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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3부

미디어위원회
2005-04-29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3부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4. 시간의 끝(종말)과 생태 신앙


(1) 시간의 끝(종말)에 관한 보편적인 믿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끝나면서 우주와 세계 역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떤 계기로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전 세계를 덮쳤을지도 모르는 홍수나 화산 폭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산불 등의 자연 재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던 인류는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도모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구상에 존재해 왔던 무수한 종교들은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종말 의식을 갖게 되고 또 종교에 의지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죽음에 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시간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만큼 사실적이고 엄정한 종말은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행복, 기쁨 등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 가족, 재산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아가 버린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신의 삶과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절대적인 상실로부터 도피하지 못한다. 죽음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불안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죽음과 종말의 시한이 못 박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들을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었던 이러한 종말 의식은 과학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과 종말을 자각하면서 산다. 현대인들에게도 시간의 종말인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 및 그로 인한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과학적인 사실들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종말에 대하여 갖는 두려움은 두 가지 요인들로부터 생겨난다. 그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것이다. 화산 폭발, 대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자연 재해, 그리고 행성과 지구의 충돌 및 이로 인한 지구의 대격변 등이 외부적 요인에 해당한다면,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및 사회적 병리의 급속한 확산 등은 내부적 요인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이 종교와 같은 어떤 특정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총체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참으로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똑같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간의 종말이란 주제가 직선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직선적인 시간 표상은 참으로 시간과 역사가 일회적인 것이요, 유한한 것임을 함축하며, 정해진 끝을 향해 직선적인 진행을 계속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선적 진행의 한복판에 시간의 창조자이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시간과 역사의 모든 과정, 곧 그 시작과 중간 과정 및 끝 일체를 주관하시고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32).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시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심과는 달리 끝을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여 시작된 시간과 역사는 그가 정하신 최후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되, 결코 되돌아오거나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진행할 뿐이다. 하루나 1주일, 한 달, 1년 등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야 늘 되풀이되겠지만, 그 안에서 운행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까지 항상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한 번 흘러간 시간과 같을 수가 없다. 시간의 틀은 순환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죽음이나 종말을 향해 직선 형태로 계속 전진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에서 시간의 끝에 대한 생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단 종말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죽음에 직면하여 생긴 것이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각종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며(창 2:17; 3:22-24), 태곳적 사람들의 수명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창세기의 족보들(창 5:1-31; 11:10-32)에서 금방 확인된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노래하는 시편의 몇몇 노래들(시 39:4-5; 90:9-10)도 개개인에게 닥치는 시간의 끝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의 시작에 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창조신앙 자체가 시간의 끝-완전한 끝은 아니지만-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는 창세기 6:13이나 홍수 이야기를 끝맺음하는 창세기 8:22 본문이 그렇다. 6:13은 모든 생명체의 “끝날”이 이르렀음을 강조하며, 8:22는 홍수 이후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의 안정적인 질서를 창조 질서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바, 서두에 있는 “땅이 있는 한”이라는 표현은 땅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에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33). 하지만 이 본문은 시간과 역사의 끝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의 끝에 대한 인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겠지만, 그것이 끝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한 것은 비교적 후대에 이르러서이다.

단순히 개개인의 죽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종말의 공동체적이고(communal) 우주적인(cosmic) 차원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이른바 종말 신앙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주전 8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34). 종말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종말 신앙의 기본 형태가 그들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예언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말 신앙은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묵시의 시대가 오면서 제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옳을 것이다. 예언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종말 신앙이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일정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 반면에, 묵시가들의 종말 신앙은 문자 그대로 시간과 역사 모두가 끝나는 한 시점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이 점은 특히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사건(수 10:12-14)과 해 그림자를 열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한 사건(왕하 20:8-11; 사 38:7-8)에 매우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신 다음의 질문 역시 하나님 아닌 다른 누구도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에게 명령하여, 새벽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 일이 있느냐?”(욥 38:12).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고 보는 시편 74:17 의 고백이나,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또 추수 기한을 정하신다는 설명(신 11:14; 호 6:3; 렘 5:24; 욜 2:23) 역시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33) Westermann, Genesis 1-11, 457;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y of the Old Testament (Phillipsburg: P & R Publishing Company, 2001), 81-83.
34)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구약 세계의 이해』 (서울: 한들출판사, 2001), 168.

 

(2) 문서 예언자들의 종말 예언과 생태 신앙

주전 8세기에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문서 예언자들은, 왕이나 특정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했던 초기 예언자들과는 달리,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 곧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국(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처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전 예언자들이 개개인의 범행을 들추어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재난으로부터 보존하려고 한 반면에,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무조건적인 파멸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초기 예언자들의 예언 메시지가 단편적이고 부분적이었던 반면에, 주전 8세기 이후에 활동한 문서 예언자들은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하되, 특히 국가 전체의 완전한 파멸, 곧 예루살렘의 함락, 성전 파괴, 왕정 붕괴 등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실상 시내산 계약의 저주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기존의 국가 형태를 완전히 끝장낸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35).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은 생태학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암 8:8; 9:5-6; 호 4:3; 사 13:9, 13; 24:18-20; 나 1:4-5; 습 1:2-3; 렘 9:10-12; 겔 38:19-22; 학 2:6, 21 등). 물론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범죄 행위가 주변 환경인 생태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적인 사실36)에 기초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시간 개념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심판 메시지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의 심판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심판 선고에 의하면, 야웨는 근본적으로 “묘성(Pleiades)과 삼성(Orion)을 만드신 분, 어둠을 여명으로 바꾸시며, 낮을 캄캄한 밤으로 바꾸시”는 분(암 5:8)이지만, “대낮에 해가 지게 하고, 한낮에 땅을 캄캄하게 하는” 분이기도 하다(암 8:9). 이것은 야웨가 겨울과 여름의 계절 변화를 주도하는 분이요, 낮과 밤의 시간 변화를 주관하는 분이시면서도, 때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천체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시간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한다(참조, 암 5:18; 렘 15:9; 습 1:15; 욜 2:2 등)37).


만일에 아모스가 예언한 바와 같은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혼란이 생겨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시간 질서를 담당하는 천체의 제 기능 상실은 아마도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정상적인 생명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천체의 기능 마비로 인하여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뒤집어지는 상황에서는 생태계의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창조하신 시간 질서가 생태계의 유지와 존속에 대하여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모스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신명기 28:29(“너희는 마치 눈이 먼 사람이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처럼 대낮에도 더듬을 것이다”; 참조, 사 59:9-10)에 있는 저주 규정의 성취에 해당하는 바, 비슷한 시기에 남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이사야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의 한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늘의 별들과 그 성좌들이 빛을 내지 못하며,
해가 떠도 어둡고, 달 또한 그 빛을 비치지 못할 것이다. (사 13:10; 참조, 사 8:22)

이사야의 이 본문 역시 아모스가 선포한 심판 메시지와 똑같이 천체의 시간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하여 예상되는 생태계의 대혼란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야웨 신현(theophany)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이신 그의 심판 임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조 세계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38).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의 결과를 혼돈으로의 복귀와 관련시키고 있는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습니다.
둘러보니, 기름진 동산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일 때문에 온 땅이 애곡하고,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다.... (렘 4:23, 25-26, 28; 참조, 사 34:4).

예레미야의 이러한 심판 선고는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태초의 혼돈에로 복귀한 것과도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황, 곧 혼돈과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을 가리키며, 아직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계의 완전한 붕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할 것임을 이처럼 비유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시간의 소멸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로기 이후의 요엘도 비슷한 메시지를 선포한 바가 있다. 그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메뚜기처럼 많은 군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쳐들어오면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며(욜 2:10; 참조, 마 24:29), 끔찍스럽고 크나큰 야웨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라고 말한다(2:31). 그는 또한 야웨께서 판결의 골짜기에서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실 때에도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3:15). 요엘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아모스나 이사야, 예레미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간조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요, 그 결과 온통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생태계의 붕괴와 파멸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한 태초의 혼돈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39).


그러나 이처럼 공포스러운 하나님의 심판을 계기로 하여 도래할 끝날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끝이면서 또 다른 시작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끝이 가까웠다고 설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러한 사실은 파멸 이후의 새로운 창조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인 메시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새로운 창조 세계가 전개될 것임을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하는 바, 변화된 그 세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힘입어(호 11:8; 습 3:17) 다시금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포한 새로운 시대, 그리고 희망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야웨께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남은 자”; 암 3:12; 9:8-10; 사 1:9; 6:13; 7:3; 10:20-22; 11:11-16; 28:5; 30:17; 겔 6:8-10; 습 3:12-13 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요, 그들은 고향 땅에서 이상적인 지도자의 통치 아래 샬롬의 나라를 이루며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은 자들이 살게 될 샬롬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주실 온갖 풍요와 번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요(암 9:11-15; 호 1:10-11; 14:4-8; 욜 3:18 등), 그 결과 이전에 심판으로 인하여 파멸과 무질서에 빠진 생태계가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때, 홍수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우주적인 계약을 맺은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더 정확하게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계약을 맺음으로써40) 자연계와의 사이에 우주적인 계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호세아의 구원 메시지(호 2:18)41)나, 동물들의 세계에까지 확대 적용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평화를 선포하는 이사야의 구원 메시지(사 11:6-9; 참조, 65:17, 25)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구원 메시지 역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에덴 동산과도 같은 생태계의 회복과 관련시켜 설명한다(겔 34:25-29; 36:8-11, 35; 47:1-12)42). 이러한 구원 메시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창조 질서의 회복-더 정확하게는 생태계의 회복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상호 공존의 세계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시간의 운행이 이제는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사랑의 사귐과 나눔이 있는 평화의 세계 안에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시간 질서의 회복을 생태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예언자가 바로 호세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시간 질서를 포함하는-의 회복과 풍요로운 농산물 수확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창조의 복을 주실 것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호 2:21-22)

이 본문에 의하면 자연 질서의 회복은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야웨의 자비로운 응답은 자연계의 모든 영역들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 있는 하나님-하늘-땅-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스르엘 등의 순환 구조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순환 구조에 의하면, 창조주이신 야웨께서 하늘에 응답하신 결과 하늘이 햇빛과 비를 땅에 내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하늘이 땅에 응답한 결과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의 풍요를 이스르엘에게 제공할 것이다. 호세아는 이를 통하여 계절의 순환과 곡물의 생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새로운 시간 질서의 회복이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구원 은총(2:23)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복인 생태계의 회복이 시간 질서의 회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35) 특히 북왕국과 남왕국의 “끝”을 강조하는 아모스 8:1-3; 에스겔 7:1-13 두 본문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36) 이를테면 아담과 가인에게 내린 생태학적인 성격의 형벌(창 3:17-18; 4:12)이나 노아 시대에 임한 우주적이고 생태학적인 차원의 홍수 심판, 출애굽 당시의 각종 생태학적인 재앙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T. Frymer-Kensky, “Pollution, Purification, and Purgation in Biblical Israel,” in C. L. Meyers and M. O'Connor (eds.), The Word of the Lord Shall Go Forth: Essays in Honor of David Noel Freedman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399-414; H. H. Schmid, “Cre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Creation Theology’ as the Broad Horizon of Biblical Theology,” in B. W. Anderson (ed.), Creation in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102-117; G. Friedrich, “생태학과 성서,” 이정배 (편), 『생태학과 신학-생태학적 정의를 향하여』 (서울: 종로서적, 1989), 44-50.
37) Shalom M. Paul, Amo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Amo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1991), 168, 262. 예레미야 13:16(“주님은 빛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도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자연 질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J. A. Thompson, The Book of Jeremi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5), 369.
38) R. E. Clements, Isaiah 1-39,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136.
39) 이 점에 있어서는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심판 재앙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 재앙들은 한결같이 창조 질서가 자신의 정상적인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재앙 이야기에 의하면, 이집트 심판의 도구가 된 자연계의 모든 요소들은 피조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깨뜨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피조 세계가 광란에 사로잡힌 것과도 같은 그림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아홉 번째의 어둠 재앙은 빛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상황,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혼란에 빠진 상황 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혼돈과도 같은 상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 72-79.
40) M. DeRoche, “The Reversal of Creation in Hosea,” VT 31 (1981), 400-409.
41) R. Murray, The Cosmic Covenant (London: Sheed and Ward, 1992), 31-32, 39; G. I. Davies, Hosea (Grand Rapids: Eerdmans, 1992), 84.
42) A. DeGuglielmo, “The Fertility of the Land in the Messianic Prophecies,” CBQ 19 (1957), 308; Ronald A. Simkins, Creator and Creation: Nature in the Worldview of Ancient Israel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4), 235-237.

 

(3) 묵시문학의 종말 진술과 생태 신앙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악을 심판하실 끝날이 곧 올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끝임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죄악과 탈선으로 오염된 역사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옛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은 철저하게 역사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들이 설교하는 끝 또는 종말은 당연히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다43). 이른바 역사 내적인(within history) 종말론이 문서 예언자들의 신앙과 신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내지는 희망의 미래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도무지 실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고통과 절망의 상황이 계속 강화되면서, 예언신학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묵시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묵시 사상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종말과 천상 국가에 관한 신적인 비밀을 밝히는 것을 뜻하는 바, 이러한 묵시 사상은 고통과 절망의 현실이 극대화되던 주전 2세기에 이르러 다니엘서를 필두로 하는 본격적인 묵시작품 내지는 묵시문서들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통과 탄식 및 가난 등의 사회ㆍ정치ㆍ경제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그들로 하여금 극도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44).


그렇다면 이처럼 극심한 탄식과 절망의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묵시작품들은 시간과 종말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가? 묵시작품들은 무엇보다도 현실 역사 내지는 현 세대에 대한 강한 비관주의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묵시문학은 극도의 절망과 비탄의 현실을 밑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묵시작품들은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임을 부정한다. 도리어 그것들은 악의 세력이 현실 세계와 역사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악의 무리가 지배하는 현 세대가 빠른 시일 안에 종결되리라고 봄으로써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기도 하다45).


이러한 확신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왕국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묵시작품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예언자들의 설교하는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왕국과는 달리, 그 본질에 있어서 초월적이고 초지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46). 따라서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시간과 역사가 끝을 본 다음의 시대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역사 초월적인(beyond history) 종말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묵시작품들이 한시적인 현 시대(world-age)와 미래의 영원한 시대(eternal age)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두 시대 이론 내지는 시간적 이원론(temporal dualism)을 전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47). 물론 다가올 새 시대는 현 시대의 완결이 아니라 현 시대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옛 시대 안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 까닭에 본격적인 묵시작품들이나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현존하는 세계와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사 65:17):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7) 

이 본문은 창세기 1:1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실 세계가 이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이룰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벧후 3:10-13; 계 21:1).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이전 세계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시간 개념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66:22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새로운 세계가 영원의 차원과 맞닿아 있는 것이고 볼 경우, 새로운 시간 역시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간은 구체적으로 이전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대체 어떻게 새로워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암시를 초기 묵시에 해당하는 스가랴 14:6-7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낮만이 이어 간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주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이 창조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이를테면 첫 번째 창조의 첫날에 이루어진 낮과 밤의 교체 주기, 곧 시간 구분의 기초를 이루는 낮과 밤의 주기적인 반복이 사라질 것이요, 항상 낮만이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또한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창 8:22)이 묘사하고 있는 다양한 시간 질서가 사라지거나 완전히 새롭게 변화될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운행에 기초하여 정하신 기존의 시간 질서는 본래 파괴와 소멸의 위협-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저주가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추위와 더위의 반복이나 낮과 밤의 순환 같은 기존의 시간 질서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위 본문은 첫 번째 창조의 열매인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추위도 어둠도 없는 따스함과 밝음-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비롯되는-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참조, 사 60:19-20; 계 21:22-25; 22:5)48). 이러한 시간 개념의 변화는, 마지막 때가 되면 시간 질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들(마 24:29-31; 막 13:24-27; 계 6:12-14; 8:12; 20:11)에 의해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43)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170;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구약성서 묵시문학 다니엘서의 재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29-30.
44) J. J. Collins, “The Apocalyptic Technique: Setting and Function in the Book of Watchers,” CBQ 44 (1982), 107-109. 묵시문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자들을 위로하는 위기관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기존질서에 맞서는 저항문학이기도 하다: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70-80.
45) Walter Schmithals, The Apocalyptic Movement: Introduction and Interpretation, tr. John E. Steely (Nashville: Abingdon Press, 1975), 77-84.
46) 그리고 이 왕국 개념은 모든 인간과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재창조와 관련된다: D. S. Russel,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200 BC-AD 100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4), 280-284.
47) 박준서, “구약 묵시문학의 역사이해,” 155; 왕대일, “묵시문학 운동의 역사 이해,” 기독교사상 편집부 엮음, 『종말론의 올바른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82.
48) R. L. Smith, Micah-Malachi, WBC (Waco: Word Books, 1984), 288-289.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이사야 30:26 역시 비슷한 어조로 “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서 마치 일곱 날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낮과 밤의 주기가 필요없는 때, 곧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강한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날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참조, 희년서 1:29; 19:25; 에디오피아 에녹서 91:16): O. Kaiser, Isaiah 13-39: A Commentary, OTL, tr. R. A. Wilson (London: SCM Press, 1974), 303.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D. E. Gowan, Eschatology in the Old Testament, 홍찬혁, 『구약성경의 종말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00-204.

 

5. 나가는 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되면서 시간이 창조되었고, 그로 인하여 시간이 없었을 때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낮과 밤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들 및 해 등의 보다 큰 시간 단위들이 만들어졌다고 봄으로써,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시간이라는 틀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시간 자체와 시간의 다양한 단위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 시간과는 다른 자연 생태계의 리듬, 곧 농산물 수확의 시기와 기온의 변화, 계절의 순환, 낮과 밤의 반복 등의 자연 시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측정하고 계절과 기온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달력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산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그대로 따르는 축제와 절기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은 인간의 삶을 압박하는 세속의 시간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곤 했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전인적인 교류를 통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생태계의 리듬에 기초한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무한정하게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직선적인 시간관에 기초한 종말 신앙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시간이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표, 곧 시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예로써 주전 8세기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천체의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한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대혼란이 그에 수반될 것임을 자주 예언하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생태 질서의 회복과 그로 인한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가능케 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반면에 묵시작품들은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 역사와 세계가 완전히 끝장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생태계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변형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생태 질서와 시간 개념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간의 창조자요 주인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시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흐름 일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여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오염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시간과 역사 및 세계 전체를 끝장내시고 새로운 시작을 이루실 수도 있는 분이다. 어떻게 보면 묵시가들이 예고한 종말은 우주적인 대파멸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구원을 강조하는 희망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선포한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은 파괴와 전멸을 목표로 하는 때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통한 회복과 완성을 목표로 하는 때인 것이다.


시각을 달리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주목해 보자. 계몽주의 이후 한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오늘날에는 과학과 산업기술의 발달로 누리게 된 풍요의 뒷자리에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 전쟁 빈발 등의 다양한 부작용과 역기능이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인류와 우주의 전면적인 파멸이 불가피할 것임을 조심스럽게 예견하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낮과 밤의 구분마저도 무너뜨린 채로, 계량화된 시계 시간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모두를 지배하고자 하는 고도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 문명은 자연과 세계로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동식물을 포함한 각종 생명체에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와 무관한 각종 유전자를 삽입하거나 인간의 시간 스케줄에 적합하게 유전 정보를 조작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렇다.


이로 인하여 이제는 시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 충만해 있던 자연이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잃고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각종 생명체들과 관련된 언어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나 생태계의 시간을 표현하는 각종 시간 언어들이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언어들의 실종은 역으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제거함으로써 생태계 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뿐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자연 시간에 맞춘 축제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설령 축제가 있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생태계 시간에 맞춘 것이 아니다. 생태학적인 축제가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을 증폭시킨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한에는,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는 불가피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 자체가 비극적인 종말로 귀결될 수도 있는 과학기술 문명의 폐단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는 비록 성서 저자들이나 당시의 공동체가 오늘날 고도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생태 문제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거나 생태주의를 하나의 주의나 주장으로 제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다양한 신앙고백과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보여 준 생태학적인 시각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만큼 생태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이제는 녹색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녹색의 입으로 신학을 말하고자 함은 물론, 녹색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생태계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류사 이래 가장 힘겨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제대로 가꾸고 보전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올바른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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