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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창조신앙의 역사, 그 교회사적 고찰 :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창조신앙의 역사, 그 교회사적 고찰 

: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Trajectory of the Faith in Creationism in Church History 

: Early Church Period)

박형진 


요약

오늘날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는 결국 창조신앙의 중요성 및 그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2000년간 기독교역사에 나타난 창조신앙은 어떠하였는가를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본 논문은 그중 초대교회 기간에 초점을 맞추어 교부들의 성경해석 및 설교강론 가운데 나타나는 창조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 맥락에서 쓰였고 무엇을 강조하였는지를 살펴본다. 기독교초기부터 창조신앙의 본질을 끊임없이 위협해온 주변 세계관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창조신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안목을 열어 주리라 본다.

Today's issues in creationism against evolutionism demonstrates the significance and restoration of Christian faith in God's creation. What is the shape of the trajectory of faith in creationism in church history? This study examines the early church period, especially with early church fathers' understandings of the creation account in their biblical interpretations and sermons. In what contexts did they defend, explicate, and emphasize creationism? This study will throw light on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faith in creationism and the nature of worldviews that has threatened the faith in God's creation.


I. 들어가면서

성경의 초두에 나타나는 창조기사는 기독교신앙의 근본이다. 오늘날 창조신앙은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진화론이라는 양상으로 위협받고 있다. 기독교초기에는 창조기사에 관하여 어떠한 이해를 가졌으며 또 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도전은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가?

창조신앙의 역사를 기독교 2000년간의 교회사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고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본 논문은 그중 초대교회기간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위에 제기된 중심 질문의 좀 더 세부적이고 단계적인 질문으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하위질문을 갖는다. 첫째, 창조기사에 관한 초대교회의 성경해석은 어떠하였는가? 둘째,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던 이단사상과 이들의 세계관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던져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아마도 위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가정을 두고 던져지며 또한 답변을 시도할 것이다. 첫째,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의 입장과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은 창조신앙의 이해를 도와주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둘째,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사상은 오늘날 진화론과 같이 나름대로 총체적 세계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초대교회든 현대교회든 창조론을 위협하는 불신앙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통적인 요소를 반드시 공유할 것이다.

연구방법은 역사문헌을 중심으로 하되, 특히 자료에 있어서 이 논문은 초대교부들의 주석 및 설교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 그리고 성경본문으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기사에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교부들은 사도시대가 끝나고 등장하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으로부터 초대시대가 끝나고 중세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던 어거스틴(Augustine)까지 A.D.100-430에 이르는 초대교회시대의 교부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방대한 기독교역사가운데 이 논문은 초기시대에 국한되어지긴 하지만 이 기간에 나타난 해석학적, 철학적, 신학적 논쟁은 그 이후 교회사에서 계속 이어질 창조신앙에 대한 논쟁에 큰 틀을 제공해 준 것이라 본다. 그리고 현 창조론에 대한 입장과 이해에 더 한층 역사적인 의의로 조명해 주는 기여가 되리라 본다.

 

II. 초대교부들의 성경 창조기사 해석

창조와 타락을 서술하고 있는 창세기 1-3장은 교부들의 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된 곳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이 상당히 많다는 면에서 창조에 관한 인식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2) 본 절에서는 교부들의 창조기사(창세기 1장)에 관한 이해들을 창조기사의 순서를 따라 살펴보기로 하고 그 분석된 내용을 종합하여 전반적인 양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태초의 천지 창조

초대교부가운데 탁월한 설교로 인해 '황금의 입”이라 불렸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왜 하나님이 천지 즉, 하늘을 먼저, 그리고 땅을 뒤이어 언급하셨을까에 대해 배열된 단어의 순서대로 실제 하늘을 먼저 내시고 그 다음에 땅을 내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는 인간적인 상식의 집짓기와는 순서가 다름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기초(땅)를 먼저 내고 그 위에 지붕(하늘)을 덮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는 반대로 지붕을 먼저 내시고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는 창조주시라는 면을 보여주시려 했다고 강조했다.3) 이토록 교부들 가운데 성경해석을 문자적(literal)이고 역사적(historical)인 방법을 따랐던 이들이 있다. 바실(Basil)과 같은 교부도 은유적, 상징적인 해석을 피하고 가능한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하여 창조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4) 그들은 단어의 순서배열과 그 함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는 궁창위의 물과 궁창아래의 물은 영계와 물질계라는 두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 구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5)

 

2. 창조사역에 있어서의 성부, 성자, 성령

에프렘(Ephrem)과 같은 시리아계열의 교부는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성령을 어미 새에 비교하였다.6) 그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모두 창조사역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창조하시고, 성령은 베푸셨다는 것이다.7) 제롬(Jerome)과 같은 라틴계열의 교부는 창1:2의 장면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는 마치 앞으로 임할 세례에 대한 전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질 세례의 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8) 에프렘도 이 장면에 세례의 의미를 부여하여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음으로 인해 생명을 부화시키는 것과 같이 물세례도 그 위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시키는 구속적 의미 이상의 창조적 의미를 바로 이 구절이 전조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9)

 

3. 빛의 창조: 첫째 날의 빛, 셋째 날의 식물, 넷째 날의 광명의 상호관계에 관한 문제

에프렘은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빛이 아님을 말하면서 빛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10) 암브로우스(Ambrose)는 첫째 날의 빛은 태양보다 선재하고 태양을 태양되게 한 원초적 빛이요 태양의 전조라고 소개하였다.11)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도 창세기 1:3에 언급된 첫째 날의 빛에 대해 이 빛은 자연의 가시적인 빛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 이러한 어거스틴의 답변은 사실상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고 비꼬았던 마니교도들에 관한 변증이었다. 즉, 이들은 궁창위의 빛인 태양이 넷째 날 창조되었다면 그 첫째 날 나온 빛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어떻게 태양과 지구의 상호주기작용으로 인한 '날”(하루 24시간 개념)이라는 부조리한 말을 쓸 수 있느냐는 식으로 구약의 말씀을 도전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셋째 날 창조된 식물에 관해 에프렘은 설명하기를 풀은 즉시 창조되었지만 이미 성년에 이른 완숙한 풀이요, 나무도 하루 만에 단숨에 창조되었지만 벌써 과실을 맺을 만한 완숙한 형태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13) 바실은 셋째 날 창조에 있어 풀과 채소와 과목과 같은 식물이 이미 넷째 날 태양의 창조이전에 선재한 것을 통해서 이미 지구와 식물계가 사실상 태양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마치 태양을 생명의 기원을 야기한 존재로 보아 이를 예배하거나 숭배하는 행위는 무지하고 악한 우상숭배임을 통렬히 지적하였다.14) 크리소스톰도 이미 셋째 날 식물계의 창조는 가시적 태양광선이전에 이미 성년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생명의 근원을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려하게 함이었던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15) 암브로우스 또한 태양은 사실상 식물보다도 더 어린 존재임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생명력을 주는 근원임을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다.16)

 

4. 새와 물고기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은 넷째 날과 다섯째 날에 창조된 궁창의 빛들(해, 달, 별)과 새와 어류와 같은 생물들을 창조된 공간과 무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식물(ornamentation)로 보았다.17) 그는 문자의 나열과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다섯째 날의 경우 물고기와 새의 출현에 있어서 물에게(만) 명령을 내린 구절(창1:20)을 설명하면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새의 날개가 공통적으로 유체 속에서 유영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유영을 위한 공통적 구조가 곧 공통의 출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18) 이토록 바실의 경우 이러한 세심한 차이도 빠뜨리지 않고 설명을 부과하려 한 면밀함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 교부 중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이 이레니우스(Irenaeus)였다면, 마니교(Manichaen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은 한때 그것을 추종하고 따랐던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경우 창세기 주해는 대부분 마니교도의 성경비판에 대한 변증이었음을 보게 된다. 마니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파생될 수 있는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면을 끄집어내어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려고 하였다. 특히, 다섯째 날의 새의 창조를 물고기가 창조된 물이라는 배경에서 같이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어찌 조류와 어류를 한 통속으로 보느냐는 것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은 바다나 강과 같은 물이 아닌 많은 수분을 내포하는 공기라고 설명한다. 물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유영할 수 있는 매질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공중의 새들도 축축한 수분이 내포된 공기가 그들의 날개로 날 수 있도록 매질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 공기 중의 수분은 밤새 이슬이 되어 응축된 자연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19) 반면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으로 유명한 오리겐(Origen)과 같은 교부는 궁창을 마치 우리의 마음에 비유하면서 궁창을 나는 새는 마침 우리 마음속에 어지럽게 날고 있는 악한 생각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으로 설명하였다.20)

 

5. 여섯째 날 동물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의 경우 여러 동물들의 종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러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이렇게 종류대로 된 것들이 아무리 수십 세대 간을 거치는 동안에라도 변함이 없이 보존된다는 자연현상에서 더욱 입증되고 있다고 설명한다.21) 그러므로 종자의 순종(purebred)은 창조질서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나, 잡종(hybrid)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잡종은 창조질서의 역행으로 인해 사실상 고통을 당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해석함으로 상당히 생물학적인 언어로 종에 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22)

마니교도들은 여섯 째날 하나님이 땅을 향하여 명하시되 동물들을 종류대로 내라(창1:24)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마치 광물질인 땅 자체에 유기물인 생명을 낼 수 있는 창조적 장치가 있느냐는 식으로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실은 땅이나 물이 자체로 부터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의 궁극적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3) 바실은 이러한 창조행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24)

 

6. 여섯째 날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해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는 교부들이 좀 더 세심한 이해와 해석을 덧붙였다. 특히,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피조물과 두가지면에서 특이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인간의 창조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논의(Triune consultation)가 있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위대한 갑바도기아 교부가운데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의 주장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단순한 한 명령어에 의해 존재케 된 반면 인간은 삼위의 하나님의 신중한 논의에 의한 결정체였다는 것이다.25) 크리소스톰 역시 인간은 논의와 협력과 토의를 거쳐 나온 존재라는 면에서 타 피조물과 구별될 수 있다고 하였다.26) 그레고리는 인간의 창조가 순서상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면에서도 그 완성도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이는 진화를 의미하진 않음)고 주장한다.27)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면에서 더욱 구별된다. 헬라의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요소로 보고 애써 이를 구별하여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오리겐은 형상(image)은 선천적 요소로, 모양(likeness)은 후천적 요소로 보아 후자를 인간자신이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으로 획득되어 질 수 있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28) 창1:26절에서 언급된 형상과 모양 중 형상에 관한 것만 한 번 더 그 다음절에 언급되어 있고 모양에 관해서는 침묵하신 이유도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 한다고 보고 있다.29) 또한 헬라교부들의 치밀하고도 정밀한 해석적 시도는 우리의 형상과 모양에서 '우리”라는 말은 복수로 쓰인 반면, '형상”이나 '모양”이라는 말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지칭한 점에서 우리 하나님의 특성 즉, 세 인격(복수)으로 있으나 본질상 하나(단수)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설명하였다.30)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 이를 단순한 내면적 인격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외적인 신체의 모습까지도 이야기하는 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 모두가 있었다. 내면적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자는 오리겐으로 그는 우리의 영적인 특성, 즉 내면적 사람, 보이지 않고 비육체적이며 부패될 수 없고 죽지 않는 영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1)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내면적 성정은 반드시 삼위일체적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삼위일체에 기반한 인간이해를 도모하였다. 포타미우스(Potamius)같은 교부는 인간의 외적인 신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 발현이라고까지 보았다.32)

 

7.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관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대체로 초대교부들은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에 관한 해석에 있어 두 갈래로 나눠짐을 보게 된다. 하나는 문자적(literal)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이다. ‘알레고리(allegory)’라 함은 우의적, 은유적, 풍유적 해석이라 하여 문자가 의도하는 것 이상의 뜻(주로 영적인 의미)이 있다고 믿고 숨겨진 진의를 해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동방 헬라 교부의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서방 라틴 교부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의 경우 성경해석에 있어 그 나름대로 합리성과 조화를 시도하기 위해 문자적 해석에만 머물지는 않았음을 보게 된다.33)

일례로, 창조기사의 ‘날’(Day)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그 입장이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지게 됨을 본다. 첫째는 ‘하루 24시간’으로 보는 입장이며, 둘째는 ‘긴 연대’적 입장이며, 셋째는 ‘순간적 창조’의 입장이다. 먼저, 첫 번째 부류로 문자적 접근을 시도했던 크리소스톰의 예를 들어보자. 창조기사에 있어서 ‘날'이라는 말을 태양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첫날부터 쓴 것은 그 시간의 정해짐이 넷째 날 창조된 태양에 대한 지구자전주기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러한 시간대(24시간)로 날을 지정하였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하루를 지구의 자전에 의한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말씀의 권위에 의한 의도적 결과로 해석하였다.34) 바실의 경우도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가는 것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더 과시하는 태도라고 보고 성경은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했다.35) 에프렘도 6일간의 창조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즉, 문자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36)

두 번째 견해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한 오리겐은 물론이고, 순교자 저스틴이나 이레니우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은 하루를 천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긴 시간으로 보았다. 그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벧후3:8) 같다는 비유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아담도 과실을 따서 ”먹는 날” 바로 죽지 않고(창2:17) 930세에 죽은 것(창5:5)으로 보아 ‘날’의 의미를 하루 24시간으로 만 볼 필요는 없다고 유추한 결론들이었다.

그러나 초대교부들 가운데에는 특이하게도 또 다른 세 번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암브로우스 같은 교부는 다섯째 날의 창조기사에서 아예 모든 생물의 창조는 순식간이며 동시적이었다고 보았고, 단지 창조기사는 이를 우리의 인식에 맞게 설명하도록 순서적으로 배열된 묘사에 불과하다고 믿었다.37) 그의 회심에 있어 암브로우스의 영향을 받고 세례까지 받은 어거스틴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창조를 24시간 길이의 하루가 여섯 날에 걸쳐 창조된 것이라 보지 않고 오히려 일순간에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8) 그도 역시 창조기사의 서술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리적 순서(이때 논리는 과학적 시간의 순서 논리가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의 논리)에 의해 기술되었을 뿐 실제 창조는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창조는 순서적으로 이행된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아야 된다고 주장했다.39) 이에 관해 크리소스톰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절차 없이 다 창조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나 우리의 이해와 교훈을 위해서 순서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40)

초대교부들의 창조기사 해석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다른 성향이 있음에 관해 통찰력 있게 연구한 샌드웰(Isabella Sandwell)은 두 인물로 위에서 언급되어온 크리소스톰과 바실을 대비시키고 있다.41) 양자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모두가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충실히 따르는 정통 교부들이라는 점과 문자적 의미의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42)그리고 두 사람 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찬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43) 그러나 상이점이라면 크리소스톰의 경우 좀 더 목회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바실의 경우 좀 더 과학적이고 변증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이다.44)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말씀으로 '선포‘하는 쪽에 섰다면,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납득해야 할‘ 말씀으로 ‘설명‘하는 쪽에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궁창을 설명하면서, 바실은 마치 오늘날 노아홍수의 캐노피 이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공기가 찬 하늘의 물[즉, 궁창위의 물]이 있어서 위로 올라 온 수증기, 즉 강과 못과 늪과 그리고 바다에서 오른 그 증기가 위로부터 오는 엄청난 열기로부터 [궁창 아래의 땅을] 타는 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다.45)

바실은 처음 3일간의 빛도 태양과 상관없이 아침과 저녁을 구분 짖게 하셨으나 오직 넷째 날 광명을 만드신 이유는 이 원초적 빛을 담을 하나의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하였다고 설명한다.46) 마치 이것은 빛과 램프를 비교해 봄으로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빛 자체가 램프와 분명 구별되는 것처럼 등(광명)은 빛을 담기위해 준비된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7) 반면 크리소스톰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태양을 처음부터가 아니라 셋째 날 식물이 창조되고 넷째 날 만드신 이유는 헬라인들로 하여금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근거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말하여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48) 바실은 가능한 기존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비유적 방법(analogy)을 사용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였지만 크리소스톰은 오히려 청중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비약적이고 탈 논리적 방법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더욱 부곽 시키려고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49) 한마디로 바실이 그 예리한 지성으로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였다면 크리소스톰은 그 황금의 입으로 우리의 믿음에 호소하였던 것이리라 여겨진다.

 

III. 초대교회시대의 창조신앙을 위협하던 사상들과 이들의 세계관

1. 헬라주의적 세계관: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

오늘날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과학사조 가운데 하나인 진화론 사상이라면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것은 헬라(Greek)의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인 플라톤주의(Platonism)였으며 이후 발전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이것이 기독교내에 영입되어 혼합주의적 양상을 띤 영지주의(Gnosticism)라 할 수 있겠다.

초대교부들의 창조론은 대체로 당시 그들을 위협했던 플라톤주의적,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대응이었고 변증이라고 하겠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는 상위 및 하위 개념의 이원화된(dualistic)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상위 개념이 완전하고 선하며 불변하는 원형(Form 혹은 Idea)의 진리의 세계인 형이상학적 세계라면 하위 개념은 불완전하고 선하지 않으며 가변적인 형이하학적 세계로 대비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에선 당연히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이며 이성적이며 영적인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기독교의 창조론에 심각한 위협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 세계관에선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50) 창조는 기껏해야 조물주(Demiurge)가 이토록 선재하는 물질을 창조사역을 위한 필연적 재료로 의존하고 사용한 ‘유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materia)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전능성에 근거한 ‘무로부터의 창조’를 위협하는 세계관이었다.51) 헬라권에서 플라톤철학에 깊이 젖어들었던 순교자 저스틴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유로부터의 창조로 본 반면에, 시리아권의 타티안(Tatian)이나 라틴권의 터툴리안(Tertullian)과 같은 교부들이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로 본 것은 이러한 교부들의 사상 속에 배어 있는 정신문화적 배경을 엿보게 해준다.52)

더 나아가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위협은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구약의 창조를 악신의 창조로 보며 구약을 폐기하려는 위협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르시온주의(Marcionism)라 하겠다. 그 창시자 마르시온(Marcion)의 이름을 딴 이 이단사상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지은 조물주(Demiurge)로서 신약의 예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라고 본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하나님과 달리 보복적이며 열등한 유대인의 부족 신 정도로 보았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그의 저서 Against Heresies(이단에 대항하여)에서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견제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며 로고스를 통해서 이룬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하였다.53)

 

2.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세계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를 위협할 만큼 팽배했던 종교 사상가운데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와 마니교(Manichaeism)가 있었다. 이 둘은 고대로부터 헬라에 맞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던 페르시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두 가지 모두 그 세계관을 살펴 볼 때 헬라적 사상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이원론적 특성을 지녔다는 면에서 영지주의와 사촌관계라 할 수 있겠다. 형이상학적 이원론(metaphysical dualism)은 곧 도덕적 이원론(moral dualism)과 연결되어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완전한 것 vs. 불완전한 것)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면,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도덕적 이원론(선한 것 vs. 악한 것)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조로아스터교는 우주와 역사의 이해를 선신과 악신의 대결양상으로 믿었는데 이는 훗날 마니교 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쳐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구도로 나타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론은 이토록 대결구도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선신과 악신이 각각 선한 것의 창조, 악한 것의 창조를 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성경적 창조신앙에 위배됨을 볼 수 있다.

마니교는 기독교 초기시대에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급진적이고 널리 퍼진 고대종교가운데 하나로 북아프리카의 젊은 어거스틴에게까지 파급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3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의 사상은 어거스틴을 매료시켰고 그의 주장은 이후 어거스틴이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 그의 신학사상을 고뇌하는 가운데 정련케 시킨 대표적 이단사상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기독교신앙을 위협하였던 부분은 두 서로 다른 신과 실체의 대립구도로 인해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된 어거스틴은 이러한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악은 실체가 아닌 선의 부재로 보았으며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1:2에 언급된 흑암에 관해 이는 존재로서의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없는 부재로서의 어두움, 즉 어두움이 실체가 아닌 빛이 없는 상태임을 가리키고 있음을 주장하였다.54)

마니교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곡해 한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였으나 그는 기독교인으로 새로운 변증을 제시해야만 했다.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 마니교에 대항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를 옹호하기위해 마니교가 유로부터의 창조를 근거로 삼는 창1:2을 변증하기위해 창1:1과 창1:2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설명을 시도하였다. 즉, 창1:1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였으며 이후 언급된 창1:2은 이 상간 어느 때인가 무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을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납득될 수 있는 해석과 조화를 시도하며 마니교도의 공격에 일축을 가했다.55) 그러나 이 결과 어거스틴은 창세기의 첫 두절 상간에 불가분 갭(gap)을 초청하는 틈을 주고 말았다.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과 페르시아의 현자(sage)라 불리는 교부 아프라하트(Aphrahat)는 이 지역에 팽배하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창조신앙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을 위협하였던 조로아스터교 및 마니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페르시아권에 만연하던 점성술등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여러 일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견지해 줄 신앙고백을 서술하고 있다.56)
 


Ⅳ.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주는 함의

1.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from Demiurge to Creator

이상과 같은 세계관들이 위협하였던 것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시요 창조자가 되심을 제한하는 도전들이었다. 결국 초대교회 창조논쟁의 열매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는 이후 전개될 창조신학과 창조과학의 토대를 놓아 줄 출발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온전한 ‘창조신앙’의 정의를 의미한다. 당시 창조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운데서도 가장 핵심과 사활이 걸린 것은 결국 ‘무로부터의 창조’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라는 속성에서 필연적으로 귀추 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유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을 창조주가 아닌 조물주(이미 있던 물질로 질서지우는 자)로 제한하는 영지주의적 요소를 인정하는 바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후 2세기 말부터는 무로부터의 창조는 점차 교회의 정통적 창조신앙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57)

초기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한 대항이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관하여 공헌하였다면, 영지주의에 대한 대항은 무로부터의 창조교리를 잉태한 셈이다. 이로 보건데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 기독교역사의 두드러진 신학적 산물(theological landmark)로서 정통신앙의 표지(signpost)가 되었으며, 창조론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이정표(milestone)가 되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창조신앙의 핵심교리로 당시 창조론을 위협했던 많은 이단적 사상들에 대해 더 무게 있게 강조되어지고 변증되어졌다.58) 무로부터의 창조는 특히,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구별 지어주는 가늠자가 된 것이다. 초기교부가운데 위에서 언급된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과 같이 헬라 철학적 특성이 강한 교부들을 제외하곤, 무로부터의 창조는 바실, 에프렘, 어거스틴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 교부들에 의해 옹호되었다.59)

성경은 분명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히11:3),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롬4:17), ”만물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계4:11)고 하시며,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선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충실히 따를 때 성경자체가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에게 자연은 언제나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스스로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출3:14).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自然)은 오직 타연(他然)일 뿐이다.

 

2. ”정녕 죽으리라” vs.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과학주의적 사고, 진화론적 사고가 성경의 창조신앙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면 초대교회 때 창조론에 지극히 위협을 미친 것은 이원화된 구조의 철학 및 종교사상, 특히 영지주의적 사고가 성경의 창조신앙에 대한 위협이라고 대응시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주의와 진화론이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히려 유물론적 사고, 진화(evolution)란  이념에 사로잡혔다면,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선 오히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지나치고 신비적일 정도로 사로잡혀 있고 창조세계는 오히려 퇴화(devolution)되었다고 여기는 잘못된 이념을 보게 된다. 오늘날 과학주의와 진화론이 자연세계를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배제시킨 것이라면 초대교회당시 플라톤주의, 영지주의는 오히려 자연세계를 경시함으로 이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경시하고 한갓 열등한 신인 조물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조물주 사상은 플라톤주의, 마르시온주의와 같은 영지주의, 그리고 마니교등에선 'Demiurge'라는 이름의 조물주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한 신에 대항하는 악신인 'Ahriman'이란 이름의 조물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보건데, 초대교회당시 이토록 격하된 창조세계에 대한 인식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진리라 할 수 있는 창조, 성육신, 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이 오히려 그들에겐 부합될 수 없는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핵심적 진리가 시간과 공간과 인간, 즉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계시되었다는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historicity)마저도 경멸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십자가의 도’가 결국 지혜(philosophy)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unsophisticated, foolish) 것으로 거치는 반석밖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고전1:18; 1:22-24).

초두에 가정한 바처럼 초대교회 시대이든 오늘날의 시대이든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사상들과 세계관속에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떠한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을 보게 된다. 과연 무엇이 공통적인 요소였는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불신앙이라고 하겠다.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다. 이것은 인류의 첫 조상에게 처음으로 부닥뜨려진 바로 그 테스트였다. 그 본초적인 현장으로 다시 찾아가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1,4)

”정녕 죽으리라”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사이에는 어떠한 중립의 여지도 없다.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선택의 문제이고 그 결과 사실여부에 의해 진정한 권위가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판가름 짓는 문제이다. 그리고 지구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은 모든 육체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아니 모든 사람은―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는 높은 견해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성경을 대할 때, 계속되는 자연의 관찰과 과학의 발견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드러나고 그 말씀의 권위가 더욱 견고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것이 '주의(-ism)' 곧, 이데올로기화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우리는 과학과 과학주의, 철학과 철학주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과학행위도, 철학행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위협하는 ‘과학주의’와 ‘철학주의’의 모습에 대해선 대처할 줄 알아야 하겠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나 수정당할(to be corrective) 마음의 각오를 할 줄 알아야 될 것이다.

 

V. 나가면서

지금까지 창조신앙의 역사(歷史)를 더듬어 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에 관한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사상과 세계관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던져주는 함의가 무엇인가 살펴보았다.

초대교부들의 창조기사에 대한 이해와 입장은 통일된 것이 아니었고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문자적 해석, 알레고리적인 비유적 해석, 그리고 절충적인 입장등 차이가 있었고 이러한 차이는 개인적 성향 뿐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대와 지역의 정신문화적 특성도 반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초대시대를 마감하고 중세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후에 도래할 중세 천 년,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던 어거스틴의 경우만 하더라도 오늘날 창조과학자들이 다 동의할 수 없는 해석과 입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상, 그의 방대한 저술과 사상의 폭에서 일관되고 체계적인 창조론의 논지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 초대시대의 교부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앙적 유산과 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나 그 누구도 창조에 있어 완벽한 이해를 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당시의 다양한 형태의 철학, 종교, 이단적 사상들에게서 총체적인 세계관적 구조를 갖고 나타나는 ‘이원론’이라고 하는 공통분모적인 특색 에 대해서 창조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가 그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창조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오직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다. 초두에 물었던 가정대로, 창조신앙에 대한 초기의 도전들이나 오늘날의 도전들이나 그 공통적인 요소는 ‘말씀의 권위’에 대한 태도로 압축되어 진다.

이제 부족한 능력과 여러 가지 한계 속에 내놓은 소견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고를 마쳐야겠다. 앞으로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초대교회시대를 이어 중세, 종교개혁과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창조신앙이 어떠한 도전을 받아왔고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그 신앙의 여정을 계속 추적해 보기를 기약해 본다.

 


Footnotes

1) 이를 위해서 주로 사용한 자료는 The Ante-Nicene Fathers (hereafter, ANF). Thomas Oden, general ed.,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hereafter, ACCS), Old Testament, I, Genesis 1-11, edited by Andrew Louth in collaboration with Marco Conti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2001). R. R. Reno, Genesis, Brazo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Michigan: BrazosPress, 2010). 그리고 관련학회지로서 북미주교부학회(The North American Patristic Society)에서 발간되는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를 참조했다.
2) CCS I, li.
3) Chrysostom, Sermon 1:3, ACCS I, 4.
4) Basil, Hexaemeron 3:9, ACCS I, 10.
5)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11:17, ACCS I, 10.
6)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7)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8) Jerome, Homilies 10, ACCS I, 6.
9)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10)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8:3; 9:2, ACCS I, 7.
11) Ambrose, Hexaemeron 4:1, ACCS I, 17.
12)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3:6, ACCS I, 5.
13)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22:1-2, ACCS I, 15.
14) Basil, Hexaemeron 5:1, ACCS I, 15.
15)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2.
16) Ambrose, Hexaemeron 3:6, ACCS I, 15.
17) Basil, Hexaemeron 7:1, ACCS I, 20.
18) Basil, Hexaemeron 8:2, ACCS I, 21.
19)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15:24, ACCS I, 21.
20) Origen, Homilies on Genesis 1:8, ACCS I, 21.
21) Basil, Hexaemeron 9:2, ACCS I, 22.
22) Ambrose, Hexaemeron V 3:9, ACCS I, 23.
23) Basil, Hexaemeron 8:1, ACCS I, 25.
24) Basil, Hexaemeron 9:2, ACCS I, 25.
25) Gregory of Nyssa, On the Origin of Man, ACCS I, 28.
26) Chrysostom, Sermons on Genesis 2:1, ACCS I, 28.
27) Gregory of Nyssa, On Creation of Man 8:7, ACCS I, 28.
28) 이와 비슷한 견해로 디아도쿠스(Diadochus of Photice)도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은 자발적 사랑과 헌신에 의해 이를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하였다. 참조) Diadochus of Photice, On Spiritual Perfection 4, ACCS I, 30.
29) Origen, On First Principles III 6:1, ACCS I, 30.
30) Fulgentius of Ruspe, To Peter on the Faith 5, ACCS I, 31.
31) Origen, Homilies on Genesis 1:13, ACCS I, 31.
32) Potamius of Lisborn, Letter on the Substance 356-64, ACCS I, 33.
33)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The City of God(신의 도성)에서 창조기사에 나오는‘날’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정의하기 극히 어려운 사안이라고만 언급하고 명확한 입장을 내놓진 않았다. 참조) Augustine,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the beginning of time are the same,' The City of God, Book 11: Chapt. 6; 'Of the nature of the days when there was 'morning and evening' before the creation of the sun,' The City of God, Book 11: Chapt. 7. 어거스틴은 문자적 해석을 따르는 교부들과는 달리 24시간에 기초한 6일 창조론을 따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인류역사의 연도에 관해선 비교적 짧은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아담 이후 인류의 역사는 600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참조) Augustine, 'Of the Falseness of the History Which Allots Many Thousand Years to the World’s Past,' The City of God, Book 12: Chapt. 10.
34)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4, ACCS I, 16.
35) Basil, Hexaemeron 9:1, ACCS I, 16.
36)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1, ACCS I, 9.
37) Ambrose, Hexaemeron 5:2-3, ACCS I, 21.
38) 어거스틴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저서 On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14.28-29; 6.6.9)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성경을 주해적으로 접근(exegetical approach)해서 얻은 결론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인 추론(philosophical inference)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창조는 '시간 안에서'(in time) 이루어지는 것(즉, 시간의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될 수 없고 '시간과 함께' (with time) 이루어진 것(즉, 시간이 시작되는 그 찰나적 시점)이어야만 한다는 사상에서 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창조이전의 시간이란 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창조는 곧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의 시작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9) Gregory of Nyssa, Homilies on Genesis 44, ACCS I, 45.
40)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3:12, ACCS I, 45.
41) Isabella Sandwell, 'How to Teach Genesis 1.1-19: John Chrysostom and Basil of Caesarea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 19 no. 4 (Winter 2011), 539-64.
42) Sandwell, 539.
43) Sandwell, 543.
44) Sandwell, 539.
45) Basil, Hexaemeron 3:7, Sandwell, 555.
46) 이와 비슷한 견해로 훗날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도 넷째 날의 광명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 광명은 그 자체가 빛의 근원이라기 보단 첫째 날 창조된 빛의 수용체(receptacle)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참조) John of Damascus, Orthodox Faith 2:7, ACCS I, 17.
47) Basil, Hexaemeron 6:2, Sandwell, 556.
48)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4, Sandwell, 557.
49) Sandwell, 561.
50)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중 하나인 Timaeus에서 우주는 선재하는 물질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그의 사상에 근거한다. 참조)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박세혁 역, 『과학신학』 (서울: IVP, 2004), 71.
51) Paul M. Blowers, 'Creation,' in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ed. Everett Ferguson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0).
52) 아무리 교부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시대적 산물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당시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의 경우는 하늘, 땅, 불, 바람, 물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는 창세기 1:1에서 언급된 최초의 창조, 즉, 무로부터의 창조로 보고, 이후에 나오는 창조들, 즉, 창세기1:3에서 언급된 빛의 창조로 부터는 이미 있었던 이들 요소를 이용해서 창조된 유로부터의 창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1:14; 15:1, ACCS I, 9 참조). 이처럼 교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들, 즉, 물, 불, 흙, 공기들에 대한 언급은 당시 헬라적 세계관에서 너무도 강력히 나타나는 자연철학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써 바실과 같은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에서도 나타남을 볼 수 있다 (Reno, 548 참조).
53) Blowers, 'Creation.'
54)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9:15, ACCS I, 8.
55) Reno, 39.
56) 이러한 예는 아프라하트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Demonstrations 1:19을 참고하기 바람.
57) 이후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회의 때는 교리로서 공식화 되었고, 1870년 제1차 바티칸 회의 때 재확정 되었다.
58) Basil, Hexaemeron 2:2-3, ACCS I, 2.
59) 예) Augustine, On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4:13, ACCS I, 6.

 

참고문헌

(1) The Ante-Nicene Fathers.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89.
(2)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 Second Series.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89.
(3) Ferguson, Everett, ed.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0.
(4) Oden, Thomas, general ed.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Old Testament, I, Genesis 1-11, edited by Andrew Louth in collaboration with Marco Conti.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2001.
(5) Reno, R. R. Genesis. Brazo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Michigan: BrazosPress, 2010.
(6) Sandwell, Isabella. 'How to Teach Genesis 1.1-19: John Chrysostom and Basil of Caesarea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 19 no. 4 (Winter 2011): 539-64.
(7)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박세혁 역. 『과학신학』 서울: IVP, 2004.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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