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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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Henry M. Morris
2004-04-30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4 

(God's Plan for Your Life)


Foreword 
Section I - God's Purpose in Creation
Section II - The Problem of Sin
Section III - The Price of Reconciliation 
Section IV - Blessings of the Christian Life
Section V - Problems and Difficulties
Summary - What Must I Do To Be Saved? (footnotes)

 

Section IV - 축복받는 기독교도의 삶 (Blessings of the Christian Life)

내가 만약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나의 생활은 어떠한 영향을 받을까요?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매일 교감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맞이하는 경이로운 축복의 원천입니다. 일단 맺어진 이 친교를 잘 간직하면, 신실하게 믿는 자에게 죄와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합니다. 참 평화와 기쁨 그리고 안정은 오직 속죄 받은 하나님의 권속한테만 가능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지은 죄를 매일 회개함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는 약속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죄를 범하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성령님이 유죄로 판결하시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교관계가 끊기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우리는 온전히 회복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약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9).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13-14).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실질적인 담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내재하는 성령님의 증거에 따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놀라운 확약입니다. 그것은 이마도 거룩한 삶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삶을 사는 인생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 가운데서도 가장 큰 상일 것입니다. 구원의 담보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믿는 자는 그것으로 인해서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분명하고 역동적인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13).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2).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하는 특권과 그것으로 인하여 그의 영광 안에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은 역설적이지만 기독교인한테 주어지는 다시없이 큰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로 인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저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좇아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의 경우에서처럼 자기부인의 삶을 뜻합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데는 오해나 부당하게 비난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핍박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원한 내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그와 현재적 친교를 기뻐하며 마음의 평화와 영원의 조망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4:12-1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9:23, 24).

 

그렇다면 크리스천으로서의 나는 내 삶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점 의혹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진지한 소망이야말로 자신의 직업이나 결혼 등 개인의 행동을 포함하여 삶의 문제들에 대한 결심과 같은 특정한 문제들에 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불가피한 필수 요건임이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구태여 당신의 의지를 좇으라고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당신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6, 17).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 2).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고 주를 더욱 더 잘 알기를 원하는 것이 결심을  필요할 때마다 동기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변함 없이 언제나 우리와 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어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더욱 더 효과적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에베소서 5;17-19).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린도전서 10:31-33).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그의 계시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중요한 인생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하한 상황에 처한 경우에도 기본적인 안내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16, 17).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찾는 크리스천의 기도에 응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과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에 응답을 주십니다. 길을 찾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당장에 주어지기도 하며, 오랜 기간 계속되는 기도 후에 주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상황의 형태로 오기도 하며, 또는 마음속에 영적 확신으로 오는 수도 있습니다. 또 이 두 형태가 한꺼번에 오기도 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 5:14,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하나님이 뜻하시는 길은 우리가 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경험하는 더없이 큰 기쁨의 길이며 유익하고 축복된 길입니다. 그 길에는 우리의 구세주께서 좇던 길과 같이 역경과 고난이 없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심오한 평화와 기쁨의 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 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로새서 1:9, 11).

(다음에 계속됩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godsplan.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07

참고 :

Henry M. Morris
2004-04-30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5

(God's Plan for Your Life)


Section V - 문제들과 어려움들 (Problems and Difficulties)

 

그렇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저술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말씀 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3000 번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만약이 이 주장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하는 그들은 사악한 거짓말쟁이든가, 아니면 정신 나간 맹신자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런 사람은 성경과 같이 세련된 문학작품을, 심오한 논리와 철학을, 지고한 도덕과 윤리를, 정확한 역사를 저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세계적 규모로 광범하게 읽히며 사랑받는 성경과 같은 책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성경은 모든 시대를 총망라하여 가장 위대한 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 1:11, 12).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쓰였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약성경을 오류 없는 권능의 말씀으로 일점일획도 빼지 않고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는 구약성경과 유사한 영의 인도를 당신의 사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약속한 영의 인도로 사도들이 나중에 신약을 저술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 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그밖에도 성령의 감화로 쓰였다는 많은 증거들 (내적으로 오기도 하고 또는 현상계에 드러나기도 하는)이 있습니다. 수백 권의 성경들이 그러한 증거들을 나타내면서 쓰였습니다.(2) 그리고 그런 성령의 증거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성경의 정확성은 수많은 역사적 조사와 과학적 조사에 의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오류나 모순이 확실하게 증명된 바가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성령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수 세기 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내용이 꼼꼼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300 가지가 넘는 예언들이 그리스도가 첫 번째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5-2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8).

 

나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장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평범한 사람이 하였다면 황당한 광언으로 들렸을 주장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올 때에는 진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천국의 문이고, 유일한 구세주이며, 부활이며 또 모두의 재판관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만이 천국에서 아래로 내려온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할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말이 결코 허망 되게 지나가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의 문이 자기의 교회를 압도하지 못 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한테로  모일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7, 28).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가복음 14:61, 62).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의 성품과 가르침은 더할 데 없이 완벽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빼고는 어느 누구도 죄 없이 완벽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화신이 아니라면 하나님에 관해서 예수님처럼 이야기하고 가르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 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베드로전서 2:22).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요한복음 7:46).

그리스도의 육신으로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그가 주장하고 약속하였던 것들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증거입니다. 그의 부활에 대한 이중증거인 그의 빈 무덤과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던 사실들로서도 그 당시 대부분의 비판적인 조사자들에게 그가 진정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과 증거를 아직은 서슬이 시퍼런 당국이 막을 수 있을 때인데도 부활을 선전하던 설교를 듣고 무서운 핍박에 굴하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많은 전문적인 역사 학자들까지도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육신으로 부활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증거가 그 어떤 역사상의 사실에 못지않게 충분히 증명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간증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4:33; 6:7).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 4).

 

만약 내가 진지하게 다른 종교를 좇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다른 종교라 함은, 여러 가지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의 구원은 사역의 체계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기독교는 구원이 사역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통해서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독특합니다. 기독교는 가르침들을 집대성한 내용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의 화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 위에 근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독특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죽음을 정복한 교주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독특합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들은 한결같이 다 보통 사람과 같이 죽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 어느 종교도 구원의 방법을 어떤 형태로서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집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게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금에 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29-31).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28-29).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96:5).

세상에 참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창조주는 한 분 뿐이고, 궁극적 진리도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강구하여 계시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달성은 결국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와 그의 속죄제물로의 희생, 그리고 그의 부활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사역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모두가 다 허구의 종교입니다. (그 많은 종교들 가운데 구원이 일부는 그리스도를, 또 일부는 인간의 사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는데, 이 종교까지도 허구의 종교인 것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집니다). 인간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다른 이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디도서 3:5, 6).

 

하지만 일찍이 그리스도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찌 되는 겁니까?

사람들이라면 예외 없이 모두 다 어떤 형태로든 빛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빛에 따라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의 전통에 천성적 양심적 관행을 보면 그들의 공통조상이 받았던 원천적 계시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속에는 참 하나님의 증거가 풍부하게 엿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인간의 죄 많음, 인간이 요구하는 구원, 그리고 인간이 고대해 마지않는 구세주를 보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과 신실하심, 이런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빛에 깊은 신앙으로 진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빛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는 보편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가 개인한테 미치는 데는 그가 회개하고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으로서 족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개인이 구세주에 대한 믿음의 바탕으로서 얼마나 특별한 지식을 더 가져야 하는 지도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14, 18).

크리스천은 전 세계인에게 그리스도와 구원의 복음을 전도할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할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일찍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이 참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관해서 더 많은 빛과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매우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도 구원을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온전한 빛이 그들에게 미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20, 21).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권능에 맡겨야만 합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각각의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들한테 당신의 뜻하시는 바대로 행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계획적인 죄인임을 부인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긍휼의 권능으로 당신 자신을 한없는 희생을 무릅쓰고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까지 내놓으시면서 놀라운 구원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원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을 값없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모든 중생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그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에 분명히 진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하시는 일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에는 그냥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히 의로우심을 그러면서도 끝없는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이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족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로마서 9: 14, 18-2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로마서 11:33, 34).

 

구원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다 함은,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죄를 짓는데 자유롭다는 뜻인가요?

참 구원은 우리를 죄의 권능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로부터 구해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성령님은 구원을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보다는,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는 새로운 성품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난생 처음으로 우리는 사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영적 열매를 맺고 선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한테는 평생 동안 예전의 성품이 남아서 새로운 성품과 마찰을 일으키지만,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도 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를 물리치고 온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계속적인 은혜의 성장을 천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순수한 구원을 얻어가는 성적표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2:8-1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17, 18).

크리스천은 이 생애에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한 동안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벌하여 어떻게든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관계와 구원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세를 사는 동안 우리의 기회와 연관된 우리의 사역에 따라서 내세에 가서는 크리스천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보상 (또는 보상의 상실)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구원이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하나님과의 우리의 친교 관계와 크리스천으로서 행한 우리의 사역과 영위한 행복한 삶, 그리고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보상, 이런 것들은 우리의 현재의 삶의 태도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봉사 여하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1: 31, 32).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린도전서 3:13-15).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고려하여야 합니까?

만약에 우리가 구세주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은 다음, 죄의 형벌과 굴레에서 우리를 되찾아주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에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면,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연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그 자체의 불확실성에 더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와 관계유지를 계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되면 성령님은 우리의 무관심을 내버려두시어 우리는 마침내 복음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되어 우리한테 급하게 요구되는 큰 구원을 우리는 외면하고 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4; 17).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10:29).

나머지 문제들도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더욱 더 잘 해결 될 수 있습니다.(3) 결심을 내리는데 더 이상의 지체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가령 풀리지 않은 지식의 문제들, 가족이나 친구들한테서 받을 수 있는 반대나 빈정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 삶에서 누구한테도 공개하고 싶지 않은 내용을 하나님의 교정에 내맡기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 그밖에 여하한 문제들이든지 간에, 일단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부터는 더욱 더 잘 풀릴 수 있습니다.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야말로 크리스천이 가지는 큰 지적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내재하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크리스천 동료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크리스천에게 힘을 주고 앞을 인도해 줍니다. 그 어떤 이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영생에 대한 그의 권유를 무시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6).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Summary :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footnotes)

그렇다면, 나는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또 내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 예수를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신앙을 가지고 영접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온전한 뜻에 진지하고 겸손하게 당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하나님에게 지옥에 떨어진 당신의 상황을 고백하고 죄를 대신 져주는 사람과 구세주가 필요함을 고하십시오. 당신의 신앙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대신에 하나님 앞에 죄인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당신을 의롭다하게 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다시 사신 하나님의 화신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안에 있으면, 깨끗게 하심과 용서와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당신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신의 주로 그리고 회복시켜주시는 이로 영접할 것을 맹세하십시오. 그리고 이후로는 그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어 그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당신의 영적 양식으로 삼고 매일 그의 말씀으로 섭생하십시오. 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어린 권속으로서 당신을 영적으로 양육할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면 당신은 그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주는 간증은 당신의 변화된 생활과 말로써 하여야 합니다. 또한 당신의 간증은 공중 앞에서 받는 세례로 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영적이며 성경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그리스도-중심적인 마을 교회에 나아가 크리스천 동료들과 활동적인 결연관계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성경 공부와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일을 주님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하십시오. 성령이 당신의 삶에서 지은 죄를 당신에게 드러낼 때면 언제라도, 당장에 그것을 판단하고 하나님에게 고백하여 그의 도움을 받아 그 죄를 떨쳐 버리십시요. 성경 안에 특별히 거론되지 않은 사안들(누구와 결혼을 하여야 하는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 중대한 결심을 하여야할 때에도 당신은 엄청난 도움의 보고(寶庫)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믿음의 기도, 말씀에 대한 지식, 거룩하게 정돈된 생활, 그리고 내적 확신에 찬 영혼,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앞길을 지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13:20, 21).

 

References

1. For a documented exposition of the many scientific fallacies of evolution, see Scientific Creationism. 2nd. Ed., edited by HM. Morris (san Diego: Master Books, 1985), 277 pp.

2. For answers to many other common questions and objections, see The Bible Has the Answer, by Henry M. Morris and Martin E. Clark (San Diego: Master Book Publishers, 1976), 378 pp.

3. see the book Many Infallible Proofs, by Henry M. Morris (San Diego: Master Book Publishers, 1974, 381 pp.) for an exposition of many of these evidences, along with answers to the more important objections raised by skeptics.

*Dr. Morris is founder and President Emeritus of IC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godsplan.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08

참고 :

John D. Morris
2004-04-27

진화론과 하나님의 형상

(Evolution and The Image of Go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7

”만약에 남자와 여자가 애초부터 아메바로부터 생긴 것이라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다.” - Ken Wilber, 뉴에이지 이론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 이 얼마나 고귀한 가르침인가! 이토록 놀라운 사상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충분히 반영하는 특질과 특성을 오직 당신 자신만이 아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부여하여, 인간을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온전히 구별시키셨다. 동물들도 경이롭게 디자인되었지만,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는 못한다. 천사들도 특별히 고매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일찍이 창조된 천사들 중에서 최고 지위에 있던 천사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베푼 특별한 관심에 몹시 원망하였던 것 같다.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분을 새기지 못한 그 천사는 자신의 창조주에 반항하는 데까지 내닫게 되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쫒겨난 다음 일련의 부하 악마들을 대동하고 지상으로 추방되는 몸이 되었다.

그 추방된 천사는 자기의 강력한 원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들 위에 분노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증오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작품들이 모두 자연과정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조롱하면서, 그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가르침을 가짜라고 왜곡하였다. 아담과 하와를 부추겨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탄은 인간들이 스스로 신의 지위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거짓말로 그들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속여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타락한 존재들이 아니고, 동물로부터 상향진화하고 있는 존재란 것을 믿으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속아서 그것을 믿은 자들의 생각은 바뀌어졌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창조주의 권위를 무시하고 얻어진 증가된 지식은 어느 정도 그들을 보다 많은 지혜로 인도하였다.

그 반란의 길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창세기 6:4) 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을 왜곡시켜 여자한테서 나올 약속된 속죄의 씨앗이(창세기 3:15) 영영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 창조주께서는 사탄이 지향하는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계획을 차단시켜버렸다. 그러나 이 속이는 자는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인간과 사랑의 친교관계를 구축하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떼어놓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탄은 자기의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까지 망쳐놓는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파탄 난 결혼,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 호흡을 힘들어하는 폐기종 환자, 통증을 못 참아 모르핀을 요구하는 암 환자, 마약중독자를 도와주기 위해 어른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십대들... 이런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보고 황홀감에 젖는 것이 사탄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에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안겨주는 재주를 전문으로 하고 있다.

뉴에이지(New Age) 문학작품들 속에서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막고, 관능적 쾌락을 쫒아버린 심술궂은 재판관으로 중상모략 되고 있다. New Age 신봉자들은 하나님을 창조 그 자체로 인식해 버린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머니 지구, 즉 가이아(Gaia) 신(神)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적 통찰력을 획득함으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로마서 1:25).

오늘날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창조하신 의미가 땅에 떨어졌으며, 동성애가 환영받는 행동 패턴이 발호하고 있다. 결혼과 정절은 선택의 문제로 밀려나고 말았다. 아기의 출산은 무시되고, 고령자는 물론 태아와 어린아이들은 소모품 신세로 전락하였다. 오늘날의 사회악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과 그의 형상(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지지 않은 나무나 고래를 보존하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New Age 신봉자들이 표방하는 이와 같은 교리는 고대 이교도의 그것과 거의 다른 데가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지식주의) 사상은 이들과 비슷하게 확산되었었는데, New Age 신봉자들의 교리와 고대의 이교적 교리를 고루 내포하고 있었다. 거짓말의 아버지(사탄)는 세부적 교리의 내용을 바꿀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사탄은 그의 추종자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훈련시키면서, 하나님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들이 줄줄이 망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노시스주의의 도전에 성경의 가르침으로 강력하게 맞대결하면서, 진화론적 이교적 사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도 거의 동일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우리들의 무기도 그때의 그것과 동일하다. 승리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은 창조자의 말씀과 세계관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president/prz-9904.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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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상
2003-12-24

창조의 신비 30. UFO는 과연 존재할까


      미국 항공우주국의 화성탐사로 외계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하나님은 지구밖의 외계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창조하셨을까.정체불명의비행물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UFO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먼저 현재까지 보고된 UFO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로 UFO는 뚜렷한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무수한 사람들이 비행물체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이나 혹은 착륙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로는 수만장의 사진과 손발이 잘린 동물,전파방해,비행접시의 침전물,자동차의 증발 등 수도 없이 많지만 누구 하나 이중에 뚜렷한 UFO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람이 없다.

둘째로 현재까지 관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사진과 기록에 의하면 UFO의 모양은 모두가 다르며,그 모양은 당시 과학문명과 연관이 되어 있다.즉 비행기 같은 것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태양 혹은 불덩어리처럼 보였으며,현재는 상당히 발달된 고도의 우주선과 같은 모양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다.결국 UFO는 항상 당시의 과학문명보다는 훨씬 진보된 모습으로 꾸며져 허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UFO의 비행에 관한 관찰이 지구에서의 물리법칙에 위배되고 있다는 것이다.UFO가 다른 외계에서 왔다하더라도 지구에서의 행동은 지구의 중력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그러나 소리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다든지 공기층을 뚫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관찰되었다고 주장되는 UFO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로 악령의 장난일 수 있다.실제로 지구에 도착했다고 말하는 비행물체와 접한 사람들이 악령을 접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가 수없이 많다.예를 들면 신들림,기억력 상실,눈 멀음,최면상태에 빠짐,심한 두통,마술에 빠짐,거짓말 등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UFO는 환상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우리도 종종 꿈과 실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특수한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기억될 수도 있다.

셋째로 UFO는 마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마술사들이 금성에서 온 인물과 대화를 했다느니,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등의 기록은 외계인이 인간과 성교를 했다는 보고와 접촉한 후 신들림의 능력이나 심령치료의 능력을 얻었다는 기록 등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UFO에 미혹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위험성을 진단해보자.

첫째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이들은 성경의 기적과 천사의 방문 등을 외계인에 의한 것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고 천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외계인이 사는 혹성인 것처럼 해석하려 한다.

둘째로 이단의 교리에 빠지게 된다.UFO와 관련된 대표적인 이단으로는 캘리포니아교가 있다.교주인 알램 미가엘 눈난은 자신이 구세주로 천사장 미가엘의 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외계의 소식을 듣고 있다고 가르친다.1947년 비행접시의 출현이 곳곳에서 보고되어 미공군에서 조사를 나섰던 해에 자신은 하나님의 보좌에 갔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서 1,2차원의 금성인들이 세계를 구하도록 자기에게 명했다고 가르치고 있다.그가 가르치는 교리에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은하의 명령,모태가 되는 혹성,전기성을 띤 사람,미네마의 두뇌,초능력의 하나님 등 UFO에 관련된 용어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이들은 「세계적인 하나의 가족」이란 명칭하에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이단운동을 확대해 가고 있다.



출처 - 국민일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79

참고 :

이웅상
2003-12-17

창조의 신비 23. 「화성에 생명체가 있을까」


      미국 NASA에서 화성에 착륙시킨 패스파인더에 지구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무엇보다 생명체가 존재하기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진화론자들은 그동안 최초의 생명체는 원시지구에서 우연히 화학적 진화를 통해 발생되었다는 가정속에서 그 증거를 찾아왔다.그러나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고 환경조건이 유사한 화성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물이 생명체와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이 갖고 있는 특징때문이다.물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액체형태의 물은 태양열에 의해 증발해 기체가 되지만 구름을 형성하면서 비나 눈의 형태로 다시 지상에 내려 호수나 바다와 합쳐지게 된다.

물은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게 된면 얼어 고체가 된다.다른 대부분의 액체는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어 들면서 밀도가 높아져 가라앉게 된다.그러나 물은 4도까지는 다른 액체와 같이 온도가 낮아지면서 부피가 줄어들지만 4도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부피가 커지면서 밀도가 낮아진다.

그러므로 영도에서 물이 얼게되면 밀도가 액체상태의 물보다 낮아져 뜨게 되는 것이다.이 때문에 병에 물을 넣고 얼리면 터지게 된다.만약 물도 다른 액체처럼 고체가 되면서 밀도가 증가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영하의 추운 날씨에 얼기 시작한 호수와 바다에는 얼음들이 가라앉기 시작해 결국 호수와 바다 전체를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며 그 속의 생물들은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물은 다행히 얼면서 가벼워 지기때문에 수면에 뜨게 되고 두꺼운 얼음층을 형성,호수나 바다속을 추운 공기로부터 보호해 수중생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물은 화학적 특징때문에 다른 액체에 비해 온도의 변화에 느리게 반응하며 기체로 변할 때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이 때문에 몸의 70%가 물로 구성된 생물들은 급격한 기온의 변화에도 잘 적응해 살 수 있는 것이다.더운 날씨에는 동물들은 땀으로 물을 증발시켜 체온을 낮춰 주는가 하면 식물들도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잎에 있는 기공을 통해 증발시키므로써 더위를 식힌다.

물은 생물체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화학반응에 없어서는 안될 용매로 때로는 직접 반응물로 관여하므로 물의 역할이 없이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을 때 지구를 바라보며 『공중에 매달린 보석』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묘사했다.흰색과 청색,녹색을 띄는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지구,이는 바로 지구에 있는 물과 생물때문인 것이다.흰색은 구름과 얼음 그리고 눈으로 덮힌 부분이며, 녹색은 물과 더불어 생활하는 식물들이며, 청색은 바다와 호수들에 의한 것이다.

태평양 하나만도 지구의 1 / 3 을 덮고 있어 물로 충만한 지구에는 생물로 충만할 수 있게 된 것이다.물이 없으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지구외에 어느 행성에도 이렇게 물로 충만한 곳은 없다.이 풍부한 물과 그 속의 생명들의 수많은 가정과 기대를 갖고 탐사하고 있는 패스파인더를 통해 화성의 삭막한 모습을 보면서 이 아름다운 지구를 주신 하나님께 시편의 말씀으로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편 95편 5절∼6절)



출처 - 국민일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65

참고 : 5703|5685|5613|5592|4730|4552|4522|3830|3741|3664|3626|3579|2858|2785

임번삼
2003-12-09

학문의 목적과 역사 1


1. 학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다(Homo sapiens). 그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thinking reed)라 하였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왜 태어나 살며, 사는 동안 왜 고통은 끊이지 않고, 결국은 죽는 것일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그리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신은 정말로 존재할까? 우주만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주와 인간 사이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간단하게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질문들을 수없이 되뇌이며 우리 조상들은 살아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문의 출발지라는 그리스에서는 자연(동물, 식물, 광물, 우주,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 곧 학문의 출발점이었다. 자연철학은 자연의 기원과 존재 및 그 운행원리(변화, 운동, 소멸)에 대해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sophia)을 사랑하여(philia) 학습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로 얻은 지식은 동물지(動物誌 animal history), 식물지(植物誌 plant hitsory), 광물지(鑛物誌 mineral history), 자연지(自然誌 natural history), 존재론(存在論 ontology)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

자연철학은 중세 말에는 자연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으로, 근세에는 여러 갈래로 분과된 학문(分科的學問), 즉 과학(科學)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지식(scientic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인문과학(cultural science), 사회과학(social science)으로 나누고  있다. 브리타니카는 무생명체를 다루는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생명체를 다루는 생물과학(biological science), 인간사회를 다루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 및 통합과학(combined science) 등으로 나누고 있다. [Britanica Encyclopedia, S-Sound, Vol. 22, pp 61-61e, 1974]  이처럼, 학문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learning)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화된 지식(science)을 일컫는 말이다.

선인들은 학문의 목표가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달리 말해서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탐구에 있으며, 영원불멸의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통하여 그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단순히 ‘지식에 지식을 더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소개하려는 데 촛점’을 맞추려 한다. 이러한 기술자세에는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관적이긴 하나 내 나름대로는 학문적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시중에 나도는 대부분의 고전들도 내용적으로는 저자들의 주관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관이 어떤 면에서는 차별성과 독창성(distinction & originality)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학문이란 그러한 개성있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면서 논쟁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진화론이 흡사 실증된 이론인 양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본인이 본서를 기술하게 된 동기는 진화론의 오류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사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는 생명과학의 주제들에 대하여 진화론적 견해를 먼저 소개한 후, 이에 대한 창조과학적 비판을 병기하여 두 이론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창조론적 시각이 현대과학의 논리에 더욱 부합함을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진리를 찾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과 같이 타임캡슐을 타고 우리 선조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행방을 찾아 과거의 세계로 떠나 보기로 하자.


2. 진리란 무엇인가?

(1) 철학, 과학, 사상, 종교의 관계

사람들은 옛날부터 진리를 찾느라 노력해 왔으나, 진리는 베일 속에 제 몸을 감춘 채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현인들이 진리를 찾아 헤메었으나,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구도행렬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였고, 부질없는 짓이라 자포자기 했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진리라 속단하고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동서양의 역사를 통하여 유사하였다.

인간이 진리를 찾는 방식은 종교와 철학 및 사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의 주된 관심은 우주의 기원(起源)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두 명제에 집중된 것이었다. 종교(宗敎 religion)는 절대자와 내세관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철학은 절대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와 구별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絶對者)란 만물을 창조하고 자연법칙을 만든 초월적 존재이거나(人格神論), 우주법칙 자체(汎神論)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전자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후자에는 힌두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속한다. 유교는 절대정신(仁)을 가지고 있으나 내세관이 없으므로 종교라기보다는 사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내세관(來世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이므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믿음은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는 실험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의 궁극 목표인 진리를 탐구하려면 실험과학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게 되므로, 종교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험과학과 종교는 경쟁 아닌 보합적이고, 표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철학(哲學 philosophy)은 이성(理性)을 통하여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데 반하여, 사상(思想 thought)은 주관적인 추론이나 감성적(感性的) 인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헤겔(Hegel)은 일찍이 서양에서는 철학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철학(학문) 보다는 사상이 발달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울러, 철학은 후일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사상은 객관성의 결여로 학문화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甲田 烈, 山本伸裕; 哲學, pp 20-37, Kanki Publishing Co, 東京, 1999]

논리성과 객관성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철학은 후일 서양에서 자연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과학의 혁명기(15-16C)와 계몽주의(啓蒙主義 Philosophy of Enlightment) 시대를 거치면서 철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한 실증적인 분야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 성격의 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은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 된 과학은 학문본연의 목적인 진리를 규명하기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지니게 되었다. 전문화는 되었지만 부분적이기에 가지는 한계성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을 인문과학의 한 분야로 전락한 근세철학에서는 직관(直觀)과 자기비판(自己批判)으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Okuyama Minoru; 基督敎界ニ ォケル 創造ニ 關スル 異ナル 見解, pp 3-4, 創造ニ 關スル 一日セミナ, Ochanomizu Center, Mar. 20, 東京, 1993].

이상에서 보았듯이, 진리를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은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상은 감성과 주관으로, 철학은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그리고 종교는 믿음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2) 동양의 구도활동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진리를 도(道)라 하였고, 많은 선인들이 그것을 찾아 헤메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성인과 현인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종교의 형태로 후계자들에게 이어졌다. 그들이 깨달았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정신적 유산을 가장 많아 남긴 곳은 인도라 할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발흥했던 브라만교(Brahmanism)의 경전인 우파니샤드(Upanishad 30C BC)는 신(deva 하늘)에 대한 찬가인 베다(veda)를 해설한 책이다. 베다는 아리안족이 기원전 18세기경에 가지고 들어 온 경전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브라만(Brahman 梵)이며,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만(Brahman), 파괴자인 쉬바(Shiva), 보존자인 비슈느(Vishne)의 삼신이 일체(trimurti)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가 아트만(atman 眞我)이며, 범아는 일체(梵我一體)라 하였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 karma)에 따라 윤회전생(輪回轉生)을 하게 되므로, 범아일치(梵我一致)로 윤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기반으로 출현한 이러한 브라만교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인도인으로 태어나 브라만이 되어야 하며, 제사, 지혜, 봉헌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1,500년경 힌두교(Hinduism)로 계승되어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인과응보, 윤회설 등의 브라만 사상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 후 8백여년(300BC-500AD)을 지나면서 힌두교의 교리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지금과 같은 근대적 교리는 8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다시 보강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 때에 근대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이 유물론적이고 숙명론적이며 허무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J.B. 노스원저, 尹以欽역; 世界宗敎史(下), pp 581-624, 762-839, 玄音社, 서울, 2000]

기원전 6-7세기경에는 이러한 힌두 교리에 반발하여 많은 자유사상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산과 들의 나무와 바위에 앉아 부동의 자세로 진리를 깨달으려 정진하였다. 석가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대표적인 종교가 자이나교(Jainaism)와 불교(Buddhism)였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인도인의 최대 관심사인 업(業 karma)과 윤회로부터의 해탈(解脫)을 이루는 방안으로 현실부정과 고행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전자가 철저한 고행을 주장한 데 반하여, 후자는 중도(中道)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카피라성의 왕자였던 석가(Gautama Shidata)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고민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보리수 밑에서 6년간 수행하며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붓다(Buddha)라는 말인 데 ‘진리를 깨달은 자’ 라는 뜻이다. 그가 깨달은 내용(大覺)은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苦)은 욕심(集)에서 오므로 욕심을 없애야(滅) 참다운 깨달음(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사성체(四聖諦)라 부른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한 부처(神)가 되어 열반(nirvana)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브라만(梵 하늘)과 아트만(참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아와 세계는 관계성에 의해 성립하며,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괴로움은 12 가지의 인연(전생2 + 현생8 + 내생2) 때문에 오는 것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現象界)는 색(色=물질, 육체), 수(受=감각, 지각), 상(想=인간과 세계의 개념구성), 행(行=의지, 기억), 식(識=순수의식)의 오감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자가 없다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대자가 없다면 악의 개념이나 선악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모순논리를 안게 되었다.

불교는 자리적(自利的)인 구도에 정진하여 깨달음의 최고 경지(阿羅漢果)에 들어가자며 사체설(四諦說)를 강조하는 소승불교(hinaya 500BC-기원)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중국의 달마대사(達磨大師 520AD) 등이 제행무상제법무아(諸行無常諸法無我)의 공(空)사상과 연기설(緣起說)을 주장하며, 중생의 구원을 외친 대승불교(mahaya 기원-500AD)의 교리를 수립하였다. [윤이흠 역; ibid, pp 644-761], [Hiro Sachiya; 佛敎ト 基督敎, pp 13-17, 新潮社, 東京, 1986] 이처럼, 불교는 초월적인 인격신을 부정하며, 우주의 원리만을 인정하는 범신론(pantheism)임을 알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격신에 의한 창조설을 부인하며, 모든 것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우주에는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인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종교들의 공통점은 자연 속에 신의 성품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어 자연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고대중국은 왕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유일신인 상제(上帝)에게 매년 제사를 드리던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였다. 기원전 11-15세기의 상(商)과 은(殷)나라에서는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제사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도 하늘(天)에 제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광호/우제태 공역;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pp 15-31, 도서출판 예향, 인천, 1996, 원저는 Ethel R. Nelson & E. Broadberry; Genesis and the Mystery Confusius Couldn't Solve, Concordia Publishing House, St. Louis, 1994].

기원전 10세기부터는 음양의 조화로 만물의 근본물질들(水火木金土)이 생성되었다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나타나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다가, 주나라 때에 북방 유목민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이에 위험을 느낀 귀족들이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전통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일곱 국가들(진, 초, 연, 제, 한, 위, 조)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722-221 BC)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적 상황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현세적인 학문을 꽃 피우게 하였다.

노자(老子 604 BC-?)와 장자(壯者 365-290 BC)는 자연을 중시했으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행복하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회의론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를 설파하였다. 노자의 사상이 집약된 도덕경(道德經)은 우주의 근본인 도(道)에서 기(氣)가 나오고, 기는 음기와 양기로 나뉘며, 이들의 조화로 나온 화합물에서 만물이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온다고도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도교(道敎 Taoism)의 형태로 유교와 더불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공자(551-479 BC)와 맹자(371-289 BC)의 가르침을 유교(儒敎 Confucianism)라 하며, 이들의 사상은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와 오경(五經; 시경, 서경, 춘추, 역경, 예기)에 집약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이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려면 다섯 덕목(仁, 義, 禮, 智, 信)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인 계로(季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묵자(博愛主義), 한비자(法治主義), 순자(性惡說), 맹자(性善說) 등이 나타나 다양한 통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인간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자연과 우주의 기원이나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었다. [윤이흠역; ibid, pp 865-1011]

그 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뒤이어 일어난 한(漢)나라가 도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중국의 유일신 사상은 급속히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후, 송(宋)의 주자(朱子 1130-1200)는 만물이 음(陰)과 양(陽),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집대성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하늘을 숭배하는 하늘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에 의하면 환인(桓因 하늘님)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비(雨師=북), 바람(風伯=거울), 구름(雲師=검)의 삼부인(三符印)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한다. 그는 곰녀(熊女)와 결혼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단군왕검(檀君王儉 2370 BC)을 낳았다는 것이다. 단군은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배달겨레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다스렸다고 하였다. [임승국 번역/해석; 환단고기, pp 15-22, 정신세계사, 서울, 1986].

삼국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고려조까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배불숭유책을 내세운 조선조 초기에는 유교와 주자학에 영향을 받은 성리학(性理學)이 이퇴계과 이율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최재우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東學, 天道敎)을 창도하였다.

일본은 다신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원시신도(原始神道)에 의하면, 고천원(高天原 Takamigahara)에서 제사를 받는 우두머리 신인 모노카미(Monokami 本神)에게 옷을 지어주며 제사를 드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Amateras Okami)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모노카미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다른 신들의 청원으로 다시 살게 된 천조대신은 그 후 영신(靈神 Tamakami)이 되었으며, 그가 낳은 후손이 천황(天皇)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천황의 즉위식 때에는 모노카미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상제(新嘗祭 ninamesai)를 거행한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대표적인 천황을 받드는 절간(神社)이다. [飛鳥昭雄, 三神タケル; 天照大神ノ謎, pp  42-46, 學習硏究社, 東京, 1998].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그들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자처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손신화(天孫神話)는 일본인의 조상이 큐슈남부의 아소산(峨蘇山)에서 솟아 나왔다는 지신신화(地神神話)와 대립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일본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천황의 시조가 비류(沸流)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飛鳥昭雄外; ibid, pp 137-140]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0

참고 :

임번삼
2003-12-09

학문의 목적과 역사 2


(3) 서양의 구도활동

서양학문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사상(Christianity)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문의 역사를 말할 수 없으며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주지하듯이, 학문의 기원은 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7 BC)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동양인들과는 달리 논리적인 방법으로 진리의 실체탐구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주의 본질(en arche)이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일원론적 사고(mono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Sokrates 470-399 BC)는 연구의 대상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망각(忘却)의 레떼강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대는 이데아계(睿智界 idea)가 진리의 본체라 하였다. 이데아계는 불변의 이상(理想)이며, 이것이 투영된 것이 현상계(現象界)라 하였다. 인간의 영혼(psyche)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이성(理性)과 감정을 다스리는 기개(氣槪), 그리고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慾望)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목적론적 이원론은 후일 기독교(특히 개신교)와 이슬람권의 환영을 받았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형상과 질료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연구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인간은 질료인(質料因)인 점토(粘土)로 만들어진 육체, 조물주의 이미지인 형상인(形相因 영혼), 조물주의 손이나 도구에 해당하는 동력인(動力因), 이러한 물체(生命體)를 만드는 설계도에 해당하는 목적인(目的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그는 형상인을 중시하였고, 목적인과 형상인을 가진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는 식물의 영은 영양적이며, 동물은 여기에 감각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동물의 영혼에 이성(理性)을 가미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의 이원론은 그 후 다원론적인 원자론(atoma theory)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구약성경(舊約聖經)을 경전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Judaism)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에 대한 해설과 실천방안을 해설한 탈무드(Talmud)는 유대인 뿐 아니라 세계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2천년전에 태어난 예수(Jesus Christ)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인간세계에 내려 온(incarnation) 하나님의 아들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파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 진리의 실체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전 세계의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세기(606)에 마호멧에 의해 일어난 이슬람(Islam)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파생한 종교로 성경의 일부 내용에 마호멧의 예언(코란)을 포함시킨 알키탑(Al Kitab)을 경전으로 삼고, 알라(Allah)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유일신교(唯一神敎 monotheism)이다. 그들은 코란과 칼로 중동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을 삽시간에 지배하면서 찬란한 사라센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에서는 신에 대한 증명(神論)과 세계와 자아를 관통하여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時間觀)하였다. 사도 바울(St. Paul) 이래 최대의 기독교 신학자로 불리우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 수립한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은 비기독교적인 순환론적 시간관과 극명하게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그는 <두 도성>(Two Castles)에서 시간은 창조(創造)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종말(終末)을 향해 달리는 화살과 같다고 하였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는 그리스철학과 하나님, 인간, 자연의 상호관계를 조화적으로 설명한 스콜라철학(Scolaticism, Thomism)을 수립하여 카톨릭에 범신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도입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만물의 제일 생성원인‘(Prima Causa)이라 하였다.

13세기 이후에는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복귀하려는 르네상스(Reneisance, Born Again)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1517-1650)이 일어나 근세과학의 탄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부터 철학의 주제는 신(神)으로부터 인간으로 바뀌면서, 인본주의(humanism)가 싹트기 시작하여 계몽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중세 카톨릭이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해 온 데 대한 반발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한편, 루터, 멜랑히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신성설(勞動神聖說)을 주장하였고, 자연을 숭배가 아닌 조작(操作)의 대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근세철학의 원조라 불리우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주장하면서, 주관(보이는 자기)과 객관(보여지는 세계), 마음과 물질로 나뉜 세계상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진리탐구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회의론으로부터 근세철학이 싹트게 되었다. 데칼트의 방법론적 회의에 대하여 스피노자와 라이프닛츠를 중심으로 한 대륙의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베이컨, 록크, 버클리, 흄 등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추구하였다. 그는 화란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왜 슬플 때 눈물이 나오느냐?'고 묻자, '신이 정신과 물질을 만들었으며, 이 세 가지(신, 정신, 물질)가 우주의 실체(實體)'라고 대답하였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신이 유일의 실체'라 하였고(一元論), 라이프닛츠(Gottfried Wihelm Leipnitz 1646-1716)는 '신이 만든 비물질적이면서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모노드(monod 單子)가 우주의 근본적 실체이며, 이들의 복합체가 세계를 이룬다'는 다원론(多元論 pluralism)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대륙의 합리론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영국에서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험에 의존하려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관념(觀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데칼트의 주장을 부인하였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신(神)을 만물의 제일생성원으로만 이해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같은 상태인 데, 교육을 통하여 감각(感覺)으로 그 위에 자기가 받은 인상을 그리며, 이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관념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감각과 반성은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며, 관념은 단순에서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미의 교육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버클리(George Buckley)는 인식(認識)이란 정신과 관념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감각세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관념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神)로부터 유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 밖의 존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경험은 생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을 통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라 하였다. 인간이 시공을 통해 감성(感性)으로 현상을 인식하고, 오성(悟性)으로는 현상을 정리하여 개념화한다고 하였다. 이성(理性)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성으로 마음 속의 도덕율(道德律)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문제는 경험이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하여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양심의 소리’에 따른 도덕율을 강조하였고, <판단력비판>에서는 ‘천상의 별’(물자체)과 ‘마음속의 도덕율’(행위의 기준)을 연결시킴으로써 주관과 객관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순수이성을 비판함으로써 데칼트가 제기했던 문제(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의 연결문제)는 이론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으며, 도도히 흘러 온 철학의 사조는 사실상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헤겔(Georg Wilhelm F. Hegel 1770-1831)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보고, 인간의 성장이나 역사의 발전이 정(正 these)과 반(反 antithese)이 대립하다가 합(合 synthese)으로 조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계정신(World Spirit, Welt Geist)을 향해 발전해 간다고 하는 변증사관(辨證史觀 dialectic view)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헤겔의 그러한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며, 모든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다는 유물론(materialism)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종교는 민중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공격하였다.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이 없었던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도, 중세봉건제도,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유토피아에 이르게 된다는 유물사관(唯物史觀 materialistic view)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산종주국인 소련이 몰락하고(1989)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빗나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서양철학의 시대적 특징을 요약한다면 그리스철학은 근본에 대한 탐구시대요, 중세철학은 신학적 철학시대이며, 근세철학은 체계적 철학시대라 할 수 있다. [甲田 烈等; ibid, pp 34-35]


(4) 진리의 본체

1995년 어느 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내 나름으로 깨달았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는 진리의 실체를 발견했으니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매우 단순했지만, 내게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다.

모든 학문은 깊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진리의 샘>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생물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체학)의 많은 법칙들 (예컨데, 유전법칙, 열역학법칙, 파스칼의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 상대성원리, 질량불변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인문과학(철학, 문학, 수학, 신학, 사학)에서는 귀납법, 연역법, 생명의 존엄성, 진리의 추구, 피타고라스의 정리, 역사정신 등을, 사회과학(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에서는 한계효용의 법칙, 경세제민의 원리, 자유, 정의, 평등정신, 법의 정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나 법칙들은 반론할 수 없는 확고한 원리들이지만, 이들을 바로 진리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나 원리요 법칙일 뿐이며, 진리의 한 단면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의 샘>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것을 뿜어내는 <거대한 수맥(水脈)>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원리 및 정리들은 결국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여 활용하려는 것이며, 인문과학의 제반 법칙이나 정리, 사회과학에서의 양심법, 자유, 정의, 평등의 추구는 자연현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생명과 인간존엄을 지키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맥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들은 <진리의 강>과 만나게 된다. 앞에서 기술했던 모든 법칙과 원리들이 결국은 우주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우주의 지배를 받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예외가 없이 우주의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법칙이란 ‘온 우주에 통일되게 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질서체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의 인식과는 무관하지만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다. 자연계 속의 모든 생물이나 인간은 그 법칙 아래서 움직이고 살다가 사라지는 한시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우주계에는 변하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만일, 우주계의 질서가 수시로 변하든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우주법칙을 탐구하려는 것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의 법칙>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진리의 강들은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으로 <진리의 바다>에 이르게 마련이다. 그곳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요 진리의 형체가 숨쉬는 곳이며, 진리가 베일을 벗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면, <진리의 바다>란 과연 무엇일까? 그 마지막 베일을 걷고 보면 그것은 놀랍게도 우주와 우주의 법칙을 만들고 운용하시는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일정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만물이 조화롭게 돌아가며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메던 진리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창조주였던 것이다(그림 1).


그러면, 이러한 창조주는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최종적인 물음에 우리는 봉착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학문적인 문제이면서 개인적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학문적 문제라 함은 창조주가 실존하고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면 창조론적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해야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세계를 넘어 신학과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인문, 사회과학이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절감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1,500 BC) 기록물인 성경(Bible)에서는 “만물이 주(主)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롬11;3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主)란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가 우주를 만들고 운행하며,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깊이 탐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동의나 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선택은 학문적 선택이면서도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사상은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학문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며, 세계사적으로 모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성경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ism)이 다윈의 진화론(19C)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서양학문을 지배하였다. 이와는 달리, 성경기록이나 진화론과 관계없이, 절대자의 지적설계에 의존치 않고서는 자연계의 기원이나 운행에 대해 과학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창조주가 될 수도 있고, 자연법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창조론은 범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한다. 성경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은 일부 주장에서는 일치하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진화론과 대치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과학적 창조론은 후일, 유신진화론의 탄생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5) 진리의 목적

우주(universe, cosmos)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서체계(orderness, cosmos)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우주는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질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모든 질서의 지향방향은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간성을 꽃피우며, 자유, 정의, 진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하여 ‘지식에 지식만을 더하는 학문’은 인류에게 해로운 역기능을 했던 많은 사건들을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파수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참다운 진리는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문의 목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 학문 간에 경계선을 긋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그 연구대상이 실험 가능한 물질계(物質界)로 국한이 되어 있는 것은 16세기부터 베이컨과 로크의 귀납적 경험론의 도입, 그리고 데카르트와 라메뜨리의 생명기계론(生命機械論)이 과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학제 간에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동식물학자요, 의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물학자였으며,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고,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해부학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을 발전시킨 방법론을 제시한 공로자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를 발견치 못하도록 오도한 책임도 아울러 져야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학자에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창의와 영감의 원천이다. 반대로, 인문과학자와 사회과학자에게는 자연과학이 추상적 연구대상에 대한 실증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물질계를 연구대상으로 한정한 오늘의 자연과학은 진리의 본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진리는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의 영역에 숨어 있으며, 학제의 연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적인 생명활동은 형이상학적인 생명이 연출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질계로 한정된 자연과학의 학제는 일정한 부분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인문, 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도 역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51

참고 :



이은일
2003-11-18

UFO와 우주인에 대한 의견


      우주인과 UFO는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영화에서 UFO와 우주인은 단골 메뉴입니다. 과연 우주인은 있을까요?

 

1. 우선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살펴봅시다.

성경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도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이 지구의 창조목적도 인간이 거할 거처로써 지으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은신 자니라" (이사야 45:18)

성경은 인간의 죄, 타락, 심판, 구원에 대하여 다루고 있지만 이런 일들이 마음속에 이뤄지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덴동산의 추방, 노아의 홍수, 소몸과 고모라의 멸망 등은 모두 구체적인 사건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주로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이 심판대 앞에 서고, 그 후에 새하늘과 새땅이 된다는 것도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류처럼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죄를 범해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하 아무런 시사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주인이 있어서 사람처럼 지성과 문명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셔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또한 지구에 사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단순히 지구 만의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며 모든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새롭게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지구 이외 다른 곳에 사람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지구의 심판이 곧 우주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근거할 때 사람 이외 다른 지적 존재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흐름과 맞지 않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UFO와 외계인에 대한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

  UFO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잘못 인식한 구름, 비행기, 운석 등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해서 곧 UFO에 발달된 문명을 가지 외계인이 있다는 해석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UFO가 관찰된다는 것과 외계인에 있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런 UFO 현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UFO 연구자들은 우리의 과학기술과는 전혀 다른 비행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나는 다양한 물체들에 대한 이런 목격담을 근거로 매우 발달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조정하는 비행물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UFO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다양한 빛의 형태로 나타나고, 떼를 지어 움직이기도 하고, 현대의 과학 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비행능력을 보이는 것은 어떤 영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세에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략인 것을 생각하면 이런 영적인 존재가 사탄의 계략에 의해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계인을 직접 목격하거나 접촉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접촉자들의 대부분은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주장을 하고 있어 그 체험과 주장의 진위 여부를 의심받고 있습니다.  출현한 외계인의 모습도 높은 지능, 훌륭한 성품 아름다움을 갖춘 인류의 모습을 가진 경우부터, 키가 작고 추한 난쟁이 모습, 짐승이나 로봇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또한 인류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주장부터 강간당하고 혼혈아를 낳아 빼앗겼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합니다.  로즈웰 UFO 추락사건때 수습된 외계인의 사체라는 사진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의견들을 종합해서 보면,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경우, 개인적 신비적 체험에 대한 확신 등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X 파일이라는 영화에서 나타났듯이 미국 정부가 외계인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그 많은 증인들이 있어도 믿지 않으면서,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적인 증거가 희박한데도 쉽게 믿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보았고,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사진에 찍혔다고도 합니다.  이런 귀신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흥미거리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UFO와 외계인은 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UFO와 외계인 문제도 귀신 문제와 같이 영적인 문제이지 과학적으로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귀신 문제와 달리 UFO와 외계인 문제를 과학으로 다루는 것은 진화론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cPJFjCeP8g


3. 진화론과 외계인

현재까지 우주에 대한 조사 결과 지구 이외 생명체가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무기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이 오랜 시간을 지나 우연히 생명체가 되었다는 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우주에 있는 무기물들이 우연히 유기물이 될 수 있고, 유기물이 우연히 생명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기물이 우연히 유기물로 합성되는 것은 자연계에서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만, 유기물이 우연히 생명체로 합성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명체는 저절로 합성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체를 만드신 분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진화론의 영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넓은 우주에 지구처럼 생명체를 탄생시킬 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외계인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UFO 현상을 이런 믿음과 연관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화론이 단지 믿음인 것처럼 외계인의 존재도 믿음에 불과합니다.  

 

4. 과학적인 분별, 영적인 분별

외계인과 UFO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일관성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화성인, 목성인 등을 주장하다가 화성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 확인 된 이후에는 다른 은하계에 존재하는 외계인이라는 등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흥미 있는 현상 등이 있다는 것과 그런 현상의 원인을 외계인으로 돌리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외계인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적도 없고, 증명될 수 도 없을 것입니다.

귀신, 외계인 등 많은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말세에는 이런 현상이 강해질 것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도 여기다, 저기다 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지만 예수님이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알 수 있도록 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중요한 일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알 수 있도록 이뤄질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열매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잎이 무성해 보여도 열매가 없으면 소용없듯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좋게 보여도 그 열매가 무엇인지 잘 보면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런 주장이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인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되는 것인지를 보면 될 것입니다.  UFO와 외계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약하게 하거나, 하나님을 우주인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음난하고 더러운 일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5. 결론

1) 외계인이 있다면 예수님은 그 외계인을 위해서도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며, 예수님의 재림도 우주적 사건일 수 없다.
2) 지구이외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
3) 진화론은 우주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생명체가 우연히 합성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우주에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4) 말세가 될 수록 신비주의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귀신, UFO 등도 이런 영적 현상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5) 영적인 분별이 중요해 진다.  그런 주장의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잘 보면 그런 주장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데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조 : Do I Believe in UFOs? Absolutel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1/believe-in-ufos

Are ETs & UFOs Real?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are-ets-and-ufos-real

What really happened at Roswell?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094/ 

러시아 '외계인 시체' 정교한 가짜로 판정 (2011. 4. 20.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104/h2011042011171097100.htm

‘외계인 사체 ‘ 닭고기와 빵으로 만들었다 (2011. 4. 20. 조선일보)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20/2011042000476.html?multimedia


출처 - 창조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0

참고 :

김영식
2003-11-14

기원론 문제의 세계관적 고찰


서론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생물들이 존재한다. 생물학자들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종의 총 수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미생물의 영역까지 다 포함한다면 수천만 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1) 이처럼 생물의 다양성이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생물 종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답변은 크게 두 가지가 있고, 흔히들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과학이 보다 많이 발전하게 되면 결국에는 이 논쟁도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단순히 창조론와 진화론 사이의 대립으로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기원론에 대한 문제는 '세계관의 대립'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기원론에 관련된 논쟁의 본질은 유신론적 세계관---특히 기독교적 유신론---과 무신론적인 자연주의와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2) 그러므로 세계관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과학적인 사실의 축적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기원론에 관련된 두 가지 세계관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것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본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대립되는 각각의 세계관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자 할 때의 문제점은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이다'라고 제시해 줄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 내에서도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지만 아마도 각자가 조금씩은 서로 다른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이처럼 다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다원주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내부에서 과거와 같은 절대적인 기준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3) 여기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들4)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기본적인 틀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이 틀은 바로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틀로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타락-구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셨음을---자신을 구속하셨음을---믿는다. 이것은 자신이 그 이전에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었으며 그 상태를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시인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러한 구속이전의 전적인 타락5)의 기원을 찾다보면,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중요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이 없었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 역시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이 타락했다면 타락하지 않았던 그 이전의 상태도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 직후의 상태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상태에서 인간으로 인해 창조세계가 전적으로(totally) 타락하게 되었으며 이런 타락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정리하자면 창조가 없으면 타락도 없으며 타락이 없다면 구속도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속하셨음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창조와 타락도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구속하셔야 하는 이유를 창세기가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현대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의 역사성(특히 1장에서 11장까지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문자 그대로의 사건은 아니더라도 그 내용과 유사한 사건이 역사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신이 구속되었음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비역사적이라는 의미로서의 신화6)를 기록한 책으로 창세기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쓸 데 없는 일이 아니다.7)

정리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이전에 존재하신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지구와 우주를 포함하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된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것이다.

 

2. 자연주의 세계관 

다음으로 오늘날 과학을 비롯한 많은 학문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자. 자연주의 세계관에 대한 자세한 논의들은 다른 책들을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다루도록 하겠다.8)

첫째,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물질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모든 현상들은 물질들과 물질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둘째,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우주는 닫혀 있고 그 닫혀진 우주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인과율을 따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우주가 닫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를 초월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닫힌 우주 밖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는 정의상 닫힌 우주 내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닫혀 있고,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이 우리가 보고 접하는 세상이다.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우리 자신 역시 이러한 물질과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지구를 포함한 모든 천체들 모두 다른 물질들과 여러 가지 상호작용을 하고 있고 이런 작용을 통해서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기도 하고 수명이 다한 별들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9)현재 존재하는 모든 무거운 원소들은 별속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초신성 폭발을 통해서 우주로 방출되었다. 이렇게 방출된 물질들은 우주를 떠돌다가 다시 여러 가지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별을 형성한다. 우리의 태양도 그런 과정 속에서 약 50억년 전에 형성되었고, 이 때 함께 형성된 지구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 과정중에서 물질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원시 생물이 탄생했고, 그 원시 생물을 기반으로 해서 많은 생물들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풍부한 생물의 다양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기원, 인간의 기원, 생명의 기원, 생물의 다양성의 기원이다.10)

이처럼 자연주의 세계관의 특징은 모든 것을 물질과 그 물질들간의 상호작용만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특히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

 

3.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학문, 특히 자연과학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자연을 논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포함시키는 것 자체를 비과학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그의 책 『과학시대의 신론』(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생명과 우주의 기원과 같은 문제는 단순히 과학적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과학이 논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분명히 과학의 한계로 인해 다룰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대부분의 경우 과학이 말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원론에 있어서 과학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 역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것만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에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과학 영역은 자연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연주의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과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간섭하지 않으신다'---표현을 바꾸자면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하에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러한 전제는 결코 검증된 것도 아니고 검증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그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 이론만을 진리로 여길 것을 강요하고 있다.12)

구체적으로 이것은 미국의 경우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미국의 창조론 단체들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과 함께 동등한 시간동안 창조론 교육을 시키도록 하는 법률안을 주 의회에서 통과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법안은 곧바로 위헌성13)이 제기되었고 법정 논란 끝에 대법원에 가서는 결국 패소하였다. 패소한 이유를 보면, 진화론은 과학이지만 창조론은 종교이기 때문에 공립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런 판결의 배후에는 과학은 우리 모두가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종교는 일부 사람들만이 믿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런 전제에는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14) 뒤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자연주의 세계관 역시 기본적으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학문에 있어서의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오늘날의 학문은 어떠한 대안적인 세계관의 수용도 거부한다. 자연주의 세계관이 이렇게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자연주의는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철학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객관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과학활동 조차도 인간의 주관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100%의 객관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위에서 간단하게 얘기했던 것처럼 자연주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 체계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된 세계관인 것처럼 보인다.16)

그러나 자연주의 세계관만으로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 세계관은 인간이 인간을 귀중하게 여길만한 어떠한 근거를 제공했는가? 자연주의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이 독특하다면 개도 독특하고, 고양이도 독특하다.

실제로 자연주의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를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아예 인간이 동물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단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17) 이런 논리는 인간 역시 자연적인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특이하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특이하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핵전쟁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을 하더라도 자연과정의 일부일 뿐 특이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을 단지 분자들의 집합이며, 복잡한 화학공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로 단지 물질들로만 이루어져 있고,18) 그 물질들에 작용하는 법칙들의 작용의 결과라면, 인간의 이성이나 인격 역시 어떤 화학반응에 의해서 진행되는 어떤 한 과정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단지 어떤 특정한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화학반응에 의해서 알게된 사실들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즉, '인간은 기계이다'라는 것이 과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한 인간의 이성---두뇌속에서 일어난 어떤 화학반응---이 내린 결론이라면 그것은 기계가 내린 결론이고, 그러한 결론이 옳은지 여부를 그 기계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 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기계인지 아닌지 조차 불확실하게 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출발했던 자연주의가 결국은 인간의 이성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이런 결과가 허무주의로 가는 하나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19)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결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외의 또 다른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실존주의자였던 사르트르는 '만일 하나의 유한점(有限點)이 하나의 무한한 준거점(reference point)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0)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독교적 세계관처럼 아예 처음부터 초월자로서의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것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오히려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끝으로 자연주의 세계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단지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면,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일부 자연주의자들은 '존재하는 것이 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21) 그러나 악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므로,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주의적인 세계관만을 기반으로한 기원론을 받아들이다 보면 윤리적·도덕적인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4. 근대과학과 기독교 세계관 

오늘날처럼 자연주의 세계관만을 기반으로 해서는 과학 활동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과학이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프란시스 쉐퍼는 '화이트헤드(Whitehead)와 오펜하이머(Oppenhimer) 역시 근대 과학이 기독교의 세계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22) 계속해서 그는 '화이트헤드가 매우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초기 과학자들은 모두가 우주는 이성적인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우주는 이성에 의하여 탐구될 수 있다고 믿었다'23)고 말한다.

실제로 근대 과학혁명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물론 이들 네 사람의 구체적인 신앙 배경은 모두 달랐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로마 카톨릭이었고, 케플러는 루터교, 그리고 뉴턴은 성공회였다. 게다가 뉴턴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비공식적으로는 믿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들 모두 '기독교적인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었다.24)

물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오늘날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비슷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산으로는 자연철학의 한계를 넘어 근대과학으로 도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이 네 명의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질서있게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성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확실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을 붙들고 계셨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의 균일성25)이라는 과학의 전제를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으로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이어받고 그것을 다시 뉴턴이 깨끗하게 정리함으로써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질서의 일부분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뉴턴이 과학에 있어서 해 놓은 일은 업적의 양으로만 볼 때는 굉장히 작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룬 일련의 성공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뉴턴처럼만 하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뉴턴이 했던 방법론은 수용했지만 그런 뉴턴의 방법론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던 뉴턴의 신앙적인 배경을 수용하는 것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프랑스에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를 가지고 온 볼테르(Voltaire)는 뉴턴식의 방법을 선전하고 다녔으면서도 기독교 대해서는 비우호적이었다.

그 이후로 근대과학의 성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 세계관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주의 세계관으로 완전하게 교체되었다.

 

5. 학문과 믿음 

과학은 여러 가지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과학적인 방법론으로는 그런 전제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전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과학 그 자체의 방법론적인 한계를 넘어서 주변의 다른 세계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절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자연 과학은 자연이 균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자연이 균일하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 시간이나 공간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오늘 성립하는 법칙은 어제도 성립했고 미래에도 성립한다는 것이며, 지구에서 성립하는 법칙은 수천 광년 떨어진 우주 저편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이다.26) 이러한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오늘날 모든 과학자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자연주의나 그 어떤 과학도 이런 전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근대 과학이 성립하는데 중대한 기여를 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으며,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적인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의 전제들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주의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그러한 전제들이 옳다는 것을 지지하는가? 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자연주의 세계관은 모든 자연현상이 외부의 간섭이 아닌 닫힌 체계안에서 서로간의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주의 세계관이 바라보는 자연은 질서있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 믿음을 요구한다. 즉, 자연주의 세계관도 결국은 믿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이 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학문 영역에 있어서는 자연주의 세계관보다 더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명백하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 세계관 역시 결국은 믿음이 필요하다. 인간이 하는 모든 학문들은 기본적인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과학, 더 나아가 기독교적인 학문은 결코 주관이 개입된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학문과 과학에는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주의적인 주관과는 달리 기독교적인 주관은 학문의 여러 전제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며, 인간의 이성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결론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지금까지 이 글에서 짧게나마 기독교 세계관과 자연주의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 두 가지 세계관이 과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날은 자연주의 세계관이 과학의 전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자연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을 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특히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자연주의적인 접근을 했을 때는 결국은 허무주의적인 사고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위의 전도서 12장 1절 말씀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7)라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적 선언으로 시작했던 전도서가 마지막 결론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 특히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늦기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기독 청년들에게, 특히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둘러싸여 있는 학문의 영역에 관련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생명의 기원 문제는 결코 과학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유신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 사이의 대립이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 결코 자연주의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근대과학의 초창기에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근대과학 역시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 오늘날에도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우리의 이성으로 탐구한 결과들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과학의 전제에 대해서 믿을만한 근거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동안 기독교적 학문의 가능성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결과는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학문을 배우는 기독 학생으로서 계속해서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이며, 우리 모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논의해 보았으면 한다.

 

Notes

  1.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생명의 다양성(The Diversity of life)」(까치) 제8장 '탐험되지 않은 생물권'을 참고하라.
  2. 물론 여기에서 말한 기독교적 유신론도 오늘날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3.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그의 책에서 계몽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이단이라는 단어가 절대적인 기준에 반대하는 소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후기 계몽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단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고 말하고 있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IVP, p.76.)
  4. 여기에서 말한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믿고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의할 것은 이런 정의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정하는 이유는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논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전제를 이미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타락은 인간이 했지만, 그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받게 되었다(롬 8:22)는 의미에서 '전적인 타락'이다.
  6.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화가 반드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신화'를 사용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7.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책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생명의 말씀사)에서는 창세기 1장에서 11장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8. 이 부분은 특히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The Universe Next Door)」(IVP) 제4장 '유한한 우주의 침묵 : 자연주의'를 참고했다.
  9. 별의 죽음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별이 더 이상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10. 지구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자들의 입장도 현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inevitabilist들과 프레드 호일(Fred Hoyle)이나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과 같은 improbablist들의 대립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대략적으로 소개한 기사가 Scientific American 지(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으며 주소는 아래와 같다. 전자의 경우는 생명이 지구상에서 어떻게 해서든 출현하 수 있었을 것으로 믿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Scientific American 에 실린 소개의 글에서는 두 가지 입장 모두 아직은 '순수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순수한 추측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은 처음부터 그 가능성조차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http://www.sciam.com/explorations/112596explorations.html
  11.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과학시대의 신론(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 동명사(이정배 역), 1998, p. 90.
  12. 특히 '과학적인 이론'이 '종교적인 믿음'과 상충될 때에는 종교적인 믿음이 진리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물론 우리가 현재 기독교의 가르침으로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여유를 갖고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를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을 두고 이 문제를 꼼꼼히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진리가 언제나 더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경향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두어서, 우리가 보기에 과학과 계시 사이에 모순 같아 보이는 점이 과연 과학이 제시하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이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릴 때도 있을 것이다.'(프란시스 쉐퍼, 「궁극적 모순은 없다(No Final Conflict)」, 생명의 말씀사, 1995, pp. 23∼24.).
  13. 미국 헌법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진화론자들은 여기서 '창조론 교육'이 곧 '종교 교육'이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4.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IVP) 제3장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참고하라.
  15.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IVP, 1995, p. 103.
  16. Ibid, p. 103.
  17. 실제로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 라는 영국의 동물학자는 인간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버드 워처(Bird-watcher)'가 새를 관찰하듯이 '맨 워처(Man-watcher)'가 사람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책 「맨워칭(Manwatching)」(까치, 과학세대 역)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강조해 두고 싶은 점은 사람을 동물로 간주하는 것이 결코 사람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우리는 동물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영장류에 속하는 하나의 종이며, 다른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생물일 뿐인 것이다. 인간성은 동물성의 하나이며,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히 사람이란 종은 특별한 동물이다. 그러나 다른 어느 동물들도 각자의 독자성이라는 점에서는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맨워칭, p. 11.) 그러나 인간을 '모욕'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제거 시켜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18. 칼 세이건은 보다 구체적으로 '진화를 믿으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Carl Sagan·Ann Druyan,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고려원 미디어(김동광·과학세대 역), 1995, p. 88.
  19.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IVP, 1995, pp. 118∼124.
  20. 프란시스 쉐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생명의 말씀사(허긴 역), 1995, p. 33.에서 재인용.
  21. 프란시스 쉐퍼, 「다시 자유와 존엄으로(Back to Freedom and Dignity)」, 생명의 말씀사(김원주 역), 1995, pp. 38∼44.
  22. 프란시스 쉐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말씀사, 1995, p. 56.
  23. Ibid., p. 56.
  24. 예를 들어 오늘날 종교가 과학을 탄압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의 주인공인 갈릴레오 역시 종교재판을 받으면서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 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찰스 험멜Charles E. Hummel)의 「과학과 성경 : 갈등인가 화해인가(The Galileo Connection : Resolving Conflicts between Science & the Bible)」(IVP)를 참고하라.
  25. 이것은 5절에서 다시 다루겠다.
  26. 실제로 천체물리학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지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법칙들을 모든 우주에 적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7. 전도서 1장 2절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3/b13o6.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4

참고 :

James Stambaugh
2003-10-20

창조와 저주

(Creation and the Curse)


      혹시 당신은 가젤을 뒤쫓는 암사자가 마침내 그 가젤을 잡아먹는 광경을 담은 National Geographic 지의 특집 영상을 본적이 있는가? 사력을 다해 도주하는 그 가젤의 눈 속에 담긴 공포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생명체가 육체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살해되고 고통을 받는 자연의 재해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 우리들의 반응은 속수무책이다. 우리들은 이 비극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는 우리들 마음에는 무의식중에 이 세상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태로 늘 있어왔다는 가정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 가정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또는 하나님의 절대 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다.

즉,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는 자기 피조물이 육체적인 악이나 도덕적인 악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왜 허락하시는가? 엄연한 악의 존재를 볼 때 그에게 악과 대결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게 틀림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한테는 악을 이기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이 주제를 '악의 문제” 라고 일컫는다. 이 주제(issue)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피조물이 처하고 있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크리스천의 수가 늘어만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와 같은 의문을 누군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썩어짐, 종신토록 이어지는 수고, 육체의 사망, 고통 그리고 수난(受難)의 문제를 인간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당연시 하고 있으나, 또 이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죄를 영원히 정복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연결되어 있지만, 이러한 고통의 실체들이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최초의 반역 이전에는 없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자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는 이 모든 부정적인 현상이 아담의 창조 훨씬 오래 전부터 사실상 존재하고 있었다는 압도적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다.” (Hugh Ross). [1]

우리들 크리스천들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본질과 그 시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은 창세기 3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서 8:19-21에 기록된 창조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야말로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필요한 열쇠다. 우리는 창조의 시점과 범위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허무”의 의미 (The Meaning of ' Vanity')

'허무” (로마서 8:20)라는 단어의 해석에 이르는 첫 단계는 그 뜻과 용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희랍어 단어 metaios와 그 파생어들은 신약 속에 11번 출현한다. 이 단어의 명사 metaios는 영어로 'vanity (허무)” 또는 'vanities'로 KJV에 6번 사용되고 있다[2]. 그 단어의 형용사 mataiotes(영어는 ”vainity'로 해석됨) 는 3번 사용되고 있다[3]. 그 부사 maten (영어로 'in vain'으로 해석됨) 는 2번 보인다[4]. 어떤 사전에서는 그 명사형과 형용사형을 'value (가치, 가치 있는)” 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vanity (허무)를 'useless, futile, empty (무가치한, 허망 된, 공허한)”으로 정의 할 수 있다[5]. 구약성서 70인 역 (the Septuagint)에서 사용된 이 형용사 metaios는 구약 전도서 (the Book of Ecclesiastes)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hebel 에 대한 희랍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영어번역에 의하면 그 단어는 'vanity of vanities (허무 중의 허무)'라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

'vanity (허무)'의 개념은 희랍어 두 단어, kenos와 mataios에 해당한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그 단어들 사이에 6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점이다. 자주 영어의 'vanity'로 번역되는 희랍어 단어 kenos는 mataios에 유사한 개념으로 해석된다 [6]. 동일한 책에서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된 유일한 경우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경우다. 바울은 kenos를 10절과 14절에서 mataios를 17절에서 다같이 헛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그 단어들을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하기 위해 사용했다. 즉, 'kenos”를 ‘vain (공허한)'의 뜻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무언가가 내용이 비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mataios'를 'vain (헛된)”의 뜻으로 사용할 때에는 무언가가 deceptive(기만하는) 이라는 뜻으로, 또는 ineffectual (무력한, 헛된)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7]. 이렇게 해서 바울은 이 대조적인 두 단어를 사용하여, kenos를 내용이 비어있는 믿음이나 비어있는 은혜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다른 한편, mataiotes를 무언가가 실제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으면서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형용사로 사용하고 있을 때에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한 뜻은 자연이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20에서 이 단어의 명사형을 'emptiness, futility, purposeless, 그리고 transitoriness (허무, 무용, 무익, 헛됨)”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8]. 이 단어의 형용사 형태는 기만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더해 언외(言外)의 뜻을 함축한다. 구약의 전도서(Ecclesiastes)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으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는 데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구약 70인 역본(Septuagint)에서 이 단어의 형용사 형태는 '헛됨 (vanity)' 의 관념을 전하고 있다. 솔로몬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알아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삶은 그 어떤 소망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악이라는 것이다. 구약 전도서가 제시하는 그와 같은 삶의 형태는 겉으로는 성취하는 삶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기만일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구약 전도서는 이러한 형태의 인생은 기만이고, 또 하나님의 계명에 역행이라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도 또한 metaiotes에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관념을 연결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의 저자들이 이 단어 metaiotes를 사용하고 있는 나머지 두 곳에서도 이 단어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의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4:17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믿는 자들은 이방인들처럼 마음을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에베소 인들은 저들 나름으로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삶을 살았지만 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역시 불순종의 삶이었다. 이 단어는 베드로후서 2:18에서도 쓰였는데, 이 때의 그 단어는 거짓된 스승의 언변의 표본을 묘사한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vain 또는 empty'로 번역되는 이 단어 metaiotes에 두 가지 관념, 즉 기만과 불순종을 연계시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vanity' 즉 metaiotes는 허망한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Dunn은 '헛되다(metaiotes) 함은 피조물이 설계된 기능을 하지 않는다” 것을 의미한다는데 주목한다 [9]. 다시 말해서, 자연, 인간의 삶의 형태, 그리고 인간의 말, 이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서 존재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세 가지가 원래의 설계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헛되다(metaiotes) 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그것들이 정당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나 계획에 관련하여 일종의 윤리적 기만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Trench는 '진실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려면 사람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헛된 것(metaiotes)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10]. 그러므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안하지 않고 자연이 정당하게 기능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허무”와 '타락”이 발생한 시점 (The Timing of 'Vanity' and 'Corruption')

시점 (the timing)은 '굴복 당했다(subjected)'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는 피조물에 어떤 외부의 힘이 미쳐서 완성된 과거의 사건을 언급한다. 수동태로 쓰인 이 단어 ”굴복 당했다 (subjected)”는 전체 피조물 위에 이 허망과 썩어짐의 굴레를 씌운 어떤 외부의 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일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려 덮기 위해 비인칭(非人稱)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사를 통해 사역하는 힘을 하나님으로 보는 관점에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11].

희랍어 동사의 부정과거 시제(不定過去 時制, aorist tense)는 어떤 과거의 사건을 지목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희랍어 부정과거 시제는 여러 종류의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로마서 8:20에서 바울은 'culminative aorist (... 부정과거)”를 사용하여 어떤 사건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조망하기를 원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그 사건을 보려고” 하는 것 같다.[12]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바울은 피조물을 '허망한 것에 굴복”하는 조건 하에 있는 전체 생명체로 조망하기 위하여 이 부정과거 (cumulative aorist)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한테는 '굴복”의 사건이 언제 있었던가에 관해서 두 가지 취사선택만이 주어진 것 같다. 그 첫 번째 옵션은 창세기 3:14-19의 내용으로서, 즉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류, 동식물 그리고 지구에 내린 심판이고, 두 번째 '굴복”의 사건은 창세기 1:1의 태초의 창조이다.

만약에 굴복의 사건을 창세기 1:1의 시점에 선택적용하면, 그 사건은 기독교 교리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다시 말해서, 만일에 하나님이 태초부터 피조물을 저주하였다면, '악의 문제”를 풀어낼 타당한 해답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보편적인 '악”의 문제인 죽음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의의 거하는바”(베드로후서 3:13)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4)의 임재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목가풍(牧歌風, in idyllic fashion)으로 창조하셨다 ('아주 좋았더라!” 창세기 1:31)고 말씀 하신다. 땅과, 동물, 그리고 인간은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생하면서 협조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어 그를 순종하든지 거부하든지 인간 스스로의 의사에 따르게 하셨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로마서 8:19-21에 말씀하시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기원을 창세기 1:1의 시점을 정한다면, 우리한테는 선하고, 사랑하며, 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보장책이 없어진다. 그것은 이 '신음하는” 세계가 그의 계획인 까닭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악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사람들은 이 토론에서 또 다른 두 가지 관념을 외면하는 것 같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인격과 조화되는 것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이 악으로부터 (최소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하는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그 때에는 악은 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하나님한테 그 사악한 세계를 물리칠만한 힘이 없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해석이 된다. '허무와 썩어짐에 굴복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던 신(神)은 잔인하고 사악하고 변덕스럽던 고대의 그 모든 신들과 꼭 같은 신이다. 요컨대, 이 신은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탄과 아담이 이 '헛된 것과 썩어짐”의 힘과 조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갖지 못했다는 해석이 된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에, 그들은 주변의 피조물과 아무런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이나 아담하고 깨끗한 관계에 있지 않았고 또 있을 수도 없었다. 사탄은 물론 아담도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썩어짐”이 그들에게 의지의 힘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토록 강력한 힘을 행사하여 그들은 죄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하였다. 이 썩어짐의 힘은 오늘날의 목회선교에도 영향을 주어 목회자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들의 신음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세계가 창세기 1:1부터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다는 해석에서 기원한 무서운 결과다.


결론 (Conclusion)

본 논설은 그 저주의 시점과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의 허망함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부패는 생명체계의 육체적 썩어짐을 지목한다. 이 사건의 시점은 아담이 죄를 범하는 내용을 담은 창세기 3:14-19에 들어맞아야만 한다. 만약 이 믿음이 바로 서야만, 그 때에 모순이 없는 기독교 교리가 바로 서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만 할 것이다.

  

References

1. Hugh Ross, Creation and Time (Colorado Springs: NavPress, 1994), 69

2. The six are: Acts 14:15; I Corinthians 3:20; I Corinthians 15:17; Titus 3:9; James 1:26; I Peter 1:18.

3. The three are: Romans 8:20; Ephesians 4:17; II Peter 2:18.

4. See Matthew 15:9 and Mark 7:7.

5. Johannes P. Louw and Eugene A.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2nd ed., 1:625. A portion of a footnote on p. 620 is of importance here: 'Another danger in dealing with meanings of value is to assume that nominal and adjectival forms are essentially equivalent in meaning, but this is by no means always the case.'

6. See Acts 4:25; I Corinthians 15:10,14,58; II Corinthians 6:1; Galatians 2:2; Ephesians 5:6; Philippians 2:16; Colossians 2:8; I Thessalonians 2:1; 3:5; James 2:20.

7.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s.v. 'Mataios.'

8.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s.v. 'Mataiotes.'

9. James D.G. Dunn, Romans 1-8 (Dallas: Word Books, 1988), 470.

10. Richard C. Trench, Synonyms of the New Testament, 9th ed. (1880; reprint,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6), 182.

11. C.E.B. Cranfield,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Edinburgh:T. & T. Clark LTD, 1980), 1:413.

12. H.E. Dana and Julius R. Mantey, A Manual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Macmillan Company, 1957), 196.

* James Stambaugh, Librarian, ICR Research Librar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72.htm 

출처 - ICR, Impact No. 272, 199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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