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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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Norman L. Geisler
2003-10-08

절대가치는 있을까? 절대로 있다!

(Any Absolutes? Absolutely!)


       윤리체계는 도덕적 절대가치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덕적 절대가치에 대한 믿음이 성경적 세계관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노만 가이슬러 (Norman L. Geisler)는 크리스천 윤리의 기본문제들과 취사선택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조사를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요약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비크리스천들의 상대론적 정의가 비록 다양하지만, 대부분 윤리성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근거가 없다. 크리스천은 '정당성'을 하나님의 의지에 견주어 결정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 당신의 도덕성(His moral nature)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의 도덕성은 불변이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서 생기는 도덕적 당위들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그의 도덕적 당위들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구속적이다). 두 개의 또는 그 이상의 절대가치가 상충할 때엔, 크리스천은 보다 큰 계명에 따라야할 의무가 있다. 크리스천은 두 개의(또는 그 이상의) 상충되는 계명 중에서 보다 작은 계명을 지키지 않은데 대하여 정죄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호주에서 강의를 하는데, 한 번은 호주의 한 의학도와 만찬석상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선생님의 강의 주제들은 무엇입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윤리요"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그는 되물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유명한 풋볼 코치인 빈스 롬바르디(Vince Lombardi)와 같은 낙담을 느꼈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는 언젠가 한 번 자기가 맡고 있는 Green Bay Packers 팀이 특히 형평 없는 경기를 치렀을 때 의기소침한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풋볼이야!!"

우리는 어떤 문제건 깊이 탐구할 때 한계를 느끼기 쉽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지금 몇 가지 기본적인 정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이 '정의(옳음)' 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Defining What is 'Right')

많은 비크리스천 사상가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해 제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대개 그들의 정의는 윤리문제 해석에 적절한 근거가 희박하다. 그렇지만 그 정의들에도 각각 한결같이 윤리의 참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얼마쯤은 엿볼 수 있게 한다.1

 

힘이 정의이다 (Might is Right)

고대 희랍의 철학자, 트라시마커스 (Thrasymachus)는 정당성을 권력에서 찾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정의는 강자의 이해 문제'인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의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정의는 대개 정치적 세력으로 이해된다. 마키아벨리 (Machiavelli)는 이 정의를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정의는 물리적, 심리적 또는 다른 종류의 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힘은 정당하다" 라는 이론은 몇 가지 결정적인 오류를 내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그것이 힘과 선(善)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론은 선하지 않고서도 힘을 가질 수 있다고도, 또 힘없이도 선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네로 황제를 비롯하여 스탈린에 이르는 악(惡)의 독재자들의 경우들은 "권력은 정당하다"라는 믿음을 반박하기에 충분한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 역사는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라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도덕은 사회적 관행이다 (Morals are Mores)

또 다른 윤리철학은 도덕적 정당성은 소속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즉, 윤리는 윤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한 소속 사회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구성원을 위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뜻한다. 문화적 관행은 윤리적 계명이다.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한 도덕규범들은 그 어떤 보편적인 도덕 규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단순히 공통된 필요와 희망 때문에 생긴다.

이 이론이 맞닥뜨리게 되는 최초의 어려움은 소위 '이다(있다)-이어야한다'의 해석상의 오류다. 누가 단순히 무엇을 하고 '있다' 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여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명제가 오류가 아니라면, 인종차별이라든가 간음행위, 또는 잔학행위, 그리고 살인까지도 그 도덕적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인정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매 개별 사회의 관행이 제 딴에는 다 옳다고 한다면, 그때에는 서로 다른 사회와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상충들을 판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회들 '위에서' 사회를 규제하는 도덕적 원리가 없는 한 그 사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알력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도덕적인 방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만약에 도덕이 각 사회집단들 간에서 상대적이라면, 그때에는 비록 반대 입장에 있는 윤리적 명령도 옳다고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충하는 명령들 사이에서 양쪽이 다 옳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다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가 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은 확실히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규준(規準)이다 (Man is the Measure)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는 "인간은 모든 사물의 규준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개별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이 말은 사람은 각기 제 나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는 뜻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행한다는 것은 '나에게'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옳은 것이 다른 사람한테는 그릇 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역도 맞는다.

이 이론은 도덕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잔인하고 가증스럽고 혹은 포악스러운 행동까지도 어떤 사람한테는 옳은 행동이 될 수 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에 이 이론이 실제로 적용된다면, 사회는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본가치의 공통분모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집단사회는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글자그대로 '자기 자신의 일' 만을 한다면, 혼돈만이 생길 것이다. 끝으로, 이 이론이 결정해야할 문제는 인간 본성 중에서 어떤 것을 모든 사물의 규준으로 삼아야하는가 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단순하게, '선한 것' 이라고만 해서는 하나의 구걸처럼 되어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개인이나 인종을 초월한 그 어떤 선의 기준이 있어서 인간의 본성 중에서 또는 사회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판결할 수 있는 규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정당성의 근본이다 (The Human Race is the Basis of Right)

앞에 예시한 이론이 내포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윤리적 유아론(唯我論)을 회피하기 위하여, 인류 전체를 선의 규준으로 가정하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부분은 전체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못하지만, 전체는 부분의 정당성을 결정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류가 모든 사물의 규준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인종전체도 옳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스타운 (Jonestown)의 경우처럼 전체 사회의 집단자살 행위가 하나의 그런 예다. 가령 세계문제의 최선의 해결책으로 다수의 인류가 자살을 결정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에 불참하는 자들을 강제로 참여시킬 것인가? 더욱이, 인종의 윤리적 관행이 변함에 따라서 인종은 변한다. 노예제도가 인정되었듯이 어린아이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던 관행도 일반적으로 인정됐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종이 보다 선한 도덕 기준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보다 더 선한' 이라는 말에는 어떤 '최선의' 기준 또는 인종을 초월한 곳에서 인류의 진보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있을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은 이렇다. 윤리도덕을 측량할 수 있는 어떤 완벽한 기준이 인류를 초월한 곳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전에는 우리는 인류의 도덕 수준을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옳은 것은 중용이다 (Right is Moderation)

유명한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도덕성을 중용에서 찾았다. 행동의 올바른 자세는 '황금의 중용' 즉 행동의 두 극단 중에서 중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예컨대, 절제야말로 방종과 냉담과 사이의 중용의 자세다. 자존심은 허용과 겸손사이의 중용의 자세다. 용기는 두려움과 만용 사이의 이상적인 자세이다.2

때로는 중용이 가장 현명한 자세인 것만은 확실하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빌립보서 4:5). 문제는 중용이 도덕성에 대한  적절한 '표현' 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도덕성에 대한 적절한 '정의 (혹은 본질)' 이냐 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보면 중용은 선의 본질이 아니라는 암시가 드러난다. 첫째로, 올곧은 것이 행위로 옮길 때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위급에 대처하는 행위, 자기 방어 행위, 침략에 항거하기 위한 전쟁, 이런 것들이 좋은 예다. 이런 상황에서는 중용은 반드시 최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덕목들은 분명히 겸양한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반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또한 사람은 반만큼만 감사할 수도, 반만큼 진실할 수도, 혹은 반만큼 관대할 수는 없다. 더욱이 어느 정도를 중용의 정도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 따위는 없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겸양은 악덕(지나침)으로 간주하였다. 크리스천도 겸양을 덕목으로 믿는다. 중용은 어떤 보편적 잣대가 아니고, 기껏 해봐야 행동의 일반적인 지침일 뿐이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Right is What Brings Pleasure)

비록 에피쿠로스 (Epicurus) 자신은 남보다 더 중용의 사람이었지만, (B.C. 4세기에서 그 이후의) 에피쿠로스 파들 중 몇몇 사람들은 쾌락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전적으로 즐거운 것도 전적으로 고통스러운 것도 세상천지에 거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선한 것을 정하는 공식을 결정한다는 것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결국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적은 고통을 주면서 보다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이런 것들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즉 쾌락은 반듯이 선한 것이 아니(예컨대 사디즘)며, 고통은 반듯이 악덕이 아니(예컨대 경고성 고통)라는 화두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도 역시 어떤 종류의 쾌락을 검사의 기본으로 사용하는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쾌락에는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인 것 말고도 여러 종류의 쾌락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쾌락도 있음을 안다. 즉, 우리는 당장의(현세에 살고 있는 동안의) 쾌락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궁극적인(내세의) 쾌락을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기도 한다. 끝으로, 우리가 사용할 쾌락의 잣대는 개인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집단이나 인종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도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된다. 요컨대, 이 이론은 해답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최다수를 위한 최대의 선은 정당하다 (Right is the Greatest Good for the Greatest Number)

위에서 언급된 문제들을 생각하고, 공리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최다수에 선한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정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선의 의미를 양적으로 이해하려한다 ━ 즉, 쾌락의 최대의 량 (量)을 뜻한다. 제러미 벤덤 (Jeremy Bentham; 1748-1832)이 이 범주에 꼭 들어맞는다.3 그밖에 스튜어트 밀 (Stuart Mill; 1806-1873)은 선을 질적으로 생각했다 ━ 즉, 최대 다수를 위한 최고 수준 (종류)의 쾌락이다.4

공리주의적 이론이 맞닥뜨리는 한 가지 문제점은 '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양적인가 아니면 질적인가). 더욱 어렵게도 이 이론은 최대의 선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선'이란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옳음과 선함은 순환 논리적으로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든가, 아니면 공리주의의 과정 밖에 있는 어떤 기준에 준해서 정의 되어야할 것이다.  

더욱이 어느 누구도 결과적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실용 목적을 위한 공리주의적 선의 정의는 쓸모가 없다. 지금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여전히 무엇이 선한가를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어 기대해 보는 수밖에 도리 없다.

 

스스로를 위해 바람직한 것은 정당하다 (Right is What is desirable for Its own Sake)

선을 스스로를 위해서 본래적이며 자연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도덕가도 없지 않다.5 도덕가치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라고 간주한다. 선은 결코 선 이외의 것을 위해서 욕구돼서는 안 된다. 예컨대, 사람은 덕목 이외의 무엇 (말하자면,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을 얻기 위해서 덕목을 욕구하여서는 안 된다. 덕목은 그 자체를 위해서 욕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관념에는 분명히 장점이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도덕적으로 선한 실질 행동을 정의하지 못한다. 다만 단순히 선한 방향 (말하자면, 종국적인 방향)을 지적하는데 그친다. 더욱이 그것은 욕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 (예컨대, 욕구되어야만할 것)과 혼동하기 쉽다. 이래서 이 이론도 또한 비평을 받는 빌미를 제공한다. 선은 단순히 욕구되는 것(실질적으로 욕구되어야만 하는 것과 대조되는)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은 때로는 악한 것도 욕구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 자체가 선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반듯이 실질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한테 자살은 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제해결로부터의 최종적인 책임회피의 구실이기 때문이다.

 

옳음은 정의할 수 없다. (Right is Indefinable)

도덕적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어떤 사상가는 단순히 선은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무어 (G.E. Moore; 1873-1958)는 선을 정의하려는 기도는 매번 '사실적 오류'에 빠지게 마련일 것이라 주장했다. 이 오류는 쾌락을 선에 귀속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동일하다는 가정에서 연유된 결과다. 무어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은 선이다'라는 것이 전부이지 그 이상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6 다른 어떤 것에 연루시켜 선을 정의하려는 기도는 결국 그 어떤 것을 고유한 선으로 만들게 된다.

이 개념도 장점은 있다. 결국 궁극적 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밖에 모든 것은 그 궁극적 선에 예속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개념은 그래서 부적절하다. 첫째로, 그것은 선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제공하지 못한다. 만약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내용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때엔 선한 행위와 사악한 행위를 변호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선이 보다 더 궁극적인 것에 연계되지 않고는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은 선이 결코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도덕적으로 선한 하나님이 당신자신과 같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에도,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선이지, 그밖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선은 자신을 닮은 피조물을 지으리라 의지하신대로 지어진  도덕적인 피조물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意志하신 것은 선하다 (Good is What God Wills)

우리의 최종적인 대안은 하나님이 의지하시는 것에 연관시켜 선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 관념은 때때로 윤리의 신성계명 이론이라고 불려진다. 어떤 행동도 하나님이 선하다 하신 것은 선한 행동이다. 그 역의 경우, 즉 만약에 하나님이 사악한 행동이라고 하신 것은 사악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도덕적인 선은 궁극적이며 또 설명될 수도 있다. 그것은 궁극적이라 함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함은 그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이 관념에 때때로 제기되는 두 가지 반대 이론이 있음을 안다. 첫째로, 이 이론이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형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반대 주장은 그 권위가 궁극적이 되지 못할 때에만 유효하다. 즉, 만약에 어떤 유한한 존재가 이와 같은 궁극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나온다면, 그 때에 우리는 그것을 '권위주의'라고 주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권위자가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인정하는데 아무런 하자도 없다. 만약에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인해서 그는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궁극적인 기준이다.

두 번째의 반대는 하나님의 의지와 연계하여 선을 규정하는 것은 독단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반대 이론은 선에 대한 본질론적 견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주의론적(主意論的) 견해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주의론자 (자발주의자)는 하나님이 의지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래서 선하다고 믿는다. 다른 한 편, 본질론자는 하나님이 의지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하게 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윤리의 신성계명 이론이 갖는 바로 이 형태가 비평의 화살을 피할 수 있게 하면 크리스천 윤리의 기본을 형성하게 한다.

 

크리스천 윤리는 하나님의 불변의 본성에 근거한다 (Christian Ethics is Rooted in God's Unchanging Nature)

옳음과 그름에 대한 크리스천의 관념은 독단적이지 않고 허황되지도 않다. 그것이 독단적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의 의지하시는 바가 절대 선인 그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허황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불변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 여호와는 변역(變易)지 아니 하나니"(말라기 3:6); "...여호와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고보서 1:17). 비록 우주는 변할지라도, "주는 여상(如常)하시다..."(시편 102:27). 비록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본질적 선에 따라 행동이 자유롭지만, 그는 당신의 본질에 역행하는 행동에는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은 궁극적인 선이신 당신의 불변의 본성에 언제나 뿌리를 대고 있어야만 한다.

 

크리스천 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표현된다 (Christian Ethics is Expressed by God's Will)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모든 윤리적 명령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도덕성과 일치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지하시는 바는 하나님 당신 자신의 도덕적 속성들에 일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위기 11:45)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다(마태복음 5:4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니"(히브리서 6:18), 우리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골로새서 3: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16), 그리고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다(마태복음 22:39). 간단히 말해서, 크리스천 윤리는 하나님의 불변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된다.

 

크리스천 윤리는 절대적이다. (Christian Ethics is Absolute)

하나님의 도덕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당위들은 절대적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즉, 그것들은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구속적이다. 하나님이 의지하시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의 불변의 본성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당위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할 뿐이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복종의 도덕성을 시험하기 위해 특별히 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금하였다(창세기 2:16-17). 아담과 하와가 그 명령을 어긴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지만(로마서 5:12),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그 명령에 더 이상 구속받지 않는다. 그 명령은 물론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만, 그런다고 그 명령이 반드시 하나님의 본성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한 편,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명을 주시기(창세기 9:6) 이전부터 살인을 금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의 율법(출애굽기 20:13)에 의해 이미 적용되고 있었으며 모세의 시대 이후에도 역시 적용되었다(로마서 13:9).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으로 살인을 금한 것임은 틀림없다 (창세기 1:27, 9:6). 사람은 도덕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골로새서 3:10; 야고보서 3:9).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의 도덕성에 기인하는 것은 모두 다 도덕적 절대가치로 된다. 여기에는 거룩함, 의로움, 사랑, 진실함 그리고 긍휼과 같은 도덕적 당위들이 포함되었다.

구태여 하나님의 본성 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의지 에서 생기는 다른 계명들도 위에 당위들과 마찬가지로 구속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계명들은 절대가치는 아니다. 즉, 그 계명들은 하나님이 규정하였기에 준수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계명들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었다 (Christian Ethics is Based on God's Revelation)

크리스천의 윤리적 당위들은 하나님의 도덕성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도덕적 표현을 성경 속에 드러내신 계시에만 한정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계시는 자연 속에 표현하셨다(시편 19:1-6; 로마서 1:19-20). 그리고 특별한 계시는 성경 속에 표현하셨다(로마서 2:18; 3:2; 디모데후서 3;16-17). 하나님의 도덕성은 불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와 초자연적인 계시들은 서로 유사하고 또 중복된다. 일반적인 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포함한다. 특별한 계시는 하나님이 의지하는 바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사람의 윤리적 책임은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집중 탐구코자하는 바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가 아니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이다.

도덕적 당위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가 도덕적 의무의 면책사유는 되지 못한다. 이는 심지어 무신론자들한테도 참이다. 그것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14-15). 즉, 믿지 않는 자가 아무리 지식으로 아는 도덕적 율법이 없다고 하여도 그 본성에 새겨진 율법이 있다 하였다. 비록 그들은 지식으로 율법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성향(性向)으로 율법이 있음을 드러낸다. 바울의 말로는 심지어 남색자들도 때로는 그들의 행위가 '본성에 역리(逆理)란' 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KJV 로마서 1:26).

 

크리스천 윤리는 규범적이다 (Christian Ethics is Prescriptive)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들은 도덕적인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었음으로 그것은 규범적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법을 만들어주는 존재가 없으면 도덕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법의 입법자가 없으면 도덕법의 입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크리스천 윤리는 그 본성으로부터 규범(規範)적이어야 하지 기술(記述)적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윤리는 당위 (ought to be)를 다루는 것이지, 현상 (is)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윤리적 의무를 크리스천의 기준이 아니고, 크리스천에게 부과된 규준(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크리스천의 견지에서 볼 때, 순수 기술적 윤리는 결코 윤리일 수 없다. 인간 행실의 기술은 사회학이다. 그러나 인간 행실의 규정은 도덕성의 영역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관행에서 도덕규정들을 도출하려는 기도는 '현상(is)-당위(ought)' 오류를 범하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하는 현상들은 그들이 반드시 하여야할 도덕적 당위들의 근본은 아니다. 실제로 현상적인 행동들이 윤리의 근본이 되어야한다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여야 하고, 속이고, 훔치고 또 살인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런 행동들이 항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윤리는 의무본위다 (Christian Ethics is Duty-Centered)

광의의 윤리체계는 두 범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의무론적인(deontological)7 것이 그 하나로서 의무본위를 말하며, 다른 한 가지는 목적론적인(teleological) 것으로서 목적본위를 말한다. 크리스천 윤리는 의무론적이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목적론적 윤리의 좋은 예다. 의무론적 윤리관은 목적론적 윤리관과 대조하여 보면 더욱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아래의 표가 이 두 윤리체계의 차이점을 요약한다. 

          의무론적 윤리

           목적론적 윤리

 명령이 결과를 결정한다.

 명령이 행동의 기본이다.

 명령은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

 결과는 언제나 명령 안에서 평가된다.

 결과가 명령을 결정한다.

 결과가 행동의 기본이다.

 명령은 결과에 따라서 선하다.

 결과는 때때로 명령을 깨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 차이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만약에 누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노력하다가 실패하였다면, 목적론적 윤리의 형태에 따르면,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음으로 이것은 선한 행동이 아니다. 행동의 선은 결과가 결정하게 되어있는데,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든 행동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목적론적(공리주의적) 윤리의 보다 더 복잡한 형태는 그 기도가 비록 실패했으나 사회에 선한 영향을 줄 수도 있겠으므로, 선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어왔으며 또 앞으로도 남을 도와 구제하라고 고무하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까지 실패한 구제행위는 그 자체가 선한 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보다는 그들은 이 대목에서, 선한 결과를 이룰 때에만 그 행동은 선하다고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천 윤리는 의무론적이다. 크리스천 윤리는 실패한 행위도 선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전혀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한 사랑이 더 낫다고 믿는다. 크리스천은 십자가가 실패가 아닌 것은 누군가가 구원을 받을 것이란 단순한 이유에도 있다. 그런데 십자가의 구원의 효과는 믿는 사람에게만 효험이 있지만, 실은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효험이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이다. 크리스천 윤리는 완고한 신앙과 인종주의에 항거하는 사역이 비록 실패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선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도덕적인 행위는 결과의 성패여부에 상관없이 그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철학이다.

그런다고 크리스천 윤리가 결과를 소홀히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결과가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로되 그런대로 결과는 윤리적 결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크리스천이라면 총의 방아쇠를 당길 때 어느 방향에 겨냥할 것인가를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자동차의 운전수라면 자기가 몰고 가는 차의 속도가 다른 대상들에 어떤 결과를 미칠 것인가를 예상하여야 할 것이다. 話者는 자신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 대법원이 정당하게 예를 든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군중이 모인 건물에 들어가 뜬금없이 '불이야!'하고 외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심각한 질병에 예방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밖에 여러 가지 의무사항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의무론적 해석과 결과론적 해석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크리스천 윤리는 결과를 전적으로 규정과 규범 안에서 평가한다. 즉, 제아무리 좋게 예상되는 결과라고 해도 하나님이 주신 도덕 율법에 위반하는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이와는 달리, 공리주의자는 예상되는 결과를 구실로 이용하여 도덕 규정을 위반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규정을 만들기 위하여 결과를 이용한다. 그리고 기대되는 결과가 요구하면 기존의 규정도 위반할 수 있다. 예컨대, 크리스천은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허락하지만, 그런다고 인류의 유전자 혈통을 정화하기 위한 유아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크리스천 윤리는 사악한 수단(무고한 유아의 살해)의 사용을 결정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목적(예컨대 결과)을 구실로 사용하지 못하게 금한다. 요컨대, 목적은 선한 수단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사악한 수단은 물론 어떤 수단도 다 정당화하지 않는다.

 

상충 상황 (Conflict Situation)

불행하게도 도덕의 절대치를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도덕적인 원칙이 상충할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망설일 때 봉착하는 문제다. 여태까지 알려진 주요 윤리 체계는 통틀어 여섯 개로 집약된다. 그 각각의 체계는 다음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따라서 명명된다. '그것은 객관적 도덕 율법인가?' 즉, 그 율법은 조금도 주관적이 아니며,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1) 反(無)율법주의(Antinomianism)는 절대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덕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 정황주의(Situationism)는 율법의 절대가치는 하나뿐이다, 즉 사랑이 그것이라고 단언한다. (3) 일반주의(Genralism)는 몇 가지 일반적인 율법은 있으되 절대적인 율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4) 무조건적 절대주의(Unqualified Absolutism)는 절대적 율법은 많이 있으나 결코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5) 상충적 절대주의(Conflicting Absolutism)는 절대적인 규범은 많지만 서로 간에 때로는 상충한다. 그리고 사람은 보다 덜 사악한 규범을 따라야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6) 등급별 절대주의(Graded Absolutism)는 서로 간에 상충하는 절대적 율법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람은 법률보다 고등한 도덕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8 위에 열거한 여섯 개의 기본적 윤리관들 중에서 둘은 모든 객관적인 절대적 도덕법을 부인한다. 그 중에서 반율법주의는 모든 보편적 일반 도덕법을 부인한다. 다른 한편 일반주의는 다만 보편적 도덕법만을 부인하고 일반적 도덕법은 지지한다. 즉, 몇몇 객관적 도덕법은 대부분의 시간에 걸쳐 구속력을 가지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모든 시간에 걸쳐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윤리적 상충에 대한 다양한 견해 (Various Views on Ethical Conflicts)

위에 열거된 윤리 체계들 가운데서 네 체계는 일종의 절대주의 형태를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상황주의는 단 한 가지 절대가치(사랑)를 인정한다. 한편 나머지 체계들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절대가치를 긍정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상황주의가 주장하는 제 나름의 절대가치라는 것은 허황되어 상세히 설명할만한 내용이 없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누구도 상황에 조우하기 전에 당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머지 두 윤리체계의 절대가치들이 때로는 상충한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무조건적 절대론은 절대적 도덕 원리들은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덕 원리들이 때로는 상충한다고 주장하는 이 두 윤리체계 중에서 상충적 절대주의는 사람은 여러 악행들 가운데서 비교적 작은 악을 행할 책임이 있으나, 그런데도 어느 계명이건 위반하면 유죄를 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등급별 절대주의는 사람은 보다 큰 계명에 순종하여야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보다 적게 상충하는 계명을 순종하지 않은데 대하여 유죄의 판결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코리 붐(Corrie Ten Boom)은 나치스의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유태인들을 구해낼 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는가를 말했다. 이보다 훨씬 최근 (1987)에 있던 일로서, 이란-콘트라 (Iran-Contra)문제에 대한 미국의 상원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올리버 노스(Oliver North) 중령은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고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허위진술을 하였다고 단언하였다. 노스 중령은, "나는 거짓말과 생명을 저울질하여야만 했다"라고 진술했다. 사실이지, 성경에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없이 있다. 파라오의 살해명령으로부터 남자아기를 구하기 위하여 히브리인 산파는 거짓말을 했다(출애굽기 1:19). 라합은 여리고에서 유태인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여호수아 2장).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라면 언제이고 거짓말을 해도 정당한가? 이 문제야말로 앞서 열거하였던 여섯 개의 기본적인 윤리 체계들 사이에 개재하는 상이점들에 초점을 맞춰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1)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다. 이를 판단할 법은 없다. 반율법주의9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은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이 사상은 이 화두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도덕 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화두는 반듯이 주관적, 개인적 혹은 실용적인 근거에서 판단하여야만 하는 것이지 그 어떤 객관적인 도덕적 근거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만이 아니라 그 어떤 다른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심을 선도할 수 있는 도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2)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르다. 보편적인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주의10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른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이 일반적인 규정은 위반될 수 있다. 보편적인 도덕법이 없기 때문에 이미 뱉어진 거짓말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그 거짓말이 초래한 결과여하에 따른다. 만약에 결과가 좋았다면 그 거짓말은 옳았다. 대부분의 일반주의자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옳다고 믿는다.

(3) 거짓말을 하는 것이 때로는 옳다. 보편율법은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다.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가 제창하는 상황주의11는 절대도덕법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그런데 그것이 참말을 말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한다.12 사랑이 오직 하나의 절대가치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어쩌면 사랑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사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은 사랑하는 행위이다. 이것으로 해서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때로는 옳다는 주장이 성립된다. 사랑을 제외한 그 어떤 도덕법도 사랑을 위해서는 때로는 위반하여야 한다. 사랑 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4)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언제나 그릇된 행위다. 서로 상충하지 않는 규범이 많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친 사상과 같은 무조건적 절대론은13절대적 도덕규범이 많이 있으며 그중 어떤 규범도 결코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4 진실이 그중 하나의 규범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여야 한다. 그 결과로 누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진실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절대가치는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에 있어서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비록 결과가 제아무리 바람직하다 할지언정 이 법칙을 저버리기 위해 결과를 절대로 이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5)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용서될 수 있다. 서로 상충하는 규범이 많다. 상충적 절대론15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는 절대적 도덕법도 때로는 불가피하게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티리케(Helmut Thielicke)는 이 견해를16 지지하였다. 상충하는 절대론 지지자는 불가피하게 서로 상충하는 도덕률 속에서 보다 작은 악을 행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다 하위의 율법을 위반하고 자비를 호소하여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다면 거짓말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도덕법을 위반한데 대한 용서를 간청하여야 한다. 우리의 도덕률은 때로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함입(陷入)한 도덕적 궁지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도덕규범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6)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때로는 옳다. 보다 높은 등급의 율법이 있다. 본 저자가 지지하는 등급별 전대주의17는 많은 도덕적 절대가치들이 때로는 상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율법은 다른 율법보다 상위에 있어서, 율법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상충할 경우 보다 높은 등급의 도덕법을 좇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수 없어서 저지른 일로해서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보다 높은 등급의 도덕법을 준수하여야 하는 최우선 당위를 염두에 두시고 우리가 낮은 등급의 율법을 저버린 죄를 벗겨주신다.

수많은 등급별 절대론 지지자들은 고통 받는 무고한 사람에 대한 자비심은 죄지은 자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보다 더 큰 의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은 행위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등급별 절대론 지지자들 가운데 아직도 진실이 자비심에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단순히 가치의 계급적 차별성을 내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인간 위에, 그리고 인간을 사물 위에 매기는 가치의 기본적 등급에 동의하고 있다. 어느 두 등급 사이에 모순이 있을 때이면, 이와 같은 가치의 계급에 따라서 보다 높은 등급의 도덕가치가 아래 등급의 도덕가치에 우선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간보다 더 사랑하여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들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들 여섯 개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反율법주의는 그의 관념에서 모든 객관적 도덕법을 배제한다 고 밝힌다. 일반주의는 도덕법에는 예외가 있다고 주장한다. 상황주의는 다른 절대치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의 절대치 (사랑)만을 고수한다. 무조건적 절대론은 절대적 도덕법에는 명백한 모순으로부터 언제나 탈출구는 있다고 주장한다. 상충적 절대론은 도덕법이 상충할 때엔 보다 작은 악을 행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주장한다. 등급별 절대론은 도덕규범이 상충할 때 하나님은 보다 높은 등급의 당위에 순종하여야할 우리의 의무의 관점에서 보다 낮은 등급의 가치를 당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요약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 한다. 즉, 보편적 의무에도 때로는 예외사항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윤리체계가 어떻게 절대적인 형태로 간주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등급별 절대론 지지자들은 그래도 그것은 아직은 절대적 관념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로,  도덕법은 그 원천(하나님)에 의해서 절대적이다. 둘째로, 각각의 도덕법은 그것의 적용 범위의 따라서는 절대적일 수 있다. 예컨대, 거짓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는 언제나 그릇된 행위이나 생명을 구하는 행위일 때에는, 진실을 말하여야할 당위를 위반한데 대해 정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무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 磁力이 引力을 유지한 상태의 重力을 압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무가 인류를 사랑하는 의무를 압도한다. 셋째로, 각각의 도덕법은 그 등급에 있어서는 절대적 가치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한테는 주어진 가치의 등급은 하나님이 당신의 본성에 따라서 설정한 것이기에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최우선이고, 사람이 그 다음, 그리고 사물을 최종적인 존재로 설정하셨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보고 부모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경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이렇게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어느 어버이가 자녀에게 우상을 경배하라고 명령한다면, 그 자녀의 보다 높은 등급의 의무는 어버이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요약

도덕적인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들과는 달리 유태교-기독교적 개념만이 유일하게 도덕적 행위의 적절한 기본이 된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로, 여타의 윤리 관념들은 훌륭한 도덕적인 원칙에 대한 가정을 세울 수 있지만, 그런 원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관념은 유태교-기독교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다음의 두가지 이유로 해서 진실이다. 즉, (1) 윤리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 (하나님)의 불변의 본성에 근거하지 않는 한, 도덕적 절대가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오직 절대적 도덕법의 수여자만이 절대적 도덕법에 대한 충분한 근거이다. (2) 만약에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면, 그 때엔 겁탈, 살인 또는 대량학살과 같은 행동까지를 포함하여, 그 어떤 것이든 원할 때 하지 못하는 충분한 이유가 없어진다. 물론 도덕적 절대가치를 부인하는 인본주의자나 그밖에 다른 사상가들도 일반적인 도덕원칙들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원칙들 가운데 많은 것은 고상한 것도 사실이다.18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은 이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념 체계에 따르면, 그들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없다.  

더욱이 도덕법의 수여자에 근거한 윤리만이 객관적 의미로서 진정으로 규범적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記述적 윤리는 전혀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들만을 기술할 따름이지 사람이 꼭 하여야할 당위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심지어 상대론 지지자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온갖 사악한 행위들을 행하고 있다. 이 지적을 증명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상대론 지지자를 모욕을 주든가, 겁탈을 하든가, 아니면 살해하려 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런 것을 당하는 상대론 지지자들의 반응은 자신들의 신념을 저버리고 이런 행동이 그릇됐다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남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믿는 바가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이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측정하는데 남의 공격에 대한 그의 반응 이상 더 정확한 잣대는 없다.    

크리스천 윤리에는 물론 독특한 본질이 있다. 그것은 다른 윤리들, 즉 보다 낮은 등급의 유신론적 윤리와는 구별된다. 첫째로,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뒤쫓기에 완벽한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온 흔적이 완벽한 모범이라고 주장한다.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벽하게 삶을 살았다. (요한복음 1:1, 14; 히브리서 4:15). 예수 안에서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관념일 수밖에 없는 선(善)의 원리들이 구체화되고 인격화되었다. 우리로부터 아득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우신 윤리적 당위들과 같은 것들은 특별히 우리의 인간적인 상황과는 친숙하지 않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인간적인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가치가 구체화 된 것이다.

더욱이 크리스천 윤리의 독특함이 그 표본에서 뿐만 아니라, 그 정신적 권위의 수여 근거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삶의 표본을 삼을 수 있는 실질적인 사람을 표본으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를 수 있는 신성한 능력도 주셨음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4).

 

참고자료

1. See Norman L. Geisler, Christian Ethics: Options and Issue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chapter 1-4

2. See Aristotle, Nicomachean Ehics, Books II-V, in The Basic Works of Aristotle, trans. Richard McKeon (New York: Random House, 1941), 952-1022.

3. See Jeremy Bentham,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New York: Hafner, 1965 reprint).

4. See John Staurt Mill, 'Utilitarianism,' in the Utilitarianism's (Garden City, NY Dolphin  Books, Doubleday, 1961).

5. Aristotle.

6. See G.E. Moore, Principia Ethic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7. A classic represntative of a deontological ethic is Immanuel Kant, 'On the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Benevolent motives,' in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6th ed., trand. Thomas Kinsmill Abbott (London: Longmans Green, 1963).

8. Each of these views is elaborated in Geisler, chapters 2-7.

9. Ibid., chapter 3.

10. Ibid., chapter 4.

11. Ibid., chapter 3.

12. See Joseph Fletcher, Situation Ethics: The New morality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4.).

13. See Geisler, chapter 5.

14. See St. Augustine, On Lying,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 ed. Philip Schaff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56).

15. See Geisler, chapter 6.

16. See Helmut Thielicke, Theological Ethics, vol. 1, ed. William H. Lazare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6).

17. See Geisler, chapter 7.

18. See my critique of the ethics of humanist Paul Kurtz in 'Forbidden Fruit: The Ethics of Humanism,' Christian Research Juirnal (Fall 1988).

19. Some might wonder why 'Judeo-'Christian' is not broadened to 'Abrahamic,' this including Islam, the thirdd theistic ethics. One reason for the reluctance is that, while it is a 'divine-command ethic,' nonetheless it is very voluntaristic. Allah sometimes commands what is evil. See Norman L. Geisler and Abdul Saleeb, Answering Islam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3).

*This article first appeared in the Summer 1995 issue of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www.equip.org/free/DE198.htm

출처 - Christian Research Journal, Summer 199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4

참고 :

Henry M. Morris
2003-10-08

미국 무슬림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An Open Letter to American Muslims)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 8).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지금 라마단 단식 기간 동안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식 기간동안에는 신실한 무슬림들이 다들 그렇게 하듯이 나도 방금 코란1을 독파하였습니다. 나는 코란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해보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도 나처럼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라마단 기간에는 말입니다. 마호메트 자신이 AD 600 년경에 코란을 기록할 때에 모세의 책의 내용들은 물론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진술 내용들도 빈번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실생활에 관한 가르침에 관한 측면에서는 이 성경과 코란에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코란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6 일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한 창조주 한 분뿐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2 이 점이 특히 우리 ICR 회원들을 기쁘게 합니다. 이 6 '일'의 시간은 긴 기간이라고 말하는 무슬림들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 그러나 코란 그 자체는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창조주가 순간적으로3 창조하셨다고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참고: 시편 33:6-9). 그렇지만 두 책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알라의 속성에는 성경의 하나님의 속성들과 부합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알라는 '동정심이 많은 분,' '자비하신 분,' '전능하신 분,' '세상의 주,' '현명하신 분,'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 '용서하시는 분,' '은혜로우신 분,' 등등. 이러한 속성들은 성경의 하나님에게도 확실히 적용됩니다.

그러나 나는 코란에서 '사랑'의 알라를 언급하는 곳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신이십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사랑' 이십니다 (요한일서 4;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그리고 물론 또 다른 차이점도 있습니다. 코란은 예수님이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4 코란은 아담을 첫 번째 선지자로 하고 마호메트를 마지막이면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하는 길고 긴 선지자 계보 상에서 예수님을 한 사람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마호메트는 죽었고 예수는 살았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온전히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세세무궁토록 이겼습니다. 영광을 입은 그의 육신으로의 부활은 수없이 많은 책에 기록된 크리스천의 간증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사에 있어서 완벽히 입증된 사실입니다.5

코란은 이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실물증거들이 결론적으로 입증한 바에 비추어 코란의 부인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3). 그 이후에도 요한이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계시록 1:18).

코란은 처녀 몸에서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장차 있을 그의 재림을 인정하고 있으나,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6을 부인합니다. 더욱이 그의 부활(그의 주장하신 바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도 부인합니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파괴하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코란은 우리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훼손하려 합니다. 이런 차이점으로 보아, 성경의 사랑하는 하나님은 알라로 불려지는 신(神)과 동일한 신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무슬림, 유태교인, 가톨릭교인, 개신교인━각기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 같이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마호메트까지도 죄인이었기에 용서와 구원을 필요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기에 그만이 홀로 원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 생애 동안에 어떤 형태로서도 죄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만이 모든 사람 (남녀 구별 없이)을 위하여 청순무구 (淸純無垢)한 제물로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순순히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마호메트는 우리를 사랑하는가요? 알라는 우리를 사랑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코란은 모든 인간적 금지행동에 대한 형벌로 영겁의 화염지옥이라는 위압으로 넘쳐흐릅니다. 심지어 신실한 무슬림한테 까지도 구원과 천국에 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불신자 (infidel)에게 그런 기회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불신자는 모두 지옥으로 직행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코란은 모든 유태교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사실상 모든 비무슬림들을 싸잡아 불신자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불신자들은 반드시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가능한 한에서 목이 잘려야만 됩니다. 그뿐입니까? 그 다음에는 영원한 고통의 지옥행입니다. 사실상 선행을 한 (혹은 비무슬림과 싸우다 죽은) 무슬림만이 그들의 죄 값을 치른 것으로 되어 모든 관능적인 보상의 약속이 넘치는 낙원으로 갈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한편, 성경에 계시된 참 하나님은 사랑의 신으로서, 그는 ”…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그의 구원의 선물을 받으라고 누구한테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

성경의 하나님은 무슬림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알라의 영감을 받아 마호메트가 받아 쓴 것으로 주장되는) 코란에는 그런 언급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우리의 믿음만으로 값없이 온전한 용서와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전파하라” (로마서 1:8)는 뜻입니다. 이 전도는 칼로서가 아니고, 사랑과 이성으로서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결심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렸습니다. 미국인이든 아시아 사람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무슬림이든 크리스천이든 종교적 배경의 차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관계없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느냐 마느냐의 결심이야말로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결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이 선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행한 사역까지 저울에 달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이 선물을 받아들이든지━아니면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것으로 무방합니다!

ICR 사역에 힘쓰는 우리는 많은 무슬림 친구들이━이 나라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 있는━놀라운 이 선물을 받아들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저 자신은 공과대학에서 함께 일하고 면학에 힘썼던 많은 무슬림 동학들을 알고 지낼 수 있는 것을 개인적으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그들의 탁월한 능력이 세계에 기여한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지난날의 저의 친구들은 이란인, 이라크인, 아프간인, 파키스탄인, 아랍인, 그밖에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아프가니스탄의 공과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고 1940 년대에 저의 가족과 함께 그들을 도우러 가려고 차비를 갖추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회가 무산되고 말았으나, 그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저는 아프가니스탄과 무슬림들, 그리고 그들의 일반적인 종교에 관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공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무슬림이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온전히 교육받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더없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의 인격의 몸으로 (물론, 마리아의 몸에 자연적인 잉태로 나신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오신 구원의 신이십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고 괘념하는 신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3,14). 그것은 죄와 죽음과 지옥으로  타락한 인간을 되찾는 무한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슬림 친구들이━특히 위대한 자유의 나라 미합중국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7 백만 무슬림들━ 바로 그 자유 (그들의 고국에서는 당당하게 누릴 수 없는 자유)를 행사하여 오로지 우리 주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영원한 자유를 받아들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 기대를 가지고 이 편지를 공개하는 바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도울 일을 알려만 주시면 저희는 달려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겠습니다.

 

Endnotes

1. 코란의 영역판이 수없이 많다. 내가 사용한 영역판은 여러 해 전에 나의 무슬림 친구 한 분한테서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영역판은 제대로 된 번역판으로 믿을 수 있다. 코란은 대략 114 'Suras'로 되어있는데, 수라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章에 해당한다. 그런데  각 수라스 마다 하나님이 마호메트에게 전하는 특별한 '계시'를 대표한다. 아래 인용한 문장들은 전형적인 수라스의 문장들이다.

2. ”짐(We)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노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엿새 동안에 지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짐(us)에게는 아무런 피로도 없노라” (Sura 50:38). 알라는 자기 스스로를 언급할 때마다 빈번하게 'we' 와 'us'를 사용하였다. 스스로를 복수인칭으로 호칭하고 있는 알라이면서도 그는 맹렬하게 다신론과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3. ”그리고 그가 사물을 명령할 때, 그는 단지 '있어라 (Be)' 하면, 그것은 있다” (Sura 2:111).

4. ”지금 '진실로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 (Ibn Maryam)인 메시아다' 라고 말하는 자가 불신자이노라!” (Sura 5:19).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그의 사도들을 믿어라, 그러나 '삼위 (삼위일체가 계신다)'를 말하지 말라━너희를 위해 그러는 것이 좋으리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계신다! 그가 아들을 가진다 말하는 자는 그의 영광에서 멀리 있을진저!” (Sura 4:169).

5. 부활에 관한 간략한 요약을 ICR의 책자 The Resurrection of Christ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CR Customer Service에 요구하시면 무료로 우송해 드립니다.

6. ”그리고 저들의 하는 말에 의하면, ”진실로 우리는 메시아, 마리아의 아들 예수, 하나님의 사도를 죽였노라” 한다. 그러나 저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도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도다. 다만 그를 닮은 자를 그리 하였도다 … 저들은 진정 그를 죽이지 않았노라. 다만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 (Sura 4:157).

7. ”이제 불신자는, ”하나님은 메시아인 마리아의 아들이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 ”하나님은 셋 중의 세 번째이다” 라고 말하는 자들은 불신자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 외에 하나님은 없기 때문이다.” (Sura 5;76, 77).

”누구든지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를 원하는 자의 종교는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그는 나락에 떨어진 자로 있을 것이다” (Sura 3:79).

”너희가 불신자를 만나거든 그의 목을 쳐라, 그리하여 마침내 저들 가운데서 너희가 위대한 전사로 우뚝 서라. 그리고 그밖의 자들에게는 재빨리 족쇄를 채워라” (Sura 47:4).

”그리고 마침내 나팔 소리가 울리거든, …누구라도 공적이 저울을 기울게 한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로다. 그러나 저울에 달아 공적이 가벼운 자는━저들의 영혼을 잃을 것이며, 영원히 지옥에 거할 것이다” (Sura 23:3-5).

”하나님을 위해 싸운 자는 누구든지, … 그는 저들을 낙원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저들에게 말해 주지 않았더냐” (Sura 47:5, 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btg-a/btg-158a.htm

출처 - ICR, BTG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22

참고 :

John D. Morris
2003-10-08

창조와 정치에서 하나님 말씀의 사용 

(Using God's Word in Creation and Politics)


       최근에 나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모 주립대학교의 기독교 사회학 교수와 담소(談笑)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종국에는 창조의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다. 교수라는 직업적 배경 때문에 그런지 그는 창조론이 바보스럽게 생각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창조론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체계적인 나의 과학적 논거가 글자 그대로 해석되는 성경의 가르침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놀라는 표정은 볼만하였다.

토론의 열기를 느끼고 그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 당신은 자유주의자인가요? 보수주의자인가요? 민주당원입니까? 공화당원인가요? 성경의 문자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교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교 교수들의 경우에서처럼 그가 받아온 모든 교육훈련은 인문주의적인 사상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팽배한 환경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어두운 곳에서 크리스천의 불빛이 되어 젊은 학생들을 선도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의 세계관 형성에 성경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성경을 나의 과학이론에 대한 필수적인 골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창조론이 진화론보다 더 훌륭하게 모든 데이터를 설명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충격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나도 역시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어떤 정당에 적을 두고 있지만, 나는 지난 수 년 동안 성경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을 후보를 선택하기 위하여 ”주의 나라에 투표”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을 그에게 확실히 말했다. 나는 우리가 개인적인 그리고 직업적인 또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려야할 때 성경을 안내지침으로 삼아야한다는 점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였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노동의 과실로 살아가고 기업과 기업가가 높게 평가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체제보다 더 선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는 자유주의자보다 후자의 줄에 더 많이 선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적인 접근이라면 대우는 공정하여야 하고 개인적인 성과는 보상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또 다시 보수주의적인 접근에 강점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모든 단계의 인간생명에 높은 가치를 인정하는 측면에서는 성경과 맥을 같이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도 역시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개인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정부의 과다한 과세정책에 제동을 거는 측면에서는 성경과 동의한다. 개인의 책임을 중히 여기는 측면과 과다과세에 제동을 거는 측면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사생결단식 사업관행의 측면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업관행은 사회주의적 다윈사상의 잔재로서 일종의 사악한 다윈사상의 파괴적인 전투행위다. 사업의 측면에서 ”힘은 정의이다”는 명제는 성경적인 해석으로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성급한 전쟁행위도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성경은 특별히 나라가 설 때와 그 경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기에 그것을 지키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하지만, 부유한 나라가 금전적인 이득을 위해 전쟁을 발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보수주의자는 통상적으로 탄탄한 가족제도, 유용한 교육, 그리고 종교적 자유를 찬성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짓밟힌 사람들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에 훌륭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태도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의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돕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봉사하고 다가가는데 있다. 이 행위는 자유주의자의 목표와는 양립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른 한편 보수주의적인 크리스천들은 수많은 병원, 무숙자를 위한 숙박시설, 그리고 나라의 대학들을 위한 운영책임을 맡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성경적인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보수주의자이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심지어 정치적인 사안에 있어서까지도 성경적인 원칙에 순응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밖에 어떤 철학에도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키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 개개인들은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나와 의견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업은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뿌리를 내린 경건한 삶을 살아 가야할 것이다.

* Dr. Morris is President of IC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president/prz-0211.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90

참고 :

John D. Morris
2003-10-08

변화하는 세계의 주재이신 하나님 

(Sovereign God in a Changing World)


      우리는 언제나 영원의 일을 생각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늘 듣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현실의 생활문제에 골몰하면서 영원의 문제에서 관심이 멀어지곤 한다. 그런데 특별히 최근에 발생한 몇몇 사건들은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생각을 흩어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하나는 콜롬비아 우주 왕복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폭발되어 승무원들이 비명에 세상을 떠나야했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승무원들 중 몇 사람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데 안도한다. 그것은 그들의 간증이 나머지 승무원들의 마음을 진정시켰으리라는 생각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믿기 때문이다. 추도회에 있었던 그들 가족들의 간증은 새삼 영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결코 빈 말이 아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장기적인 우주탐색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주왕복 계획은 대개가 유용한 과학적인 탐색이다. 그 계획이 가져다 준 부산물은 모든 분야에 유익하였다. 그러나 NASA가 추진하는 과업에서 많은 부분은 지구 외의 어느 행성인가에 생명체가 존재하는가를 알아보려는 일이 우선적일 때가 비일비재하다. 콜롬비아 우주왕복선의 최후의 항해가 미국 최고의 연구기관에 계속적인 충격을 주어 NASA의 연구방향을 유용한 사역으로 전환시킨다면, 그리고 정부로 하여금 고집스럽게 추진하려는 사업목적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면, 폭발사건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중동지역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미국 본토에서 벌어졌던 테러사건은 콜롬비아 우주선의 폭발사건에 못지않게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안전은 모든 나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한 분한테서만 보장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슨 사건이 벌어지든 간에 거기에는 그의 위대한 계획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의 안전은 전능하신 그의 손 안에서 보장된다는 걸 안다는 것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흐트러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요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심오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우리 모두는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최근의 창조과학회 (ICR)의 저서 '하나님과 나라들 (God and Nations)'은 내가 보았던 일련의 사건들의 모습을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지만, 오늘의 '뉴스' 인 나라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떤 근거로 한 나라의 탄생을 허락하시고, 축복하시며, 또 그의 패망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은 역사의 주재이시며 이끌어 가시는 계획을 가까이에서 보았기에 나는 더없이 기쁜 것이다.

이번 부활절에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피난처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과, 진리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마음 바탕에서만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절 메시지를 전할 때 정당한 창조론적 맥락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뜻을 보다 더 충실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또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태초에 주재자이신 초월적인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의지에 따라서 우주만물의 생기(生起)를 명령하셨다. 그는 당신의 솜씨대로 이 지구를 만드시고 인간의 삶에 적합하도록 하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남자와 여자)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피조물들을 관리할 자격을 부여하시고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우주만물은 본래 죽음도 죄도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상호간에 온전한 친교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심히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은 물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까지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의 '대가'인 영육간의 죽음을 초래케 하였음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게 '썩어짐의 멍에'를 씌우게 하고 말았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갈라서 있는 동안 우리는 죽음의 올가미를 스스로 벗어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창조주께서는 인간과의 친교관계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에 죄 없기를 원하시며, 그의 의는 죄 값으로 죽음을 정죄하신다. 시간이 성숙하였을 때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시었기에 그 어떤 정죄도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음이라는 제물이 되어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기에 우리의 죄 값은 치러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는 그리스도가 죽임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즉 우리 죄를 대신하여 치르셨던 일로 해서 완전히 충족된 것이다. 모든 일을 온전히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바로 이 창조주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아버지 앞에 나서서 우리를 대변하시는 한편,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매일 같이 그는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권속으로 받아들이고, 육신의 죽음이라는 모욕을 당하는 당신의 권속들을 당신이 임재하신 곳으로 반갑게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머지않은 어느 날 이 지구로 돌아오실 것이다. 그리 되면, 모든 피조물은 그가 바라는 바에 따라서 죄로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의의 거하는 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서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3:1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우리는 우주왕복선의 크리스천 승무원들이 지구로 낙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주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과 테러의 불확실성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가 그렇게 확신하는 데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계획과 타락한 피조물을 당신이 어떻게 되찾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 인해서 되찾아진 의의 근거 위에서 영생을 약속받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부분인 피조물들은 죄로 말미암아, 심지어 우리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다. 그렇지만 창조주 당신께서는 피조물의 반역에 대한 정죄로 죽으셨으나, 죄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당신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갈아 입히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흠없이 나설 수 있도록 하셨다.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다. 피조물은 타락하고, 구속되고, 되찾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계획이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president/prz-0304.htm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34

참고 :

Jonathan Sarfati
2003-10-07

화성에 생명이?


     ”1996년의 보도 내용 중 가장 뜨거웠던 논제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화성에서 생명체를 발견했다는 획기적인 주장입니다.” 분명 그 사실은 신문과 텔레비전 채널을 얼마간 지배했었다. 그 뉴스는 NASA(미 항공우주국)를 널리 알려주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미국 국회에서는 NASA에 대한 예산 삭감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것의 발표 시기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다는 내용의 대형 고성능 폭탄에 관한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Independence Day)'의 개봉과 일치하여 찬란하게 빛났다.

화성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1908년까지 수백개의 화성 표면의 줄을 발견했다고 착각했던 미국의 부자 천문학자 Percival Lowell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1976년에 바이킹 우주선이 화성에 도달했을 때 정교한 탐색 기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생명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최근의 '발견' 내용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기독교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많은 기사들이 주장을 한다. 그들은 화성에 생물체가 있다는 것을 볼 때 물질은 생명이 생기게 하는 성향을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창조자는 불필요하며, 지구와 인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칭 복음주의자인 미국 대통령 클린턴(Bill Clinton)은, ”이 발견이 확실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우주에 관하여 과학이 발견한 것 중 가장 근사한 통찰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고 말하며 매우 열광적이다.1) 


실제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아무도 화성에서 생명체를 발견한 적이 없다. 발표 내용은 (남극 대륙에서 가져온)지구상의, 고구마 크기의 암석에 관한 것이다. 이 암석은 운석으로 생각되는데, 외관상 형상이 박테리아를 닮은 작은 소구체와, 한때 살아있던 유기체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약간의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대부분은 미생물 생명체의 화석에 대한 증거일 뿐, '작은 녹색인(Little Green Man)'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암석은 정말로 화성에서 왔는가?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다고 동의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암석의 작은 공극 속에 담긴 기체는 오늘날의 화성의 대기(아르곤과 이산화탄소)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광물 성분은 화성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다른 11개의 운석 성분과 다르며, 또한 (진화론적 연대측정법에 따르면) 그것은 다른 11개 보다 '수십억 년' 더 오래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것들과 동일하고 분명한 산소동위원소비를 갖고 있으므로, 그것이 '수십억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모체로부터 온 것일 수 있다는 증거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암석이 화성의 중력을 벗어나려면 그 속도는 소총의 탄알 속도보다 다섯배 이상 커야 된다.2) 일부 과학자들은 매우 큰 물체로부터의 충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어떤 생명체라도 발견된 것이 있는가? 

호주의 열렬한 무신론 회의론자 중의 한사람은 '화성의 생명체' 를 사실로 주장했으며, 과학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신중함도 없이, 우주와 생명이 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들에 대해 또 다른 격론을 가하기 위한 구실로 그것을 이용했다. 그러나 사실들은 그의 독단적인 주장을 정당화 해주지 않는다.

그 암석에 있어서 일부의 구조는 보기 드문 것이며 어떤 박테리아의 모양을 약간 닮았다. 그러나 모든 일들을 드러난 외관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을 조사하는 한 팀의 연구책임자는 그러한 모양이 바싹 마른 진흙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

화석 박테리아라고 알려진 것이 갖는 커다란 문제는 그들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독립생활을 하는 박테리아보다 여러 배 작다.3) 간단히 말해서, 화성의 물체는 자기 복제 세포를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채워 넣을 만한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4) 이러한 이유로, 미화석(微化石)의 전문가인 UCLA의 William Schopf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들이 생명활동의 흔적을 갖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암석을 분석했던 다른 팀에서는 그것이 생명활동의 주요 징조를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팀의 리더인 뉴멕시코 대학의 유성학 연구소장 Jim Papike는 이렇게 말했다. ”두 종류의 황(Sulfur)의 비를 조사해볼 때, 그것이 생명 형태에 대한 비라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실제로, 그는 그 비가 반대쪽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5) 


그러면 사람들은 왜 생명체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하는가? 

표면에 한층 작은 타원형 및 튜브 모양의 물체를 가진, 탄산염이라고 하는 광물의 작은 소구체. 예를 들어 석회암과 대리석은 주로 탄산염 광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헌 6)에서는 ”이들 소구체의 기원은 논의의 여지가 있으며, 그것들은 생명체와 관련이 없는 과정에 의하여 형성되었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특히, 그것들은 생명체가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온도에서 형성되었다는 일부 증거가 있다. 

PAHs(다핵 방향족 탄화수소)라 불리는 분자들. 그러나, 이들 분자들은 항상 살아있는 생물에 의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을음과 디젤 배기가스에서 통상적으로 발견된다. 또한, 시카고 대학의 지구과학자 Robert Clayton에 의하면, ”PAHs는 화성과 목성의 궤도 사이 및 그 부근에 산재한 소행성에 널리 있는 화합물이며 생명체의 특수현상은 아니다.” 그는 또한, 화석에 있어서의 PAHs는 이 암석에서의 그것보다 약 1000배 정도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7)

또 다른 가능성은 이들 화학물이 지구에서 생긴 것이며 운석이 여기에 있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화학팀의 팀장이었던 Richard Zare는, 오염물질은 내부보다는 표면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는데, 암석의 표면보다는 내부 깊숙한 곳에 PAHs가 더 많다는 이유로 이런 설명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부 감리교 대학의 지질학자인 Robert Gregory는, 암석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침투할 때 PAHs를 내부에 응집시킬 수 있으며, 한편 표면의 PAHs는 자외선에 의해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8) 

약간의 철 화합물. 그 암석은 자철광과, 천연자석(최초의 나침반에 사용되었다)이라고 하는 광물 뿐 아니라 '황철광' 과 유사한 또 다른 광물을 갖고 있다. 이 광물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으며, 한편 생명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정에 의해서도 형성될 수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그 광물들이 살아있는 세포로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자들은 생명과 관계없는 과정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화성의 생명체가 입자에서 사람으로의 진화를 증거하는가? 실제로 화성에서 생명체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기에서 진화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으므로, 많은 무신론자들은 논리적 실수를 범했다.

첫째, 그 생명체가 지구에 기원을 두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암석이 화성에서 폭발하여 지구까지 날아올 수 있다면 결국 그 반대의 방향으로 폭발되는 것도 가능해야만 한다.9) 과학자들이 수년동안 생각했던 보다 덜 극적인 가능성은, 특별히 태양표면의 대폭발 동안에 지구상의 포자(胞子)가 가벼운 압력에 의하여 상층의 대기로부터 우주로 밀려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성의 생명체 라고들 말하는 것이 원래는 지구의 생명체에서 난 것일 수 있다. 둘째, 진화론자들은 살아있지 않은 물질이 살아있는 세포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많은 장애물들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 증명하지 못했다.10)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지구 이외의 곳에 생명이 창조되지 않았다고 외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근년에, 영국의 학자인 Richard Bentley 같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광이, 생명체를 가진 많은 혹성에 나타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우기도 했다.11)

그러나, 이 기사의 서두에서 지적하였듯이, 외계의 생명체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론적 편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Car1 Sagan과 H. G. Wells는 진화를 지지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들을 썼다. 우주로부터 오는 복합 신호를 찾아서 외계의 지성을 증명하려는 데에 수백만 달러가 낭비되고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의 DNA와 단백질에서 발견되는 복합신호가 우리를 만드신 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Clinton 대통령은 암석에 있는 일부 형상과 화학물이 생명체가 화성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우주 계획을 돕기 위해 수십억 달러의 지원을 사실상 약속한 것을 볼 때 참으로 슬프다. 여태까지 미국에서는 그의 동의하에, 심장이 박동하고 뇌파가 있는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데에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그는 그들이 살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지구 이외의 다른 어느 곳에도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며, 납세자들이 낸 수백만 달러를 SETI 프로젝트12)에 소비하고서도 그 사실을 반박하는 데에 실패했다. 지구는 인간의 거주지라는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바로 그 지구에서 인간은 그들의 창조주를 배반하였고, 그래서 우주는 죽음과 멸망의 저주아래 있게 되었다(로마서 8:22). 또한 바로 그곳에서 창조주께서 그분의 창조물중의 한 사람의 특성을 취하셨고,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타락과 성육신을 갖는 지성적 생명체가 다른 세상에도 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또한 하나님이 다른 혹성에 극히 작은 생명체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 교의적이어서는 안된다. 


요약 

적어도 매스컴에서 ”화성에 생명체가 있다 고 추측한 것은 시기상조이다.” 일부 현장의 조사자들은 그 증거가 실제로 어떤 생명체에도 반대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주장이, NASA가 정부 기금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이목을 끌기 위한 선전이라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그 증거라는 것은 미생물의 생명체를 어렴풋이 암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지구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암석 내의 '생명' 에 관한 이들 모호한 주장은, 참 생명은 반석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사 44:8), 영원한 생명을 위한 단 하나의 길은 머리되신 모통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엡2:20, 요14:6, 행4:12)을 가리는 연막이다. 


각주

1. 클린턴이 진화론적 입장이 따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낙태와 동성연애에 대 해서 그가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 화성 표면을 탈출하는 속도는 5.1km/s이다.

3. 화성의 물체는 크기가 20~100nm(1nm =10-9m)인 반면, 독립생활 하는 박테리아는 500~ 20,000nm이다. 가장 크기가 작은 박테리아인 미코플라즈마(Mycoplasma)는 지름이

100~250nm인데, 이것은 보다 진보된 생물의 기생충으로만 생존할 수 있다.

4. 미국 생화학자 Harold Morowitz는 상상할 수 있는 세포의 최소 추정 크기가 지름이 약 100nm 정도라고 계산했다. 이 크기로는 세 개의 리보솜(역주:세포안의 RNA와 단백질의 복합체; 단백질 합성이 이루어짐)과, 하나의 완전한 효소, 100,000 염기 길이의 DNA 분자 하나, 그리고 하나의 세포벽을 담을 수 있다. 여기에는 조절기능이나 비타민 대사작용과 극도로 제한된 중간대사를 포함시키지 않았으므로, 이 크기는 거의 최소한도라고 그는 지적한다.

5. C. K. Shearer, g.d. Layne, J. J. Papike & M. N. Spilde, 'Sulfur isotopic systematics in alteration assemblages in martian meteorite Allan Hills 84001,' Geochimica et Cosmochimica Acta, Vol. 60, no. 15, 1996, pp. 2921-2928.

6. David S. McKey et al., 'Search for Past life on Mars: Possible Relic Biogenic Activity in Martian Meteorite ALH84001,' Science, Vol. 273, August 16, 1996, pp. 924-930.

7. New Scientist, August 17, 1996, pp. 4-5.8. lbid, p. 5.

8. lbid, p. 5.

9. 지구는 탈출속도(11.2km/s)가 화성의 탈출속도의 두 배가 넘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또한, 화성으로부터의 암석은 태양의 중력에 의하여 인력을 받을 것이므로 지 구의 궤도를 가로지르기가 더욱 쉬울 것이다. 반면에 태양의 인력은 지구로부터의 암석을 화성의 궤도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본문에서 대략 설명한 기전인, 태양의 작용으로 인한 바람에 의하여 포자가 이동한다는 개념에 따르면 지구에서 화성으로의 이동이 그 반대쪽보다 더 가능성 있다.

10. 미코플라즈마가 가장 단순한 자기복제 유기체라고 가정하자(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실제로 독립생활하는 유기체는 보다 더 복잡하다.) 그것은 평균적으로 약 400개의 아미노산 길이를 갖는 효소들을 암호화하는, 482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효소가 올바로 가능하게하려면 정확한 순서를 가져야만 한다. 효소 안에는 20가지 종류의 아미 노산이 있다. 각각의 효소안에 단 10개의 단위만 정확히 제자리에 있기 위한 화합 확률은 106271 (1 뒤에 0이 6271개) 분의 1이다. 이 숫자는, 우주 내의 원자의 수가 약 1080 개(1 뒤에 0이 80개)밖에 안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0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자연선택을 빌어서 이들 기현상을 설명하려고 항상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것을 처음 시작하려면 자기복제의 실체가 필요하므로, 그들의 기원은 설명할 수 없다.

11. Lance Morrow, Viewpoint: Life as Divine Cartoon, Time, August 19, 1996, p. 83.

12. 역주 : SETI (Search Extra Terrestrial intelligence: 지구 밖의 지적 생명탐사) 원래 탐사는 60년대부터 프랭크 드레이크 박사가 시작하였다. 1992년 10월 12일 미국 NASA에서 10년동안 700억 달라를 투자하여 연구 계획. 1년간 연구성과가 많았으나 한 건도 (37건 중)증거가 나타나지 않음. 예산 삭감. 1년뒤 93년 9월 말로 취소. 민간인이 '페닉스' 라는 사업명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파크스, 모플러에 있는 전파망원경을 이용하여 95년 11월부터 연구재개.

 

*참조 : Life from Mar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0_3/j10_3_293-296.pdf



번역 - 이종헌

링크 - ,

출처 - 창조지, 제 101호 [1997. 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9

참고 : 5703|5685|5613|5592|4730|4552|4522|3830

양영은
2003-10-07

UFO와 외계인


      이 시대에 UFO와 외계인의 언급이 더 이상 생소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80년대 초, 스필버그 감독의 'ET'라는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외계인을 소재로 한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서점에나 인터넷에도 외계인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단어다. 어린이들의 만화속이나, 우리의 대화 속에서도 쉽게 등장하는 외계인…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현상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UFO의 정의와 UFO 현상

'Unidentified Frying Objects'는 말 그대로 '미확인 비행물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것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라면, 그것을 UFO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UFO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당연히 UFO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UFO라고 하면 모두 외계인과 연관을 시킨다.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외계생명체의 비행물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보면 거의 대부분 제트기나 기상현상을 본 것 뿐이다.

실제로 UFO 목격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1분에 1건이 보고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적인 UFO 연구 기관인 뮤폰에서조차 ”그 가운데 99%가 가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수한 항공기 조정사들도 드문 기상 현상을 처음 대할 때는, 그것이 인공물인지 자연 현상인지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니, 우리 주변에서 흔히 오인하는 현상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① 운석·화구·별·구름

가장 대표적인 UFO 현상이 바로 유성이나 별이다. 운석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대기층을 뚫고 지나는 동안 커브를 그릴때면 마치 UFO가 고속으로 나는 것으로 보인다. 종종 금성을 UFO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구름은 일정한 형상을 가지지 않지만, 간혹 기류의 소용돌이에 의해 UFO와 같은 둥근형 또는 원반형의 모양을 이룰 때가 있다.

② 항공기·항공기 탑조등 또는 헬리콥터

고도 10km 이상을 나는 제트기 등은 비행 소리가 전혀 들리지않기 때문에 UFO로 잘못 볼 수 있다. 특히 멀리 나는 항공기의 경우는 날개를 식별하기 어려워 UFO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또한 야간에 비행중인 비행기를 볼 경우 탑조등의 깜박거림을 UFO로 착각할 수 있다.

③ 인공위성

현재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의 수는 4000개에 달한다. 이들을 육안으로 보면 직선으로 나는 것차럼 보여, 일부 인공 위성체를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④ 구전 현상

구전 현상은 초고온에서 발광하는 이온 가스체로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릴 때 발생한다. 매우 밝은 빛을 내고, 구름에서 떨어져 나와 수십 초동안 떠다니기 때문에, 충분히 UFO로 오인된다. 악천후의 기상 조건하에서 항공기가 편대로 날 때, 인공적으로도 발생시킬 수 있다.

⑤ 오로라

오로라는 태양 주변의 폭발로 우주 공간에서 날아온 전기를 띤 입자들이, 지구 자기의 변화로 극지방의 상공에서 대기 중의 산소 분자와 충돌하여 생기는 방전 현상이다.

⑥ 기온 반전 현상

대류권 내에서는 상층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데, 반대로 기온이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따라서 따뜻한 대기층과 차가운 대기층이 겹치는 경우, 그 경계면에서의 반사광이 이상한 광판으로 보일 때가 있다.

⑦ 기구나 은박지 풍선

기구는 대체적으로 매우 크고 공과 같이 둥근 형태나 비행선과 같은 모양이 많다. 고정된 상태나 천천히 이동중인 예가 많아서, 멀리서 볼 경우 UFO로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은박지 풍선의 경우, 맑은 대낮에 고공에 떠 있거나 계속적으로 올라갈 때, 햇빛의 영향을 받아 은백색의 빛이 반사되어 멀리 떠있는 UFO로 착각할 수 있다.

 

2.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것이 왜 위험한가?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것이 왜 성경상으로 문제가 있는지, 외계인도 하나님의 창조물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등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인 중에도 많은게 사실이다. 성경에서 ”외계인은 없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도 없다. 하지만 외계인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1) 진화론에 입각한 위험한 발상

시중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외계인 책들을 보면, UFO와 외계인에 관한 목격담이 실려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화보와 사진으로 ”사실이다”라고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또한 책을 엮어나간 편집자나 글쓴이들은 거기에 의견을 보태거나 나름대로 외계인에 대해 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상은 철저한 진화론에 바탕하고 있음을 느낀다.

인간이, 아니 모든 생물이 진화의 소산이듯, 외계인은 우리보다 앞선 문명을 가진 진화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책들에서 외계인은 ”너희는 우리의 과거다, 우리는 너희의 미래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리고 있는 외계인의 대부분이 인간의 형상에 가깝다.(머리와 눈은 커지고 입과 코, 턱은 작다. 머리털은 없으며, 정신적인 활동이 대부분이므로, 육체는 퇴하하여 작고 말랐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되면 그런 모습이 될 것이라는 자연스런 결론을 유도한다.

또한 당연히 우주밖 생명의 흔적에 대해 언급하려 얘쓰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화성의 얼굴 형상이나,  달에 우주선 착륙의 흔적이 있다는 등의 설은 모두 검증되지 않았거나, 단순한 형상을 문명의 흔적이라고 과대 평가하고, 사실인듯 믿게 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2) 종교화 되어가고 있는 UFO신드롬

① 새로운 믿음의 형성과 확산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종교학과 교수 로버트 엘우드 2세는 1950년대가 UFO 종교의 전성기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0~1970년대에 주로 등장한 기괴하고, 얇은 입술의 UFO 탑승자나 납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현란할 정도로 아름답고 영성적인 존재들이 이때 주로 나타났었기 때문에, UFO 종교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가 1950년대로 국한됐다고 1970년대 말에 언급했었다. 하지만 최근 존 맥 등의 연구결과는 오히려 지금이 UFO 종교운동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시기임을 말해준다. 자크 발레는 모든 UFO 현상이 종교적인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8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UFO 연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피랍사례들에서 종교적인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제니 렌들즈는 오늘날 나타나 보이는 피랍사례가 격심한 세력으로 퍼져 나갈 거대한 신앙운동의 성격을 띠며, 이런 측면에서 그 유형이 접촉사례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후자가 전자로 진보된 성격을 띤다고 말하고 있다.

지구상의 잠재적인 피랍자들과 접촉자들 숫자는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만 3백만 명 이상이 이 범주에 속한다는 것으로 봐서, 전 세계적으로 그 인원이 수천만 명 이르지 않을까 싶다. 자신들을 우주시대의 새로운 예언자라고 믿는 이들이 아직까지는 조롱의 대상이거나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단교가 항상 그 시대의 한두 명의 미치광이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고 새시대를 예언했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몇몇 교단은 후에 전 세계적 규모의 버젓한 종교로 발전했다. 이제  첨단 우주과학시대에 UFO를 내세우는 새로운 미치광이들이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최소한 양적인 측면에서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그들이 성공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② UFO의 존재에 대한 믿음

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 년에 국한시켜 생각해 볼 때, UFO 신드롬만큼 매우 짧은 시기에 이토록 광범위한 믿음을 형성했던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가령 미국의 경우 18세 이상 성인 남녀 50%가 UFO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 것은 맨 처음 그 현상이 논란이 된 지 불과 30년도 채 안 됐을 때의 일이었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과학 문명국 미국에서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과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존재를 믿었던 일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20세 이상 성인 남녀 약 30%가 UFO의 존재를 믿으며, 고학력자의 70%, 청소년들의 70%이상이 그 존재를 믿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정도의 믿음이라면, 기성 종교들 중의 어느 한 종교를 믿는 신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UFO와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셈이다. 혹자는 종교적 믿음과 외계인에 대한 믿음은 그 질적인 측면에서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지적할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고도의 문명을 지닌 외계인에 의해 인류가 창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그들이 지구의 파멸에서 인간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 우주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내용들을 기성종교의 교리보다 무의식적으로 더 신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UFO 신드롬은 오늘날 사회 심리적 요구와 적절히 공명하고 있다. 이런 공명으로부터 보강되는 측면은 과학적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종교적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모든 종교 초기 숭배교 상태에서 잉태하는 주물숭배(Fetishism), 토테미즘(Totemism), 초월성(Trenscendence), 전지(Omniscience), 완전성(Perfection), 하늘로부터의 구원(Salvation) 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UFO 신드롬이 인류의 종말이라는 종교적 메시지의 가장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살로니가후서 2:9-12)

많은 기독인들과 전통 신학자들은 UFO신드롬을 사탄(DEVIL)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그도 그럴것이 다분히 종교적 성향을 띄며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계인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자살하거나 횡설수설한다.( 그리고 최면을 이용한 증언은 절대적으로 비과학적이며, 비기독교적인 것인다!) 여기서 잠깐, 인터넷에 뜬 한 기독인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한다.

”UFO는 과연 사탄적이다! 단순한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무서워 떨게 하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동경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UFO의 3대 체험자라고 할 수 있는 '빌리 마이어 ('셈 야제'라는 외계인을 만났다는 사람)'과 '조지 아담스키' 그리고 'UFO종교인 '라에리안 무브먼트'의 창시자인 '클로드 보리롱 라엘'이라는 자들의 언급한 것을 유심히 보면 그들끼리도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세히 보게 되면 일치성이 의외로(?) 적다. 물론 그것을 UFO 긍정론 주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역설적으로 합리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Crill(Krill) file'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일부러 슬쩍 거짓 정보를 흘려서, 그것이 사실인 양 떠들게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유포한 사람이 암살됨으로써 그것이 더욱 사실임을 부축일 수도 있다. 배후조직들의 고도로 발달된 음모의 전술이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부가 사실일지라도 유포과정에서 왜곡되었거나 혹은 첨가/삭제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도 미국 정부의 개입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 외계인이라는 존재들은 '외계인'이 아니며, 사탄의 조직들의 다른 활동 유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성경적인 해석의 종합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개인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현상적인 면들을 모두 섭렵했을 때의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사료되므로, 가히 그들 악한 세력들의 치밀한 음모의 전말을 두고 볼 만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부분은 상당한 부분이 필자 주관이 개입되었지만, 대부분의 하나님의 테두리안에서 UFO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는 수준에서 주관을 언급한 것이므로,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③ 라엘리안 무브먼트(Raelian Movement)

'Le Livre Qui Dit La Verite(진실을 말하는 책, 우리나라에선 '진실의 서'라고 제목 붙여져 출판되었음)'는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으며 이 종교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기적들은 외계인들이 초능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성경의 사실(?)의 몇몇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1:26)”라는 말에 그들은 큰 의미를 둔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모두 엘로힘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단어는 복수형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이 고도의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DNA 이용, 인간을 만들어냈지만 우리의 현재 지혜로서는 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에 대한 원천 봉쇄를 해 버린다. 또한, 홍해를 가르는 것은 척력광선(斥力光線: repellent beem)을 이용한 것이고, 만나는 분말합성제로 만들어진 화학식품으로, 그것은 지표에 흩어져 있다가 새벽 이슬을 맞으면 부풀게 된다고 했다. 한편 바위로부터 물을 이끌어 낸 지팡이는 바로 지하수 탐지기였지만, 그 당시 인간은 지능이 많이 발달하지 못하고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불뱀을 보고 병이 난 것은 구리뱀을 쳐다보는 동안 주사기를 가지고 가서 재빨리 혈청을 주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손을 삭발 금지 시킨 이유는, 두뇌가 파동과 사고를 전할 수 있는 송신기이고, 머리털과 수염은 안테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그래서 과학자나 예언자, 현자들의 머리나 수염을 기르는 이유가 그런 맥락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라엘도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다.) 이렇게 말도 안되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해석을 믿는 그들을 보면 정말 그들의 신념과 믿음이 대단하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해석은 비단 구약에서만이 아니다. 라엘이 말하는 예수님은, 성서에 쓰여진 그들의 진실을 지상 전체에 퍼트리고 과학시대가 되어 모든 사실이 인간에게 해명될 때 성서의 기술(記述)이 진실의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사명을 지닌 자로, 지구 여성과 창조자 한 사람가운데 어린애를 갖게 하여 지상에 파견한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텔레파시에 의한 집단 최면법으로 설득력있게 이야기하여 ”군중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 물위를 걷는 것은 반중력(反重力) 광선을 사용, 그곳의 중력을 소멸시키고 그를 지탱한 것이라고 한다. 거기서 ”바람이 그쳤다”는 것은 광선 작동을 껐다는 얘기라고....이러한 예는 한도 끝도 없다.

 

3. 고대문명과 미스테리 사건, 그리고 외계인

많은 UFO신봉자들은 고대의 화려한 유적들을 보며 ”그 당시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스스로 ”외계인에 의해서”라고 결론내려 버린다. 또한, 전 세계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곳을 외계인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는 관점을 가지고 핏대를 세우며 우기고 있다. 많은 예들이 있지만, 여기서 몇 가지만 짚어보도록 하겠다.


①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광활한 태평양에 떠있는 이스터섬의 석상은 세계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지구에서 가장 고립돼 있는 조그만 섬에 현대인들이 경탄하는 '모아이'라는 거대한 석상들이 여기저기 서있다. 어느 민족이 만들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모아이는 바다나 내륙을 향해 어지러이 놓여 있다. 숫자는 9백여개. 일반적으로 키가 3.5~5.5m에달하고 무게는 20t 정도다. 가장 큰 것은 키가 10m, 무게가 90t에 이른다. 대부분 400~1680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11세기 경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1722년 부활절 네덜란드의 제독 야코프 로헤벤이 처음 이곳에 접근했을 때, 그는 매우 놀랐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섬에 거대한 군인들이 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독은 3척의 배를 먼저 섬에 접근시켰다. 그러나 거인은 단순한 석상이었다. 제독이 상륙한 다음날 여러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그들은 보통 사람 키의 백인이었다. 이후 이스터섬의 거대한 석상은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주민들과 밀접한 대화를 나눈 결과 이스터섬에 있는 거석들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그의 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외계의 지적 생물체가 거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니켄은 원주민들이 돌로 된 연장만으로 조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석의 질이 단단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거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많았다. 원주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거석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을 통나무를 만들 숲이 주위에 없었다. 이스터섬의 천연적인 환경은 이런 거석들을 만들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다니켄의 책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비슷한 류의 책들이 수없이 발간됐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모아이를 보기 위해 이스터섬을 방문했다. 초호화 유람선의 일정에 이스터섬이 단골메뉴로 포함됐다. 그러나 이스터섬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한마디로 책을 팔기 위한 장삿속이라고 일축했다. 모아이는 신비에 가득찬 유물이 아니라 이스터섬 주민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정착한 최초의 이주민은 호트 마트아를 추장으로 하는 단이족(귀가 작은 민족)이다. 마트아 추장은 한 여자를 두고 사랑 때문에 벌어진 장이족(귀가 큰 민족)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이곳에 왕국을 세운다. 섬에는 식량이 부족해 고구마를 주식으로 삼았고, 닭과 쥐를 길러 식량을 대신했다. 그러나 장이족이 다시 이곳을 침략해 섬 전체를 지배했다. 이들은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대규모 건설 작업을 감행했다. 모아이 건설이 그것이다. 장이족은 단이족이 농사 지을 시간을 제외하곤 모아이를 만드는 노동에만 전념케 했다. 하지만 장이족은 사람을 잡아먹는 습관이 있어 단이족의 아이를 곧잘 잡아먹었다. 참다 못한 단이족은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번에는 장이족이 싸움에 패배했다. 단이족은 권력을 되찾자, 장이족이 자행한 탄압의 상징인 모아이를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모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다니켄을 비롯한 일부 탐험가들은 모아이가 모두 철과 같이 강한 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모아이의 재질은 화산석이다. 화산석은 돌 연장으로 거대한 석상을 단시간 내에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른 재질을 갖췄다. 조각된 모아이를 지정된 장소에 옮기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하다. 정교한 'Y자'형의 나무로 만든 썰매를 이용하면 적은 수의 인원으로 쉽게 거대한 모아이를 옮길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됐다. 실험에 따르면 6.5km 정도 떨어진 거리를 한달 안에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 한편 운반된 모아이는 지렛대를 사용하면 간단하게 세워진다는 결론이 제시됐다. 현지인들을 동원해 실제로 모아이를 세우는 실험을 재현했는데, 놀랍게도 12명의 인원으로 18일만에 모아이 하나를 세울 수 있었다.  이스터섬에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는 점도 과장이었다. 예전에는 산림이 무성했지만 큰 화재로 모두 불타버려 현재와 같이 황폐한 섬이 됐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모아이는 누구를 대상으로 조각한 것일까?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원주민들의 선조로서 왕이나 고관, 또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모아이의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의문은 말끔히 풀리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이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을까? 결국 이스터섬의 표정없는 거석들은 앞으로도 계속 풀리지 않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숨겨진 비밀이 어떻든 섬의 원주민이 수많은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② 팔랑케의 무덤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책들이 대표적으로 뽑는 유물이다. 과테말라에서 발견된 팔랑케의 뚜껑에는 가득이 조각이 새겨져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그림을 보면(특히 외계인이 있다는 확실한 신념에서 모든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이 뒤로 불꽃을 내뿜는 기계를 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마야족의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긴 문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무지의 소치였다. 그 그림은 우주인의 모형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죽음과 관련된, 단지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이에대해 고고학자들은 아무도 UFO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③ 버뮤다의 삼각지대 (Bermuda Triangle)

194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이곳에서의 비행기 사고가 거듭해서 일어나고 200여 명의 사망자가 생김에 따라 ”이곳은 4차원 세계다, 외계인의 기지가 있는 곳이다.” 등으로 많은 소문이 퍼져 나가고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한 곳이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과거로부터 별탈없이 많은 선박과 항공기들이 오가고 있었으며, 위험에서 탈출해 나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곳이 실상보다 훨씬 더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1995년 한 해에 크고 작은 사고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1백 명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사망한 사고만도 해상과 비행기와 철도 사고 등으로 1번 이상은 있고, 그 이외에도 어선 납북, 유조선 사고 등 온통 사고와 사건 투성이었다. 이렇게 보면 20여 년간 겨우 2000여 명이 사망한 버뮤다 삼각해역은 우리나라 연안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한 면적인데 비하면 오히려 사고가 지극히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통계에 의한다면 한반도가 오히려 마의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형편이다. 한편, '삼각 해역'이라는 것은 순전히 신문 기자가 만들어낸 임의의 지역을 구별하는 말이었는데, 그대로 신비한 지역을 구별하는 단어로 쓰여지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발생한 사고에 관한 한 가지 타당한 결론으로 미국 그레이스대학의 유명한 물리한 교수 도널드 영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은 멕시코 만류가 휘몰아치는 지역이다. 이곳에 추락한 비행기나 움직일 수 없게 된 배가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대서양으로 몰아친 바람에 의하여 파손된 배나 비행기의 잔해가 순식간에 북동쪽으로 떠밀려 쉽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④ 미스터리 써클 (mystery circle)

1980년 여름 영국의 농부 존 스컬은 자신의 밭에서 지름이 18미터에 이르는 완전한 원형을 발견한다. 이것은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외계인이 다녀간 UFO의 흔적으로 소문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양은 1988년 영국에서만 250여개가 발견되었고, 1990년에는 600여개, 1991년에는 1,000여개로 계속 증가한다. 원형의 흔적이 나타나는 지역도 영국에민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호주,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등으로 번져 나갔다.    

과거에는 이런 현상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 소동이 벌어졌던 것일까? 아무튼 이런 와중에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당시 영국의 신문 [데일리 미러]지는 [데일리 익스프레그]라는 신문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데일리 익스프레스]지가 이 둥근 원형 자국에 대한 특종 기사를 따낸 것에 대해 샘이 나서 [데일리 미러]기자들 몇 명이 세퍼드라는 한 농부에게 돈을 건네면서, 밀 밭 가운데 멋진 원형 자국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들의 작업은 [포틴 타임즈]의 봅 리카드 기자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 만약 발각되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원형이 외계인의 흔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1991년 9월 초 런던에서 발행되는 [투데이]지의 그레이엄 브로우라는 기자는 '데이브 촐리'와 '다그 바우어'라는 노인에게 ”지난 13년간 영국 남부 지방에 나타난 30여 개의 원형 자국들은 모두 우리 둘이 만든 것입니다” 라는 자백을 듣게 된다. 이들은 직접 만드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바우어가 중심에 서서 막대기를 잡는다. 그런 다음 촐리가  막대에 맨 쇠 즐을 무릎 높이로 조정해 바우어의 주의를 돈다. 그렇게 하니 다 자란 밀들이 일정하게 쓰러지는 것이었다. 일단 쓰러지고 난 밀들이 낱알의 무게 때문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므로 멀리서 보면 원형 자국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결국 과학자들이 떠들고 보도진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뭔가 특종을 바라고 이상한 것을 접하고자 하는, 인간 심리에 바탕한 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4. 외계인은 돈벌이?!

외계인이 있든지 없든지, 그들의 존재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외계인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싸한 이야기와 사건들이 더욱 퍼져나간다. 서점에 즐비해 있는 UFO와 외계인에 관한 책들을 읽어봐도 그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물론 개중에는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증거와, 사진도 아닌 그림들로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 자신들과도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지난 97년 중앙 일보에 <호황을 맞이한 UFO 관광 사업>이란 제목의 기사를 발췌한 것이다

”뉴 멕시코의 노스웰에서는 다음달 1일부 터 「로스웰 UFO의 만남 97」이란 이름의 색 다른 축제가 일 주일간 열린다. 약10만 명의 관광객들이 모일 것으로 추정되는 로스웰 시는 50년 전 인근에 미확인 비행물체가 추락해 UFO의 메카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정부의 의심스런 행동과 더불어 영화산업은 UFO를 가상의 존재에서 실존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 트렉」과 「더 파일스」등 TV 영화는 물론이고, 최근 짭잘한 흥행을 기록했던 「인디펜던스 데이」는 이번에 UFO축제를 벌이는 화제의 로스웰에서 촬영, 다시 한번 로스웰을 UFO의 메카로 확인시켜 주었다. 로스웰의 주민들은 이제 이러한 각계의 지원(?)에 힘입어, 이제 UFO 관광산업을 일으킬 태세다. 축제기간 중에는 UFO가 떨어진 현장과 시내를 순회하는 1일 투어가 계속되며 각종 강연회가 잇따라 열리고, 2개의 박물관도 내부 공사를 통해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외계인의 형상을 담은 티셔츠와 인형 등 각종 기념품 판매로 부수적인 수입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 3월 「천국의 문」교도들의 집단자살 사건으로 얼마간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모두 극복되었다는 로스웰의 대다수 주민들은 「UFO의 존재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관광축제를 이끌고 있는 로스웰 상공회의소의 빌 포프 소장은 『마치 다른 고장에서 벌이는 도마뱀 경주대회나 로데오 경기등과 유사한 행사』라고 설명한 뒤, 『관광을 유도하는 행사는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로스웰의 이번 축제는 상혼에  걸려 든 UFO와 외계인들이 지역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을런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5. 정리

UFO와 외계인에 대해서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지만, 저들이 주장하는 외계인은 분명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악한 세력의 이용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주장하는 많은 흔적- 이스터 섬 석상이라든지 팔랑케 무덤의 관 뚜껑이라든지 하는 고대 문명도 고고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저들은 미혹당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그대로.....위에서도 밝혔듯이 UFO신드롬은 일종의 말세적 현상이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과학'이란 그럴듯한 이름에 싸여진 허실을 좇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구하고 쉼 없이 말씀을 접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디모데후서 4:3-4)

 


*참조 : UFOs are not extraterrestrial! Modern secular researchers are getting closer to the truth
https://creation.com/ufos-not-extraterrestrial

What really happened at Roswell? 60 years on, what is the truth behind UFOlogy’s holy grail?
https://creation.com/what-really-happened-at-roswell

Alien Life / UFO Questions and Answers
 https://creation.com/alien-life-ufo-questions-and-answers

Do I Believe in UFOs? Absolutel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1/believe-in-ufos

 Are ETs & UFOs Real?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are-ets-and-ufos-real

러시아 '외계인 시체' 정교한 가짜로 판정 (2011. 4. 20.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104/h2011042011171097100.htm

‘외계인 사체 ‘ 닭고기와 빵으로 만들었다 (2011. 4. 20. 조선일보)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4/20/2011042000476.html?multimedia



출처 - 창조지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1

참고 : 5003|4997|4993|4612|4311|2860|3012|311|386|1426|1893|1905|2520|2565|2641|2661|2741|2785|2858|3180|3296|3411|3579|3626|3664|3741|3815|3830|4040|4152|4210|4506|4552|4652|4721|4730|5050|5241

Henry M. Morris
2003-10-0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1

 (Christ Our Life)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shall appear, then shall ye also appear with him in glory' (Colossians 3:4)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창조되는 그 때부터 영광 중에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그 때까지 우리의 생명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경이로운 말씀이다! 그는 태초에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창조하시었다. 그리고 그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시다. 이는 그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기" 위함이다. (사도행전 17:25, 27). 지금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브리서 1:3) 계시기 때문에, 만약에 그가 한 순간이라도 그 신비로운 결속의 힘을 우리한테서 거두시면, 우리 육신은 원자 한 톨까지도 무너져 내려 흙으로 변할 것이다. 그에게 지으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들이, 매일 매일의 생명까지도 주시는 바로 그를 거부하고 무시한다는 것은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리스도의 생명유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 사람은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창조주는 생명을 되찾아주시는 분(사실상 한 분뿐인)이시다. 놀라운 진실은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는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실" 것이다(시편 103:4). 그리만 되면, 우리의 성경말씀이 약속한바 대로 장차 영광된 어느 날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생명의 창조주 (The Creator of Life)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실험실에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간절하게 믿고 있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진화' 라는 신비한 힘이 수 10억년 전에 원시대양의 무생물 미분자들로부터 실제로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믿고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공상과학소설의 개념이지 실질적인 과학의 개념은 아니다. 심지어 단순히 상상력으로 그려볼 수 있는 수준의 생명조차도(말하자면 복사 능력이 있는 단백질 분자, 가령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하는 말이지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질 속에 포함된 정보보다 더 많은 정보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입력하여야 가능할 것이다. 비록 모든 과학지식과 값비싼 실험기구들을 총동원하고서도 생명을 창출한 과학자는 일찍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그런 기도를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딘지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바다에서 오래 오래 전에 무심한 화학성분들이 우연히 생명을 창조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단 생명이 존재하게 된 후에 각기 생명의 종류를 종류별로 재번식하는 경이로운 유전인자 암호체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조차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John Maddox 경(아마도 최근까지 가장 유명한 과학 잡지의 편집인으로 있었던)은 이렇게 인정하였다.

"유전인자 암호체계는 생명의 기원 그 자체가 아직도 모호한 것에 못지 않게 모호하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Nature, January 13. 1994, p.111).

모든 과학적인 증거들은 하나같이 생명은 자연주의적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반하나님적인 억지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의 제일 첫 번째 장은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 창조하시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창세기 1:21). 히브리어(이 절에서는 '생물; creature로 번역 됨)는 nephesh 인바, 이 단어는 그냥 '생명'이라고 자주 번역된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개개의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바로 이 핵심 절에서 히브리 단어 nephesh가 '생령; soul'로 번역되어 있다. 이 두 경우 어느 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생명의 신성한 창조주는 실질적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리스도, 즉 육화이전의 존재이시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골로새서 1:16에 강조되어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씀과 비슷하게 에베소서 3:9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 … "고 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은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가장 명백하게 진술한 대목은 요한복음에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14).

그와 같은 명명백백한 계시의 말씀의 관점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보좌의 두 번째 인격이시며, 영원히 살아 계실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특히 이 지구 위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창조주이심을 의심 없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적 생명과 죽음 (Spiritual Life and Death)

그런데 육신의 생명만이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실 때엔 '생령'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27). 이것은 그들이 육신과 마음(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육신을 입고 스스로가 인간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창조주와의 교감을 지속하는 영원한 친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의 생명은 '영과 혼과 몸의' (데살로니가전서 5:23) 생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다주고 창조주와의 친교관계도 단절되어 버리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경고하였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7). 그럼에도 그가 그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7, 19) 하셨다.

하나님이 경고하신바 대로 아담의 영적 생명은 그가 죄를 짓고 자기를 지은 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자마자 죽게 되었다. 동시에 부패와 죽음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그의 육신에서 작동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930년 후에 실질적인 육신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5:5).

하지만 생명이 죽은 것은 아담뿐만이 아니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린도전서 15:22; 로마서 5:12).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 성질을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유전적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과 같이 아담과 하와에까지 소급하여 물려받게 됨으로써,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천적 범죄의 경향까지 물려받았다. 그 범죄의 경향은 육신의 부패와 죽음으로 지향되는 유전학적으로 선천적인 경향이다. 이것은 결국 죄의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이 돈독한 사람까지도 자기 자신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하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3, 24) 하고 부르짖었다. 비록 청순 무구한 마리아까지도 역시 구세주(하나님 내 구주(누가복음 1:47))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영의 본성에 관한한,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다,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도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 3).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죽음의 육신으로부터 구속하실 수 있는 분이신, 한 구주께서 우리한테로 와 계시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으시다!

 

생명의 구속자 (The Redeemer of Life)

그이 말고는 따로 구속자는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그런데도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 함은 그들이 하나같이 천성과 관습에서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고사하고 어느 누구도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다"(시편 22:29).

오로지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을 구속하시고 살리실 수 있다. 창조주는 또한 바로 그 구속자임이 틀림없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에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사역을 완성할 능력을 가진 자는 하나님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 모순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당신 스스로의 거룩하심의 기준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의 기준에 반대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거부를 그냥 못 본 체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절대 의로운 창조주와 인간과의 사이에 인간의 죄로 인해서 생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만으로 제거될 수도 다리를 놓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연히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창조사역의 목적을 못 이룰 리 없다. 그는 아담에 의해서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타락할 인간의 구속을 위한 장엄한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이 되어 (요한계시록 13:8, 요한복음 1:29), 온전하게 거룩하고 죄 없는 제물로 봉헌될 운명으로 미리 정해졌던 것이다. 제물이 될 흠없는 양은 두말할 여지없이 어느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19, 21).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간증하는 그런 경이로운 교류(交流)는 인간의 발상(發想)으로서는 결코 창출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런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자기 자신과 영원한 친교관계에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우리의 죄에 대한 정당한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당신 자신이 치르셨다.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갈라섰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즉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온전하고 죄 없는 인간(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온 세상의 죄로 인하여 정죄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질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던 것이다.

과연, 우리 창조주는 우리의 구주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창조사역에 대한 그의 목적을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당신의 권속들을 당신과 영원히 갈려 지내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걸었던 그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반드시 구속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구속자만이 창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속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래서 생명의 창조주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죽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창조주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Life's Creator)

이와 같은 신성(神性)의 역설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은 '끝없이' 죽어야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그는 그 자신의 죄 없는 몸으로는 모든 시공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든 육적인 죄의 무한한 무게를, 그리고 그 자신의 죄 없는 정신으로는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혼적인 죄를, 그리고 그 자신의 온전한 영혼으로는 모든 인류의 모든 영적인 죄를 감당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헤어져 있던 그 무서운 세 시간 동안 끝없는 지옥의 고통, 그 자체 속에 있었다. 그런 다음 그 십자가형의 무시무시한 육체적 심정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로부터 떠남으로 겪는 끝없는 영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다 이룬' (요한복음 19:30) 후에야 그의 몸은 온전히 죽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영혼(물론 그의 영혼은 존재를 멈춘다는 뜻으로의 '죽음'을 죽지 않는다)이 떠나 명부(冥府; Hades)로 가서 거기에 영어(囹圄)의 신세에 있는 영들에게 죄와 죽음을 이긴 그의 승리를 선포하는 한편, 그의 시신은 무덤 속에 사흘 동안 안치된 채로 있었다 (베드로전서 3:18-20).

그런 다음에 위대한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적부활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아버지를 떠났던 그 무서운 시간을 제외하고는 결코 죽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의 부활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십자가형 이후 처음 그가 나타나자 그들이 '혼령'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9) 하며 당장에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4복음서는 모두 한결같이 주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매장까지도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그의 구속복음의 핵심(고린도전서 15:1-4에서 개설(槪說)되어 있는 바와 같이)은 그의 매장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이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몸으로 죽어 아담의 죄에 대한 심판이 영혼의 죽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뜻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우리의 생명은 몸과 영과 그리고 혼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생명의 이 세 구성요소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과 보전 사역의 대상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일단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세 시간 동안 그의 아버지로부터의 무서운 별리의 고통을 당한 후 (마태복음 27:46), 그리고 그가 그의 몸을 떠나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잠'을 잠으로써 죄에 대한 빚을 온전히 갚고, 사탄과 죄와 그리고 사망을 당당하게 이기고, 몸과 영과 혼으로 사망에서 일어나셨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행하였던 그의 위대한 설교 중에서 선포한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24)고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사망은 그를 잡아매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용서와 구속을 위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으로 영원히 죽을 수 없다. 일단 그 값을 치른 다음에 그는 무덤 속에 누인 그의 몸으로 돌아와 수의(壽衣)를 벗어놓고 무덤을 나서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사도행전 1:3), 그런 다음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마가복음 16:19).

전체 책들(그 중 많은 책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성(神性)을 간증하는 '수많은 확실한 증거들'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는 기독교 교회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도 분명한 증거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성의 증거가 없었다면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타의 종교들은 제각기 창시자의 가르침 위에 근거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포스트-사도 시기의 언필칭 교회의 아버지들의 기록에서는 물론, 사도행전에 있는 초기교회에 관한 기록에서도 이 사실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그 때에는 그의 체포와 사형집행으로 귀착됐을 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을 확신을 갖게 하고 용기를 북돋운 동기는 그가 무덤에서부터 몸이 살아난 놀라운 부활이었다. 무시무시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의 구속(救贖)을 집요하게 전도하였다. 그들은 그가 항상 살아 계시리란 것을 의심 없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렇게도 확신을 갖게 하였던 틀림없는 증거는 무엇이었을까? 제일 첫 번째 증거는 바로 그 빈 무덤이었다.

제자들 모두는 그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도 역시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를 무덤에 안치하는 것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그 주(週) 첫 날 아침 일찍이 바로 그 무덤에 다시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묵중한 돌이 치워져 있었고, 무덤을 지켜야할 파수 군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찬란한 옷을 걸친 두 천사 (누가복음 24:4)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서 무덤을 떠났다고 단언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 말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하려 달려갔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고 있었던 것 같다━요한복음 20:4-8).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도 역시 무덤으로 달려와서 직접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요한의 감동적인 진술은 이렇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4-8).

이와 같이 해서 요한은 세마포 수의와 머리수건이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안으로 폭삭 꺼져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부활된 몸이 수의와 두건을 벗어놓고 빠져나간 것 말고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고 당장에 인식하였다. 요한은 그렇게 믿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흔들림 없이 증거 한다. 그러나 그것만 전부가 아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몸을 만져보고, 또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 (사도행전 1:3). 비록 오늘날 우리가 그들처럼 그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간증은 확고부동하여 가히 설득력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그를 직접 보았던 자들 중 몇몇의 증언을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사도행전 15:3-8).

바울은 그의 제일 처음 보이심(막달라 마리아에게)과, 맨 마지막으로 보이신 (밧모에서 요한에게) 일을, 또한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제자에게 보이신 일과, 그 밖에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신 일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거명한 사람들(특히 그를 보았던 500여명 중에 아직도 살고 있던 사람들)은 보통이라면 대개는 그가 잘못 알고 하는 소리라고 비난했음 직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서 핍박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격담을 취소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의 나타나심은 개인들에게, 일부는 집단에게, 어떤 때는 밀폐된 실내에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열린 노상이나 언덕 위에서 있었다. 그 많은 나타나심이 결코 환영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환영은 이 모든 나타남과 같이 그렇게 다양한 환경에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목격자들이 다 공범자일 수는 없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자기네의 간증으로 인해서 모두가 다 고통을 받고 있었으면 있었지 결코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목격하였으며, 또 빈 무덤을 보았기에 그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행전 4:3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tracts/christourlife.html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86

참고 : 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640|887

Henry M. Morris
2003-10-0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2 

(Christ Our Life)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활 생명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으로 그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만족하시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온전히 구속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우리도 모두 다 부활할 것임을, 그리고 그와 같이 부활의 몸으로 영광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서 3:21).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린도전서 15:42).

하지만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가능하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신실한 신자(죽은 자 산 자 구별 없이)들은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라고 그는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이 현재적인 생명은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기에 더 이상 살 수 없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는 신앙 속에서 그분 앞에 진정으로 나와서 구속이 필요한 길 잃은 죄인으로서의 우리 신세를 고백한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정죄된 우리의 죄를 그가 대속하신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또한 그의 부활과 우리의 주님으로서 그의 권위를 믿는다면, 그 때에 가서야만 사실상 우리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9-14).

비록 아직은 우리가 우리의 옛 몸 안에 있지만, 우리들의 일상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 생명에 걸맞은 태도로 살아야만 한다는 명제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그의 재림에 맞추어 이 낡은 몸이 곧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에 싸일 것이라는, 즉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로마서 8:29) 라는 그의 확실한 언약을 받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약속된 영광의 미래에 어울리게 살아야만 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에 관한 놀라운 증언들과 약속의 말씀들이 수없이 많다━하도 많아 여기서 그 모든 말씀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몇 말씀만 주목하기로 하자. 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부활하시어 영광 중에 그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5,6)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을 우리(이미 우리가 그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약속 안에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 아직도 계신다면 그가 사셨을 삶과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리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로새서 3:1-3).

 

영원한 생명 (Everlasting Life)

위에 인용된 절(골로새서 3:1-3) 바로 다음 절은 이 글의 주제인 골로새서 3:4 이다. 그런데 이 절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인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지금 우리는 '위치상으로는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지구에 다시 한번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인격 속에서 그와 함께 우리도 나타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이 말씀은 그의 약속인즉 그는 약속을 식언할 수 없으시는 이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3)고 그는 말씀하셨다.

영광에 싸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된 생명처럼, 약속받은 우리의 부활된 생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양'에 관해서, 그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라고 약속하신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우리는,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영생을 가졌음을 뜻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한테 이렇게 확언해 준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뜻한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그들이 이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크리스천이 몸으로 죽었을 때에, 그의 시신은 한 동안 무덤 안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 안에 있는 영과 혼은 그 잠시 동안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혹은 그 여자는)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그는 또 다른 서간문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립보 1:23) 라고 떠나기를 원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음을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에서 존재하는 때는, 그 어떤 멈춰진 활력의 '혼-수(魂-睡)━몸을 떠난 영혼들이 서로를 볼 수도 없고 교통할 수도 없는━상태로 있는 무의식의 시간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 상태의 영혼의 존재를 결코 '더 좋다' 할 수는 없다. 명부(冥府)에 들어간 어느 부자와 나사로(Lazarus)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천국에서의 영혼의 존재가 그렇지 않다(누가복음 16:19-31)는 것을 확실히 하셨다. 물론 '아버지 아브람'과 '나사로'는 아직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직은 죽지 않았기에 그들을 '낙원'(누가복음 23:43)으로 함께 들어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의식할 수도 있었고 또 서로 교통할 수도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천국에서 살고 있는 기간 동안 그 어떤 인식하는 영적인 몸을 확실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천국에서의 일을 모를 수는 없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이와 같이 해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1).

그러나 이 단계의 미래 생명은 단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라들을 심판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구로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구속되어 천국에 머물던 모든 남자와 여자는 그를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데살로니가전서 3:13).

그 때에 위대한 부활의 날이 열린다! 성도들의 영적 몸들은 그 어떤 위대한 기적적인 교류(交流)를 통해서 그들의 죽은 몸으로 돌아와 그들의 주와 같이 변모하고 영광을 입을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대천사의 목소리로 큰 한 소리 외치면서 하늘에서 강림하실 것이다. 그리 되면 제일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살아서 남아있던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 주님을 만날 것이다. 그리 되어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데살로니가서 4:16, 17).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린도전서 15:51, 52).

그리스도께서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에베소서 1:14)는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오실 때에 성경에서 예언된 천국과 지구에서 일어날 일들은 이 책자가 다루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 지금으로서는 그 영광된 부활의 날에 일어날 위대한 일들 중 제일 먼저 어느 순간에라도 그가 오실 수 있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오시는 순간을 위해 우리는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성경은 그의 강림이 가까워졌다는 흔적을 수없이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의 강림에 앞서 일어날 일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만약에 그런 것이 언급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다리지는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그를 기다리기를 원하신다. 그 어떤 반-그리스도나, 어떤 고난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그 말고 다른 어떤 것도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사람들은 그가 오셔서 그 어려움에서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기대하는 데 그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주된 동기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보다는 우리는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오래전에 가르쳐준 기도의 말씀대로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마태복음 6:10)를 원하여야 한다. 그의 오심과 연관되어 여기 이 지구 위에 그의 온전한 나라가 서고 결국 창조에 담긴 그의 영광스러운 목적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오심을 바라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디모데후서 4:8).

그의 영생의 선물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세세토록 진정으로 놀라운 시간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그 때가 바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요한계시록 14:13) 쉬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때는 또한 주님이 구속하신 피조물들 안에서 주님을 위한 봉사가 영광되고 만족스러운 것이 되는 시간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계시록 22:3),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할"(마태복음 25:21, 23)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시며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히브리서 12:2) 행하셨다.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7).

한편 우리가 그의 오심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우리들에게 여기 이 지구에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누가복음 19:13) 그리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 11)하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기다리며' 또 '그의 나타나심을 갈망하는' 동안, 우리가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하는데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것을 되뇌어야 한다. 즉,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끝으로, 그를 구속의 주로 영원한 생명의 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은 마지막 초대의 말씀을 보냈다. 즉,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개인적인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는, 즉 그의 영적인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하셨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tracts/christourlife.html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87

참고 : 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640|886

한국창조과학회
2003-10-04

하나님이 창조한 가정 - 참된 가정의 부모와 자녀 관계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는 두 가지 밖에 없으니 가정과 교회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창조사역의 완성이며 교회는 구원사역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교회다. 가정교회가 건전하면 모든 유형의 교회도 건전하게 유지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으로써 친히 인류 최초의 가정을 이루어 주셨으며 성경말씀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가꾸는 방법을 말씀하고 계신다.

가정은 두 가지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첫째가 남편과 아내, 부부의 관계이며 둘째는 부모와 자녀 관계이다. 이 두 관계에 대한 기본 원리는 물론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신 기본 원리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성경은 부모와 자녀관계의 중요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1∼4)

대개 이 말씀은 주로 부모를 공경할 자녀의 의무를 강조할 때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또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쌍방간에 어떤 신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의 권위의식으로 자녀들을 대한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일단 자녀를 노엽게 만들면 그 다음에는 대화가 단절되고 마음의 문이 닫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자녀교육의 원리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먼저 자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자녀의 마음을 얻고 그들과 대화하며 고민을 들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않는 한 신앙적인 교육은 시작될 수조차 없다.

신실한 신앙을 가졌어도 가정교육에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데 급급해서 종국에는 자녀를 노엽게 하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일단 마음의 문이 닫히면 자녀들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에서 창조의 원리를 따라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이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정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까지 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서 자랐다. 이 때 받았던 가정교육이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웠으며 평생의 작업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목수 인 아버지로부터 나무를 베고 다듬는 일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건해졌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 나무 위에 매달려 죽을 것'이라며 미래의 십자가를 준비했다.

예수님은 자라면서 지혜 또한 자랐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지혜란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알고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며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아는 지혜이다. 인간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며 예수님은 자라면서 가정에서 이 지혜를 배워갔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항상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며 자라도록 했고 그 결과 예수님은 항상 은혜로 충만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요셉 가정에 보내심으로써 그곳에서 훈련받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하도록 부모에게 맡기셨다. 부모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을 심어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가정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가기만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은 일반 학교 교육에 맡기고 가정은 단지 쉬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모습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녀들을 어린이집으로,유치원으로,학원으로 내몰게 한다. 자녀를 하나님 말씀 안에서 양육하는 부모의 역할을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부모는 학비를 조달하거나 생활편의를 도모해주는 아저씨며 도시락이나 싸주는 아주머니 노릇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 자녀를 양육하는 사명을 학교의 선생님이나 학원에 넘겨주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기 자식을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가정은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는 곳이 돼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 부정적인 말과 꾸중보다는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어렸을 적 부모의 말 한마디는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아무리 부족해도 '너는 앞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신성한 자존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럴 때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인격이 형성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모는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녀들 때문에 부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얻는다. 그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 할 수 없다. 자녀는 부모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다.

이렇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자녀에게 부모가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실상 부모가 자녀에게 베푼 것보다는 자녀로부터 얻는 기쁨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부모, 그 부모를 자녀는 공경하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가정의 모습이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마음을 얻은 후에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 부모에게 순종하며 감사하는 자녀가 있는 가정이다. 그 안에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어진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부모와 자녀 관계이다.



출처 - 창조지, 제 131호 [2002. 5~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08

참고 :

송만석
2003-10-03

과학의 날을 보내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올해에도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은 세상의 오묘한 질서를 조금이라도 더 밝혀내고 사람들의 생활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각종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이 땅 곳곳에서 수고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은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동일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과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해 주는 귀한 지적 산물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학의 발전과 이를 통해 도래하게 될 미래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이제까지의 눈부신 발전으로 일반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신뢰를 받기에까지 이르렀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터인데, 왜 이런 시각이 공존하는 것일까요? 사실상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 빈부격차의 심화, 가정의 파괴, 범죄의 증가, 치열한 경쟁 등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것은 도대체 왜입니까?  

과학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인류의 삶을 더 경쟁적이고 비참하게 만든 것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발전에 부정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잘못된 이론들 때문입니다. 진화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생명의 우연한 발생과 진화에 의한 새로운 생물체들의 계속적인 출현에 대해 그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과학적인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학의 이름으로 무신론을 조장,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이 통치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 결과,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것이 역으로 이용되며 세상의 죄는 더 깊어지고, 더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인종 차별, 민족주의 등이 진화론의 영향을 입어 정당화되기도 했던, 인류역사의 비참했던 과거 역시 이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창조주를 거부하고 사람들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자신의 욕심을 좇아 사는 것이 진화론만의 영향은 아니지만, 진화론과 같은 이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을 정당화시키며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화론적,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은 과학자들에도 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 발전의 당사자들인 과학자들이 윤리적인 문제나 잠재적 위험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준비 없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연구를 늦추거나 중단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생명과학 분야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람이 될 배아를 실험용으로 사용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지만, 돈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만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들 가운데에도 이를 이용하여 큰 수익을 올려 보려는 이들이 있으며, 또 이러한 악한 의도와는 상관없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의 혜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들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진화론적 영향을 보다 명백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화론적 토양―생명에 대한 무목적성과 우연성 위에서 자라나는 생명과학기술의 발달은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해 본성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역시, 똑같은 무신론적 바탕으로는 궁극적인 반박이론을 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과학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어서, 그 발전이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며, 부정적인 미래를 도래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학의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으며, 과학 지식을 통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우리가 동참하고, 만드신 그 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화론과 같은 왜곡된 과학이 존재하는 데에 있는 바,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잘못된 생명기원관을 변화시키고,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그 본연의 선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모든 무신론과 잘못된 인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인류에 발전이 되는 과학이 되도록, 생명을 죽이는 과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과학이 되도록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이 일은 몇몇 소수의 기독과학자들만이 아니라 선교사나 목회자로부터 일반 학생, 주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각계 각층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4-5)

21세기 첫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과학의 발전이 지금까지 인류에 기여한 큰 공헌에 감사하면서, 이제 과학이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인류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봉사하는 날이,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3/b13c3.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1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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