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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인류 역사의 회고 3 : 유럽,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미국, 멕시코, 페루, 남아메리카

미디어위원회
2005-07-13

인류 역사의 회고 3 

: 유럽,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미국, 멕시코, 페루, 남아메리카

유종호


유럽 대륙

유럽 본토에 있어 BC 3,000-1,000년 기간에는 발달된 문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러시아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정착민의 증거가 포착되기는 하지만, 북부 지역의 유목민들은 숲과 초원에서 좋은 사냥 여건과 식량 확보가 손쉬웠기 때문에 이 지역들은 조기에 발달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인디언들과 함께 북미주로 이동했다. 진화론자들은 수십만 년이나 수백만 년 동안 동굴과 엉성하게 지은 거처에서 살면서 진화해왔다고 가정되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유랑했던 관계로 소집단을 이루고 근친혼을 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보하며 조상들의 많은 능력과 노하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의 남단에 살던 원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찰스 다윈이 그들을 보았을 때 인간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퇴보해 버렸다.

사실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은 육체적으로 현대인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찰스 버릿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세계로부터의 신비들' 이라는 책에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원래의 크로마뇽인은, 뇌 용적이 현대인보다 크다.”고 했다. 이들은 유럽을 방황하던 바벨탑 후손임이 확실하다.

인류의 초기에 유럽의 대부분 특히 북부에는 거의 도시나 화폐나 정부나 문자가 없는 부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생계는 사냥, 수렵, 채집 등에 의하거나 곡식, 채소, 목축 등의 간단한 농사를 지어서 꾸려갔다. 장인(匠人)들은 항아리를 굽고 청동 기물을 만들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직조(織造), 피혁 작업, 도자기, 자수(刺繡) 등의 작업이 행해졌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동굴에서 거주했다는 주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동굴과 바위 은신처는 매우 단기간 동안에 문명인들이 사용했다.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콜로라도의 남서부나 다른 남서부 주들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그들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개방된 곳이나 동굴 입구 인근에서 살았다. 그들은 유랑하는 동안 영국의 전설적인 로빈 후드나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천막 등과 같은 이동식 거처를 가지고 다녔다.

어떤 동굴에서는 들소, 순록, 말 등의 그림들이 발견된다. 프랑스의 루싹 근처의 동굴에는 모자를 쓰고 핸드백을 들고 현대식 옷을 입은 젊은 숙녀의 스케치가  있다. 원시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발견된 모습이다. 선사 시대 역사 작가인 로버트 실버버그는 소위 석기시대 그림일 가능성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동굴 벽화들은, 원숭이보다 조금 작은 제4기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위대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멋진 차림의 신사숙녀들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즉 원시인은 연속성과 종교와 미술을 가진 조직된 사회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최초 거민들이 기독교 시대까지는 다시는 이루지 못할 만큼 예술적 성취를 높였음을 우리가 알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야만으로부터 발흥하여 꾸준하게 발전되어 왔다는 이론을 반박한다.”


영국

영국과 북프랑스에서 소위 원시인들이 이룩했다는 믿을 수 없는 많은 위업들을 발견한다. 그 위업들은 진화론자들을 심히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거석(巨石)들 또는 일반적인 영어로 영국과 프랑스의 거대한 바위들이 있다.

내셔날 지오그래픽이 펴낸 '고대 세계의 신비들' 이라는 책은 이 바위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BC 4,500년경의 것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그로부터 약 3,000년 후의 것이라고 주장 한다. BC 4,500년경은 그 거석들이 대홍수 이전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고 노아홍수의 퇴적암이 그것들을 덮지 않았다고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바위들은 선돌이라 칭하는 낱개로부터 거석주군(巨石柱群)이라 부르는 거대한 돌무더기 집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 곳에 가장 많은 숫자의 선돌이 있는 곳은 프랑스의 브리타니에 있는 카르낙 근처에 있다. 3,000개 이상의 바위들이 2.5마일에 걸쳐 11-12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그랜드 멘허라고 하는 한 선돌은 무게가 380톤이고 벼락을 맞아서 다섯 조각으로 부서지기 전에는 그 높이가 약 69피트(21m)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거니와 어떤 원시인이 어떤 기계의 도움도 없이 이렇게 거대한 바위를 움직이고 세울 수가 있겠는가? 이것들이 우리들이 오늘날 의아하게 여기는 소위 원시적(?)인 조상들의 놀라운 위업들이다.


아프리카

아프리카에는 이집트 이외에는 홍수 후에 발달된 문명이 없지만 항상 지속적으로 수렵, 사냥, 과일과 다른 식량의 채집을 하기 위해 이동해 다녔던 아프리카 유랑 족들이 있었다. 거대한 사하라 사막 때문에 남쪽으로 이주해 와서 문명을 형성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리키와 다른 진화론적 인류학자들이 찾아내고 있는 원숭이와 다른 동물들과 인간들의 뼈들은 분명히 가공스럽고 어마어마하고 진흙투성이이고 거칠었던 노아 때의 홍수 속에 묻혔던 동물들과 인간의 화석들이다. 이런 화석들은 어떤 계기로 특히 동부 아프리카의 리프트 계곡에서 노출되었다. 그곳에서는 콜로라도 강 유역에서처럼 홍수 퇴적암의 양쪽 벽이 드러났다. 아프리카가 농업과 산업분야에서 발달된 것은 유럽인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겨우 최근의 1,000년 내외에 일어난 일이다.


아메리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바벨탑 사건 후의 어느 때에 인간들이 2개의 루트를 따라 유럽과 아시아로부터 아메리카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확실한 것은 베링해를 수 마일 가로지르는 루트였다. 그 길은 오늘날에도 에스키모들이 어렵지 않게 건너다닐 수 있다. 그곳으로부터 남녀의 사람들이 보다 따뜻한 미국과 중앙아메리카로 단기간 동안에 남진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남아메리카를 통과하여 계속 유랑하다가 길을 따라서 문화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10,000년 이상이나 묵은 야영지의 유적들이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은 이 대륙에서 놀라운 속도로  번창할 수 있었다. 원숭이 화석에 대해서는 어떤 증거도 없다.

이집트나 수메르 기타 지역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홍수 이후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한 후, 미노아나 페니키아인들과 같이 쉽게 보트를 만들어서 콜럼버스보다 수백 년 전에 태평양을 횡단했다. 배를 타지 않았을지라도 태평양의 조류를 타고라도 북대서양 해류를 따라서 유럽으로부터 상당히 쉽게 여행이 가능했을 것이고, 흔하게 불던 바람을 타고 남아메리카의 북동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인도 제도를 지나서 칼리브해 지역에 도착했고, 도중에 걸프만 국가들, 중앙아메리카, 북부 남아메리카에 상륙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의 동전 저장굴이 어떻게 베네수엘라에서 발견되었고, 수백 건의 고대 페니키아 문헌들이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1986년 10월 31일에 북 미네소타 주 소재 하부 레드호수 인근에서 자갈을 채취하던 노동자들은 인간의 뼈들을 발견했다. 주의 한 고고학자는 그 뼈들이 약 4,000년 전에 매장된 인디언의 것이라고 말했다. 대홍수 이전은 물론, 바벨탑사건 이후에 곧바로 사람들이 북아메리카에서 쉽게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

미국에 대해서 말하자면, 1492년에 콜럼버스가 최초로 미국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AD 1,000년경의 라이프 에릭슨이 발견했었다. 최초로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횡단해 와서 상륙한 자들은 프랑스와 영국과 기타 유럽대륙에서 그렇게도 큰 바위들을 세웠던 사람들의 일부였을 것이다. 뉴헴프셔주 북 살렘에 있는 신비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선사 유적지에는 200피트(60m) 높이의 언덕이 있고, 그 정상에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이 배열된 22개의 큰 바위들이 있다. 유사한 대형 바위들의 나열들이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된다. 이 바위 중에 어떤 것들은 조각이 되어 있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아스텍이나 마야나 톨텍의 문명보다도 더 오래 된 것 같다. 그와 같이 거대한 바위들은 페루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멕시코

멕시코의 테후아카 계곡에는 수천 개의 동물 뼈들, 인공적 가공물, 70구의 사람 뼈, 많은 식물들 특히 초기 옥수수의 잔해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연대는 대략 BC 5,200-3,400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의 멕시코 사람들은 일종의 그림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책이나 문헌들 일부가 아직 남아 있으나 그들의 그림문자는 거의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미국의 서남부, 중남미 등에서 발견되는 문명의 증거들은 멕시코의 아스텍, 과테말라와 유카탄 반도의 정글에 있는 마야, 그리고 안데스 페루의 잉카 등 3곳이 아주 뛰어나다. 이들 지역의 문명의 성취도는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과 비견된다. 마야인들은 뉴욕에 최초의 마천루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미주에서 가장 고층 건물이었던 사원을 과테말라의 티칼에 세웠었다. 이 가파른 탑 구조의 사원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수백 년 동안 숲 속에 은폐된 채 숲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200피트(60m) 이상이나 높이 솟아 있다. 이 사람들의 사원들은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로 표현되는 언어체계를 발전시켰으나, 아직껏 아무도 그것을 해독할 수가 없다. 그들의 수학 작품들은 해석이 되는데, 그들의 종합적인 필기체계는 그림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들의 책들은 나무껍질을 두들겨서 만든 종이에 씌어졌다. 1562년 스페인 사람들이 점령한 후 유카탄의 대주교는 그들의 책을 악마의 작품이라고 해서 파괴시켜 버렸다. 미국의 인디언들과 함께 이들 중에는 자기들의 조상들이 동쪽에서 바다로 "거대한 카누를 타고 수 주 동안 떠내려 왔다”는 확신과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유럽과 아조레스제도와 칼리브제도 사이에서 섬의 융기 현상이 일어났었다는 확신과 일치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 모든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채소들을 재배했는데, 그들이 가장 꾸준하게 재배했던 곡식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생산성이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발전된 옥수수였다. 이들은 또한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것보다도 정교한 달력도 발명했다. 그리고 달과 행성들과 별들에 대한 지식에도 정통하였다.


페루의 잉카 문명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페루 안데스 산 지역의 잉카 문명이다. 이들은 대 도시들과 관개(灌漑) 시설과 고속도로와 놀라운 구조물과 모든 종류의 예술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잉카문명 이전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페루와 볼리비아에는 잉카시대 이전에 사원들과 요새들과 궁전들이 50-300톤짜리 바윗돌로 건축되었다. 이 바윗돌 중 어떤 것은 직사각형이고 어떤 것은 10-20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바윗돌과 바윗돌은 서로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기계 기술자의 가장 엷은 측정 게이지도 돌덩이들 틈에 끼워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돌덩이들은 치밀하게 조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돌덩이들은 시멘트를 사용치 않고 쌓아졌다. 이런 돌덩이들이 어떻게 절단되고 산위로 운반되어 완벽하게 쌓아 맞춰졌을까 하는 것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바윗돌들을 정확하게 장착하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벽에다 몇 번이고 붙였다 떼었다 했을 것이다. 이 모든 바윗덩이들은 정밀하게 맞물려 있는데, 따라서 이 모든 체계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잉카문명 이전의 요새들 중의 하나가 페루의 오일란타이탐보(Oilantaitambo)에 있다. 150톤이 넘는 돌덩이들은 약 7마일 떨어진 산에서 켜가지고 운반해온 매우 단단한 안데사이트(安山巖)로 만들어졌다. 어떤 경우에는 1,000피트(300m)의 고도에서 이 돌덩이를 켜서 산 밑으로 내리고 1,000피트 높이의 절벽이 있는 캐년을 건너 운반되고 또다시 1,000피트의 산정으로 끌어 올려서 요새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기술과 작업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들에 대하여 나중에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안데스산맥 지대에는 오늘날 우리들을 당황케 할뿐인 그와 같은 요새들과 복합 구조물들이 더 있다. 포장도로와 산맥을 횡단하는 도로망,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들, 성채들(citadels), 지하 공간들, 대형 수조(水槽) 등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들은 운반에 필요한 모든 장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필수적인 것 한 가지 즉 손수레, 짐마차 또는 전차에 필요한 바퀴는 없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운반용 바퀴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바퀴가 있기는 했다. 왜냐하면 어린이용 멕시코 장난감에는 바퀴 달린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만일 이 사람들이 외견상으로는 불가능한 듯한 건축물들을 세우고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들에 바퀴를 달았다면, 그들은 발달된 수송 장치들에도 바퀴를 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학자들이 대홍수의 위력과 그 결과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바퀴들과 기술이 깃든 수많은 인공품들을 수천 피트 깊이의 석회암 지층 바닥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1967년 4월 10일자 신문들은 콜로라도주 로키포인트 광산 지하 120m(400피트)에서 은 광맥에 끼어 있는 인간의 뼈와 구리로 만든 4인치짜리 화살촉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많은 것들과 화석들이 지표의 수백 수천 피트 아래에서 발견되어 오고 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발달되었고 지혜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페루의 잉카문명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물건들이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의 발달된 단계를 보여 주는데, 그 이유는 백금을 녹이는 데에는 섭씨 1,750도의 고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나게 높은 온도를 요하는 고도의 제련 지식을 필요로 했다.

리마의 250마일 남쪽에는 페루의 나스카 계곡이 있다. 계곡 전체는 거대한 동물 형체들로 뒤덮여 있다. 즉 거미들, 새들, 원숭이들, 거북이들, 뱀들, 물고기들, 심지어는 고래와 인간의 거대한 형상들이 있다. 삼각형 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와 도로들을 닮은 짧은 선들도 있다. 비행장과 같이 보이는 띠들도 있다. 이런 선들과 형체들은 관찰자가 바로 그들과 일직선상에 서있지(standing directly in line with them) 않으면 지상에서는 거의 식별할 수 없다. 몇 피트만 옮겨가도 선들은 나머지 사막의 바닥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선들은 지상에서는 쉽사리 보이지 않으나, 비행기에서는 분명히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지상 270마일 궤도를 비행하는 스카이 렙 위성에서는 잘 보인다.

페루 파라카스 인근의 탑과 같은 절벽 위에 안데스산맥의 칸델라브라 라고 불리는 800피트(240m) 길이의 조각을 태평양 밖 멀리서 볼 수가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것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온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그림은 나스카에 있는 항아리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하나는 노랑으로, 하나는 하얗게, 하나는 검게, 하나는 갈색으로, 그리고 하나는 붉은 색으로 된 다섯 소녀들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이 고대 인류들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족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페루에 있는 이 모든 고고학과 건축술은 진화의 이야기같이 들리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과학적으로 참인 사실들이다.

페루의 잉카문명과 다른 아메리카의 문화들은 건축과 미술과 또한 농업기술의 분야에서 매우 발달되었지만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기하는 체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잉카문명이 그들의 생각들을 기록함에 있어 가장 근사했던 것은 결승문자의 사용이었는데, 결승문자는 길이와 색깔과 가늘기가 각각 다른 일연의 끈들로 매듭들이 맺어져 있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다양한 조합으로 된 끈들과 매듭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정보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들을 통해서 구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 같다.


남아메리카의 최남단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으로 내려가서 수천 년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찰스 다윈이 세계 일주 항해 중에 만났던 인간의 한 종족을 만나게 된다. 다윈이 원시인 바로 다음 단계라고 여겼던 이 사람들은 인간의 문화적 유산이 후대로 가면서 퇴보된다는 주장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그들의 퇴보는 그가 세계일주 항해를 한 후에 그의 마음속에서 발전되었던 진화 사상을 확실하게 논박하고 있다. 이 진화론은 나중에 진화론자들 중에서 소위 인간은 원숭이 같은 동물에서 발달된 것이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이 사람들과 다른 많은 원시적이고 미개한 사람들의 문화유산들이 진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퇴보는 최근 수십 년 사이 사물의 속도가 증가하는 가운데서 일어났다. 의료분야에서 행해진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도 옛날부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죽는다.

 

*참조 : A possible post-Flood human migration rout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9_1/j19_1_65-72.pdf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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