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누리는 유일한 길
(The only way to peace?)
by David Green
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때로 씨름하고 있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현실 세계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도전들과 다가오는 미래에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족에서 평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은 깨지기 쉽고, 결국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안에 대한 최종적 파괴자인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망각도 이것을 극복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평안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가 답해야 하는 딜레마로 이어진다. 평안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우리 현실 속에서 평안을 찾는 최종 해법은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종교적 탐구이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기독교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AD 58년경) 다루고 있다(로마서 1장, 특히 1:24~25). 그는 두 기본 종교, 즉 다양한 형태의 피조물 경배와 창조주 경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4~25)
각 사람은 그러한 질문에 다르게 접근한다. 한 사람은 평안을 피조물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평안이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신'으로 변장하여 우리에게 찾아오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모순은 평안을 평안하지 못하는 근원으로부터 찾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또 다른 대답은, 평안은 피조물 밖에 있는 것으로, 완전한 시각을 갖고 계시며, 삶에 대한 이 기본적인 질문에 정확하고 최종적인 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창조주와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창조 안에서 바라보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답은 피조물, 또는 '자연', 또는 '우주'를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 관점에서 모든 '신'들은 우리가 살고 있고 의존하고 있는 우주의 일부인 피조물 내의 무엇이거나, 또는 누군가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우리 안에는 피조물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갈망이 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서서히 풀어지고 있는 물질적 우주, 비인격적 물질과 에너지, 사람들의 삶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들이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복음은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하고, 우리를 피조물 밖으로 나와 답을 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인격적이며, 사람들 사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순한 물질들만이 아닌 세계로 도달하게 해준다. 우리는 서로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좋은 관계는 다른 모든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만든다.
우주는 개인적 특성과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고, 연결해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성경적 대답은 관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분을 반향하고, 그분을 아는 것 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경의 첫 몇 구절(창세기 1장)에 나와 있다 :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고(창 1:1), 성령님은 운행하셨고(창 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는 후에 그 말씀을 읽게 되었다.(요한복음 1:1~3, 12~13). 세 분 모두 함께 일하셔서 창조를 완성하셨고, 동시에 피조물과 분리된 채로, 그것에 속해있지 않으신다.[1]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은 우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분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은 날들을 우리와 같은 시간으로 창조하셨다. 그 날들은 상징도, 비유도, 단순한 허구도 아니며, 하나님의 시늉도 아니다.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막연하고 모호한 시간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적 날들로 설정된 것이다. 이 날들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실제 행동이 무엇을 만드는 우리의 실제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이 그리스 철학자이자 시인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말을 인용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그것들은 우리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삶에서 친밀하게 하나님과 연결되게 한다.
성경은 날들이 끝나고, 모든 것들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주를 만드셨지만 진화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오늘날의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의 개념과 배치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와 하나님의 정체성과 전능하심을 약화시키고, 창조와 진화를 혼합해버리는 타협적 믿음이다.
평안을 찾는 것과 우리의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대답은 바로 말씀에 들어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사도 요한의 기록을 통해, 그가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1-5).
즉, 그분은 하나님 자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미스터리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따라서 우리가 평안을 찾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평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 안에서 찾을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의 장소인 것이다. 피조물 안에서 평안을 찾는 것은 이교도의 특징이다. 현대 이교도는 교만, 자기 집착, 도덕적 가식을 갖추고, 마침내 정치, 경제, 사회를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그 무용성을 보여준다.[3]
평안의 원천은 인간의 기원 되시는 창조주와 우리의 기본적인 관계성에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이것을 설명하시고, 문제를 진단하셨고,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다루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4-18).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타락한 세계에서 고통과 혼란 속에 있는 소외된 우리를 평안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음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평안이 있기를 바라셨다.
현실에서 이 해결책만이 유일하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을 때만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주의적 사건들의 불가능한 연속으로 우리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나사렛 예수는 창조주이시며, 오직 창조주만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만드신 인간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
Posted on CMI homepage: 3 June 2024
References and notes
1. See articles under Is one God really three persons? creation.com/god#trinity.
2. The details of the poet’s life (7th or 6th century BC) are obscure and tainted with mythical elements. The poem was referring to Zeus, which Paul applied to God as the one in whom we exist.
3. Jones, P., Pagans in the Pews, Baker Pub Group, 2001; Neopaganism inside the Church, youtu.be/QC4fO-Kzjck?t=40, accessed 16 Au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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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rating Twelve Names of Christ
Isaiah 9:6–7: The coming Child who would be called ‘Mighty God’
Not just another book on ‘Why me, Lord?’
Further Reading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ow long were the days of Genesis 1?
Six days? Really?
*참조 : ▶ 성경적 창조신앙의 중요성
https://creation.kr/Topic501/?idx=6790739&bmode=view
▶ 예수 그리스도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16674&t=board
▶ 예수님의 가르침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15625&t=board
▶ 문화 전쟁
https://creation.kr/Topic501/?idx=6790724&bmode=view
▶ 성경적 창조론 교육
https://creation.kr/Topic501/?idx=6790658&bmode=view
출처 : Creation 45(1):54–55, January 2023
주소 : https://creation.com/one-way-peace
번역 : 미디어위원회
평안을 누리는 유일한 길
(The only way to peace?)
by David Green
대부분의 사람들이 때때로 씨름하고 있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현실 세계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도전들과 다가오는 미래에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족에서 평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은 깨지기 쉽고, 결국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평안에 대한 최종적 파괴자인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망각도 이것을 극복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평안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가 답해야 하는 딜레마로 이어진다. 평안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우리 현실 속에서 평안을 찾는 최종 해법은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종교적 탐구이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기독교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질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AD 58년경) 다루고 있다(로마서 1장, 특히 1:24~25). 그는 두 기본 종교, 즉 다양한 형태의 피조물 경배와 창조주 경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4~25)
각 사람은 그러한 질문에 다르게 접근한다. 한 사람은 평안을 피조물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평안이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신'으로 변장하여 우리에게 찾아오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모순은 평안을 평안하지 못하는 근원으로부터 찾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또 다른 대답은, 평안은 피조물 밖에 있는 것으로, 완전한 시각을 갖고 계시며, 삶에 대한 이 기본적인 질문에 정확하고 최종적인 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창조주와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창조 안에서 바라보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답은 피조물, 또는 '자연', 또는 '우주'를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 관점에서 모든 '신'들은 우리가 살고 있고 의존하고 있는 우주의 일부인 피조물 내의 무엇이거나, 또는 누군가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우리 안에는 피조물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갈망이 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서서히 풀어지고 있는 물질적 우주, 비인격적 물질과 에너지, 사람들의 삶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들이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복음은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하고, 우리를 피조물 밖으로 나와 답을 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인격적이며, 사람들 사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순한 물질들만이 아닌 세계로 도달하게 해준다. 우리는 서로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좋은 관계는 다른 모든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만든다.
우주는 개인적 특성과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고, 연결해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성경적 대답은 관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분을 반향하고, 그분을 아는 것 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경의 첫 몇 구절(창세기 1장)에 나와 있다 :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고(창 1:1), 성령님은 운행하셨고(창 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는 후에 그 말씀을 읽게 되었다.(요한복음 1:1~3, 12~13). 세 분 모두 함께 일하셔서 창조를 완성하셨고, 동시에 피조물과 분리된 채로, 그것에 속해있지 않으신다.[1]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창조의 날들‘은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은 우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분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셨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은 날들을 우리와 같은 시간으로 창조하셨다. 그 날들은 상징도, 비유도, 단순한 허구도 아니며, 하나님의 시늉도 아니다.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막연하고 모호한 시간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적 날들로 설정된 것이다. 이 날들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실제 행동이 무엇을 만드는 우리의 실제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이 그리스 철학자이자 시인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말을 인용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그것들은 우리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삶에서 친밀하게 하나님과 연결되게 한다.
성경은 날들이 끝나고, 모든 것들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주를 만드셨지만 진화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오늘날의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의 개념과 배치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와 하나님의 정체성과 전능하심을 약화시키고, 창조와 진화를 혼합해버리는 타협적 믿음이다.
평안을 찾는 것과 우리의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대답은 바로 말씀에 들어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그가 행하신 일에 대한 사도 요한의 기록을 통해, 그가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1-5).
즉, 그분은 하나님 자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미스터리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따라서 우리가 평안을 찾고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평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 안에서 찾을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의 장소인 것이다. 피조물 안에서 평안을 찾는 것은 이교도의 특징이다. 현대 이교도는 교만, 자기 집착, 도덕적 가식을 갖추고, 마침내 정치, 경제, 사회를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그 무용성을 보여준다.[3]
평안의 원천은 인간의 기원 되시는 창조주와 우리의 기본적인 관계성에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이것을 설명하시고, 문제를 진단하셨고,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다루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4-18).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타락한 세계에서 고통과 혼란 속에 있는 소외된 우리를 평안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음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우리 안에 평안이 있기를 바라셨다.
현실에서 이 해결책만이 유일하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을 때만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주의적 사건들의 불가능한 연속으로 우리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나사렛 예수는 창조주이시며, 오직 창조주만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만드신 인간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
Posted on CMI homepage: 3 June 2024
References and notes
1. See articles under Is one God really three persons? creation.com/god#trinity.
2. The details of the poet’s life (7th or 6th century BC) are obscure and tainted with mythical elements. The poem was referring to Zeus, which Paul applied to God as the one in whom we exist.
3. Jones, P., Pagans in the Pews, Baker Pub Group, 2001; Neopaganism inside the Church, youtu.be/QC4fO-Kzjck?t=40, accessed 16 Au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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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reation 45(1):54–55, January 2023
주소 : https://creation.com/one-way-peace
번역 : 미디어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