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내용이 서로 모순될 수 있을까? 4. 성경을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 - II. 주제연구 (2)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성경을 읽을 때 오류나 허구처럼 느껴졌다거나 성경책들간에 서로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을 비평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신화적인 내용이 들어있고 자체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성령님의 참 계시일 수 없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조금은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우리가 교과서에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배운 진화론적 해석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권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에 걸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기적들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 기적들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진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로소이다. (시편 119:142)


이외에도 로마서 1:17(오직 믿음으로 구원)과 야고보서 2:17(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깊이 연구해 보면 모순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관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이에 관한 것은 토론문제에서 다시 한번 다루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표현한 것은 지나친 과장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보완합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행위와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위는 서로 관점이 다릅니다. 로마서에서(율법적)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함은 우리 힘으로 율법을 다 지켜 스스로 의로워져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만 가능)는 뜻이지, 신자의 “믿음과 삶(행위)이 별개의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을 분리시키는 것은 오히려 요한일서에서 경고하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를 더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행위는 신자(예수님을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자)로서 드러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로마서 2:13, 8:13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과 삶이 별개의 것이라고 했습니까? 야고보서 2:22에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어떻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3,14)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2)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같이 완벽해져서 우리의 의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믿음이 서로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완전히 성화된 자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믿는 자, 하나님이 택하신 자) 가 성령님의 이끄심 (견인)으로 성화를 향하여 나아간다고 가르칩니다. 누가 구원받은 자인가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조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꽃이지만, 생명도 없고, 향기도 없고, 벌도 모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중생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등 외적증거들이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 중에도, 심지어 하나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자중에도 주님이 보시기에 가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원론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은, 반드시 삶의 목적과 가치관에 변화가 나타나고, 또한 그것이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에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한 예를 들겠습니다. 민수기 23:19에 보면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를 한 눈에 보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에 후회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신성에 잘 맞지 않으며, 이 구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11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번역되어 있어 앞의 민수기 구절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의 두 성경구절에서 “후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함”에는 “후회하다”의 뜻 외에 “근심하다”, “애통해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15:11에서의 “후회하노니”는 “근심하노니”로 번역되어야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순종의 길을 떠남으로써, 사울을 비롯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임할 고통과 실패를 미리 보시고, 깊이 근심하며 애통해 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영어 번역을 살펴보면, NIV에서는 사무엘상 15:11을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으로 앞의 내용과 부합되게 번역되었으나, NASB에는 “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으로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설사 ‘후회한다’로 번역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제임스 패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반응하는 결과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다.”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무엘상 15:29)


성경의 오류와 문제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창세기 2:19에, 아담이 지음을 받은 후, 하와가 지음을 받기 전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라는 구절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1:25,26의 모든 땅의 짐승들이 먼저 만들어지고 맨 마지막으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다는 내용과 순서상 모순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창세기 2:19의 “지으시고”의 시제가 히브리어 과거분사 “had formed”임을 안다면, 그 들짐승과 새들은 이미 아담 이전에 지음을 받은 것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으로는 물론 그러한 시제의 정확한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관점(big picture)에서 세상 만물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overview of the whole)를 기술한 것이고, 2장은 사람의 관점(man's perspective)과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19-20도 아담이 에덴 동산을 중심으로 그와 관계를 갖고 사는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함.) 결론적으로, 1장과 2장이 서로 관점이 다르지 모순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9:4,5에서 창세기 1:27과 창세기 2:24을 동시에 인용하심으로 창세기 1장, 2장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 하에 오류 없이 기록된 것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And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pass, than one tittle of the law (Old Testament) to fail.) (누가복음 16:17)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에서 솔로몬(Solomon)을 거쳐 다윗에 이르는 부계를 통한 왕적/법적 가계도(kingly/legal genealogy)이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에서 다윗의 다른 아들인 나단(Nathan)을 거쳐 다윗에 이르는 모계를 통한 혈통적 족보(physical lineage)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성령님의 인도 아래 예수님의 부계와 모계가 모두 다윗의 씨로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한편, 사무엘하 7:13에 보면 “저(Solomon)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I will establish the throne of his kingdom forever).”라고 예언되어 있고, 사무엘하 7:16에는 “네(David)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Your house and your kingdom will endure forever before me; your throne will be established forever).”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다스림이 성취된다는 다윗 언약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육적인 가계도는 솔로몬이 아닌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통한 것이므로, 솔로몬에게는 오직 그 위(throne)만이 연속되고, 다윗에게는 네 집(physical lineage)과 네 위가 모두 영원하다고 한 것입니다. 위의 두 예언이 마태와 누가의 부계 및 모계의 족보에 의해 문자 그대로 성취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땅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하늘로 들려 올려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즉 모든 사람이 육체적인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중재림시 휴거하는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에녹과 엘리야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사야서 34:16에 성경에 관한 의문은 성경이 답을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2을 읽고 그에 관한 실마리(clue)가 될 수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이 내용은 그 마지막 때의 두 증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 견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face-to-face) 만나는 날, 이 모든 비밀들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분류:기독교-세계관
출처:`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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