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김광훈
2004-07-28

특종! 믿음 사건 (The Case for Faith)


 도서명 : 특종! 믿음 사건 (The Case for Faith)  
◆ 저 자 : 리 스트로벨 (Lee Strobel)
◆ 출판사 : 두란노
 

◆ 목  차 :
믿음을 향한 도전
답을 찾아 떠나는 길
반론 1 : 사랑의 하나님이 악과 고난을 허용할 수 있는가?
반론 2 : 비과학적 기적, 믿을 수 있는가?
반론 3 : 생명 기원, 진화론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반론 4 : 살인을 명하는 하나님, 예배 받을 자격이 있는가?
반론 5 :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반론 6 :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인가?
반론 7 : 교회야말로 압제와 폭력의 역사가 아닌가?
반론 8 : 여전히 회의가 드는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결론 : 믿음은 살아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하거나 의심이 나는 부분을 만났던 때가 있었을 것 같다. 때로는 누군가가 기독교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해오면 말문이 막혀 답답해했던 경험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창조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노아의 홍수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기적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창조과학을 접하게 된 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문제들에 대해 성경이나, 다른 유능한 기독 지성인들과 신학자들이 설명한 여러 가지 변증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성경에서 여러 이해되지 않던 점들에 대해 창조과학자들의 도움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소개할 <특종! 믿음 사건>은 아마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소시켜줄 것으로 보이는 책이다. 또한 신앙적인 면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면을 빌어 이 책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생각하기로는 지금까지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었던 책들과 비교해 볼 때 이번에 소개할 책이 나름대로 가장 재미있는 책일 것 같다.

필자는 최근에 '기적(Miracle)과 법칙(Law)'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책을 보던 중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예전에 인터넷을 통해 원서로 구입할 계획이 있었던 리 스트로벨의 <특종! 믿음 사건>이 최근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책 내용 중에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있기에 빨리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ECPA(미국복음주의출판협회)가 선정한 2001년 최고의 도서로 리 스트로벨이 3번째로 ECPA의 'The Gold Medallion Book Award'를 받도록 해준 책이다. 책 제목도 다소 가볍고, 내용 면에서도 다른 전문적인 변증학 관련 책들에 비해 그렇게 깊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특유의 표현이나 전개 방식이 매우 흥미로워 독자들을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책을 어렵게 쓰는 것은 매우 쉽다. 그냥 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는 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도 재미있게 쓰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렵고 재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소유한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런 기독교 변증과 관련된 서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번역이 깔끔하게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좋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1) 사랑의 하나님이 악과 고난을 허용할 수 있는가? 2) 비과학적 기적, 믿을 수 있는가? 3) 생명 기원, 진화론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4) 살인을 명하는 하나님, 예배 받을 자격이 있는가? 5)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6)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인가? 7) 교회야말로 압제와 폭력의 역사가 아닌가? 8) 여전히 회의가 드는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8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각 주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위주로 책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한때 기자 출신의 회의론자였던 저자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핵심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혜로운 답변들을 잘 정리했다.

기독교인으로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두 번째 주제인 기적에 대한 부분은 이름이 많이 알려진 윌리엄 크레그 박사의 인터뷰 내용이 주된 내용으로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크레그의 논증에 대해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 같다.

세 번째 주제인 생명의 기원에 대한 부분 즉, 창조론과 설계 논증에 대한 부분은 당연히 창조과학회 회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내용일 것이다. 약 30쪽에 걸쳐 나름대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유명한 월터 브래들리 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그 외에도 네 번째 주제인 살인을 명하는 하나님 부분에서는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벌이고 있는 노먼 가이슬러 박사의 견해가 실려있고, 지옥과 관련된 여섯 번째 부분에는 지적설계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J.P 모어랜드 박사의 견해가 실려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변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더욱 정확히 이해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비기독교인 또는 반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기독교적인 입장을 지혜롭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번에 소개한 책 <특종! 믿음 사건>에 나온 여러 가지 전문가들의 변증을 모두 받아들이는 데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타당성을 줄 수 있는 논증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과연 어떤 사실에 대해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을 타당성 있게 설명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출퇴근길에 아침저녁으로 1장씩 읽었는데 일주일만에 쉽게 다 읽을 수 있었다. 여러분들도 이 기회에 편한 마음으로 책을 한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출처 - 창조지, 제 131호 [2002. 5~6]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04

참고 :

이웅상
2004-07-28

성경과 과학(1) 너무나 과학적인 '성경'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윤리, 도덕적으로는 위대한 책일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무엇인가 문제가 많은 책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성경이 과학과 상충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 것은 오늘날 진화론 일색의 교육이 마치 성경이 비과학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물에서 우연한 충돌에 의해 유기물이 생겨나고 여기서 최초의 생명체가 우연히 탄생했다는 화학진화론적 생명의 기원관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최초의 한 생명체에서 진화되어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그 원인인 것이다. 이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을 따로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에 비교해 뒤진 책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계시의 말씀이어서 그 당시의 과학이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부분을 연구하는 학문인 과학이 발달하면서 성경이 과학과 자연스럽게 잘 화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밝히게 된 일부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성경의 권위와 무오함을 설명하고자 한다.


지구가 둥글게 생겼으며 허공에 떠서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과학적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이 생겨난 것은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불과 수 백년도 안되었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지구는 평평하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둥글며,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에 뉴튼이 17-8세기에 두 물체는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훌륭히 설명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지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혹시 천동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 중세 유럽교회의 천동설 주장을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과학사적인 해석을 통해서 그와 같은 반대는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요소와 그 시대의 세계관적인 요소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가 되었다. 과연 그러면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이사야 40:21-22)." 여기서 '땅 위 궁창' 할 때의 궁창은 원형의 모양을 의미한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은 "above the circle of the earth"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욥기 26:10에는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경계라는 말의 의미가 역시 원이라는 뜻이다.  욥기 26:7-8에 기록된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18세기에 와서야 정확히 이해한 "지구가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공간에 다시며"라는 말은 허공에 띄워 놓으셨다는 말로 NIV 영어성경은 이 의미를 "suspends the earth over nothing"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과학적 용어나 공식은 성경에 없지만, 지구에 대한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과학자들이 공기는 혼합물로 된 무게가 있는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공기의 무게는 16세기에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인식한 것을 그의 수제자인 토리첼리가 1640년에 그 무게를 측정하는데 성공했다. 토리첼리가 공기의 무게(압력)를 재는 기계인 압력계를 최초로 만들어 재어 보았더니 1기압이 수은으로 760mmHg로 나타났다. 그래서 토리첼리 박사가 이 단위를 자기 이름을 붙여 torr(토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이보다 3100여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장 7절에 하나님이 궁창 (공기층)을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욥기 28:25절에 "바람(공기)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분량을 정하시며"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그 공기와 물의 무게를 정하사 모든 물질의 기준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17세기에 알게 된 사실을 성경은 이미 수 천년 전에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과 과학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갈등의 관계가 아니며, 이런 관계는 잘못된 과학관으로 인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출처 - 기독공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889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8

창조주 그리스도의 흔적들

(Glimpses of Christ The Creator)

David Demick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아버지와 성령과는 하나이며 동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기독교 교회의 제1위적 교의(敎義)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창조의 동역자였으며, 전체 창조과정을 통한 주요 참여자였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창세기 1장의 처음 절들 속에 담겨있는 이 이념들을 이렇게 풀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사도 바울도 또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1:16).


하지만 이 진리가 복음서들의 서술 부분에는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거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당신의 사명과 가르침을 받드는 자들에게  죄의 회개에 대한 당부의 말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하나님과 하나임을(요한복음 10:30),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었음을 (요한복음 17:5),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권능을 증명하는 기적들을 행하신 (요한복음 20:30-31)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한편, 우주창조에서의 그의 직접적인 역할에 대한 당신 자신의 언급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말씀 중에 창조자 그리스도의 통찰의 면모가 번득이는 곳이 몇 곳 보인다.


예컨대 산상수훈 중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 말라는 권면의 말씀 속에 담긴 그의 면모에서 그런 통찰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연에서 예를 들면서 당신의 요점을 설명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8, 29).

이 진술은 고대 희랍인과 로마인들이 알고 있던 진화론적 철학과는 정반대의 대조를 이루는 빛나는 말씀이다. 저들과 맥을 같이하는 오늘날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은 생명이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땅 속에서 솟아난 것이라는 '보다 더 단순한' 철학을 견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강림보다 3 세기 앞서서,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는 현대 진화론 철학과 현저하게 유사한 우연적이며, 맹목적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제창하였다.

”원자는 자체의 영구운동 속에서 수없이 많은 결합과 분리의 과정을 지난 후에 마침내 소위 '세계' 라는 것에 융합되었다. 태초에 지구는 생명체가 없는 흙덩어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동물과 새들이 갈기와 깃털을 내듯이 지구에 풀과 수풀과 꽃이 솟아났다. 그런 다음에 생명체들이 생겼다. 새들은 공중을 날고 … 짐승들은 어슬렁대기 시작하였다 … 몇몇 종들은 환경에 적응하여 마침내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종들은 … 자연의 기형들은, 다시 말해서 맹목적인 세계의 맹목적인 실험의 희생자는 멸종이 될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런 플롯도 없는 이 흥미로운 연극의 주인공인 인간은 이 무대장면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등장인물이다.” 1

이 철학은 오늘날의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경이롭게 디자인된 세계의 특징을 과소평가하는 세계관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사역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창조주의 사역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은 죄 많은 인간의 본성이다. 예컨대, 옷감을 마련함에 있어서 섬유질 식물의 수확, 직조, 염색 등과 같은 관련된 인간의 작업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편협한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그와 같이 복잡하고 중요한 인간의 작업행위에 비해 한 송이 꽃을 피우든가, 한 톨의 작은 씨앗이 자라는 것은 단순하고 흔한 일로 보일 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을 깊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마틴 루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진리에 더욱 가까이 가 있었다.

”만약에 그대가 한 톨의 밀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경이로운 사역을 알게될 것이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현대과학보다 오래 오래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안목으로 한 송이 꽃을 피우고 꽃잎에 모양을 다듬고 색상을 입히는 것 같은 일견 하찮은 일에도 믿을 수 없을 만치 경이로운 미세공학 원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소상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해서 그는 꽃에 관한 진리를 자신감을 가지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말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산상수훈 중 다른 구절에서는 심오한 과학적 함축을 담은 또 한 번의 예수님의 빛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몸에 관련된 말씀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태복음 6:22-23).3

"The light (Greek, luchnos, lamp)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Greek, haplous, free from defect, unspotted),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Greek, photeinos, full of light, shining, bright). But if thine eye be evil,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darkness. If therefore the light (Greek, phos, radiance) that is in thee is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Matthew 6:22-23).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주된 목적은 도덕적 교훈이지, 결코 과학적 교육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구절들과 예수 시대의 교양 속에는 이기심과 탐욕에 대한 경고가 담겨져 있다.4 그 구절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 현상들을 이용하여 예를 들고 있는 또 다른 사례이다. 그런데 영적 진리도 자연 진리와 서로 공명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특별히 눈의 예를 들어 온 몸을 '가득 채우는(filling)' 등불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눈을 통하여 감지되는 빛이 갖는 체계적인 생리학적 효과를 암시하고 있었다. 이 같은 나의 생각은 공상일까? 최근까지 만해도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경생리학의 발전으로 눈의 감광(感光) 지각은 온 몸의 건강한 기능에 진정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부단한 의학기술의 발달로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 더욱 밝혀져서,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천재성도 경이롭게 드러나고 있다.


이 과학적 진리를 풀어내는 길고 긴 이야기는 인간의 두뇌에 근접해 있는 비강(鼻腔) 바로 상단에 위치한 뇌하수체를 발견하였던 고대의 해부학적 업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세기를 걸쳐 뇌하수체(腦下垂體, pituitary)는 비강 분비물에 관련이 있는 중요하지 않은 조그만 내분비선(腺; 샘)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밖에 뇌하수체의 용도는 모호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 들어 생리학자들은 뇌하수체가 내분비 체계의 실질적 '주 내분비 샘'으로서 신장, 부신장, 그리고 생식선(生殖腺) 등 다른 중요한 내분비 샘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뇌하수체 바로 상단에 뉴런(신경단위 세포)들의 복합체인 시상하부(視床下部, hypothalamus)가 있어서 대부분의 뇌하수체를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시상하부의 중요성을 현행 생리학 교재에 실려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

”이렇게 해서, 뇌 전체의 1%도 되지 못하는 시상하부는 대뇌변연계통(大腦邊緣系統)의 중요한 운동신경 출력경로들 중의 하나로 있다. 시상하부는 신체의 발육기능과 내분비기능은 물론 정서행동의 많은 측면들을 조정한다.” 5

뇌하수체와 시상하부에 관한 이와 같은 일련의 발견에 뒤이어, 1972년에 포유동물의 시신경섬유조직이 뇌의 시각피질(皮質)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망막에서부터 시상하부까지 직접적으로 감각신경을 연결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뇌에 보내지는 감광 자극의 부차적 통로는 '망막시상하부 경로(retinohypothalamic track)'6 라는 학술명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서 드디어 눈이 갖는 감광기관과 신체의 다른 부위의 전반적인 기능 사이를 연결하는 생리학적 연결고리를 설정하는 바탕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뇌의 송과선(pineal gland)이라고 알려진, 뇌의 또 다른 조그만 한 부분이 '영상-신경계뇌분비선 체계(photo-neuroendocrine system)' 라고 불리는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이 생리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뇌하수체나 송과선의 존재는 고대부터 주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뇌의 송과선의 기능을 이해하려면 다윈의 지혜가 그것은 대부분 무용한 '퇴화기관'7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던 1859년에서 한 세기가 지난 시대(1959년)까지 소급하여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58년 송과선이 몇 가지 중요한 긍정적인 생리학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멜라토닌(melatonin) 이라고 불리는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현대적 안목이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빛-뇌-몸의 상호작용의 효과에 관한 한, 멜라토닌 호르몬은 일일 수면-기침(起寢) 사이클에 영향을 미치는 24 시간(一日) 리듬의 내분비물의 분비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계속되어온 연구는 송과선과 suprachiasmatic nucleus, 즉 시상하부의 '시계 (clock)' 중심과의 사이에 있는 연결기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일일 행동 리듬은 서로 밀접하게 묶여있다는 것도 발견되었다. 시상하부, 뇌하수체, 그리고 송과선을 통하여 눈의 망막을 거쳐 진행된 빛의 자극이 시각(視覺)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온 몸에 광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학적인 성과는 지난 수세대 동안 의학적 용도에 크게 이용되었다. 그것은 겨울철에서 경험하는, 특히 지리학적으로 높은 위도에서는 점진적으로 상실되어져 엷어지는 주간 햇볕 때문에 경험하는 정신적 위축감의 증가에 대한 생리학적 설명근거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또한 일일 낮-밤의 사이클과 공시성(共時性)이 맞춰지지 않은 수면-기침 리듬을 유지하여야만 하는 교대근무자들이 흔하게 경험하는 의학적인 여러 문제들에 대한 생리학적 설명근거가 되기도 한다.8 이 현상은 우리가 온 몸의 건강을 위한다면 정상적 일일 사이클 중 눈을 통해 감지되는 강력한 빛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영상-신경계내분비선 계통이 가지는 더 많은 유익한 측면들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에게는 인체에 미치는 바로 이 유익한 빛의 효력에 관한 새로운 과학은 남다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그 과학적 발견은 우리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경이로운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조명하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와의 동행을 알리는 끊이지 않는 그의 영광의 빛 속에서 주신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쁘게 받아든 크리스천을 위해, 그는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은 그의 성(城)을 마련해 두셨다. (요한계시록 21:10-27).


결론적으로, 현대과학에 비추어 산상수훈에 기록된 성경 구절들을 세밀히 검토하여보면,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에 드러난 위대한 지식과 통찰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말씀이 도덕적인 가르침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경우도 이 점에서는 한결같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한 가지로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이 순결한 의미와 진리가 겹겹이 쌓여있음을 알 수 있다.


*Dr. Chaney Bergdall of Huntington College 와 Dr. Jerry Bergman of Northwest State College of Ohio 가 보내주신 충고와 조언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References

1. Thomas, H. and Thomas, D.L. Living Biographies of Great Philosophers, Blue Ribbon Books, 1941, p. 44.

2. Bainto, Roland,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Mentor Books, 1955, p. 168.

3. Scripture quotations from the King James Version with amplified word meanings from Young's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 Eerdmans, 1970.

4. France, R.,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inter-Varsity Press, 1985.

5. Guyton, A., A Textbook of Medical Physiology, W.B. Saunders, 8th ed., 1991,  p.

6. Klein, Moore, and Reppert. Suprachiasmatic Nucleus: The Mind's Cloc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7. Bergman and Howe. Vestigial Organs Are Fully Functional, Creation Research Society Monograph #4, 1990, pp. 49-55.

8. Moore-Ede, Sulzman, and Fuller, The Clocks That Time Us: Physiology of the Circadian Timing System,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2, pp. 330-341.

9. Sack, Brandes, et al., 'Entrainment of Free-Running Circadian Rhythms by melatonin in Blind Peopl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ol. 343, no. 15, Oct. 2000, p.1070.

*Dr. Demick is a practicing physician in Hastings, Nebraska.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glimpses-christ-creator

출처 - ICR, Impact No. 355, 2003. 1. 1.

미디어위원회
2004-07-28

현대의 과학적 발견들은 성경을 입증한다.

(Modern Scientific Discoveries Verify The Scriptures)

Duane T. Gish 


      우리는 성경을 비난하는 과학자들의 생각이나 의견, 이론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사실(fact)에 기초한 것이고, 단지 학설(theory)에서 나온 것인지를 신중하게 분별한다면, 우리는 성경과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사실간의 어떠한 모순점도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과 자연에 대한 해석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시편 102:26을 확인시켜준다.

첫째로, 열역학 제 2법칙을 생각해보자. 시편 102편 25, 2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 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5절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26절에는 우리에게 뭔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우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사실이 아닌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과학이 눈뜨기 전인 약 30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 의하면, 우주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는 낮은 수준으로 계속해서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사실은 아니다. 인간의 관찰에 의하면 우주는 변화될 수 없던 것이었다. 우주가 무작위적으로 되어가고, 더욱 무질서하게 된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야기이다. 현 상태에서 우주가 낮은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현대과학에 의해 완전히 입증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은하계 수준에서 작은 원자수준까지, 어느 곳에서나 모든 시스템이 질서에서 무질서한 방향, 복잡성에서 단순한 방향으로 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은하계의 무리가 서로 멀어짐에 따라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회전은 느려지고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소멸되고 있다. 지구의 모습은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도 그렇다. 우리는 죽고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의 집, 우리의 기계들 역시 닳아 없어지고, 마침내는 버려지고 교체되고 만다. 많은 원자들이 단순한 산물로 분해되고, 심지어는 양성자와 같은 원자구성요소(sub-atomic particles) 조차도 매우 느리겠지만 에너지로 분해될 것이다.

태양을 포함한 별은 매초에 수십억 톤의 연료를 태우며 불타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주의 모든 별들도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면, 연료를 다 소비하고 어둡고 차가워질 것이다. 물론 우주도 차가워지고 죽게 될 것이며, 모든 생명체도 우주의 죽음 이전에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심지어 현재 신성(nova)이나 초신성(super-nova)가 생성된다 할지라도, 별들은 빠른 속도로 무질서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르는 자연의 경향성은 널리 퍼져있고, 무너지지 않는 자연법칙(natural law)으로 확립된 것이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이 법칙에 대해 이렇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Smithsoniam Institute Journal, June 1970, p.6)

“열역학 제 2법칙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주는 계속 무질서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법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들어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방이 있다. 하지만 그 방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금방, 아주 쉽게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집, 기계들, 그리고 우리 몸의 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그것들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가!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모두가 엉망으로 만들고 부수고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들뿐이다. 그것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 말하고 있는 전부이다.'

현대의 과학적 연구들이 시편 102편 26절에 표현된 사실들을 입증해왔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수십년간 과학자들의 수천 번이 넘는 반복적 연구가 성경에서 표현된 과학적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만들었다.

 

우주는 시작이 있어야만 했다.

더욱이, 우주가 악화되고(deteriorating) 있다는 사실은 우주가 영원히 지금과 같진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면, 오래 전부터 닳아 없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태초에 하나님이 … 창조하시니라’라는 첫 번째 구절이 과학적으로 믿을만한 주장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 성경구절은 우주는 전에는 없었고, 과거 어느 순간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앞에서 언급했던 성경이 쓰여졌을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우주가 영원히 존재해왔고, 또 영원히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시작이 있었고, 현재 닳고 있다(running down). 그러므로 현대과학은 많은 사람들이 우주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잘못되었으며,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맞음을 증명해낸 셈이다.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해 창조가 완성되었음이 확인된다.

열역학 제 2법칙이 있다면 물론 제 1법칙도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렇고, 이 자연법칙은 성경의 또 다른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열역학 제 1법칙은 우주의 에너지나 물질의 총량(total quantity)은 일정하다는 것이다. 한 종류의 에너지가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고, 에너지가 물질(matter)로 전환되기도 하고, 물질(matter)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 당신은 무(nothing)에서 어떠한 것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다.

과학계에서 자연법칙으로 가장 잘 확립된 열역학 제 1법칙은 창세기 2장 1,2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완성된 창조(finished creation)를 확인시켜준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우주 어디에서라도 무(nothing)에서부터 물질이나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이 보여진다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완성된 창조는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다. 또한 그 반대일 경우라면 성경은 진실임이 판명될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증명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과학적 실험에도 끄덕 없었다.

 

시편 8편은 과학적 연구 프로젝트에 영감을 주었다.

매튜 모리(Matthew Maury)는 성경에 기초한 연구를 수행했고, 다시 한번 성경이 과학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모리는 1841년부터 1861년까지 미해군(United States Navy)의 수로측량국(Hydrographic Office)에서 해도(海圖) 제작과 기구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던 크리스천이었다. 어느 날 시편 8편을 읽다가 3절에서 8절에 이르는 부분을 읽게 되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the paths of the seas)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러분과 나도 수 차례 읽었을 것이다. 비록 시편이 말하고 있는 위대한 진실을 많이 이해하였다해도,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리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그는 당시 항해산업을 가로막는 문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8절의 중대함을 인식했다. 그 구절은 모든 생물 중 하나님께서 땅위의 짐승, 하늘의 생물, 바다의 고기들의 통치권을 주셨고, 바다의 길로나 어디로나 다니게 하셨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모리는 “바다에도 길이 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전도서 1장 6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the wind returneth again according to his circuits. KJV)”

모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잘 정립된 바람의 순환이 있다는 것과 문자 그대로 “바다의 길(해로)”즉, 바다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결론 내렸다. 그는 바람의 기류와 해류가 정해져 있을 수 있다면, 이 정보들은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커다란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정보를 이용하면 바다와 공기의 기류를 이용하여 항해로를 결정하는 이점이 있고, 바다를 가로지르는데 드는 몇 일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리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모리를 비웃었다. 그들은 “모리, 너는 성경이 바다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고 너의 사무실에서 매일 오래된 기록과 차트로 거위 쫓듯이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리가 말한 것처럼 성경의 진실이 정확히 증명되었다. 모리는 바람의 기류와 해류를 발견했다. 예를 들면, 커다란 걸프 해류(Gulf current)는 40마일의 넓이에 2000피트 깊이로 멕시코 만에서 대서양을 흐르는 바다의 길이다. 이런 해류는 영국, 아일랜드, 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의 기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서부해안의 겨울철 평균 기온은 얼음이 어는 온도보다 2도 정도 높은 섭씨 2도 정도가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북쪽 나라들로 갈수록 그 평균기온은 낮아질거라 생각할 수 있다.

다른 바다의 길로는 캘리포니아 해류와 일본 해류를 들 수 있다. 캘리포니아 해류는 알래스카로부터 차가운 물을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가져오게 된다. 그 결과 샌디에고에 사는 사람들은 하와이 섬에 사는 사람들이 수영하는 것처럼 따뜻한 물에서 수영할 수가 없다. 더욱이 이 차가운 물은 열대폭풍(tropical storm)으로 분산되고, 남태평양에서 남쪽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밀리게 된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는 여름에 거의 비가 오지 않게 된다.

모리의 고향인 버지니아 주는 그에게 항해(navigarion)라는 큰 빚을 진 것을 알고, 그를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매튜 모리(Matthew Fontaine Maury), 바다의 길을 찾은 사람 (Pathfinder of the Seas), 바다와 대기에 숨겨진 비밀 법칙을 처음으로 찾아낸 천재, 그는 성경의 시편 8:8, 107:23, 24, 전도서 1:6에서 영감을 받았다.”

매튜 모리는 정말로 천재였는가? 아니면 그는 단지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으로써 성경을 확신했는가? 그가 천재이건 그렇지 않던 간에 성경에 대한 그의 믿음은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하도록 했고, 그의 믿음이 옳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과학적 발견을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이룩한 사례들은 매우 많다. 성경이 비록 과학책은 아닐지라도, 과학적으로 시험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경우, 그 기록들은 과학적으로 정확했음이 입증되어 왔다.

 

* Dr. Gish is Vice-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19.htm 

출처 - ICR, Impact No. 219, 1991.

미디어위원회
2004-07-28

지구의 중심 (The Center of the Earth) 

: 컴퓨터가 계산한 지구의 지리적 중심

Dr. Henry M. Morris 


    지구의 표면은 70% 이상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물로 덮여 있다. 땅으로 되어있는 지구의 30%는 하나의 땅덩어리가 아니라, 이상한 모양의 대륙과 섬들로 펼쳐져 있고, 모두 사람이 살거나 사람에 의해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7개 중 3개의 큰 대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은 실제로는 함께 연결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나머지 2개인 북미와 남미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빙하기 동안 해수면은 낮았고, 베링 해협(Bering Strait)을 가로지르는 다리(land bridge)가 유라시아와 미국을 연결했었다. 호주는 아마 말레이 군도와 인도네시아 섬을 가로질러 아시아와 연결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중요한 땅들은 아마도 최근까지는 함께 연결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사람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말이다. 사실 성경적 연대학(Biblical chronology)에서는 대홍수가 있은 뒤, 심지어는 바벨탑 사건이 있은 뒤 일정 기간동안이라는 입장이 우세해야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세기 9:19)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9)

현대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세속 역사학자들 모두가, 문명의 발달은 소위 “Bible lands” - 유럽, 미국, 중국, 남아프리카가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역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지역 - 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수메르, 이집트, 엘람, 앗시리아 등 고대의 나라들은 모두 이 지역 주위에 집중되어 있다. 비슷하게 문자, 운송수단, 축산, 농업, 대부분의 인류 경제학의 구성요소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첫째로, 이 사실들을 성경의 영감설(divine inspiration)을 뒷받침하는데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문명이 홍수 이전에 존재했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같은 문명화된 지식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점차로 아라랏산과 바벨탑으로부터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의 일반적인 역사적 정확성을 뒷받침하지만, 문명이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창세기의 기록자가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단지 좋은 역사가였다 라는 것밖에 얻질 못한다. 그 지역에서의 문명의 시작은 아마도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노아의 방주가 머무른 지역보다는 살기 좋은 물리적, 기후적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후나 토양조건과 같은 자연적 요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경과 지질학간의 미묘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꼭 필요한 추론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가장 적절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그 시점에 완전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의 가설로써 살펴볼 가치는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효과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몇 개의 암시가 있다. 예를 들면 에스겔 38장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 중앙에 거하는 백성을”이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이스라엘의 땅이 지리학적으로 지구 땅덩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구절들이 있는데 “땅 사방에서(the four corners of the earth)” 또는 “땅 네 모퉁이(the four quarters of the earth)”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지역을 넷으로 나누는 위치적 표시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용어가 된다 (northeast, northwest, southwest, southeast). 언제나 성경에서는 모든 방향의 기원이 되는 특정한 지점을 이스라엘로 당연시한다. 심지어는 특별히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Bible lands”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홍수 이후에 지면에서 흩으신 중심이 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구원의 소식을 퍼트리신 곳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 전파의 중심이 지구의 지리적 중심에 있다는 것을 볼 때, 은혜로운 하나님의 일의 완성에 있어서 최대로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론에 대해 완전하게 확신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지리학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데 적절했다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적어도 이 주제는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다. 사실, 지구의 지리적 중심은 신학적 고찰과는 별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 순수한 학술적, 미학적 흥미를 더한다면, 그 정보에 수많은 미래에 대한 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기구, 국제 통신센터, 교육센터, 운송, 상업 거의 모든 인류를 위한 조직이 있어야 한다면, 가장 적절한 위치는 논리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세계의 인구가 사는 곳의 지리적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들도 동일하다. 만약 그들의 시스템이 그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모든 하위 시스템들의 중심이 되는 곳에 있다면, 그러한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한 비용은 최소화되고, 시스템을 사용하기 위한 편의성은 최대화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 중심 위치는 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호감이 갈 뿐만 아니라, 과학적, 경제학적으로 볼 때도 그렇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러한 정보는 거의 얻어지지 못했고, 처음으로 지구중심의 지리학이 상당한 정확도로 그려지고 있고 현대까지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륙과 섬의 지리학은 매우 복잡해서 고속 디지털 컴퓨터로도 그 중심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만약 지구가 하나의 대륙이었고, 일정한 기하학 모양을 가졌더라면, 중심을 정하는 일은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물론 매우 복잡하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지구 표면의 위치(모든 지점의 점으로부터 평균 거리가 최소화되는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지점은 지구의 지리학적 중심으로 정의된다.

(1) 모든 지구의 땅을 작고 동일한 Unit으로 나눈다.

(2) 가능한 지구의 중심이 될만한 Unit을 선택한다.

(3) 다른 지구 모두의 지점들과 선택한 Unit과의 거리를 계산한다.

(4) 모든 거리들을 더하고 총수로 나눈다. 결과는 모든 지점에서 선택한 지점에 이르는 평균거리가 된다.

(5) 1번부터의 전체 과정을 반복한다.

(6) 다른 Unit으로부터 계산한 평균값들을 비교한다. 그중 가장 작은 것이 지구의 지리적 중심이 된다.

사실상 이 계산은 초고속 컴퓨터를 사용해야만 가능하다. 완성되기 위해서는 구면 삼각법, 측지학, 미적분, 컴퓨터 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모든 지구 땅덩어리에 대한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묶는 기준선망(grid network)이 배열된 데이터가 사용 가능해야 한다.

 

결과

이 연구조사는 먼저 물리학자인 앤드류 우드(Andrew J. Woods, Gulf Energy and Environmental Science in SanDiego)가 제안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창조과학회의 후원을 받아 컴퓨터 대여와 Mr. Woods가 분석, 프로그래밍한 것을 논문화 하는데 제공되었다. 그의 결과는 프로젝트 보고서 형식으로 요약되었고, 그 논문에 삽입되었다. 분석 원리, 컴퓨터 결과, 결론은 거기에 자세히 제공된다.

이 사실은 통계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Bible lands를 남과 서로 고대 이집트 수도인 멤피스(Memphis), 북과 동에서는 아라랏산으로 경계를 짓는다고 하면, 이 지역은 바빌론, 예루살렘을 포함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이 사각형에 들어오는 지역은 거의 440,000 평방마일이나 된다. 지구 전체의 면적은 거의 197,000,000 평방마일로 이에 450배 가량 된다.

그러므로 지구 중심이 Bible lands에 올 확률은 단지 450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통계학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449개의 동일한 크기의 다른 지역에서 그러한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다른 지역들은 지구의 지질학적 중심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드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의 정확한 중심은 터어키의 현 수도인 앙카라(Ankara) 근처에서 발견되었다(위도 39, 경도 34). 이는 아라랏산의 위도와 같고, 예루살렘의 경도와 꼭 같다. 신학적 차원에서 말하면 지구의 중심이 정확히 예루살렘, 또는 아라랏산이나 바벨이라고 판명하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 모른다. 세 지역을 보면 앙카라는 아라랏산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550마일 정도 동일한 거리에 떨어져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구의 중심이 정확히 아라랏산이나, 바벨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지구의 중심이 Bible lands 안의 어디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흥미롭게도 지구의 중심인 앙카라와 예루살렘, 아라랏산, 바빌론은 거의 정확한 사각형을 이룬다. 세계 활동의 강력한 센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지역내의 어느 곳에서나 만나게 될 것이다. 정확한 중심성 외의 다른 요소들도 물론 그러한 위치 선정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한다.

우드의 계산은 어떠한 중심 위치에서 모든 일반적인 다른 지역과 이르는 평균거리가 다양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앙카라에서의 평균거리는 4597마일인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4612마일, 아라랏 지역은 4617마일로서, 차이는 15마일과 20마일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 이러한 차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한편, 지구의 반대중심(anti-center)의 위치는 즉, 다시 말해 지구의 모든 지역과 이르는 평균거리가 가장 큰 지역을 말하는데, 위도 45, 경도 150인 남태평양 부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지역은 뉴질랜드의 남동쪽과 남미의 남서쪽이다. 이 지역은 세계 활동 중심의 어떠한 종류의 것도 위치하기 가장 나쁜 지역이다. 그 평균거리는 약 7813마일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the-center-of-the-earth

출처 - ICR, Impact No. 2, 1973. 4. 1.

Henry M. Morris
2004-07-28

성경과 생물학

 (The Bible and/or Biology)


      생물학(biology)이라는 용어는 bios(생명)와 logos(말씀)의 두 그리이스 단어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명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키며, 성경(Bible)은 많은 증거와 그 자체의 주장에 의해 확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성경은 생물학을 비롯하여 사실에 근거한 과학(factual science)을 연구할 것을 격려(실제로는 명령)하고 있다. 사람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신성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의 본성과 기능을 알아야만 했으므로, 소위 이 '지배명령(dominion mandate)'은 실제로는 "과학을 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생물학의 확립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동물과 식물 자원을 보호하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과 생물학 사이에는 어떠한 충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 생물학'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 입장은 특별창조가 관여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순전히 자연주의적인 입장으로 모든 형태의 생명의 기원과 발달 역사를 설명하려는 시도로서, 과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본다면 성경은 진화론적 입장의 생물학에는 반대한다.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 10번씩이나 오직 '종류대로' 여러 형태의 생명이 생겨났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창세기 1:11,12,21,24,25). 물론 같은 종류일지라도 정확히 똑같은 두 개의 개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변이(variation)'의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된 종 내에서의 그러한 '수평적(horizontal)' 재조합은 과학연구의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성경과 충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생물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많은 기독교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성경 말씀을 큰 어려움 없이 인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창조과학연구소(ICR)에는 적어도 30명의 생명과학 전문가들이 있으며, 창조연구회(CRS)와 다른 창조론 모임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나 다른 생명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진화론에 헌신되어 있다. 이것은 특히 생물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사실이다. 최근의 미국 학술원 회원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과학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주도적인 과학자들이 무신론을 신봉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생물학자들이 특히 많다고 한다.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들은 하나님과 불멸을 믿는 비율이 각각 7.5%인데 반해, 생물학자들은 그 비율이 가장 낮아 겨우 5.5%만이 하나님을, 7.1%만이 불멸을 믿고 있었다."1

또한 사실상 하나님을 믿는 적은 수의 사람들 중 대부분도 유신론적 진화론자이지 창조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화론에 헌신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과학적 증거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 기독교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다윈조차 성경의 신적 형벌교리를 거부했기 때문에 진화론자와 회의론자가 되었다.2


실제적으로 볼 때에는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기껏해야 매우 빈약할 뿐이다. 역사상 진짜로 진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가장 간단한 생명체에서까지 발견되는 엄청난 복잡성은 진화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도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모든 피조물의 생식과정을 관할하는 유전학적 코드도 너무나 복잡하여 지적인 설계가 있었음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그들은 이것을 자연선택으로 돌리고 있다. 다음의 진술에 주목해 보자.

"유전학적 코드는 단순히 무작위적인 결과가 아니라, 초기의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영국의 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 코드는 수 십억의 수 십억 배에 달하는 가능한 코드 중 최선의 것이라는 것이다. 대략 1020 개의 코드가 가능한데 자연에서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35억년 이전에 표준으로 채택된 것이다." 3

지적인 존재가 관여했다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효율적인 코드가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은 극히 희박하다. 자연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이 틀림없다." 4

따라서 자연선택은 종의 기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는 놀라운 코드의 기원에서조차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수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은 그러한 놀라운 특질을 성취하는데 있어 자연선택에만 의존하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두 명의 매우 뛰어난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동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주된 의문들은 신다윈주의를 통해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한 질문들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어떻게 새로운 구조가 진화를 통해 일어나는가?' '수많은 환경의 변화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화석기록으로 보건대 진화에 있어 왜 균형상태(stasis)가 그토록 우세한가?' '어떻게 한 그룹의 기관이나 한 분자세트가 서로로부터 진화되었는가?" 5

이러한 질문들은 창조론자들이 수년간 진화론자들에게 제기해 온 질문과 동일한 것인데, 명백하면서도 진실된 해답은 성경적 창조에 있다.


물론 이러한 해답을 진화론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히 그랬을 것이다 (just-so stories)라고만 설명하거나, 또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불가사의한 시나리오를 고안해 낸다.

"이런 가상적인 개념은 신다윈주의자들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공학자나 물리학자, 수학자로 출발한 과학자들로서 생물학이 '쉽다'는 것을 알았다." 6

위에서 언급한 공저자들(coauthors)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점진적 진화라는 신다윈주의자들의 개념에 완강히 반대하며, 또한 굴드(Gould)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해답이 가이아(Gaia)라는, 지구자체-소위 어머니로서의 지구(Mother Earth)-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고대 이교도들의 생각에 있다고 믿는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신다윈주의자이며,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역시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신다윈주의자이다. 윌슨(사회생물학의 주요 주창자로 잘 알려져 있다)의 최근 책을 리뷰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했다.

"....책의 몇 군데 구절에서, 복잡성의 문제가 모든 과학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임을 암시하고 있다." 7

그의 동료 다윈주의자인 도킨스는 그러한 문제는 모두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그의 '눈먼 시계공' 이론에 의해 여하튼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선택을 통해 인간의 두뇌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던 윌슨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뇌(brain)의 진화는 300만년 이상에 걸쳐 우리의 유인원 조상과 호모 사피엔스(약 100만년 전에 나타난)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이상한 특징은 인간의 두뇌의 용적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크기보다 훨씬 컸다는 점이다. 더욱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조금이라도 진화론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모든 문명의 최초의 기록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에 반해, 일단 뇌가 형성되고 난 이후에는 단지 수천년 안에 엄청난 문명의 분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8

물론 인간의 뇌와 문명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위의 어떠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태초에 신에 의한 창조라는 단순한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대신,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을 설명하는데 있어 신다윈주의, 단속평형설, 가이아 이론의 상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느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제이 굴드(Steven Jay Gould, 단속평형설의 주창자)는 비록 듀안 기쉬(Duane Gish)와 같은 창조과학자와의 토론은 거절했지만, 이러한 주제에 대해 도킨스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토론에는 참여하였다. 최근에는 인간심리학이 다윈적인 선택의 결과인지, 아니면 단속평형의 결과인지에 대한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진화론적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와의 논쟁을 널리 공표하기도 했다. 과학 저술가인 브룩스의 다음 논평은 매혹적이며 적절하다.

"굴드는 이제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단순하면서도 쓸모 없는 오래된 논쟁의 필연적인 부산물과도 같다. 그것은 지적으로 우월해지려는 것 외에 어떠한 명백한 기능도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많은 상상과 논쟁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양측 모두의 견해에 대한 증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9

이 특별한 논쟁은 진화심리학에 관한 것이지만 동일한 비평이 진화생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어느 쪽도 관찰에 의한 증거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다윈주의에 대해 진화학자 도버(G. A. Dov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화론 연구는 목적론적인 컴퓨터 시뮬레이션,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 그리고 잘못 기획된 확률놀음에서 제거되어 실험실과 현장으로 되돌려보내져야 한다...... 아직 배워야 할 여지가 많이 있으므로 신다윈주의자의 통합(neo-Darwinist synthesis)은 눈먼 시계공 이론에 의해 끝까지 방어되어서는 안 된다." 10

현장 연구를 통해 단속평형론자들은 화석기록에 보편적인 진화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또 현재 현장이나 실험실에서 결코 목도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석의 기록은 진화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일반적인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화석은 점진주의(gradualism)나 단속주의(punctuationism) 모두에 대해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화석의 발견은 단순한 진화계통수를 만들려는 우리의 시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요 시대의 화석은 대개 중간화석이 아닌 많은 다른 그룹의 특징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주 화석그룹은 단순히 선형적(linear)이거나 진행적(progressive)인 방식으로 조합되지 않는다. 새로운 특징들은 종종 다른 시대의 다른 그룹으로부터 '취해서 붙여 놓은(cut and paste)' 것에 지나지 않는다." 11

암석에 남겨진 수십억 개의 화석 중 전이형태의 화석은 없을 뿐더러, 명백한 진화론적인 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고학에 '닭이냐 달걀이냐 (chicken and egg)'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주요 특징들에 대한 독립적인 진화가 일반적이라면, 계통발생학은 어떻게 인식될 것인가?" 12


생물학적 기원의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출발선은 바로 성경의 기록이 모든 실제적인 과학적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이며, 진화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References

1. Edward J. Larson and Larry Witham, 'Leading Scientists Still Reject God,' Nature (vol. 394, July 23, 1998), p. 313.

2. Charles Darwin, Autobiography, reprinted in The Voyage of Charles Darwin, edited by Christopher Rawlings (BBS, 1978). See 'A Scientist's Thought on Religion.' New Scientist (vol. 158, April 18, 1998), p. 15.

3. Jonathan Knight, 'Top Translator,' New Scientist (vol. 158, April 18, 1998), p. 15.

4. Ibid.

5. Lynn Margulis and Dorion Sagan, Slanted Truths: Essays on Gaia, Symbiosis, and Evolution (New York: Springer-Verlag, 1997), p. 100.

6. Op. cit., p. 270.

7. Charles C. Gillispie, 'E. O. Wilson's Consilience: A Noble Unifying Vision, Grandly Expressed,' Review of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by Edward O. Wilson (New York: Alfred Knoph, 1998), 322pp. In American Scientist (vol. 86, May/June 1998), p. 282.

8. Op. cit., p. 281.

9. Martin Brookes, 'May the Best Man Win,' New Scientist (vol. 158, April 11, 1998), p. 51.

10. G. A. Dover (1998), cited in Margulis and Sagan, op. cit., p. 271.

11. Neil Shubin, 'Evolutionary Cut and Paste,' Nature (vol. 394, July 2, 1998), p. 12.

12. Op. cit., p. 1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12.htm

출처 - ICR, Impact No. 312, 199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51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8

놀라운 7일 사이클

(The Amazing 7-Day Cycle)

Kenneth Westby 


과학이 밝혀내고 있다.....

사람 몸은 놀랍게도 7일이라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현대과학은 밝혀내고 있다.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안식하면, 사람 몸과 마음은 완전히 최상의 상태로 재출발 할 수 있지만, 이를 어기고 10일까지 일을 한다면 그 다음에는 이틀을 쉬어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0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의학이 밝혀낸 결과이다. 이러한 주기는 결코 사회적인데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생체 깊숙한 내부적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Top-down 이 아니고 Bottom-up 현상인 것이다. 즉 사람 안의 여러 미세조직들이 다 미세조직 차원에서 7일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몸의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critsol 호르몬, 적혈구, 혈압, 심장박동, 소변의 양과 성분, 면역체계, 심장박동.. 등등이 모두 7일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말라리아 환자나, 신장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 등의 임상적 상태가 신비한 7일 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료계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놀라운 7일 주기는 사람뿐만이 아니고, 동물 식물 등에서도 일관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관찰된다는 사실이 최근 속속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어 쥐, face fly 등에서 이러한 리듬이 입증된바 있다. 최근에는 alga 라는 거대한 단세포 조류(藻類) 식물을 실험한 결과 이러한 단순한 생물조차도 역시 7일 리듬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생명체들이 7일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15년간 수퍼컴퓨터가 발달하면서 과학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학계는 보고하고 있다. '시간생물학(chronobiology)' 이라는 분야는 생물체에 존재하는 리듬을 밝혀내는 학문으로써, 여러 기관들에서 (NASA, 여러 주요 대학, 정부 NIH 연구소 등)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특히 Franz Halberg 교수는 이 분야의 개척자이고 많은 주요한 논문을 발표하였다.그의 웹 자료를 보면 그가 과학자로서 어떻게 국제 사회로부터 그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7일 안식일 제도는 당연한 것도 아니요, 우연한 것도 아님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Jeremy Campbell은 (Winston Churchill's Afternoon Nap) 7 일 안식일이 오직 기독교와 유대교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민족들은 3일장, 5일장, 10일장과 같이 시장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생활리듬을 삼아 왔다. 오직 기독교 국가들만 7일 안식일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프랑스가 '혁명'을 한 후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로 안식일 제도를 없앴었다. 그들은 10일 안식일제를 1793년 10월 법으로 정하고, 교회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어기면 호된 벌금과 형무소 처벌로 다스렸다. 그러나 10일 제도는 1805 년에 실패로 돌아갔고, 7일 안식일제는 다시 복원되었다.

스탈린도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국내 생산을 늘리기 위해), 1929년에 10일 안식일제를 도입하였으나, 오히려 생산성이 거꾸로 내려가는 바람에 1940년에 7일 안식일 제도로 되돌아간 적이 있다. 이제는 전 세계가 7일 안식일제를 지키고 있다!

 

*참조 : Seven-day human biological rhythms: An expedition in search of their origin, synchronization, functional advantage, adaptive value and clinical relevance.

https://pubmed.ncbi.nlm.nih.gov/27830946/

페일리의 시계가 생물체 내에서 발견되었다. 

https://creation.kr/Plants/?idx=13735242&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oocities.org/heartland/pines/4655/daycycle.html

미디어위원회
2004-07-28

NASA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냈는가? 

(Has NASA Discovered a “Missing Day”?)

Bert Thomson 


Q. 태양이 ”멈추었다” 라는 여호수아 이야기에 대한 근거가 나돌고 있다. 지구와 태양의 궤도를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산하던 NASA의 과학자들이 인류 역사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이것을 추적해본 결과, NASA의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데 사용한 컴퓨터가 성경의 기록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것은 정말일까?


A. 위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면 심심치않게 (통상 교회의 주보나 종교 출판물에) 실제 사건인양 나돌곤 한다. 이 정보의 최초 발언자는 신실한 의도에서 출발하였다는 것과, 불신자의 화살과 돌팔매로부터 성경을 지키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여호수아의 '긴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조사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밝혀졌다.


어쨌거나 엇비슷한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지도 이럭저럭 반세기가 되었다. 해리 림머 (Harry Rimmer)는 1936년에 처음 출판된 자신의 저서 ”과학과 성경의 조화 (Harmoney of Science and Scripture)” 의 마지막 장(章) 전부를 ”현대과학과 여호수아의 긴 하루”에 관한 내용을 위하여 할애하였다. 림머는 이 장에서 하나님이 태양의 운행을 멈추게 하였다는 (여호수아 10장)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기적적인 그 하루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즉, ”그 날의 기록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과학은 증언할 것이다. 시간이 엄연히 존속하는 이상, 그 날의 기록은 남는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한 저명한 과학자가 있다. 나는 이름이 알려진 두 사람의 증언을 여기서 인용하고자 한다.” (1936, p280).


그리고 림마 박사는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볼 경(Sir Edwin Ball)과 예일 대학교의 토튼(C.A. Totten) 교수를 소개했다. 그는 ”태양계의 시간 체계에서 24 시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볼 경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림마는 이어서 이렇게 묻는다. ”그 24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이 불가사의한 시간이 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p 280). 바로 다음 단락에서 그는,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확실히 있다. 현직에 있는 과학자가 증언한 내용이다. 예일 대학교의 토튼 교수는 1890에 출판한 책에서 이 사건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p 281)라는 말을 인용한 다음, 림마는 토튼의 책의 '요약'이라고 하며 제시한 글에서, 토튼이 '사라진' 날을 찾아낸 정확한 경로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림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호수아가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달과 날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7월 22일 화요일이라고 추정하였다. (p 266)!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이 해묵은 이야기부터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새로운 이야기가 옛날의 이야기를 분명히 각색해 내놓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을 인용한다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따옴표로 표시한 인용 구절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림마 박사는 1890년에 토튼 교수가 저술하였다는 책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림마 박사는 자기 책의 한 장(章)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룬 주제임을 고려해보면, 이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셋째로, 림마 박사는 볼 경과 토튼 교수의 책이라고 하면서, 그 책들에 관한 서지학적 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 학자들의 책들이 림마 박사의 논거일진대, 당연히 신빙성을 확실히 해야할 필요가 있을 텐데, 그의 모호한 주장이 여기서도 또 다시 비상식적이 아닐 수 없다.

넷째로, 볼 경이나 토튼 교수의 주장을 앞세운 림마 박사의 주장은 그 신빙성을 확실히 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한 예로, 버나드 람 (Bernard Ramm)은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에서 림마의 주장과 토튼의 주장에 대한 림마의 해설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면서, 그들이 제시하였다는 '증거'에 대해 아주 정선(精選)한 어휘로 점잖게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나는 이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쿨프 박사 (Dr. Kulp)는 예일 대학교에서는 토튼의 주장을, 그리고 영국에서는 에드윈 볼 경의 이론을 자세히 조사했으나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라고 했다. (1954, pp 109,117)


림마 박사는 이 이야기를 말할 때 그 진실성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문서적 배경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 이야기들의 발원지를 찾아내기란 떠돌고 있는 경로를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일단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믿을 만한 인사들과 관련된 사실들에 의해서 '보강되면', 선의의 사람들은 철저한 조사를 해보기도 전에 그것을 진실로 수용하기 쉽다. 일단 수용되고 나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하는 데 쓰일 좋은 합리적 방패로 삼으려 한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볼과 토튼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앞부분에서 NASA의 이야기에 관한 질문에서도 같은 대답 패턴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이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림마 박사가 말하던 그 이야기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모두 크게 흥분했었다. 그래서 성경의 진실성을 '간증'하는 과학을 고대해 마지않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그의 말을 수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그 이야기는 곧 잊혀지고, 거들떠보는 이 없는 가운데 역사유물 창고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그 상태로 처박혀있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 순간까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틀림없이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에 더 호소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얼마쯤은 각색하여, (관련 있는 개개인들과 회사들, 그리고 도시들의) 이름을 연관시켜놓고는, 상당부분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신임이 두터운 유명한 정부기관 (NASA)과 결부시켰다. 그 이야기의 '배경설명'은 언뜻 보기에 완전하리 만치 그럴싸하게 잘 짜여져서 의심하거나 미심쩍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NASA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우주선의 탄도궤적을 계산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태양, 달, 그리고 별들의 위치를 추적하고는, 더 나아가 1000년 전의 것도 추적하고 있었다. 정부기관의 정교한 컴퓨터들이 입력된 데이터를 계산하다가, 전혀 예상 밖으로 갑자기 삐걱거리며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달려온 정비기술자들은 아무런 기계적 하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여기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즉, 컴퓨터들은 하루에 해당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알려졌다. 어느 누구도 컴퓨터가 왜 그렇게 멈춰야 했었던가, 또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학자 팀에 소속했던 어느 과학자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특히 하나님이 하루 동안, 대강 그 정도의 시간 동안, 태양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 떠올렸다.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나머지 NASA의 과학자들은 그 따위 '정보'를 가지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과학자는 여호수아 10장을 펴들고 성경을 읽었다. 그런 다음 정비기술자들이 컴퓨터의 입력 데이터 안에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입력하자 컴퓨터는 거의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컴퓨터가 또 다시 멈췄다. 컴퓨터가 찾아낸 잃어버린 시간은 만 하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컴퓨터가 찾아냈던 잃어버린 시간은 23시간 하고 20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40분이 모자랐었다는 것이다. 그 때, 성경을 참조해보자고 건의하였던 그 과학자는 이 수수께끼를 다시 한번 성경 안에서 찾아보자고 제의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내용 중에 뭔가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열왕기하 20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 (Hezekiah) 왕이, 병이 나을 것이며 장수를 약속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약속의 징표를 요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해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해그림자의 10도 후퇴는 정확하게 40분에 해당한다고 그 과학자는 계산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이 컴퓨터가 필요한 24시간을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컴퓨터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 채웠다는 것이다!


위 이야기는 여러 정보통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커티스 엔진 회사 (Curtis Engine Company)의 사장 해롤드 힐 (Mr. Harold Hill) 씨는 그 정보가 정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는 NASA 시험장이 위치하고 있는 도시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낸 곳이 메릴랜드의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시험장이라고 했다. 그밖에 다른 '사실들'도 알려지고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힐 씨 자신이 어린 시절 주일학교엘 다녔다던 그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NASA의 컴퓨터가 여호수아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아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리라고 하는 말은 재미있다. 다른 설명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대개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즉, 힐 씨는 NASA에서 그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그냥 그 곳에 참석한 것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혼란스럽게도, 어떤 이야기 속에는 힐 씨의 이름을 전혀 거론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가 그 일에 아무런 참견도 한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했다. 19870년 4월에 Bible-Science Newsletter 지에 이 이야기가 출판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다는 커티스 엔진 회사의 힐 씨 앞으로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그 편지들은 우체국의 '수취인 불명'이라는 딱지를 달고 죄다 되돌아왔다. Bible-Science Newsletter 1989년 7월호에 실린 기사에 1970년 4월 호의 출판 이후 몇몇 독자들이 마침내 힐 씨로부터 회신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인즉슨, 힐 씨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처음 쓰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힐 씨와 연결이 된 적이 있다는 어느 독자는, 힐 씨가 자신이 그 이야기를 쓰지 않았음은 물론, 그 정보를 들은 기억조차 없다.” (Bartz, 1989, p 12)고 했다.


1989년도 7월판 Bible-Science Newsletter는 이런 기사내용이 실었다. 즉, 볼튼 데이비다이샤 (Bolton Davidheiser) 박사가 메릴랜드 주 그린벨트에 있는 NASA 사무소에 편지를 보내어 이 이야기가 일어났다는 곳이 어딘 지를 물었다고 한다. NASA는 해롤드 힐 씨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또 '잃어버린 하루' 이야기를 전혀 확증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했다.


그 NASA의 편지 결론 단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록 우리는 우주선의 궤도를 확정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사용하여 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지만, 그린벨트의 우리 기관에서 일하는 그 어떤 우주비행사나 과학자도 힐 씨와 관련이 있는 그 ”잃어버린 하루” 문제에 개입된 적이 없다.” (p12). 결국 이 이야기의 순수성을 확증하려하였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이야기에서 거론된 사실들은 문제의 실질적인 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호수아 10절의 '잃어버린' 하루를 찾는 일에 개입돼 있을 법한 사람들은 NASA에서 있었다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컴퓨터가 잃어버린 하루를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다” 라고 하는 주장만 해도 믿을만한 사람들은 죄다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여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허위라는 것이다. 이 결론이 사실일진대 더 이상 이 이야기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상시적인 안목으로 조금만 깊이 조사해보면 전혀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상케 할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 있으며, 지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하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진 검”을 들고 지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References

1. Bartz, Paul (1989), ”Qustions and Answeres”, Bible-Science Newsletter, 27(7):12

2. Ramm, Bernard (1954), The Christian View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3. Rimmer, harry (1936),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Grand Rapids, MI: Eerdman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has-nasa-discovered-a-missing-day

출처 - Reason & Revelation, 11(5):17–19, May 1991.

한국창조과학회
2004-07-28

여호수아와 히스기야의 긴 날들은 설명될 수 있을까?


     성경은 여호수아 10장에서 태양과 시간이 멈췄던 하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아모리 족과 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전투 중에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이 멈추기를 기도했다. 소임을 다 끝내려면 덤으로 햇빛이 더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그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수10:13). 아모리 족이 경배해 마지않던 하늘의 태양과 달이 오히려 자기네와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기적은 없었다는 의견. 다만 시적 표현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도 열심히 싸웠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을 이어서 싸운 것 같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낮의 열기가 식어 오후 내내 쉬지 않고 싸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 그러나 더위로부터의 해방은 이스라엘 민족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적에게도 골고루 해당되었을 것이다.

.햇빛을 가린 일은 일식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 이 또한 일식은 몇 분 정도를 헤아리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해석들은 예외 없이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여호수아 10:14), 그리고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하박국 3:11)라는 성경의 묘사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그 특별한 날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모든 기적이 다 그렇지만, 기적을 과학적인 이론으로 사색한다는 것은 허황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빛을 굴절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지구의 자전을 느리게 운행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쩌면 전체 우주를 (모두 동일한 정도로) 멈추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호수아한테는 시간이 멈추었고, 히스기야한테는 시간이 후진하였다. (열왕기하 20:9-11). 하나님은 이 사건을 히스기야의 건강회복을 약속하는 특별한 징표로 사용하셨다. 태양의 그림자가 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마 해시계로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을 후퇴하는 시간에 해당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태양이 서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동쪽으로 움직였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도 결론은 동일하다. 즉, 그런 기적은 과학적인 설명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거주자를 태운 채로 잠시 지구의 자전을 역행시켰을지 모른다. 또한 어쩌면 히스기야의 하루는 전 세계적인 규모가 아니고, 한 지방에만 있었던 기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후자의 의견은 역대하 32:31절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라는 구절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여호수아와 히스기야는 둘 다 하나님한테 저 하늘이 움직이게 해주십사 하는 고매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을 주셨다. 창조자의 말씀의 권능으로 우주공간에 자리를 잡게 된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인 다음에야 그것들도 당연히 창조주의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조 : 여호수아의 긴낮과 징조(태양아 멈추어라...달아 그리할지어다), 김명현 박사

https://www.youtube.com/watch?v=mm71uvGqXmw

아하스의 해시계 그림자 표적(창세기 1장 강해), 김명현 박사

https://www.youtube.com/watch?v=DL9cS6XOmb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hristiananswers.net/q-eden/edn-c016.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1

참고 : 2323|1412|1413|629|2746|1805|528|2545|2515|2458|522

미디어위원회
2004-07-28

창세기에서 찾아본 올바른 식습관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 중 많은 것들이 암이나 변비, 또는 관상동맥계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물질로 비난을 받고 있고 최근 수 년간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건강식품에 대한 지식의 범람으로 혼란이 일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브유의 경우, 처음에는 동맥을 막는 아주 나쁜 음식으로 인식되었지만 그후 심장질환을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형태의 유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처럼 많은 불확실한 이론 가운데, 하나의 명백하고 지속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식습관이다.

많은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식물성 급원의 천연식품이나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자연식품을 섭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건강상태를 제공해 준다고 보고되고 있다.

규칙적인 운동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형태의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한 생활을 보장하며 건강문제에 관한 위험도를 낮추어 준다는데 이견을 제시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즉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의 많은 부분은 감자나 쌀 또는 다른 곡류식품들의 도정을 적게 한 전분질 식품으로 구성되어져야 하고, 신선한 과일, 야채, 견과류 등도 그 음식물들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또 서구 여러 나라의 식습관과는 상반되게 우유나 계란, 육류같은 단백질 식품의 소비는 적게 이루어져야 하며, 지방의 섭취 역시 매일의 식품을 통한 에너지 섭취 중 가장 낮은 비율을 나타내야 한다.
 

실제적인 예 

일본과 같이 쌀, 야채, 생선 등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심장병 발병율이 아주 낮다. 그러나 이런 지역 사람들이 서구의 식습관과 같이 가공식품이나 고지방식품을 많이 섭취하게 되면 심장병에 걸리는 비율이 높아지게 되고 서구의 나라들과 비슷한 경향들 보이게 된다. 또 견과류나 종자류, 과일, 뿌리채소 등을 주로 먹으면서 가끔씩 생선이나 육류를 섞어서 섭취하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경우, 오늘날 튀긴 스넥류나 패스트푸드, 청량음료 등을 자주 섭취하게 됨에 따라 과거에는 없었던 당뇨병이나 관상동맥계 심장질환과 같은 질병들이 위험한 수준으로 발생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한 유전적인 요인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안식일 재림파와 같은 서구의 채식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이들에게 심장병이나 암 등의 발병율은 훨씬 낮고 평균수명도 다른 비교군보다 더 길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논리적 근거 

이와 같은 현상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처음 의도하셨던 계획을 고려해 보면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 29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 고 계신다. 이담과 이브는 아마도 충분한 과일과 야채류, 그리고 견과류 등의 많은 식물성 식품들을 즐겼을는지도 모른다.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 인류가 육류를 섭취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지나친 지방섭취라는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끝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창세기9장 3절과 같이 명령하셨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우리의 몸이 저지방과 채식주의적 식습관에 맞게 고안되어 있다는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류의 섭취를 허용하셨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하나의 유력한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아의 홍수로 인한 식물의 소멸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어떤 특정 식물이나 그것의 종자를 방주에 실으라고 요구하신 기록은 없으며, 또한 홍수 기간 동안 호흡을 하는 동물과는 달리 반드시 식물만을 살릴 의도도 없으셨을 것이다. 즉 홍수로 인하여 널리 분포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식물들이 소멸되었다.

이들 중에는 아마 건강을 위해 필요한 적합한 형태의 단백질과 다른 영양소들을 많이 제공해 주었던 식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요즘은 육류를 섭취하지 않고도 적절한 양과 형태의 단백질, 철분, 비타민 등을 섭취할 수 있다. 우유나 계란마저 섭취하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들의 경우, 이들이 적절한 종류의 식물성 단백질로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모른다면 적어도 이론적으로 영양결핍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영양지식과 충분한 영양학적 '노하우'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 이들이 영양결핍에 걸리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하에서 동물성 식품을 자유로이 섭취하는 것은 영양결핍이라는 문제에 대한 부담을 크게 줄여주게 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 

만약 위의 추측들이 사실이라면 노아의 홍수로 인해 많은 양질의 식물성 급원들이 소멸된 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육류의 섭취를 허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이며, 예비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노아의 홍수 이전 육류소비에 관한 금지명령을 지켰던 사람들은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한 상태를 지녔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곳인 우리의 몸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잘 알고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6:19).

자신을 학대하거나 흡연으로 건강장애를 초래하는 것을 언잖게 생각하는 많은 기독교인들도 운동은 거의 하지 않고 지나치게 가공된 고지방식품을 과식하거나 때때로 나쁜 건강상태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건전하고 바람직한 식습관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해답은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생활양식이 에덴동산에서의 그것과 닮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보다 더 나은 건강상태를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우상숭배시하여 열광적으로 체육관을 쫓아다닌다거나, 광천수를 마시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을 지연시키고자 노력하는 무리들에게 가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담과 이브의 후손인 우리 모두는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저주하에 있고 따라서 일시적인 우리의 육체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들만이 요한계시록 22:3절에서와 같은 더 이상의 저주가 없는 영원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과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계시록 22:3).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린도전서 15:54)

(Paul Emerson, Ceration ex nihilo Vol 18 No. 2 pp.10~ 13) 

* 역자 주: 최근 사이콜러지 투데이에 실린 연구결과에 의하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과일이나 야채를 적게 먹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특히 포화지방산)가 높은 사람은 심장병이나 암에 걸릴 위험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우울증, 정서장애 등을 보이고 적개심과 공격성이 높다고 한다. 또 과일류에 많이 들어 있는 포도당을 적절히 섭취한 학생은 그렇지 못했던 학생에 비해 수업성취도가 높았고, 매일 육류를 먹던 사람이 아침식사를 곡류로 바꾼 후 우울증이 좋아지고 공격성이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최근 현대판 불로초로 알려진 항산화제는 과일, 채소, 차, 토마토, 그리고 우수한 식물성단백질 급원인 콩에 많이 들어 있으며, 특히 콩단백질은 지방합성에 관여하는 효소의 생성을 억제함으로 비만을 방지하는 효과가 우유단백질보다 더 크다고 보고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섭취하는 고추는 뇌에서 엔돌핀이 많이 나오게 해 진통효과가 있고, 마늘은 혈중 콜레스테콜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여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쥐의 경우 뇌세포의 재생을 촉진시켜 주게 된다.

 


번역 - 배지현

출처 - 창조지, 제 98호 [1996.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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