 말들을 기록했던 또 다른 저자가 모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그는 이 모세의 마지막 활동들을 기록하였고, (모세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 적어 넣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사람이 여호수아일지, 에스라일지, 엘르아살일지,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가 모세의 삶을 간단한 설명으로 마무리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chapter)들을 재조정하거나(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여호수아로), 또 다른 저자가 신명기에 작은 부분을 마지막에 추가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성경의 진실성은 이 문제에 관한 이러한 설명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책을 쓰고 있다가, 또는 개인적 메모들을 남기고 있다가 죽었다면, 그리고 어떤 이가 당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거기에 마지막으로 추가하였다면, 아직도 그 책의 저자는 당신으로 간주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23/contradictions-dead-man-writing 

출처 - AiG–U.S. 2009. 2. 23.

미디어위원회
2009-09-09

마태는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것으로 잘못 인용하였는가?

: 성경의 오류로 자주 주장되는 구절에 대한 반론. 

(Contradictions : Mixed Prophets)

Paul Taylor and Bodie Hodge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 비판가들은 마태복음에 하나의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슥 11:12–13) 예레미야가 한 것으로 잘못 인용하였다는(마 27:9) 것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27:9-10)

은 삼심에 대한 이 인용문은 스가랴서의 구절을 매우 연상시킨다. 그래서 마태는 실수를 범하였다고 가정되고 있다. 만약 마태가 실수를 범하였다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개념은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는 어떻게든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주장되어지는 이 문제에 대한 그동안 논의되어져왔던 여러 가능성 있는 설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  

1. 예레미야에 의해서 말해졌지만, 후에 스가랴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2. 시몬 베드로(Simon Peter)를 베드로(Peter)로 칭하는 것처럼, 스가랴의 세컨드 네임(성)이 예레미야이다.
3. 필사자의 실수이다. 모든 그리스어 번역본에는 예언자의 이름이 존재하지만, 시리아와 페르시아어 번역본에는 이 이름이 없다.
4. 이것은 유다(Jude)가 에녹서를 인용한 것처럼, 예레미야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5. 스가랴서의 마지막 4 장은 실제로는 예레미야에 의해 쓰여졌다.
6. 유대 경전(Jewish canon)에서 책들은 다른 순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소선지자들보다 적절한 신뢰가 주어졌을 수 있다.
7.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와 스가랴서의 두 부분이 인용되었는데, 단지 예레미야만 언급된 것이다.

1-5 번까지의 설명은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6, 7번이 보다 일반적인 설명이 되고 있다. 이 설명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언서들의 모음집 (6)

이 가능성은 모음집에서 첫 번째 책의 이름으로 그 모음집을 부르는 잘 확립된 랍비적 방식(rabbinical formula)을 마태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눅 24:44절에서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글들을 (잠언과 같은 다른 책들도 포함하고 있었을지라도) 시편으로서 언급하셨다.  

유대 성경(Jewish Tanakh)에서, 예언서들은 기독교의 성경 순서와는(모든 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다른 순서를 가지고 있다. 예언서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의 첫 번째 책은 이사야서가 아니라, 예레미야서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말이지만 예레미야서에서 인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전후 문맥 (7)

이 설명은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에 있는 한 구절보다 전체적인 문맥을 인용하여 많은 구절들을 자주 암시하는 방법을 포함하고 있다. 스가랴서의 인용에는 필요한 많은 기초적인 정보들이 있어야한다.

먼저, 예레미야 18장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임을 말하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나라에 대한 재앙을 경고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은 그 분의 죽음을 은 삼십 개와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복음의 메시지는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특별히 예루살렘)은 곧 폐허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 19:1-4절은 토기장이의 밭에 관한 보다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Potsherd Gate) 어귀 곁으로서, 그곳에서 대참사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으며, 무죄한 자의 피가 흘려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결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피까지).  

그리고 예레미야 32:9-12절은 토지 및 구매 계약을 논하고 있다. 마태복음 27:9-10절의 최초 인용문이 스가랴서의 구절과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두 번째 인용문인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라는 구절은 토기장이의 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 32:9-12절을 시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예레미야서에 언급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가랴는 그 위에 구축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전체 구절이 예레미야와 관련된 토기장이의 밭에 관한 문맥 속에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마태가 언급한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가능성 있는 설명 (8)

그리고 마태복음과 스가랴의 이 두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그 구절들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서로 일치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Then was fulfilled what was spoken by Jeremiah the prophet, saying, 'And they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the value of Him who was priced, whom they of the children of Israel priced, and gave them for the potter’s field, as the LORD directed me.)” (마태복음 27:9-10)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Then I said to them, 'If it is agreeable to you, give me my wages; and if not, refrain.” So they weighed out for my wages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e LORD said to me, 'Throw it to the potter”—that princely price they set on me. So I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rew them into the house of the LORD for the potter.)” (스가랴 11:12–13)

마태복음에는 은 삼십을 ”가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스가랴서는 ”달아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스가랴서는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27:5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태복음은 ”토기장이의 밭 값”이라고 되어있는데, 스가랴서에는 그러한 말이 없다(‘품삯’으로 되어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러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만 해도 충분하다. 즉, 마태복음의 구절은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비판가들은 마태가 이 인용문을 스가랴의 것으로 잘못 인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가랴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가랴의 말은 일부 유사한 면은 있지만,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말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마태가 이것을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인용하였다면, 그것은 예레미야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정말로 예레미야가 말했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상고해 보라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25)

따라서 마태가 인용한 이 구절은 스가랴서의 구절이 아니라, 예레미야에 의해서 말해진 기록되지 않은 말씀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레미야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되(written)”라 하지 않고, ”하신 말씀(spoken, rheo)”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다가 유다서(9장)에서 천사장 미가엘에 관한 기록되지 않은 정보를 포함시킬 수 있도록 영감되었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마태에게 영감을 불어 넣으셔서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예언의 말씀이 주어진 후, 성령님께서는 후에 비슷한 예언을 스가랴에게도 주시어서 그의 기록된 책(스가랴서)에 기록되게 하셨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구절에 대한 8 가지의 가능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마지막 3 가지(6-8번) 설명은 이 구절이 성경의 오류라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 Who was Matthew Quoting?

https://apologeticspress.org/who-was-matthew-quoting-65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4/27/contradictions-mixed-prophets 

출처 - AiG, 2009. 4. 27.

미디어위원회
2009-09-03

가롯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How Did Judas Die?)

Georgia Purdom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Judas Iscariot)는 목매어 죽었는가(마 27:5), 아니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는가?(행 1:18)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5)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8)

어떤 사람들은 마태와 누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 틀리게 기록하고 있음으로 이 구절들은 성경의 오류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마태는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는 같은 사건을 두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보행자가 자동차에 치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는 그 보행자는 자동차에 치어 죽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장면을 보지 못하고 이후에 그 장소에 도착한 검시관은 시체의 손상을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와 검시관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의사였던 누가는 목매어 죽은 이후에 발생한 일을 자세하게 묘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만약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내장이 터져 나왔다면 목매어 죽을 수 없다. 둘째,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내장이 터져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피부는 매우 강인하여서 심지어 복부가 칼에 찔린다 하더라도 내부 장기는 대게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유다가 단지 떨어져 죽은 것만으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는 보기 힘들다.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사체가 예루살렘의 뜨거운 태양아래 매달려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몸 안에 있던 세균들은 활발히 번식했을 것이고, 사체가 부패하면서 조직과 세포들을 파괴했을 것이다. 세균 대사의 한 부산물은 종종 가스(gas)이다. 부패하면서 생겨난 가스의 압력은 세포와 조직 밖인 복강 내부에 축적되어 높아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체는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또한, 조직의 부패는 피부의 약화와 손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유다의 사체는 부풀어진 풍선처럼 팽창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체는 땅에 떨어졌고(목매달았던 나뭇가지나 밧줄의 끊어짐으로 인해) 사체의 피부는 쉽게 파열되었고, 가스의 압력으로 배는 터졌고, 내부의 창자는 다 흘러나왔던 것이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단지 두 저자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참조 : Did Judas Die Twice?

https://apologeticspress.org/did-judas-die-twice-176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5/25/contradictions-how-did-judas-die 

출처 - AiG–U.S. 2009.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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