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과 풍유
김무현
모형과 풍유 (Type and Allegory)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상징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모형론(typology)과 풍유법(allegory)이 있습니다. 모형(types)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언적 상징(prophetic symbol designed by God prefiguring something to come)이고 풍유(allegory)는 확장된 은유법(extended metaphor)입니다. 모형론은 앞에서의 멜기세덱의 예와 같이 객관적인 상징성이 있고 또 성경이 그를 증거 해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성막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등이 모형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 등입니다.
저희가 (제사장들이 성막 안에서)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브리서 8:5a)
로마서 5:12-21을 정독하여 보십시오. 로마서 5:14의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NASB 성경에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8-19)
위의 성경말씀에 의하면 왜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합니까?
풍유법적 해석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외의 감추어진 은유적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즉, 객관성은 결여되지만 주관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도 있는 비유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함락시 자기 집 창문에서 붉은 밧줄을 내림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여호수아 2:21), 그 붉은 밧줄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피로 물든 밧줄을 붙드는 자는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죽으리라.”는 등의 해석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마라의 쓴 물로 인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하고 원망할 때(출애굽기 15:22-2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질 때, 쓴 물이 단물로 바뀐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풍유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몸(이새의 가지, 이사야 11:1; 하나님의 싹(Branch of the Lord), 이사야 4:2)이 십자가(나무)에 던져짐으로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쓴 물) 영생과 거듭남의 참 기쁨(단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은 특히 개인의 묵상시간에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되어 큰 은혜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다른 성경구절에서 뒷받침해주는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학적 의미로 객관화하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풍유적 해석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에는 동방박사들이(Magi) 갓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보배합을 열어 황금(gold)과 유향(incense)과 몰약(myrrh)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예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님의 사역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은 왕관 즉 왕(kingship)에게 적합한 예물이며, 유향은 분향에 사용되므로 제사장(priesthoodship)에게 적합한 예물입니다(요한계시록 8:4, 출애굽기 30:34-37). 앞에서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상징했었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요한복음 19:39-40)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는 선물로서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별히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그와 같이 미리 정하여 놓으시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모형(type)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형(type)과 풍유(allegory)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NASB성경에는 갈라디아서 4:24의 “이것이 비유니”가 “This is allegorically speaking(NASB)”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4:22-31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새 언약 안에서의 자유 자와 율법 안에서의 종 된 자로 조명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적 상징인지 정리하여 보십시오. (만약 위의 창세기의 내용이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징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면 모형(type)에 해당할 수 있겠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모형과 풍유
김무현
모형과 풍유 (Type and Allegory)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상징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모형론(typology)과 풍유법(allegory)이 있습니다. 모형(types)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언적 상징(prophetic symbol designed by God prefiguring something to come)이고 풍유(allegory)는 확장된 은유법(extended metaphor)입니다. 모형론은 앞에서의 멜기세덱의 예와 같이 객관적인 상징성이 있고 또 성경이 그를 증거 해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성막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등이 모형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 등입니다.
로마서 5:12-21을 정독하여 보십시오. 로마서 5:14의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NASB 성경에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으로 되어 있습니다.
위의 성경말씀에 의하면 왜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합니까?
풍유법적 해석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외의 감추어진 은유적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즉, 객관성은 결여되지만 주관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도 있는 비유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함락시 자기 집 창문에서 붉은 밧줄을 내림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여호수아 2:21), 그 붉은 밧줄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피로 물든 밧줄을 붙드는 자는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죽으리라.”는 등의 해석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마라의 쓴 물로 인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하고 원망할 때(출애굽기 15:22-2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질 때, 쓴 물이 단물로 바뀐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풍유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몸(이새의 가지, 이사야 11:1; 하나님의 싹(Branch of the Lord), 이사야 4:2)이 십자가(나무)에 던져짐으로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쓴 물) 영생과 거듭남의 참 기쁨(단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은 특히 개인의 묵상시간에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되어 큰 은혜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다른 성경구절에서 뒷받침해주는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학적 의미로 객관화하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풍유적 해석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에는 동방박사들이(Magi) 갓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보배합을 열어 황금(gold)과 유향(incense)과 몰약(myrrh)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예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님의 사역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은 왕관 즉 왕(kingship)에게 적합한 예물이며, 유향은 분향에 사용되므로 제사장(priesthoodship)에게 적합한 예물입니다(요한계시록 8:4, 출애굽기 30:34-37). 앞에서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상징했었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요한복음 19:39-40)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는 선물로서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별히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그와 같이 미리 정하여 놓으시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모형(type)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형(type)과 풍유(allegory)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NASB성경에는 갈라디아서 4:24의 “이것이 비유니”가 “This is allegorically speaking(NASB)”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4:22-31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새 언약 안에서의 자유 자와 율법 안에서의 종 된 자로 조명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적 상징인지 정리하여 보십시오. (만약 위의 창세기의 내용이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징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면 모형(type)에 해당할 수 있겠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