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진화 논쟁 : 회고와 전망
박희주
진화론 논쟁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의 기원]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되었으나, 초기의 논쟁은 주로 영국에서 발생했다. 이 논쟁은 생물학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등 사회 각 영역에 걸쳐 다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논쟁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에서의 논쟁은 대략 지식인들 간의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반진화론적 흐름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영국교회는 진화론과 타협 또는 화해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반진화론적 경향이 우세했으며, 진화론 논쟁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논쟁으로 치달았다. 1920년대 본격화된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진화 논쟁사에 있어서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20세기 미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창조과학이란 용어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는 198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된 바로 그 창조과학이며, 미국의 창조론 운동은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창조과학회의 지적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난 20년간 전개되어온 한국 창조론 운동의 특성과 그 전개과정은 미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창조-진화 논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별히 한국창조과학회 20 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지적 배경을 더듬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창조과학회가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반추는 필요 불가결한 작업이라고 믿는다.
미국 창조-진화 논쟁은 1960년을 전후로 대략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20년대 스코프스 법정 논쟁으로 대표되는 반진화론 운동과, 1980년 아칸소 법정논쟁으로 정점을 이룬 창조론운동이 그것이다. 이외 1990년대 초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은 최근 미국 창조-진화논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앞의 두 가지 운동이 창조-진화 논쟁의 회고 부분이라면, 지적설계운동으로 시작된 최근의 동향은 앞으로의 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 발표에서는 대략 이 세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1) 스코프스 논쟁 (1925)
1859 년 '종의 기원” 출간으로 미국 과학자 사회에 소개된 진화론은 당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기원에 대해 지배적 답변이었던 '특별 창조설’을 급속히 대체하기 시작하여, 1880년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추세는 과학 교육에도 곧 반영되어 이때쯤 진화론은 처음으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등장한다. 20세기 초 미국 중등교육의 급속한 팽창에 힘입어 진화론은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에 보급되며 이에 위협을 느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반진화론 운동을 일으킨다. 3 번이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이미 교과서에서 사라진 특별창조론과 교육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진화론을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며 이 운동을 이끈다. 미국 전역에 걸친 대대적 반진화론 운동의 결과 테네시(1925), 미시시피(1926), 아칸소(1928) 주에서 진화론교육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반진화론법이 통과된다.
테네시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직후 미국시민자유연맹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이후 ACLU로 약칭)은 이 법의 실효성을 시험할 것을 선언하고 나서고, 이에 협조하기로 한 스코프스(John Thomas Scopes)라는 교사가 진화론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테네시주가 즉각 스코프스를 고발하고 ACLU가 맞서 변호하는 희대의 재판이 1925년 7월 데이튼이라는 소도시에서 열린다. 약 2주간에 걸친 대 논쟁은 결국 스코프스 측이 $100 벌금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일단락 된다. 이 재판 과정에서 ACLU측 변호사 다로우 (Clarence Darrow)와 역시 변호사 출신이었던 브라이언이 맞붙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브라이언은 재판이 끝난 3일 후 돌연사 한다. 법률적으로는 진화론 측이 패소했으나, 자유적 경향의 미국 주류언론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원숭이 재판으로 희화화하고, 반진화론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조롱거리로 만듦으로서 근본주의 측 역시 큰 이미지 손상을 입게된다.
1920 년대 반진화론 운동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변천과정이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60 년대에까지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주류해석을 형성했던 자유주의적 해석들은 대체로 그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스코프스 재판(특히 재판 중 브라이언과 다로우의 격돌)을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대결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이러한 구도 하에 아무런 지적내용이 없는 남부 농촌의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브라이언을, 그리고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다로우를 설정한 후, 다로우의 냉정한 이성적 심문에 의해 브라이언의 맹목적 신앙이 철저하게 조롱거리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스코프스 재판의 하이라이트로 제시함으로써, 브라이언의 패배를 곧 근본주의의 패배로 연결시켰다. 한 마디로 스코프스 재판이 근본주의의 쇠퇴를 결과했다는 것이다. 브라이언의 돌연사도 결국 이러한 패배의 충격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은 반진화론운동을 현대 세계와 과학에 대한 두려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동, 교육과 사회를 근본주의의 이상과 부합하도록 교정하려는 욕구) 등 시대착오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고, 현대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죽어가는 운동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반진화론적 근본주의가 부활함에 따라 이러한 예측은 빗나가고 만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해석에 근원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60년 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이다. 대표적인 수정주의 역사가로 폴 카터(Paul Carter), 에른스트 산딘(Ernest Sandeen),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이 세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폴 카터 : 그는 근본주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곧 쇠락할 주변적인 사이비 신앙이 아닌 수백만의 추종자가 따르는 강력한 신념으로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스코프스 논쟁 이후 근본주의가 무너졌다는 주장은 근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연구하지 않은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들어낸 판에 박힌 해석이라고 카터는 일축한다. 오히려 근본주의가 보이는 지속적인 활력에 주목하여 이를 가능케 한 요인을 근본주의 운동에서 찾아내는 것이 근본주의 연구에 있어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제언한다.
에른스트 산딘 : 근본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추적. 산딘은 근본주의 세력과 이념의 근원으로 무식한 남부의 시골문화를 지목한 기존의 해석과 달리 근본주의는 종말론적 신학과 관련된 당시 보편적 믿음이었으며, 따라서 지적 정통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조지 마스덴 (George Marsden):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은 1980년 출판한 {근본주의와 미국의 문화: 20세기 복음주의의 형성, 1870-1925}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에서 집대성된다. 마스덴은 근본주의 운동의 지적 이념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산딘과 함께 근본주의는 지적인 내용이 결여된 공허한 운동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제를 비판하며, 근본주의 운동의 해석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자유주의적 언론이 창출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한다.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이 반진화론 운동의 지적신뢰성에 손상을 가하기는 했으나, 이 운동의 운명에 즉각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반진화론운동은 곧장 몰락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다. 재판이 끝난 2년 후인 1927년에 모두 13개 주에서 반진화론 법이 상정됨으로써 반진화론 운동은 오히려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인은 불분명하지만 (대식가인 브라이언이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 브라이언이 재판의 충격으로 고뇌 속에서 죽었다는 해석 역시 사실과 다르며 실제 낮잠을 자던 중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수정주의자들은 브라이언의 죽음이 반진화론 운동의 쇠퇴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반박하며, 브라이언의 죽음은 근본주의자 들에게 순교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잠깐이나마 반진화론운동을 가열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에 의해 반진화론운동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 운동의 사멸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스코프스 재판이후 30년 동안의 소강상태 동안 진화론이 미국 생물교과서에서 모두 사라지는 다시 말해 반진화론 운동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진화론을 생물교과서에 그대로 둘 경우 각 주의 교과서 채택위원회에서 이를 문제 삼을 소지가 있고, 이는 교과서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진화론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진화론적 근본주의는 이의 임박한 종말을 예언했던 자유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60년대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부활하여 80년대에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까지 부상하게 된다.
2) 아칸소 법정 논쟁 (1981)
20년대 근본주의자들의 반진화론 운동은 60년대 창조론 운동으로 부활한다. 이들 운동의 가장 큰 전략적 차이는 전자가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제거를 요구했다면, 후자는 창조론의 삽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발생한 구 소련의 스퓨트닉 인공위성의 발사성공은 미국에 안보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이는 대대적인 과학교육개혁작업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생물학 분야에서도 60년대초 진화론이 생물학 교과서에 복귀한다. 복귀하게된 진화론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 창조론자들은 기왕에 그렇다면 진화론과 함께 창조과학을 교과서에 포함시켜 기원에 대한 교육의 형평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다.
이에는 한 가지 문제가 따랐는데, 미국 헌법에 의하면 국가공공 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행위는 위헌사항으로 규정되어있다. 창조과학이 종교라면 헌법에 의해 이를 공립학교 교과서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된 상황인데, 이를 우회하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이 과학적 창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 이라는 용어 자체가 70년대 중반 만들어졌는데, 창조론을 '성서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 둘로 나누어 종교인 전자는 배제하고, 과학인 후자만 선택적으로 생물 교과서 삽입을 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와 아울러 두 모델접근법이라는 전략을 개발하여, 진화와 창조를 생명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두 개의 모델이라고 제안하며, 기원의 문제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규정한다.
새로운 전략에 바탕하여 70년대 말 창조론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1시간 가르치면 마찬가지로 창조과학도 1시간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소위 '동등시간법' (Equal-Time Law) 을 고안하고, 미국 전역에 걸쳐 이 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1981년 아칸소와 루이지애나 주 의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동등시간법이 통과되자마자 미국시민자유연맹 (ACLU) 이 나서서 이 법의 위헌성을 제소한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이며, 따라서 국가공공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이를 가르치도록 규정한 동등시간법은 위헌이라는 것이 제소의 요지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의 과학성이 재판의 핵심문제로 떠올랐다. 아칸소주에서만 정식 재판이 열렸는데, 하일라이트는 창조 진화 양측이 동원한 전문가들의 일주일에 걸친 증언이었다. 양측에서 모두 자기 측을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 신학자, 교육전문가들을 동원하였는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진화론 측의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 였다. 오늘날 대표적 생물철학자중 한사람인 Ruse는 증언에서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님을 입증하는 다섯 가지 과학의 요건을 제시하였다.
1. 과학은 맹목적이고 변치 않는 자연의 규칙성에 (자연법칙)에 기초해야만 한다.
2. 과학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가능 해야한다.
3. 과학은 경험적 실재에 비추어 검증 가능(testable)해야 한다.
4. 과학은 반증 가능(falsifiable)해야 한다.
5. 과학은 잠정적(tentative)이어야 한다.
재판을 주재했던 오버 (William Overton) 판사는 루스의 증언을 받아들여, 창조과학은 초자연적 설명에 바탕하고 또한 근본적으로 독단적인 믿음에 근거하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린다. 동등시간법은 결국 위헌판정을 받게된 것이다. 이어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도 이와 동일한 판결이 내려진다.
창조과학의 과학성을 둘러싸고 법정에서 보다 더 치열한 논쟁이 재판 후 발생했다. 재판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중진 과학철학자들이 루스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필립 퀸(Philip Quinn)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창조과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루스가 전문 철학자로서의 윤리에 충실치 못하고 이중 잣대를 적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자들 간에 과학을 비과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문제(demarcation problem)는 수세기를 끌어온 난제였는데, 이는 논리실증주의의 붕괴이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혹은 가짜 문 (pseudo-problem)로 간주되어왔다. 과학철학계가 이렇게 포기한 상황에서 Rus 가 대담하게 다섯 가지 범주를 제시한 것이었다.
라우든이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섰다. 라우든은 법정 판결이 내려졌던 1982 년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가을호에 게재한 글에서 '창조과학'이 시험불가능, 독단성(비잠정적), 반증불가능 등의 이유로 창조과학을 비과학이라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시험, 반증가능한 경험적 주장을 실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구연령이 6,000-20,000년이라는 주장이나, 지구 초기역사에서 발생했던 대홍수가 현재의 대부분의 지질현상들을 결과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하며, 또한 실제 확인 절차를 밟았으며, 그 결과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을 반박하는 정공법은 창조론이 포함하는 경험적 주장들을 반박하는 것이지, '창조과학'이 그러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라우든은 주장한다. 만일 '창조과학'의 핵심주장들 - 예를 들어 인간은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였음, 노아 홍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임 - 이 변경 불가능한 독단이라면 마찬가지로 과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핵심이론들 역시 가변적인 보조가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쉽게 포기되지 않는 독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우든은 루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어떤 현상이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될 때만이 비로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과학사상에 등장하는 여러 중요한 자연현상에 대한 주장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와 뉴튼은 중력현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중력의 실재를 가정했으며, 다윈은 멘델에 의해 유전현상이 설명되기 전에 자연선택 이론에서 이미 그 존재를 가정했다. 노아 홍수의 실재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같은 논리로 중력이나 유전현상을 가정한 뉴튼이나 다윈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정리하면 문제의 핵심은 다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과학의 범주를 '창조과학'이 만족하느냐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진화론과 '창조과학' 어느 쪽에 보다 강력한 논거를 제공해주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다고 라우든은 결론짓는다.
과학철학자들 간에 5 년여를 끌었던 이 논쟁은 필립 퀸의 제안에 의해 적당한 선에서 절충되는 것으로 끝난다. 퀸은 상아탑 속의 학자가 비 이상적인 세상 법정으로 나가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때는 세상적 필요와 학문적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여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고,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올 때는 손을 씻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때 타협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끔씩만 수행함으로써, 한 개인의 전문가적 양심이 타락으로까지 가는 것을 방지하는 한도 내에서 이러한 타협은 현실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논쟁에서 창조론에 반대하는 과학철학자들의 사회적 가치와 그들의 전문가적 양심 사이의 갈등이 절충되는 과정은 결국 과학 비과학 구별문제가 인식론적 문제인 동시에 다분히 사회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창조-진화 논쟁은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주제인 동시에, 이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가진 가치관의 갈등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의 창조-진화논쟁이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가치와 새로운 다원주의적 가치 체계간의 갈등인 문화전쟁의 큰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3) 지적설계운동 (1990 - )
동등시간법이 1981 년 아칸소주와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패소한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법률제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 결과 전국적인 동등시간법 캠페인을 주도했던 젊은지구창조론은 교육현장에서의 개별적 문제해결이라는 풀뿌리 운동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둘째, 지구연령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한다.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주에서의 동등시간법 통과는 진화론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창조론운동을 무시해왔던 진화론 진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인 반창조론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지구연령문제를 창조과학의 아킬레스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과 두 번의 법정패소는 복음주의 교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지구연령문제를 과도한 지적부담으로 여기면서, 오랜지구창조론의 목소리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커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지구연령문제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은 분열적인 이슈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셋째, 지적설계운동의 등장이다. 지구연령문제를 비롯해 창세기 1-2장의 구체적 해석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각들은 복음주의 교회의 결속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기 위한 반성적인 움직임이 1980년 말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클리 캘리포니어 주립대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창조-진화 논쟁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전략적 선회를 제안한다. 기존의 논쟁구도가 창조 대 진화 이었다면, 이제 초점을 옮겨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의 대치구도로 이행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선회는 지적설계운동이라는 형태로 가시화 된다.
제한된 지면상 지적설계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고,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의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이라는 보다 큰 구도로 판을 다시 짤 경우, 창조-진화론 논쟁에서 보였던 보수 교단간의 미묘한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이 무마되며, 공통된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단결 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둘째, 기존의 창조과학 운동이 대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오면서 보수 기독교 인구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공을 거둔 반면, 지식인 사회로부터는 냉대 당하며 보수 기독교에 반지성적 이미지를 안겨준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적설계운동은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 기독교 유신론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주된 목표를 두게된다. 셋째, 오늘날 세속학문의 절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자연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다. 자연주의의 한계를 조직적으로 비판하여 숨통을 트지 않는 이상 학문의 주 생산지인 일반 대학에서 진지한 유신론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창조-진화 논쟁에서 자연주의는 부수적인 이슈였으나, 지적설계운동에서는 자연주의의 한계 비판과 유신론의 과학적, 학문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핵심적 이슈로 떠오른다. 진화론은 이들 이슈를 논의하는 대표적 사례로 사용된다.
아직 성장 단계에 있는 지적설계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으나, 기원에 관한 논쟁의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 한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지적설계운동이 기원문제에 관한 담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1920 년대 반진화론운동은 스코프스 논쟁을 거쳐가며 1930년대 들어서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창조론 운동 역시 80 년대 두 차례에 걸친 법정논쟁을 거쳐가며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하고 활력을 잃는 듯 했으나, 90년대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으로 기원문제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 10년 미국에서의 기원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그 열기가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원문제를 지식사회 내에서 담론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기원문제에 관련해서 복음주의 사회의 지적신뢰성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
한국의 창조론 운동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체계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 동안의 한국 창조론 운동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창조론 운동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유일한 예외가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던 조덕영 목사가 신학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창조론 운동을 내부자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세한 비교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교훈을 미국의 경험에서 유추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창조과학회의 자체적인 독창적 연구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조덕영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창조론 운동은 신학적인 뒷받침이 빈약한 상태에서 과학 기술시대에 나타난 과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창조론이 전파되어온 감이 없지 않았다. 또한 번역물에 의존하고 자체적인 연구에 등한하다보니 신학과 과학 양쪽에 있어 창조론 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국내 창조과학 운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중운동으로서의 창조론이 성공하게된 핵심 요인을 과학자에 대한 대중의 전폭적인 신뢰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이제는 이러한 신뢰의 원천인 과학적 전문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입장은 다를지라도 학문적 엄밀성만큼은 반대자들도 수긍할 정도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고는 앞으로 전문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대중의 신뢰 역시 점점 기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젊은지구창조론은 외부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진화론, 그리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과의 경쟁가운데서 보다 확고한 논의를 개발하는데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젊은지구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들인 폴 넬슨과 존 레널즈는 젊은지구창조론이 지난 20 년 동안 꾸준하게 '엄밀성과 정교함'을 더해왔다고 주장하며 '국제창조학회'(4년에 한번씩 개최)에서 발표된 최근 논문들을 그 증거로 든다. 나아가 미국의 젊은지구창조론은 "몇몇 자체 주장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학문적 책임감"과 심지어 "자기 비판적이기까지"한 열린 태도를 보인다고 넬슨은 지적하며, 이를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비해 상대적 강점으로 꼽았다. 넬슨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로운 경쟁과 학문적 책임감, 그리고 비판적 태도가 최근 젊은지구창조론의 '엄밀성과 정교함'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에 비해 기원문제에 대한 한국의 논의는 상당히 제한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을 이끌었던 주류는 젊은 지구창조론이지만, 오랜지구창조론과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도 활발하게 논의에 참여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간에 갈등도 발생했고 나아가 분열의 소지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원에 관한 논의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비판과 선의의 경쟁은 건강한 논의를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는 창조과학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국창조과학회의 현 시점에서 새겨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한 논의의 생산은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열린 토론과 건강한 비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의 논의는 창조-진화를 넘어서 학문과 사상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20년간 갈등과 분열도 있기는 하였으나, 기원에 관한 미국의 논쟁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현황은 20 년전 도입 당시의 젊은지구창조론에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은 미국과 호주에 이어 창조론 논의가 가장 활발한 나라이다. 이제 기원문제에 관한 국내의 논의도 한 단계 도약할 시점이라고 본다. 한국창조과학회 창립 20주년은 이러한 도전적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출처 - 창조지, 제 125호 [2001. 5~8]
창조-진화 논쟁 : 회고와 전망
박희주
진화론 논쟁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의 기원]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되었으나, 초기의 논쟁은 주로 영국에서 발생했다. 이 논쟁은 생물학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등 사회 각 영역에 걸쳐 다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논쟁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에서의 논쟁은 대략 지식인들 간의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반진화론적 흐름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영국교회는 진화론과 타협 또는 화해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반진화론적 경향이 우세했으며, 진화론 논쟁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논쟁으로 치달았다. 1920년대 본격화된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진화 논쟁사에 있어서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20세기 미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창조과학이란 용어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는 198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된 바로 그 창조과학이며, 미국의 창조론 운동은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창조과학회의 지적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난 20년간 전개되어온 한국 창조론 운동의 특성과 그 전개과정은 미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창조-진화 논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별히 한국창조과학회 20 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지적 배경을 더듬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창조과학회가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반추는 필요 불가결한 작업이라고 믿는다.
미국 창조-진화 논쟁은 1960년을 전후로 대략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20년대 스코프스 법정 논쟁으로 대표되는 반진화론 운동과, 1980년 아칸소 법정논쟁으로 정점을 이룬 창조론운동이 그것이다. 이외 1990년대 초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은 최근 미국 창조-진화논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앞의 두 가지 운동이 창조-진화 논쟁의 회고 부분이라면, 지적설계운동으로 시작된 최근의 동향은 앞으로의 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 발표에서는 대략 이 세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1) 스코프스 논쟁 (1925)
1859 년 '종의 기원” 출간으로 미국 과학자 사회에 소개된 진화론은 당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기원에 대해 지배적 답변이었던 '특별 창조설’을 급속히 대체하기 시작하여, 1880년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추세는 과학 교육에도 곧 반영되어 이때쯤 진화론은 처음으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등장한다. 20세기 초 미국 중등교육의 급속한 팽창에 힘입어 진화론은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에 보급되며 이에 위협을 느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반진화론 운동을 일으킨다. 3 번이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이미 교과서에서 사라진 특별창조론과 교육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진화론을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며 이 운동을 이끈다. 미국 전역에 걸친 대대적 반진화론 운동의 결과 테네시(1925), 미시시피(1926), 아칸소(1928) 주에서 진화론교육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반진화론법이 통과된다.
테네시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직후 미국시민자유연맹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이후 ACLU로 약칭)은 이 법의 실효성을 시험할 것을 선언하고 나서고, 이에 협조하기로 한 스코프스(John Thomas Scopes)라는 교사가 진화론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테네시주가 즉각 스코프스를 고발하고 ACLU가 맞서 변호하는 희대의 재판이 1925년 7월 데이튼이라는 소도시에서 열린다. 약 2주간에 걸친 대 논쟁은 결국 스코프스 측이 $100 벌금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일단락 된다. 이 재판 과정에서 ACLU측 변호사 다로우 (Clarence Darrow)와 역시 변호사 출신이었던 브라이언이 맞붙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브라이언은 재판이 끝난 3일 후 돌연사 한다. 법률적으로는 진화론 측이 패소했으나, 자유적 경향의 미국 주류언론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원숭이 재판으로 희화화하고, 반진화론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조롱거리로 만듦으로서 근본주의 측 역시 큰 이미지 손상을 입게된다.
1920 년대 반진화론 운동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변천과정이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60 년대에까지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주류해석을 형성했던 자유주의적 해석들은 대체로 그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스코프스 재판(특히 재판 중 브라이언과 다로우의 격돌)을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대결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이러한 구도 하에 아무런 지적내용이 없는 남부 농촌의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브라이언을, 그리고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다로우를 설정한 후, 다로우의 냉정한 이성적 심문에 의해 브라이언의 맹목적 신앙이 철저하게 조롱거리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스코프스 재판의 하이라이트로 제시함으로써, 브라이언의 패배를 곧 근본주의의 패배로 연결시켰다. 한 마디로 스코프스 재판이 근본주의의 쇠퇴를 결과했다는 것이다. 브라이언의 돌연사도 결국 이러한 패배의 충격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은 반진화론운동을 현대 세계와 과학에 대한 두려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동, 교육과 사회를 근본주의의 이상과 부합하도록 교정하려는 욕구) 등 시대착오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고, 현대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죽어가는 운동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반진화론적 근본주의가 부활함에 따라 이러한 예측은 빗나가고 만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해석에 근원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60년 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이다. 대표적인 수정주의 역사가로 폴 카터(Paul Carter), 에른스트 산딘(Ernest Sandeen),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이 세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폴 카터 : 그는 근본주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곧 쇠락할 주변적인 사이비 신앙이 아닌 수백만의 추종자가 따르는 강력한 신념으로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스코프스 논쟁 이후 근본주의가 무너졌다는 주장은 근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연구하지 않은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들어낸 판에 박힌 해석이라고 카터는 일축한다. 오히려 근본주의가 보이는 지속적인 활력에 주목하여 이를 가능케 한 요인을 근본주의 운동에서 찾아내는 것이 근본주의 연구에 있어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제언한다.
에른스트 산딘 : 근본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추적. 산딘은 근본주의 세력과 이념의 근원으로 무식한 남부의 시골문화를 지목한 기존의 해석과 달리 근본주의는 종말론적 신학과 관련된 당시 보편적 믿음이었으며, 따라서 지적 정통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조지 마스덴 (George Marsden):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은 1980년 출판한 {근본주의와 미국의 문화: 20세기 복음주의의 형성, 1870-1925}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에서 집대성된다. 마스덴은 근본주의 운동의 지적 이념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산딘과 함께 근본주의는 지적인 내용이 결여된 공허한 운동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제를 비판하며, 근본주의 운동의 해석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자유주의적 언론이 창출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한다.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이 반진화론 운동의 지적신뢰성에 손상을 가하기는 했으나, 이 운동의 운명에 즉각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반진화론운동은 곧장 몰락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다. 재판이 끝난 2년 후인 1927년에 모두 13개 주에서 반진화론 법이 상정됨으로써 반진화론 운동은 오히려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인은 불분명하지만 (대식가인 브라이언이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 브라이언이 재판의 충격으로 고뇌 속에서 죽었다는 해석 역시 사실과 다르며 실제 낮잠을 자던 중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수정주의자들은 브라이언의 죽음이 반진화론 운동의 쇠퇴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반박하며, 브라이언의 죽음은 근본주의자 들에게 순교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잠깐이나마 반진화론운동을 가열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에 의해 반진화론운동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 운동의 사멸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스코프스 재판이후 30년 동안의 소강상태 동안 진화론이 미국 생물교과서에서 모두 사라지는 다시 말해 반진화론 운동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진화론을 생물교과서에 그대로 둘 경우 각 주의 교과서 채택위원회에서 이를 문제 삼을 소지가 있고, 이는 교과서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진화론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진화론적 근본주의는 이의 임박한 종말을 예언했던 자유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60년대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부활하여 80년대에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까지 부상하게 된다.
2) 아칸소 법정 논쟁 (1981)
20년대 근본주의자들의 반진화론 운동은 60년대 창조론 운동으로 부활한다. 이들 운동의 가장 큰 전략적 차이는 전자가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제거를 요구했다면, 후자는 창조론의 삽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발생한 구 소련의 스퓨트닉 인공위성의 발사성공은 미국에 안보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이는 대대적인 과학교육개혁작업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생물학 분야에서도 60년대초 진화론이 생물학 교과서에 복귀한다. 복귀하게된 진화론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 창조론자들은 기왕에 그렇다면 진화론과 함께 창조과학을 교과서에 포함시켜 기원에 대한 교육의 형평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다.
이에는 한 가지 문제가 따랐는데, 미국 헌법에 의하면 국가공공 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행위는 위헌사항으로 규정되어있다. 창조과학이 종교라면 헌법에 의해 이를 공립학교 교과서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된 상황인데, 이를 우회하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이 과학적 창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 이라는 용어 자체가 70년대 중반 만들어졌는데, 창조론을 '성서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 둘로 나누어 종교인 전자는 배제하고, 과학인 후자만 선택적으로 생물 교과서 삽입을 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와 아울러 두 모델접근법이라는 전략을 개발하여, 진화와 창조를 생명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두 개의 모델이라고 제안하며, 기원의 문제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규정한다.
새로운 전략에 바탕하여 70년대 말 창조론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1시간 가르치면 마찬가지로 창조과학도 1시간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소위 '동등시간법' (Equal-Time Law) 을 고안하고, 미국 전역에 걸쳐 이 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1981년 아칸소와 루이지애나 주 의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동등시간법이 통과되자마자 미국시민자유연맹 (ACLU) 이 나서서 이 법의 위헌성을 제소한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이며, 따라서 국가공공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이를 가르치도록 규정한 동등시간법은 위헌이라는 것이 제소의 요지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의 과학성이 재판의 핵심문제로 떠올랐다. 아칸소주에서만 정식 재판이 열렸는데, 하일라이트는 창조 진화 양측이 동원한 전문가들의 일주일에 걸친 증언이었다. 양측에서 모두 자기 측을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 신학자, 교육전문가들을 동원하였는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진화론 측의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 였다. 오늘날 대표적 생물철학자중 한사람인 Ruse는 증언에서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님을 입증하는 다섯 가지 과학의 요건을 제시하였다.
1. 과학은 맹목적이고 변치 않는 자연의 규칙성에 (자연법칙)에 기초해야만 한다.
2. 과학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가능 해야한다.
3. 과학은 경험적 실재에 비추어 검증 가능(testable)해야 한다.
4. 과학은 반증 가능(falsifiable)해야 한다.
5. 과학은 잠정적(tentative)이어야 한다.
재판을 주재했던 오버 (William Overton) 판사는 루스의 증언을 받아들여, 창조과학은 초자연적 설명에 바탕하고 또한 근본적으로 독단적인 믿음에 근거하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린다. 동등시간법은 결국 위헌판정을 받게된 것이다. 이어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도 이와 동일한 판결이 내려진다.
창조과학의 과학성을 둘러싸고 법정에서 보다 더 치열한 논쟁이 재판 후 발생했다. 재판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중진 과학철학자들이 루스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필립 퀸(Philip Quinn)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창조과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루스가 전문 철학자로서의 윤리에 충실치 못하고 이중 잣대를 적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자들 간에 과학을 비과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문제(demarcation problem)는 수세기를 끌어온 난제였는데, 이는 논리실증주의의 붕괴이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혹은 가짜 문 (pseudo-problem)로 간주되어왔다. 과학철학계가 이렇게 포기한 상황에서 Rus 가 대담하게 다섯 가지 범주를 제시한 것이었다.
라우든이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섰다. 라우든은 법정 판결이 내려졌던 1982 년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가을호에 게재한 글에서 '창조과학'이 시험불가능, 독단성(비잠정적), 반증불가능 등의 이유로 창조과학을 비과학이라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시험, 반증가능한 경험적 주장을 실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구연령이 6,000-20,000년이라는 주장이나, 지구 초기역사에서 발생했던 대홍수가 현재의 대부분의 지질현상들을 결과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하며, 또한 실제 확인 절차를 밟았으며, 그 결과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을 반박하는 정공법은 창조론이 포함하는 경험적 주장들을 반박하는 것이지, '창조과학'이 그러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라우든은 주장한다. 만일 '창조과학'의 핵심주장들 - 예를 들어 인간은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였음, 노아 홍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임 - 이 변경 불가능한 독단이라면 마찬가지로 과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핵심이론들 역시 가변적인 보조가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쉽게 포기되지 않는 독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우든은 루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어떤 현상이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될 때만이 비로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과학사상에 등장하는 여러 중요한 자연현상에 대한 주장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와 뉴튼은 중력현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중력의 실재를 가정했으며, 다윈은 멘델에 의해 유전현상이 설명되기 전에 자연선택 이론에서 이미 그 존재를 가정했다. 노아 홍수의 실재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같은 논리로 중력이나 유전현상을 가정한 뉴튼이나 다윈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정리하면 문제의 핵심은 다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과학의 범주를 '창조과학'이 만족하느냐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진화론과 '창조과학' 어느 쪽에 보다 강력한 논거를 제공해주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다고 라우든은 결론짓는다.
과학철학자들 간에 5 년여를 끌었던 이 논쟁은 필립 퀸의 제안에 의해 적당한 선에서 절충되는 것으로 끝난다. 퀸은 상아탑 속의 학자가 비 이상적인 세상 법정으로 나가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때는 세상적 필요와 학문적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여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고,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올 때는 손을 씻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때 타협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끔씩만 수행함으로써, 한 개인의 전문가적 양심이 타락으로까지 가는 것을 방지하는 한도 내에서 이러한 타협은 현실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논쟁에서 창조론에 반대하는 과학철학자들의 사회적 가치와 그들의 전문가적 양심 사이의 갈등이 절충되는 과정은 결국 과학 비과학 구별문제가 인식론적 문제인 동시에 다분히 사회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창조-진화 논쟁은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주제인 동시에, 이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가진 가치관의 갈등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의 창조-진화논쟁이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가치와 새로운 다원주의적 가치 체계간의 갈등인 문화전쟁의 큰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3) 지적설계운동 (1990 - )
동등시간법이 1981 년 아칸소주와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패소한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법률제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 결과 전국적인 동등시간법 캠페인을 주도했던 젊은지구창조론은 교육현장에서의 개별적 문제해결이라는 풀뿌리 운동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둘째, 지구연령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한다.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주에서의 동등시간법 통과는 진화론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창조론운동을 무시해왔던 진화론 진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인 반창조론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지구연령문제를 창조과학의 아킬레스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과 두 번의 법정패소는 복음주의 교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지구연령문제를 과도한 지적부담으로 여기면서, 오랜지구창조론의 목소리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커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지구연령문제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은 분열적인 이슈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셋째, 지적설계운동의 등장이다. 지구연령문제를 비롯해 창세기 1-2장의 구체적 해석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각들은 복음주의 교회의 결속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기 위한 반성적인 움직임이 1980년 말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클리 캘리포니어 주립대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창조-진화 논쟁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전략적 선회를 제안한다. 기존의 논쟁구도가 창조 대 진화 이었다면, 이제 초점을 옮겨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의 대치구도로 이행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선회는 지적설계운동이라는 형태로 가시화 된다.
제한된 지면상 지적설계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고,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의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이라는 보다 큰 구도로 판을 다시 짤 경우, 창조-진화론 논쟁에서 보였던 보수 교단간의 미묘한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이 무마되며, 공통된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단결 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둘째, 기존의 창조과학 운동이 대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오면서 보수 기독교 인구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공을 거둔 반면, 지식인 사회로부터는 냉대 당하며 보수 기독교에 반지성적 이미지를 안겨준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적설계운동은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 기독교 유신론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주된 목표를 두게된다. 셋째, 오늘날 세속학문의 절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자연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다. 자연주의의 한계를 조직적으로 비판하여 숨통을 트지 않는 이상 학문의 주 생산지인 일반 대학에서 진지한 유신론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창조-진화 논쟁에서 자연주의는 부수적인 이슈였으나, 지적설계운동에서는 자연주의의 한계 비판과 유신론의 과학적, 학문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핵심적 이슈로 떠오른다. 진화론은 이들 이슈를 논의하는 대표적 사례로 사용된다.
아직 성장 단계에 있는 지적설계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으나, 기원에 관한 논쟁의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 한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지적설계운동이 기원문제에 관한 담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1920 년대 반진화론운동은 스코프스 논쟁을 거쳐가며 1930년대 들어서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창조론 운동 역시 80 년대 두 차례에 걸친 법정논쟁을 거쳐가며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하고 활력을 잃는 듯 했으나, 90년대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으로 기원문제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 10년 미국에서의 기원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그 열기가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원문제를 지식사회 내에서 담론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기원문제에 관련해서 복음주의 사회의 지적신뢰성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
한국의 창조론 운동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체계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 동안의 한국 창조론 운동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창조론 운동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유일한 예외가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던 조덕영 목사가 신학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창조론 운동을 내부자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세한 비교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교훈을 미국의 경험에서 유추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창조과학회의 자체적인 독창적 연구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조덕영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창조론 운동은 신학적인 뒷받침이 빈약한 상태에서 과학 기술시대에 나타난 과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창조론이 전파되어온 감이 없지 않았다. 또한 번역물에 의존하고 자체적인 연구에 등한하다보니 신학과 과학 양쪽에 있어 창조론 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국내 창조과학 운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중운동으로서의 창조론이 성공하게된 핵심 요인을 과학자에 대한 대중의 전폭적인 신뢰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이제는 이러한 신뢰의 원천인 과학적 전문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입장은 다를지라도 학문적 엄밀성만큼은 반대자들도 수긍할 정도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고는 앞으로 전문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대중의 신뢰 역시 점점 기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젊은지구창조론은 외부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진화론, 그리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과의 경쟁가운데서 보다 확고한 논의를 개발하는데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젊은지구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들인 폴 넬슨과 존 레널즈는 젊은지구창조론이 지난 20 년 동안 꾸준하게 '엄밀성과 정교함'을 더해왔다고 주장하며 '국제창조학회'(4년에 한번씩 개최)에서 발표된 최근 논문들을 그 증거로 든다. 나아가 미국의 젊은지구창조론은 "몇몇 자체 주장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학문적 책임감"과 심지어 "자기 비판적이기까지"한 열린 태도를 보인다고 넬슨은 지적하며, 이를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비해 상대적 강점으로 꼽았다. 넬슨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로운 경쟁과 학문적 책임감, 그리고 비판적 태도가 최근 젊은지구창조론의 '엄밀성과 정교함'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에 비해 기원문제에 대한 한국의 논의는 상당히 제한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을 이끌었던 주류는 젊은 지구창조론이지만, 오랜지구창조론과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도 활발하게 논의에 참여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간에 갈등도 발생했고 나아가 분열의 소지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원에 관한 논의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비판과 선의의 경쟁은 건강한 논의를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는 창조과학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국창조과학회의 현 시점에서 새겨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한 논의의 생산은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열린 토론과 건강한 비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의 논의는 창조-진화를 넘어서 학문과 사상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20년간 갈등과 분열도 있기는 하였으나, 기원에 관한 미국의 논쟁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현황은 20 년전 도입 당시의 젊은지구창조론에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은 미국과 호주에 이어 창조론 논의가 가장 활발한 나라이다. 이제 기원문제에 관한 국내의 논의도 한 단계 도약할 시점이라고 본다. 한국창조과학회 창립 20주년은 이러한 도전적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출처 - 창조지, 제 125호 [2001.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