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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앙

창조과학 사역의 의미 1 : 창조과학에 대한 소개

창조과학 사역의 의미 1 : 창조과학에 대한 소개

이은일 


      창조지에 연재된 창조과학 지상 강좌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글을 올리면서, 창조과학 자체에 대한 이해 전에 왜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어하며, 진화론이 어떻게 확대되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어떻게 창조과학이 활용되는 지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서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없으시다고, 또는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100년 이상 공격받고 있었고, 진화론이 바로 그 공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1)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가 비과학적인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과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강조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는 심판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 진화론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이 모든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진리가 비과학적인 거짓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의 ”생명의 기원” 서론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중세기까지는 생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설과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창조론이 신봉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생명은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학설이 대두되었고, 1859년에는 다윈에 의해 종의 기원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면서 생물의 진화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글을 보면 비과학적인 ‘생명 자연발생설’과 ‘창조론’을 함께 비과학적인 무식한(?) 이론으로 동일시하고, 과학적인 ‘생명 속생설'과 ’진화론‘을 함께 과학적인 이론으로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은 비과학적인 증명할 수 없고, 증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진화론은 마치 ’진화법칙‘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하나님의 창조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창조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교육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혼란을 겪고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이 과학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설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화론의 영향으로 자신들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십자가의 구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1절, 성경의 처음을 자신이 창조주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의 첫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는데, 그 뒤에 있는 말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기는 어렵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지금의 땅과 하늘을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죽었던 몸이 영원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 -> 타락 -> 구원 -> 최후의 심판 -> 새 하늘과 새 땅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첫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시작하셨고, 그 뜻대로 끝내신다는 것이며, 그분이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믿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본론

1. 진화론의 대두와 그 배경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진화론이 어떻게 대두되었고, 왜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1) 계몽주의의 영향

지금 세계의 문명은 유럽 문명이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유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진 곳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화 된 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합쳐져 중세의 암흑시대를 낳게 되었다. 16세기에 시작된 계몽주의, 즉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교적 권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그리스 로마시대와 같은 인본주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종교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게 하였다. 중세의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중심이 된 인본주의는 이성 중심의 철학과 과학주의를 낳았고, 마침내 기원문제 조차도 하나님을 버리는 진화론을 낳게 되었다.


2) 다윈의 진화론 발표 - 다양성에 대한 오해

1859년 다원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소개하였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보면서 이런 다양한 동물들이 어떤 변화를 거쳐서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론을 만든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이 시대에 다윈 말고도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유전학 등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유전정보에 의해 이런 다양성이 발현된다는 것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윈 등의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을 채택하였고, 첫 기원에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진화론이 발표된 후 1860년 동물학자인 헉슬리와 월버포스 주교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역사적 논쟁을 하였다. 진화론자들은 동식물의 다양성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진화론을 변명하였고, 이에 비해 월버포스 주교의 창조론 변증은 과학적 증거가 약해 보였다. 이 당시의 과학수준으로는 생명체에 있는 생화학 기전이나 DNA 등에 대하여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체가 지적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때 다양성과 진화가 다르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3) 진화론 확대의 시대적 배경과 거짓 증거의 영향력

창조론은 주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되던 가톨릭 쪽에서 주장하였기 때문에 창조론 옹호자들은 보수주의자들로 취급되었고, 진화론 옹호자들은 개혁적인 인사들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진화론은 시대적으로 인기가 있는 이론이었다. 또한 이 당시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 전쟁은 진화론의 양육강식에 의한 자연선택 이론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흑인 및 동양인들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열등한 인종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진화론에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진화론은 인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나타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즉 인본주의 시대에서도 물질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화론은 이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이 인본주의 시대에 환영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은 유럽에서 교육되고 있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1925년 프로테스탄트 보수주의의 아성인 테네시주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선조는 같다는 진화론을 가르쳤던 고교 생물교사 죤 스콥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100의 벌금을 내라는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도리어 진화론자들의 거센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화론자들의 법정 투쟁이 42년이나 계속되었고, 1967년에 대법원이 ”반진화론법은 연방헌법에 위배 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과학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학문적으로 유럽보다 뒤진 상태였고, 발전된 유럽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우는 스콥스의 재판을 통해 진화론이 미국에 자리 잡게 된 중요한 계기는 진화론이 과학적 증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재판에서 제시된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들은 ”중간 단계 화석의 증거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필트다운인’이었는데 이 필트다운인은 영국 필트다운지역에서 발견된 1912년 발견된 것으로, 진화론자들이 예측한대로 원숭이의 턱뼈를 가진 인류의 두개골이었다. 진화의 완벽한 증거로 인정받았던 필트다운인 화석은 1953년 뼈에 대한 연대측정결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정밀 조사결과 조작된 것임을 1962년 공식 확인하였다. 1912년부터 1962년, 20세기 초반 중요한 시기에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완벽한 증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살고 있던 위대한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들, 기독교인들이 쓴 글에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글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진화론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이다. 50년 동안의 거짓 증거의 위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유일한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생물학 뿐 아니라 학문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지질학, 우주과학 등의 자연과학 뿐 아니라, 역사, 문화인류학 등 인문과학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학문의 전 영역에서 다뤄지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이 법칙인 것처럼 인식되게 된 것이다.


2. 진화론과 과학만능주의의 쇠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진화론과 과학만능주의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진화론에 대하여는 그 허구성을, 과학에 대하여는 그 한계에 대하여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 진화론적 역사관의 쇠퇴

진화론의 역사 해석은 끝없는 진보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되고,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우수한 집단이 더 진화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역사는 계속 발전한다고 믿고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사람들은 과학의 진보와 그 열매를 누리면서 사람의 능력에 의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환상은 진화론적 역사의식과도 잘 맞는 것이었다. 인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진화론은 서로 잘 어울리는 동무들이었던 것이다.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진화론적으로 역사 발전이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 이성을 절대시하던 철학적 풍토도 깨어지게 되었다. 또한 문화 인류학이 발전하고, 인권 존중 사상이 퍼지면서, 원시인적인 삶이라고 경멸받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진화론적으로 발달되지 못한 문명이라고 낮게 평가되었던 것은 지나친 서구 기계 문명 위주의 평가이며, 그들 나름대로 독특하고 발전된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화 이론에 의해 낮은 단계에 있다고 흑인들을 평가하는 것은 진화론적 선입관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1, 2차 세계 대전이 바로 진화론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적자생존, 자연선택 이론은 어떤 특별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절시키는 것도 진화론적으로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우생학”도 바로 진화론의 결과이다.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에게 불임 수술을 하거나, 결혼을 제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도태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세계에서 진화론의 영향력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역사 등의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에서는 아직도 진화론의 영향력이 강력한 실정이다.


2) 과학만능주의의 쇠퇴

르네상스 이후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자연(피조세계)은 분석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별의 운행에도 규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물리학적 법칙들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세계가 하나의 정교한 기계인 것처럼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을 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지를 설명해야하는 철학의 입장에서 기계와 같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 이성은 그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과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기원에 관하여는 진화론만이 유일한 과학적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 이성으로 실험하고, 연구하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많은 과학적 발전은 사람들에게 큰 변화와 유익을 주었다. 쉬운 예로 자동차의 발명은 길거리에 널려있는 말똥의 공해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해방시키는 것으로서 크게 환영받았다. 과학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고, 이것은 과학만능주의로 나타났다. 즉, 과학은 하나님을 대신한 현대인들의 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증가되는 환경오염과 지구에서 인류가 사용할 에너지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과학 발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철학적으로도 인간 이성의 절대성이 비판받고 과학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인 부분이 있고,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체, 프로이드, 하버머스 등의 학자들은 학문이 이해관계나, 인격성, 신념 등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였고, 물리학의 발전으로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 있다’는 등의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하나님 대신에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세웠던 계몽주의 운동은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처럼 다신론과 죄가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1) 다신론적 사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리우는 지금의 시대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으며, 비합리주의, 상대성, 다의성, 이질성 등을 인정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수백 년간 고민하며 내린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이 된 인간 이성, 과학은 이제 그 신적인 자리에서 내려와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오만한 자리에 앉았던 서구문명은 천대하던 동양문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에 있는 철학, 종교 등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이성과 과학의 절대성에 회의를 갖게 된 서양은 이러한 동양의 철학과 종교,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양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범신론적 가치관과 문화 등이 급속도로 세계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서양의 신비주의와 쉽게 결합할 수 있다. 뉴에이지 운동 등이 동양적인 범신론적 세계관과 밀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각하게 인간 이성 및 과학의 절대성을 고민하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문화적으로 인간 이성 중심의 건조한 사상에 목마르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과학과 인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으며, 다른 의지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만능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과학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과학만능주의적 생각을 아직도 붙들고 있다. 현대 문명은 이와 같이 과학만능주의와 신비주의의 두 가지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는 다신론적 가치관이 지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과 과학만이 신이던 시대에서, 이제 그것을 포함하여 천사숭배, 악마숭배, 자연숭배 등 다양한 신이 생긴 것뿐이다.


2) 죄의 번창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로마서 1장 21절부터 32절까지 잘 나와 있다. 우상을 숭배하고, 동성연애, 음란, 간음 등 성적인 죄를 짓고, 살인, 분쟁, 비방, 교만, 부모를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하는 등 상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상실한 마음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하여, 마약, 도박 등의 쾌락을 쫓게 된다. 점차 마음의 양심의 소리는 작아지고, 죄를 짓기에 익숙하게 된다.  이제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이 죄를 짓는 사람들을 옳다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로마서의 기록은 지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컴퓨터의 발전은 가상공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고, 가상공간 내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살인, 폭력, 성적인 쾌락 등이 아무런 문제없이 행해질 수 있고, 그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깊은 고민과 사색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이 컴퓨터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죄가 바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무시한 결과 가상공간에서의 죄악은 실제 현실의 삶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들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들의 죄가 관영하고, 세상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세상의 죄에 대하여 선지자적 비판을 가해야하는 교회도 세상의 소금과 빛을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모습이야말로 복음을 강력하게 증거해야하는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진정한 신,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한 세상

1) 절대적 기준이 필요한 사람들

죄의 번창함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 쾌락을 추구하며 죄를 짓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군인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절대적 기준에 대한 헌신, 충성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모습인 것이다. 자신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강력한 신적 존재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소개는 신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신이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위해 존재해야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한 창조주에 대한 개념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의 절대적 기준이 있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기준을 바라면서도, 절대적 기준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뜻에 맞는 절대적 기준만을 찾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만이 참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된 책이고, 그분의 감동에 의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쓰여진 많은 내용들, 특히 창세기의 기록들이 신화처럼 취급받았지만, 과학적 증거는 도리어 성경의 기록만이 참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절대적 기준인 성경 말씀이 유일한 진리이며,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마음 밭이 돌로 가득 찬 사람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여러 종류의 밭이 나온다. 복음의 씨가 떨어지더라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옥토에 떨어져야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지만, 갈수록 열매 맺는 일은 힘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진화론적 교육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교육을 계속 받아왔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현실의 쾌락을 제거해야하는 거침돌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로 향하는 이정표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는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내면 이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사상이 깨어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음 밭에 있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이런 거침돌들을 제거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 열매를 크게 맺을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의 기록이 진리임을 확신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힘들다. 창조과학 강연을 듣거나 책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마음 밭에 있는 돌들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삶의 주인이 자신에서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할 뿐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단지 다른 신처럼 잘 보이면 복을 주는 신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기 전에, 예수님은 성부, 성령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세계의 주인이 되신 분이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묵상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묵상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창조주 되신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킬 것을 약속하셨다. 창조주 되신 분은 만물을 통치하시므로 역사의 시작과 끝도 주관하시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복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전히 통치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복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할 것은 분명하다. 이런 믿음은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준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어 만물을 그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회복하실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동일한 회복이 일어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결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이다 (엡 6:12).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지금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살인자 가인이 쌓은 에녹성에서 찬란한 문화가 꽃피웠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노아시대 홍수의 심판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도 바벨성을 쌓으며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사상이 있어왔고,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과학 사역은 진화론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화론이 거짓 과학이며, 과학적 증거는 도리어 성경의 기록을 지지함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를 수행해야하고, 연구 결과를 잘 전파할 수 있도록 사람을 훈련시키고, 강연하고, 책을 출판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창조과학적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자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선교지에서든,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훈련받으면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 사역은 하나님의 도구이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진화론과 같은 사상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고전 10:4,5)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진화론을 비롯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사상은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견고한 진임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의 증거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믿음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믿음을 공고하게 해주고, 복음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고, 선교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지만, 이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 뿐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전 10:4,5)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그렇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창조과학 사역도 지식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헛된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창조과학 사역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해박한 지식으로 위대한 서신서가 태어났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바울처럼 창조과학자들과 사역자들은 창조과학 지식을 발전시키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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