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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미디어위원회
2012-09-28

과학과 신학 : 갈등인가? 통합인가? 

(Science and Theology : Conflict? or Integration?)

최용준


요약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두 학문은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입장이며, 둘째로 양자는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관점이다. 셋째로 신학과 과학은 서로 이해관계가 중복됨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지막으로 양자는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이 네 가지 입장을 간략히 소개한 후 궁극적으로 두 학문은 통합관계가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Historically speaking, there are four typ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The first type is the conflict theory, stating the two disciplines contradict and are incompatible with each other. The second view is that both are independent treating each as quite separate realms of enquiry. The third perspective is that both can have a dialogue because each field has things to say to each other. Finally, there is an integration model which aims to unify both fields into a single discourse. After presenting each view respectively and critically, I would like to argue that science and theology can be integrated harmoniously.

 

I. 서론

최근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학문적인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1) 그렇다면 양자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과학과 신학이 처음에는 상호 대립적이지 않았다. 특히 자연과학의 본격적인 발전기를 중세 이후로 볼 때, 당시 과학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신학자가 과학에도 정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과학과 신학은 상호 갈등을 빚기도 하였고, 반대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신학의 이러한 관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2) 첫째, 두 학문은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이전의 프톨레미적 세계관, 즉 지구 중심적 세계관에 대해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처음 주창한 지동설을 나중에 다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과학적 증거를 들면서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그 때까지는 신학의 한 분과로 연구되어왔던 과학이 점점 신학의 권위를 위협하자 기존 교회는 과학에 대해 종교 재판이라는 명목으로 경고하였고, 그 이후부터 과학은 수시로 신학과 갈등관계를 보여 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이론은 미국의 과학자 드레이퍼(John W. Draper: 1811~1882)3) 및 화이트(Andrew D. White: 1832~1918) 등이 주창하였다.

둘째로 위의 견해에 반대하여 과학과 신학은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 연구 영역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 주창되었다. 그는 과학이란 경험 가능한 사실(facts)의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며, 신학은 가치와 도덕 및 신앙(faith)의 영역을 다룬다고 하면서 양자를 분명히 구분했다. 따라서 두 학문은 서로 갈등이나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 각기 별개의 분야이며 나름대로의 방법론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영향으로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양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중복됨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세 번째 관점이 나타났다. 이것은 미국의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및 영국의 과학자이며 신학자인 폴킹혼(John C. Polkinghorne: 1930~)이 강조하는 입장으로, 과학과 신학은 창조적 협력을 통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진리들을 계속해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비추어 보면서 재고하는 동시에 과학 이론도 그 전제가 되는 철학적, 신학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들도 과학적인 이론과 경험적인 실험에 개방적이어야 하며 과학자들도 신학자들의 연구에 귀 기울일 때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양자는 서로 공헌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두 학문은 궁극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헤르만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가 주장했다. 여기서 양자가 통합된다고 해서 각자의 학문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학의 연구 영역과 신학의 연구 대상은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하나의 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 학문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므로 인간에 의해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에도 그 인간의 중심이 학문과 인간의 궁극적인 기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통합의 성격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여베르트는 이러한 내용을 소위 그의 ‘이론적 사고의 선험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ctical thought)’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4)

본고에서 필자는 이 네 가지 입장을5) 좀 더 각기 상세하게 소개하고 평가하면서, 이 네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지를 탐구하여 결론을 맺고자 하는데, 결국 두 학문은 갈등적 요소도 있고 독립적 요소가 있지만 대화가 가능하고 나아가 통합관계가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II. 과학과 신학의 관계

1. 갈등 모델 

과학과 신학이 서로 갈등적 입장에 있다고 보는 관점은 초대 교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대표적인 교부는 터툴리안(c.160~c.225)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말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우선 이방 철학과 복음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지만, 폭넓게 해석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된 과학과 신적 계시가 중심이 된 신학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영적 대립 관계6)에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근대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에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점차 계시에 기초한 신학적 진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과학은 점점 더 절대화되어 가장 신뢰할만한 지식을 획득하고 진리를 얻게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으로 인정하게 되는 소위 ‘과학주의(scientism)’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어, 결국 신학이 전제하는 신적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되었고, 과거의 모든 전통들이나 미신 또는 신학적 주장들도 이성에 의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7)

나아가 이러한 이성 주도적 과학 및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본주의적이며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낳아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인간의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해결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는 무한한 진보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부터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달성한 수많은 업적은 세계관 및 인간관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보게 된 것이다.  

또한 과학은 성경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부활 등 초자연적 기적들 및 초월적 창조주나 신적 섭리도 자연법칙에 어긋나기에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관은 결국 기계적이며 결정론적이고 물질 중심적 세계관인 자연주의(Naturalism)을 낳게 되었다.8) 자연은 하나의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며 정해진 법칙을 따라 움직일 뿐 의미는 없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의 자유나 가치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생각은 결국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낳게 되었고, 히틀러 또한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나찌즘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거대한 도전 앞에 신학은 큰 충격을 받았고 처음에는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과학적 증거들을 반박할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가령 영국의 성공회 주교였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1805~1873) Wilberforce)는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던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의 이론을 비판하였고,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였던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다윈의 사상을 무신론으로 몰아붙였다.

또한 이 갈등 이론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과학자 드레이퍼 및 화이트 등에 의해서도 주창되었는데, 먼저 1870년대 초에 드레이퍼는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의 역사에 관해 책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교황 무오성 교리 및 반 지성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반면에, 이슬람과 개신교는 과학과 큰 갈등이 없다고 주장했다.9) 또한 1896년에 화이트는 「기독교 내에서 과학과 신학의 전쟁사」라는 책을 출판했다.10) 이것은 그가 이 주제에 대해 30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인데, 여기서 그는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제한적이며 독단적인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갈등 모델을 소위 "드레이퍼-화이트 논제(the Draper–White Thesis)”, '전쟁 논제(the Warfare Thesis)” 또는 "전쟁 모델(the Warfare Model)”이라고 부른다. 즉 과학과 신학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던 신화나 갈릴레오 사건과 같이 종교와 과학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 적대적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가령 코인(Jerry Coyne) 및 타이슨(Neil D. Tyson)등 미국의 일부 과학자들도 과학과 신학은 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가령 타이슨은 뉴튼(Isaac Newton: 1642~1727)이 해결되지 않은 과학적 이슈들에 대해 종교적인 해답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갈등 모델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모델의 과학관은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은 이 모든 과학적 주장을 거부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축자적으로 확신하고 주장했다. 나아가 참된 과학은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진화론은 창조론과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신학과 진화론적 과학은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갈등관계이다. 그런데 사실상 근대 과학이 낳은 무신론적 자연주의라고 하는 세계관 자체는 이미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무시무시한 제 1,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나이브한 낙관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과학주의의 우상을 버리게 되었다. 신학 또한 근대 과학의 다양한 도전 앞에서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과학의 열매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지나친 과학지상주의를 경계하는 입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갈등 이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독립 모델

갈등 모델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론이 독립 모델이다. 즉 과학과 신학은 별개의 영역을 다루는 독립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작용을 다루며 신학은 초자연적이고 초경험적 현상들 및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다룬다고 본다. 전자는 사실의 영역을 후자는 신앙의 영역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 간에는 전혀 연결점이 없고, 따라서 갈등이 일어날 필요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가 그 대표적 철학자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하면서 실재를 현상계(phenomenal world)와 초현상계(noumenal world)로 나누어 전자는 과학의 영역으로, 후자는 신학의 영역으로 이원화했다. 현상계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자연계를 의미하며 초현상계는 궁극적인 원인들 및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다룬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확실한 지식은 오직 현상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트는 초자연적이거나 도덕법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모두 신앙의 영역으로 추방하여 사실-신앙(fact-faith)의 이원론적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학의 속박과 간섭으로부터 과학을 온전히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결과 과학은 물질의 영역으로 제한되었고 마침내 포이에르바흐(Ludwig A. von Feuerbach: 1804~1872)와 같은 무신론적 물질주의(materialism)를 낳았고,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미국의 과학자 굴드(Stephen J. Gould: 1941~2002)는 '양립 이론(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라고도 불림)'을 주장한다. 이 입장은 과학과 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 경험의 다른 면들을 다루기 때문에 각 학문은 각자의 영역이 있고 따라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11) 굴드가 이렇게 과학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반면, 영국의 철학자 스테이스(Walter T. Stace: 1886~1967)는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는 과학과 신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완전하다고 본다.12) 경험을 해석함에 있어 과학은 서술적이지만 신학은 규범적이며, 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다룬다면 신학은 당위의 세계를 다루고, 과학은 방법(how)을 신학은 이유(why)를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가 자기 영역을 지키지 못할 때 혼란이 생기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갈릴레오 재판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들 중에는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및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2)가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실존주의적 신학은 칸트와 키엘케골의 영향을 받아 이 세상을 사실, 법칙 및 결정론의 영역과 가치, 의미, 목적 및 자유의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신학은 하나님과의 도덕적이고 종교적 경험을 해석하는 학문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과학은 신학과 모순되지도 않고 신학을 지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도 과학의 발견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신학도 더 이상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성경은 과학적인 책이 아니며, 창세기는 단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신화로 보고, 창조를 하나의 긴 진화 과정으로 보려 한다. 나아가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의 부활 등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들도 부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들은 과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이 세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든 신앙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배적인 과학이론은 물질주의적, 기계적이었다. 따라서 자연에는 더 이상 자유, 의미 그리고 가치의 영역이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과학은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불확정성 등이 지배하면서 더 이상 하나의 세계관을 믿지 않는다. 신학도 더 이상 과학을 그 기초로 보지 않고 과학에 의해 위협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어떤 과학이론에도 무관심하며 다만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헌신적 결단 및 도덕적 의미만 탐구한다. 결국 과학과 신학은 서로 해치거나 지원할 수 없고 상호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 이론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과학은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도한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면, 신학 또한 일상적인 삶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인 쿤(Thomas S. Kuhn: 1922~1996)도 과학이란 문화적 전통에서 나타나는 패러다임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신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13)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도 과학적 지식도 보편성에 대한 헌신에 불과하고 많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개념에서 발견되듯이 객관적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14) 나아가 그는 모든 지식은 개인적이며, 따라서 과학자가 학문하는 행위조차도 매우 개인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며, 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헌신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15)

영국의 물리학자인 쿨슨(Charles A. Coulson: 1910~1974) 및 미국의 물리학자 쉴링(Harold K. Schilling)도 과학과 신학의 방법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주장했다.16) 쿨슨은 과학이 단지 사실들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에 의해 진보하며, 신학은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경험의 영역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쉴링은 두 학문의 영역 모두 ”경험, 이론적 해석 및 실제적 적용이라는 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이 모델은 신학과 과학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무시하여 양자 간에 건설적인 대화와 교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신학도 과학적 세계관 및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과학 또한 특정한 철학적 전제들을 이어 받은 신학적 분위기에서 탄생했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는 계속해서 과학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대화 모델에 대해 알아보겠다.

 

3. 대화 모델

많은 신학자들이 이제는 과학의 연구 결과들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과학자들도 그들의 이론들을 좀 더 신학적 문맥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신학과의 대화에 더 관심을 가진다. 가령 ‘왜 우주는 질서 정연하게 존재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은 과학이 답변할 수 없으므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령 신학적 교리들도 현재 과학의 빛에 비춰보고 반대로 과학 이론들도 신학적 요소들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이나 발견에 의한 새로운 사실들에 좀 더 개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학 연구의 지속적인 발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할 것이다. 과학자들 또한 그들의 가정들이 신학에 기초해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자세는 그들이 연구한 데이터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줄 것이다. 나아가 그 가정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과학적 진보를 낳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연구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영역을 훼손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화의 과정에서 특정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러한 대화는 건강하고 상호적인 협력을 낳게 될 것이라고 본다. 즉, 과학은 신학이 가질 수 있는 오류나 미신을 제거할 것이며, 신학은 과학이 무의식적으로 절대화하는 전제들을 지적할 수 있으므로 양자는 상호 협조 및 견제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모델은 과학과 신학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대신 한 사건에 대해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실재는 매우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과학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과학은 실재의 한 면을 떼어 내어 그 면을 다양한 기술로 실험하고 측정한다. 그러나 신학은 실재 전체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과학이 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델의 대표적인 학자로 미국에서 과정 신학을 정립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독일의 몰트만(Juergen Moltmann), 영국의 물리학자이면서 성공회 신부였던 폴라드(William G. Pollard: 1911–1989)와 폴킹혼(John C. Polkinghorne) 그리고 호트(John F. Haught) 등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이 실재의 한 차원을 말한다면, 철학은 과학이 추상화하는 실재 전체를 다루며, 신학은 이러한 전체 실체의 도덕적이고 종교적 차원 즉, 신과 세상 및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다고 본다. 따라서 대화 모델은 과학과 신학이 다루는 대상, 주제 및 방법도 다르다고 보면서 양자 모두 그 영역 안에서 진리이며 상호 모순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트만 역시 세계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 자연과학에 중요하며 과학적 인식도 신학을 풍요롭게 한다고 주장한다.17) 폴라드는 인간의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공적인 반면 신학적 지식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라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편견임을 지적했다.18) 나아가 폴킹혼 역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한 영국의 대표적 학자로 자신의 대화 원리를 공명론(consonance)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공명이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이해가 지속적으로 서로를 심화시키고 상대방으로 인해 자신이 새롭게 조명되는 관계”를 의미한다.19) 그는 과학과 신학 모두 하나의 신과 우주를 전제하며 과학이 탐구한 실재와 신이 창조한 우주는 서로 일치한다고 본다.20) 그러므로 신학과 과학은 함께 하는 것이 우주에 대해 더 적합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또한 양자 간의 인터페이스와 상호 관계를 강조한다.21)

이러한 대화 모델은 과학과 신학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한다는 면에서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호 타협하여 창조적 진화론 등 성경 진리를 양보하려는 경향도 있다. 이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통합 모델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제 이것을 살펴보겠다.

 

4. 통합 모델

프랑스의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관찰하는 당시 과학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물질과 정신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외면’과 ‘내면’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주는 단순한 출발점(알파 포인트)에서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체계를 이룬 후 정신세계로 확산되어 완성점인 ‘오메가 포인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이다.22) 따라서 과학과 신학도 궁극적으로 이 오메가 포인트에서 만나게 될 것이므로 함께 대화하면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가이며 생물학자인 바울러(Peter J. Bowler)도 과학과 신학간의 갈등보다 화해를 추구하여, 지적으로 보수적인 과학자들과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간의 협력 및 통합을 강조했다.23) 바버가 1966년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에 관한 책을 출판한24) 이후부터 ‘종교와 과학’ 그리고 ‘신학과 과학’에 관한 학술지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25) 그 외에 미국 물리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Physics) 및 미국 과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Science) 등과 같은 주요 학술지에도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실리기도 했다. 나아가 최근에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인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과학과 종교 간의 피상적인 갈등 보다는  깊은 일치점이 있으며, 오히려 과학과 자연주의 간에는 얼핏 일치점이 있는 것 같지만 보다 깊이 고찰해보면 더 큰 갈등이 있다고 주장했고26) MIT 출신의 과학자 슈뢰더(Gerald L. Schroeder)는 과학이 신앙에 긍정적 근거를 제공한다고까지 말한다.27)

네덜란드의 과학사가인 코헨(H. Floris Cohen)은 근대 과학의 발전 초기에 성경적 영향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호이까스(R. Hooykaas: 1906~1994)의 논제 즉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성경적 세계관이 그리스의 합리주의적 약점에 대한 대안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의 일반 은총 속에 만인 제사장설이 강조되면서 직업이 소명임을 인식하여 육체노동을 존중하게 되었고,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창 1:27-28; 2:15) 하에 실험 및 경험주의를 강조하며 자연의 신성을 제거한 신관이 주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개신교가 근대 과학의 출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28)

옥스퍼드의 역사가 해리슨(Peter Harrison) 또한 성경적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리슨은 개신교적 성경 해석이 자연의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29) 그는 또한 창세기의 창조 및 타락 이야기가 17 세기 영국의 자연과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당시 과학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자연에 대한 지배를 회복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30)

역사가이며 종교학자인 클라렌(Eugene M. Klaaren)도 창조 신앙이야말로 17 세기 영국에서 과학이 출현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31) 역사가 제이콥(James R. Jacob)도 17 세기 성공회의 지적 변혁 및 영향력 있는 영국 과학자들(가령, 보일 및 뉴튼)에 대해 언급했다.32)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가이며 신학자였던 브루크(John H. Brooke)는 자연 철학자들이 자연법에 대해 언급할 때, 그 법칙들은 지적인 신에 의한 입법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데까르트(1596-1650)도 ”하나님께서 자연에 심으신 법칙들”을 발견한다고 주장했으며, 나중에 뉴튼도 태양계의 법칙은 ”지혜롭고 전능하신 신의 섭리와 지배”를 전제한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33) 역사가 넘버즈(Ronald L. Numbers)도 이러한 입장이 화이트헤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여러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과학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34) 베일러 대학교의 사회학자 스타크(Rodney Stark)도 ”기독교 신학은 과학의 출현에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35) 한국의 조덕영 교수는 칼빈의 적응 이론(accommodation theory)이 복음주의적 과학관이라고 보며36) 박찬호 교수도 원칙적으로 통합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37)

끝으로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도여베르트는 과학과 신학이 서로 독립성이 있지만 통합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38) 그에 따르면 각 학문들은 실제의 한 양상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가령 과학 중에도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물리적인 면만 집중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모으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물리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법칙들을 연구한다. 신학은 계시인 성경에 기초하여 각 분야(조직신학, 성경 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한다. 이렇게 각 학문의 대상을 생각하면 칸트 등이 말하는 독립 이론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궁극적으로 두 학문을 각각 학문으로 만드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점이 또한 통합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도여베르트는 이것을 이론적 사고의 반립(antithesis)과 종합(synthesis)으로 설명한 후 결국 이 학문의 주체인 인간도 독립적이거나 자충족적이지 못하고 궁극적 기원을 지향하며 그 기원과의 관계에 의해 학문의 내용 및 전제가 결정된다고 본다. 이러한 기원이 성경적인 유신론일 경우 각 학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과학적 물질주의 등을 낳게 되며, 이것은 결국 사상적 우상이 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과학과 신학의 통합은 만유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거듭난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창조 질서 및 영적인 법칙들을 연구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III.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과 신학간의 관계를 네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양자를 갈등적으로 보는 입장, 서로 독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모델, 두 학문의 대화를 시도하여 상호 보완하려는 입장, 그리고 통합될 수 있다는 모델도 살펴보았다. 특히 필자는 기독교 철학적 관점에서 진정한 통합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 보았다. 기독 학자는 계속해서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학문과 신앙 그리고 삶 전체가 통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Footnotes

1)그 대표적인 두 저서로는 폴킹혼(John C. Polkinghorne)의 One World: The Interaction of Science and Theology (Philadelphia and London: Templeton Foundation Press, 2007) 및 Science and Theology: An Introduction (London/Minneapolis: SPCK/Fortress Press, 1998) 참조.
2)이 네 모델은 Ian G. Barbour, When Science Meets Religion, 이철우 역,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서울: 김영사, 2002)와 http://en.wikipedia.org/wiki/Relationship_between_religion_and_science를 참고했다.
3)John W. Draper,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New York: D. Appleton, 1874)
4)Herman Dooyeweer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Ontario: Paideia Press, 1984)
5)존 호트(John Haught)는 이 네 가지 입장을 모두 영문자 C로 시작하는 분류법을 제시했다. 즉 갈등(Conflict) 이론, 대조 (Contrast) 이론, 접촉 (Contact) 이론 및 긍정 확인 (Confirmation) 이론이다. John Haught, Science and Religion: from Conflict to Conversation (Mahwah NJ: Paulist Press 1995) 구자현 역,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서울: 들녘, 2003) 참조. 그는 대화를 강조한다.
6)근대에 와서는 네덜란드의 영적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도 양자 간에 영적 대립(antithesis)이 있음을 인식하고 주장했다. A.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 1931) 참조.
7)러셀은 심지어 과학과 신학의 갈등은 단지 학문 간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이 있음을 주장한다. Russell, Bertrand. Religion and Science, 김이선 역, 종교와 과학 (서울: 동녘, 2011)
8)James Sire, James Sire, 김헌수 역,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2007) pp. 75-105 참조.
9)http://en.wikipedia.org/wiki/Conflict_thesis 2012년 3월 20일 오전 11시에 접속함.
10)Andrew D. White,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 (Kessinger Publishing, 2004) (재판). Ferngren, Gary B. ed. Science and Religion: A Historical Introduction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도 참고.
11)Stephen J. Gould.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 (Ballantine Books, 1999)
12)W. T. Stace, Time and Eternity: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
13)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14)Michael Polanyi, Science, Faith, and Society (Oxford: Oxford Univ. Press: 1946), reprinted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n 1964.
15)Michael Polanyi,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Ian G. Barbour, 'Science and Religion Today'. In Ian G. Barbour (ed.). Science and Religion: New Perspectives on the Dialogue (1st ed.) (New York, Evanston and London: Harper & Row, 1968) pp. 3–29.
16)http://en.wikipedia.org/wiki/Relationship_between_religion_and_science#Independence, 2012년 3월 28일 오후 1시 55분 접속함.
17)Moltmann, J. 김균진 역, Wissenschaft und Weisheit: Zum Gespraech zwischen Naturwissenschaft und Theologie, 과학과 지혜: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8)William G. Pollard, Physicist and Christian: A dialogue between the communities (Seabury Press, 1961)
19)J. Polkinghorne, Quarks, Chaos and Christianity: Question to Science and Religion,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4) pp. 67-68. Ted Peters도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Peters, Ted. ed.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역,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 (서울: 동연, 2002) 참고.
20)이정배, '폴킹혼(J. Polkinghorne)의 공명론과 유신론적 자연신학 연구: 유신론적 작인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한국조직신학논총 9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39.
21)McGrath, Alister E. A Scientific Theology, Volume 1: Nature. Volume 2: Reality. Volume 3: Theory. (Edinburgh: T&T Clark, 2001)
22)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and Row, 1959), pp. 250-75.
23)Peter J. Bowler, Reconciling Science and Religion: The Debate in Early-twentieth-century Britai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24)Ian G. Barbour, Issues in Science and Religion, reprinted by Harpercollins College Div in 1971. Smedes, Taede A. 'Beyond Barbour or Back to Basics? The Future of Science-and-Religion and the Quest for Unity'. Zygon, 2008 43 (1): pp. 235-58도 참고.
25)http://en.wikipedia.org/wiki/Faith_and_Science#Christianity, 2012년 3월 24일 오후 5:30에 접속.
26)Ibid., Alvin Plantinga, Where the Conflict Really Lies: Science, Religion, and Natur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27)Schroeder, Gerald L. The Hidden Face of God: Science reveals the ultimate truth (New York: Touchstone, 2001)
28)Ibid., R. Hooykaas, 손봉호, 김영식 공역, Relig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근대과학의 출현과 종교 (서울: 정음사, 1987)
29)Ibid., Peter Harrison, The Bible,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Natural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30)Ibid., Peter Harrison, The Fall of Man and the Foundations of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Charles Webster, The Great Instauration (London: Duckworth, 1975)
31)Ibid., Eugene M. Klaaren, Religious Origins of Modern Science: Belief in Creation in Seventeenth-Century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1977)
32)Ibid., James R. Jacob, 'The Anglican Origins of Modern Science”, Isis, Volume 71, Issue 2, June 1980, pp. 251-267.
33)Ibid., John Hedley Brooke, Science and Religion: Some Historical Perspectiv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 19.
34)Ibid., Ronald L. Numbers, Science and Christianity in pulpit and pe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 4, 138 n. 3. 여기서 그는 특별히 포스터(Michael B. Foster), 호이까스(Reijer Hooykaas), 끌라렌(Eugene M. Klaaren) 그리고 자키(Stanley L. Jaki)의 업적을 인정한다.
35)Ibid., Rodney Stark, For the glory of God: how monotheism led to reformations, science, witch-hunts and the end of slave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p. 123.
36)조덕영, 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논쟁: 과학과 신학의 최근 주요 논쟁점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pp. 67-77 참조.
37)박찬호, 과학과 신학 그리고 영성 (서울: 대서, 2010) 참조.
38)Yong Joon Choi, Dialogue and Antithesis: A Philosophical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Herman Dooyeweerd's Transcendental Critique (Philadelphia: Hermit Kingdom Press 2006). 최용준, '헤르만 도여베르트: 변혁적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철학의 성격을 확립한 철학자',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손봉호 외, (서울: IVP, 2005), pp. 37-66.

 

참고 문헌

(1) Barbour, Ian G. 'Science and Religion Today'. In Ian G. Barbour (ed.). Science and Religion: New Perspectives on the Dialogue (1st ed.). New York, Evanston and London: Harper & Row, 1968.
(2) ______________. When Science Meets Religion, 이철우 역,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서울: 김영사, 2002.
(3) Brooke, John Hedley. Science and Religion: Some Historical Perspectiv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4) Choi, Yong Joon. Dialogue and Antithesis: A Philosophical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Herman Dooyeweerd's Transcendental Critique Amsterdam: Buijten & Schipperheijn, 2000. 학위논문, 인터넷 주소: www.dooy.salford.ac.uk/papers/choi/index.html, 재판: Philadelphia: Hermit Kingdom Press, 2006.
(5) Dooyeweerd, Herman.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Ontario: Paideia Press, 1984.
(6) Draper, John W.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New York: D. Appleton, 1874.
(7) Ferngren, Gary B. ed. Science and Religion: A Historical Introduction,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8) Gould, Stephen Jay.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 Ballantine Books, 1999.
(9) Harrison, Peter. The Bible,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Natural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0) _____________, The Fall of Man and the Foundations of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11) Haught, John. Science and Religion: from Conflict to Conversation, Mahwah NJ: Paulist Press 1995. 구자현 역,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서울: 들녘, 2003.
(12) Hooykaas, R. 손봉호, 김영식 공역, Relig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근대과학의 출현과 종교, 서울: 정음사, 1987.
(13) Jacob, James R. 'The Anglican Origins of Modern Science”, Isis, Volume 71, Issue 2, June 1980.
(14) Klaaren, Eugene M. Religious Origins of Modern Science: Belief in Creation in Seventeenth-Century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1977.
(15) Kuhn, Thomas 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16) Kuyper, A.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 1931
(17) McGrath, Alister E. A Scientific Theology, Volume 1: Nature. Volume 2: Reality. Volume 3: Theory. Edinburgh: T&T Clark, 2001.
(18) Moltmann, J. 김균진 역, Wissenschaft und Weisheit: Zum Gespraech zwischen Naturwissenschaft und Theologie, 과학과 지혜: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9) Numbers, Ronald L. Science and Christianity in pulpit and pe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20) Peters, Ted. ed.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역,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 서울: 동연, 2002.
(21) Polanyi, Michael. Science, Faith, and Society. Oxford Univ. Press: 1946, reprinted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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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Polkinghorne, John C. One World: The Interaction of Science and Theology. Philadelphia and London: Templeton Foundation Pres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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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Russell, Bertrand. Religion and Science, 김이선 역, 종교와 과학 서울: 동녘, 2011
(26) Sire, James. 김헌수 역,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2007.
(27) Schroeder, Gerald L. The Hidden Face of God: Science reveals the ultimate truth, New York: Touchstone, 2001.
(28) Stace, W. T. Time and Eternity: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
(29) Stark, Rodney. For the glory of God: how monotheism led to reformations, science, witch-hunts and the end of slave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30) Teilhard de Chardin, Pierre.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and Row, 1959.
(31) Webster, Charles The Great Instauration London: Duckworth, 1975.
(32) White, Andrew D.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 Kessinger Publishing, 2004 (재판).
(33) 김용준,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 노트, 서울: 돌베게, 2005
(34) 박찬호, 과학과 신학 그리고 영성, 서울: 대서, 2010
(35) 조덕영, 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논쟁: 과학과 신학의 최근 주요 논쟁점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36) 최용준, '헤르만 도여베르트: 변혁적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철학의 성격을 확립한 철학자',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손봉호 외, 서울: IVP, 2005, pp. 37-66.
(37)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한국조직신학논총 9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38) http://www.frontiernet.net/~kenc/science.htm
(39) http://www.counterbalance.org/physics/sr-frame.html 
(40) http://en.wikipedia.org/wiki/Conflict_thesis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김광
2012-06-28

생활 속 창조과학 이야기



요약

창조과학은 자연과학이나 신학을 전공으로 하는 기독교인 학자들에게만 부여된 사명이 아니다 누구든지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 생활 속 창조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만물에 나타난 질서 있는 모습들을 볼 때에 분명히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질서를 유지시키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동물들도 스스로 옷을 지어 입지 않음에도 오직 사람들만 옷을 지어 입는다는 사실은 사람과 동물이 분명히 다르게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매일 먹는 음식과 인간만이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창조의 진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귀한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햇볕, 공기, 물과 같은 귀한 것들을 거저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찾을 수 있다. 온갖 식물들로 하여금 맛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사람과 동물들로 먹게 하신 것이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즐기는 인간만의 모습은 분명 창조주의 선물이다. 또한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 만물의 영장으로 특별하게 창조하신 존재라는 것을 초고층 빌딩을 건설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수십~수백만 년간의 진화된 결과가 아니라는 증거를 인구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1]


I. 서론

  바른 종교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가는 길이라고 본다면, 바른 과학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들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는 그 분의 신성과 능력을 발견하며 그 속에서 창조주가 의도하시는 바를 바르게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모든 일들에서 창조의 능력과 은혜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창조주가 계시며, 그 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고 접해지는 모든 자연만물의 움직임들 가운데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으신 만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창조과학은 특별한 학문과 연구를 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생각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가 쉽게 접하고 느끼는 주변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창조 진리들을 다루며, 이를 통해서 생활 속의 작지만 중요한 창조의 진리들을 쉽게 느끼고 찾을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II. 본론

1. 질서와 창조

우리 주변에서는 언제라도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의 질서가 있다. 봄이 오면 어느새 여름이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가 다시 1년 만에 봄이 찾아온다. 달은 지구를 한 달에 한 바퀴씩 돌고 있고 그 모양은 초승달에서 반달, 보름달, 반달을 거쳐 그믐달에 이르기까지 역시 일정한 질서가 있다. 또,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있어 낮과 밤이 구별되며, 지구가 23.5도 기울어진 채로 자전하고 있기 때문에 여름에는 낮이 좀 더 길게 되어 한낮에는 덥고, 겨울에는 반대로 밤이 좀 더 길게 되어 추워지게 된다. 이런 질서는 꾸준하게 매년 계속된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질서가 지켜지고 있다. 어떤 개구리도 올챙이 시절을 지내지 않고 바로 개구리가 될 수는 없다. 나비는 각각 애벌레와 고치이던 시절이 있으며, 정해진 시기가 되면 고치를 찢고 나오는데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고 고치를 손으로 찢어주거나 벌려주어 좀 더 쉽게 나오도록 도와주면 안 된다. 왜냐면 고치를 찢고 나오는 과정동안 있는 힘을 다해 애쓰면서 나비는 날개 끝자락에까지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고치를 찢고 나온 후에 훨훨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오묘한 창조의 질서인가? 이런 질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라면 올챙이를 보면서 개구리의 모습을, 애벌레를 보면서 나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물가나 물속에 사는 어류, 양서류와 같은 동물들은 대부분 체외수정을 통해 번식한다. 즉, 암컷이 많은 난자를 뿌려놓으면 수컷이 그곳에 정자를 뿌려서 수정란이 만들어지고 이 수정란이 발생과정을 거쳐 어린 새끼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체외수정을 하는 수많은 동물들이 마구 뿌려놓은 난자와 정자들이 섞이면서 혹시라도 새로운 종류의 동물이 생겨나는 일은 절대 없다. 반드시 같은 종류의 동물 난자와 정자가 만났을 때에만 수정란이 된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다. 그래서 물가에 수많은 종류의 곤충과 양서류, 수중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더라도 언제나 같은 종류끼리만 번식하는 것이다.

식물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에는 분명한 질서가 담겨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어 적당한 시기가 되면 나뭇잎들이 예쁘게 단풍이 들어서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도 식물이 보여주는 놀라운 질서이다. 열매나 꽃이 보여주는 맛과 향기, 색깔과 모양은 그 다양한 종류에 따라 분명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또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서 산소를 만들어 주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식물의 광합성 작용은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놀라운 질서의 연속이다. 광합성이 진행되는 순간순간마다 필요한 기관들과 요소들이 제때에 바르게 움직여주어야만 정상적으로 광합성이 이뤄질 수 있다. 이런 식물의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산소 때문에 동물들과 사람들이 숨을 쉬며 살 수 있다. 정말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질서이다.

질서라는 것은 아무리 크던 작던 간에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누군가의 지혜와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주와 지구, 동물과 식물 등 엄청난 자연 만물의 모든 구석구석마다 놀라운 질서와 법칙이 있고, 이런 질서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성경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 만물, 이 피조세계의 질서를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2]. 그리고 이런 자연만물의 모습을 통해서 창조주의 능력과 성품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에 이를 자연계시라고 부른다.


2. 유일하게 옷 입는 인간

요즘 애완동물에게 옷을 입혀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동물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동물들을 위한다기 보다는 기르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동물들은 결코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옷을 만들어 입지 못한다. 진화론에서는 왜 인간만 유일하게 옷을 만들어 입느냐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 동일한 진화의 과정을 겪어왔다던 다른 동물들 중 어떤 종류도 아직까지 옷을 만들어 입을 필요를 느끼거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어떻게 유독 사람만이 이런 필요성과 능력을 갖게 되어 옷을 만들어 입고 있냐는 것이다.

옷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수치설, 장식설, 이성유혹설, 환경적응설 등의 여러 주장을 해왔다[3]. 그러나 이들 주장 중 어느 것도 다른 어떤 동물들은 아직까지 전혀 하지 못하는 옷 만들어 입는 일을 왜 사람만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진화론적 사고를 포함해서 사람이 생각해 낸 과학적이거나 문화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옷의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의 창세기다. 창세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시작, 지구의 시작, 바다와 육지의 시작, 해와 달과 별들의 시작, 수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매우 중요한 피조물인 인간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그 최초의 인간이 바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엔 보이는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었다. 그리고 이들이 창조되었던 처음에는 옷을 벗고 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4]. 지금 우리는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뱀의 꾐에 넘어간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왜 인간만이 다른 모든 동물들이 느끼지 않는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으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5].

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의 원인은 바로 인간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타락 이전의 인간이 벌거벗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던 그 시절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타락한 인류 시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신다. 이때부터 인간은 갖가지 재료들을 가지고 각양각색의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라별로 민족별로 다양한 의복 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시간이 지나오면서 옷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의미들이 부여되어 왔던 것이다.


3. 먹거리와 창조과학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불을 사용하여 굽고, 삶고, 찌고, 끓이는 요리를 한다. 진화론적 문화인류학에서는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연히 산불이 나서 불에 탄 짐승들을 발견하여 맛본 후 그 맛을 알게 되어 일부러 불을 피워 요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의 세기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가장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찾아왔다는 설명이다.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연히 불의 세기를 조절하거나 나뭇잎에 고기를 싸거나 그릇을 만들어 찌거나 삶아 먹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십만 년 동안의 우연의 연속이 모여서 지금 각 나라별로 엄청나게 다양한 음식과 요리들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인류의 조상들은 불과 수십만 년 정도가 지나는 동안 엄청나게 다양한 요리법을 터득하여 찬란한 음식문화를 즐기고 있는데 반해, 그 옛날 1억년 넘게 지구를 지배했다던 공룡들이나 수천만 년을 거치면서 인류와 비슷하게 진화되었다는 침팬지나 원숭이, 오랑우탄들에게서는 자연상태 그대로의 고기와 과일, 채소, 풀을 먹는 방법 외에는 변변찮은 요리법 하나 찾아볼 수가 없냐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만이 이렇게 특별하고도 탁월한 진화의 가속도가 붙을 수 있었냐는 것이다.

음식을 다양하게 요리하여 즐기는 모습만 보더라도 인간과 동물은 절대로 같은 수준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깨를 볶아서 기름을 짜고 나면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에서 기름을 짜먹을 생각을 했을까?” ”참깨와 들깨에서 서로 다른 맛의 기름을 짤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짐승들은 풀을 뜯어 먹을 때에 생풀을 그냥 뜯어 먹을 줄만 아는데 사람은 왜 깻잎은 깻잎대로 먹고, 깨는 볶거나 으깨서 깨소금으로 먹기도 하고, 깨를 뜨겁게 눌러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하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특별한 음식인 김치만 해도 다양한 종류의 요리법이 있다. 재료나 지역, 계절에 따라 열무김치, 나박김치, 배추김치, 갓김치, 파김치, 백김치, 동치미, 고들빼기, 배추겉절이, 깍두기 등등 많은 종류들이 있다. 주재료가 무와 배추, 오이, 파 정도인데 우리 조상들은 그동안 지역별로 계절별로 재료별로 다양한 김치 음식을 개발하여 맛있게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발효시켜서 먹는 방법 역시 참으로 놀라운 지혜의 산물이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자신들만의 발효식품들을 가지고 있다. 발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도 말한다. 민족이나 나라별로 과실주, 곡물주, 빵, 치즈, 요구르트 등을 만들 때에 이용되어 왔다. 성경에서도 이런 발효음식이 등장한다[6].

성경을 보면 사람은 창조되었을 때부터 매우 지혜로웠고, 인류시조 아담이 살던 시대부터 불을 사용하는 것 뿐 아니라 음식과 문화 예술 건축 등 수많은 문명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7]. 이처럼 요리할 수 있는 인간이 지혜와 능력을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 맛있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먹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이런 사실에서도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을 닮은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셨다는 창조의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4.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가치 있을 때

세상에 한두 개 밖에 없는 희귀한 물건보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치 있고 귀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이 있는데, 바로 햇빛이나 공기, 물과 같은 것이다. 배추나 무 등 채소의 값을 매길 때에는 농사지은 분들의 수고와 농사짓는 데에 들어간 비료나 설비 등의 비용과 판매에 필요한 유통비용, 판매상들의 이익 등 여러 종류의 비용들을 따져서 채소의 판매가격이 결정된다. 하지만, 정작 배추나 무가 자라는데 매우 필요한 햇볕이나 비, 공기, 온도와 습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용도 포함되지 않았다. 과일도 마찬가지이다. 과일을 풍성하고 맛있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과 시원한 빗줄기, 땅 속의 영양분, 광합성을 하게 하는 공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값을 매기지 않는다. 수돗물을 사용하기 위해서 수도요금을 내지만 수도요금에는 물 값이 아닌 수돗물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설비와 약품, 인건비와 같은 부대비용들이 포함될 뿐이다.

정말 우리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햇볕이나 공기, 물 등 자연적인 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값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가 너무 흔하다고 생각하는 공기만 해도 사실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정말로 귀한 것이다. 매순간 숨 쉴 수 있는 공기야말로 값어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귀한 것이다. 당장 지구 밖의 우주 공간에만 나가도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이다. 진공상태에서는 공기의 압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 몸속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압력밖에 남지 않아서 1분도 채 살 수 없게 된다. 입과 코, 귀 등 신체의 구멍으로 수분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영하 100도 이상의 온도로 점점 얼어붙게 되고 산소를 들이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피를 통한 산소공급이 불가능해져 결국, 의식을 잃게 되고, 혈압은 낮아지면서 심장이 멈추어 죽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지구에서 우리가 맘껏 들이마시는 공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치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다른 별들 가운데서 물의 존재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물의 존재가 생명체에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바다와 강, 지하수와 같은 물과, 시시때때로 내리는 비나 눈은 아직까지 우주 안에서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귀한 것들이다. 그리고 사시사철 적절한 온도의 변화를 통해 4계절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도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매우 귀한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태양계의 어떤 행성도 지구처럼 1년 내내 사람이 살 수 있는 적당한 온도의 범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창조주의 선물

가을이 되면 한창 단풍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가을이 되어 추워지기 때문에 나무의 잎 속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녹색빛깔을 내는 엽록소가 사라지고 대신 빨간색이나 노란색 등의 다른 색깔을 내는 요소들이 바깥으로 드러나면서 형형색색의 단풍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단풍을 보면 어떨까? 어떤 동물들도 가을에 단풍잎이 곱게 물든 숲을 보면서 감동하거나 사색에 잠기지 않는다. 오직 가을 단풍놀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가을에 아름다운 단풍은 봄과 여름동안에 수고하고 가을에 결실을 수확하는 때를 맞추어 아름답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위로와 즐거움을 누리도록 특별히 사람에게만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계절마다 제 철 과일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름에는 수박이나 참외, 포도를 많이 먹게 되고, 가을에는 사과나 감이 제 철 과일이다. 겨울에는 밤이나 호두 등의 견과류가 있으며, 봄이 오면 갖가지 봄나물이 입맛을 돋우는데 좋다. 요즘에는 저장 기술이 발달해서 4계절 내내 계절의 구분 없이 온갖 과일과 채소를 구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역시 과일은 제 철에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몸에 유익을 준다. 더운 여름에 수박을 시원하게 해서 나눠 먹으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여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일할 수 있으며, 이뇨작용으로 몸 안의 노폐물을 시원하게 배출할 수 있게 해 주는 등 몸에 유익을 준다.

진화론에서는 중생대에 번성하던 겉씨식물이 신생대로 들어서면서 속씨식물로 진화되고 영양분을 열매로 맺을 수 있게 되었기에 열매를 이용하여 점점 더 번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영양분이 많은 열매를 동물의 먹이로 제공하는 대신에 동물들이 열매를 먹은 뒤 씨를 뱉거나 배설하게 되면 이로 인해 여러 곳에 속씨식물을 퍼져서 자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자신의 번식을 도모하기 위해 진화해 온 것이라면 그 열매가 왜 이렇게 보기만 해도 침이 나올 만큼 먹음직스럽고 맛있을까? 어떻게 해서 속씨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열매가 사람들의 입맛에 너무나도 맛있게끔 딱 맞게 진화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바른 대답은 바로 성경에 있다. 열매와 채소를 맺는 식물들의 존재 이유를 성경에서는 너무 명쾌하게 알려준다[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사람과 동물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시기 위해서 채소와 과일을 맺는 식물들과 풀을 만들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먹으면 맛있고, 몸에 좋은 영양분이 되며 병을 치료하는 약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이런 식물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절대로 찾아낼 수 없다.

사람들은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진화론에서는 꽃이 피는 이유 역시 꽃이 번식하기 위해서는 곤충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예쁜 꽃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곤충을 이용하여 번식하는 꽃으로 진화된 식물들이 꽃가루를 날리는 겉씨식물보다 훨씬 더 번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 단지 번식을 도와주는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라면 꽃의 번식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까지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창조주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 아닐까?


6. 초고층 빌딩을 짓고 있는 인류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앞 다투어 높은 빌딩을 짓고 있으며,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과 인천 등에 150층 가까이 되는 초고층 빌딩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높은 건물을 지음으로 해서 도시나 국가의 기술과 경쟁력을 내세우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사람에게 있어서 집이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때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안식처가 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집은 단순히 생활의 근거지가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문화, 아름다움, 예술, 과학을 실현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이 자신의 명예나 부귀를 뽐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좀 더 크고 넓고 편안한 집을 짓기 위해 많은 돈과 노력을 기울이며,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들에게 있어서의 집의 의미는 인간과는 좀 다르다. 물론 동물들에게도 집이 휴식의 공간인 동시에 새끼를 낳아 키우는 번식의 공간이 되고,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공간이며, 비, 바람, 추위를 피하기 위한 좋은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기술적인 만족을 위한 집이란 상상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물들 중에서 자신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획기적인 집짓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간혹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집짓기를 보여주는 동물이 있지만 그 집은 본능적인 문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집 짓는 재료나 장소에 있어서도 동물과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흙, 나뭇가지, 풀잎, 자신의 분비물 등 자연 재료를 가지고 집을 만들고, 개미들은 땅속이나 나무 밑동, 돌 밑에 집을 짓고 있으며, 새들은 높은 나뭇가지 위, 절벽 위, 바위틈 등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에 안전한 곳을 찾아 집을 짓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무나 돌, 흙 등의 자연재료 뿐만이 아니라 벽돌, 시멘트, 콘크리트, 철근 등 갖가지 인공재료를 개발하여 안전하고 효율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훌륭한 건축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집 짓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이렇게 인간과 동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수백만 년 전에 인간과의 공통 조상이라는 유인원으로부터 인간과 같은 시간대를 지나면서 진화해 왔다는 현대의 영장류인 침팬지나 원숭이, 고릴라, 오랑우탄 등에게서는 전혀 인간의 건축물 비슷한 것조차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인류 진화론을 심각하게 의심하게 만들면서 인간은 동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진화론적으로 본다면 인간보다 수십 수백 배 이상의 기간을 진화해 온 동물들은 집짓는 기술에 있어서 거의 진화하지 못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창조된 때부터 즉시 집을 짓고 성을 쌓는 일을 할 수 있었음을 알려 준다[9]. 전혀 진화되어야 할 필요가 없이 충분한 지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7. 늘어나는 인구 숫자와 짧은 인류 역사

현재 세계의 인구 숫자는 70억 명을 넘고 있다. 1987년 7월 11일에 세계 인구가 50억 명을 돌파했었음을 보면, 25년 동안에 2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구 숫자는 과거로 갈수록 점점 적어졌다는 것인데, 기록에 따르면 세계의 인구 숫자는 기원후 30년 경에는 약 2.1억 내지 2.5억에서 1650년에 약 5.5억 명, 1750년에 약 6.2억 명, 1850년에 약 12억, 1950년에 약 24억, 1975년에 39억 7천만 명 정도였다[10]. 과거의 인구 숫자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러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과거 2천년 동안 세계인구의 증가율은 매년 0.25%에서 3% 내의 범위 내에 들어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의 기록에서도 인구 증가율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모든 가족들의 숫자는 77명이었고, 그로부터 4대가 지난 후인 430년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당시에는 전쟁에 나갈 만한 군인의 숫자가 60만 명이상이 될 정도로 늘어났다. 여자와 노인, 아이들의 숫자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1백만에서 2백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인구 증가율로 계산한다면 430년간 평균적으로 매년 2.25%에서 2.41%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11].

진화론에서는 인류가 수백만 년 전에 현생 인류로 진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진화론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인류는 적어도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살아온 결과 2012년 현재 70억이 넘는 숫자만큼 늘어났다는 말이다. 이는 인구 증가율의 측면에서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엄청나게 낮은 증가율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1백만년 전에 최초의 원시인 부부 2사람으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다고 보면 평균적으로 매년 0.002% 정도의 낮은 인구 증가율로 인류가 지내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정도의 수치는 인구수가 2배로 늘어나는 데 무려 32,000년이 걸린다는 말이 된다. 이 수치로는 인구가 늘어나기 보다는 멸종될 수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정도이다.

2008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서는 약 7만 년 전에 인류가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2천여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12].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계 인구가 2천 명에서 70억 명으로 늘어나는 데 7만 년이 걸렸다는 주장은 인구수가 2배로 늘어나는 데 필요한 기간이 평균 3,000년 이상 걸렸다는 말이 된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인구 증가율인 셈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만을 근거로 했을 때 노아의 식구 8명에서 4,500년 만에 70억 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구증가율의 계산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 주시는 창조주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다.


III. 결론

사람들은 매년 새해를 맞으면 이전 해를 반성하고 돌이키며 새해에는 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결단하고 계획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진다. 이러한 모습 역시 창조의 증거가 된다. 세상에 어떤 동물들이 해가 바뀔 때에 뭔가 새로워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사람들은 창조되었을 때부터 시간을 가늠하였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며, 한 달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조주께서는 이미 창조 넷째 날에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도록 명하셨으며, 이 명령은 바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어떤 동물들도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가늠하며 일생을 계획하며 목표를 만들고 달성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 왜냐면 인간만이 이런 지혜를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고 생각해 보면 결코 진화론적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창조과학의 대상들로 가득하다. 우연과 오랜 시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진화론적 관점으로는 창조의 질서와 섭리를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조차 없지만, 동물들과 구별되어 특별히 창조된 인간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성경적 창조의 관점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모쪼록 창조의 시각으로 주변을 바라보면서 창조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창조과학자다! 아니 창조과학자이어야 한다!”


Foot Notes
1. 이 글은 필자가 2008년 하반기에 극동방송 선교프로그램인 [복음의 메아리]의 ‘창조과학 야기’를 진행하였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이 글의 일부는 2010년부터 한국창조과학회 정기간행물 ‘창조’에 5회 동안 연재되었다.
2.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http://blog.daum.net/sac_art/8940767 에서 재인용
4. (창세기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5. (창세기 3:6~7)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6. (사무엘하 17: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7. (창세기 4:19~22)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8. (창세기 1:29~3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9. (창세기 4:17)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0. http://ko.wikipedia.org/wiki/인구
11. http://www.kacr.or.kr/bbs/subview.asp?cate=B&id=74&no=1
12.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124344


참고문헌
1. 개역개정 한글성경, 대한성서공회
2.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현재 60억의 세계인구가 가능합니까?,”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 자주하는 질문, http://www.kacr.or.kr/bbs/subview.asp?cate=B&id=74&no=1
3. '인류는 7만년 전 멸종할 뻔했다,” 중앙일보 2008.4.25,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124344
4. FASHION DESIGN, 박진희 저, 한국산업인력공단, 2006년,
http://blog.daum.net/sac_art/8940767 에서 재인용
5.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


출처 - 2012 한국창조과학회 국제학술대회 논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403

참고 :

이웅상
2012-05-26

창조 주일 메세지 

: 자녀에게 창조신앙을 가르치자 (창세기 1:26-28)


       한국창조과학회가 31년 만에 처음으로 ‘자녀와 함께 참가하는 학술대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난 5월 19일에 부산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평소 학술대회는 200~300명 정도가 모였었는데, 이번에는 사전 등록인원만도 3100명이었고, 당일 등록한 인원과 등록하지 않고 참여한 사람을 합치면 족히 3,500명은 모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550명의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끝없이 몰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랐습니다. 어려운 외국강사들의 세미나도 듣고,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비젼을 세워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습니다.

왜, 우리는 자녀들에게 창조신앙을 가르쳐야합니까? 창조신앙이 자녀에게 뿐만 아니라, 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까?

 

I. 첫째로, 창조신앙은 우리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분과에서 발표하시는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 창조신앙은 성경의 시작이요, 신앙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단순한 신화로서, 하나님은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창조했다는 유신진화론은 증거가 옳지 않은 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뿌리가 흔들리면 나무 전체가 흔들리듯이, 창조신앙이 흔들리면 신앙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할 신앙은 바로 창조신앙인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너를 낳았지만,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너를 만드신 것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평생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왜 하나님이 나를 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나를 왜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까?


II. 둘째로, 창조신앙은 복음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창세기 1장 1절과 똑같이 '태초에'로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권세를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신앙이 없이는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하는지, 그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우리 복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III. 창조신앙은 회복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아무리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더라도 바른 창조신앙을 가지게 되면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강사로 오신 일본 창조과학회 회장이신 우사미 목사님이  충격적인 발표를 하셨습니다. ”작년에 쓰나미로 인해 3만 명이 죽었을 때 우리 한국에서 지원해주시고 특별히 성도님들이 기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일본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쓰나미로 죽은 사람이 3만 명이었지만 매년 자살로 죽는 사람의 수가 3만 명이 넘습니다. 왜 일본이 자살왕국인줄 아십니까?” 하면서 통계자료를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가 50%이상이 창조주가 있다고 믿지만 유일하게 일본은 1%만 믿는다는 거예요. 기독교인의 수는 0.3%에 불과합니다. 과연 일본이 왜 이런 줄 아십니까? 가장 큰 원인은 인본주의에 기초한 진화론 교육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가 있음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례로 카네까와가 8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법정에서 심문하는 판사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모기가 물면 모기를 죽이는 것이 이상합니까?, 모기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라는 기가 막힌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 살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질문에 카네까와는 ”나는 사람을 계속 죽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1870년대부터 이런 교육을 해왔습니다. 경제 발전에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정신세계는 이렇게 무너질 대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각기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정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창조신앙을 가질 때 바른 인간관을 회복할 수 있고, 무너져 가는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그들이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인권과 동성애법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은 정말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런 죄악된 삶 속에서 살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영원히 그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계가 나서서 이 법을 끝까지 막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법 제정에 찬성을 했는데, 자신의 신념보다는 재선을 위해 선택했다고 물의를 빚고 있지 않습니까? 남자-남자가, 여자-여자가 그렇게 가정을 이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녀는 어디서 태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주시지 않으셨다고 본문에서 너무도 자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자녀를 생산해 땅에 충만하도록 우리의 가정을 축복해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정과 그런 가정들에게 이 땅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살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놀라운 지혜와 그 능력을 주셔서 이 세상에 빛으로 살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 자녀에게 세상교육보다도 창조신앙을 열심히 가르쳐서,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다운이라는 어린이가 삼촌과 함께 이집트에 있는 카이로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고고학회가 열렸는데 데이비드가 카이로 박물관에서 미이라를 보았습니다. 바로 이집트 역사와 성경에 나오는 아멘호텝 2세로 알려져 있는 미이라를 본 거예요. 그래서 이 아이가 삼촌에게 ”삼촌. 성경에 보면 모세를 추격했던 바로와 모든 이집트 군사들이 홍해 바다에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나와있는데 이 미이라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촌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학자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면서 ”성경이 좀 잘못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니, 성경이 어떻게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성경을 잘 모르시나보네요. 제가 연구할래요”하면서 평생 고고학자가 되어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현재 80세가 넘도록 연구하여 이집트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잘못된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집트의 고대 역사는 표준연대와 개정연대가 있습니다. 표준 이집트 연대(standard chronology)는 BC 32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인 연구와 성경연구를 통해서 거의 1000년 이상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아멘호텝 2세는 실제로 성경에 나와 있는 출애굽 시의 바로가 아니라 솔로몬 시대의 바로로 밝혀져서, 이제는 개정연대(revised chronology)라고 현재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역사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성경과 하나도 틀림없이 일치하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요? 그 삼촌과 함께 온 꼬마가 밝혀냈습니다. 학술대회에 가서 도전받아서 ”에- 이렇게 학자들이 모르냐”라고 꿈을 받은 어린 아이가 연구를 통하여 기존 이집트의 표준연대를 개정해서 이렇게 성경과 같은 개정연대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놀이동산에 데리고 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창조박물관, 창조학술대회를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창창한 미래의 아이들이 관람하고 사진도 찍으며 하나님의 과학자, 하나님의 고고학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꿈을 갖도록 좀 더 시간과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바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우리 자녀들이 창조신앙을 가질 때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합니다. 그동안은 창조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학술대회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부산에서 '자녀와 함께 참가하는 창조과학회 학술대회'를 실시한 결과, 학술대회에 3100명이 등록했는데, 실제 참석인원은 3500~3600명으로 추산될 만큼 하나님께서 학술대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녀에 관심을 갖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자녀를 드리고 양육하면, 자녀들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신앙으로 가르칠 때, 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던지 당당하게 이 땅을 밝히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가 있음을 믿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가르치지 않으면, 진화론에 기초한 과학만 배우면 하등 동물들로부터 진화된 존재로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진화론에 기초한 생활방식을 선택해서 평생 살아가게 됩니다. 창조신앙은 우리 자녀들에게 꼭 가르쳐야할 중요한 신앙 중 하나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 가운데 빛을 발하며,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모든 가정과 교회위에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구분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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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경호
2012-04-20

과학의 날 특별 기고 창조, 그 이후


      매년 4월이면 과학의 날을 맞게 된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이기(利器)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4월이 과학의 달이고 4월 21일이 과학의 날이란 것을 무심코 지나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에게 과학의 날은 남다른 의미가 있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우리나라 과학의 메카라고 일컫는 대덕연구단지의 한 연구소에 몸 담아 오면서 수많은 과학의 날을 맞고 또 보내왔다. 사실, 세계 1위의 조선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 그것도 과학기술의 중심에 있는 대덕연구단지 선박연구소에서 일한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내가 연구하고 있는 과학기술과 창조주 하나님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원론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나의 가치관을 바꾼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1993년 한국창조과학회에서 '노아방주에 대한 안전성평가'라는 프로젝트를 연구소에 의뢰하였으며, 나도 이 프로젝트의 연구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구는 세계 최고의 조선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 그것도 세계적인 실험시설을 갖추고 국제공인 능력을 갖춘 연구소를 통해 현대 조선공학적 관점(선박의 구조적 안전성, 복원 안전성, 내항 성능)에서 노아 방주에 대해 연구하고, 실제 모델을 만들어 실험한 세계 최초의 연구로서 그 결과가 언론뿐 아니라 세계 국제 학술대회에 발표되어 그 우수성을 평가 받은 놀라운 연구였다. 이 연구는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공부하고 연구해 온 과학기술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이 선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기술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화론은 과학이란 탈을 쓰고 우리를 유물론적 가치관과 물질 만능주의적 가치관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님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4월 들어 한국창조과학회 교육원에서는 희망하는 많은 교회를 대상으로 창조과학 기본과정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 중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창조과학 기본과정의 주제가 '과학을 품은 창조'이다. 물론 유명했던 드라마의 제목을 패러디 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과학을 품고 있다. 과학기술은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조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Fact)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과학기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창조의 증거를 찾고, 우리의 평생의 삶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내 가치관과 정체성이 회복되는 변화가 요구된다. 더 나아가 세상의 패러다임(Paradigm)을 변화시킬 수 있다. 패러다임은 우리의 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창조! 그 이후.. 세상의 패러다임은 진화론이라는 너무나도 견고한 안경이 씌워진 채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피조세계를 진화론이라는 올무에 묶어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있다. 과학기술은 하나님과 멀어진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다.

나는 '프로테스탄트(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라는 단어를 좋아 한다. 중세 종교개혁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패러다임을 바꾼 신실한 크리스챤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지배해 오던 시대에 지동설의 주장을 통해 우주에 대한 관점을 바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또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등은 불변의 진리로 알고 있던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과학자들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세상을 바꾼다. 창조과학이 정체성 회복의 도구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진화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 그 이후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진화론의 견고한 성을 누가 바꿀 것인가? 21세기 젊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주역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운동에너지(E=1/2mv2)와 위치에너지(E=mgh)가 있다. 두 에너지 모두 질량(m)에 비례하지만, 운동에너지는 움직이는 속도(v)의 제곱에 비례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화려한 움직임이 있고 액티브한 운동에너지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치에너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너무나 정적이다. 물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높이, h)에 따라 에너지가 결정된다. 그래서 위치에너지는 영어로 포텐셜(Potential, 잠재적인)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물체가 어느 위치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위치에너지를 좋아한다. 그렇게 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정확한 위치에 있으며, 거기서 떨어져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창조과학은 화려한 운동에너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충격(Holy Impact)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항상 가슴이 뛴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과학기술의 최 일선에 서 있다는 것 때문에... 또한 10년차 교수로서 이후 하나님의 나라의 무한 가능성을 가진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창조, 그 이후! 과학의 날을 맞아 너무나 과학적으로 설계된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의 발견과 우리 젊은이들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회복을 기대해 본다.

창조의 에너지를 머금은 연두색 새순과 꽃들이 만발한 4월의 용현동 캠퍼스에서...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사 33:6)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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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김정훈
2012-03-30

지혜와 순종, 그리고 생명


      잠언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의로운 길을 가는 자, 부지런한 자, 겸손한 자”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단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 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순종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잠언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씩 따라가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2:6),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얻을 수 있고 (9:10), 그것을 얻게 되는 자들에게 지혜는 생명나무가 된다 (3:18).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하며, 결국 ‘순종’하는 자라야 ‘생명나무’를 얻게 된다. 아담은 이에 대하여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다. 결국,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이는 곧 순종하는 자이며, 생명나무를 얻게 되는 자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계속해서 지혜가 으뜸가는 것이고 (4:7)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그것과 비교될 수 없다고 (4:11) 말하고 있다.

그러면 지식은 지혜와 어떤 관계일까?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로 말미암아 입술에 지식을 더하게 된다 (잠언 1:5, 8:12, 10:14, 16:23).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함을 얻게 되고 (16:21), 그의 귀는 지식을 구하게 된다 (18:15).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지식도 얻거나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 즉, 지혜의 시작을 이루는 것 (9:10) - 이 결국은 지식의 시작이 된다고도 또한 말할 수 있게 된다 (1:7).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지혜로운 자가 되면,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식을 얻게 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여기서 흔히 오해 하듯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명철을 얻어 점차적으로 지혜에 이르게 됨이 아님을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꺼이 순종하기 원하는 그 지혜가 있으면 지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며,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있어 유용한 지식들조차도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더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가 지식을 먼저 갖게 되더라도, 또 거기서 더 나아가 수행이나 명상이나 선한 행위를 통하여 어떤 명철 (깨달음)을 얻게 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지혜로 이어질 수는 결단코 없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지혜 - 더 나아가 생명나무 - 를 얻는다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바 즉,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자신이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5-11 참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다.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우리가 진정 지혜롭다 칭함을 듣는 것은 순종을 이룰 때인데, 그때 지혜는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를 얻지 못할 때, 우리가 말씀에 순종을 놓칠 때, 생명은 파괴되고 죽어 간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는 오직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생명을 같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4월 1일 ‘생명의 날’을 맞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축복한다.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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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5015|4227

미디어위원회
2012-02-11

복음의 기초 - 창세기

박창성 


      가끔 어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 때 ”참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감탄하거나, 물질과 음식이 풍요로운 것을 보고 ”여기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관찰하고 하는 말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발생한 해일로 희생당한 사람들과 파괴된 건물들을 보면서, 혹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거나, 비행기 테러로 수천 명이 희생당한 미국의 세계무역센타가 붕괴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세상”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니고 지진, 홍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와 분쟁, 질병, 고통, 죽음, 죄악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전도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흔히 이렇게 항변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단 말이요?” 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 위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현재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의 상태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질병과 재앙들을 이 세상에 인간과 함께 만들어 넣으시고 창조를 마치신 후 ”심히 좋다”(창1:31)라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을 위해 죽음과 고통, 등의 문제가 전혀 없는 완전한 세상, 즉 낙원(paradise)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시작된 것은 인간의 죄(sin)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상세히 기록된 바와 같이 인간이 우리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이성적인 결정에 의하여 하나님을 따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공의(Justice)의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실 수 없기 때문에 심판해야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땅은 저주를 받게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만큼 가까웠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과, 원래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었으나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탄의 공격을 받으면서 죄악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인간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1-22)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서 처음에는 완전하였으나, 현재는 저주받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범죄와 타락,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는 복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진화론에 의해서 복음의 기초인 창세기의 사실여부가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말해야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은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 무생물로부터 간단한 단세포 생물을 거쳐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쳐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진화론 교육으로 세뇌되어있는 현대인들은 아담과 하와를 그들의 조상으로 여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물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좀더 오래, 좀더 재미있게 잘 살아보려는 데에만 골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내용을 사실로 믿어야만하고,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가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박창성
2012-02-08

하나님의 존재


* 하나님은 정말 존재합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성경 이외의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이 의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알고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현재 우리는 진화론 교육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상세히 알려 주셨을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직접 오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9)

이와 같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14:1)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일상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하나님의 존재가 전혀 의심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없는 분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냥 믿으면 돼”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분들을 위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경 이외의 객관적인 증거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가능성이 성경 말씀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로마서1:19-2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자연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을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라고 하는데, 우리 주위를 조금만 유심히 관찰해 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공예품을 감상할 때, 비록 제작 과정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만든 기능공의 존재와 그의 솜씨를 깨달을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면 가장 대표적인 객관적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연법칙(natural law) 입니다.

우선 누구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자연법칙으로 인과(因果)의 법칙(principle of Cause-and-Effect)이 있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으며, 원인은 항상 결과보다 크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가 누군가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존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원인 없이 컴퓨터가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침팬지가 만들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침팬지는 컴퓨터를 만들 만한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컴퓨터가 존재하려면 컴퓨터의 내용을 다 알고그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과의 법칙을 우주에 적용한다면,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알고(全知),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으며(全能), 모든 곳에 존재하는(全在) 최초의 원인(原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적(知的)인 존재가 바로 성경에 계시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연법칙 중에 열역학 법칙(Laws of Thermodynamic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1법칙은 우주 안에 있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한 양은 언제나 일정하다는 내용으로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과 에너지는 형태만 바뀔 뿐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주 안에 있는 물질과 에너지는 처음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원인(原因)없이 그냥 존재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없다면, 그것은 곧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무(無)의 상태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창조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주 안에 있는 물질과 에너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적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살펴보면, 이미 설계되어 있는 장치(programmed mechanism)나 지적(知的)인 외부의 작용이 없는 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수리를 하지 않는 한, 건물은 점점 낡아져서 분해되어 흩어지고 맙니다. 또, 우리가 한번 사용한 에너지는 우주 공간으로 흩어져서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열은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되고, 결국 우주의 모든 부분이 같은 온도가 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으로 비교할 수 있고, 시계의 태엽이 풀리고 있는 상태와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태엽이 풀리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태엽을 감아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태엽은 스스로 자신을 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서 지금보다 질서 있는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는 무질서한 상태로 변할 뿐, 스스로 질서 있는 상태로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은 우주가 폭발한 후, 무질서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질서 있는 상태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대폭발설과 진화론이 사실과 다른 잘못된 이론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창세기 1:31) 완전한 상태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자연법칙들을 종합해 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주만물을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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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류승원
2012-01-12

창조과학 도서를 통한 창조주 찬송을 소망하며


      2012년 새해를 맞이하여 도서출판 창조과학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회원님과 동역자님들과 그의 가정과 사역 가운데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회원님께서 본회 출판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는 사역에 헌신하여 주셨습니다. 그 헌신 가운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기도와 많은 물질의 후원이 있었음을 남겨진 자료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역의 열매로 이제는 많은 창조과학 도서와 영상물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고로 만드신 창조과학 도서들을 통하여 지금도 창조신앙이 회복되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창조과학 문서사역과 사역자들을 통하여 전파되고 있는 창조 진리는 진화론으로 어둠에 묻혀진 땅을 회복하며, 온 열방을 향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는 생명수의 근원이 되어 있습니다.

지난 해 8월 한국창조과학회는 도서출판법인을 설립하고 업무를 개시하였습니다. 도서출판 창조과학회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보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IT 환경의 변화는 신세대들의 삶의 모습과 지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신세대들은 비주얼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융합의 세대입니다. 신세대들의 활동공간은 국경을 넘어 온 열방을 하나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이제 문서사역도 더욱 시대에 맞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세들과의 접촉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도서에 비주얼이 있고, 융합이 있고, 그리고 공간을 뛰어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문서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진리는 문서로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더라도 진리는 문서로 기록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진화론으로부터 과학책을 도로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는 과학도서가 돌아와야겠습니다. 이제 창조과학 도서와 출판물은 진리를 전하는 도구로써 더욱 귀하게 자리매김 되도록 정성을 다하여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서출판 창조과학회는 복음과 창조의 진리를 문서로 남기는 일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창조과학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일 가운데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밀레니엄에 해당되는 분량의 도서를 공급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밀레니엄 독자들이 인간과 만물의 기원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갖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넓힐 뿐아니라 창조신앙이 깊어지는 데에서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회원님들의 아낌없는 기도와 헌신으로 도서출판 사역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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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권영헌
2012-01-11

창조의 진리가 숨쉬는 <창조>지가 되기를 소망하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천지만물을 뜻대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지난해까지 너무나 헌신적으로 정병갑 교수님께서 창조지 편집장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그 책임을 정말 부족한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창조지는 창조과학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함으로부터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을 소개하는 일들을 포함하는 일까지 지금까지 많은 역할들을 잘 감당해왔습니다. 이렇게 귀한 역할을 잘 이루어냈던 창조지입니다. 이 창조지를 더욱 그 본분에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제가 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조지를 통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는데 도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지를 잘 만드는 것 - 그것이 목적이고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창조지는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가리키는, 하나님께 촛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본분에 충실하는 것이 저를 비롯한 편집부에서 담당해야할 일이 아닌가합니다.

이 일은 저희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역하시는 여러분들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기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그럴듯함을 분별하는 명철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함을 배우는 기쁨도 필요합니다.

천지만물을 그 분 뜻대로 지으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이 일을 우리를 위해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이웃을 우리 곁에 두셨습니다. 이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사랑으로 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 일에 창조지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랑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잘 준비되려 합니다.

새해에도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와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1월
창조지 편집장
권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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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김홍석
2012-01-10

2012 성경위원회가 신년을 맞아 드리는 말씀


     할렐루야!  한국창조과학회 모든 회원님들께 올 한해도 하나님의 평강을 빕니다.

우리는 올해도 여전히 과학과 인간이성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인본주의 가치관으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새해 들어 창세기 1장의 빛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변을 정리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조 6일 간의 활동 가운데 지구와 태양을 함께 만드시지 않고 태양은 제4일이 되어서야 만드신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를 함께 만드시고 태양으로부터 빛이 나와서 지구를 비추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순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근 40년 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먹고 사는 일이 가능한 근거는 땅에 곡식을 심고 거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해결된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신 8:3). 땅에 곡식을 심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질서(자연법칙, 과학)를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빛과 태양의 창조 순서에도 분명 의미와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양이 만들어진 제4일 이전의 빛과 태양빛에 대하여 ”어떻게 태양이 없이 지구에 빛이 비추어져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수 있었는가?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의 빛과 태양이 만들어진 이후 지구를 비추는 빛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빛과 태양의 순서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의 교훈을 찾아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은 빛이 존재하게 된 것이 태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이 있게 된 것은 태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창 1:3). 그렇습니다. 만유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은 만유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이르시니 그렇게 되었다”(창세기 1장 3, 6, 9, 11, 14, 20, 24, 26, 2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그대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과학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초과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도,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부활도, 우리의 부활의 소망도 모두 과학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기본적인 질서로서 자연법칙(올바른 과학)이 존재하며 동시에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 일어나는 초과학적 현상들이 공존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자연법칙을 초월한 7가지 기적의 사건을 얼개로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여주고 그것을 위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주의를 포함한 인본주의는 성경을 과학의 틀, 이성적 틀로 바라보고 해석하려고 하며 초과학적, 초이성적인 사건 기록들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상징화 시키고, 메세지를 담은 우화처럼 바라보려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와 의도가 왜곡되는 현상들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창조과학회는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넘어선 초과학적, 초이성적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학을 사용하여 탐구하고 전하는 활동을 하며,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경위원회는 이를 위해 여러분들과 함께 올 한해도 열심히 노력하고자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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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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