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변증
이재만
신학분야 중에 성서변증학이란 것이 있다. 왜 성경이 옳으냐? 왜 성경의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냐? 등의 이유를 공부하는 분야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경이 사실임을 변론하기 위한 학문 분야이다.
성경을 먼저 펼쳐보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11:3)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창조에 대하여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믿음 부분과 사실(세계) 부분이다. 믿음과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할 때 어느 곳에서도 “성경의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경우를 찾을 수 없다. 항상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막연히 어림짐작한 창조주가 아니라 “성경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 속에 일을 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성경은 성경 자체에 관하여 사실에 기초한 믿음을 요구한다. 다른 종교 경전과는 달리 성경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것과, 첫 사람의 타락, 대홍수, 바벨탑 사건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과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대등하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도 분명한 지구상에 시공간 속에 사건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믿음이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분명히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 말씀, 뜻과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부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롬11:33), 시공간 속에 이루어진 사실은 그 증거를 남겨놓았을 수 밖에 없다 (롬1:20).
변증학에서 하나님의 성품, 말씀, 뜻과 같이, 이미 하나님이 있다고 전제하고 변증하는 방법을 전제적(Presuppositional)방법이라고 한다. 반면에 역사상에 뿌려놓은 증거들을 이용하여 성경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방법을 증거적(Evidencial) 방법 이라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신학교에서 증거적 접근 방법을 회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기점을 보면 진화론적 사고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때부터이다. 진화론이 마치 과학적 사실인양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진화론에 이야기하는 내용이 성경과 너무 달랐고,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가 흔들린다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권위에 눌려 마치 증거적인 것을 요구하면 사실의 진위여부를 생각하기도 전에 믿음의 도약을 요구했다. “그냥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등등의 대답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미국에 있는 신학교의 대부분은 전제적 변증만을 취급한다. 필자가 다니던 신학교도 보수적으로 잘 알려진 학교지만, 학생들이 증거적인 질문을 할 때면 “우리 학교는 전제적 신학교(Presuppositional seminary)입니다” 라는 대답으로 일축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신학교에서 전제적인 변증만을 취급하자 당연히 교회에서도 증거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물론 전제적인 방법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만약 전제적 신앙만을 요구한다면,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시공간 속에서 벌어진 성경의 사실에 질문만을 간직한 채 묻어버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하나님이 막연해지고, 성경이 막연해지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많은데, 믿음(?)으로 덮어야 하는 답답함 속에 있어야 했다. 마치 사실의 기초 위에 서지 않는 구름과 같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사실”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전제적인 방법과 증거적인 방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도 가닥을 잡아야 한다. 진화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이 과학적 진리라는 것과,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이 노아 홍수의 증거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누가 물어보더라고 “사실이니까 믿는다” 라는 대답이 자신 있게 나와야 한다.
균형잡힌 변증
이재만
신학분야 중에 성서변증학이란 것이 있다. 왜 성경이 옳으냐? 왜 성경의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냐? 등의 이유를 공부하는 분야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경이 사실임을 변론하기 위한 학문 분야이다.
성경을 먼저 펼쳐보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11:3)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창조에 대하여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믿음 부분과 사실(세계) 부분이다. 믿음과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할 때 어느 곳에서도 “성경의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경우를 찾을 수 없다. 항상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막연히 어림짐작한 창조주가 아니라 “성경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 속에 일을 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성경은 성경 자체에 관하여 사실에 기초한 믿음을 요구한다. 다른 종교 경전과는 달리 성경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것과, 첫 사람의 타락, 대홍수, 바벨탑 사건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과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대등하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도 분명한 지구상에 시공간 속에 사건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믿음이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면 분명히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 말씀, 뜻과 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부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롬11:33), 시공간 속에 이루어진 사실은 그 증거를 남겨놓았을 수 밖에 없다 (롬1:20).
변증학에서 하나님의 성품, 말씀, 뜻과 같이, 이미 하나님이 있다고 전제하고 변증하는 방법을 전제적(Presuppositional)방법이라고 한다. 반면에 역사상에 뿌려놓은 증거들을 이용하여 성경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방법을 증거적(Evidencial) 방법 이라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신학교에서 증거적 접근 방법을 회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기점을 보면 진화론적 사고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때부터이다. 진화론이 마치 과학적 사실인양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진화론에 이야기하는 내용이 성경과 너무 달랐고, 믿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가 흔들린다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권위에 눌려 마치 증거적인 것을 요구하면 사실의 진위여부를 생각하기도 전에 믿음의 도약을 요구했다. “그냥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등등의 대답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미국에 있는 신학교의 대부분은 전제적 변증만을 취급한다. 필자가 다니던 신학교도 보수적으로 잘 알려진 학교지만, 학생들이 증거적인 질문을 할 때면 “우리 학교는 전제적 신학교(Presuppositional seminary)입니다” 라는 대답으로 일축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신학교에서 전제적인 변증만을 취급하자 당연히 교회에서도 증거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물론 전제적인 방법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만약 전제적 신앙만을 요구한다면,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시공간 속에서 벌어진 성경의 사실에 질문만을 간직한 채 묻어버리며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하나님이 막연해지고, 성경이 막연해지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많은데, 믿음(?)으로 덮어야 하는 답답함 속에 있어야 했다. 마치 사실의 기초 위에 서지 않는 구름과 같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사실”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전제적인 방법과 증거적인 방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실도 가닥을 잡아야 한다. 진화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이 과학적 진리라는 것과,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이 노아 홍수의 증거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누가 물어보더라고 “사실이니까 믿는다” 라는 대답이 자신 있게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