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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5-11-14

창세기의 하나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 삼위일체의 하나님

 (Who really is the God of Genesis?)

Russell Grigg 


      창세기의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지 않는 오늘날의 유대교, 힌두교, 여호와 증인, 유니테리언파(삼위일체론을 부인하고 유일 신격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기타 다른 신앙 체제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들과는 달리, 창세기는 기독교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인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절은 이렇게 써 있다. ”태초에 하나님(복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단수)”(창세기 1:1).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로서 단수인 (el) [3] 또는 단수의 시적인 형태인 엘로아(eloah)를 사용하지 않고, 복수 용어인 엘로힘(elohim)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사에 대해서는 단수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엘로힘 이라는 단어 이외에도 모세는 창세기의 하나님에 관련하여 다른 복수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다. 창세기 1:26은 다음과 같이 써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복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복수)” [4]. 여기서 모세는 ‘가라사대’ 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복수 대명사와 복수의 동사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1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모세는 이들 복수 형태를 사용했는가?

어떤 사람은 이 복수가, 오늘날 왕이나 여왕 및 기타 다른 사람들이 당당하게 사용하는 ‘짐(朕)’(royal we)이라는 말과 같이 단순히 장엄 복수일 뿐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성경 기사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단수로 부르고 있다. 언어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말하기를, ”모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왕이나 왕자를 복수 형태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상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증거는 없다.” [5]

또 다른 사람들은 좀더 나아가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복수의 능력과 속성과 인격을 포함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 명사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 단어를 2,500회 이상 사용했는데, 통상적으로 (창세기 1:1에서처럼) 단수의 동사나 형용사와 함께 사용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한 분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신격의 ‘단일복수(uniplurality)’ 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단일복수’ 혹은 ‘인격(personhood)의 복수’가 삼위일체(trinity)를 말하는가?


두 번째 위격 : 하나님의 말씀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약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부록을 보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요한복음 1:1-14에서 그분의 명칭 중의 하나가 ‘말씀(the Word)’ (헬라어로 ‘로고스(logos)’)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the Word was God)” (요한복음 1:1)의 구절을 주목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제1장을 다시 읽으면, 창조주간 6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His Word)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날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공식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 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창세기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활동이 밝혀져있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16절은 다음과 같다. ”만물이 그에게(by Him, 14절; 그 아들) 창조되되...” [7]. 따라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작용(self-causation)이나 진화론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고, 능력 있고, 지성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작동하였다. 거기에다가, 그 동일한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히1:3, 골1:17 참조).


세 번째 위격 : 하나님의 성령

창세기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모세가 사용한 히브리 단어 루아흐(ruach)는 문맥에 따라서 ‘영(spirit)’, ‘바람’, ‘숨(breath)’ 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는 바람이 물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특별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8] 창조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 ‘운행하시니라(hovering)’ 라는 분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단지 창조주간의 중요한 사건을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결론짓는다 [9].


결론

우리는 저자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성경구절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창세기의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성령에 관하여 나중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으로 사용한 단어들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관하여 성경에서 나중에 완전하게 드러난 것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록 참조).

창세기는 성경의 맨 첫 구절에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 확증한다. 신명기 6:4의 유명한 쉐마 (Shema, ‘들으라(hear)’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one)인 여호와시니.”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one)’에 대한 단어 에하드(echad)는 종종 단일성 안에서의 복수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19:5과 마가복음 10:8에서 인용하셨던) 창세기 2:24에서 남편과 아내(두 사람)가 '한(echad) 몸을 이룰지로다” 와 같은 것이다 [10].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한 분의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임을 드러낸다. 세 구별된 위격이 하나의 영원하고 거룩한 본질 혹은 실재 안에 있다. 따라서 실제로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 유일하고 삼위일체이신 -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창세기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율법을 주셨으며, 우리의 구원자와 심판자가 되신다.



References and notes

1. Modern-day non-Messianic Jews might believe that God created as per Genesis, but they reject God’s uniplurality.
2. The first of some 2,570 times elohim is used of God in this way in the Old Testament. Although it usually refers to the Living God, it is also used occasionally in the Bible to refer to pagan deities (in the plural), as in: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elohim] before me’ (Exodus 20:3; cf. Joshua 24:16; Jeremiah 5:7).
3. Corresponding to the Greek theos, the Latin Deus, and the English God.
4. Some antitrinitarians try to claim that God is conversing with angels here. But there is no indication anywhere in Scripture of angels being involved in creation, or having such creative power. And more importantly, mankind was made in the image of God, not in the image of ‘God plus angels’—see also Hebrews 2.
5.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6. E.g. Morris, H.,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 39, 1976.
7. See also John 1:3; 1 Corinthians 8:6; Hebrews 1:2.
8. Whom the Bible tells us is eternal (Hebrews 9:14), omniscient (1 Corinthians 2:10–11) and omnipresent (Psalm 139:7–10).
9. Kelly D.F., Creation and Chang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Ross-shire, UK, p. 91, 1997, who references Young, E., Studies in Genesis One,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Philadelphia, USA, p. 36, 1964.
10. Paul, thoroughly educated in Judaism and writ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understood this. In 1 Corinthians 8:6, he wrote: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Here, Paul is applying the Shema, using the key phrase ‘one Lord’, and applying it to Jesus Christ, thus including Jesus in the identity of the one true God!                 


부록 1 :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elohim)의 근본적인 의미는 ‘능력 있는 분(the powerful one)‘이므로,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모세가 창조주간의 창조주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주 적절하였다. ”길고 잡아 늘려진 진화론의 시간표 동안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다양한 물체와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직함(title) 혹은 서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정말로 개인적인 이름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분이 드러내신 이름(출애굽기 3:15), 즉 YHWH로서 종종 야훼(Yahweh)로 음역하며, 영어로는 ‘Jehovah(여호와)‘와 대문자 ‘LORD(주)‘로 쓴다. 그 의미는 ‘나는 나다(I am that I am)'이며 ‘스스로 있는 자‘ 혹은 ‘있게 하는 자‘를 뜻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2]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모세는 결합된 용어인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 야훼 엘로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번역가들이 영어로는 ‘주 하나님(the LORD God)‘으로 번역했다.


References and notes

1.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2. As well as of God’s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s people.



부록 2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격의 하나됨(unity) 안에 영원하고도 서로 동등한 세 위격(persons)이 존재함을 말한다.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역할이 다른 세 위격(혹은 의식의 세 중심)이시며 하나의 존재(being)이시다 (그림을 보라). 이 교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존재에 관해 성경에서 드러내신 것이므로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예로써,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아들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으며,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마태복음 3:16-17). 그리고 예수님이 대 위임(great commission)을 주실 때에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태복음 28:18-20).


하나 됨(oneness)과 셋 됨(threeness)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교리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리에 있어서, 해군과 육군과 공군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전투 집단이지만, 또한 하나의 군대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주 : 이것은 세 위격이 하나님의 ‘부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각의 위격은 신격의 충만을 갖고 있다(골로새서 2:9). 보다 나은 비유는, 공간이 세 개의 차원(길이, 폭, 높이)을 갖고 있지만, 그 차원들은 ‘부분들‘이 아닌 것과 같다. 즉, 세 개의 모든 차원이 없다면 ‘공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삼위일체와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라고 말한다(요한일서 4:8,16).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특이한 것이며, 아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랑은 하나님 본질의 일부이다. 그런데 사랑은 최소한 두 사람을 필요로 하며, 자기 사랑은 전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신격 안에는 최소한 둘의 위격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하나의 위격이라면, 사랑은 그분의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로 제한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지향할 때 그 사랑은 더 위대하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즉,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사랑이 연합하여 그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충만함의 견지에서 사랑을 나타내려면, 세 위격이 있어야만 하며, 개별적인(individual) 사랑과 집합적인(collective) 사랑이 모두 있어야 한다. 집합적인 사랑을 위해 셋 이상은 불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위격의 수만 증가시킬 뿐, 사랑의 본질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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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who-really-is-the-god-of-genesis

출처 - Creation 27(3):37–39, June 2005.


미디어위원회
2005-08-10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Russell Grigg 


       창조론자들은 성경 전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자주 비난당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논의하는 책 또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다음의 것들이 분명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詩) - 시편의 경우. 관념의 반복 또는 대구법이 영국의 전통적 시에서 중요시 되는 운(소리의 대구법)과 운율(시간의 대구법)이 없이, 시에 관한 히브리인의 관념과 일치한다. 이것이 시편이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질 수 있는 이유이며, 아직도 문자적인 간절함과 시적인 맛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서양의 시들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 리듬과 운율의 요소들은 대게 잃어버리게 된다.       

비유 -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의 경우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23) 같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것은 비유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며, 씨나 흙과 같은 여러 가지 항목들에 대한 의미를 그분이 직접 알려 주셨다.

예언 - 구약의 뒷부분에 있는 책들(이사야에서 말라기 까지)의 경우.

서신 - 신약에서 바울, 베드로, 요한 및 다른 사람들이 쓴 사도서신의 경우.

전기(傳記) - 복음서의 경우.

자서전/증언 - 사도행전의 경우.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개종한 것을 역사적 사실로 언급한 뒤에(행 9:1-19),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언의 일부로써 이 개종의 경험을 포함시키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22:1-21, 26:1-22).

인증된 역사적 사실들 - 열왕기상·하 등과 같은 책들의 경우.

따라서 성경의 각 책들의 문체와 내용을 통해 볼 때 그에 관한 저자의 의도는 아주 분명한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였으며, 기록한 그의 문체와 내용으로부터 어떤 의도가 드러나 보일까? 


창세기의 저자

주 예수님 자신과 복음서 기자들은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했으며(마 10:3, 눅 24:27, 요 1:17), 유대인 학자들 및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한결같은 전통과, 요즘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쓰여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 ···의 후예(히브리어로 톨레도스 = ‘혈통’, 즉 ‘혈통의 기록’이라는 뜻)[1]는 이러하니라”라는 구절이 열한 절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주: 창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참조), 점토판에 새겨 보존된 족장들의 기록이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계통을 따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모세가 참고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그들이 언급한 사건의 뒤에 따라 나오며, 각 구절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지명된 개개인의 죽음 뒤가 아니라 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위첨자(superscript) 즉 표제가 아니라, 아래첨자(subscripts) 즉 마감 서명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아담, 노아, 셈 등이 그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의 설명을 각자 기록했으며, 모세는 성령의 인도 하에 이들을 발췌하고 편집하여 자기 자신의 주석을 달아서 현재 우리가 창세기라고 알고 있는 책 속에 삽입했다는 것이다.[2]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을 보라)


바벨론 서판 조각이 니푸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고대 바벨론 지역으로써 아브라함이 나온 곳이 바로 그 지역이다. 검정색 테두리를 한 부분이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다. 전 세계적으로 홍수에 관한 내용이 300개 이상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 약 30개는 문자로 남아 있다. 몇 개는 원래의 기록인 성경과 상세한 부분까지 현저하게 일치한다.

창세기 12-50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및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삶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신뢰할만한 역사로서 쓰여졌음이 매우 분명하다. 유대민족들은 초기 성경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줄곧, 창세기의 이 부분이 그들 나라 역사의 사실적 기록이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 부분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이며, 자유주의 학자나 현대 과학자들 및 회의론자들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이다.

 


창세기 1-11장, 이들 중 시가 들어있는 부분이 있는가?

특별히, 창세기가 말하는 것을 기원에 관한 오늘날의 현대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일부 자유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신학적 시’가 들어있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히브리 시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의 대구법’이 의미하는 바를 다소 깊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시편 1:1을 생각해 보자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우리는 명사와 동사의 사용에 있어서 3중의 대구법을 보게 된다:

        좇다(walketh)     꾀(counsel)    악인(ungodly)
서다(standeth) 길(way) 죄인(sinners)
        앉다(sitteth)       자리(seat)        오만한 자(scornful)

이러한 명백한 대구법뿐만 아니라, 은밀하고도 미묘한 의미의 진행도 있다. 첫 번째 열에서, ‘좇다’는 단기간의 면식을 나타내고, ‘서다’는 의논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앉다’는 장기간의 연루를 말한다. 두 번째 열에서, ‘’는 일반적 권고를 나타내고, ‘’은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을 말하며, ‘자리’는 마음을 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 번째 열에서, ‘악인’은 소극적인 나쁜 사람을 나타내고, ‘죄인’은 적극적인 나쁜 사람을 뜻하며, ‘오만한 자’는 남을 경멸하는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

다른 형태의 히브리 시로 잠언 27:6에서와 같은 대조적 대구법을 들 수 있다 :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또한, 시편 46:1에서와 같은 완성적 대구법도 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3]

그러면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자.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 중에 신학적 시가 어느 하나라도 있는가?

답 : 없다. 이 열한 장에는 드러난 형태이든 숨어있는 형태이든 히브리 시의 형태에 대한 어떤 정보나 암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 : 물론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가 열 번 나오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가 일곱 번, ”그 종류대로”가 열 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 날이니라”가 여섯 번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위에서 논하는 시적인 형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사실에 대한 서술이므로, 그 반복은 반복되는 단어의 중요성을 나타내려는 강조를 위한 것이다.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으로 기원전 3천 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대한 창조의 작업을 하신 분이 ‘루갈/Lugal’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모세의 시기보다 1000년 이전에 사람들이 창조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며, 문자에 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창세기 앞부분의 장들은 솔로몬 시대보다 수백 년 이후에 최초로 기록된 것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일부 현대주의자들이 제시하듯이 이 열한장 중에 비유가 들어있는가?

아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그분이 그것을 비유라고 말씀하시든가, 아니면 그것을 미소와 함께 소개하셨으므로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이 비유라는 것이 명백하게 하셨다. 그런 예는 ”천국은 마치 ···” 등과 같은 그분의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의 저자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고 그런 문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들 열한 장에 예언이 들어 있는가?

비록 이 부분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이 훗날에 성취된다는 견지에서 예언적이기는 하지만, 전체 문맥상으로는 예언이 아니다.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15 로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여자의 후손’(예수님)이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 ‘그(메시야)의 발꿈치’[5] 라는 표현 때문에 유대인들의 탈굼[4](Targums, 아람말로 번역된 구약성경)까지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후손(‘seed’)을 메시야(Messiah)로 해석해 오고 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정상적으로 아이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하여(예로 창세기 5장, 11장, 역대상 1-9장,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23-38),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부름으로서 동정녀 탄생(virginal conception)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창세기 8:21-22와 9:11-17이다. ”여호와께서 ···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부분에 서신이나 전기, 또는 자서전/증언이 들어 있는가?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아래첨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아담이 창조의 제1일에서 6일까지의 사건들을 알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주셨음이 분명하다. 아담은 제6일에 가서야 지어졌으므로 그 이전의 사건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해 주셔야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2:4a의 말씀에서 강조된다. "하늘들과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내력이 이러하니라(KJV 직역)." 제7일, 안식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이 앞인 창세기 2:2-3에 포함되어서, 그로써 (예상할 수 있듯이) 전체 7일의 주간에 대한 기록이 완료되고, 그 뒤에 이 아래첨자 혹은 마감 서명이 등장한다.

그리고는 창세기 2:4b-5:1a의 사건들이 뒤따른다. 이 부분에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비록 3인칭으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에덴동산과 하와의 창조(2장),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반(3장) 및 그들의 후손들의 행적(4장-5:1)에 관련하여 아담이 알고, 보고,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설명을 읽을 수 있다(주: 3인칭의 사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에서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긴 설명을 3인칭으로 썼다.) 이 부분은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말로 마친다.

타락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로부터 창세기 1:1-2:4a를 그가 쓸 수 있었다는 것과, 창세기 2:4b-5:1을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썼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의 능력을 고려해 볼 때 그렇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담은 성인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DNA에 부여받았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데에 충분한 원예 기술을 알고 있었으며(창 2:15),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인식하고 이름 붙일 정도로 광대한 지능을 가졌다(창 2:19). 그와 하와는 알파벳을 배운 적이 없어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전혀 쓸 수 있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7]


추정되는 모순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사건의 순서와 1장에서의 순서 사이에 추정되는 모순은 어떠한가? 하나도 없다!   

다음의 두 구절을 읽어보면 제 2장은 식물과 동물이 아담 이전에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창 2:19) [강조가 추가됨].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줄 때는(창 2:20) 이미 그 동물들이 존재해 있었다. 창세기 2:20에 나열된 동물의 순서에도 크게 모순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을 만난 순서로 짐작되며, 반면에 창세기 1:20-25에는 그들이 창조된 순서가 주어져 있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아담에게 나아온 동물은 사람과 아주 친밀하며 사람에게 순응하여 사귀기에 아주 쉬운 후보자들뿐이었다. 여기에는 공중의 새와 육축(20절 - 아마도 길들이기 쉬운 동물들)과 들의 짐승들이 포함되는데, 들의 짐승은 사람들의 거주지 근처에 사는 작은 야생동물임이 분명하다. 포함되지 않은 동물로는 바다의 물고기,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짐승들(창 1:24)인데, 땅의 짐승이란 사람 및 경작지로부터 상당한 거리에서 사는 야생동물로 짐작된다.”[8]

지리적인 위치의 이름을 고려해보면, 대홍수 이전의 세상이 완전히 멸망되었으므로, 홍수 이전에 땅이나 강들의 형상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홍수 이전에 이름 붙여진 땅과 강들은 대홍수 이후에 유사하게 이름 붙여진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다.

창세기 2:18-25의 목적은 창조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과 동물들 사이에 어떤 형태이든 친족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를 닮은 동물은 하나도 없으며, 어떤 것도 그에게 우정이나 교제를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생령’이기 때문이다(창 2:7 및 1:27).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담을, 그분이 말을 걸 수 있고, 그는 응답할 수 있으며, 그분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성경의 솔직한 진술은 인간 진화의 개념과 상치된다.

따라서, 아담이 창세기 2:4b-5:1의 가장 가능성 있는 저자이며, 이 부분은 에덴동산에서의 사건, 하와의 창조, 타락, 및 가인과 아벨과 셋의 삶에 관해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증거가 충분히 많다.

창세기 6:9b에서 10:1a까지의 부분은 주로 방주와 대홍수를 취급하며 다음의 말로 마친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러한 어법으로 보면 이 부분은 노아의 아들 중의 하나가 썼음을 암시하는데, 모세가 셈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아마도 셈일 것이다. 이 장들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이 매우 상세한 것으로 보아 눈으로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8:6-12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서 눈으로 목격한 설명의 특징인 확실성의 고리를 담고 있는지 주목하라.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6-12)

이렇게 세밀한 설명은 신빙성 있는 목격에 대한 증언의 본질이다. 그것들은 진실의 고리를 갖고 있다.

아래첨자로써 기술된 창세기의 이 부분들은 영원한 기록을 만들어서 전할 목적으로 그 안에 이름이 들어있는 사람이 쓴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이들 처음 열한 장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답 :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


창세기 내에서의 증거

1. 창세기 자체 내에 증거가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유대 사람들은 12-50장을 그들의 사실적인 역사 기록이라고 항상 여겨왔으며, 또한 1-11장의 서술 방식이 12-50장의 방식과 현저히 다르지 않다.

2. 다음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어 흠정 강좌 담당교수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 교수가 1984년에 썼던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세계 여러 대학에서 히브리어나 구약을 담당하는 교수 중에는 창세기 1-11장의 저자(들)가 그들의 독자에게 다음의 개념을 전달할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a) 창조는 연속되는 6일에 걸쳐 일어났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가 겪는 24시간의 하루와 같다. (b) 창세기 가계에 들어있는 숫자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성경 이야기의 나중 단계까지의 연대기에 단순히 더할 수 있다. (c) 노아의 홍수는 세계적인 것이며, 방주에 있던 사람들 외에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절멸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부정적으로 보아서, 창조의 '날들'이 긴 시대의 시간이라고 보는 변증적 논법이나, 년한의 숫자가 연대기적이 아니라거나, 홍수가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에 제한적이라는 내용은 내가 아는 한 그런 교수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9]

3. 창세기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주권은 창세기 1-11장의 네 가지 현저한 사건(창조, 타락, 대홍수, 바벨의 흩어짐)과 관련한 하나님의 행동 및, 창세기 12-50장의 네 명의 두드러진 사람(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그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창세기 전체는 어떠한 부분이라도 신화적이고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실패로 끝나게 되는 통일된 주제가 있으며, 한편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을 보충해준다.[10] 


성경의 다른 책에서의 증거

4. 창세기 1-11장에 언급된 주요 인물들은 성경의 나머지에서 실제의 (신화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람으로 종종 여러 번 언급된다. 예로써,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및 노아는 성경의 창세기 이외의 15권에서 인용된다.

5.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창세기 1:27과 2:24를 인용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실제의 역사로 언급하셨으며(마 19:3-6, 막 10:2-9), ‘인자의 오심’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노아를 실제의 역사적 인물로, 대홍수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으로 언급하셨다 (마 24:37-39, 눅 17:26-27).

6.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이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나머지의 성경은 그 전체의 의미로써 불완전하며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주제는 구속하심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11장에서 드러난다.
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2장에서 유다서 25절까지 진행되며,
  i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계시록 1-22장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인류는 왜 구속을 받아야 할까?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창세기 1-11장에 주어진다. 즉, 죄에서 초래된 파멸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진짜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대속하는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불가사의이다. 역으로, 창세기 1-11장의 역사적 진실성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공정한 노하심 아래 들어왔으며, 죄의 형벌, 권능, 존재로부터 구원이 필요함을 알게 해 준다.
 7. 창세기의 앞부분 장들의 사건들이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면,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 무의미해진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한 사람(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21-22,45). 첫 번째 아담에 관한 기록의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서 마지막 아담(예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증해준다.


결론

이 기사의 제목이 되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보통의 성경 주석 원리를 적용하면(우리 시대의 진화론적 편견을 따르게 하려는 압력을 무시하면), 창세기는, 솔직하고 분명하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신빙성 있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분명하다.

 

References

1. See Genesis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2. The seminal author on the colophon concepts was P.J. Wiseman, Creation Revealed in Six Days, Marshall, Morgan & Scott, London, 1948, pp. 45~53. For an excellent evaluation of this by a evangelical linguist see The Oldest Science Book in the World, by Dr Charles V. Taylor, Assembly Press, Queensland, 1984, pp. 21~23, 73, 121.
3. This discussion of Hebrew poetry was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13~16.
4. Aramaic paraphrases of the OT originating in the last few centuries BC, and committed to writing about AD 500. See F.F. 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s,(Westwood: Fleming H. Revell Co., Rev. Ed. 1963), p. 133.
5. A.G. Fruchtenbaum, Apologia 2(3):54~58, 1993.
6. The use of the third person is no problem. Moses wrote the long account of his own life in Exodus to Deuteronomy in the third person, and many classical authors like Julius Caesar also wrote in the third person.
7. Adam and Eve knew how to sew fig-leaf ‘aprons’ for themselves (Genesis 3:7). Within a few generations, Adam’s descendants founded a city (Genesis 4:17), were tent-makers, cattle farmers, musicians with the ability to make both stringed and wind instruments, and metallurgists with the ability to smelt the ores of copper, tin and iron and then to forge all kinds of bronze and iron tools (Genesis 4:20~24). Dr Henry M. Morris comments in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1976, pp. 146~147):
‘It is significant to note that the elements which anthropologists identify as the attributes of the emergence of evolving men from the stone age into true civilization?urbanization, agriculture, animal domestication, and metallurgy?were all accomplished quickly by the early descendants of Adam and did not take hundreds of thousands of years.’
8. Henry Morris, The Genesis Record, p. 97.
9. Letter from Professor James Barr to David C.C. Watson of the UK, dated 23 April 1984. Copy held by the author. Note that Prof. Barr does not claim to believe that Genesis is historically true; he is just telling us what, in his opinion, the language was meant to convey.
10.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27~29.

 

*참조 :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736/

Is Genesis poetry / 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50/

From Chaos to Cosmos :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www.westminsterreformedchurch.org/ScienceMTS/Science.Pipa.Framework.Critique.htm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http://hermeneutics.kulikovskyonline.net/hermeneutics/Framework.pdf

Vintage Journal: Literary theory and Genesis 1: Part 2

https://creation.com/literary-theory-2

Vintage Journal: Literary theory and Genesis 1: Part 1

https://creation.com/literary-theory-1

Genesis: Myth or History?

https://creation.com/genesis-myth-or-history

Does God have body parts?

https://creation.com/does-god-have-body-parts

Do I have to believe in a literal creation to be a Christian?

https://creation.com/do-i-have-to-believe-in-a-literal-creation-to-be-a-christian

Why do you take the Bible literally?

https://creation.com/why-do-you-take-the-bible-literally

How could the days of Genesis 1 be literal if the sun wasn’t created until the fourth day?

https://creation.com/how-could-the-days-of-genesis-1-be-literal-if-the-sun-wasnt-created-until-the-fourth-day


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should-genesis-be-taken-literally

출처 - Creation 16(1):38~41, December 1993.

관리자
2005-06-25

   간격이론 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위원회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이론이다. 간격이론은 화석을 포함하는 지질시대의 수억 년이 이 두 절 사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이를 재창조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진화론적 지질학과 창세기 1장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간격이론도 그 중에 하나인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장 어딘가에 긴 기간을 넣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격이론은 에피스코피우스(Dutchman Episcopius. 1583-1643)가 처음 언급했지만 당시 내용도 불분명했고 신학계에 영향력도 없었다. 간격이론이 알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Scottish, 1780-1847)에 의해서이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지질학자이면서 목사인 윌리암 버크랜드(William Buckland)가 대중화시켰다. 그 후에 이 이론에 대한 여러 글들이 등장했는데, 19세기 지질학자 휴 밀러(Hugh Miller)가 더 자세한 이론을 전개했다. 즉 진화론적인 지질학 개념을 가진 기독교인이 자신의 이론과 창세기 1장을 엮으려는 노력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커스탄스(Arthur C. Custance)가 “혼돈하고 공허하며(Without form and Void)”라는 책에서 간격이론을 옹호했다. 

위의 글들은 어김없이 기존 진화론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주석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스코필드 성경(Scofield Study Bible)에는 “화석은 원시창조로 설명되며, (그러면) 창세기의 우주진화 모양과 과학은 모순이 없다” 고 설명했었다. 데이크 주석 성경(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에는 “(진화론적) 지구 나이에 동의할 때,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천만년을 놓는다. 그러면 창세기와 과학 사이에 모순이 사라진다.” 라고 전형적인 간격이론에 기초한 해석을 썼다. 

성경으로 볼 때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속에 긴 기간이란 것이 들어갈 틈이 없다.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분명히 사람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이론대로라면 아담 이전에 지질계통표에 근거한 유인원이 죽었어야 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분명히 성경은 죄로 인해 피조물이 고통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간격이론은 죄 이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간격이론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죽음이 있었다고 하며 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노아홍수를 제거함으로 동일한 말씀으로(벧후3:7)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막연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사45:7)” 2절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깜깜한 세상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간격이론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사실인 성경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진화론에 기초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지질계통표의 역사는 있지도 않고 우주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창세기 1장을 통해 “보시기에 심히 좋다(very good)”를 통해서도 화석과 같은 잔인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나온 해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미디어위원회
2005-06-14

에서의 아내들 (Esau’s Wives) 

: 성경의 오류라는 지적에 대한 반론

Stephen Caesar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자주 창세기의 오류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에서의 아내(Esau’s wives)들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26:34 과 28:9에 의하면, 에서의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 (Judith, daughter of Beeri the Hittite) (창 26:34)
-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 (Bashemath, daughter of Elon the Hittite) (창 26:34)
-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 (Mahalath, daughter of Ishmael, sister of Nebajoth) (창 28:9)

그러나 창세기 36:2-3에 의하면, 그의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 (Adah, daughter of Elon the Hittite)
-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 (Aholibamah, granddaughter of Zibeon the Hivite)
-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Bashemath, daughter of Ishmael, sister of Nebajoth)

바스맛 (Bashemath, 정확하게는 Basemath) 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셈족어(Semitic)의 어간인 b-s-m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향기로운(fragrant)’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besem 은 히브리어에서 'balsam(향유)”을 의미한다). 여기에 히브리어에서 여성을 뜻하는 어미 -ath 를 붙이면, 바스맛(Basemath), 즉 ‘향기로운 여인(fragrant woman)’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할랏(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과 아다(헷 족속 중 엘론의 딸)는 둘 다 '향기로운 여인(바스맛)”이라는 별칭(nickname)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Douglas 1982: 124). 다시 말해서, 창세기 26:34절의 엘론의 딸 바스맛은, 창세기 36:2절의 엘론의 딸 아다와 같은 사람이었으며, 창세기 36:3절의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은, 창세기 28:9절의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브에리의 딸 유딧과 첫 번째 결혼 후에, 에서는 엘론의 딸 아다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의 별칭은 '향기로운 여인(Fragrant)” 이었을 것이다. 아다가 죽은 후에,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얻으면서,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별칭을 '향기로운 여인”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에서는 '향기로운 여인” 아다와 이혼을 했고 (이것은 족장시대에 세속적인 근동지역의 법으로 허락되어 있었다), 마할랏과 결혼하면서 그녀에게 아다를 대신하여 '향기로운 여인”이라는 별칭을 주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에서의 여러 번의 결혼은 다음과 같이 타당성을 가지고 재구성될 수 있다.      

첫째 부인 :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
둘째 부인 : '향기로운 여인(the Fragrant, Bashemath)”인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 그녀는 일찍 죽었거나 이혼했다.
셋째 부인 : '향기로운 여인”인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
넷째 부인 :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손녀 오홀리바마

아내들이 진짜 이름과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례는 적어도 두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예는 족장시대(Patriarchal Era)와 동시대였던 마리토판(Mari tex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말라마트(Abraham Malamat)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몇년 전, 나는 마리(Mari)의 여인들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짐리림(Zimri-Lim, 족장 시대에 마리의 왕)의 왕비인 쉬부츠(Shibtu)에 대한 연구(P. Artzi와 함께)를 발표하였다.... 꽤 최근까지도 쉬부츠는 알렙포(Aleppo)의 왕인 야림림(Yarim-Lim)의 딸이었고, 왕의 첫째 부인은 가쉐라(Gashera)로서 여겨졌었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서, 쉬부츠의 어머니는 지지(Zizi)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쉬부츠는 알렙포의 왕인 야림림의 두 번째 왕비가 난 공주이거나, 지지가 가쉐라의 별칭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별칭은 고대사회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짐리림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들은 자주 그를 ”my Star' 로 불렀었다” (Malamat 1989: 12).    

훨씬 후에, 앗시리아의 왕인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의 부인은 아람어(Aramaic)  이름으로 나퀴아(Naqia) 이지만, 앗시리아 이름으로는 자쿠투(Zakutu) 였다. (Boardman 1991: 138; Kuhrt 1995: 527).


따라서 에서의 두 아내는 태어나서 아다와 마할랏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별칭인 '향기로운 여인(바스맛, Fragrant)”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References

Boardman, J, et al., eds. 1991. Cambridge Ancient History, 2nd ed., Vol. 3., Part 2: The Assyrian and Babylonian Empires and Other States of the Near East, from the Eighth to the Sixth Centuries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Douglas, J.D., organizing ed., 1982. New Bible Dictionary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Kuhrt, A. 1995. The Ancient Near East c. 3000-330 B.C., in 2 vols. (London: Routledge).

Malamat, A. 1989. Mari and the Early Israelite Experience. London: Oxford Univ. Press.

*Stephen Caesar holds his master’s degree in anthropology/archaeology from Harvard. He is a staff member at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nd the author of the e-book The Bible Encounters Modern Science, available at www.authorhouse.com.

 

 *참조 : Get 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critics.asp#contradiction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rae.org/esauswives.html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2004. 9. 15.

미디어위원회
2005-05-20

그러나 창세기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But Genesis is not a science textbook!)

Jonathan Sarfati


     당신은 이러한 말을 몇 번이나 들어보았는가? 이 질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짧은 대답은 "교과서는 언제나 많은 오류와 몇 년 지나면 구식이 되어버리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고, 언제나 새롭다” 는 것이다.


역사 대 과학

사실 창세기는 과학(science, 창세기는 확실히 인류학, 생물학, 지질학 등과 매우 관련이 되어있지만) 이라기보다는 역사(history) 이다. 달을 여행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의 보통 과학(normal science, 활용되는 과학)은 현재(present)에 반복될 수 있는 관측(repeatable observations)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과거' 의 목격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창세기는 창조에서부터 메시야가 오시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까지 세계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몇몇 사람들은 "창세기는 광대한 지질시대, 또는 진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에, 역사교과서 또한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한 창세기'의 글에서 지적했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광대한 지질시대나 진화였다면, 단순한 언어를 가지고도 충분히 그 뜻을 전하실 수 있었다.


창세기와 과학

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현대 과학(modern science)이 다른 여러 문화들에서는 번성하지 못했지만, 기독교화 된 유럽(Christianized Europe)에서는 꽃을 피웠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놀라운가? 그러나 놀라지 말다. 과학은 합리적인 생각과, 우주는 질서 정연하며, 인간은 온 세계를 탐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결과들은 정직하게 보고 되어야 하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창 1:26~27),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며(고전 14:33),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창 1:28), 우리들에게 정직하라(출 20:16)" 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것들에 대한 논리적인 기초가 모두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Creation) 지에 매번 성경을 믿는 과학자의 글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번 창조 지에서는 한 사람의 뛰어난 '행성 과학자'와 많은 생명들을 구한 'MRI의 개척자‘를 소개하고 있다. 후자인 분은 창조론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자주 '사이비 과학자'라는 비난도 당하였다. 이들 비난하는 자들은 현대과학의 위대한 설립자이며 창조론자들이었던 뉴튼(Newton), 패러데이(Faraday), 파스퇴르(Pasteur)와 같은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단지 믿음과 도덕만을 말하는가?

"...성경은 믿음(faith)과 도덕성(morality)에 관한 책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와 도덕성은 성경의 역사적/과학적인 면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제 삼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과, 일시에 500여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것은(고전 15:1~6)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과학과 충돌한다. 자연주의적 과학자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진정한 역사인 창세기 3장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존재했던 최초의 인간 '아담'은 실제로 죄를 지었고, 실제로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실제로 죽음으로부터 육체적 부활을 가져오신 것이다.(고전 15:1~4, 21~22, 45)

혼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혼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하나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불과한가? 그러나 예수님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역사로서 창세기 1:27과 2:24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마 19:3~9, 막 10:6~9). 게다가 예수님은 첫 번째의 사람 부부는 창조 후 수십억 년 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경을 '빅뱅 이론'으로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도덕성에 관한 내용인 십계명에서도, 역사를 배제하면 그것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네번째 계명, 즉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확실히 '창조 주간(Creation Week)'의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출 20:9~11)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태초의 일들(창조의 사건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일들(즉 믿음과 도덕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위(authority)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질문들이 있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당신들은 창세기가 의미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만큼, 세례, 안식일, 예정론 대 자유의지, 마지막 날, 주님의 축복, 교회의 형태들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이 모든 논쟁들은 성경만이 권위(the Bible is authority)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과거 지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성경(the Bible)이 그 권위가 있는지, 현대 과학(modern science)이 그 권위가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성경은 태초에 그곳에 계셨고, 오류가 없으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창조주의 목격을 기록한 책이다. 예수님도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0:35). 그러나 과학자들은 태초에 그곳에 있지 않았으며(욥 38:4),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실수투성이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은 성경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 하라는 요구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대답하기 위해서 대답하지 말라'의 글(p.43)에서 논했던 것처럼,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대답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효과적으로 성경이 진리라는 주장을 포기하도록 하고 있으며, 패배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진리의 최종적인 결정권자라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믿지 않는 자들의 죄악된 견해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관련기사  : 양승훈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창조론 오픈 포럼 대표 >에서 창조과학회의 '젊은 지구론' 비판. "성경이 과학교과서라는 주장은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다." (2008. 8. 11. 뉴스파워)

(반론)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과학책이라고 주장하는가? (2017. 3. 22.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but-genesis-is-not-a-science-textbook

출처 - Creation 26(4):6, September 2004.



미디어위원회
2005-03-23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김정훈 


      얼마 전의 일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아담과 이브도 우리 처럼 배꼽이 있었는가 하는 쪽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은근히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필자의 두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 보니, 둘 다 대답이 같게 나왔다. 아담과 이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배꼽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실이 고맙고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아이들이 놓치고 있음을 발견하고 조금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다. 성경은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 2:7). 즉, 이 말은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엄마의 자궁 속에서 수태되어 지은 바 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사실은 이브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브 또한, 누구의 뱃속에도 들어 있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는 과연 우리 아이들의 대답대로 배꼽이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기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필요한 영양분을 탯줄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공급 받고 있는데, 아기가 출생하게 되면 이제 이 탯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출생과 동시에 잘라 버리게 된다. 배꼽은 바로 이 탯줄이 붙어 있던 자리가 흔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적당한 기간을 보내고서야 출생을 하게 되므로, 따라서 누구나 예외 없이 그 증거로서 배꼽을 자신의 배 한 가운데에 지니고 다니게 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 없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배꼽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드신 아담과 이브가 유일한 그 예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치고 이제는 바뀌어진 아이들의 대답을 기대하면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뜻 밖에도 이번에는 두 아이의 대답이 다르게 나왔다. 큰 아이는 아직도, 그래도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을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비록 그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 존재치 않았었다 하더래도 그 뒤에 나오는 그들의 자손들과 서로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배꼽을 따로 만들어 붙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만 우리 모두는 서로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래 그거야 진짜 하나님만 아실 일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 그 날의 대화는 끝을 내렸는데, 그날 밤에도 필자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에게는 우리와 같은 배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이 없다면, 배꼽 없는 그들을 바라 볼 때 마다 그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의 기원에 대한 무엇 보다도 확고 부동한 창조론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가 배꼽 없는 그들을 보면서 감히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지구의 나이가 수 십억년이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는 당시에 같이 살았던 후손들에게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은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의 나이를 헤아림으로서 지구의 나이를 또한 가르쳐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아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굳이 가짜 배꼽을 만들어 부치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담의 배꼽과 관련지어 이따끔씩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조롱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대로라면 남자의 갈비뼈 수가 여자 보다 하나가 모자라야 하는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으로 성경이 한갖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창 2:21-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셔서 이브를 만드셨다고 되어 있으므로,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갈비뼈 하나를 아담이 상실했다 하더래도 그의 자손은 여전히 완전한 수의 갈비뼈를 갖고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이와 같은 현상을 가르켜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말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쉽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가령 우리가 살면서 사고로 눈을 한 쪽 다치거나, 팔을 하나 잃어 버리게 되었다고 하였을 때, 그 뒤로 부터 태어나는 모든 우리의 자손들이 팔이나 눈이 하나인채로 태어 난다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새로이 얻게 된 소위 '획득 형질'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로 '유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관찰을 통하여 아는 사실은, 아무리 우리가 사고로 팔 다리를 잃게 되었다 하더래도 여전히 우리의 자손은 두 팔과 다리를 갖고 태어 난다는 사실이다. 과거 19세기에 프랑스의 라마르크라는 사람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기린의 목이 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기린의 목은 그리 길지 않았었는데,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열매를 따먹으려고 자꾸 목을 뻗침으로 목이 길어지게 되었고, 그 뒤 그의 자손들이 그 형질을 물려 받아 그 뒤로는 기린의 목이 모두 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가리켜 '용불용설'이라고 불렀는데, 그 뒤 유전학적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되었고, 따라서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전학에 있어서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이같은 유전학적 법칙에 비춰 볼 때,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잃은 사실은 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요 그의 자손에게는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 일임을 쉽게 알 수 있음으로, 따라서 성경의 이 기록을 가지고 오늘날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의 갈비뼈와 그 숫자가 같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의 기록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놀리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과연 아담이 하나님께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심으로 평생 갈비뼈 하나가 모자라는 채로 그의 생을 살았을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몸을 잘 관찰해 보면, 갈비뼈는 골막이라고 하는 섬유성 조직에 의하여 덮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골막 조직은 바로 그 안에 뼈를 만들어 내고 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함으로, 이 조직만 살아 있으면 갈비뼈가 다시 재생되어 생겨 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병원에서 갈비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더래도 의사들이 이 골막 조직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라내면, 차츰 갈비뼈가 재생되어 수술 후에 곧 상처가 아물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 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우고 갈비뼈를 꺼내는 수술을 하실 때 왜 이 골막 조직을 남겨두고 수술하지 않으셨겠는가? 어쩌면, 아담의 갈비뼈는 얼마 후 멋지게 재생이 되어 하나님의 수술로 인한 아무런 불편도 겪지 않고 지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성경이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쉽게 씌여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훈련이 부족하다. 가령 우리는 노아의 홍수로 인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와 바뀌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데, 성경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면, 창세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의 배꼽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이들 처럼, 성경의 기록에 충실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놓치게 된다. 바른 성경의 이해는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창조과학은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잘못된 성경의 이해를 바로 잡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그 기록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의 정립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5-03-22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김정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혹은 훈련의 부족으로 알고 있는 사실도 잘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내에서 역사적이나 과학적 사실성을 요구하는 구절에 가서는 전혀 답변을 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그냥 지나쳐 버리던지 아니면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우리들의 제한된 지식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또한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한 번쯤은 궁금해 보았을 대표적인 질문은 바로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질문 같지만, 그래서 왠만한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 같은 것은 별로 안해 보았을 내용이지만,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질문 하나도 그 답이 교회에서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 얼마든지 한 사람의 영혼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의 믿음을 실족시킬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성경을 연구하고 그에 걸맞는 훈련을 받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 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의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보았다는 라는 천체 우주 documentary program으로 유명한 Carl Sagan 박사는, 그의 자서전격인 소설 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 다녔었던 적이 있지만,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 궁금했었고, 그에 대한 답을 교회서 얻지 못했을 때, 차츰 성경을 불신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교회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Carl Sagan은 그 후 철저한 진화론자로 탈바꿈 하여, 인간 보다 고등한 외계의 생명체를 찾아 보겠다고 수억의 돈을 투자하여 설립한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외계에서 오는 radio 신호를 찾는데 그의 일생을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낙태를 옹호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결국, 사소한(?) 질문에 답변이 준비되지 못했던 교회는 한 사람의 영혼을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반기독교 인물을 배출하는데 간접적인 역할을 하고만 셈이 되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열려 세인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소위 원숭이 재판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으로 잘 알려져 있던 William J. Bryan이 피고측 변호인으로 나섰던 Clarence Darrow의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는데, 여기서 Bryan은 특히 여러 가지 난해한 성경구절들을 골라 질문해대는 Darrow에게 이렇다 할 답변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후에 이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마치 그가 무식하고 근시안적이며, 맹신적인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도 되는 양 media에 묘사되는데 이용당하게 되었다.

 

Darrow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복음의 내용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고, 사회적인 여러 가지 issue에도 관심이 많았던 Bryan이었지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성경의 몇 가지 구절들이나 그와 관련된 질문들에는 미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마치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 전체가 비합리적이고 맹신적인 믿음의 바탕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세인들에게 주고 만 것이었다.

 

자, 그러면 과연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 그 답을 찾아 보기로 하자. 우선, 성경은 아담이 첫 사람이며 (고전 15:45), 그의 아내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고 (창 3:20) 기록하고 있으므로,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성경은 아담이 930세 까지 살았으며, 그 동안에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창 5:4-5) 있으므로, 아담의 큰 아들인 가인에게는 배필로 삼을만한 그의 여동생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자손들이 계속하여 인구를 늘려갔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가인은 필경 당시 아주 큰 인구를 이루었을 아담의 자손 중에서 아내를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당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을(창 1:28)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류가 번성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이 같은 근친간의 결혼은 불가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의 결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게 되다가, 모세의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율법(레 18-20)으로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또한 근친간의 결혼을 통한 유전적인 위험성도 상당히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류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유전인자에 여러 가지 환경 요인으로 인한 결함이 많이 늘어나게 되고, 근친간의 결혼은 이와 같은 유전적 결함을 유전병으로 발현시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이후 초기의 인류에게는 근친 결혼을 하더라도 아직 이같은 유전적 위험이 나타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얼마 되지 않은 때이므로 매우 건강하고 장수하였음을 성경에 나타나는 족장들의 나이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성경을 잘 읽어 보면,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족장들의 나이가 급격히 감소함을 발견할 수 있어, 아담이 창조된 때부터 홍수 이전 까지의 대기와 환경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장수하기에 적합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인이 범죄한 후에 만나기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성경에 보면, 가인이 범죄 한 후에 아담은 셋을 새 아들로 얻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3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5:3).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고, 세대 당 평균 8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가정하면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건강과, 자손을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고려할 때 비교적 적게 잡은 숫자이다), 아담의 나이 130세가 될 때에는 이미 5세대를 지나 적어도 2000명 이상의 인구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인이 범죄 하였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미 상당히 많은 수의 아담의 자손들이 주변에 퍼져 살았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가인은 범죄 한 후에 땅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만나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였는데 (창 4:14), 이들은 바로 다름 아닌 주변에 흩어져 살던 가인의 친족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 역사책은 아니요, 과학책은 더더구나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어떤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기록이 나올 때는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가인이 만나기를 두려워 했다는 사람들이나(창 4:14) 그가 결혼하여 아내를 얻었다는(창 4:17)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추적하여 그려보면, 별 어려움 없이 역사적 사실로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아무런 모순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접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성경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라 (사 34:16). 하나님께서 그 답을 주실 것이다. 적어도 제 2의 Carl Sagan 같은 이는 나오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5-03-21

다시 생각해보는 창조의 순서와 그 내용

김정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성경에 관하여 많은 질문을 받게 되는데, 한 번은 어떤 교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질문을 받게 되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식물이 먼저 창조되고(1:11-12)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식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필자 자신도 같이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기회에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각각의 창조의 순서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창세기 2장의 성격부터 분명히 이해해 보도록 하자. 앞서 1장에서 연대기적인 창조의 기술이 있은 후 그 결론이 2장 3절까지 이르러서 일단락을 지음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2장 4절이 뒤에 나오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Westminster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 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대략'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 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열 번이나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 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 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이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장 5절은 분명히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들'과 '밭'은 동일한 원어에서 나온 단어로서 인간의 농사를 암시하고 있는 단어라는 점이다. 실제로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들의 초목(plant of the field) 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라는 말에서 같은 field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같은 사실은 5절 앞부분에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사실 밭(field)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얻게된 결과로써,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면서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얻어 낼 수 있는 땅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결국 5절에 기록된 내용은 앞서 1장에서 창조의 셋째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표현된 지상의 모든 종류의 식물이 '땅'에는 이미 창조되었으나(1:11-12),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땀흘려 농사 지으며 가꾸게 될 '밭'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2:5)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그럼 여기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지구와 함께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2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여 지구에 첫째 날을 되게 하셨다(3-5절). 여기서 창조된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주의 어딘가 에서 단지 지구를 비추는 빛의 근원에 대한 창조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말할 것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이 빛을 비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후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 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태양이 있기 전에 만들어 졌어도 다음 날 태양이 나올 때까지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이미 그 잎사귀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같이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태양이 창조됨으로써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을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와 물 속의 생물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이때 다시 한 번 'bara' 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아마도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동물을 창조하실 때 새로이 창조하신 것 같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soul' 로 보는데, 꽤 설득력이 있는 생각이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러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지으시는데(24-31절),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시 한번 'bara'가 사용됨으로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는 근본적인 새로운 것을 사람에게 새로이 창조하여 주심을 볼 수 있다. 동물을 포함한 모든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 'spirit' 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칠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억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오히려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수억년 동안을 태양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억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 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4-11-18

가인이 두려워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김무현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특히 진화론자들)중에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그의 아내는 어디서 얻었으며, 그 가인이 주위에 무서워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성경이 그 자체적으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창세기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신화와 같은 책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질문은 1925년에 테네시주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에서 유창한 ACLU의 변호사 대로우(Clarence Darrow)가 성경을 믿을 수 없는 근거로 내 걸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성경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1-2절로 보아 가인과 아벨이 첫째와 둘째 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4:3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라고 되어 있고, 그 후,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유리 방황하다 놋 땅에 거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창세기 4:25을 보면 셋의 출생은 아벨의 죽음 바로 다음이며(그래서 아담이 셋을 ”아벨대신 얻은 자(replacement for Abel)”라고 불렀음) 창세기 5:3을 보면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출산 가능한 성인으로 창조되었음은 성경이 말하는 바이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문화명령 중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Be fruitful and multiply)” (창세기1:28)가 중요한 요소 였음을 고려한다면, 가인과 아벨의 출생 후 아벨이 죽고 셋이 태어나기까지는 120년 정도 이상의 기간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5:5에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음을 감안한다면, 그 120년 동안은 하나님 명령에 충실하게 많은 자녀들을 낳았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따라 또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고, 이 과정이 120년 동안 계속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당시 공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 4:14의 가인이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했던 사람들이 가인이나 아벨과 전혀 관계가 없던 다른 족속(race)이었다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알았다 한들 죽이려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마도 그들도 아벨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왜 구체적으로 다른 자녀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창세기 5:4을 보면 아담에게 많은 자녀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선택하여 주신 메시지입니다. 아마 창조에 관한 기사만 해도 하나님께서 미주알 고주알 다 쓰셨다면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체의 분량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25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25)

성경에서는 계보를 기록할 때, 이러한 원리로 꼭 필요한 사람들만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출생 후 120여 년 동안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가 셋이 태어났다고 해석한다면 오히려 더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이외에도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든 것이 아니냐?” (유신론적 진화론자 또는 진화론자들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화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겠지만)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분명히 우리들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며, 그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시작되었고(그 때문에 그 후손들은 영적으로 눈먼 상태로 태어남),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둘째 아담(예수)으로 피의 언약을 완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은 대단히 비성경적 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사도행전 17:26)

최근 진화론 과학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창세기와 사도행전 17:26 말씀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많은 종족의 미토콘드리아 DNA(반드시 모계로만 승계됨)를 자세히 분석한 결과,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한 여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연구발표가 권위있는 진화론 저널에 몇 차례 발표되었습니다. 이 연구 후, 다른 연구팀에 의해서 많은 종족의 Y염색체(Y-Chromosome: 부계로만 승계됨)를 자세히 분석하여, 모든 종족이 한 남자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는 같은 결론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연구결과들은 그 동안 진화론자들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현 인류가 지구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견해를 뒤집고 미궁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자연주의에 세뇌된 진화론 과학자들이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로마서 1:21-22)

그들은 ”동시에 진화되어 온 여러 다른 종족들이 있었을 텐데, 그 중에 오직 한 여자, 한 남자의 자손들만이 다른 종족과 하나도 섞이지 않은 채로 현재의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었으며, 다른 종족들은 이유는 모르지만 모두 멸종되었고, 그 후손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였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하여튼, 진화론자들은 굉장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또, 성경을 비판하는 진화론자들이나 일부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한 부모의 자녀들이 서로 결혼하게 되면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아담과 하와로부터 인류가 퍼지기 시작하였다는 창세기의 기사가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첫째 인류 아담의 불순종의 원죄 이후 모든 피조세계는 저주를 받고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돌연변이(genetic mutation)는 유전자 복제시 이상이 생긴 것으로서 이 중의 한 현상입니다. 타락 이후, 이 돌연변이(genetic copy error)가 계속 후 손으로 전해지고, 그것들은 점점 증가되며 누적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유전자는 아버지로부터 반, 어머니로부터 반을 물려받게 됩니다. 부계나 모계의 유전자중에는 돌연변이에 의한 비정상 부분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만약 유전적으로 관계가 먼(즉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녀가 결혼하게 되면, 이러한 반쪽의 유전자에 있는 카피 에러가 정확히 겹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줄어들며, 반대로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즉 가까운 친척 안에서) 남녀가 자녀를 낳게되면 그 카피 에러가 겹칠 확률이 매우 커집니다. 만약에, 부계와 모계의 카피 에러가 정확히 겹치지 않으면 정상의 것이 비정상의 것을 수정하도록(override) 되어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정확히 겹칠 시에는 수정이 불가능하고 그러므로 유전적 결함을 갖는 기형아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근친결혼을 법적으로 금지시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돌연변이가 계속 증가하고 대대로 누적되며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 현상이지, 처음의 아담의 후손 시에는 그런 문제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 홍수심판 후 노아의 후손들 사이에서도 매우 희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갈수록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8장을 통해 근친 결혼 불가법 (The law forbidding marriage between close relatives)을 주시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계십니다(물론 모세는 이러한 유전학적 이유를 몰랐을 터이지만).

이러한 유전학적 사실들은 진화론 유전학자인 마르쿠스(John Marcus) 박사가 ”인류가 과거 초기에는 유전적으로 매우 강하였으나, 돌연변이가 많이 누적된 현생 인류는 유전적으로 매우 약한 상태”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진화론 측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학설입니다.

결국, 가인의 아내는 아담과 하와의 수많은 후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이 두려워 한 사람들도 그 후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족인 아벨의 죽음에 대해서 그토록 흥분하고 가인을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가인과 아벨과 전혀 관계가 없는 동시 다발적으로 진화한 사람들이었다면, 오히려 자기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인이 두려워 떨 만큼 그토록 흥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크리스챤들이 스콥스 재판에서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 성경은 불신자들이나 진화론자들에게 아주 우스운 책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진 책(God breathed words: 디모데후서 3:16)입니다. 진화론으로 세뇌된 우리들이 함부로 ”이러한 성경구절은 상식이나 과학에 맞지 않아!”하며 성경의 권위나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역대상 29:11)

이재만
2004-09-14

창세기 1장 (33) - 완벽하게 끝맺은 창조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1)


창조의 끝에 성경이 여러 번 강조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마치셨다'는 의미이다.  2장 1절에는 창조를 다 이루니라(completed), 라고 되어있으며 2절에는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마치시니(By the seventh day God completed His work)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done)'라고 하셨다.  3절에도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라고 하셨다.


창조역사가 마쳤다는 말씀은 완벽한 창조를 드러내는 '하나님이 지으시던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는 구절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전하게 끝마치셨다는 의미이다.  창조는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실로 완벽한 창조를 마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


만약에 기원에 대한 어떤 이론이 창조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성경과 위배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어떠한 기원모델도 창조역사가 그쳤다고 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라고 말하며 진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찾으려고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대표적인 진화모델인 빅뱅이론도 지금도 우주는 진화하고 있으며 지금의 진화하고 있는 모습을 찾으므로 과거로부터 우주가 진화했음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렇게 완전하게 이루어진 피조세계는 바로 인간의 죄로 인하여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롬 5:12).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이 완벽한 세계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죄를 짓기 전 아담과 같지 않으면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존재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 (고전 15:45).  바로 죄를 짓기 전의 완전했던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과 같이할 완벽한 세상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 5:17).


기독교적 세계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완벽한 창조와 인간에 의한 타락과 저주, 그리고 그리스도 구속을 통한 완벽한 세계의 성취를 말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올 소망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확신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창조모델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나올 수가 없으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인간타락 전의 모습인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서이다.


진화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과 거꾸로 시작은 불안정하고 점점 완벽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생존경쟁을 통하여 미래가 열린다고 말한다.  복음을 통한 소망을 흔들어놓았다.  바로 창세기를 흔들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죄로 인하여 더욱 완벽이 깨어지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사실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여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09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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