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아’ - 비성경적 판타지

T.Chaffey, R.Patterson
2014-04-14

영화 ‘노아’ - 비성경적 판타지

(The Noah Movie: Our Detailed Review)


Editor’s note: 영화 ‘노아’에 관한 짧은 리뷰는 전에 했었다. 그 영화에 대한 아래의 리뷰는 새로운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보다 상세한 조사이다.

  AiG(Answers in Genesis)의 사람들은 새로 나온 영화 ‘노아’를 봤다. 우리 사역팀의 신뢰할만한 친구의 리뷰에 근거하여, 스텝 멤버를 포함한 우리는 이 비성경적인 영화를 보는 데 돈을 조금이라도 허비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심지어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묻는 요청을 이미 수없이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 AiG 연구자들은 눈으로 본 리뷰를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노아’의 감독이자 작가인 다렌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는 ‘New Yorker’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영화는 ”여태까지 나온 성경 관련 영화 중에서 가장 비성경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좋으냐 나쁘냐를 판단하기 위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꼭 봐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언 11:14). 우리는 이번의 영화 리뷰를 통해 우리의 지략을 제공하려고 하며, 이미 이 영화에 대한 초기의 간략한 리뷰를 게재했고, 그 주제를 토론하는 인터넷 방송을 주재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찬성할 수 없는 이 영화를 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현명한 지략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리뷰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에 대해 답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비판적일 때,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의 반응을 대하게 되는데, 이것을 먼저 앞부분에서 다루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1. 당신은 영화를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가?

자, 우리는 이 영화를 봤으며, AiG 스텝 한 사람은 수개월 전에 이 영화의 한 컷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러한 반대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비판적이었는데,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스텝을 포함하여 이 영화를 보았던 믿을만한 사람들과 이미 대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라는 불경스런 영화의 경우에서도 그랬듯이, 그것이 극단적으로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영화를 꼭 볼 필요는 없다.

2. 할리우드가 성경적 영화를 제작하리라고 예상했단 말인가?

우리는 할리우드가 노아와 방주에 관한 성경의 설명을, 성경을 존중하며 진실되게 취급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기독교인 리더들이 그 영화를 추천하면서, 영화제작자들이 성경 원문을 잘 다루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한테 그 영화를 보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제 그 영화를 보고 난 상태에서, 우리로서는 지식 있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그 영화가 성경을 왜곡한 여러 가지 사례들은 아래에서 읽어보라).

3. 그것은 그냥 영화일 뿐이니까, 그냥 즐기는 목적으로 보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거룩하고 이 세상과 구별되라고 부름을 받았다. 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생각을 자기 마음속에 채워 넣으려고 해야 하는가? 이 경우에, 영화 ‘노아’는 성경의 몇 가지 상세한 부분에서 약간 서투르게 표현한 정도를 넘어서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노골적으로 공공연하게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더욱이, 어떤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영화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단지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성경의 명령과 반대되는 것이다.

4. 영화 제작자들은 단지 예술의 자율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경을 주제로 한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예술의 자율권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상,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자 할 때는 예술의 자율권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창조박물관’(Creation Museum)에 노아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서 예술의 자율권을 사용했으며, ‘방주와의 만남’(Ark Encounter)을 준비할 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노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입었고, 어떻게 말했는지 등등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제작자들이 예술의 자율권 범위를 넘어섰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여러 분야에 있어서 공공연하게 원문과 반대되게 표현하고 있었으며, 경건하고 의로운 노아의 성품을 완전히 바꿔서, 마지막 남은 인간까지도 죽이려고 하는 삐뚤어진 성격의 미친 사람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노아는 자기의 친손녀까지도 살해하려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 영화가 예술의 자율권을 남용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파라마운트사의 ‘노아’ : 예술의 자율권이 미쳐 날뛰다(Paramount’s Noah: Artistic License Run Amok)”라는 기사를 보라.

5. 이 영화가 복음 전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기독교인들에게 이 영화는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경의 진실에 대한 개념을 연결시키는 일은 실제로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암석 사람(rock people)”을 성경 어디에 근거해서 설명할 것인가? 영화에서는 하나님이 왜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가? 뱀 껍질이 왜 마술적인 능력을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것인가? 따라서 이 영화는 수많은 오류투성이에 성경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 영화를 본 사람에게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앉아서 성경을 펼쳐놓고 그가 본 것이 틀렸음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차라리 그 영화를 보지 말라고 사람들을 독려한 다음에, 그들에게 노아에 관한 진실된 기록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결국 무신론자가 복음전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영화를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복음전파의 능력(로마서 1:16-17)과 복음전파의 명령을(우리를 도와줄 영화가 없을 때라도) 잊어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 그 영화를 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게 될 것이다. 그 경우에 크리스천들은 의지를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은혜스럽게 진실되게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 영화는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가?

다양한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우리가 들은 말 중의 하나는, 그 영화는 성경 원전에 다소 충실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7분짜리 비디오는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크리스천이 제작한 것으로, 그 영화의 다양한 보증 역할을 했다. 거기서 ‘노아’의 공동 극작가 아리 헨델(Ari Handel)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하나는 원전의 문자와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창세기와 모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람들의 예상을 깨기 원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공동작가의 말에 의하면, 원전의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 것을 그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그들이 그 목적을 잘 이루었는지를 살펴보자.

아리 헨델이 원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선전하기 위해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영화 저작의 순수성이라는 한 가지 의문점으로 귀결된다.

어떤 사람은 성경적 이야기라는 거대한 기획에 있어서, 이런 많은 논점들은 다소 중요하지 않은 관점이라고 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대한 오만한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은 관점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들이 더 큰 논점을 정확하게 취급하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아래를 보라.) 그들은 전체적인 스토리를 바꾸지 않고도, 세부적 내용을 바꾸고 있었다. 방주를 지은 것은 타락한 천사(Watchers, 감시자)들이 아니었다. 방주에 탄 노아의 아들들은 어리거나 미결혼의 상태가 아니었다. 함과 야벳의 아내들은 배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두발가인은 방주에 밀항하지 않았다. 까마귀를 내보낸 것은 야벳이 아니라 노아였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라멕을 적당한 시간에 죽게 할 수 있었으며, 노아에게 사랑하는 삼촌 혹은 죽게 되는 큰 형을 만들어주어 후반부에 두발가인과 조우한다는 설정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영화제작자는 그들의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거슬렀다. 이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원전(성경)의 기록에 모순되는 그 어떤 것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 영화가 다루는 주제들은 성경과 일치하는가?

수많은 광고와 함께 제공된 선전 문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영화는 노아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예술의 자율권이 도입된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 영화가 본질, 가치 및 전 세계 수백만 사람의 믿음의 초석인 이야기의 순수성 면에서 사실이라고 믿는다. 노아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은 물론 확실히 맞지만 나머지 문장은 어떠한가? 그 영화가 성경의 노아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한 가지는 맞다. 거기에는 노아도 나오고, 방주도 나오고, 홍수도 나오며, 성경의 다른 인물들의 이름도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로 노아 이야기의 ”본질, 가치, 순수성 측면에서 진실”인가? 전혀 아니다.

이 영화에는 몇 가지 거대한 문제점들이 있다. 하나는, 노아의 성품이 매우 잘못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심하게 상처 입은 동물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아는 세 명의 남자를 기꺼이 살해한다. 이 할리우드의 노아에게는 동물의 목숨이 인간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함이 구하려고 했던 젊은 여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노아의 며느리가 딸을 낳으려 할 때 노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에 나는 그녀를 베어버릴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내내 노아는 '결백한 자”(동물로 읽는다)가 홍수 이후의 새로운 에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는 데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이야기 전개를 어떻게 성경의 노아와 비교할 수 있을까? 창세기 6:9절은 그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모든 것을 신실하게 준행했다(창 6:22).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에스겔서에서 노아는 의인으로 평가되며 욥과 다니엘과 같은 수준의 위치에 있다(겔 14:14, 20). 베드로는 노아를 ”의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불렀다(벧후 2:5). 또한 노아는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물론 노아는 완전하지 않았다. 노아는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았으며, 그의 평생에 수도 없이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의인이며, 그의 세대에서 흠 없는 자라고 선언하셨다. 노아가 완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죽어가는 도마뱀-개를 보호하기 위해 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홍수 이후에 단 한 가지, 노아가 취해서 그의 아들 함에게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초래하게 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영화에 나오는 노아가 성경의 노아를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성경의 노아는 영화에서 묘사된 노아가 아니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선지자를 잘못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택받은 종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영화에서 하나님을 잘못 표현하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은 항상 창조주로만 연관 짓는다. 비록 이것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분에 대해 사용된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이 전혀 묘사되지 않으며, 그분이 전혀 말씀하지 않으실 때 그 성품으로부터 그분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불경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항상 멀리 계신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지시를 일련의 환상과 꿈을 통해 조각조각 받으며,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퍼즐을 자기 스스로 풀어야 한다. 사실상, 노아가 받는 홍수에 대한 ‘계시’의 일부는 므두셀라(영화에서는 일종의 주술사)가 노아에게 준 미혼약의 영향 하에서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 그가 무엇을 해야 하며, 왜 그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를 그에게 정확히 말씀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해준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없었는가? 하나님이 내키시지 않으셨던 것인가? 많은 경우를 볼 때, 영화 ‘노아’에서의 하나님은 이신론의 신, 즉 창조만 하고 그 이후에는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신에 가깝다.

또한 영화 ‘노아’에서 하나님은 잔인하고, 사악하게 보여진다. 영화에서 노아가 단 한번 기도하는 때는 그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의 손녀들(그들이 여자일 경우)을 죽이기로 결심하기 직전이다. 쌍둥이 여자애가 태어났을 때, 노아는 기다란 단도를 애기 중 한명의 얼굴 위로 갖다 댄다. 약간의 긴장이 흐른 후에, 그는 칼을 치워버리고 하늘을 바라보고는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자기는 하나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하나님은 노아가 자기 친손녀를 죽이기를 원하시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는 자비, 심판, 인간의 악행,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노력 등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개념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런 주제들을 성경에서 묘사한 대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개념은 왜곡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노아는 그를 공격하려고 위협하는 사람들의 캠프를 방문한다. 그는 어둠을 틈타 들어가서, 신체학대, 유괴, 여자와 먹이를 교환하는 것(그리고 분명한 식인 행위), 및 기타 죄들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노아는 자기 자신(자신의 생령)을 동물의 고기를 먹고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며, 이것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그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는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를 거스리는 죄로써 동물을 먹고 땅에서 그 자원을 빼앗는 형태이다. 로마서 1장을 참고하면, 영화에서 노아는 창조주를 거스르는 것보다도 창조물과 창조를 범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으로 보인다.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이사야 5:20).

이 영화는 종종 성경적 도덕성을 마치 물구나무서듯이 뒤집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에 위의 구절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감독이며, 동시에 공동 작가인 다렌 아로노프스키가 스스로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공언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만으로는 그가 성경적 역사에 근거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사실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그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노아’에 나오는 거의 모든 도덕적 논점은 뒤집혀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경에서 의인으로 명성있는 노아가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모든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하는 정신병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사람에게보다도 식물과 동물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신은 성경에 묘사된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노아가 임신한 자기 며느리에 대한 답을 간청할 때 침묵하는, 복수심 불타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서의 신은 아담과 하와가 존재하는 데에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잔인한 과정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수십억의 동물들이 살고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래에 더 언급했다). 이러한 진화론 옹호적 접근방식은 영화 속의 신을 우주적 위선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태워 구함으로써 사람이 없는 새로운 낙원에서 다시 번성할 수 있도록 하기 원하고 있었지만, 진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신은 사람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수십억의 동물들이 고통 받고 죽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실제적인 '악당”은 신학적으로 가장 강한 것을 만드는 존재이다. 두발가인은 노아의 아들 함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인간에게는 동물과 땅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물론 아로노프스키는 전적으로 통상적인 할리우드식 생각을 가지고 이에 대한 극단을 취한다. 두발가인은 악한 사람이지만, 그는 땅의 소유권과 권총 소유권(그렇다. 그는 일종의 폭발성 발사무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수성 및 동물을 사냥할 권리 등을 믿는다. 또한 그는 육식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영화에서는 그것을 가장 나쁜 죄로 묘사하고 있다. 대홍수 이전에는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므로(창 9:3), 그 시기 이전에 노아가 고기를 먹는다면 잘못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노아는 일부 사람이 동물을 먹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류를 도살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에 과도하게 싫증을 낸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 있을 때, 노아가 그들에게 과거 이야기를 할 때, 에덴동산에서 뱀이 껍질을 벗었다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아담이 혼란스러웠고, 하와는 방황하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이른다. 이렇게 벗겨진 뱀 껍질이 일종의 마술적 부적이 되어서, 노아와 그의 조상이 자기들의 앞이마에 감고서, 자기 자손들을 축복하기도 하며,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동산에서 벗겨진 뱀 껍질은 선한 것이며, 반면 하나님은 나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비틀은 것은, 타락한 천사가 착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 영화에서 타락한 천사(‘감시자’라고 부른다)는 마귀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고 있는 영웅이다. 심지어 아로노프스키와 헨델은 외경인 ‘에녹의 서(Book of Enoch)’와 다른 유대 고전의 도덕성까지도 뒤집었다. 에녹의 서에서는 ‘셈야자(Semjaza)’라는 이름의 한 타락한 천사가 200명의 천사 집단을 이끌고 지구로 와서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며 그들의 마법으로 인류를 부패시킨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복수심에 불타는 신이 인간들을 동산에서 쫓아냈다는 이유로, 이들 천사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도우려고 하늘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잔인한 신은 그들을 땅에 내팽개쳤다. 빛나는 그들의 몸에 흙이 달라붙어서 다중 갑옷의 (표석 덩어리를 닮은) 암석 거인으로 변해버렸다. 일종의 마술사인 므두셀라만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는 유일한 인간이다. 심지어 그는 마술적인 뱀 껍질을 이용하여 폭발물을 만들어서 암석거인(타락한 천사)을 죽이려고 하는 수백 명의 전사들을 불태워버렸다.

영화 중반에서, 두발가인은 노아를 발견하고, 노아가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한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노아에게, 그 혼자서 자기 군대에 대항하여 맞설 수 있느냐고 묻는다. 노아가 대답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멋지다! 기독교인 관람객은 노아가 자기를 압도하는 기묘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을 시사하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그 둘이 대치하는 동안에 돌더미처럼 꼼짝 않고 앉아있던 암석 거인 감시자가 그 순간에 일어나 두발가인과 그의 군대를 위협한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자기를 구출해 달라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은 타락한 천사에게서 온다.

그러나 영화 ‘노아’는 더 나쁘게 진행된다. 셈야자가 이끄는 타락한 천사들은 홍수 초반에 방주에 타려는 두발가인의 맹렬한 군대로부터 노아와 방주를 방어한다. 감시자들은 돌격한 군대를 한 사람 한 사람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 사람이 죽을 때 감시자는 하늘에 소리쳐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그의 암석같은 몸이 빛으로 변하여 하늘로 뻗어 올라간다. 이러한 ‘부활’은 또 다른 암석 거인으로 하여금 ”그는 창조주께로 돌아간다”라고 선언하도록 부추긴다. 이와 같이, 성경에 의하면 타락한 천사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영원한 형벌이 정해져 있다(마 25:41, 히 2:16, 벧후 2:4)는 것이 아주 분명한데, 아로노프스키는 자기 영화의 진정한 영웅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 다시 성경의 내용 크게 왜곡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이와 같은 많은 성경적 주제들을 왜곡했다. 아로노프스키와 헨델이 이러한 논점들을 단지 우연히 간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도 믿기 어렵다. 아니다. 그들의 대본에는 성경의 도덕성 뿐 아니라, 성경에서 선언하는 하나님의 품성, 의와 자비의 개념, 타락한 천사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심판, 및 창조에서 인간의 위치 등을 의도적으로 뒤엎으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진화론적 견해를 조장하고 있었다. 노아는 방주로 모인 그의 가족들에게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빅뱅이 시각적으로 드러나서, 용융된 공이 다른 물체와 부딪혀서 달이 형성된다는 등의 성운 가설을 통해 지구가 형성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생명체는 해양에서 작은 유기물로부터 시작하고, 원형질이 어류로 변하여, 해면 가까이로 헤엄친다. 이 어류가 일종의 양서류 생물이 되어서 육지로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는 파충류가 되어, 곧 땅 속의 굴에서 종종걸음으로 달리는 설치류로 진화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동물 형태는 영장류로 되고, 우리는 덩굴 사이를 활보하는 원숭이를 보게 되는데, 마침내는 그 덩굴이 제거되고 스크린이 밝게 빛난다. 빛이 희미해지면서 아담과 하와가 스크린에 등장하는데 빛으로 옷을 입었다.

그 영화를 추천했던 일부 기독교 리더들은 영화 ‘노아’에 진화론적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과 하와는 특별 창조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영화는 아담과 하와가 활보하는 원숭이를 포함하여 진화론 사슬에서 바로 다음의 고리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존재라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이들 모든 생물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면, 그것은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더욱이, 영화가 최고로 관심을 갖는 것이 생물이라는 것에 근거하면, 심지어 동물이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은 것이 되는 셈이다.

AiG는 진화론의 오류를 밝히고 있는 수많은 글들과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 진화론은 성경과 양립될 수 없다. 사실상 성경은 동물의 어떤 종류의 진화론적 발달도 부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6일 만에 창조하셨으며(창세기 1장; 출애굽기 20:11), 각각의 동물과 식물들은 ”그 종류대로” 혹은 ”그들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다시 말해서, 개는 항상 개를 낳고, 고양이는 항상 고양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는 우리가 여태까지 관찰했던 모든 사실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진화론 이야기의 사건과 영화에서 묘사된 사건의 순서는 성경과 모순된다(사건의 순서에 대한 20가지 이상의 차이를 상세히 다룬 Terry Mortenson 박사의 글 'Evolution vs. Creation: The Order of Events Matters!'을 보라).


우리는 더 말할 수도 있다.

영화 ‘노아’에는 다른 더 많은 오류들이 있고, 염려스러운 것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제 그만 둘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더 말하지 않는 것들로는, 므두셀라가 가진 매우 기괴한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매우 신비스럽게 나왔다는 것, 동물들이 방주에 타서는 잎사귀로 만든 어떤 형태의 향 때문에 잠들게 된다는 것, 두발가인이 떠다니는 방주로 급히 들어온 후에 잠자는 동물을 먹는 것(이런 것으로 공룡의 멸종을 설명하려는 것인지?), 원형의 무지개가 진동하는 것, 도마뱀-개, 에덴동산으로부터 보존된 마술 씨 등등 많이 있다. 추후에 이들 특별한 논점들 일부를 보다 상세히 다루어서 웹페이지에 올리는 글들을 보라.


나쁜 것을 최대한 이용하기

영화 ‘노아’는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표현하고, 노아의 성격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가득 찬 영화이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위험한 방식으로 왜곡하며,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게 하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철회할 것을 요청하지는 않겠지만, AiG는 누구에게도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영화를 본 비기독교인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이용하여 어떻게 복음을 나눌 것인가? 첫째로, 당신은 누군가와 뛰어난 대화를 하기 위해 그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다만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보았는지에 대해 좋은 질문을 하고, 그리고는 성경을 펴서 대홍수 사건에 대해 성경이 진정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시키려고 한 일을 노아는 어떻게 알았는가? 영화에서 인류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영화에서는 어떤 이유로 세상에 홍수가 왔다고 하는가? 노아가 방주를 지은 목적은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무엇이 정말 이상하게 보이는가? 어떤 배역이 당신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또한,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 영화는 기독교인인 당신을 거슬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높은 가치를 둔다는 강력한 간증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이런 토론을 할 때 당신의 성경을 펼쳐라.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권위로 설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고 단순히 의견을 하나씩 논하라. 영화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분명하게 의사소통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에 관해 말할 때나, 혹은 영화에서 동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때, 당신의 목표는 그 토론을 복음으로 이끌어가는 것임을 기억하라. 영화에서 제시된 죄와 의의 주제가 비록 왜곡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죄와 의와 자비에 관한 성경의 진실된 개념을 가리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죄인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동시에 제공하셨다는 것을 알도록 돕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하여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고, 기꺼이 그분의 목숨을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대속물로 바치셨다. 그리고는 죽음에 승리하여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하나님을 거슬린 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값을 예수님이 지불하셨다. 회개하는 믿음으로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서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방주에 타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방주로 바라볼 수 있다.

가서 이 좋은 소식을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Footnotes
1.'Darren Aronofsky Gets Biblical,” The New Yorker, March 10, 2014, http://www.newyorker.com/services/presscenter/2014/03/17/140317pr_press_release.


Noah Movie and Other Articles
Noah Movie Review: An Unbiblical Film
An Examination of Christian Entertainment Choices and the Movie Noah
What We Know of Noah and the Ark in the Bible
AiG and Ray Comfort on Noah and the Last Days


Ken Ham
The Noah Movie Is Disgusting and Evil—Paganism!
Don’t Be Taken in by the Noah Movie’s Promotion
Yet Another Hollywood Deception to Promote the Noah Movie
The Positives? Make Sure You Also Hear the Negatives!
Was Noah an Environmentalist?


*관련기사 : 영화 ‘노아’ 8~9점 받던 평점 5~6점 급락, 왜? (2014. 3. 24.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40324/61943525/1

성경 속 하나님의 홍수 심판 소재 영화 노아,  ‘반기독적·상업주의’ 논란 (2014. 3. 25. 국민일보)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gCode=0000&sCode=0000&arcid=0008166479&code=30401100

영화 ‘노아’를 바라보는 이민교회의 시각은 (2014. 4. 9. 기독일보)
http://www.christianitydaily.com/articles/78231/20140409/영화-노아-를-바라보는-이민교회의-시각은.htm?r=ny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oah-movie/detailed-review

출처 - AiG–U.S. 2014. 3. 29. 창조대구 소식지 135호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893

참고 : 3032|1455|1458|4610|4607|4490|4473|4235|4275|4198|5841|5429|5399|5260|5311|4535|4354|4352|3725|3596|5737|5721|5556|5527|5400|5307|720|721|5628|5594|5468|2851|5225|5065|5062|4982|4722|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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