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Brian Thomas
2019-08-14

유태인들에 대한 유전자 분석은 창세기를 확증한다.

(Genetics Analysis of Jews Confirms Genesis)


      일단의 유전학자 팀은 최근 107 개의 서로 다른 인종 집단에 속하는 6529 명의 사람들의 유전체(genomes)를 분석하였다.[1]. 그들은 다양한 인종 집단들에서 아프리카인 조상의 유전적 흔적을 발견했으며, 고대 아프리카인과 비아프리카인과의 혼합 시기를 추정하였다. 그들의 유태인 집단에 대한 분석결과는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 역사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량의 유전 데이터들에 대한 집중적인 통계 분석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그들의 결과를 실제적인 연대와 부합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역사적 자료에 의존하였다. 그 같은 방식에 따라서 저자들이 ‘놀라운 발견’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 기록에 근거할 때 완전히 예상되던 결과였다.

하버드 의대 연구자들이 이끌고 있는 연구팀은 개인들 간의 DNA 염기서열 차이를 비교했고, 그 데이터를 가지고 몇 가지 집중된 분석을 실시하였다. 예로서, ‘3 집단 테스트(3 Population Test)’로 불리는 알고리즘으로 3개의 집단을 동시에 비교했는데, 그것은 그들 중 하나가 다른 두 개의 조상인지 아닌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온라인 저널 PLoS Genetics에 발표된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북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유전적으로 혼합되었다는 실제적 증거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지리적 거리를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러나 남부 유럽인들은 55 세대 전에 아프리카인과 어느 정도 혼합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5 세대 전은 1세대를 29년으로 가정하고 일정한 돌연변이율을 가정했을 때 약 1,600년 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2]

그러나 저자들의 모든 창의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과를 실제 역사에 고정(부합)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적 자료(근거)를 필요로 했다. 그들 자신도 이러한 결과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었다[1]. 따라서 그들은 AD ”5세기 초까지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고, 실제로 무덤의 비문들과 문학적 참고문헌들은 무역 관계가 그 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음”을[1] 제시하고 있었다.

소위 ‘분자시계’(molecular clock) 데이터들은 가능한 이차적인 역사적 자료로 항상 보정되는데, 연대와 관련된 이들의 분석 결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분자시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전도유망한 것이었으나, 곧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리고 매우 자주 화석에 진화론적 ‘연대’(dates)를 부여하는 데에 관련되어왔다.[3]

또한 PLoS 연구에서 8개 유태인 집단들 모두는 3~5%의 아프리카인 DNA 염기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그 유전 분석은 발견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 인데, 왜냐하면 세속적 역사 기록에서 각 유태인 집단들은 수백 년 동안 서로 격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의 DNA는 심지어 AD 1100년 이후 북유럽에 거주했던 사람들인 ‘아슈케나지 유태인(Ashkenazi Jews)’의 현대 후손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연구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러한 관측에 대한 한 조심스런 설명은, 많은 유태인 그룹들이 (BC 6~8세기에 일어났던 유태인들의 디아스포라 시작 이전에) 아프리카인과 섞인 한 공통 조상으로부터 후손되었다는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 

그러나 다른 결과들과는 달리, 저자들은 관련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분명히 담고 있는 한 역사적 기록(성경)과는 연관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역사적 기록이 세속적 기록이 아닌 성경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중요한 역사적 연구의 주제로서 성경은 금기(taboo)시 되어있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일까?

성경 창세기 기록(창 41:45)에 의하면,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인 요셉은 이집트 출신의 아프리카인(아스낫)과 결혼했다.[4] 민수기 1장은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후손을 포함한 요셉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둘을 합치면 다른 지파보다 후손이 많았다.[5] 민수기의 다른 곳에서 요셉의 후손들이 상속한 토지 면적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 컸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요셉의 아내인 아프리카인의 DNA가 계속된 세대를 통하여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후에 친척과 후손들도 또한 아프리카인들과 결혼했을 수 있다.

실제로 요셉 이후 몇 세대를 지나서 모세는 아프리카인 여성과 결혼했다. 민수기 12: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모세가 구스 여자(Ethiopian woman)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PLoS의 연구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인들과의 DNA 유사성을 특별히 찾고 있었지만, 성경에 어떤 유태인과 아프리카인이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상술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도 또한 유태인들과 결혼했을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모든 아프리카인들을 나일강 지역에 거주한다면 이집트인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을 포함하여 이집트 남쪽으로부터 왔다면 에티오피아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대략 BC 1706년 경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부터 BC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될 때까지[6] 계속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역시 아프리카인과 상호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 범위와 맥을 같이하여, 그 유전적 연구는 유태인 조상들과 아프리카인들이 ”1,600~3,400년 전 사이”의 넓은 기간 동안 혼합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1].

유전자 분석은 기껏해야 하나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지만, 고대의 역사적 기록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유태인 유전자 분석은, 유대 민족의 역사에 대해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삼하 7:28)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References

1. Moorjani, P. et al. 2011. The History of African Gene Flow into Southern Europeans, Levantines, and Jews. PLoS Genetics. 7 (4): e1001373.
2. More specifically, the team measured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 which may be the result of random mutation or non-random cellular DNA alterations.
3. See, for example, Thomas, B. New Study Contradicts Flower Fossil Dates. ICR News. Posted on icr.org April 9, 2010, accessed May 25, 2011. And Thomas, B. Frozen Penguin DNA Casts Doubt on DNA-Based Dates. ICR News. Posted on icr.org November 25, 2009, accessed May 25, 2011.
4. Genesis 41:45.
5. Because these sons of Joseph were each blessed with 'tribe' status on par with their uncles, their populations were counted separately. According to Numbers 1, Ephraim and Manasseh totaled 72,700 people at the time of the exodus from Egypt, and the next largest tribe was Zebulon, at 57,400. Also, each one inherited a separate land area within what is today known as Israel.
6. Dates based on Ussher's Chronology, a charted summary of which can be found at creation.com



번역 - 문흥규

링크 - http://www.icr.org/article/6188/ 

출처 - ICR News, 2011. 6. 2.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094

참고 : 4998|4966|3730|512|3936|4315|4824|585

Brian Thomas
2019-03-20

중생대 파충류 화석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Triassic Tumor Raises Creation Questions)

Brian Thomas


       독일 벨버그(Velberg) 근처에서 발굴된 2억4천만 년 전으로 주장되는 트라이아스기(Triassic) 석회암 지층의 파충류 화석에서, 희귀한 악성 골종양(bone cancer, 골암)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질병의 근원과, 궁극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독일 연구자들은 JAMA Oncology 지에 화석 생물의 대퇴골(femur)에 대한 미세 컴퓨터 단층촬영(micro-computed tomography, micro-CT) 스캔을 발표했다.[1] 그것은 내부의 확대된 부분을 보여주었고, 희귀한 골암인 골막골육종(periosteal osteosarcoma)의 특징적인 뼈의 이상 형태가 확인될 수 있었다. 이 발견을 보도하고 있는 PhysOrg(2019. 2. 8) 지에 따르면, 이 질병은 매년 약 850명의 미국 시민에서 발병되고 있지만, 화석에서는 낮은 비율로 발생한다는 것이다.[2]

2억4천만 년이라는 이 화석에 부여된 세속적 연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담과 하와가 존재하기 수억 년 전에 암(cancer)이 있었다고 결론 내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암은 창세기 1:31절의 말씀인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구절에 반하는 것이다. 골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 질병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심히 좋을 리는 만무하다. 암을 심히 좋았더라고 말하는 신이 있다면, 신뢰할 수 없는 신으로 보인다.[3]

하나님이 병든 세상을 만드셨을까? 또는 생물의 창조 시에 어떻게든 질병도 사용하셨는가?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성경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기 이전인, 원래의 창조됐던 세계는 심히 좋았다고 기록하고 있다.[4] 사실, 예수님이 주셨던 ”크고 소중한 약속들” 중 하나는,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이다.[5]

이러한 딜레마를 풀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이 파충류 화석에 부여된 장구한 진화론적 추정 연대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즉 트라이아스기 지층과 다른 지층들의 퇴적시기를 아담의 범죄 이후인 노아 홍수 시기로 보는 것이다. 사실 대홍수는 수많은 화석들의 형성과 매우 적합하다. 대격변이었던 전 지구적 홍수는 역암, 사암, 셰일, 석회암 등으로 분류되어, 대륙 넓이의 두텁게 쌓여있는 퇴적지층들과, 그 안에 들어있는 수 조개의 화석들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화석에서 암의 발견이 희귀한 것은 홍수의 시기와 적합하다. PhysOrg 지의 보도에 따르면, ”암은 화석기록에서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일부 현장 발굴자들은 암이 수억 년 전부터 생물들에 퍼져 있었는지, 심지어 발생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었다”고 지적했다.[2]

과거에 암 발생률이 낮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돌연변이는 암을 유발한다. 창세기 3장에 기술된 피조물에 대한 저주 이후에 돌연변이 발생률이 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다른 연구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암 발생률이 증가한 것을 보여주었다.[6] 이 돌연변이 시계를 거꾸로 감는다면, 홍수 이전에는 암 발생률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석에서 암의 희귀성은 성경에 기초한 예측과 일치하는 것이다.

질병은 드물었지만, 여전히 발병하고 있었다.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서 암 화석의 발견은 장구한 연대를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의 딜레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수십억 년의 진화론적 시간 틀에 동의하는 크리스천들은 암은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암을 보시고도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반면에, 이 화석 파충류의 암이 아담의 저주 이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은 수억 수천만 년 전이라는 진화론적 시간 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References
1. Haridy, Y. et al. Triassic Cancer—Osteosarcoma in a 240-Million-Year-Old Stem-Turtle. JAMA Oncology. Published online before print February 7, 2019, accessed February 8, 2019.
2. Yirka, B. Bone cancer found in 240-million-year-old stem-turtle fossil. PhysOrg. Posted on phys.org February 8, 2019, accessed February 8, 2019.
3. The God of the Bible uses evils including cancer to bring about greater good, but the bad is still bad. See Thomas, B. 2017. Cancer Research Confirms the Curse. Acts & Facts. 46 (6): 15.
4. 2 Peter 1:4.
5. Isaiah 65:17.
6. See Thomas, B. Rising Animal Cancers Point to a Dying World. 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July 21, 2009, accessed February 8, 201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11245/

출처 - ICR, 2019. 3. 5.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014

참고 : 3589|3689|6642|6283|6639|6351|3967|3628|5886|5869|5628|5627|5723|2996|2245|3046|4351|6035|2365|6145|4451|2291|5903|6657|5076|6669

Brian Thomas
2018-12-26

왜 하나님은 괴물 같은 공룡을 만드셨나요? 

(Why Would God Make Monsters?)

Brian Thomas


        달라스 지역에서 있었던 공룡 강의를 마친 후에, 어떤 부인이 아들이 물어봤던 질문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창세기의 창조가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괴물 같은 공룡을 만드셨나요? 티라노사우르스 공룡의 이빨을 보세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그런 괴물을 만드셨을까요?”


그 질문은 결함을 갖고 있다. 즉 그 질문은 하나님이 이 괴물을 만드셨다는, 단 하나의 옵션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괴물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그 질문은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가지 옵션을 빠뜨렸다.

하나님께서 괴물을 만들지 않으셨다면(이 경우에 괴물 같은 공룡),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창세기 첫 장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분명히 공룡들을 창조하셨다.[1] 분명히 공룡들은 지구상의 짐승들 사이에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공룡들을 만드셨지만, 괴물로 만드시지는 않았던 것인가?

태초에 티라노사우루스 공룡은 그들의 이빨을 과일이나 식물을 먹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괴물들을 만들지 않으셨다. 창세기 1:30절에 의하면, 원래의 동물은 식물을 먹었고, 서로 잡아먹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태초에 티라노사우루스 공룡은 그들의 이빨을 과일이나 단단한 식물을 먹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년의 질문에서 제외됐던 옵션은, 하나님이 공룡을 원래에는 보시기에 좋게 만들었지만, 창조가 끝난 후에 그 공룡을 괴물로 만든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괴물(monster)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몸체에 커다란 이빨과 같은 신체적 모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한 행동이 없다면, 커다란 생물은 커다란 이빨을 갖고 있는 친근한 자이언트가 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어떤 동물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사용하여 식물을 먹는다. 팬더곰(Panda bears)은 대나무를 먹지만, 당신은 그들의 이빨을 보았는가? 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된 18종의 악어들 중 13종이 34종의 식물들로부터 과일을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 괴물로 만드는 것은 신체적 모습이 아니다. 괴물로 만드는 것은 포악한 행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태초에는 잘 행동하도록 동물들을 창조하셨지만,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곧 포악해졌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창조물을 저주하셨다고 말씀한다.[4] 하나님이 홍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에, 그 당시의 사람과 동물들은 모두 괴물처럼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극단적인 포악함과 부패를 참지 않으셨다. 전 지구적 홍수는 공룡들을 포함하여 수십억 마리의 생물들을 파묻어 버렸다. 하나님은 괴물을 만드시지 않았다. 인류의 죄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룡에 대한 질문에 도움이 되는 참된 역사에 대한 말씀은 또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각자는 내부에 괴물을 갖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괴물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의 괴물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 죄로 인해 우리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고 말씀한다. 공룡에 대한 질문에 도움이 되는 참된 역사에 대한 말씀은 또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실된 생명의 말씀이 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1. Genesis 1:25.
2. Genesis 1:31.
3. Platt, S. G. et al. 2013. Frugivory and seed dispersal by crocodilians: an overlooked form of saurochory? Journal of Zoology. 291 (2): 87-99.
4. Genesis 3; Romans 8:20.
5. Romans 5:8.

* Mr. Thomas is Science Writer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M.S. in biotechnology from Stephen F. Austin State University. Cite this article: Brian Thomas, M.S. 2018. Why Would God Make Monsters?. Acts & Facts. 47 (1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10987

출처 - ICR, 2018. 11. 30.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963

참고 : 2245|5903|3046|2291|5031|6145|5739|4451|2202|2200|5500|4351|2996|2998|2297|6816|6328|6035|5886|5723|5336|5171|4618|4685|4463|4878|4872|4870|4868|4726|4725|4723|4718|4714|4713|4663|4599|4514|4492|4488|4480|4452|4450|4416|4414|4413|4399|4387|3249|3233|3218|3208|3166|3162|3148|3020|3022|2530|2321|2805|2688|2525|1756|1793|1790|720|721|4819|2330|5861|5852|5753|5741|5638|5628|5625|5578|5555|5514|5094|5463|5415|5402|5395|5275|5035|5034|5033|5018|5271|905|738|740|741|6102|6762|6766|6769|6774

Scot Chadwick
2018-04-30

하나님은 정말 태양보다 식물을 먼저 창조하셨나? 

(Did God Really Create Plants Before the Sun?)


요약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인 창조주간 제 3일에 식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날에 광원을 만들어 태양이 수행할 많은 역할을 하게 하셨다. 본 글은 창조주간에 일어난 일들의 순서, 하나님이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의 본질, 창조주간의 길이, 하나님이 한 주간 내내 식물의 필요를 어떻게 제공하셨는지를 탐구해 보았다.


서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명체인 식물을 창조하신 후에, 태양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하면, 태양이 존재한 후에 식물이 출현한다. 창세기 1~2 장을 읽으면, 진화론에서 제안하는 시간 틀과 양립할 수 없는 연대기가 산출된다. 오랜 지구 연대 창조론자들은 창조주간의 하루는 장구한 지질시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들은 어떻게 태양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생존할 수 있었을까? 창세기 1장의 창조 과정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 적어도 두 가지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사건의 순서와 날들(days)의 길이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창조주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창조주간의 첫째 날에, 하나님은 초기의 일시적인 광원을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3-5)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식물들을 만드셔서 땅을 덮으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세기 1:11-13).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하나님은 태양, 달, 별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세기 1:14-19).

이 역사적 기록에서, 우리는 태양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초기 빛은 태양과는 다르며, 어떻게 그 날이 하루 24시간의 규칙적인 날이 되었는지, 그리고 식물들이 이러한 조건 하에서 어떻게 번성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들을 위한 현명한 준비를 해놓으셨고, 만물은 쉼을 얻으며, 기뻐할 것이다.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첫째 날에 창조한 빛에 관한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창세기 1:3~5). 첫째, 그것은 일종의 창조된 빛이었다. 즉, 광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빛은 다음 순간에도 존재했다. 빛이신 하나님처럼(요한일서 1:5), 그 빛은 영원한 빛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빛과 함께 계셨고(다니엘 2:22),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셨다.(디모데전서 6:16). 첫째 날의 빛은 하나님 자신과는 별개의 것처럼 보인다.

둘째, 뚜렷하게 낮과 밤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빛은 어떤 위치가 있어서,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확산광이나 주변광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빛은 지구에 대해 고정되어 있어야했다.[1]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지구는 한 쪽은 빛에 노출되고, 반대쪽은 어둠에 있도록 하면서, 첫째 날부터 축을 중심으로 회전을 했음에 틀림없다.

셋째, 그 빛은 또한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면서,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적절한 열을 제공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셨고(창세기 1:7), 지표에 있는 물을 바다로 모으셨다.(9~10절). 이 빛 또는 다른 열원에서 나온 열은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기 전까지, 식물, 나무 및 기타 식생에 필요했다.

넷째, 이 초기의 일시적인 빛은 분명히 4일째의 태양으로 대체되었다.[2] 우리는 이 일시적인 물리적 실체들이 있었다가 제거됐던 몇몇 사례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나타났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준비물이었다.(출애굽기 13:21-22, 40:34-38).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만나라는 하나님의 선물도 있었다.(출애굽기 16:4,31,35).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에게로 인도했던 별도 있었다.(마태복음 2:1~10). 더욱이 태양과 달 그 자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3; 참조, 이사야 60:19, 요한계시록 22:5).

 

창조주간의 6일은 얼마의 기간이었을까?

창세기 1-2 장에서 '하루(day)'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과 연결되어 쓰인 '첫째 날(The first day)' (이하 ~째 날)은 지구의 완전한 자전, 즉 24시간의 하루(a calendar day, 달력일)를 가리킨다.(창세기 1:5).

• '밤(night)'과 대조되는 '낮(day)'은 하루에서 빛이 밝게 있었던 동안을 의미한다.(1:5, 14, 16, 18).

•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2:4)은 창조주간 전체가 이 문장에 요약되었음을 나타낸다.[3]

본문은 창조주간의 날(days)들이 평범한 날들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날들은 불확실한 오랜 시간이 아니라, 규칙적인 24시간의 하루였다. 이러한 추정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빛을 창조하신 창조의 첫째 날부터 적용된다. 그래서 셋째 날에 만드신 식물은 첫째 날부터 이미 빛이 비추었기 때문에, 태양 빛이 나타나기까지 불확실한 기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왜 하나님은 태양을 4일째에 되어서야 만드셨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록해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왜 이러한 순서를 따랐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4] 우리는 태양이 첫째 날에 창조되지 않은 두 가지 가능한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생명체가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생명체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시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계획에서, 태양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지속되기 위해서 중요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체는 태양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창세기 1장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창조의 순서에 따라, 태양과 달이 없이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빛을 손에 들고 계셨음을 말씀해주고 있다”.[5] 이것은 물론, 태양(및 다른 별들)이 먼저 존재했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진화론적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신(神)으로 여겨 생명의 창시자로 태양을 경배하는 인류의 성향을 허물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의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 절하거나 일월성신에게 절하는 것'(신명기 17:3, 참조, 4:19, 시편 121:5~6)을 금지시키셨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바벨론에게 넘기시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겔 8:16, 참조, 예레미야 8:2). 비슷한 경우로, 사람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치료를 위한 도구로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하고 있었다.(열왕기하 18:4, 민수 21:9 참조). 구원받지 못한 인류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행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로마서 1:25)


식물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식물 문제로 돌아가서, 식물은 생존을 위해서 분명히 빛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에 제공했던 몇 가지 다른 필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빛 : 하나님께서는 광합성 과정을 통해 가시광선으로부터 에너지를 만드는 식물을 창조하셨다. 식물 세포의 엽록소는 주로 청색 및 적색 파장의 가시광선을 흡수하며, 주로 녹색 파장을 반사한다. 엽록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당(수소, 탄소 및 산소 원자로 만들어진)으로 변형시킨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태양과는 별개의 광원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빛을 갖고 있었다.

적절한 온도 : 대부분의 식물은 적절한 지표면과 적절한 대기 온도를 필요로 한다. 태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일정한 거리가 주어지면, 이 온도는 주로 지구의 자전과 기울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지구의 정확한 회전으로 인해, 낮에 생성된 열은 밤의 냉기로 식혀져서, 온화한 온도가 제공된다. 또한 지구의 자전축의 기울기는 계절이 생겨나도록 하는 효과(tempering effect)를 만들어, 계절적 성장과 휴면하는 시기를 허용한다.

대기 :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에 대기를 창조하셨고, 그리하여 나중에 창조하신 식물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셨다. 대기는 살아있는 세포를 손상시키는 자외선과 다른 우주 광선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한다. 또한 대기는 질소와 이산화탄소를 포함하여, 식물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제공한다.

물 :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창 2:5-6). 식물은 물을 광합성의 한 구성 요소로서, 그리고 식물의 다른 부분에 영양분을 운반하는 매개체로 사용한다. 또한 식물은 물을 사용하여 태양열로부터 식물을 식히고, 식물의 구조를 채워, 모양을 갖게 하며, 지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의 첫 주간에 지표수와 대기 중의 수증기는 생물들이 살아가기 적합한 서식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 하나님은 둘째 날에 물과 땅을 나누셔서, 수생식물과 육상식물 모두에게 적합한 서식지를 창조하셨다. 땅은 식물의 뿌리 시스템을 위한 안정된 위치를 제공하며, 식물은 물과 바람과 같은 침식 요인으로부터 토양을 보호함으로써 혜택을 돌려준다. 땅은 또한 식물의 뿌리에 의해 수집되는 물과 질소와 같은, 식물이 필요로 하는 많은 영양소들을 보유하고 있다.

수분 매개 생물 : 식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번식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수분(pollination)을 통해 씨앗을 맺는다. 곤충과 새 같은 일반적인 수분 매개자는 필요한 식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5일째에 만들어졌다. 진화론적 시나리오에 의하면, 곤충들이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킨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비-현화식물(침엽수와 같은 나자식물)이 현화식물보다 먼저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천만 년 후에 꽃가루를 생산하는 현화식물(피자식물)이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순서와 진화론의 진화 순서가 서로 다른 또 하나의 사례이다.


결론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우리에게 우주의 첫 번째 사건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의 증언을 제공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면, 하나님이 지구상의 생물들을 위해 자신의 창조를 어떻게 지혜롭게 이루셨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창조 과정은 인간이 만들어낸 진화론 또는 오래된 지구 연대 이론들과 매우 상반됨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식물들이 계속적으로 번성할 수 있도록 하셨으며, 그의 권능으로 모든 생명체들을 붙들고 계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1:36)

반역적이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마련해주신 분도 동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각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음의 형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 죽게 하셨다. 성경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용서와 영생을 얻는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번역 - 문흥규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days-of-creation/did-god-really-create-plants-before-sun/

출처 - AiG, 2017. 9. 22.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823

참고 : 4204|6360|1790|1922|2016|2138|2638|2797|2936|2942|2982|3020|3024|3331|3589|3628|3640|3641|3654|3689|3731|3901|3932|4297|4351|4375|4380|4440|4487|4492|4540|4869|5033|5035|5084|5094|5265|5275|5381|5394|5542|5628|5627|5870|5923|5969|6044|6064|6066|6071|6107|6110|6135|6146|6152|6153|6189|6283|6351|6414|6477|6480|6491|6512|6581|6639|6642|6697|6669|6679|6806|6808|6767|5764|5249|4748|6020|4105|6608|6540|6275

임용철
2017-10-09

창세기와 21세기의 대화


창세기와 현재의 대화, 가능할까?

창세기[1]가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의 문제는 창조과학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핵심 가치 중 하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학회존립의 문제를 넘어서, 기독교의 존립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창립 이래 지금까지 창세기의 역사성을 수호하고 전파하는데 본 학회는 최선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류 신학계와 교계에서는 이 사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오히려 유신진화론을 필두로 골격가설, 날-시대 이론, 다중격변론 등 창세기의 기록을 왜곡하는 이론들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잘못된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함으로, 필자는 창조과학회의 일원으로써, 이런 분위기를 전환하는데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사실 창세기의 기록이 기독교 내에서조차 역사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분명 실제 했던 인류의 역사이며, 그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접근방식이 보다 효과적일까에 대해 고민하여 보았다. 그 결과 다음 두 가지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일반 역사가들이 어떻게 역사를 정의하는 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면 인류에게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 가운데, 어떤 사건이 역사로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또한 역사와 신화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과정은 역사가들이 내린 역사의 정의에 비추어, 지금까지 창조과학회에서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근거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창세기의 역사성에 대해 피력해온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아니면 새로운 접근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먼저 일반 역사가들이 역사의 정의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가들 사이에서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는 『역사란 무엇인가』[2]를 저술한 E. H. Carr에 따르면, 이 정의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Carr(카)는 그의 책에서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에 의한 주관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Carr에 의하면, 이 두 이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인 ‘해석’과 그의 해석에 따라 선택된 ‘역사적 사실’의 필연적인 상호작용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의 책 1장 말미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란 역사가(historian)와 그의 사실들(his 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3]

여기서 Carr가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들’이라 하지 않고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주체가 바로 역사가이며, 특정 사건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개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역사란 단순한 사실들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역사에 대한 Carr의 주장을 ‘성경’에 적용해 보자. 성경은 진정한 역사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탄생부터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적 사건(사실)들 가운데, 오직 성경의 기록 목적에 부합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주관적(절대적) 해석에 의해 선택되어 기록된 것이다.[4]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기록자이신 동시에, 인류역사에 끊임없이 개입(Carr의 말에 따르면 상호작용)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관자이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세기가 역사로 인식되기 위한 첫걸음은 그것을 기록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창조과학회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이기도 하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다음으로,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Croce(크로체, Benedetto Croce) 역시 '모든 역사는 현대사(혹은 당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했다.[5[ 이것이 말하는 의미에 대해 Carr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6]

위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역사는 마치 ‘현재’와 ‘과거’라고 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로 비유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몰랐던 점을 배우게 되며, 대화가 잘 통하고 그 내용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기능과 두 시대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의 기능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Carr가 제시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간단명료한 정의를 창세기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입해 보자. 그러면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창세기를 신화나 설화로 보는 견해는, 마치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같이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주된 이유는 현재의 주류과학인 진화론적 해석과 주장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한다거나, 혹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창세기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반면, 유신진화론 및 오랜 연대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창세기를 신화로 취급하는 입장보다 그나마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입장 역시 Carr의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를 역사로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의 주장이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진화론적 해석을 가미한 현대 과학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사실성’에 강조를 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역사란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이론이 창세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유신진화론이 문제를 야기시키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신진화론은 현재의 진화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려고만 하는 일방적인 시도를 한다. 결국, 창세기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므로,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도 역시 창세기를 역사로 보는 입장이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없다.

 

창세기가 역사인 이유 : 창조과학회의 입장

이제 점검할 사항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창조과학회의 접근방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그 접근방식을 앞서 소개한 역사에 대한 정의와 비교하는 것이다. 필자는 본 학회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 내용을 살펴보고 종합한 결과, 그 내용들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성경 안에서 찾는 것이었다. 성경은 기록자와 기록된 시대를 초월하여 놀라우리만큼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는 특징을 지닌다. 창세기의 기록은 다른 책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거나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더욱이 창세기의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것임을 강력히 지지하는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두 번째 범주는, 다양한 학문적 자료들을 통해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드러내고,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발견들이 오히려 창세기에 기록된 그대로의 창조를 지지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정리하자면, 창조과학회는 ‘성경 그 자체와 과학에 입혀진 진화론적 해석의 제거’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창세기가 역사라는 점을 강변해 왔다.[7]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 역시 창세기가 역사임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앞에서 역사란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다’는 Carr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접근방식 또한 창세기가 온전한 역사의 지위를 얻도록 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접근방식을 계속 유지한다면[8] 앞에서 지적한 유신진화론이 갖는 것과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9]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여러 이론들의 주장을 압도하거나 허물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진정한 역사의 지위를 회복하려면, 이 기록이 사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이것을 기록한 기록자의 해석과 그 의도를 파악하여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두 시대 모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창세기를 통해 대화하려는 누군가를 찾고 계시며,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창세기는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하는 그 사람에게 역사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로, 이 문제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섣불리 시도하기 어렵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창세기를 역사라고 믿는 한 성도로서 직무유기라는 죄책감에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해 본다.


창세기와 현재 사이의 대화-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우다.

서로 알지 못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마도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의 관심사가 같거나 유사하다면, 대화가 더욱 깊어지고 둘의 관계도 깊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먼저 창세기(여기서는 1장)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에는 시공간 속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장에 기록된 내용 중에는 ‘하나님’이 32차례, 다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7차례 등장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역사가의 주요 관심사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며 그 모든 과정과 결과물이 ‘좋았다(Good)’라는 것이다. 이 두 단어 중에 필자가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단어는 하나님에 비해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좋았다(Good)’[10]이다.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Good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날 지으신 결과물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결과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날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창조하실 필요 없이 단숨에 모든 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Good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하루’라는 정해진 시간과, 그 시간 안에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 모두를 포함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11] 이렇게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하루라는 시간,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결과물이 모두 합쳐진 것을 표현한 단어가 Good이라고 할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시공간 속에서 창조되지 않아 어떤 것이 없는 상태의 ‘하루’[12] 역시 Good이라는 점이다. 사실 창조의 6일 과정 대부분은 피조물 중 무언가가 빠져있는 부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루라는 시간과 그 안에 이루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창조의 6일 동안 하루하루 지나면서 전날의 부재 상태가 하나씩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전날보다 ‘더 좋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고 있는 Good의 정의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Good의 정의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Good에 대해 지금까지의 내용과 이 장의 또 다른 핵심어인 ‘하나님’으로부터, Good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보았다. Good이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내에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물’이다.[13]

개인적으로,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근거로 내린 Good에 대한 정의가 창세기와 현재 대화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하루를 살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목적하신 바가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가 실현되는 삶을 말한다. 이 하루가 21세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Good의 정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던 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묵상하여 보길 권한다.


현재에 비추어 창세기를 배우다.

앞서 창세기 1장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고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제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대화의 시작은 역시 21세기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 단어에 대해 힌트를 드리면, Good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듯이, 세상 나라의 시작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시점부터 지금까지 세상 나라14)를 대표해온 단어로, 세상 나라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Good의 정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악(Evil)’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껍질로 갈아입듯, Evil의 사전적 의미와 발음이 완전히 바뀐 그런 단어이다. 아마 이 단어가 제시되는 순간,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의아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단어의 정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좋은(Better)’이다. 이제 왜 Better가 현재의 세상(나라)을 대표하는 단어이며, Evil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Better를 통해 어떻게 창세기를 더 깊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로 Better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Better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Better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자신, 그리고 가족의 삶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자녀들은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일 것이다. 부모세대는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조직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 Better가 되었다고 내일 Better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 대부분은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경쟁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Better는 현재를 대표하며, 생존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동시에, 겉보기에는 ‘더 좋은’의 뜻이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삶을 피폐함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Evil이다.

이제 현시대를 대표하는 Better라는 단어를 통해 창세기의 한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후(Good의 상태가 깨어진 후), 그들에게 일어난 여러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처음 나타난 변화는 자신들이 벌거벗었으며, 그 상태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7절).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8절, 10절)이 엄습했으며, 서로에 대한 원망과 책임의 전가(12절, 13절)로 관계가 깨어졌고, 해산의 고통(16절)과 수고함(17절), 그리고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쫓겨남(23절)과 죽음(19절)이었다. 이러한 변화들과 현재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으로 생긴 개인과 사회 문제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놀랄 만큼 흡사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이 변화의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존재할까? 솔직히 말하면, 이 변화 중 절반 이상이 필자의 삶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의 결과와 21세기 경쟁사회에서 Better를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오늘날 Better의 정체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Evil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창세기의 Evil이 곧 현시대의 Better인 것이다. 이 관점으로 창세기 3장을 재해석하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을 경쟁상대로 본 것이며, 그 열매를 먹는 순간,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경쟁사회에서 나타나는 불안과 고통 등, 앞에서 나열한 문제점들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끝으로, Better에 대한 정의를 내려 봄으로써 지금까지의 주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단어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Good의 정의에서 ‘하나님’ 대신 ‘내’가 들어가면 된다. Better란 ‘내가 목적한 바가[15] 내가 정한 시간 내에 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Better의 또 다른 표현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 Better를 통해 창세기 3장의 범죄 사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Good과 Better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역사를 공부한 전공자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닌, 평신도로 글을 쓰다 보니, 역사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인용에 의존해 창세기를 역사로 바라보고자 하는 필자의 시도에 여러 실수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Carr가 말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는 이런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는 철퇴를 내릴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이 글을 써 내려 가는 내내 필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고 온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필자 스스로가 21세기를 사는 범죄한 아담임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성도의 목적이 경쟁에서 이겨 내가 보기에 좋은 하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그 하루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를 사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주
1. 여기서의 창세기는 주로 논란이 되는 1장부터 11장까지를 지칭함.
2.『역사란 무엇인가』 Edward Hallett Carr, 까치.
3. 같은 책, 46쪽.
4. 참고로 E. H. Carr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물론 초월자의 존재나 그의 역사개입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책, 71쪽과 105쪽 참고)
5. 같은 책, 34쪽.
6. 같은 책, 96쪽.
7. 이 주장은 학회 전체의 입장이 아닌, 필자 개인의 소견임을 독자 여러분께 밝힌다.
8. 기존의 시도에 오류가 있다거나 잘못이 있어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밝혀둔다.
9. 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거나 두 시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점.
10. 글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 ‘좋았다’라는 표현 보다는 ‘Good’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Good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후 언급될 ‘Better’와 ‘Evil’ 등의 단어도 같은 이유에서 영문으로 표기하였다.
11. 이미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2. 예를 들어, 첫째 날에는 동물이나 식물, 해와 달과 별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
13. 이 내용 역시 학계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4. 여기서의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분의 통치 대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5. 예를 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출처 - 창조188호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99

참고 : 1412|1413|1536|1756|1790|2245|2515|2525|2530|2688|2746|2797|2996|3020|3022|3055|3148|3162|3166|3208|3218|3233|3249|3633|3641|3872|3945|4043|4071|4100|4148|4237|4480|4329|4376|4383|4385|4387|4390|4391|4394|4399|4413|4414|4416|4450|4451|4452|4463|4488|4492|4599|4578|4514|4868|4726|4725|4723|4718|4714|4713|4819|4878|4872|5018|5034|5094|5275|5395|5415|5402|5463|5514|5638|5741|5852|5861|5969|5985|6017|6066|6071|6089|6179|6205|6235|6351|6387|6401|6432|6446|6458|6529|6533|6639|6679

Jonathan Sarfati
2017-10-04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칼뱅은 말했다. 

(Calvin said : Genesis means what it says)


      자칭 복음주의적이라는 어떤 크리스천들은 창조론자들이 창세기를 순수하게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literalistic view)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론(creationism)은 20세기의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보다 진리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창세기를 쓰여진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는 모세(출 20:8-11), 바울(롬 5:12, 고전 15:21-22,45, 딤전 2:13-14), 베드로(벧후 3:3-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마 19:3-6, 막 10:6-9, 눅 17:26-27)의 견해였다. 그것은 또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실한 방어자였던 바실 대주교(Basil the Great)를 포함하여 수많은 교부(Church Fathers)들의 견해이기도 했다. (Genesis means what it says: Basil (AD329–379)을 보라) [1].


성경의 권위로 되돌아 간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도 창세기에 대한 쓰여진 그대로의 문자적 견해를 수용했다. 이러한 견해는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가지고 있었다. (What was Martin Luther’s stand on Creation/Evolution?을 보라).[2]. (아래 글 참조).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람은 프랑스의 법률가요 신학자였던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이었다. 그는 6,000여명의 개신교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칼뱅(칼빈)은 1559년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제네바 대학(University of Geneva)을 설립했고, 많은 외국의 학자들을 영입했다.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59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선포했다. 그는 또한 창세기를 포함하여 성경 각 권들의 노련한 주석가이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은 많은 신앙고백, 교리문답서, 설교자들, 현대 기독교부흥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청교도단(Pilgrim Fathers)에 의해 미국으로 이전되었다.[3].

칼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고 있었다 :

지구의 나이는 젊다 :

”그들은 우주가 창조된 지 불과 5,000년이 조금 더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4].

하나님은 6일 간의 연속적인 정상적인 날(days, 24시간)들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 

”여기에서 우주가 한 순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분명하게 논박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6일(six days) 동안에 완벽하게 이루셨던 일을 모세가 단지 명령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6일로 배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약적인 억지 이론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능력으로 수용케 할 목적으로 그가 친히 6일이라는 기간을 취했다고 결론을 내리자”.[5]. ”나는 이 세계가 형성되는 데에 6일이 걸렸다고 위에서 말했다. 한 순간이 천 년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묵상하는 데에 우리를 참여시키셨는지도 모른다”[6].

▶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인 첫째 날부터 밤과 낮의 주기가 이루어졌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창세기 1:3절 말씀의 주석에서) :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의 바로 그 명령에 의해, 해와 달이 없이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빛을 그의 장중에 가지고 계셨다. 더욱이 문맥으로 보아 빛이 그렇게 창조되어 어둠과 교대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밤과 낮의 순서가 계속 교대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7].

▶ 해와 달과 별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고 (지구가 창조된 후), 지구에 빛의 분배자로서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는 창세기 1:15절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은 먼저 빛을 만드셨다. 그러나 지금의 태양이 낮 동안 빛의 분배자가 되고, 달과 별들은 밤하늘을 비추어야한다는 새로운 자연 질서를 만드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를 수행해야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그것들에게 그런 임무를 할당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전에 창조하셨던 빛과 교대하여 온 지구에 빛을 발하는 특정한 도구(태양)를 임명하셨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일한 차이는 이것이다. 즉 빛이 먼저 비추었으나, 지금은 육안으로 보이는 물체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8]. (또한 아래 관련자료 링크 2번의 글, ”태양이 4일째까지 창조되지 않았다면,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 그대로의 하루인가?”를 보라).

최초의 창조는 어떠한 악도 없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창세기 1:31절의 주석에서) : 

”각각의 창조 날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칭찬(”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만 주어졌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가 모든 부분에서 완성되고, 그리고 마치 최후의 손질처럼 마무리를 다 마치시고 난 후에, 하나님은 완벽하게 좋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조화성은 거기다가 아무것도 더 추가할 수 없는 최상의 완성품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9].

지구상의 고통(suffering)은 죄의 결과이다. (창세기 3:19절에 대한 주석에서)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나쁜 것들이 생겨났을 지라도, 그것들은 땅의 자연적 열매들이 아니라, 죄로부터 기원한 타락의 열매들임을 알 수 있다.”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은 죄의 결과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에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영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그의 육체는 영혼과 분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는 바울의 선포에서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죽음은 죄로 인해 부과되었다···· 진실로 첫 번째 사람(아담)이 바르게 서 있었더라면, 더 나은 삶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분리, 쇠퇴, 어떤 종류의 파괴, 격렬한 변화 등은 없었을 것이다.”[10].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5장의 주석에서) :

”·····(모세는) 우리의 최초의 조상(아담과 하와)과 여타 인간들을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아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11].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규모였다. (대홍수와 방주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 중에 한 작은 부분으로 언급하면서) :

”그리고 그 강수는 40일간 지속되었다. 모세는 온 세계가 다 물에 잠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사실을 자세히 강조하였다.”[12].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창세기는 쓰여진 그대로 명백하고 평이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대한 외부적 사상과 이야기들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점진론적 창조론자’인 패틀 펀(Pattle Pun)이 솔직하게 시인함으로써 보여주었다 :

”창세기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이해는 과학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성경해석학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6 일(24시간으로 된 하루)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은 제 6일째에 창조되었으며, 죽음과 혼돈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화석들은(창조론자들은 ‘대부분’의 화석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 수세기 동안 지속된 산발적인 격변들도 일부 화석들을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가족과 방주에 함께한 동물들만 살아남았던 격변적 대홍수의 결과였다는 것이 분명하다.”[13]. 

칼뱅 자신은 그런 모든 타협들에 반대했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대학들은(심지어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드에 있는 칼뱅대학 같이 칼뱅의 이름을 딴 대학들을 포함하여) 반창조론, 유신진화론/오래된 연대 사상들의 온실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오류투성이의 추측과 추정을 신뢰하기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References
1. Batten, D., Genesis means what it says: Basil (AD 329–379), Creation 16(4):23, 1994.
2. Citing Martin Luther, in Jaroslav Pelikan, editor, ‘Luther’s Works,’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1:3,6, Concordia, St. Louis, MO, USA, 1958.
3. Packer, J.I., John Calvin and Reformed Europe; in: Great Lead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 Woodbridge, J.D., Moody Press, Chicago, IL, USA, pp. 206–215, 1988.
4.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925, ed. John T. McNeill, Westminster Press, Philadelphia, PA, USA, 1960.
5. Calvin, J., Genesis, 1554; Banner of Truth, Edinburgh, UK, 1984, p. 78.
6. Calvin, Genesis, p. 105.
7. Ref. 5, pp. 76–77.
8. Calvin, Genesis, p. 83.
9. Calvin, Genesis, p. 100.
10. Calvin, Genesis, p. 180.
11. Calvin, Genesis, p. 227.
12. Calvin, Genesis, p. 272.
13. Pun, P.P.T., Journal of the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39:14, 1987; emphasis added.


창조와 진화에 대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견해는 무엇이었는가?

성경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창조를 믿고 있었고, 이 세계는 매우 젊음을 가르쳤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

”우리는 모세의 기록으로부터 이 세계는 6,0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루터는 모세가 보통의 문자 그대로의 언어로 창조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

”그(모세)는 꾸미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즉, 우리가 관례적으로 모세가 문자적 의미로 말했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그는 날(day)과 저녁(evening)이라는 단어를 비유나 은유 없이 사용했다. 즉, 이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은 기록된 말씀 그대로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학생으로 남아있어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도록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Reference
Martin Luther in Jaroslav Peliken, editor, 'Luther's Works,'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Vol. 1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8), pp. 3, 6.

 

*참조 :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736/

Is Genesis poetry / 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50/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2/i4/calvin.asp

출처 - Creation 22(4):44–45, September 2000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375

참고 : 2797|1790|3654|4374|3932|2638|4204|2982|3640|2016|1922|3020|3689|3641|3628|2942|3249|3242|3931|3055|2330|3024|4140|3186|4487|4869|5210|5542|5923|5381|6135|6414|6107|6360|5870|6283|6376|6642|6639|6614

김홍석
2017-10-02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I. 서론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근저에는 크게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11장에 나타나는 내용이 신화적이며 근동의 설화들과 유사하므로, 이 내용은 고대 근동의 설화들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창세기 기록이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성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II.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의 설화들

먼저 창세기 1~11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유사한 설화들에 대하여 살펴보자.[1] 창세기 1~9장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수메르 홍수설화에서 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의 윤곽을 서술하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 6~9장의 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들은 고대 근동에서 그 시대 지식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나 근동의 설화들이나 모두 다음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한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이 존재하며, 그들은 인격적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인간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보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사람이 진흙의 혼합과 죽은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애굽의 문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사이를 분리하는 행위로서의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고대 근동의 신학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주제의 유사성을 넘어 이면 즉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창세기”는 존재에 관하여 시종 긍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본다. 사물들은 점점 더 좋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던 당시에 완전한 것이었으나,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생물들 외에는 모두 물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점점 더 나빠졌다. 이는 수메르 설화의 취지와 다르다.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인본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바벨론사람들과 가나안사람들은 신들이 여자들과 성적인 결합을 맺는 것은 풍요의 의식으로서 제의적 매음과 결혼 의식을 행하여 토양의 비옥함과 국가번영을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창세기 6:1~8은 그런 관습들을 절대적인 공포로 여긴다. 오히려 그런 관습들은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물 심판을 초래한 행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홍수가 사람들의 소란과 땅의 과잉 인구에 화가 난 신들에 의하여 보내졌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노아는 우연히도 홍수를 지지하지 않는 신을 경배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홍수가 시작되자 그것은 신들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들은 홍수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신인 엔릴이 희생제사에 나타나서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음에 놀란다. 홍수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인구증가를 억제할 대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는 신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어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에 비하여 창세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특히 해, 달, 별들은 고대 근동의 신관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들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였다. 반면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창세기 1~11장은 다신론에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정의, 전능하심, 사람을 돌보심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사람의 지혜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창세기는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족장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근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기사는 우리가 창세기 1~11장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좀 더 부연하면, 창세기 3~11장은 사람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창세기 1~2장은 세계의 원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족장들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구속이라는 목표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고대 근동의 설화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창세로부터 홍수까지의 주제와 일부 피상적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창세기 자체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

다음으로, 창세기 기록들 가운데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된다는 이유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제시해온 주장들을 분석하여보자. 다만, 시간에 대한 문제는 지면 관계상, 그리고 주제 자체가 다른 여러 주제에 비하여 살펴볼 내용이 너무 많으므로 차후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2]

첫째, 창세기 1:14~18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구절들의 이해에 있어서 궁창이 오늘날의 대기권이라면, 궁창에는 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창세기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역사성을 가진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3] 그저 막연한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궁창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들도 하늘의 궁창에 와 닿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와 같은 어린 시절이 없이 갑자기 성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이 우주의 천체들도 성숙하고 그 빛들이 넷째 날에 이미 지구의 땅을 비추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창세기 1장에서 식물과 사람의 창조순서가 창세기 2장에서는 바뀌어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통해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문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2:5에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이 투여되어 경작되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농작물의 부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 경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선악과사건 이전으로, 땅에 식물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반면 농작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왜 이렇게 농사를 힘들게 지어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선악과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창세기 2장의 순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선악과 사건 이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식물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다. 식물들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히. ‘네페쉬 하야’)이 아니라, 그저 환경과 음식의 역할을 하는 배경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경우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사건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것과 식물을 먹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상은 사람이었다.

넷째, 창세기 3:14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뱀은 흙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런 근거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9:3에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아방주에 태워졌던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방주에서 육식하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그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노아홍수 이전까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뱀의 경우 노아홍수 이전까지 흙을 먹고 살다가, 노아홍수 이후에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면서 사람과 동물들의 육식이 허용되고, 이때 뱀도 먹는 것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년왕국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사야 65:25을 주목하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구절은 동물들의 육식이 사라지고,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을 당시까지 성경에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골격가설적인 서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창세기의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후에 800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이후 807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이름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후에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는 창세기 4:3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서술을 통하여, 그들이 장성했으며,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창 4:25). 이러한 기록과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담과 셋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도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이 태어난 것이 아담 130세였으니까 가인의 살인사건은 아담 129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가인이 장남이라면 성년으로 창조된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나이가 1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3살에 아벨을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벨이 죽임을 당할 당시 나이는 126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벨에게는 이미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벨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살인자를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와 기적과 하늘의 일들과 땅의 일들의 연대성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바이다. 창세기 6:2의 하나님의 아들들(히. ‘베네 하엘로힘’)은 욥기 1:6과 2:1, 38:7에 동일한 단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4] 유다서 6~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처럼 동일한 행동으로 음란하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벧후 2:2~7의 내용도 호색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호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대등하게 불경건의 예시로 들고 있다. 천사가 육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18:1~8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대접한 젖과 우유와 송아지요리를 먹었음이나, 이에 유사한 모습이 창세기 19:3-15에서도 언급됨으로부터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32:24-30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네피림(창 6:4)은 노아홍수 때 모두 사라졌어야 함에도, 민수기 13:33에서 네피림의 후손이 등장하기 때문에[5], 창세기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거인, 장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네필’이라는 일반명사의 남성복수형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33의 네피림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창세기 7:2~3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실어서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7:15에서는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창세기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일곱 수 암’, 부정한 짐승은 ‘둘 수 암’, 공중의 새는 ‘일곱 일곱 수 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7쌍씩, 1쌍씩, 7쌍씩 방주에 태워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7:14~15절은 노아가 그들을 선별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로 보내셨고, 노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 7:16에서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물들은 노아에 의해 선별되어 실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아는 심지어 다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아는 모든 동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방주로 들어감과 그것들이 암수였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7:15은 어떤 동물들이 모두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방주에 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7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1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방주에 타는 모습은 모두 둘씩 암수가 짝을 지어서 탔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내에서 방주에 탄 동물들의 수에 대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다.

 

IV. 인류 지성과의 마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성을 가진 기록으로 보지 않고, 교훈을 담고 있다는 골격가설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물들이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피조된 개인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유인원에서 발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개발시키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의 원인(ape-man)이 바로 아담부터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른 생물진화의 순서나 생물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창세기 1장의 하루의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의 기록이 진화론과 다르므로, 창세기를 골격가설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창조(창 2:7), 하와의 창조(창 2:22),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창1:26~27; 5:1~2), 또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선악과사건, 원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 등 창조에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진화가설(evolutionary theory)이라는 이 시대의 하나의 주장이다. 생물들이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 화석들의 증거를 비롯하여, 환경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미 유전자 속에 그 적응능력이 존재하고 있다가 발현된 것이라는 내용과,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많은 증거들은 진화론을 반박한다. 창세기에는 17번의 ‘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기 종류대로”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시에 10번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7번은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기 종류대로” 방주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별된 기록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미주
1.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64-73
2. 김홍석, '창세기의 창조, 아담, 셈 톨레도트에 나타난 시간 연구”, 학위논문(2014)
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마오르’를 '광명체”로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개역성경은 '광명”으로 오히려 잘 번역되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영어역본들도 'lights'로 번역하고 있음.
4.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290-293 참조.
5. 민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처 - 창조 188호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97

참고 : 1790|1922|2016|2138|2638|2797|2936|2942|2982|3020|3024|3331|3589|3628|3640|3641|3654|3689|3731|3901|3932|4204|4297|4351|4375|4380|4440|4487|4492|4540|4869|5033|5035|5084|5094|5265|5275|5381|5394|5542|5628|5627|5870|5923|5969|6044|6064|6066|6071|6107|6110|6135|6146|6152|6153|6189|6283|6351|6360|6414|6477|6480|6491|6512|6581|6639|6642|4723|4718|4714|4713|4819|4878|4872|5018|5034|5395|5415|5402|5463|5514|5638|5741|5852|5861|5985|6017|6089|6179|6205|6235|6387|6401|6432|6446|6458|6529|6533|6679

Andy Mcintosh
2017-08-22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창조와 십자가 

: 유신진화론자들의 죽음에 대한 왜곡 

(What Is the Scriptural Understanding of Death? Creation and the Cross)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견해(유신진화론)는 점차 우리 복음주의 교회내로 스며들고 있다. AiG의 연사 중 테리 몬테슨(Terry Mortenson) 박사와 나다니엘 진슨(Nathaniel Jeanson) 박사는 최근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신학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15년 전에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같은 논문들이 올해에는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아담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일부 논문들이 여전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심각하다.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 스토트(John Stott) 조차도 하나님이 유인원과 같은 생물체를 사용하셔서, 그중 하나를 택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적 존재(아담)가 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펄젼(Spurgeon)은 당시 ‘내리막길 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특히 창세기의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창세기가 왜 신학적으로 중요한가?를 물었는데, 창세기는 죽음(death)이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지,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내용에서 우리는 죽음이 분리(separation)를 포함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죽었다.

창조에 대한 타락과 저주의 영향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사람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었다. 이전까지 사람은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죽음(사망)에 대한 기원이 확실히 영적이란 것은 로마서 6:23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히브리서 2:14절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것이다(dying, thou shalt die)”를 의미한다. 창세기 저자의 관점에서 창세기 2:17절은 두 가지 사망을 가리키고 있다.(이것은 나중에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분명해진다.) 히브리어 단어의 반복 사용은 종종 강조를 하기위해서 사용된다.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에 창세기 3: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의 끔찍한 사건을 읽을 때,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보게 되는데, 바로 분리됨(separation)이다. 첫째로 영적 사망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에 죄 이전에 그들은 그분과 완전한 교통을 누렸다. (일부 사람들은 창세기 3: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담과 동행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계셨지만, 9절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확장하여 로마서 5:18절을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은 시들어버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으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와와 함께 숨으려고 애쓸 때에, 그는 이미 영적인 분리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그리고 약 9백년 후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겪게 된다.(아담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사이에 얼마의 기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타락의 즉각적인 결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즉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다룰 때, 중요한 점이 된다. 그들의 말대로 저주로 인해 아담은 육체적으로 바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유신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따라서 저주로부터 온 죽음은 오직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2:17절에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은 하나님과 즉각적인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영적 사망이 타락의 유일한 결과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는 유신진화론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세 부분을 살펴볼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가죽옷을 입히신 것의 의미

안타까움 속에 나무 잎으로 가린 것을 하나님께서 동물 가죽으로 대체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염소/양의 종류로 동물(아마도 두 마리)을 죽였을 것이다. 죽음의 첫 번째 기록은 하나님 자신이 수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다가올 구속 사역은 이미 에덴동산을 가로 질러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한 죄에 대한 저주는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땅에도 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3:17 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지옥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분리)으로 곧 바로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피의 희생제물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후,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것이 아니라, 아벨의 희생제물을 받으셨던 중요한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뱀을 저주하시지만, 이 시점에서 저주는 아담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타락과 인류에게 온 두 죽음

두 가지 죽음(영적 및 육체적)의 신학적 중요성은 성경 말미에 있는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이처럼 둘째 사망은 또한 요한계시록 20:6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또한 요한계시록 2:11절도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돌이킬 수 없는 형벌, 둘째 사망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8). 다음 섹션에서 보겠지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아버지의 진노를 경험하며, 참혹한 둘째 사망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셨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21)

성경은 끝부분에서 두 차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듯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결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12 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영적 재앙 이전까지, 육체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1~22절에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다시 요약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육체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과 로마서 5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육체의 죽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치루셨다.

죄에 대한 형벌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는, 이중 처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을 통해서, 이 두 사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처벌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총 6시간 동안 달려계셨다. 그는 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마가복음 15:25) 제 육시에서 제 구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임했다.(마태복음 27:45; 누가복음 23:44). 대부분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시고, 성경에 기록된 처음 세 번의 발언을 앞의 3시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1 참조) 이제 그리스도는 제 구시에(막 15:34) 마지막으로 네 번의 말씀을 차례로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정말 강력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22:1절을 인용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던 ”아버지”와 다르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리가 있고, 분리되어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지옥이 되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 번째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경험을 하신 것이다. 아마도 십자가의 신학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술은 이 두 구절에 있는 것 같다 :

”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린도후서 5:19)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그런 다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후에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 단어는 ”끝내다/마치다 (Complete/Done)” (의무가 이행됐거나 끝이 남)을 의미하는 법률적 용어이다.  지불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죄의 유일한 대가가 영적 사망뿐이라면, 왜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 하나님이 먼저 살고 있던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 이유가 없으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육체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9:30절에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리스어: ”그가 그의 영을 넘겨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제는 능동태이며, 수동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셨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요한복음 10:17~18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창조세계에 생명을 주신 분이 이제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부활을 모두 통제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모두가 관여하신 것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행전 17:31). 로마서 8:11 절에 따르면, 성령님께서도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림 1.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죽으셨는가? 그것은 참으로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영광의 부활은 결국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받게 될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는 육신 안에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영광스럽고 부활한 새 몸으로 말이다. 이 부패하고 썩을 몸이 변하여, 불멸하고 썩지 않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15:53).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높이와 크기와 깊이를 이해할 때, 아담의 죄 이전에 죽음을 허용하고,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사람)을 만드셨다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과 하나님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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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But my acceptance of Adam and Eve as historical is not incompatible with my belief that several forms of pre-Adamic 'hominid” may have existed for thousands of years previously. These hominids began to advance culturally. They made their cave drawings and buried their dead. It is conceivable that God created Adam out of one of them. You may call themHomo erectus. I think you may even call some of themHomo sapiens, for these are arbitrary scientific names. But Adam was the firstHomo divinus, if I may coin a phrase, the first man to whom may be given the biblical designation ‘made in the image of God.’” John R. W. Stott, Understanding the Bible: Special Edition(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43.
2. Some have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 saying of Jesus recorded inLuke 23:34might have been said toward the end of His crucifixion (because ofJohn 19:28following immediately after the record ofJohn 19:27, 'Woman, behold thy son.”). In this interpretation, Jesus would have asked the Father to forgive them just before He says, 'It is finished.” This author would not subscribe to that view because of the statement inLuke 24:34band35which describes the soldiers casting lots over Jesus’ garments and people looking at Him with some speaking to Jesus on the Cross—all suggestive of the initial three hours of light. So the cry, 'Father, forgive them,” inLuke 23:34aseems to be just prior to this (see alsoJohn 19:23–24). Whichever order one takes, the argument concerning Christ’s atonement and taking both aspects of death as the penalty for our sin does not rest on the suggested order of Figure 1.



번역 - 류지열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scriptural-understanding-of-death/

출처 - AiG, 2016. 5. 23.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69

참고 : 6642|6376|3589|3689|6283|6305|3379|5969|5870|5725|5628|6657|4452|3628|3302|3168|2638|6152|6153|6285|6146|6110|6099|3241|3244|3242|2314|1790|1922|2016|2138|2797|2936|2942|2982|3020|3024|3331|3640|3641|3654|3731|3901|3932|4204|4297|4351|4375|4380|4440|4487|4492|4540|4869|5033|5035|5084|5094|5265|5275|5381|5394|5542|5627|5923|6044|6064|6066|6071|6107|6135|6189|6351|6360|6414|6477|6480|6491|6512|6581|6639

Simon Turpin
2017-07-11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유신진화론 

: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담이 없다 하느냐? 

(How Do Some Among You Say There Is No Adam? : 1 Corinthians 15: Adam and the Gospel)


서론 : 그리스 철학, 아담을 거부함

사도 바울은 종종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반대들에 대처해야만 하는 문화 속에 자신이 속해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미래에 믿는 자들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린도전서 15:12).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그들의 문화나 세계관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고린도 도시에는 그리스 철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사색적인 철학을 사랑했으며,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고(고린도전서 1:22, 2:5) 신뢰하면서, 그들의 지혜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들의 지혜에 스스로 빠져서,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 일부는 육체와 분리된 혼의 불멸에 관한 그리스 철학으로 인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물질)가 썩는 것을 보았으므로, 불멸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그것이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을 조롱했다.(사도행전 17:32).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바울 시대의 문화에 그리스 철학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다. 다윈의 진화론에 기초한 세계관은 그 핵심이 근본적으로 그리스 세계관인 것이다.[1]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혼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거기에 철학이라는 이름 대신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물었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담이 없다 하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스식의 사고가 성경적 사고와 혼합되었기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역사적 아담(a historical Adam)을 거부하는 것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2] 유신론적 진화론자(진화적 창조론자)인 데니스 라무뤼(Denis Lamoureux)는 아담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1~7절에 관한 주석을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며, 여기에는 아담에 관한 어떤 언급도, 그의 존재 여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아담이 아니라, 예수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분의 죽으심과 육체의 부활을 연결시키지 말고, 분리시켜야 한다.”[3]

라무뤼는 사도 바울이 아담을 실재했던 사람으로 이해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담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고대의 과학관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또한 역사적 아담을 믿어야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면서, 이것을 거부하였다.[4]

부활이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실재했었다는 개념은 복음 및 복음에 근거한 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5절

기독교는 유일하게도 역사(history)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설명처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전서 15:1~5).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시고 계시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 사건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는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주장했다(로마서 5:12~16). 아담이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속죄하셨듯이(창세기 3:21)[5], 우리는 ”아담 안에”(고린도전서 15:22)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이셨다.

속죄에는 폭력과 죽음을 암시하는 피의 제사(히브리서 9:22)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과 죽음이 수억 수천만 년에 걸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의 일부분라고 말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세계관에서 이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 이전에 수백만 년 동안 동물들과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역사에 대한 가르침이 손상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단지 창세기와 아담의 초자연적 창조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까지도 훼손시키는 것이다.[6]

더욱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5절에서 아담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아담이 기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교도 문화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창조에 대한 성경적 이해(사도행전 14:15~17, 17:24~28)로부터 시작하는데, 특히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사도행전 17:26). 그리고 나서,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비추어 모든 사람이 회개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사도행전 17:30~31).


고린도전서 15:20~22절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창세기 1~3장의 기초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사건들의 역사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22)

2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죽음은 한 사람, 즉 아담을 통해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론을 사용하여, 부활의 이유를 설명한다. 2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사망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부활할 것이다.[7].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행적 언급이 너무도 가까워서, 하나는 역사적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더욱이, 아담이 신화적 인물이라면, 어떻게 신화적 인물이 그러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인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의 부활, 즉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육체적인 부활에 맞춰져 있다. 아담이 세상에 가져온 죽음이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육체적으로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초자연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계시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육체적인 죽음이 왔다는 것도 거절해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 속죄,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정말로 필요 없게 된다. 성경적으로, 창세기 3장(로마서 5:12~21, 8:19~22, 요한계시록 21:4, 22:3)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창조세계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6절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아담을 통해서이고, 죽음이 정복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사망을 ”원수”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원래의 창조 상태의 일부분일 수 없다. 로마서 5:14절에서 바울은 아담의 때로부터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다고 말하며, 로마서 5:21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이래로 사망의 지배가 죄의 지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것은 아담의 불순종이며(창세기 2:17, 3:6~19), 그래서 바울은 사망을 멸망 받아야할 원수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원수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에 생물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부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사망에 대한 승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나사로의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 분노하신 것을 볼 수 있다.(요한복음 11:35). 3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리스어 동사 ‘엠브뤼마오마이(embrimaomai)’는 ”항상 깊이 자리잡은 분노를 말하고, 단순한 감정의 기복을 뜻하지 않는다.”[9] 예수님은 왜 화가 나셨는가? 죄와 사망의 권세가 세상에서 왕노릇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이기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에 비추어 살아갈 필요가 있다.
 
 
고린도전서 15:45~49절
 
42~4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새로운 몸은 현재의 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광을 갖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필요한 이유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의 결과이다.(창세기 3:19). 그러나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우리의 미래 몸이 영(spirit)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몸(body)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바울은 전형적으로 성경에 호소한다. 45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2:7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땅의 흙으로부터 만드시고, 그에게 혼을 주셔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49)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람” 앞에 ”첫 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창세기 2:7절에 나오는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사람으로 아담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인류에 관한 순서의 관계에서 첫 번째 사람으로서의 아담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다. 더욱이 바울이 아담을 첫 번째 사람이라고 언급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종족의 우두머리”[11], 또는 ”신석기 시대의 농부”[12]였다는 개념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모두 아담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재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바울의 ”육적인”에 대한 언급은 아담을 가리키는 것이고, ”영적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이 사용한 대구법은 아담의 육적인 존재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에 관한 것이다.[13]
 
47절에서 바울은 ”육”과 ”영”의 대조에서, ”땅”과 ”하늘”의 대조로 옮겨간다. 이것은 두 사람의 기원을 강조함으로써, ”육적인”과 ”영적인”이라는 말에서 바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정의하게 해준다. 아담이 땅에서 났으므로 인류의 원조가 되었듯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원조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류의 구속과 창조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로마서 8:19~22)을 아담의 불순종과 분리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5:21~22, 45~49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과 부활의 기초를 창세기 역사의 실제성에 두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에(창세기 1:31) 육체의 죽음과 타락을 가져왔던 것은 실제의 사람 아담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첫 번째 사람의 일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실제의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초자연적인 아담의 창조를 거부한다면, 장차 죽음으로부터의 초자연적인 부활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아담의 초자연적인 창조를 거부하면서도, 모순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죽은 자들의 육체의 부활은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초자연적인 부활도 부인하는 다수의 세속적 과학자들의 주장과 충돌된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 주장이 실패라는 표시이다.
 
 
결론

역사적 아담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를 하나님의 계시보다 높은 위치에 두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는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보다 앞서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고린도전서 1:20~25, 3:19).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24, 골로새서 2:3)가 어떤 철학보다 훨씬 우월함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런 도전을 받았을 때,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심오한 지혜를 그들의 지혜로는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창조에 관한 진리는 참된 지혜, 즉 시대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Footnotes
1. Jerry Bergman, 'Evolutionary Naturalism: An Ancient Idea,” Answers in Genesis, August 1, 2001, https://answersingenesis.org/theory-of-evolution/evolutionary-naturalism-an-ancient-idea/.
2. For example, see influential evangelical theologian Alister McGrath, 'What Are We to Make of Adam and Eve?,” BioLogos, March 31, 2010, http://www.biologos.org/blog/what-are-we-to-make-of-adam-and-eve/.
3. Denis Lamoureux, 'Was Adam a Real Person? Part 3,” BioLogos, September 17, 2010, http://biologos.org/blog/was-adam-a-real-person-part-iii/P60.
4. Denis Lamoureux, 'Evolutionary Creation View,” in Four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3), 61–62.
5. Since Adam and Eve were the only humans at this point, the skin God used to clothe them must have been that of an animal. Although Genesis 3:21 does not explicitly say that the skins were from animals, it is a reasonable implication and one that would make sense to the original audience(Mosaic Community) where the skin of an animal was offered to make atonement for sin (Leviticus 7:8).
6. The Biologos website had many different authors present various ways to understand the atonement in light of evolution. See Joseph Bankard, 'Substitutionary Atonement and Evolution, Part 1,” BioLogos, June 9, 2015, http://biologos.org/blogs/archive/substitutionary-atonement-and-evolution-part-1. See AiG’s response, Tim Chaffey, 'Evolution and the Atonement of Jesus Christ,” Answers in Genesis, August 28, 2015, https://answersingenesis.org/jesus-christ/evolution-and-atonement-of-jesus-christ/.
7.It is important to note that Paul is not teaching universalism here, as the 'all” who are made alive in verse 22 is qualified in verse 23 as 'those who belong to him.” Paul clearly believed in a final judgement for unbelievers: Romans 2:5; 2; 1 Corinthians 1:18; 2 Thessalonians 1:9.
8.Romans 5 and 1 Corinthians 15 are dealing with human death. For an explanation of how all animal death is a result of Adam’s sin, see Bodie Hodge, 'Biblically, Could Death Have Existed before Sin?,” Answers in Genesis, March 2, 2010,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biblically-could-death-have-existed-before-sin/.
9.Grant Osborne, Cornerstone Biblical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Carol Stream, Illinois: Tyndale House, 2007), 171.
10.The Greek word for corruption, phthora, (1 Corinthians 15:42) is the same word used in Romans 8:21 where Paul refers to the creation’s bondage to decay.
11.See C. John Collins, Did Adam and Eve Really Exist? Who They Were and Why You Should Care (Wheaton, IL: Crossway, 2011), 120–121.
12.See Denis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 (Oxford, UK: Monarch Books, 2008), 236, 243. Alexander acknowledges that this is his view on page 243.
13.Paul does this in order to make the point that '(1) there are two very different kinds of bodily existence; (2) so far they [the Corinthians] have experienced only the one that is common to all Adam’s children; thus (3) they should look forward to the bodily existence that comes only after this first one (and is experienced only by God’s own people).” Roy E. Ciampa and Brian S. Rosner,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Nottingham, England: Apollos, 2010), 821.

 

*관련기사 : '아담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 (2015. 2. 2.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385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characters/adam-and-eve/how-do-some-among-you-say-there-no-adam/

출처 - Answers, 2017. 3. 2.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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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Sarfati
2017-07-06

창세기는 역사다! (Genesis is history!)


      우리의 사역은 성경의 첫 절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창조론(‘6일 창조, 젊은 지구’)에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도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은 창세기 1~11장을 시, 혹은 비유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우리를 비난한다. 우리는 성경을 과학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참조: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과학책이라고 주장하는가?)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과학교과서는 수년만 지나도 수정해야 되지만,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에 수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를 기록했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1]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창세기가 어떤 종류의 책인지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2]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성경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성경의 다른 저자들은 창세기를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이미 여러 기사에서 밝혔듯이, 성경의 나머지 책들은 창세기를 실제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3]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성경의 다른 저자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시간 틀[4], 심지어 사건의 순서까지도 단순히 문학적 혹은 신학적 장치가 아닌, 실제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5] 그리고 역사적 실제성은 믿음과 도덕성에 대한 엄격한 가르침의 기본이 된다.[6] 더욱이 신약의 저자들은 자기의 독자들인 초대교회의 새로운 회심자들이 창세기에 관한 상세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7]
 

성경적 역사는 어떤 식으로 보일 것인가?
 
창세기가 역사(history)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토론을 목적으로, 창세기가 역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식일 것이 예상되겠는가? 논쟁의 여지없이 역사적인 책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 등과 같은 스타일로부터 답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문법의 전문가들은 구약에 있어서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는 매우 독특한 양식의 동사를 갖고 있다고 입증한 바 있다. 그것들은 qatal(완료시제)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동사로 시작하고, 결과를 나타내는 waw(vav, ו), 혹은 wayyiqtols 라고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동사가 이어진다.[8, 9] 이런 동사 형태는 구약의 역사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에 적용해 보라. 첫 번째 동사 bara(create, 창조하다, ברא)는 qatal인데, 뒤이어 나오며, 그 설명을 앞으로 전달해 가는 동사는 wayyiqtols이다. 즉, ‘and ... said(ויאמר, 그리고 말씀하셨다)’, ‘and there was( ויהי, 그래서 있었다)’, ‘and saw(וירא, 그리고 보았다)’ 등. 이와 같이 이런 것들은 역사적인 설명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양상이다.
 
더욱이, 창세기 1~11장은 아무런 형식의 변화 없이 창세기 12~50장으로 매끄럽게 넘어간다. 후자(창세기 12~50장)가 역사로 읽히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원전 자체의 문법과 형식을 볼 때 전자(창세기 1~11장)도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인 것이다.


시는 어떤 식으로 보일 것인가?
 
이제, 창세기가 시(poetry)라면 그것은 어떤 식이어야 하는가? 시편과 같은 히브리 시는 다른 형식을 갖는다.[10] 히브리 시의 결정적인 특성은 리듬이나 운율이 아니라, 대구법(parallelism)이다. 즉, 둘 혹은 그 이상의 연속적인 행에 들어있는 서술들이 어떤 식으론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의어 대구법(synonymous parallelism)에서는 하나의 서술이 있으면, 즉시로 그와 동일한 뜻의 다른 단어로 말해지는 다른 서술이 뒤따른다. 시편 19:1~2절이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반의어 대구법(antithetical parallelism)에서는, 첫 번째 서술에 뒤이어 그와 반대되는 서술이 뒤따라온다. 예를 들면, 잠언 28:1과 7절을 보면 :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통합적 혹은 구조적 대구법((synthetic or constructive parallelism)에서는 첫 번째 서술이 그 다음의 서술에 의해 확장된다. 예를 들면, 시편 24:3~4절을 보면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사람(라멕)의 말을 인용한 창세기 4:23~24절 외에는 대구법이 없다. 이 부분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과는 두드러진다. 창세기가 정말로 시라면, 전반적으로 대구법을 사용했을 것이다.[11] 사실상, 성경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시로 찬양하는 부분이 있는데, 시편 104편이다. 그러므로 창조를 시적으로 표현한 기사가 어떤 식으로 보여질지를 보기 원한다면, 그곳을 보면 된다. 예를 들면, 시편 104:7,11절은 대구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또한 히브리어 학자인 스티븐 보이드(Steven Boyd) 박사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동사(완료시제 혹은 미완료시제)가 히브리 시에서는 빈번히 사용되었는데, 역사책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그가 동사들을 분석한 결과, 창세기 1:1~2:3절이 (시가 아니라) 이야기일 확률이 99.997%라고 발표했다.[12]
 

창세기와 다른 구절들과의 구조적(structural) 유사성
 
구조에 있어서 창세기 1장과 가장 유사한 구절 중의 하나가 민수기 7장이다. 둘 다 구조화된 기사이며, 둘 다 날(day)에 대한 히브리 단어(욤,  יוֹם , yôm)를 숫자로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둘 다 숫자화 된 날들의 연속이다. 민수기 7장에는 12개의 연속적인 숫자화 된 날들이 있는데, 거기서 이스라엘의 12지파 각각의 대표들이 제단에 희생제물을 가지고 온다 :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
둘째 날에는 잇사갈의 지휘관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헌물을 드렸으니 ...
셋째 날에는 스불론 자손의 지휘관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헌물을 드렸으니 ...
열두째 날에는 납달리 자손의 지휘관 에난의 아들 아히라가 헌물을 드렸으니 ...

날-숫자의 대비는 오히려 민수기 7장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각 날을 셀 뿐 아니라, ”...던 날에(in the day that)”라는 문구로 그 장을 열고 닫음으로써, 전체 순서를 집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을 놓고 보통 길이의 날들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으로부터, 창조주간을 요약하고 있는, 창세기 2:4절의 ”...던 날에(in the day that, כיום, bəyôm)”는[13] ”...할 때에(when)”에 대한 히브리 관용구인 것으로(많은 영어 번역본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날들이 보통 길이의 하루가 아니라는, 잘못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14]

더욱이, 민수기 7장이 신학적인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시적 구조일 뿐,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세기 1장의 날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부정할 문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둘 다 직설적인(straightforward) 역사인 것이다.
 

첫째, 둘째... 날들은 보통 길이의 날들이다.
 
창세기의 창조주간 기사에서 둘째 날에서부터 여섯째 날에 대한 숫자들은, 민수기의 구절들에서 숫자화 된 모든 날들처럼, 서수(ordinal number)의 히브리어 형태로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15] 즉, 각 날들이 둘째(second, שני, shenî), 셋째(third, שלשי, shlishî), 넷째(fourth, רביעי, rveî‘yî), 다섯째(fifth, חמישי, chamîshî), 여섯째(sixth, ששי, shîshî) 등의 서수로 수식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주간의 첫째 날에 대해서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창세기 1:5절에서 ”첫째 날”은 서수인 ”first day”(즉, יום ראשון, yôm ri’shon’이 아니고)라고 기록되어있지 않고, 대신에 기수(cardinal number)인 ”one day”(한 날, יום אחד, yôm echad)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이것은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날(day)’이라는 단어를 숫자로 수식하는 처음 순간이다. 그래서 기수가 적절한 것이다. 다른 날들이 있었다면, 한 날이 아니라 ”첫째” 날일 수 있지만, 창조주간의 시작에 있어서는 오직 그 한 날 뿐이었다. 또한 하나님 자신도 창세기 1:5절에서 어두움(밤)과 빛(낮 시간)의 주기를 ”한 날”이라고 정의하고 계신다. 즉,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한 날이니라” 지구가 한번 회전하는 시간이 그 하루와 동일했다. 전체의 창조는 지구가 단지 여섯 번 회전하는 데 걸린 시간 안에 완성되었다. 지구가 회전한 여섯 번의 보통 길이의 날들이었다.[17]

위대한 신학자 바실(Basil, AD 329-379)은 오래 전에 창조주간에 관한 설교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

”성경은 왜 ‘첫째 날(the first day)’ 대신에 ‘한 날(one day)’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둘째, 셋째, 넷째 날이라고 일련의 날들을 말하기 전에, 그 첫 번째 날을 ‘한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따라서 그 날을 ‘한 날’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낮과 밤의 길이를 결정하고, 그 한 날이 포함하는 시간을 결합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한 날의 시간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24시간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와 동지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한 날의 시간 길이는 경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 날의 기간은 24시간 이거나, 또는 천체가 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8]


결론
 
창세기는 실제로 역사(history)이다. 성경의 다른 저자들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성경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다른 역사적인 책들과 비교할 때, 그 형태와 동사의 양상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더욱이, 그것은 시편과 같은 시적인 책과 전혀 유사하지 않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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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Sarfati, J., 'But Genesis is not a science textbook, Creation 26(4):6, 2004; creation.com/textbook.
2. A classic explanation is Grigg, R., 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Creation 16(1):38–41, 1993; creation.com/literal. See also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2, Creation Book Publishers, Atlanta, 2004, 2011; as well as the articles under creation.com/genesis.
3. A new resource documenting this is Genesis Verse-by-Verse, creation.com/genverse.
4. Wieland, C., Jesus on the age of the earth, Creation 34(2):51–54, 2012; creation.com/jesus_age.
5. Sarfati, J.,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Creation 28(2):21–23, 2006; creation.com/gen-hist. See also Batten, D., and Sarfati, J., 15 Reasons to Take Genesis as History, Creation Book Publishers, 2006.
6. Sarfati, J., Why Bible history matters, Creation 33(4):18–21, 2011; creation.com/bible-history-fall-ark.
7. Cosner, L., What the New Testament doesn’t say, creation.com/nt-doesnt-say, 11 September 2012.
8. In modern Hebrew, the letter ו, when functioning as a consonant, is pronounced like our v, but in biblical times, it was pronounced like our w. The same sound shift occurred in Latin: when Julius Caesar said 'Veni, vidi, vici” (I came, I saw, I conquered), he pronounced it 'Weni, widi, wiki.” Much later Ecclesiatical (Church) Latin pronounces it 'Veni, vidi, vichi.”
9. Joüon, P. and Muraoka, T.,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Part Three: Syntax, p. 390,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Rome, 1991.
10. See also: Is Genesis poetry/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creation.com/fh.
11. Kaiser, W.C., Jr., ‘The literary form of Genesis 1–11’ in Payne, J.B., New Perspectives on the Old Testament, Word Inc., Waco, Texas, USA, pp. 59–60, 1970.
12. Probabilities range from 0 (impossible) to 1 (certainty). Boyd, S.W., The biblical Hebrew creation account: New numbers tell the story, icr.org, November 2004. See also Boyd, S.W., A proper reading of Genesis 1:1–2:3; in: De Young, D. (Ed.), Thousands … Not Billions, Master Books, Green Forest, AR, pp. 157–170, 2005.
13. Actually, in Numbers 7, the phrase is bayyôm, where the ‘a’ in bayyôm represents the definite article, ‘the’, meaning ‘on the day [xth]’, unlike bəyôm, which lacks the article.
14. McCabe, R.V., interview in Creation 32(3):16–19, 2010; creation.com/mccabe; Graves, D.G., '… when Yahwe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a proposal for the right translation of כיום [bəyôm] in Genesis 2:4, J. Creation 23(3):119–122, 2009.
15. Ordinal numbers are used to refer, for example, to the order of runners finishing a race—first, second, third, etc., as opposed to cardinal numbers: one, two, three, etc.
16. An English Bible version which reflects this distinction is the NASB.
17. And this numbering pattern, including the deliberate use of the definite article for Day 6 (and Day 7 in Genesis 2:2–3, as well as for all the days in the Numbers passage) further emphasizes this. Sarfati, J.,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J. Creation 17(2):60–61, 2003; creation.com/numbering—after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JETS) 45(4):577–584, 2002.
18. Basil, Hexaëmeron 2:8, AD 370, newadvent.org/fathers/32012.htm; see also Genesis means what it says: Basil (AD 329–379), Creation 16(4):23–53 September 1994; creation.com/basil.
19. For a detailed critique of some of the compromising attempts to deny the history of Genesis based on literary style, see Kay, M.,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two parts), J. Creation 21(2):71–76; 21(3):93–101, 2007; creation.com/literary-theory-1 and creation.com/literary-theory-2.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creation.com/genesis-is-history

출처 - Creation 37(2):50–52, April 2015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39

참고 : 5275|5035|5033|4869|4540|4492|4487|4440|4297|3731|3689|3589|3331|3024|3020|2982|2936|2797|2638|2138|2016|3901|4351|5628|5627|5969|5870|6581|6044|5084|5542|5923|6107|6135|6283|5381|6360|6414|6110|6152|6153|6285|6146|5394|5265|6064|6066|6133|2942|6351|6533|6564|1922|3640|6491|6480|6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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