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e background

노아 대홍수의 증거물인 방주는 존재하는가?

미디어위원회
2004-07-26

노아 대홍수의 증거물인 방주는 존재하는가?

김희택, 박진호 


답 : 성경의 많은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랏산에 방주가 안착되었다는 기록은 단순한 우화나 에피소드가 아니며, 방주는 지금까지도 실존(實存)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지면을 할애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대홍수』와 이 홍수 재난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계속 전승되었던 방주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인류의 전설 가운데서도 가장 끈질긴 것일 것이다. 비록 이것이 전설이라도 말이다. 성경 창세기에는 이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무려 5장을 차지하고 있다.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에덴의 동산,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전부 합해도 불과 4장 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방주」가 『아라랏산』의 산상에 표착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기독교 세계에서는 2천 년 가깝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 보다 몇 세기 이전부터 헤브라이, 아르메니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을 포함한 여타 상이한 문화지역에서조차도 인정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경전인 『코란』에서「방주」에 관한 전설이 사실로 인정된 지도 이슬람교가 7세기 중엽에 창건된 이래로 거의 1400(AD 7C~20C)년이나 된다.


이럴 정도까지 깊이 믿을 수 있게 된다면, 현대의 탐험가가 지난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 거대한 배가 지금도 남아 있는가를 확인하려한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들에 있어서 힘이 되는 것은 그 산에 올라가 「방주」를 보고 만졌으며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체험담과, 또 아라랏 산정 부근을 비행 중에 그것을 보았다는 파이롯들의 보고들이다. 1972년 미국의 '지구자원 인공위성'(ERTS)이 포착한 사진이나, 정찰기인 U-2기에 촬영되었다고 하는 사진도 있어, 방주가 산상에 존재할 가능성을 가일층 높여주고 있다. 

아라랏산의 「방주」가 있다는 끈질긴 신앙은 비단 종교그룹 뿐만 아니라, 선사문화(先史文化) 연구자들이나 고고학자, 그리고 최근에는 지질학자 가운데에도 있기 때문에, 그 실존을 에워싼 문제는 기존의 고고학계(考古學界)에서도 문제시 되었다.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의 레이니 관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혹시 고고학상 있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고대의 배가 썩거나 자연재해에 의해 파손되지 않고 수천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보존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는, 방주의 재질(才質)이다. 방주의 건조에 사용했던 나무는 영어표기로 'Gopher'라는 나무였다. 오늘날 고퍼(고페르)라는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학자들은 '고퍼'를 삼목(杉木) 즉 참나무로 추측한다. 이 나무는 건축에서 가로 들보용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중국의 명, 청나라에서는 정크선과 같은 목조선을 건조할 때 사용되었었다. 참나무는 방수성(防水性)이 아주 강하면서 자연적인 수분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단단하고, 바탕이 치밀하며, 농도가 높은 목재이기 때문에 방주 건조용 재료로는 아주 안성마춤인 것이다. 노아가 이처럼 바탕이 질기고 밀도가 높으며 내구성(耐久性)이 아주 강한 참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수천 년이 지나도 방주는 별다른 이상 없이 아라랏 산상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배를 건조할 때 방수제로 사용했던 역청(또는 피치: pitch)에 있다. 역청은 역청암이라는 검거나 푸른빛의 광택이 나는 화산암(火山岩)에서 나오는 광물성 기름의 찌꺼기로, 고대에는 주로 물과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성벽 축조시 벽돌과 벽돌 또는 매듭의 틈바구니를 메우기 위해 사용했다. 이러한 역청은 사해(死海)에서 페르시아만옆 아랍지역의 원유 산유국까지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는데, 배의 방수용으로 가장 이상적인 역청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고, 또 로마제국 시대에도 커다란 역청의 덩어리가 사해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市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에서 많은 양의 역청이 쏟아져 나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노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그 어느 평원에서 방주를 건조했으리라 짐작된다.

中東지방에서 우리나라까지 유조선으로 원유를 운반하면, 연안에 위치한 정유공장의 증류탑에서 원유를 증류시키게 되는데, 비점 범위에 따라 제일 먼저 가솔린이 나오고, 다음에 나프타 등유, 경유, 중유 그리고 맨 아래에 찌끼유가 남는데, 보통 우리나라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깔 때 도로에 쏟아 붓는 피치라는 물질로 역청에 해당된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자동차 타이어 마찰의 완충제 역할을 하는 역청이 고대 성벽의 돌구조의 틈새를 메워주거나 목조선을 건조하는데 방수제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건조할 때, 방주의 내부, 외부에 골고루 발랐던 피치는 후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안착하고 나서부터는 썩는 것을 최대한 억제시켜주는 방부제(防腐劑) 기능도 발휘했을 것이다. 


셋째, 방주 보존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요소로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지점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방주를 보호한 아라랏산의 추운 기후와 만년설(萬年雪)이다. 이렇게 방주는 1년내내 거의 녹지 않는 만년설(萬年雪)에 덮여 있기 때문에, 사시사철 거의 완벽할 정도로 냉동되어, 이 목재 구조선이 썩거나 부패되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아라랏산이 거대한 대형 냉장고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냉장고 속에 담겨져 있는 식빵같이 장기간에 걸쳐 싱싱하게 저장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최근 알프스 산맥에서 발견된 Ice Man에 관한 기사이다. 3000년도 더 오래된 인간의 육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썩어 없어지거나 흙과 진흙에 묻혀 없어지지 않고, 시체보존 처리가 고대제국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이집트 람세스 왕의 미이라보다 더 완벽하게 보존되었다는 사실에서 만년설(萬年雪)의 냉동보존 능력이 탁월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노아의 방주는 인체구조보다 더 견고한 참나무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보다 더 이상적으로 완벽하게 더 오랜 기간동안 부패에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니, 하물며 만년설 속에서는 얼마나 잘 보존되었겠는가? 이렇게 고대의 배가 냉동 저장된 덕분으로 설산(雪山) 정상 복판에 보존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일까? 회의론자가 말하는 장소와 기후상의 문제는 오히려 그 보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목조 배나 거대한 목조 구조물이 몇 천년이고 보존되는 유일한 방법들은 빙하의 내부, 동토(凍土)의 속, 심해(深海)의 모래언덕 혹은 사막의 구릉에 파묻혀 있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수목(樹木)이 자랄 수 없는 4000미터가 넘는 산상에 방주가 어떻게 올려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지구상에 대이변으로 해양의 물이 산더미 같은 홍수로 변하여 격동과 융기나 침강을 되풀이하여 지표를 돌진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산상에 배가 올라가는 것을 검토하려면 우선 인류 역사상에 있어 세계적 대홍수와 지진이 있었다고 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이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고고학계(考古學界)의 대다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의 해설자들은 아라랏산의 방주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그 존재를 일반상식과 같이 당연하게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당시엔 누구라도 산에 올라가 볼 수가 있었으며, 때로는 평지에서도 빙하의 눈과 얼음을 배경으로 방주가 새까맣게 보였기 때문이다. 


BC 3세기 바빌로니아의 신관(神官)이며 저술가인 베롯소스에 의하면, 방주까지 올라간 사람은 언제나 배의 측면에서 송진을 깍아내 가지고서 귀신을 몰아내는 부적(符籍)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송진이라는 것이 보통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송진이 아니고 방주의 이음새 부분의 피치로서 방주를 문질러서 피치를 수집해 부적으로 사용했음을 암시한다. 다른 저술가의 설명에 의하면 기념품을 목표로 하는 무리들은, 올라가는데 힘들고 방주는 곧장 눈속에 파묻히기 때문에 이런 기회는 좀처럼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송진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나뭇조각을 절취하여 돌아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AD 4세기 사라미스의 승정(僧正) 에피파뉴스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방주의 틀림없는 실존을 들고나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노아방주의 잔해가 쿠르드족의 땅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당신은 정말로 우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과거 쿠르드족(族)은 낯선 사람들을 보면 바로 발포해 온다고 알려져 있어 아라랏산의 탐험가들을 그 동안 꽁무니 빼게 하는 위험 요소 중에 하나였다. 또 다른 위험으로는 쿠르드인의 울프라하운드(거대한 늑대개), 곰, 독사, 그리고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들개의 집단들이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급작스런 눈사태, 푸석푸석한 암석의 낙하, 빙하의 눈과 얼음, 얼음 가운데에 돌발적으로 입을 벌리는 함정인 크레바스,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진, 변화불측한 악천후의 날씨 등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몇 백 세대에 걸쳐 아라랏산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은 자신의 조상이 유래된 성지(聖地)임을 알았던지, '혹시나 거대한 배 같은 것이 빙하에서 튀어나오지 않는가, 그것보다 두개의 아라랏산 (원추형의 소(小)아라랏산과 중앙에 원개형인 대(大)아라랏산)에 끼어진 낮은 곳 부근에서 보이지 않을까하고 언제나 눈을 집중시켜 왔다. 고명한 아르메니아의 왕자로 나중에 프랑스의 수도승이 된 제한 하이슨은 13세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랏산의 정상에는 언제나 거대한 검은 물체가 보인다...「노아의 방주」라고 말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저명한 탐험가 마르코 폴로(AD 1234~1324)는 그의 여행 도중 아라랏산을 지나칠 무렵에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산봉우리, 만년설로 뒤덮인 이곳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

1883년 5월에 지진으로 산의 일부가 빠금 입을 벌리고 목조의 배로 보여지는 것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지진의 피해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온 터어키 관리들의 눈에 포착되었다. 관리들은 빙하에 돌출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면서, 높이는 12m~15m라고 추정하였는데, 물체의 나머지 부분은 빙하깊이 묻혀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길이인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영국의 조사위원이 낀 동조사대는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그 일부는 높이 4.6m 구획이 된 칸막이를 한 것 같이 보였다. 그 배와 같은 물체의 누워있는 모양으로 볼 때 산중턱으로 빙하와 같이 미끌어 온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산중에서 뜻밖에 얼어붙은 배에 조우했던 조사위원회는 「노아의 방주를 드디어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미국의 각 신문들은 현재의 UFO 목격 사건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약간 장난조의 반응을 표시하였다. 『뉴욕 헤럴드』는 「방주」에 얼음이 가득 차 있으면 미국까지 수송하는 비용의 일부를 이번 여름에 얼음을 팔아서 처리하자고 제안하였다. 또 이 신문의 별도 사설 난에서 이렇게 첨가하고 있다. 

"해군성은 지금 바로 「방주」를 구입하여야 한다. 세계 최대의 공화국의 면모답게 해군 공창(工廠)을 나오는 순간에 부패하지 않는 배를 적어도 한 척쯤은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방주」발견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메소포타미아의 누일리 왕자라고 하는 남자가 1894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우리나라 대전 EXPO '93의 전신)에 나타나 적절한 자금원조를 해준다면 터어키에 있는「방주」를 세계박람회장에 까지 실어와서 많은 나라에서 몰려오는 관람객들에게 보여 줄 수 있게 하겠다고 어느 자본가 그룹에 제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라랏산에서 터키의 관리들에게 발견된 물체는 얼마 뒤에 다시 얼음 밑으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20세기 과학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최초로 이 산의 상공을 비행한 파이롯에 의해 얼음의 위와 아래에 배 모양의 물체가 사진에 찍히게 될 때까지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만 했다. 


최근에 와서도 여러 명의 사자(死者)나 행방불명자가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설 탐험대가 조직되어 아라랏산의 수색에 나서며, 또 개인적인 등반자들로 끊이지 않고 있다. 아라랏산 밑의 도그바야짓트 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방주를 찾아 나선 탐험대나 개인등산가들의 베이스 캠프로 되어있다. 

프랑스의 등산가 훼루난 나바라는 산상의 눈 밑에서 파낸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흔적이 있는 대들보용 목재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후에 이것을 엄밀한 방사선 탄소측정법 (C14)에 의해 측정해 본 결과 BC 5000년이라고 하는 연대측정이 나왔다. 나바라 이후로 또 다른 탐험대들과 2차대전 후 비약적으로 신장된 첨단 항공기구에 의해 방주는 수차례나 목격되었다.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방주에 관한 이야기나, 최근 20세기 비행기에 의한 방주 목격 사례가 수십 건이 넘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방주는 오늘날까지 해발 5165m의 대(大)아라랏산 중턱의 만년설 속에 고이 묻혀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창조지, 제 82호 [1992. 12]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