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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갈릴레오의 재판

미디어위원회
2004-10-29

갈릴레오의 재판

최인식 


      갈릴레오로 알려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세익스피어가 출생한 1564년 이태리 피사의 부유한 상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파듀아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기하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구의 자전과 해를 중심으로 한 공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는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그대로 전수받은 일 세기의 천문학자 톨레미의 천동설이었습니다. 천동설은 해와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교황청과 종교 지도자들도 이 주장에 편승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 사상이 모든 학문 심지어 신학에도 깊이 관여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21년 전이었던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논문 '천체의 회전'을 교황 바오로 3세에 증정했습니다. 그는 정평 있는 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제시한 논문의 내용은 1500년 이상을 군림해온 톨레미의 천문학적인 이해를 도전하는 혁명적 이론이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엉뚱하여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56년이 지난 1609년에, 갈릴레오가 화란의 안경 제조상이 만든 작은 망원경에 착안하여 천체를 30배 이상 확대하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기까지는 이 새로운 이론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16년에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와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의 상반성(Incompatibility)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예로 1633년 종교재판 중에 인용된 성경구절(수 10:13, 시 19:1-5, 시 104:1-5, 사 40:22)을 살펴 보면 해와 별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서 40장 22절(땅 위 궁창에; upon the circle of the earth)은 둥근 지구의 지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처음에 갈릴레오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쯤에는 종교계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있던 때라 원래 친분이 좋은 과학자인 갈릴레오가 영향력 있는 종교계의 인사들의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1633년 6월 22일 당시의 교황 어반 8세(1568-1644)의 명령에 의해 열린 종교재판의 결과에서도 드러납니다. 10명의 재판관 중 3명의 재판관이 판결문에 서명을 거부합니다. 재판을 강요한 교황 어반 8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오와 신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반(1624년)에는 갈릴레오와 여섯 차례나 장시간의 접견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염려는 결코 하지않아도 된다고 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단된 이유 중의 하나는 1632년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두 개의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은 저자인 갈릴레오가 어떤 사람을 접견하여 서로 세계관을 토론하는데, 교황을 암시하는 가상적인 인물을 써서 교황에게 모욕적인 공격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교황청이 금지령을 내린 또 다른 원인은 독일의 수학자 요한 케플러와 같이 갈릴레오의 주장에 동조를 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사고의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발로 말미암아 그들이 교황청에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대신 갈릴레오의 관찰을 강조하는 새 방법은 그들에게 불안과 불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갈릴레오와 교황청의 관계를 질시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과학계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몰아넣는 길 만이 그를 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판결문에는 ”이단적인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고 교황청이 지정하는 주택에 삼년 동안 연금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참회시를 외울 것”을 형벌로 받았습니다. 1638년에 완전히 실명한 그는 그로부터 3년 후 1641년 1월 8일에 77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칩니다.


한 개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사회의 전통적으로 기존하는 구조에 변화를 조만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하는 측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이때는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을 포함한 모든 자연학문 분야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므로, 관찰과 실험이 연구방법의 중심이 되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과학자들이 동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떤 한 세대가 전체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계관은 종교적인 신념과 성경에 대한 이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 당시에는 중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던 때라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상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하바드 대학이 1636년에 설립 될 당시에도 전교수진이 톨레미의 천동설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 같이 인식되어 있는 것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세계관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의 대결일 뿐입니다. 틀린 과학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습니다. 세속의 과학이 어떻게 말하던 성경을 말씀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교회는 흠 잡힐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연주의에 기초한 진화론 일색의 과학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냉철히 판단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가톨릭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진화론적 과학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과감히 배격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톨레미의 천동설과 다름없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은 다시 한번 성경과 진화론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참조 : The Galileo affair: history or heroic hagiograph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25

           Galileo Quadricentennial : Myth vs fact
               http://creation.com/galileo-quadricenten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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