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위원회
2004-07-24

유인원의 허구 1 : 라마피테쿠스 (Ramapithecus)

임번삼 


(1) 라마피테쿠스 (Ramapithecus)

 

 예일대학의 인류학과 대학원생이었던 루이스(G. Edward Lewis 1934)는 인도서북부의 시왈릭 언덕(Siwalik Hill)에서 이빨(40개)과 턱뼈들(15개)을 발굴하여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앞니와 송곳니가 원숭이의 것보다 작고 치열이 포물선을 이루며 턱뼈의 경사도가 사람쪽으로 유사하다 하여 중신세에 나타난 인류의 첫 조상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인도어로 ‘왕자 또는 크다’는 뜻의 ‘라마’에 라틴어로 ‘원인’(猿人)이라는 뜻의 ‘피테쿠스’를 조합하여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 brevirostris)라 명명하였다(그림 7). 


이 학설은 당시는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960년에 저명한 인류학자였던 하버드대학의 필빔(David Pilbeam)과 예일대학의 선사생물학자인 시몬즈(Elwin Simons)가 공동으로 당시까지 알려진 원인들의 화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 일부의 화석들이 라마피테쿠스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그들은 드리오피테쿠스, 브라마피테쿠스, 라마피테쿠스로 분류해 오던 것을 라마피테쿠스만 따로 떼어 새로운 학명을 부여하였다. 이 유골들을 K-Ar 법으로 조사하고 1,40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시몬즈는 라마피테쿠스와 브라마피테쿠스가 동일한 동물임을 확인하고 브라마피테쿠스의 이름을 없애고 라마피테쿠스로 통일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유명한 최초의 호미노이드인 라마피테쿠스가 탄생한 것이다. 진화론적 주장을 반영하는 타임-라이프지(1978)는 최근까지도 이렇게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더욱 확실한 후보가 나타날 때까지는 라마피테쿠스를 인간의 조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한국일보타임-라이프; 원시인, p42, 1978]


그 후, 이와 유사한 유골들이 케냐(Fort Teman)를 비롯하여 파키스탄, 독일 스페인, 중국 등지에서도 발굴되었다. 1970년대부터 새로이 발굴된 유골들을 비교한 바, 라마피테쿠스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시바피테쿠스와 유사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진화학자인 리키와 르윈(Richard E. Leaky & Rodger Lewin 1977) 및 힐(W.C.O. Hill 1970)은 라마피테쿠스의 잇빨과 턱의 모습이 개코원숭이(Gadala baboon)과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급기야,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왔던 필빔(David Pilbeam 1982)마저 파키스탄(1973-1976)과 중국/파키스탄(1978-1981)에서 라마피테쿠스와 유사한 화석과 인골들을 발굴하여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라마피테쿠스는 인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랑우탕과 유사하다는 놀라운 발표를 하였다. 이는 라마피테쿠스가 인류의 조상이라던 자신의 과거 주장을 번복한 것으로 당시 진화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실수한 이유는 턱뼈와 치아화석만 분석하였고, 비교해부학이나 분자통계학의 자료를 무시하였으며, 중신세의 다양한 호미노이드에 대한 상상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라 고백하였다.


같은 해에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안드류스(Andrews 1982)는 라마피테쿠스가 오랑우탕계통인 시바피테쿠스(암컷)와 유사하다고 했으며, 중국학자들(1980)도 운남성에서 시바피테쿠스와 라마피테쿠스의 두개골을 발굴 조사하고 시바피테쿠스는 오랑우탕의 선조라고 하였다(1983).


뒤이어 미쉬간대학의 그린필드(Leonard O. Greenfield 1975), 안드류(Peter Andrew 1982) 및 칼리포니아 대학의 윌슨과 캔(A.C. Wilson & R. Cann) 등의 연구결과 루이스가 발견했다는 유골들은 오랑우탕 등의 뼈들을 결합한 것임이 들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수십년간 인류의 첫 조상자리에 앉아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라마피테쿠스는 오랑우탕임이 밝혀지면서 하나의 촌극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진화론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인류와 역사앞에 책임있는 사과나 사죄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임번삼
2004-07-24

진화론적 인류기원설


 (1) 현생인류의 기원론

  진화론자들은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믿기 때문에 영장류에 대한 분류를 매우 중요시한다(표 2). 그들의 분류에 의하면(Cartmill 1992), 지구상에는 230여종의 영장류가 있다. 영장류는 다시 하등의 원원류(原猿類  procimians)와 고등의 진원류(眞猿類 anthropodis)의 두 아목(suborder)으로 나뉜다. 전자는 작은 체구에 야행성으로 쥐와 일부 원숭이가 이에 속한다. 후자는 신대륙의 광비원류(廣鼻猿流 신세계원숭이 Platyrrhiness)와 구대륙의 협비원류(狹鼻猿流  Catarrhines)가 포함되어 있다. 협비원류는 다시 유미원(有尾猿,구세계원숭이, Cercopithecoidea)와 호미노이드(Hominoid 人猿類/類人猿/人間)의 두 상과(上科)로 구분한다. 호미노이드는 콜로버스(Colobidae 코주부원숭이)와 긴팔원숭이(Hylobatidae) 및 사람(Hominidae)의 세 과로 나눈다.

현생인류를 제외한 사람과(人科)에는 기본(Gibbon/Hylobates), 샤망원숭이(Siamangs)와 같은 작은 체구의 소원류(小猿類) 및 고릴라(Gorillas),침팬지(Chimpanzees), 오랑우탕(Orangutans)과 같이 체구가 큰 대원류(大猿類)로 나눈다. 이 대원류에서 현생인류가 출현했다는 것이 진화론자의 주장이다.

그러면, 이러한 네 발짐승인 대원류에서 현생인류가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탄생한 것일까? 주지하듯이 진화론자들은 35억년전에 지구상에 단세포의 생명체가 출현하여 1-6억년전의 캄브리언기에 다양한 생물형태로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긴 세월이 지나면서 수중생물이 육상으로 상륙하여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를 거쳐서 오늘의 현생인류로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포유류에서 인간으로의 진화의 순서는 허리경사각(그림 2), 치아배열(그림 3), 안면경사각과 뇌의 용량(그림 4)등에 의해 구분한다. 유인원(類人猿)은 네발로 너클보행(knuckle walking)을 했으며 굽은 허리와 작은 뇌를 가졌고 안면 경사각이 완만하며 턱뼈와 잇틀이 말발굽형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차로 허리경사각이 완만해졌으며, 두 발로 직립보행(bipedalism)하면서 허리경사각이 직각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에 따라, 가파른 안면경사각에 큰 뇌와 넓은 치아의 배열형태를 가진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7천만년전(백악기 말기)의 대멸절기에 살아 남은 포유류 일부가 결국 오늘의 영장류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영장류의 두개골은 서서히 직각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되었으리라 추정하고 그러한 순서대로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뇌용적을 비교한다면,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뇌는 2,000cc로 매우 크지만 천재로 이름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1844-1924)의 뇌는 유인원 수준인 1,017cc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보다 미개했다는 구인인 네안델탈인은 현대인(1,450-1,600cc)보다도 큰 1,750cc였다고 한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인류진화의 역사는 추리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표 3). 초기 유인원인 플리오피테쿠스가 프로콘슬을 거쳐 드리오피테쿠스로 진화했다고 한다. 3천만년전에는 나무 위에서 생활을 하던 드리오피테쿠스(Driopithecus)가 몸집이 커지면서 육상으로 내려 왔으며, 오레오피테쿠스를 거쳐 1,300만년전에 라마피테쿠스가 되었다고 한다. 1,000만년전에는 파란피테쿠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그림 5). 

 

다아트는 파란피테쿠스가 처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원숭이나 침팬지는 2천만년 전에 분리되었으며, 1천300만년 전에는 오랑우탄이, 6백만년 전에는 고릴라가, 5백만년전에는 아인류(亞人類)인 침팬지가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360만년전 침팬지가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猿人)로 진화되었는데, 키가 작은 아팔원인(A. afarensis, 아팔猿人)과 키가 큰 오스트랄로피테쿠스(A. africanus, A. robutus, A. boisei)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뇌용적이 커지면서(500-600CC) 아팔원인으로부터 사람의 형태에 가까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 두 발로 완벽하게 직립보행(erect)을 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原人)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호모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육식을 하였고, 20만년전까지 지구상에 존속했다고 한다. 그 후, ‘지혜로운(sapience) 사람(Homo)’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 사피엔스인 네안델탈인(Homo sapience neanderthalensis 舊人)과 크로마뇽인(新人)을 거쳐 마침내 현대인(Homo sapience sapience)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원숭이와 현생인류의 중간에 위치한 포유류를 유인원(類人猿 hominoid)이라 부르고, 구인과 신인을 호미니드(hominid)라 구분하여 부른다(표3). 

 

현생인류로의 진화과정에 대해서는 현재 진화론자들은 두 학설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즉, 호모 에렉투스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진화하여 현생인류로 진화했다고 하는 다지역발생설(multiregional generation theory)과 중부 아프리카에서 첫번째의 현생인류(Homo sapience)가 탄생하여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하는 단일지역발생설(African generation theory)이 그것이다. 이 두 학설간에는 현격한 견해의 차이를 보이면서 양측의 진화론자간에 서로의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며 논쟁중에 있는데, 이는 두 이론이 모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지역에서 현생인류가 출현했다는 단일지역발생설이 진화론자들 사이에 폭넓게 수용되어 가는 추세이다.

단일지역발생설은 인류의 조상이 3-20만년전에 출현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지역설에 비해 매우 짧은 기간을 설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중동 아시아에서 출현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창세기의 기록에 의견이 접근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이론공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 다지역발생설(多地域 發生說)

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우연히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그 지역에서 발굴한 화석과 인골 및 문화유적들을 분석하여 추리한 것이다. [Alan G. Cann, Milford H. Wolpoff; The Multiregional Evolution of Humans, Scientific American, April, 1992, 日經サィェス, 6月號, pp 48-55, 1992] 그 결과, 유인원(5백만년전)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猿人 400-200만년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2백만년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25-170만년전), 고대형 호모 사피엔스(archaic Homo sapience 40만년전), 구인(Homo sapience neanderthalensis), 신인(Homo sapience新人 10만년전)을 거쳐 현대인(Homo sapience sapience 現代人)로 진화하였다고 말한다(그림 6). [Michel D. Lemonick, Andrea Doefman; Up from this ape, Time Jan. 17, pp 34-45, 2000]

그들에 의하면, 5-7백만년전에 아프리카 대륙의 기온이 하강하여 열대림이 축소되고 사바나 기온이 조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부족해진 식물을 찾아 다니기에 편리한 이족(二足) 보행을 하게 되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3백만년 전에 다시 기온이 하강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뇌의 용적이 더 커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탄생했으며 안면 경사각(顔面傾斜角)도 사람처럼 직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00만년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유럽으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이동을 개시하였다. 인도(Namada지역)를 거쳐 인도네시아와 중국에서 많은 인골들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는 유안모(元謨, 雲南省)에서 치아가 발견되었고(80-90만년전 추정), 란티엔(鹽田, 山西省)에서는 뇌용적이 700cc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굴되었다(70만년전 추정). 그리고, 쵸우코우티엔(周口店, 北京)에서는 23-46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북경원인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솔로강변의 트리닐(Trinil)과 상기란(Sangiran)에서 많은 유골들이 출토되었다. 상기란 남쪽 40마일 지점의 카부층(Kabuh)에서도 50-7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800-900cc)을 포함한 유골들과 퇴적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카부의 아래층은 70-100만년전의 푸챵안층(Puchangan)인데, 여기에서는 두개골(뇌용적 750cc)과 앞니와 송곳니가 붙은 하악골이 발굴되었다. 독일의 고인류학자인 케닠스발트(von Koenigswald 1930)는 모조케르토(,Modjokerto, East Surabaya)의 푸칸장층에서 두개골을, 야콥(Jacob 1973)은 상기란 인근의 삼붕마찬(Sambungmachan)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보이는 두개골(뇌용적 1000-1250cc)을 발견했다고 한다. 쟈바섬에서는 10만년전의 지층까지 오직 호모에렉투스만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홍적세 중기말에 해당한다는 40만년전에 살았다는 고대형 호모사피엔스(archaic Homo sapiensis)의 출현은 로데시아(현재의 잠비아)의 브로큰(Brocken Hill)에서 큰 두개골(뇌용적 1,100-1,300CC)이 발굴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호모사피엔스 로데시언시스(Homo sapience rodesiensis)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물들이 고대형 호모사피엔스인지 호모에렉투스인지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유럽지역인 독일(Mauer, Bilzingsleben), 헝거리(Vertesszolloes), 그리스(Petrlanona)에서 발굴된 유골들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이 중, 마우어지방에서 발굴한(1907) 하악골의 주인공은 60만년전의 호모사피엔스로 진화인류학자들은 취급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살레(Sale, Rabat, Moroco)에서 출토된 두개골(960-1,000cc)은 4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고대형 호모사피엔스가 10만년전까지 생존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극동지역에서는 최근까지 호모에렉투스가 살다가 10만년전부터 중국의 달리(大劦, 陜西省), 직뉴산(金牛山, 遼寧省), 마바지방(廣東省)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이 고대형 호모 사피엔스로 교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호상가바드(Hoshangabad, Middle India)에서 출토된 나르마다두개골(Narmada Skull)은 호모 에렉투스와 고대형 호모 사피엔스의 중간형으로 보고 있다.


20만년 전부터 유럽에서는 호모 네안델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체구는 65Kg에  170cm의 키를 가졌다고 한다. 뇌용적은 1,750cc로 현대인보다 크며, 석기를 사용하고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까지 150개의 동굴매장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뇌의 특징은 얼굴 중앙부위가 돌출했고 아래턱이 길고 콧구멍이 크며, 빙하기를 견디느라 사지골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골들이 유라시아의 엔기스(Engis, Belgium), 라페라시와 라퀴나(La Ferrassie & La Qina, France), 타쉬크 타쉬(Tashik Tash, Uzbekistan), 아무드(Amud, Israel), 샤니다르(Shanidar, Iraq) 등지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극동지역과 아프리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수렵을 비롯한 문화생활을 했는데 그들이 사용했다는 도구가 발굴된 무스티에(La Moustier, France)동굴의 이름을 따서 무스테리안 문화(Mousterian Culture)라 부르고 있다. 식인습관을 가졌다는 이들이  멸절한 것은 3만5천년전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멸절사유는 신인인 호모 사피엔스에 의한 공격설등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는 것이다.


네안델탈인의 뒤를 이어 10만년부터 초기 현대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신인(新人), 만기지인(晩期智人) 등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2만5천년 전부터 신인들이 시베리아를 거쳐 미주대륙으로 이동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크로마뇽(Cro-Magnon, France)에서 발견한 화석(1868년)의 이름을 따라 크로마뇽인으로 명명된 유럽의 신인(新人)은 네안델탈인보다 키가 컸지만 뇌의 용적은 오히려 더 작았다(1,400cc)고 한다. 왜, 뇌가 반대로 작아졌는지 진화와 반대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학설에서는 크로마뇽인의 뇌가 네안델탈인처럼 현대인보다 더 컸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코와 턱은 현대인처럼 작으며 치골도 현대인과 유사했으며, 3만5천년전에 나타난 크로마뇽인은 돌과 뼈를 이용하여 기구를 만든 후기 구석기문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들이 살았다는 동굴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종교생활을 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니오동굴(Niaux Cave, South France)에서 발견된 창에 찔린 들소의 그림이다. 모스크바의 동부에서는 구슬장식을 한 크로마뇽인 노인의 유골(2-3만년전 추정)이 최근에 발굴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현대인과 유사한 오모유골(Omo-1, 6만년전)이 이디오피아에서 발견된 것을 비롯하여 클라지스(Klasies, South Africa 10만년전), 볼더(Border, South Africa 9만년전) 등지에서도 발굴이 되었다고 한다. 아시아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의 카프체(Qafzeh)와 스크훌(Skhul)에서 발굴한 유골이 1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이를 근거로 신구인이 한동안 공존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중국의 류지앙(柳江, 廣西省)의 두개골은 3-7만년전의 것으로 몽골로이드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들의 피부는 흰 색에서 검은 색까지 혼합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원숭이와 현생인류의 중간종이라는 호미노이드의 유골이 아래 표에서 보듯이 500여건이 넘게 발굴되었다(표 4).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같은 진화론자인 분자유전학자(分子遺傳學者)들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즉, 화석의 유체연구만으로는 인류의 발생기원을 확인할 수 없으며, 화석주변에서 발굴했다는 도구들에 대해서는 신뢰하기가 어렵고, 극소수의 화석을 가지고서 그 시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물군을 대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A.C. Wilson & R.L. Cann; ibid, p 46-47]

 

이처럼,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단일지역 발생론자들은 분자생물학적으로 유인원에서 인간이 분리된 연대를 추정하는 분자시계(molecular clock)와 分子生態學(molecular taxonomy)에 의한 분자상동성(相同性, molecular homology)으로 동물들간의 상관관계를 진화계통수(進化系統樹)로 나타내려 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 그들은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는 단일지역발생설을 주창하게 되었다.


그러면, 진화론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호미노이드 및 호미니드의 실상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들은 진화론자인 마틴(Rorert Martin)이 말했듯이 '불충분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만든 상상의 산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의도적인 사기사건까지 발각되어 학계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지금도 상존하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로서 왜 연구결과를 조작하려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연구비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명예욕, 다른 학자들과의 경쟁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 때문이라고 어느 논문은 분석한다. 이제,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205

참고 : 5768|5796|6292|6425|6476|6423|6305|6271|6243|6190|6052|5952|5948|5819|5818|5802|5701|5528|5525|5507|5496|5492|5455|5406|5375|5349|5334|5218|5180|5155|5157|5129|5051|5025|4880|4847|4842|4833|4824|4820|4812|4785|4763|4751|4720|4709|4682|4660|4650|4626|4593|4563|4499|4498|4432|4410|4372|4315|4266|4176|4053|4007|4000|3989|3988|3890|3867|3848|3834|3656|3431

임번삼
2004-07-24

인간과 인종


(1) 인종의 분화

  이 지구상에는 많은 인종(human races)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한 것이며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인종이 태어난 것일까? 한 동안, 독일의 인류학자인 블루멘바흐(J. F. Blumenbach 1820)가 백색인(Caucasian), 황색인(Mongolian), 갈색인(Malayan), 흑색인(Negro), 적색인(American)으로 구분한 인종론이 널리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는 인종을 백인종(Caucasoid), 황인종(Mongoloid), 흑인종(Negroid) 및 호주인(Australoid)으로 구분한다(표 1). 인종의 분류기준은 피부색(skin color), 얼굴면적(head space), 코(nasal index) 및 머리카락의 형태(hair style) 등에 근거한다.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피부색
(SKIN COLOR)

NEGROID

MONGOLOID

CAUCASOID

얼굴면적
(HEAD SPACE)

CEPHALIC INDEX:

頭長幅 指數

넓다

CI>80

중간

CI=75-80

길다

CI<75

코의형태
(NASAL INDEX)

낮다

중간

높다

머리카락 형태

곱슬함

WOOLLY

직선적

STRAIGHT

굽이침

WAVY

대표적 인종

FOREST

중부阿

남부阿


NILOTIC

나일강변

오세아니아


PIGMIES

콩고

한국

중국

일본

몽고

티벹

말레이인

아메리카인디언

남미인디오

NORDIC

스칸드나비아

독일(북)

덴마크

영국

화란

MEDITERRANEAN

프랑스(남)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ALPINE

슬라브

독일(남)

프랑스(남)

혼혈 인종


BUSHIMAN-HOTTENTOT족

DRAVIDIAN(인도양)

POLYNESIAN

MICRONESIAN

AINUS등

 

백인종의 머리칼은 물결처럼 굽이치며(wavy), 황인종은 직선적(straight)이고 흑인종은 곱슬하다(woolly). 얼굴의 모습은 두장폭지수(頭長幅指數: cephalic index)로 따지는 데 이는 머리의 최대폭을 최대길이로 나눈 수치이다. 이 수치가 75이하이면 긴 얼굴(long-headedness, dolichocephaly)로 백인종을 나타내며, 75-80은 중간형(medium headedness, mesocephaly)으로 황인종을, 80이상은 넓은 얼굴(broad or short headedness, brachycephaly)로 흑인종을 나타낸다.

백인종의 코는 폭이 좁고(narrow-nosed), 황인종은 중간형이며(medium-nosed) 흑인종은 넓다(broad-nosed). 피부색은 각기 백색, 황색, 흑색으로 구별하며, 대체로 머리나 눈의 색갈과 일치한다. 이 밖에도, 최근에는 혈액형(blood type)이나 분자학적 상동성(molecular homology)에 의한 분류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각 인종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황인종은 넓적한 얼굴에 곧은 머릿결과 황색 내지 갈색의 피부를 지니며 한국, 일본, 북중국, 티벳 등의 전통적 몽골계(Mongoloid)와 말레이인(Malaysian) 및 아메리카 인디언 등이 이에 속한다. 백인종은 물결치는 머리결에 좁고 높은 코와 흰 피부색을 지니며, 노르딕(Nordic; 스칸디나비아, 북부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영국), 지중해인(Mediterranean; 남부 프랑스, 북부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이베리아반도) 및 알파인(Alpine; 슬라브, 중부 프랑스, 남부 독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흑인종은 곱슬머리에 넓은 코와 흑색 내지 흑갈색의 피부를 지니며, 삼림족(Forest; 중남부 아프리카), 나일족(Nilotic; 나일강변, 오세아니아), 피그미족(Pigmies; 콩고지역) 등으로 나눈다. 혼혈종으로 남아프리카의 부쉬멘-호텐토트족(Bushman-Hottentot), 인도양의 드라비다족(Dravidian) 및 일본북부에 사는 아이누족(Ainus)등이 있다. 호주인은 호주, 뉴질랜드의 원주민과 폴리네시안(Polynesian), 미크로네시안(Micronesian)등의 남태평양제도에 사는 원주민을 포함한다.

 

(2) 인종분화에 대한 논쟁

그러면, 이처럼 다양한 인종은 어디서,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 현재, 학계에서는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단세포로부터 포유류와 영장류를 거쳐 오늘의 현생인류로 진화하였다고 하는 진화론적 사고와 하나님이 처음부터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대로(Imago Dei)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바벨탑사건으로 언어가 분화되면서 인종의 분화로 연결되었다고 하는 창조론적인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참조 : 어떻게 인종들이 달라지게 되었는가?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21¶m=category=B02). 이 밖에, 하나님이 진화론적으로, 즉 유인원에게 영혼을 불어 넣어서 현생인류인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이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다.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원칙을 제외한다면 거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991년도에 미국 갤럽조사에서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응답자의 47%가 창조론을 지지한 반면 진화론은 겨우 9%에 불과했으나, 유신진화론은 놀랍게도 40%를 나타내었다. 따라서, 인류의 기원과 그후의 인종분화문제는 결국 영장류에서 진화했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셨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함을 알 수 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린네는 <자연의 체계>(1735)에서 동식물과 광물질을 이명분류법(二命分類法)으로 분류하였다. 그러한 분류체계에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는 종명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인간이 영장류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며, 종은 불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즉,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종류대로 창조되었기에 이러한 분류작업이 가능하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植物)에서 인간에 이르는 그의 생물분류체계는 진화론자들에 의해 진화를 증거하는 자료로 역이용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블루멘바하(1791)는 두 손을 사용하는 인간을 네 손발을 쓰는 동물과 구별하였으며, 이리겔은 인간의 특징은 직립보행을 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인간을 에렉타(Erecta 직립자세)라 명명하였다. 프랑스의 큐비에(1822)는 처음으로 영장류의 화석을 파리근교의 몽마르뜨에서 발굴하였다. 그는 린네처럼 종의 불변설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큐비에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가졌던 영국의 창조과학자인 오웬(Richard Owen 1804-1892)은 중생대의 파충류를 공룡(Tiranosauria)이라 명명했으며,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리 ‘최고의 뇌를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아켄세팔라(Archencephala)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다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본격화된 논란이 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였다. 1809년, 프랑스의 진화론자인라마르크는 <동물철학>(1809)에서 “만일, 인간이 기관의 특징만으로 구별되고, 다른 동물들과 같은 기원을 갖는다고 한다면...원숭이로부터 탄생했을지도 모른다”고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동물진화론에 불을 집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큐비에의 종의 불변설에 눌리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한편,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교수였던 아르망 드 캬틀파지는 인간은 선악을 알고 내세를 믿는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영국에서는 19세기말에 ‘다윈의 불독’로 불리우는 헉슬리와 옥스포드의 사제인 윌버포스주교 간에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1860)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헉슬리는 해박한 생물지식을 이용하여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였다. 생물학에 대해 비전문가였던 윌버포스 주교는 오웬의 지원을 받았으나, 논쟁은 헉슬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유인원진화설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대상은 독일의 라인강변에서 발굴한(1856.8) 네안델탈인으로 옮겨져 30여년간 진화론과 창조론이 격렬히 논쟁하였다. 독일의 훌롯트, 오스트리아의 샤프하우젠은 그 유골의 주인공을 유인원으로 본 반면, 캇셀학술회의(1857)에서 프랑스의 프류넬니베는 켈트인으로, 부울은 동굴인(cave man)으로, 다른 학자들은 1814년에 그 곳에서 죽은 코쟈크병사로, 독일의 저명한 병리해부학자인 버효는 곱추병에 걸린 지체부자유인으로 판정하였다. 뒤이어, 이와 유사한 인골이 벨지움의 라노렛동굴(1865)과 스피지방(1886)에서 발굴되었으며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프랑스남부의 크로마뇽암반에서는 철도부설공사를 하던 중 루이 라르테(1868)가 5인의 인골을 발굴하고 크로마뇽인이라 명명하였다(1874). 이에 대한 논쟁도 유인원과 현대인이라는 견해로 나뉘어 지금까지 논쟁중에 있다. 이들에 대한 내용은 앞으로 상세히 기술할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진화론을 신봉하던 많은 학자들이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인 유인원(類人猿)을 찾아 나서는 붐을 이루었다. 독일의 대표적 진화학자인 헤켈(1867)은 인류진화의 초저층(超底層)에 파프아뉴기니아인을 배치하고 이들이 멜라네시아인과 더불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원숭이와 사람의 배발생이 유사한 점에 착안하여 동남아 부근의 인도양에 가라앉았다는 전설적인 레무리아 대륙에 살았다는 원숭이로부터 현생인류의 첫 조상인 피테칸투로프스(Pithecanthropus alalus)가 발생했으리라고 추리하였다. 이에 반해, 다윈과 헉슬리는 각각 <자연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간의 유래>라는 저서에서 인간은 원숭이가 아닌 침팬지에서 유래했으며,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윈의 사촌동생인 갤튼(Galton)은 인종우생학(Eugenics 1884)을 만들고 백인위주로 인종을 개량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사람이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순으로 우수하다고 하여 학문적으로 인종차별의 불씨를 남겼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일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비롯한 국수주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다른 민족에 대한 대량학살로 이어지게 하였다. 예나 의과대학에서 7년간 헤켈에게서 배운 화란의 외과의사인 유진 듀보아도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아 나섰던 사람이다. 그는 해군 군의관 신분으로 당시 화란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섬으로 출항하였다(1887). 수마트라에서 쟈바섬으로 여행하는 동안 1만2천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화석골을 수집하였다. 이러한 뼈들은 유럽으로 직송되어 분석되었으나 모두 동물의 뼈들로 확인되었다. 1891년, 쟈바섬의 솔로강변에서 그는 아래턱뼈와 치아를 각각 한 개씩, 그리고 인간의 두개골 한 개를 발견하고, 이 유골의 주인공을 직립원인이라는 의미로 피테칸트로프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헤켈에게 ‘잃어버린 고리’를 찾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라이덴에서 열린 학술회의(Lyden, Holland, 1895)에서는 학자들 사이에 그가 조립한 네 종류의 뼈들이 각기 다른 장소(두개골과 치아는 1m, 대퇴골은 15m 거리에서 발굴)에서 발굴한 것이었으므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더구나, 그는 현대인의 인골을 같이 발굴한 사실을 숨겨 왔으나, 후일(1923) 케닉스발트 등이 같은 지역에서 동물뼈와 인골을 동시에 발굴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이즈음(1928) 중국의 북경근교인 주구점에서는 원인(原人)의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데이비드슨 블랙과 비중문 및 샤르뎅 등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물론, 이 북경인도 후술하겠지만, 수많은 조작과 의혹을 가진 문제가 많은 발굴이었다. 진화론자들은 쟈바인과 북경인을 묶어서 호모에렉투스라 명명하고, 이 해를 인류고고학의 출발점으로 선언하였다. 학문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서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엉성한 상태로 봉합하여 인류고고학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기원논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 첨예하게 격돌하였다. 192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진화론을 공립학교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면서 전국이 진화론 논쟁의 와중으로 빠져 들었다. 테네시주정부는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반대하는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924. 3). 그러던 중, “인간은 동물의 자손”이라고 가르친 진화론 교사 스코프스(John  T. Scopes)를 한 학부형이 테네시주법정에 고소하여 소위 원숭이재판(Monkey Trial, Dayton, Tennessee, 1925)이 열리게 되었다(사진 1).

7월 중순부터 진화론측을 옹호한 대로우 변호사(Clerance Darrow)와 창조론을 옹호한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수일간 논쟁하였다. 브라이언은 민주당측의 대통령후보로 세 번이나 나섰던 사람이었고, 대로우는 당시에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반진화론연맹의 활동(사진 2)에도 불구하고, 필트다운인(후일, 사기극으로 판명)과 네브라스카인(후일, 멧돼지어금니로 판명)의 자료에 힘입어 롤스톤판사는 스코프스에게 벌금 100달러의 가벼운 벌금을 부과하면서 반진화론법규들을 무효화시켰다. 여기에서도 진화론자들이 판정승을 한 셈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진화론이 미국의 교육계에 급속도로 확산되는 또 다른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원숭이재판의 영향으로 미국 대학의 신입생중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설을 믿었던 숫치가 80%(1914)가 42%(1933)로 급강하하였다고 한다. [Richard Culp; Remember Thy Creator, p160, 1975] 

미국 대법원은 1963년부터 공립학교에서의 기도(祈禱)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공립학교의 1/4 이상이 뜨거운 기도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타임지는 소개하고 있다. [Time, April 27, 1998]. 미국에서는 주 단위로 교육위원회가 구성되어 자기 주에서의 교육방침을 독자적으로 설정한다. 1981년에는 아칸사스주와 루이지에나주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는 <수업시간 균등법>이 발효되었으나, 연방판사가 이 입법안이 종교교리를 내세우는 것이므로 비헌법적이라고 판단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연방대법원도 이러한 견해를 7:2로 지지하였다(1987). 대법원판사인 포타스(Abe Fortas 1981)는 아칸사스주의 반진화법규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적 정부는...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다른 이론에 대항하는 한 종교적 이론을 돕거나 홍보 또는 격려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 반하는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미국의 헌법정신에 반하는 행위임을 지적하는 말이다. 어떻게 크리스챤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파괴하는 비크리스챤적인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인지 시펄트(1995)는 반문한다. [Albert Sippert; Evolution is not Scientific; 32 Reasons Why, p 354, N. Mankato, MN, 1995]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진화론은 과학의 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창조론을 두둔하였다(1984), 그러나, 1987년에 연방법원은 이 법규를 위헌이라고 다시 판결하였다. 최근(2000. 8. 11)에는 캔사스주교육위원회(위원장; 린다 헐러웨이, 사진 3)가 “진화론은 확증이 없는 하나의 이론이므로 각종 학교교육의 교과내용과 모든 평가시험에서 진화론을 제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진화론교육을 위헌으로 판정하고 학교에서는 과학적인 사실만을 가르치도록 결정하였다. [송만석; 린다 헐레웨이 전 캔사스주교육위원회위원장과의 인터뷰, 창조, No. 123, 2월호, pp 30-33, 한국창조과학회, 2001].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진화론자들의 거센 반발로 2001년 4월에 다시 진화론교육이 허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알라바마주 교육위원회에서는 “(교과서에서) 진화론은 동물, 식물, 사람 등의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논쟁의 소지가 있으므로...생명의 기원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사실이 아닌 이론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아리조나, 켄터키, 루이지아나 등의 6개주에서도 진화론교육의 폐기여부로 논란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속에 미국에서 최근에 실시한 한 갤럽조사(1991)에 의하면, 인류의 기원에 관한 설문에서 매우 예상밖의 결과가 나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창조론 47%, 진화론 9%, 유신진화론 40%로 나타난 것이다(그림1-상). 이러한 결과는 창조론이 아직도 미국사회에서 깊이 신뢰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南條郁子譯; 人類ノ 起源, pp2-3, (株)創元社, 大阪, 1995, 원저는 Thomas Herbert; L'Homme avant l'Homme].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현상은 진화론의 지지가 9%에 불과한 데 반하여 유신진화론이 40%로 높은 지지를 나타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많은 진화론자들이 유신진화론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또 다른 흥미있는 조사는 헐리(John Hulley; Comets, Jews & Christian)가 과거 90년간(1901-1990)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의 종교분포를 조사한 것이다(그림1-하). 그 결과에 의하면 전체 수상자의 64%가 개신교신자였고, 그 뒤를 유대교(22%), 가톨릭(11%), 정교회(1.6%), 불교(0.9%), 힌두교(0.8%), 이슬람교(0,1%) 등이 순서대로 뒤를 따랐다(그림 1). 기독교계를 모두 합치면 98.6%를 점하고 있어 유신론적인 학자들이 노벨상 수상을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204

참고 :

유익동
2004-07-24

화석 인류진화론의 실상과 허상 - 1, 2


      인류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인류학이나 고대생물학 분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형태를 근거로 하여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각종 화석들의 발견상황이나 이론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비약된 점이 많아 그때그때 많은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또 최근 들어서는 분자유전학 및 분자계통학 등의 새로운 학문이 발달되면서, 인류의 진화론적 학설이 재검토되어 진화론에 입각한 인류의 기원론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과연 현재까지 정설로 알려지며 우리가 배워온 인류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화석진화론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침팬지나 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된 것일까?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창조된 것일까?(창 1 :26-28).

인류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인류진화론 학자들에 의해 화석으로부터 분자레벨까지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며 그의 추적과 증명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학설만 난무할 뿐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최근 일본의 '科學' 이란 잡지에 특집으로 기재된 인류기원론에 관한 논문의 일부내용을 재편집하여, 화석을 근거로 하여 인류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인류진화론의 실상과 허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류화석의 형태적 해석 기준 

생물의 형태학적 연구는 자연사적(自然史的) 관심을 통한 계통론과 기능적(機能的) 관심을 통한 적응론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따라서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하여도 당연히 이상의 두 가지 입장에서 고찰할 수 있겠다. 제1은 화석의 형태를 비교함으로써 그 유연관계(類緣關係)를 찾아 인류의 출현으로부터 현재까지의 계보 전모를 복원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개개 화석의 연대에 관한 주위 학문으로부터의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 제2는 각 진화 단계에 속한 화석에 대하여 그 형태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 측면을 분석하고 각 시대를 거침에 따른 적응형태의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그 진화의 요인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입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인류로 알려져 있는 Homo sapiens, 원인(原人)으로 알려져 있는 Homo erectus, 또는 중신세(中新世) 유인원으로 알려져 있는 Hominoid 등은 어떠한 과학적 근거와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접근하였는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화석 인류학이 안고 있는 제일 큰 과제요 초점일 것이다.

인류의 진화를 뒷받침 해주는 화석들의 형태적 해석기준은 옥스퍼드 대학의 Le Gros Clark가 발표한 논문에 기준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일찍이 남아프리카에서 직접 화석을 채취하며,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실시하였던 화석인류 학자로 화석의 계통연구를 계속하는 동안 언제나 강조하던 것은 '형태의 전체상(Total Morphological Pattern)을 통한 정확한 해명과 완전한 증명의 제시이었다. Le Gros Clark는 인류화석의 판정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즉

① 직립하여 두발로 보행이 가능한 골반, 下肢, 발의 구조와 四肢의 비례.

② 손가락의 대칭성과 발가락의 비대칭성.

③ 후두과(後頭顆)의 전방전이와 두개저축(頭蓋底軸)의 굴곡. 두개(頭蓋)의 확대.

④송곳니의 퇴화, 치아간격의 소실, 포물선형의 치열(齒列) 등을 조사하여 진화의 정도를 설명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한다면 진화과정 중의 인간이라면 두 다리로 직립 보행하며, 뇌의 용적이 크고, 송곳니가 퇴화되는 등의 커다란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재까지 인류의 직립보행의 진화과정을 완전하게 보여주는 화석상의 증거는 전혀 없다. 또한 인류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는 구인류 및 원시인류들의 모습 전체 상을 담은 화석도 발견된 적이 없고, 모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분 부분을, 그것도 대부분이 대퇴부나 턱뼈 또는 두개골의 형태만을 가진 화석들을 수집하여 상상으로 추정한 것들로 과학적인 증거나 뒷받침 할만한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든다면 남아프리카의 해부학자인 Dart가 1924년 다우윙 채석장에서 발견한 동물화석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는 수집한 동물화석 중에서 그림1과 같은 유인원과 비슷한 두골(頭骨)의 화석을 보고 안면부분에 고착된 석회화(石灰華)를 긁어내면서, 이 화석을 인류의 진화과정중의 어느 부분일 것으로 단정하고 어느 위치에 놓아야 좋을지 만을 고민하였다. 그는 수개월간 생각한 끝에 '사람이 되려고 진화하기 시작한 미지의 유인원의 일종' 이라고 발표하고, 그 두개골만을 가지고 Australopithecus africanus라 명명하여 Nature지에 게재함으로써 유명한 遠人으로써의 위치가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이 Australopithecus africanus에 관한 실상은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지만, 단지 그림1과 같은 두개골 하나만으로써 '사람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유인원의 일종'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은 초기의 原人으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라마피테쿠스의 실상일 것이다. 이번 호에는 이 라마피테쿠스의 실상과 허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초기의 原人으로 알려진 라마피테쿠스

(Ramapithecus의 실상) 

초기의 原人으로 알려진 라마피테쿠스는 1932년 예일대학의 Lewis에 의해서 인도의 시와리크 지방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턱뼈의 파편조각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Lewis는 이 화석을 발견한 후 즉시 사람의 턱뼈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그의 발표는 오랫동안이나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져 있었다. 그 후 30년이 지난 1960년 예일대학의 고생물학자인 Simons은 이 화석에 주목하여 인류학자인 Pilbeam과 공동으로 당시까지 알려져 있는 中新世 호미노이드 화석들을 총점검 하였다. 그 결과 中新世 후반의 호미노이드 화석은 Lewis가 발표한 라마피테쿠스와 같이 송곳니가 비교적 적고, 치열(齒列)이 포물선형을 띄우며, 大印齒의 에나멜질이 두껍고, 튀어나온 턱뼈의 경사가 약하다는, 등 사람중 특징 일부를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Simons과 Pilbeam은 이들 일련의 화석표본을 그때까지는 유인원의 화석 군으로 분류하여온 드리오피테쿠스(Dryopithecus), 시바피테쿠스(Sivapithecus), 브라마피테쿠스(Bramapithecus),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 등에서 라마피테쿠스만을 따로 분류하여 Ramapithecus punjabicus 라는 새로운 학명을 부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신세 호미노이드 화석에대한 연구가 아주 활발히 진행되면서 라마피테쿠스에 대한 새로운 학설에 많은 지지를 얻게되었다.

그러나 Simons과 Pilbeam의 학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또 다른 많은 새로운 화석이 발견되면서부터 原人으로 정의 되어온 라마피테쿠스는 유인원의 화석인 시바피테쿠스와 매우 유사하여 人類的이 아니란 것이 지적되기 시작, 라마피테쿠스=원시인류란 도식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또 이들 라마피테쿠스의 분포가 동아프리카지역에서부터 유럽, 동남아시아, 중국남부 등 지역적으로도 아주 넓은 분포를 갖게 되며, 연대도 약 700 만년 전부터 1,300 만년 혹은 그 이전까지의 연대의 화석에도 발견되어져 라마피테쿠스는 화석 유인원인 시바피테쿠스와 동일속이거나 혹은 동일종의 자웅(雌雄)일 가능성이 있음이 시사되었다.

또 Simons과 Pilbeam이 라마피테쿠스 화석을 발표할 당시에는 상하의 턱뼈와 치아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나, 1978년부터 198l년에 파키스탄과 중국에서 보존성이 아주 좋은 두개골(頭蓋骨)의 자료가 추가되고, 터어키에서는 위턱뼈와 안면부의 화석이 출토되면서, 현재에도 살아있는 유인원중 오랑우탕과 아주 유사한 형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한편 분자계통학에 의한 호미노이드의 계통 分岐 년대의 추정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람과 유인원과의 分岐 시기가 400만년 내지는 600 만년 전쯤일 것이라는 발표에 의해서도 중신세의 라마피테쿠스를 초기 원시인이 아니라는 진화론학자들 간의 상이한 주장도 발표되고 있다.

한편 1980년 중국 운남성(雲南省) 祿豊에서는 시바피테쿠스의 頭蓋와 함께 보존상태는 그다지 좋지못하나 대망의 라마피테쿠스의 頭蓋가 발견되어 그의 연구성과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83년 중국의 吳, 徐, 陸등의 연구결과 頭面이나 頭蓋의 윤곽, 眼의 형태 등으로 보아 시바피테쿠스는 오랑우탕의 선조라고 결론지었으며, 동시에 몸체도 적고 송곳니도 퇴화한 라마피테쿠스도 기본적인 형태의 특징은 시바피테쿠스와 일치함으로써 오랑우탕의 雌이었던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라마피테쿠스가 초기의 원시인이라고 주장하였던 Pilbeam 교수도 지금에 와서는 자기의 옛 학설을 전면적으로 철회하고 있으며, 라마피테쿠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있다. 즉 ①원래의 분류에는 그다지 유용하지도 않은 턱뼈와 치아의 화석만으로 학설을 주장하였던 점, ②중신세 호미노이드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다양성에 현혹되었던 점. ③그 외 화석학 이외의 연구분야 예를 들면 비교해부학이나 분자계통학 등의 성과를 무시하였던 점등을 들고있다

1932년 Lewis에 의해 처음 발견된 후 약30년 간이나 잠자고 있다가 별안간 초기의 원시인의 위치까지 올라갔던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 그러나 이번에는 또 완전히 뒤바뀌어 오랑우탕의 선조인 시바피테쿠스(Sivapithecus)의 雌으로 그 학명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놓여있는 기구한 운명의 라마피테쿠스, 이상이 초기의 原人으로 우리가 배워온 라마피테쿠스의 실상인 것이다. 현재에도 화석은 여전히 단편적인 것만이 발견되고, 그 전체상을 갖는 화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치아나 턱뼈만으로 한정하여 본다면 분명히 라마피테쿠스는 사람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 실상은 전혀 다른 오랑우탕의 것이었던 것이다. Dental Hominod 라고 할 수 있을까?

Le Gros Clark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형태의 전체상(Total Morphological Pattern)을 갖춘 인류진화의 계보와 출현은 어느 때쯤 완벽한 증거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분명히 밝혀지기까지는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화석자료의 발견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니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로만이 이해될 수 있는 거룩한 힘일 것이다.


창조. 제 40호. 1987년 1월. 

화석 인류진화론의 실상과 허상 (Ⅱ)

유익동 박사
(KAIST, 유전공학센터, 미생물생태연구실장, 본회임원)

(전호에서 계속)

전호에서는 인류의 原人으로 알려졌던, 라마피테쿠스(Ramapithcus)의 기구한 운명을 기술하였다. 즉 우리가 그동안 인류의 원인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워온 라마피테쿠스의 실상은 원시인류의 화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오랑우탕의 선조라고 알려진 시바피테쿠스(Sivapithecus)와 동일종의 화석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결론지어졌던 허상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Ramapithecus를 최초의 원인으로 발표하여 일약 인류학자로써의 명성을 얻었던 예일대학의 필빔 교수도 최근에 와서는 그 학설을 번복 발표하고 있어, 우리는 물론 화석인류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까지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미지의 유인원의 일종'으로 소개되며 인류猿人의 또 다른 학설로 우리들에게 접근하여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학문적인 사실과 과학적인 근거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인류의 猿人으로 알려진 Australopithecus의 실상
 

전호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Australopithecus는 1924년 남아프리카의 해부학자인 다트(R. A. Dart)가 다우닝 채석장에서 출토된 동물화석중 유인원과 유사한 조그만 頭骨의 화석을 발견하면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다트는 이 화석을 발견한 후 그 다음해 Nature란 잡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즉, '뇌두개에 대한 안면두개의 비율이 유인원보다 약간 적고, 튀어나온 턱뼈의 경사가 약하며, 치열의 형태도 포물선으로, 송곳니가 적고, 치아의 간격도 그리 넓지 않다. 또 아래턱뼈의 중앙부위에는 원숭이와 같은 구조를 갖지 않으며, 대후두공(大後頭孔)의 위치가 비교적 전방에 있어 직립자세와 손의 사용을 추측할 수 있다. 두개공(頭蓋孔)의 용적은 고릴라와 큰 차이는 없으나, 작은골에 비하여 큰골의 비율이 고릴라보다 커, 이상의 결과들로 보아 유인원보다 진화된 人類猿人의 화석' 이라고 논술하였다. 그리고 이 화석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트에 의해서 '인류원인의 화석'이라고 보도된 이 논문은 오랫동안 학회에서 무시되어져 하나의 학설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다트가 발견한 화석의 두개골은 두개골중 몇 개의 특징과 치아는 사람과 비슷하였으나, 전반적으로는 원숭이와 흡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Australopithecus를 인류의 猿人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보다는 인류와는 다른 별개의 원숭이의 화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지배적이었다. 

다트에 의해 Australopithecus의 화석이 발견된 지 30여년이 지난 1959년 루이스 리키(R. Leakey) 부부는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진잔트로푸스보이세이(Zinjanthropus boisei), 또는 동아프리카인 이라는 화석을 발견하여 새로운 인류원인의 화석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 시켰다. 루이스 리키 부부의 연구 결과는 곧 미국의 지질학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의 후원을 받으며 지질학협회지에 과장되게 게재되면서, 많은 선전효과를 얻게되어 점차 인류원인의 화석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화석은 나중에 30여년전 R. A. Dart가 발견한 화석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리키(R. Lakey)조차도 자기들이 발견한 Zinjanthropus boisei는 다트가 남아프리카에서 발견한 Australopithecus의 변종임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국 지질학회의 후원을 받고 발표된 이 학설은 학회의 후광에 의해 어느 사이엔가 기정사실화 되어버렸고, 그 덕분에 Dart가 발견한 Australopithecus는 특별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인류원인의 화석이라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화석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Australopithecus는 비교적 몸체가 적고 작은 턱과 치아를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와 비교적 몸체가 크고 큰 턱과 치아를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Australopithecus robustus)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이들의 연대를 보면 A. africanus는 약 200~300만년 전의 것으로, A. robustus는 약 150~200만년 전의 화석으로 평가되며, A. africanus 로부터 A. robustus로 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또 이 동물들의 골반과 다리뼈 조각중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이들 화석의 일부를 근거로 하여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하는 것들은 직립보행 하였을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의 연구결과로는 A. africanus와, A. robustus는 시대적으로나 장소적으로 보아 서로 중복되면서 생존하게 되었고, 그 후 둘 다 멸절되어 버렸다는 학설이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쥬커만(Solly Lord Zukerman) 경과 미국 시카코대학의 해부학 및 인류학 교수인 옥스나드(Charles Oxnard) 박사는 Australopithecus의 인류원인의 학설을 부인하고 나섰다. 쥬커만경이 이끄는 연구팀은 15년 이상에 걸쳐 꼬리있는 원숭이, 꼬리없는 원숭이 및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 화석의 해부학적 특징들을 연구했다. 그 결과 쥬커만경은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내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지위에 관한 해부학적 주장을 검토할 때마다 거의 실패로 끝났다' 라고 실토하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한낱 원숭이에 불과하며, 인류의 기원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옥스나드 교수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한 연구결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사람처럼 똑바로 서서 걸은 것이 아니

라 오랑우탕과 비슷하게 걸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옥스나드와 쥬커만 경의 견해가 옳다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확실히 인류의 조상도 아니며 원숭이와 인류사이의 중간형태도 아닌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유인원으로 인류의 猿人에 속한다는 주장은 치열과 직립보행을 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치열을 살펴보면 앞니는 비교적 작지만 어금니는 넓고 크며, 턱도 크고 몇몇의 경우에는 몸집도 크다. 또한 현존하는 개코원숭이 등의 많은 특징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비슷하다. 이와같은 사실은 특별히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猿人 이라는 증거에 상반되는 결과들이다. 따라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류猿人의 화석으로 이로부터 인류가 진화되었다는 인류진화론 학자들의 주장이 특별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 아니란 것이 판명된다.


Australopithecus afarensis (아팔 猿人)의 실상
 

한편 1970년대에 들어서서 화석 인류 진화론 학자들의 커다란 성과로 들고 있는 것은 이디오피아 아팔지방의 하달(Hadar)과 탄자니아의 리에트리(Laetoli)지방에서 300만년을 넘는 형태적으로도 일층 원시적인 특징을 갖는(?) 화석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 원인은 통칭하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라 불리우고 있다.

라에토리(Laetoli)의 원인화석은 턱뼈와 치아만으로 구성된 화석으로 약 360만년 전의 2족보행의 흔적 비슷한 화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화석 인류학자들은 이 발자국이 踵부터 발의 외측부에 체중이 걸려있고,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과 평행으로 되어있다는 것 등을 들며, 유인원의 발자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 하달(Hadar) 화석도 약 280~340만년 전의 지층에서 Johanson과 Taieb 등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이들 화석의 특징도 골반이 유인원과 같이 가늘고 긴 형태가 아니고, 2족보행에 적합한 골반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인류와 비슷한 2족 보행적응형태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스턴과 수스만(J. T. Stern과 R. L. Susman)의 연구결과로는 이들 하달의 화석은 현대인에 비하여 관골의 외측면이 너무나 뒤를 향하고 있어서 2족 보행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하며 하달화석의 2족 보행을 부인하고 있다. 또 라에토리 화석의 발자국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엄지발가락의 인상이 인류에 비하여 훨씬 약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 외 아팔원인이 인류로 진화되기 시작한 초기의 원인으로 진화론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이유중의 하나는 뇌의 크기를 예로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포유동물(哺乳動物)은 뇌의 무게 E와 체중 P 사이에는 E = k P2/3 라는 관계가 성립한다고 제리슨(H. J. Jerison)은 보고하고 있다. 이때 k치는 현생포유동물은 약 0.12. 영장류들은 약 0.24, 현생인류는 약0.79~0.94% 라고 알려져 있다.

화석으로 보는 인류의 경우에는 뇌의 무게는 두개공(頭蓋孔)의 용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나 체중을 정확히 추정하기에는 거의 곤란하다. 그러나 토비아스(P. V. Tobias)에 의해 보고된 아프리카누스 화석의 대체적인 추정(뇌의 무게 500g, 체중 25kg)을 가정하여 위식에 대입하여 구입한 k치는 0.59라는 k치가 나왔다. 이 결과를 근거로 하여 침팬지의 k치 0.26%~0.32에 비하여 약간 크기 때문에 사람으로 진화하는 도중의 원인이라고도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뇌의 무게는 두개골의 화석으로 어느 정도 계산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체중 25kg 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신빙성이 희박한 것이고, 단지 k치를 침팬지나 사람의 중간정도에 놓기 위해서 설정한 체중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뇌의 용적만 보고 어떻게 체중을 과학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체중은 동물의 자웅이나 어미, 새끼에 따라서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기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개개의 개체에 따라서도 그 변이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0.59라는 k치는 전혀 과학적인 합리성이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아팔원인의 화석에 대한 완전한 頭蓋는 아직도 발견된 것이 없기 때문에 뇌의 무게조차도 정확한 추정을 할 수가 없는 실정이고, 그 위에 체중까지 추정하여 계산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약적인 논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으로 인류의 조상이라고 소개되어 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우리에게 접근하여 온 과정과 그 실상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낱 몇 개의 두개골 파편, 아니면 턱뼈나 치아의 일부만으로 상상으로 추측하며 인류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에 의해 잠시는 우리를 현혹시키나 곧 그 진상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 화석 인류 진화 학설의 실상이라 하겠다.

 


출처 - 창조지, 제 40호 [1987. 1]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5

참고 : 6623|6621|6606|6605|6560|6521|6476|6425|6423|6305|6292|6271|6243|6190|6052|5952|5948|5819|5818|5802|5768|5796|5701|5528|5525|5507|5496|5492|5455|5406|5375|5349|5334|5218|5180|5155|5157|5129|5051|5025|4880|4847|4842|4833|4824|4820|4812|4785|4763|4751|4720|4709|4682|4660|4650|4626|4593|4563|4499|4498|4432|4410|4372|4315|4266|4176|4053|4007|4000|3989|3988|3890|3867|3848|3834|3656|3431|3419|2769|1457|577|576|3093|2387|2523|1452|1446|2712|879|2325|2149|1454|1441|1440|390|1206|1207

미디어위원회
2004-07-24

자바인의 실체

유익동 


1. 서론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연구는 주로 고생물학자 및 인류화석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어 왔는데 지금까지는 화석의 형태적 특징과 추정연대를 근거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인류진화의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증거품으로는 침팬지나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중간단계의 화석의 발견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와 같은 가장 확실한 증거품이 될 수 있는 진화과정 중의 화석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많은 인류진화론 학자들은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는 중간단계의 화석(혹은 빠진고리,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를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왔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리하게 빠진고리를 끼워 맞추려 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인류원인이라고 배워온 쟈바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인류원인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왔던 쟈바인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개되었는가?

 

2. 쟈바인이 인류原人으로 알려지게 된 동기 

네덜란드의 외과의사였던 듀보아는 인류 진화의 빠진 고리를 볼 수 있는 진화단계의 화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군에 입대한 다음, 인도네시아의 쟈바섬으로 파견을 원하여 화석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891년의 어느 날 듀보아는 트리닐(trinil)지방의 솔로강(solor river) 언덕에서 부서진 두개골의 파편조각과 2개의 어금니를 발견하였고, 그 후 약 1년이 지난 그 다음해에는 두개골의 파편을 발견한 곳으로부터 약 15m 떨어진 곳에서 넓적다리뼈하나를 발견하였다. 발견된 두개골은 이마가 낮고 경사졌으며, 눈두덩이가 두터웠다. 또 뇌의 용적은 900cc 정도로 판단하고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인류진화의 빠진고리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1895년 독일의 라이덴에서 열린 국제동물학회 (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에서 이 화석이 인류원인인 쟈바인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쟈바인은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인류의 原人이라고 결정지어 졌고, 오늘날까지 국내의 교과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오고 있는 쟈바인은 실제적인 인류원인이며, 지금도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쟈바인은 인류의 원인이 아니라 침팬지나 긴팔원숭이의 화석으로 밝혀졌고, 또 학계에서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쟈바인에 대한 문제점의 제기

이상과 같은 쟈바인의 학설은 실제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었다. 듀보아에 의해서 쟈바인이 처음으로 보고되었을 때 제일 먼저 지적되었던 것은 부서진 두개골 파편과2개의 어금니 그리고 약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넓적다리뼈 등이 동일한 생물의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듀보아는 수집된 쟈바인의 뼈들은 악어에게 잡혀 먹다가 남은 뼈 중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아마도 그 뼈들이 강물에 휩쓸렸기 때문에 각각 15m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의견을 달았다. 그러자 또 많은 학자들은 쟈바인의 뼈들이 묻힌 그곳이 50만년전에도 강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고생물학자로 유명한 헥켈의 전임교수이었던 루돌프 휠쇼는 듀보아가 상기의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를 공개하기 위하여 1895년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그 회의의 좌장 맡기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는 듀보아가 수집하였을 당시 주장한 것과는 달리 두개골에서 보여주는 봉합선은 사라져버린 유인원과 동일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판단으로는 쟈바인은 인류 原人의 뼈가 아니라, 커다란 긴팔원숭이의 뼈에 불과하다. 게다가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 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까지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권위있는 전문가 교수로부터의 공격을 받게 된 듀보아는 차츰 자신이 발견한 쟈바인 화석에 대한 주장이 줄어들게 되었고, 나중에는 적당한 거짓말로 그냥 덮어버릴 때가 많게 되었다. 

듀보아가 쟈바섬에서 귀국한 당시 그는 215 상자에 달하는 많은 화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화석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쟈바인 화석은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 각 1개, 그밖에 몇 개의 다리뼈와 2개의 어금니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듀보아는 그 화석들이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原人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듀보아는 두개골 파편의 뇌용적을 900cc로 측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두개골의 파편조각으로 그와 같은 정확한 뇌용적을 계산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의문지워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듀보아는 발표하지 않고 감춘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쟈바인을 발견하였던 그 전해에 거의 같은 지층에서 현재의 인간의 두개골과 같은 화석 2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듀보아는 그 인간의 두개골 화석을 발표하면 혹시 쟈바인으로 발표한 두개골 파편조각의 화석도 현재의 인간의 것으로 인정이 되고 그렇게 되면 강하게 비판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염려한 때문이었다. 듀보아는 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밖의 넓적다리뼈 조각과 다른 이빨 한 개를 다른 화석들과 함께 부엌의 선반에 감추어두고 있었다. 그것들도 결국은 고생물학자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1920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계속 발표하였다.

 

4. 쟈바원인의 제2차 탐색 

당시 고생물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폰·퀘니그스발트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가 듀보아의 뒤를 이어 새로운 화석의 발견을 위해 쟈바섬로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듀보아의 집을 방문하였을 당시 놀란 것은 수집한지 40년 정도는 지났을 것으로 보이는 보존상태가 아주 나쁜 화석컬렉션들이었다. 더구나 그 화석들 중에는 라벨이 없어 무슨 화석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던 것이다. 1906년 폰·퀘니그스 발트에 의한 쟈바에서의 2차 발굴은 듀보아의 발견에 더욱 많은 의혹을 줄 뿐이었다. 그는 듀보아가 쟈바인을 발견한 장소와 동일한 곳에서 지하 12m까지 파 내려가 총 10,000입방야드의 흙을 체로 쳐가면서 새로운 화석의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쟈바인의 뼈는 1개도 발견치 못하였다. 결국 그 장소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사람의 뼈 1개와 타다 남은 목탄뿐이었다. 그 후 1930년대에 들어와 폰·퀘니그스발트는 이번에는 그곳으로부터 약 65㎞ 떨어진 지점에서 새로운 두개골의 파편조각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듀보아가 발견한 두개골과 아주 비슷하였으나, 크기가 약간 적고 복원시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었다. 또 1953년과 1961년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조사 결과, 듀보아가 발견한 쟈바인의 화석은 단지 커다란 긴팔원숭이나 침팬지의 화석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5. 결론

침팬지나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중간단계의 인류원인이라고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쟈바인의 실상은 알고 보면 무리하게 빠진 고리를 끼워 맞추려한 한 외과의사의 선입견과 명예욕 때문에 빚어진 잘못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성경말씀에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신 의지와 창조의 섭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창세기1장 26절~31절)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자기모습을 닮은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내가 온 땅의 씨맺는 식물과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으니 그것이 너희 양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에게는 푸른 풀과 식물을 내가 먹이로 주었다.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것을 보시니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하였다” (창세기 1장 26절~31절).

 

출처 - 창조지, 제 69호 [1990. 5~6]

김기태
2004-07-24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가? 원숭이의 후손인가?


      진화론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화의 과정을 뒷받침하는 유인원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진화론에 대해서 가장 큰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이 바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일 것이다. 적어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동물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자부하던 인간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일텐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에 쉽게 수긍하고 있다는 점도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화론의 주장은 과연 타당성이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확보되어 있는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그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즉 도구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 직립보행으로 이행되는 과정과, 지능의 발달에 따라 뇌의 용적이 확대될 것이므로 그것을 담는 두개골의 용적이 커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는 상상도들을 보면 구부정한 모습에서 점차로 꽂꽂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서의 변화와 두개골의 모양이 원숭이의 모습에서 점차로 현대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의 중간에 서 있는 유인원들이 과연 화석으로 발견되었고, 그것이 진짜로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형태의 것이라는 명백한 해석이 내려지고 있는지를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유인원의 화석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들은 대개 완벽한 전신의 원형을 추론하기에는 훨씬 미흡한 두개골의 일부분 또는 신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턱뼈, 치아, 부숴진 두개골의 일부 조각, 환도뼈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직립보행의 정도나 두개골의 정확한 윤곽 및 용량 등을 추론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리이다. 즉 어느 정도가 사람에 가깝고 어느 정도가 원숭이에 가까운 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매우 간접적인 기준이 발견된 화석에 대한 평가에 적용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턱뼈에 있는 치아의 배열형태나 두개골의 안면경사각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전문치과의사들도 고릴라의 턱뼈와 사람의 어린아이의 턱뼈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고, 안면의 경사각은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이 인류의 진화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생물학 관련 서적에 버젓이 그림으로 소개되고 있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한 상상도는 진짜로 상상도에 불과하지,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거의 초기의 인류로 소개되고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은 두개골의 용적에서나 외형상 완전히 원숭이과에 속하는 하나의 동물의 것이고, 치아의 배열형태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인간적인 특징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쥬커만 경은 그 화석을 원숭이의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기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분석한 바도 있다. 결국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한 분석들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인류의 조상도 아니고, 원숭이와 인류의 중간형태도 아닌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는 자바인의 경우는 그것을 발견한 듀보아라는 화란의 외과의사가 죽기 전에 스스로 긴팔원숭이의 것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듯이 인류의 진화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특히 자바인의 경우는 두 번에 걸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각각 발견된 두개골의 윗부분과 대퇴골 그리고 두 개의 어금니를 모아서 구성된 것이었으니, 자료 자체의 신빙성에서부터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하겠다. 북경인의 경우 30개의 두개골과 11개의 턱뼈, 그리고 147개의 턱뼈를 기초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자료는 치아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분실되어 버렸으므로 그당시 진화론자들로만 구성된 학자들의 견해만으로는 인류의 기원에 관한 논쟁의 증거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겠다. 

어처구니 없었던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는 네브라스키인과 필드다운인을 들 수 있다. 네브라스키인은 후에 멸종된 멧돼지의 어금니로 판정된 치아 한 개로 구성되었던 유인원이고, 필트다운인은 원숭이의 턱뼈와 인간 두개골의 윗부분을 교묘하게 조합해서 조작했던 유인원이었다. 이들 예는 인류 진화론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화석자료에 빈곤을 느꼈었는가를 반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가장 최근의 인류의 조상으로 소개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은 어떠한 면에서도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두개골의 용적이 현대인들보다 100cc 가량이나 크고, 전체적인 체격도 현대인들보다 커서 오히려 진화의 방향을 역행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창조과학회에서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아주 좋았던 환경에서 살아가던 인류들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없다. 더우기 최근의 분자생물학적 연구는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모두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역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아담과 이브를 만드셔서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성경의 계시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르며 하나님을 섬기고 나머지 피조계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2/e29/e29c1.htm

출처 - 창조지, 제 98호 [1996. 7~8]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74

참고 :

Omniology
2004-04-27

원숭이(중간형태)인간 루시, 럭키, 어린 루크의 복원

  

 

 

 

 

 

 

 

 

 

 

 

 

 




 

 


이러한 '상상적인' 복원은(위의 그림) 합리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진화라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자기 도취적인 신념에 의하면 인류는 원시적인 조상으로부터 오늘날의 현대인인 Homo sapien sapien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복원들 모두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진화론적 신념에 의한 자유로운 진화논리적 해석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학문적인 엘리트들은 그들의 행동을 함께 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차이는 다음과 같이 일어난다. 한 지체 높은 학자는 루시와 럭키는 사람보다는 원숭이에 가깝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원숭이 보다 사람에 가깝다고 말한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그들은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말들에 대해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을 입증할 명백한 경험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원들 모두는 단지 루시와 럭키의 조각난 두개골 파편의 불완전한 화석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

 

 

 

 

 

 

 

 

 

  

 

 

 

 

 

 여기에서 제시된 그림은 '인류의 시작 (Beginnings of human kind)' 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과학자가(Tim White) '여러 개체의 부분들을 사용해서' 하나의 두개골을 재복원하고, 전 세계의 과학자 집단들은 그것을 '인류 진화의 증거' 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성적으로 부정직한 것이며, 학문적인 사기인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omniology.com/LUCY-LUCKY-LittleLUKE.html

출처 - The California Institute of Omniology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75

참고 : 577|1457|2769|3419|3643|5768|5796|6292|6425|6476|6423|6305|6271|6243|6190|6052|5952|5948|5819|5818|5802|5701|5528|5525|5507|5496|5492|5455|5406|5375|5349|5334|5218|5180|5155|5157|5129|5051|5025|4880|4847|4842|4833|4824|4820|4812|4785|4763|4751|4720|4709|4682|4660|4650|4626|4593|4563|4499|4498|4432|4410|4372|4315|4266|4176|4053|4007|4000|3989|3988|3890|3867|3848|3834|3656|3431

미디어위원회
2003-12-10

네브라스카인의 재조명 

: 돼지 이빨 하나로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 유인원

(Nebraska man revisited)

Ian Taylor 


      돼지 이빨(pig's tooth)을 가지고 인류의 진화론적 조상인 유인원으로 재구성되었던, 지금은 폐기된 네브라스카인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뉴욕 자연사 박물관(New York's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의 고인류학 책임자였던 헨리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 박사가 1922년 2월 이 화석 이빨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았지만 그것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주의자며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저명한 멤버였던 그는, 미국 공공학교에서 진화론의 가르침을 법적으로 금지하려는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연맹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25년 테네시주 데이톤(Dayton)에서 열릴 재판(스코프스의 원숭이 재판(Scopes Monkey Trial)으로 알려지게 된)에서 귀중한 증거로서 그 이빨을 바라보았다.      


재판은 준비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빨은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증거로서 제출되지는 않았다.  1923년 1월 6일 미국 박물관 수련생(American Museum Novitiates)들에 의해서 진실은 천천히 그리고 희미하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9 명의 권위자들은 그 이빨이 영장류와 관계된다는 주장에 대한 그들의 반대 주장을 인용했다. 더 많은 연구가 1927년 원래 발견 장소였던 Snake Creek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화론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이빨은 오늘날의 멧돼지(peccary) 또는 야생 돼지(wild pig)와 관련이 있는 멸종된 종(species)인 Prosthennops 라는 동물의 것이었다고 결론내려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개 뉴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Science 지에 개제되었다. (1927, 66:579).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14판(1929, 14:767)에서도 그것은 실수였으며, 이빨은 또 다른 목에 속하는 것이라고 어렵게 인정하였다. 당혹감에 대한 부담은 지금은 은퇴한 헨리 오스본에게는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학자들은 그 이빨은 멸종된 돼지의 것이었다고 믿으며, 그 일을 잊어버렸으나, 1972년 Ralph Wetzel는 한 떼의 이러한 동물들이 파라과이의 챠코(Paraguay's Chaco)에 잘 살아있음을 발견했다. Wetzel은 이 발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Science (1975, 189:379) 지에 보고하였다. 거기서 이 동물은  Catagonus wagneri 속(genus)으로 승인되었다. 이 새로운 종은 멸종된 종인 Catagonus wagneri 와 유사함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화석 기록은 단순한 어제의 기록이 되어버렸다.

 

.네브라스카인과 그 이름을 명명한 Henry Fairfield Osborn.


* Ian Taylor, A.I.M., is a Toronto-based writer and researcher. A university graduate from London, England, he spent 20 years as a researcher in North America. He is author of the popular book, In the Minds of Men (above).

  

*참조 : Pig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627/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human-evolution/piltdown-man/nebraska-man-revisited/

출처 - Creation 13(4):13, September 1991.

미디어위원회
2003-10-16

유인원의 허구 5 : 신구인의 실상

임번삼


(4) 신구인(新舊人)의 실상

진화론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짐바부웨)와 중동지방(이라크)에 나타난 구인(舊人) 네안델탈인(Neander Valley, Germany 3-20만 년 전)과 교체가 되었는데, 이들은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구인들은 다시 3만5천 년 전부터 유럽지역으로 진출했으며, 크로마뇽인과 같은 신인(新人)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신인이 현대인류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구인의 멸절 이유는 당시에 공존했다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와 혼혈이 되어 현생인류로 진화했다는 주장과, 신인에 의해 멸절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신구인들은 현대인과 허리가 약간 굽은 것 이외에는 거의 유사하므로, 원시인으로 판단하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 부르게 되었다. 현생인류는 이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ce sapience)라는 긴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신구인을 통합하여 호미니드라 부르고 있다.


① 네안데르탈인 (The Neanderthal Man, Homo sapience neanderthalensis) 

 

 네안데르탈인은 라인강변의 네안델동굴(Neander Valley, Dusserdorf, Germany)의 채석장에서 발굴한(1856) 두개골 상부와 다른 유골을 토대로 한 것이다(그림 17). 이것은 인근 학교의 교사인 훌롯(Fuhlrott)의 손을 거쳐 본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샤프하우젠(Schaffhaugen)에게 전달되었다. 아일랜드의 해부학자인 킹(King 1864)은 이 유골의 주인공을 호모 네안델탈렌시스라 명명하였다.

작은 키(152cm)에 뇌의 용적(1600cc)은 현대인(1450-1500cc)보다 오히려 약간 컸다(Robert Charroux et al 1974). 전반적으로 현대인과 유사하면서도 두개골은 좁았으며, 넓은 뺨과 뒷머리에 토끼뼈와 같은 융기를 가지고 있으며(Carl Hodge 1988), 완만한 안면경사각과 원숭이처럼 굽은 척추뼈 때문에 구인(舊人)으로 명명이 되었다. 평균수명은 29.4세로 추정하였다. [한국일보타임-라이프, p180, 1978]. 그 후, 이태리의 한 동굴속의 습지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발자국화석을 발견하였다(사진 20). 이들은 작은 키에 짧은 다리, 큰 머리와 큰 코를 가졌으며 구석기인 무스티에 석기(Mousterian Stones)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례와 종교의식 및 식인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어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1908년에도 프랑스의 라샤페르(La Chapelle-aux-Saints)에서 발굴되어는 데, 파리 인류학연구소장인 부울(Marcellin Boule)은 유인원으로 판단하고 반인반원의 상상도를 그렸다. 부울은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도 사람도 아닌 진화의 별도의 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등이 꾸부정한 <동굴사람>(Cave man)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진화고생물학자인 윌포프 교수 등은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적수준은 현대인과 동일하며, 두 종족이 이스라엘 인근의 중동지역에서 5만 년간 공존했었다고 주장하였다. 크링스(Krings et al 1997) 등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유전자증폭실험(PCR)을 한 결과, 이들이 현생인류와 다른 인종임을 확인하고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로 분류하였다. [Cell, 90, pp 19-30, 1997]

그러나,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을 현대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크링스의 실험은 샘플의 채취과정에서 오는 오염가능성과 유전자증폭장치(PCR)의 측정에러 외에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mtDNA) 간의 차이가 현대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mtDNA에 대한 실측결과 현대인과 네안데르탈인 간의 오차(22-36 base pairs)가 현대인 간의 오차(1-24 base pairs)의 크기와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다.

독일 본대학의 마이어 교수(F. Mayer)는 이들이 1814년에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했던 러시아의 코사크족 군인의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비타민 D결핍에 의한 골연화증으로 동굴에서 쉬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저명한 세포학자이면서 병리학인 베를린의 버효(Rudorf Verchow of Berlin 1821-1902)는 병리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네안델탈인의 유골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들에게 공통적인 사항은 관절염을 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유는 비타민의 섭취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허리가 굽은 것은 이 때문이며, 이들의 신장은 170cm 이상이었고 뇌의 평균크기(1,600cc)도 현대인들(1,500cc)보다 더 큰 인종이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들은 현대인의 두개골보다 평균 13%가 크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진화론자인 도브잔스키(T. Dobzhansky)는 "현생인류라 할 수 있는 네안델탈인의 두개골 용적은 현대인과 같거나 더 크며...두개골 용적으로만 본다면 현대인보다 더 진화된 존재”라 하였다. [T. Dobzansky; Changing Man, Science, No. 155, 1965]

이러한 발견 후 50여년이 경과한 후 죤스홉킨스 대학의 병리학자인 스트라우스(Straus 1957)는 이 유골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부울이 주장한 긴 발톱이 물건을 잡기에 적합하다고 한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이 구루병으로 척추와 턱뼈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 내었다. 이렇게 하여 버효가 주장한 이론이 부울보다 옳았음이 판명되었다.

미국 미시간 대학의 인류학자인 브레이스(C. Loring Brace 1979)는 이 유골이 서북 유럽인과는 다른 독립된 두개골의 형태로 분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Loring C. Brace; The stage of human evolution, 2ed., Englewood Cliffs, N.J., Prentice Hall, 1979]  그리고, 홋지(Hodge)는 덴막인, 노르웨이인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최근, 렌스버거와 메턴스(Boyee Rensberger & Jay Matterns 1981) 및 아이반호(F. Ivanhoe 1970)도 이 유골의 주인공이 비타민 D부족으로 곱추병을 앓은 환자라고 하였다. 아이반호는 "네안데르탈인이 굽어 있는 것은 큰 유인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꼽추병 때문이었다. 3만5천 년동안 동굴에 살면서 섭취한 음식물에는 분명히 비타민D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Nature, August 8, 1970]. 이러한 이유로 네안데르탈인들이 살았던 시대는 항상 빙하기였을 것이라는 추리가 나오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들이 최후의 빙하기가 시작된 11만 년 전 지중해 연안과 유럽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그림 18).

이상의 자료들로부터 네안데르탈인은 불을 사용하고 사냥을 하며 장식품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는 완전한 현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노아홍수 직후에 아라랏산으로부터 유럽쪽으로 이동한 인류의 후예들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나,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다. 네안데르탈인의 어금니의 마모도를 측정한 결과 이들이 평균적으로 150-220세를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보고가 이러한 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인도의 한 부족인 문다족(Munda, India, 사진 21)과 유사한 인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Taylor; ibid. p 215]

최근에 새로 개발된 연대측정법인 전자스핀공명법(Electron-spin Resornance Method)으로 갈릴리지역(Galili, Israel)에서 발굴한 유골들을 측정한 바에 의하면 타분지역(Tabun)지역에서 나온 네안데르탈인이나 스쿨(Skhul) 및 콰체(Qafzeh)에서 나온 현대인의 유골들이 꼭 같이 12만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83개 지역에서 345개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53%에 해당하는 183개는 매장된 것이었다. 이러한 조사결과에 의한다면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종족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타임 지는 <인류의 조상>이라는 특집기사에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부울이 진화론의 압력으로(p 40)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와 원숭이의 중간고리로 만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처럼 발을 곧바로 펴지 못했고, 척추도 곧게 펴지 못했으며, 두뇌가 작았다고 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조사단(1957)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연구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인류와 다른 종임이 입증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p 41).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하였다(p 41). [Michael D. Lemonick; How Man Began?, Time, March 14, pp 35-41, 1994]

 

② 크로마뇽인(The CroMagnon Man) 

 

크로마뇽인은 프랑스의 인부들이 프랑스 서남부의 베제르 계곡을 통과하는 철로변에 있는 레제이지(Les Eyzies)마을의 크로마뇽 동굴(CroMagnon, Dordogne, South France)에서 발굴한(1868) 커다란 두개골과 작은 다섯개 유골의 주인공을 일컫는다(그림 19). 그들은 크로마뇽 동굴의 벽화를 그렸다 하여 크로마뇽인이라 명명되었으며, 두개골의 모습이 현대인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였다 하여 신인(新人)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크로마뇽이란 그 곳 방언으로 ‘큰 구멍’(big hole)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학명도 현대인처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ce sapience)로 명명되었다.

이들의 유물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데, 유인원에서 현대인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부르지 않고 항상 동굴인(cave man)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180cm의 큰 키(여자는 165cm)에 유럽인처럼 긴 다리와 높은 이마, 그리고 돌출한 턱을 가진 이들은 홍적세의 빙하 후기인 3만5천년전에 나타나 아시아와 중동지역에서 유럽, 더 나아가 미주대륙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진화학자들은 이들이 구인과는 다른 구석기를 제작했으며, 구인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의 유골이 완전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출현한 것일까?

그들은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남부유럽의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동굴벽화들을 남겼는데, 특히 사우투올로(Marcelino de Sautuolo 1879)가 발견한 알타미라 동굴(Altamira Cave, Santander, Spain)의 들소 그림은 역동성과 섬세함으로 유명하다(그림 20). 사우투올로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현생인류라고 했으나, 발견 당시에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진화론자들의 조소를 받으며 1888년에 서거하였다 한다(Schiller 1971).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1940년 9월 12일, 하버드 대학의 할람 L. 모비우스를 포함한 네 명의 청년들이 개(犬)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라스꼬 동굴(Lascaux, France)을 발견하였다(사진 22). 그 곳에는 600점의 채색화와 1,500점의 선각화(線刻畵)가 그려져 있어, 거대한 고대박물관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나, 조류에 의한 침식으로 1963년부터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이 동굴의 연대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동굴에 살았던 주인공들이 맘모스와 같은 선사시대의 동물들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수십 년이 소요되었다. 오늘날, 예술사(藝術史)를 포함한 여러 교재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진과 그림들은 벽과 천장의 굴곡을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그려진 지능적으로 배부분을 둥글게, 그리고 눈부분은 깍아내린 정교한 모습을 재현하지 못한다. [Taylor; ibid, pp 219-220]

크로마뇽인의 유골은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완벽한 현대인이라 할 수 있다. 마쉑(Marshack 1972)은 크로마뇽인들이 뛰어난 화가였을 뿐 아니라, 천체의 운동과 달의 위치를 매일 기록한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였다. 영국의 스톤헨지(Stone Henge)나 프랑스의 카르낙Carnac)을 건설한 것도 이들이 아닐까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Thom 1971). 여기에서 확실히 하여 둘만한 일은 크로마뇽인들이 동굴속에서만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물가죽만을 옷감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직조한 옷감도 사용하였으며, 머리스타일도 멋을 부려 했다는 것이다. 타임-라이프 잡지에 소개된 미네테다 모녀도(母女圖, Mineteda, Spain)를 보면(그림 21) 이들이 직조된 옷과 땋은 머리를 하고 있다(Prideaux 1973).

 

이 벽화들을 방사선 탄소원소로 측정한 결과 최소 8천 년 이상 경과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동굴 속에서 고기를 불에 구어 먹었다면 연기때문에 그림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깨끗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그림의 역사가 의외로 짧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맘모스가 같이 그려져 있는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은 맘모스와 같이 살았으며, 맘모스는 최근까지도 지상에 생존했던 거대한 포유동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림 22).

진화론자들이 봉착한 또 한가지 문제는 네안데르탈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크로마뇽인의 두뇌가 1,550-1,750cc로 현생인류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진화론적으로는 뇌용적이 커지는 쪽으로 진화하여왔다고 주장해 왔는데, 현생인류부터는 뇌가 다시 작아지는 방향으로 역진화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캠벨은 반문한다. [B.G. Campbell; CroMagnon Man, Encyclopedia Britanica, P 792, 1965]. 그래서, 진화론자이면서 고생물학자인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1857-1935)은 말하기를 "진화적 과정에서 볼 때 크로마뇽인은 우리와 꼭 같은 존재이며, 머리와 두개골은 도덕적 및 정신적 수준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뛰어난 용사이자 사냥꾼이었고 화가였으며 조각가였다”고 피력하였다. [Henry F. Oborn; Revised Guide Leaflet, No. 52, American Museum of National History, 1923] 


③ 두개골에 총탄 구멍이 있는 로데시아인(The Rhodesian Man)
일명, <브로큰 힐 맨>(Brocken Hill Man)으로 불리우는 이 유골의 주인공은 항상 인종학계의 수수께기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지금은 교과서나 일반서적에 거의 실리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 유골 역시 다른 경우에서 보듯이 선입관에 의한 상상의 작품이었다. [Taylor; ibid. pp 229-230]

옛날의 영국 식민지였던 로데지아(지금의 잠비아)에 있는 부로큰 힐의 아연탄광에서 완전한 형태의 인골이 우연히 발견되었다(1921). 묵직한 눈두덩이와 움푹 패인 이마 때문에 고대인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그림 23). 이 시기는 중간형의 호미니드가 발견되지 않아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발굴된 것이었다. 광부들은 그 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길옆에서 3-4인의 뼈들도 발견했으나 발굴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두개골은 1,280-1,325cc로 현대인의 평균치보다 약간 작았다. 진화론자들은 현재 이 유골을 네안데르탈인의 변종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그로스(Wilfrid Le Gros 1928. 12)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유골들도 부로큰힐 개발(The Brochen Hill Development Co.)에 의해 영국의 런던박물관(British Musium of National History)으로 바로 보내졌으며(1921), 필트다운인 사기사건에 연루된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가 이끄는 팀에 의해 재조립이 되었다. 그는 물고기화석(논문 600편 발표)과 인류화석(논문 30편 발표)에 가장 권위있는 학자였다. 다윈학설을 신봉한 우두워드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원숭이처럼 허리가 굽은 모습으로 걸었으리라 상상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재조립작업을 하도록 동물학관리자(assistant keeper of Department od Zoology)인 파이크라프트(W.J. Pycraft)에게 주문하였다. 우드워즈나 파이크라프 모두가 해부학자들은 아니었다. 우두워드는 왜 많은 인류학자들을 외면하고 동물학자에게 이러한 작업을 하도록 부탁했는지 쿠퍼(Bill Cooper)는 의문을 제기한다. [Bill Cooper; Rhodesian Man, Ex Nihilo Technical Journal, Vol 3, p 149, 1988]. 그들은 같은 곳에서 발굴한 허리골반 줄기뼈들을 부착하여 사이판트로푸스(Cyphanthropus, Stooping Man)라는 학명을 부여하였다. 이처럼, 재조립된 유골은 진화론자들에 의해 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호모 로데시안시스(Homo rhodesiansis)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British Museum of National  History; Rhodesian Man and associated remains, British Museum(National History) Publication, pp 1-17, London, 1928]. 이러한 명명은 우두워드가 7편의 관련논문들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눈치를 보느라 7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1928).

우드워드는 로데지아인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얼굴의 섬세한 구조로 보건데 인간진화의 마지막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피엔스의 진정한 조상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새로운 증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데지아인의 얼굴은 뇌와 해골의 모습이 네안데르탈인의 것과 거의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이 다음 단계로의 진화된 모습이다” [Arthur S. Woodward; A new cave-man from Rhodesia, South Africa, Nature, 108, pp 371-372, 1921] 즉, 로데지아인이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진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유골은 두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두개골이 광물화된 것을 보면 오래된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리그씨병(Rigg's disease)과 치석(齒石)을 앓았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치아배열이 현대인과 다르게 바뀐 것이지 오래된 치아가 아니라고 로링은 확신한다. [Lohring C. Brace; The stages of human evolution, 2nd, Englewood Cliffs, Prentice Hall, 1979]. 둘째는, 두개골 양편에 서로 다른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데(사진의 검은 점), 이는 전형적인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마이어 교수(Mair of Berlin)은 진단한다. [Herbert Went; From ape to Adam, Bobbs-Merrill, New York, 1972]. 이에 반해, 프린스(Prince & Molleson 1974) 등은 충치에 의해 종양(cholesteatoma)을 앓다가 구멍이 뚫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J.L. Price, T.I.Molleson; A radiographic examination of the left temporal bone of Kabwe Man, Brocken Hill Mine, Zambia, Journal of Archeological Science, 1, p 285, 1974].

오늘 날, 진화론자들이 발행하는 대부분의 화보들은 오른 쪽의 구멍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행히 필빔의 화보(Pilbeam 1970)에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조작된 흔적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필트다운 사건에서 유골조작을 주도했던 샤르뎅은 이 그림들을 담은 화보집을 <인류의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는데, 그는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로데시아인에 대해 해설하고 있으며, 두 장의 화보를 반페지에 실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개골의 구멍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 구멍을 아예 삭제하고 게재하였다. [Teilhard De Chardin; The appearance of man 1956, Translated by J.M. Cohen 1965] 그는 필트다운인의 유골조작에 이어 로데시아인의 그림도 조작한 것이다.

이 유골의 또 다른 조작 부위는 엉덩이뼈의 조립이다. 이 뼈들은 면밀한 조사결과 다른 동물의 것을 부수어 조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인류학자인 클라크(Clark 1928)는 말한다. "엉덩이뼈가 다른 데서 온 것이라는 사실은 희한한 일일 뿐 아니라, 포유류 해부학자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Le Gros Clark; Rhodesian Man, Man, 28, pp 206-207, 1928]

그들이 죽은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로데지아인의 사기극에 관여한 사람은 파이크라프트 외에 필트다운인 사기극에 연루되었던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보고서를 감독한 홉우드(A.T. Hoopwood), 각 사람들에게 조작업무를 부여한 박물관의 지질학 책임자였던 베더(F.A. Bather), 그리고 얼굴을 나타내지 않은 박물관의 고위 책임자들이었다고 한다. [Cooper; ibid, p15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쿠퍼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로데지아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쿠퍼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Bill Cooper; Rhodesian Man, EN Technology, vol. 3, pp 137-151, 1988].


④ 구아델로우프에서 온 숙녀(Lady from Guadeloupe) 

 

 이 숙녀의 유골은 지난 50년간 많은 교과서들에 게제되어 왔을 뿐 아니라, 대영박물관에도 전시되었던 것이므로 소개하고자 한다(Konig 1814). 이 해골은 1812년, 프랑스의 구아델로우프(Guadeloupe)라는 섬에서 발견한 것으로, 다리와 머리만 제외하고는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다(사진 23). 유골의 주인공은 5.2피트의 신장을 가진 여인으로 추정되었다. 이 유골의 특징은 뼈들이 뒤틀리고 관절들이 제위치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뼈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과서나 박물관에서는 모두 퇴거되고 말았다.

이 유골은 2,800만 년 전의 것으로 측정된 석회암에서 발굴된 것이었다. 아직 유인원에서 호미니드들이 나오기도 전에 거의 완전한 형태의 현대인과 유사한 인골이 발견되자, 진화론자들에게는 큰 혼란이 오게 되었다. 다윈은 인간이 아프리카의 옛 원숭이(Old Monkey)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들이 미주대륙으로 이주한 시기는 수천 년 전이었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다 훨씬 오래전에 현대인과 유사한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⑤ 기타

이 밖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가지의 발견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타 바바라에서의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인골의 발견이다(1923). 이 유골의 연대는 네안데르탈인의 이주 시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유골들은 현대 인디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도 판명되었다.

이와 유사한 다른 발견이 필레오세 지층(200만 년 전)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질학 조사위원회 위원장인 휘트니(J.D. Whitney 1866)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California)에서 이루어졌다. 현대인의 모습을 한 ‘칼라버라스 두개골’(Calaveras Skull)이 그 주인공이다(사진 24). 200만 년 전의 유골로 연대측정치가 나왔는데, 유골의 모습은 현대인과 닮았다.

이러한 현상을 진화론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유골이 지금까지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진화론자들의 고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만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에 맞으면 공개하고, 맞지 않으면 비공개하는 자세는 객관성을 잃은 행위라 할 수 있다. 진화론자들이 세계의 주요한 박물관의 직책들을 독차지한 결과가 가져다 주는 기이한 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미디어위원회
2003-10-14

유인원의 허구 4 :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 쟈바인, 북경원인, 네브라스카인, 필트다운인,  하이델베르그인  

임번삼 


(4) 의문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그 후, 불을 사용하고  육식을 하면서 정상적인 직립보행(erect)을 한 호모 에렉투스(160-250만년 전)가 나타나 1백만년 전부터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하였으며, 30-40만년 전 구인으로 대체되기까지 번성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큰 키(5.5피트)에 더 커진 뇌(750-1,000cc)와 작은 치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람쪽으로 더욱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처음으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는 쟈바인(Trinil, Indonesia 100만년 전)과 북경원인(Choukutien, China 50만년 전) 및 프랑스의 선사학자인 앙리 드 류므레(1966)가 아라고 동굴(동부 피레네의 도타벨, 1971)에서 발굴했다는 인골(45만년 전), 네브라스카인 등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 시기가 빙하기 초기이므로 불을 사용하고 주먹도끼를 포함한 아츄리언 돌도구(Acheulean stones)도 사용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현생인류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쟈바의 솔로강변에서 발굴한 인골(25만년 전)은 뇌용적이 1,100-1,200cc인 반면 같은 지역에서 발굴한 다른 유골(홍적세 중기의 호모 에렉투스)은 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의 많은 연구결과 이처럼 주장되어 왔던 호모 에렉투스의 유골들이 동물의 것이거나 심한 경우 새로운 뼈들을 가공한 사기극으로 판명이 되어 우리에게 놀라움을 더하게 하고 있다. 이제 그 중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쟈바인(The Java Man)

 

 듀보아(Eugene Dubois 1858-1940)는 화란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독일의 예나 의과대학(Jena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사진 10). 거기에서 7년간 독일인 스승 헤켈(Ernst Haekel)의 영향을 받아 진화론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인류진화의 ‘빠진 고리’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헤켈은 '빠진 고리‘의 이름을 피테칸트로푸스 알라루스(Pithecanthropus alulus)라고 미리 이름까지 지어 놓은 상태였다(Wendt 1972). 그 뜻은 ’말없는 유인원‘(speechless ape-man)으로 호미노이드는 사람과 외관은 같으나 단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상상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헤켈은 막스(Gabriel Max)라는 화가로 하여금 이 유인원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상상력으로 듀보아를 교육하였다.

마침내, 듀보아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좋은 취직자리들을 물리치고 화란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es)와 해군군의관 신분으로 8년간 근무하기로 계약하고 인도네시아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쟈바섬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수마트라에서 50명의 현지인을 고용하여 400상자분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유골은 화란으로 보내어 조사토록 했으나, 대부분 동물의 뼈들로 확인되었다. 그는 친구(van Rietschoten 1889)가 쟈바섬의 와드잭에서 발견한 인골을 기증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1889년부터는 쟈바의 솔로강변에 위치한 내륙지방(그림 12)을 중점적으로 탐사하였다. 

 

 그러던 중 제4기 지층에서 문제의 와드잭(Wadjac)에서 두개골(Wadjac skull 1,550-1,650cc) 두 개를 추가로 찾아 내었다. 그리고, 와드잭에서 6마일 거리에 있는 트리닐(Trinil) 지역으로 이동하여 7년간(1891-1898) 집중적으로 답사하였다. 1891년, 마침내 모래언덕 속에서 문제의 두개골(900cc 추정, 사진 11)과 어금니를 한 개씩 발굴하였다. 다음 해(1892년)에도 15m 인근에서 사람의 대퇴골과 어금니(10월)를, 1898년에는 앞어금니를 추가로 발굴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인부들이 3년간 일만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제방을 파 헤쳤다. 대부분의 뼈들은 동물의 것이었고,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치아 단 한 개(1891.9), 다른 치아 한 개와 두개골(1891.10), 넓적다리뼈 한 개(1892.8), 이어서 발견한 치아 한 개(1892. 10)뿐이었다. 더구나, 두개골은 넓적다리뼈가 발견된 곳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치아들은 두개골 지점에서 3미터 밖에서 발굴한 것들이었다(Bowden 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보아는 이 유골들이 한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조립하여 연구 검토한 결과 50-100만년 전에 직립보행을 한 현생인류의 조상의 것이라 판단하고 안드로피테쿠스 에렉투스(Anthropithecus erectus)라 명명하였다. 이는 ‘직립 유인원’이라는 뜻이다. 그 후, 넓적다리등의 모습이 인간쪽을 닮았다 하여  ‘직립원인’을 의미하는 피테칸트로프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로 개칭하였다(그림 13). 

1893년, 복무기간이 지나자 그는 일단 귀국하여 유럽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탐사내용에 대하여 강연하며 다녔다. 그 결과 명성은 얻었지만, 그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냐는 의문 때문에 학계와 교회들로부터 배척되었다. 1895년에 열린 화란의 국제동물학회(The 3rd 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 Leyden, Holland)에서 그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참석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영국학자들은 유골의 주인공을 사람의 것으로 본 반면, 독일 학자들은 원숭이로 해석하였다. 프랑스 학자들만이 그 중간형태의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유럽의 인류학자 24인이 다시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결과, 10명은 유인원(동물)으로 판정하였고, 7명은 원인(猿人)이라 하였다. 독일의 영장류 해부학자인 버효(Rudolph Verchow)는 두개골과 대퇴골이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한 동물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에는 진화론자인 웰스(H.G. Wells)도 동의하였다.

그 후, 그는 감정을 숨기고 곧잘 화를 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발굴한 유골들을 외부에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화석들은 지금도 화란 라이덴의 자연사박물관(Leiden Natural Museum)에 비밀스럽게 보관된 채 어떠한 연대측정도 한 적이 없이 보관되고 있다. 비록 부정확한 연대측정법이라 할지라도 이를 이용하여 하루 빨리 듀보아의 유골에 대한 연대를 측정하여 의구심을 풀어야 마땅할 것이다. [Taylor; ibid, p 24] 그는 1898년에는 생계를 위해 비전공 분야에 박봉인 암스텔담 대학의 결정학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1907년, 독일 과학아카데미의 세렌카 교수(Selenka)가 이끄는 조사팀이 듀보아의 발굴내용을 확인하려고 쟈바를 방문하였다. 듀보아는 그들에게 아무런 협조도 안 했을 뿐더러 유골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연구팀은 트리닐에서 만여톤에 달하는 흙을 파 헤치면서, 43박스에 달하는 화석을 발굴했으나, 듀보아가 발견했다는 내용물들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Keith 1911). 그들이 확인한 흥미로운 일 중 한가지는 듀보아가 파 내려갔던 화석들이 나오는 지층은 인근지역의 화산에서 흘러 내리는 용암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이는 쟈바인을 50만년전으로 추정한 방식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14년, 듀보아의 쟈바인은 호주에서 몇 년전에 발굴한 탈가이 두개골(Talgai Skull)의 발굴소식에 가리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엔 이미 진화인류학자들의 활동으로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가 인류의 연결고리로 인정되어 가고 있었던 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듀보아는 다시 와드잭 두개골을 공개함으로써 학계에 복귀를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도 듀보아는 자신이 와드잭 인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감추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듀보아는 자신이 발굴한 유골들이 인류의 직계조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시 와드잭(Wadjac)에서 발굴한 인골(Wadjac skull 1550-1650cc)을 30년간이나 숨겨왔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많은 학자들도 같은 지역(Trinil, 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굴한 것과 비슷한 수많은 동물뼈와 더불어 현대인의 인골을 발굴하였다.

 듀보아가 70세가 되던 해, 독일의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케닉스발트(G.H.R. von Koenigswald 1902-1982)는 4년간에 걸쳐(1935-39) 듀보아와 같은 지역(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견한 것과 유사한 유골들을 발굴하였다(사진 12). 그러나, 손발뼈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치아가 붙은 턱뼈와 두개골의 윗조각을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ropus Ⅱ, Ⅲ, Ⅳ)라 명명하면서 "듀보아가 발견한 두 어금니는 오랑우탕의 것이며, 앞의 어금니와 대퇴골은 사람의 것이고, 치아는 원숭이의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리고, "쟈바인은 원숭이와 비슷한 동물”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Franzen J.L.; In Memoriam Gustav H. R. von Koenigswald, Seckenbergiana lethaea, 64(5/6), pp 381-402, 1984], [P.V. Tobias; The Life and Work of G.H.R. von Koenigswald in auf denSpuren des Pithecanthropus, Ges., 34, pp 25-96, Frankfurt, 1984]

듀보아는 돌연히 자기가 발굴한 두개골은 원숭이의 것이며, 쟈바인은 커다란 기본원숭이(Gibbon ape)의 일종이라고 문서로 발표하였다. [W. Homells; Mankind in Marking, pp155-156, 1935]. 이는 그의 주장을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지점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고백내용은 벤트(Herbert Went 1955), 브레이스와 몬태규(C. Loring Brace & Ashley Montagu 1955), 버드셀(Joseph B. Birdsell 1975) 등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두개골 화석연구의 권위자인 부울과 발로아(Marcellin Boule & H. M. Vallois)는 듀보아가 발굴한 두개골의 윗부분을 철저히 분석한 후 "이들은 침팬지나 긴팔원숭이를 닮은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버효(Verchow of Berlin)는 두개골의 안와(眼窩)의 후면이 협착된 것으로 보아 원숭이의 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뼈들이 모두 한 생명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즉, 여러 동물의 뼈들을 조립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p 86, Michigan, 1973].

듀보아가 죽은 후(1940), 진화론자들은 쟈바인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Mayr 1950). 지금도 학자들간에는 쟈바인이 신종(중간종)인지 인간의 변종(현대인)인지 대립하며 논쟁중이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러한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었느냐는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두개골과 사람의 대퇴골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간직한 채 쟈바인을 진화학자인 톰슨(Thompson 1958)은 <다윈의 기원론>의 복사판에서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왔던 원숭이와 현생인류의 연결고리라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② 북경원인 (北京原人 The Peking Man) 

북경원인은 또 하나의 '빠진 고리'로 주장되어 온 대표적인 호모 에렉투스 중 하나이다(사진 13). 스웨덴학자 즈단스키(Otto Zdansky 1921)는 북경근교(45Km)의 쵸우코우티엔(Choukoutien 周久店)의 한 언덕(龍骨山)에서 사람의 것과 유사한 치아 두개와 많은 동물뼈들을 발굴했으나, 그는 아무런 설명없이 고국으로 돌아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카나다의 내과의사였던 블랙(Davidson Black)은 마튜(William Mathew)가 쓴 <기후와 진화>(Clime & Evolution)를  읽고서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한다. [Dora Hood; Davidson Black: A biograph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4)]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1914) 필트다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학자중 하나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로부터 필트다운인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아직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그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북경 유니온의과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dge)에 인류탐색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교수에 취임키로 하고, 1919년 부인과 함께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쟈바인을 발굴하려 했던 유진 듀보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이들은 다음 해부터 석회석 채굴장이 많이 있는 북경서남쪽 45Km지점의 주구점일대(龍骨山)를 탐사했다. 그러나, 찾던 유골은 나타나지 않았다. 1926년부터는 중국학자인 비중문(裵文中)과 양종건(揚鐘健)을 비롯하여 프랑스 신부로서 중국지질학부 고문인 샤르뎅 신부와 미국인 지질학자인 바바 등이 참여하였다(사진 14).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영국의 필트다운사건 때 거짓유물을 묻은 것으로 판명된 샤르뎅이 1923년부터 북경인의 발굴에도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당시에 교황청으로부터 일체의 저술활동을 하지 않도록 금지령을 받고 있던 때였다. 사진중앙의 세 번째 사람이 비중문이고, 중앙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샤르뎅이며, 그 옆에 담배대를 물고 있는 사람이 블랙이다. [南條郁子譯; 人類ノ起源, p 97, 創元社, 大阪, 1995, 원문은 Thomas Herbert; L'Homme avant l'Homme].

이들은 재정이 고갈되어가던 1927년에 마침내 그는 이빨 한 개를 발견하였다. 불랙(1927)은 이러한 치아의 주인공이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의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50-100만년 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라 단정하고,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 pekingsis)라 명명하였다. 치아 하나로 이렇게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명명한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저 놀랍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후, 이곳에서는 인골(10)도 발견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은 일체 발표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표에 고무된 북경유니온대학의 설립자인 록펠러 재단은 인류화석의 연구기금으로 8만불을 추가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에 거금이었던 이 돈으로 그는 100명의 인부를 발굴현장에 투입하였다. 한 암석에서 떼어낸 두개골의 용량은 1,000cc 보다 작았으나, 블랙은 이 두개골이 자기가 명명한 시난트로프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블랙처럼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헤메고 있었던 샤르뎅을 위시하여 진화인류학들인 스미스, 부울, 케닉스발트 등은 이 두개골을 보고서 원숭이의 것과 유사하며, 듀보아가 쟈바에서 발견한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쟈바인과 북경인을 한 데 묶어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 명명하였다.(Koenigswald & Weidenreich 1939, Teilhard de Chardin 1965).

 그 후에도 블랙은 1929년부터 2년간 비문중 및 스웨덴의 인류학자인 앤더슨과 같이 화석화된 두개골 파편(30개, 800-1,100CC)과 아래턱뼈(11), 대퇴골(7), 팔뼈(2), 치아(147)를 발굴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뼈들을 연결하고자 수백톤의 암석들을 폭파하였다(Day 1977, T. Chardin 1965). 그러나, 코끼리, 사슴 등의 동물뼈들만 나올 뿐 시난트로프스의 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150피트까지 지층을 파내려 갔지만,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34년, 블랙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북경인의 유골조각들을 조립하던 바이덴라이히(Frantz Weidenreich)였다. 그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북경인(Peking Man)으로 알려진 모조품인 것이다. 뇌용량 1,000cc에 50만년 전에 살았다는 원인(猿人 hominoid)으로 발표하였다. 그들은 북경인의 치아가 현대인과 약간 다르며, 불과 연장을 사용하였고 식인습관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유골의 발굴작업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계속되어 45개의 인골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그러던 중, 북경인 유골에 관하여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전까지 수집한 유골들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송하려고 북경에서 해안지방인 진황도(秦皇島)로 이송하던 중(1941.12.7) 치아 두개를 남기고는 유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한 설에 의하면 이 유골을 실은 배가 황해에서 전복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더구나, 193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여한 바이덴라이히가 만든 리스트에 기재된 14개의 두개골과 나머지의 모든 유골들도 2차세계대전 중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다. 이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진화학자들이 관리하여 오던 많은 유골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지금은 출처불명한 주형물들(casts)과 치아 두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고리’가 된 것이다. 따라서, 북경원인의 연구를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와 같은 진화학자들이 남긴 연구논문과 그림 및 플라스틱 모조품에 의존해야하므로 학술적 검증이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이다(Patrick O'Conell 1969, Shapiro 1971, Janus & Brashler 1975).

 그 후, 1966년까지 추가로 발굴된 22구의 인류화석들(남19, 여3)도 모두 파손되거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삼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이러한 의문스러운 증발사건은 진화론자들이 역사적으로 자행했던 다른 조작사례들과 관련하여 상기할 때, 그들이 프라스틱모조품을 만들 때 사용했다는 뼈조각들이 과연 진품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은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의 구석기연구교수인 헨리 부루일(Henry Breuil 1931)이 샤르뎅이 발굴했다는 동일한 장소에서 현대인이 일한 작업장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마일 밖에 있었던 돌과 뿔사슴들의 뼈들이 이 작업에 이용되었으며, 불을 지피는 용광로의 흔적도 발견했다고 한다. 이러한 흔적을 부루일은 잿더미가 7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H. Breuil; Le Feu l'industrie de pierre et d'os dans le gisement de 'Sinanthropus' a Chou K'ou Tien(The Fire and the Industry of Stone and Bone in the Layer of Sinanthropus at Chou K'ou Tien), L'Anthropologie(Paris), 42(March), p 1-7, 1932]. 이처럼 현대인이 사용한 잿더미를 진화론자들은 북경원인이 흡사 불을 사용했던 것으로 각색시켰던 것이다. [David Pilbeam; The evolution of man, Thames and Hudson, London, 1970].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하려고 대영박물관에 근무하던 마우리스(Maurice 1950)의 지휘하에 북경인이 굴속에서 불을 집히고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그림 14). 그리고, 대영제국박물관 입구의 층계길에 걸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 아니다. 불의 이용에 관하여 그들의 일원인 샤르뎅(1934)은 후일 "불의 흔적은...수미터의 깊이까지 쌓여 있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Teilhard de Chardin(1956); The appearance of man translated by Cohen, 1965] 

 그리고, 진화학자인 루캉(Rukang & Shenlong 1983) 등도 불의 흔적은 6미터나 되는 대규모의 것이라고 확인하였다. [Taylor; ibid, p 239] 그러나, 블랙과 샤르뎅(1933)은 그러한 보고내용(1932)은 무시한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 보낸 것이다. 그들은 이 글 속에서 용광로작업을 ”인공적 불의 흔적"이라는 간단한 한 마디의 표현으로 무시해 버렸다. [Taylor; ibid. pp 238-239]. 부로일은 그 밖의 다른 작업장의 유물도 추가로 발굴하여 그 지방에 조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하였으나, 그 진열품들 역시 어느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Bouden 1977).

1934년에는 현대인의 두개골(세 개는 완전한 형태)도 발굴되었으나, 샤르뎅(1965)은 '윗 동굴'(upper-cave)에서 발견된 것처럼 고쳐 기술하였다. 사실적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류의 두개골 발견사실을 감추려고 바이덴라이히(1939)는 5년간 활동하였다. [F. Weideneich; On the earliest representation of modern mankin recovered on the soil of East Asia, Peking Natural History Bulletin, 13, p 161, 1939]. 그러한 두 사람의 활동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부로일이 발견했던 방대한 잿더미나 현대인의 두개골에 대해서는 일체 소개하지 않고 있다. 진실이 이처럼 조작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은 학문적인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우든(Bouden 1977)은 브루일의 보고서가 모든 교과서와 책자에 인용되는 것을 억압하기 위하여 진화론자들이 갖은 노력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Macolm Bouden; Ape-men: Fact or fallacy?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UK, 1977]

지금까지 전해지는 에피소우드 중 하나는 샤르뎅이 스승인 부울을 주구점에 초청했을 때 부울은 부스러진 원숭이의 두개골을 보고서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현대인들이 (과거에) 주구점에서 모종의 산업에 종사했으며, 두개골들은 단순히 원숭이의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숭이의 두개골이 부스러진 것과 다른 두개골 부위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작업자들이 원숭이의 뇌를 먹고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울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욕을 부려서 시난트로프스를 주구점의 지배자라고 추리한 것은 아닌지 (그것이) 동물이라는 기준에서 다시 자문해 보아야 한다.” [Marcellin Boule  and H.V.Balloise; Fossil man Translated by M. Bullock, Rerint, Thames and Hudson, London, 1957]

더욱, 흥미있는 일은 이 발견에 관여했던 샤르뎅 자신도 북경원인이 큰 원숭이라고 고백했으며, 듀보아도 자신이 발견했던 쟈바인이 원숭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F. Weidenreich; Pithecanthropus and Sinanthropus, Nature, 141(Feb. 26), p378, 1938]. 그 후, 바이덴라이히(1948)와 샤르뎅(1955)이 모두 죽자 그들의 추종자들이 북경인의 공식명칭을 호모 에렉투스 페킹시스(Homo erectus pekingsis)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우든(1984)은 말하기를 이러한 유골들의 주인공이 당시의 석회석을 채굴했던 사람들과 이들이 채굴작업을 하면서 원숭이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여 잡아 먹은 후 불속에 버린 동물들의 뼈들이 혼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구점 일대는 지금은 거의 채석장으로 변하였고 동굴들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다만, 작은 전시관에 몇 점의 화석인골과 그 곳에서 출토하였다는 유물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을 뿐인데, 이러한 화석뼈들은 주로 동물들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영문으로 기록된 수많은 북경인에 관한 서적들을 살펴 보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두개골의 숫자는 14-40개, 손발의 뼈들은 3-11개, 발굴지점은 ‘윗 동굴’에서 ‘아랫 동굴’로 다양하나, 현대인의 거주흔적에 대해서는 일체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샤르뎅은 두개골이 큰 원숭이의 것이라고 하여 유인원일 가능성을 부각시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한다면 북경인은 진화론자들이 선입관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골들을 자기들이 상상한 방향으로 조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Taylor; ibid, p 241]

주구점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동굴에서는 사암의 물고기 화석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석회석 채굴업자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아 먹고 버렸거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 사람과 동물들이 갑자기 같이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③ 멧돼지 이빨과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

북경인의 발견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지질학자인 쿡(Herold J. Cook 1922)은 네브라스카주의 필리오세(Piliocene)지층에서 어금니 하나를 발굴하였다. [Henry F. Osbourn; The origin and evolution of life,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18]. 이것을 당시의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미국의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이었던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 1922)과 그의 동료들은 침팬지와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40만년 전에 살았던 현생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헤스페로피테쿠스 헤롤드쿠키(Hesperopithecus harold cooki)라 명명하였다. 일명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그의 발표가 전해지자 고생물학자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1922, 1924)와 윌더(Harris Fairfield Wilder 1926)와 같은 수많은 진화론자들이 이를 지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트다운인의 발굴에 관여했던 영국의 그라프톤 스미스는 전세계에 배포되는 런던화보사(Illustrated London News)를 설득하여 네브라스카인 부부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설득하였다(그림 15). 어금니 한 개로 전체적인 인물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화가에게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모양으로 그리도록 주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페이지를 장식한 기상천외한 상상도가 런던화보집에 실리게 되었다. [G. Elliot Smith; Hesperopithecus: The ape-man in the western world, Illustrated London News, 160(Jun. 24), p 944, 1922]. 스미스는 후일(1935) 과학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53년에는 필트다운인의 사기극 공모자로 지목되었으니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들은 그 후에 사실을 왜곡케 한 재판정의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925년 7월에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 하여 법정에 기소됐던 한 주립고등학교의 진화론교사 스코프스(John Thomas Scorpus)에 대한 원숭이재판(Monkey Trial, Dayton, Tennessee)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출된 것이다. 이 재판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당시의 주법은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프스는 주법을 위반한 셈이었던 것이다. [J.T. Scoupes & James Presley; Centre of the storm: Memories of John T. Scoupes, Holt, Rinehart & Winston, New York, 1967]

테네시 법정에서 진화론측 변호자인 대로우(Clarence Darrow)는 창조론자인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an)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See Brian, even in your own state of Nebraska has a fossil that shows there are missing links and that evolution is variable (브라이언씨, 당신의 고향 네브라스카에서도  진화론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잃어버린 중간고리인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소?)"

진화과학자들은 네브라스카인의 자료로 브라이언을 맹렬히 조소하며 비난하였고, 브라이언은 아직 자료가 빈약하므로 연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경윈인과 또 다른 사기극으로 판명된 필트다운인의 증거까지 제시된 이 재판에서 결국 진화론을 가르쳤던 스코프스는 불과 100달러의 벌금형만을 선고받음으로써, 이 재판은 실질적으로는 진화론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후, 테네시주에서의 진화론교육의 금지규정은 196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화론과 다른 견해는 가르쳐지지 못하고 추방되는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Davidheiser 1971).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 일인지 혼란스러운 생각뿐이다.

그러다가 재판이 끝난지 3년 후(1928), 매우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되었다. 네브라스카인의 어금니와 완전히 동일한 이(齒)를 가진 멧돼지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더구나, 그 이빨의 주인공은 그 곳에선 멸종되었으나 지금도 파라과이의 샤코지방(Chaco)과 에쿠아돌에서 서식하는 멧돼지(Prosthennops serus->Catagonus ameghino)의 것으로 여러 학자들(William K. Gregory 1927, Ralph M. Wetzel 1975, Tim White 1983]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R.M. Wetzel et al; Catagonus, an 'extinct' peccary, alive in Paraguay, Science, 189(Aug.1), p 379, 1975]. 이처럼, 네브라스카인은 멧돼지의 어금니 한 개와 출처불명의 유물 몇 점을 근거로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네브라스카인은 교과서는 물론 브리타니카 사전(14판, p 767, 1929)에서도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어 시급한 시정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필트다운인, 쟈바인, 북경인, 그리고 라마피테쿠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네브라스카인과 유사한 사건이 그 후에도 서남콜로라도인(Southwest Colorado Man) 사건에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콜로라도에서 발굴했다는 이빨 한 개로 진화론자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이 이빨의 주인공은 후일 말(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p 85,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chigan, 1973].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제 아무리 권위있는 진화학자들이 학문을 빙자하여 새롭게 발표하는 주장들이라 할지라도, 앞으로는 일단 의심하고 철저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오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나 반성없이 학문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쉼없이 새로운 이론과 변명의 자료를 개발하는데 급급해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학문이며, 무엇을 연구하려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④ 필트다운인(The Piltdown Man)

 

 필트다운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희대의 학문적 사기사건으로 유명하다.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진화론자였으며 대영제국의 런던박물관장이던 우드워드(Arther Smith Woodward)와 그의 친구이며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도오손(Charles Dowson)은 (Reader 1981)은 1908년부터 1912까지 다윈의 생가에서 수마일 떨어진, 영국 동부의 필트다운 마을(Piltdown, East Sussex)의 자갈 구덩이에서 40-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의 파편들과 치아 및 턱뼈들을 발견하고(사진 15) 이안트로푸스 도소니(Eoanthropus dowsoni)라 명명하였다. 이 이름의 뜻은  ‘도오손이 발견한 첫 사람’ 이라는 말이다. 두개골은 사람에 가깝고 아래 턱뼈는 원숭이와 비슷하여 현대 인류의 ‘첫 사람’(Dawn Man) 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그림 16). 이들은 런던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 1912.12.18)에 초기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그들의 발표내용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사이언스지의 표지기사로 실리게 되었고(Science1938. 12),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부울(Marcellin Boule 1886-1942)과 미국 고생물학자인 오스본(Harris F. Osborn 1857-1935)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리타니카 사전에도 인류의 중간종으로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왕립아카데미소속의 연구원인 쿡(John Cook)이 그린 필트다운인의 대형 유화가 런던의 지질학회에 걸리게 되었다.이러한 사실이 보도되자 필트다운인을 주제로 한 학술논문도 500건 이상이 쏟아져 나왔다. [Gary E. Parker; Origin of Mankind, Impact No. 101,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alifornia, p 4, Nov., 1981]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의 교과서에 인류의 조상으로 기재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주요 박물관들에서도 전시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의 공로로 영국정부는 1916년에 이미 죽은 도오손을 제외한 케이스(1921), 우드워드(1924), 스미스(1926?) 등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유골들에 대한 진위성이 계속 문제가 되어 마침내 8인으로 구성된 제1차 진상조사위원회(1916)가 결성되었다(사진 16). 이 회의에는 도오손과 우드워드를 비롯하여 영국의 왕립협회회원으로서 저명한 해부학자이며 의사인 케이스(Arthur Keith) 등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이 유골들을 진품으로 판정하였다. 여기에 소개한 사진은 일차 조사위원회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중앙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케이스이며, 그의 오른편에서 화석골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유골발견자의 한 사람인 도오손이다.[南條郁子; ibid, p 39]

 

 그러던 중, 1953년에 다시 2차 조사위원회가 재소집되었다. 소집이유는 새로운 유골분석방법인 불소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에는 대영자연사박물관의 오클리(Kenneth Okley), 인류학자인 와이너(Joeph Weiner), 옥스퍼드대학의 치과해부학자인 클라크(LeGros Clark), 뇌연구자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등 10인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와이너와 오클리(사진 17)가 회의를 주도하였다. 이 방법으로 검토한 결과 필트다운인의 유골은 5년이 경과한 원숭이 턱뼈와 사람의 두개골을 조립하여 만든 것임이 드러났다. [The Great Piltdown Hoax, Popular Science, Oct, 1956]. 

불소측정법이란 영국 킹스칼리지의 해부학자인 워터스톤(David Waterston 1871-1942)이 화석뼈에 대한 연대측정법으로 개발한 것인데, 이는 오래 된 뼈일수록 흙 속의 불소(F)가 뼈속으로 스며들게 되므로, 오래된 뼈속에 불소함량이 점점 더 많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트다운인의 두개골 속에는 불소 함량이 매우 적어 전문학자들이 재조사한 바 그 뼈들은 불과 수천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턱뼈에는 인이 거의 없었으며, 더욱 놀라운 일은 해골이 중크롬산카리로 변색처리되었고, 치아에서는 줄톱으로 연마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Criswell; ibid. p 89] 

뒤늦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턱뼈가 정상인의 해골에 걸맞지 않게 컸으며, 아래턱뼈, 턱뼈관절, 아래턱의 송곳니 및 얼굴 부위가 없었다. 더구나, 두개골의 중간 부위가 없었기 때문에 두뇌의 용적을 측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드워드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치인 1,070cc라고 임의로 추정한 반면, 케이스(사진 18)는 자신이 설명한 대로 커다란 턱뼈에 부합하도록 1,500cc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중재에 나선 사람이 샤르뎅 신부였다. 그는 같은 필트다운 지역에서 발굴한 송곳니 하나를 그 유골의 주인공의 것으로 삽입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측이 만족할만한 뇌용적인 1,200cc 라는 숫치가 타협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사람과 유인원의 중간크기에 상당하기 때문에 모두가 수용하였다. [Taylor; ibid. pp 227-228] 뇌용적을 실험치가 아닌 상상과 추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며 치과해부학자였던 클라크(LeGros Clark)는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으로 판명되었을 당시에 메모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치아들을) 마모시킨 흔적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왜 일차조사시 그것을 발견치 못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Ronald Millar; The Piiltdown man, Paladin, St. Albans, UK, 1974]. 그는 1916년도의 조사시 그러한 사실이 발견되어 상부에 보고된 적이 있었으나, 지도층인 케이스와 우드워드가 무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C.W. Lyne; The significance of the radiograps of the Piltdown teeth, Proceedings of Royal Society of Medicine, 9(Ondontological section), p 33, London, 1916]

 

이와는 별도로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이 뼈들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탕 암컷의 턱뼈를 조립한 것으로, 턱뼈들은 중크롬산카리 용액으로 처리하여 색소가 입혀져 있다는 사실도 판명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학적 사기극을 주도한 사람이 부울(Marcellin Boule)에게 사사받은 27세의 샤르뎅(Gould 1979)과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라고 추정하였다(Winslow & Bouden 1983). [Stephene J. Gould; Piltdowm revisited, Natural History, 88(March), p 86, New York, 1979], [J.H.A. Winslow, Meyer; The Perpetrator at Piltdown, Science 83(Washinton), 4(September), p 33, 1983]. 보우든(Malcolm Bowden 1977)은 필트다운이 발견된 구덩이에 가짜 화석들을 집어 넣은 사람이 유신진화론자인 샤르뎅(S. J.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M. Bouden; Ape-Man: Fact or Fallacy, pp 35, 46-47,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Kent, Canada 1977] 이렇게 하여 40여년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군림하여 왔던 필트다운인은 희대의 학술적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표 5). 

최근에, 스펜서(Frank Spencer 1990)가 추가로 밝힌 바에 의하면, 호주 시드니 대학의 한 역사학자의 조사결과 이러한 사기극을 도운 또 다른 공범이 필트다운진상조사위원이었던 케이스(Arthur Keith 1866-1955)였다고 밝히고 있어 충격을 더 하고 있다. 결국, 허위진상조사위원들의 과반수가 사기극을 주도했던 공범자라는 이야기이므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케이스는 철저한 진화론자로서 일찌기 서젼로얄대학 해부학탐색교수(Hunterian Professor of Anatomy at Royal University of Surgions 1908)로 취임시 "나의 포부는 영국의 인류학역사를 새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었다. [Arthur Keith; An Autobiography, Philosophical Library, New York, 1950]. 이러한 사기극의 진상은 이차진상조사위원회를 주도하였던 와이너(Joseph S. Weiner 1955), 오클리와 와이너(Kenneth P. Oakley & J.S. Weiner 1953, 1955)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 런던지질협회(1954. 7. 10)와 밀러(Ronald Miller) 등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진화학자인 쥬커만은 "앞으로 인류화석에 대한 발견이 보고될 때에는 일단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필트다운인 사건은 인류진화를 믿고자 한 진화인류학자들이 진화론의 약점인 ‘빠진 고리’를 발굴하고자 만들어 낸  잘못된 열심과 학문적인 명예욕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허황된 자작극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상상이나 선입관에 의한 유골발굴작업은 지금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키, 요한슨 등의 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Taylor; ibid. p 229]. 최근에 타임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주, 영국의 고생물학자인 가디너(Brian gardiner)는 자신과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커런트(Andrew Currant)는 (필트다운인 사기극의) 범인이 당시에 박물관에서 동물학부 책임자로 일했던 힌턴(Martin A.C. Hinton)이었음을 확인하였다” [Time, June 3, 1996]

 

⑤ 하이델베르그인(The Heidelberg Man)

하이델베르그인은 진화론자들이 1907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인근 마우어지방의 라인강변 모래구덩이에서 턱뼈의 화석을 발굴하였다(사진 19). 화석을 분석한 결과 25-60만년 전에 그 곳에 살았던 초기인류라고 주장하고 일명 마우어인(The Mauer Man)이라 불렀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큰 턱뼈가 유인원과 유사하나 치아의 배열은 사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뼈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치아는 현대인과 같으며, 턱뼈는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사람들과 같고, 두개골은 흑인들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진화 인류학자인 허들리카(A. Herdlika)는 하이델베르그인의 치아는 사람의 것으로 이 유골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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