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John C. Whitcomb, Ph.D
2006-05-18

'창세기 대홍수' 저서의 역사와 영향 

(The History and Impact of the Book, The Genesis Flood)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라는 책이 1961년에 출간된 이후, 그 책은 그 저자들의 삶을 또한 변화시켰다. ‘창세기 대홍수’의 공동 저자이며, 나의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박사와 나는 550 페이지의 책을 출판하여 하나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연합되었다. ”창세기 대홍수의 출판은 나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공학을 하던 나의 삶이 창조론과 기독교적 증거들을 찾기 위해서 전적으로 집중하도록 변화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창조론 강연들을 하게 되었고, CRS(Creation Research Society, 1963)를 설립하게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1970)이 태어나게 하였고, 수많은 세미나, 회의, 토론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과학적 성서적 창조론(scientific Biblical creationism)의 회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 ‘창세기 대홍수’의 촉매적 영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헨리 모리스를 1953년 9월에 ‘최근 창조와 전 지구적 홍수의 성서적 증거’ 라는 제목으로 미국과학자 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 (내가 구약학 교수로 있는) 그레이스 신학교(Grace Theological Seminary)로 보내셨다. 이것은 결국 기원에 대한 나의 전체적인 접근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고, 하나님은 내가 ”창세기 대홍수: 지형학적 범위, 지질학적 영향, 그리고 연대기적 배경에 대한 조사”(Winona Lake, IN: Grace Theological Seminary, 1957) 라는 제목이 붙은 450쪽 분량의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4년 동안을 보내도록 자극하셨다. 곧 모리스는 ‘창세기 대홍수’의 공동 집필에 동의했다. 그와 나는 둘 다 신학적 및 과학적으로 엄청난 이슈를 다루는 그러한 규모의 프로젝트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관점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했다.

이처럼 엄청나게 시간이 소모되는 과정 속에서, 21명의 과학자, 9명의 신학자, 그리고 2명의 문법 학자들에게 원고의 일부나 전체를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회고해보니, 1959년은 또한 시카고에서 헉슬리(Julian Huxley) 경과 다른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다윈 100 주년을 기념하면서 ”창조론은 본질적으로 죽었다” 라고 발표한 해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창조론에 대한 장례식’은 미숙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창세기 대홍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들

우리의 책이 출판되고 약 25년 후인 1980년대 말, 두 개의 심각한 반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운동은 둘 다 자연주의적 다윈주의(naturalistic Darwinism)에는 반대했으나, 동시에 성경적이고 과학적인 창조론(Biblical and scientific creationism)에도 반대했다.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이것은 슬프게도 예언되어 있던 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말로 맞섰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heresies)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9, 표준새번역). 한편으로 이것은 건전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상대방이 얼마나 뛰어나거나 웅변적이든지 간에 단지 권위를 지닌 인물이라는 이유로, 아무 관점이나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는 그러한 것들이 그런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7:11).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성경적 진리를 포기하도록 속임을 당해왔다.


점진적 창조론

이 운동의 첫 번째는 특별히 크리스천 천문학자인 휴 로스(Hugh Ross) 박사에 의해 대표되는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는 창조가 소위 ‘빅뱅(Big Bang)’이라고 하는 사건으로 수십억 년 전에 시작되었고, 동물들은 초자연적으로 주기적으로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가 아니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반역이 동물계에 죽음을 야기하지 않았으며, 노아의 홍수는 지역적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성경의 66권의 책은 전적으로 영감에 의한 것임을 믿지만, 67번째 책인 현대과학(modern science)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믿고있다.

2003년 1월에, 미국창조과학회(ICR)는 ‘점진적 창조론’의 도전에 대해 심도있게 대응했다. 나는 휴 로스 박사의 관점에 대한 반박과 8명의 토론단에 참석하기 위해서 3명의 과학자와 1명의 신학자와 합류하도록 초청받았다 (After Eden: Understanding Creation, the Curse, and the Cross). 나는 특히 ‘점진적 창조론자들’이 인류의 창조 이전에 수억 수천만년 동안의 퇴적작용과 화석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창세기 대홍수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소규모 격변 정도로 축소하려는 헛된 노력에 놀랐다.


지적설계운동

두 번째 반운동은 보기에도 훨씬 더 놀랍다. 이것은 ‘지적설계운동(IDM, Intelligent Design Movement)’으로 불리는 것으로, 무신론적 자연주의와 신다윈주의적 진화론은 생명체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한 요소도 제거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지적설계 학자들은 성경이나 세계의 창조주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소 없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에 의해서 진화론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궁극적 기원(origins)에 대한 연구의 건전성과 진실성을 회복하려는 합리적인 노력에 성원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대부분 지적설계운동의 목표는 정확하다. 하지만 이 운동의 비극은 기원에 관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고의적으로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문자적 역사로서의 창세기는 진화론적 과학자들과 논쟁할 때에 짊어져야 할 당황스럽고 원치않는 불필요한 짐인 것처럼 보인다.

지적설계운동의 주된 대변인인 필립 존슨(Philip Johns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다. ”논쟁에서 성경과 창세기는 빼라. 왜냐하면 소위 성경 대 과학이라는 이분법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학회에서 들려질 수 있는 방식과 종교적 반대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쟁을 표현하라. 그것은 ”창조가 되는 데에 조물주가 필요한가, 아니면 자연이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문제들로 벗어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노아의 홍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그러한 것과 같은 것들을 물어올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분을 길이 없는 불모지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에 결코 곰곰이 생각하지 말라” ('Berkeley's Radical' in Touchstone 15:5 [June, 2002], p. 41).

사실상, 천지만물이 지적설계자의 산물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완전한 창조 진리로 이끄는 사다리의 맨 밑단일 뿐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불충분하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이처럼 엄청나게 중요한 질문에 참된 관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과 2장 내의 기원에 관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기록과 창세기 6-9장의 전 세계적인 규모의 홍수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도 또한 믿어야만 한다. 만물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는(골로새서 2:3), 그리고 모든 생명과 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의 궁극적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적설계’를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믿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겸허히 강조한다. 이것은 명백히 생명체가 창조된 방식(성숙한 창조)과 물질이 창조된 순서, 그리고 창조사건의 기간(단지 수천 년 전에 하루 24시간의 6일 동안)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주님은 지구를 창조하시고 수십억년 후에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들을 ‘태초에(본래, at the beginning)’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4). 따라서, 동물계 내의 죽음은 인류 창조 이전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아담이 불순종한 결과로 일어나게된 일임을 믿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창세기 1:31, 로마서 8:20-23에 의거한 로마서 5;12). 매우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 걸친 무수한 동식물 화석들은 단지 창세기 대홍수라는 전 지구적인 격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창조/진화 논쟁에서는 슬프게도 무시되어, 한 영혼의 영생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는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요소가 있다. 우리의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누가복음 9:26). 만약 우리가 창조/진화 토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린다면, 물질주의적 진화론의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진리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지적설계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시적으로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을 받아들임(히브리서 4:12)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완수된 사역과 죽은 자 가운데 육신이 부활하셨음에 대한 증거(참고. 로마서 10:9-10)로써만 나타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지적설계에 대해 강력히 설파한 후, 참되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제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신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그의 연설을 끝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도행전 17:16-31).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이것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 (30-31절). 바울은 그 연설에서 주 예수를 전파했기 때문에 몇몇 사람이 그에게 합류하였고 믿었다 (34절). 바울은 다른 경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그렇다면, 현대의 지적설계 지지자들이 대답해야만 하는 화급을 요하는 질문이 있다. 사람들이 지적설계 메시지를 들은 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고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충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구원을 이루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9,17). 이것이 진화론자들을 죄에 대한 무지함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들을 세계의 창조주이자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지식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쐐기(wedge)’인 것이다.

휴 로스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이 온 산들을 덮고 1 년간 지속되었던 노아 시대의 대홍수를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적 홍수로 축소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한편, 지적설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공식적으로 대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와 그 뒤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65권의 책들도 또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참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계의 기원(origin of the world)에 관하여 커다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을 유한하며, 죄 많은, 항상 변하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인간들의 의견에 굴복해야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각들에 대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베드로후서 3:4-6)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확인해 주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8-39).

잠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홍수가 와서 모든 것들을 휩쓸어갔을 때,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이 ‘홍수’로부터 살아남았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이 홍수가 지역적인 홍수를 의미하는 것일까? 지역적인 홍수라면 노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거대한 방주를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지 일부 사람들만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일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그 당시에 모든 인류는 한 지역에 모여 있어서 정말로 지역적 홍수로도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갔을 수 있었는가? 그러나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러한 시나리오조차도, 방주는 정말로 필요했을 것 같지 않다. 지역적 홍수였다면, 경고를 받은 노아는 2달 정도면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새, 포유류, 파충류들이 한 번의 지역적 홍수로 죽게 될 수 있었을까?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홍수에 관한 정보에 신뢰할만한 근원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속이실 리가 없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진지하셨다. ”그러나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7).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돕기 위해서 우리의 책 ‘창세기 대홍수’를 사용하셨다. 홍수의 규모, 심도, 중요성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 성서신학, 성서해석학, 그리고 주해 등에 대한 커다란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다. 성서적 격변설(Biblical catastrophism)은 유한하고 항상 변하는 인간의 이론이 아닌, 성경의 거룩한 계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 Dr. Whitcomb is co-author of The Genesis Flood. This article is an adaptation of a message given at the Answers in Genesis Mega-Conference on July 18, 2005. 



번역 -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719

출처 - ICR, Impact No. 395, 2006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00

참고 :

Headlines
2006-04-01

미생물의 세계를 열었던 레벤후크 

(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


       과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과학에서 근본이 되는 발견과 과학의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고, 인간 역사의 과정을 바꾸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또한 비전문가가 새로운 기준이 될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것 역시 종종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레벤후크는 매우 창의적이었고, 주의깊었으며, 정확하고, 그 당시의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으며, 채울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호기심은 그가 40세부터 91세로 죽는 날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 호기심은 그가 로버트 후크(Robert Hooke)의 벌레, 코르크, 직물과 20-30배의 배율로 관찰된 다른 물질들의 그림을 포함한 새 삽화집인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의 사본을 읽었을 때 시작되었다. 레벤후크는 자신의 렌즈를 연마하여 만들고, 그 자신만의 현미경을 만들었다. 기술상의 완벽함은 그 배율을 200배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그는 인류에게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인 미생물의 세계(world of microorganisms)를 열었던 것이다.

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난 안토니에게는 과학자가 될만한 어떠한 조건이나 기회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어려움과 역경을 먼저 알게 되었다. 바구니 제조업자 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대여섯살 때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맥주 양조업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화가이자 지방행정관(bailiff)이었던 사람과 재혼했으나, 안토니의 새아버지는 그가 16살때 다시 세상을 떠났다. 삼촌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고, 대학교육은 결코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 당시의 과학교육에 사용되던 언어인 라틴어 교육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그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가 그가 아는 유일한 언어였다. 레벤후크는 16살이 되던 해 직물상의 견습생 일을 시작해서, 22살이 되기 전 직물점의 상인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비단 상인의 딸이었던 바바라 드메이(Barbara de Mey)와 결혼했다. 그리고 5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그 중에 네 명은 어릴때 죽었다.

안토니는 1660년도에 시종(chamberlain)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와인의 검사를 위한 조사관이자 검사관이 되었다. 그의 직책과 아마도 얼마의 유산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그의 유명한 취미생활이 된 것을 추구할 만한 넉넉한 수입이 생겼다. 그의 아내는 1666년 그가 3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5년뒤 칼빈파의 성직자이자 다른 직물상이었던 사람의 딸인 코넬리아 스왈미우스(Cornelia Swalmius)와 결혼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안토니의 과학에 대한 탐구를 일깨워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업적들이 그들의 결혼 2년 이내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결혼은 169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23년동안 지속되었다. 그 이후 안토니가 1723년도에 죽기까지, 그의 마지막 딸이 그를 돌보았고, 그래서 그가 두번째로 홀아비가 된 후 29년동안 그의 과학적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안토니가 현미경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합 확대 렌즈(compound magnifying lenses)는 그가 태어나기 40년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 현미경의 배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아마도 그의 직물거래시 조사할 때 사용하던 확대경에 친숙했었을 것이다. 그가 다녀왔던 단 한 번의 런던 여행(두 번째 결혼 중간인 1668년도에)을 통해, 그는 로버트 후크(Robert Hooke)의 인기 있던 새 책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소개된 확대경을 통해서 본 그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자연의 세계에 접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단지 5년 뒤에 활짝 피어난 현미경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레벤후크에게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마 그 책이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그의 두번째 아내 혹은 그의 지적인 친구들이 그랬을까? 레벤후크 자신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그랬을까? 어떻든지 그는 스스로 확대경을 연마하고 완벽한 위치에 고정시킨 뒤 검사시료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서투른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 후크, 스왐메르담(Swammerdam), 말피기(Malphighi),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들에 비하면 매우 뛰어나서, 19세기까지 그것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전자현미경은 그 후 250년이 지나서 나왔다.) 그 당시의 복합 현미경은 색수차(chromic aberration)때문에 고전하고 있었고, 20배 이상의 배율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레벤후크는 그의 현미경에 핀머리(pinhead)보다 많이 크지 않는 작은 렌즈를 사용했고, 그의 우수한 시력을 사용하여 270배의 배율과 1.4 micron의 해상도를 얻어냈다. 이제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은 나뭇잎이나 직물과 같이 잘 알려진 것들을 확대해서 보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레벤후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원했다. 그의 현미경을 통해서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었던 1673년에 한 친구가 그를 영국의 왕립학회(Royal Society)와 연결해 주었다. 안토니는 한 친구가 그렸던 벌(bee)의 침과 입, 이(louse), 곰팡이(fungus) 그림을 그곳에 보냈다. 저명한 영국의 과학자들은 처음엔 네덜란드어 밖에 말할 줄 모르는 훈련받지 못한 비전문가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1676년도에 그는 물에 사는 미생물들을 발견한 것을 묘사하면서, 이들은 너무도 작아서 ”만 개 정도의 이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하나의 거친 모래 입자와 비슷할 것이다” 라고 기술했을 때, 왕립 학회는 그의 보고서가 진짜 관찰된 것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이유는 특히 로버트 후크 자신이 (그때까지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가지고 있었던) 이 실험을 반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벤후크의 관측이 사실이고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1680년에는 이 훈련받지 못한 비전문가가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후에도 결코 다시 런던을 방문하거나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 네덜란드의 옷감 상인은 50여년동안 영국의 과학자들과 샘플들을 첨부한 수백통의 편지를 보내며 활발한 교류를 했고, 그 중의 몇몇은 현재까지 왕립학회 도서관에 그가 직접 만든 현미경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그가 만든 현미경은 수백대였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단지 9대 이다.)

레벤후크의 편지는 발견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한 방울의 물에서 발견된 생물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속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의 움직임은 아주 신속하고, 다양하며, 위, 아래, 원을 그리고 있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몇몇 이 작은 생명체들이 치즈껍데기, 밀가루, 곰팡이, 그리고 비슷한 것에서 발견되는 가장 작은 것보다 수천배 이상으로 작다고 판단한다.... 이 중에서 몇몇은 매우 작아서 수백만 개가 하나의 물방울에 담겨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작은 크기를 비교할 만한 살아있는 생명체를 본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 이러한 엄청나게 작은 생명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조차 없기에,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해 더욱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그 당시 영국의 과학자들에게는 품위가 없는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의 이빨 사이에 끼어있던 치태(plaque)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나는 수많은 작은 생물체들과, 아주 예쁜 움직이는 것들, 가장 큰 종류의 것들이 아주 강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지고,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듯이 물(침)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다.... 두번째 종류는 잡아늘인 실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현미경을 통해 보였던 것들에 대한 안토니의 강한 호기심과 놀라움은 거의 촛불 수준의 조명 하에서, 그의 5cm 가량의 작은 현미경을 계속 들여다볼 수 있게 했던 힘과 인내심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동기에 대해서 그 자신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오랬동안 해 왔던 내 일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찬사를 얻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보게된 것들에 대한 알고자하는 열망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레벤후크는 처음에 박테리아, 윤충류(rotifers), 그리고 종벌레(Vorticella)와 같은 원생생물(protists)들을 관찰했다. 그는 혈액속의 세포를 관찰했고, 처음으로 정자(sperm)의 물결치는 움직임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실험 생물학의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의 모델이 되었을 기술적 기능들을 실험하면서, 현미경 렌즈에 가져다 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과 미지의 것들에 대해서 조사했다. 또한 그는 미신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일했다. 독립적으로 일하며,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인식들에 대해서 전혀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한 좋은 실험적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신비한 글씨가 불에 탄 종이처럼 보이는 물체에서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온 메세지로 여겼었다. 안토니는 그것이 단지 말라 있는 조류(algae)의 층(sheet)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는 그러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법의학적 모델(forensic analysis)을 사용했는데, 심지어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을 재현해 보이기도 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레벤후크는 그 당시에 보급되어 있던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이슬에서 뱀장어가, 모래에서 조개가, 고기에서 구더기가, 그리고 밀가루에서 바구미가)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의 원리를 비판했다. 그는 개미, 벼룩(fleas), 홍합(mussels), 뱀장어, 그리고 다양한 벌레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완전한 주기를 관찰했다. 잘못된 자연발생설 개념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에 의해서 종말을 맞을 때까지 15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진화론적 철학의 영향에 의해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연발생설이 또 다시 생겨나기는 했지만).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는 그의 말년에 어느 정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경이로운 작은 미생물들을 보기 위해서, 그의 작은 가게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러시아 황제), 영국 국왕 제임스 2세(King James II),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가 있었다. 그는 왕립학회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 당시 주름잡던 과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명성이나 위치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그가 너무 바쁘거나 약속 없이 찾아오면 왕족에게도 퇴짜를 놓기도 했다. 진실로 그의 정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사하도록 허락해 주신 자연의 경이로움(wonders of nature)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항해학, 천문학, 수학과 또 다른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지 성취될 수 있다면 그 생각으로 항상 바쁠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벤후크에 대한 전기들이 주로 그의 실험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레벤후크의 기독교인으로서의 헌신된 자세에 대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확고한 하나님의 창조가 기초를 이루고 있는 네델란드 개혁 교회(Dutch Reformed tradition)에서 태어나 자랐고, 교회는 사람들이 연구를 통해 자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솜씨를 조사하는 것을 이해하고 격려하였다. 그의 종교관에 대해서 인디애나 대학의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세례를 받고, 칼빈(Calvist) 교회에 묻혔으며, 그의 두번째 아내는 칼빈주의(Calvinist) 성직자의 딸이었다.” 또한 레벤후크는 분명히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과 같은 미신과 싸웠음이 분명하다. 아미테이즈(Mark Amitage)는 레벤후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작은 동물들이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말 기적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러한 미생물들이 원래 창조되었고, 창조주가 고안한 방법에 의해 증식되고 있음을 믿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레벤후크 시대에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주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전통 아래 주로 청교도(Puritans)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이 서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출판물들과 심지어 묘비에서도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자부심과 기쁨을 그들과의 관계에서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벤후크의 글들에서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함과 놀라움을 가지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다. 믿음의 과학자들(Scientists of Faith, Kregel, 1996)에서 그레이브(Dan Grave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생명체를 작고 위대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로움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그의 장점은 인내심, 간결함, 굽히지 않음에 있었다. 그는 모든 이론, 심지어 자신의 이론 위에 있는 진실을 사랑했다.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것을 증명했듯이, 그들의 요점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의 작업이 강한 기독교적 헌신 이외의 것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앞에서 이야기된 바와 같이, 레벤후크의 업적과 기독교적인 세계관 사이에 분명한 일치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레벤후크는 그의 마지막 관찰 내용을 구술해서 왕립학회에 전달한 후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분명히 그의 길고 충만한 삶은 과학적 의문에 대한 열정으로 꽉 차 있었다. 현미경은 그의 죽음 이후 많은 발전을 했다. 과학자들은 이제 수백 배가 더 높은 100,000 배율의 전자현미경을 사용해서 레벤후크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DNA, 분자모터, 세포의 동력기관 등과 같은 세계를 조사하고 있다. 현미경 아래에 광대한 창조의 수평선이 아직도 미탐사 상태로 남아있다. 혹시 당신은 레벤후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조사(scientific investigation of nature)가 기쁨의 원천이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레이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토니 반 레벤후크의 삶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대부분은 아마도 우리에게 태양 아래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여줌에 의해서일 것이다”



*참조 :

.Louis Pasteur’s Views on Creation, Evolution, and the Genesis of Germ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rj/v1/n1/louis-pasteurs-views

.The World’s Greatest Creation Scientists from Y1K to Y2K.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304.htm 

출처 - CEH, 2004. 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12

참고 :

김무현
2006-03-14

헨리 모리스 박사를 추모하며


      2006년 2월 25일, 현대 창조과학운동의 아버지이며, 탁월한 성경변증학자 였던 헨리 모리스 박사께서 8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저술에 몰두하였고 설교와 강의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60권이 넘는 주옥같은 창조과학 클래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하나님께서 마틴 루터를 들어 쓰셔서 타락으로 치닫던 중세 카톨릭 교회를 참 신앙과 말씀으로 돌이키셨듯이, 후대에 헨리 모리스 박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성서비평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로 떠내려 가던 미국의 기독교에, 다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으려 하는 근본주의 및 보수 복음주의의 새 물결을 일으키셨다.

그 때, 이미 영국과 독일의 교회들은 인본주의, 진화론, 자유신학의 영향으로 날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25년 그 유명한 스콥스 재판(Scopes trial) 이후로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공인되어가고, 모세의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신화정도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그 당시 믿는 과학자들의 모임이었던 ASA(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마저도 진화론 일색의 칼라로 바뀌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간격이론(gap theory)및 날-시대 이론 (day-age theory)등 타협이론들을 정론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위세에 눌려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보수 복음주의에 숨통을 터 준 책이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 (죤 휘트콤 박사 공저)의 '창세기 홍수 (The Genesis Flood, 1961)'이다. 이 명저를 기반으로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기록과 같은 대격변의 패러다임 안에서 지각의 퇴적층과 화석들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자유주의 및 복음의 세속화에 의분을 느낀 헨리 모리스 박사는 계속해서, 1967년, 창세기와 노아홍수를 계시된 말씀 그대로 믿는 창조과학자들의 모임인  CRS(Creation Research Society)를 진수시키고, 1970년, 창조과학 연구 대학원인  ICR(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을 설립하여 창조과학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토목공학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ASCE (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최고 명예인 Fellow에 선출되었으며, ICR 설립 바로 전까지 명문대학인 VPI(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토목공학과의 Chair Professor로 재임했었다. 또한, 일반 수리학의 명교과서인 'Applied Hydraulics in Engineering'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창조과학 변증 및 선교로 그 활동이 매우 활발한 AIG(Answers In Genesis)의 원장인 켄 햄은 그의 사역의 시발점이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의 책 창세기 홍수라고  간증하고 있다. 필자가 창조과학 및 성경변증의 개인적 소명을 갖게 되는데, 결정적인 동기 부여를 한 책들도 바로 헨리 모리스 박사의 저서들이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이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창조주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 안식하고 있으리라. 그가 믿음의 거장으로서 유산으로 남긴 탁월한 저서들과 삶의 본들은 오늘날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 믿는자들에게 다시 한번 성경을 수호하는 전도자로서의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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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Ann Lamont
2006-03-02

존 레이 (John Ray) 

: 생물학의 창시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1627-1705)


     존 레이(John Ray, 1627-1705)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 태어난 해,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죽은 해인 1627 년에 태어났다. 보일은 현대 화학의 창시자이며, 베이컨은 실험과 이성적인 논의(rational argument)를 결합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시작한 사람이다. 크로우더(J. G. Crowther)는 그의 책 ‘영국 과학의 설립자들(The Founders of British Science)’에서, 이들 세 명의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업적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대의 보편 과학(universal science)을 창조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의 내용물(contents of nature)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베이컨이며, 화학에서 그것을 시작한 사람은 보일이다. 생물학에서는 존 레이가 상당한 업적을 수행했다.”[1]

존 레이는 1690년에 출간된 영국의 식물에 관한 그의 책 서문에서, 고대 그리스 사고의 잔존물이었던 (실제 세계에서의 시작점 없이) 논리적인 논의만 주장하던 이전의 철학 대신에, 실험과 논리를 결합시킨 베이컨의 개념으로 대치된 시대에 그가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초반의 삶

존 레이는 1627년 11월 29일에, 영국 에섹스(Essex)에 있는 블랙 노틀리(Black Notley)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 대장장이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풀을 모아서 약용으로 사용했으며, 그 지역에서는 그녀 자신의 치료용과 아픈 사람들을 위한 연민으로 그것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식물에 대한 존의 흥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풀을 채집할 때인 초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존은 그의 고향 마을에서 약간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지역의 교구목사는 그가 학문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브레인트리(Braintree) 근처의 중등학교(grammar school)에 다니도록 주선했다. 또 다시 그의 잠재력이 인정되어 16살에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갔다.

대부분 부유한 신사의 자제였던 캠브리지 학생들과는 달리, 존 레이는 가난했으며 필요경비를 지불할 수 없었다. 그 후의 아이작 뉴턴과 마찬가지로, 레이는 트리니티 대학 교직원의 하인으로 활동함으로써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그는 165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트리니티 대학의 강사로 남았다.


기독교 신앙

레이는 기독교 신앙에 깊게 헌신되어 있었으며, 온유하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기 학생들의 생각이 물질주의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지기를 원했다. 크로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이는 학생들에게 게임이나 유흥에 전념하지 말고, 그가 자연의 절묘한 작업에서 예시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묵상함으로써 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을 제안했다.”[2]

비록 대학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이 아직 학과목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지만, 레이는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개인 시간에 그 지역의 식물상(相)과 동물상을 조사하는 데에 그와 함께 참여할 것을 권했다. 레이는 식물학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인 ‘캠브리지 부근의 식물에 관한 목록(a catalogue of the plants around Cambridge)’을 1660년에 출판했다.

레이는 항상 안수 받은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국가가 교회의 문제에 상당히 간섭하는 시대에 살았다. 왕정주의자들이 권력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교회의 최종 예배의식을 다시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는 "외적인 수행에 많은 의존을 하는 종교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내부의 영적인 제도(institution)와 양심의 정화(refinement)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3] 레이는 그의 믿음을 타협하려고 하지 않아서 1662년에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레이는 자기 자신과 과부가 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레이의 이전 학생이었으며, 부자였던 프란시스 윌러비(Francis Willughby, 1635-1672)가 자신의 경비로 과학적인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레이의 면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어서, 그의 위대한 업적인 생물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서 8:28절과 같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과학에 대한 레이의 기여

10년 동안 레이와 윌러비는 영국의 섬들과 그 밖의 유럽을 돌며, 관찰하고 시료들을 수집했다. 윌러비는 동물들에 초점을 맞춘 반면, 레이는 식물들에 집중했다. 그들의 목적은 살아있는 생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것들을 한정된 숫자의 강(綱, class)으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1670년에 레이는 영국 섬의 식물 목록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식물의 약용에 대한 긴 절을 담고 있었는데, 거기서 점성술, 연금술 및 마법을 고발하고 있었으며, 증거를 요구하는 데 있어서 냉혹하였다.”[4]

그때까지의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레이는 영국의 이름난 위대한 과학자 그룹인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후에 왕립학회의 회장(secretary)이 되어달라고 요청 받았을 때, 레이는 생물학에 관한 그의 연구에 전념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윌러비는 1672년에 죽었지만, 윌러비의 뜻에 따라 이 목적을 위해 풍부하게 제공된 기금을 가지고 레이는 그들의 위대한 과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레이는 자기 자신의 과업을 진행할 뿐 아니라, 윌러비가 동물에 관해서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레이는 1676년에 새(birds)에 관한 책을 출판했고, 1685년에 물고기(fish)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새에 관한 그의 책은 "과학적인 조류학의 기초를 놓았다."[4]

그리고 나서 레이는 유럽과 그 외 지역의 식물에 대한 기록과 분류를 수행하여, 식물왕국에 대한 일반적인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떡잎이 두 개냐 아니면 하나밖에 없느냐에 따라 꽃을 피는 식물을 분류했다. "이것은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구별한 것으로 이후의 모든 식물학자들이 채택한 구분이다."[4]

종(species)을 의미하는 것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이 레이였다. 린네(Linnaeus, 또 다른 헌신된 기독교인)는 레이에 뒤이어 종을 그의 분류체계의 기본원칙으로 사용했는데, 관련된 종들을 모아서 속(genera)으로, 관련된 속들을 모아서 더 높은 범주 등등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레이의 식물에 관한 일반적인 목록이 "린네가 현대의 형태로 도입한 체계적인 분류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5]

파충류(reptiles)와 포유류(mammals)에 관한 그의 1693년의 책에서 레이는 이빨과 발굽과 발가락에 따라 동물들을 분류했다. 동물에 대한 이와 같은 논리적인 분류는 이전의 체계에 대한 대단한 개선이었다.

레이의 통찰력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의 시대를 앞서갔다. 아시모프(Asimov)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화석이란 멸종된 생물체의 석화된 잔존물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100년 이후까지 생물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진화론에 반대하다

레이는 그의 기독교 신앙과 자신의 과학적 작업 사이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과학적 연구란 "인간 재능의 적절한 실행이며 기독교인 탐구의 합법적인 영역"이라고 믿었다.[4]

레이는 만물(하늘들, 땅,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무한히 정교한 부분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널리 읽히는 두 권의 책에 표현하였다. 두 번째 책인 ‘창조의 작업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the Creation)’는 고전이 되었다. 그는 ‘거룩한 삶의 추구(Persuasive to a Holy Life)’라는 제목의 신학책도 썼다.

레이는 왕립학회에, 생명이 무생물로부터 자연적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는 개념인 자연발생설에 완전히 반대되는 논문을 썼다.[6] 레이는 자연발생설과 상치되는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의 실험을 인용했다. 레이는 "내가 관측하고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런 것은 자연에 없다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7], 자연발생설을 '인류와 다른 동물들의 첫 번째 출현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허구적이고 터무니없는 설명” 이라고 간주했다.[7]

레이는 식물과 동물이 하나님에 의해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때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식물과 동물에 대해 광범위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한 후에 종들은 구별성을 유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식물과 동물은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며, 그 분에 의해 처음에 만들어진 것과 동일한 상태와 조건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고 결론지었다.[8] 불행스럽게도, 이 설명은 ‘종의 불변성(fixity of species)’으로 이해되어서 진화론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다양한 ‘종’의 핀치새들을 관찰한 후에, 그들이 군도에 도착한 적은 숫자의 핀치새들로부터 계통되어져 나왔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종들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창조론자들이 틀렸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레이는 아마도 다윈의 핀치새들은 진화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 개(dogs) 안에서의 다양성과 같이 창조된 종류(kind) 내에서의 다양성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노년

존 레이는 44세에 결혼했다. 그의 어머니가 1679년에 죽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는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지어주었던 블랙 노틀리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의 노년에 어린 네 딸들은 표본들을 수집하고 번식시키는 데에 훌륭한 조수들이 되었다.

그의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겸손을 유지했으며, 부자나 가난한 자들과 쉽게 교제했다. 그는 1705년 1월 17일에 죽을 때까지 블랙 노틀리에서 살며 일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친구가 레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거래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보다 확실할 수 없었으며, 대화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보다 겸손하거나, 정중하거나, 상냥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보다 신실할 수 없었으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보다 동정적이거나 자비로울 수가 없었다.”[9]

그의 길고도 열매가 많은 생애 동안에, 레이는 식물학과 동물학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삶과 행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J.G. Crowther, Founders of British Science: John Wilkins, Robert Boyle, John Ray, Christopher Wren, Robert Hooke, Isaac Newton, Cresset Press, London, p. 94, 1960.
2. Ref. 1, p. 105.
3. Ref. 1, pp. 107-8.
4. McGraw-Hill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9:118, McGraw-Hill, New York, USA, 1973.
5. I. Asimov, Biographical Encyclopedia of Science and Technology: The Lives and Achievements of More Then 1000 Great Scientists from Ancient Greece to the Space Age, 3rd edition, Doubleday & Co. Inc., Garden City, New York, USA, p. 137, 1982.
6. The evolutionary ideas of spontaneous generation and of species being able to change from one to another were not originated by Charles Darwin. These ideas had been around since the time of the ancient Greeks. Darwin merely put various existing ideas together into his theory of evolution and popularized them.
7. J. Ray quoted in Ref. 1, p. 126.
8. J. Ray, quoted in: H.M. Morris, Men of Science, Men of God, Master Books, El Cajon, CA., USA, p. 18, 1982.
9. W. Derham, quoted in Ref. 1, p. 129.


*Ann Lamont, B.Sc., M.Ed.St., was for many years a teacher of mathematics and science, and a researcher in education. She is the author of 21 Great Scientists who Believed the Bible (CSF, October 1995).


*참조 :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1/ray.asp

출처 - Creation 21(1):51–53, December 199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56

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6-02-28

헨리 모리스 박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Dr. Henry Morris has died)


       ICR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명예 회장이고, 현대 창조과학 운동(특별히 1960년대 초에 쓴 ‘창세기 대홍수’를 통해)의 아버지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가 최근 일련의 작은 뇌졸중으로 쇠약한 상태에 있다가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저녁, 그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갔다.

87세의 헨리 모리스 박사는 그동안 샌디에고에 있는 요양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었다. 그의 아들인 헨리 모리스 3세(Henry Morris III, ICR 부회장) 박사의 말에 의하면,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득력과 조심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나의 동생 존(ICR 회장)과 누이인 메리(Mary)와 레베카(Rebecca)가 주님 품으로 떠나실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밤 ICR 회원들과 가족, 친구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모리스 3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버님은 주님의 많은 축복을 받으셨고 온전한 삶을 주님께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당신의 주님 앞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받으며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AIG–USA의 회장이고, AIG-Australia의 공동창설자인 켄 햄(Ken Ham)은 AiG 리더쉽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리스 박사님은 나의 믿음의 영웅들 중 한 분이십니다. 그는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서 주님을 높여 드렸던 사람입니다. 모리스 박사님과 휘트콤 박사님이 공저로 쓰신 저 유명한 책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는 전 세계에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불꽃을 일으킨 주님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내가 읽었던 최초의 주요한 창조과학 책이었고, 그래서 호주에서 창조과학 운동의 불을 지피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가족들과 ICR의 스탭진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의 생애 동안에 저술했던 많은 책들과 글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도록 기도를 부탁드린다.

  

헨리 모리스 박사님이 주님의 품에 안기다
(Dr. Henry Morris is home with the Lord)

Feb 27, 2006, ICR News
http://www.icr.org/index.php?module=news&action=view&ID=59


     최근 몇 주 동안 일련의 작은 뇌졸중 후에, ICR의 설립자였고 회장이셨던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님께서 2006년 2월 25일 오후 6시 30분, 향년 87세의 나이로 그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스리스도의 품안으로 평화롭게 안기셨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성경적 창조론, 과학적 창조론, 성경 주석 등에 관한 60여편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가장 최근의 작업은 젊은 지구 창조론(young-earth creationism)을 지지하는 수천의 주석을 포함하는 'the New Defenders Study Bible' (지난 달에 출판됨) 이었다.

모리스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현대 창조과학 운동을 시작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많은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졌던 뛰어난 과학자요 신학자였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신실했던, 그리고 그 앞에 당한 경주를 인내로써 경주하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달려갈 길을 마친 하나님의 종이었다. (히 12:1-2)

추도 예배가 이번 주 화요일(2006. 3. 2)에 Shadow Mountain Community Church에서 있을 예정이다. 모리스의 가족과 ICR의 전체 스탭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린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answersingenesis.org/docs2006/0225morris.asp ,

출처 -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53

참고 :

Ann Lamont
2005-08-17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 저명한 과학자이며 동시에 헌신적인 기독교인


      ”자연의 세계, 인간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 이들은 서로 잘 들어맞는다.” -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는 독일의 바일데어슈타트(Weil der Stadt) 라는 마을에서 1571년12월 27일에 태어났다. 어릴 적에 요하네스는 매우 작았으며 자주 병을 앓았다. 세 살 때 그는 천연두에 걸려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수개월을 지냈다. 그의 소년시절도 불안정했고 불행했다. 그의 아버지는 용병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집을 떠났으며, 어떤 때는 한 번에 수년씩 걸렸다.

요하네스의 어머니가 그의 남편과 지내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요하네스는 할머니와 함께 남았다. 그의 부모와 떨어진다는 것이 요하네스에게는 애처로운 일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다.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어린 요하네스의 믿음이 자라도록 그를 격려하였다. 요하네스의 할아버지는 비록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교육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학교에 보냈다. 그의 선생은 그 소년의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부모가 몇 년 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Heinrich)는 여관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그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데 드는 돈을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요하네스를 여관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싼 노동력으로 보았다. 따라서 하인리히는 그의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그러나 후에 여관 사업이 기울어서 실제로 요하네스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다. 그의 예전 선생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는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공작으로부터 장학금을 얻는 데 성공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주정뱅이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를 학교로 돌려보냈다.


교육

공작의 지속적인 배려로, 요하네스 케플러는 1587년에 튀빙겐 대학(University of Tubingen)에서 학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성경, 수학, 천문학을 배웠다. 케플러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미가엘 마스트린(Michael Mastlin)은, 그 당시 극소수인 천문학 교수로서,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개념을 받아들였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케플러는 1588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591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케플러는 젊은 시절 동안에 헌신적인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죽기 바로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서, 그 안에 모든 피난처와 위로가 있다” 라고 믿었다.[1] 케플러는 대학을 마친 후에 루터교의 목사로서 하나님께 봉사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특한 재능을 가진 이 젊은 사람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594년에, 케플러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즈(Graz)에 있는 루터파 고등학교에, 방금 죽은 수학 선생을 대신하여 와줄 것을 요청 받았다. 신학 수업을 마칠 때가 거의 다 되었지만, 케플러는 가르치는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천문학과 점성술

케플러는 그라즈에서 수학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교구의 수학자가 되었다. 이 지위는 땅을 측량하고, 상업에 사용하는 무게와 치수의 정확성에 관한 논쟁을 조정하며, 달력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날짜를 나열하는 이외에, 오늘날의 달력에는 공휴일과 학교의 휴일, (보름달과 초승달 등의) 달의 위상 등에 관한 정보를 종종 담는다. 심지어 어떤 달력에는 운동 경기 날짜와 공공 서비스 요금의 지불일 같은 것도 싣는다. 마찬가지로, 케플러의 시기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실어줄 것을 기대했다. 즉, 농부들에게 농작물을 심고 거두는 시기를 알려 주기도 하고, 군사작전의 지휘자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과 연애 사업에 도움을 주는 정보 등을 포함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의 상대적 위치와 지축의 기울기가 연관되어 사계절 및 달의 위상, 조류, 일식과 월식 등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농사와 낚시, 군사 계획, 그리고 다른 여러 일들과 과학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현대에 있어서도, 어떤 군사적 공격은 계절과 달빛에 적합하도록 시간을 조절한다).

그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으로는, 천문학이라는 과학에 근거한 이치에 맞는 결론과 점성술에 근거한 사실 무근의 주장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케플러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차이점에 관하여, 일반 사회나 대학 모두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천체의 운동에 관하여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어떤 사건이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에 영향을 받았으며 어떤 사건이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케플러는 계속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치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그의 예측의 정확도를 계속하여 검사하기로 했다. 이 과정의 일부로서, 케플러는 1601년에 ”별들이 인간의 삶을 지시한다는 미신적인 견해를 부인하는” 책을 출판했다.[2] 케플러는 점차적으로 점성술의 다른 관점들도 부정했다. 케플러의 자서전을 쓴 티너(J. H. Tiner)는, ”요하네스는 점성술의 장기적인 정확도를 조사한 첫 번째 과학자이었다. 그의 기록을 보면, 점성술을 믿는 것은 위험한 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지적했다.[3]


행성의 운동

케플러는, ”자연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 이 세 가지는 서로 잘 들어맞는다”고 강하게 믿었다.[4] 특히 케플러는, 지능이 뛰어난 창조주가 우주를 설계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논리적인 전형(pattern)에 따라서 작동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그가 볼 때, 혼돈된 우주의 개념은 하나님의 지혜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다른 많은 과학자들은 간단한 논리적 전형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자(사진의 사람)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1법칙 :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 태양은 타원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한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2법칙 :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직선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것은 행성이 태양에 가까울 때 더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에 케플러는, 어느 기간 동안 행성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입수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수학에 근거하여 행성 운동의 배후에 깔려 있는 전형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1595년에 쓴 ‘우주의 신비(Cosmic Mystery)’라는 책에서 그의 생각을 제안하였다. (과학의 경우에 있어서 종종 그렇듯이) 그의 개념 중 많은 것들이 훗날에 옳지 않다고 밝혀지기는 하였지만, 그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케플러는 저명한 덴마크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티코 브라헤는 케플러의 수학적 능력과, 수학을 천문학에 적용하려는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그의 천문학자 팀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였다. 그들 천문학자들은 하늘을 지나는 행성들의 경로에 관하여 수년 동안 도표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본 복잡한 경로의 이치를 맞출 수 없었다. 케플러는 1600년에, 프라그(Prague)에 있는 티코 브라헤의 천문대에서 그와 합류하였다. 케플러에게는 화성의 궤도를 조사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마침내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실제로 과학적으로 공략하는 데 필요했던 자료를 입수했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3법칙 : 임의의 두 행성의 회전 주기(P)의 제곱비(ratio)는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비와 같다. 즉, r13/r23=P12/P22


케플러의 시대에는, 행성의 경로가 원이거나 원의 결합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거의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원을 복잡하게 결합하더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냈다. 보편적인 사고에서 돌아서서, 케플러는 ”원이 아닌 경로를 시도하다가 마침내 올바른 답을 발견했다 : 화성은 타원 궤도로 공전하며 태양은 그 초점 중의 하나를 점유하고 있다.”[5]

더 나아가 케플러는 과거에 생각하던 것처럼 행성은 같은 시간 동안에 같은 거리를 이동(즉, 속도가 일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신에 그는, 태양과 행성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이 같은 시간 동안에 타원의 같은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이것은, 행성이 태양에 가까울 때 빨리 지나가며,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때 늦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케플러는 1609년에, 이들 두 개의 행성 운동 법칙을 ‘새로운 천문학(The New Astronomy)’이라는 책에서 발표하였다.

10년 후에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의 궤도를 일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태양으로부터 그 행성까지의 평균 거리를 수학적으로 관련짓는, 세 번째 행성 운동 법칙을 수립했다. 이 법칙은 1619년에 ‘세상의 조화(Harmony of the Worlds)’ 라는 책에서 발표했다. 케플러는 그 책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위대하시도다, 그의 권능은 위대하시며 그의 지혜는 끝이 없으시도다.” [6]

케플러의 기독교 신앙은 결국, 다른 많은 과학자들이 포기했던 행성 운동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그의 사고방식을 인도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관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할 수 있는 간단한 논리적 전형을 찾고자 했고,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마치 건축가처럼, 질서와 법칙에 따라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런 방식으로 모든 것을 측정하셨음을 알게 된다.” [7]

 

다른 발견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그가 과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이들 법칙은 과학적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만유인력에 관한 아이작 뉴턴 경의 후기 연구에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과학의 기타 다른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새로운 별(초신성)을 발견했고, 인간의 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했으며, 망원경을 개선시키는 등 광학의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별과 행성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출간하였는데, 그것은 항해자들에게 막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계산을 빨리 할 수 있는 방법 등을 포함하여 수학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여러 가지 고체의 체적을 연구했다.

케플러는 현대 과학의 창시자들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는다. 그가 쓴 세 권의 책, ‘우주의 신비(Cosmic Mystery)‘, ’새로운 천문학(New Astronomy)‘, ’세상의 조화(Harmony of the Worlds)‘에서 그는 궁극적으로 미신을 이성으로 대치하게 된 작업을 시작했다.’[8]

또한 케플러는 예수님의 탄생을 포함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연구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꿈(The Dream)’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는 최초의 현대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인정받는다.


비극적 인생

요하네스 케플러는 1630년 11월 15일에, 독일의 레겐스버그(Regensberg)에서 58세의 나이에 심한 질병으로 죽었다. 케플러의 인생은 비극으로 가득 찼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불행과 질병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즉, 그의 여섯 자녀 중 세 명이 어린 시절에 죽었으며, 첫 번째 부인이 죽었고, 종교적 박해가 반복되었다. 케플러는 대부분의 통치자가, 그의 백성들이 통치자의 종교적 믿음을 그대로 따라 주기를 기대하던 시기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의 믿음의 변화에 따라서 그의 믿음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케플러는 성경의 사람이었으며, 성경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법칙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자세는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큰 박해를 받게 했다.

케플러의 생애에 있어서 또 다른 외형적 사건은, 미신에 사로잡힌 그의 어머니가 마녀라고 기소 당한 사건이다. 그녀의 유죄가 인정된다면, 고문을 당하고 나무 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기술적인 변호 때문이었다.

그 재판의 모든 과정 동안 케플러는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을 지켰다. 그는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간단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요약했다.[9]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했다. 그의 열망은 이런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나의 이름은 쇠하게 하소서.”[10] 그는 하나님을 ”무(無)로부터 자연을 나오게 하신 친절한 창조주”로 인식했다.[11] 케플러는 그 자신의 생을 위해 세운 계획들을 멀리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말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신학자가 되려고 했었다. … 그러나 지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 천문학을 통하여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



References

1. Johannes Kepler, quoted in: J. H. Tiner, Johannes Kepler-Giant of Faith and Science, Mott Media, Milford, Michigan (USA), 1977, p. 193.
2.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1985, vol. 22, p. 506.
3. Tiner, p. 69.
4. Kepler quoted in Tiner, p. 172.
5.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22, p. 507.
6. Kepler quoted in Tiner p. 178.
7. Ibid., (inside front cover).
8. Tiner, pp. 195-196.
9. Kepler quoted in Tiner p. 197.
10. Ibid.
11. Ibid. (inside front cover).
12. Ibid.

*Ann Lamont, B.Sc., M.Ed.St. was for many years a teacher of mathematics and science, and a researcher in education. She has a strong interest in researching the lives of early creation scientists.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5/i1/kepler.asp

출처 - Creation 15(1):40~43, December 199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35

참고 :

Ann Lamont
2005-07-13

블레이즈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 뛰어난 과학자이며 헌신된 크리스천


      블레이즈 파스칼은 클러몬트-페란드(Clermont-Ferrand)라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1623년 6월 19일에 3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가 세 살밖에 안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후 가족 모두 파리로 이사했다.

그의 생애 동안 건강은 극도로 약했지만, 재기 넘치는 지성을 타고났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파스칼이 수학을 배우면 심적으로 매우 어려워할 것으로 우려하였으나, 오히려 수학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4세에 파스칼은 매주 수학강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수학자들의 주별 모임이 후에 ‘프랑스 과학원(French Academy of Science)’으로 발전하게 된다. 단지 16세에, 파스칼은 원뿔곡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은 동시대 수학자들로부터 아르키메데스 시대 이후 "수학 분야에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기여를 한 논문"으로 갈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원뿔곡선에 대한 현대적 접근방법의 기초가 되었다.


파스칼의 계산기

블레이즈 파스칼은 항상 실생활에 유용한 과학 및 수학을 추구하였다. 아직 십대였을 때, 그는 계산하는 첫 기계, 즉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는 대수기계를 발명하였다. 이 기계는 각각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가진 일련의 바퀴로 구성되어 있었고, 바퀴들은 여러 개의 기어로 연결되어 있어, 한 바퀴가 1회전하면 그 옆 바퀴는 십 분의 1만큼 회전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이 기계는 세무법원의 판사인 아버지에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점차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파스칼의 계산기는 오늘날의 계산기와 컴퓨터의 발달을 가능케 한 디딤돌이 되었다.


크리스천 신조

1646년에 파스칼은 얀센파에 가담하였다. 얀센파는 선행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칼뱅주의에 동조하는 프랑스 내의 카톨릭의 한 파이었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한 빈 공간(God-shaped vacuum)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파스칼은 창세기에 묘사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대영백과사전은 ”파스칼은 인간의 가증함은 오직 타락의 결과로서만 해석될 수 있고,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은 첫 아담이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두 번째 아담인 것처럼, 자신에게도 두 번째 아담으로 믿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적하기(積荷機; loader)의 앞에 있는 삽(shovel)을 작동시키는 데 사용되는 유압 장비는 파스칼의 발견에 근거한 것이다.


명확한 신념을 소유한 크리스천 파스칼은 계속해서 과학과 수학에 종사했다. 파스칼은 기압계를 사용한 실험을 통하여 오늘날에는 매우 익숙한 사실들을 증명하였다. 즉, 기압계의 수은주의 변화를 관찰하면 알 수 있듯이, 기압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감소하며,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도 변한다는 사실들을 증명하였다. 또한 파스칼은 유체정역학과 유체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용기에 담긴 액체에 압력이 가해지면, 그 압력은 그 압력이 부하된 면적에 관계없이, 또한 거리에 관계없이 모든 방향으로 동일하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사실은 "파스칼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스칼이 설계한 유체 압축기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유체에 관련한 이러한 실험 도중에 주사기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싸이클로이드(한 원이 직선을 따라 구를 때, 그 원주의 한 점이 그리는 궤적)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싸이클로이드에 관한 수많은 물리적/수학적 발견은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 미적분학의 발달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확률론

파스칼은 페르마(Fermat)라는 수학자와 함께 확률이론에 대해 연구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를 통해 그들이 확률이론의 창시자로서 동등한 역할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연구는 다양한 도박장에서 수행되었지만, 그 이론은 엄청난 적용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이론은 모든 보험상품(설계)의 기초가 되었으며, 입자의 거동을 묘사할 때 확률을 사용하는 양자 물리학 등, 수많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 유용한 이론이 되었다. 파스칼은 확률계산에 유용한 "파스칼의 삼각형"으로 알려진 간단한 도식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파스칼의 삼각형은 매우 간단하게 작성된다. 삼각형의 각 숫자는 바로 위에 있는 두 숫자의 합이다. 그것은 단 두 개의 결과만을 갖는 사상(event)의 확률을 구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여기에는 동전 던지기(앞면이냐 뒷면이냐) 또는 아이 낳는 것(남자냐 여자냐)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동전을 세 번 던지면 8개의 경우의 수가 있다: HHH, HHT, HTH, THH, TTH, THT, HTT, TTT.
삼각형의 세 번째 행을 보면 숫자가 1, 3, 3, 1이다. 이것은, 모두 앞면 또는 모두 뒷면을 얻을 경우의 수는 단 한 번이며, 앞면이 두 번 뒷면이 한번, 또는 뒷면이 두 번 앞면이 한번 나올 경우의 수는 3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확률로 환산하면, 가능한 결과의 확률은: 3H - 1/8(8번 중에 한 번의 기회); 2H1T - 3/8,  2T1H - 3/8,  3T - 1/8
네 번째 행을 보면, 네 명의 자녀를 둔 가족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딸 하나와 아들이 셋인 경우가, 딸이 없고 아들만 네 명인 경우보다 가능성이 네 배이다. 반면에, 아들이 둘이고 딸이 둘인 경우는  6배이다. 자녀가 4명인 가족이 모두 아들이거나 모두 딸인 경우는 16번 중의 한 번이다. 등등.

 

회개

파스칼은 도박이 열리는 많은 파티에 참석했으며, 불행히도 이런 생활방식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1654년 마차가 튕겨 나가는 사고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의 말은 죽었으나 그 자신은 무사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그 당시 생활방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즉, 31세부터, 39세에 죽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 소망은 사람들의 생각을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그 당시에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확신! 기쁨! 평화!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세상과 모든 것을 다 잊는다...”  "나는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킨다.”

파스칼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종교적 저술에 헌신하였다. 그는 "시골뜨기의 편지(Provincial Letters)"로 알려진 그 유명한 18개로 구성된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현대 프랑스 산문의 시초로 간주된다. 파스칼은 또한 탁월한 저서 "팡세"(불어로 ‘사상’을 뜻함)를 저술하였다. 팡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자신의 신념에 대해 논한 책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믿음은 감각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해 주며, 그것은 나타난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단순한 창조자 이상이심을 알았다. 즉,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개개인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파스칼은 구원문제에 확률의 개념을 적용한 "파스칼의 내기"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스칼의 내기는 다음과 같이 쉽게 풀이된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 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파스칼은 기록하기를 "나는 나를 위해 고통 받고 죽으신 나의 구원자를 향해 팔을 펼치고 있다.” 파스칼은 파리에서 1662년(39세) 8월 19일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부단히 병고에 시달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이 헌신된 크리스천은 과학, 수학 및 문학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갔다.

 


*참조 : 위대한 창조과학자들 (List of great Creation Scientists)
http://crev.info/?scientists=index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1/scientist.asp ,

출처 - Creation 20(1): 38–39, December 199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45

참고 :

김정훈
2005-06-24

어느 선교사의 죽음 : 전광호 선교사를 보내며


       서울대학교 학사와 카이스트 석사, 동경대학교 박사, 미국 국립보건연구소 연구원, 그 다음 이력으로는 뭐가 어울릴까? 명성 높은 어느 대학이나 혹은 어떤 세계적인 기업에서 계속 그 경력을 이어 갔다고 하면 어울렸을까?  그러나 그는 그의 전공인 생화학 분야에서 한창 연구가 무르익으며 경력에 불이 붙을 즈음에 홀연히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선교사가 된 것이다.  

지난 5년간 그는 인도네시아라는 낯선 땅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한 대학의 교수로 있으며 학생들에게 생화학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를 바쁘게 했던 것은 그 나라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해야 했던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갑자기 삶의 궤도 수정을 한 것도 결국은 그 ‘진리’에 대한 마음속의 오랜 부담이 인도네시아란 나라를 향해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진리’는 과학도였던 그가 드러내고자 했던 만물의 기원에 관한 진리였고, 그것은 다름 아닌 ‘창조’에 대한 증거였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과학자로서 과학이 가리키는 만물의 기원은 어떤 지적존재에 의한 창조일 수밖에 없음을 양심선언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 창조주임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분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매진한 것이었다.

모든 선교가 그렇듯이 창조과학 전문 선교도 결코 쉬울 수가 없었고, 그 어려움은 예상 외로 빨리 찾아 왔다. 다른 언어, 문화, 풍토 속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선교에 전력 하던 중, 유난히 폐질환을 많이 일으킨다는 그 나라 기후에 그만 폐암이라는 진단을 얻기에 이르렀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암이 많이 진행되어 간과 뇌로까지 퍼져 있었고, 급기야는 지난 6월 19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전 광호 선교사님. 40대 중반의 한창일 시기에 그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문득 그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뒤로 하고, 지난 5년간 낯선 인도네시아 땅에서 그가 전하고 다녔던 그 ‘창조의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아메바로부터 원숭이를 거쳐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할 이유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어 왔다면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이야기는 역사가 아닌 한낱 상상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예수를 통한 구원도 무의미해지지만,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과학적으로 봐도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우리에게 그 만드신 분에대한 탐구를 촉구하여 신앙의 시발점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 이는 예수의 부활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그의 죽음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그가 누비고 다녔던 인도네시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또한 이곳 고국에서도 늘 그의 삶을 지켜보며 한 마음으로 그를 격려하던 우리들 남겨진 자들에게 그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될 것이다. ‘창조의 진리’는 계속하여 외쳐질 것이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그 날까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14

참고 :

이재만
2004-07-29

화학, 생물학의 기초자 

: 로버트 보일, 존 레이, 카롤루스 린네


      영국 학사원(the Royal Society)의 설립자인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91)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서양의 화학이 중세의 연금술 수준에서 벗어나도록 했던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보일의 이름은 중고등학교에서 입에 붙어 다니며 외우던 화학의 기본 보일-샤를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귀에 익다. 즉 기체의 압력, 온도, 부피의 관계를 기체역학으로 설명한 가장 기초적인 법칙이다. 그의 기여도는 화학, 물리학 모두에서 수많이 발견된다.  보일은 겸손하며 자신이 믿는 증거를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며, 성경 읽기에 부지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성서번역과 복음전파에 많은 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성서변증에도 유달리 강해서, 상대자에게 기독교를 변론하는 '보일의 강연”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보일을 따라 영국 학사원을 같이 설립했던 영국박물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레이(John Ray, 1627-1705)가 있다.  그도 역시 당시 식물학과 동물학에 가장 권위 있는 자로 신실한 기독교인이며, 창조론자였다.  레이는 수많은 자연신학에 관한 책들을 썼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창조작품 속에 명백히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 The Wisdom of God Manifested in the Works of the Creation” 이다.  그의 책에는 "처음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작품들은 그가 처음 만든 것과 똑 같은 상태와 조건으로 그에 의해서 오늘날에도 보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많은 노력은 당시 이신론적(Deistic) 진화론자들을 정면으로 지적하였는데, 특별히 진화론이 나오기 전에 진화론적 사고를 갖고있던 데카르트(Decartes, 1596-1650)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해당자 들이었다.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사람이 바로 생물분류법으로 알려진 카롤루스 린네(Carolus Linnaeus, 1707-1778)이다. 식물계와 동물계로 그 분류의 기준이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린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성경에 대한 열정과 경외함이 가득찬 사람이었는데, 엄청난 수의 생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창세기의 "종류대로”란 말을 정리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종, species” 이란 개념을 성경의 "종류대로, kind”와 동일시 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인데, 그는 변이(같은 종 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는 같은 종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으나,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즉 나중에 찰스 다윈에 의한 진화 가능성을 일찌감치 부정했다.  그는 종의 판별이 쉽지 않으며, 많은 실수들을 거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근본적인 "종의 불변성, fixity of species”을 믿고 있었다.  오늘날 종의 분류가 많은 부분에서 진화론적 영향을 받았지만, 분류학의 처음 시도는 성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참조 : Carl Linnaeus: the scientist who saw evidence for God in everything in nature (CMI, Creation 37(4):52–55, October 2015)   http://creation.com/carl-linnaeus

서양이 중세과학에서 근대과학으로 넘어가는데, 화학과 생물학에 기초를 다졌던 사람들은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던 기독교인이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신도 허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알고 있던 자(잠 1:7; 9:10)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과학자들의 머리가 되게 하신 일들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 28:13-14)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26

참고 :


이재만
2004-07-28

베이컨 / 파스칼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은 소위 말하는 “과학적 방법”을 설정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과학자로서 직접 이룬 업적은 없지만, 근대과학으로 접어들게 한 사고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귀납법적 방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즉 관찰과 그 결과를 요약하여 과학적 법칙으로 이끄는 형태를 지지하였다. 기존에 관찰이나 실험이 없이 결론으로 이끄는 식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을 비판하면서, 전통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인 사고가 아니라, 실험이 수행되어야 하며, 자료에서 유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베이컨의 글들은 영국왕실의 기초를 세우는데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사고는 19세기 초 미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이란 과학이 사실을 고수하여야 하며, 직접적인 관찰 없이 확증 안된 가설들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이컨은 성경을 확고히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글에는 “우리 앞에는 실수를 막을 수 있는 두 권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의지가 계시된 성경이며, 그의 능력을 드러내는 피조물 이다” 라고 쓰여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은 위대한 철학자요, 수학자며, 유체역학의 아버지요, 수리역학의 설립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수학에서 원추기하학, 미적분학, 확률에 대한 수학이론 등을 기초하였다. 원추기하학의 결론에서 “만약 이것이 계속적인 연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한도까지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진공에 대한 연구로도 잘 알려졌으며, 이는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에 진공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반박하였다. 이는 기압계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자연이 창조주의 뛰어난 솜씨를 표현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를 자연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불가능한 베일 뒤에 감추셨다고 믿었다. 파스칼은 성경이 말하는 사실 위에 기독교가 서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한 과학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자로서 잘 알려졌는데, 바로 그의 명상록 때문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 안에서 교회개혁의 정신을 주장했던 얀센파(Jansenists)로서 캘빈주의적 준 개신교인으로 잘 알려졌다. 또한 “파스칼의 내기 (Wager of Pascal)”로 유명한데, “기독교인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이 잃을 것이 있을까? 그(기독교인)가 죽은 다음 내쫓을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허구라면, 그는 잃을 것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그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믿는 덕택에) 더 행복한 삶 속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결국에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의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결론은 새로운 형태의 변증학을 산출하기도 했다.


과학적 방법을 체계화한 기독교인 베이컨이나 파스칼 모두가 과학에 있어서 관찰과 실험이라는 귀납법적인 형태를 취하였지만, 그 귀납법적인 방법이 사실인 성경보다 앞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과 올바른 과학적 방법과 한계를 알고있는 두 사람의 생각은 지금도 똑같이 적용된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24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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