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을 모르는 진화론자들

진화론을 모르는 진화론자들

(Evolutionists Don’t Understand Their Own Theory)

David F. Coppedge


    만약 진화론자들과 기자들이 신다윈주의(neo-Darwinism)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고수한다면, 그들의 주장 대부분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못할 것이다.

다윈은 생명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계통나무 전체를 진화시킬 수 있었던 자연적 메커니즘(자연선택)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었다. 신다윈주의는 돌연변이를 변이(변화)의 원천이라고 여기고 있다. 진화론의 핵심은 그 과정이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지시되지 않은 무작위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많은 진화론자들과 언론 기자들은 이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인공선택은 진화가 아니다. 진화론자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중 하나는 인공선택(artificial selection)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선택은 사람의 목표, 목적, 계획에서부터 나오게 된 지적설계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이 오류의 한 가지 형태가 ”컴퓨터상의 진화”이다. 즉, 진화 과정을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여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다. Science Daily(2013. 4. 23) 지는 코넬대학의 ”창조 기계 실험실(Creative Machine Lab)”(다윈주의와 관련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려는 이름)에서 수행된 시도를 보도하고 있었다. ”코넬대학의 한 연구팀은 창조 기계 실험실에서 한 컴퓨터 알고리즘을 만들어내었다. 이 알고리즘은 가상의 생명체가 질척질척하고 근육 같은 형태에서부터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진화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을 독자들은 듣게 되는 것이다. 앞의 문장에서 ‘만들어내었다’, ‘알고리즘’, 배우기 위해서‘ 등과 같은 단어들은 다윈주의 원리와 위반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이 실험이 '반직관적인 설계물을 창조해내는 진화의 힘”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 내의 변화는 진화가 아니다. Medical Xpress(2013. 4. 18) 지는 독자들에게 이 심오한 관측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진화 유전자는 유전자가 진화하도록 유도한다.” 이 헤드라인은 유의어 반복(tautology)이며, 종의 기원에 대한 증거가 결코 되지 않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트러스트 생어 연구소(The Wellcome Trust and Sanger Institute)는 인간 언어 능력에 연관되는 FOXP2라 불리는 단일 유전자에 대한 긍정적 선택(positive selection)의 증거를 찾고 있었다 : ”이 FOXP2 유전자의 기능이나 발현에서의 진화적 변화가 그 목표 유전자를 새로운 선택적 압력에 노출시켰는가?” 그러나, 그들이 찾은 변이(variations)들은 모두 호모 사피엔스들인, 종내 교배가 가능한 인간 개체군에만 존재한다. 엄격한 창조론자들도 이러한 종류의 변화(종 내의 변화)는 인정하고 있다.


소진화적 변화는 진화가 아니다. UC 산타크루즈 대학의 존 톰슨(John Thompson)은 ‘맹렬한 진화(Relentless Evolution)’라는 신간을 냈다. ”종들은 맹렬하게 진화하고, 진화적 변화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히 그가 말하는 변화는 종 내에서만 일어나고,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는 일어나지 않는 변화이다. PhysOrg(2013. 4. 18) 지에 따르면, 톰슨은 다윈니즘의 메커니즘은 방향이 없는 것임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적응 진화의 대부분은 어느 방향으로도 인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그 기사는 (창조론자들을 하품하게 만드는) 종 내에서 거듭되는 소진화적 변화(microevolutionary change)만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 거듭되는 소진화적 변화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다른 종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화 게임에서 개체수를 유지하게 만든다”. ”이 방향 없어 보이는 방랑(meanderings)은, 방향성 있는 변화와 종 분화를 가끔씩 동반하는 진화의 필수 동력이다”고 톰슨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종의 기원이나, 새로운 기관이나 기능을 이끈 방향성이 있는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었다.


종 내의 행동은 진화가 아니다. New Scientist(2013. 4. 24) 지는 ”겁자생존: 소심함의 놀라운 장점”이라는 헤드라인으로 고전 다윈주의를 바꾸어놓고 있었다. 레슬리 오그던(Leslie Evans Ogden) 기자는 어떤 사람들, 도롱뇽, 조류는 자신감 없는 것이 더 성공적으로 보인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한다는 것에 대해 그 어디에서도 설명하지 않고 있었다. 진화는 대담함과 소심함 모두를 선호한다고 오그던은 주장하지만, 생존의 관점에서 ‘적자’를 정의하는 것에 유의어반복을 하고 있었다. 수줍음이 생존에 장점이 될 수 있었다는 그녀의 주장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 주장의 어떤 것도 신다윈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진화할 능력은 진화가 아니다. 진화할 능력이 그 자체만으로 박테리아가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Science Daily(2013. 4. 26) 지가 게재한 ”컴퓨터 과학자들이 진화할 능력(evolvability)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안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경쟁은 비필수적인가?”라는 제목의 글은 여러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컴퓨터 과학을 참고로 하고 있었으며, 종의 기원의 필수 조건으로 고전적 다윈주의적 경쟁을 부정하고 있었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기초한 내용은 방향과 목적이 없는 과정이 어떻게 새로운 기관과 기능을 형성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이 될 수 없다.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의 한 연구자는 ”이 결과의 중요한 의미는 늘어나는 진화능력과 같은 현상에 대한 전통적인 선택과 적응의 설명이 더 철저히 검증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불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 말했다. 그 기사의 어떤 곳에서도 지시 없는 과정(unguided processes)에 의한 종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 있었다.


진화는 목적을 가질 수 없다. Live Science(2013. 4. 24) 지의 한 글은 모순 어법인 ”진화적 목적(Evolutionary Purpose)”이라는 말은 제목으로 쓰고 있었다. 기자 찰스 최(Charles Choi)는 ”새들은 몸을 웅크리는 이상한 방법 때문에 날개를 높이 들 수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이 접혀진 자세는 그들의 비행의 진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생물이 나무에 앉아 있는 한 만화는 상상력을 더해준다. 몇몇 공룡들의 웅크리는 자세는 새들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찰스 최가 증명해야하는 것은 방향 없는 과정이 어떻게 조류의 비행을 가져왔는가 이다. 인간과 캥거루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웅크릴 수 있지만, 속이 빈 골격이나 조류의 허파나 날개를 가지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최는 ”새들은 웅크리도록 진화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진화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 두 단어(목적과 진화)는 함께 갈 수 없다. 방향 없고, 목적 없는 과정은 어떤 것을 하도록 ”진화할” 수 없다. 게다가, 최는 그것이 점진적으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급격하게 일어났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과학적 설명이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진화론자들에게 진화의 개념을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하자. 진화는 목적이 없다. 진화는 목표가 없다. 진화는 지능이 없다. 진화는 방향이 없다. 진화는 무작위적인 과정이다. 진화를 가정하는 것이 사실은 아니다. 소진화(종 내의 변화, 유전정보의 획득 없는 변화)는 진화가 아니다. 진화는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는 지적설계를(인공선택과 같은) 할 수 없다.

이러한 진화 규칙 내에서 진화를 주장해야만 한다. 종 내에서의 변이가 아닌 새로운 종, 새로운 종류를 보여 달라. 창조론자들이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변화의 종류를 뛰어넘는 변화여야 한다. 이러한 진화론 규칙들을 지킨다면, 다윈을 추종하는 진화론 학계는 바싹 말라붙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다윈 진화론의 원리들에만 의존해서 자연의 실태를 정직하게 다루고자 하는 연구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진화의 규칙이라면, 애초부터 진화론적 가정들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규칙들은 개념-발상-제안의 비물질적 영역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아마 진화론자들이 침팬지처럼 끙끙댄다면 더 말이 될지도 모른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3/04/evolutionists-dont-understand-their-own-theory/ 

출처 - CEH, 201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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