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태동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진화론의 태동

임번삼 


       진화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커티스 등은 "진화란 유전자풀에서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형질빈도(alleles frequency)의 모든 변화"라고 말한다. [Helena Curtis, N. Sue Barnes; Biology, 5th ed, Worth Publishers, p974, 1989]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을 컬쿳(Kerkut 1960)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요약하였다. [G.A. Kerkut; Implication of evolutionism, p6, 1960]

(1) 무생물에서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

(2) 자연발생은 단 한번 일어났다.

(3) 바이러스, 세균, 동식물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4) 원생동물에서 후생동물이 발생하였다.

(5) 여러 무척추동물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6)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이 발생했다.

(7) 척추동물인 어류에서 양서류, 양서류에서 파충류, 파충류에서 조류와 포유류가 발생했다.


  진화론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 단계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합성되어 안정된 반응계를 형성한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이다. 둘째 단계는 안정된 반응계가 자기복제능력을 가진 원시세포로 발전하는 생명발생(origination of life)의 과정이다. 셋째 단계는 원시세포가 장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동식물과 미생물종으로 분화한 생물진화(biological evolution)이다. 첫 단계는 오파린의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 1937)에 집약되어 있으며, 밀러와 유레이 및 폭스가 실험적으로 증명하고자 시도했음은 앞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둘째 단계는 중세기의 생명의 자연발생설이며, 셋째 단계는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에 의해 점화된 것이다.

  진화론의 탄생근거는 동식물의 형태적 유사성, 생명현상이나 유전자기능의 동일성, 같은 종 내에서의 변종출현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하등한(?) 생물로부터 고등한 생물로 발전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믿음 위에 가설을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경계하는 선입관(先入觀)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생물의 진화론은 다윈이 주장하기 이전부터 있어 온 사상을 다윈이 자기 이론으로 정리하였을 뿐이라고 드프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조상의 생물종으로부터 변이에 의해 신종이 생성된다는 진화론은 다윈 이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것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95), 라마르크(1809),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및 체임버스(Robert Chambers 1844) 등이 그 예이다" [A. De Veris; The Enigma of Darwin, Clio Medica 19(1-2), 136-155, p 145, 1984]

  유럽의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이면서 <자연과학과 신학간의 전쟁시대>였다. 이러한 싸움은 그리스의 자연에 대한 점진적 적응사상이 자극을 준 것이다. 다윈이 한 일은 오직 세계관적인 이론을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였다. [A. Desmond; The Politics of Evolution, p 1,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진화론의 성립과정을 정리하면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표 1). 이 표에서 보듯이 진화론은 명백히 상상에 의존하여 만든 추리소설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은 비약의 연속이기 때문에 매우 드라마틱하며 강한 믿음이 없이는 수용하기 힘든 시나리오이다. 첫 장면은 원시대기의 주성분으로 추측되는 환원성 가스들이 번개의 방전에너지로 결합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이 비에 녹아 원시해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물질들이 교질상의 원시바다에서 햇빛의 작용으로 서로 결합하여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입자가 되고, 이것이 외부에 있는 핵산과 단백질분자를 흡수하여 단백질상의 구형입자(proteinoid)로 발전하면서 무기호흡계가 발생한다. 이것이 발달하여 광합성능을 가진 독립영양체인 원시세포(protocell)가 되면서 산소를 방출하기 시작한다. 산소는 대기권으로 올라가 오존층을 형성한다.

  이러한 원시세포들이 해중의 세균류가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동식물로 방산진화한다. 유해로운 우주광선이 오존층에 의해 차단되면서 해중생물이 육상으로 올라  온다. 그 과정은 해양척추동물이 양서류, 파충류, 설치류, 조류, 포유류(類人猿), 영장류를 지나 마침내 오늘의 인간으로까지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생물들은 진화를 계속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또 다른 동물로 바뀔 것이라는 예고편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인류의 이름을 그들은 이미 에데노피테쿠스(Ethenopithecus)라고 명명까지 해 놓은 상태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완전히 추리에서 출발하여 예측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추리는 자연과학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물질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생성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므로 인간존엄성을 굳이 내세울 근거도 없어지게 된다. 다른 동식물들보다 머리가 좋은 탓에 만물을 지배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다른 동물집단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인종을 개량하자고 진화론자들이 인종우생학(人種優生學 Eugenics)을 설립한 것이 120 년전(1883년)의 일이다. 흡사 공상소설에서나 나옴직한 이러한 가설이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가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진화사상의 기원은 그리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레토스학파(700 BC)는 물질에서 생명이 저절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611-546 BC)는 흙으로부터 식물과 하등동물이 생겼고, 인간은 어류로부터 진화한 것이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특히 동물학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동물의 종류를 에이도스(eidos)라 하였고 비슷한 에이도스를 모아 게노스(genos)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생물의 진화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생물의 계통을 나열한 자연의 사다리를 작성하기도 하였다(그림 2).

  다윈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연'이라는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고 종의 기원(1859, 1872년판)에서 주장했으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우연론이 어떻게 불가능한 것인지 논증하였다. 그는 자연의 과정에서 우연으로는 자연계의 현상이 일어날 수 없으며, 자연 속에 내재하는 어떤 힘(계획과 아이디어)에 의해 수행된다는 목적론적 자연관을 설파하였다. 이는 우연에 의해 자연선택이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자연선택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로마시대부터 1,500여년 간은 기독교적 창조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시기였다. 중세기가 지나면서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나타나면서 현대진화론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헬몬트, 뷰퐁, 니이담, 푸셰 등의 생명의 자연발생설, 라이엘의 지질학(geology), 라마르크 등의 생물진화론, 라매뜨리의 인간기계론, 생물분류학(taxonomy), 해부학(anatomy),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그리고 말서스 등의 인구론을 비롯한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출현이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요인들이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라이엘 등을 중심으로 한 지질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생물진화론의 씨앗이 프랑스에서 뷰퐁과 라마르크를 중심으로 싹을 피워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두 요소가 합하여져 다윈에게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1. 생물분류법의 수립

  18세기까지는 '종(種 species)은 불변'(immutability)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종이란 마이어(E. Mayre)가 제안했듯이 '상호교배가 가능한 집단'을 말하며, '자연집단 내에서 같은 유전자 풀(pool)을 이루고 있으면서 다른 무리와는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무리'라 정의할 수 있다. 진화론에서는 종이 분화를 일으키는 요인으로서 지리적 격리(geographic isolation), 생식적격리(reproductive isolation), 이질배수성(allodiploidy)을 든다.

 18세기에 창조과학자인 스웨덴의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 사진 1)는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 1735)라는 불후의 저서를 통하여 생물의 이명분류법(二名分類法)을 확립하였다(사진 2). 그 분류체계에서 인간을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 분류하였다. 그 자신은 진화론에 반대하고 창조주에 의한 창조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물분류체계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역설적으로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종은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린네는 사람을 영장류의 일종으로 분류했으며, 분류학상 어느 종으로도 분류하기에 애매한 잡종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 용불용설과 후천획득형질 유전설

 프랑스의 뷰퐁(Buffon 1707-1788)은 <박물지>(1749)에서 "생물은 환경의 영향, 특히 먹이와 온도가 생물의 변화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뷰퐁의 박물지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다윈 이전의 최대의 진화론자로 알려진 프랑스의 해부학자 라마르크(Jean Beptiste de Lamak 1744-1829)였다. 그는 <동물철학>(Phylosopie Zoologique 1809)과 <척추동물지>(1815)에서 "생물은 환경이 변하면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변한다. 생물의 기관은 사용할수록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그리고, 퇴화하거나 발달한 형질은 다음 자손에게 전하여 져서 진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진화에 시간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생물은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서서히 변한다고 하였다. 또한, 동물의 기관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많이 사용하면 발달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 Theory of Use and Disuse 1809)과 후천적으로 얻어진 형질은 유전된다(aquired character inherited)는 획득형질유전설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험적인 비교해부학과 분류학을 주장한 큐비에의 '종의 불변설'과 대치되어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가설들은 후일 학문적으로 부정되었으나 종의 진화사상을 확산시키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였다. 다윈은 라마르크의 자연선택현상을 설명하면서 용불용설을 인용하였다. [S.J. Gould; Leonardo's Moutains of Clams and the Diet of Worms, Harmony Books, p 4, 1989]

  오켄(Lorez Oken 1779-1851)은 <자연철학 개요>(1809-11)에서 "동물은 그 발생기간에 동물계 전체과정을 경과하며 태아는 전체의 동물망을 일시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계통발생설(系統發生說)을 주장하였다.

 

3. 인간의 진화론

   뷰퐁(1707-1788)은 "원숭이와 사람은 공통조상을 가졌었다"고 하였다. 다윈의 조부이며 박물학자인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동물학>(Zoonomia 1794-1796)에서 생명은 해중에서 발생하여 양서류, 육상동물, 원숭이를 거쳐 사람이 되었다고 했으며, 환경에 대한 적응(adaptation)이 진화의 요인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다윈이 태어나기 7년전에 죽었지만 독일어로 쓰인 에라스무스의 영어번역본은 다윈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rnst L. Kraus; Erasmus Darwin, translated by W.S. Dallas, J. Murray, London, 1879] 후일, '다윈의 불독'으로 알려진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는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1863)라는 저서에서 인간의 동물기원설을 주장하였다. 다윈의 또 다른 추종자인 독일의 헤켈도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하였다.

 

4. 지질학과 화석

  생물학계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다윈의 진화론형성에 큰 영향을 준 분야가 19세기에 부상한 지질학(geology)이었다. 당시에 학계에서 수용하고 있었던 격변설(激變說 catastrophism)에서는 지층이 대홍수에 의한 격변적 변화로 급격히 형성된 것이라 가르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지질학 원리>(Principle of Geology 1830-33)에서 지층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된다는 동일과정설(同一過程說 uniformitarianism)을 주장하였다(사진 3). 라이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허튼(James Hutton 1726-1797)은 <지구의 이론> (Theory of Earth 1795)에서 '지형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서서히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며 '현재는 과거의 열쇠'(The present is the key of the past)라고 하였다. 동일과정설의 핵심이론은 '장기간'과 '서서히'라는 말속에 압축되어 있는데, 이 용어들은 후일 다윈의 진화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격변설에서는 지구의 역사가 매우 짧다(10만년 이내)고 했으나, 동일과정설에서는 지층을 12개로 구분하고 지구역사가 운석의 분석결과를 토대로 46억년이라고 주장하였다. 라이엘은 다윈에게 영국에서 과학연구를 계속하려면 저서 속에 종교문제를 다루지 말도록 충고를 받았으며, 다윈은 이 충고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Himmelfarb 1968) 여기에 곁들여 지층 속에서 발견되는 화석(化石 fossil)이 또 다른 논쟁거리로 등장하였다. 화석은 라틴어 포실리티스(fossilitis; 땅에서 파낸 기묘한 물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옛 화석에 나타난 생물의 종류가 현재의 생물종과 다른 이유는 그러한 생물들로부터 현재의 생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이엘은 화석종과 현재 생물이 다소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종이 변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진화론자들을 비판하였다.

  층서학(層序學)의 시조로 불리우는 큐비에는 화석은 홍수에 의한 격변시 생성되었다는 격변설(또는 천변지이설 catastroph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파리근교의 몽마르뜨에서 발굴한 화석들(1796)을 연구 분석한 <화석골에 대한 연구>(1812)를 발표했으며, 화석뼈들을 모아 처음으로 동물의 모습을 복원하였다(사진 4). 그는 27회의 격변 후 최종적으로 전지구적인 노아 홍수에 의한 격변이 일어났었다고 주장하였다(1812). 격변설에서는 화석이 격변에 의해서만 생성되며 중간종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다윈은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되면 중간종(transitional forms)도 무수히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중간종의 화석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화석은 진화론을 괴롭히는 최대의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5. 자연신학과 자연철학

  19세기에 풍미한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속에는 자연을 이끌어가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후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로 하여금 범신론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하였다. 그의 사상은 중세기에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따라 카톨릭교회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침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자연철학은 자연을 신비화함으로써 환경보호에 기여했으나, 자연과학의 발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자연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연신학(自然神學 natural theology)은 자연계에 나타난 신의 능력과 신성(롬 1;20)을 노래하면서 모든 생물이 자연에 적응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신비속에서 신의 설계와 신의 의지를 찾고자 하였다. 큐비에의 제자인 하버드 대학의 아가시즈(L. Agassiz)는 <분류에 대한 고찰>(1857)에서 "생물계는 유일한 지혜와 위대성, 전지성, 통찰, 섭리를 잘 보여준다.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인간은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다윈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배웠던 그의 스승 패일리(William Paley 1743-1805)에게 일생동안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자연환경에 대한 생물계의 오묘한 적응현상을 신의 존재론적 증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다윈은 생물들이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현상에서 생물의 적자생존에 의한 자연의 선택(natural selection)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다윈은 학부과정에서 고전, 수학, 신학을 공부했는데, 패일리의 <기독교의 증거>와 <도덕과 정치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패일리는 자연계의 오묘한 조화는 지적설계자(Master Designer)인 창조주의 솜씨(Creator's Hand)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에 대해 연구한 진화론자인 헉슬리는 해석하기를, 패일리가 신이 자연을 창조한 후에는 우연에 의해 발전해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이며 진화론적인 사고를 받아들인 경향이 있다고 분석하였다. [Francis Darwin ed; Charles Darwin, life and letters, 3 vols, 2;202, John Murray, London, 1887] 그래서, 패일리의 신은 종종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연선택사상은 다원 이전에 웰스(William Charles Wells 1813), 월레스(Alfred Russel Wallace 1858), 체임버(Robert Chamber)등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다윈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가 체임버의 <창조의 자연사적 증거들>(1844)을 보지 못했더라면 <종의 기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F.G. Crookhank; The Mongol of Our Midst, p 4, E.P. Dutton & Company, New York, 1931] 체임버는 인종이 진화와 퇴보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Crokshank 1931).

  다윈은 그 후, 보수주의적인 캠브리지나 옥스퍼드대학 대신 자유주의적인 에딘버러대학으로 전학하여 지질학자 및 라마르크주의의 동식물학자들과 만나면서 진화에 대한 기초를 쌓게 되었다. 그는 불신자들(부모, 형제, 친구들을 포함한)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성경내용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불신자로 돌아서게 된 것으로 전한다. [Nora Barlow;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1809-1882, p 87, Collins, London, 1958]

 

6. 유물론과 사회과학

  다윈이 후일 비글호(The Beagle)로 항해하면서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와 더불어 가장 애독한 책이 말서스(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人口論 Essay on the Principles of Population 1798)이었다. 인구론에 나오는 "식량생산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이나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이다...이러한 불균형은 기근, 지진, 혁명, 전쟁 등에 의해 인구가 조절된다"는 글을 읽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개념을 도출하였다. 그는 후커에게 보낸 편지(1838. 10)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말서스의 인구론을 읽었는데..... 생물이 경쟁상황에서 적절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살아 남고 적응치 못하면 도태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런 생존경쟁의 결과라면 신종(新種)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공산주의자인 엥겔스(Engels)는 생명을 '단백질의 한 존재양식'으로 규정하였으며, "진화론은 유물론의 한 기둥"이라 하였다. 막스(Karl Marx)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환경에서 생물들의 경쟁은 계급간의 경쟁과 관련된다"고 했으며 다윈의 생존경쟁을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 속표지에 "챨스 다윈 선생님께,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칼 막스로부터" 라고 서명하여 다윈에게 기증하였다(사진 5). 이러한 사실에서도 진화론과 유물론간의 긴밀한 학문적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Nation 1776)에서 "자유경쟁의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룬다"고 하였다. 다윈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도태에 의해 모든 것이 스스로 진보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진화론은 당시에 부르조아 계급의 주요한 정치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사회를 하나의 통합적인 생명체로 해석하는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진화(evolution)'라는 용어의 보급에 앞장을 섰고,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획득형질의 유전과 자연선택설을 지지하였다. 그가 만든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원리를 합리화함으로써 인종차별과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정책의 합리화에 이용되었다.

 미국의 프랭크린(Benjamin Franklin 1706-1790)도 영국의 사회주의적인 단체(Moon Club)의 회원이었으며 [Taylor; ibid, p 55], 유니테리언이었던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는 사회주의적인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다가 미국으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Taylor; ibid, p 56]

 

7. 인공육종실험

  다윈은 당시에 유행했던 동식물의 육종실험으로 변종이 탄생하는 것을 보고 여기에 '장기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계속되면 신종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험적 세계에 상상의 날개를 달게 한 것이다. 그는 <종의 기원>(1859)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자연계에서의 도태는 인공교배보다 훨씬 더 정교한 것이다...자연계의 생물들은 한없이 복잡하며 격심한 조건에 순응치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8.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 밖에도, 오랜 중세 암흑기에 인간을 억압했던 종교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및 18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도 다윈의 진화론 형상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물진화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몽테스큐(Chales de Secondat Montesquieu 1689-1755)로 그는 "태초에 매우 적은 종으로부터 다양한 생물로 증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마일레(Benoit de Maillet 1656-1738)는 "물고기가 조류, 포유류, 사람의 조상"이라고 했으며(1748), 백과사전학파인 디데로(Diderot)는 "원시동물로부터 자연에 의해 오늘의 모든 동물들로 발전했다"고 하였다.

 

9. 유니테리언 가문과의 교제

  다윈의 가문은 유니테리언인 웨지우드 가문(Josiah Wedgewood's family)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죠시아 웨지우드는 다윈의 조부인 에라스무스 다윈의 친구였다. 이들이 다니는 유니테리언 교회에는 산소의 발견자인 화학자 플리스틀리(Joseph Priestley)도 포함되어 있었다. 찰스 다윈도 청년시절에는 유니테리언이었다. 죠시아의 딸인 수산나(Susannah)는 다윈의 아버지인 로버트 다윈(Robert Darwin)과 결혼하였다. 찰스 다윈은 어머니의 조카인 에마(Emma Wedgewood)와 근친결혼을 하였다. 다윈의 큰 누나는 웨지우드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다윈 가문과 유니테리언신앙의 웨지우드 가문이 3대에 걸쳐 겹사돈관계를 맺으면서 긴밀한 혈연관계를 갖게 되었다.

  유니테리언은 후일 다윈의 진화론을 교회 내로 이끌어들이는 중심적 역할을 함으로써 유신진화론의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버드대학을 유신진화론으로 바꾸게 한 아사 그레이이다. 그는 다윈의 친구로서 교제를 계속하였으며, 미국에 진화론을 도입한 <진화론 전도사>였다. 여기에서 의문이 되는 점은 왜 다윈 가문이 웨지우드 가문과 대대로 결혼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그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사회에서는 명문계급간에 우수한 집안끼리 결혼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이미 부정된 라마르크의 후천 획득형질의 유전설을 다윈이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Taylor; ibid, p 127]

  그러나, 이렇게 의도적으로 육종되어 태어난 근친간의 자손은 병에 걸리게 된다. 찰스 다윈의 10명의 자손이 이를 증명한다. 한 딸(Marry)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앤(Anne)은 10세에 죽었다고 한다. 장녀(Henrietta)는 15세에 정신분열증에 걸렸고, 6남중 3명은 다윈이 표현한대로 잦은 병으로 '쓸모 없는'(semi-invalid) 존재가 되었으며, 막내아들(Charles Jr.)은 지능저해자로 태어나 9개월만에 죽었다고 한다. 레오날드 다윈만 제대로 자라났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다윈 자신도 일생을 갖가지 병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윈슬로우(J. H. Winslow)는 그가 비소축적 독에 걸렸다고 했으며(Colp 1977), 애들러 교수(Saul Adler)는 샤가스씨병(Chagas disease, Triatoma infestans)에 걸렸을 것으로 진단하였다(Colp 1977). 다른 학자들은 니코틴중독이나 정신적, 심리적 질환을 추측하기도 한다.

  그의 병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콜프(Colp)에 의하면 다윈은 공교롭게도 진화사상을 품기 시작한 젊은 시절(1837. 7)부터 각종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망, 비글호를 운전했던 피츠로이 선장의 자살,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때(1859) 받은 거센 사회적인 비난 등으로 신경쇠약과 위장병을 앓았으며, 얼굴에 퍼진 습진 때문에 그 유명한 수염을 기르게 되었다고 한다. [Ralph Colp; To be an invalid, p 142,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77]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런던근교에서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무신론자인 그의 시신은 유신진화론자인 훼드릭 템플의 노력과 영국상원의 청원에 힘입어 기독교의 심장부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묻히게 되었다.

  다윈의 사촌인 갤튼(Francis Galton)은 미래사회를 지배할 우수 엘리트의 육종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한 저서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보다 적합한 인종이나 혈통종자를 만들려면 덜 적응적인 인종보다 빠르게 증식하는 보다 좋은 기회를.....인종우생학이라는 단어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충분히 표현해 준다" [Francis Galton; Heredity Genius, p 24, Macmillan, London, 1869]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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