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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20세기를 마감하면서 -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을 중심으로

20세기를 마감하면서 -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을 중심으로


      타락 이후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섬기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자신들을 올려 놓았다.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바 이 우주와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에도, 태초에 물질만이 있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연이란 과정을 통해 이 물질이 스스로 조직화되고 변화되어 지금의 정교한 우주가 되었다는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진화론은 점점 교묘한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이제는 일반인은 이해하기도 힘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진화는 사실이 아니고, 이 우주는 절대자의 지혜와 의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손길 아래 유지되고 있다는 창조론을 믿는 과학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몇몇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유능한 과학자들이며 일생을 진화론 교육만 받아 왔던 사람들이다. 사물을 보는 건전하고 과학적인 눈이 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인재들이다. 과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진화론에서 창조론으로 전향하게 하였는가? 그들이 창조론을 믿음으로써 모두 과학을 포기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과학적인 방법론과 도구들을 이용하여 면밀히 검토하더라도 오히려 창조론이 더 합리적이고 더 과학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창조과학 운동은 이제 소수 몇몇 과학자들만의 운동이 아니다. 이 운동은 이제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갖고 호응하게 되었으며, 최근 미국의 캔자스주의 결정과도 같이 교육계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창조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창조론-진화론의 논쟁은 과학의 논쟁 이전에 세계관의 차이, 패러다임의 충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며 20 세기를 마감하는 이 때에, 인류역사에 나타난 창조론과 진화론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며, 앞으로 나갈 길을 정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와 생명의 자연발생설

생명의 기원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자연철학자로서 그는 부식토나 썩은 고기에서 작은 생물이 번식한다는 관찰에서 생물은 부모없이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엄밀한 실험을 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생각은 17세기까지 지배적인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었다.


2. 케플러, 뉴턴, 패러데이, 켈빈, 파스퇴르 등 (17~19세기)

역사상 위대한 과학자들 중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창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행성의 운동법칙을 발견한 케플러는 우주에는 창조주가 부여하신 질서와 조화가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역학, 광학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뉴턴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넓은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껍질 몇 개를 줍고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다. 뉴튼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의 연대기와 예언서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전자기 법칙을 발견한 패러데이, 지금도 절대온도 단위에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켈빈경, 발효와 세균학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파스퇴르 등 과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과학자들 중에는 진화를 부정하고 창조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다.  


3. 허튼(1726-1797)과 라이엘(1779-1875)의 동일과정설

근대 지질학의 원조로 알려진 제임스 허튼은 1785년 지구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여, 지구의 표면은 침식, 퇴적되고 습곡을 통해 새로운 지형을 이루며 다시 침식, 퇴적의 과정이 반복되는 순환하는 지구를 가정하였다. 라이엘은 이러한 '현재는 과거의 열쇠이다' 라는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이 이론에 의하면 과거에도 지금과 똑같은 과정이 일어났으므로, 현재 일어나는 지질작용을 관찰하면 과거의 일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층, 계곡, 산 등은 무한히 오랜 시간동안의 침식, 퇴적운동의 결과이며, 지구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론은 다윈의 진화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이엘 이전에는 과거에는 지금과 다른 대격변이 있었다는 퀴비에(Cuvier, 1769-1832)의 격변설(catastrophism)이 주로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다시 격변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

다윈 이전에는 종은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스웨덴의 린네(Linnaeus, 1701-1778)는 다양한 생물의 세계에 분류를 통해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7 단계 분류법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다윈은 비이글호를 타고 5 년간의 항해 끝에 얻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구상의 다양한 생물들은 단일 종 혹은 몇몇 종으로부터 진화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1859 년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 다윈은 1) 종은 불변이 아니며 새로운 종이 나타날 수 있고, 2)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3) 이러한 과정은 자연선택 혹은 적자생존에 의해 인도된다는 가정을 하였다. 다윈식의 진화론은 그 후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고 더욱 공교히 되어 현대종합이론에까지 이르게 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 버렸으나, 그 기본적인 개념, 즉 종간의 진화가 가능하다는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진화론은 생물학 분야뿐 아니라 다른 학문분야,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쳐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주요 패러다임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5. 멘델(1822-1884)의 유전법칙 

비록 다윈이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진화를 설명하려 했으나, 수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그중의 하나가 유전법칙인데, 오스트리아 부린의 수도원장이었던 멘델에 의해 1865 년 발표되었다. 멘델은 부모의 형질이 어떻게 자손에게 유전되는지를 정량적으로 밝혔는데, 이 이론에 의하면 부모에게 없는 형질은 절대로 자손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이론은 한 종으로부터 다른 종이 진화될 수 있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멘델의 유전법칙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당시 많은 학자들이 이미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 파스퇴르(1822-1895)와 생물속생설 

희랍시대로부터 믿어져 내려온 생명의 자연발생설은 17세기 후반에 들어, 생물은 생물에 의해서만 생긴다는 생물속생설이 제기되면서, 200년 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였던 파스퇴르는 백조목실험이라는 유명한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이 실험에서 파스퇴르는 S자 모양의 목이 긴 플라스크를 이용해 공기는 통하지만 미생물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든 뒤 플라스크내의 멸균된 고기즙을 조사한 결과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미생물이 생기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S자 모양의 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곧 공기중의 미생물에 의해 고기즙은 감염된다.  


7. 오파린(1894-1980)의 가설과 밀러(1930-)의 실험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인 후 무생명체와 생명체를 연결해 주는 고리가 필요하였는데, 소련의 생화학자 오파린은 화학진화가설을 발표하였다. 이 가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구의 대기는 수소, 암모니아, 메탄, 수증기 등 환원성이었는데,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거나 번개 등에 의해 방전되어 아미노산을 비롯한 여러 유기물들을 만들고, 이것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교질상태가 되었다가, 단백질 등의 콜로이드 입자가 결합된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작은 알맹이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코아세르베이트 내에서 효소가 형성되고, 유기물이 분해되어 에너지를 얻고 점점 성장하여,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오파린은 가정하였다. 환원성 대기로부터 아미노산이 합성되었다는 오파린의 가설은 1953년 시카고대학의 유레이와 밀러의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고, 마치 오파린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초의 대기가 환원성이었다는 증거가 없고, 생성된 아미노산이 생명체가 필요하는 L-형이 아닌 D-형과 L-형이 동일한 양으로 함유되어 있는 혼합물이라는 사실은 화학진화의 가설을 부정하고 있다.  


8.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 조작된 증거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사람들의 초점은 역시 인류의 조상이었다. 사람도 진화의 산물이라면 인류의 조상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인원의 뼈를 찾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대부분 불충분한 자료로부터 얻어낸 결론이거나 선입관에 의한 결론이었다. 심지어 자료를 조작하거나 변형시킨 경우도 있었다. 1892 년 듀보아는 자바에서 두개골, 치아, 대퇴골을 수집하고, 이것이 50 만년 전의 직립원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자바인은 원숭이라고 고백하였다. 1922 년 도오손 등이 영국의 필트다운 근처에서 발견한 턱뼈와 두개골은 이들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원숭이의 턱뼈를 줄로 연마하고 긁은 것임이 밝혀졌다. 한편 해럴드 쿡은 네브라스카 강바닥에서 멧돼지의 치아 하나를 발견하고, 이것이 원인에 속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59년 리키 부부가 동부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두개골은 원숭이의 두개골로 판명되었으며, 1907 년 독일 마우어에서 발견된 턱뼈는 25 만년 전에 살았던 하이델베르크인이라고 하였으나, 치아로 보건대 이는 완전한 사람의 치아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조상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인류의 진화를 믿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편견일 따름이다. 


9. 지구의 연대 논쟁

창조론과 진화론의 핵심에는 지구의 연대에 관한 논쟁이 있다. 진화는 매우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므로 진화론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창조론에서는 상당히 젊은 지구를 가정한다. 중세의 대학자이며 캔터베리 주교였던 어셔(Ussher)는 1650년 오랜 연구 끝에 지구는 BC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하였다.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구의 연대를 계산한 사람은 켈빈경이었다. 그는 정교한 수학을 바탕으로 몇 번의 계산끝에 지구는 약 1억 년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값은 현 창조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긴 연도지만 다윈의 진화론을 만족시키기에는 매우 짧은 연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지구의 연대논쟁은 러더포드에 의해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측정이 개발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현재 진화론자들은 약 45억년 정도로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일례로서 지구의 자기장의 세기변화가 있다. 자기장의 세기는 계속 감소하는데, 감소속도로부터 자기장의 세기가 너무 강해 생명체가 살 수 없을 때까지의 연도를 계산하면 대략 1만 년 내외의 연도를 얻는다.  


10. 원숭이 재판과 진화론의 확산 

1925년 미국 테네시주의 데이튼이란 조그만 도시에서 세기적인 재판이 열렸다. 흔히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는 이 재판은, 피고인 스코프스라는 청년이 주헌법이 금하고 있는 진화론 교육을 공공연히 한데서 비롯되었다. 보조 생물교사였던 존 스코프스라는 청년이 당시의 몇몇 인물들과 모의하고 창조론 대신 진화론을 가르쳤다. 이 사실은 곧 교장에게 보고되었고 헌법을 위반한 죄로 고소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 미국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더 집중시킨 것은 검사와 변호사 모두 자원하고 나섰는데, 검사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세 번이나 경선에 나선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이었고, 변호사는 당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클레런스 대로우였다. 그러나 결과는 브라이언의 참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진화론은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미 전역에 진화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루이지애나주 입법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 과학(evolution-science)' 을 가르칠 때는 '창조 과학(creation-science)' 도 동등하게 가르쳐져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연방판사가 종교를 세우려는 시도이므로 비헌법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1987년 연방대법원은 루이지애나의 법안은 비헌법적이다 라고 7 : 2로 다시금 확인시켰다. 윌리엄 브레난 판사는 그 법안의 목적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종교적 관점을 고양하는 것이므로 비헌법적이라고 했으나, 반대의견을 낸 안토닌 스칼리아 판사는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루리지애나 사람들은 누구나 진화에 반대되는 과학적인 증거는 무엇을 막론하고 들을 자격이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창조론 교육이 금지되고 기도가 금지된 후 청소년들의 범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통계는 얼마나 창조론 교육이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현재 대부분의 주에서 창조론 교육이 금지되고 있지만, 학부형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대다수가 창조론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11. 세인트 헬렌산 폭발과 지층의 형성 

1980년 5월 18일 미국 시애틀 남쪽의 캐스캐이드 산맥에 있는 세인트 헬렌 화산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주위에 지질학적 증거들을 남기게 되었다. 히로시마 원자탄의 수만배에 달하는 위력의 이 폭발은 엄청난 양의 화산분출물을 배출하였으며, 단 몇일만에 북쪽 평원에 지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화산활동으로 터져나온 엄청난 양의 흙더미가 화산 북쪽에 위치한 큰 강을 막아버렸고, 호수같이 변해버린 강에는 계속적으로 물이 차다가 결국 둑을 터뜨리고 홍수가 나면서 주변을 침식시켜 리틀 그랜드캐년(Little Grand Canyon)이라는 협곡을 형성하였다. 동일과정설에 의하면 수십, 수백만년이 걸려야 형성될 지질학적 과정들이 단 몇일 내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격변론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부정합, 다지층 규화목 등을 포함한 여러 지질학의 난제들이 풀리게 되었다.  


12. 창세기 대홍수와 미국의 창조연구소의 설립 

현대 창조론의 시작은 1961년 헨리 모리스와 존 윗컴의 저서 '창세기 대홍수' 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9년 종의 기원 출판 100주년 기념행사가 시카고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는데, 참가한 많은 과학자들은 이제 창조론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진화론만이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창세기 대홍수'의 출판은 미약했던 창조과학 운동 부흥시키는 촉발제가 되었으며, 1963 년 창조연구회(Creation Research Society)를 설립하였으며, 1972 년 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를 설립하여 전세계의 창조과학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 창조과학 연구뿐 아니라, 석사과정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전미국을 순회하며 '창세기로 돌아가자(Back to Genesis)' 강연을 하고 있다. 창조과학 박물관의 운영과 수많은 저술을 통해 창조과학의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13. 한국창조과학회 설립 

1980 년 복음화 대성회때 미국의 창조연구소의 과학자들을 초청하여 창조과학 세미나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81년 1월 31일 창립하게 되었다. 초대회장으로 김영길 박사(현 한동대 총장)가 임명되였으며, 현재 전국의 각 지역에 지부는 물론 미국 및 일본에도 지부를 두고 천 여명의 회원을 갖는 기독과학자 단체가 되었다. 사역은 주로 저술, 강연,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지며, 최근에는 전국적인 창조과학 교사협의회, 청년창조과학자 모임이 결성되어 교육현장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창조과학 교육원을 개설하여 기초교육과정 및 강사훈련과정을 통해 창조론 전파와 강사를 발굴하고 있다. 앞으로 창조과학관을 만들어 많은 이들이 직접 창조과학의 내용에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으며, 현재 인터넷 창조과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14. 생물교과서 소송사건 

이화여대 이양림 교수와 서울과학고의 이광원 교사(현 서울시 장학관)는 1990년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의 '생물의진화' 부분을 기존의 진화론과는 다른 입장에서 집필하였으나, 결국 교육부의 검정 불합격 처분을 받았다. 2차 심사까지 통과하였으나, 교육부의 수정지시는 책의 전체 내용을 흐리게 할 수 있고 집필의도와 상반되는 내용을 첨가해야 하므로 저자들은 이에 검정포기사유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교육부는 최종심사 불합격 판정을 내렸으며, 저자들은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교육부의 별다른 조치가 없자 교과서검정 불합격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내게 되었다. 이 소송도 패소하게 되었으나, 창조론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생물교과서 소송사건은 현 교육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지도층의 지적 수준을 나타낸 것으로서, 진화론의 영향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15. 미국 캔자스주 교육위원회의 진화론 교육 금지 결정 

지난(1999년) 8월 11일 미국의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든 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을 폐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지난 수십년 동안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진화론만 교육했던 미국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 결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지난 6 월의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사건과 연이은 학생 총기사건이었다. 총기난사로 숨진 학생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학교가 신앙교육을 금했고 그 결과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다"고 설교했다. 그후 미 하원에서는 공립학교 및 공공건물에 십계명을 게시할 수 있다는 법안을 큰 표차로 통과시켰다. 진화론의 영향을 미국사회는 이제 인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창조지, 제 117호 [199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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