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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갈릴레오 재판

미디어위원회
2004-10-29

갈릴레오 재판

김창환 


도입

갈릴레오는 전제주의 정권의 악을 보여 주는 고전적인 실례로 남아 있다. 그는 독립적인 사고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고 고발당했다. 갈릴레오는 성경을 의심하였고, 자기만의 독립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거스렸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체계를 파괴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취하였다. 즉 그들은 그 불화의 씨를 원천 봉쇄하였던 것이다.1) - Colin A. Ronan

필자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6살부터 예수님을 만난 17살까지 대략 십 년간을 이성지상주의자로 살았다. 당시의 내가 이해한 과학과 종교의 - 특히 기독교와의 - 관계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 재판이었다. 그리고 그 재판 이야기가 내게 준 인상은 위 인용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비합리적이게도 성경을 신봉하는 교회가 분명한 사실을 보려하지 않으며 온갖 부당한 압제를 가하는 데 맞서 자유로운 과학 연구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희생당하였으나 결국 그가 옳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식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다시 과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불행한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나왔다.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자라나면서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는 선입견이 생길 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런 선입견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비단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뿌리깊은 생각 때문에 눌려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경우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한동안은 반지성적인 경향을 띄었었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과학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관해 흔히 말해지는 바가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는 반지성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하신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영성을, 한편으로는 지성을 추구하면서2) 그 두 가지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계속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러 자료를 찾아 볼 능력이 생긴 후에 재판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 보니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결론을 얻게 되었다. 자료 속에서 내가 본 갈릴레오의 모습은 압제자에 맞서는 투사의 모습도 아니었고,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주제넘게 성경의 진리에 도전한 교만한 인본주의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한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경과 I - 전향 

그의 단순한 관측은 하나하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의 기둥을 흔들어 놓았다. 갈릴레오는 이제, 자신의 눈으로, 그의 능력으로는 세어 볼 수 없는 무수한 항성들을 본 것이다. 우주는 무한한 것인가? 달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그는 보았다. 결국 실체에 있어서 천체와 지구 사이에는 아마도 차이가 없는 것인가? 은하수는 헤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다. 천체는 고귀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천체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지상의 과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 이러한 간단하고 우연한 관측들이 전통적인 독단론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시작은 하였으나, 아직 그 어떤 것도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에게 있어서는 그가 본 것이 그를 전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케플러는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으나 이제 망원경이 그를 설득시킨 것이다.3) - Daniel J. Boorstin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에 피사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에 피사대학에서 3년 기한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기한이 끝난 1592년에는 파두아대학에서 수학교수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언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597년 파두아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실제로 지지하였고 그 때 그가 집필중이던 '우주론; Cosmography'에서도 전통적인 우주론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표명하지 않았다.4) 하지만 1595년에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가정한 지구의 두 가지 원운동(자전과 공전)을 필요로 하는 조수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고안해내었고,5) 1597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공격하는 편지를 피사의 옛 동료에게 보냈다.6) 같은 해에 독일에서 온 한 방문자가 케플러의 첫 번째 책인 Cosmographic Secret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덕택에 일찍이 새로운 천문학을 받아들였다고 갈릴레오는 인정하였다.7) 그러나 케플러가 그에게 새로운 새계관에 대해 언급해 줄 것을 재촉했을 때 갈릴레오는 이것을 거부하였다.8) 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단지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 생각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실제로 맞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확신이 깊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깊이 확신하면서도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략 십 년간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적으로 변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9년, 망원경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곧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천체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이 망원경을 통해 관찰되었는데,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표면처럼 굴곡이 있으며,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이고, 태양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검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목성의 4개의 위성이 관측된 것이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고, 자기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다른 천체를 가진 지구와 같은 개체가 그 자신도 다른 천체를 회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10) 이러한 발견들은 1610년 3월에 '별의 사자; Starry messenger; Sidereus Nuncius'11)라는 24쪽짜리 책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금성의 위상과 겉보기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였다.12) 이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과 II - 비약 

......성경과 자연은 다같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전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며 후자는 신의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해서 집행한 것이다. 또한 이들을 일반 백성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절대적 진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말의 의미에 대하여)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 반면, 자연은 냉혹하고 불변하며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감추어진 이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이 그에게 주어진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 눈앞에 놓여진 물리적 결과나 또는 필요한 논증의 결론은 그 어떤 이유로도, 말이 또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구절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된다...... 두 개의 진리는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13) - Galileo Galilei

161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과학적 논쟁은 신학적 논쟁으로 비약된다. 처음으로 이 논쟁에 성직자를 끌어들인 것은 지오반니 마기니였는데 그는 젊고 열정적인 종교인이었던 프란체스코 시지를 자극하여, 행성은 단 일곱 개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준 종교적인 주장을 제기하고,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되는 달들은 환상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믿을 수 없는 책을 출판하게 하였다. 플로렌스의 철학자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11년에 이탈리아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반론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지구의 운동이 성경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인용문들로 마쳤다. 그는 '리가 Liga'라고 알려진 갈릴레오에 대항하는 은밀한 조직운동을 지도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갈릴레오가 순전히 과학적 논의에 의하여 패배될 수 없다면, '리가'는 그 전투를 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14) 

1613년 대공 코시모 2세가 베푸는 관례적 만찬 자리에서 비공식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거기서 코시모 보스타글리아 교수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카스텔리는 그날의 상황을 갈릴레오에게 자세히 써보냈다. 갈릴레오는 같은 해 성탄 직전에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 Letter to Castelli' 에서 과학자와 카톨릭 교도로서 자신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성경은 때때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적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물리적 결과에 관한 논쟁에 성경을 끌어들이는 일”에 대해 걱정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 - 성경과 자연의 책 -을 주셨는데, ”그 두 가지 진리는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하였다.15) 

1614년 12월 20일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교수들과 연관이 있는 도미니카파 수사 토마소 카키니 신부는 태양이 멈추었던 여호수아의 기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상은 이단에 매우 가깝다고 강하게 정죄하였다. 도미니카파 지도자가 공식적인 사과문을 보내오기는 하였으나 갈릴레오에 대한 반대는 점점 강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을 읽고 그 사본을 1615년 2월 7일에 로마로 보내면서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빛에 비추어서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을 짓밟는다...... 나는 갈릴레오주의자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다소 교활하고 건방지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신교의 성경 해석 때문에 사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민감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그 편지는 자기가 급히 쓴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대한 새로운 편지 '대공 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서신; 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을 써보냈다.16) 

로마에서는 위원회가 소집되어 로리니 신부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심의를 하였다. 단 며칠의 심의 후에 1616년 2월 24일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되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7) 달력이 그것에 기초해 있으므로 금지되지 않고 다만 '수정을 위하여 출판이 중지'되었다.18) 3월에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 앞에 소환되었고 '실제적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우주론으로서 옹호하는 일을 중단하도록 권고받았다. 갈릴레오가 이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는 논증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는 것만 금지되었을 뿐 유죄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의 책이 금서가 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 갈릴레오가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교황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대적들의 음모가 알려졌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켰으며,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서를 만들어달라는 갈릴레오의 요청에 따라,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개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는 취지의 사적인 편지를 주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되며 따라서 변호되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지적받기만 했다고 썼다.19)

 

경과 III - 재판

따라서 모든 추기경과 모든 신앙심 깊은 교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정당하게 나에게 품게 된 이 의심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면서, 진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으로 나는 맹세코 전기의 잘못과 이단, 그리고 거룩한 교회와 반대되는 모든 잘못과 이단을 버리고 저주하고 배척할 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으로나 글로 말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어떠한 이단이나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이 성스러운 교회 재판소 또는 내가 있을 곳의 어느 교회에나 고발하겠습니다......20) - Galileo Galilei

1623년 8월에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으며 그의 견해에 호의적인 마페오 바베리니가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1624년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따뜻하게 갈릴레오를 맞아주고 그의 새 책을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다섯 번이나 더 그를 만나주었다. 갈릴레오는 조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구의 운동에 관한 주제를 교묘하게 다시 끄집어내면서 적들의 악의와,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구를 하는가를 넌지시 이야기하였다. 갈릴레오는 1616년의 결정이 취소되기를 기대했지만 교황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지구의 운동이 가설로만 간주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조수 이론에 관하여 출판하여도 좋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내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에 따라 1624년부터 1630년까지 '대화; 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World Systems'를 집필하였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한 전문가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또 한 전문가가 제3의 중립적인 인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내용의 대화체로 되어있다.21) 갈릴레오는 1630년 5월에 출판 허가를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 허가가 난 것은 1631년 6월이었고, 1632년 2월에 초판 인쇄본을 대공에게 바쳤다. 그 책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8월에 판매가 금지되었고 10월 1일에는 갈릴레오가 로마로 소환되었다.22) 악명 높은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종교 재판소에 서명 없는 문건이 하나 접수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23) ”갈릴레오는 상기위원(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 성하와 교리 성성의 전체 회중의 이름으로, 전술한 견해 즉 태양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교리 성성이 그에 대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 금령에 대하여 갈릴레오 본인은 수락하였으며 순종하기로 약속하였다.”24) 이에 갈릴레오는 공적인 금령을 받은 바 없고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라는 말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적인 편지를 제출하였다. 재판의 초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한 말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후자에 관해서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거나 변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대한 반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이 약점이 있으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그가 자기들을 우롱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견지하고 변호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25) 

그리고 심의는 수주일 동안 더 지속되었다. 열 명의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황의 사촌이었던 프란체스코 바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4월 30일 갈릴레오는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고, 5월 10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가벼운 선고로 끝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후 결정을 위하여 더 높은 권위자들에게 올라갔을 때 상황은 갑자기 갈릴레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6월 16일에 선고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교리 성성의 심의회에서, 강한 이단의 의혹이 있는 것으로 선언되며, 따라서 성성이 정하는 대로 구금의 형에 처해지며, 어떤 형태로든지, 말로든지 글로든지, 지구의 운동과 태양의 정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그는 재범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대화'라고 명명된 책은 금지된다.”26) 최악의 결과였다.27)

 

불운 

과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그 둘 사이가 몹시 나쁘다거나 또는 무관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쁘다고 하는 생각을 심어 준 데에는 갈릴레오 사건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 연구는 이 사건이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종교가 진보적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과학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것은 다른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듯이,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개인적, 종교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빚어진 결과일 따름이라고 규정한다.28) - 김명자

어쩌면 이 절의 제목을 '불운'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불운'은 어느 정도는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갈릴레오가 로마 대학의 호의를 계속해서 받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공전을 포함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9)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릴레오에게는 토론상대자를 화나게 만들어 적으로 돌려버리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오반니 마기니는 1592년 피사대학의 교수 자리를 놓고 갈릴레오와 경쟁하였으나 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마기니는 갈릴레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는 '별의 사자'가 출간되었을 때 갈릴레오를 신랄하게 비판했을30)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직자를 논쟁에 끌어들였다.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04년 신성(new star)에 대한 자신의 책을 갈릴레오가 공격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1611년 부유물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갈릴레오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예수회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샤이너가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여 1612년에 보고서를 냈을 때 갈릴레오는 그 해석에 반대하여 '태양의 점들에 관한 서신; Letters on Sunspot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갈릴레오는 자기가 먼저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샤이너를 화나게 했으며, 다른 많은 예수회파 사람들도 기분이 상했다.31) 1618년 가을에 나타난 세 개의 혜성에 대해 오라지오 그라시 신부가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을 때, 갈릴레오는 거기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라시에 대해 다소간의 인격적인 모독도 주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갈릴레오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었던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샤이너와 그라시는 저 악명 높은 재판이 열리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2) 

이외에 정말 '불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대화'의 출판업무를 맡은 리카르디는 원고를 비스콘티에게 보냈는데, 비스콘티는 교황이 일찍 서거할 것이라고 예언한 모란디의 친구였다. 비스콘티와 모란디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갈릴레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갈릴레오는 문제의 예언에 대해 잘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지오반니 치암폴리는 갈릴레오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우르바누스 8세가 즉위할 때 바티칸의 훈령 비서관에 임명되어 갈릴레오에게 희망을 품게 한 인물로서34) '대화'의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스페인 주교 보르기아가 교황의 지위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추방되고 만다.35)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체시 백작은 '대화'가 승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세상을 떴다.36)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재판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1616년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확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불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16세기 이탈리아는 혼란스러웠다. 1527년 로마의 피침, 1530년 플로렌스 공화국의 몰락, 이탈리아에 대한 스페인의 통치, 이러한 혼란은 권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37) 오직 교황청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서 집안단속의 의미가 있었다. 갈릴레오가 성경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오의 '불운'에서 정점에 위치해있다. '대화'를 출판한 출판사는 물고기 세 마리가 그려진 그들의 통상인지를 찍었는데 이것이 교황의 세 조카에 대한 명예훼손에 대한 증거라는 말이 돌았다. 또한 '대화'에 등장하는 바보스러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교황을 풍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38) 예수회파는 '대화'가 수사학적 가면을 쓰고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힘있게 변호한다고 교황에게 말하였고, 또한 교황이 조소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국제 정치는 우르바누스 8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개신교도인 스웨덴 왕과의 비밀연합이 그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알려지게 되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지고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악용당했다. 국내에서는 갖가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여러 가지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은 속았다고 생각하며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위신을 회복하며 교회의 머리인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9) 그 결과는 갈릴레오의 지독한 '불운'이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

나아가서 나는 만약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따라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참된 증거가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증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설명할 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우리는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증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데, 이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체들 중에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구제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과, 실제로 태양이 중심에 있으며 지구가 천체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40) - Roberto Berlarmino

위에서 쓴 것처럼 1633년의 재판에서 초점이 된 것은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무엇을 말하였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어겼는가 하는 것과 '대화'가 교황이 허락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이 재판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성경과의 관계 같은 것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1616년이었고 그 때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벨라르미노 추기경이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위 인용문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는 아마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권위가 자명하고 확실한 추론과 배치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이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배치되는 것은 성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서 해설자가 성서에 부여하고 싶어했던 그 의미인 것이다. 즉 성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가 자의적인 믿음으로 성서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진리와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41) 

벨라르미노는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성경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2) 만약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확실히 증명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틀렸다고 단언해서는 안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과 양립하는 형태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성경해석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과학적 증명의 여부였다. 벨라르미노가 요구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단지 관측가능한 자료들을 짜 맞추기 위한 수학적 고안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참된 물리적 설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평가하는 가운데, 갈릴레오는 그 발견들이 지구의 운동을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철회하였고, 금성의 위상들을 예언하고 다른 많은 일들을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반대하는 주장들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의 논리 전개는 추론과 리트로덕션(오늘날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 : 각각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함에 따라 더욱 그럴 듯하게 되는 가설적 모델을 시험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다른 신학자들이 보기에 갈릴레오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이었으며,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임시적인 논거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강요할 만큼 힘이 없었다.43) - Charles E. Hummel

피에르 뒤앙(Pierre Duhem)이나 칼 포퍼(Karl Popper)같은 사람은 현대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실증주의에서 입각해 보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웠다고 주장하였다.44)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들, 즉 울퉁불퉁한 달 표면, 태양의 흑점, 목성의 4개의 위성, 금성의 위상변화와 같은 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반증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직접 입증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벨라르미노 추기경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정하면 현상이 더 잘 설명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올바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가르멜회 신부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 신부에게 쓴 편지의 사본을 입수한 갈릴레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의미하는 '증명'이란 단어의 의미로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증명을 고안하는 것이 갈릴레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1615년 말경에 갈릴레오는 마침내 조수의 운동을 통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증명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증명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45) 갈릴레오는 무역풍도 지구자전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제대로 된 증명을 구성할 만한 배경지식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46)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는 150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다. 연주시차와 푸코의 진자가 그것들로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발견들이다.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자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마음을 굳혔다. 그가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앙이나 포퍼가 갈릴레오가 틀렸다고 말하려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이 발달한 20세기를 지나온 우리는 물론 실증주의가 지지되기 어려운 과학철학임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확실히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철학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실제로 그것은 편견, 뿌리깊은 증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특수하고 집단적인 이익이 일차적 원인이 된 혼란스러운 난전이었다...... 교회 지성인들의 주요부는 갈릴레오 편이었다. 반면에 갈릴레오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자는 세속 사상에서 왔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교권자들 자신까지도 희생양이 된 그 구성의 결과가 비극이었다 - 그것은 모호하고도 상이한 인물들이 기묘한 연합을 이루어서 실행한 음모였다.47)

-- Giorgio de Santillana

갈릴레오 재판에 대하여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도 모든 면에서 철저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소 왜곡되기는 하였어도 모종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권위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은 정확하다. 다만 그 권위주의가 카톨릭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갈릴레오의 몰락을 몰고 온 진짜 권위주의는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과학의 조망이었다.” 4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유한하고 구형이라고 믿었으며, 지구는 그 중심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달 아래와 하늘을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달 아래 세상은 물, 불, 흙,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지상적 물체는 가변적이며 파괴될 수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한편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아래, 위로 움직이는데, 물과 흙은 아래로, 불과 공기는 위로 움직인다. ”자연적인 운동”은 내재적인 것으로 본래의 위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며, ”억지의 운동”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없어지면 물체는 ”자연적인 운동”을 하게된다. 한편 천체는 지상의 원소들보다 훨씬 우월한 제5원소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연적인 운동”ㅍ은 처음이나, 끝 또는 한계가 없는 완전한 형태의 원운동이다. '에테르'는 가변적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영원하다.49) 따라서 달 아래와 하늘은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50) 이 체계에 히파르쿠스는 이센트릭(eccentric)51)을, 아폴로니우스는 주전원(epicycle)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퀀트(equant)52)를 도입함으로써 관측자료와 맞출 수가 있었다.53)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받아들여 기독교화 하였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선 고대 이래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과 자리바꿈하여 한낱 행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옥의 위치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에 대한 사실적 기초를 위태롭게 했으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중심이었다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즉 그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 바깥에 신이 거주한다는 전통적인 우주 구조의 붕괴를 뜻했던 까닭에, 조화된 우주의 붕괴가 교리 자체에 손상을 입히게 됐던 것이다.” 54)

 

현 교황청의 입장55) 

오늘날과는 매우 동떨어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과 아주 오래된 우주론을 분리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의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 더구나 그 이론이 아직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 본질상 가톨릭 전통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으며 그 이론의 가르침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이러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는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처분으로 이끌어 가게 했습니다. 성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이러한 잘못은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56) - 폴 푸파르 추기경

1979년 11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에서 ”신학자, 학자, 사학자들에게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것과 오류가 어느 편에서 오든지 이 오류를 공정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내실 있는 조화에 대한 의혹을 척결할 것을 촉구”하였다.57) 이에 따라 1981년 7월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였다.58) 

추기경은 먼저 위원회의 기원, 구성, 목적, 조사방법, 참고한 문헌들에 대해 잠깐씩 언급한 다음,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을 설명하고 갈릴레오가 자신의 입장을 반박의 증거없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59) 그러나 갈릴레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 대한 납득할 만한 반론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상황이 명확해지자 1741년에는 갈릴레오 전집에 교회 인가가 부여되고, 1757년 판 금서목록에서는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이 삭제되었다고 하였다. 1820년에 천문학과 관련된 어떤 책의 교회인가가 거부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1822년 교황은 저자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사건도 간결하게 언급한다. 추기경이 설명하는 결론은 ”모든 소송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훌륭한 신앙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는 것과 지동설에 대해 ”그릇된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천문학 지식 영역의 과도기적 상황의 결과였으며, 우주론에 대한 주석학적 혼돈의 결과”라는 것이었다.60) 

이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서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진실한 신자이던 갈릴레오는 이 점에 대해 그의 반대파 신학자들보다 더 진지하고 예리했다”고 평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일으킨 혼란은 성서학에 있어서 인식론적 숙고를 촉구하여 결국 현대적 성서 해석에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부합되어야 함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들의 성찰에 참고할 점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수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들에 관해 규칙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였다.6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사건으로부터 두 개의 교훈을 끌어내었다. 먼저 그는 아인슈타인을 언급하면서 ”편파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관점을 뛰어넘어 서로를 포함하면서도 서로를 초월하는 더욱 폭 넓은 관점이 있음”을 첫 번째 교훈으로 꼽았다. 두 번째 교훈은 ”지식의 다양한 문화는 방법의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것으로서, ”지식에는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이성 스스로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두 영역이 있으며 이 두 영역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두 영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만나는 공통점이 있고 각 영역의 고유한 방법론들은 실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2)

 

신화가 되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 사건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 왔는데 그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그려 왔던 모습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발달에 대한 교회의 거부, 혹은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를 반대하던 '독단적' 반계몽주의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신화는 상당한 문화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신화는 훌륭한 신앙을 지닌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의 정신과 그 탐구의 규칙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그 사이에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극적인 상호간의 이해부족이 과학과 신앙 사이의 근본적 대립의 반영으로 해석되어졌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탐구로 이루어진 해명으로 이 불행한 오해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6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험멜은 과학자 갈릴레오와,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갈릴레오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좀 길게 인용해보자.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에 이미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갈릴레오는 편견과 권위에 대한 이성의 도전의 상징, 그리고 중세 신학의 깜깜한 의견들에 대항한 과학의 확실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최초의 과학사가들, 18세기 말기의 프랑스 백과전서파들은 갈릴레오의 연구를 옛 과학 방법과 새로운 과학 방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그리고 과거와 예리한 창조적 결별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이 과학자는 상징이었다. 그들은 갈릴레오를 암흑의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운 순교자의 전형과 해방자로 제시하였다.” 64) 

갈릴레오 이야기는 계몽주의를 선전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신뢰하며 계시를 거부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갈릴레오 재판에서 계시의 핍박을 받는 이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는 이미 갈릴레오가 옳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이성이 승리하였고 계시의 핍박은 부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성이 신앙과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들은 이 이야기를 계시를 핍박하여 추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 1832-1918)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책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전쟁사;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천오백 년 동안 묶어두고 있었다”고 썼다. 그보다 앞서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 1811-1882)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에서 ”사고의 절대적인 자유가 있어야 한다. 성직자는 그가 택한 영역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고 철학자를 탄압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썼다.65) 이러한 사고방식은 20세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는 저 유명한 재판의 중심인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재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속적인 평안의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나의 글 속에는 거룩한 교회에서 빗나감에 대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완전히 아는 나 자신의 양심의 증거가 있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이 대의에서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말을 할지라도, 아무도, 심지어 옛 교부들까지라도, 나만큼 많은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66)

 

결론

성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도 성서 해석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한다.67) - Galileo Galilei

하지만, 진리의 말씀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것만이 모세의 주장이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주시여, 주의 종을 살펴보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하오니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한 말씀에 다른 뜻이 전혀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혹 그때 모세의 의향에 다른 것이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태초에'라고 기록하면서 그는 창조의 첫 시간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같은 말에서 아직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무엇을 만들기 전에 창조의 의도만을 가진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말했건간에 당신의 위대한 종으로써 기록한 것인데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68) 

-- St. Augustinus

벨라르미노는 엄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 아니어서 이론은 종종 버려지기 마련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20세기 과학철학이 밝혀낸 것이므로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다. 험멜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성경의 과학적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런 논증으로 무장하고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을 공부하여, 회의주의적인 친구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과학적 법칙들은 개정되기도 하고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데서 그 신빙성의 근거를 찾게 되면, 그 과학적 이론이 묵은 것이 될 때, 결국 성경도 그 과학 이론과 함께 역사적 유물로 남고 말 것이다.”69)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해석을 가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어떠한 식으로든지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지만 내가 성경을 읽고 이해했을 때 내가 이해한 바가 오류가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70)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성경해석과 과학이론 둘 다 임시적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오히려 우리가 의혹의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과학이론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갈릴레오를 압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이론들, 예컨대 다윈주의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은 자연주의이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자연주의적이 아닌 과학을 상상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단죄한 것처럼, 오늘날 자연주의 체계(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 자체를 공격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1) Colin A. Ronan, Galileo (New York : G. P. Putnam's Sons, 1974), p.253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황영철 역,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IVP, 1991, p. 16에서 재인용. 

2) 이러한 표현은 마치 지성과 영성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줄 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3) Daniel J. Boorstin, 이성범 역, 발견자들 II, 범양사출판부, 1987, p. 56.

4) Ibid., p. 54. 

5)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6) Daniel J. Boorstin, Op. Cit., pp. 54-55. 

7)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8) Daniel J. Boorstin, Op. Cit., p. 55. 

9) Charles E. Hummel, Op. Cit., p. 104. 이런 것들은 그저 그런 발견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의하겠다. 

10) Daniel J. Boorstin, Op. Cit., p. 56. 

11) Hummel은 이 소책자는 '결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05.)고 한 반면, Boorstin은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동의한다는 것을 과감히 표명하였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56)고 한 것은 흥미롭다. 

12) Charles E. Hummel, Op. Cit., p. 105. 

13) Daniel J. Boorstin, Op. Cit., p. 59. 

14) Charles E. Hummel, Op. Cit., p. 107-108. 

15) Ibid., pp. 110-111. 

16) Ibid., pp. 111-112. 

17)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이다. 그 체계는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18) Charles E. Hummel, Op. Cit., p. 127. 

19) Ibid., p. 130. 

20) Daniel J. Boorstin, Op. Cit., p. 64. 

2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주장은 바보스럽고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상상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Hummel은 갈릴레오가 '1616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권고에 대하여는 문자적으로는 순종하였지만 그 정신에는 순종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34.)고 표현하였고, Boorstin은 만약 이것이 '검열관을 속이기 워한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61.)라고 하였다. 

22)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4-136. 

23) 갈릴레오의 적대자가 꾸며낸 허위문서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김명자, 과학과 신앙, '과학사에서 본 카톨릭의 기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36. 

24) Giorgio de Santillana, The Crime of Galile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p. 262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14에서 재인용. 

25)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5. 

26) Ibid., pp. 136-137. 

27) Boor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6일로 기록된 교황의 선고는 모든 대안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었다.' Daniel J. Boorstin, Op. Cit., p. 63.

28) 김명자, Op. Cit., pp. 31-32.

29) Charles E. Hummel, Op. Cit., p. 133. 

30) Ibid., p. 105. 

31) Ibid., pp. 108-110. 

32) Ibid., pp. 131-133. 

33) 김명자, Op. Cit., pp. 35-36. 

34) Charles E. Hummel, Op. Cit., p. 132.

35) 김명자, Op. Cit., p. 36. 

36) Charles E. Hummel, Op. Cit., p. 135. 

37) Ibid., pp. 121-122. 

38) Daniel J. Boorstin, Op. Cit., pp. 62-63. 

39)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142. 

40) Ibid., p. 128. 

41) 요한 바오로 2세, 과학과 신앙, '신앙과 이성은 결코 대립될 수 없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12. 

42) 폴 푸파르, 과학과 신앙, '갈릴레오 사건의 해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p. 18-19. 

43) Charles E. Hummel, Op. Cit., p. 129. 

44) Daniel J. Boorstin, Op. Cit., p. 60. 

45) 나는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해 바닷물은 한 방향으로 쏠린다. 버스가 출발할 때 몸이 뒤로 쏠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한편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해변이 바닷물이 쏠린 방향을 지날 때에 밀물이 되고, 그 반대 방향을 지날 때 썰물이 된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밀물은 지구의 정반대되는 위치에서 동시에 밀물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조수의 주기도 24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조수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뉴턴에 의해 주어졌으며 그 원인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46) 폴 푸파르, Op. Cit., p. 19. 

47) Giorgio de Santillana, Op. Cit., pp. xii-xiii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 144에서 재인용. 

48) Charles E. Hummel, Op. Cit., p. 143.

49) 이것이 울퉁불퉁한 달 표면이나, 태양의 흑점이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반증이 되는 이유이다. 목성의 4개의 위성을 사람들이 믿지 않은 이유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50) Ibid., pp. 31-32. 

51) 행성의 원궤도의 중심이 지구와[또는 태양과] 일치하지 않고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984, p. 30-31. 

52) 행성이 원궤도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등속운동을 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그 각도에 있어서 등속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Op. Cit., p. 31. 

53) Charles E. Hummel, Op. Cit., pp. 40-43. 

54) 김명자, Op. Cit., p. 33. 

55) 필자는 개신교인이기는 하지만 카톨릭에 대해서 문제가 될만한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편견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56) 폴 푸파르, Op. Cit., p. 21. 

5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9. 

58) 폴 푸파르, Op. Cit., p. 17. 

59) 여기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설명한 바는 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비슷하다. 

60) 폴 푸파르, Op. Cit., pp. 17-20. 

61)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p. 10-12. 

62) Ibid., pp. 13-14. 

63) Ibid., p. 13. 

64) Charles E. Hummel, Op. Cit., p. 113. 

65) Mark A. Kalthoff, Man and Creation, 'God and Creation: An Historical Look at Encounters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Hillsdale College Press, 1993, pp. 10-11. 

66) Charles E. Hummel, Op. Cit., p. 146. 

6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10. 

68) St. Augustinus, 오병학 임금선 공역, 참회록, 예찬사, 1991, p. 281. 

69) Charles E. Hummel, Op. Cit., pp. 21-22. 

70) 그렇다면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혹시 누군가가 물을지 모르겠다.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이 질문은 마치 과학이론의 절대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과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론이 실제 세계에 대한 완벽한 상황을 알려주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중요한 측면을 알려준다고 믿는다.


출처 - 창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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