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연대문제

미디어위원회
2007-12-14

현대의 변증가 

(The Modern Apologist)

by John D. Morris, Ph.D.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 믿음에 대한 체계적인 방어)은 오늘날 인기있는 학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 그것을 믿는 이유를 알고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명령받았다.(베드로전서 3:15). 정말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개념을 받아들이고 알고 있다면 멋진 일이다.

오늘날 몇몇 기독교 대학들은 변증학으로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 라디오 프로그램들과 일부 기독교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자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변증학(변증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언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역자들도 있고, 이단과 사교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역자들도 있다. 일부는 중고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고, 일부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믿음 위에 강하게 서도록 애쓰시고 수고하시는 그 분들의 수고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헌신자들은 매우 필요하다.

변증학을 가르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무오성(biblical inerrancy)을 믿으라고 주장한다. ICR도 이것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심지어 문자적으로 젊은 지구 창조를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변증학 사역자들은 진화론의 어떤 형태나 오래된 지구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 ”지구의 나이(age of the earth)에 대해서는 나의 생각을 정립하지 못했다. 또는 나는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러한 대답은 ”한 주의 3일은 젊은 지구를 믿고, 다른 3일은 오래된 지구를 믿고, 하루는 무엇을 믿을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자주 '변증론”을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받곤 한다. 너무도 자주 그 프로그램의 담당자들이 창조론과 관련하여 성경을 방어하는 것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에 현대의 과학 이론들과 비교하여 그가 창조론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적하곤 했다. 나는 과학적 증거들은 젊은 지구를 지지한다고 확신한다. 성경은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다. 왜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경적 진리를 지지하는 증거들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오히려 빅뱅 우주론(Big Bang cosmology), 점진론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몇 년 전, 나는 수십억 년의 오래된 지구와 빅뱅을 옹호하는 휴 로스(Hugh Ross)와 전국적인 기독교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에서 토론을 하였다. 나는 빅뱅 이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과학적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점은 성경적 증거들에 맞추었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진행자의 말로 끝이 났다. ”모리스는 더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로스는 더 과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군요. 저는 로스 편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감히 기독교 방송의 진행자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자신을 성경적 변증론자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칼 세이건(Carl Sagan)과 같은 무신론자들의 말에 의지해야만 하는가? 설사 젊은 지구를 가리키는 증거들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포기하기 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될 때까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류되어야한다고 말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현대의 변증학이 하고 있는 노력은 자주 펜스 위에 앉아서 형세를 관망하는 경기가 되곤 한다. 그리고 진화론과 오래된 연대에 근거하여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과 타당성에 문제가 제기될 때, 너무도 자주 회피하여 버린다. 하지만 성경은 이 점에서 있어서는 분명하다. 그리고 창조와 대홍수, 그리고 젊은 지구에 관한 과학적 증거들은 압도적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마도 적절할 것이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요한계시록 3:15-16)

* Dr. Morris is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551/

출처 - ICR, BTG, 2007. 12. 1.

미디어위원회
2007-05-11

잊혀진 대주교, 제임스 어셔. 

(The forgotten archbishop)

어셔 주교에 대한 휴 로스와 스테판 굴드의 대조되는 평가>

Larry Pierce 


     지구의 창조된 시점에 관한 연대 문제에 있어서,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대주교 보다 더 많은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셔는 1650년대에 지구가 BC 4004년 10월 23일에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제시했고, 이 연대는 20세기 중반까지 많은 성경들의 관주로서 가장자리에 표기되곤 하였다. 그렇다면 어셔는 현명한 사람이었는가, 허풍쟁이였는가, 아니면 단지 고지식한 사람이었는가? 그의 연대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하여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예와 명성을 겸비했던 학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는 1581년에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그는 교회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주님께서는 그의 결심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는 18세에 그 당시 세계의 유수한 대학 중의 하나였던 더블린 대학교에 입학했다. 20세에 그는 더블린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부제와 사제(a deacon and priest)로 임명되었다. 그는 26세의 약관에 극히 도달하기 어려운 영예인 더블린 대학의 신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그는 1607년부터 1621년까지 교수로 봉직했고, 두 번이나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의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일찍이 학생 때부터 역사 과목에 뛰어났고, 20세부터 다음 20년 동안 그의 손에 닿는 모든 역사책들을 읽었다. 그는 교회 역사에도 뛰어났고, 사도시대 이후의 아일랜드 교회와 영국 교회를 다룬 방대하고 권위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저술을 했다.

그는 1625년에 아일랜드의 영국국교회의 최고 고위직인 아르마 대주교(Archbishop of Armagh)에 임명되었다. 셈족 언어(Semitic languages)의 전문가였던 그는, 구약성경의 옛 히브리어 본문의 신뢰성을 논증했고, 아시아에서의 기독교와 성경과 관련된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광범위한 저술활동을 했다.

1628년에, 영국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그를 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추밀원(Privy Council)에 임명했다. 그는 제임스 왕의 후계자인 찰스 1세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란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반란을 이끌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어셔를 매우 존경했다. 어셔가 죽었을 때, 크롬웰은 그를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고,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묻히도록 했다.


유일한 믿을 만한 출처의 문서

어셔의 많은 계획들 중의 하나는, 창조 시점부터 AD 70년까지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망라한 라틴어로 된 세계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었다. 그는 1650년에 이 1600페이지 짜리의 두터운 책을 라틴어로 출판했다. 영문 번역판은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658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는 재출판 되어왔고, 이제는 Answers in Genesis bookstore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연구의 첫 권의 내용은 온라인(online)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창조 시점부터 BC 176년까지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그 저술을 준비하면서, 어셔는 먼저 성경(the Bible)이 인류 역사의 기간들을 포함하는 연대기적 정보의 유일하고 믿을만한 출처가 되는 문서라는 가정을 하였다. 사실 페르시아 제국 이전의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역사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추정과 설화에 의존하고 있었다. 세속 역사의 연대들은 메데-페르시아 제국의이건국(c. 540 BC)과 더불어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전의 사건들에 대하여, 어셔는 그의 역사적 시간 틀을 확립하기 위해서 오직 성경 자료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믿을 만한 연대로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연대를 선택하였고, 그 날짜를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성경적 연대를 계산했다. 그러므로 그 날짜로부터 거꾸로 계산을 해 나가서, 그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이 창조일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연대를 계산하게 되었나?

성경 어느 곳에도 이 날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대인과 많은 다른 고대 민족들에서는 가을에 새해가 시작되었으므로, 어셔는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가 가을에 해당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천문표를 근거로 하여, 그는 추분(autumnal equinox,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후의 첫 번째 일요일을 골랐다.

우리는 모두 추분이 10월 23일이 아니라, 9월 21일경에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 달력의 조정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연구에서 어셔는 고대 유대인과 이집트 사람들은 태음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그들은 일년을 한 달이 30일인 열 두 달이 되게 했다. 매년의 마지막에는 5일을 더했고, 4년마다는 6일을 더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1년은 365.25일이기 때문에, 365일로 된 일년은 조금 짧았고, 366일로 된 일년은 조금 길었다. 달력을 계절에 맞추기 위해서는 날 수를 빼주어야만 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달력을 개량했을 때, 그는 12개월의 길이가 서로 다른,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을 채택했다. 1752년 9월 2일에, 계절과 달력을 일치시키기 위해 영국 달력에서 11일을 빼었다. 1800년과 1900년에도 하루씩을 빼었다. 이 해들은 통상 윤년이지만 달력을 맞추기 위해 평년으로 만들었다.

줄리어스 시저의 개량 전에는 달력의 날 수에 대한 수정이 없었다. 시저의 시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창조 때까지 4,000년 동안, 계절이 제 때에 해당되도록 하기 위하여는 32일을 빼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조정을 한 결과, 어셔는 9월 21일이 아니라, 10월 23일이라는 날짜를 얻었다.

자 그러면 그는 어떻게 BC 4004년이라는 연대를 얻게 되었는가?

대답 : 그는 창세기 5장 11장의 연대기와, 이제 곧 살펴보겠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사용하여 계산을 하였다. 우리는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하여 연대기를 BC 588년의 예루살렘 함락에 일치시킬 것이다. 상세한 계산은 책의 원문에서 100페이지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창세기 5장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연대를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어셔가 했던 것과 같은 모든 중간 세부사항을 거치지 않고도, 같은 계산을 가능케 하는 몇몇 긴 기간들의 연대를 제공하고 있다.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둥들

따라서 창조일은 = 584 + 3421 - 1 = BC 4004 년
이제 당신은 어셔가 어떻게 계산을 하였는지에 관한 대략적인 개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어셔는 세속의 역사가 아닌 성경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함락을 BC 586년이 아닌, BC 588년으로 본 이유이다. 그는 여호야김의 통치 4년째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첫 해에 해당한다는 점에 유의했다 (예레미아 25:1). 유다 왕들의 목록을 통해서, 그는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아비가 죽기 2년 전인 BC 607년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느부갓네살의 아비는 BC 605년에 죽었고, 많은 역사가들은 이 때가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사실 이때 그는 이미 2년 동안 총독으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그가 총독이 되었던 해를 왕의 통치의 첫 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경에서 시작하여, 어셔는 세속 역사의 이러한 잘못을 정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셔는 옳았는가?

어셔는 허풍쟁이도, 고지식하지도 않았으며, 사실 당대의 가장 박식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계산에 사용한 가정들을 이해한다면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고,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가 창조의 날짜를 어떻게 도출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후대의 연대기에 고의적인 탈락이나 간격(내 견해로 이것에 대한 증거들은 부적절하다)이 없다고 본다면, 그가 계산했던 날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과 그의 방대한 지식에 근거를 둔, 완전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던 것이다.  


천문학과 어셔

미국 콜로라도주 보울더(Boulder)에 있는 고고도 관측소(High Altitude Observatory)의 천체물리학자 존 에디(John Eddy) 박사는 1978년의 한 심포지엄에서 의미 깊은 언급을 하였다. 이것은 1978년 9월의 Geotimes 23:18에 보고 되었다.

”태양의 관측만으로는 태양의 나이가 45-50억 년 되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다” 에디 박사는 말했다. ”나는 태양의 나이가 45억 년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의 나이에 관한 새롭고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들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언젠가 멋진 재계산과 이론적 재조정이 이루어진다면, 어셔 대주교가 제시한 태양과 지구의 나이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천문학에서 젊은 연대를 거부하는 관측 증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Larry Pierce is retired and publishes biblically related material as one of his hobbies and enjoys the study of ancient history. He and his wife, Marion, live in Winterbourne, Ontario.


*참고 및 노트

이 작업은 읽기에는 매혹적인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제 그것은 완성되어지는 대로 다시 발표되어질 것이고, Answers in Genesis 웹 사이트에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도록 올려놓을 예정이다. 창조로부터 BC 176년까지의 기간에 대한 첫번째 내용은 이미 웹사이트에 올려져 있다. Ussher’s Time Line for the Divided Kingdom을 보라.
1) 유대인들은 후일 바벨론 포로시절에는 바벨론인들의 8년 주기 음력을 채용하였다.
2) 오늘날 우리들은 줄리안 태양력(Julian calendar)을 개선한 그레고리 태양력(Gregorian calendar)을 사용한다.  




어셔 주교에 대한 휴 로스와 스테판 굴드의 대조되는 평가

(Hugh Ross v Stephen Jay Gould on Ussher)

by Jonathan Sarfati, Ph.D.

 

     오늘날 어셔는 점진론적 창조론자인 휴 로스(progressive creationist Hugh Ross)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랄한 조롱을 받고 있다. 휴 로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라이트풋(Lightfoot)과 어셔는 둘 다 히브리 학문을 무시했다. 그리고 성경적 연대기에 언급되어지지 않은 생략되어진 세대는 없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들은 또한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을 기초로 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날 수를 연속적인 24시간으로서의 6일로서 가정했다.”[1] 

로스는 그가 공저로 지은 어린이들을 위한 RTB comic book에서 더욱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었다 [2]


여기에서 어셔는 바보모자 같은 머리장식(dunce-cap-like headgear)을 쓰고 있는 한 멍청이로 묘사되어 있다. (위의 풍자만화[3]를 보라). 이것은 로스가 자신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셔의 연대는 그 당시에 계산되었던 많은 연대들과 대략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어느 믿음이 최근의 탈선인가? : 오래된 지구 또는 젊은 지구? 글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세상은 단지 수천 년 전, 24시간 길이를 갖는 6일 동안에 창조되었고, 창세기 5장과 11장의 연대기에는 간격이 없다는 것이 기독교계가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다. 따라서 그가 KJV 성경에 기록되어진 창세기 말씀에 기초하였다는 비난은 불합리한 것이다. 오늘날 KJV 성경은 거의 모든 영어성경 번역본들을 있게 하였다. 어쨌든, 이 두 학자들은 오로지 라틴어로만 기술하였다.     


또한 그들이 히브리어를 무시했다는 로스의 주장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라이트풋은 라틴어와 헬라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 전문가였고, 구약을 포함하여 후대의 유대인들의 기록인 탈무드와 미드라시(Midrash)에 대해 능통하였다.[4] 어셔는 ”당대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인정되고 있었다.[5] 그의 주요 저술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셈족 언어(Semitic languages)와 고대사의 전문가였다.     


또한 몇몇 위대한 과학자들이 창조의 연대를 어셔의 연대와 매우 가깝게 계산하였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다. 예를 들어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BC 3992년으로 창조의 연대를 계산하였다. 또한 운동과 중력의 법칙, 미적분 등을 발전시킨 아이삭 뉴턴(Sir Isaac Newton, 1642/3–1727)은 모든 시대를 걸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역사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썼고, 열심히 어셔 주교의 연대기를 방어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 ”17세기 또는 심지어 18세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에서, 인류의 과거를 6천년 훨씬 뒤로 확장시키려는 어떠한 제안도 헛된 것이고, 바보같은 추정이다” [6] 


나는 휴 로스가 풍자만화에서 어셔를 바보(dunces)로 조롱했듯이, 케플러나 뉴턴을 조롱할 것인지 궁금하다. 로스의 이러한 행동에 반해, 유명한 진화론자였던 스테판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의 반응은 대조가 된다. 그는 어셔를 매우 공정하게 다루고 있었다.[7] 굴드도 분명히 어셔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셔는 그 당시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학문을 사용했다고 굴드는 말하고 있었다.

”어셔의 연대기는 그 당시 하나의 고귀한 하나의 노력으로서 변호되어야 한다. 우리의 통상적 조롱들은 먼 과거의 다른 시대를 판단하는 데에 현재적 기준을 잘못 적용하는 유감스러운 편협된 생각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셔는 그 당대에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수용된 방법론 하에서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거대한 지식인 사회에서 실체적 연구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알 수도 없었고, 접근할 수도 없었던 후세의 기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준들에 의해서 평가를 내렸던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나는 탄원하는 바이다.”[8]   

 

References and notes

  1. Ross, H., Creation and Time, Navpress, Colorado Springs, pp. 26–27, 1994.
  2. Ross, H. and Bundschuh, R., Destination: Creation, Reasons to Believe Comix, p. 5, 1997.
  3. When we published Pierce, we asked RTB for permission to publish this cartoon. Not surprisingly, they refused. Now we know more about copyright law, which has provision for ‘fair use’ reproduction of pictures for the purpose of criticism.
  4. McClintock, J., Smith, W.M., Strong, J., 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Baker Book House, pp. 426–427, 1982.
  5. Elwell, W.A.,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p. 1131, 1996.
  6. Newton, I., The Chronology of Ancient Kingdoms Amended, published posthumously 1728, cited in Renfrew, C., Before Civilization, Penguin Books, pp. 22–23, 1976.
  7. Gould, S.J., Fall in the house of Ussher, Natural History 12(11):12–21, 1991.
  8. Gould, Ref. 7 , pp. 14,16,21.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appendix-b-the-forgotten-archbishop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2/archbishop.asp

출처 - Creation 20(2):42–43, March 1998.

미디어위원회
2006-09-25

호주 원주민들은 언제부터 호주에 살게 되었는가? 

(How long have Aborigines lived in Australia?)

CMI


      호주 원주민들은 언제부터 호주에 살게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대답은 4만년 전부터 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시점은 5만 또는 6만년 전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더 길 수도 있다.

그러한 주장은 항상 많은 가정(assumptions, 사실로서 입증될 수 없는 믿음)들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radiocarbon dating)의 경우, 지구에서 방사성탄소의 생산과 붕괴는 평형 상태였다고 가정하고 있다. (오랜 연대 이론에서는 그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측은 그렇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3만 년이라는 방사성탄소 연대는 사실 단지 수천 년을 나타내고 있을 수 있다. 틀린 연대가 사실로서 가정될 때, 더 아래 지층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들은 더 오래된 연대로 결정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래된 연대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진화론과 그 이론의 추종자들이다. 고고학자인 브루(Brew) 교수가 말했던 것처럼, '만약 C-14 연대가 우리 이론과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 연대를 교과서에 싣는다. 그리고 그 연대가 우리 이론과 전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면, 각주로 싣게 된다. 그러나 그 연대가 우리 이론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 연대는 단지 폐기되어 버린다.' [1]   

호주의 북부 지역인 유명한 카카두 국립공원(Kakadu National Park)과 같은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교육적이다. 거기에서는 잘 알려진 X선 스타일의 암벽화(‘X-ray’ style of rock paintings)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집 벽에 칠해지는 페인트들도 단지 몇 십년 동안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암벽 그림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황토(ochre)와 물을 혼합하여 그린 그림들이 수만 년이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빠르게 바래짐 (Rapidly fading)

이들 벽화들은 비가 올 때 빠르게 침식되는 것이 관측되었기 때문에, 그림들 중 일부는 그들 주변에 빗물의 흐름을 돌리기 위한 실리콘 띠들, 또는 물방울 방어책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때때로 만져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수만년 동안 일어났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때, 어떻게 그러한 긴 기간동안 그림들이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같은 공원에 있는 또 다른 암벽 그림에는 유럽인들이 담배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그림이나, 배를 타고 항해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아래의 암벽 그림은 한 자루의 장총(a rifle)이 그려져 있는 카카두의 그림(Kakadu painting)이다.


한 자루의 장총(rifle)이 그려져 있는 이 호주원주민의 암벽 그림은 최근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같은 공원에 있는 다른 그림들은 수천 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암벽 그림은 ‘최근(recent)’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이 암벽 그림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파손되지 않은 연속성을 가진 미술 기록이라고 입심 좋게 말해지면서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모든 그림들은 기껏해야 수 세기 전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어떻게 이들 암석 그림들이 사람이 만든 보호 장치 없이, 빠른 파괴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을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순환논법 (Reasoning in circles)

진화론자들은 때때로 적어도 카카두 그림의 일부는 수만 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에는 수만 년 전에 멸종한 동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의 진화론적 가정이 또 다른 가정을 뒷받침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순환논법이다. 그 동물들도 단지 수 세기 전에 멸종되었다는 주장도 완벽하게 타당한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호주원주민들이 훨씬 짧은 기간동안 호주에서 살았었다는 다른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많은 호주원주민 종족들은 전 지구적인 홍수에 대한 전설들을 가지고 있는데 (선교사들과 원주민들의 접촉으로 알려짐), 간혹 성경의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2]

홍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종족은 중동이 아니라, 호주 퀸즈랜드 최북단 쿡타운(Cooktown)에 있는 종족이라는 것이다.[3] 그들은 요나와 물고기, 또는 홍해를 건넌 모세와 같은 문화적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모두 바벨에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야기를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아니다.  

최근 호주 북서쪽 끝의 킴벌리(Kimberley)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의 미술 화랑은 진화론자인 발견자에게 그 그림들이 1천년 이상의 것으로 가정하도록 원인되었다. 왜냐하면 일부 기독교 항해자들이 그 종족에 도착되었음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문 기사는 그 그림은 '기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만 언급하였다. 개인적 통신에서, 발견자는 그 그림은 '거대한 홍수와 한 가족으로부터 사람들이 재번성하는 것”을 주제로 포함하고 있었다고 하였다.[4]

만약 성경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암석 그림들에 바벨탑 이후의 이야기들이 없다는 것이 결국 밝혀진다면, 그 그림을 그린 원주민들이 초기 기독교인들과 접촉에 의해서 그것을 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설명이 곤란해진다. 그렇다면 왜 신약 성경의 이야기들을 그 그림의 주제에서 빠져있는가? 그것은 호주 원주민들의 홍수에 대한 기억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을 것이다. 


논박된 인종차별주의 (Racism refuted)

또한 현대 생물학은 호주원주민들이 오랜 기간동안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인들과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라는 낡은 진화론적 인종차별주의적 믿음이 더 이상 주장될 수 없음을 밝혀내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한 혈통으로(made of one blood) 만드셨다. 모든 종족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너무도 적어서, 그들은 일련의 매우 밀접한 중복되는 원들로 나타내질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 되었다.

불행하게도 호주원주민들이 오랜 기간 동안 호주 대륙에서 살아왔었다는 강한 정서적인(emotional) 요소들이 있다. 4만 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이 단지 2,000-3,000년 전에 살아왔었다는 것보다 호주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행동을 더욱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호주에서 ‘고대(ancient)’ 라는 주제는 호주원주민의 그림이나 기념품 등은 팔 때에 어떤 신비로움을 언급하지 (상업적인 호소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며, 검은 피부에 대한 자부심, 땅의 권리 등과 가깝게 연결되어있다. 심지어 최근에 만들어진 호주원주민의 록 음악(rock music)은 판매 효과를 위해 40,000년 전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과대선전 되고 있다.

이러한 유행하는 사회적 압력 하에서, 호주원주민들의 유물들에 대한 새로운 연대측정들이 점점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도록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증거의 무게는 호주원주민들이 노아 가족의 후손으로서[5],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사촌으로서, 단지 수천년 전에 (확실히 4천년 보다 이전에) 호주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들로 기울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을 위해 죽으셨다. 거기에는 호주원주민, 유럽인, 아메리칸 인디언, 아프리카인, 에스키모인, 모든 종족들이 포함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References

1. Fully referenced in The Revised Quote Book, Creation Science Foundation, Sunnybank (Queensland), 1990, p. 23.
2. See, for instance, The Flood, Creation magazine Vol. 4 No. 3, pp. 9–12. Also, Funk and Wagnall's Standard Dictionary of Folklore, Mythology and Legend, New York, 1950.
3. George Rosendale (Aboriginal Lutheran Pastor from Far North Queensland), personal communication.
4. The Courier-Mail, Brisbane (Australia), 10 February 1992. Also G. Walsh, personal communication.
5. See the chapter on the origin of races in The Answers Book for a detailed explanation. (Ken Ham, Andrew Snelling, Carl Wieland, The Answers Book, Creation Science Foundation/Master Books, 1990, chapter 8.)


Related Articles


*참조 : Cape painting
http://en.wikipedia.org/wiki/Cave_painting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how-long-have-aborigines-been-in-australia

출처 - Creation 15(3):48–50, June 1993.


미디어위원회
2006-06-03

날이 하루가 아닐 때는? 

(When Is a Day Not a Day?)

by John D. Morris, Ph.D.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믿는 크리스천들도 성경과 역사는 아브라함(Abraham)이 단지 수천 년 전에 살았었음을 가르치고 있음을 인정한다. 게다가, 성경에 기록된 연대기는 아브라함과 노아(Noah) 사이에, 그리고 노아와 아담(Adam) 사이에 단지 몇 천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 성경 사본들에서 주어진 최대 기간을 사용하더라도, 아담에서부터 현재까지 수천 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지 창조는 수십억 년 전에 일어났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6일(six days)’ 동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여섯째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첫째 날, 둘째 날.... 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각 날들을 구분해 놓고 있다. 창조 6일에 아담 이후의 시대를 더하면 아직도 수천 년에 불과하다.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조의 각 날들은 실제로는 장구한 기간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날(day)’이 오랜 기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성서적, 언어학적 증거가 있는가?


사실 'day'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욤(yom)’ 은 영어에서처럼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히브리어나 영어 둘 다, 그 단어는 태양일의 하루, 즉 지구가 그 축을 한번 회전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지는 날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만일 내가 ‘오늘(today)’ 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생일날” 이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분명하다. 또한 ‘첫째 날(first day)’, ‘셋째 날(three days)’과 같이 수사를 사용해서 그 단어를 변형시켰을 때도, 당신은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조지 워싱톤의 시대(in the day of George Washington)"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가 독립전쟁 시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 문맥에 의존하고 있다. 사용되는 단어는 어떤 특별한 어법 안에서 그 의미가 지정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해두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실 때 그 단어의 정의를 해 놓으셨다. 천지(the heavens and the earth)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3절). 그리고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4절). 이 빛/어두움 사이클에서 "빛을 낮(Day, yom)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Night)이라 칭하셨을” 때(5절), ‘Day'의 뜻은 더욱 확실해진다. 나머지 구절들 전체에서, 하나님은 일곱째 날까지 첫째 날에 사용하셨던 단어를 사용하신다.

잘못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출애굽기 20:11절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어떤 내용을 돌판에다 새겨 넣으셨다. 십계명에서 제4 계명은 우리들이 일하는 한 주(week)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6 일간은 일하고 제 7 일은 안식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같은 단어인 욤(yom)이 같은 문맥, 같은 형태, 같은 돌판, 같은 저자, 그것을 기록하신 같은 손가락 하에서 다른 뜻으로 쓰여졌을까? 만약 그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날들과 같은 6일 동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우리들이 일하는 일주일 형태가 되는 것이다.  

'날(Day)”이 어떤 문맥에서는 기간(period)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조 시에 설명된 날은 실제로 하루를 의미한다. 크리스천들은 일시적이고 늘 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정의한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www.icr.org/article/when-day-not-day

출처 - ICR, 2006. 5. 1.

미디어위원회
2005-10-27

조상들과의 만남 

: 창세기 연대기의 정확성과 족장들의 긴 수명

 (Meeting the ancestors)

Russell Grigg 


     당신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Lamech)이[1] 아담(Adam)과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당신이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과일을 먹기 전에 하나님과 지냈던 일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연대기에 의하면, 아담은 라멕이 56살 되던 때까지 죽지 않았다. [2] (아래 표를 보라).

아브라함이 셈(Shem)과 말하는 것을 어떨까? ”저에게 당신과 당신의 형제였던 함, 야벳,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일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하나님이 당신들께로 보내신 모든 동물들과 방주 안에서 1년여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하나의 상상의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도 또한 일어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연대기에 의하면 셈은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살아있었다. [3, 4]


성경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족장들의 나이에 대해서 세심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메시야/언약 가계에 있는 각 인물들이 아이를 낳았을 당시 몇 세였는지, 그들이 몇 세를 살다가 죽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죽을 때에 아들의 나이는 몇 세였는지를 기록해 놓고 있다. [5, 6]
그러므로 간단한 산술에 의해서, 각 족장들은 세계가 시작된 해(the Year of the World, 라틴어로 Anno Mundi, 약자로 ‘AM’으로 표시함)로부터 몇 년에 태어나고, 몇 년을 살다가, 몇 년에 죽었다는 것이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목록으로부터 어떠한 ‘간격(gap)’이 있을 가능성은 제거되어진다.


따라서 최초의 해(first year) 제 6 일에 창조된 아담은 AM 930 년에 죽었고, AM 874 년에 태어난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시기까지 그의 후손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아들인 셈은 AM 1558 년에 태어나서 AM 2158 년에 죽었기 때문에, AM 2008 년에 태어난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때까지의 여러 후손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마찬가지로, 창조 후의 노아 홍수가 일어난 날짜도 정확하게 정해질 수 있다. 창세기 7: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아래의 표로부터 우리는 노아가 AM 1056 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홍수는 600 년 후인 AM 1656 년에 발생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AM 2008년) 352 년 전이다.


셈(AM 2158 년에 죽음)과 에벨(Eber, 셈의 증손자, AM 2187 년에 죽음)은 둘 다 아브라함 시대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 당시 족장 시대에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Israelites)이 셈족(Semites, 셈의 이름을 따라), 또는 히브리족(Hebrews, 에벨의 이름을 따라)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간격이 있는가?

선의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들 연대기에 간격이 있다고 말해왔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성서적 시간 틀을 잡아 늘려서 부분적으로 세속적 지질학과 고고학과 화해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창세기의 연대기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 그것들은 물샐 틈 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은 정확한가?

창세기를 읽다보면 '...계보(대략, 사적, 후예)는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히브리어로 toledoth = origins, ’history,’ 또는 ‘family history’) 라는 구절이 11번이나 나온다 (KJV) [7]. 이들 문장들은 모두 그들이 기술했던 사건들 다음에 오고 있다. 그리고 각 구분되어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거명된 개인들의 죽음 이후 보다는 죽음 이전에 발생했던 일들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문장 앞에 또는 머리말로 쓰여졌다기 보다는, 문장 뒤에 글을 마치는 서명으로 더 잘 어울린다. 


만약 이것이 그렇게 쓰여졌다면, 이것들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담, 노아, 셈 등의 사람들 각자가 그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점토판들에 기록했을 수 있다 [8]. 그리고 그것들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담, 셋, 노아, 셈.....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계보를 경유하여 물려주었다. 모세는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이것들을 선택하고, 자신의 주석을 넣어 편집하여, 오늘날 우리가 창세기(Genesis)라고 알려진 책으로 편찬하였다 [9].  


조상대대로 물려온 많은 중첩된 사실들에 의해서 쓰여진 기록은,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어떠한 구두적인 설명(oral accounts) 보다는 훨씬 정확하게 기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단지 2명의 중개자, 즉 므두셀라(또는 아마도 라멕)와 셈만이 필요했다.


초기 족장들의 연대기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성경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즉, 창세기 5장과 11장, 역대상 1장, 그리고 누가복음 3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계보에 대한 기술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10, 11, 12]. 유다서 1:14절에는 특별히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연대기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재강조해주고 있으며, 연대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13].       



References and notes

1. Not to be confused with another Lamech, son of Methusael and descendant of Cain (Genesis 4:17–18).
2. Adapted from McIntosh, A.C., 
Genesis for Today—Showing the relevance of the creation/evolution debate to today’s society, 2nd edition, Day One Publications, Epsom, UK, pp. 44–47, 2001. Note that Genesis for Today discusses other options for the dates of Abraham.
3. Abram, mentioned first in Genesis 11:26, was the most important of the three sons born to Terah; he might or might not have been the first born, cf. Shem, Note 6. Abram left Haran at the age of 75 (Genesis 12:4), after the death of Terah (Acts 7:4) who died at age 205 (Genesis 11:32). This would mean that Abram was born when Terah was 130, i.e. in AM 2008.
4. Abram’s name, which means ‘exalted father,’ was changed by God to Abraham, meaning ‘father of many,’ when Abram was 99 years old (Genesis 17:1,5).
5. E.g. Genesis 5:3–6: ‘And Adam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a son in his own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And the days of Adam after he had begotten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that Adam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 … ’.
6. Of Noah’s three sons, born after Noah turned 500 (Genesis 5:32), although Shem (the son in the covenant line) is mentioned first, Japheth is described as the elder (Genesis 10:21), so presumably Japheth was born when Noah was 500; Ham is called the younger (Genesis 9:24). Genesis 11:10 says, ‘Shem was one hundred years old, and begat Arphaxad two years after the flood’; i.e. Shem was 100 in AM 1658, and so would have been born AM 1558, when Noah was 502.
7. Genesis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8. Most of the events of Creation Week in Genesis 1 occurred before Adam was created, so must have been revealed by God, probably to Adam.
9. The Lord Jesus Himself and the Gospel writers said that the Law was given by Moses (Mark 10:3; Luke 24:27; John 1:17), and the uniform tradition of the Jewish scribes and early Christian fathers, and the conclusion of conservative scholars to the present day, is that Moses wrote Genesis. See Grigg, R.,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 Creation 20(4):43–46, 1998.
10. Cf. the importance of repetition of incident in Genesis 41:32 and Acts 10:9–16; 11:10.
11. For a discussion of the mention of Cainan in Luke 3:36, see Cainan: How do you explain the difference between Luke 3:36 and Gen. 11:12~
12. For a discussion on how many people there were pre- and post-Flood, see Batten, D., Where are all the people? Creation 23(3):52–55, 2001.
13. The key to understanding any portion of the Bible is to ascertain the purpose of the writer of that part. A straightforward reading of these three records indicates that the writers intended to give a complete genealogical record from Adam to Abram/Abraham (and on to the kings of Judah in 1 Chronicles, and on to the Lord Jesus Christ in Luke 3). See Biblical genealogies.



족장들의 긴 수명 (long lifespans)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 앞부분의 족장들의 긴 수명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

1) 그들이 역사적이지 않다고 제시할 만한 근거가 본문에 전혀 없다.
2) 그들 숫자의 자릿수는 수메르인의 기록에 의해서 지지 된다 [1].
3) 숫자들을 기록하는(단어로 하는) 히브리인의 방법은 필사 오류로 보기에는 너무 어렵다.
4) 한 해(year)가 실제는 한 달(month)을 의미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므두셀라는 80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국한한 가정은 본문의 다른 곳에서 지지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일부 족장들은 어린이였을 때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5) 여러 내부적인 일관성이 있다. 죽을 때의 나이로부터, 므두셀라는 정확하게 홍수가 나던 해에 죽은 것으로 계산된다 [2]. 그러나 만약 (오류가 있는) 70인역(Septuagint)을 사용한다면, 그의 죽음은 홍수 후 14 년이 된다. 그러나 므두셀라는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된다. 극적인 수명 단축이 홍수 이후부터 시작되어진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격변적 영향과 인구수와 일치된다.
6) 긴 수명에 대한 어떠한 생물학적 장벽이 없다. 그리고 연속적인 수명 저하(decline)에 대한 유전적 설명(환경적인 요소들을 더하여)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중이다 [3].


References and notes

1. The ages of their pre-Flood kings seem astronomical. However, when one realizes that the Sumerians used a number base of sixty (not ten), presumably when transcribing from historical pre-Flood records, the ages come into good alignment with the patriarchal lifespans of Genesis. See López, R.,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CEN Tech. J. 12(3):347–357, 1998.
2. Some commentators argue that the name Methuselah comes from the roots muth (= death) and shalach (= bring or send forth), thus his name means ‘his death shall bring’—a prophetic reference to the Flood judgment. If so, then it is fitting that he was the longest-lived person in the Bible, a symbol of God’s immense patience and longsuffering.
3. Wieland, C., Living for 900 years?, Creation 20(4):10–13, 1998 and Decreased lifespans: have we been looking in the right place? CEN Tech. J. 8(2):138–141, 1994.



*참조 : Temporal changes in the ageing of biblical patriarch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51/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Biblical chronogenealogi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06/

Did People Like Adam and Noah Really Live over 900 Years of Ag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06/04/did-people-live-over-900-years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3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Why Genesis 5 is a key chapter in the Bible. Multiple timeframes underline the historicity

https://creation.com/why-genesis-5-is-a-key-chapter-in-the-bible

Sermon ideas. Help for preachers teaching congregations that already believe Genesis creation

https://creation.com/sermon-idea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meeting-the-ancestors

출처 - Creation 25(2):13–15, March 2003.

유종호
2005-10-24

연대측정 방법과 가정들 3 - 연대측정 방법들


5. 다양한 색체의 할로 (Pleochronic Halos)

최근에 물리학 교수인 로버트 젠트리(Robert Gentry)는 지구의 물질들이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생겨났다는 충격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것이 수십억 년에 걸쳐 천천히 진화했다는 과거의 진화론을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증거를 많은(Pleo) 색깔(chroic)을 의미하는 다양한 색채의 할로(halos, 후광)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다양한 색을 띠는 공 모양의 동심원이다. 현미경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반지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물질에 따라 색깔, 크기, 특성, 수와 간격이 다양하다. 그러한 조그만 반지 문양은 중앙에 황소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조그만 결을 이루고 있는 섬세한 화살의 과녁과 비슷하다. 그들의 할로와 색깔의 특성 때문에 그들은 다양한 색체의 할로(pleochroic halos) 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수년에 걸쳐 이러한 할로를 연구·분석한 젠트리의 결론에 의하면, 폴로늄의 할로는 뜨거운 가스폭발로 지구가 형성되어 수억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냉각되었다는 진화론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1986년 10월『창조의 조그만 신비』p.3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강암이 천천히 냉각하는 용암에서 결정화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구가 용융상태의 구형체로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지구의 화학성분이 우주에서의 핵융합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말씀에 의해 순식간에 창조되었던 것이다.”

”폴로늄 할로는 사라지는 자연 방사능의 무언의 증거였는가? 폴로늄(Po) 218의 반감기인 고작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구의 화학 원소들을 창조한 순간부터 하나님이 화강암을 조성하신 시간까지 경과를 측정한 것인가? 지구의 연대에 관한 진실을 탐구하는 나의 연구에서 나는 일순간의 창조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는가? 조그만 폴로늄의 할로들이 하나님이 지구의 암석에 남긴 하나님의 지문인가? 전 캄브리아기 화강암들이 우리 지구의 창세기 암석들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말했다] 더욱이 (할로와 관련된 방사능의) 짧은 반감기 때문에 암석들과 방사능의 형성은 거의 순간적인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믿을 수 없겠지? 나는 한동안 그러한 사실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스스로 자문해 왔다. 즉,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우주론은 결국 정확한 것인가? 지구는 어떤 권위자의 말씀으로 창조될 수 있었을까?”  . . . 지질학적으로 말하자면 지표의 모든 화성암은 화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만약 말씀에 의한 창조의 가설이 맞는다면, 다양한 반감기 할로들이 발견되는 암석의 체계는 원 위치에서(in situ) 형성된 지구 최초의 물질을 구성할 것이다.”

‘원 위치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최초의 장소에서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수한 원자가 단지 3분이라는 반감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15분 이내에 그것은 사실상 사라진다. 이러한 할로가 고체의 상태에서만 나타나고 액체의 상태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지구의 화강암 형성은 수십억 년의 세월이 아닌 15분 이내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실하다.


6. 다른 연대측정법에 대한 소고

바다의 염분 양에 의한 측정법이 있다. 바다에는 어느 정도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염분이 바다로 반입되는 비율을 측정하고 염분이 축적되는데 걸린 시간을 파악한다. 이러한 방법은 본래 담수로 구성된 바다를 전제로 하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

또 다른 방법은 지구의 퇴적물이 형성되는데 걸린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층이 천천히 그리고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다. 그러나 돌들과 돌들 속에 매장된 화석들과 나무들을 통해 이러한 지층이 급격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다른 방법들은 달이 지구에서 멀어지는 비율을 이용하고, 물과 빙하가 골짜기를 침식하는데 걸린 시간을 측정하는 것, 혹은 지구와 달에 운석을 축적하는데 걸린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 그리고 일 년에 하나 이상의 나이테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목의 나이테를 헤아리는 방법 등이 있다.

그러나 개별적이거나 종합적이거나 간에 이 모든 이론들은 지구와 우주가 약 6,000~8,000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기본적 진술을 흔들 수 없다.  


7. 연대추정의 기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실수와 기만의 사례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화산으로 분출된 용암이 실제 200년 된 것인데 수십억 년으로 잘못 추정되었다.

필트다운인이 있었다. 진화론자인 루스 무어(Ruth Moore)는 1953년경에 『인간, 시간 그리고 화석』에서 불소실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에오안드로푸스(필트다운인)은 50,000년경에 생존했었다. 불소실험이 필트다운인의 유해에 적용되기 전에 많은 권위자들은 그들의 연대가 대략 500,000년과 아마도 백만 년경이라고 추정하였다.”

p.353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대인은 백만 년 전의 고대인이 아니라 5만 년 전에 등장한 신참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맞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우선 루스 무어가 책을 쓰자마자 필트다운인이 날조임이 드러났다고 여길 때 그것은 한없이 중요하다. 그렇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그런 가증스런 거짓말에 의해서 그들의 하나님과 구속주로부터 오도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은 한없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어린이들의 정신과 영을 강탈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수백만 살이라고 주장된 네브래스카인의 치아가 결국 최근의 돼지 이빨이라고 입증된 사실을 생각해보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거짓된 진화론이 아닌가? 이러한 거짓 주장이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게 미친 손해는 어떠한가? 그러한 재판이 우리 공립학교에서 지난 60년 동안 얼마나 해를 끼쳤는가?


8. 수십억 광년

진화론자들이 추정한 우주의 수십억 광년의 나이는 이 지구와 우주의 존재를 위하여 그들이 제시한 수십억 년보다 더욱 엉성하다. 이는 이 지구의 퇴적암과 지질학을 오독한 결과이다.

우주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팽창한다는 사실은 진화론자들에게 수십억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그 주위에서 헤매게 한다. 수백만 광년은 순전히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외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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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2005-10-20

연대측정 방법과 가정들 2 - 연대측정 시계들


2. 연대측정방법에 주로 쓰이는 우라늄

우라늄 연대측정방법에 관하여 『월드 북』의 「지구」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라늄은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일정한 비율로 붕괴 또는 해체되는 방사성 동위원소이다. 그것은 헬륨원자를 방출하고 납을 남긴다. 우라늄이 처음에는 순수한 상태였다는 가정 하에, 우라늄 성분을 지닌 암석에서 우라늄과 납의 함량을 측정함으로서, 과학자들은 우라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순수한 우라늄으로 출발했다고 가정하는 거짓 전제와 시점을 주목했는가? 암석과 지구의 연령을 결정하는 방법으로서의 우라늄이라는 시계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가? 사실상 너무도 많은 부분이 증거도 없이 가정된다든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첫째로, 태초에 우라늄을 함유한 암석이 오직 우라늄과 비방사성 기원의 납만 포함했다고 가정하고 있다. 비방사성 기원의 납은 방사성 붕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라늄을 창조할 때 방사성 납과 순수한 납을 둘 다 만드셨다. 그래서 그것은 지구와 우주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성숙한 상태(완전한 납)로 만드셨다. 이런 사실은 태초의 창조 시 또는 지구와 우주의 '제로 타임”에서 암석의 겉모습은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유아가 아닌 성인의 모습으로 창조했듯이, 하나님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둘째로, 우라늄 동위원소의 방사성 붕괴율이 항상 일정하여 45억 년마다 반으로 느리게 붕괴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율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이 가정하듯이 아무도 수백만 년 동안의 우라늄 붕괴 현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두들리(H. C. Dudley)는 1975년 4월 7일에 『재 실험된 방사능』에서 외적 영향에 의해 붕괴율이 변한다는 실험 증거가 있다고 보고했다. 14 가지의 다른 방사성 핵종(核種)들의 붕괴 속도는 온도, 압력, 전기, 자기장과 같은 외적 영향들에 의해서 변화하였다. 우라늄 연대측정방법은 단지 몇 세기 밖에 되지 않은 용암에서 수십억 년의 세월이라는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상당한 오차를 보이고 있다. 만약 진화론자들이 본래는 우라늄이었다고 주장하는 납이 원래부터 납으로 창조되었다면, 그리고 만약 붕괴율이 한때 급변했었다면, 우라늄과 납이 45억년의 세월을 겪었다고 볼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지구의 우라늄이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어디에선가 우라늄의 근원을 찾기를 희망했다. 마침내 그들은 외계에서 지구로 떨어진 운석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최초의 지구가 운석과 같은 물질을 포함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라듐도 소위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시계로서 사용되어 왔다. 하인츠 하버(Heinz Haber)는 『우리의 파란 행성, 1965』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만약 우리에게 한 조각의 라듐이 있다면, 먼저 그것의 질량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만약 원래의 라듐의 양이 알려진다면, 여러분은 그 동안에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라듐의 원래 무게가 어느 정도 나갔는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3. 포타슘과 아르곤의 연대측정방법

포타슘은 금속과 같은 원소이고, 아르곤은 기체이다. 포타슘 동위원소는 붕괴되어 점차적으로 아르곤과 칼슘이 된다. 이러한 연대측정방법은 화산과 같은 엄청난 열로 형성된 암석들을 토대로 이용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용암에 있는 아르곤의 양을 측정하고 포타슘이 아르곤으로 붕괴하는데 걸린 시간을 계산한다. 그리고는 암석의 나이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크나큰 오류를 저지르기가 쉽다. 새로운 화산의 용암을 연구함으로써, 자유 아르곤이 용암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암석이 처음에 형성될 때 발생했으며, 포타슘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많은 암석들은 외견상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포타슘-아르곤 방법은 그간 폭넓게 사용되어왔다. 리키의 추종자들이 발견한 많은 화석들의 연대는 이러한 방법으로 측정되었다. 존 홉킨스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스트라우스(W. Strauss)와 지질학 교수인 찰스 훈트(Charles Hunt)는 포타슘방법에 따른 연대측정방법에 많은 변수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Culp 저, 당신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p.174 참조).

”이러한 연대측정방법들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틀림없이 부정확하다. 어쩌면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제시된 연대들은 소량의 소금에서 산출된 것이다..... 이러한 연대측정은 인간과 그들의 문화, 그리고 다른 척추동물의 진화율에 관한 가설을 세울 때 그 가치는 회의적이다.”

더욱이, 하와이와 세계 전역의 다른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포타슘-아르곤 방법에 근거하여 2천2백만 년으로 측정되었으나, 실제로는 고작해야 200년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연대측정에서 사용된 방법은 단지 가정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빗나간 방법이다. 버지니아 주 종합기술연구소의 핵 상담원인 로버트 휘틀로(Robert Whitlaw) 교수는 지구의 추정 연령인 약 7,000년 이상의 연대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포타슘-아르곤 방법은 사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4. 탄소14에 의한 연대측정방법

이 방법은 미국의 물리학자인 리비(W. F. Libby)가 개발했다. 탄소14는 탄소(C)의 방사성 동위원소이다. 보통의 탄소12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아니다. 탄소14에 의한 연대측정방법은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로 들어와 탄소14 원자를 만들고, 이들이 성장하는 동식물로 흡수되어 전이되는 원리에 근거한다. 동물들과 인간들이 식물을 섭취할 때 탄소14도 함께 흡수한다. 그러므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탄소14를 흡수한다. 죽으면 이런 흡수는 중지되고, 신체 속에 잔류하고 있던 탄소14는 어떤 비율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동물 혹은 식물은 죽어있는 상태가 길수록 화석에 남게 되는 탄소14의 양은 그만큼 줄어든다. 리비 박사는 수치로 환산하여 5568년이 지나면 절반 정도의 탄소14의 양이 붕괴되는 것을 파악했다. 이러한 방법이 연대를 알 수 있는 삼나무와 이집트 바로왕의 묘지에 사용된 나무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된 반면에, 다른 실험에서는 정확하지 않았다. 이것은 5,000년 전에 생존했다는 생물의 실험에서 특히 그랬다.

이러한 방법에는 많은 가정들이 설정되어 있어서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리차드 컬프(Richard Culp)는 『당신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1975』p.169, 172에서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방법이 가정하는 것을 보면 1) 이산화탄소에 탄소14의 농축은 일정하다. 2) 우주선은 불변이다. 3) 탄소원자의 붕괴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4) 바다와 대기에 이산화탄소의 상대적인 양은 변하지 않는다. 5) 생물학적인 활동 혹은 외적인 과정은 탄소14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6) 오늘날의 탄소에 어떠한 오염현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모든 가정들은 의문에 직면해 있다. 가장 중요하게도 노아 시대에 대홍수는 이러한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일 궁창 위의 물 층이 지구를 덮고 있었다면 우주선의 여과 작용은 더욱 증대하고 탄소14의 형성은 줄어든다. 양 극지방까지를 포함해서 전 지구상의 열대 식물군과 동물군의 화석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복음적인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진화론자들도 그러한 궁창 위의 물 층의 존재를 인정하여 왔다.” 

그 외에 다른 가정들도 있는데, 이러한 모든 가정들은 의심의 여지가 많은 것들이다. 그래서 동물, 식물들에 대한 오래된 연대를 얻기 위한 탄소14의 연대측정 방법은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개념을 지탱하려는 노력의 또 다른 실패를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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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2005-10-19

연대측정 방법과 가정들 1 - 연대측정 방법의 기본 가정들


1. 연대측정 방법

지구와 우주의 연대를 결정할 때, 진화론자들은 우라늄과 다른 방사성 동위원소들의 붕괴율을 이용한 연대측정 방법에서 여러 실수들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원소들이 100% 순수한 물질에서 시작하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창조할 때부터 성숙한 지구를 창조하셨다.


원소들과 다른 물질들의 창조를 고려할 때, 우리는 표면상의 나이와 진짜 나이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아담과 이브가 창조 당시 대략 20에서 50살로 보였으나, 그들의 실제 나이는 0살이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5천명을 먹이실 때, 물고기는 몇 년 자란 것처럼 보이는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0살에 불과했다. 예수님께서 물로 만든 포도주는 수년간에 걸쳐 숙성한 포도주 같았다. 에덴동산의 나무, 관목, 꽃 그리고 4개의 강은 수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 같지만, 그들의 실제나이는 0살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빛은 진화론자들에게는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의 세월을 날아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빛은 별들과 같이 한 순간에 존재하게 되었다. 만약 진화론자들이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존재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더라면, 오늘날 지구와 우주의 연령에 대해 취하는 그들의 행동처럼 수십억 년의 세월을 따라 잡았을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지구의 연령을 수십억 년이라고 주장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물질들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우라늄 같은 방사성 물질이 천천히 납과 같은 안정된 물질로 붕괴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모(母)원소와 자(子)원소의 일정한 비율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숙한 지구와 우주를 창조할 당시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는 수십억 년의 세월을 겪은 모습으로 지구의 물질들을 창조하셨지만, 그들의 실제 연령은 단지 0살 인 것이다. 표면적인 연령은 그동안의 붕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최초의 모습이다. 


진화론자들은 모원소인 우라늄과 자원소인 납, 혹은 그 밖의 다른 원소들의 연령을 결정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특별한 가정을 하고 있다. 즉 1) 최초에 방사성 물질은 중간 혹은 마지막의 붕괴물질(자원소)을 포함하지 않는 상태로 있었다. 2) 그것은 아무 것도 뺄 수도 더할 수도 없는 닫힌계 였다. 3) 붕괴율은 전 시대를 걸쳐서 항상 일정했다.


첫째 가정은 최초 암석에는 모원소 우라늄만이 있었고, 자원소인 납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지구의 모든 물질을 창조하실 때 성숙한 상태의 물질들을 창조하셨다면 이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진화론에 필요한 수십억 년의 세월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화론자들은 처음에는 중간 혹은 마지막의 붕괴물질이 없었다고 가정한다. 『사기 사업(The Monkey Business』p.102.에서 진화론자인 닐 엘드리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암석이 형성된 시기에 최초에 존재하는 모원소와 자원소의 양을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모원소가 자원소로 붕괴하는 비율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원소와 자원소의 현재 조성 비율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암석의 연령을 계산할 수 있다. 아! 창조론자들을 울려라, 수많은 가정들이 거기에 있구나! 붕괴비율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는 암석의 연령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비교하는 낡은 순환논법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그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암석과 화석의 연대측정 방법은 방사성 동위원소 방법과 비교된다. 그는 그러한 방법이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순환논법은 과거에 진화론자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이다. 이러한 빗나간 전제를 동원하는 논법으로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다.

최근에 발생했던 일을 생각해 볼 때, 창조 시에도 많은 양의 방사성 붕괴물질 자(子)원소들이 함께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진화론: 명백한 몰락』 p.30에서 헨리 히버트(Henry Hieber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근의 화산 폭발에 의해 생겨난 암석에서조차 방사성 붕괴물질인 납이 우라늄과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1968년 7월 15일 지구물리학 연구라는 저널에서, 실제 연령 168세였던 하와이 용암이 포타슘-아르곤방법에 의해 2천9백6십만 년으로 추산되었던 실례가 인용되었다. 이것은 드문 현상이 아니다. 현대의 용암들이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계산으로 나이를 측정할 때, 그들의 납-우라늄 연대는 흔히 수십억 년이 넘게 나타난다! 만약 연대를 알 수 있는 암석들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나이를 나타낸다면, 연대를 모르는 암석들의 나이를 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168년과 29억6천만년 사이에는 1760만 배의 차이가 있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두 번째 가정은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가 가감이 없는 닫힌계에서 발생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특히 깊음의 샘들이 터져나오는 대홍수 때에 지구의 암석들이 겪었을 격렬한 지각운동에 비추어보면 그럴 것 같지 않다. 모든 암석 시스템들이 격렬한 소동 속에서 충돌하고, 으깨지고, 산산 조각이 되었을 때, 많은 것들이 암석에 있는 방사성물질들의 구성을 변형시키며, 일실되었고, 더하여졌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많은 암석들이 걸러질 수 있었다. 수억 수천만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6,000년에서 8,000년의 세월조차도 많은 것이 특히 격렬한 홍수의 시기에는 더욱 변할 수 있었다.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측정에서 진화론자들이 세운 세 번째 가정은 붕괴율이 항상 일정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대홍수의 시기에는 방사능 붕괴율이 크게 변화될 수 있었다. 대홍수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무슨 변화가 발생했는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대홍수는 방사성 원소들을 뒤섞고, 침전물의 퇴적을 증가시킴으로써, 사용하는 연대측정 방법의 가능성을 파괴하였을 것이다. 또한 화석에서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대홍수의 시기에 큰 기후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홍수시기에 대기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우주에서 오는 방사선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우주 방사선이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면, 방사능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가 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던 창조 당시에 어느 정도의 방사능이 있었는지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붕괴비율이 일정하다는 가정은 증명할 수도 없으며 시험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연대측정 방법은 매우 불안정한 가정들을 전제로 한다. 연대측정 방법에서 가정된 전제와 결론은 전체의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분명치 못하다. 사실 이러한 연대측정 방법으로 추산된 연령은 신빙성이 없다. 말콤 머거리지(Malcom Muggeridge)는 진화론의 책자들을 검토하고 진화의 증거가 없음을 알고 난 후에, 진화를 위해 요구되는 수천만 년의 세월이 ”순수한 환상으로서의 신화에서도 포착될 수 없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감명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화를 신화로 이해했다. 머거리지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그러한 부주의하고 불확실한 이론이 그토록 쉽게 20세기의 정신세계를 사로잡고, 그토록 폭넓게 분별없이 적용되었다는 사실에 후손들은 확실히 놀랄 것이며, 즐거워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연대측정방법에서 가정된 수십억 년의 세월은 진화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화가 발생한 수천만, 수십억 년의 세월을 확보할 다른 방법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조작된 수십억 년의 세월은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수십억 년이라는 충분한 세월을 확보한 그들은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게 하였고, 그 다음에 가능한 모습을 있음직한 일로, 마지막으로 있음직한 일을 거의 절대적으로 확실한 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실버버그(Robert Silverberg)가 쓴 『시대를 위한 시계들』p.75의 다음 인용문에는 진화론자들이 수십억 년의 세월로 어떠한 환상들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어떤 경우에도 지질학적 역사의 패턴을 명백하다. 아마도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처음에 지구는 둥근 불덩어리였다. 그것이 냉각되고 응고됐다. 대기에서는 물이 응축하여 비가 수백만 년 동안 끝없이 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바다가 형성되었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설명할 수 없이 바다에서 화학성분이 뒤섞이면서 생명세포가 등장했고, 그것이 번성하고 번식하면서 더욱 더 복잡한 미생물이 나타났다. 20억 년이 지난 후에 이러한 미생물들이 바다를 차지했다. 그러나 갑자기 진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지구가 존재한 최근의 6억 년 간에 수많은 생명체, 즉 삼엽충, 벌레,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상황을 사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 알려진 가장 최근의 존재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둥근 불덩어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수백만 년 동안 내린 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살아있는 세포에 있는 생명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번식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종이 수천의 종으로 변할 수 있었는가? 오늘날에 보면 어떠한 종도 다른 종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는 적어도 진화론에 근거한 사상들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진술하고 있다.


현재 진화론의 대부인 칼 세이건은 수십억 년의 세월에 대해 가장 설명을 잘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1987년 5월 31일 『퍼레이드 매가진』에 그는 ”수십억에 수십억(billions and billions)”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글을 실었다. 즉,

”나는 결코 그것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오, 나는 아마도 일천억 개의 은하계와 셀 수 없는 별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엄청난 숫자를 동원하지 않고는 우주에 대해 말하기란 어렵다. 나는 우주에 관한 텔레비전 연재에서 수십억이란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수십억에 수십억”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부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수십억에 수십억”은 과연 얼마를 나타내는가? 단순한 수십억인가? 그것은 다소 막연하다....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좋아한다. 이따금 내가 코스모스 책의 사본을 복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속표지에 ”수십억에 수십억”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나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OK라고 말하면 여하튼 써 주세요 라고 답한다.... 코스모스 텔레비전 프로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1980년에, 사람들은 수십억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수백만의 표현은 소규모적이고 인기 없는 인색한 표현이 되었다..... 아주 유행하는 수의 개념은 이제 새로운 영역인 수 조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진화론의 환상을 많은 사람에게 퍼뜨리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왜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라는 생각을 퍼뜨리고 있는가?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이라는 우화를 실제 사실로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1960년의 노벨 수상자인 피터 메다워(Peter Medawar) 경의 경우도 그러하다.(Ⅺ장 16번을 참고하시오)


국가적인 채무가 한 때 수백만 달러, 수십억 달러, 이제는 수조 달러에 달한다. 사람들이 그런 숫자에 익숙해지면서, 진화론자들은 그런 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만약 수조의 단위가 오래 전에 사용되었더라면, 만약 진화론자들이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가능성을 그럴 듯한 것으로, 그럴 듯한 것을 절대적인 사실로 변화시키는데, 수억 년의 개념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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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 Morris
2004-07-26

젊은 지구(The Young Earth) 1장. 암석이 말하는 지구의 연대


    신문에서 새로운 화석이나 고고학적 발견 또는 지하 단층에 대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는 으레 과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진화론이 또 다시 입증될 수 있게 되어 매우 흥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수백 만년, 수억 년 혹은 수십억 년 전으로 연대가 제시된다. 아무도 그 연대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되지 않으며, 독자들 또한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느낀다. 과학자들이 그 연대를 어떻게 얻었는지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었는가?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암석과 화석들이 말을 하거나 자기들의 나이와 지금까지 되어온 과정을 설명하는 표라도 달고 나온 것처럼 말이다. 내가 비밀을 말하건대 사실 암석들은 말을 할 수도 없고 어떤 표를 달고 나오지도 않는다. 내가 아끼고 돌보는 암석들이 몇 개 있다. 그들에게 '바위야, 너 몇 살이니? 화석아, 너는 어떻게 화석이 되었지?' 라고 물어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진화론 과학자들도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대와 역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 대답은 너무 간단하다. 그러나 그 개념이 이 책의 중요 공격 목표이다. 이 책에서 나는 암석과 화석의 연구방법과 그것들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결론이 내려지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그런 연구 방법이 보통 어떻게 진행되는지 왜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진화론자들도 대부분 훌륭한 과학자들이다. 그들의 이론들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혼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다만 진화론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마음의 덫을 보여 주고, 보다 나은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제 어떻게 암석이나 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지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것이지만 실제 전형적인 방법이다.

  

연대 측정은 보통 어떻게 수행되는가? 자, 당신이 아주 잘 보존된 화석을 담고 있는 석회암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 암석의 나이를 알고 싶어서 근처 대학의 지질학과의 한 교수에게로 가지고 갔다. 다행히 그 교수는 당신이 가진 암석에 흥미를 갖고 있어서 나이를 측정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교수는 '탄소 연대 측정은 오직 유기물질에 사용될 수 있지 암석에는 사용될 수 없다'며, C-14 연대 측정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화석도 암석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탄소 연대 측정은 이론적으로 과거 수천 년의 역사에만 유효한데, 당신의 화석은 수백 만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전문가는 화석을 담고 있는 암석의 종류는 퇴적암인데 이런 암석은 방사성 연대 측정법에 의해 정확하게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며, 방사성 동위원소의 농도를 측정하지도 않는다.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오직 용암과 화강암 같은 화성암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대신 그 교수는 화석의 모양과 특징만을 연구할 뿐이며, 화석의 나이를 앎으로써 그 암석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편의상 당신의 화석이 조개라고 해보자. 물론 지금도 많은 종의 조개들이 산다. 그런데 이 조개는 당신이 이제껏 보아온 것들과 약간 다르게 생겼다. 그 교수는 과거에 많은 종류의 조개들이 살았으며, 그것들은 지금 조개들의 조상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멸종되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는 무척추 고생물학이라는 책을 꺼내 조개에 대한 페이지를 편다. 조개 그림이 많이 있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씩 다르다. 교수는 책에 있는 그림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더니 마침내 당신의 조개와 아주 비슷한 것을 찾아낸다. 그림 아래에 있는 설명을 보니 시준화석으로 약 3억2천 만년 전의 것이라고 되어 있다. 교수는 만족한 표정과 확신 있는 어투로 '당신의 암석은 약 3억2천만년 되었군요'라고 설명한다.

  

정작 암석은 조사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암석의 연대는 그 안에 있는 화석들에 의해 측정되고, 그 화석의 연령은 시간에 따른 진화론적 연대표에 의해 측정된다. 석회암 자체는 시대를 불문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해 암석을 사용할 수는 없다. 화석들이 암석의 연대를 결정하고 진화론적 연대표가 화석의 나이를 결정한다. 석회암은 흔히 화석을 포함하고 있지만, 어떤 석회암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화석들이 아닌 매우 미세한 입자 층으로 되어있다. 많은 석회암의 경우 화석들은 분쇄되어 파편들로 되어 있고 사암과 셰일(혹은 혈암)같은 퇴적암들은 전혀 화석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당신이 물어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교수는 층서, 즉 지층들이 어떻게 발견되는지에 대한 정보, 제일 오래된 것(즉 제일 오래된 화석을 담고 있는 것) 위에 보다 최근의 것이 쌓이는 식으로 지층이 발견되는 방식에 대해 짤막한 강의를 해준다. 이해가 간다. 분명 밑의 지층은 위층이 생기기 전에 퇴적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신이 '그 연대는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라고 물으면, '그 지층이 담고 있는 화석에 의해서'라고 대답한다.

  

많은 퇴적암들은 그 암석만 가지고는 전혀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퇴적암이 진화체계 내에서 연대를 나타내는 화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위층과 아래층에서 화석을 담고 있는 다른 층을 찾아서 그 암석의 연대를 그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한다'고 교수는 말하였다. 그와 같은 층이 동일 지역에 없을 수도 있지만 옆으로 층을 추적해 가다 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운 좋게 당신의 암석은 그 안에 좋은 화석, 진화 역사에서 오직 한 기간에만 살았던 생물로 정의되는 시준 화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다른 조개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다른 조개에는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종류의 조개를 볼 때 우리는 그 조개 화석을 담고 있는 암석은 3억2천만년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조개는 3억2천만년 전에 살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화석은 시준 화석이 아니다. 많은 조개, 달팽이, 곤충, 심지어 단세포 생물조차도 수억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고 여러 지층에서 발견된다. 그 생물들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만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석의 연대를 알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오직 시준화석만이 유용한데, 이것들은 한 암석층에서만 발견되어 지질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화석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 암석의 연대를 그것에 따라 추정한다.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이 사고 과정이 순환논리임을 깨닫도록 하자. 이 논리는 결코 과학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관찰로부터 결론에 이르는 대신, 결론이 관찰을 해석하고, 관찰은 결론을 '증명'한다. 화석들은 진화를 지지하는 중요 증거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암석의 나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시준화석의 진화 단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시준화석은 암석의 나이에 의해 자동적으로 연대가 결정되고 배열된다. 그래서 암석은 화석의 나이를 결정하고, 화석은 암석의 나이를 결정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굳어진 용암을 발견했다고 하자. 분명히 그것은 화석을 담고 있지 않지만, 당신은 이 암석의 나이도 알고 싶어한다. 지질학과에 근무하는 교수는 지구 물리학과에 가보라고 추천한다. '거기 가면 이 암석의 나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요' 라고 말한다. 당신의 암석을 보자 지구 물리학 교수는 매우 기뻐한다. 그는 이 암석이 그 속에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들의 함량 비의 정확한 측정에 기초하는 방사성 연대측정 기법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일단 그 비가 알려지면 수학 공식에 대입하여 그 암석의 절대 연령을 얻을 수 있다. 불행히도 그 검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암석을 가루로 빻아서 특정 광물을 분리해야 하고, 그 광물을 비율을 결정하는 연구소로 보내 결과 보고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컴퓨터로 방정식을 풀어 연대를 결정한다.


  지구 물리학자는 이 검사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들지만, 당신의 암석이 매우 흥미있고, 자신이 연구비가 많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비용을 전혀 받지 않겠다고 알려준다. 게다가 그는 당신의 암석에 대해 여러 개의 다른 검사를 수행할 것이다. 우라늄-납(U-Pb) 방법, 포타슘-아르곤(K-Ar) 방법, 루비디움-스트론티움(Rb-Sr) 방법, 그 외 여러 방법들이 있다. 이것들은 전체 암석 혹은 암석 내의 개별 광물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들은 모델 혹은 isochron(등시성) 기법에 의해 분석될 수 있고, 이상의 여러 방법들은 동일 암석에 적용된다. 그리고 바위의 절대 연대를 알려주는 것이다. 여러 주 후에 그 교수는 전화를 걸어 당신에게 결과를 알려준다. 마침내 당신은 암석의 실제 연령을 알게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다른 검사들의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각 방법마다 나이가 다르게 나온 것이다. '같은 암석에 대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당신은 의아해한다.

     우라늄-납 방법으로는 5억 ± 2천만 년의 나이였다.

     포타슘-아르곤 방법으로는 1억 ± 2백만 년의 나이였다.

     루비디움-스트론티움 모델 검사로는 3억2천5백만 ± 2천5백만 년의 나이였다.

     루비디움-스트론티움 등시성 검사는 3억7천5백만 ± 3천5백만 년의 나이였다.


  그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뒤따른다. '당신은 이 암석을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이 용암을 담고 있는 노두(露頭)근처, 위 혹은 아래에 어떤 화석들이 있었나요?'  당신이 그 용암이 3억2천만년된 화석을 담고 있는 석회암층 바로 아래 있었다고 보고할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루비디움-스트론티움 연대가 정확합니다. 당신의 암석이 3억2천5백만년과 3억7천5백만년 사이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검사들은 부정확한데 아마 약간의 침출이나 오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화석들이 암석의 연대를 결정하고, 화석은 진화론적 연대표에 의해 그 연대가 결정된다. 이 이야기는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보통 이런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해석의 도식이 이미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각 연대 측정 결과는 진화의 가정에 의해 평가-수용 혹은 거부-되어야 한다. 연대 측정의 전과정이 오래된 지구 각본 안에서 진행된다. 오래된 지구 관점에 어긋나는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못한다. 참된 증거가 무엇을 보여주든지 간에 진화는 견고하고 오래된 지구 사상들은 견고하다. 별개 사실은 그것이 진화의 일치하는지 여부에 따라 타당한 증거로 채택되든지 거부된다.

 

 이 딜레마에 대해 몇몇 진화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첫 번째 사람은 고생물학자 데이비드 키츠 박사인데, 우리는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함께 재직했다. 열렬한 진화론자인 키츠 박사는 정직하고 우수한 과학자이며 훌륭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진화의 기록은 다른 역사적 기록과 같이 특별한 선개념과 일반적인 선개념의 복합체 내에서 구성되었고, 그 가정은 진화는 일어났다는 것이다." -  David Kitts, Paleobiology, 1979, pp.353,354

 "'이것은 어떤 문제를 야기한다. 만약 우리가 화석에 의해 암석들의 연대를 측정한다면 어떻게 돌아서서 화석 기록에서 시간에 따른 진화적 변화 유형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Niles Eldridge, Time Frames, 1985, p.52

  "순환 논리가 발생한다 : 진화론에 의해 화석 기록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조사해보고 그래서 그것이 진화론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자,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 Tom Kemp, 'A Fresh Look at the Fossil Record', New Scientist, Vol. 108, Dec. 5, 1985, p.67


하나님의 형상대로

순환적 사고가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인가? 보다 나은 결정은 없는가? 과학자들은 영원히 이 원 안에서 달려야 할 운명인가? 인간의 사고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성경은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피조물을 연구함으로써 확실한 사실, 특히 만물이 어떤 것 혹은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피조물들의 특성은 그 조물주의 특성을 드러낸다. 확실히 이것은 자연인이 그의 감각과 사고력을 통해 아마도 어떤 한계 내에서 정확한 관찰과 해석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관찰자가 어떤 핑계를 하지 않는 한 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거나, 조물주가 있지만 그 또한 만물의 일부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피조물을 연구함으로써 적어도 창조주의 본질에 대한 이해,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구절은 사람들이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인된 분명한 진실, 즉 바른 결론에 항상 이르지는 못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창 1:27).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무소부재하지도 않다. 반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능력과 특성을 부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을 부여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의 육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하나님은 그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7), 구약 시대에도 때때로 그러하셨다 (창 18장, 24장 등). 다른 예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 혹은 활동을 말씀하면서 그의 손, 얼굴, 혹은 팔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 하나님이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그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은 주로 사람이 인격적, 합리적 그리고 도덕적 자질을 가졌고 神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이 점에서 사람은 다른 동물과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사람의 물리적 그리고 감정적 구성의 많은 부분이 동물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동물들은 종류대로 창조되었으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어느 정도 적절하게 그 분의 영광과 속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 형상은 태초에는 '심히 좋았다' (창 1:31).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며 단지 그의 형상을 나타낼 뿐임을 인식하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위대한 잠재적 능력을 수반한다. 아담과 이브가 수행하도록 명령받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창 1:26,28).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그들과 그 후손들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대신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길을 택했고,그 분의 진노를 촉발하였다 (창 3). 그들은 죽음의 벌을 받게 되었고,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죽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도 손상되어 사람의 영적, 정신적 능력도 줄어들었다. 이브로부터 시작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죄의 결과를 피하고 권력의 자리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시인하기를 거부한다. 오늘날 아담의 후손들이 자주 거짓 결론에 이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버렸다 (롬 1:21, 22).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 14:1).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였다 (고후 4:4).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엡 4:18). 이 불완전한 사고 능력과 진리를 향한 열망의 부족은 불완전한 논리와 의미 있는 자료들을 발견하고 분간하고자 하는 마음의 부재와 맞물려서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 으로 이끈다 (딤전 6:20). 이론적으로는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도 진리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 궁극적 의미에서 사람은 이것을 거의 성취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창조는 일어났으나 과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대개 희미한 근사치를 성취하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다. 아마도 타당한 관찰과 이 관찰에 대한 해석을 분리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해석 과정이 무신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타당한 관찰을 수행할 수 있다. 과학자는 한 암석 내의 원소들의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고, 다른 암석층에서의 층서학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화석을 기술하고 분류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른 화석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암석과 화석의 퇴적과 그 시기는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와 기원을 해석하기란 훨씬 어렵고 매번 순환논리에 의지해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대안은 있는가?

창조론자는 순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설득력 있는 과학자는 순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해야만 하는가? 앞에서 인용했던 3 명의 진화론자들처럼 신중한 태도로 거부해야 할 것이다. 순환 논리는 과학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다 잘 할 수 있다. 그 열쇠는 처음부터 가정을 갖고 출발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있다. 진화에 대한 가정이 과학에 꼭 필요한가? 현대 진화론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그렇지 않다. 다른 가정들은 가능한가? 그렇다! 좋은 과학이 자연주의에의 배타적 헌신 없이도 가능한가? 확실히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의 집합이 옳은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을 논의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극소수의 사람만 인식하며 진화론자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말이다. 과학은 현재를 다루며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에 국한된다. 과학적 이론들은 다른 것들도 포함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현재 존재하는 자료와 과정의 관찰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먼 과거를 본 적이 있는가? 암석과 화석들은 지금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연구하며 실험한다. 이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난다. 과학적 방법은 현재를 다룬다 (물론 인류 역사 이내의 관찰과 기록은 관찰자를 신뢰할 수 있는 정도 내에서 사용 가능하다).

  

과학적 이론은 또한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잠정적으로 반증 가능해야 한다. 즉 그것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가능한 방법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과거에 대한 사상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진화(혹은 창조)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기 위해 어떤 검사를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과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재현 가능성이다. 이것은 오늘 어떤 사건이나 물체를 관찰했을 때 내일 관찰해도 똑같을 것임을 의미한다. 유사한 사건들은 유사한 결과와 유사한 관찰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오직 한번 일어났다면 그것을 관찰하고 결과를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 사건이 반복될 수는 없다. 오직 한 번 일어나는 사건들 중 지구의 기원과 같은 사건들은 전혀 관찰조차 할 수 없었다. 과학자들이 어떤 사건의 결과 혹은 그 이후의 결과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일회적 사건의 충분한 재구성은 가능하지 않다. 이 개념이 어렵지만 좀 더 설명해 보겠다. 내가 과학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의 한계를 보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지질학은 존재하는 암석과 화석의 성질, 그리고 그것들의 형성과 변형 과정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암석의 미래에 대한 예견은 다른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역사 지질학(암석과 화석의 관찰되지 않은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런 어려움이 생물학, 생태학, 천문학, 고고학 등에도 존재한다.

  

진화가 정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찰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고,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진화의 각 단계도 단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라. 어느 누구도 생명이 없는 무기 화합물로부터 생명이 시작된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는 누구도 어떤 종류의 생명체로부터도 완전히 다른 종의 생명체 (대진화)가 발생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 누구도 의미있는 진화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조차 한 적이 없다. 동식물 집단 내에서 현재도 일어나는 작은 변이(소진화) (예, 곤충의 DDT 저항성, 후추나방의 지배적인 색의 변화 등)는 진화적 변화가 아니다. 실제로 창조는 창조된 종류 내에서의 적응과 변이를 허용하기 때문에 작은 변이는 완전히 창조론과 양립할 수 있으며, 그것 자체가 진화의 증거는 결코 아니다. 주요 변화(대진화)는 결코 과학적으로 관찰되지 않았으며, 공통조상으로부터의 진화 이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도 없다.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것이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진화는 과거에 대한 과학자들의 믿음(신념) 체계이며, 그들은 이 역사관을 현재의 증거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창조가 정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찰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며 현재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창조가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창조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도 없다. 그것 역시 과학자들이 과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참고> 증명을 위해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능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관찰과 반복성을 요구하는 과학적 증명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신뢰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어떻게 성경이 권위적이며, 그것의 저자는 신뢰할만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로 책을 썼고 저자들마다 약간씩 다르게 접근하며 나도 나의 견해가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믿음의 맹목적인 도약이 아니라는 점만 말해두자. 우리 모두는 현실 세계에 살고 있고, 이 현실 세계는 항상 세련된 철학적 틀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가설이 현실에 잘 적용되는지 관찰할 수 있으며 실제로 관찰하고 있다. 어떤 가설이 반복적으로 적용되지 않거나 우리가 알고있는 지식에 위배된다면 우리는 그 가설을 버린다. 성경의 많은 내용은 시험과 반증이 가능하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보면 그것이 진실이거나 최소한 사실일 가능성 (충분한 자료와 완전한 사고 능력이 동원되는 전제하에서)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비평가들이 성경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지만, 객관적이고 엄격한 연구에 의해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의학, 경제학, 과학,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타당한 원리 내지 발견과 부합됨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성경의 예언들이 기록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성취되는 것을 본다. 사회와 가정이 성경적 원리를 따른다면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회와 가정도 번영할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사랑, 정직, 그리고 진실과 같은 성경적 가치들이 옳다는 것을 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역사(役事)한다. 우리는 성경이 모든 영역에서 유익한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안다. 다른 제도들과 가르침들은 그렇게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믿음으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그 지식에 대한 우리의 해석 또한 기꺼이 다듬어가야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참되고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정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과학적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이 옳고 모든 영역에서 적용 가능하다는 믿음을 견지하는 것은 타당하다. 성경은 최근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연구와 지식을 이끌 수 있는 기본적인 과학적 모델, 즉 이 세상의 과학이론 시장에서도 고려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창조는 인간이 관찰할 수 없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진화와 창조는 모두 경험과학 영역밖에 있고 과학적 방법에 의해 접근할 수 없다. 관찰할 수 없고 되풀이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의 범주에 속한다. 현시점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를 있게 한 과거, 하지만 관찰할 수는 없는 과거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가능한 한 가장 논리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나, 그 어떤 역사적 재구성도 증명할 수는 (혹은 부정될 수는) 없다. 기원에 관한 어떤 관점도 궁극적으로는 믿음에 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으로 역사에 대한 창조의 관점이 옳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조금의 의심 없이 이것을 사실로 알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나는 창조주를 개인적으로 알며, 과거 사건들에 대한 그 분의 설명을 믿는다. 그는 그 곳에 계셨으며 그 모든 일을 하셨다. 그 분의 기록인 성경은  과학적 세부 지식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나 자신의 과학적 연구를 지도할 일반적 체계를 제공한다. 나는 그것이 실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임을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원

여건이 같다면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사고하기 때문에 비성경적(즉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비그리스도인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없는 자원, 즉 성령께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저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 라고 가르치셨다 (요 16:13).  하지만 성령의 임재가 바른 결론을 보장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현실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도 죄가 관영한 세상에 살고 있고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세속적인 관점으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오류를 없애는데 어려움을 갖고 있다. 개인적인 죄는 어떠한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잘못된 습관에 대해 승리할 수 있지만, 죄는 아직도 우리의 사고 과정을 흐트러뜨리고 온전한 성령의 주관을 억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른 관점에서 시작할 수 있고 매번 정도는 다를지라도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 성령의 사역, 곧 내적 확신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 우리가 더 많은 정보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성숙이 깊어질 때 우리는 기꺼이 생각을 보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비그리스도인들보다 진리에 도달할 잠재적 능력을 훨씬 많이 갖고 있다. 성경에 주어진 고대 역사에 대한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창조의 결과인 동물과 식물의 유형을 연구할 수 있다. 또한 노아 시대 홍수의 결과인 화석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구 퇴적암을 연구할 수 있다. 창조와 홍수를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실제 일어났었음을 확신하고 바른 역사적 사고 체계 내에서 현재의 증거와 과거의 결과를 해석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지식의 빠진 부분을 채울 수 있고, 보다 만족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성경이 옳고 창조, 저주, 홍수, 바벨탑 사건이 실제 일어났었다면, 진화론적 역사를 인정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만일 누가 참 역사를 부정하고 잘못된 가정을 수용한다면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분명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되었을 테고, 실제 사건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것에 비해 질이 떨어질 것이고, 내적 일관성도 없을 것이고, 과학적으로 만족할만하지도 못할 것이다. 자료들이 이론에 들어맞지 않아도 그 이론이 틀리다고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 언제든지 그 증거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사실이고 증거는 증거라는 것을 유념하자. 오직 믿음으로 창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사실에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의 믿음에 반하는 어떤 것이 발견될까 겁낸다. 그래서 차라리 대면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사실들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가정들과 양립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염려해서는 안 된다. 사실들은 암석 같은 것들이고, 그것들은 말을 하지 못하며, 한 사람의 가정에 의해 해석되어야만 한다.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교수들은 자주 시인했다. '가치 판단이 배제된 사실같은 것은 없다'. 특히 관찰되지 않은 역사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사실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어떤 의미를 갖기 전에 존재하는 세계관 내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실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을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과학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자라갈 때 우리의 전제들을 기꺼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는 분명 존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꾸준히 연구하여 그것을 밝혀 내도록 해야 한다.

  

관찰되지 않은 과거에 관한 사실 혹은 자료들이 보통 하나 이상의 세계관 내에서 하나 이상의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하지만 두 가지 해석이 다 옳을 수는 없다. 이 장의 시작에서 언급한 화석이 바로 그 예이다. 그 조개 화석은 진화론적 역사 재구성에 의하면 다른 동물, 궁극적으로는 단세포 생물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견해에서 그 조개는 3억2천만년 전에 살았고, 그 후대 생물들은 멸종되었던지 지금의 조개로 그 계통을 유지해 왔다고 본다. 혹은 창조론적 역사 재구성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 기간 동안 퇴적물 속에 묻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창조 5 일째 창조된 '조개' '종류' 안에서 처음부터 조개로 그때까지 번식해 왔다. 다른 조개들은 홍수 기간 동안 살아 남았고, 그 종들이 오늘까지 살아있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 창조론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 기록을 수용한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창조론의 관점에 근거한 과학적 연구는 결코 사소하지도 비생산적이지도 않다. 그 견해의 세부 사항들은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고, 알아야 할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특정 화석 퇴적물의 구체적인 것들을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역사를 부인하는 자들은 결코 그럴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논리를 반박하고 현재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열등한 재구성을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 과학과 과거의 재구성 영역에서도 성경에 따라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주어진 사고 체계 내에서 과학적 자료를 해석해야 한다.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가?

  역사에 대한 견해가 결국 과학적으로 증명 혹은 부정될 수 없다면 무슨 희망이 있는가? 창조/진화 논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해결할 수 있는가?  가정 혹은 전제 수준에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 논쟁에 진전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사실들은 역사에 대한 두 가지 모델에 어느 정도 일치한다. 양쪽 진영에서 모두 좋은 과학이 수행될 수 있고, 해석들은 각 모델 내에서 일관적일 수 있으나, 서로 매우 다르다. 이 도식 묘사는 그 점을 잘 나타내 준다. 그것은 현재의 여러 상황에서도 사실인데 한 예로 정치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가정(假定)은 성령의 인도와 그 가르침에 복종하는 자세로 성경의 신중하고 정직한 해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진화론자의 가정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일차적 위치에 있는 과학자들의 능력을 불필요하게 높게 평가하는데서 온다. 그들은 전체 중 일부 자료에 의지하고 잘못될 수 있는 논리적 도구를 사용하며 필요할 때 관찰을 위해 그 곳에 있지도 않았던 유한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과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나 한계를 갖고 있다. 나는 거의 모든 진화론자들이 단순히 진화론이 그들이 이제껏 배운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부터 그들을 지도했던 사람들은 오직 무식한 근본주의자들 (편평한 지구를 믿는 사람들)만이 창조를 믿는다는 잘못된 개념을 주입시켜 왔다. 그래서 그들은 연구를 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거부한다. 결코 창조에 대한 신뢰할만한 변호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진화가 유일하게 적법한 관점이라는 거짓말을 계속한다. 이 오류는 과학을 창조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로 재정의함으로써 심화된다.


혜성들 : 가정과 해석

두 모델을 흥미로운 사례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태양을 타원 궤도로 도는 태양계 내의 혜성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혜성이 태양을 한 번 돌 때마다 질량의 얼마를 잃는다는 것을 관찰한다. 혜성의 질량과 시간에 따른 잃는 양을 측정함으로써 많은 혜성들, 특히 회전 주기가 짧은 것들은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젊은 지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태양계가 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태양계가 수백 만년 되었다면 짧은 회전 주기를 가진 혜성들은 모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성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태양계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얼마나 단순하고 쉬운 논리인가?

  

그러나 '오래된 태양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혜성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들은 현재의 혜성이 오래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시인한다. 그러나 태양계는 오래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태양계 바깥에 가상의 혜성 창고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너무 멀어서 망원경으로 볼 수 없고 어떤 감각 도구로 측정할 수도 없는 곳이다. 그들은 이 가상의(실제로는 상상의) 혜성 구름을 이것을 처음 주장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라 오르트 구름(Oort Cloud)이라고 부른다. 오르트는 '성간(星間)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간혹 안정한 구름으로부터 물질의 일부를 흐트러뜨려 가까운 태양계로 진입하게 함으로 우리 태양계 내에 계속 혜성들을 공급해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신은 그 논리를 제대로 이해했는가?

            가정 : 태양계는 오래 되었다.

            관찰 : 혜성의 수명은 매우 짧다.

            결론 : 젊은 혜성들이 계속해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양계로 들어오고 있다.

'젊은 태양계' 지지자들이 혜성의 나이를 가지고 나오면 오래된 태양계 지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됐어. 혜성들은 오르트 구름으로부터 계속 나오고 있거든'. 이렇게 관찰을 가정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 않고는 그로 하여금 상상의 오르트 구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다. 과학적 관찰 영역 바깥의 사건들, 즉 매우 오래된 일회성의 가정적 사건들을 다룰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참고: 뉴튼과 파스퇴르와 같은 과거의 신중한 과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관찰들은 적법하다. 우리는 항상 과학적 데이터와 자료의 해석, 관찰된 과거와 관찰되지 않은 추론의 과거, 이 차이를 분간해야만 한다. 한편 과학의 많은 선구자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며 창조론자들이었고 성격적 세계관을 갖고 연구를 수행했다. 그 과학자들의 짧은 전기를 보려면 'Man of science: Man of God' (Henry M. Morris)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불행하게도 진화론자들은 그들이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거의 시인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관찰된 사실인양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점과 해석을 제시한다. 학생들이나 일반 사람들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회유되거나 겁을 먹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한 세계관을 수용해 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화를 믿는 진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화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이 배워왔던 모든 것이다. 만약 창조를 언급하면 조롱 당하거나 불공평하게 평가된다. 그래서 진화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옳다고 증명되지도 않고, 창조는 거부되면서 틀렸다고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그들의 가정과 해석 과정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비교, 평가, 합리적 토론이 가능하다. 자신이 전제를 갖고 있음을 시인조차 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추진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증거를 예측하기

각 모델의 형식적 진술이 완료되면 '예측'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자료에 대한 예측이다. 각 모델의 지지자들은 '만약 나의 가정이 옳다면 우리가 자료를 검토할 때 이런 특징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 증거를 보다 잘 예측하는 모델이 더 옳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증명되거나 부정될 수는 없다. 우리는 내적 비일관성을 조사해 봄으로써 예측들을 평가한다. 예측부터 검증까지 일관적인가? 일관되기 위해 이차 조정을 필요로 하는가? 모든 자료에 다 들어맞는가? 전혀 부합하지 않게 보이는 사실이 있는가? 보다 근본적이며 직관적인 수준인데 삶의 실제 현장에서 잘 작동하는가? 상식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상상적인 요소를 요구하는가? 나는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가지고 살 수 있는가? 목적과 희망을 위한 나의 개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가?  적적하고 실용적인 삶의 철학으로 인도하는가? 이러한 평가 과정을 거쳐 우리는 적절한 모델, 즉 과학과 삶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창조 모델에 대해 3 가지 주장을 한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1)그것은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자료들을 다룬다. (2)그것은 진화 모델보다 분명히 우수한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3)그것은 만족스럽고 잘 적용되는 삶의 기초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가정들

1990년 나는 모스크바의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공산주의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번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백 명의 생물학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강의한 적이 있다. 그 때 모스크바 학생들이 미국 학생들보다 흥미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학생들은 교수가 가르친 것을 암기하여 시험에서 기억해 내도록 요구받는 반면 러시아 학생들은 전제를 기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당시 러시아인들은 공개적으로 무신론과 자연주의적 과학관을 시인하는 반면 많은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은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암묵적으로 자연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미국인보다도 더 한층 전제를 기초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고, 다른 모델에 직면할 때 겁을 덜 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러시아인들은 전적으로 진화론적 사고로 기울어 있었다. 공산주의는 변함없이 무신론에 기초하고 있고 공산주의가 붕괴할 때까지 현 세대는 계속해서 무신론에 대해서만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진화론은 공산주의 세계관에 과학적 신뢰성을 제공하였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나는 이란의 샤(Shah) 정권 아래 자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어 공산주의를 더 알기 위해 1년 동안 모스크바에 유학생활을 했던 한 학생을 기억한다. 그가 오클라호마 대학의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알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그가 무엇을 배웠을 것 같은가? 마르크스? 아니다. 레닌? 아니다. 일년 내내 그는 진화론을 배웠다. 진화는 막시즘에 꼭 필요한 기초이다. 진화가 사실이면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 자연적 과정들로부터 나온다. 시간에 따른 진화는 필연적이고, 막시즘은 가장 진화된 사회적·정치적 체계라고 주장된다.


  러시아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은 과묵하며 강의 장소에서 거의 금욕적인 경향이 있다. 70년 동안 초청교수 같은 권위 있는 사람들을 매우 존경하여 감정을 보이지 않도록 요구되어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강의동안 나는 어떤 청중의 반응도 관찰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과학의 전제적(presuppositional) 성격과 창조론적 전제의 적법성, 그리고 그에 따른 해석들의 과학적 논리에 초점을 맞춰 말했다. 나는 도식을 사용하여 가정 A와 B는 각각 해석 A와 B를 낳는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오직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해석만 가지고 있는 도식을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이것이 러시아에서 수행되는 방식이고, 그들이 교육받았던 방식이라는 것을 부각하였다. 놀랍게도 방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 점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 반응에 고무되어 나는 통역자를 통해 '이것은 교육이 아니고 세뇌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의미있는 웃음이 방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 분위기를 더 띄우기 위해 '이것은 당 노선을 따르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들은 웃음을 머금고 자기들끼리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그 도식 속에서 그들의 교육과 자기 자신들을 인식했고 그들이 보았던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점으로부터 학생들과 교수들은 집중해서 그 자체적으로 그리고 실제 세계와 일관성을 가진 창조론적 세계관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강의를 마치자마자 기자들이 몰려와서 취재를 하더니 나에 대한 기사와 여행 일정까지 프라우다 지에 게재하였다. 이런 일은 이제껏 없었다. 나의 여행은 기드온 모스크바 지부의 일부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들은 방금 성경을 배로 가득 받았다. 성경은 학생들에게 있어 이제껏 본 적도 없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내 강의가 끝났을 때 창조를 가리키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정보가 제시되었고 학생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창조의 증거가 이렇게 많다면 하나님은 계셔야만 한다. 이 하나님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학생들이 그런 질문들을 갖고 강단에 올라올 때 기드온 협회의 사람들이 상자 속에 든 성경을 배포하였다. 창조가 가진 자유케 하는 힘은 어둠 속에서조차 큰 능력을 갖는다. 반대로 진화론적 사상은 많은 비애를 가져왔다. 막시즘은 진화론과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책, 「종의 기원」이 사회 영역에서의 진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과학적 신뢰성을 부여하였다고 생각했고 그의 책 「자본론」을 다윈에게 헌정하였다. 진화의 이름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악들이 특히 막시스트와 전체주의 국가에서 고착화 되어왔다. 오늘날 서구의 많은 사회적 병폐들 또한 그들의 삶과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진화론을 채택한 결과들이다. '생각이 행동을 낳는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1993년 중국 베이징에서 2,700명의 중국 관료, 대학생, 공산당 간부들로 가득 찬 군중들에게 연설했을 때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정부는 그리스도인 전문가들을 초청해 기독교가 중국에 주는 가능한 유익들에 대해 연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집회를 조직하고 강의 제목을 정하고 강사들을 선정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창조의 세계관이 과학에 주는 유익을 토론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몇 달의 준비 기간을 거치는 동안 정부는 내 강의를 포함해서 많은 발표들을 여러 번 취소하였다. 그러나 매번 내가 그 강연회 준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 때문에 다시 번복되었다. 그들은 내가 말할 것에 대해 매우 부담스러워 했으나, 그것을 취소함으로써 체면을 잃을까봐 꺼려하였다. 마침내 강연회 전날 밤 그것은 다시 취소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내가 강의할 주제는 그들 세계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협상에서 내 이름과 강의 주제가 이미 프로그램 순서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창조, 진화, 기독교 혹은 성경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전공인 지질학 연구에 대해 말할 것을 동의한다면 강연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했다. 다른 중요한 주제 강연들이 모두 취소되었고 이것만이 그래도 무언가 말할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다. 나는 1980년 헬렌산의 화산 폭발에 대해 슬라이드로 강의하고 과거의 관찰되지 못한 지질학 사건들에 대한 해석의 함축들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발표에서 과거에 대한 단순한 해석 이상의 것을 포함시켰다. 나는 미국 교육이 초기부터 이학 박사 학위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불완전한지를 보여 주었다. '헬렌산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많은 정보가 나의 교육이나 모든 지질학 교육에서 빠져 버렸다. 이런 새로운 '격변적' 사상들은 지질학에서 매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정보와 학생들의 사고 방법을 규제하는 것은 학생에게나 그 같은 세뇌에 참여하는 나라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준다.' 앞줄에 앉아 있었던 공산당 간부들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들은 매우 화난 것처럼 보였다. 반면 학생들은 기뻐하였다. 그들은 이제까지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과학자들이 나에게 모여들었다. 그 중에 과학원장도 있었다. 그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들에 대해 장시간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나를 여러 대학들에 초청하였고, 심지어 격변설이 석유와 광물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티벳 지역 야외 탐사에 합류하도록 초청받았다. 검열과 세뇌를 시인한 사람들은 바로 보호해야할 세계관, 이 경우는 진화에 기초한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는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 함축을 지닌 과거에 대한 철학적 세계관이며,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조주 하나님 없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미친 시도이다. 그것은 결국 나쁜 과학, 참 역사의 부정, 그리고 그것을 채택한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큰 불행을 가져온다. 하나님이여, 너무 늦기 전에 이 나라가 빛과 논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소서.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연대문제/연대문제와 성경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L05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연대문제/젊은 우주와 지구에 있는 많은 자료들을 참조하세요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L04



제 125호 [2001. 5~8]

번역 - 조정일

출처 - 창조지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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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4-07-26

창세기 6일 창조에 대하여


      보통 우리가 성경의 창세기 제1장을 읽을 때,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6일(24시간 하루) 동안에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많은 교회 내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날들(days)” 이라는 뜻이 수천 년 혹은 수백만 년, 더 나아가서는 수십억 년에 걸친 기간 일 수도 있다는 견해들이 나돌고 있다. 이 날수들이 실제로 얼마의 기간이었는지가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이 날수들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ordinary) 날들인지, 혹은 더 긴 기간이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날(day)’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날(day)’ 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yom' 이다. 그 의미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인 하루, 혹은 24시간 중 낮부분(밤과 구별되는 낮), 혹은 정해지지 않은(indefinite) 어떤 기간의 의미로(예를 들면 사사시대, 혹은 주님의 날) 사용될 수 있다. 모든 히브리어 성경에서의 단어 ‘yom’은 ‘기간 (period)’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확실한 오랜 기간을 지칭하는 데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 주목해야할 것은 ‘yom’ 이라는 단어가 정해지지 않은 어떤 기간의 의미로 사용될 때 ‘day’ 라는 단어의 의미가 문자적 의미로 의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문맥 내용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타난 'day’ 라는 단어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중요한 점은 맨 처음 그 단어가 사용될 때는 상징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 우리들은 예수께서 '문(door)” 이라고 하신 말을 듣는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우선 단어 'door(문)'가 들어가는 입구(entrance)를 의미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말의 문자적 의미를 우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징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door)’ 이라는 단어는 우선 우리가 그것의 문자적 뜻을 이해한 후에 이런 식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어의 문자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므로 'day'라는 말은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사용되는데, 이것이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이것이 바로 창세기 기자가 처음에 나오는 'day'를 자세하게 심사숙고하여 정의하려 노력하는 이유이다. 창세기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으로부터 나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l:15절에서는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을 읽게 된다. 바꿔말하면 이와 같은 용어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day'이란 용어가 어두움이 ‘밤’과 구분되어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빛'으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1:5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것이 첫째 날이라”로 끝맺는다. 이것은 바로 나머지 5일들에 사용된 귀절들과 동일한 것으로, 명확하게 확립될 낮과 밤의 주기 즉 빛과 어두움의 주기를 보여준다. 6일간의 각 날에서의 빛의 주기는 마침내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하셨을 때이고, 어두움의 주기는 창조사역을 하지 않으셨을 때를 의미한다. 

 

하루와 태양

그런데 만일 태양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낮과 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창세기 1장에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태양은 4일에 가서야 창조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는데, 이 문구 "저녁과 아침”을 보면 빛과 어두움의 주기가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빛은 존재하고 있었고, 자전하는 지구에 어떤 고정된 빛의 원천으로부터 직접 얻어져서 낮과 밤의 주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히 이 빛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창세기 1:3절에서 ‘빛’이라는 단어는 빛이 창조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4절 19절에서 우리는 4일째에 태양이 창조되어서, 그 이후로 계속 빛의 원천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태양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낮’을 주관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낮'은 전과 같이 유지되었으며, 단지 빛의 원천이 새로워졌을 뿐이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의 처음 3일간은 태양이 창조된 이후의 3일간과 같은 형태의 날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태양을 제 4일째 창조한 가능한 이유 중에 하나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인류가 태양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여 태양을 숭배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진화론적인 우주 기원에 대한 이론으로는 태양이 지구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태양보다도 지구와 빛을 먼저 창조했다고 말씀한다. 태양은 제 4일째에 창조되어,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되었다.


창세기의 창조 일들을 보통의 24시간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커다란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연대를 과학자들이 증명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절대적 연대측정 방법은 없다. (그 예로서 방사성동위원소 방법에서 초기 조건이 불명확하며, 붕괴속도가 과거나 현재나 동일했다고 가정하고 있지만,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엿새인가?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힘과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지혜 등을 가지신 분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하고자 원하시는 일은 시간을 끌지 않으시고 즉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즉시 온 우주와 땅과 그 속의 모든 것을 창조해온 창조사역이 가능한 분이시다. 아마도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의문은 왜 하나님은 어떻든지 간에 엿새 동안의 기간을 택하셨을까? 하는 점이다. 결국 엿새란 기간은 무한하신 존재인 하나님께는 어떤 것이든 창조하시는데 너무 긴 시간이란 점이다.


그 해답은 출애굽기 20:11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은 10계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계명은,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는 바대로 바로 그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표시된(하나님이 친히 쓰신) 돌판에 기록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 31:18).”

20장 9절에 기록된 네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고, 하루는 쉬도록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11절에 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된다.

이 점에 일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우리는 반드시 일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날(day)’ 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은 무엇이든지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만약 ‘날’ 이란 말을 창세기의 긴 시간의 한 기간의 뜻으로 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유익한 방법은 ‘하루’란 정해지지 않는 시간, 또는 측정하기 힘든 기간 (정의되는 시간은 아니)이란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 9-11절의 인식은, 일해야 하는 여섯 정해지지 않는 기간과 휴식하는 일곱번째의 정해지지 않는 것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넌센스이다. 하루(날)들을 통상의 날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가 통상의 6일 동안 일하시고, 통상의 하루동안 쉬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 통상의 하루(24시간)는 우리가 지금도 살고 있는 7일 한 주일의 생활양식 그 양식을 인간에게 정해 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기 출애굽기 20장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에 엿새의 기간을 택하셨는지 ?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날-시대 이론의 모순 (문제점)

창세기의 '날'들을 하나의 긴 기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일관성이 없음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창세기 1:26-28절에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아담)을 제 6일에 만드셨다. 아담은 남은 부분과 제 7일을 살았는데, 창세기 5:5절에 보면 930세에 죽었다(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을 마치고 안식하셨다고 한 창세기 2:2절을 "아직도 안식하고 계신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이, 오늘 우리는 아직도 제 7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만약 하루가 백만 년이었다고 하면 참으로 문제가 생긴다. 실인즉 하루가 천 년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담이 죽었을 때 나이가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하루가 천 년같이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후서 3:8의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 귀절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루를 천 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시편 90:4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벧후 3장과 시편 90편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이 자연적인 현상이나 시간에 의해서도 전혀 제약받지 않는 분임을 의미한다. 이와 반면에 시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다. 시간에 매여 있지 않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두 성경귀절 모두 창세기에 나오는 날들과 같은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음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을 베드로후서 3장에서 설명하는 문맥 내용은 시간이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창세기의 창조의 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3:8에서 하루라는 단어가 천 년과 대조되고 있다. '하루' 가 '천 년' 이라는 귀절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대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메시지 핵심은 사람이나 자연이 완성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자연의 무작위 현상에 의해서 사람으로 진화하려면 수백만 년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을 주목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수백만 년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성경 말씀을 덧붙여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는데 수백만 년이 걸렸다고 말하고 있다. 진화론에서는 오랜 기간이 요구되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이 벧후 3:8의 요점이다.


베드로후서의 "하루가 천 년 같다"라는 귀절 앞부분에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쫓아 행하며 기롱하여 말하기를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라는 설명이 있음을 주목하는 것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마치 수백만 년 동안 만물이 계속되어왔다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세에는 사람들이 만물이 여전히 계속되어왔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간섭하심을 믿지 않는다.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는 말은 바로 현대의 '동일과정설” 개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지질학에서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라는 관점으로(즉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처럼 수백만 년 동안 이 세상이 계속 진행되어가고 있다) 현대 지질학에서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다. 참으로 이 개념이 현대 진화론적 지질학의 기초가 되었다. 대부분 현대 지질학자들은 하나님이 수천 년 전에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믿지 않고,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6일동안 만물을 창조했고, 또한 출애굽기 20장에서 설명한 특정 목적 때문에 6일이라는 기간에 걸쳐 창조했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일자와 연한

창세기 1장 14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만약 여기서 일자라는 말이 글자 그대로 하루가 아니고 긴 연한을 의미한다면 연한이란 말을 바로 다음에 또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자와 언약

예레미야 33:25-26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 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게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이 주야가 있도록 하신 그 언약은 깰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다윗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한 언약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야가 있도록 하신 그 약정은 창세기 1장에서 하신 것인데, 만약 주야가 보통 우리가 말하는 24시간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이 언약도 헛것일 것이다. 

 

날짜가 문제가 되는가?

결론적으로 그러면 우리가 날들을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날로 받아들이든지 또는 그렇지 않든지 정말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 이것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참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예로써 우리가 이것을 하루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러면 그 날들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가서는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들도 창세기의 다른 기사들을 그대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분명해진다. 즉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예로써,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흙을 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창세기를 문자가 표현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해야 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자적 해석은 용어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거나, 그것을 해석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분명히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있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때에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갈 것이며, 또는 그 본문에서 우리에게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줄 것이다.


창세기에서 가르치는 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 날들을 보통의 하루로 받아들일 때,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아무런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참조 : Did Jesus Say He Created in Six Literal Day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id-jesus-say-he-created-in-six-days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출처 - 창조지 제 74호 [1991.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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