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Ali Salem
2003-10-03

어느 아랍 인의 사죄문


       나는 한 사람의 이집트인으로서 9/11 참사를 당한 미국 국민에게 사죄의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처참한 비극을 가져온 장본인들 가운데 한 이집트인도 끼어있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문필가로서 나는 저들을 그런 인간으로 키워낸 독특한 문화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

뉴욕시의 그 쌍둥이 타워가 파괴되기 훨씬 이전에 벌써 우리나라의 많은 타워처럼 우뚝 선 거인들이 저들과 궤를 같이하는 자들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저들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주었고 이집트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도 암살했습니다. 저들은 이집트의 자유와 교종(敎宗)분리주의를 수호하였던 문필가, 파라그 푸다를 살해했습니다. 저들은 우리나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기부 마하푸즈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것도 30년 전에 출판한 그분의 소설이 저들의 눈에 불신앙적으로 보였다는 이유로 인해서 82살의 노인을 말입니다. 저들은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들에게 그 작품이 신성모독이라고 일러줬을까요?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어느 동굴 속에 죽치고 있는 그 누구일까요? 아니라면 런던의 카페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는 그 누구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뉴저지 주의 어느 모스크 사원에 소속된 어떤 자가 그들을 세뇌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누구라고만 하면 다 알만한 자들입니다. 이집트 안에서만 해도 근본주의자들은 1000명이 넘는 경찰과 민간인들을(무슬림 또는 크리스천 구별 없이) 살해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 유적들 중의 하나인 핫쉐프트 여왕의 사원에서 저들은 1997년 60명에 가까운 관광객을 살해했습니다. 알제리에서 저들의 낫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을 끝없이 베어 버렸습니다. 저들은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목적을 표방하고 이 모든 범죄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예술과 교육, 그리고 경제는 온통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면문제는 종교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데에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문제의 해결은 종교지도자의 합의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약에 무슬림 교주들, 크리스천 목회자들, 그리고 유태교 랍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회합을 가진다면, 회합장소에서 나올 때엔 모두가 지복(至福)한 미소를 머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각기의 가치관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과 모두가 다 정당했다고 보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자기네들을 회복시켜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 이기적 공상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자유롭고 현대화된 나라인 미국에서도 극단주의 행태를 볼 수 있습니다. 기아나에서 자기를 좇는 무리들한테 독약을 탄 쿨-에이드를 마시게 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짐 죤스의 경우에서 그런 실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텍사스의 와코에서는 데이비스 코레쉬가 만들어낸 그의 조그만 지옥에서 또한 그런 실례를 보았습니다.

내가 속한 세계, 즉 중앙아시아의 아랍세계에는 극단주의라는 사회적 병폐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 병을 교육을 통해서 치유 하려는 우리 정부의 선의의 기도가 오히려 막대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은 소망하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하는 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건(穩健)을 추구하면서도 경건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존중하는 시민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면서, 여태껏 학교 교과과정엔 과학의 가치만을 고양하고 있을 뿐, 철학과 역사 즉 자기들이 실현하려는 자유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 가치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들은 사람들이 종교적 온건을 체질화하려면, 이슬람의 순수한 형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 결과로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진실한 신자들만을 대량생산 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강요된 경건을 처음에는 그런대로 환영하지만, 나중에는 실생활 속에서 조우하는 도전들과 대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점차 알아차리고, 마침내는 삶을 음울한 짐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자연사(自然死)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 대신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승천하기 전에 소속 사회가 성전승인(聖典承認)하는 충분사유(充分事由)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유, 즉 동족들의 눈에 자기들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확실히 가슴 속에 품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믿습니다. 일단 그들은 그런 사유를 발견하면, 그들은 자기네들의 성스러운 망상에 참여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눈에까지 자기네들의 행위를 고귀하게 만들어 보이는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내심으로는 보통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논리와 합리를 존중한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민족이라는 보편적인 이유를 찾아 헤맵니다. 그 실례로 우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9/11 테로 행위의 충분사유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내세우는 주장들 근저에는 보다 더 슬픈 진실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주의자들이 병리생물학적 질투심에 불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스스로를 난쟁이라는 자의식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이 타워들과 우뚝 솟아난 위인들만을 노리고 찾아 헤매는 이유입니다. 우리들도 이들에게 생명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명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은 우리 생명과 저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이어야 합니다. 아랍 세계에 사는 우리들은 자유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상한 생활을 살 기회를 요구합니다. 우리들은 당신네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끔씩 그렇게 보이는 걸 부인하지 못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얼마쯤은 당신네들보다 낙후한 것이 사실일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 정부들은 모두 합심해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문화에 바탕을 두고, 그리고 어떤 행동으로 생명을 증오하는 저들의 영향(影響)과 싸워나가야 하는가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 Ali Salem is a playwright and the author of several books, including Journey into Israel. He lives in Cairo.



번역 - 미디어위원회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42

참고 :

John D. Morris
2003-09-24

하나님의 적대세력과 영원한 창조계획 간의 오랜 전쟁


     (이 글(기도)은 테러리스트가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타워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 건물에 폭격을 가한 저녁에 쓰여졌다. 이 글은 ICR의 회장 Dr. John Morris의 기도로 되어있다.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다 더 큰 조망으로써만 가능하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여, 천지의 창조주이시여.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당신이 계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지고한 지혜와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를 위한 당신의 계획 앞에 우리는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보다 더 큰 당신의 계획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의 체에 걸러지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음을 승복하고 있지만, 오늘 있었던 살인행위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느끼시는 슬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당신께서 당신의 피조물에 주시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태초의 아침에 당신의 피조물을 지으시고 그 피조물이 아픔도, 고난도, 죽음도, 죄악도 없어서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창조의 손길은 완벽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주단인들 그에 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의 시 구절인들 당신의 솜씨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당신의 한없는 사랑과 긍휼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당신과 격이 없는 친교를 즐겼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괴로움을 당하거나 죽음을 맛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에 대한 그와 같은 거역에 죽음의 벌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거룩한 재판에서 인간계의 모든 것은 죽음이라는 저주(죄의 대가)를 받았습니다. 얼마 못 가서 형제는 형제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세기 6:5) 이었습니다. ”강포(强暴)가 땅에 충만하였던” (창세기 6:11) 것입니다. 오늘날 아담의 후손들은 너나없이 모두가 그 죄악의 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이라는 징벌의 무게에 짓눌려서 탄식하고(로마서 8:22) 있습니다. 그런 반항이 오늘날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당신은 죄를 징벌할 온전한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 죽음이란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사람은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담의 발자취를 선택한 우리는 모두 그 죽음의 정죄를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우리는 죄악의 지배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바로 오늘 우리나라는 그 죄악의 공격을 받고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죄로 인한 징벌과 응보로부터 ”만물이 창조되게 하신” (골로새서 1:16)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기억할 때 더욱 더 큰 감사를 느낍니다. 그는 ”사람과 같이 되었으되” (빌립보서 2:7) ”죄는 없으신” (히브리서 4:15)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사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죄 없는 자의 몫으로서, 그 분만이 온전히 충분한 대속의 자격을 갖추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린도전서 1:16) 하나님의 신성한 재판을 완전하게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에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로서의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어 믿는 자들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직 생명의 영원한 창조주이시기에 그는 죽은 후에 그의 육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펜타곤 건물의 폭파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그 이후에 목숨을 잃은 분들 가운데 일부는 의심할 바 없이 당신이 값없이 주신 선물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용서와 구원과 회복을 주시려는 당신의 선물을 거부하고 당신의 품을 떠나 영겁의 나락으로 영원히 가버린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시는 은혜 속에 당신의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믿게 된 것으로 인해서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들로 인해서 영원한 교섭이 끝나버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할 때면 우리 마음은 슬픔에 잠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오, 주님이시여. 진리의 짐을, 영혼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위대하신 창조주와 구세주에게 등을 돌렸던 자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려는 우리의 불타는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ICR 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 개개인은 물론 이 조직에게 힘을 허락하시어, 그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도구로서 분명한 창조의 증거들을 허락하여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고린도후서 5:20)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여 주옵소서. 시간이 촉박합니다.

그리고 오, 주여. 우리는 당신이 이 지구로 돌아오셔서 지구를 올바로 세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어서 오셔서 피조물을 원래의 창조의 의지와 기능으로 돌려주옵소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천지가 언젠가는 녹아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 (베드로후서 3:13)이 있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주는 치워지고 (요한계시록 22:3) 죄가 더 이상 군림하지 못하는 세상이 올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요한계시록 21:4,5) 라고 말씀하신대로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온전히 결실을 맺을 때까지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가 하는 일마다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걸음마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 당신에게 위대한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가 신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president/prz-0111.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41

참고 :

손기철
2003-09-18

세계관이란?


(1) 삶의 조망

오늘날 인간의 삶을 간략히 조망해 보자. 태어나서부터 언제부터인가 이성에 눈을 뜨게 되며, 주위의 자연을 보고, 인간을 보고, 자신을 보게 된다. 그후 체험에 의해서 발전되어지는 인식은 급기야 인간 본연의 물음인 인생의 존재(생명)론, 가치(진리)론, 그리고 목적(길)론과 같은 원초적인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부분은 이러한 문제들이 1) 너무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 것을 발견하거나, 2) 모든 사람들이 회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3) 그러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 없이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실제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지성의 눈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상대적이고 물질적인 문화가 우리의 삶(행동과 신조형성)에 영향을 끼치도록 방치하며, 동질적인 삶 속에서 '열심과 성실'에 위안을 삼으며, '남보다 빠르게, 좋게, 많이'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한평생을 바쁘게 살아가게 된다(winning is the only thing, Vince Lombardi). 한편, 각자의 인생 여정에서 다양한 요인들로 인하여 큰 충격을 접할 때는 본연의 지성이 다시 열리고, 자신의 심연을 다시 돌아보며 인생여정의 방향을 새롭게 수정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환언하여 언급하자면, 우리는 처음 지성에 눈뜰 때에 이미 존재하는 문화나 교육,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자신의 신념체계(세계관), 그 틀만을 가지고 자기의 삶 전영역을 이해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했을 뿐, 그 틀 자체의 유무, 정확성, 효율성, 목적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삶은 '본질'에 대한 정답없이 '어떻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 틀의 정확성, 효율성, 목적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또한, 어떤 틀에 기반을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이러한 틀에 관한 조망을 넓은 의미에서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세계관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어 'We1tanschauung(세계관)' 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발전되어져 왔다. 특히, 세계관의 독특한 의미는 성경을 통하여 세계를 포괄적으로 조망하려고 했던 기독교에서 구체적으로 발전되어져 왔으며, 20C에 들어오면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보다 심화되어지고, 삶의 전 영역에서 성경에 순종할 수 있는 준거틀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1) 사유와 삶의 전 영역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2) 선한 생활을 정의하고 인생의 희망과 목적을 바로 찾기 위하여, 3)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해서, 4)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창조론적(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적용이지만, 이에 앞서 세계관의 의미와 속성, 그리고 다른 포괄적인 체계들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세계관이란?

세계관의 발생과 개념사에 대한 깊은 이해는 본고의 의도를 벗어나기 때문에 제외코자 하나, 세계관의 의미를 가장 손쉽게 이해한다면,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삶에 대한 어떤 목적을 추구하면서 사는 피조물로서, 관점 대신에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체이다. 이 경우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선택은 그들이 삶을 보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세계관(worldview)이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로서, 사물의 존재양식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들로 볼 수 있다. 다른 의미로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존재론, 가치론, 목적론에 대해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건, 일관성이 있든 없든 간에) 일련의 전제들(참이거나 부분적으로 참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거짓일 수 있는 가정들)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릴 때부터의 경험들이 이성의 합리화 작용에 의해서 무의식적, 무의도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구조화되어진다. 세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언급한 일련의 전제들이 전이론적(pre-theoretical)이라는 데 있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전제들을 갖게 된 것이 먼저 그것들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이미 거기에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사고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단 어떤 전제들에 주의를 돌리면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원한다면 의식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저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다음에 가서야 그것들이 무엇인지 발견한다.

세계관을 이루는 전제들은 무엇일까? 삶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제들은 논지에 따라 다양하게 기술될 수 있지만, 다음의 기본적인 질문들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에 따라 다른 대답을 가질 것이며, 기독교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의 예를 들어 비교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제들(예시)

기독교적 세계관

진화론적 세계관

참된 최고의 실제

하나님, 말씀

없음, 물질원인

인간은 누구?

피조물

진화의 도상중 생명체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

행복(물질적 욕구충족)

사후의 세계는?

하나님 나라

없음 혹은 모른다

윤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속성, 사랑
존재주의, 이타주의

인간적인 공존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소유주의

역사의 의미는?

구속사적 개방역사

인본주의적 개방역사

자연을 보는 관점은?

질서, 조화, 균형
목적성을 가진 상호공존

인본주의적 정복주의, 소유주의

삶의 방법은?

절대주의, 성경

상대적 삶의 가치,
극단적인 금욕주의, 극단적인 쾌락주의

가치판단체계

창조,타락,구속, 구조와 방향

진화론, 이원론

 

(3) 세계관과 철학, 신학

세계관은 삶의 전영역(세계)을 포괄적으로 조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관의 의미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신학이나 철학과의 관계성에 의문이 제기되나,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시공간적 차원에서 존재한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세계관, 철학, 신학은 범위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지만, 신학이나 철학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전문적인 탐구영역이다. 그러나 세계관은 상당히 다른 문제로서, 삶에 대한 어떤 조망을 갖기 위해서 어떤 학위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적 지혜나 건전한 교리가 신학훈련만으로 높아지고 풍부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둘째로, 철학이나 신학은 학문으로서 과학적이며 이론적인데 반하여 세계관은 그렇지않다. 세계관은 우리 모두가 매일 일상생활에서 당면하는 경험의 문제요,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직관적인 이성에 관한 문제이다. 즉, 세계관은 철학보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실재와 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성질상 과학적이기 보다는 비과학적이고 오히려 전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적 태도는 항상 경험의 직관적인 앎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학과 과학은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다듬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 다양한 신학과 과학의 사조는 세계관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구조와 방향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사용함으로, 세계관, 신학, 철학간의 관계성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은 사물들의 구조(통일성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인 반면. 신학은 사물들의 방향(피조물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거역, 죄와 은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관은 구조와 방향 모두에 동등한 관심과 영향력을 가진다. 

 

(4) 세계관과 문화

한편, 삶의 다양한 분야를 총괄하여 문화라고 규정할 때, 세계관과 문화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문화인류학자들은 대개 문화를 크게 세계관(worldview), 가치체계(value system), 행동양식(behavior pattern)의 세 영역으로 나눈다. 이중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장 심층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관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신념체계에 기초를 둔 문화 사회적 행동과 실체의 근본 출발점은 바로 세계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신념을 형성하는 것은 단순한 일상적인 체험이나 의지판단의 정도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이 되므로 종교는 세계관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세계관의 속성

세계관은 단순히 삶에 대한 시각(vision of life)만이 아니라, 삶을 위한 시각(vision for life)도 제공한다. 즉,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의 가치기준을 결정하며, 동시에 우리 주위의 세계를 해석하는 일련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우리 삶의 인도자 역할을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자의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전적으로 무원칙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책임을 지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의해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 무엇이 바로 모든 인간이 지닌 믿음이며,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가 의식적으로 지닌 철학이나 신학에 앞서 세계관이 제공하는 구조에 대한 이해와 방향제시의 기능없이는 살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개인, 단체, 혹은 민족의 동질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가장 가치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구분한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가 가진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낙태, 사형, 체벌, 동성연애, 인종차별, 인공수정, 혼외정사 등)에 직면할 때 특히나 어떤 함의가 자신들의 신념들과 상치될 때는 그들의 세계관이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어떤 세계관을 견지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행동과 신념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세계관을 수정하거나, 행동을 신념에 맞추게 된다. 만약 오랫동안 적절한 세계관이 성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아상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6) 세계관의 형성과 변화

세계관 형성은 시공간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경험의 파편들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해서 폐쇄적인 구조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이성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 다른 의미로 세계관이란 인간의 이성이 경험을 합리화시키면서 형성한 하나의 폐쇄적인 사고의 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이 구체화되고 조직적이 되어 구조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그 사회에서 용인될 때 철학이나 혹은 과학계에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러한 철학이나 패러다임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폐쇄성에 있다. 한 철학이나 패러다임이 다른 것으로 변해지기 까지는 바로 그 폐쇄성에 의해서 그것이 유지된다. 세계관이란 실재(reality)에 대한 바른 파악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계관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 성경적으로 볼 때,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바른 관계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이성만을 진리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지식정도에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오감을 통하여 지각하는 실재가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경적 세계관의 변화는 오직 순종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은혜인 것이지, 노력해서 획득하는 산물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다 나은 효율적인 세계관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타자를 이해시킬 수는 있지만 그의 몸에 배어 있는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자주 경험한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경험과 이성 모두를 포함한 보다 근원적인 뿌리에서 발생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치체계 정도에만 영향을 미치는 인간지혜에서 나온 설득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세계관과 그리스도인

앞서 세계관의 본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그 속성들을 살펴 보았으며,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세계관은 전이론적(pre-theoretical), 전과학적(pre-scientific), 전철학적이다.

2) 세계관은 전실재(前實在)에 대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조망(universa1 and comprehensive view)이다.

3) 세계관은 하나의 직관적, 신념적 구성물이다.

4) 세계관은 모든 실재계를 보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선험적(a priori)이며 주관적인 틀이다.

5) 세계관은 우리가 실재를 보고 이해하는 인식론적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생활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 실제적 원리가 된다.

6) 세계관은 개인적이지만. 체계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지닌다면 공동체가 공유하게 된다.

7) 세계관은 종교적(religious)이다.

8) 세계관은 문화를 형성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문화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계관은 무엇일까? 많은 주의나 체계, 그리고 여타 다양한 세계관을 언급할 수 있지만 가장 포괄적인 근원은 진화론적 세계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세계관이 지향하는 삶의 의미는 현재 우리 지성이 가지는 단적인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을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말을 성경적 세계관(하나님중심주의적)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믿음과 확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우리가 먼저 알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만,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믿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의 삶 전영역(구조)에서 하나님의 도구(방향)로 사용될 수 있을까? (롬 12:2, 고후 3:9-10). 창조론적(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 지성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지성은 기독교적 사고의 선행조건이며, 또한 기독교적 사고는 기독교적 행동의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Harry Blamires). 기독교적 지성이란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세속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자료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 능력은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제임스 사이어(정옥배 역).1994. 지성의 제자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알버트 월터스 (양성만 역). 1992. 창조, 타락, 구속,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전광식. 1988. 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 CUP

.안점식. 1998. 세계관을 분멸하라. 죠이션교회출판부

.리챠드 미들튼, 브라이언 왈쉬 (황영철 역).1987.그리스인도의 비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VP)

.아더 홈즈(이승구 역). 1991. 기독교 세계관. 도서출판엠마오

.헤리블레마이어 (황열철 역). 1993.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도서추판 두란노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3/b13c5.htm

출처 - 창조지, 제 112호 [1999. 1~2]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3

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3-09-16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 - 기독교 가정의 원리


       오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돈과 도덕적 무질서는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는데서 비롯된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전래의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심각한 개인주의가 가정을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가정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핵이 무너지면서 집은 있으나 가정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세대 차로 빚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가정이 공통적으로 봉착한 어려움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가정 창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을 볼 때 오늘의 가정 부재 문화는 곧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무시하는 가정파괴 행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 가정의 원리는 과연 무엇입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먼저 `한 몸'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창세기 2:24).성경에서 `한 몸'이란 말은 타락 전 한 번, 타락 후 세 번 나옵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 함은 육체의 결합만이 아니라 서로 책임을 지고(나 때문이야),비밀이 없어야 하고(타락 전 부끄러움이 없었다),인간적 수단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호지 두 장을 풀로 붙인 후 뜯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돕는 배필'의 원리입니다(창세기 2:18).세상 사람들은 서로 바라는 배필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돕는다는 말은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바라는 배필은 바라던 것과 현실과의 괴리를 발견하고 곧 실망하고 좌절하고 불만스러워지며 불행해질 뿐 아니라 그 배우자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셋째는 `순종과 사랑'의 원리입니다(에베소서 5:22~25).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아내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면 아내는 가정의 목입니다. 머리는 목이 연할 때 잘 움직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 남편들은 아내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하라는 것은 아내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형편없는 대상을 위하여 먼저 사랑해 주셨고 가장 귀한 것을 주셨고 고통까지 감수하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남편의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국민일보 1999. 4. 15 발췌)

 

 

진화론적 결혼관
 

     인간의 생성이 몇억 년 전 원숭이의 진화에 의하여 된 것이라는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결혼제도의 생성도 이와 같이 진화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인간의 결혼제도가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는 성욕이 있어서 같이 살다 보니 자식이 생기고 부모가 되고 사회적으로 이것을 보호해야 되겠으니까 가정에 대한 법이 생겨 오늘날과 같은 가정제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혼제도에 대한 진화론적인 생각인데 이것은 결혼의 존엄성을 깨뜨리게 된다. 그리고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부모들이 성적으로 즐기다 보니 부산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결론을 얻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가치를 동물 수준으로 하락시키고 만다. 가정제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하고 설계하여 만든 최고의 제도이다. 그래서 이 제도를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결혼제도를 만드셨다. 그뿐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나의 배필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성장시켜서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알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 - 창조지, 제 131호 [2002. 5~6]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06

참고 :

주수일
2003-09-16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 - 가정창조의 목적과 배경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일에 어린이날이 있으며 8일에는 어버이날이 있다. 그 어느 달보다도 가정을 생각하며 가족의 고마움을 돌아보는 때이다. 그러나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행복한 모습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혼율이 증가하고 독신자가 늘어나며 미혼모의 출산율이 높아지는 등 가정이 파괴되어 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또한 비성서적, 비윤리적 성적 타락은 우리 자녀들을 위협하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인간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대한 무지에 있다. 격월간지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이라는 주제를 이번 호 특집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위대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룩된 가정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편집자)

 

1. 가정창조의 배경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되 남녀로 만드셔서 가정을 이루어 살도록 하셨다. 즉 가정제도를 창조하신 것이다. 왜 인간이 이렇게 가정을 이루며 살도록 만드셨을까? 이것은 우주 속의 큰 비밀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가정제도가 지구창조 이전 영원 전의 사건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세계 우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조화 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이 조화에 대하여 사탄으로부터의 첫 번째 도전이 나왔다. 이 도전의 내용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가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자기세계를 만들어 존재해 보려고 하는 불순종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가 불순종 하면서는 이 우주 안에 어떠한 개체도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또 자유의지를 갖는 둘 이상의 개체들이 분리되지 않고 순종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분리되어 나가려는 사탄의 부당성을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첫 번째 도전인 사탄의 분리를 용납하는 것은 제2, 제3의 분리를 용납하는 결과가 되고 이렇게 계속 분리되어 나가면 모든 개체는 별개로 움직이게 되고 우주는 결국 조화를 잃고 무질서의 세계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하늘에는 전쟁이 있었는데 여기에 패한 사탄 루시퍼가 땅으로 와서 지구는 불순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구는 이 싸움의 전쟁터가 되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시록 12:7-9)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순종하든지 사단의 불순종에 가담하든지 결정해야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의 세계를 따로 만들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며 부부가 연합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살아보는 체험을 통하여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결혼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결혼제도는 결국 두 개체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기본원리인 것이었다.

 

2. 가정창조의 목적
 

1) 하나님 자신의 확장과 우주통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8)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을 목적으로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최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 속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영존하므로 하나님의 찬미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에베소서 1:10-12, 골로새서 1:16-20) 

하나님의 통치원리와 결과

사탄의 도전내용과 결과

타인 중심적인 사랑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개체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통일된 세계가 된다

하나님 이외에 사탄을 중심으로 한 다른 세계를 만들어 분리되어 나간다.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의 이익을 우선해 주기 때문에 두 개체가 하나가 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상대를 항상 자기 이익의 수단화하기 때문에 분열되어 나간다.

이 원리가 확산되면 하나님 한 분을 중심으로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존재하게 된다.

분열이 계속되면 그 누구도 중심이 될 수 없고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무질서의 세계가 된다.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며 창조주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한다. 이것이 천국이다.

무질서와 혼돈이 늘어나 사망과 무저갱이
남는다. 이것이 지옥이다.

모든 계층, 민족, 국가 등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왕국을 형성한다.

나라와 민족계층 사회집단들이 이해를 달리하여 계속 대립하고 싸우며 분열한다.

이것은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부부까지도 이기심으로
분리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유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되기를 원하신다. 사랑은 모든 개체들이 상대를 위하여 존재하게 해 주고 만물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행복하게 공존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영원한 우주통치의 이념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 중심은 사랑의 원천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되셨다. 그래서 그 어떤 다른 존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고 계셨다. 그래서 인간도 그 형상대로 남편과 아내와 자녀 삼위가 한 가정을 이루어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게 지으셨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물론 우주통치의 이념으로서 사랑이 적합한가, 부적합한가 하는 것을 판정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었다.

우주통치가 왜 꼭 하나님 중심적으로 되어야 하느냐? 또 왜 우주만물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방법으로만 존재하여야 하느냐? 다른 원리에 의해서 운영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모든 존재가 살아갈 수도 있지 않는가? 이것이 사탄이 내세운 도전이념이었다.

구약을 보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욥의 시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욥의 시련의 원인은 욥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논쟁의 승패는 욥의 삶 속에서 판가름이 났다.

이와 같이 부부가 하나됨의 가능성도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의 초점이 되어 있고 이 논쟁의 승패는 인간 부부관계에서 판가름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부가 싸우면 사탄이 승리하고 사랑으로 하난가 되면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이다.

원래 사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 희생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동안만 대충 결합되는 모양을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부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으로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마지막 세대에 우리 인간 세대에 우리 인간 남녀가 서로 자기 이익을 주장하면서 가정을 파괴하도록 하는 최후의 시도를 할 것인데 이러한 징조들이 이미 사회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우리 부부가 하나되는 것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주에 어떻게 확장되느냐 하는 문제이고 우주 운영의 원칙이 어떻게 확립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우주의 큰 비밀이다.(에베소서 5:32)


서로의 배경을 알면 이해와 사랑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환경과 배경 속에서 자라왔다.서로 사랑해서 만났고 또 결혼하지만 서로 다른 얼굴 모습만큼이나 서로의 성격도,기질도 다를 수밖에 없다.특히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타고 태어났다.최근의 한 권의 책은 `화성에서 온 남자,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이름으로 남녀
차이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사실상 이러한 성적 차이점은 창조상의 문제다.인간을 남녀로 설계한 분의 고도의 계산 아래 그러한 차이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러한 차이점에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창조주께 대한

항거인 셈이다.나의 성(남성/여성됨)에 대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 상대방의 모습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과 배우자의 기질과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서로의 성장 과정이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특히 지나친 집착이나 편집증적인 성격,포악한 성격 등은 분명 그만한 원인들이 있어 형성된 것이므로 조용한 기회를 만들어 서로의 어린 시절을 나누는 것이 치료와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흔히 경직되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경우 감정의 표현이 쉽지 않고 억눌린 감정은 분노로

폭발하기 쉽다.반면에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비교적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게 된다.이처럼 자라온 배경이 서로 다르고 가정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자주 갈등하게
된다면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 배우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 어떤 경험이 가장 좋았던지,혹은 어느 때가 가장 힘들었던지, 배우자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게 되면 현재 배우자의 모습을 충분히 용납할 수 있게 된다.우리가 진정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배우자의 모습 그대로 용납해주고 그 허물까지도 덮어주어야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 전서 4:8)

 

2) 아들인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아담 이브만을 직접 만드시고 그 후에 인간들은 직접 만드시지 않고 인간들이 만들게 하셨다. 하나님은 직접 다 만드실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지 하셨을까? 사실은 그렇게 해도 우리 인간들은 인간을 만든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도구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형식으로라도 만드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 만드시면서도 인간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형식만을 취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셨을까?

그 이유는 첫째가 아들인 인간들이 창조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인류가 한 혈연으로 뭉쳐 행복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창조 이전부터의 하나님의 뜻이 결국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정제도를 만들게 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 대하여 바라는 궁극적인 염원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겠는가?

인간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놓고 그 자식에게 바라는 최대의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젖먹이는 아기의 부모가 아기에 대한 최대의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것일 것이다. 애가 커서 학교에 들어갔다. 이제는 그 아이에 대한 염원이 무엇이 되겠는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음은 대학을 졸업했다. 이제는 무엇을 원하겠는가? 좋은 직장을 얻고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모의 각 세대를 걸친 자녀에 대한 염원이 다 다르다. 그러면 정말 다른 것일까? 아니다. 사실은 하나이다. 이 모든 세대를 걸쳐 변치 않는 하나의 염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녀가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것도 공부를 잘하라는 것도 취직을 잘하라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하여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 아이를 낳고 미역국을 먹으면서 그 애에 대하여 바라는 본질적인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애가 평생을 행복하게 잘 살아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바라는 염원도 결국은 아들인 인간들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제도가 필요했다.

그냥 행복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또 질서와 절차를 통하여 모든 일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성품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절차를 통하여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풀어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완전하게 만드셨지만 아담과 이브 속에 자기 자신은 스스로 메울 수 없는 독특한 필요들을 만들어 놓으셨다.

이 필요들은 욕망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수면욕, 식욕, 성욕, 재산욕, 명예욕 등이다. 인간들은 이 욕망을 채우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 중 식욕과 수면욕은 자기 스스로가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성욕, 재산욕, 명예욕 등은 스스로 채울 수 없다. 상대방이 나의 것을 채워줘야 되게 돼 있다.

그러므로 이 필요는 하나님과 이웃 또 부부관계 자녀 등의 인간관계를 통하여 채워져야 하는 것들이다. 특히 이것은 사랑하는 상대에 의하여 채워졌을 때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본성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 것이다.

만일 우리 인간들이 이러한 필요들을 느끼지 않거나 또는 자기 스스로가 다 채울 수 있게 만들어졌다면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떻게 됐을까? 인간관계 자체가 없어졌을 것이다. 사랑을 줄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고 도움을 줄 필요도 받을 필요도 없고 각자는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혼자 살아가는 이상한 사회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모양은 온 우주와 인간들이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존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넘치는 욕망으로 인해 이 필요들을 다 채우지 못하고 가끔 불행하다는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이 필요가 없으면 큰일난다. 필요가 없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이 필요를 느낄 수 있게 창조되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결국 채워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린 인간 부모들도 자식을 낳아 놓고 그 자식이 '나는 행복해져야 된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저 녀석이 행복해져야 될 텐데'하는 생각을 하고 그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는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키고 취직까지 시키고 나면 마지막으로 짝을 지워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리고 부모들은 아, 내가 할 일은 다 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행복하게 해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만물을 다스리는 일감을 마련하시고 배필을 만들어 짝을 지어 주시므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잇는 시스템을 완성해 놓으셨다. 그리고 할 일을 다 했구나 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곧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정제도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가정을 위한 10계명

                        1.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 가정예배를 드린다.

                        3. 과거의 잘못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는다.

                        4. 가족문제는 가족회의를 통해서 의논한다.

                        5.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 언제나 인사를 한다.

                        6. 온 가족에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한다.

                        7. 지친 가족을 안마해 준다.

                        8. 온 가족이 함께 영화, 연극, 콘서트 등 문화생활을 즐긴다.

                        9. 자녀와 함께 하는 '아빠와의 데이트'를 한다.

                      10. 가족을 위해 멋진 특별식사를 준비한다.

 

3) 더 풍성한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 위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행복을 배가시켜 그 기쁨을 더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들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땅 위에 번성한 인간들이 결혼을 통하여 사랑으로 하난가 되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삶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됨의 원리가 온 우주에 확장되어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지구의 통치자로 창조된 인간은 이 지상에 이 하나됨의 원리를 확장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한다면 우리 크리스천 남녀가 만나서 살다 싫어지면 적당히 갈라서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생각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특별히 고안하여 만든 제도이므로 여기에서 인간은 행복을 느껴야 한고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이 세상에 나타내야 되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온 우주에 확장시켜야 된다. 이 거대한 일이 우리 부부가 먼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처 - 창조지, 제 131호 [2002. 5~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07

참고 :

원동연
2003-08-21

기독교 세계관


1. 서론 

현재 우리의 사회전반을 살펴보면 무신론과 인본주의가 이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오염되고 회의와 불신 속에 빠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배금주의, 인본주의, 윤리적 타락, 좌경사상 등이 기독교 내에까지 은밀하게 침투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가 현대문화의 특징을 형성하며 우상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혁명과 대규모의 기술개방은 인간에게 힘을 부여했고, 인간은 스스로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과학을 절대적 위치에 끌어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과학주의이다. 과학주의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복하기 위한 기술지배를 필연적으로 잉태시켰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물질적 부요라는 경제주의의 가속적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인간의 사고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 중에 하나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경우 세상과의 갈등과 긴장상태를 회피하려고 이원론적 사상이 도입되었다. 쪼들리는 시간문제, 직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섭외활동, 학교에서의 경쟁, 승진시 거쳐야 할 복잡한 인간관계, 단순한 흑백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도덕적 회색지대 등등이 엄청난 중압감을 가지고 들이닥칠 때 대부분의 기독학생이나 사회인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행동패턴을 정하게 된다. 이때 대표적인 행동패턴으로는 타협, 분리, 이원론적 태도로 대별된다. 타협형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으로 전락한다. 분리형은 갈등과 싸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에 대한 이상적 친화상태를 유발하여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이원론적 태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채택하는 것으로 이중적인 가치관, 행동양식,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없이 둔화되어 버린 '신앙적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이건 신앙과 무관한 일이니 나도 남들처럼 적당히 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지상명령을 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전도하라는 명령이다(마9:28, 28:19, 행1:8, 딤후4:2). 둘째는 문화적 명령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창1:28). 이 두 명령을 두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이 두 가지 명령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도 어색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때문에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전도명령에 비해 문화적 명령은 인간타락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좀 더 본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전 인격적 변화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고후 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신분이나 자격에 추가된 또 하나의 신분이나 자격이 될 수 없다.

Kenneth Herman의 표현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성경적 견해는 우리가 인간이 된다는 말과 동등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신의 전 존재와 행하는 모든 일을 대표하고 규정하며 특징 지워야 한다. 자신의 인간됨이 자신의 모든 일을 특정 짓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특징짓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을 특징짓는 행위는 성경공부, 예배, 전도, 헌금, 설교 등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생활, 취미생활, 가정생활, 학문활동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한다.

 

2. 학문과 신앙 

사단의 궤계를 대적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시급한 일은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체계적 정립이라고 생각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교육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연구는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학문세계의 인본주의화는 우려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적 경향이 학문연구의 본래적 특징인양 간주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가 되었다. 학문연구의 탈가치(valuefree)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인본주의적 가치를 학문체계에 도입하고 있다(예를 들면 유물주의, 행동주의, 과학주의 등). 학문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 학문을 학문답게 한다는 의도적 반역이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다. 학문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이처럼 위축된 것은 학문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우리는 신앙만 지키면 된다는 이방 종교적 이원론이 우리의 뇌리속에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왜 기독교적 학문연구를 해야하는가?

첫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다른 신을 섬긴다. 이것은 Augustine이 말한 소위 '종교적 집중(religious concentration)' 원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한 어떤 것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 사도 바울도 인간의 경배 대상은 창조주가 아니면 창조의 어떤 측면(피조물)이라고 말했다.(롬8:18∼2). 따라서 모든 인간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어떤 견해 즉, 세계관(world view)을 가지고 자신의 주위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잘못된 신앙은 피조물을 창조주의 자리까지 격상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합리주의로부터 Marxism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절대화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런 우상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올바른 학문적 조망을 위한 선결문제이다.

둘째, 사람은 자기들이 섬기는 대상의 형상에 따라 자기를 형성해 간다. 즉, 인간은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자기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견해도 그들이 섬기며 경배하는 대상을 따라 형성되어간다. 한 예로 철학을 생각해 보자. 철학 자체의 뿌리는 철학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철학도 보다 근본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면 어떤 피조물을 향한 신앙적 결단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실용주의 철학, Kant 철학이 있고 하나님께 근거한 기독교 철학이 있는 것이다.

셋째, 학문연구를 창조의 다양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활동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근본에 있어서 창조의 질서를 연구하지 않는 학문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물리, 화학, 생물, 지학 등의 자연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인문과학, 사회과학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사회적 기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또 다른 의미는 창조속에는 사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과학 사이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 구분은 연구대상이 창조속의 사물들인가 추상적 개념인가에 따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논리의 세계까지 만드셨기 때문이다(골1 : 15,16). 

기독교적 학문연구는 학문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 시대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는 이방사상의 추방과 배교적인 시대정신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피조세계를 연구함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케 한다(롬1:19, 20)는 측면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연구한 결과를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학문연구가 효과적으로 수행되면, 학문과 신앙은 전통적인 반목관계를 청산하고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 궁극적 한계는 연구의 주제나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 분야의 조망을 형성하는 개개인의 세계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학문적으로 기독교적이 되게 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3. 기독교적 세계관 

세계관은 그 정의부터 사람마다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세계관의 범주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야 하는 가에도 사람마다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J. Sire 교수의 세계관에 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비교적 포괄적이면서도 체계적이라 생각되어 간단히 소개한다.

Sire 교수는 그의 저서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에서 세계관이란 '이 세상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나 가정들'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이 세상의 근본적 구성요소란 다음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참된 최고의 실제는 무엇인가? (2) 인간이란 무엇인가?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주의, 이신론,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 등의 세계관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l) 우주의 참된 최고의 실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혹자는 물질, 여러 신들, 사물들 속에 깃들어 있는 사상 등 다양한 대답을 할지 모르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시고 인격적, 초월적, 내재적, 주권적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유지하시는 유일하신 분이다.

(2)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관의 질문에 대해 유물론적 세계관에서는 매우 정교한 전기 화학적 기계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래서 인격과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가진 존재라고 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형상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 회복 가능한 존재라고 본다.

(3) 인간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사망관의 질문에 대해 혹자는 개체성과 인격의 소멸, 다른 형태로 탄생하기 위해 잠시 쉬는 단계 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죽음이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사망의 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혹자는 문화적, 육체적 생존을 향한 동력, 혹은 인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도덕은 초월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선한 속성이 세상의 모든 도덕 기준들의 기준이 되므로 상황윤리를 부정한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3/b13c4.htm

출처 - 창조지, 제 71호 [1990. 9~10]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2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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