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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손기철
2004-07-26

창조냐 진화냐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는 크게 진화론과 창조론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진화론은 오랜 시간의 역사 속에서 원소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단세포 생물이 되고, 이것이 진화하여 현재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왔다는 것이며, 창조론은 창조주에 의해 - 그 지혜와 설계에 의해 처음부터 다양한 생물들이 종류별로 단시간동안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를 비교해보기 위해 먼저 과학적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보자.  과학이란 일반적으로 현상의 관찰,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 가설의 설정, 실험을 통한 검증이라는 일련의 방법을 거쳐서 비로소 하나의 "과학적 법칙"이 성립되는 학문 체계이다. 그러나 기원의 문제는 그 첫 단계인 현상의 관찰이 불가능하고 실험을 통한 검증으로 사실 여부를 밝힐 수도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과학을 적용하려면, 이미 밝혀진 과학적 자료를 고찰하여 어느 것이 더 과학적 논리와 법칙에 타당하게 들어맞는지를 판별하거나, 제한된 실험을 통하여 기원 과정들을 단편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한 예로, 단세포로부터 고도의 복잡한 생물체로의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이 증명되려면 수많은 중간 단계의 생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생물에서도, 발견된 화석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화석은 현재와 똑같은 과거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데, 이것은 진화론보다는, 생물이 처음부터 종류별로 창조되어 존재해 왔다는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게다가 말과 당나귀의 교배로 출생한 노새가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이나, 초파리의 돌연변이 실험에서처럼, 아무리 다양한 돌연변이를 일으켜봐도 비정상적인 초파리만 나올 뿐 본래의 종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물이 탄생되지 않는다는 사실 등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물체의 변화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에서 그 종류 내에서만 이루어질 뿐, 다른 종으로의 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경우를 수학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면 제로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에 대해 과학자 카프란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라는 잡지에서 "생명체 형성의 확률이 1/10^130이라고 한다면 생명은 생명을 주는 자, 즉 창조주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또한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이 오히려 자연발생 및 진화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비과학적인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진화론을 고수하고 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비교에 있어서 반드시 짚어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위해서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진화론을 고수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과학과 신앙이 별개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둘은 서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고 완전히 대치되는 별개의 영역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은, 흔히 생각하듯, 철저히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 영역이 아니며, 그 시대 다수 혹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체계(세계관)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즉,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증기기관에 대한 이론과 연구가, 우주시대에는 천체물리학과 로켓엔진에 대한 실험이, 세계대전이 발발한 때에는 원자폭탄에 대한 과학자들의 밤샘연구와 그 실적들이, 에너지가 부족한 평화시기에는 같은 원자폭탄의 원리가 원자로의 개발을 위한 연구에 사용되고 연구되는 것이다.  

좀 더 관념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자신 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고 체계 위에서 자연계의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창조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진화론자로 대변되는 무신론자들은 증명 불가능한 가설과 이론들을 만들어 내어서라도 우연과 오랜 시간에 의해 그것들이 형성되었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과학적인 반증들만 수없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그들이 무신론의 테두리안에 있는 한 다른 대안을 생각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가 단순한 과학적 사안이 아니라 신념이 작용하는 문제임을 이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과학 자체가 신앙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람이 행해온 다른 일들도 그렇듯이, 과학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학이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미완의 상태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학자적 고백이 된다.  생명의 기원을 논하는 수많은 생물, 화학, 물리, 지구과학 관련 서적이 출판되고 무수히 개정되어 우리들의 도서관에 진열되어있다.  아마 전세계에 있는 이 책들을 다 모은다면 잠실운동장을 채울 분량이 될 것이다. 새로운 학설이나 이론이 발표되어 학자들간에 동의가 얻어지고 이것이 서적화 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전에 알고있던 이론에서 오류를 발견하여서 수정할 필요가 생겼거나, 또 다른 하나는 이전에는 미쳐 알지 못하던 사실을 발견하고 그 기전을 설명하거나 같은 현상을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상태, 즉 실험적으로 반복 재현한 것들인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고 비판하고, 가설을 다듬어 온 과거 100여년간 이 작업은 무수히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창세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씌어 지고 그 이후 개정된 바가 없는 이론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은 과거 100여년간 만들어지고 계속적으로 수정된 여러 이론 (또는 가설)과 3400년 전 씌어지고 한 차례도 수정되지 않은 한 이론 사이의 논쟁이다.

과학에서는 가설 (한사람 또는 몇몇 과학자들의 주장으로 대변되는)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며, 여러 차례 수정된 가설은 신뢰가 더욱 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현상을 놓고 대립된 여러 가설들이 대립된 상태에서 다시 개별적으로 수정되어 가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가설 전체가 불신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진리는 수정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는 단일한 것이어야 한다.  창세기는 3400년간 변화하지 않았으며, 여러 나라의 말로 각 나라의 언어학자들이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가운데 번역되기는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도 수정판이나 증보판이 발간되지 않은 하나의 생명기원이론을 담고 있다.  어느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의 제한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서라도 말이다.

수세기전 철학과 과학이 함께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대 학문의 최고 분야로 자타가 공인하던 물리학 (physics), 그 물리학의 막강한 권위 앞에서도 그보다 더 낳은, 가시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할 수 없는 어떠한 물리학, 물리학 위의 어떤 것이 있음을 과학철학자들은 인정하였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meta-physics (형이상학)라 부르기로 했다.  물리학 다음의 물리학, 물리학 위의 물리학인 것이다.  자연과학 위의 자연과학, 자연과학의 다음 세대에 오는 자연과학.  그것을 우리는 창조과학이라 부른다.  성경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자연과학에 대한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 받고 과학자들이 거듭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천지를 조성하신 창조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 속에서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창조주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더욱 분명하게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104:24)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8

참고 :

신재헌
2004-07-26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


<글의 순서>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I. 서론 :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진화론을 신앙안으로 수용하자는 주장 ―유신론적 진화론― 이 최근 기독인들 중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성경해석학적 고찰을 통하여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정립에 대한 도전을 주고자 한다.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위하여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련된 용어들을 간략히 정의 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는 소진화와 대진화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고, '진화론'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과학 이론이다. '소진화'란 보통 어떤 종(species)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종분화(speciation) 과정을 수반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한다 [1,2]. '종분화'란 어떤 종이 지리적 격리 등과 같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어미종(원래 종)과 상호 교배할 수 없을 만큼 생식적으로 격리된 새로운 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종분화의 정의는 종의 정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는 교배가 가능하지만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교배하려고 하지 않는 두 생물군을 같은 종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 '대진화'란 현재 생물계의 모든 분류군들이 오랜 시간동안 소진화 즉 종분화와 같은 미세한 과정의 축적에 의하여 최초 (무생물의) 형태로부터 유래했음을 의미하는 (가설적) 과정이다 [1,2,4]. 많은 진화론자들은 종분화 자체를 대진화로 여기면서 종분화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대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애석하게도 창조/진화 논쟁의 격렬한 싸움들은 이와 같이 진화에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는데서 대부분 비롯된다 [5].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도 하는데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시공과 물질 그리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셨고 그 이후에는 부여하신 자연법칙 하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 우주를 형성시키셨고 생물들을 진화시키셨다는 것이다 [6,7,8]. 온건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최초 생명체의 발생과 인간 영혼의 창조 등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직접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기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많아지는 기준으로 몇 가지 기원론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신론적 진화론 → 이신론적 진화론 → 유신론적 진화론 → 점진적 창조론 → 순간(명령)적 창조론  

여기서, '이신론(理神論)적 진화론'이란 태초에 빅뱅을 시작시킨 원인이 초자연적 존재냐 아니냐 라는 점에서만 무신론적 진화론과 틀리고 나머지는 무신론적 진화론과 같다 [9]. 이러한 이신론적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신적 목적이나 계획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전적으로 비기독교적 견해이다. '점진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매우 긴 지질학적 시간동안 단계적으로 창조하셨는데 각 창조의 사이사이에는 소진화를 사용하셔서 종들을 다양하게 하셨다 라는 것으로 지질학적 발견들을 성경과 조화시키면서도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10,11]. '순간(명령)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생물들이 원래의 종류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라는 것으로 [9], 홍수격변설과 함께 창조과학의 이름으로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창조론이다.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종류대로의 창조'를 지지하는데, 이 때의 '종류'는 현재 생물분류학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취급하는 '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genus)'이나 '과(family)'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라는 단어를 종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면서 종분화까지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좀 더 온건한 창조론자들은 종분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5]. (앞으로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냥 '창조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을 함께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과연 대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모든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발생되어 어떤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복잡한 형태로까지 되었다는 주장을 사실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과연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진화론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소진화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종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로부터 어미 종으로부터 딸 종으로 분화하는 종분화 현상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식물의 경우 종분화는 관찰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비록 직접 관측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16종의 갈라파고스 핀치새"라든가 "수백 종의 하와이 초파리" 등과 같이 종분화를 지지하는 몇 가지 '상황 증거'들이 있는데, 그 증거들은 ―물론 '종류'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라는 창조론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일단 종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된다 [12]. 신다윈 종합설에 의하면 이러한 종분화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은 '자연선택', '유전적 (돌연)변이', 그리고 '지리적 격리'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종분화 현상을 그대로 대진화로 여기면서 대진화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 학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13-17]. 금붕어와 지네의 차이나 낙지와 꿀벌과의 차이와 비교해 볼 때, 하와이 초파리의 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너무나 미소하다 [17]. 그러한 미소한 형질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진화론적 설명은 실제적 증거가 아닌 가설과 유비를 근거로 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13]. 비록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소진화의 메커니즘은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매우 다른 형태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는 대진화의 메커니즘으로써 역시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이클 덴튼(M. Denton)은 이러한 상황을 '날씨 변화'와 '계절 변화'에 비유하는데, 매일 매일의 날씨 변화를 설명하는 고기압이나 저기압과 같은 현상을 가지고 계절 변화와 같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7]. 

종분화가 대진화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논증은, 종분화 과정이 유전정보가 새로 생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잃는' 과정이라는 주장에 기초한다 [18]. 새로운 기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유전정보들이 새롭게 생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파충류가 진화해서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던 날개가 생겨야 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허파나 심장 같은 여러 기관들도 그 형태가 엄청나게 변화해야 하는데 [19],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새로운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기능적 정보들이 하나 둘 생성되어 기존의 유전정보에 첨가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것을 대체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종분화 과정은 특정 유전정보를 잃음으로써 어미종으로부터 분리되어져 가는 현상이므로 이와같은 대진화적 변화의 근거로 제시되기가 힘들다 [18]. 

최근에 필자는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새들이 점점 진화해서 나중에는 우주를 날라다니는 새들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새가 수 억년 (또는 수 십 억년) 뒤에 우주를 날라다니는 생물로 진화될 수 있을까? 혹자는 허황된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대진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먼 훗날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화론의 가능성에 너무나 심취된 나머지, 진화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식의 어떤 '신앙'적 형태로 진화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줄리안 헉슬리(J. Huxley)는 다윈 100주년 기념식에서 "생명의 진화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의 근거이다... 우리는 의미론과 정의라는 수렁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라는 식의 교조적 발언을 했다 [13]. 반면, 그 바로 전 해인 1959년 독일의 동물학자 베른하르 렌쉬(B. Rensch)는 대진화는 소진화 과정을 연장해서 설명할 수 없으며 현재 알려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당시 지도적 생물학자들의 리스트를 제시하였다 [20]. 이러한 의견 차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진화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진화계통수상의 가상적 공통 조상들과 전이 형태의 생물들이 화석 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원시 단세포 생물과 현재의 복잡한 생물들 사이에 있을 법한 수많은 '공통 조상' 또는 '전이 형태'의 화석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오히려 전이적 형태의 부재가 더 일반적인 법칙임을 보여주고 있다 [21, 22]. 거의 모든 주요 무척추동물 문들의 대표들이 어떤 전이 형태 없이 갑자기 등장한 소위 '캄브리아기 폭발'이나, 대부분의 '피자식물' 즉 꽃식물들이 이들이 속하고 있는 군의 분류 형질을 그대로 갖고 특수화 된 채 백악기에 돌연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출현초부터 고도로 특수화 되어 있고 서로가 고립된 분류군으로서 돌연히 출현하고 있는 '어류군' 등은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골칫거리로 남아 있고 [21, 22], 이 외에도 화석상의 수많은 의문점들이 점진주의적 다윈 진화론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현재 주류 기독인 생물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리처드 라이트(R. T. Wright) 교수는, "화석은 진화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한 역사적 증거이지만 이는 점진적 다윈주의자들이 제안한 계속적 변화이기보다는 불연속적 기록이다. 즉, 전이적 형태들보다는 공백이 더 많은데 이는 대량 멸종이 발생하며, 새롭고 복잡한 것들이 화석 유물에 아주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들은 감지할 만한 변화 없이 수백 만년 동안 존재한다... 즉, 진화론의 경우 문제점은 화석 증거의 부족 ―전이적인 형태의 부재― 에 주로 기인하며.."라고 말한다 [21]. 

이외에도 대진화의 가설적 추론적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점들이 더 있지만 그것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본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본 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 몇몇 주도적 신학자, 과학자, 과학철학자 등 여러 분야의 기독인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지적설계가설' (intelligent design hypothesis, ID)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ID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발견된 많은 생물학적 지식들이 생물이 진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 설계에 의하여 탄생한 것임을 증거해준다고 말한다 [23]. 이것은 세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물학적 기작들이 '환원'될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현상이 자연적으로 탄생했다고 믿는 것 보다는 어떤 설계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래 사장에 쓰여진 어떤 글자를 볼 때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그 글자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듯이, 그리고 과학자들이 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것도 그러한 메시지가 자연적으로 날라온 것이 아니라 어떤 외계의 지성적 존재가 보내 준 것이라는 지극히 정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듯이,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현상을 보면서 지성적 존재에 의한 설계를 추론해 내는 것이 결코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이러한 논의는 다분히 과학철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차후에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행해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진화론은 과연 기독교 유신론과 배치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 논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일 것이다. 만약, 진화라는 단어를 "무목적적이고도 우연한 과정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라는 식의 의미로만 사용한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 "Yes!"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으로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목적'과 '우연'이라는 철학적 함의들을 진화론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무신론적 진화론자들로부터 공격받는 빌미가 되고 마는데 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우연이라는 과정에 신의 손길을 가정함으로써 진화론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충분히 진화가 일어나는데 왜 거기다가 신의 의지를 집어넣는냐"라고 비난하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반응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또한, 창조론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왜 가설적인 진화론에 집착하느냐?"라는 식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몰아부친다. 양측으로부터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유신론적 진화론은 도리어 양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부딪치고 있는 셈이다.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먼저, 과연 진화론은 무신론인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당연히 "No!" 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진화론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는 첫 번째 이유로 삼는다. 물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No" 이다. 왜냐하면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진화론은 생물 현상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몇몇 부류는 이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한다 [25]. 역시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불일치는 바로 용어의 정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진화주의'는 세계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 진화론을 의미하는데, 자연적인 과정인 진화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모든 생물과 우주의 발달에 유일한 원인이 된다는 '믿음'이다 [26]. 이러한 진화주의는 현재 '자연주의 세계관' ―보이는 물질만이 실체의 전부라고 믿는 세계관― 과 함께 무신론을 대표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다윈식 진화론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모든 기원의 문제를 단순한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다윈 종합설의 대가인 마이어(E. Mayr)도, "살아 있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자연도태가 '하나님을 폐위시켰다'고 거론되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27].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무신론이 아니지만 무신론적 세계관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사람이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진화론이 함의하고 있는 '우연' 또는 '무목적성'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통상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신론적 진화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최초의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 진화에 의한 최종 산물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모든 '초기조건'을 정교하게 잡아주셨다는 것이다 [28]. 즉, 오늘날의 모든 생물체는 하나님의 개입없이 진화를 해왔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오늘날의 생태계가 이룩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두 번째 부류는 점진적 창조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양자역학적 함의를 도입하여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 자체에 신적 행위가 개입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29]. 이것은 진화의 밑바탕에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불확정'적인 양자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고 있고, 이 불확정성은 하나님에 의해 양자세계에 부여된 본질적인 법칙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깨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지대로 진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9]. 즉, '우연'이라는 양자적 자연법칙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진화 과정을 조정하실 수 있으므로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부류의 대답은 어떤 경우이든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두번째 질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초기의 단세포 형태로부터 지금의 다양한 생물계를 이루었다 라는 가설적 설명 ―대진화적 설명― 을 수용할 필연성이 없어진다. 우리에게는 수백 만 번의 변이 없이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즉각적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6]. 

세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비록 유전적 변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더라도 자연선택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결국 수많은 변이 형태의 생물들이 생겨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변이적 생명체들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될 후손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물― 이 등장하기까지 적자생존과 경쟁이라는 지극히 잔인한 메커니즘의 '희생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30].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생물들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모든 생물들이 정말로 수많은 변이체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그러한 것이 과연 보시기에 좋으셨을까? 이러한 논점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답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랑'이라든가 '잔인'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개념은 인간적인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지금도 그러한 적자생존이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비록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 기준과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분명 지금의 생태계는 아담의 범죄 이후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그 이전이므로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에 의한 창조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매끈하게 조화되기 힘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된다. 이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성경의 영감성에 대하여,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과학의 한계와 성경의 한계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31]. 본 장에서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좀 더 나은 합일점을 향한 방향제시와 도전을 주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비단 창조/진화 문제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모색에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그럼,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정립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첫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단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조직신학자 에릭슨(M. J. Erickson)은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다룰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이 사용하는 전략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는 창세기가 생물과 인간 기원의 방식에 관하여 어떤 구체적인 사항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다만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9]. 이는 분명히 옳은 지적인데, 왜냐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의 구문들을 단지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풍유)적인 표현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담을 지은 '흙'이 어떤 선재하는 피조물을 상징한다거나, "번성하고 충만하라"가 다른 종류를 생산하라 라는 것을 상징한다거나 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달리 개신교의 전통적 성경해석학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가장 우선시한다 [32]. 여기서 '문자적'의 사전적 뜻은 "글이나 표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성과 의미를 따르는, 또는 단어의 일상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따르는"이다 (Webster's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이나 상징들, 모형들, 혹은 알레고리를 간과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32]. 중요한 것은, 문자적 접근은 다른 모든 문학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통상적 관행이며, 문자적 해석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판명 나지 않는 이상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적 의미로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2,33,34].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구분주의, compartmentalism)란 성경과 과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주장하면서 [35], 성경으로부터 문자적·역사적 의미는 무시하고 도덕적·영적 의미만 추출하고자 하는 이원론적 태도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분리주의에 대하여, "창세기 초반부는 신화적으로, 혹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조점이나 자연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결여된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일련의 비유로 본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그 문제들을 아예 도외시함으로써 과학과 성서 사이의 갈등을 피하고 있다. 만일 진화론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세계관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분리주의자들에게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35].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에 기술된 하나님의 창조 기사로부터는 창조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알아낼 수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결국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적 태도에 매우 가까움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과학의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며 성경이 기술된 방식도 비이론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신화적 서술로 격하시키거나, 아니면 엉뚱한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분명한 것은 비록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한 비이론적 서술이지만 창세기에는 분명 창조의 방식이 기술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피조물들의 관계와 지위, 역할, 속성 등도 함께 나타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은 이러한 구절들의 문자적 의미 자체를 아예 포기한다는데 있다.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이 취하는 입장은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 취하는 입장과 정확히 반대이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의 문제점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모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고자 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나 모두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이 무시된 채 비유적으로만 혹은 문자적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있어서 과학이 성경의 해석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는 안되듯이 마찬가지로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중요한 점은, 어떤 과학이론이 성경의 구절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때 어느 한쪽을 무시하기에 앞서서 성경과 과학을 각각의 올바른 방법론에 의해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될 때에 모순처럼 보이던 부분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이러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근본주의적 창조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만약 이러한 노력들이 진지하게 전개된다면 양자는 분명 좀 더 나은 합일점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본다. 성경은 어떤 책이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은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권오식 역), p.125, IVP, 1995.

[2]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황영철 역), p.277, IVP, 1991.

[3] R. A. Wallace, et. al, 생물학 -생명의 과학- 3판 (이광웅 외 7인 역), pp.370-374, 을유문화사, 1993.

[4]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임번삼 외 2인 역), p.99, 한국창조과학회, 1994.

[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Ch. 4, 7, 10, 11, IVP, 1996.

[6] W. Grudem, 조직신학(상) (노진준 역), pp. 402-407, 은성출판사, 1997.

[7]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신경수 역), pp. 434-435,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8]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신경수 역), p. 46,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9]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p. 44-46.

[10]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p. 435.

[11]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 47.

[1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3-98.

[1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277-278.

[14]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90.

[1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5-126.

[16] P. E. Johnson, Darwin on Trial 2nd Ed., pp. 19-20, 68-69, IVP, 1993.

[17]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9-105.

[18] P. Davis, D. H. Kenyon, and C. B. Thaxton, Of Pandas and People, Haughton Publishing Co., Dallas, pp. 15-20, pp. 77-89, 1989.

[1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223-238.

[20] B. Rensch, Evolution above the Species Level, Columbia Univ. Press, New York, p. 57, 195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 99)

[2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8-130.

[2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Ch. 8.

[23] 지적설계이론에 대해서는 www.origin.org 와 www.discovery.org/crsc 등의 인터넷 사이트 참조 바람.

[24] J. Wells, Evolution and Intelligent Design, http://www.discovery.org/crsc/crscviews/wellsdesign.html

[2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1-185.

[26]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32.

[27]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22.

[28]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186.

[29]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6-188.

[30]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9-190.

[31]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Ch. 8, 10.

[32]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p. 167-176, 생명의 말씀사, 1996.

[3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197-202.

[34]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 158.

[3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93.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6

참고 :

윤성호
2004-07-26

과학철학으로 바라본 창조, 진화 논쟁


Abstract

'과학'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뜻을 정확이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이다. 창조과학서도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하며 '과학'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 의미가 매우 불만족스러운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로인해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비판함에 있어서 "당위적 연역법"에 근거할 때가 많고 인식론적(認識論的) 형평성을 잃을 때가 많다. 본 글에서는 과학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논의(-주로 창조론적 입장에서)에서 사용된 '과학'의 정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여려형태의 과학철학 이론에 근거하여 창조, 진화문제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1. 문제제기

    위의 (명제 1, 2)는 국내의 대부분의 창조론자들이 동의하고 주장하는 명제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명제 3)을 주장하는 창조론자들도 있지만 현재의 추세는 (명제 3)까지 쉽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위의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함의(imply)하고 있는 주장은 "과학이란 증명가능하고 실험적으로 확실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필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하여 대표적인 과학철학적 견해들 - 논리실증주의, 칼 포퍼와 반증주의, 토마스 쿤과 패러다임, 라카토슈와 연구 프로그램, 파이어아벤트와 아나키즘(anarchism)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위의 명제들은 논리실증주의적 견해에 의존하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는 오래전에 포기된 주장들이다.

 

2. 논리 실증적 입장에서의 과학

    즉 이론은 실험에 의해 확인되어져야 하고 다른 누구라도 다시 실험을 하며 재현되어야 하며 이렇게 해서 얻어진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의 주장들인 위의 세 주장은 1900년대 초반 학계의 과학에 대한 이론이며 현대의 일반인 및 대다수의 창조론자들의 '과학'의 개념에 대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위의 3가지 주장을 기반으로 한 과학에 대한 개념은 이미 깨진지 오래이다.

    위의 견해가 깨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가지를 한다면 '관찰의 이론의존성 (theory lade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관찰할 때는 필연적으로 몇가지 이론들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행성 등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물체의 운동을 관찰할 때는 만원경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 때는 광학이론의 도움을 받게된다. 원자 등의 미시세계를 관찰할 때는 구름상자등의 실험적 도구를 받게된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 도움을 받지 않고 단지 감각에 느껴지는 진술만을 한다면 "밤하늘의 달은 새끼 손톱만하다"라는 주장과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떠한 관찰도 이론적 바탕없이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과학이론", 혹은 "객관적 증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떠한 관찰, 실험도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예는 생략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과학철학 입문서2)를 보면 수없이 많은 예가 나와있다.

    만일 논리실증주의의 견해를 따른다면 분명 "진화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험적으로 재현할 수도 없고 정확한 의미의 증명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떠한 과학이론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퍼의 주장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3. 포퍼와 반증주의3)

    "어떠한 이론도 정확하게 증명될 수 없다"라는 것을 받아들인 포퍼는 "과학이론이란 반증가능성이 있는 이론이다"라고 하였으며 하나의 과학이론이 반증되었을 때 - 틀렸다고 판단했을 때 - 기존의 과학이론을 폐기처분하고 새로은 과학이론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론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반증(falsify)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이론은 계속적으로 반증되며 보다 정확한 이론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Britanica' 및 대부분의 사전적 정의 및 교과서적 정의로 이용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장 간단한 예로 열역학 1법칙, 2법칙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 두법칙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이것을 아직까지 반증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증될 가능성은 있다. 그것은 '영구기관'을 만들어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 예로 뉴튼의 법칙을 들어보자. F= ma 로 표현되는 뉴튼의 이론은 증명된 이론인가? 천만에!! 그저 F= ma 라고 썼더니 많은 사물 현상들이 설명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현재와서 뉴튼의 이론을 적용하다 보니 반증사례가 나타났다. 수성의 궤도운동, 미시세계의 원자의 운동에 있어서는 뉴튼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을 도입하여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록 F= ma가 반증되었지만 '반증가능성'이 있었기에 과학이론으로 다루어야 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증가능성이 없는 이론으로는 "물체는 그 고향을 땅에 두고 있기 때문에 밑으로 떨어진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모든 현상을 '잠재의식'과 '성욕'으로 해석한 프로이드의 이론 등을 들 수 있다.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진화론의 과학여부를 따져보자. 진화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반증'될 수 없기에 과학이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창조론은 어떤가? 창조론 또한 반증가능이 불가능하기에 과학이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종 "창조는 과학적인 사실이다."라는 주장을 듣게 되는데 만일 어떠한 이론이 과학이론으로써의 자격을 갖는다면 언제든지 '반증'될 수 있어야
하며 폐기처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 과학이론은 엄밀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

    포퍼는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였고 과학의 객관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그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반증가능성'이란 개념이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과학 이론은 중심이론과 그 이론주변을 감싸고 있는 보조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론의 반증 예에 부딪치게 되면 그 주변의 보조가설을 수정함으로써 그 반증 예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로 천동설과 지동설의 주장이 양립할 당시의 예로 티고브라헤라는 과학자는 지동설을 다음과 같이 반증하였다. "만일 지구가 돈다면 오늘 바라보는 별들의 위치와 내일 바라보는 별들의 위치가 연주시차에 의하여 달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몇 일에 걸쳐 별의 위치를 확인하였더니 별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로 지구는 돌지 않는다." 그러나 티코 브라헤는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가 짧다라는 보조가설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별들과 지구의 거리는 매우 크기에 눈으로 연주시차가 확인되지 않는다. 두 번째 예로 뉴튼의 이론이 발전할 당시 뉴튼의 이론은 천왕성의 운동을 설명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당시의 뉴튼이론의 반증사례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누군가 천왕성 외부에 새로운 행성이 있다면 천왕성의 운동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역으로 미지의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만원경으로 확인하였더니 지금의 해왕성이 발견된 것이다. 이와같이 과학이론의 반증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론의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현대의 과학철학은 토마스 쿤과 페이어 아벤트에 의하여 상대론적 결론으로 다가서게 된다.


5.  토마스 쿤과 파라다임4)

    이러한 주장들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60-70년대 이후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 의하면 과학이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게 된다.

정상과학 → 이상 현상 → 위기 → 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

    즉 어떠한 이론(이론 A)에 의하여 과학이론이 계속하여 발전하다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거나, 그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과 일치하지 않을 때 위기를 겪게 되고 이것을 대치할 만한 새시대의 패러다임에 일치하는 이론(이론 B)이 나오면 그 이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결코 누적적이거나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이고 또 전혀 새로운 형태로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또한 패러다임이란 그 시대의 과학자 사회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치관, 문화적 배경, 실험적 엄밀성의 정도 등 여러 가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요소로 구성되어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뉴톤의 이론으로 뉴톤의 이론에서 아이슈타인의 이론으로의 발전은 축적적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진 것이고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쿤에 의하여 "한 이론이 과학적 이론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라든지 "한 이론이 과학적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라는 문제는 실험적 사실의 판별 여부 객관성에 있지 아니하고 다분히 과학자 사회의 동의여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론도 진화론도'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범주 않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진화론은 다수의 과학자가 승인하는 정상과학의 형태이고 창조론은 소수의 과학자가 받아들이는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최근의 학계의 경향 - 많은 생물학자들이 대진화의 과정을 찾아내는데 실패하고 점차로 증가하는 수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창조론을 제시하는 경향 - 은 진화론에 위기현상이 오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고 하나의 이론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치되었을 때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6. 페이어 아벤트와 아나키즘 5)

    'Anythings goes(어떠한 것이든지 좋다.)'라고 대변되는 페이어 아벤트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이론이란 정치활동, 신화와 근본적이 차이가 없으며 과학자들의 학회는 정치인들의 정당대회와 유사하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데이타를 조작하고 소수의 사람이 신봉하는 이론적 바탕에서 쓴 논문을 거절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러한 견해는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 반 이성주의 철학등과 함께 최근에 점차로 큰 힘을 얻어가는 추세인 것 같다.

    "그에게 진화론이 객관적 사실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객관적 사실이 있다고 믿는거야?"  페이어 아벤트의 철학에 있어서 과학에 있어서의 객관성,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어떠한 이론이 더 실용적이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지가 중요할 따름이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가 수십년 내에 일반인들에게 암묵적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이 암암리에 실존주의적, 반이성주의적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그러한 시대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창조론을 변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7. 라카토슈와 연구프로그램

    라카토슈의 논증은 과학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 혹은 반증을 시도하려는 오류를 피하는 동시에 토마스 쿤과 페이어 아벤트와 같은 상대론적 결론도 피하기에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어떠한 이론 B가 기존의 이론 A보다 더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고 또한 새로운 현상을 예측한다면, 또한 그 내부적 정합체계가 일관적이라면 이론 B를 이론 A를 대신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한 이론의 절대적인 증명, 반증은 불가능하지만 이론간의 상호 우월성 여부, 이론의 점진성(혹은 퇴행성) 여부를 판별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의 이론에 의하여 창조론, 진화론을 판별해 본다면 두 이론 중 어떠한 이론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어떠한 이론이 보다 많은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또한 과학활동에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비교가 될 것이다. 단순히 진화론의 비일관성 - 예를 들면 진화의 과정에 대한 이론이 여러 가지가 된다는 등의 - 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론이든지 보조가설 등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신의 이론을 새롭게 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조로 (그림 1)은 토마스 쿤, 라카토슈, 페이어 아벤트 등의 견해를 단순하게 나타낸 것으로 기존의 이론 A가 새로운 이론 B로 변화할 때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두 이론은 공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설명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며 라카토슈에 의하면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이론이 설명한 체계를 포함하고 더 넓은 영역을 설명할 수 있고, 페이어 아벤트에 의하면 두 이론이 설명하는 영역, 방식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8. 결론

    이상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 후 '과학철학자' 들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생각한 '과학'이라는 용어를 놓고 여러 가지의 정의가 가능함을 보았으며 최근의 논의에 의하면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이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살펴보았다. 또한 과학적 이론에 대한 증명과 반증이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살펴보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각 과학관을 기반으로 하여 창조, 진화 논쟁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명제 (1, 2 혹은 3)으로 표현되는 창조론적 변증에 대한 비판도 언급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과학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단순한 진화론 비판을 넘어서서 '창조론적 대안'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하여서는 앞으로 많은 토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nd Notes

1) 윤성호 형제는 청년 창조과학 연구회 회원이며 포항공대 환경공학과 석사를 졸업했습니다.

2). 현대의 과학철학, 차머스 저, 서광사, 1994.

3). 과학적 발견의 논리, 칼 포퍼 저, 박우석 역, 고려원, 1994

4).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저, 김명자 역, 동아출판사, 1992.

5). 방법에의 도전, 페이어 아벤트 저, 정병훈 역, 1987.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3

참고 :

Encyclopedia
2004-07-26

양자택일 : 진화냐 창조냐? 

(Only Two Alternatives)


      무엇이 지구의 생명을 만들었는가? 어떻게 하늘의 별들이 만들어졌을까? 과학자들은 이것을 주의깊게 심사숙고하여 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단지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진화되었거나, 창조되었다. 여기에 그들의 말들이 있다. 이것은 과학 대 진화이다. Creation-Evolution Encyclopedia은 당신에게 창조과학이 진실임을 알려줄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만약 과학자들과 우리들중 몇몇이 어리석은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유일한 선택은 창조론 뿐이다. 별들과, 행성과,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이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유일한 대안은 신이 그들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유일한 대안(창조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우스꽝스러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은 동물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화가 실제로 발생한다고 보여지거나……또는 논리적인 증거에 의해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 즉 특별한 창조가 확실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D.M.S. Watson, 'Adaptation,' in Nature, Vol. 123, p. 233 (1929).

사실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인간의 지성뒤에는 진화론적인 변화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이 존재한다” - *S. Zuckerman, Functional Activities of Man, Monkeys and Apes (1933), p. 155.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거나, 모든 것이 스스로 진화되어 만들어졌거나 이다.

”그러한 설명은 두 가지의 부류중 하나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즉 특별한 창조 또는 진화이다. 이 두 가지 개념에는 다양한 혼합과 변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을 완벽하게 제외하고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 *Davis and *E. Solomon, The World of Biology (1974), p. 395.

이 양자택일의 해결을 반박할 수는 없으나, 경멸할 수는 있다.

”시대에 뒤지고 완전히 비평되며, 무식하고 독선적이고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창조론을 제외하고는 경쟁할만한 가설은 없다.” - *H. Newman, Outlines of General Zoology (1924), p. 407. 

생물과 무생물 어느 쪽을 보건대, 우리는 명확한 설계와 세심한 의도를 볼 수 있다. 오직 훌륭한 지적능력과 이해력을 가진 '지성적인 존재' 만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과학의 사실들이 단순히 우연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우리가 지구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은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구에 대해 연구한 것은 나를 절대자를 믿는 사람으로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우리는 확실히 신이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신의 작품들을 보아 왔다.”

”정직한 사색가들은, 만약 그들이 세밀히 살펴본다면, 놀랄만큼 복잡한 우리의 세계와 그 속의 생명들은 절대의 정신(Infallible Mind)만이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 *Paul Francis Kerr, quoted in F. Meldau, Why We Believe in Creation, Not Evolution, pp. 50-51. 

그밖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생물들은 완벽히 발달한 상태로 이 지구에 나타났거나 혹은 그 반대이다.

”창조와 진화, 이들 사이에, 생물의 기원에 대한 가능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들은 완벽히 발달한 상태로 이 지구에 나타났거나 또는 그 반대이다. 만약 생물들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출현하였다면, 그들은 계속 발달되어야만 하며, 또는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몇몇 변형과정에 의해 이전부터 존재하던 종들로부터 발달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완벽히 발달한 상태로 나타났다면, 그들은 절대적 지성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것이다.” - *D.J. Futuyma, Science on Trial (1983), p. 197. 

진화론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지하는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라는 사실은 생물학의 중심이고, 생물학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기초를 둔 과학이라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학일까 믿음일까? 그러므로 진화론을 믿는 것은 창조론을 믿는 것과 완벽히 유사한 입장이다. 두 가지 다, 믿는 자들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나 현재까지 둘 다 증명될 수가 없는 개념인 것이다.” - *L.H. Matthews, 'Introduction' to The Origin of Species by Charles Darwin pp. x, xi (1971 edition). 

대안 이론인, 창조론은 이것을 지지하는 사실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은 창조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물리학자들에게 몹시 혐오된다는 사실을 안다. 정말로 나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나 실험의 증거가 뒷받침해 줄 경우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이론이라도 거부해서는 안된다.” - *H. Lipson, 'A Physicist Looks at Evolution,' Physics Bulletin, 31 (1980), p. 138. 

이 두 가지는 절대로 서로 조화될 수 없다.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두 번째 것은 거부된다, 혹은 두 번째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첫 번째 것은 거부된다. 그리고 진실은 오직 한 쪽에만 존재한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와 진화론은 조화될 수 없다. 둘 중 한 가지가 옳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틀릴 것이다. 화석 이야기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긍정한다. 가장 오래된 암석에서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부터 발달된 모습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보이는 일련된 화석들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오래된 암석에서 발달된 종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모든 종들 사이에 중간과정의 화석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 *D.B. Gower [biochemist], 'Scientist Rejects Evolution,' Kentish Times, England, December 11, 1975, p. 4. 

창조된 우주가 근원도 없고, 계획도 없고, 기준도 없으면서, 목적도 없고, 가능성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사람을 생산했다고 생각해 보라.

”다윈론자들의 이론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 엄청난 충격으로 인간은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를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 시대에서 다른 지적인 혁명은 없다……그래서 인간들은 우주에서의 그들의 위치와 그들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 *Michael Denton [Australian molecular biologist],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1985), p. 67. 

단지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뿐, 세번째는 없다.

”적당한 입장은 자연발생을 믿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은 초자연적인 창조가 태초에 한 번 일어났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번째 입장은 없다.” - *George Wald, 'Origin of Life,' Scientific American, August 1954, p. 4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pathlights.com/ce_encyclopedia/Encyclopedia/20hist15.htm

출처 - Encyclopedia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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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04-07-26

하나님은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데


      진화론은 화학진화의 결과로 생긴 최초의 원시세포가 오늘날 수 백만 종의 다양한 생명체의 공통조상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화학진화설이 과학이론으로서 얼마나 문제가 많은 주장인가를 검토한 바가 있다. 이를 인식한 과학자들 가운데는 최초의 생명체가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로부터 일종의 포자와 같은 형태로 우주진에 섞여서 지구에 유입되었다는 소위 판스퍼미아설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서 노벨상을 수상하였던 프란시스 크릭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쨋든 진화론에 있어서의 두번째 과제는 하나의 지극히 간단한 원시생명체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로의 진화를 자연적 메카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그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신종의 출현 메카니즘과 화석학적 증거 내지는 발생학적 증거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풀과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종류대로,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날개있는 모든 새를 종류대로,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들이 창조된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각각의 생명체들은 종류대로 초자연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처음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만큼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지구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진화론과 성경적 창조론은 생물종의 출현과정에 대해서 다시 큰 이견을 보이게 된다. 즉 하나의 조상에서 부터 점진적인 변이를 거쳐서 새로운 생물종이 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각양의 생물종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이 보고 있는 모습에 준하는 완성된 형태로 출현하게 되었는지 이다.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는데 가장 긴요한 과학적 자료는 생물의 화석이다. 화석재료는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거쳤는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점진적인 변이와 자연상태에 의한 생물종의 출현은 필수적으로 중간형태의 생명체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었음을 가정하게 된다.

예를 들면, 고래가 포유동물(대부분 육지에서 서식)이기 때문에 육상의 어떤 동물이 바다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육상의 동물이 가지고 있는 다리가 없어지면서 지느러미의 형태로 바뀌고, 몸은 유선형으로 바뀌고, 꼬리가 꼬리 지느러미의 형태로 바뀌는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리나 꼬리가 지느러미의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양자의 특징을 부분적으로 지니는, 고래의 원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육상동물과 고래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형태의 생명체가 지구상에 출현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 도처에서 발굴되고 있는 화석들 가운데에 이러한 애매한 중간형태의 것에 해당되는 화석이 분명히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그 고래가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면, 고래의 조상에 해당되는 육상동물과 고래를 연결하는 중간형태의 생물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류의 화석이 발견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 중간형태의 화석이 결코 발견된 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많은 진화론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때로는 시조새의 화석과 같이 중간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처럼 해석되는 화석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면밀한 검토를 하였을 때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독립된 생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는 하였다.

결국 성경에서 언급하듯이 모든 생물들이 각기 종류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서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을 가지고 지구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타당성을 지니게 되고, 점진적인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한 생물종의 진화라는 주장은 아무런 과학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대체하기 위하여 소위 '점단식 평형이론' 또는 '괴물이론' 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안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오늘날 유전학이 이해하고 있는 유전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황당무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를 테면, '괴물이론' 이라는 것은 도마뱀이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부화되고 나니 거기서 참새가 나왔다는 식이다. 점단식 평형이론 이라는 것도 새로운 종의 출현은 매우 급격한 속도로 진행이 되어서 그의 중간형태의 화석을 남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식이어서 문제의 본질을 교묘하게 피해보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예로 부터 '닭이 먼저냐, 달갈이 먼저냐?' 라는 질문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겨왔다. 하지만 창조론적인 관점에서는 분명히 닭이 먼저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면 분명히 닭을 창조하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달걀을 창조하셨다면 그 달걀은 누가 품어서 부화시켰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율이나, '송아지는 엄마소를 닮는다'는 유전학의 법칙 등 모든 과학적 추론을 동원해 볼 때, 성경이 가르치듯이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모든 생물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무신론적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결코 과학적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기본적인 원죄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창조냐, 진화냐?'의 논쟁은 결코 과학적 논쟁으로 성립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창조지, 제 96호 [1996. 3~4]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1

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4-07-26

한겨레 지상 논단을 게재하면서 : 한림대 송상용 교수의 창조과학 비판


     본 誌에서는 지난 1994년 4월 14일(목) <한겨레 21> 제4호에 게재된 송상용 교수(한림대)의 본회 사역에 관한 일방적 비방으로 시작된 <한겨레 21>의 지상 논단을 싣기로 결정하였다. 가감 없는 이 3편의 논지만을 가지고도 본회의 회원들과 본회를 기억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그 진상을 정확히 알고 각자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 교수의 글이 나간 후 본회로는 명예훼손에 가까운 그런 글에 대하여 왜 창조과학회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느냐고 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본회는 가장 정중(?)하고도 의연하게 이 일에 대처하기로 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끝까지 기다리신다"는 톨스토이의 말을 기억하면서......  
 

1. 1994. 4. 14일(목)자 한국창조과학회에 관한 송상용 (한림대 사학과) 교수의 비판 기사.

" '원숭이 재판' 다시 할 건가" 

"얼마 전 신흥종교 연구가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또 다시 광신이 문제되었다. 물론 우리나라 뿐 아니다. 선진 미국에서 후진 아랍세계까지 광신과 몽매주의가 기승을 떨고 있다.

광신은 무지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최고의 지식인들도 곧잘 빠져든다. 창조과학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사학자 넘버즈가 쓴 〈창조론자들〉(1992)을 보면 미국이 수출한 한국창조과학회는 10년만에 회원 1천명을 확보했으며, 그중 3백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이고, 미국에 여러 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이 모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기본 생물체는 창세기에 말씀하신 대로 창조주간에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음을 믿는다"고 한다. 회원들은 그동안 5천여회의 강연을 통해 창조론이 과학임을 주장해 왔다. 대전엑스포 기간에는 5억원을 들여 창조과학전시관을 열었으며, 러시아 창조과학회 등을 불러 국제학술대회를 가졌다. 

사실 창조과학운동의 뿌리는 1925년 미국의 '원숭이 재판'까지 올라간다. 프로테스탄트 보수주의의 아성 테네시州에는 인간이 하등동물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이에 반해 진화론을 가르쳤던 과학교사 스코프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42년을 끈 이 사건은 대법원이 반진화론법을 연방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결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이때 이후 생물 교과서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진화론은 최초의 유인우주선 스푸트니크호 발사 충격과 '종의 기원' 1백주년의 자극을 받은 과학 교과과정 개혁으로 1960년대 초에 복권되었다. 

창조론은 새 전략으로 이에 대처했다. 진화론과 똑같은 시간을 창조론에도 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창조론을 교과에 넣으려면 진화론처럼 과학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창조론은 '과학적 창조론' 또는 '창조과학' 을 표방했다. 사회학자 넬킨에 따르면 창조론자들은 당시 가정의 몰락, 도덕적 타락, 공산주의 등의 책임을 과학에 덮어씌웠는데 진화론이 속죄양으로 걸려든 것이다. 창조과학 운동은 레이건 등 극우정치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1970 년대 보수회귀 무드에 힘입어 무섭게 커갔다. 1980년대 들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는데, 한국이 가장 강력한 우방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 창조과학운동에 대항하는 만만치 않은 움직임이 번져갔다. 과학자, 과학 교육자, 진보적 종교지도자들이 정치가 과학에 개입하여 정통논리를 배척해 버린 '뤼생코 사건의 미국판'을 막자고 일어섰다. 20년대 스탈린의 소련 공산당은 농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획득형질이 유전한다는 뤼생코의 설을 지지하고 정통 유전학을 배척하였다. 아무튼 이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연대를 이루었고, 언론, 의회, 법정에서 광신자들과 대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창조과학운동은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있다. 창조과학 고정칼럼을 주어 적극 지원하는 일간지가 있는가 하면, 다른 언론들도 가끔 호의를 보인다. 창조과학은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학교에 교두보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교재를 만들어 대학강의에 침투하고 있고 동아리를 만들어 교사강습회도 연다. 

3월 17일자 한 주간지(시사저널임)에는 한국창조과학회가 한국기계연구원 선박해양공학 연구센터에 3천5백만원을 주어 의뢰했다는 연구 과제의 결과를 보도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조선공학적으로 안정성이 있는지를 연구했다는데, "그것이 지극히 과학적이며 대홍수 또는 역사적 사실임을 보여준 것"이라는 결론이다. 진화론의 약점만 들춰내면서도 스스로 과학임을 증명하지 못한 창조과학이 이제는 적극 공세로 전환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웃음거리를 그대로 넘겨버리는 한국의 과학 풍토는 참으로 한심하다. 노아의 방주가 묻혀있다는 아라랏산에 발굴대를 보내야 정신을 차릴까. 과학자, 과학교육자들이 창조과학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4년전 생물 교과서에 창조론을 포함시켰다가 검정을 못 받자 저자들이 문교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패소했지만, 아직도 계류 중이다. 기세 등등한 창조과학 쪽에서 앞으로 어떤 기발한 카드를 내놓을지 불안하다. 

한국 교회는 창조과학이 과학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종교에도 불명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학회에 수천만원 기부금을 내는 교회 명단에는 진보적인 교파도 보이는 딱한 노릇이다. 원숭이 재판에 소리 높여 항의한 니버 같은 신학자가 이 땅에는 없을까? 다윈 당시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신이 생물을 창조했고, 그 뜻에 따라 진화한다고 함으로써 멋진 타협을 제시했다. 현명한 그리스도교도라면 진화론을 과감히 수용하거나 과학의 일로 돌려놓을 것이다."


2. 송상용 교수의 창조과학 비판에 관한 본회 김정욱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의 반론 (1994.5.12일(목) 제8호 한겨레 21) 

'저절로 '펑' 터진 게 아니다.

'신의 섭리' 주장도 마땅히 존중되어야

사람의 판단이란 것은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살인범이라고 잡아서는 현장검증까지 다 하고 나서 처형했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 살인범은 엉뚱한 데서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우리가 두 눈을 뻔히 뜨고 보는 세계에서도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실험도 해볼 수 없는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의 머리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사람의 두뇌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사람의 두뇌를 컴퓨터와 비교하여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컴퓨터는 컴퓨터의 기본 작동단위보다 더 작은 공간이나 시간의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즉 컴퓨터는 일정한 양의 전류의 흐름을 기본 작동단위로 하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보아서는 그 전류의 흐름보다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도 어떤 전기 화학적인 작용이 기본 작동 단위가 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가 감지할 수 있는 기본단위보다 더 작은 공간적인 사건, 또 그 보다 더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은 인간의 이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빛이나 소리를 컴퓨터가 전혀 느끼지 못하듯이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현상도 이 우주공간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과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감각기관이 느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현상을 연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현상을 일으키는 본질이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본질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본질의 기원도 물론 알 수가 없고, 또 그런 본질이 있게 한 신(神)이 있는지 없는지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만물의 기원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보든지 저절로 진화되었다고 보든지, 그것은 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둘 다 믿는 것일 뿐이다. 몇몇 진화론자들의 잘못은 자기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믿는데, 창조론자들은 틀린 것을 믿는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데 있다.

사실 나는 무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였다가 삼십대 후반에 들어서야 창조론자로 바뀌었다. 갑자기 무엇에 덮어씌여서 정신이 든 것이 아니라, 맑은 정신을 되찾고 깨달음이 생겨서 창조론자가 된 것이다. 내가 생각을 바꾼 후에 알게 된 것은 진화론이야말로 자연법칙상 일어날 수 없는 것을 믿는 하나의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당연한 것을 믿고 있을 뿐이다.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몇 가지 쉬운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는 아무리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을 해봐도 아무것도 없던 데서 에너지나 물질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창조론자들이 그렇다면 그것들은 초자연적으로 창조되었음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실험을 통해서 대칭되는 모양과 목적과 질서와 상호의존적인 것은 설계해서 만들지 않으면 저절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엇을 하나 '펑!' 터뜨렸는데 거기서 대칭이며 질서며 목적이며 상호의존이며 그런 것이 나타난 것을 본적이 없다. 

민심을 어지럽히는 광신도?

우주와 생물과 원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에 나타나 있는 대칭성과 목적과 상호의존과 질서를 두고 창조론자들이 그렇다면 누군가 지혜로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진화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펑 터져서 나타났다고 믿는다. 누가 더 타당한 믿음의 근거를 가졌는가?

창조과학회에 있는 과학자들이 무슨 이상한 도를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는 광신자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정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 과학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충실히 일하고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어서 사회에서도 인정들을 받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겸손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신이 창조한 환경을 아끼며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도록 권면함으로써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가꾸어 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3. 한겨레 21 송상용 교수 논단에 대한

한국과학기술원 창조과학연구회(RACS)의 입장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 실린 송상용 교수의 논단은 창조과학을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으며,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두 가지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데, 첫째가 국내의 탁명환 소장 피살 및 영생교 사건과 국외의 종교분쟁을 인용하고 있다. 송교수의 글에 의하면 광신과 정상적인 신앙을 혼돈하고 있는데, 창조과학 활동을 어떤 면에서 광신이라고 주장하는가? 사실 정직한 과학자라고 한다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한 아직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과학자다운 자세라고 생각한다. 기원에 관한 각자의 판단에는 그것이 과학적이라기보다 신념과 신앙의 문제이다. 만약 생명의 기원이 진화론에 의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고 즉,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라고 증명된 것이 있으면 제시해 보라. 결국 기원의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최소한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어떠한 가설이 현재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에 근거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과학회는 창조는 물론이고 진화도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둘 다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기원에 대한 두 입장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서 재현하거나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확인할 수 없는 기원의 문제를 대하는 자세는 어떤 가설이 더욱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신념에 관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송교수가 예로 든 스코프스 재판에 대한 설명은 일부분만 본 것이다. 그 사건의 결말에 대해서 정확히 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송교수는 그 재판에서 어떻게 진화론자들이 승소했는지를 알고 있는가? 진화론자들이 그 재판에서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사용한 화석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네브라스카인 이라고 명명된 이빨 화석이었는데, 당시는 그 네브라스카인이 인류진화과정을 설명해 주는 중간단계 화석으로 주장되어, 인간이 원숭이에서 유인원으로 다시 중간단계를 거쳐 현인류로 진화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했다. 그 네브라스카인의 화석으로 인해 창조론은 패소했고 진화론은 승소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중간단계 화석이라는 네브라스카인은 미국 네브라스카 지방에선 멸종된 혹은 남미에서 발견되고 있는 멧돼지 이빨로 확인되었다. 아직까지도 원숭이에서 혹은 다른 생명체에서 인류가 진화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행정적인 판결은 아직 끝났으나 과학적인 판결은 아직 끝나지 않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원숭이 재판을 다시 하려 든다고 매도하지 말라. 다만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둘 다 기원에 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광신인가? 송교수는 창조론을 교과서에 넣으려면 진화론처럼 과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서 진화론이 과학이라고 주장하는가? 과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증명도 할 수 없고, 실험도 할 수 없고, 관찰도 되지 않는 이론이 과학이라 할 때 그 한계는 어디까지나 가설의 범위를 넘을 수 없는 것이고, 가설은 과학자의 신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기존의 중, 고등 과정뿐 아니라 대학과정의 교과서를 보아도 진화가 확인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없다. 다만 진화가 됐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한창 UR 문제와 북한 핵사찰 문제 등으로 인해 반미(反美)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이 때에 어디에 무슨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지만 창조과학이 미국 내 극우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한국창조과학회가 마치 미국의 정치적 영향을 받은 것처럼 기술하였다. 보수회귀 무드 하에서 진화론이 핍박을 받은 것 같은 감정적 표현에 대해 송교수는 무엇을 보고 그러한 판단을 내렸는가?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보수회귀 무드에 의해 진화론과 창조론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배격을 받았는지 송교수는 정직한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과학을 평론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객관적이고 신중하며 정직하기를 바란다. 

노아 방주의 조선공학적 안정성에 관한 연구는 실제의 실험과 컴퓨터 시물레이션에 의해 밝혀진 결과였다. 어떤 이유에서 웃음거리인지, 또한 정신 못 차리고 한 일인지를 송교수는 보다 과학적으로 평가하고 평론하기를 바란다.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선입견과 주관적 견해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송교수가 지적한 광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내용중 과학적으로 입증되며, 관찰되며, 증명된 사실이 있으면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내용이 있으면 기원에 관한 창조론적 입장이 수정되고 개선되어야 할 문제이지, 타협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과학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출처 - 창조지, 제 90호 [1994. 4~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0

참고 :

장대식
2004-07-26

모든 생물은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1)


(1) 생명의 기원과 두 가지 관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1-12).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약 200만종이나 되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생물의 구조, 영양, 대사, 생식, 발생, 유전 등에 관한 연구를 하는가 하면 환경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관찰하고 연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의 이 다양한 생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엇갈리고 있는데 그 하나는 창조론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진화론적 관점입니다. 창조론적 관점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으로 창조자의 초자연적 지혜와 설계에 의하여 처음부터 독특한 형태를 가진 생물들이 종류대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한편 진화론적 관점은 진화론자들의 학설에 근거하는 것으로 수십억년이란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연히, 그리고 자연적으로 생명이 없는 무기물에서 시작하여 먼저 간단한 생명체로 되고, 차츰 복잡하고 질서있는 체제를 갖춘 고등생물로 서서히 진화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2) 성경에 근거한 창조론적 관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1-12)

이상과 같이 땅에서 나는 모든 식물들은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처음부터 각각 종류대로 나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1)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물고기와 모든 날짐승을 처음부터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5) 라고 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짐승과 육축 그리고 땅 위의 기는 모든 동물을 처음부터 각각 그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성경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면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성경의 주장은 크게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모든 생물을 땅에서 나게 명령하시거나(창 1:11~12), 만드시거나(창1:25), 창조하셨습니다(창1:21). 다시 말하면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생명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즉, 창조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생물을 존재하게 하실 때, 처음부터 각각 그 종류대로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두 특징을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3)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
 

이제 여기서 우리는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멘델 (Mendel; 1822~1884)의 유전법칙과 다윈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은 서로 충돌되는 이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처음에 생물이 아메바와 같은 아주 간단한 생물로부터 시작하여 수십억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오늘날과 같이 수백만 종의 생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유전법칙에서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동일한 종내에서 어떤 법칙으로 유전이 되느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모든 생물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자연히 옮겨지지 않으며 유전 질서가 엄격히 지켜진다는 과학적 사실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전법칙 내에서도 유전학적 한계 내에서의 변이(變異)와 다양성(多樣性)은 관찰이 됩니다. 가령 사람에게도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이 있고 동물이나 식물에도 같은 종(種)에 여러 품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전자는 안정하여 환경에 따른 종의 변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나쁜 쪽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음 세대로는 유전이 되지 않습니다. 

"또 너희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상의 성경 말씀은 생물의 유전법칙을 잘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생물의 종류마다 씨가 있고, 그 씨를 뿌리면 씨마다 각각 다른 형체의 몸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씨는 그 유전 인자를 의미합니다. 모든 생물의 세포 속에 유전 정보(유전 인자)가 들어 있다는 현대 과학의 증언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었던 생명의 비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실은 모든 생물이 처음부터 그 종류대로 시작되었다는 성경 말씀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온 생물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의 약점만 지적해 주면 생물이 처음부터 그 종류대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창조론이 보다 과학적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진화론을 다룬 다음에 알아보기로 합니다. 



(4) 진화론적으로 본 생명의 기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4-25).

진화론에서는 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을 처음에 하나의 공통된 미생물로부터 장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진화되어 생긴 후손들로 보고 있습니다. 처음에 수소 원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수십억년의 긴 시간 동안에 서서히 사람에 이르기까지 진화되었다고 봅니다. 즉, 수소 원자에서 시작하여 아메바→원생동물→무척추동물→척추동물→파충류→포유동물→사람의 순서로 진화되었다고 봅니다.

생물이 진화된 원인으로서는 라마르크(J.Lamark; 1744-1829)의 용불용설(用不用說), 다윈(C. Darwin; 1809-1882)의 자연선택설(自然選擇說) 및 드 브리스(H. De Vries; 1848-1935)의 돌연변이설(突然變異說)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론에 의하면 생물의 종에 변이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진화론적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장 유력한 최근의 이론은 러시아의 생화학자인 오파린(A.I.Oparin; 1894-1980)이 1922년에 발표한 화학진화(化學進化)의 가설입니다.

가장 간단한 무기물에서 단세포(單細胞)까지의 진화 과정을 화학진화라 하고, 단세포 생물이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고등생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생물진화라 합니다. 즉, 수소 원자에서 아메바(단세포 동물)까지의 진화는 화학진화이고, 아메바에서 사람까지의 진화는 생물진화입니다.

오파린의 화학진화에 대한 가설에 의하면 질소, 탄소, 수소 등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유기물(有機物)들이 저절로 모여 더 복잡한 형태의 유기 복합물인 코아세르베이트(coacervate)가 됩니다. 그 다음 이것이 더 복잡한 코아세르베이트가 된 후 드디어 자기복제(自己複製)와 번식을 할 수 있는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가 된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질소, 탄소, 수소 등이 특정한 배열로 질서있게 결합하여 질서도가 높은 아미노산이 되고 그 다음에 다시 더 질서도가 높은 단백질이나 핵산(核酸)이 되며, 드디어 매우 복잡하면서도 질서도가 더 높은 생명 세포로 진화되어 간다는 이론입니다. 생물이 진화되었다는 증거로는 화석상의 증거, 발생상의 증거 및 비교해부상의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지층에 나타나는 생물의 화석이 연대에 따라 간단한 생물로부터 복잡한 생물로 나타난다는 화석상의 증거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5)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고찰
 

이제 우리는 생명의 기원이 우연적인 진화의 산물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설계의 산물인가를 몇 가지 과학적 고찰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① 열역학적 고찰

먼저 우리는 화학진화와 생물진화의 가설을 열역학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 내에 있는 에너지는 그 형태는 변할 수 있으나 그 총량은 일정불변이다.' 라는 '에너지보존의 법칙' 을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석유나 가스를 사용하면 점점 줄어지는 것처럼 이 우주 내에 있는 가용(可用)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우주 내에 있는 모든 사물은 가용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질서에서 무질서로 바뀌게 됩니다. 즉, 무질서도가 증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우주 내에서 가용 에너지가 감소하고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자연 현상'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 합니다.

모든 생물은 원자들이 질서있게 모여 세포를 이루고, 또 그 세포가 질서있게 모여 조직과 기관을 이루는 질서도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이 죽어 부패하면 원자 또는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주위에 흩어지므로 질서도가 낮은 무질서한 상태로 됩니다. 이처럼 자연 상태에서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상태로 진행이 됩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에서 생명 세포가 되는 화학진화의 과정은 분명히 질서도가 증가하는 과정입니다. 질서도가 자연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인 자연 법칙에 어긋나게 되므로 화학진화는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② 생물학 및 화석학적 고찰

또 단세포 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되는 생물진화 과정도 질서도가 증가하는 과정입니다. 고등생물로 갈수록 질서도가 높고 모든 조직으로 볼 때 사람이 질서도가 가장 높은 생물입니다. 따라서 생물 진화의 과정도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복잡하고 보다 질서있는 조직을 가진 고등생물로 진화되기 위해서는 유전자에 큰 변이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유전자는 놀랄만큼 정확하고 질서있게 유전 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200만여 종이나 되는 다양한 생물이 진화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화석은 생물의 기원과 그 자취를 알아보는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됩니다. 진화론에서는 지층을 12층으로 구분하고 간단한 생물 화석에서부터 복잡한 고등생물 화석이 지층의 순서대로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고생대에서 신생대까지 12개의 지층 구조를 모두 보여주는 지층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하등동물의 화석 지층이 고등동물의 화석 지층보다 위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의 진화 과정에 있는 중간형태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진화론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있습니다. 


③ 창조론적 입장

한편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모든 생물들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유전학적 한계 내에서의 소진화는 이루어진다고 인정합니다. 창조론의 주장은 유전학, 분자생물학, 열역학법칙 등 자연과학의 모든 원리와 법칙에 모순되지 않으며, 진화론에서 내세우는 화석 자료들과도 잘 일치가 됩니다.

특별히 생물의 진화 과정을 증거해주는 중간형태의 화석이 없다는 것은 생물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만들어졌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물의 화석은 진화론보다 창조론을 증거해주는 과학적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6) 생명의 기원에 대한 수학적 고찰 

단백질은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의 가장 중요한 구성 물질입니다. 생명체에 있는 단백질은 20여 종류의 아미노산이 수백개에서 수만 개까지 일정한 배열로 모여 생명체의 기능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단백질은 세포핵 내에 있는 물질로 유전자의 본체를 이루는 DNA(deoxyribo nucleic acid)의 명령에 따라 불과 5초만에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즉, 불과 5초만에 수백 개의 아미노산이 질서있게 연결되어 단백질로 합성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자연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간단한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봅니다. 지금 100개의 아미노산이 특정한 순서로 자연적으로 배열되어 간단한 단백질로 합성될 수 있는 확률은 계산에 의하면 10130분의 1에 불과합니다. 10130분의 1은 0에 가까운 심히 작은 수입니다. 진화론을 수학 확률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 카플란(Kaplan)은 "생명체의 형성의 확률이 10130분의 1이라고 하면 생명은 생명을 주는 자 없이는 생겨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설령 우연히 단백질이 형성된다 하더라도 단백질이 곧 세포는 아니며, 수많은 단백질과 또 다른 여러 종류의 많은 분자들이 질서 있게 모여야 하나의 세포가 됩니다. 또 세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닌 것입니다. 물질의 분자만 모아놓았다면 죽은 세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간단한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생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0이며, 더욱이 생명 세포가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생명 세포 내에서는 불과 5초만에 이루어지고 있으니 생명의 합성에는 초자연적인 창조주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7) 진화론의 약점
 

진화론은 수십억년의 지질시대를 통하여 무기물→유기물→단세포생물→하등생물→ 고등생물→인간의 순으로 생물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학은 그 진화의 단계마다 불합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하는 '생물진화' 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한 종에서 보다 우수한 다른 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전 질서는 엄격하기 때문에 유전자 변이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나쁜 쪽으로 일어나고 다음 세대로는 유전하지 않습니다. 또한 생물진화의 중요한 증거가 될 중간형태의 화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로, 무기물에서 단세포까지의 진화인 '화학진화'도 불가능합니다. 생물진화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무기물에서 단세포까지의 진화는 질서도(秩序度)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자연계에서의 질서도는 감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화학진화는 자연법칙에 위배되므로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학확률적으로 볼 때 세포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단백질분자 하나가 자연적으로 합성되는 것조차도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셋째로, 진화론은 무(無)에서 무기물(無機物)이 생기는 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일단 무기물을 전제하고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되는 화학진화부터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기물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에너지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이 우주 내에 있는 물질과 에너지는 절대로 우연히 생기거나 저절로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우연히 생겼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진화론은 자연법칙 그 자체에 모순이 됩니다. 



(8) 창조론의 타당성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이 말씀 한마디로 우주 만물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모든 문제가 명료하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설계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생명체가 창조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자연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단백질 분자를 단 5초만에 합성할 수 있는 손길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령 100개의 아미노산 분자로 된 단백질 분자가 저절로 합성되기 위해서는 확률적 계산에 의하면 무려 10 년이나 걸립니다. 그런데 생체 내에서는 이와 같은 불가능한 일이 단 5초만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엄청난 일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부득이 자연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둘째로, 세포에 생명을 부여하는 손길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령 어떻게 해서 자연적으로 세포의 물질이 질서있게 모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세포에 불과합니다. 죽은 세포는 단백질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일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셋째로, 세포핵의 DNA에 유전정보 등 정보를 설계해 넣은 손길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물은 이 유전정보에 의하여 그 형질이 자손에게 그대로 유전됩니다. 그 정보가 저절로 생겨났다고는 절대로 볼 수 없으며, 이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설계의 작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9) 결 론
 

지금까지의 다각적인 과학적 고찰의 결과로 우리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서 진화론적 관점보다 창조론적 관점이 보다 타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종래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창조론적 관점으로 바꿀 때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요구되는 신앙적 요구가 아니고, 생명과학과 창조과학의 발전에 따른 일반적이고 교육적인 요구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생물은 종류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 l:11~12, 21, 25, 27).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amazement/a1/a11/a11c1.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

참고 :

Ken Ham
2004-06-26

창조 :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Creation : Where's the Proof?)

여러 해를 걸쳐 나는 많은 사람들한테서 다음과 같은 질문공세를 받아왔다:

”저는 친구들에게 증명해 보여주려 노력했습니다. 친구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성경 안에 내용들에 흥미를 느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창조의 참 증거를 보고 싶다고 하며, 기독교에 관한 나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청을 유도하기 위해서 과연 성경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제가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를 말할 수 있을까요?”

내 대답은 간단하다.

 

증거 (Evidence)

창조론자나 진화론자, 크리스천이나 비크리스천 따질 것 없이 모두가 다 같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사실은 누구에게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지구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위에 있는 같은 화석 퇴적층을, 그리고 같은 동물과 식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들은 동일하다.

나타나는 차이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같은 사실을 해석하는 방법에 있다. 그러면 왜 우리들은 동일한 사실들을 다르게 해석할까? 그 이유는 우리들의 해석이 서로 다른 '전제' (자명원리 라고도 함; axioms) 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증명할 수 없으면서 제 각기 참이라고들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차이가 생기는 원인이다. 일단 전제를 참이라고 가정한 다음 사람들은 그 전제를 다른 이론의 결론을 도출하는데 근거로 삼는다. 모든 주장은 전제 위에 근거한다. 과거의 사건을 해석할 때 전제는 특히 적절하게 이용된다.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

우리는 모두 현재에 존재한다. ━ 그리고 모든 사실도 현재에 있다. 이 사실들의 현재적 존재를 가능하게 한 방법을 (동물들은 어디서 왔을까? 화석의 퇴적층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따위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본다.

그러나 과거에 없었던 우리는 당연히 과거의 사건을 관찰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과거의 사건을 알 수 있어서 현재 이 시점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타임머신이라도 있어서 과거의 사건을 확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크리스천은 당연히 그런 것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로는 '타임머신'이 맞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시기에 우리가 꼭 알아야할 과거의 사건들을 알려주신다.

그런 중요한 사건들 (창조, 타락, 대홍수, 바벨탑 등등)을 근거로 하고, 우리는 현재의 증거들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사고방법을 세워나가는데 필요한 일련의 전제를 가지게 되었다.

진화론자들은 그들 나름의 과거/현재에 관한 일종의 신념의 근거가 되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 (최소한 특별한 창조의 사역을 하는 하나님)은 없다는 전제가 그것으로서, 그 위에 그들은 현재의 증거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크리스천의 그것과 달리 한다.

이런 까닭으로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 사이에 증거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때면,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그들 나름의 전제 에 근거한 서로 다른 해석 에 관한 논쟁인 것이다. 이것이 논쟁이 자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흐르게 되는 이유이다:

”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겁니까?”

”그래요, 모르겠어요. 그러는 당신은 당신 말이 얼마나 틀렸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천만에요. 저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이 분명히 맞아요.”

”아닙니다. 전혀 분명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 말이 맞는다는 것이 분명한데요.”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증거를 놓고 논쟁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제 각기 다른 안경을 끼고 증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출발부터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전제에 관해서 논쟁을 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 까지는, 그들은 서로 다른 믿음의 근본적인 이유에 관해서 토론해볼 생각을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안경으로 바꿔 쓰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증거해석을 바꿔보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전제를 바꾸기 전까지는 믿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이론을 이해하는 크리스천이 실질적으로 진화론자의 안경을 (전제들을 진실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쓰고 보면 진화론자들이 증거를 바라보는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비크리스천은 정신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유 때문에, 그들과 크리스천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전재의 싸움임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전제에 대해 자문해 보기 전에는 크리스천의 안경을 쓰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데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 창조에 대해 어떤 특수한 과학적인 논쟁에서 우리가 창조의 '증거'를 그냥 제시하기만 해도, 그것으로서 창조가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상대방은 납득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증거에 대해서 제 3자로부터 다른 해석을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해석이 우리의 해석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우리의 설명을 버리고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싸움의 문제는 전제 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문제의 소재를 더 잘 이해할 것이다. ━ 즉, 해석이 다른 것은 전제가 달랐던 것이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 다시 말해서 출발선에서 이미 마음에 품고 있는 믿음 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교사로서 나는 창조의 사실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때마다, 그들은 나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다른 교사들로부터 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때에는 학생들은 나에게 다시 와서는, ”자, 우리들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나는 학생들에게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사실해석을 어떻게 우리가 세운 전제에 근거시키는가를 가르치는 방법을 안 다음부터는 그 방법대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사들이 사실을 자기네들 식으로 해석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교사들의 근본적인 가정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아니고 교사가 저한테 찾아왔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이 교사의 증거해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그 교사의 사고의 기본에 도전하였다고 내게 항의하였다.

어떤 일이 일어났었기에 학생들이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반 학생들이 변화된 모습은 놀라웠다! 한 10여년이 지난 후에 우리 반 학생들 가운데 몇몇이 찾아와 그들이 학창시절 내가 가르쳐준 사고방법 덕분으로 활동적이고 확신에 찬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토론을 전개하는 방법 (Debate Terms)

자주 사람들은 성경을 펴들지 않고 토론을 하자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동의하려면, 토론을 전개하는 방법을 설정하여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토론을 전개하는 조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1. '사실들은' 중립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해석이 안 되는 사실 (brute facts)”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들은 해석이 되게 되어있다. 일단 성경을 논쟁에서 배제하고나면, 그 때엔 크리스천의 전제들은 사라지고 말아서 사실을 해석할 대안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크리스천에 반대쪽 토론자는 여전히 그들의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

2. 진리는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확정될 수 있으며 또 확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잠언 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크리스천은 이 싸움에서 성경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는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비크리스천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3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한복음 3:19).

상대방이 요구하는 토론의 조건에 동의하면 우주역사에 대한 성경의 말씀이 그 역사를 이해하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저들의 전제를 암암리에 수용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판결한다 (Ultimately, God's Word convicts)

베드로전서 3:15는 물론 다른 성경 구절들에 있는 말씀들도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논쟁의 수단을 다 사용하여야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0:4-5은 저들의 오류를 반박하여야 한다고 말씀한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때와 같이). 어쨌거나 우리는 결코 히브리서 4:12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또한 이사야 55:11의 말씀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였다.

비록 우리 인간의 논리가 제아무리 힘이 있다고 하여도, 궁극적인 판결의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진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어떤 논쟁에 임할 지라도 판결의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논쟁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실용적인 적용방법 (Practical Application)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성경은 아니고 '증명'을 또는 '증거'를 말하라고 언쟁할 때면, 나는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저로서는 당신들이 성경을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군요. 그러나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은 제가 우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주변의 사실들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라고 믿습니다. 성경에 기초를 두고 생각하는 저의 사고가 어떻게 이 세계를 설명하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과학과 상충하지 않는가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컨대, 성경은 하나님이 동물과 식물들을 그 종류별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위 자연선택이라든가 유전적 부동(浮動)이란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으며, 또 해석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유전학이라는 과학이 성경에 기초를 두면 어떻게 조리가 서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과학적인 예에도 이 방법을 적용한다. 예컨대, 죄와 심판과 같은 문제가 지질학이나 화석의 증거와 얼마나 적절하게 연계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인간의 최초의 타락이 뒤이은 창조의 저주와 더불어 인간에 유해한 돌연변이, 폭력 그리고 죽음의 증거로 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일단 이것을 상세히 설명한 다음, 나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졌다.

”자 내 설명은 이만큼 해두고 지금부터는 이 사안들에 대한 당신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당신의 신념에 기초를 둔 당신의 사고 방법이 어떻게 이와 같은 증거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과학적 설명과 논리에서 어디에 오류가 있었는지도 지적하여 보세요.”

논쟁을 유리하게 펼쳐 나아가려면, 크리스천은:

1. 증거를 해석하는 사고방법을 구축하기 위하여 성경적인 전제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2. 성경과 과학은 적대하지 않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3. 상대방이 근거로 삼는 전제들 (전제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에 공격을 가하여야 할 것이다.

4. 상대방한테 그들의 과학과 그들이 내세우는 설명이나 전제들과 논리적으로 합치되는가를 증명해 보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5. 인간의 영혼을 판결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논쟁 중에 상대방을 창조자/회복시키는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인도하려는 노력은 않고 창조만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영광되게 하는 사람을 영광되게 하신다. 우리들은 생명에 관한 모든 진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사용하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연주의와 논리, 그리고 현실 (Naturalism, Logic and Reality)

창조론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차 의식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제라고 하면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배제한다는 전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물질로부터 생겼으며, 세상에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든가 태초의 창조적인 지성 따위는 없었다는 자연주의/유물론의 주장이바로 그들의 전제이다. 아래에 제시된 두 예가 그들의 가정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1. 한 젊은이가 내 세미나에 찾아와서, "아무리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도 저는 여전히 '빅뱅(big bang)' 이론을 믿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모두 무작위적인 과정을 거쳐 우연히 여기 던져졌다는 이론 말입니다. 요컨대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의 두뇌나 생각조차도 무작위의 산물이라는 말이군요. 따라서 당신의 생각이 옳은지 조차도 모르겠다는 말씀이 되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두뇌가 올바른 길로 진화되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심지어 그런 맥락에서 보면 당신은 옳다는 말의 의미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당신의 진술이 옳은지 또한 내게 던진 질문 그 자체가 옳은 지도 모르겠군요."

그 젊은이는 나를 쳐다보다가 머쓱해서 불쑥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이 추천하신 책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결국 자신의 믿음이 그 스스로의 근거를 도려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전개하는 ”합리적 설명이란 것”이 그 합리성 자체의 근거를 파괴하였던 것이다.

2. 또 한 번은, 세미나가 끝나자 한 남자가 내게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가치를 믿지 않음은 물론이고 현실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당신은 지금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그렇군요” 하고 내 말에 호응하였다. 그래서 나는 재차 ”뭐가 그렇다는 것이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까 봅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집에서도 없을 것입니다” 했다. 그는 다시 ”그렇군요”. 그래서 나도 또 다시 ”뭐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라고 되물어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 정도에서 그 사람은 내 말뜻을 알았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또 철학적으로 어떻게 현실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 자체는 고사하고 우리는 어떻게 진리라는 가치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Ed. Note: for more information on formal logic and the Christian faith, see Loving God With All Your Mind: Logic and Creation.

 

참고자료

1. 사실을 말하자면, 과학은 기독교적 이념구조 안에서만 실패작을 피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세속적인 과학자들도 이 점에 한해서는 실질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과학도 실질적이며 객관적인 이 우주가 변하지도 속이지도 않는 신성의 법 수여자(神性의 法 授與者)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 전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 신성의 법 수여자는 인간의 마음을 원칙적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분이다. [Ed. note: Refuting Evolution, Ch.1, discusses this in more detail]

2. This assumption is even defended, as a 'practical necessity' in discussing scientific things including origins, by some professing Christians  who are  evolutionist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www.answersingenesis.org/docs/4179.asp

출처 - Creation 22(1), December 199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5

참고 :

Ken Ham
2004-06-23

스코프스 재판과 십계명 

(Scopes & the Ten Commandments)


       공공학교에서(그리고 앨라배마의 사법부 건물에서) 십계명의 제거는 2003년 미국 전역에서의 주요 뉴스였다. 그러나 당신은 이 사건과 1925년 스코프스 재판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는 동안, 나는 공공 장소에서 십계명 판들을 제거하라는 결정 후, 앨라배마 사법부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일부는 이 일의 발생을 멈추어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땅 위에 엎드러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람 중에 얼마나, 이 전투의 근본적인 본질을 이해하고 있을까?

만약 내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가지고, 시위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실례합니다. 당신은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창세기 1 장의 창조의 날(days)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조과학 사역 동안의 나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그 대답은 대부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무엇이라고요? 그들이 십계명을 제거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질문을 나에게 물어보는 것입니까?”

또는 내가 '당신은 가인(Cain)이 그의 아내를 어디서 얻었는지 대답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까? 그들이 십계명을 법으로 제거했다구요. 당신은 왜 그것과 상관없는 질문들을 물어보며, 내 시간을 허비하게 합니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문화(culture)가 이처럼 행동하고 있는 진짜 이유와 관련이 있다. 스코프스 재판(공공학교에서 진화론의 교육에 관계된)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인이었던 기소자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증언석에 섰을 때,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미국시민자유연맹)의 변호사였던 클러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가 그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들을 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의 나이, 창조의 날들,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얻었는지”에 관한 것들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의 십계명 논쟁과 확실히 관련이 있으며, 대로우도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증언석에서 기독교인으로 서있었던 브라이언은, 가인의 아내에 관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믿고 있지 않으며, 수백 수천만 년의 지구 나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때 대로우는 자신이 승리하였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청중들 앞에서 기독교인은 성경의 역사(즉, 가인의 아내)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과, 성경을 기록된 말씀 그대로(창조의 날들)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적인 가르침(오래된 연대)을 인정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브라이언은 (고의는 아니지만)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켰고, 세속적인 철학이 문화와 교육계에 널리 퍼지도록 하는 길을 닦았던 것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브라이언처럼, 역사로서 성경의 평범한 말씀들을 거부하고 세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세상이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돕고 있다. 그러한 세뇌 교육이 수십 년 동안 진행되었고, 이제 한 세대가 일어나서 성경에 기초한 도덕성까지도 (논리적으로)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적으로 기독교적 이념에 기초한 구조들이 점점 제거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은 왜 AiG가 세워졌는지, 그리고 창조박물관(성경의 역사가 사실임을 전 세계에 말해줄)이 오늘날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또 하나의 극히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참조 : 스코프스 재판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시되었던 흔적기관, 헥켈의 배아, 자바인, 필트다운인, 네브라스카인 등은 사기와 허구로 밝혀졌지만, 이들 가짜 증거들로 인해 진화론은 과학적인 것으로 위장되었고,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쇠퇴와 함께 과학, 교육, 문화, 예술,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참조 : The Scopes 'monkey trial”—80 years later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544

The wrong way roun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037

Inherit the Wind: an historical analysi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682

Scopes Trial facts v Inherit the Wind fic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793

The big picture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3/i2/bigpicture.asp

Evolution in American education and the demise of its public school system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5/0131education.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us/newsletters/1103lead.asp ,

출처 - Answers Update – US, November 2003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61

참고 : 2067|3677|4010|3051|2148|2061|729|180|91|485|1440|1441|1454|3054|3056

박희주
2004-06-21

창조-진화 논쟁 : 회고와 전망


      진화론 논쟁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의 기원]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되었으나, 초기의 논쟁은 주로 영국에서 발생했다. 이 논쟁은 생물학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등 사회 각 영역에 걸쳐 다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별히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논쟁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에서의 논쟁은 대략 지식인들 간의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반진화론적 흐름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영국교회는 진화론과 타협 또는 화해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반진화론적 경향이 우세했으며, 진화론 논쟁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논쟁으로 치달았다. 1920년대 본격화된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창조-진화 논쟁사에 있어서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20세기 미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창조과학이란 용어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는 198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된 바로 그 창조과학이며, 미국의 창조론 운동은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창조과학회의 지적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난 20년간 전개되어온 한국 창조론 운동의 특성과 그 전개과정은 미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창조-진화 논쟁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별히 한국창조과학회 20 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지적 배경을 더듬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창조과학회가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반추는 필요 불가결한 작업이라고 믿는다.

미국 창조-진화 논쟁은 1960년을 전후로 대략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20년대 스코프스 법정 논쟁으로 대표되는 반진화론 운동과, 1980년 아칸소 법정논쟁으로 정점을 이룬 창조론운동이 그것이다. 이외 1990년대 초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은 최근 미국 창조-진화논쟁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앞의 두 가지 운동이 창조-진화 논쟁의 회고 부분이라면, 지적설계운동으로 시작된 최근의 동향은 앞으로의 전망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 발표에서는 대략 이 세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1) 스코프스 논쟁 (1925)

1859 년 '종의 기원” 출간으로 미국 과학자 사회에 소개된 진화론은 당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기원에 대해 지배적 답변이었던 '특별 창조설’을 급속히 대체하기 시작하여, 1880년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추세는 과학 교육에도 곧 반영되어 이때쯤 진화론은 처음으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등장한다. 20세기 초 미국 중등교육의 급속한 팽창에 힘입어 진화론은 광범위하게 미국사회에 보급되며 이에 위협을 느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반진화론 운동을 일으킨다. 3 번이나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이미 교과서에서 사라진 특별창조론과 교육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진화론을 제거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며 이 운동을 이끈다. 미국 전역에 걸친 대대적 반진화론 운동의 결과 테네시(1925), 미시시피(1926), 아칸소(1928) 주에서 진화론교육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반진화론법이 통과된다.     

테네시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직후 미국시민자유연맹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이후 ACLU로 약칭)은 이 법의 실효성을 시험할 것을 선언하고 나서고, 이에 협조하기로 한 스코프스(John Thomas Scopes)라는 교사가 진화론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테네시주가 즉각 스코프스를 고발하고 ACLU가 맞서 변호하는 희대의 재판이 1925년 7월 데이튼이라는 소도시에서 열린다. 약 2주간에 걸친 대 논쟁은 결국 스코프스 측이 $100 벌금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일단락 된다. 이 재판 과정에서 ACLU측 변호사 다로우 (Clarence Darrow)와 역시 변호사 출신이었던 브라이언이 맞붙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브라이언은 재판이 끝난 3일 후 돌연사 한다. 법률적으로는 진화론 측이 패소했으나, 자유적 경향의 미국 주류언론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원숭이 재판으로 희화화하고, 반진화론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조롱거리로 만듦으로서 근본주의 측 역시 큰 이미지 손상을 입게된다.

1920 년대 반진화론 운동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변천과정이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60 년대에까지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주류해석을 형성했던 자유주의적 해석들은 대체로 그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스코프스 재판(특히 재판 중 브라이언과 다로우의 격돌)을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대결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이러한 구도 하에 아무런 지적내용이 없는 남부 농촌의 근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브라이언을, 그리고 모더니즘의 상징으로 다로우를 설정한 후, 다로우의 냉정한 이성적 심문에 의해 브라이언의 맹목적 신앙이 철저하게 조롱거리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스코프스 재판의 하이라이트로 제시함으로써, 브라이언의 패배를 곧 근본주의의 패배로 연결시켰다. 한 마디로 스코프스 재판이 근본주의의 쇠퇴를 결과했다는 것이다. 브라이언의 돌연사도 결국 이러한 패배의 충격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은 반진화론운동을 현대 세계와 과학에 대한 두려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반동, 교육과 사회를 근본주의의 이상과 부합하도록 교정하려는 욕구) 등 시대착오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하고, 현대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죽어가는 운동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반진화론적 근본주의가 부활함에 따라 이러한 예측은 빗나가고 만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해석에 근원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60년 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이다. 대표적인 수정주의 역사가로 폴 카터(Paul Carter), 에른스트 산딘(Ernest Sandeen),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이 세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폴 카터 : 그는 근본주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곧 쇠락할 주변적인 사이비 신앙이 아닌 수백만의 추종자가 따르는 강력한 신념으로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스코프스 논쟁 이후 근본주의가 무너졌다는 주장은 근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연구하지 않은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들어낸 판에 박힌 해석이라고 카터는 일축한다. 오히려 근본주의가 보이는 지속적인 활력에 주목하여 이를 가능케 한 요인을 근본주의 운동에서 찾아내는 것이 근본주의 연구에 있어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제언한다.

에른스트 산딘 : 근본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추적. 산딘은 근본주의 세력과 이념의 근원으로 무식한 남부의 시골문화를 지목한 기존의 해석과 달리 근본주의는 종말론적 신학과 관련된 당시 보편적 믿음이었으며, 따라서 지적 정통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조지 마스덴 (George Marsden):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은 1980년 출판한 {근본주의와 미국의 문화: 20세기 복음주의의 형성, 1870-1925}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에서 집대성된다. 마스덴은 근본주의 운동의 지적 이념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산딘과 함께 근본주의는 지적인 내용이 결여된 공허한 운동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제를 비판하며, 근본주의 운동의 해석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들 수정주의자들은 스코프스 논쟁을 자유주의적 언론이 창출한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한다.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이 반진화론 운동의 지적신뢰성에 손상을 가하기는 했으나, 이 운동의 운명에 즉각적인 그리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코프스 재판이후 반진화론운동은 곧장 몰락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다. 재판이 끝난 2년 후인 1927년에 모두 13개 주에서 반진화론 법이 상정됨으로써 반진화론 운동은 오히려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인은 불분명하지만 (대식가인 브라이언이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 브라이언이 재판의 충격으로 고뇌 속에서 죽었다는 해석 역시 사실과 다르며 실제 낮잠을 자던 중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 수정주의자들은 브라이언의 죽음이 반진화론 운동의 쇠퇴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반박하며, 브라이언의 죽음은 근본주의자 들에게 순교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잠깐이나마 반진화론운동을 가열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자유적인 경향의 언론에 의해 반진화론운동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 운동의 사멸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스코프스 재판이후 30년 동안의 소강상태 동안 진화론이 미국 생물교과서에서 모두 사라지는 다시 말해 반진화론 운동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진화론을 생물교과서에 그대로 둘 경우 각 주의 교과서 채택위원회에서 이를 문제 삼을 소지가 있고, 이는 교과서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진화론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진화론적 근본주의는 이의 임박한 종말을 예언했던 자유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60년대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부활하여 80년대에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까지 부상하게 된다.

 

2) 아칸소 법정 논쟁 (1981)

20년대 근본주의자들의 반진화론 운동은 60년대 창조론 운동으로 부활한다. 이들 운동의 가장 큰 전략적 차이는 전자가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제거를 요구했다면, 후자는 창조론의 삽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발생한 구 소련의 스퓨트닉 인공위성의 발사성공은 미국에 안보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이는 대대적인 과학교육개혁작업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생물학 분야에서도 60년대초 진화론이 생물학 교과서에 복귀한다. 복귀하게된 진화론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인식하게 된 창조론자들은 기왕에 그렇다면 진화론과 함께 창조과학을 교과서에 포함시켜 기원에 대한 교육의 형평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다.

이에는 한 가지 문제가 따랐는데, 미국 헌법에 의하면 국가공공 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행위는 위헌사항으로 규정되어있다. 창조과학이 종교라면 헌법에 의해 이를 공립학교 교과서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된 상황인데, 이를 우회하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이 과학적 창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 이라는 용어 자체가 70년대 중반 만들어졌는데, 창조론을 '성서적 창조론'과 '과학적 창조론' 둘로 나누어 종교인 전자는 배제하고, 과학인 후자만 선택적으로 생물 교과서 삽입을 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와 아울러 두 모델접근법이라는 전략을 개발하여, 진화와 창조를 생명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두 개의 모델이라고 제안하며, 기원의 문제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규정한다.

새로운 전략에 바탕하여 70년대 말 창조론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1시간 가르치면 마찬가지로 창조과학도 1시간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소위 '동등시간법' (Equal-Time Law) 을 고안하고, 미국 전역에 걸쳐 이 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1981년 아칸소와 루이지애나 주 의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동등시간법이 통과되자마자 미국시민자유연맹 (ACLU) 이 나서서 이 법의 위헌성을 제소한다.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이며, 따라서 국가공공기관인 공립학교에서 이를 가르치도록 규정한 동등시간법은 위헌이라는 것이 제소의 요지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의 과학성이 재판의 핵심문제로 떠올랐다. 아칸소주에서만 정식 재판이 열렸는데, 하일라이트는 창조 진화 양측이 동원한 전문가들의 일주일에 걸친 증언이었다. 양측에서 모두 자기 측을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 신학자, 교육전문가들을 동원하였는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진화론 측의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 였다. 오늘날 대표적 생물철학자중 한사람인 Ruse는 증언에서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님을 입증하는 다섯 가지 과학의 요건을 제시하였다.


1. 과학은 맹목적이고 변치 않는 자연의 규칙성에 (자연법칙)에 기초해야만 한다.

2. 과학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가능 해야한다.

3. 과학은 경험적 실재에 비추어 검증 가능(testable)해야 한다.

4. 과학은 반증 가능(falsifiable)해야 한다.

5. 과학은 잠정적(tentative)이어야 한다.     


재판을 주재했던 오버 (William Overton) 판사는 루스의 증언을 받아들여, 창조과학은 초자연적 설명에 바탕하고 또한 근본적으로 독단적인 믿음에 근거하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린다. 동등시간법은 결국 위헌판정을 받게된 것이다. 이어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도 이와 동일한 판결이 내려진다.

창조과학의 과학성을 둘러싸고 법정에서 보다 더 치열한 논쟁이 재판 후 발생했다. 재판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중진 과학철학자들이 루스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필립 퀸(Philip Quinn)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모두 창조과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루스가 전문 철학자로서의 윤리에 충실치 못하고 이중 잣대를 적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자들 간에 과학을 비과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문제(demarcation problem)는 수세기를 끌어온 난제였는데, 이는 논리실증주의의 붕괴이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혹은 가짜 문 (pseudo-problem)로 간주되어왔다. 과학철학계가 이렇게 포기한 상황에서 Rus 가 대담하게 다섯 가지 범주를 제시한 것이었다.

라우든이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섰다. 라우든은 법정 판결이 내려졌던 1982 년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가을호에 게재한 글에서 '창조과학'이 시험불가능, 독단성(비잠정적), 반증불가능 등의 이유로 창조과학을 비과학이라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시험, 반증가능한 경험적 주장을 실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구연령이 6,000-20,000년이라는 주장이나, 지구 초기역사에서 발생했던 대홍수가 현재의 대부분의 지질현상들을 결과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하며, 또한 실제 확인 절차를 밟았으며, 그 결과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과학'을 반박하는 정공법은 창조론이 포함하는 경험적 주장들을 반박하는 것이지, '창조과학'이 그러한 주장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라우든은 주장한다. 만일 '창조과학'의 핵심주장들 - 예를 들어 인간은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였음, 노아 홍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임 - 이 변경 불가능한 독단이라면 마찬가지로 과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핵심이론들 역시 가변적인 보조가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쉽게 포기되지 않는 독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우든은 루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어떤 현상이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될 때만이 비로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과학사상에 등장하는 여러 중요한 자연현상에 대한 주장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와 뉴튼은 중력현상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중력의 실재를 가정했으며, 다윈은 멘델에 의해 유전현상이 설명되기 전에 자연선택 이론에서 이미 그 존재를 가정했다. 노아 홍수의 실재가 자연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같은 논리로 중력이나 유전현상을 가정한 뉴튼이나 다윈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정리하면 문제의 핵심은 다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과학의 범주를 '창조과학'이 만족하느냐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진화론과 '창조과학' 어느 쪽에 보다 강력한 논거를 제공해주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다고 라우든은 결론짓는다.

과학철학자들 간에 5 년여를 끌었던 이 논쟁은 필립 퀸의 제안에 의해 적당한 선에서 절충되는 것으로 끝난다. 퀸은 상아탑 속의 학자가 비 이상적인 세상 법정으로 나가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때는 세상적 필요와 학문적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여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고,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올 때는 손을 씻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때 타협의 역할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끔씩만 수행함으로써, 한 개인의 전문가적 양심이 타락으로까지 가는 것을 방지하는 한도 내에서 이러한 타협은 현실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논쟁에서 창조론에 반대하는 과학철학자들의 사회적 가치와 그들의 전문가적 양심 사이의 갈등이 절충되는 과정은 결국 과학 비과학 구별문제가 인식론적 문제인 동시에 다분히 사회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창조-진화 논쟁은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주제인 동시에, 이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가진 가치관의 갈등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의 창조-진화논쟁이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가치와 새로운 다원주의적 가치 체계간의 갈등인 문화전쟁의 큰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3) 지적설계운동 (1990 -  )

동등시간법이 1981 년 아칸소주와 1986 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패소한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법률제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벽에 부딪치게 된다. 그 결과 전국적인 동등시간법 캠페인을 주도했던 젊은지구창조론은 교육현장에서의 개별적 문제해결이라는 풀뿌리 운동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둘째, 지구연령문제가 표면으로 부상한다.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주에서의 동등시간법 통과는 진화론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창조론운동을 무시해왔던 진화론 진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인 반창조론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지구연령문제를 창조과학의 아킬레스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이러한 공격과 두 번의 법정패소는 복음주의 교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지구연령문제를 과도한 지적부담으로 여기면서, 오랜지구창조론의 목소리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커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지구연령문제를 중심으로 창조-진화 논쟁은 분열적인 이슈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셋째, 지적설계운동의 등장이다. 지구연령문제를 비롯해 창세기 1-2장의 구체적 해석을 둘러싼 서로 다른 시각들은 복음주의 교회의 결속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기 위한 반성적인 움직임이 1980년 말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버클리 캘리포니어 주립대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창조-진화 논쟁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전략적 선회를 제안한다. 기존의 논쟁구도가 창조 대 진화 이었다면, 이제 초점을 옮겨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의 대치구도로 이행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선회는 지적설계운동이라는 형태로 가시화 된다.

제한된 지면상 지적설계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고,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전략적 의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유신론 대 자연주의적 무신론이라는 보다 큰 구도로 판을 다시 짤 경우, 창조-진화론 논쟁에서 보였던 보수 교단간의 미묘한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이 무마되며, 공통된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단결 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둘째, 기존의 창조과학 운동이 대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오면서 보수 기독교 인구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성공을 거둔 반면, 지식인 사회로부터는 냉대 당하며 보수 기독교에 반지성적 이미지를 안겨준 한계를 지적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적설계운동은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 기독교 유신론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주된 목표를 두게된다. 셋째, 오늘날 세속학문의 절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자연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다. 자연주의의 한계를 조직적으로 비판하여 숨통을 트지 않는 이상 학문의 주 생산지인 일반 대학에서 진지한 유신론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창조-진화 논쟁에서 자연주의는 부수적인 이슈였으나, 지적설계운동에서는 자연주의의 한계 비판과 유신론의 과학적, 학문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핵심적 이슈로 떠오른다. 진화론은 이들 이슈를 논의하는 대표적 사례로 사용된다.

아직 성장 단계에 있는 지적설계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으나, 기원에 관한 논쟁의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 한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지적설계운동이 기원문제에 관한 담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1920 년대 반진화론운동은 스코프스 논쟁을 거쳐가며 1930년대 들어서는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창조론 운동 역시 80 년대 두 차례에 걸친 법정논쟁을 거쳐가며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하고 활력을 잃는 듯 했으나, 90년대 등장한 지적설계운동으로 기원문제에 관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지난 10년 미국에서의 기원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그 열기가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원문제를 지식사회 내에서 담론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기원문제에 관련해서 복음주의 사회의 지적신뢰성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

한국의 창조론 운동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체계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 동안의 한국 창조론 운동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창조론 운동사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유일한 예외가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로 일했던 조덕영 목사가 신학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창조론 운동을 내부자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세한 비교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교훈을 미국의 경험에서 유추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창조과학회의 자체적인 독창적 연구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조덕영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창조론 운동은 신학적인 뒷받침이 빈약한 상태에서 과학 기술시대에 나타난 과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창조론이 전파되어온 감이 없지 않았다. 또한 번역물에 의존하고 자체적인 연구에 등한하다보니 신학과 과학 양쪽에 있어 창조론 운동이 침체기에 들어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국내 창조과학 운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중운동으로서의 창조론이 성공하게된 핵심 요인을 과학자에 대한 대중의 전폭적인 신뢰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이제는 이러한 신뢰의 원천인 과학적 전문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원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입장은 다를지라도 학문적 엄밀성만큼은 반대자들도 수긍할 정도의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고는 앞으로 전문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대중의 신뢰 역시 점점 기대하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젊은지구창조론은 외부적으로는 자연주의적 진화론, 그리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과의 경쟁가운데서 보다 확고한 논의를 개발하는데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젊은지구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들인 폴 넬슨과 존 레널즈는 젊은지구창조론이 지난 20 년 동안 꾸준하게 '엄밀성과 정교함'을 더해왔다고 주장하며 '국제창조학회'(4년에 한번씩 개최)에서 발표된 최근 논문들을 그 증거로 든다. 나아가 미국의 젊은지구창조론은 "몇몇 자체 주장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학문적 책임감"과 심지어 "자기 비판적이기까지"한 열린 태도를 보인다고 넬슨은 지적하며, 이를 오랜지구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비해 상대적 강점으로 꼽았다. 넬슨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로운 경쟁과 학문적 책임감, 그리고 비판적 태도가 최근 젊은지구창조론의 '엄밀성과 정교함'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에 비해 기원문제에 대한 한국의 논의는 상당히 제한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을 이끌었던 주류는 젊은 지구창조론이지만, 오랜지구창조론과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도 활발하게 논의에 참여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간에 갈등도 발생했고 나아가 분열의 소지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원에 관한 논의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비판과 선의의 경쟁은 건강한 논의를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는 창조과학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국창조과학회의 현 시점에서 새겨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한 논의의 생산은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열린 토론과 건강한 비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의 논의는 창조-진화를 넘어서 학문과 사상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20년간 갈등과 분열도 있기는 하였으나, 기원에 관한 미국의 논쟁은 그 폭과 깊이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현황은 20 년전 도입 당시의 젊은지구창조론에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국은 미국과 호주에 이어 창조론 논의가 가장 활발한 나라이다. 이제 기원문제에 관한 국내의 논의도 한 단계 도약할 시점이라고 본다. 한국창조과학회 창립 20주년은 이러한 도전적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3/e31/2001_125_5.htm

출처 - 창조지, 제 125호 [2001. 5~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18

참고 : 2067|3677|4010|3051|2148|2061|729|3054|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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