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5-03-20

모세를 찾아서 2 

(Searching for Moses)

David Down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 (The Ten Plagues on Egypt)

바로는 이집트 땅에 내려진 10가지 파괴적인 재앙과 악질로 인해서, 모세의 요구대로 그의 노예들을 놓아주었다.(출애굽기 7~12장). 성스러운 나일강물은 핏물로 변하였고, 모든 생축은 악질로 죽었으며, 번갯불은 가연성 물질들을 모두 태웠고, 우박이 내려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과일 나무를 꺾었으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남아있던 지상의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다. 이집트의 경제가 그토록 피폐했었다면, 어디엔가 그와 같은 국가적 대재난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이후에 풍미했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그  기록은 제13왕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기록은 이렇다. 즉,

”아니, 그 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 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 아니, 그 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 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곡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20


출애굽기의 바로 (The Pharaoh of the Exodus)

이집트 제12왕조의 말기를 통치하던 왕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 아메넴헤트(Amenemhet) 3세, 그리고 소벡네페루(Sobekneferu) 여왕이다. (여기에 소벡네페루를 앞서 아메넴헤트 4세로 알려진 모호한 인물을  포함시키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소벡네페루 여왕의 죽음과 함께 제12왕조도 막을 내렸음은 그녀한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양자인 모세마저도 미디안(Midian)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제12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한참동안 불안정한 기간이 이어졌다. 14명의 왕이 숨가쁘게 대를 바꿨다. 초기에 속하는 왕들은 아마도 제12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나일강의 삼각주 (the Delta)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13왕조의 왕들은 삼각주의 북동 지역을 이미 통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기에 제12왕조가 몰락하자, 곧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제13왕조를 열었다.  (왕조[dynasties]라는 개념은 당시의 이집트의 관념이 아니었다. 그 개념은 나중에 마네토(Manetho)가 창안한 관념이다. 마네토는 BC 3세기에 살던 이집트의 승려로서 이집트 역사라는 기록을 남기고, 왕들을 왕조 별로 분리시켜 계보를 만들었다).

온 이집트를 통치하기 위한 권좌에 등극하기 위해 이 왕들 간에는 맹렬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었고,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짧은 통치기간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을 초래했다. 이와 같은 정권쟁탈전은 네페르호텝(Neferhotep) 1세의 즉위와 함께 가라앉아, 그의 재위 11년의 기간동안 상당부분 안정을 회복하였다.

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던 상대자 바로를 카섹엠르-네페르호렙(Khasekemre-Neferhotep) 1세로 산정한다. 내가 그렇게 믿는 데는 페트리가 발견한 카훈에 있던 예전 왕들의 부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21 그런데 페트리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한 부적은 네페르호텝의 것이었다. 이 네페르호텝은 힉소스(Hyksos) 족이 이집트를 ‘전투 없이’ 점령하기 전에 이집트를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왕이었다. 전투 없이 점령하였다고? 이집트 군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홍해의 바다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4:28). 카섹엠르-네페르호텝(Khasekemre-Neferhotep) 1세는 아마도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 것이다. 그의 미라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카섹엠르-네페르호렙 1세의 동상. 그는 이집트가 힉소스에 의해 점령되기 전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의 시체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그는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지 모른다. 


우드(Wood) 교수는 자기의 강의에서 창세기 47:11과 출애굽기 1:11, 12:37에서 언급되는 라암세스(라암셋, Rameses)의 이름을 ‘도로의 출입문’이라는 뜻을 가진 이집트의 단어 ‘RW3TY’22에 연관시켰다. 그는 그것을 텔엘다바(Tell eld-Daba, (힉소스족의 수도인 Avaris)에 있는 새로운 인구 중심지의 Stratum d/222에 연결시킨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 맨프레드 비텍(Manfred Bietak)에 의해서 발굴되고 있는 현장이다. 비텍에 의하면 이 지층(stratum)에는 가나안(Canaan) 인들의 요소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우드 교수는 Stratum d/2가 이집트에 있었던 이스라엘인들과 연관시킨다.12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를 라암세스 2세로 산정하는 사람들은 ‘라암세스(Rameses)'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성경의 바로가 이 라암세스와 동일인임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라암세스가 출애굽기의 바로라고 하면, 그의 시체는 홍해의 해저 바닥에 누워있어야 할 것인데, 그의 시체가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다. 우드의 주장은 라암세스의 이름을 성경의 구절에 연결시켜야할 필요성을 거부한다.


결론 (Conclusion)

만일 우리가 그 때 당시를 올바르게(맞게) 들여다본다면, 이집트에는 이스라엘 노예들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스라엘 노예들의 돌연한 실종, 10가지 역병과 재앙으로 인한 이집트의 피폐, 이집트 군대의 괴멸.. 등등. 그래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당시(시점, time)가 중요한 요소이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출애굽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은 해보다 480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열왕기상 6:1). 이것으로 출애굽은 BC 1446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430년 앞선 때였기에 (출애굽기 12:40, 갈라디아서 3:16, 17), 그 때는 BC 1850년경이 된다. 노아의 선조의 시대로부터 창세기 12-13 장에 걸쳐서 주어진 연대들을 따져보면, 전 지구적 대홍수는 427년 앞선 BC 2302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에 관한 대부분의 권위자들에 의하면 피라미드들은 BC 155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이집트 최초의 왕조는 BC 3100년경에 통치한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23

이와 같이 해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기록과의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게 된다. 이집트의 최초의 왕조는 물론 피라미드들의 건축도 대홍수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이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면,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는 오류가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기에,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안은 명백하다. 이집트 역사에서의 현재 통용되는 연대기를 인정하고 성경의 연대기를 거부하는 것은, 엿새 만에 완성하셨다는 창조의 기록을 포함하여, 성경의 초기 기록의 잔여 부분에 대한 회의론에 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의 오류가 증명되면, 성경 기록을 인정하는데 중요한 장애의 하나가 제거될 것이며, 그 때에 가서는 창세기 역사가 정당시 될 것이다.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은 현장 고고학자로서 매년 관광객 그룹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안내하고 있다. 관광여행의 마감 때 즈음해서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의 발굴 사역을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된다. 그의 발굴 사역은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의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다. 그는 'Diggins' 라는 월간 고고학 뉴스레터와 전 호주를 커버하는 신문 발행인을 통하여 보급하고 있는 'Archaeological Diggings' 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는 또한 Moscow Radio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 있는 10여 방송국을 넘는 방송국들을 통하여 주당 15분짜리 고고학 토크 쇼를 녹화한다. 그리고 시드니(Sydney) 소재 Wesley Mission에서 고고학 클럽을 매달 주관한다. 그는 시드니 라디오 방송국 2GB를 통하여 Gordon Moyer 박사에 의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References

1. Kenyon, K., Archaeology on the Holy Land, Praeger, New York, p. 198, 1964.

2. Garstang, J., The Story of Jericho, Marshall, Morgan and Scott, London-Edinburgh, p. 136, 1948. 

3. Kenyon, Ref. 1, p. 210.

4. Mazar, A., Archaeology and the Land of the Bible, Doubleday, New York, p. 369, 1992; Ben-Tor, A., The Archaeology of Ancient Israel, Yale University Press, p. 304, 1994. 

5. James, P. et al., Centuries of Darkness: A Challenge to the Conventional Chronology of the Old World Archaeology, Rutgers University Press, p. 318, 1991; Rohl, D., A Test of Time, Century Ltd, London, p. 143, 1995.

6. Edwards, I.E.S. et al.,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I, part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43, 1975; David, R., Ancient Egypt, Harper Collins, p. 20, 1988.

7. Diggings, Vol. 1, No. 3, p. 2, March 1985.

8. Velikovsky, I., Ages in Chaos, Doubleday, New York, 1952.

9. Courville, D.A., The Exodus Problem and its Ramifications, Challenge Books, Loma Linda, 1971.

10, James, Ref. 5, p. 318.

11.  Rohl, Ref. 5, p. 143.

12. Wood, B., New evidence for Israel in Egypt, Newsletter of the Horn Archaeological Museum, p. 3, Winter—Spring 1999.

13. There are two main schools of thought on the 430 years of Exodus 12:40. One regards the period as commencing with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or the beginning of slavery, and the other commenc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As translated in the KJV, the Exodus 12:40 text seems to suggest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but I consider the Hebrew in Exodus can be translated to support either view. I prefer to build on Galatians 3:17, which seems to place the period as beginn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Based on the ages of the patriarchs involved, I would consider it 215 years from the covenant with Abraham till Jacob entered Egypt and 215 years in Egypt. It is not possible to determine the years spent in slavery but, based on the pharaohs involved, I would think about 100 years.

14. See also: Beechick, R., Sojourn of the Jews; Williams, P., Reply to Beechick, Letters to the editor, TJ 15(1):60—61, 2001.

15. David, A.R., The Pyramid Builders of Ancient Egypt: A Modern Investigation of Pharaoh’s Workforce, Guild Publishing, London, p. 191, 1996.

16. David, Ref. 15, Plate 16.

17. If the sex of the babies could be determined to be all or mostly male, that would harmonise with Pharaoh’s edict to kill all the male babies. When Dr Rosalie David visited Australia two years ago, I asked her if the sex of the babies found by Petrie was known. She replied that unfortunately Petrie had only sent three skeletons to European museums and they have all been lost. None of them can be traced. Petrie buried the remainder of the skeletons in a sand dune, but no one knows which sand dune as he left no record of it.

18. David, Ref. 15, p. 195.

19. David, Ref. 15, p. 199.

20. Erman, A., Ipuwer Papyrus, Leiden Museum, quoted from The Ancient Egyptians, a source book of their writings, Harper and Row, New York, pp. 94—101, 1966.

21. The term scarab in archaeological reports refers to seals used for sealing documents though they were often used as ornaments. In either case, they were made of stone, metal or even pottery, with the shape of the scarab beetle on top and the name and title of the king engraved underneath, so when it was pressed down on the soft clay it left his seal impression. 

22. After archaeologists have completed their reports they identify the strata or layers of occupation from the bottom up, so that the lowest layer may be early bronze, the next up middle bronze, the next up late bronze and the top layers iron age or later. But when they first start digging they cannot know what lies beneath, so they number the strata from the top down numbering them 1, 2, 3 etc. These are likely to be later subdivided with letters, so d/2 would be the second layer down and the 4th (d) subdivision of that layer or stratum. 

23. Gardiner, Sir A., Egypt of the Pharaohs: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pp. 430, 434, 1964.

  

*참조 : Biblical Archaeology : Evidence of the Exodus from Egypt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htm

Biblical Archaeology : The Date of the Exodus According to Ancient Writers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date.htm

Biblical Archaeology : Mt. Sinai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mtsinai.htm

Problems with ‘Searching for Moses’ articl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52-pro.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5/i1/moses.asp 

출처 - TJ 15(1):53–57, April 2001.

미디어위원회
2004-10-29

갈릴레오의 재판

최인식 


      갈릴레오로 알려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세익스피어가 출생한 1564년 이태리 피사의 부유한 상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파듀아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기하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구의 자전과 해를 중심으로 한 공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는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그대로 전수받은 일 세기의 천문학자 톨레미의 천동설이었습니다. 천동설은 해와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교황청과 종교 지도자들도 이 주장에 편승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 사상이 모든 학문 심지어 신학에도 깊이 관여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21년 전이었던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논문 '천체의 회전'을 교황 바오로 3세에 증정했습니다. 그는 정평 있는 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제시한 논문의 내용은 1500년 이상을 군림해온 톨레미의 천문학적인 이해를 도전하는 혁명적 이론이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엉뚱하여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56년이 지난 1609년에, 갈릴레오가 화란의 안경 제조상이 만든 작은 망원경에 착안하여 천체를 30배 이상 확대하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기까지는 이 새로운 이론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16년에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와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의 상반성(Incompatibility)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예로 1633년 종교재판 중에 인용된 성경구절(수 10:13, 시 19:1-5, 시 104:1-5, 사 40:22)을 살펴 보면 해와 별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서 40장 22절(땅 위 궁창에; upon the circle of the earth)은 둥근 지구의 지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처음에 갈릴레오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쯤에는 종교계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있던 때라 원래 친분이 좋은 과학자인 갈릴레오가 영향력 있는 종교계의 인사들의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1633년 6월 22일 당시의 교황 어반 8세(1568-1644)의 명령에 의해 열린 종교재판의 결과에서도 드러납니다. 10명의 재판관 중 3명의 재판관이 판결문에 서명을 거부합니다. 재판을 강요한 교황 어반 8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오와 신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반(1624년)에는 갈릴레오와 여섯 차례나 장시간의 접견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염려는 결코 하지않아도 된다고 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단된 이유 중의 하나는 1632년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두 개의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은 저자인 갈릴레오가 어떤 사람을 접견하여 서로 세계관을 토론하는데, 교황을 암시하는 가상적인 인물을 써서 교황에게 모욕적인 공격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교황청이 금지령을 내린 또 다른 원인은 독일의 수학자 요한 케플러와 같이 갈릴레오의 주장에 동조를 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사고의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발로 말미암아 그들이 교황청에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대신 갈릴레오의 관찰을 강조하는 새 방법은 그들에게 불안과 불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갈릴레오와 교황청의 관계를 질시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과학계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몰아넣는 길 만이 그를 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판결문에는 ”이단적인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고 교황청이 지정하는 주택에 삼년 동안 연금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참회시를 외울 것”을 형벌로 받았습니다. 1638년에 완전히 실명한 그는 그로부터 3년 후 1641년 1월 8일에 77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칩니다.


한 개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사회의 전통적으로 기존하는 구조에 변화를 조만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하는 측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이때는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을 포함한 모든 자연학문 분야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므로, 관찰과 실험이 연구방법의 중심이 되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과학자들이 동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떤 한 세대가 전체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계관은 종교적인 신념과 성경에 대한 이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 당시에는 중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던 때라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상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하바드 대학이 1636년에 설립 될 당시에도 전교수진이 톨레미의 천동설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 같이 인식되어 있는 것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세계관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의 대결일 뿐입니다. 틀린 과학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습니다. 세속의 과학이 어떻게 말하던 성경을 말씀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교회는 흠 잡힐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연주의에 기초한 진화론 일색의 과학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냉철히 판단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가톨릭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진화론적 과학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과감히 배격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톨레미의 천동설과 다름없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은 다시 한번 성경과 진화론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참조 : The Galileo affair: history or heroic hagiograph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25

           Galileo Quadricentennial : Myth vs fact
               http://creation.com/galileo-quadricentennial


미디어위원회
2004-10-29

갈릴레오 재판

김창환 


도입

갈릴레오는 전제주의 정권의 악을 보여 주는 고전적인 실례로 남아 있다. 그는 독립적인 사고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고 고발당했다. 갈릴레오는 성경을 의심하였고, 자기만의 독립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거스렸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체계를 파괴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취하였다. 즉 그들은 그 불화의 씨를 원천 봉쇄하였던 것이다.1) - Colin A. Ronan

필자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6살부터 예수님을 만난 17살까지 대략 십 년간을 이성지상주의자로 살았다. 당시의 내가 이해한 과학과 종교의 - 특히 기독교와의 - 관계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 재판이었다. 그리고 그 재판 이야기가 내게 준 인상은 위 인용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비합리적이게도 성경을 신봉하는 교회가 분명한 사실을 보려하지 않으며 온갖 부당한 압제를 가하는 데 맞서 자유로운 과학 연구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희생당하였으나 결국 그가 옳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식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다시 과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불행한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나왔다.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자라나면서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는 선입견이 생길 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런 선입견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비단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뿌리깊은 생각 때문에 눌려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경우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한동안은 반지성적인 경향을 띄었었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과학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관해 흔히 말해지는 바가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는 반지성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하신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영성을, 한편으로는 지성을 추구하면서2) 그 두 가지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계속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러 자료를 찾아 볼 능력이 생긴 후에 재판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 보니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결론을 얻게 되었다. 자료 속에서 내가 본 갈릴레오의 모습은 압제자에 맞서는 투사의 모습도 아니었고,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주제넘게 성경의 진리에 도전한 교만한 인본주의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한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경과 I - 전향 

그의 단순한 관측은 하나하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의 기둥을 흔들어 놓았다. 갈릴레오는 이제, 자신의 눈으로, 그의 능력으로는 세어 볼 수 없는 무수한 항성들을 본 것이다. 우주는 무한한 것인가? 달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그는 보았다. 결국 실체에 있어서 천체와 지구 사이에는 아마도 차이가 없는 것인가? 은하수는 헤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다. 천체는 고귀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천체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지상의 과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 이러한 간단하고 우연한 관측들이 전통적인 독단론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시작은 하였으나, 아직 그 어떤 것도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에게 있어서는 그가 본 것이 그를 전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케플러는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으나 이제 망원경이 그를 설득시킨 것이다.3) - Daniel J. Boorstin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에 피사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에 피사대학에서 3년 기한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기한이 끝난 1592년에는 파두아대학에서 수학교수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언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597년 파두아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실제로 지지하였고 그 때 그가 집필중이던 '우주론; Cosmography'에서도 전통적인 우주론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표명하지 않았다.4) 하지만 1595년에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가정한 지구의 두 가지 원운동(자전과 공전)을 필요로 하는 조수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고안해내었고,5) 1597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공격하는 편지를 피사의 옛 동료에게 보냈다.6) 같은 해에 독일에서 온 한 방문자가 케플러의 첫 번째 책인 Cosmographic Secret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덕택에 일찍이 새로운 천문학을 받아들였다고 갈릴레오는 인정하였다.7) 그러나 케플러가 그에게 새로운 새계관에 대해 언급해 줄 것을 재촉했을 때 갈릴레오는 이것을 거부하였다.8) 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단지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 생각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실제로 맞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확신이 깊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깊이 확신하면서도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략 십 년간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적으로 변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9년, 망원경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곧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천체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이 망원경을 통해 관찰되었는데,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표면처럼 굴곡이 있으며,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이고, 태양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검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목성의 4개의 위성이 관측된 것이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고, 자기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다른 천체를 가진 지구와 같은 개체가 그 자신도 다른 천체를 회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10) 이러한 발견들은 1610년 3월에 '별의 사자; Starry messenger; Sidereus Nuncius'11)라는 24쪽짜리 책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금성의 위상과 겉보기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였다.12) 이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과 II - 비약 

......성경과 자연은 다같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전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며 후자는 신의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해서 집행한 것이다. 또한 이들을 일반 백성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절대적 진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말의 의미에 대하여)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 반면, 자연은 냉혹하고 불변하며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감추어진 이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이 그에게 주어진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 눈앞에 놓여진 물리적 결과나 또는 필요한 논증의 결론은 그 어떤 이유로도, 말이 또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구절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된다...... 두 개의 진리는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13) - Galileo Galilei

161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과학적 논쟁은 신학적 논쟁으로 비약된다. 처음으로 이 논쟁에 성직자를 끌어들인 것은 지오반니 마기니였는데 그는 젊고 열정적인 종교인이었던 프란체스코 시지를 자극하여, 행성은 단 일곱 개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준 종교적인 주장을 제기하고,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되는 달들은 환상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믿을 수 없는 책을 출판하게 하였다. 플로렌스의 철학자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11년에 이탈리아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반론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지구의 운동이 성경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인용문들로 마쳤다. 그는 '리가 Liga'라고 알려진 갈릴레오에 대항하는 은밀한 조직운동을 지도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갈릴레오가 순전히 과학적 논의에 의하여 패배될 수 없다면, '리가'는 그 전투를 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14) 

1613년 대공 코시모 2세가 베푸는 관례적 만찬 자리에서 비공식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거기서 코시모 보스타글리아 교수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카스텔리는 그날의 상황을 갈릴레오에게 자세히 써보냈다. 갈릴레오는 같은 해 성탄 직전에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 Letter to Castelli' 에서 과학자와 카톨릭 교도로서 자신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성경은 때때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적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물리적 결과에 관한 논쟁에 성경을 끌어들이는 일”에 대해 걱정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 - 성경과 자연의 책 -을 주셨는데, ”그 두 가지 진리는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하였다.15) 

1614년 12월 20일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교수들과 연관이 있는 도미니카파 수사 토마소 카키니 신부는 태양이 멈추었던 여호수아의 기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상은 이단에 매우 가깝다고 강하게 정죄하였다. 도미니카파 지도자가 공식적인 사과문을 보내오기는 하였으나 갈릴레오에 대한 반대는 점점 강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을 읽고 그 사본을 1615년 2월 7일에 로마로 보내면서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빛에 비추어서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을 짓밟는다...... 나는 갈릴레오주의자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다소 교활하고 건방지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신교의 성경 해석 때문에 사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민감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그 편지는 자기가 급히 쓴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대한 새로운 편지 '대공 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서신; 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을 써보냈다.16) 

로마에서는 위원회가 소집되어 로리니 신부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심의를 하였다. 단 며칠의 심의 후에 1616년 2월 24일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되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7) 달력이 그것에 기초해 있으므로 금지되지 않고 다만 '수정을 위하여 출판이 중지'되었다.18) 3월에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 앞에 소환되었고 '실제적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우주론으로서 옹호하는 일을 중단하도록 권고받았다. 갈릴레오가 이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는 논증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는 것만 금지되었을 뿐 유죄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의 책이 금서가 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 갈릴레오가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교황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대적들의 음모가 알려졌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켰으며,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서를 만들어달라는 갈릴레오의 요청에 따라,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개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는 취지의 사적인 편지를 주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되며 따라서 변호되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지적받기만 했다고 썼다.19)

 

경과 III - 재판

따라서 모든 추기경과 모든 신앙심 깊은 교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정당하게 나에게 품게 된 이 의심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면서, 진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으로 나는 맹세코 전기의 잘못과 이단, 그리고 거룩한 교회와 반대되는 모든 잘못과 이단을 버리고 저주하고 배척할 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으로나 글로 말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어떠한 이단이나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이 성스러운 교회 재판소 또는 내가 있을 곳의 어느 교회에나 고발하겠습니다......20) - Galileo Galilei

1623년 8월에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으며 그의 견해에 호의적인 마페오 바베리니가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1624년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따뜻하게 갈릴레오를 맞아주고 그의 새 책을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다섯 번이나 더 그를 만나주었다. 갈릴레오는 조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구의 운동에 관한 주제를 교묘하게 다시 끄집어내면서 적들의 악의와,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구를 하는가를 넌지시 이야기하였다. 갈릴레오는 1616년의 결정이 취소되기를 기대했지만 교황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지구의 운동이 가설로만 간주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조수 이론에 관하여 출판하여도 좋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내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에 따라 1624년부터 1630년까지 '대화; 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World Systems'를 집필하였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한 전문가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또 한 전문가가 제3의 중립적인 인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내용의 대화체로 되어있다.21) 갈릴레오는 1630년 5월에 출판 허가를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 허가가 난 것은 1631년 6월이었고, 1632년 2월에 초판 인쇄본을 대공에게 바쳤다. 그 책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8월에 판매가 금지되었고 10월 1일에는 갈릴레오가 로마로 소환되었다.22) 악명 높은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종교 재판소에 서명 없는 문건이 하나 접수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23) ”갈릴레오는 상기위원(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 성하와 교리 성성의 전체 회중의 이름으로, 전술한 견해 즉 태양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교리 성성이 그에 대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 금령에 대하여 갈릴레오 본인은 수락하였으며 순종하기로 약속하였다.”24) 이에 갈릴레오는 공적인 금령을 받은 바 없고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라는 말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적인 편지를 제출하였다. 재판의 초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한 말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후자에 관해서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거나 변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대한 반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이 약점이 있으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그가 자기들을 우롱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견지하고 변호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25) 

그리고 심의는 수주일 동안 더 지속되었다. 열 명의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황의 사촌이었던 프란체스코 바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4월 30일 갈릴레오는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고, 5월 10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가벼운 선고로 끝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후 결정을 위하여 더 높은 권위자들에게 올라갔을 때 상황은 갑자기 갈릴레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6월 16일에 선고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교리 성성의 심의회에서, 강한 이단의 의혹이 있는 것으로 선언되며, 따라서 성성이 정하는 대로 구금의 형에 처해지며, 어떤 형태로든지, 말로든지 글로든지, 지구의 운동과 태양의 정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그는 재범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대화'라고 명명된 책은 금지된다.”26) 최악의 결과였다.27)

 

불운 

과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그 둘 사이가 몹시 나쁘다거나 또는 무관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쁘다고 하는 생각을 심어 준 데에는 갈릴레오 사건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 연구는 이 사건이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종교가 진보적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과학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것은 다른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듯이,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개인적, 종교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빚어진 결과일 따름이라고 규정한다.28) - 김명자

어쩌면 이 절의 제목을 '불운'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불운'은 어느 정도는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갈릴레오가 로마 대학의 호의를 계속해서 받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공전을 포함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9)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릴레오에게는 토론상대자를 화나게 만들어 적으로 돌려버리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오반니 마기니는 1592년 피사대학의 교수 자리를 놓고 갈릴레오와 경쟁하였으나 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마기니는 갈릴레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는 '별의 사자'가 출간되었을 때 갈릴레오를 신랄하게 비판했을30)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직자를 논쟁에 끌어들였다.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04년 신성(new star)에 대한 자신의 책을 갈릴레오가 공격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1611년 부유물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갈릴레오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예수회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샤이너가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여 1612년에 보고서를 냈을 때 갈릴레오는 그 해석에 반대하여 '태양의 점들에 관한 서신; Letters on Sunspot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갈릴레오는 자기가 먼저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샤이너를 화나게 했으며, 다른 많은 예수회파 사람들도 기분이 상했다.31) 1618년 가을에 나타난 세 개의 혜성에 대해 오라지오 그라시 신부가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을 때, 갈릴레오는 거기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라시에 대해 다소간의 인격적인 모독도 주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갈릴레오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었던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샤이너와 그라시는 저 악명 높은 재판이 열리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2) 

이외에 정말 '불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대화'의 출판업무를 맡은 리카르디는 원고를 비스콘티에게 보냈는데, 비스콘티는 교황이 일찍 서거할 것이라고 예언한 모란디의 친구였다. 비스콘티와 모란디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갈릴레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갈릴레오는 문제의 예언에 대해 잘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지오반니 치암폴리는 갈릴레오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우르바누스 8세가 즉위할 때 바티칸의 훈령 비서관에 임명되어 갈릴레오에게 희망을 품게 한 인물로서34) '대화'의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스페인 주교 보르기아가 교황의 지위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추방되고 만다.35)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체시 백작은 '대화'가 승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세상을 떴다.36)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재판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1616년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확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불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16세기 이탈리아는 혼란스러웠다. 1527년 로마의 피침, 1530년 플로렌스 공화국의 몰락, 이탈리아에 대한 스페인의 통치, 이러한 혼란은 권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37) 오직 교황청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서 집안단속의 의미가 있었다. 갈릴레오가 성경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오의 '불운'에서 정점에 위치해있다. '대화'를 출판한 출판사는 물고기 세 마리가 그려진 그들의 통상인지를 찍었는데 이것이 교황의 세 조카에 대한 명예훼손에 대한 증거라는 말이 돌았다. 또한 '대화'에 등장하는 바보스러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교황을 풍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38) 예수회파는 '대화'가 수사학적 가면을 쓰고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힘있게 변호한다고 교황에게 말하였고, 또한 교황이 조소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국제 정치는 우르바누스 8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개신교도인 스웨덴 왕과의 비밀연합이 그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알려지게 되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지고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악용당했다. 국내에서는 갖가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여러 가지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은 속았다고 생각하며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위신을 회복하며 교회의 머리인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9) 그 결과는 갈릴레오의 지독한 '불운'이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

나아가서 나는 만약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따라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참된 증거가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증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설명할 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우리는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증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데, 이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체들 중에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구제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과, 실제로 태양이 중심에 있으며 지구가 천체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40) - Roberto Berlarmino

위에서 쓴 것처럼 1633년의 재판에서 초점이 된 것은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무엇을 말하였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어겼는가 하는 것과 '대화'가 교황이 허락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이 재판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성경과의 관계 같은 것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1616년이었고 그 때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벨라르미노 추기경이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위 인용문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는 아마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권위가 자명하고 확실한 추론과 배치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이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배치되는 것은 성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서 해설자가 성서에 부여하고 싶어했던 그 의미인 것이다. 즉 성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가 자의적인 믿음으로 성서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진리와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41) 

벨라르미노는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성경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2) 만약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확실히 증명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틀렸다고 단언해서는 안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과 양립하는 형태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성경해석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과학적 증명의 여부였다. 벨라르미노가 요구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단지 관측가능한 자료들을 짜 맞추기 위한 수학적 고안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참된 물리적 설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평가하는 가운데, 갈릴레오는 그 발견들이 지구의 운동을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철회하였고, 금성의 위상들을 예언하고 다른 많은 일들을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반대하는 주장들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의 논리 전개는 추론과 리트로덕션(오늘날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 : 각각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함에 따라 더욱 그럴 듯하게 되는 가설적 모델을 시험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다른 신학자들이 보기에 갈릴레오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이었으며,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임시적인 논거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강요할 만큼 힘이 없었다.43) - Charles E. Hummel

피에르 뒤앙(Pierre Duhem)이나 칼 포퍼(Karl Popper)같은 사람은 현대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실증주의에서 입각해 보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웠다고 주장하였다.44)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들, 즉 울퉁불퉁한 달 표면, 태양의 흑점, 목성의 4개의 위성, 금성의 위상변화와 같은 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반증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직접 입증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벨라르미노 추기경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정하면 현상이 더 잘 설명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올바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가르멜회 신부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 신부에게 쓴 편지의 사본을 입수한 갈릴레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의미하는 '증명'이란 단어의 의미로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증명을 고안하는 것이 갈릴레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1615년 말경에 갈릴레오는 마침내 조수의 운동을 통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증명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증명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45) 갈릴레오는 무역풍도 지구자전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제대로 된 증명을 구성할 만한 배경지식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46)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는 150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다. 연주시차와 푸코의 진자가 그것들로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발견들이다.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자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마음을 굳혔다. 그가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앙이나 포퍼가 갈릴레오가 틀렸다고 말하려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이 발달한 20세기를 지나온 우리는 물론 실증주의가 지지되기 어려운 과학철학임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확실히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철학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실제로 그것은 편견, 뿌리깊은 증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특수하고 집단적인 이익이 일차적 원인이 된 혼란스러운 난전이었다...... 교회 지성인들의 주요부는 갈릴레오 편이었다. 반면에 갈릴레오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자는 세속 사상에서 왔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교권자들 자신까지도 희생양이 된 그 구성의 결과가 비극이었다 - 그것은 모호하고도 상이한 인물들이 기묘한 연합을 이루어서 실행한 음모였다.47)

-- Giorgio de Santillana

갈릴레오 재판에 대하여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도 모든 면에서 철저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소 왜곡되기는 하였어도 모종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권위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은 정확하다. 다만 그 권위주의가 카톨릭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갈릴레오의 몰락을 몰고 온 진짜 권위주의는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과학의 조망이었다.” 4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유한하고 구형이라고 믿었으며, 지구는 그 중심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달 아래와 하늘을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달 아래 세상은 물, 불, 흙,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지상적 물체는 가변적이며 파괴될 수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한편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아래, 위로 움직이는데, 물과 흙은 아래로, 불과 공기는 위로 움직인다. ”자연적인 운동”은 내재적인 것으로 본래의 위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며, ”억지의 운동”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없어지면 물체는 ”자연적인 운동”을 하게된다. 한편 천체는 지상의 원소들보다 훨씬 우월한 제5원소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연적인 운동”ㅍ은 처음이나, 끝 또는 한계가 없는 완전한 형태의 원운동이다. '에테르'는 가변적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영원하다.49) 따라서 달 아래와 하늘은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50) 이 체계에 히파르쿠스는 이센트릭(eccentric)51)을, 아폴로니우스는 주전원(epicycle)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퀀트(equant)52)를 도입함으로써 관측자료와 맞출 수가 있었다.53)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받아들여 기독교화 하였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선 고대 이래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과 자리바꿈하여 한낱 행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옥의 위치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에 대한 사실적 기초를 위태롭게 했으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중심이었다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즉 그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 바깥에 신이 거주한다는 전통적인 우주 구조의 붕괴를 뜻했던 까닭에, 조화된 우주의 붕괴가 교리 자체에 손상을 입히게 됐던 것이다.” 54)

 

현 교황청의 입장55) 

오늘날과는 매우 동떨어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과 아주 오래된 우주론을 분리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의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 더구나 그 이론이 아직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 본질상 가톨릭 전통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으며 그 이론의 가르침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이러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는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처분으로 이끌어 가게 했습니다. 성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이러한 잘못은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56) - 폴 푸파르 추기경

1979년 11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에서 ”신학자, 학자, 사학자들에게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것과 오류가 어느 편에서 오든지 이 오류를 공정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내실 있는 조화에 대한 의혹을 척결할 것을 촉구”하였다.57) 이에 따라 1981년 7월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였다.58) 

추기경은 먼저 위원회의 기원, 구성, 목적, 조사방법, 참고한 문헌들에 대해 잠깐씩 언급한 다음,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을 설명하고 갈릴레오가 자신의 입장을 반박의 증거없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59) 그러나 갈릴레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 대한 납득할 만한 반론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상황이 명확해지자 1741년에는 갈릴레오 전집에 교회 인가가 부여되고, 1757년 판 금서목록에서는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이 삭제되었다고 하였다. 1820년에 천문학과 관련된 어떤 책의 교회인가가 거부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1822년 교황은 저자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사건도 간결하게 언급한다. 추기경이 설명하는 결론은 ”모든 소송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훌륭한 신앙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는 것과 지동설에 대해 ”그릇된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천문학 지식 영역의 과도기적 상황의 결과였으며, 우주론에 대한 주석학적 혼돈의 결과”라는 것이었다.60) 

이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서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진실한 신자이던 갈릴레오는 이 점에 대해 그의 반대파 신학자들보다 더 진지하고 예리했다”고 평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일으킨 혼란은 성서학에 있어서 인식론적 숙고를 촉구하여 결국 현대적 성서 해석에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부합되어야 함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들의 성찰에 참고할 점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수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들에 관해 규칙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였다.6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사건으로부터 두 개의 교훈을 끌어내었다. 먼저 그는 아인슈타인을 언급하면서 ”편파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관점을 뛰어넘어 서로를 포함하면서도 서로를 초월하는 더욱 폭 넓은 관점이 있음”을 첫 번째 교훈으로 꼽았다. 두 번째 교훈은 ”지식의 다양한 문화는 방법의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것으로서, ”지식에는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이성 스스로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두 영역이 있으며 이 두 영역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두 영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만나는 공통점이 있고 각 영역의 고유한 방법론들은 실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2)

 

신화가 되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 사건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 왔는데 그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그려 왔던 모습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발달에 대한 교회의 거부, 혹은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를 반대하던 '독단적' 반계몽주의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신화는 상당한 문화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신화는 훌륭한 신앙을 지닌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의 정신과 그 탐구의 규칙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그 사이에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극적인 상호간의 이해부족이 과학과 신앙 사이의 근본적 대립의 반영으로 해석되어졌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탐구로 이루어진 해명으로 이 불행한 오해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6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험멜은 과학자 갈릴레오와,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갈릴레오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좀 길게 인용해보자.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에 이미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갈릴레오는 편견과 권위에 대한 이성의 도전의 상징, 그리고 중세 신학의 깜깜한 의견들에 대항한 과학의 확실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최초의 과학사가들, 18세기 말기의 프랑스 백과전서파들은 갈릴레오의 연구를 옛 과학 방법과 새로운 과학 방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그리고 과거와 예리한 창조적 결별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이 과학자는 상징이었다. 그들은 갈릴레오를 암흑의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운 순교자의 전형과 해방자로 제시하였다.” 64) 

갈릴레오 이야기는 계몽주의를 선전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신뢰하며 계시를 거부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갈릴레오 재판에서 계시의 핍박을 받는 이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는 이미 갈릴레오가 옳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이성이 승리하였고 계시의 핍박은 부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성이 신앙과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들은 이 이야기를 계시를 핍박하여 추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 1832-1918)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책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전쟁사;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천오백 년 동안 묶어두고 있었다”고 썼다. 그보다 앞서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 1811-1882)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에서 ”사고의 절대적인 자유가 있어야 한다. 성직자는 그가 택한 영역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고 철학자를 탄압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썼다.65) 이러한 사고방식은 20세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는 저 유명한 재판의 중심인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재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속적인 평안의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나의 글 속에는 거룩한 교회에서 빗나감에 대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완전히 아는 나 자신의 양심의 증거가 있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이 대의에서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말을 할지라도, 아무도, 심지어 옛 교부들까지라도, 나만큼 많은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66)

 

결론

성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도 성서 해석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한다.67) - Galileo Galilei

하지만, 진리의 말씀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것만이 모세의 주장이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주시여, 주의 종을 살펴보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하오니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한 말씀에 다른 뜻이 전혀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혹 그때 모세의 의향에 다른 것이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태초에'라고 기록하면서 그는 창조의 첫 시간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같은 말에서 아직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무엇을 만들기 전에 창조의 의도만을 가진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말했건간에 당신의 위대한 종으로써 기록한 것인데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68) 

-- St. Augustinus

벨라르미노는 엄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 아니어서 이론은 종종 버려지기 마련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20세기 과학철학이 밝혀낸 것이므로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다. 험멜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성경의 과학적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런 논증으로 무장하고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을 공부하여, 회의주의적인 친구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과학적 법칙들은 개정되기도 하고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데서 그 신빙성의 근거를 찾게 되면, 그 과학적 이론이 묵은 것이 될 때, 결국 성경도 그 과학 이론과 함께 역사적 유물로 남고 말 것이다.”69)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해석을 가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어떠한 식으로든지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지만 내가 성경을 읽고 이해했을 때 내가 이해한 바가 오류가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70)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성경해석과 과학이론 둘 다 임시적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오히려 우리가 의혹의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과학이론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갈릴레오를 압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이론들, 예컨대 다윈주의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은 자연주의이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자연주의적이 아닌 과학을 상상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단죄한 것처럼, 오늘날 자연주의 체계(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 자체를 공격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1) Colin A. Ronan, Galileo (New York : G. P. Putnam's Sons, 1974), p.253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황영철 역,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IVP, 1991, p. 16에서 재인용. 

2) 이러한 표현은 마치 지성과 영성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줄 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3) Daniel J. Boorstin, 이성범 역, 발견자들 II, 범양사출판부, 1987, p. 56.

4) Ibid., p. 54. 

5)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6) Daniel J. Boorstin, Op. Cit., pp. 54-55. 

7)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8) Daniel J. Boorstin, Op. Cit., p. 55. 

9) Charles E. Hummel, Op. Cit., p. 104. 이런 것들은 그저 그런 발견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의하겠다. 

10) Daniel J. Boorstin, Op. Cit., p. 56. 

11) Hummel은 이 소책자는 '결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05.)고 한 반면, Boorstin은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동의한다는 것을 과감히 표명하였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56)고 한 것은 흥미롭다. 

12) Charles E. Hummel, Op. Cit., p. 105. 

13) Daniel J. Boorstin, Op. Cit., p. 59. 

14) Charles E. Hummel, Op. Cit., p. 107-108. 

15) Ibid., pp. 110-111. 

16) Ibid., pp. 111-112. 

17)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이다. 그 체계는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18) Charles E. Hummel, Op. Cit., p. 127. 

19) Ibid., p. 130. 

20) Daniel J. Boorstin, Op. Cit., p. 64. 

2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주장은 바보스럽고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상상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Hummel은 갈릴레오가 '1616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권고에 대하여는 문자적으로는 순종하였지만 그 정신에는 순종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34.)고 표현하였고, Boorstin은 만약 이것이 '검열관을 속이기 워한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61.)라고 하였다. 

22)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4-136. 

23) 갈릴레오의 적대자가 꾸며낸 허위문서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김명자, 과학과 신앙, '과학사에서 본 카톨릭의 기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36. 

24) Giorgio de Santillana, The Crime of Galile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p. 262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14에서 재인용. 

25)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5. 

26) Ibid., pp. 136-137. 

27) Boor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6일로 기록된 교황의 선고는 모든 대안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었다.' Daniel J. Boorstin, Op. Cit., p. 63.

28) 김명자, Op. Cit., pp. 31-32.

29) Charles E. Hummel, Op. Cit., p. 133. 

30) Ibid., p. 105. 

31) Ibid., pp. 108-110. 

32) Ibid., pp. 131-133. 

33) 김명자, Op. Cit., pp. 35-36. 

34) Charles E. Hummel, Op. Cit., p. 132.

35) 김명자, Op. Cit., p. 36. 

36) Charles E. Hummel, Op. Cit., p. 135. 

37) Ibid., pp. 121-122. 

38) Daniel J. Boorstin, Op. Cit., pp. 62-63. 

39)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142. 

40) Ibid., p. 128. 

41) 요한 바오로 2세, 과학과 신앙, '신앙과 이성은 결코 대립될 수 없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12. 

42) 폴 푸파르, 과학과 신앙, '갈릴레오 사건의 해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p. 18-19. 

43) Charles E. Hummel, Op. Cit., p. 129. 

44) Daniel J. Boorstin, Op. Cit., p. 60. 

45) 나는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해 바닷물은 한 방향으로 쏠린다. 버스가 출발할 때 몸이 뒤로 쏠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한편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해변이 바닷물이 쏠린 방향을 지날 때에 밀물이 되고, 그 반대 방향을 지날 때 썰물이 된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밀물은 지구의 정반대되는 위치에서 동시에 밀물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조수의 주기도 24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조수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뉴턴에 의해 주어졌으며 그 원인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46) 폴 푸파르, Op. Cit., p. 19. 

47) Giorgio de Santillana, Op. Cit., pp. xii-xiii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 144에서 재인용. 

48) Charles E. Hummel, Op. Cit., p. 143.

49) 이것이 울퉁불퉁한 달 표면이나, 태양의 흑점이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반증이 되는 이유이다. 목성의 4개의 위성을 사람들이 믿지 않은 이유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50) Ibid., pp. 31-32. 

51) 행성의 원궤도의 중심이 지구와[또는 태양과] 일치하지 않고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984, p. 30-31. 

52) 행성이 원궤도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등속운동을 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그 각도에 있어서 등속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Op. Cit., p. 31. 

53) Charles E. Hummel, Op. Cit., pp. 40-43. 

54) 김명자, Op. Cit., p. 33. 

55) 필자는 개신교인이기는 하지만 카톨릭에 대해서 문제가 될만한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편견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56) 폴 푸파르, Op. Cit., p. 21. 

5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9. 

58) 폴 푸파르, Op. Cit., p. 17. 

59) 여기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설명한 바는 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비슷하다. 

60) 폴 푸파르, Op. Cit., pp. 17-20. 

61)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p. 10-12. 

62) Ibid., pp. 13-14. 

63) Ibid., p. 13. 

64) Charles E. Hummel, Op. Cit., p. 113. 

65) Mark A. Kalthoff, Man and Creation, 'God and Creation: An Historical Look at Encounters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Hillsdale College Press, 1993, pp. 10-11. 

66) Charles E. Hummel, Op. Cit., p. 146. 

6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10. 

68) St. Augustinus, 오병학 임금선 공역, 참회록, 예찬사, 1991, p. 281. 

69) Charles E. Hummel, Op. Cit., pp. 21-22. 

70) 그렇다면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혹시 누군가가 물을지 모르겠다.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이 질문은 마치 과학이론의 절대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과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론이 실제 세계에 대한 완벽한 상황을 알려주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중요한 측면을 알려준다고 믿는다.


출처 - 창조지


미디어위원회
2004-10-23

예루살렘의 독특한 기후

 (Jerusalem's Unique Climate)

Larry Vardiman, Ph.D.


추위로부터의 탈출

꽁꽁 얼어붙은 땅을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대지방의 겨울철 동안, 상쾌한 열대 해변에 대한 환상은 지친 직장인들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가까이에 모래사장이 있고 시원하고 푸른 바다와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아마도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또는 카리브 해안에서의 휴가가 그들에게 손짓할 것이다. 겨울철 북쪽지방의 추위, 바람, 눈을 피해 북부인들을 태양이 내리쬐는 열대지방으로 운송하는 것이 하나의 주된 산업으로 발전했다. 소수 여행자들은 이스라엘로 떠나는 여행을 이런 겨울의 혹독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여겼다.

몇년 전에 텔 아비브(Tel Aviv) 대학의 유대인 기상학자인 파인하스 알퍼트(Pinhas Alpert)는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는 시편 48:1,2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터(situation)’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가 ‘노프(nof)’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단지 한 번만 나타나며, 그것의 설명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nof’ 는 환경, 전경, 혹은 높은 곳이나 원거리에서 관찰되는 풍경을 의미한다. 알퍼트(1991)는 한 주석자가 그 단어가 ‘기후(climate)’를 의미한다고 제안했으며, 예루살렘의 기후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 글은 예루살렘이 실로 독특하며 아름다운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업상이나 휴가차 왔던 방문자들에게도 주님의 특별한 축복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태양과 비의 이상적인 조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사막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 벌판을 밟고 지나가는 낙타 캐러밴들의 사진과 그림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런 장면을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샌들을 신고 이스라엘을 가로질러 다녔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발 씻을 물의 결핍, 식수의 부족, 기근에 관한 성경 이야기들을 읽어왔으며, 모세 시대에 이집트 사막과 시내 광야에서 출애굽을 하던 할리우드 영화를 보아왔다. 이런 모든 이미지들을 통해 지독히 덥고 뜨거운 날씨와 내린다 해도 거의 적은 수량의 비를 연상케 되는 것이다.

네게브(Negev) 지역의 이스라엘 남부와 요단강 골짜기(Jordan River Valley) 동부에 매우 건조한 날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근처의 중북부 연안과 예루살렘이 있는 고지들을 따라 위치한 지역의 기후는 훨씬 더 시원하고 풍부한 강수량을 보인다. 이스라엘 북부와 고지들이 있는 지역의 평균 연강수량은 보통 380mm(15인치)를 초과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지역에서는 감귤류, 올리브류, 무화과류 및 곡류와 같이 풍부한 농작물들을 생산한다. 사막지역과는 달리, 이스라엘에서 이들 지역들은 굉장히 비옥하다.

이상적인 기후를 만드는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도만 너무 높지 않다면, 많은 햇빛이 최우선 순위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햇빛이 너무 강해서 구름이나 비가 전혀 생기지 않으면 이상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 기후가 너무나 건조하고 덥기 때문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열대 기후도 너무 습하므로 이상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적당한 양의 구름과 비, 그리고 많은 양의 햇빛이 잘 섞여진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받고 있는 햇빛과 비의 양은 이런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1의 X 축은 지구상에 있는 69군데의 기상 관측소에서 조사한 일조량이고, Y 축은 연간 강수량(mm/yr)을 나타낸다. 연간 3250 일조시간에서의 수직선과 연간 300mm 강수량에서의 수평선은 이 차트를 4등분으로 나눈다. 예루살렘의 두 관측소는 많은 양의 일조시간과 적당한 양의 강수를 가지고 있어, 이 도표의 오른편 상부에 속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런 이상적인 조건에 접근하는 다른 유일한 관측소는 아리조나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로, 이곳은 예루살렘에 비해 상당히 높고 서늘한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의 기후

이스라엘의 기후가 오늘날처럼 항상 따뜻하고 건조하지만은 않았다. 성경의 몇몇 구절에 의하면 그 땅은 과거에 더 촉촉했으며, 오늘날 중동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관개수로 없이 농사짓기에 적합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애굽기 3:7,8)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전반에 걸친 토지이용(land-use)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 경에 이 지역은 서늘하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농작물들과 숲들이 무성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Crowley & North, 1991).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전체의 호수 수면(lake levels)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빙하기’ 때 더 높았다 (Street-Perrott & Harrison, 1985).

오늘날에는 사막이 된 북부 아프리카 지역 도처에는 농업과 초원지대가 흔했다. 무성한 초원 지역에서 서식하는 기린, 얼룩말, 사자 등의 암각화(petroglyph)가 사하라 중부의 바위투성이의 암석 노두(outcrops)에서 발견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찍은 콜럼비아 우주선의 레이더 영상은 과거의 많은 강우량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모래 아래에 묻혀있는 완전한 지류계(tributary system)를 가진 수로들을 보여주었다 (Jet Propulsion Laboratory, NASA).

전 세계 기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빙하기(Ice Age)’ 동안에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기후는 완전히 달라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미와 북유럽을 덮은 빙상은 북반구에 제트기류를 야기시켜 폭풍의 궤도(storm track)를 남쪽으로 더 이동하도록 하여 북부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이동하도록 했다. 이렇게 남쪽에서 부는 폭풍 궤도는 이스라엘 도처에 습하고 시원한 기후를 만들어냈었다 (Kutzbach & Wright, 1985).

만약 ‘빙하기’가 창세기 대홍수에 이어 기원 전 3000년과 1000년 사이에 발생했었다면, 그 다음 아브라함 시대 동안의 기후는 오늘날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 사막이 존재하는 남부 이스라엘과 요르단 열곡(Jordan Rift Valley)에서의 기후 변동이 아마도 가장 컸을 것이다. 북부 이스라엘과 고지들을 따라서는, 강수량의 차이가 그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기후 변화가 오늘날보다 극단적이었을 같다. ‘빙하기’가 후퇴함에 따라, 온도차가 크고 습도차가 큰, 매우 변동이 심한 기후를 초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요셉과 엘리야와 같은 여러 족장들의 시대 동안 성경에 기술된 가뭄, 기근, 전염병, 그리고 다른 극단적인 날씨 현상들과 일치될 수 있다.


날씨와 기후의 차이

날씨(weather)는 매일 매일의 기상 현상인 반면에, 기후(climate)는 일정한 지역에서의 전반적으로 장기적인 기상 현상이다. 비록 예루살렘의 기후가 이상적일지라도, 이것이 온도와 강수량에 있어서 극한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면, 1998년 ICR에서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동안, 강한 한랭전선의 발달로 인해 이스라엘 전 지역에 강한 바람과 기온 하강 및 눈이 내렸었다. 40년 만에 가장 강한 바람(50노트 이상)이 몰아쳤고, 예루살렘에는 15cm의 눈이 내렸다. 비록 일반적인 기후가 매우 상쾌할지라도, 예루살렘에서 매년 눈을 경험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아름다운 기후

하지만, 오늘날 예루살렘은 전반적으로 균일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곳은 이상적인 기후를 경험하기에 특별히 선호되는 지역이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덥지도 않고, 그렇게 춥지도 않으며, 그렇게 건조하지도 않고, 그렇게 습하지도 않다. 예루살렘의 기후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성경을 확실히 뒷받침 해준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시편 48:2).


References 

.Alpert, P. 1991: The Uniqueness of the Jerusalem Climate. Bulletin of the American Meteorological Society, vol. 72, no. 2, pp. 228-231.

.Crowley, T.J. and G.R. North, 1991: Paleoclimatology, Oxford Monographs on Geology and Geophysics #18, Oxford University Press, 349 pp.

.Kutzback, J.E. and H.W. Wright, 1985: Simulation of the climate of 18,000 yr BP: Results for the North American/North Atlantic/European sector and comparison with the geologic record. Quaternary Science Reviews, 4, 147-187.

.Street-Perrott, F.A. and S.P. Harrison, 1985: Lake levels and climate reconstruction, in Paleoclimate Analysis and Modeling, A.D. Heckt, Ed., John Wiley and Sons.

* Dr. Vardiman is Administrative Vice President and Chairman of the Astrogeophysics Department at ICR.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20.htm 

출처 - ICR, Impact No. 320, 2000.

미디어위원회
2004-07-27

어떻게 인종들이 달라지게 되었는가? 

: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기원

(How Did Human “Races” Develop?)

Walt Brown

 

     단지 하나의 인종이 있다. 그것은 사람 인종(human race)이다. 오늘날 '인종(race)' 이란 단어는 피부 색, 눈 모양, 머리카락 등의 육체적 특성이 구별되는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는 늦은 1800 년대에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육체적 특성과 관련된 인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대신 '민족(nation)'이란 단어는 200번 이상 사용되어 있다.

인종이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아이디어이다. 비록 특성들이 폭넓게 다양하다 하더라도, 소위 인종 사이에의 유전적 분자적 변이(variations)는 사소한 것으로 확인되어졌다. 인간의 변이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 예를 들어 개(dog)의 가계에는 매우 다양한 특성들이 존재한다. 가축으로 길러지는 개에 있어서 대부분의 다양성은 과거 300년의 동안에 만들어졌다. 개들은 백색, 흑색, 적색, 황색, 점박이, 작은 것, 큰 것, 털이 있는 것, 털이 없는 것, 귀여운 것, 귀엽지 않은 것 등이다. 기질과 능력 또한 매우 다양하다. 길러지는 개는 늑대, 코요테, 딩고, 자칼 등 개 종류(kind)의 거의 모든 종들과 교배할 수 있다.

생명체의 각 종들에 들어있는 방대한 양의 유전자(genes)들은 후손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러한 변화들을 허락한다. 이러한 설계된 특성이 없었다면, 멸종은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각 종안에 변화가 없었다면, 생물체들은 매우 단순한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다음의 3 가지 메커니즘은2 아마도 대부분의 '인종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홍수 이후인 대략 5000 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림 148 : 몇몇 인종들의 얼굴들. 첫째 열 왼쪽부터 일본, 티벳, 보르네오, 네덜란드, 둘째 열은 아일랜드, 중국, 르완다, 한국, 셋째 열은 뉴질랜드, 발리, 오키나와, 이스라엘, 넷째 열은 미국, 호주, 인도, 이집트, 다섯째 열은 몰루카, 캐나다, 그리스, 과테말라인의 얼굴들이다.

옷과 관계없이 헤어스타일, 나이, 피부색이 다른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은 얼마나 다른가? 대륙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이 웃고, 똑같이 운다. 우리의 차이는 매우 적다. 우리들의 같은 점은 너무도 많다.

 

 

 



1.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이 잘 확립된 현상인 자연선택은 비록 그것이 소진화(microevolution)의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는 하지만, 일 세기 동안의 실험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진화(macroevolution)의 메커니즘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부모의 어떤 유전자들이 후대에서 여과되는 현상으로,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지만 유전적 변이가 매우 적은 후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적도 근처에 사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피부암과 같은 심각한 위험에 보다 민감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생식 가능한 시기까지 살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밝은 색의 피부색 유전자를 전달할 기회를 적게 가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태양 빛의 흡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피부에서 형성되는 비타민 D3의 결핍 가능성이 크다. 극지방에서 이것은 구루병(rickets)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세대가 지난 후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적도지방 근처에서, 흰 피부의 사람들은 고위도 지방 근처에서 많아졌을 것이다.      

예외도 있다. 에스키모 사람(Inuits)들은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북극의 위도에 산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 음식에는 많은 비타민 D3를 포함하고 있는 물고기-간 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루병을 예방했을 것이다.

 

2. 문화적 선호 (Cultural Preference). 이것은 좋아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싫어하는(편견과 같은) 형태에 따라 일어난다.

좋아함. ” 제 눈에 안경'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화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종족 계통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거위들에서 확인되었다. 파란 눈 거위(blue snow geese)는 북극의 한 지역에서 산다. 그리고 하얀 눈 거위는 또 다른 지역에서 산다. 각 집단의 알들이 한 부란기에서 부화되었다. 거위 새끼들은 반대 색을 가진 부모들에게 입양되어 키워졌다. 어린 거위들은 후에 자라서 양부모의 색깔을 가진 거위들과 짝지으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 양부모는 분홍색으로 색칠되었다. 색깔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새끼 거위들은 자라서 그 색깔을 가진 짝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래된 노래 ” I Want a Girl Just Like the Girl That Married Dear Old Dad' 는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싫어함.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매우 심하다. 육체적 모습에 기초한 편견은 전쟁, 학살, 강제 격리, 자발적 분리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태인들과 몇몇 인종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리안 종족에 대해 극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인종에 대한 극도의 편견은 유태인 종족의 감소와 아리안 종족의 증가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자발적 분리의 예는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다. 평균 키가 135cm 정도인 피그미(Pygmies) 족은 간혹 210cm의 큰 키를 가지는 와투시(Watusi)족과 분리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두 종족은 서로 수백 마일 이내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것들과 수천년 동안 계속된 수많은 다른 편견들은 많은 종족들을 육체적 모습에 의해 분리시켜 놓았다.                

 

3. 소수의 고립된 인구집단들. 전체 인구 집단, 또는 여러 생물체들의 전체 집단은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집단 내에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집단에서 소수가 고립된 지역으로 (예로 섬과 같은) 이동되었다면, 새로운 그룹은 전체 집단에 비해 매우 적은 유전적 특징(또는 유전형질의 적은 범위)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세대가 흐른 후, 섬에는 원래의 집단과는 다른 종족이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리석(marbles, 반은 흰색, 반은 검정색)으로 채워진 통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자, 각 대리석이 사람을 나타내며, 대리석의 색깔은 사람의 피부 색깔에 대한 유전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 일부의 대리석이 무작위로 취해져서 격리된 섬들에 놓여진다면, 그 섬들은 한 색깔의 대리석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이 분산되고 고립되었을 때도 어느 정도 유사할 수 있다. 각 사람들은 피부색깔에 대해 여러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같은 피부색(검은, 또는 흰)의 유전자를 가진 채 고립되었다면, 그들의 후손들은 똑같은 피부색을 가지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다른 유전적 특성들도 마찬가지로 대리석의 색깔로 설명될 수 있다.    

실제, 이 과정에 대한 유전학은 이러한 간단한 설명보다는 더욱 복잡하다. 예를 들면, 피부색을 결정하는 데는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의 유전자가 관여한다. 또한 수천의 종족들이 있다. 작은 그룹들이 큰 집단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그들의 각각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지역에서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특성들이 쉽게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수 후 여덟 명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 흩어질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창세기 10-11장에 나타나는 노아의 후손들의 목록에서부터, 우리는 초기의 이동 형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셈의 직계 후손들은 일반적으로 아라랏산 근처(오늘날의 터키 동쪽)에 머물렀고,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함의 후손들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면에 야벳의 후손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작은 그룹들이 고립된 지역에서 정착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유전적 특성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발현되었을 것이다.

 

이 3 가지 메커니즘(자연선택, 문화적 선호, 고립된 인구집단)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제 몇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해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하게 생겼을까? 분명히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 모든 종족들(아마도 사라진 다른 종족들까지)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었던 유전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보여지지(발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유전자들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중간의 어떤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담의 히브리어 말은 '붉음(redness)'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붉은(red)', '피를 보다(to show blood)'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피부색은 미국 인디언의 피부색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140 여년 동안 진화론은 매우 다른 한 그림을 그려왔다. 사람들의 조상은 원숭이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진화론에 의하면, 일부의 초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가지가 분리되어서, 그들이 다른 육체적, 정신적, 행동적 특성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들을 비인간화 시키고 있는, 그리고 매우 편견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인종우월주의(racism)인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을 인종우월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종우월주의자 였지만). 인종우월주의는 오늘날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대중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진화론은 인종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해 왔던 것이다.3       

창세기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 노아와 그의 부인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사촌이라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행동한다면, 세계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e word 'race,' as applied to groups of people, is never used in the King James translation and is seldom used in modern translations. The two or three uses in these modern translations come from Hebrew and Greek words that mean 'family' or 'offspring,' not a variety or subspecies.

2. A fourth mechanism may play a role. Experiments with a few plants and animals have shown that a hostile environment can switch on preexisting genetic machinery in a parent, so offspring are better protected. (See Item 2 on page 6.) This may partially explain skin color variations in humans.

3.  'Biological arguments for racism may have been common before 1859, but they increased by orders of magnitude following the acceptance of evolutionary theory.'  Stephen Jay Gould, Ontogeny and Phylogeny (Cambridge, Massachusett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77), p. 127.

* Roger Lewin, Bones of Contention (New York: Simon & Schuster, Inc., 1987), pp. 266-267.


*참조 : 흑백 쌍둥이와 인류의 기원.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7&bmode=view

흑백 쌍둥이가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378&bmode=view

다른 피부색의 쌍둥이가 연속해서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401&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cience.com/onlinebook/FAQ310.html#wp1249448

출처 - CSC

미디어위원회
2004-06-22

저희가 별을 보고 2 (When They Saw the Star)

 : 베들레헴 별에 관한 과학적 추적

Dr. Henry M. Morris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Matthew 2:10)

 

(4) 그의 별 (His Star)은 과연 진짜 별이었을까?

신성이나 초신성은 원래 창조 주간의 네 번째 날에 창조된 기존의 별들로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자기 폭발하는 별을 일컫는다. 하지만 신성의 폭발은 아주 드문 경우다. 어쨌거나 보통의 별이 갑자기 엄청나게 광도(光度)를 높이며 수개월 동안 폭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 빛이 사그라진다.

초신성의 폭발은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어쨌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발생하기 때문에, 점성술에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은하계 안에서 초신성의 폭발의 기록은 겨우 두 세 번뿐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경우가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AD 1054년에 보고한 예이고, 그 다음 것은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AD 1572년에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의 경우는 케플러(Kepler)가 AD 1604년에 보고한 경우이다. 그밖에 몇 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형 망원경의 도움으로 관찰된 것들이었기에 그 Magi 들이 보았던 별에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 가시적인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다는 확고한 공식적인 천문학사 중에 기록은 없지만, 그와 같은 별의 출현이라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소임으로는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AD 1054년 이전에도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존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침묵시키려 해서 생기는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무려 50년 동안 Royal Greenwich Observatory의 태양부(太陽部)의 총감독으로 있었으며, 또 영국의 천문관측소의 총재직에 있던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는 그와 같은 별(그 당시는 '새로운 별' 또는 '임시 별'이라고 불렸다)이야말로 베들레헴에 나타났던 그 별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인 설명을 가능케 하는 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1908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천문학 그리고 성경(Astronomy and the Bible)'에서 한 장(chapter)을 할애하여 이 주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사실상 다른 곳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그 별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 별에 관한 언급은 오직 마태복음 2:1-12절에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초기 크리스천 저술가들은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자기들 나름으로 성경 밖의 자료들을 들춰서 당시의 사건을 조사했던 것 같다.

한 예를 들어보면, 한때나마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107년에 사망)는 그 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별은 너무도 밝게 빛나서 하늘에 있는 그 모든 별들의 빛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모습은 가히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고보의 원복음서(The protoevangelium of James)로 알려져 있던 성경의 외경에 담겨있는 기록은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했다는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많은 별들 속에서 빛나던 믿을 수 없이 큰 별이 다른 별들의 빛을 흐리게 하여 마침내 더는 빛이 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AD 4세기 초에 활동하던 박학다식한 교회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자기가 살던 시대보다 몇 세기 전에 있던 문헌들에 대하여 상당한 연구증거를 남기면서, ”그 별은 하늘에 있는 보통의 빛들 속에 새롭고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의 별들 속에 섞인 그 별은 진정 이상하고 낯설었다. 알려진 그 어떤 별과도 전혀 닮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한 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맥가이버(Robert mcIver)는 이 주제를 최근 30여 년 동안이나 조사한바 있다. 그는 1998년에 출판된 자기 저서 '베들레헴의 별 - 메시아의 별 (Star of Bethlehem - Star of Messiah)' 에서 중국과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각기 그리스도의 탄생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비정상적인 새 별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때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이상한 별을 묘사하고 있는 로마의 지하묘지의 벽화와 여러 나라의 주화 속에 그려진 그림에 관해서도 검토했다. 그는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별이 관찰되었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들의 많은 부분이 그와는 달리하는 의견에 취약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은 말고도,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있었다는 이상한 새 별에 대한 징후들이 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최소한 흥미진진한 우연의 일치이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 별은 두 개나 그 이상의 행성의 합이라든가, 하층 대기권에 생긴 어떤 움직이는 특별한 불빛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짜 별이었다는 주장이 독단에 흐를 가능성이 없는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별과 별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이를 소상히 알고 있을 Magi들은 결국 그것을 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페르시아의 Magi들은 점성가들이기 보다는 유능한 천문관측자들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아니었다면 (어느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들은 배화교도(拜火敎徒; Zoroastrians)였으리라. 그리고 배화교는 많은 측면에서 유대교와 닮았다. 그 중에서도 점성술에 대한 혐오감이 그랬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특히 이스라엘에 위대한 왕이 오실 것을 알리는 새로운 별에 관한 발람의 예언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발람 그 자신도 아마 Magi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어쩌면 Magi라는  신분계급을 창시한 사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배화교도들은 심지어 발람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의 기간에 활동하던 초기 Magi들 중의 한 부류였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성령에 감화된 발람의 예언과 성령에 감화된 마태의 역사기록은 둘 다 그것을 하나의 별 - 실은 '그의' 별! - 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때에 진정 새로운 별을 하나 창조(하려고만 하셨다면 할 수 있었을 테지만)하셨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신성의 가능성보다 더 가능성이 농후한)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현실적이다. 초신성이란 무엇인가? 이미 창조된바 있으면서도 일찍이 알려지지 않던 별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별이 아니던가!

앞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이 설명은 이미 고인이 된 영국의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그 별을 단순히 '새 별'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신성(nova)이라든가, 초신성(supernova)이라는 학술어가 그가 살던 시대엔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1976년 12월판 Science Digest 지에 실린 '베들레헴의 별(The Star of Bethlehem)'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즈 멜라니(James Mullaney)는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별에 관해서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거의 모든 설명들 가운데서 신성이 아니면, 초신성이었다는 설명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의견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p.65).

멜라니는 또 한번 강력히 자기 소견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 ”진실로 왕의 탄생이 아니고는 그렇듯이 경이로운 천상(天上)의 고지서(告知書)를 보내올 만큼 중요한 사건이 있었겠는가?!”(ibid). 하나의 초신성의 폭발로 방사되는 에너지는 폭발 정점 때에는 우리의 은하수에 있는 별 전체가 방사하는 에너지의 총합보다도 크다! 창조주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들 속에 등장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능한 가장 장엄한 고지 방법을 선택하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천군천사가 그 현장에 나타나서 알리기를 - 온 세상에 보내준 강대한 별이다! 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신성의 폭발원인과 후속 효과에 대한 세부 내용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아직까지는 모호하다. 그리고 신성의 발생 위치와 시점은 전적으로 예측불허이다. 그렇다면 발람은 메시아의 탄생이 있을 때, 신성의 폭발이 있을 것을 1400년 전에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 정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점성가들이 혜성이나 유성들, 그리고 행성들의 합은 물론 '새' 별들까지도 위인들의 부침(浮沈)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 어떤 점성가도 수백 년 후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한 자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라도 원하실 때 어느 별이고 선별하여 폭발시킬 수 있으셨을 것이고, 또 원하시면 먼 훗날에 세워놓으신 사건을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설명 - 발람의 유명한 예언(비록 발람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반(反)하는 예언이었지만!)과 하나님 당신 자신이 선택하신 때에 기적적인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예언을 결국 이루셨다는 설명 - 보다 더 훌륭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Magi들은 어떻게 이 별, 즉 이 초신성(그 별이 초신성이었다는 가정 하에)이 그의 별━오래 전에 발람이 예언했던 별━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까? 요컨대  다른 '새 별들'이 때때로 발생했다면, 그 별은 절대로 최초의 초신성은 아닐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혹시 그 별이 최초의 초신성은 아니었을까? 옛날에 있었던 혜성들과 행성들의 합의 경우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일종의 점성술적인 전조로 간주되어왔었다. 그러나 옛날에 그 어떤 형태로건 초신성이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발견된 바는 없다. 사실상 성경의 연대기는(진화론적 천문학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별들은 창조된 지가 겨우 주전 수천 년밖에 안 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별들은 대체적으로 그렇게도 빨리 폭발을 수반하는 분열의 과정에 함입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초신성의 발생을 촉발하지 않으셨다면, 그 별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그 때 이래로 많은 신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또한 몇 번의 초신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와 같은 별들을 만드신 데는 그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리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별들은 최소한 그의 창조사역이 과거에 완성되었다는(창세기 2:1-3) 그의 계시된 진실성을 최소한 공고히 하고 지지한다. 그의 창조 내용은 현재 양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나, 질적으로는 엔트로피 원리에 의해서 쇠퇴하고 있다(시편 102:25-27을 비교하라). 이 원리는 죄로 인해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내린 하나님의 최초의 저주에 의해서 설정되어있는 것이다(창세기 3:17; 로마서 8:20-22 등). 그리고 이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Magi들은 (그리고 그들 말고도 그의 별을 고대하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도 또한) 이 새로운 별이야말로 발람이 예언했던 그 별이라고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니엘 선지자의 7주간의 예언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그들은, 주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상적인 천문관측을 통하여 그 별의 출현을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별은 장차 구세주를 보내겠다던 하나님의 최초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어떤 한 특정 성좌에서 발생했을 개연성이 매우 현실적이다. 바로 이 'protoevangel (최초의 복음)'이 뱀(사탄)과 여자의 후손(그리스도)과의 사이에 벌어질 장구한 원수지간의 갈등을 예언했던 것이다. 뱀은 여자의 후손에게 상처를 입히겠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사탄을 영원히 멸할 것이다(창세기 3:15).

이 태초의 약속이 성좌들 안에 있는 많은 별-그림(相)들 속에, 특히 황도대의 12궁성과 그것들의 데칸(decans, 12궁성과 관련된 성좌들) 속에 잘 반영되어있다. 이 별자리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후대의 점성가들이 부여한 점성술적인 의미로 말미암아 잘못 훼손되었지만, 실제로는 점성가들의 해석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성경의 여러 책들 자체가 그 별자리 궁성들과 그들의 최초의 의미들은 본래가 하나님 당신 자신께서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고대 족장들(특히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 [유태인 역사학자 Josephus의 말에 의하면])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별들을 창조하시고 그 별들의 광명으로 ”징조(徵兆)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하셨다 (창세기 1:14). 그 다음,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12궁성(Mazzaroth)을 계절에 따라 이끌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었음(욥기 38:32)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자로스(Mazzaroth)는 특별히 황도대의 12궁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좌들을 일컫는데, 예컨대 처녀자리(Virgin), 저울자리(Balances), 물고기자리(Fishes), 사자자리(Lions) 등등을 대표하도록 지정되어있는 것들이다.

어떤 성좌들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언급된 것들도 있다━즉, '아르크투루스(목자 별자리)' '오리온 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욥기 9:9), '날랜 뱀' 자리(욥기 26:13), 그리고 그밖에 여럿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이름도 지으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시편 147:4; 이사야 40:26). 이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좌들의 이름을 지으신 데는 어떤 목적하는 바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결코 점성술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하늘 위에 당신의 목적하는 바와 약속하는 바를 새겨놓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약속과 목적하는 바가 언제나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특히 당신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기 전부터 알려지게 하려하셨다는 추론이다. 그렇게 해서, 태초부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시편 19:1, 2).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점성가들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대 성좌들은 하나님이 주신 태초의 약속을 지금도 명료하게 발하고 있다.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W. Maunder)가 이 점을 주목하였음은 세대를 통해 이어오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처녀궁성은 처녀의 몸에서 출산되실 구세주의 약속을 암시하고 있음은 '여자의 후손' 이라는 바로 그 구절 속에 함축되어있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닌 한 여자가 출산할 후손이기 때문에 한 여자만이 그 기적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자별자리의 궁성은 정복자다운 사자가 도망치는 뱀을 죽이는 그림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른 별자리 궁성에서 그림으로 연역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오늘에 이르러 그 별이 나타났던 성좌가 어느 성좌였었는지를 꼬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일도 분명치 않다. 그리고 그 별이 출현한 성좌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별은 약속된 구주의 오심을 묘사하는 성좌로 Magi들이 알고 있던 그 성좌에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 박사들은 신실한 사람들로서 창조의 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별들에게 부여하셨던 애초의 징조와 상징에 친숙했을 것이기에, 하늘에 갑자기 불타듯 빛나는 이 새 별이 '그의 별', 즉 약속된 왕의 탄생을 선포하는 별이 틀림없다고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그를 찾아서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긴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여행길은 하루 낮 밤에 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행할 시종들과 호위병들의 진용을 조직하는 한편 일행의 보급품을 마련하고 거룩한 아기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같은 목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Magi들과 회합을 위한 준비에도 많은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드디어 긴 여행길을 떠났던 것이다.

 

(5) 그의 별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초신성들은 여러 달 동안 빛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빛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붕괴 과정에 있는 별로서 결국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또한 지구가 태양 주변의 궤도를 공전함에 따라서 밤하늘도 변한다. 어떤 한 해 동안 하늘에 보이던 별들이 낮 시간동안에 태양 광선 때문에 가려지다가 그 하루 해가 저물 무렵에 자취가 없어지는 수도 없지 않다. 아마도 박사들이 보았던 별도 이렇게 되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긴 여로에서 그 별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장차 오실 이스라엘 왕을 선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이면 그 아기가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것을 예상하였기에, 그들은 그 별의 더 이상의 안내가 없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마리아와 요셉은 요셉의 조상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실시하고 있는 로마 당국의 호구조사에 등록하기 위하여 갈릴리의 나사렛 집을 떠나 유대 땅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당도하자 때맞춰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다.

비록 베들레헴의 하늘에 나타난 천군들이 선포하고 또 새 별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지만, 그 어느 선포도 예루살렘을 특별히 동요케 하지 않았었다. 목동들이 천군천사한테서 들은 그 소식을 베들레헴 근처에 퍼트리고, 나중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그 소식을 예루살렘 근교(누가복음2:17; 2:38)에 퍼트렸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참 뜻을 인식했던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기도 할 것이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벌써 여럿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별을 보았을 사람이 많았을 테지만, 그들도 그 별과 메시아와 연관된 흥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발람이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살해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그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그 별을 본지 여러 달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어쩌면 두 해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중에 헤롯왕이 아기들을 살해한 때를 감안해 추산된 수치다. 참고: 마태복음 2:16). 예루살렘에 도착한 박사들은 갓난아기 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헤롯왕이 아기 왕이 있는 곳을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그냥 '소동'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들은 파르티아 인과 페르시아 인이 유대 나라의 옥좌에 이 새 왕을 옹립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관들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증거로 미가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자, 헤롯은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갓난아기를 찾아보게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6마일 떨어진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떠나자 갑자기 그 별이 다시 나타났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에는 그 별은 보이지 않았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앞서 가고 있다가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으리라. 아마 꼭두새벽 하늘이었던 것 같다.

성경의 말씀으로는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고 되어 있다(마태복음 2:9). 이 말로 미루어보아 그 별이 천정(天頂)에 다다랐을 때가 바로 베들레헴의 중천에 왔던 때에 해당한 것 같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는 길에 특별히 길잡이 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별이 다시 나타나자, 그들은 ”가장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린 성경해석이 옳았을 뿐만 아니라, 이 별이야말로 진정 그의 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말 같은 옛날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들어서자마자, 어느 우물에 비치는 별의 반사를 보고 그들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베들레헴 마을의 중천에 수직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비록 확인된 바는 없지만,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Maunder)에 의해서 진실한 이야기로 인용됐었다. 물론 성경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그 집 위에 머물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곳이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마을 사람들한테서 아기가 있는 곳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를 본 그들은 ”엎드려 그를 경배하였다” (마태복음 2:11).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참조 : What Was the Christmas Star?
https://answersingenesis.org/holidays/christmas/what-was-the-christmas-star/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whentheysawthestar/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04-06-22

저희가 별을 보고 1 (When They Saw the Star) 

: 베들레헴 별에 관한 과학적 추적

Dr. Henry M. Morris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Matthew 2:10)


 매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없이 간증하면서,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다는 그 유별난 별에 관한 '해설' 기사들이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구별 없이 출판되고 있다. 문필가들은 마태복음 2:1-12절에 기록된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려고 많은 논설을 내놓는다. 비록 이 책자와 같이 조그만 책으로서는 그 많은 연구들을 진정 옳게 평가하기는 역부족이겠지만, 그런대로 그 가정하는 '별'이 '별'임을 인정하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입장에 서 그들의 연구들을 요약하여 평가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별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전에, 이 놀라운 사건에 관해 제기되는 최소한 두 가지 흥미진진한 의문을 검토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토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지만, 실은 중요한 주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그 '박사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만이 그 별이 중요한 별임을 인식했던 것일까? 그들이 먼 나라로부터 느닷없이 예루살렘에 나타날 때까지, 유대의 종교계, 정치계 지도자들은 그 별의 중요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2. 그 세 명의 나그네가 나타나 질문을 하고 다닌 일로 인해서, 헤롯왕의 조정과 유대의 지도자들이 동요할 만큼 자극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박사들이 베들레헴 상공에 떠있는 그 별을 보고 모두 기뻐했는데도, 왜 헤롯왕과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3. 마지막으로, 그 별은 무엇이었기에 그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떠나게 했으며, 또 정확한 위치까지 올 수 있게 인도했을까? 특히 메시아가 오리라고 약속된 도시에 살고있던 사람들은 그 별의 나타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이 흥미진진한 질문들에 대한 가능한 대답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그 동방박사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었을까?

그 동방박사들에 대한 일반적인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세 사람으로서, 이름은 멜키올(Melchior), 발다살(Balthasar), 가스발(Gaspar)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나라(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에서 왔다. 초기의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들을 세 왕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며, 결코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2:1,7절에 기록된 '박사들(wise men)'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Magi (또는 Magoi)'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어는 특별한 승려집단에 속하는 사람에 적용된다. Magi(오늘날의 'magic' 이라는 단어의 유래) 라고 불렸던 학자 신분은 원래 Medina에 살던 어떤 특정 부족에서 유래했을 것 같다.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통치 집단의 일부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특별히 천부적으로 점성술과 예언의 '지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결국 일종의 승려 신분이 되어,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는 물론 아라비아와 인도와 같은 먼 나라의 조정에까지 출사하여, 그 나라 귀족의 전속 고문과 자문직에 종사했다.

심지어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악명 높던 선지자 발람(Balaam)은 초기 Magi 집단의 일원이었음은 물론, 어쩌면 Magi의 창시자였는지 모른다는 전설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의 Magi들은 하나님이 구세주의 탄생을 특별한 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알린다는 예언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에 기록된바와 같이 장차 나타날 별에 관한 예언도 발람의 예언이었음은 물론이다. 아래에 그의 예언을 인용해본다. 그 예언은 실질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의 의사에는 반(反)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강제에 못 이겨 진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민수기 24:17-19).

이와 같이 해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발람의 예언은 이스라엘과 연관된 특별한 별이 세계를 통치할 미래의 홀(笏)(즉, 왕)같이 나타날 것임을 계시하고 있었다.

후대의 Magi들, 특히 (다니엘은 물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Magi들은 심오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예언은 물론 다니엘의 다양한 예언들까지도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이 누군가? 그는 느부갓네살 왕과 키루스 왕의 조정에서 '박사들' 중 가장 존경받던 예언자가 아니던가!) (참고: 다니엘서 2:45; 6:28).

Magi들 중 일부는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닐지라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에스더 왕비의 집권기간 중에 하나님이 페르시아에서 유태인들을 구출할 때, 그 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유대인이 되었다.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스더 8:17). 이 사건 그 자체로서도 페르시아의 Magi들을 수없이 자극하여, 당시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성전(聖典)들, 특히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들을 연구하도록 충동했을 것이다. 이 민담(民譚)은 Magi의 전통적인 학습의 주요 부분이 되어 세대를 이어 전수되어 오다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때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들 가운데에는 메대 사람 다리우스 왕(페르시아의 왕 550-486 BC)의 통치 기간에 했던 그의 '70 주간'에 관한 위대한 예언이 있는데, 이 예언은 페르시아의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재건토록 명령(다니엘서 9:24, 25) 한 지 483년 후에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었다.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페르시아의 Magi들이 발람의 예언들과 다니엘의 예언들을 겹쳐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의 별'이 나타나기를 기대에 찬 눈으로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뭔가 이와 같은 상황이 페르시아 Magi들이━헤롯 왕당파들과 합리주의적인 사두개 교인들(당시 유대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대부분 이에 속하고 있었다)이 아닌━그 별의 출현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는 이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바빌론과 다른 나라(심지어 아라비아나 인도)의 조정에서 고문직을 감당하면서 이름을 높인 이 승려신분 계급에 속한 'Magi'도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페르시아의 Magi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Magi들도 이 약속된 '유대의 왕'을 찾아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일행들 속에 합류했을 개연성도 있었던 것 같다.(사실상 전설은 그렇게 전한다). 찾아온 Magi들은 셋 뿐이었다는 것을 믿어야할 이유는 없다. 아기 예수 앞에 바쳐진 선물이 세 종류였다는 사실로, 선물을 증정한 사람이 셋 뿐이었다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거기에 왔었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지만 세 사람보다 많았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2) 왜 헤롯왕과 유대인들은 박사들의 방문에 그토록 동요했을까?

세 사람의 순회 '점성가들'의 방문이 예루살렘을 그렇게도 심각한 동요를 야기시켰다는 이야기는 어찌 생각하면 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이 외국인들은 헤롯왕을 배알하기 위해서 어떻게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들이 왕의 탄생을 물었다는 것이 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소동시키는' 원인이 되었을까?(마태복음 2:3).

그러나 이 의문은 내방한 외국인 '점성가'는 셋이 아니라 더 많았다고 전제할 때에만 풀린다. (많은 현대의 성경번역가들이 그들을 '박사들'이라고 호칭한 것처럼). 그 Magi 집단은 세 사람 이상으로 구성되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12명이나, 아니면 그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은 '동방'에서 왔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한 나라는 하나뿐만 아니라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은 경호병들과 상당한 수의 시종들을 대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추측이 맞는다 해도, 그들의 방문 사실이 왜 강력한 왕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을까? 헤롯왕은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던 위대한 로마제국의 비호 하에 있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 아닌 로마 제국의 위대한 씨저 아우구스투스 황제 자신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가 왜 이 동방의 귀인들의 내방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을까?

하지만 로마제국이 당시 실제로 알려진 것처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유대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 - 로마제국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강력한 거대 제국 파르티아의 일부였던 것이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와는 심각한 경쟁 대상에 있었으며, 정복 목적으로 침범한 로마 군단을 여러 번 물리쳤었다 (한 번은 왕위등극 전의 헤롯이 직접 로마군단을 인솔하고 침범한 적도 있었다). 이 당시에 파르티아(페르시아를 포함하여)는 로마제국에 근접한 경계선에서 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로마제국에서 하사된 헤롯의 공식 명칭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런데 지금 강력한 적성국에서 내방한 대표단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 관한 정보를 묻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2). 헤롯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이 그 수행원들이(크리스마스 카드에 자주 묘사되는 것처럼) 낙타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건장한 말을 타고 왔던 것이다. (페르시아 귀족들이 다 그렇게들 하고 여행을 하질 않던가!).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나라의 미래의 왕이 이미 탄생되었음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새 왕의 오심을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 별을 띄워 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헤롯왕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도 동요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적성국의 침입이 임박한 것으로 오해하고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까닭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걱정뿐만 아니라 당황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 자신이야말로 외국 내방객보다 먼저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정보를 들어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실제로는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고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수지맞는 직업이 흔들릴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최소한 메시아 출현에 관한 예언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에돔 사람의 후손이었던 헤롯왕은 그 예언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제사장과 사관(史官)들에게 그 예언에 관해서 물었을 때, 그들은 오시는 왕이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를 알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가 5장2절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서 그들은,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5, 6) 라고 알렸다.

이 유대의 지도자들이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들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실질적으로 그 별이 출현했을 때 그들도 틀림없이 보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3) 그 특별한 별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성경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별은 진짜 별일 수밖에 없다. 그 박사들은 그 별을 무슨 천사라든가, 어떤 기적적인 대기권에 나타난 불빛 같은 현상이 아니고, 그냥 '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어 단어 'aster' 는 신약성경 속에 통틀어 24번쯤 보인다. 이 단어와 유사한 단어 'astron' 은 4번 쓰였다. 이 두 단어는 문맥에서 별도로 언급이 없는 한, 단적으로 진짜 별을 뜻한다.

별이라는 단어는 천사(요한계시록 1:20; 12:4,7)나 사람(유다서 1:13)을 상징할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 점성가들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 자신도 행성이나 유성(流星), 그리고 혜성들을 분명히 '별'로 간주하고 있었음(마태복음 24:29)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뜻으로 쓰였을 때는 언제나 문맥 안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박사들의 설명은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박사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별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별' (실제로는 그의 별)이라고 불렀지, 천사라든가 길을 인도하는 그 어떤 불빛 같은 것으로는 호칭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 휘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던 그 영광의 구름기둥(the Shekinah; 神座에 나타난 하나님의 示現; 예: 민수기 14:14)의 기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구름기둥의 기록이 발람의 별의 기사가 담겨 있는 Torah 안에 함께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들은 그것을 별이라고만 불렀지, 영광의 구름기둥이라든가, 하늘 가운데를 움직이는 어떤 불빛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천에 머문 별이(심지어 행성이나 혜성처럼 움직이는 별이) 어떻게 박사들을 아기 그리스도가 있는 베들레헴의 그 집까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인도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성경 교사들이 많이 있다. 비록 자질이 훌륭한 교사들이지만, 그들은 그 별은 틀림없이 천사이던가, 아니면 여호와의 모습(Shekinah: 영광의 구름기둥)이었을 것이라고 믿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떤 움직이는 기적적인 불빛으로서 오직 그 외국 박사들한테만 보였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 '별'이 진짜 별이 아니라는 생각은 순수한 '별' 이라는 솔직한 단어 때문에 생기는 해석상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특별한 천상의 메신저를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직접 보내지 않고 600마일이나 떨어진 페르시아에 보냈을까? 물론 유대인 지도자들이 메시아를 실제로 기다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그 구유 근처에 있던 일단의 목동들에게 천군천사를 보내어 '주님의 영광'을 비춰주고,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구주 탄생을 고하도록 시켰던 것이다(누가복음 2:9-12).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던 다른 신실한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이 이야기라면,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졌다”(누가복음 2:38)는 설명과, 특별히 시므온과 안나에 관한 이야기를 참고해 보는 것도 가치가 있겠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 두 사람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출산 40일 후 정결케 되어(레위기 12:2-6을 참조) 요셉과 함께 아기 예수를 주님에게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마리아와 요셉을 만났을 때, 아기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누가복음 2:22). 그들에 못지않게 메시아를 기다리던 신실한 유대인들은 왜 그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사실을 몰랐을까?  

더욱이 멀고 먼 땅 페르시아의 Magi들은 어떻게 그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불빛이 유대인 왕의 표시임을 알아보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나려는 충동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그 불빛은 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직접 인도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왕의 조정으로 인도했을까?

사실상 마태의 설명 중에는 그 별이 (어쩌면 정말로 움직이는 불빛이었다면, 그 불빛이) 그들을 '인도하였다'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태의 설명에는 그냥 그들이 그 별을 두 번 보았다고만 되어있다━한번은 '동방에 있는' 그들의 고향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었고, 그 다음은 나중에  ”아기 예수가 있는 집 바로 위에 머물러 선 별”이었다 (마태복음 2:2,9).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긴 여로 중에 그 별을 보았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길잡이 불빛 가설은 많은 복음주의자들한테 크게 호소력을 갖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성경 안에 있는 작은 기적들(그리스도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 또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기꺼이 수용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자들까지도, 노아의 시대에 있었던 전 지구적 규모의 대홍수나 여호수아의 긴 하루와 같은 전 세계 규모의 기적들은 그렇게 쉽게 믿으려하지 않고, 가능한 그런 기적에는 물질적인 설명을 가해보려고까지 한다.

좋은 예가 있다. 그 별에 대한 설명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인기가 있는 설명은 이런 것이다. 즉, 그 '별'은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있었을 둘 또는 세 개의 행성의 동시적 합(合; conjunction)으로 생긴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천문학의 거두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야말로 이런 형태의 이론을 제창한 최초의 학자인 것 같다. 1605년에 그는 B.C. 7세기에 세 행성들(토성, 목성, 그리고 화성)의 동시적 합(conjunction)이 있었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생각을 뒤좇아 이런 행성의 합이 크리스마스의 별이었다는 가정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 가설에 의하면, 당시 물고기(Pisces) 별자리에 그런 행성의 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성가들은 이 별자리야말로 황도대 위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궁(sign)이라고 믿었다.

다른 한편 B.C. 3세기에 있었던 목성과 금성, 그리고 사자별자리(Regulus)의 합이 크리스마스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행성의 합이 크리스마스 별이었다는 이론들은 예외 없이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실제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을 Magi들이 그와 같은 별들의 집단(행성들의 합)을 '그의 별 (His Star)'! 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 행성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두 행성이 마치 하나의 별로 보일 만큼 접근한 경우가 아직까지는 알려진바 없다 - 서로 아슬아슬하게 보일 만큼도 근접해 본적이 없었다. 더욱이 행성의 합이 되는 경우의 빈도가 어느 정도 주목을 끌만큼은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경험이 많은 천문학자들이라면 알려진 행성들의 궤도에서 쉽게 계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왜 그런 행성들의 합의 어느 특정된 경우가 약속된 이스라엘의 왕과 연관이 있는 어떤 특별한 '표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일까? 사실상 행성의 합의 경우에는 그 어떤 기적 따위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일(별이나 행성 또는 황도대의 위치를 지구상에 벌어지는 사건에 연관시키는 일)은 점성비술(秘術)에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성경은 점성술을 구제불능이라고 비난한다(이사야 47:13-15; 등등). 하나님께서 약속한 당신의 화신(化神)과 관련된 별에 점성술이라는 의사과학을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속들에게 점성술을 피하라고 극구 경고하지 않았던가!

옛날의 문필가들처럼 오늘날의 작가들 중에도 크리스마스의 별이 혜성이었다는 암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앞에서와 유사한 반박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혜성까지도 행성이나 행성들의 합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궤도를 따라 상당히 빈번하게 떠돌고 있어서 혜성의 출현은 예측이 가능하다. 혜성은 일종의 꼬리를 달고 있어서, 그 모습도 역시 보통 별이나 행성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런고로 Magi들이라면 틀림없이 혜성을 진짜 별과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혜성이 출현하면 그때마다 점성가들은 예언의 계기로 이용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별(His Star)을 보내는 목적으로 진정으로 혜성을 택하셨을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론된 현상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특별한 형태의 별에 대한 검토가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신성(nova, 'new stars' 라 불려지는)과 더욱 흥미진진하며 아주 희귀한 초신성(supernova, 변광성의 일종)이라는 별들이다. 이 별들은 진짜 별들로서 행성들의 합이라든가, 혜성이 아닐뿐더러, 하늘에 생긴 어떤 현상도 아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2 (When They Saw the Star)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05&bmode=view


*참조 : What Was the Christmas Star?
https://answersingenesis.org/holidays/christmas/what-was-the-christmas-star/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whentheysawthestar/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04-06-22

가인의 아내는 누구인가?

김희택 


     이 질문은 성경 비판학자들이 제기한 질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피상적인 모순을 성경의 원저자들이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①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창 2:7,18~19).

② 아담은 930년 동안 살았다 (창 5:5).

③ '이브' 라는 이름은 모든 산 자들의 어미이기 때문에 주어졌다 (창 3:20).

④ 아담과 이브는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창 5:4).

⑤ 창조시에 모든 것들은 가장 좋은 상태이었다 (창 1:31).

⑥ 아담의 죄로 인하여 창조물들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창 3:17, 롬 8:20~22).

⑦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창 20:12).

⑧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은 모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레 18~20). 


이상의 9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이 가인이 그의 여동생 중의 하나와 결혼했음이 틀림없음을 제안하는데 실마리가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최초의 인류였다. 창세기의 그들 각자의 창조기원을 알려주고,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지시 받게 된 것에 대하여 기록한다.


성경에는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 중에서 단지 '가인', '아벨', '셋'의 세 명의 이름만 거론한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우리가 꼭 알아야 될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자세하게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5장 4절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는 많은 아들과 딸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었다는 사실과 아담은 930 년 동안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참고로 창세기 5 장 족보에 열거된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평균수명은 912 년이다. 가족의 크기나 평균수명 등에 관한 보수적인 가설에 근거해서 가인의 죽음 이전에 이 땅에 이미 많은 인구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이 가인이 몇 세에 아우를 살해했는지, 또 몇 세에 아내를 취하고 성을 세웠는지 지적하지 않음으로 기록상 아무 모순이 없다.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최초의 인류인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창조되었고, 아들들과 딸들의 많은 자녀들을 가졌으며, 확실하게 아들들은 자손들의 번성을 위해 딸들과 결혼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가인의 아내는 그와 아주 가까운 근친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의 결론을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을 들어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법은 모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보다 약 400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이복누이와 결혼했음을 성경은 말해준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금지법이 출현하게 되었는가? 이런 금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유는 그런 결혼의 결과로 나타나는 자녀들이 일반적인 결혼보다 더 기형아이거나 저능아인 가능성이 많다는데 있다. 두 사람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유전인자에 더욱 유사한 결함을 가지게 될 확률이 커지게 된다. 만약 이들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경우, 자녀들중 어느 아이인가는 부모로부터 각각 결함을 갖는 유전인자를 상속받게 되고, 이것으로부터 형성된 유전자쌍이 기형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두 사람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그들의 유전인자는 서로 다른 결함을 갖게 될 확률이 크며, 이들로부터 유전인자를 전수 받은 아이들은 각 쌍에 서로 다른 하나의 결함인자만을 갖는 결과가 되어, 앞의 경우에서와 같은 완전한 기형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예로 완전히 기형인 귀를 갖는 대신 단지 꼬부라지기만 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완전했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창 1:30). 이것은 그들의 유전인자가 완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저주하셨고 완전했던 창조세계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즉 죽음과 타락으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퇴보는 생명체의 유전인자 재료에 각종의 잘못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더욱이 이러한 퇴보는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크게 가속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홍수 이후의 기후 조건이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에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는 해로운 우주복사선(cosmic radiation)의 양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 돌연변이는 발생한 이후에 다음 세대에 계속 전달되게 되며, 그래서 그것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는 것이다. 약 2,500 년이 지난 모세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형제자매간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만큼 인간종족에 축적되었음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인은 태어난 첫 번째 아이였다. 그는 아마도 아담과 이브로부터 사실상 거의 손상 받지 않은 완벽한 유전인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와 자매는 어떤 기형의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항상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기록뿐 아니라, 잘 알려진 모든 과학적 사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출처 - 창조지, 제 79호 [1992. 9]

미디어위원회
2004-06-03

루터교도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도왔다.

 (Lutherans Helped Copernicus)

David F. Coppedge


      우리가 '알고(know)' 있는 것들이 진실(true)인지를 재검토해보게 될 때, 진실은 그 반대와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도 두려워해서 죽을 때에도 그의 ‘이단적인(heretical)‘ 견해를 출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시리즈물 ‘우주(Cosmos)’ 에서 칼 세이건(Carl Sagan)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루터교도들에 의해서 조롱당했다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바쳤다. 징거리치는 'An Annotated Census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라는 제목의 이전 책에서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 그 책은 알려진 원본들에 대한 각각의 복사본들을 게재하였고, 코페르니쿠스의 책(‘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이 전 유럽에 걸쳐 배포되었고 토론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꼼꼼하게 그 당시의 독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수백의 주변 노트들을 분석하였다. 이제 징거리치는 그의 결과물들을 새로운 책, 'The Book Nobody Read :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Walker, New York, 2004) 으로 출판함으로서 더 재미있고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책은 2004. 4. 28일자 사이언스(Science)1 지에서 피터 바커(Peter Barker)에 의해 리뷰되었다. ('De Revolutionibus 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the book nobody read)' 이었다는 아더 코스틀러(Arthur Koestler)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징거리치는 책의 제목을 코스틀러의 주장으로부터 취했다). 여기에 바커의 리뷰에서 나타난 도시 전설의 몇 가지 수정사항들을 제시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원고를 젊은 루터교인이며, 수학자인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에게 위탁했다.

● 책은 루터교인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출판되었다.

● 한 루터교 성직자는 책에 사인 없이 서문을 추가했다.

● 프러시아의 군주는 루터교도였고, ‘De Revolutionibus’를 출판했던 사회에서 후원자였다.

● ”나이 많은 가톨릭교도가 교황에게 헌정된 그의 천문학 책을 일단의 개신교도들에게 위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커는 묻고 있다. ”뉘른베르크 인쇄업자들의 전문적 지식이 확실히 한 요인이었다.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는 지방의 주교(bishop)로부터 그가 보호되기 위해서 프러시아의 군주를 또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가 아마도 지역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열망하여 그 책을 얻었고, 그것을 공부했고, 그것에 기록을 했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었다. 많은 루터교도들은 아직도 고정된 지구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

● 루터교도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그 책의 많은 복사본들을 소유했다. 바커는 말한다. 징거리치 연구에서 ‘매우 놀랄만한’ 점은, 브라헤는 그의 태양중심적인 대체 모델을 신사이며 여행가였던 폴 위치(Paul Wittich)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 ”프톨레미의 천문학은 그것이 주전원(epicycles)들에 과도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 바커는 말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전 후의 천문학자들은 단순한 하나의 주전원 계를 사용했는데, 가끔 코페르니쿠스 자신에 의해서 사용된 하나의 작은 주전원에 의해 증대되곤 했다.”

●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양중심설이 아니다. ”사실, 그의 계의 중심으로서 어떤 지점을 간주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꽤 어렵다.” 그 모델은 관측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수학적인 것이었다.

● 바커는 놀라움을 표하며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상외의 발견은,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서 (Galileo biography을 보라),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정정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징거리치의 평가에 의해서 재강조되는 점은, De Revolutionibus의 인쇄된 원본은 400에서 500권 사이였는데, 그의 조사(Census)에 의하면 이들 중 277권이 남아있는 것으로 살펴볼 때, 책이 실제로 파괴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밖에서, 심지어 가톨릭의 국가에서도 교회의 명령으로 수정된 복사본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커는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던 획기적인 책에 관한 진실을 밝혀보기 위한 징거리치의 ”놀라운 추적”을 칭찬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초기 현대 과학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1Peter Barker, 'A History Recorded in the Margins,” Science Vol 304, Issue 5671, 686, 30 April 2004, [DOI: 10.1126/science.109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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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거리치 박사는 잘못 알려졌던 도시 전설에 대한 이러한 정정을 해줌으로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6세기 과학적 전진의 적대세력은 루터교인도 아니고, 가톨릭교인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말하자면, 루터(Luther)가 코페르니쿠스를 바보(fool)라고 불렀다는 도시의 전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루터가 말했던 것들, 또는 의미했던 것들은 한참 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의 전달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도날드 코브에 의한 Leadership U 분석을 보라.


De Revolutionibus이 현대의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이끌어 냈는지는 또 하나의 의문이다. 최근까지,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우주의 물질 체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외삽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De Revolutionibus 만큼 혁명적일 수 있는 새로운 책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다. 그 책은 곤잘레스(Gonzalez)와 리챠드(Richards)에 의해서 쓰여진 ‘특별한 행성(The Privileged Planet)‘ 이다. 우리는 이것이 웹 사이트의 대화방 등에서 어떠한 주변 노트를 얻게 될 지, 또는 다윈의 교회가 그 책을 무시하는데 성공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4/04/lutherans_helped_copernicus/

출처 - CEH, 2004. 4. 30.


미디어위원회
2004-04-28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Dr. Henry M. Morris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4).

 

어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독생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름짓기 가운데서도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창조의 주재자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는 그도 어쩌면 하나님이 아들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고 상당히 놀랬을는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그로서는 모세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물론, 신명기 6:4에 담긴 위대한 단정의 말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를 여러 번 인용하였을 것이기에 하는 추측이다.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아들을 가진다는 말씀인가? 하고.

하나님께서 아굴을 시켜 솔로몬 왕의 잠언 중 매혹적으로 독특한 제 30장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말고는 그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아마 솔로몬이 잘 알고 신임하였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다윗과도 아는 사이였었던 것 같다. 최소한 다윗의 시편(詩片)들에 친숙하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 8).

아굴도 다윗의 미래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 아마 다윗이나 솔로몬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사무엘하 7:13, 14; 또한 역대상 17:13).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그 영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넘어 다윗의 보다 더 위대한 후손으로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분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신약(히브리서 1:5)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 우리는 이제야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굴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물었던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책에서 이미 하나님을 일컫는 여러 이름들에 - 특히 '하나님 (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하였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The Name of the Father)

비록 아굴의 특정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약성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새 이름은 '아버지'보다 더 아래격인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버지' 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아브(ab))가 구약성경에 500번이 넘게 보이지만, 저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브 (또는 아바(abba), 아브와 동일한 뜻의 아람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때때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예컨대, 예레미아 3:19에서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시고 노예로부터 건지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아브가 되신다는 것을 환기시킨 적이 있다 (신명기 32:6).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가 있다면 -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제외하고 (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 이것이 아마도 아굴이 자기 생전에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예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자, 상황은 온전히 변하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당신의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요한복음 17:1, 6, 11, 25, 26)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 (마태복음 6:9).

'아버지' (희랍어로는 pater)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하였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 (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그의 체포가 있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神格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들까지도 - 상황이 허락할 때면 - 우리들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똑같이 그 경이로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아마 이것으로서 세상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에 관한 아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이제는 아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려지게 될 것이다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선지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서 보내셨던 때가 솔로몬과 아굴이 세상을 떠나고 근근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선지자 이사야를 시켜 저 두 가지 위대한 예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예언이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성탄절 때마다 두고두고 낭송하는 말씀이다.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곧 태어날 처녀의 아들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하나님은 이 아들의 이름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보내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기억하라]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얼마나 경이로운 이름인가!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 이 이름들처럼 합당한 이름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 분이야말로 약속되기를 유다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면서도 또한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우리를 닮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으리오.

그의 이름을 '기묘자 (the Wonderful)' 라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기적적'이라는 뜻이 있다. 기적적인 개념과 처녀 몸에서의 탄생을 빼고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육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을 것이기에 유일하게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이름은 진정 '기묘자'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기묘자 (Wonderful)'와 '모사 (Councillor)' - 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기묘한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질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천사 같은 유다의 처녀와 약혼 중에 있던 어느 소박한 목수한테 가브리엘 (Gabriel)천사를 보내셨다. 이 두 약혼자들은 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비록 임신 중이지만 여전히 청순한 처녀이고,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룰 사명을 부여받았노라고 알렸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 때보다도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져서 비슷한 말씀을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31) 라고 전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라고 놀라운 진술을 부언하였다.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 (the 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16). 그리고 그가 우리의 영원하신 왕으로서 돌아오실 때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요한계시록 11:15).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아직은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 말하자면, 세례명이라 할까 - 그 이름은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3)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 (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존경하려면 앞에 언급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이름들을 다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그런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그를 명예롭게 받들어야 하는 이름이 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보혈로 되찾은 이 세상으로 언젠가는 권세와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개선하시는 모습을 예언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었다. 그 때 그는 주님이 앞으로 오실 세상에서 불릴 경이로운 이름 세 가지를 들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 (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다. 즉,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요한계시록 22:6), 그것은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영원히 신실하시고 참되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한테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위대한 날에 전 우주는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이름을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일러준 그의 인간의 이름을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Lord Jesus Christ)' 이시다. 그리고 그 많은 그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나님의 책을 마치는 데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이 하신 이 아름다운 말씀으로 마감하는 것이 적절하였으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Henry M.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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