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의 복
서기 26년, 로마 제국 시대, 로마의 속국 유대나라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주다 벤허(Judah Ben-Hur)는 이스라엘의 제일가는 유대인 귀족이었다. 로마의 장군이 된 벤허의 옛 친구 멧살라(Messala)는 이스라엘 주둔 사령관으로 오게 되면서 벤허에게 로마 정부에 항거하는 반란 자들을 색출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한다. 아무리 친구의 부탁이지만 자신의 동족을 팔아 넘길 수 없는 벤허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로 인해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벤허에 대해 앙심을 품은 멧살라는 유대인 반란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응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단란한 벤허의 가정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만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신임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벤허의 여동생, 틸자(Tirzah)의 실수로 기왓장이 떨어져 총독이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와를 붙인 석회가 부스러져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임을 알지만 멧살라는 이를 총독 암살 사건으로 몰아 간다. 그래서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Miriam), 누이 동생 틸자, 연인 에스터(Esther)를 감옥에 가두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 채 벤허를 로마 해군 전투함의 노 젓는 노예로 보내버린다. 노예로 팔려가는 벤허가 지치고 목말라 쓰러질 때 이를 불쌍히 여겨 우물물을 떠다 주는 마을 사람들의 물바가지마저 발로 차 버리는 로마 호송군의 횡포에 울부짖는 벤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순간에 가족과 재산을 잃어 버리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게 된 벤허는 물 한 모금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멧살라에 대한 증오와 현재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영화 “벤허”에서 찰톤 헤스톤은 너무나 잘 표현하였다. 이렇듯 비통하여 우는 울음이 있는 반면에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어릴 때 길을 잃어 가족과 떨어지게 된 형제가 오랫동안 소식을 알지 못하여 애를 태우다가 30여 년이 지난 다음 TV 방송을 통해 알게 되고 마침내 상봉하여 서로 끌어안고 흐느끼는 울음은 그 동안의 안타까움을 모두 날려 버리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혹은 아파서 울 때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눈물의 성분을 조사해 보면 98%가 물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소금 성분이다. 그리고 항 바이러스, 항균 역할을 하는 미량의 락토페린(lactoferrin)이라는 단백질과 세균을 용해하는 효소 단백질 인 라이소자임(lysozyme)이 섞여 있다. 이 눈물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흐르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도 조금씩 나오면서 눈 표면을 적셔주고 코팅해주는 역할을 한다. 평소에 눈에서는 약 6-7μl정도의 눈물이 안구를 적셔주고 있어 눈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눈물은 주 눈물샘, 부 눈물샘, 결막, 눈꺼풀의 마이봄선 등에서 분당 1.2μl정도 분비된다. 그리고 우리의 눈꺼풀은 5초에 한번 꼴로 깜박여서 눈물을 고르게 펴준다. 이 눈물은 눈 표면이 말라서 상처 나는 것을 막아주고, 영양이나 산소를 공급하고, 항균작용 및 이물질 제거 등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 눈이 맑게 보이게 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평소에는 눈물이 아주 미량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것이 흘러 나오지 않으면 안구건조증으로 몹시 괴롭다. 평상시 흐르는 눈물이 부족하면 노화세포나 먼지, 찌꺼기 등과 함께 끈적끈적한 눈곱이 자주 끼게 된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눈물이 흘러 나와 눈의 건강과 작용을 돕고 있다. 한편으로 눈에 상처나 질병 등의 자극이 있거나 또는 슬프거나 기쁨의 감정에 북받쳐 반사적으로 흐르는 눈물도 있다. 이 때는 주로 주 눈물샘에서 눈물이 분비되는데 눈물의 기본 성분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전해질이 약간 많고 단백질은 조금 적다.
만약 눈물이 없다면 눈 표면의 세포가 말라 죽고, 세균이나 먼지 등의 외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따라서 평상시 흐르는 기본적인 눈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며, 또한 자극에 의해 반사적으로 나온 눈물도 눈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이물질을 희석하고 배출하는 작용을 하므로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눈물은 소중한 역할을 한다. 양파와 같은 매운 것들을 만질 때 흘리는 눈물과는 달리 슬픈 이야기나 소설 등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성통곡을 하고 나면 멍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기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마음속에 있던 감정들이 밖으로 분출하여 정화되고 깨끗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의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사람들 사이에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특히 여자의 눈물에 남자들은 약하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의 통계를 살펴 보면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경우 한 달에 평균 5회 정도 눈물을 흘리는 반면 남자들은 1-2회 정도로 나타났다. 이는 남자들이 눈물을 보이면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통념에 지배를 받아 우는 것을 억제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생활하실 때 눈물을 흘리신 경우가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란 동네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존경하며 따랐다. 주님도 이들을 사랑하여 베다니를 지날 때는 이 집에 머무르곤 하였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며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되는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김으로 주님에 대해 지극한 존경을 표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친밀하게 지내던 이 집안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오신 주님께서 베다니로 오셔서 마리아를 부르자, 마리아는 달려 나와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통곡하며 함께 한 유대인들도 따라 우는 것을 보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곤 무덤으로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명하실 때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가 병으로 고통당하며 죽기까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당면했을 두려움과 고통의 과정들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음으로써 겪었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과 아울러 이들 가족과 삶을 함께 나누던 이웃들의 슬픔을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던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이다. 나사로 가족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베다니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들 앞에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주님의 심정을 더욱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불우한 환경으로 속절없이 약자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울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갑작스런 비극으로 슬픔에 잠긴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함께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식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사랑으로 더욱 결속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기를 원한다. 곤경에 처한 친구나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붙잡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출처 - '과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중에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26
참고 :
우는 자의 복
서기 26년, 로마 제국 시대, 로마의 속국 유대나라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주다 벤허(Judah Ben-Hur)는 이스라엘의 제일가는 유대인 귀족이었다. 로마의 장군이 된 벤허의 옛 친구 멧살라(Messala)는 이스라엘 주둔 사령관으로 오게 되면서 벤허에게 로마 정부에 항거하는 반란 자들을 색출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한다. 아무리 친구의 부탁이지만 자신의 동족을 팔아 넘길 수 없는 벤허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로 인해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벤허에 대해 앙심을 품은 멧살라는 유대인 반란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응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단란한 벤허의 가정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만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신임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벤허의 여동생, 틸자(Tirzah)의 실수로 기왓장이 떨어져 총독이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와를 붙인 석회가 부스러져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임을 알지만 멧살라는 이를 총독 암살 사건으로 몰아 간다. 그래서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Miriam), 누이 동생 틸자, 연인 에스터(Esther)를 감옥에 가두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 채 벤허를 로마 해군 전투함의 노 젓는 노예로 보내버린다. 노예로 팔려가는 벤허가 지치고 목말라 쓰러질 때 이를 불쌍히 여겨 우물물을 떠다 주는 마을 사람들의 물바가지마저 발로 차 버리는 로마 호송군의 횡포에 울부짖는 벤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순간에 가족과 재산을 잃어 버리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게 된 벤허는 물 한 모금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멧살라에 대한 증오와 현재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영화 “벤허”에서 찰톤 헤스톤은 너무나 잘 표현하였다. 이렇듯 비통하여 우는 울음이 있는 반면에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어릴 때 길을 잃어 가족과 떨어지게 된 형제가 오랫동안 소식을 알지 못하여 애를 태우다가 30여 년이 지난 다음 TV 방송을 통해 알게 되고 마침내 상봉하여 서로 끌어안고 흐느끼는 울음은 그 동안의 안타까움을 모두 날려 버리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혹은 아파서 울 때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눈물의 성분을 조사해 보면 98%가 물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소금 성분이다. 그리고 항 바이러스, 항균 역할을 하는 미량의 락토페린(lactoferrin)이라는 단백질과 세균을 용해하는 효소 단백질 인 라이소자임(lysozyme)이 섞여 있다. 이 눈물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흐르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도 조금씩 나오면서 눈 표면을 적셔주고 코팅해주는 역할을 한다. 평소에 눈에서는 약 6-7μl정도의 눈물이 안구를 적셔주고 있어 눈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눈물은 주 눈물샘, 부 눈물샘, 결막, 눈꺼풀의 마이봄선 등에서 분당 1.2μl정도 분비된다. 그리고 우리의 눈꺼풀은 5초에 한번 꼴로 깜박여서 눈물을 고르게 펴준다. 이 눈물은 눈 표면이 말라서 상처 나는 것을 막아주고, 영양이나 산소를 공급하고, 항균작용 및 이물질 제거 등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 눈이 맑게 보이게 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평소에는 눈물이 아주 미량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것이 흘러 나오지 않으면 안구건조증으로 몹시 괴롭다. 평상시 흐르는 눈물이 부족하면 노화세포나 먼지, 찌꺼기 등과 함께 끈적끈적한 눈곱이 자주 끼게 된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눈물이 흘러 나와 눈의 건강과 작용을 돕고 있다. 한편으로 눈에 상처나 질병 등의 자극이 있거나 또는 슬프거나 기쁨의 감정에 북받쳐 반사적으로 흐르는 눈물도 있다. 이 때는 주로 주 눈물샘에서 눈물이 분비되는데 눈물의 기본 성분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전해질이 약간 많고 단백질은 조금 적다.
만약 눈물이 없다면 눈 표면의 세포가 말라 죽고, 세균이나 먼지 등의 외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따라서 평상시 흐르는 기본적인 눈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며, 또한 자극에 의해 반사적으로 나온 눈물도 눈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이물질을 희석하고 배출하는 작용을 하므로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눈물은 소중한 역할을 한다. 양파와 같은 매운 것들을 만질 때 흘리는 눈물과는 달리 슬픈 이야기나 소설 등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성통곡을 하고 나면 멍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기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마음속에 있던 감정들이 밖으로 분출하여 정화되고 깨끗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의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사람들 사이에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특히 여자의 눈물에 남자들은 약하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의 통계를 살펴 보면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경우 한 달에 평균 5회 정도 눈물을 흘리는 반면 남자들은 1-2회 정도로 나타났다. 이는 남자들이 눈물을 보이면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통념에 지배를 받아 우는 것을 억제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생활하실 때 눈물을 흘리신 경우가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란 동네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존경하며 따랐다. 주님도 이들을 사랑하여 베다니를 지날 때는 이 집에 머무르곤 하였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며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되는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김으로 주님에 대해 지극한 존경을 표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친밀하게 지내던 이 집안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오신 주님께서 베다니로 오셔서 마리아를 부르자, 마리아는 달려 나와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통곡하며 함께 한 유대인들도 따라 우는 것을 보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곤 무덤으로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명하실 때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가 병으로 고통당하며 죽기까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당면했을 두려움과 고통의 과정들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음으로써 겪었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과 아울러 이들 가족과 삶을 함께 나누던 이웃들의 슬픔을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던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이다. 나사로 가족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베다니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들 앞에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주님의 심정을 더욱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불우한 환경으로 속절없이 약자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울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갑작스런 비극으로 슬픔에 잠긴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함께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식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사랑으로 더욱 결속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기를 원한다. 곤경에 처한 친구나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붙잡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출처 - '과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중에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26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