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다윈주의를 격렬히 비판한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

Andrew Sibley, M.S.
2017-01-26

다윈주의를 격렬히 비판한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

(FitzRoy, Captain of the Beagle, Fierce Critic of Darwinism)


배경 (Background)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장군은 다윈으로 유명해진 항해선 HMS 비글호의 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피츠로이는 명망 있는 왕실 혈통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뛰어난 능력과 부분적으로 그의 혈통으로 말미암아,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배의 지휘권을 얻었다. 그의 조상은 사실상 왕실 가문의 찰스 2세(Charles II)와 클리브랜드(Cleveland) 공작부인인 바바라 빌리에르(Barbara Villiers)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는 또한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의 조카였다. 그는 후에 수로 및 크로노그래프 조사(hydrographic and chronographic survey)를 위해 왕립협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영국 내 새롭게 조직된 상무부 기상관측과(Meteorological Department of the Board of Trade; 현 영국 기상청)의 최초의 통계과장으로 발탁되었다. 전 생애에 걸쳐, 그는 크리스천으로서의 강력한 의무감과 생명 보호, 특히 동료 선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바램을 가지고 있었고, 왕실칙허 해군재난에 이어 영국 주변의 폭풍 경고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 선구자였으며, 처음으로 정기적인 일기예보를 만들어 발행했다.

피츠로이는 1805년 7월 5일, 서폭(Suffolk), 암톤 홀(Ampton Hall)에서 태어났고, 1733년에 설립된 전 왕립해군사관학교인 포츠머스(Portsmouth)에 기반을 둔 해군왕립대학(Royal Naval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처럼 오래 전에 설립된 학교에서 매우 뛰어난 장학생의 능력을 보이면서, 100% 합격 평가로 금메달을 딴 최초의 학생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1] 이것은 그가 뛰어난 학자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윈의 지지자들은 나중에 그의 명성을 깎아 내리려고 시도했으나, 피츠로이는 현재 뛰어난 과학적 능력을 지녔던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1828년에 HMS 비글호의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고, 3년 뒤인 1831년에 가장 유명한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박물학자(naturalist)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을 남아메리카와 갈라파고스 군도(Galapagos Islands)로의 탐험으로 이끈 여정이었다. 피츠로이는 또한 더욱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후에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책의 출판에 뒤이어 진화론의 주된 비평가가 되었다.

비글호 항해는 프랜시스 뷰포트(Francis Beaufort) 장군에 의해 의뢰되어 조직되었으며, 1831년 12월 27일에 플리머스(Plymouth)를 떠났다. 그러나, 피츠로이의 원래 계획은 자신의 비용으로 세 명의 원주민을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로 데려다 주는 여행으로 정해져 있었다. 라밸리(Lavallee)는 이전 Impact 글(아래 관련자료 링크 1번 참조)에서, 어떻게 이 세 명의 원주민이 이전 항해로부터 영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을 크리스천으로 교육해서 두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던 피츠로이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2] 해군에서 그 여행에 대한 조직을 하였는데,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게 되었다. 해군의 주된 목적은 해상 안전을 위해 남쪽 항로에 대한 정확한 항해도를 작성하기 위해서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바다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비글호 항해 (Beagle Voyage)

젊은 다윈은 그의 이전 교수였던 존 헨슬로(John Henslow)의 권유에 따라, 그 배의 박물학자(naturalist)로서, 그리고 선장의 동반자로서 비글호에 합류했다. 피츠로이와 다윈은 그 이후 수년간 친구로 남아있었다. 피츠로이가 이 오랜 항해에서 해안을 살피는 동안, 다윈은 주변 지질, 식물상, 동물군 등을 조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피츠로이와 다윈 둘 다 『HMS 비글호 탐사의 항해 이야기(Narrative of the Surveying Voyages of His Majesty's Ships Adventure and Beagle)』로 알려져 있는 3권짜리 책 속에서 비글호의 탐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피츠로이는 1, 2권을 썼고 (비록 첫 번째 책은 대개 파커 킹(Parker King)과 프린글 스트로크(Pringle Stokes)가 편집한 자료를 사용했지만), 다윈은 세 번째 책을 썼다. 피츠로이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는 창세기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이 없는 듯 했으며, 사실상 다윈에게 오랜 항해 동안 읽도록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라는 복사본 책을 준 것에 대해 책임이 있었고, 그리고 그는 나중에 이 결정을 몹시 후회하였다. 피츠로이는 초기에 의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자 인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초기에 모세에 의해 영감으로 쓰여진 역사를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의심하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근심으로 고통 받았다. 나는 그 기록에 대해, 또는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 있는 밀접한 방식에 대해서 너무나 아는 것이 없어서, 다른 기록들의 진실성은 진심으로 믿었던 한편, 모세가 기록한 어떤 사건들은 신화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었다. 견해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믿음은 오직 혼란한, 따라서 불행한 마음상태를 만들어냈을 뿐이었다.”[3]

어떤 사람들은 신실한 부인과의 결혼이 피츠로이의 관점을 의심하는 자에서 설교자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책에 따르면 항해 도중에 처음으로 관찰한 지질학적 증거들을 통해 그의 마음이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바꾸는 데 주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834년 4월과 5월에, 피츠로이는 포경용 보트에 다윈을 동승시켜 리오 산타 크루즈(Rio Santa Cruz)의 강을 거슬러 탐사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피츠로이는 이 발견들을 왕립 지질협회(Royal Geological Society)에 보고했고, 그의 책에 이 조사 내용들을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뛰어난 지질학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츠로이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에 깎인 조약돌과 대홍수 퇴적물들이 이러한 평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 않은가? 지금 판타고니아(Pantagonia) 사막에 묻혀있는 조약돌들을 매끄럽게 한 이러한 물의 작용은 광대한 규모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지속 기간으로 있었음에 틀림없다.” [4]

”비록 강의 퇴적층은 용암층 훨씬 아래쪽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르는 물의 지속적인 작용에 의해 강바닥이 침식되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용암 표면은 눈에 수평으로 보이는 평원 위에서 모든 방향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자연적 수평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방대한 넓이의 지표면 위로 액체 상태의 용암을 퍼뜨린 엄청난 화산활동이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5]

이러한 관찰로부터, 피츠로이는 격변적 사건을 지세를 형성하는 데 물의 작용과 화산활동 양쪽 면에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악 암석에서 발견된 조개 화석의 증거가 피츠로이에게 창세기의 대홍수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내게 대홍수의 보편성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보였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다른 원인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은 이것이다. 즉, 평원과 산 양쪽 지층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조개들은 만과 근처 지역에서 발견되는 바로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 내가 볼 때 이것들은 원래 그 바다에서 났었는데, 거기로부터 물에 의해 운반되어 현재 발견되고 있는 그곳에서 퇴적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6]

그 항해 후에, 피츠로이는 켄트(Kent)의 다운 하우스(Down House)에 있는 다윈을 1857년 봄까지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방문했으나 [7], 그들의 우정은 1859년에 다윈의 책이 출판된 후에 심각하게 뒤틀리게 되었다. 피츠로이는 자신의 친구의 책에 대해 주된 비평가가 되었고, 비록 그가 우울증과 날카로운 기질 때문에 고통을 겪었지만, 그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악감정을 가지지 않았으며, 동정심을 보였다. 1859년 12월, 피츠로이는 14,000년으로 연대가 측정된 솜(Somme) 강 근처에서 발견된 석기 도구(stone tools)의 연대를 비판하면서, 타임지(The Times)와 서신교환을 시작했다. 이러한 서신은 Senex라는 필명 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필명은 ”노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라는 뜻의 라틴어 nemo senex metuit louem 로부터 유래한 것이다.[8]


1860년 옥스퍼드 논쟁 (1860 Oxford Debate)

1860년 6월, 다윈이 기원에 관한 그의 책을 출판한 약 6개월 후에, 영국 옥스퍼드에서 주요 연사들인 사무엘 윌버포스 주교(Bishop Samuel Wilberforce)와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와 더불어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반노예운동을 펼친 윌리암 윌버포스의 아들인 윌버포스 주교는 과학자가 아니었으나, 대신 런던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의 설립자인 리차드 오웬(Richard Owen)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이 모임은 영국학술협회(British Association)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약 1천 명 정도의 꽉 찬 청중이 참석했다. 모든 것들이 못마땅하게 진행되었다. 증거들이 실제로 그것을 뒷받침하지 않았으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리고 누가 이겼는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과 헉슬리의 추종자들은 후에 승리를 주장하였다. 시대풍조는 바뀌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지도자적 주교에 대한 헉슬리의 무례함과 거칠음, 그리고 수사적인 말투는 청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게 했다.

피츠로이도 또한 감정적으로 격했던 이 모임에서 말을 했다. 그 모임이 끝날 무렵, 피츠로이는 구약의 선지자처럼 자신의 머리 위로 무거운 성경책을 들어올리며, 다윈의 저서는 ”그에게 가장 극심한 통증(the acutest pain)”을 야기했다고 말하면서 [10], 청중들에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탄원했다.”고 보고되고 있다 [9]. ”아세니움(The Athenaeum)' 지의 공식 보도에 의하면, 피츠로이는 ”...[그는] 다윈의 책 출판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며, 그것이 사실에 대한 논리적 정렬이었다는 헉슬리 교수의 주장을 부인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피츠로이는 크게 소리 질렀던 것처럼 보이며, 브루스터 부인(Lady Brewster)은 열띤 분위기와 격앙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기절해서 실려 나가야만 했다.[12]

이 논쟁에 있어서 피츠로이의 공헌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 6년 후에 율리어스 캐러스(Julius Carus)는 다윈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1860년 옥스퍼드(논쟁)에서 있었던 영국학술협회의 연합 모임에서 피츠로이 장군이 당신의 이론처럼 그토록 충격적인 이론에 대한 사실들을 수집할 기회를 당신에게 준 것에 대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오.”[13]

영국학술협회의 공동창시자인 데이빗 브루스터(David Brewster) 경도 또한 진화론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고, 피츠로이에게 보내는 개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윈의 책과 에세이, 그리고 논평들은 저명한 사람들의 무신앙과 무분별함에 대해 가장 큰 경종이 울리고 있다는 증거일 걸세.” [14]

얼마 후 브루스터와의 또 다른 서신에서, 피츠로이는 진화론에 대한 다윈의 이론을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와 같다고 언급했다. [15]

피츠로이는 뛰어난 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다윈이 제시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격렬하면서도 중요한 비판가였다. 후에 다윈의 지지자들은 피츠로이의 명성을 공격했는데, 왜냐하면 비글호의 선장의 비평은 진화론에 엄청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츠로이는 주목할 만한 과학자이자, 홍수지질학(Flood geology)과 창조론(Special Creation)의 지지자였다.



Endnotes

1. Gribbin, J. & M., FitzRoy, Review, Headline Book Publishing, p. 23, 2003. Comments by Professor Inman.
2. Lavallee, L. 'The Voyage of the Beagle -- In the Creator's Service,Impact 358, ICR, April 2003.
3. Gribbin, J. & M., ref. 1, p. 79.
4. Ibid., p. 155.
5. Ibid., p. 156.
6. Ibid., p. 163.
7. Barlow, D., 'The Devil within: Evolution of a tragedy,' Weather, Royal Met. Soc., vol. 52 (11), pp. 337-341, 1997.
8. Gribbin, J. & M., ref. 1, p. 264.
9. Reported in Cadbury, D., The Dinosaur Hunters, 4th Estate, Harper Collins, London, p. 310, 2000.
10. Barlow, ref. 7. Sourced from: Origins of Meteorology: An analytical catalogue of the correspondence and papers of the first Government Meteorological Office, under Rear Admiral Robert FitzRoy, 1854-1865, and Thomas Henry Babington 1865-1866, of the successor Meteorological Office from 1867, primarily during its first two years under the Scientific Committee appointed by the Royal Society, and of registers of Instruments issued by successive Meteorological Offices from 1854 to c. 1915. Held at the Public Records Office, Kew, England.
11. The Athenaeum, 14th July. 1860. From www.oum.ox.ac.uk/debate4.htm --Accessed July 2005 -- Website of the Oxford University Museum of Natural History.
12. Cadbury, D., ref. 9, p. 310.
13. Letter from Julius Carus to Charles Darwin, 15th Nov. 1866, (From Gribbin, J. & M., ref. 1, p. 325.)
14. Barlow, ref. 7, (Source as ref. 10).
15. Barlow, ref. 7, (Source as ref. 10).

* Andrew Sibley is a Meteorologist working for the Met Office in the UK. He has a Masters of Science and is a Council member of the Creation Science Movement.



번역 -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488 

출처 - ICR, Impact No. 389, 2005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26

참고 : 670|162|2633|2329|161|1897|1907|2230|2448|2888|2937|2445|4548|4505|4493|4542|5994|6098|6258|6260|5979|5835|5683|5470|5270|5257|5130|5081|4635|4585|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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