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트다운인 이야기 : 과학적 사기극의 대명사

필트다운인 이야기 : 과학적 사기극의 대명사 

(The Story of Piltdown Man)


     진화론의 역사는 속임수와 사기극들의 나열이다. 여기에 그들 중 하나가 있다. 진화론은 신화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 증거들이 분명히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다른 아무것도 이 수많은 증거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내용 : 필트다운인 이야기

1. 속임수를 위한 준비 - 작업을 위한 시간과 생각.

2. 발견의 공표 - 잃어버린 고리가 발견되었다.

3. 항의들은 무시되었다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4. 사기극임이 폭로되다 - 과학 탐정가들이 속임수를 밝혀냈다. 

이 글의 재료는 고대인이라는 책에서 발췌되었다. 이름 앞의 별표(*)는 창조과학자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을 나타낸다. 책들 안에 있는 4,000 개의 인용구들중 단지 164 개만이 창조론자에 의한 것이다. 당신이 웹페이지의 고대인이라는 글을 읽는다면 다음의 글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간에 필트다운인 사기극에 관한 이야기는 진화론적 증거들에 대한 역사에서 위대한 기념비로 영원히 서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사기극들은 지금도 계속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한참 후에 거짓이 밝혀지는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필트다운인 사기사건은 원숭이들로부터 사람이 진화하였다는 위대한 증거이며, 확실한 사실이라고 수십 년동안 선전되고 선언되었었기 때문에, 사기극인 것이 마침내 밝혀졌을 때 매우 큰 충격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여기에 두개골 위조범의 이야기인 필트다운인 이야기가 있다.

 

1. 속임수를 위한 준비

작업을 위한 시간과 생각.  

석세스(Sussex) 주의 변호사인 *찰스 도슨(Charles Dawson)은 어느 날 영국의 플레칭(Fletching) 지역(석세스주), 필트다운의 한 농장 길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길이 그 지역에서는 보통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갈색의 자갈들로 보수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되었다. 돌들의 출처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그것들은 농장의 자갈층에서 파내어졌다는 것을 듣고 놀라게 되었다. 주변의 누구도 이 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그는 이 이상한 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내려고 그는 결심한다. 

1912년 12월경 필트다운인 발견에 대한 회고에서 도슨은 그 길을 걸었던 것은 수년 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아마 1909년 또는 1910년이었을 것이다. 셜록 홈스 탐정소설을 쓴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경 이라면 몰라도, 뼈들이 발견되고 사기극이 일어난 장소에 대한 도슨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짧은 기간 후에 도슨은 자갈 웅덩이를 방문하였고(이 웅덩이는 Uckfield와 Haywards Heath 사이 중간쯤에 위치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도슨이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던 집으로부터 불과 수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두 사람이 그곳을 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혹시 어떤 뼈들이나 화석들이 나오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았고, 그들은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그러한 것들이 발견될지도 모르니,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얼마 후 아침에 도슨은 다시 그 돌무더기 옆을 우연히 걸어가게 되었다. 그때 작업중 돌무더기 속에서 사람의 두개골 조각을 발견하였다는 한 흥분된 작업자를 만났다. 후에 기술한 것에 의하면 도슨은 ”그것은 30만 년은 된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비정상적으로 두꺼운 두정골(parietal bone)의 작은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한번 살펴보았음에도 그러한 설명을 해내었다.

도슨은 바로 조사를 실시했으나, 자갈웅덩이에서는 다른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그곳에서는 아무 발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11년 가을에 도슨은 그 장소에서 다른 커다란 뼈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두개골의 앞쪽 부분의 일부분이었고, 왼쪽 눈썹 위로 연장된 눈마루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우연히 자갈웅덩이를  방문했는데, 그 뼈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얼마 후 그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지질학 분야 책임자인 아더 스미스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자갈웅덩이에서 발견한 턱뼈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우드워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도슨이 그곳을 그냥 팠는데 그것이 있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 ”놀랄만한 발견”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는 이미 둘 다 죽었다. 여러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화석인간의 뼈를 발굴하기 위한 작업들이 있어왔지만, 네안데르탈인처럼 그들 중 어느 것도 증거로 사용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들 모두는 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수백만 년 된 반은 사람이고 반은 원숭이인 두개골과 턱뼈를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영국과 같이 늘 습한 기후에서는 무엇보다도 발견된 장소가 중요한데, 습한 곳에서 뼈들은 50년도 안되어 썩어 분해되기 때문이다.

우드워드는 욕심이 많은 고생물학자였으며, 많은 물고기화석에 대한 논문들을 써왔었다. 도슨과 우드워드는 이 뼈들에 대해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해부학자인 *아더 케이스(Arther Keith)가 참여하게 된다. 케이스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몇몇 고전적 작품들의 저자였던 그는 의학박사, 왕립대학 외과의 특별회원, 왕립 인류학협회 회장, 과학진흥을 위한 대영협회와 해부학회 특별회원 등의 존경할만한 여러 자격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여로 더욱 많은 이야기들이 있게 되었다. 그때 새롭게 명성을 얻고 있던 뇌전문가인 *그라프톤 엘리오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가 이 모임에 가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과학자들이 함께 모여 팀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첨예한 대화의 주제는 몇몇 뼈들이 그곳에 모두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래쪽 턱뼈는 인간의 두개골의 것으로는 너무 컸고, 심각하게도 위턱은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아래턱의 한 부분에는 중요한 송곳니(canine teeth)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턱관절(jaw hinge)의 짝인 부분들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들은 1)아래턱이 사람의 것인지, 원숭이의 것인지, 아니면 원숭이와 비슷한 것인지를, 2)아래턱뼈가 위의 두개골에 적합하게 들어맞는지를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음)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것들이었다.

두개골은 단지 몇 개의 조각뿐이었다. 이것은 뇌용량의 크기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각들은 큰 뇌두개에 적합할 수도 있었고, 작은 것에 적합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케이스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열렬한 진화론자였지만, 우드워드가 뇌용량을 단지 1,070 cc정도라고 생각했을 때(사람의 평균 뇌용량인 1,500cc와 원숭이의 600cc의 중간 정도로), 그는 1500cc 정도의 뇌용량임을 이론화하는 증거들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었다. 몇몇 현대인의 것보다도 약간 큰 뇌용량이라는 케이스의 평가는 큰 턱뼈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평가는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그때 제쥬이트 신부이지만 열렬한 진화론자인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이 그 자갈 웅덩이에서 원숭이의 것과 같은 송곳니를 발견한다. 케이스는 이것으로 그의 주장을 굽혔고, 뇌용량을 1200 cc에 동의하게 된다.

단지 몇 개의 볼품 없는 뼈조각들을 가지고 과학자들은 필트다운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렸던 전체의 머리를 재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잃어버린 고리(long-awaited missing link)' 를 찾아냈다고 선언하면서 기고만장하여 나팔을 불어댔던 것이다. 라틴식 이름은 항상 어떤 것을 입증한 것과 관련지어지기 때문에, ”도슨의 새벽 사람(Dawson's Dawn Man)” 이란 뜻을 가진 Eoanthropus Dawsoni 라 명명되었다. 그 이름은 모든 것을 건전한 과학처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2. 발견의 공표

잃어버린 고리가 발견되었다.

1912년 12월 16일에 이 발견은 지질학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언론들은 흥분하였고, 신문들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팔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1913년 8월 29일 테일하드(Teilhard)는 온밤을 도슨과 같이 지내며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에 그와 같이 필트다운 구덩이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두 개의 잃어버린 송곳니를 발견했다. 그것은 웅덩이 근처 자갈 아래에 있었다. 늘 안개가 끼는 영국의 습지대에서, 흐르는 물들에 의해 씻겨져 가며 30만년 동안 도슨과 테일하드가 발견할 때까지 아름답게 보관되어진 그것들을 상상하여 보라.

이것은 지질학협회에 1913년에 정식으로 보고되었고, 결정적인 증거의 세 번째 조각이 되었다. 이 이빨들과 함께 스테고돈(stegodon, 코끼리 일종)의 이빨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 뼈들은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공하여주었기 때문에 도움을 주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특별한 이 스테고돈 이빨을 분석했는데, 그것은 매우 높은 방사성 농도를 함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0.1%의 uranium oxided가 유입됨). 그 방사성 수준은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너무 높은 수치였다. 그것은 매우 건조한 기후인 튜니지아(Tunisia)의 익케울(Ichkeul)에서 발견되었던 스테고돈의 이빨에서 발견된 수치와 동일하였다. 우연히도 1906년에서 1908년까지 탐욕스러운 화석 수집가였던 테일하드는 북아프리카에서 살았었고, 스테고돈의 화석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던 북부 튜니지아의 비저타(Bizerta) 근처 익케울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몇몇 과학자들은 턱과 두개골은 같은 개체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몇 두개골 조각은 모양과 크기가 의도적으로 어떤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정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실제로 그것은 그렇게 행해졌던 것이다. 조각들은 어떤 결과를 증거하기 위해서 고도의 기술에 의해서 세밀하게 선택되어졌고 반면에 다른 사실들은 생략되었던 것이다.

결국 머리는 원숭이의 두개골 모습과 유사하게 재조립(reconstruct) 되었다. 왜냐하면 야수의 모습에 가깝게 재구성될수록 그것은 진화의 과학적 증거로서 제공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기되었던 반대 의견들은 묵살되었고, 학회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대중 언론에서는 물론 다뤄지지 않았다. 인간 뼈의 발굴에 관한 소식은 유인원 뼈의 발굴에 관한 소식처럼 많은 부수를 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본의 뼈들은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반인간-반원숭이의 석고상은 대대적으로 만들어져 세계 모든 박물관으로 보내어졌다.

영국과학진흥협회가 필트다운인에 대한 토의를 하고 있을 때인 1913년 8월에, 또 다른 어금니(molar tooth)와 두 개의 코뼈(nasal bones)가 같은 자갈 웅덩이에서 발견되었다. 같은 뼈 조각들이 그 자갈 웅덩이에서 계속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곳 습한 웅덩이에서 30만 년 동안 잘 보관된 뼈들만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가 죽었을 수백만의 수백만 배나 되는 동물들과 사람들의 뼈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발견된 뼈들도 단지 두개골 조각, 턱뼈, 이빨이 전부였다. 조금만 생각하여 보자. 자갈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흐르는 물에 의해 씻겨져왔다. 흐르는 물밑에서 30만 년 동안 뼈들이 보존될 수 있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뼈들의 마지막 재조립 과정에서 사람들은 송곳니를 원숭이의 것과 비슷한 각도로 아래턱의 오른쪽에 배치했다. 그것은 원숭이처럼 보이는 것을 도왔다. 뼈를 재조립하는 사람들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일을 하였다. 사람 두개골과 원숭이 턱뼈를 가지고 그들은 작업을 했고, 원숭이-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3. 항의들은 무시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석세스주의 두 명의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캡틴 바브(Captain St. Barbe)와 *메이저 메리오트(Major Marriott)는 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도슨의 사무실에서 염색된 뼈들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하였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도슨이 발견한 필트다운인 뼈들은 사기일 가능성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적었다.

1915년에 도슨은 우드워드에게 필트다운 지역의 다른 자갈 웅덩이에서 더 많은 화석들을 발견하였다는 우편엽서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웅덩이의 위치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두개골의 뼈들은 첫 번째 것보다 더 많은 조각이라 하더라도 도슨이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모두 1916년에 발견된 '필트다운인 II' 로 우드워드에 의해서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4 건의 폭로들이 잇따랐다.

(1)1914년에 *그레고리(W.K. Gregory)와 1915년에 *밀러(G.S. Miller)는 아래턱 오른쪽의 송곳니는 실제로 위턱 왼쪽에 있는 이빨인 사실을 과학잡지에 발표하였다. 과학자들은 단 한 개의 송곳니의 위치를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필트다운 웅덩이는 선신세(Pliocene)에 쌓여졌고, 아마도 홍적세(Pleistocene)에 재구성되었다고 진지하게 발표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빨을 자세히 검사하는 것보다 수십 수백만 년이 되었다는 연대부분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2) 또 다른 이견은 1913년 *알렉스 하드릭카(Alex Hardlicka)가 스미소니안 보고서(Smithsonian Report) 에서 턱뼈와 송곳니는 침팬지의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3) 1916년에 이빨을 검사한 치의학 해부학자는 이빨들이 줄로 쓸려져 있었음을 보고했다. 줄로 쓸려진 흔적들은(file marks)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그러나 케이스와 우드워드는 그 보고를 무시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무시해야하는 더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 1921년에 *레이 랑케스터(Ray Lankester) 경은 두개골과 턱뼈는 결단코 같은 생물체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의 결론은 런던의 왕립대학(King's College)의 데이비드 워터스톤(David Waterston)에 의해서 확인되어졌다.

그러나 4가지 폭로들중 어느 것도 언론이나 매체를 통해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필트다운인'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해 갔다. 교과서, 전시품, 잡지, 백과사전들과 같은 모든 것들은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였다는 복음을 온 세계에 전했다. 발견자들에 대한 초상화들이 그려졌고, 뼈들은 도슨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케이스, 우드워드, 그라프톤) 위대한 과학적 발견에 대한 공로로 영국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가 수여되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필트다운인의 뼈들에 대한 결점들을 지적하였기 때문에, 뼈들은 열쇠에 채워져 대영박물관의 보관함에 보관되어야만 했다. *루이스 리키(Louis Leakey)와 같은 권위자들도 단지 뼈들의 석고상을 검사하는 것만 허락되었을 뿐이었다. 진품이 아닌 석고상으로는 사기임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나서야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4. 사기극임이 폭로되다.

과학적 탐정가들이 사기극을 밝혀냈다.

비교적 최근인 1946년까지 권위 있는 대영백과사전(Vol.14, p.763)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었다. ”영국의 권위있는 연구자들은 두개골과 턱뼈가 동일한 개체의 것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1953년도에 *케네스 오클리(Kenneth Oakley, 영국박물관 지질학자)와 그의 동료인 *조셉 바이너(Joseph Weiner, 옥스퍼드대학 인류학자)와 *클라크(Le Gros Clark, 옥스퍼드대학 해부학 교수)는 직접 오래된 뼈들을 관리하며 다루고 있었다. 불소(fluorine) 함량에 의해서 뼈들의 상대연령을 결정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새로 개발되었다. 이 불소시험은 필트다운인의 뼈들이 최근에 생성된 뼈였음을 밝혀내었다.

부가적인 시험에 의해 필트다운인의 뼈는 세밀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중크롬산염(bichromate)으로 세밀히 염색되어 있었음이 또한 밝혀졌다. 그리고 뼈 속으로 구멍을 팠을때(drillings) 뼈들이 오래되었다면 가루(powder)들이 만들어져야 하나, 가루 대신 부스러기(shavings)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웅덩이 속에서 발견되었던 송곳니는 중크롬산칼륨(potassium biochromate)으로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었고, 모래 알갱이들이 채워져 있었다.

이러한 조작된 사실이 발견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놀랍기 만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뼈와 이빨들이 발견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실시되어야만 하는 극히 초보적인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졸리 쥬커만(Solly Zuckerman) 경은 후에 이 사기극을 고의로 저지른 사람 또는 사람들은 대영박물관의 과학자들이 알아냈던 것보다 훨씬 더 확실히 원숭이뼈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소시험은 뼈들이 동시에 묻혔는지, 아니면 다른 시기에 묻혔는지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땅속의 물로부터 뼈로 흡수된 불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 방법은 뼈들의 절대 연령을 측정할 수는 없으나, 각각의 뼈들이 상대적으로 어떤 것이 더 오래되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고도의 측정방법이다.  

 ”그의(Oakely's) 방사성 불소시험(radioactive flourine test)에 의해서 두개골 파편은 턱뼈 보다 수천 년은 오래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한 과학자가 지적했던 것과 같이 그것들은 같은 생물체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 만약 사람이 죽은 후 수천년동안 턱만 살아 있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 *R. Milner, Encyclopedia of Evolution (1990), p. 363.

1955년에 이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바이너는 후에 필트다운인 사기사건에 관한 책 'The Piltdown Forgery'을 출판하였는데, 그는 도슨이 사기극을 시작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중요한 각각의 조각들은 위조임이 입증됐다. 필트다운인은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사기였다.” - *Alden P. Armagnac, 'The Piltdown Hoax,' Reader's Digest, October 1956, p. 182.

(다른 좋은 흥미로운 글로서 *William L. Straus, Jr.,  'The Great Piltdown Hoax,' Science, February 26, 1954.   *Robert Silverberg, Scientists and Scoundrels: A Book of Hoaxes, 1965. 을 참조할 것)

영국 하원은 사기임이 발표되자 매우 혼란에 빠졌고, ”하원은 필트다운인의 두개골 일부가 사기였다는 대영박물관의 학술위원들의 뒤늦은 발견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라는 대책안을 거의 통과시킬뻔 하게 된다.  

”다수의 영국의회의 의원들은 대영박물관의 과학적 지도력에 대한 '불신임안' 을 표결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정치인들 또한 각자의 화장실에 구린내 나는 두개골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 또 다른 의원의 말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 R. Milner, Encyclopedia of Evolution (1990), p. 364.

정부도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사기 사건이 폭로되기 3년 전에 국립자연보존위원회(National Nature Conservancy)는 필트다운 자갈 웅덩이에 필트다운 국립기념관(Piltdown Gravel Pit National Monument)을 짓기 위해 국민들의 세금중 상당량의 재원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화론적 무익한 이야기인 필트다운인 이야기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sdadefend.com/pathlights/ce_encyclopedia/Encyclopedia/13anc08.htm

출처 -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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