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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1부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1부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는 인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쟁점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21세기의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환경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과 정보들을 거의 매일같이 대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환경 문제가 피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렸음을 뜻한다. 신학적인 논의라고 예외일 수 없다. 신학함이 본질적으로 신앙공동체가 마주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려는 작업일진대, 환경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 신학계는 1990년대 이후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또는 ‘생태신학’(eco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생태계 문제에 관한 폭넓은 논의를 전개해 왔다. 목회상담학 분야에서조차 ‘생태요법’(ecotherapy)을 주창하고 있는 것을 보면1), 그러한 논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국내의 성서신학 분야에서는 가장 최근에 성서를 ‘녹색의 눈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기까지 하다2).성서신학이 이제는 녹색신학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필자 역시 부족하지만 구약성서의 창조론을 생태학적인 시각에서 읽으려는 작업을 시도한 바가 있다.3)

그다지 새롭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작업에서 필자는 국내외 성서신학자들의 생태신학을 참고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갖는 생태학적인 의미를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개괄적으로 추적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서 필자는 열 가지 재앙을 포함하는 출애굽 사건을 생태학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4).

이러한 방법을 확대 적용한다면, 아마도 창조 세계 내지는 자연계와 관련된 구약 본문들을 일일이 찾아 그 생태학적인 의미를 천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동의어 반복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솔직히 말해서 구약성서와 관련된 녹색신학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논구한다는 것이 조금은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많이 연구되어서일 것이다. 환경문제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론적인 탐구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목표로 하는 과제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 이제 끝인가? 그렇지는 않다. 성서 본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감추어진 의미를 색출해내는 힘겨운 작업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생태계와 관련된 논의에 시간 개념-넓게 보아 종말을 포함하는-을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시간과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일반 서적들을 다수 접하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는 시간이 또 다른 피조물인 자연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연 설명하자면,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시간 개념이 창조의 동반자인 자연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나름의 생태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본 논문은 바로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시간이나 자연이 똑같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속한다는 평범한 인식을 생태학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내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부터 본 논문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필자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충분히 공론화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필자의 연구가 아직은 일천한데다가,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문헌이 충분치 않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본 연구로부터 몇 가지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부족하기는 해도 그러한 결론이 앞으로의 연구에 하나의 디딤돌이 될 뿐만 아니라, 성서를 녹색으로 칠하고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녹색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노력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주)
1) Howard Clinebell, 『생태요법: 인간치유와 지구치유』, 오성춘ㆍ김의식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2)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3) “구약성서의 창조론과 생태학,”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서울: 한들출판사, 1999), 9-48. 이 글은 필자가 쓴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서울: 쿰란출판사, 2003), 12-56에 그대로 실려 있다.
4) “생태학적 창조론의 시각에서 보는 출애굽 사건,” 『신학이해』 제19집 (2000), 9-38. 이 글 역시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 57-91에 그대로 실려 있다.

 

2. 자연과 더불어 창조된 시간

(1) 시간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시간 개념의 생태학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시간은 인간의 삶과 자연의 운행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참으로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철저하게 시간에 의해 한정되며, 시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뿐이 아니다. 해와 달과 별 등에 의해 대표되는 천체의 운행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다양한 생명 활동 중에서 시간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시간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근본적인 특성에 해당하는 것5) 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시간은 인간과 자연 가까이에 있다. 아니 그 안에 확고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움직임에 매우 친숙하다. 친숙할 정도가 아니다. 시간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삶이 시간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음을 누구나 깊이 인식하고 있다. 오랜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 사람들 치고 시간을 배제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뜨는 사람들도 있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대신에 그 반대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한없이 잘게 쪼개어6) 사용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계량화되고 계수화된 시간 개념-이를테면 각종 식료품의 유통기한 같은-으로 인간의 삶과 일상생활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는 그런 사람들의 시간 지배 욕구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시간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간의 본질 또는 시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애매모호하다고 해야 할까? 굳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7)을 빌지 않더라도, ‘시간은 이런 것이다’라고 몇 마디의 말로써 시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요, 그 지나온 길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무런 냄새도 형체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저 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인지 20세기의 탁월한 시간 연구가인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시간(과 자연)의 형성 과정이나 진행 과정이 갖는 신비로움에 대해서 명상할 때마다 인간 지성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8).

시간은 이처럼 모호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쉽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시간의 정체를 깨닫고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삶과 자연계 안에 새겨진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때만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러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시간 개념이 인간의 삶과 역사에 있어서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썼고, 그 기원이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의 진행 과정과 그들의 삶은 결코 둘일 수 없었다. 시간의 진행 과정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창조 질서에 가장 부합된 삶이요, 따라서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절실히 느끼곤 했다. 그 증거를 우리는 구약성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진행되다가 또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를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한 다양한 노력들이 그렇다. 이른바 시간의 시작과 진행 과정 및 끝(종말)에 관한 신학적인 반성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시간의 시작-창조된 세계의 기초

시간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된 것일까? 아무도 이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자들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들이다. 한 예로 영국의 유명한 이론물리학자인 호킹(S. Hawking)은 시간과 우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우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밀도가 무한히 큰 상태의 특이점이 150억년 전에 대폭발(big bang)을 함으로써 지금의 우주가 생겨났으며, 우주가 그 때 이후로 계속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팽창하다가 언젠가는 급격한 수축 과정을 거치면서 밀도 무한대의 상태로 복귀함으로써 붕괴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웠다9).

아울러 그는 “시간이란 신이 창조한 우주의 특성이고,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10)을 빌어, 시간이란 개념은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11). 우주의 시작이 곧 시간의 시작이라는 얘기다.

필자로서는 물리학자들의 이러한 설명이 옳은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점차 우주의 기원과 운명을 규명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정작 필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구약성서의 창세기가 시간과 우주의 시작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1656년에 영국의 어셔(James Ussher) 대주교는 지구가 주전 4004년 10월 22일에 창조되었다고 말했지만(인간 창조는 10월 23일)12),  이것 역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연대 추정에 관심이 없다. 당시 사람들이 연대 추정을 할 수 있을 만큼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창조의 시초와 그 과정 및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갖는 신학적인 의미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시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 세계에 속한 것이요, 자연과 더불어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맨 처음 책인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창세기 1:2에 의하면,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맨 처음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 본문이 말하는 태초의 혼돈은 아직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얘기다.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한데 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상태요, 온통 혼돈과 어둠이 지배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세우시는-가 본격화되는 첫째 날에 시간이 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론이 틀린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3절이 시간의 창조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절의 설명에 의하면, 첫째 날에 창조된 것은 어디까지나 빛이었지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으로부터 분리되어 낮으로 칭함 받게 되었고, 그 상대자인 어둠은 밤으로 칭함 받게 되었다(4-5절). 3-5절의 이러한 서술은 빛이 생겨남으로써 태초의 혼돈과 어둠이 제거되고, 그 결과 질서 있는 우주와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서로 분리되고 그로 인하여 낮과 밤의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빛의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13). 

빛과 어둠의 구분으로 인하여 비로소 시간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 해당하는 낮과 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4a절)는 빛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 창조의 기초가 된 빛의 질서 부여 기능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4).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낮과 밤이 오늘날과 같은 24시간 단위의 시계 시간이 없던 당시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까닭에 창조의 날들을 셈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이 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5b, 8, 13, 19, 23, 31절). 여섯째 날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날짜 서술 방식 역시 낮과 밤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우주 창조의 첫째 날에 빛과 함께 창조되었음을 암시한다. 시간은 빛과 더불어 하나님의 맨 처음 창조물에 해당하는 셈이다15).
 아울러 빛과 시간의 창조는 이후에 이어질 다른 모든 창조-공간을 포함하는-의 시발점을 이루는 것이요, 엿새 동안 이루어지는 창조의 시간적인 연속을 가능케 하는 사건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3)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

첫째 날에 창조된 시간은 넷째 날의 창조에 이르러 한층 구체화된다. 첫째 날(3-5절)이 낮과 밤의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넷째 날(14-19절)은 낮과 밤뿐만 아니라 계절(seasons)과 날(days) 및 해(years) 등의 보다 큰 시간 단위들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넷째 날의 창조에 대한 설명은, 동물과 인간의 창조에 관해 설명하는 여섯째 날의 설명(여덟 절)을 제외하면, 엿새 동안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설명들 중에서 가장 긴 편(여섯 절)에 속한다. 저자가 보기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해와 달의 기능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까닭에1 내용 서술이 다른 날에 비해서 길다16).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에 이스라엘의 주변 세계인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신들로 폭넓게 숭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한복판에 있던 이스라엘 역시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숭배하는 일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신 4:19; 17:3; 왕하 17:16; 23:5; 렘 8:2; 9:13 등).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규범적인 창조신학은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부연하자면, 그것들은 단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구분 짓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바로 이 마지막 대목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자연계의 일부로 창조된 천체가 첫째 날에 만들어진 시간을 구분하거나 반영하는 것들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들 천체, 곧 광명체들(luminaries)에게는 몇 가지의 과제가 주어진다. 14-15절의 명령 진술에 의하면, 그 첫 번째 과제는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인 낮과 밤을 구분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크고 작은 시간 단위들, 곧 계절-더 정확하게는 절기(cultic festivals)-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데 있었다. 시편 104:19는 달이 절기를 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마지막으로 궁창의 광명체들에게 주어진 세 번째 과제는 땅을 비추는 데 있었다(15절). 해가 낮에 지상 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달과 별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던 것이다(참조: 렘 31:35).

그런데 16-18절의 행위 진술은 해와 달과 별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14-15절의 명령 진술에서 보는 것과는 구별되는 낱말들로 표현한다. 16절은 첫 번째 과제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관하다’로 번역된 낱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다스리다’ 또는 ‘통치하다’는 뜻을 가진 ‘마샬’ 동사를 가리킨다. 18절도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다. 시편 136:8-9도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창세기 본문과 시편 136편의 이러한 내용들은 부분적이나마 해와 달에게 통치 기능이 수여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 세계의 종교에서 천체를 대표하는 자연 신들(nature gods)이 인간의 삶과 세계를 통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해와 달에게 통치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통치, 곧 신적인 존재로서의 통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완전한 통치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조물인 이들에게는 단지 제한된 기능-시간 구분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만이 부여될 뿐이다. 그러한 기능을 통하여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 된다17).  
창조 세계의 다양한 시간 구분은 노아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창 8:20-22)에서도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구절인 22절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시작될 세계의 안정적인 지속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자연계 안에 새겨진 네 가지의 시간 단위들을 소개한다. 이처럼 세계의 지속을 굳이 시간 단위를 빌어 표현한 것은, 아마도 시간의 일정한 반복과 되풀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계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본문에 언급된 네 가지 시간 쌍들(pairs) 중에서 처음 세 가지가 1년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 단위를 가리킨다면, 마지막 네 번째인 낮과 밤은 하루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 단위를 가리킨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와 달이 이끌어 가는 낮과 밤의 순환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창조 세계의 호흡18)과도 같은 것이다. 1년 주기와 하루 주기에 기초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시계 시간을 알 턱이 없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구분이 수확의 시기와 기온의 변화, 계절의 순환 및 낮과 밤의 반복 등과 같은 자연계의 리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연 시간(natural time) 또는 생태계 시간19) 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은 예외 없이 이러한 자연 시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위의 본문에 반영된 시간 구분은, 창세기 1장이 소개하는 시간 구분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 안에서 시간 개념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자연계 안에 새겨진 시간을 크게 1년 주기와 하루 주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인간을 포함하는-의 삶은 1년과 하루라는 자연계의 기본적인 시간 리듬에 따라 유지된다. 이것은 시간의 순환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이 시작과 끝(종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연 질서에 기초한 순환적인 시간관 역시 배척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20).


(주)
5)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통나무, 1999), 40.
6) 오늘날 과학자들은 1/10-15초인 펨토초를 사용한다: Jay Griffiths, 『시계 밖의 시간』, 박은주 옮김 (서울: 당대, 2002), 19.
7)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St.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성한용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395.
8)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20), 73;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 41에서 재인용.
9) Stephen Hawking, 『시간의 역사』, 현정준 옮김 (서울: 삼성출판사, 1988), 69-92, 175-213; 『호두껍질 속의 우주』, 김동광 옮김 (서울: 까치, 2001), 69-79.
10)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393-395.
11) Hawking, 『시간의 역사』, 32.
12) 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Principles of Time Reckoning in the Ancient World and Problems of Chronology in the Bible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9), 403-405; Stuart McCready 엮음, 『시간의 발견』, 남경태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02), 214, 220-222.
13) C. Westermann, 『창조』, 황종렬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1), 66.
14)어둠도 시간 창조와 관련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4-5절은 어둠에 대한 언급 이전에 빛에 대한 긍정 평가를 서술함으로써, 빛이 어둠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C. Westermann, Genesis 1-11: A Commentary, tr. John J. Scullion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4), 113.
15)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서울: 문예출판사, 2001), 80.
16) 14-15절의 명령 진술(command-account)과 16-18절의 행위 진술(action-account)이 그에 해당한다: Westermann, Genesis 1-11, 127-129. 명령 진술의 14절은 행위 진술의 16절 및 18절과 일치하며, 15절은 17절과 일치한다.
17) Westermann, Genesis 1-11, 127; 『창세기 주석』, 강성열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1998), 31-32.
18) 왕대일, “생태계 안에서 오경 다시 읽기,”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22.
19) Griffiths, 『시계 밖의 시간』, 25-32; Wolfgang Achtner, Stefan Kunz & Thomas Walter, Dimensions of Time: The Structures of the Time of Humans, of the World, and of God, tr. Arthur H. Williams, Jr. (Grand Rapids: Eerdmans, 2002), 9.
20) Norman H. Snaith, “Time in the Old Testament,” in F. F. Bruce (ed.), Promise and Fulfilment (Edinburgh: T. & T. Clarke, 1979), 176-179; R. E. Murphy, “History, Eschatology, and the Old Testament,” Continuum 7 (1970), 583-593; Westermann, Genesis 1-11, 458.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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