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는 신뢰할 만한가?
(Is Josephus Reliable?)
by Brenton H. Cook
성서 시대의 세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인용된 자료 중 하나는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누구였으며, 우리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얼마 되지 않은, AD 37년 또는 38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제사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바리새인이 되었고, 유대인 저항군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목격했다. 최초의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를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라고 부르며, 로마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에 대해 이야기했다.(요세푸스는 로마군의 포로가 된 뒤 전항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 로마시민이 되었다).

2천년 동안 기독교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저술, 특히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또는 유대 반란(Jewish revolt))’와, 창조로부터 1세기까지의 하나님 백성들의 완전한 역사인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를 보존하고 연구해왔다. 목회자들은 종종 그들의 설교에서 세부 사항들이 요세푸스에게서 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소중한 목격자
모든 역사학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그래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하지만, 특히 역사가들이 직접 보고 알게 된 지식을 보고할 때는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십대 때 요세푸스는 다양한 유대 종파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고,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에 최전선에서 유대 반란을 목격했다.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는 반대편에서 그것을 보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가 제국의 왕좌에 오를 것을 정확하게 예언함으로써, 그의 호감을 얻었다. 요세푸스는 결국 전향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심지어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실 성씨인 플라비우스(Flavius)를 성으로 채택하였다. 그는 이제 황제의 도서관, 군사 보고서, 헤롯과 팔레스타인의 다른 통치자들의 재판기록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 저술의 주된 가치는 BC 100년부터 AD 100년까지의 유대 역사에 대한 그의 기록에 있다. 이 시대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그가 수집하고 능숙하게 해석했던 수많은 확실한 출처들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요세푸스의 저술은 다른 어떤 기록에도 없는 귀중한 세부 정보들을 제공한다.
요세푸스의 저술은 다른 어떤 기록에도 없는 귀중한 세부 정보들을 제공한다. 사실, 그는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총독 벨릭스(Felix), 빌라도(Pilate)와 같은 많은 주요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경 외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자주 방문하셨던 성전과 같은, 헤롯의 많은 건축물들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은 요세푸스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의 저술은 또한 바리새인(Pharisees)과 사두개인(Sadducees)과 같은 1세기 유대 종파의 내부 활동들에 대한 통찰력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 다른 종파인 에세네파(Essenes)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들이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사해 사본)’의 저자임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성전 파괴(마태복음 24:2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예언됨)와 마사다(Masada) 꼭대기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최후 저항과 같은 1세기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흥미로운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들을 목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역사서는 그 출처만큼만 훌륭한 것이다.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의 초기 역사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단지 성경과 일치하는 세부 사항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그가 의존했던 전통보다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친-유대인적 편견
많은 유대인들은 요세푸스를 반역자로 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백성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유대인의 반란은 로마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요세푸스는 역사가이자, 유대 민족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꾸고자 했다. 칭찬할 만하지만, 이러한 편향은 주의해야 한다.
그의 친-유대인적 동정심은 ‘유대 전쟁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저술은 대부분의 유대인을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으로 묘사한다. 그는 1세기 유대 사회의 붕괴에 대해, 자신이 "산적(bandits)"과 "도적(brigand)"이라고 불렀던, 유대인 열심당원(Jewish zealots)들을 비난한다.
나중에 쓰여진 ‘유대 고대사’에서, 그는 유대 문화의 우월성과 고대성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대인들의 좋은 것들을 과장하고, 아론의 금송아지와 같은 부끄러운 실패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가 ‘선전된 역사(propagandistic history)’ 였다는 해롤드 아트리지(Harold Attridge)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가 구약성경의 기록을 의역한 것은 유대역사를 "새로운 환경에서 적절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매력적인" 것으로 제시하고자 목표로 한 "창조적 각색"이었다는 것이다.[1]
다른 기준의 설정
요세푸스의 저술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그것은 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세기 로마의 독자들은 오늘날 우리와 다른 기대를 갖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이야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세부 사항을 구체화하거나, 추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이 산꼭대기의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유명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항복 대신에, 유대인들이 몇 명의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칼로 동료들을 죽인 후, 마지막에 자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입증할만한 사체들을 찾지 못했다.
또한 그 시대의 다른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요세푸스도 영웅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어, 마사다 정상에서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자르(Eleazer)의 애국적인 웅변을 기술하고 있다. 엘르아자르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포위 공격으로 모두 죽었고, 요세푸스는 로마에서 기록을 썼기 때문에, 요세푸스가 그 웅변을 완전하게 접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숫자와 통계에 주의를 기울였던 고대 역사가들은 거의 없다. 학자들은 요세푸스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1세기 사건의 연대기에 대해서도 종종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제공하는 수치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요약하면,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신약 시대에 대한 세부 사항을 수집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도움이 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를 변증하는 자료로서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를 선호했던 그의 편견과, 유대인의 유산에 대해 더 멋진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약의 기록을 다시 쓰려했던 그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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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요세푸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성경 인물과 장소들에 대한 세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당신은 다음의 주장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 헤롯 대왕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의 칙령에 따라 유대의 왕이 되었다(유대 전쟁사 1.20.2).
● 헤롯 앞에서 춤을 추며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소녀의 이름은 살로메(Salome)였다(유대 고대사 18.5.4).
● 헤롯은 세례 요한을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Macherus)에 있는 감옥으로 보냈다(유대 고대사 18.5.2).
● 감옥에 있던 바울을 불러 그의 말을 들었던, 로마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Drusilla,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간청했다(유대 고대사 2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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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Harold W. Attridge, The Interpretation of Biblical History in the Antiquitates Judicae of Flavius Josephus (Scholars Press: Missoula, Montana, 1976), p. 181.
*Dr. Brenton Cook is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and of apologetics and worldview at Bob Jones University in Greenville, SC. He teaches church history and the 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at Bob Jones Seminary.
*참조 :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요세푸스는 말했다.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83&bmode=view
교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창조론을 믿고 있었는가?
https://creation.kr/Topic502/?idx=13865052&bmode=view
창조신앙의 역사, 그 교회사적 고찰 :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http://creation.kr/Faith/?idx=1293813&bmode=view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칼뱅은 말했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82&bmode=view
진화론이 만연한 이 시대에도 필요한 외침, ‘오직 성경’
http://creation.kr/Faith/?idx=1293853&bmode=view
출처 : Answers Magazine, 2013. 1. 1. (last featured 2020. 11. 8)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history/is-josephus-reliable/
번역 : 양승원
요세푸스는 신뢰할 만한가?
(Is Josephus Reliable?)
by Brenton H. Cook
성서 시대의 세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인용된 자료 중 하나는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누구였으며, 우리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얼마 되지 않은, AD 37년 또는 38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제사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바리새인이 되었고, 유대인 저항군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목격했다. 최초의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를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라고 부르며, 로마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에 대해 이야기했다.(요세푸스는 로마군의 포로가 된 뒤 전항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 로마시민이 되었다).
2천년 동안 기독교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저술, 특히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또는 유대 반란(Jewish revolt))’와, 창조로부터 1세기까지의 하나님 백성들의 완전한 역사인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를 보존하고 연구해왔다. 목회자들은 종종 그들의 설교에서 세부 사항들이 요세푸스에게서 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소중한 목격자
모든 역사학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그래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하지만, 특히 역사가들이 직접 보고 알게 된 지식을 보고할 때는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십대 때 요세푸스는 다양한 유대 종파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고,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에 최전선에서 유대 반란을 목격했다.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는 반대편에서 그것을 보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가 제국의 왕좌에 오를 것을 정확하게 예언함으로써, 그의 호감을 얻었다. 요세푸스는 결국 전향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심지어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실 성씨인 플라비우스(Flavius)를 성으로 채택하였다. 그는 이제 황제의 도서관, 군사 보고서, 헤롯과 팔레스타인의 다른 통치자들의 재판기록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 저술의 주된 가치는 BC 100년부터 AD 100년까지의 유대 역사에 대한 그의 기록에 있다. 이 시대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그가 수집하고 능숙하게 해석했던 수많은 확실한 출처들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요세푸스의 저술은 다른 어떤 기록에도 없는 귀중한 세부 정보들을 제공한다.
요세푸스의 저술은 다른 어떤 기록에도 없는 귀중한 세부 정보들을 제공한다. 사실, 그는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총독 벨릭스(Felix), 빌라도(Pilate)와 같은 많은 주요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성경 외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자주 방문하셨던 성전과 같은, 헤롯의 많은 건축물들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은 요세푸스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의 저술은 또한 바리새인(Pharisees)과 사두개인(Sadducees)과 같은 1세기 유대 종파의 내부 활동들에 대한 통찰력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 다른 종파인 에세네파(Essenes)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들이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사해 사본)’의 저자임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성전 파괴(마태복음 24:2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예언됨)와 마사다(Masada) 꼭대기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최후 저항과 같은 1세기의 여러 사건들에 대한 흥미로운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들을 목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역사서는 그 출처만큼만 훌륭한 것이다.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의 초기 역사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단지 성경과 일치하는 세부 사항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그가 의존했던 전통보다 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친-유대인적 편견
많은 유대인들은 요세푸스를 반역자로 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백성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유대인의 반란은 로마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요세푸스는 역사가이자, 유대 민족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꾸고자 했다. 칭찬할 만하지만, 이러한 편향은 주의해야 한다.
그의 친-유대인적 동정심은 ‘유대 전쟁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저술은 대부분의 유대인을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으로 묘사한다. 그는 1세기 유대 사회의 붕괴에 대해, 자신이 "산적(bandits)"과 "도적(brigand)"이라고 불렀던, 유대인 열심당원(Jewish zealots)들을 비난한다.
나중에 쓰여진 ‘유대 고대사’에서, 그는 유대 문화의 우월성과 고대성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대인들의 좋은 것들을 과장하고, 아론의 금송아지와 같은 부끄러운 실패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가 ‘선전된 역사(propagandistic history)’ 였다는 해롤드 아트리지(Harold Attridge)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가 구약성경의 기록을 의역한 것은 유대역사를 "새로운 환경에서 적절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매력적인" 것으로 제시하고자 목표로 한 "창조적 각색"이었다는 것이다.[1]
다른 기준의 설정
요세푸스의 저술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그것은 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세기 로마의 독자들은 오늘날 우리와 다른 기대를 갖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이야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세부 사항을 구체화하거나, 추가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이 산꼭대기의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유명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항복 대신에, 유대인들이 몇 명의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이 칼로 동료들을 죽인 후, 마지막에 자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입증할만한 사체들을 찾지 못했다.
또한 그 시대의 다른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요세푸스도 영웅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어, 마사다 정상에서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자르(Eleazer)의 애국적인 웅변을 기술하고 있다. 엘르아자르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포위 공격으로 모두 죽었고, 요세푸스는 로마에서 기록을 썼기 때문에, 요세푸스가 그 웅변을 완전하게 접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숫자와 통계에 주의를 기울였던 고대 역사가들은 거의 없다. 학자들은 요세푸스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1세기 사건의 연대기에 대해서도 종종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제공하는 수치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요약하면,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신약 시대에 대한 세부 사항을 수집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도움이 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를 변증하는 자료로서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를 선호했던 그의 편견과, 유대인의 유산에 대해 더 멋진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약의 기록을 다시 쓰려했던 그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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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요세푸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성경 인물과 장소들에 대한 세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당신은 다음의 주장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 헤롯 대왕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의 칙령에 따라 유대의 왕이 되었다(유대 전쟁사 1.20.2).
● 헤롯 앞에서 춤을 추며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소녀의 이름은 살로메(Salome)였다(유대 고대사 18.5.4).
● 헤롯은 세례 요한을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Macherus)에 있는 감옥으로 보냈다(유대 고대사 18.5.2).
● 감옥에 있던 바울을 불러 그의 말을 들었던, 로마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Drusilla,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간청했다(유대 고대사 2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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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Harold W. Attridge, The Interpretation of Biblical History in the Antiquitates Judicae of Flavius Josephus (Scholars Press: Missoula, Montana, 1976), p. 181.
*Dr. Brenton Cook is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and of apologetics and worldview at Bob Jones University in Greenville, SC. He teaches church history and the 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at Bob Jones Seminary.
*참조 :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요세푸스는 말했다.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83&bmode=view
교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창조론을 믿고 있었는가?
https://creation.kr/Topic502/?idx=13865052&bmode=view
창조신앙의 역사, 그 교회사적 고찰 :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http://creation.kr/Faith/?idx=1293813&bmode=view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칼뱅은 말했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82&bmode=view
진화론이 만연한 이 시대에도 필요한 외침, ‘오직 성경’
http://creation.kr/Faith/?idx=1293853&bmode=view
출처 : Answers Magazine, 2013. 1. 1. (last featured 2020. 11. 8)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history/is-josephus-reliable/
번역 : 양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