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조화
가을의 하늘을 바라보면 구름이 한 점도 보이지 않으면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광대하여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투명한 보자기에 푸른 물이 가득 담겨 있는 듯하여 톡 건드리면 파란 색의 물감이 쏟아질 것만 같다. 고개를 들어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듯 후련해 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높은 하늘에 새털 같은 구름들이 기묘한 형상으로 수를 놓고 있다. 특히나 석양에 저물어 가는 태양의 빛을 받아 묘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는 구름의 형상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구름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그 신비로움에 매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늘에서 형상이 변하고 위치가 바뀌는 구름에 대해 감상적인 느낌을 갖거나 막연하면서도 경이롭게 여겼지만, 구름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으로 분석을 하고 구름의 종류와 형성과정에 대해 이론적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초반에 들어 와서야 이루어졌다. 구름의 명명법과 분류법을 고안해서 현대 기상학의 기초를 닦은 분은 아마추어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1772-1864) 이다. 루크 하워드는 영국 런던에서 철제기구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 당했다. 그래서 그는 자라나면서 절제되고 따분한 일상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 밖의 구름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약제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구름에 대한 호기심과 진지한 관찰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1802년에 ‘구름의 변형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구름은 수증기가 상승하면서 응결되어 만들어진 것이며, 나아가 몇 가지 기본 형태로 구름을 분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이 논문은 기상학의 역사를 다시 쓰는 중요한 연구 성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푸른 하늘에 흩어져 변화무쌍하게 장식을 하고 있는 구름은 물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물 입자의 크기는 다양한데 입자의 크기에 따라 진동수가 달라지고, 진동수는 구름의 색깔을 결정하게 된다. 물 입자 중에 가장 작은 입자는 진동수가 많아 파란색을 띠게 하고, 조금 큰 입자는 녹색을, 더 큰 입자는 빨간색을 산란시킨다. 맑은 날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여러 가지 크기의 입자가 골고루 분포하고 있어 산란되는 파란색, 녹색, 빨간색의 양이 비슷하여 전체적으로는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름의 소나기 구름처럼 물 입자의 크기가 더 커지는 경우 빛은 흡수되고 산란되는 빛의 양이 적어지게 되어 어두운 색을 나타내는 먹구름이 된다. 그리고 먹구름의 물 입자는 크기가 커서 그 무게로 인해 마침내 땅으로 떨어져 비가 된다.
소나기를 뿌리는 먹구름뿐만 아니라 우리는 뭉게구름, 양털구름, 새털구름 등 다양한 이름을 붙이는데 루크 하워드는 이들 구름의 모양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그는 구름의 이름을 지으면서 다른 나라 학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라틴어 단어를 사용하여 머리카락을 뜻하는 권운(Cirrus), 더미 또는 퇴적 이라는 뜻의 적운(Cumulus), 층이나 판을 뜻하는 층운(Stratus) 등의 용어를 만들어 냈다. 기상학계에서는 오늘날도 하워드가 명명한 구름의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구름의 외적 특징뿐 아니라, 구름의 성질과 그에 따른 기상변화까지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가령 적운을 ‘원뿔 혹은 반구 모양으로 불룩하게 솟아오른 구름’이라고 소개하면서 ‘처음에는 작고 불규칙한 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적운이 계속 증가하도록 하는 핵’이라고 밝히고 ‘일출 후 몇 시간에 걸쳐 형성되기 시작해 정오 중 가장 더운 때에 최대로 커졌다가 다시 계속해서 줄어들면서 해거름 즈음에 완전히 사라진다’고 구름의 생성에서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또 ‘강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형성된 적운은 곧 바람이 고요해지고 비가 올 것임을 말해 주고, 적운이 사라지지 않거나 해질 무렵에 가라앉지 않고 계속 상승하면 밤에 천둥이 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면서 구름의 형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일기를 예고할 수 있음을 설명 하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관찰하면서 직접 구름의 모습을 수채화로 그려 세밀한 관측 근거에 따라 설명을 하고 있다. 하워드는 일생 동안 구름을 사랑하고 관찰하면서 변덕스럽고 쉽게 모양을 바꾸는 구름에 대해 명확한 과학적 시각을 제공하였다.
요즘 들어 세계적으로 이상기후의 조짐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태풍이 남동쪽 먼 바다에서 몰려올 때를 보면 엄청난 양의 구름이 소용돌이 치며 움직이는 것을 기상관측 인공위성에 의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거대한 구름이든 혹은 점점이 떠 있는 구름이든 당시의 바람의 세기와 방향, 기온, 공기중의 수증기 양에 따라 구름의 모양과 크기가 결정된다. 강력한 소용돌이 형태의 구름이 레이더에 잡히며 다가오면 강풍과 아울러 엄청난 양의 비가 뿌릴 것을 예측한다. 이처럼 구름은 물을 가지고 있어서 지구 곳곳에 물을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수증기를 함유하는 기체는 온도의 증가와 더불어 팽창하므로 지표 근처의 따뜻한 공기는 상승한다. 적도 근처의 따뜻하고 다습한 공기는 상승하여 극지방으로 이동하고 아래에서는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극지방에서 적도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바람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지표면의 지형 등에 영향을 받으며 순환을 함으로써 염분과 불순물이 제거된 물을 내륙 지방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바닷물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지만 녹아 있는 염분으로 인해 육상의 생물들이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염분을 제거한 물을 육지로 보내기 위해 구름을 창조하셨다. 성경의 욥기 26장 7-8절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했다. 지구가 하늘이라고 표현된 우주의 공간에 떠 있게 하시고 물이 담긴 구름으로 둘러 쌌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 10장 13절에도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겨나니 그는 땅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이 말씀은 현대에 들어와서 깨닫게 된 구름의 형성과 비나 눈이 만들어지는 강수 이론을 잘 설명하고 있다. 태양열은 초당 수십억 리터의 물을 증발시키고 공기보다 가벼운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서 공기 중의 미립자를 중심으로 응결과정을 거쳐 구름을 형성한다. 바람과 기류는 이 구름들을 이동시키면서 강수 과정을 통하여 일정한 크기의 비나 눈으로 지면에 내리게 한다. 지면의 물은 강물이나 지하수로 흘러가거나 식물들에 의해 흡수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이러한 과정을 물의 순환이라 한다.
지구 전체를 고려하여 장기간 관측하면 지면에서 증발하는 물의 양과 강수에 의해 지면에 내리는 물의 양은 거의 같으며 지구상의 물은 평형을 유지한다. 만일 육지의 생명체에게 염분이 가득한 바닷물을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진다고 하더라도 바다 근처에는 괜찮지만 내륙 깊숙한 곳에 사는 동식물들은 살기가 곤란할 것이다. 대륙의 한 가운데 사는 동식물을 위해서는 바다로부터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펌프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닷가에만 생물들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물을 싸서 바람을 이용하여 지구 내륙 깊숙한 곳으로 운반하도록 창조하셨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곡식을 키워내고 가을에 추수하여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해 물을 보내주신 덕분이다.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깊은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게 된다. 오늘 하루도 저와 여러분이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면 좋겠다.
출처 - '과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중에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66
참고 :
성경이 박쥐를 새라고 지칭한 것은 오류인가?
(Does the Bible Wrongly Call the Bat a Bird?)
James Patrick Holding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찌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레위기 11:13-19) -(또한 신명기 14:11-18절을 보라)
이것은 성경에서의 생물학적 실수인가? 많은 성경 비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 중에는 나와 내 아내가 이 글을 지역 신문의 편집장에게 보내도록 촉발했던 특별한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간단한 대답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분명히, 린네의 분류((Linnean classification)는 레위기와 신명기가 쓰여 졌던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bird)’에 대한 과학적 정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물과 사물들의 분류는 기능(function)과 형태(form) 등과 같은 다른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경우에, 새를 나타낸 단어인 'owph‘는 단순히 ”날개를 가진 것(owner of a wing)”을 의미한다. 이것은 뒤덮다(cover), 또는 날다(fly)를 의미하는 어근으로부터 왔다.
‘owph’ 라는 범주에는 새, 박쥐, 어떤 곤충 등이 포함된다. 거기에는 또한 익룡(pterosaurs)도 주변에 있었다면 포함될 수 있었다. 현대의 생태학자들도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수생생물(water-dwelling life)들을 그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플랑크톤(plankton, floaters/drifters), 유영생물(nekton, swimmers), 수저생물(benthos, bottom-dwellers) 등으로 분류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천문학자가 일몰(sunset)과 일출(sunrise)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으로 비난당하지 않지만, 성경의 그러한 기록은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유사하다. 왜 성경의 기자들에 대해서 같은 용법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잠깐만! 그래서 당신은 ‘새(bird)’가 이곳에서 사용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였다고 결정했던 스트롱(Strong)과 같은 모든 성경 학자들보다 히브리어에 더 전문가인가? 정말 그런가?”
문제는 히브리어 전문가들이 동물학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KJV 성경은 ‘새’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회의론자들이 히브리인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었던 때를 심각하게 고려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깃털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강(class)의 온혈동물로서 ‘새(bird)’를 정의하고 있는 현대적인 분류 체계만을 생각하고 있다.
”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환경에서 완벽해야만 한다!”
완벽(perfection)이란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만약 성경이 변하지 않는 자료들에 대한 자연적 이해에 있어서 우리들의 매 순간의 변화를 대비해야된다면, 어떤 것에 대한 용어가 바뀌었을 때마다 성경은 틀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성경이 ”하늘은 푸르다” 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푸르다’ 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고 심각하게 제안하는 것이다 :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 ”비록 1874년에 살았던 파두스키(Joe Padooski)가 다른 사람들이 녹색을 정의한 것처럼 이것을 정의하더라도, 그리고 그가 이 문제의 색을 프레드(Fred) 라고 부를 지라도, 하늘은 푸른 것이다.”
이런 종류의 비난을 하는 회의론자들은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의 오류로 생각되는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성경을 훼손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문제아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반대에는 전혀 정당성이 없다. 최근 성경 비판론자의 말을 들어보라 :
”당신은 거짓말쟁이다! 당신은 고의적으로 신명기 14:11을 빠뜨렸다. 거기에는 ‘tsippowr’ 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명백히 당신은 이것이 현대의 조류 강(class Aves)과 같은 의미였다는 사실을 숨겼다. 하하하!”
실제로, 질문된 단어 ‘tsippowr’(깡총깡총 뛰어다니는 작은 새)는 그 뒤에 나오고 있는 새들의 목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단어는 가볍게 뛰어다니다, 또는 일찍 출발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tsaphar’ 로부터 왔다. (참조. 사사기 7:3). 참고 자료들은 명백히 땅 주변을 가볍게 뛰어다니는, 그리고 농작물들을 쉽게 쪼아먹는 새 종류를 나타내고 있다. (스트롱의 목록 정의에 의하면 참새).
그와 같은 동물은 이후 목록에 열거되어 있는 어떠한 동물들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14:12절에 ‘but’ 이라는 대립적 단어가 있다). 그리고 14:20절에 다시 되풀이되어, 목록화된 동물들과 tsippwor를 포함하는 더 일반적인 카테고리를 나타내는 단어인 'owph (owner of a wing)‘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7:14절(KJV)에는 다른 카테고리를 나타내는 두 단어 'beasts'와 'cattle'이 같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하라.)
*참조 : 1. Did the Bible Writers Commit Biological Blunders?
https://apologeticspress.org/did-the-bible-writers-commit-biological-blunders-2731/
2. Is the Bible Wrong About the Bat Being a Bird?
https://reformedwiki.com/bat-bird
3. Apologetics Press : Alleged Discrepancies (성경의 오류라는 회의론자의 지적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https://apologeticspress.org/category/alleged-discrepancies/
4. Countering the Critics Question and Answers (AiG)
https://creation.com/countering-the-critics-questions-and-answer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tektonics.org/af/batbird.php
출처 - Tekton Apologetics Ministries
심장도 생각하는가?
: 심장은 단순한 기계적 펌프만이 아니다.
(Does the Heart 'think'?)
Stephen Caesar
창세기 6:5절의 말씀은 사람의 심장(heart)이 마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어떤 종류의 정서적 능력(emotional capacity)을 가진 것처럼 들린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심장)의 생각(THE THOUGHTS OF HIS HEART)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비평가들은 이 표현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심장은 단순한 기계적인 펌프로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잡지인 ‘Discover’ 지에서는, 찰스 시버트(Charles Siebert)의 책 '자신의 심장 뒤에 한 사람(A Man after His Own Heart)”에 기술되어진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일부 의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심장은 단순한 펌프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세밀하게 관여하고 있다. 심장은 심장 자신의 마음(mind)을 가지고 있다. 심장은 뇌와 비슷한 심장 자신의 호르몬(hormones)들을 분비한다. 그리고 내부 장기(internal organs)들 사이의 대화(dialogue, 심장연구자들에 의하면 단지 엿듣는 것으로의 대화)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심장은 격렬한 뇌와 뇌의 신경화학물질들에 의해서 심장에 가해지는 유기적 변화의 모든 방식들을 진행한다. 한 의사가 설명한 것처럼,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heartbreak)' 고통을 겪는 것이다.” (Burdick 2004: 72).
잡지는 인공 심장인 Jarvik-7의 두 번째 수혜자(가장 오래 생존함)였던 윌리암 슈뢰더(William Schroeder)의 실제 삶을 예로 사용하고 있다. 단순히 혈액을 순환시키는 기계적 펌프로서, 그 장치는 슈뢰더를 전례가 없이 620일 간을 더 살아있게 했다. 그러나 Discover 지가 보고한 것처럼 슈뢰더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환자의 정신 상태는 또 다른 문제였다. 슈뢰더는 울적해했고, 매우 낙심했다 (Jarvik-7의 첫 번째 수혜자인 바니 클라크(Barney Clark)는 죽고 싶다거나, 죽여 달라는 표현을 자주 했다). 혈액은 계속 순환되었다. 그러나 어떤 생기(심장과 마음 사이에 어떤 정서적인 교감)를 잃어버렸다. 모든(주장되어지는) 신화들에 대해 단언하건대, 심장은 진정 사람 정서(human emotion)의 근원(a seat)이다. 대조해서 Jarvik-7은 환자를 기운나게 하는 사람의 경험적 격려들에 대해서 귀머거리였다. 대신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의지나 슈뢰더에게 제공되어지는 모든 말들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했다. 시버트가 기록한 것처럼 그는 마음(심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Burdick 2004: 72).
이와 같은 발견은 우리들에게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 라는 너무 성급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
Burdick, A. 2004. Review of A Man after His Own Heart, by Charles Siebert. Discover 25, no. 5.
* Stephen Caesar holds his master’s degree in anthropology/archaeology from Harvard. He is a staff member at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nd the author of the e-book The Bible Encounters Modern Science, available at www.authorhouse.com.
*관련기사 : 심장 이식하면 기억까지 이식된다? (SBA 스페셜. 2011. 6. 20)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67&newsid=20110620171009565&p=sbsi
심장 이식받은 소녀, 범인을 잡다 (SBA 스페셜. 2011. 6. 20)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67&newsid=20110620170025257&p=sbsi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rae.org/essay-links/heart/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2005. 5. 21.
20 세기의 지진
(Twentieth Century Earthquakes - Confronting an Urban Legend)
도시의 전설
20세기가 막바지에 이르고 새 천년이 다가옴에 따라, 자칭 예언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 재해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지진, 화산, 기근, 그리고 전염병에 대한 이러한 걱정은 당연하다. 예를 들면, 20세기에 전쟁보다는 지진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예언자들은 모두 다 지진을 문명이 임박한 격변으로 향하는 전조로 간주한다. 신비주의에 관한 세속적 저자인 르네 누르베르겐(Rene Noorbergen)은 자신의 책「주후 2000년 : 세기말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지진과 화산분출이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함으로써 우리는 중심들이 뒤흔들려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부터 계속해서 투쟁하게 될 것이다.”[1]
누르베르겐의 예언은 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상은 이미 프랑스의 공상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가 예언한 화산의 재분출과 지진 활동의 증가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았다.”[2]
때때로 성경 교사들은 지진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한다:
“20세기에는 그 이전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발생한 지진보다 더 많은 지진이 발생했었다. 지난 100년간 10년마다 지진 발생횟수가 2배로 늘었다. 그리고 90년대의 후반부 동안에 지진은 규칙적으로 증가하면서 발생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전 세계에 두려움과 공포가 야기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이 재림의 징후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3]
성경 예언에 관한 저자인 게리 스티르만(Gary Stearman)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Philadelphia Inquirer) 지의 1995년 10월 11일자에 발표된 자료를 사용했다. 그 신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리히터 규모 6.0 이상인 지진이 1950년대 9회에서 1960년대 13회, 1970년대 51회, 1980년대 86회, 그리고 1990년대에는 100회 이상으로 증가했다. 스티르만은[4] 이 자료를 사용하여 가장 큰 규모의 지진 발생횟수에 대한 두드러진 증가를 주장했다. 스티르만의 독자들은 그에게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지에 나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진자료를 들이대며, 이 숫자들을 상당량 수정하도록 강요했다.[5] 하지만, 스티르만은 여전히 지진 발생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도시 전설에 대한 예를 가지고 있는가? 지진 발생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에 관한 최근의 진술은 얼마나 증거를 잘 제공하고 있는가? 20세기의 지진에 관한 일련의 자료들은 완벽한가?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지진계를 보다 더 많이 배치했기 때문에 지진을 보다 완벽하게 탐지하고 분류함으로써 지진의 감지가 증가되었는가? 대중들은 지진발생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현재 지진이 도시에 살고 있는 많은 인구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미디어를 통해 더 자주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지진의 분류
1997년 그 해는 표준화되고 눈금이 정해진 지진계가 전반적으로 배치가 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결과, 현재 대규모 지진에 대해 전 세계에 걸친 계속적인 모니터링이 100년 이상 계속되었다.[6] 사람들은 전 세계에 걸친 역사적인 지진 자료를 종합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주된 3곳으로부터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1. 미국 지질연구소(USGS)의 국립지진정보센터(NEIC) :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데이터베이스와 요약 자료를 갖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URL은 http://earthquake.usgs.gov)
2. 30군데 지진연구소의 협회인 국립지진계자문위원회(CNSS) : 각각의 회원 기관은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인터넷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종합적 목록의 자료를 제출한다. (그곳의 URL은 http://quake.geo.berkeley.edu:80/cnss)
3. 국립해양기상청(NOAA)의 국립지구물리학 자료센터(NGDC) : 주전 2100년에서 주후 1995년까지 400만 건이 넘는 지진사건을 상술하고 있는 ‘지진활동도 목록’이라는 제목으로 두 장의 CD를 만들었다.[7] 목록의 주된 부분은 인터넷에 있으며, 자주 업데이트 된다. (그곳의 URL은 http://www.ngdc.noaa.gov/seg/hazard/earthqk.html 이다).
전 세계에 걸친 지진 자료를 사용할 때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충분히 판단해야만 한다. 규모 6.5보다 작은 많은 지진들이 20세기 초반에는 보고 되지 않았거나,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20세기 전반과 후반의 규모 6.5 미만의 지진 발생횟수를 효과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20세기 초반이라 할지라도, 규모 7.0 이상 지진을 전 세계에 걸쳐 종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완벽한 기록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부 목록들도 사실상 두드러진 결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CNSS 회원 기관을 대상으로 CNSS의 종합적인 전 세계에 걸친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했을 때, 알려진 지진, 심지어 1990년대의 규모 7.0 이상인 많은 지진조차도 주된 목록에서 빠져 있음이 드러났다. 주의 깊은 연구를 먼저 수행한 후에 믿을 수 있는 지진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8]
20세기 지진에 대한 전 세계적 종합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지진의 발생횟수에 대해 아주 잘 요약한 것은 NEIC가 작성한 것이다(다음 주소의 홈페이지 참고 ; http://wwwneic.cr.usgs.gov/neis/eqlists/7up.html). 이것에는 대부분의 참사를 야기한 ‘치명적인 지진(killer quakes)’들을 포함하고 있다. 20세기의 ‘강한(major; 규모 7.0-7.9)’ 그리고 ‘매우 강한(great; 규모 8.0이상)’ 지진의 발생횟수는 [그림 1]에 요약되어 있다. 이 그림은 1900년에서 1996년까지 가장 커다란 지진(규모 7.0 이상)의 발생횟수를 보여주고 있다. 총 1,943회의 지진이 보고 되었으며, 평균적으로 매년 20회의 커다란 지진들이 보고 되었다. 20회의 지진 중에서, 매년 평균적으로 1회가 ‘매우 강한’ 지진이었고, 평균적으로 매년 19회가 ‘강한’ 지진이었다.
하지만, 20세기의 가장 커다란 지진은 그 연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지는 않았다. 1940년대는 20세기 중에서 가장 왕성한 지진(평균 매년 30회, 표준편차 5.8)이 발생했고, 1980년대는 가장 왕성하지 않은 지진(평균 매년 11회, 표준편차 4.1)이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컴퓨터에 발생횟수 자료를 입력하여 10차 다항식을 만들게 하면 가장 잘 설명해줄 것이다.
그림 1. 20세기에서 규모 7.0 이상인 지진에 대한 전 세계적 발생횟수. 지진 발생횟수는 시간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며 성경의 산고(birth pangs)라는 주제를 보여준다. 97년간의 자료는 국립지진정보센터(NEIC)의 매덜린 저브스(Madeline Zirbes)가 운영하는 웹사이트(http://wwwneic.cr.usgs.gov/neis/eqlists/7up.html)에서 얻었다.
[그림 1]에 나타난 곡선은 20세기의 지진에서 대략 30년이라는 주기성을 보여준다. 자칭 예언자라고 하는 이들의 예언과는 달리, 20세기 후반동안에 대규모 지진의 발생횟수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증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경향은 없다.
전 세계에 걸친 지진 발생횟수 자료는 항간의 도시 전설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20세기 전체에 걸친 지진발생횟수는 전체적으로 미약하나마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1의 자료를 보면, 20세기 전반(1900년에서 1949년) 동안 1,093회의 대규모 지진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평균적으로 매년 22회의 대규모 지진에 해당된다. 20세기 거의 후반(1950년에서 1996년)의 경우, 단지 850회의 대규모 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평균적으로 매년 단지 18회의 지진에 해당된다. 1998년과 1999년의 지진 발생횟수가 기록되면, 20세기 후반에는 약 900회의 대규모 지진, 즉 전반부보다 거의 200회가 적은 지진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30년 주기 양상은 미약하게나마 감소하는 경향 쪽으로 바뀌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지진 발생횟수 양상은 노아의 대홍수에 뒤따라 전반적으로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는 판구조운동과 화산활동을 주장하는 창조론적 의견과 일치한다.[9]
‘산고(Birth Pangs)’로서의 20세기 지진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성도들을 맞이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의 ‘징후(signa)’로 지진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처처에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4:7; 막 13:8), 그 말씀은 현재 지진계에 기록된 전 세계적 지진의 분포에 의해 확증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진의 징후가 ‘슬픔의 시작(beginning of sorrows)’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마 24:8; 막 13:8)이다. 많은 영어 성경에서 슬픔으로 번역된 단어는 ‘산고(birth pangs)’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산고로부터 임신한 여자가 곧 아이를 출산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엄청난 고통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림 1에서 30년 주기의 지진 발생횟수의 곡선은 산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10]
사도 바울도 또한 모든 피조물들이 세상의 새로운 출생을 기다리면서 ‘함께 고통하고 (산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롬 8:22)고 말할 때 산고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사도 요한은 6번째 인을 뗄 때 연관되어 있는 ‘대규모 지진(great earthquake)’(계 6:12)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뒤로 임신한 여자의 징후(계 12:2)가 뒤따르고, 뒤이어 사람이 지구에 존재한 이래로 가장 큰 지진이 뒤따를 것을 언급하고 있다(계 16:18-20). 이러한 미래의 ‘아마겟돈 지진(Armageddon earthquake)’은 예루살렘으로의 그리스도의 재림(행 1:9-11; 슥 14:1-11)과 연관이 있을 것이고, 전 지구적 규모로 엄청난 지형학적 및 지질학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11] 하나님의 음성이 땅을 진동하시고(히 12:26) 이런 어마어마한 지질학적 변화를 이루신 후에, 그분의 성도들은 ‘진동치 못할 나라(kingdom which cannot be moved)’(히 12:27-29)를 받을 것이다.
References
[1] Rene Noorbergen, A.D. 2000: A Book About the End of Time (New York, Bobbs-Merrill Co., 1984), p. 80.
[2] Ibid. The statement comes from inside the front of the book's dust jacket.
[3] Lester Sumrall, 'Famines, Pestilence, Earthquakes, as Man Rebels,' in Bob Anderson et al., Earth's Final Days (Green Forest, AR, New Leaf Press, 1994), pp. 63-76.
[4] Gary Stearman, 'Are Earthquakes on the Increase?' Prophecy in the News (June 1996).
[5] See Stearman's apology for the Philadelphia Inquirer's incomplete data in 'Earthquakes are Indeed on the Increase' (pp. 27-28) in the next issue of Prophecy in the News.
[6] K. Abe and S. Noguchi, 'Revision of magnitudes of large shallow earthquakes, 1897-1912,' Physics of Earth and Planetary Interiors, 33 (1983), pp. 1-11.
[7] National Oceanographic & Atmospheric Administration, Seismicity Catalog (Boulder, CO, National Geophysical Data Center, 1996), two volumes on CD-ROM.
[8] For an updated introduction to the various earthquake information sources see Dr. Steve Malone's 'Surfing the Internet for Earthquake Data' (the URL is http://www.geophys.washington.edu/seismosurfing.html).
[9] Steven A. Austin, John R. Baumgardner, D. Russell Humphreys, Andrew A. Snelling, Larry Vardiman, and Kurt P. Wise, Catastrophic Plate Tectonics: A Global Flood Model for Earth History (Santee, CA., Geology Education Materials, 1996), 48 pp. and 80 slide photographs.
[10] Steven A. Austin, 'Earthquakes in these Last Days,'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mpact No. 198 (December 1989), 4 pp.
[11] Henry M. Morris, The Revelation Record (Wheaton: Tyndale House Publishers, 1983), p. 321. *Dr. Austin is Chairman of the Geology Department at ICR.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424
출처 - ICR, Impact No. 295, 199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39
참고 :
성경은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나요?
미디어위원회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시편 19:5,6)
성경 비판가들은 시편의 이 구절을 가지고 성경이 천동설을 주장한다고 비난한다. 우선 성경의 기록 목적을 분명히 하고 설명을 시작해야 하겠다. 그 목적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알리기 위함(요한복음 5장 39절)이지, 천문학 및 다른 난해한 학문을 배우려 한다면 다른 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기록의 목적은 사건의 중심인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관측되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던 것이고,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천문학적인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은 사실 지구가 자전을 하여 해가 보이는 각도로 들어서고, 해가 안보이는 각도로 들어서는 것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일기 예보를 할 때, 해가 뜨는(일출) 시각과, 해가 지는(일몰)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상황언어'라고 말해진다. 일기 예보를 하는 아나운서나 방송국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택하셨다.(1550, 캘빈) 그러므로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과학적 사실이 오늘날에 와서 밝혀지고 나서, 때때로 성경 속에 어색한 표현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오늘날의 과학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중세 교회가 받아들였던 천동설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중세 철학 및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위에 형성되면서 고대 희랍의 천문학적 체계를 가지고, 성경의 표현을 해석한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완성의 학문인 과학(특히 진화론)에다 성경을 짜 맞추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를 혼돈에 빠트렸을 때,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되 진화의 방법도 사용하셨다고 타협했다(유신진화론).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이론을 무한한 지혜의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욥기 38장에서 꾸짖으시는 말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과학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록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초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과학 아래에 둘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교회와 믿음의 분리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Faith)
Richard Fangrad
당신의 교회는 지질학(geology), 생물학(biology), 천문학(astronomy)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과목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쳐져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과목들에 속한다.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과학과 종교를 보통 다루고 있는 세속적인 논문,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은 대게 신앙적인 일들과 과학적인 일들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분리, separation)이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조장하고 있다. 그들은 신학, 하나님에 대한 믿음, 도덕성 등과 같은 종교적인 것들과 지질학, 생물학, 천문학 같은 것들 사이에는 조금의 관련성도 없다는 개념을 구축해 놓았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교회와 믿음을 과학과 관측의 ‘실제 세계(real world)’와 분리시켜 놓았다.
그러면 교회는 이러한 영역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분리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부분의 성경 공부와 주일학교 교육 과정들은 성경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도덕적인, 영적인 면과 관련된 내용들만을 모아가지고 성경을 가르친다.
문제는 지질학, 생물학, 천문학(잘못 해석된) 등은 자주 성경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교묘하게 시사하고 있다. 예로 지질학을 살펴보자. 우리는 지질학적 과정(침식, 산들의 생성 등)들이 성경적 시간척도와 다르게 수천만 년에 걸쳐서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고 듣고 있다. 생물학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다윈 이전에 창조론자들이 믿고 기록했었던)은 학교, 대중매체, 대부분의 세속적 과학자에 의해서 분자-사람(molecules-to-man)으로 진화이론과 혼합되어 희석되어버렸다.
천문학에서 별들과 행성들의 진화이론과 외계생명체 탐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시편 19:1)보다 우주에 대한 깊은 연구만을 추진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분리의 결과는 무엇인가? 교회의 교육은 부적절하며 구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미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
바나(George Barna)의 연구 그룹을 포함하여 몇몇 조사(surveys)들에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청소년들과 대학생 나이의 청년들의 50%는 교회를 떠날 것이며,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이라는 것이다. 바나는 말한다.
”우리는 20여 년 동안 십대 청소년들의 종교적 행동과 성향을 추적하여 왔는데, 조직적인 종교활동의 참여가 임의적(optional)이고, 많은 경우에서 개인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1]
만약 이러한 영역에서 진화론 교육의 집중적인 공세가 성경적 역사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주제들이 성경적 이야기들과 나란히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성경에 대한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진화론 교육이 교회내로 완전히 밀려들어올 때,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적 신앙(Christianity)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빌리 그레함(Billy Graham)과 나란히 복음사역을 하다가 나중에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했던 찰스 템플턴(Charles Templeton)이 그러한 타협(compromise)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한때 빌리 그레함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러나 빌리(Billy), 예를 들어 성경에 기록된 창조에 대한 설명을 단순하게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세계(world)는 수천년 전에, 몇일 동안에 걸쳐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수억 년에 걸쳐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추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논증될 수 있는 사실입니다.” [2]
창세기에 대한 그의 의문은 성경적 타협(Biblical compromise)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마침내 기독교적 신앙의 포기를 가져오게 했다.
성경과 실제 세계와의 재연결
AiG는 잡지들, 웹사이트, 여러 도구들, 및 강연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과학 자료들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왔다. 지질학, 생물학, 천문학, 그리고 많은 다른 과학들은 성경이 진실(Bible is true)이라는 것을 압도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세상이 성경 역사에 반대되는 방식으로 과학적 관측들을 해석할 때, 기독교 지도자들은 잘못된 해석을 거부하고 성경적 해석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아래의 표를 보라). 이러한 방식으로 가르침으로서,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실제 나무, 화석, 별, 동물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시다는 것을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교회와 신앙을 실제 세계와 재연결하고, 성경은 첫 구절부터 정확하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세상의 가르침 | 성경의 가르침 | 교회가 가르쳐야 될 것 |
---|---|---|
사람은 진화되었고, 단지 동물에 불과하다.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특별하다. | 유인원(ape-men)의 허구성 |
화석들은 수억 년에 걸쳐서 형성되었다. | 아담 이전에 죽음은 없었다. | 노아의 홍수는 대부분의 화석들을 형성했다. 만약 죽음이 아담의 범죄 이전에 존재했다면, 복음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수억년 지질시대의 허구성. |
생물체들은 진화한다. | 종류(kinds)들은 불변한다. (종(species)들의 불변이 아니라). |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는 고등 동물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전정보를 만들지 못한다. |
‘빅뱅(Big bang)’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빅뱅의 모순점들. 열역학 법칙들. 천문학에서 수십억 년의 연대에 대한 반증. |
1. Barna, G., Barna Research Group Web site , 5 November 2001.
2. Templeton, C., Farewell to God, McLelland & Stewart Inc.,Toronto, ON, p.7,1996.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the-separation-of-church-and-faith
출처 - AiG, 24 May 2002.
킨카주 너구리 잡기
: 육식동물의 대부분은 식물도 먹는다.
(Catching a kinkajou)
David Catchpoole
연구원인 로날드 케이즈(Roland Kays) 박사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문제는 교묘히 달아나는 킨카주 너구리(kinkajou, Potos flavus), 또는 ‘honey bear' 를1,2더 많이 찾아내는 것이었다. 킨카주 너구리는 주로 미국 중부와 남부의 강우가 많은 열대 숲의 나무 구멍에서 낮 동안을 대부분 자면서 보내며, 보통 한 마리씩 따로 발견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밤중에 나무 위로 올라간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케이즈 박사는 그들에게 라디오 송신용 목걸이와 같은 추적장치들을 설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을 잡아야만 했다.
케이즈 박사는 나무 위에 위장한 포획장치를 설치했다. 그러나 어떻게 킨카주 너구리를 그 포획장치로 유인할 수 있을 것인가? 킨카주 너구리는 육식동물(carnivores)로 분류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두개골 구조와 이빨 때문이다. 그래서 케이즈 박사는 고기(닭)를 미끼로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킨카주 너구리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케이즈 박사는 언젠가 술 저장소에서 키워지던 애완용 킨카주 너구리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 보고서엔 애완용 킨카주 너구리가 자기 주인의 술을 훔쳐서 먹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케이즈 박사는 술을 미끼로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 작전도 킨카주 너구리를 포획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케이즈 박사는 과일로 킨카주 너구리를 유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 숲에서는 자라지 않는 바나나(bananas)를 사용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킨카주 너구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잡혔다. 결국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잠깐, 킨카주 너구리는 두개골 모양과 이빨을 근거로 하여 육식동물에 속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킨카주 너구리는 이 바나나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사실 육식동물로 분류되는 많은 동물들은 먹는 것의 많은 부분을, 또는 거의 대부분을 식물(과일, 땅콩, 잎사귀, 줄기, 그리고 뿌리 등)들로부터 얻는다. 예로 팬다(panda), 여러 종류의 박쥐들(bats), 그리고 붉은 팬다(red panda) 등이 여기에 속한다.3,4,5
나는 케이즈 박사와 그의 연구진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킨카주 너구리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잘 알게 되었으며, 킨카주 너구리는 과일, 나뭇잎, 꽃, 화밀 등을 먹는 채식동물(exclusively vegetarian)이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6
이것은 우리에게 간단하게 '고기를 먹는데 사용하는 이빨을 가진 동물이라고, 모두 다 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7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와 같은 발견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동물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숲에 사는 킨카주 너구리와 같이 원래에는 모두 초식동물들이었단 사실이다 (창세기 1:30).8
References and notes
1. Unless otherwise indicated, information derived from : Menino, H., Kinkajous, National geographic 204(4):42-57, 2003.
2. Though named 'honey bear' (because of the colour of its coat), the kinkajous is actually classified as being in the raccoon family. Honolulu Zoo - Kinkajou, <www.honoluluzoo.org/kinkajou.html>, 7 October 2003.
3. Catchpoole, D., The bamboozling panda, Creation 23(2):28-32, 2001.
4. Match the bat's teeth, Creation 21(1):29-30, 1998.
5. Did you know? Red Panda, <www.answersingenesis.org/docs/1251.asp>, 7 October 2003.
6. Kays, R. W., Food preference of kinkajous (Potos flavus): a frugivorous (fruit eating) carnivore, Journal of Mammalogy 80:589-599, 1999.
7. Catchpoole, D., The lion that wouldn't eat meat, Creation 22(2): 22-23, 2000.
8. For a detailed and thought-provoking discussion of the origins of apparent design features for carnivory, see chapter 6in Batten, D.(Ed.), The Answers Book, Answers in Genesis, Brisbane, Australia-available from address on page 2.
* David Catchpoole, B.Ag.Sc.(Hons.), Ph.D.
Dr Catchpoole has worked as a plant physiologist and science educator, specializing in tropical agriculture and horticulture. He works full-time for Answers in Genesis in Australia.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catching-a-kinkajou
출처 - Creation 26(3):42–43, June 2004.
시카고 창조과학 컨퍼런스를 마치고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사 40:26).
이것은 2001년에 열렸던 시카고 창조과학 컨퍼런스의 표어이자 곧 주제이기도 하였는데, 과연 이 말씀대로 2001년 컨퍼런스는 이틀 동안 연인원 700명을 동원하는 대성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창조주 되심을 증거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 그동안 개별 강사들에 의한 크고 작은 세미나는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이때처럼 여러 강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창조의 과학적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시카고 교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 행사는 매우 뜻 깊은 일이 되었는데, 참석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의 사실을 바탕으로 세상을 옳바른 성경적 세계관으로 바로 보게하고 우리의 신앙을 기초부터 다시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 행사에 어떤 분은 워싱턴 DC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고, 미시건주의 한 목사님은 10여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참석하는 등 인근 각지에서 많은 분들의 관심이 있었는데, 당시 컨퍼런스에서 소개된 여러 주제 강연들의 하이라이트를 요약하여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창조과학회가 발족한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에 거주하는 많은 강사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은 물론이요 미주지역 교민들에게도 창조과학 강의를 해오고 있지만 (미주지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1998년이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창조과학 자체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거나 그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 사역의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되는데, 우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소위 과학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 것이 내가 믿는 성경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 날 저녁 집회에서 김석화 박사(의약화학 전공)는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개념의 발달이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그리고 이것이 과학의 정의와 맞물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과학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관찰 가능하거나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을 상대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창조니 진화니 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관찰이나 실험적 증명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어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밝혀진 기존의 과학적 지식과 방법을 이용하여 어떤 기원적 설명이 보다 더 합리적으로 현재의 과학적 지식과 모순 없이 들어맞는가를 논할 수는 있으므로, 이런 식의 연구를 우리가 Dallas 신학교의 Norman Geisler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일반과학과 분리하여 소위 “기원과학”으로 부른다면 무엇을 우리가 논의하고, 또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창조과학은 어디까지나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오직 우리가 과학적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미 자연계에 나타난 창조의 사실을 증거 함으로 성경의 역사성을 뒷받침하여, 궁극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 전체를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그 사역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거나 하나님의 말씀 보다 과학적 지식을 더 위에 두지 않는다.
성경의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 1-11장은 모든 것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이나 일부 목사님들조차도) 이 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신 기록이 창세기 6-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성경에 기록된 홍수를 단순히 노아가 살던 지역에 내린 지역홍수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둘째 날 낮 특강과 저녁 집회를 통해서 이재만 한국창조과학회 미서부지부장(지질학 및 구약학 전공)이 자세한 지질학적 증거들을 통하여 밝히 보여준 것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퇴적암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생생한 화석들은 도대체 전 지구를 뒤덮은 대홍수가 아니고는 이들의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그 동안 진화론적 해석에 의하여 지층이나 바위, 그리고 산맥의 형성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형성되어 왔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생각해 왔으나, 새로운 관찰과 보다 정확한 실험적 자료에 의하면 이것들이 형성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이들을 만들기에 충분하였을 어떤 큰 사건이 필요했다는 것이 점점 밝혀져 가고 있다. 이같은 지질학적 증거는 혹자가 생각하듯이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년이나 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 같은 사건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물론 과학책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어떤 자연에 관한 기록이 나올 때는 놀라우리만치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우주 비행사가 보내온 사진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 공간에 그냥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물체 간의 힘에 의해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로켓트가 개발되기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자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지구가 공간에 매달려 있다고 정확히 말하고 있어(욥 26:7)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한편, 이사야서(40:22)에도 ‘그가 땅 위의 궁창에 앉으시며...’라고 말할 때 히브리어 “khug (영어로 circle이란 뜻)”를 사용함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줌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천문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이 놀라우리 만치 일치 됨을 둘째 날 이동용 박사 (항공기계공학 전공)의 낮 특강을 통해 증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 가운데서도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창조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딱다구리의 두 개골과 부리 사이의 놀라운 충격흡수 장치와 그 머리를 뒤로 감싸며 돌아가는 긴 혀는 이 새가 도저히 우연히 진화될 수 없음을 강력히 증거하며, 그 외에도 꽁무니에서 내는 빛을 통해 짝짓기 신호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반디에서부터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박테리아의 몸을 움직이는 편모와 세포 속의 DNA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분자 구조들에 이르기 까지 생물체의 몸 곳곳에서 발견되는 소위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복잡성 (irreducible complexity)’의 발견들은 어떤 지혜를 갖춘 이의 의도적 설계가 아니고는 이 땅에 생물체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필자도 첫째 날 저녁 집회를 통해서 피력하였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창조과학 사역은, 인본주의 진화론 교육으로 인해 비뚤어진 우리의 세계관을 바로 잡아준다. 우리는 우연 발생의 목적 없이 태어난 산물이 아니고, 창조주의 계획아래 예수를 영접함으로 그 분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릴 귀한 존재들이다. 지식과 증거가 없어도 우리는 모두 그의 자녀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바른 성경적 지식과 생생한 체험적 증거는 우리의 신앙을 매우 굳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담대함을 얻어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증거케 하는 힘이 된다.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렸던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등에서 설교할 때(행 17:22-31) 처럼, 창조주에 대한 지식은 복음을 들어가게 하는 기초를 형성한다. 둘째 날 저녁 집회에서 최인식 박사(의사, 한국창조과학회 미주지부장)는 이 같은 사실을 강조하면서, 아울러 복음 증거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창조과학의 시대적 필요성을 피력 하였는데, 바로 욥에게 행하신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창조과학 세미나’를 통하여 (욥 38-41장)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인생의 질문들은 크고 위대하신 토기장이 하나님 그 분의 절대 주권을 발견하고 그 안에 우리가 안주 할 때 그 안에서 모두 녹아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창조과학 사역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발견케 한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그분이 섬세한 분이신가도 깨닫게 한다. 전에는 귀로만 듣던 신앙에서 이제는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우리를 한 차원 끌어당긴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을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가 보는 것이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실제로 본 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96
참고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김정훈
오래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라고 예언을 한 바 있다. 이때 사용된 처녀라는 히브리 단어는 almah 인데, 보통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은, 정숙하지 못한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혼전 성관계로 인하여 아기를 갖게된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 이 말씀을 징조로 주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사야가 사용한 처녀라는 말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 보다는 결혼을 하였다 하더래도 아직 남자와의 성관계를 갖지 않은 정숙한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도 주변에서 미혼모를 발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임으로,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는 전혀 징조가 될 만큼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의 여부를 떠나서 만약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전혀 갖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는다면, 이것은 분명 우리의 경험과 상식을 뛰어 넘는 기적에 속한 일임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가히 메시야 탄생의 징조로 받아들일 만한 일대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사야서를 비롯, 구약에 기록된 수 많은 예언대로 과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한 아기가 태어나고야 말았으니, 성경은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거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였다 (마 1:18; 눅 1:34-35)는 말씀으로 이 일이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다. 생물학적 법칙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세포와 난세포간의 수정이 이루어져야만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마리아의 수태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음으로, 이 일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할 수 있으며, 창조의 능력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완전하다. 그러나, 아주 드물긴 해도 필요할 때면,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실 때가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이나, 오병이어의 기적, 혹은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여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의 이적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확률적으로 있을법하지 않는 어떤 사건을 발생케 함으로서 섭리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믿는 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기도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대부분의 기적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법칙을 연구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혜택을 누리게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필요 하시다면 언제든지 그 분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간섭하심으로서라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도 성경에 나타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이 기적은 꼭 이와 같이 자연법칙을 초월하여야만 할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방법을 쓸 수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방법에 의한 수태를 할 경우에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죄의 본성을 물려받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피가 섞이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되는데, 우리의 죄를 구원하려는 그 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분 자신은 죄가 없으셔야 했기에, 하나님은 처녀를 잉태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성경은 그 분을 가리켜, 죄를 알지도 못한 자라고 증거 (고후 5:21; 히 4:15; 벧전 2:22)하고 있으며, 그 분은 그 출생의 목적대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그 분의 이름은 예수,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마 1:21). 할렐루야.
출처 - 도서,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부활의 필요 충분 조건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복음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14, 17). 바로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부활의 사건을 두고,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인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의심들이 제기 되어졌는데, 이를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게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죽으셨었으나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셨는가?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받으신 극심한 고통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로마 병정들로부터 수 없이 많은 채찍질을 받으셨는데, flagrum 이라고 불렸던 이 채찍은 가죽 끝에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뼈와 납조각을 붙여 만들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을 뜯어냄으로, 여러 번 내리치게 되면 피부 밑에 근육까지 뜯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피부 조직을 망가뜨리면서,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 죽음 상태로 만들어 간다. 거기다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무게 (대략 50kg)로 인하여 고통은 가중되고, 마침내 언덕에 다달아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가 있게 된다.
의사 Truman Davis는 그의 저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인간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관해 잘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온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양 팔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 나면서, 점차 가슴의 근육이 마비되고, 결국은 숨을 못 쉬게 됨으로, 십자가 상에서 질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위로 밀어 올려 주면 막힌 숨을 내뿜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리를 꺽어주게 되면, 그들의 죽음을 재촉할 수가 있는데, 성경(요 19:31-34)에 보면, 바로 이와 같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 곁에 같이 매달렸던 강도의 다리를 꺽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그가 이미 죽은 관계로 꺽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죽음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처난 곳에서 많은 물과 피가 흘러 내리는 경우는 십자가 상에서 심장파열로 죽은 경우에 나타난다고, Josh McDowell은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증언>에서 더블린 대학의 생리학 교수인 Samuel Houghton의 말을 인용하여 적고 있다. 만약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피만 나왔을 것이나, 피와 물이 같이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신게 분명하며, 따라서 로마 병사는 그의 다리를 꺽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셨고 (마 27:50; 요 19:30), 운명하셨다고 (막 15:37; 눅 23:46) 네 명의 기자가 공히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까지 하였으므로 (막 15: 44-45),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의심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이루기 위한 필요 조건은 갖추어 졌으나, 부활이 문자 그대로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로 남아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Josh McDowell은 그의 저서 <부활의 요인>에서, 고려해야 할 일곱 가지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돌 무덤의 인봉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 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이다.
셋째,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대략 1360-1800kg의 무게라고 한다)이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는데,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같이 큰 돌을 그들에게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 간데 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는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 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났었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를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 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또한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하려고 하였겠는가? 증거의 신빙성을 다루는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로서, 하바드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 분야의 불후의 명저로 손 꼽히는 <증거의 법칙에 관한 논문>을 남긴 바 있는 Simon Greenleaf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을 조사해 본 끝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의 그 어느 사건 보다도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필요충분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확실한 증거들 앞에 더 이상 어찌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자,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자. 그리고 크게 외치자. 할렐루야, 우리 주님 부활 하셨으니,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다같이 소리 높여 우리 주를 찬양할 찌어다!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중에서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55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