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글호의 항해 - 창조주를 위한 봉사

미디어위원회
2003-10-08

비글호의 항해 - 창조주를 위한 봉사 

(The Voyage Of The Beagle - In The Creator's Service)

 Louis Lavellee 


      국왕 폐하의 함선 비글호 (His Majesty's Ship (HMS) Beagle)의 1831년부터 1836년에 걸친 유명한 항해에 박물학자 찰스 다윈도 동승하고 있었다. 이 배의 항해 목적은 창조주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항해의 주목적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단 해안에 대한 탐사(探査)였다. 그 탐사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1:28 절의 개척명령을 받들어 영국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다윈의 자연관찰 성과로 인해서 그 지역에 분포된 자연 자원들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 (Robert Fitzroy)의 또 다른 하나의 목적은 남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에 세 명의 푸에고 원주민을 그들 고향 땅에 귀향시키는 것이었다.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주민들을 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여 정착시키려는 생각이 피츠로이 선장이 이번 항해를 결심하게 된 주 동인 중의 하나였다” (1:222). Anglican Mission Society의 리차드 매튜 (Richard Matthews) 목사가 그 원주민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매튜 목사는 마태복음 28:19-20의 위대한 선교의 명령을 좇아, 푸에고 사람들을 위한 선교 구역을 설립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전도 사역은 퇴박을 맞았지만, 나중에는 푸에고 사람들 속에 폭 넓은 효과를 거두었다.

 

문화 명령을 완수하다 (Fulfilling the Cultural Mandate)

비글호는 해안지방의 육지 지형과 하천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 임무는 거치른 기후와 병마,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진행하여만 했다. 한번은 선체 수리를 위해 비글호를 바닷가에 끌어올렸던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다윈까지 포함한 무장한 선원들이 몬테비데오(Montevideo)의 질서유지를 위해 지방경찰을 도운 적도 있었다. 보통 때에는 선원들이 답사를 하고 있는 동안, 다윈은 각종 동식물을 관찰하고 샘플을 채집하였다. 그리고 채집된 샘플들은 보관되었다가 영국으로 옮겨졌다.

3년 반 동안 계속된 탐사를 갈라파고스(Galapagos) 군도의 조사를 끝으로 마감하고, 비글호는 세계일주 항해를 계속하였다. 비글호는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항구도시들을 기항(寄港)하였다. 영국으로 귀국 후 피츠로이 선장은 왕실지도협회로부터는 금메달을, 그리고 의회로부터는 감사장을 받았다. 피츠로이와 다윈 두 사람이 기록한 항해일기는 인기리에 1839 년 동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두 책 중 어느 책도 진화에 관한 언급은 없었지만, 장차 다가올 논쟁의 암시를 남겨 놓았다.

 

위대한 전도사명에 순종하다 (Obeying the Great Commission)

피츠로이 선장은 예전 항해 시에 도난 당했던 보트를 되찾기 위하여 몇 사람의 인질을 잡아왔었다. 그 중 4명을 영국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피츠로이의 설명은 이랬다.

”푸에고 해안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네 사람의 원주민을 상선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매우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한 동안 영국에서 생활해보면 여러 측면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나는 이 사람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마련해 주어야 하겠다. 2, 3년 후에는 제 나라로 돌려보내야겠지.” (2:54)

선원들은 그들에게 이름을 지었다. 보트 메모리, 요크 민스터, 푸에고 바스켓, 지미 버튼 이라는 이름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백신을 맞았지만, 보트 메모리는 마마로 죽고 말았다. 피츠로이 선장은 나머지 세 사람을 런던 근교에 자리한 월댐스토우(Walthamstow)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 살게 하였다. 그들은 윌리엄 윌슨(Rev. William Wilson) 목사 부부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그들은 영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농사법을 배웠다. 그들이 왕과 왕비를 알현하였을 때, 왕비는 그들에게 자기 머리에서 모자(bonnets) 하나와 자기 손가락에서 가락지 하나, 그리고 지참금으로 선물들을 하사하였다.

해군성은 피츠로이 선장이 푸에고 인들과 선교단을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로 돌려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월덤스토우 교회에서는 보급물자를 제공하였으며, 그 배의 키잡이 제임즈 벤네트(James Benett)가 예전처럼 푸에고 인들을 돌보기로 하였다. 젊은 전도사 리차드 매튜(Richard Matthews)는 푸에고 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자기는 일 년여의 항해 기간에 저들의 언어를 공부하였다.

다윈은 비글호에서 푸에고 인을 처음 보았다. 그는 지미 버튼을 제일 좋아했다. 

”지미는 쾌활하고 웃음이 헤픈 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아프면 그는 크게 동정심을 보였다. 풍랑이 심해 내가 멀미라도 하면, 그는 내 곁에 다가와서 푸념하듯 ”가련해라, 가련한 친구!” 하곤 했다.” 다윈은 그 푸에고 인들이 언어 습득에 소질이 있다는 것과 시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봤다. ”요크와 지미는 우리 선원들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우수했다. 그들은 먼 바다에 있는 물체를 알아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선원들이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망원경으로 살펴보고는 그들의 말이 맞는다는 것이 증명되곤 하였던 것이다” (1:222-3).

1833년 1월에 한바탕 심한 폭풍을 만난 후, 배는 드디어 지미네 부족들이 사는 고장에 도착하였다. 풍광은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다윈은 푸에고 원주민들의 형편을 보고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내가 어느 곳에서도 본적이 없었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 그 가엾은 사람들은 발육중단 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얼굴에는 더덕더덕 회칠을 하고 있었다. 온 몸의 피부는 더럽게 개기름이 번질거렸고, 머리카락은 뒤엉켜져 있었다. 목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몸짓은 거칠었다.” (1:228).

배 안의 세 명의 푸에고 인들도 알몸을 하고 있는 동족들을 처음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항해사 햄몬드 (Hamond)는 탄식하듯 이렇게 내뱉었다. ”이 멋진 친구들을 어떻게 저토록 야만적인 상황에 내버려두고 떠난다지!”(2:92). 우리의 푸에고 친구들을 걱정하는 또 한 사람의 장교는 매일 빼지 않고 시편을 읽는다고 알려진 항해사 설리반 (B.J. Sullivan)이었다. 그는 나중에 해군 제독이 된 다음에도 푸에고 선교사역을 충실히 지원한 사람이다.

선교 본부 위치로 마땅한 한 곳을 울랴(Woolya)에서 찾았다. 그 곳은 정원이나 목장의 개발에 알맞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잘 보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선원들은 세 채의 통나무집을 짓고, 월댐스토우에서 가져온 보급품을 하역하고, 두 곳에 정원을 개발하면서 분주하게 애를 썼다. 도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한결같은 감시가 필요하였다. 모든 것이 정돈을 갖추자, 비글호는 열흘 계획으로 탐사항해를 떠났다.

탐사항해에서 돌아온 비글호 선원이 리넨과 바둑무늬 모직 옷을 걸친 원주민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매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온전치 못했다. 다윈의 말은 이랬다.

”매튜는 푸에고 인들의 행동을 하도 나쁘게 평하는 바람에 피츠로이 선장은 그를 비글호로 다시 데리고 와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은 뉴질랜드로 옮겨졌다. 거기엔 그의 형이 전도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울랴를 떠나자마자 그 곳에서는 일종의 조직적 약탈이 규칙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밤낮없이 매튜는 원주민들 속에 둘러싸여 끝도 없이 들려오는 그들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마침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알맞은 시간에 돌아왔기에 그의 생명을 건졌다고 생각하였다” (1:241).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의견에 매튜도 동의했다. 그러나 지미와 요크, 그리고 푸에고는 남기를 원했다. 8일간 떠났다 돌아온 피츠로이 선장은 그들을 일일이 심사했다. 짓밟히기는 했어도 정원에는 작물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미는 더 많은 도난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것말고는 모든 게 다 말짱하였다. 피츠로이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그들을 영국에 데리고 갔던 우리의 충정과 동기를 그들의 동족들에게 알려지고 이해되어, 장차 우리가 다시 이 곳에 돌아왔을 때, 그들이 우리들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면, 매튜가 이곳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뒤로 미루었던 전도사역을 훨씬 더 많은 성공할 확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다” (2:103).

한 일년이 지나고 비글호가 1833년 3월 5일에 울랴에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곳엔 인적이라곤 없었다. 카누 한 척이 우리 배로 다가오더니, 카누를 타고 온 그들 중 한 사람이 얼굴의 회칠을 물로 씻고 있었다. 이에 관한 다윈의 글은 이러했다.

”그 사람은 처량하게도 지미였다 - 앙상하고 초췌한 몰골을 한 야만인이 다 되어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허리에 두른 한 조각 담요 말고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 우리가 그를 남기고 떠날 때 그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고 말쑥한 몸에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 않았던가! 나로서는 그렇게도 완벽하고 처량하게 변한 몰골은 본 적이 없었다” (1:244).

다윈은 이어서 지미와의 마지막 해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 피츠로이 선장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 매너는 예전처럼 정갈하였다. 그는 먹기엔 ”너무 많습니다.” (충분하다는 뜻으로) 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말을 했다. 춥지 않다, 친척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녁에 그의 잘 생긴 젊은 아내가 도착하고서야 우리는 지미의 기분이 보여준 이렇듯 큰 변화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여전한 그의 착한 감정으로 그는 그가 제일 친하게 지내던 두 선원에게 아름다운 수달피 가죽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손수 만든 몇 점의 창끝과 화살촉을 선장에게 선사하였다. …  지미는 바닷가에 도착하자 봉화를 피워놓고 연기를 날려서 망망대해로 선수를 돌리고 떠나려는 우리 배에게 길고 긴 마지막 작별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1:244-5).

지미의 고향에 전도 본부가 다시 세워지기는, 그 때부터 30년 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없이 거듭된 실패와 순교를 경험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피츠로이와 다윈은 타히티와 뉴질랜드에서는 선교사역의 성공 사례를 볼 수 있었다. 다윈은 자기 누이 캐롤라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악한 야만인으로 알려진 부족들에 휩싸여있지만, 선교단의 덕분으로 영국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3;176). 그의 책에서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남태평양 전역에서는 기독교 도입의 결과로 된 진보의 행진이 자력으로 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쿠크(Cook)조차도 그런 변화의 개연성을 예견하지 못했던 때부터 겨우 60년도 못된 기간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놀랬다. 그런데 쿠크의  훌륭한 판단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532). 


비글호의 항해와 진화론 (The Voyage and Evolution)

남아프리카에 머물고 있는 동안 피츠로이와 다윈은 원주민들 속에서 펼친 전도사역을 옹호하는 기사를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항해를 끝내고 3년여가 지난 다음부터 그 항해에 대한 평가에서 이들 두 사람의 세계관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다윈이 지향하는 목표가 어딘지 예견하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츠로이는 항해에 대한 설명을 성경의 진리를 믿을 것을 촉구하는 말로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소아시아에서 기원한 조상을 뿌리로 가지고 있는 친척이라고 강조하였으며, 6일 동안의 창조설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 전 세계적인 규모의 홍수가 지질학과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2:176-9). 이에 반해 다윈의 설명에는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의 책 '지질학의 원리(오늘날의 침식과 퇴적율을 기초하여 과거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즐겨 참조한 내용들을 얼마쯤 포함하고 있었다. (1:965, 132,188, 346, 494). 다윈은 긴 항해 기간 중에 최근 창조설과 세계규모의 대홍수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는 이 장편 저서를 읽었던 것이다.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의 핀치(finch) 새에 관해서, 다윈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조그만 새들의 한 집단에 개재하는 구조상의 이종(異種)과 변종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이런 환상을 떠올릴 법도 하였다. 이 군도(群島) 내에 있는 새들의 원종에서부터 한 종이 취해져서 여러 목적에 따라 다르게 부분적인 변화를 겪었으리라는 상상이다”(1:402). 그러나 새들은 새들일 따름이었다. 다윈은 진화론적 이론을 제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 나그네가 가는 곳마다 잠시 동안씩만 머문다면, 나그네의 기술(記述)은 상세한 관찰 대신에 일반적으로 단순한 스케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순전히 나 혼자 힘으로 지식과 현실간의 넓은 괴리를 부정확하고 피상적인 가정으로 채워보려는 경향이 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532-3).

1859년에 들어서는 다윈이 그와 같은 조심성을 제쳐놓은 것이 확실하였다. 그는 '종의 기원'을 출판했던 것이다.

”박물학자로서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유기체의 분포에서 어떤 특정 사실들을 발견하고, 또한 지리학적 관계에서 그 대륙의 과거의 서식생물들과 현재의 서식생물들과의 사이에 어떤 특정 사실들을 발견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본 저서의 후반부에서 볼 수 있겠지만, 그 사실들은 종의 기원에 대하여 어떤 빛을 밝혀주는 것 같았다 …” (4:6).

비글호가 진화론의 이론을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에 살던 많은 영국 사람들처럼 비글호의 선원들도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항해기간동안 그들은 매 주일 예배를 보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항해목적의 성공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수없이 많은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해안탐사를 진행하고 있는 동안, 다윈은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최초의 전도사역을 도왔으며, 또 비글호의 항해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전 : (1:222)와 같은 참조 표시는 원전을 표시한다, 즉 1(아래), 그리고 222 쪽을 가리킨다.

1. Charles Darwin, The Voyage of the Beagle, Harvard Classics 29, New York: P. F. Collier & Son, 1909 [1839].

2. H.E.L. Mellersh, Fitzroy of the Beagle, Mason & Lipscomb, 1968.

3. Adrian Desmond & James Moore, Darwin, New York, Warner Books, 1991.

4. Charles Darwin,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49, Chicago: Encyclopedia Britannica, 1952 [1859].

*Mr. Louis Lavellee (M.S., M.Div.) is an environmental engineer in Mississippi.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voyage-beagle-creators-service

출처 - ICR, Impact No. 35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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