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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창조질서와 결혼제도 : 창조와 성

창조질서와 결혼제도 : 창조와 성

이은일 


서론

많은 사람들이 결혼과 성(性)은 별개의 문제라고 믿는다.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행위가 결혼 제도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구시대적인 고리타분한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따라 나온 열매는 뚜렷하다. 청소년들의 성적타락, 미혼모와 미혼부, 버려지는 아기들, 혼외 정사로 인한 가정의 붕괴, 그로 인한 자녀들의 삶의 붕괴, 성매매, 성폭행, AIDS 등 성병 전파, 동성애 등등.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대가는 사회와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흐름은 거세지고 있다.

 

본론

1. 결혼과 성

진화론 입장에서, 특히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적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당연한 행위이며, 따라서 인간을 성적 행위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 행위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성적 행위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셨다. 성적 행위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 탄생된 가정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축복일 뿐이다. 결혼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성적 행위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자녀 생산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결혼 테두리 밖에서 이뤄지는 성적 행위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사회적 질서이며, 세상의 가치관에서도 가정이 사회의 기본단위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가정은 부부간, 가족간 사랑을 경험하고 키우는 곳이며, 자녀를 생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가정을 통해 자녀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배우며, 사회질서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가정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면 된다. 부모 없이 자란 자녀들로 가득한 사회가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질까?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사회는 절대적 기준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집단의 이익을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주장과, 개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어떤 편을 들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지에 대한 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센델 교수의 주장을 알려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는 ‘동성애’를 합헌 판결한 판사의 판결문에 대한 센델 교수의 날카로운 반박이다. 동성애 결혼에 대한 합헌 판결의 요지는 성적 행위와 배우자 선택의 자유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센델 교수는 동성이던, 이성이던, 배우자 선택이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면, 왜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배우자 선택이 개인의 자유에 해당된다면, 왜 국가가 누가 누구와 결혼하는지에 대한 관리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모든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한다. 그 이유는 가정이 그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고, 그 기본 단위가 건강하지 못하면 국가 사회가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가정을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동성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판결은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성애 결혼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판결하는 것은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사법기관이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와 사회는 결혼제도를 통해 존속할 수 있다. 결혼을 해서 가정 당 2.1명 이상의 자녀를 생산해야 그 나라의 인구가 유지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자녀들을 어른으로 성장시켜야 그 나라가 계속 발전할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안 낳으면, 결론은 그 나라는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예측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산 가능 인구는 2016년도에 최고조에 이르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감소하며, 2017년에는 고령인구가 유소년 인구를 초과하게 된다. 2100년 인구는 2천만명 수준으로 줄어들고, 2300년이면 더 이상 우리나라 인구는 소멸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아마도 그 전에 외국에서 들어온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 자녀들이 생산되고 양육될 때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며, 결혼과 자녀 양육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질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아니,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제도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 되기 원하시는 뜻이 담겨져 있다. 교회와 예수님이 하나 되어야 하듯, 부부가 주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또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수고와 희생을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자녀 양육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수고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신 희생과 닮아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의지적인 희생을 하시는 사랑이다. 범죄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희생하신 십자가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과 자녀 양육은 어려운 것이다. 하나 되는 것도 어렵고, 희생하는 것도 어렵다. 결혼과 자녀생산, 자녀양육을 당연한 가치로 여겨졌던 사회에서는 힘들어도, 위기가 닥쳐와도, 심지어 죽을 것 같아도 부부관계를 깨지 않았고, 자녀들을 최우선으로 돌보았다.

그런데 이런 결혼과 가정에 대한 절대적 가치가 깨어졌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관계가 냉랭해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힘들면 결혼을 유지하기보다 이혼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는다. 자신의 자녀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는 부모들이 늘어날 정도로, 가정이 이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닌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아시아 국가 중에 1위이며, 이혼하는 것이 두려워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정은 창조 이후로 계속 문제가 많았지만, 가정을 대신할 곳은 없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부터 배우고, 그대로 행동한다. 문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문제 아이들이 되는 것이고, 문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건전한 가정이 되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선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결혼을 수단처럼 생각하면, 아무리 목적이 고상하더라도 결혼이 유지되기 힘들다.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보다 자신들이 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면, 가정이 안식의 장소가 아닌 전쟁터가 되기 쉽다. 결혼은 그 자체가 목표를 갖고 있는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의 모델이다. 결혼만이 하나님의 자녀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땅에 충만하도록, 땅을 정복하도록,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이런 일들이 이뤄질 수 있다. 

  결혼을 통한 관계를 이룰 때,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된다. 에로스적 사랑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다. 아무리 받아도 부족하다. 아가페적 사랑은 넘쳐남으로 흘러 나오는 사랑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주어도 남는 사랑이다. 결혼을 통해 부부간에, 부모자녀 간에 이런 주는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는 경험을 통해 사랑을 주는 성숙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유하면서 부부간에 대한 사랑을 정의한 에베소서 5장 말씀의 핵심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배우자를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소유 당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에 말씀하시는 사랑은 남편들이 쉽게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겸손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보다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영적 권위를 갖고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처럼 아내의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 오직 사랑과 희생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남편의 자리이다.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돕도록 놀라운 지혜를 주신 아내는 자신의 지혜로 남편을 지배하거나 조정해서는 안된다. 남편이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가장으로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지혜로 남편을 도와 남편이 지혜롭고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정의 중심에 부부가 있어야한다. 자녀들이 가정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부부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자녀들도 그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방법은 부부가 사랑이 넘쳐야 한다. 자녀들도 그 넘치는 사랑 속에서 잘 양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자녀양육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와 사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결혼과 자녀 양육은 힘들지만, 인생에서 가장 복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만 준비하고, 결혼을 준비하지 않아서, 실제 결혼하고 나서 당황한다. 결혼은 힘든 것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결혼 전에 미리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적 행위는 부부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자녀를 낳은 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부부가 하나로 연합되는 과정에서 성적 행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사랑과 성(性)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신뢰, 존중, 희생, 이해, 네 가지로 분리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깊이가 한정 없기 때문이다. 성적 행위 없이도 얼마든지 깊은 인간관계, 고상하고 거룩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부부관계가 다른 것은 바로 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있다. 오직 성적 행위를 통해 자녀를 생산할 수 있고, 부부간의 친밀함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성(性)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혼전성관계나, 외도 등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성관계를 통해 임신한 것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즉, 사랑과 희생으로 섬겨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보는 음란한 사회가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사원과 성관계를 갖고도 회개하지 않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표현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진화론적 가치관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도리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진화론적 가치관은 자신들을 옳다고 주장하게 만든다.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는 감정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성적 행위로 표현하기 원한다. 느낌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었다. 결혼에 대한 책임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화론적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이런 감정의 주인이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학물질에 의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물질을 조정하면 그런 감정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고, 느끼는 감정도 물질에 의한 것이므로, 감정이 이끄는 데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감정도 소중하고, 우리의 육체도 소중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우리의 존재이지 감정도 육체도 화학물질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감정, 생각, 행동 모두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한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성숙해야 한다. 그런데 성적 연합은 이런 성숙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적 연합을 성숙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도리어 sex의 노예가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적 연합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의 뇌에 쾌락중추를 만들어주셨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은 성적 행위에서 분비되어 성적 연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부부간의 연합에는 도파민 외 여러 호르몬이 필요하다. 성적 쾌락 뿐 아니라, 행복감, 신뢰감, 일체감, 안정감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도파민뿐만 아니라, 세로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엔돌핀 등 다양한 호르몬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런 호르몬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부관계를 통해 이런 감정들을 함께 건전하게 추구하는 것은 악셀과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안전하게 차를 모든 것과 같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오직 성적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악셀만 있는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오직 도파민 분비만을 원하는 성관계는 곧 도파민 중독이 되고, 뇌가 손상 받게 된다. 이런 일은 성적 행위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에서 일어난다. 마약, 약물, 도박, 쇼핑 등 다양한 행동들이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고 쾌락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하다. 한 순간의 쾌락을 계속 선택하면, 육체의 쾌락이 나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 나의 인생 전체를 망쳐버리게 된다.

  도파민 중독이 어떻게 뇌를 손상시키는지는 포르노 중독 연구에서 잘 나타나있다. 포르노를 보면서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웬만한 도파민 분비로는 쾌락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강한 포르노를 탐닉하다 보면, 도파민 중독이 되고, 놀랍게도 뇌에 구조적 변화가 오며, 성관계 능력도 떨어진다. 포르노에 중독되면 도리어 성욕이 감소한다. 포르노 중독 환자의 치료에 노인은 2개월 정도 걸리지만, 젊은이의 경우는 4-5개월로 더 걸린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포르노를 많이 다운로드 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포르노를 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에 성추행과 성폭행도 우리나라에서 계속 늘어가고 있다. 

  모든 중독은 비극을 초래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비극적으로 만든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성에 중독된 사회다. 아니 세계가 성에 중독되어 있다. 동물대상 sex를 금지하는 법이 나올 정도로 성에 중독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육도 어떻게 성관계를 가지면서 임신을 하지 않고, 성병을 피할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혼제도 안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는 순결교육은 구시대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사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성관계가 이뤄지는 현실에서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지 말라는 교육은 설득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은 변화되어야한다. 성교육은 성관계에 대한 교육, 피임 교육, 성병 예방 교육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성행위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남녀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만약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된다면, 성교육에서 어떻게 남성끼리 항문성교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성 간의 성관계, 동성 간의 성관계를 가르치는 것이 학교 성교육의 내용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성중독을 포함한 모든 중독의 치료의 시작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어떻게 치료할 지에 대한 내용을 보면, 첫 번째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두 번째가 자신의 힘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공동체의 격려와 도움으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콜 중독에 대한 치료 원리는 구원의 십자가의 도와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듯이, 오직 하늘의 도움으로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콜중독이나 성중독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중독의 진정한 뿌리는 우리의 죄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죄에 중독된 자들이다. 이런 죄의 문제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중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를 통해 전달하시도록 하신 것처럼, 성중독 사회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메시지도 우리를 통해 전달되길 원하신다. 복음은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전달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삶이 없다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변화시킨 것은 여성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한다. 당시 오직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족들이 여성 그리스도인들을 며느리로 삼길 원했고, 그 결과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고, 가족들이 변화되었다. 결국 로마의 지도층들 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로마처럼 성중독에 빠진 사회이다. 사람을 성적 도구로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교회만이 사람을 쾌락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서로의 삶에 대한 헌신과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될 때, 힘든 자녀 양육도 함께 짐을 질 수 있을 것이다.  

 

3. XX와 XY

   XX는 여성의 염색체를 의미하고, XY는 남성의 염색체를 의미한다. 결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절대적 제도라면, 남성과 여성도 염색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질병 때문에 이런 염색체 이상이 생겨서, 완전한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길 수 있지만, 염색체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은 변화될 수 없다. 또한 아무도 자신의 염색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염색체에 의해 남자와 여자가 결정되는 것은 변화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이다. 남자면 남자이고, 여자면 여자이지, 다른 존재는 없다. 바로 이 남성과 여성을 통해 자녀가 태어나는 것도 변화될 수 없는 창조질서이다. 남성과 남성 사이에,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날 방법은 전혀 없다. 

  남성과 여성이 염색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결혼에 의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면, 이런 질서를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책임이 있다. 그런데 염색체에 의해 결정된 남성과 여성을 거부하고, 다른 성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몸은 남자 또는 여자일지라도 마음은 여자 또는 남자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하더라도 다른 몸을 갖길 원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수술을 하더라도 염색체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구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문화적 구별 및 차별에 대하여는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과거에 요리를 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이 어떠해야 한다는 많은 생각들이 문화적 가치관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의 기질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의 상당부분도 문화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다른 역할을 하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여성 같은 남성일지라도 아기를 가질 수 없듯이, 선천적으로 정해진 남자, 여자의 구별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질서를 무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동성끼리 서로 사랑하니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것이 사회의 진보적인 모습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동성끼리 성적관계를 갖고 살면서 부부로서 법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 결혼을 통해 자녀는 낳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해 다른 이성과 또 결혼해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같이 사는 일들이 벌어진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동성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원한다고 모든 것을 허용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실제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많은 법들을 가지고 있다.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병역의 의무도 있다. 운전할 때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공공장소에 담배를 피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왜 이런 법과 규정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법과 규정을 지킬까? 이런 법과 규정들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가정은 남자와 여자로 이뤄지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결국 어떻게 될까? 동성 결혼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동물과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결혼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동물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할 근거는 무엇인가?

  동성애는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동성애 유전자를 주장하는 연구논문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학자에 의해 억지로 주장되는 것일 뿐, 과학자들은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적 경향은 있을 수 있다. 범죄자들에게도 범죄자적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이 범죄자적 경향이 있다고 해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이런 유전적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유전적 성향으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행동을 절제해야 한다.  

  사실 동성애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민감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졌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깊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상처를 받기도 쉽다. 그런데 같은 동성애자들은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어루만져주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강한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란 동성끼리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끼리 항문성교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험이 없는 사람이 성중독 환자가 될 수 없듯이, 항문성교를 하지 않고 동성애자가 될 수 없다. 동성애는 동성끼리의 깊은 사랑과 우정도 있겠지만, 항문성교의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갈망이 존재한다(남성 동성애자들 중심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러나 항문 성교는 성병과 에이즈 등이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항문기능이 훼손되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항문은 배설기관이지, 생식기관이 아니다.

  항문성교 없이 민감한 성품을 가진 동성끼리 깊은 우정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 따라서 동성애의 치료는 성중독과 마찬가지로 항문성교의 쾌락을 포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두려움도 회복해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을 때,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주님은 사랑하시고 회복되길 바라신다. 우리도 동일한 마음으로 동성애자들과 성중독자들을 비롯한 모든 중독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종류만 다를 뿐, 죄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중독에서 죄에서 우리 모두를 건져주실 것이다.

 

결론

  성중독에서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힘들어도 결혼해서 서로 사랑하면서 한 몸을 이뤄가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를 많이 낳고 열심히 사랑과 희생으로 양육하면서, 좋은 아빠, 엄마가 되어야 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사랑과 희생을 배워서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서 주님의 일군이 될 것이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힘으로 이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희생하는 국민이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사랑과 희생으로  열방과 세계를 섬긴다면, 힘이 아닌 사랑으로 세계의 으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를 섬김으로 더 큰 나라를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삶이다. 

  또한 교회는 사랑과 희생과 함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염색체를 바꿀 수 없다면, 인정해야 한다. 이성을 믿을 수 없더라도 건전한 가정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선택의 결과이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질서를 깨는 것이 아니라, 질서 내에서 다양성의 조화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만이 세상의 대안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정을 창조하시고, 부부와 자녀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려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만이 죄에 중독된 사회를 구원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출처 - 제5회 선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창조과학세미나 자료집 (2016.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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