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십자가
: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Creation and the Cross)
Dr. Henry M. Morris
전 인류역사를 통해서 두 번의 위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세계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의 구속이다. 이 두 사건은 각기 거룩한 창조 사역의 위대한 한 주간(週間)과 하루의 쉬는 날을, 그리고 구속의 한 주간과 하루의 쉬는 날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주간은 인간창조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성주간(聖週間), 또는 고난주간(아마도 구속주간이 보다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은 인간구속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창조주간에는 완벽한 세계(창세기 1:31)의 창조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뒤이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세상에 내려졌다 (창세기 3:17). 완벽한 세상을 지으신 이를 죽이고 장사하였던 구속주간은, 인간의 구속과 이 세상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저주가 궁극적으로 걷히는 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2:3). 나무 한 그루(창세기 3:6)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든 매개물이었는데,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베드로전서 2:24)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매개물이었다.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The Two Weeks)
창조주간의 일곱 날들과 고난주간의 일곱 날들을 각기 대조하고 비교하여보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구속주간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학적 순서 매김은 학자들 사이에 크게 의견 차이가 있었던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확실히 매김 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래에 전개될 토론은 어떤 교의(dogma)를 펼쳐 보이자는 뜻에서가 아니고, 다만 그 세부 내용들을 이해하고 조화시키는데 도움이 될만한 추가적인 영역을 제공하자는데 있다. 예컨대, 금요일이 십자가형의 집행일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이 연구에서 제공되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더욱 굳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첫째 날
바로 창조의 그 첫 날에 우주(universe) 자체가 창조되었다 (창세기 1:1). 우주질서(cosmos)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의 창조의 엄명(嚴命)에 응답했다. 태초에 공간-물질-시간 (즉, 하늘, 땅, 시간의 시작)의 연속체가 오직 기본적인 원소의 형태로 창조되었으나, 그 구조는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창세기 1:2), 펼쳐진 물로 된 모체(母體)만이 정적(靜的) 정지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후서 3:5). 하지만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주질서(cosmos) 안에 인력작용(引力作用)과 전자기력(電磁氣力) 체계가 활성화되었다. 물과 정지상태에 있는 모체는 거대한 구형의 행성으로 유착되었다. 그리고 전자기력의 힘의 스펙트럼 중심부에 가시적(可視的) 발광체(發光體)가 불빛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1:3).
아래의 유추(analogy)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고난주간의 첫째 날에, 우주(universe)의 창조주이신 왕은 그의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수도로 입성하였는데 (스가랴서 9:9-10; 마태복음 21:1-9), 이것은 오래 전에 그가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로 등장하신 것과 같다. 그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심지어 그가 창조한 바로 그 원소(元素)(누가복음 19:39, 40)들은 그의 권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2) 둘째 날
지구를 창조하시고 가동시키신 다음, 하나님은 거기에 경이로운 대기권과 수계(水界)를 마련하셨다. 나중에 대기권과 수계 안에는 조류와 어류가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물론, 지구를 제외하고는 어떤 행성도 그토록 풍족하게 대기와 물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이 지구가 유일하게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수계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분리되었다. 궁창 (히브리어를 직역은 “펼쳐진 공간” 이라는 뜻이다) 위의 물은 아마도 광대한 투명성 수증기 융단을 이루고 있어서, 전 세계의 기후를 완벽하게 유지하여 인명 장수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태초에 생명유지에 필요한 대기와 물을 마련하신 사역과 유사하게도, 구속주간의 둘째 날에 그는 (베다니에서 그날 밤을 보낸 다음) 수도로 다시 입성하고 성전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도시 가까이 당도하셨을 때에,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내리셨다(마가복음 11:12-14). 그리고 성전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셨다 (마가복음 11:15-19). 그가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쫒았던 것이 이번이 이틀 동안에 두 번째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병행 비교하여 보면 그가 예루살렘 입성 첫째 날에도 그렇게 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을 청소하신 일,” 이 두 행동은 창조주의 왕국에 번지고 있던 불모와 부패의 현상에 대한 숙청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는 생명을 위한 세계 (호흡을 위한 대기와 생명의 모체를 위한 물)를 창조하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들까지도 그 세계를 척박(瘠薄)하고 불결(不潔)하게 만들어버렸다. 육신의 생명은 무엇보다 먼저 순결한 대기와 물이 있는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참된 영혼의 생명의 세계를 위한 조건은 영적호흡을 위한 순결한 대기와 정화된 말씀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영혼의 참 열매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참 성전을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예비하는 일이다.
(3) 셋째 날
그 다음 날 아침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마가복음 11:20-24). 이에 견줄만하게,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산이 바다에서 드러나게 하셨다 (창세기 1:9-10).
그리고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사두개인들하고 맞대결한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대결이 바로 이 날에 있었다. 그는 그들을 논박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공모하였던 것이다. 이 날 벌어졌던 그들에 대한 그의 도전이 포도원을 다루는 두 가지 우화를 가지고 시작하였던 것은 적절하였다 (마태복음 21:28-32, 마태복음 21:33-43; 마가복음 12:1-11; 누가복음 20:9-18). 그 우화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관리 책임을 맡겼으나, 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무화과나무의 경우처럼 그들의 책임 하에 있는 포도원에는 하나님에게 드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음으로, 그들은 곧 관리책임에서 물러나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온 지구는 창조의 셋째 날에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어 거기에는 모든 생물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 있는 열매로 풍요로웠다 (창세기 1:11-12), 그리고 그 정원은 인간의 관리에 맡겨졌었다 (창세기 1:28-30; 2:15). 그러나 전체 인간이, 특히 선택된 인간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요한계시록 22:2), 지구는 정화되어야 하며, 믿음이 없는 포도원 관리자는 갈아 치워야만 한다.
구속주간의 셋째 날은 감람산에서 행하신 주님의 위대한 설교가 그 절정을 이룬다. 주님은 그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이 반드시 파괴되어야하며, 그 연후에라야 그가 권능과 영광 속에 돌아오시어 새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24, 25;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 그런 다음 그 셋째 날 다음 날 밤에 아직도 신실한 몇 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는 감람산에서 지내셨던 것은 적절하였다(누가복음 21:37). 그것은 바로 그 산이 오래오래 전에 있었던 창조주간(週間)의 셋째 날 그가 바다에서 끌어올렸던 모든 산들을 연상시키고, 감람산 산비탈에 펼쳐진 자그만 포도원이 있는 겟세마네 정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창조주간의 바로 그 셋째 날에 육지 곳곳에 그가 심어놓으신 짙푸른 세계를 연상시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막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차비하시는 사역(누가복음 9:31)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이 땅에 내려진 저주가 깨끗이 씻겨지고, 모든 것은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4) 넷째 날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주 예수님은 태양과 달, 그리고 모든 별들을 하늘에 지으셨다. 처음 사흘 동안에도 “빛”은 있었으나, 지금에 생긴 것은 실질적인 빛들이다! 지구와 그 푸른 초원만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인간에게 자양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그 빛들까지도 인간에게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더욱이 그 빛들은 인간에게 길을 인도해주고 시간을 보전해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사상과 애정을 그의 창조주한테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대신에 부패된 수많은 거짓 신들과 여신들로 둔갑되어 버렸다. 더욱이, 별들은 모든 천체들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자아내지 못하고, 그 대신에 광대하고 진화하는 우주(cosmos) 안에서 지구는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간들의 믿음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날 밤 그 산 위에 누워 오래 전에 자신이 어둠을 쫓기 위해 만든 별빛들을 올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쓰였을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엔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성전 안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누가복음 21:37 38).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에는 그의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 결손은 제 4의 복음서(요한복음 12:20-50)에 있는 성전 안에서 행한 그의 가르침에 관한 삽입구적인 기록으로 명백하게 채워질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은 두 번에 걸쳐 스스로를 자신이 만드신 빛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2:46, 35). 참 빛이었던 그가 어두움이 되어야만 함은 새 세상에는 다시는 밤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섯째 날
구속주간의 다섯째 날에 관한 정보가 복음서들 안에는 거의 없다. 셋째 날에 서기장들과 제사장들하고 신랄한 대결을 치른 후, 그리고 아직은 “유월절이 이틀 앞에” (마가복음 14:1) 다가온 날에, 제사장들은 실질적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씌워 처형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유월절 축제(마가복음 14:2)를 지켜야 하는 날이었기에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음모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 날은 아마도 넷째 날이나, 혹은 다섯째 날이었을 것이다. 그 축제일에 유다가 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배반하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견책당한 날 밤부터 이 배신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바로 전날인 안식일 밤에 베다니에 있는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 12:1-8).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에 감람산에서의 설교 이후에 일로 삽입된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는 바로 그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이 만찬과 유다가 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결심과의 사이에 직접적으로 생긴 우발적 관련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이 유월절 날에 주 예수는 그의 두 제자를 시켜 그 날 밤에 그들만의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마가복음 14:12-17). 성전에서 행하신 그의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 그날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누가복음 21:37, 38), 기록된 바로는 이것이 그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 다섯째 날에 대한 기록에서 이 이상한 침묵은 아마도 그 유월절을 위한 예비 과정에 생긴 일들이 갖는 의미의 더 큰 중요성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그날을 유월절의 예비일 (요한복음 19:14)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을 보낸 날 다음 날에 제일로 삼고 있었다는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수 세기동안 엄청난 수의 양과 여러 동물들이 도살되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마지막으로 봉헌되는 제물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님의 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1:29). 그는 죄를 단번에 씻는 한번의 제물로 봉헌될 것이다 (히브리서 10:12). 그는십자가에서 흘린 자기 피로써 이 땅 위에 위대한 화평을 이루어 만물의 창조주에게 만물을 돌려드리고 화목하게 하셨다 (골로새서 1:16, 20).
성주간(聖週間)의 다섯째 날에 바로 그 마지막 유월절 희생양의 피를 흘려야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틀림없이 자신이 최초로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였던 창조주간의 다섯째 날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움직이는 모든 생물(히브리어 nephesh)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21). 이것은 그의 창조사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창조행위였다. 그 때 그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생명의 실체를 창조했던 것이다. (처음 것은 물리적 원소들이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살아있는 동물들한테는 그 육체의 “생명”이 그들의 피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속죄의 대가(atonement)로 지불하는 것이 그 피였다 (레위기 17:1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물(creature),” '영혼(soul),' 그리고 “생명(life),' 이 모든 단어들이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nephesh 에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날에 양의 순결한 피를 흘리는 일은 확실히 그 피의 ”생명“이 창조되었던 아득한 옛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이신 그는 우리들의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려는 참이었기 (고린도전서 5:7)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곧 승리와 생명 안에 삼켜질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54).
(6) 여섯째 날
여섯째 날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이고 목표였다 (창세기 1:26, 27). 그런데 이번의 여섯째 날에 인간의 모양대로 육화되어 오신 하나님이 보다 더 위대한 구속 사역을 끝내셨던 것이다.
엄청난 저주 아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받아 왔었다 (로마서 8:22). 그러나 이제 창조주 그 자신이 저주를 받은바 되어 (갈라디아서 3:13, 이사야 52:14), 마침내 그 창조주도 또한 죽어야만 했던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나, 이제는 그도 땅에서 들려야만 했다 (요한복음 3:14), 그리고 온 하늘은 침묵하였다 (마태복음 27:46). 비록 그는 둘째 날에 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요한복음 4:14)이었으나, 목말라 죽어갔다 (요한복음 19:28).
셋째 날에 그는 마른 땅을 창조하셨으나, 구원의 바위가 강타 당했기 때문에 (출애굽기 17:6), 지금은 “그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있다” (마태복음 27:51). 그는 또한 바로 그 셋째 날에 나무와 포도넝쿨로 이 땅을 덮었으나, 지금은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1)가 꺾이고 푸른 나무(누가복음 23:31)가 잘려나갔다. 그는 넷째 날에 해를 창조하셨으나, 지금은 그 해가 빛을 잃었다 (누가복음 23:44). 그리고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은 다 소진되었다. 다섯째 날에 그는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명이었다 (요한복음 11;25,; 14:6).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의 생명인 고귀한 피가 십자가 밑의 땅바닥에 쏟아지고 그는 “사망의 진토로” 끌어내려졌다 (시편 22:15). 여섯째 날에 그는 인간을 짓고 생명을 주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인자를 죽음에로 들어올렸다.
(7) 일곱째 날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사도행전 2:23) 되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세기 2:2). 더욱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완벽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속사역 또한 그랬다! 이 일이 특별히 요한의 말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니시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28, 30). (강조된 단어들은 모두가 그리스어로는 동일한 어원이다). 예수께서는 하셔야했던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성경의 선지자의 마지막 말씀을 이루셨다. 그 다음에야, 오직 그런 연후에 가서야, 구속의 사역이 완성됐으며, 화목의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음을 알고 그는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 라고 위대한 최후 승리의 외침을 외칠 수 있었다.
창조의 기록은 창조의 전체 사역이 그리고 만물의 창조가 이루어졌음 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3). 이와 같은 태도로 요한의 기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업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루어진 창조의 사역이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것과 같이, 이루어진 우리의 구속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사역은 “아주 크며 (큰 구원)” (히브리서 2:3), “영원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5:9). 그래서 그 소망은 “좋은”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
끝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일곱째 날에는 쉬시었다. 그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서 잠이 드셨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신속했었다. 그리고 장사준비도 또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누가복음 23:54-56). 그것은 그의 시신이 안식일 전에 매장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조의 사역을 이룬 후 안식에 들어갔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가 다시 한번 더 안식하고 있었다.
장사한지 삼일 만에 (그 날은 새 주간의 첫 날이었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6:21 et al). 그의 시신은 안식일 온 종일과 그 전날 일부와 다음날 내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관용구의 용도에 따르면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이다 (마태복음 12:40).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매어 놓지 못했다. 그는 죽음에서 깨어나서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신다. (요한계시록 1:8).
*헨리 모리스 박사는 ICR의 창시자이며 명예회장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34.htm
출처 - ICR, Impact No. 34, 1976.
창조와 십자가
: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Creation and the Cross)
Dr. Henry M. Morris
전 인류역사를 통해서 두 번의 위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세계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의 구속이다. 이 두 사건은 각기 거룩한 창조 사역의 위대한 한 주간(週間)과 하루의 쉬는 날을, 그리고 구속의 한 주간과 하루의 쉬는 날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주간은 인간창조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성주간(聖週間), 또는 고난주간(아마도 구속주간이 보다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은 인간구속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창조주간에는 완벽한 세계(창세기 1:31)의 창조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뒤이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세상에 내려졌다 (창세기 3:17). 완벽한 세상을 지으신 이를 죽이고 장사하였던 구속주간은, 인간의 구속과 이 세상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저주가 궁극적으로 걷히는 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2:3). 나무 한 그루(창세기 3:6)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든 매개물이었는데,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베드로전서 2:24)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매개물이었다.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The Two Weeks)
창조주간의 일곱 날들과 고난주간의 일곱 날들을 각기 대조하고 비교하여보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구속주간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학적 순서 매김은 학자들 사이에 크게 의견 차이가 있었던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확실히 매김 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래에 전개될 토론은 어떤 교의(dogma)를 펼쳐 보이자는 뜻에서가 아니고, 다만 그 세부 내용들을 이해하고 조화시키는데 도움이 될만한 추가적인 영역을 제공하자는데 있다. 예컨대, 금요일이 십자가형의 집행일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이 연구에서 제공되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더욱 굳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첫째 날
바로 창조의 그 첫 날에 우주(universe) 자체가 창조되었다 (창세기 1:1). 우주질서(cosmos)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의 창조의 엄명(嚴命)에 응답했다. 태초에 공간-물질-시간 (즉, 하늘, 땅, 시간의 시작)의 연속체가 오직 기본적인 원소의 형태로 창조되었으나, 그 구조는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창세기 1:2), 펼쳐진 물로 된 모체(母體)만이 정적(靜的) 정지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후서 3:5). 하지만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주질서(cosmos) 안에 인력작용(引力作用)과 전자기력(電磁氣力) 체계가 활성화되었다. 물과 정지상태에 있는 모체는 거대한 구형의 행성으로 유착되었다. 그리고 전자기력의 힘의 스펙트럼 중심부에 가시적(可視的) 발광체(發光體)가 불빛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1:3).
아래의 유추(analogy)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고난주간의 첫째 날에, 우주(universe)의 창조주이신 왕은 그의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수도로 입성하였는데 (스가랴서 9:9-10; 마태복음 21:1-9), 이것은 오래 전에 그가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로 등장하신 것과 같다. 그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심지어 그가 창조한 바로 그 원소(元素)(누가복음 19:39, 40)들은 그의 권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2) 둘째 날
지구를 창조하시고 가동시키신 다음, 하나님은 거기에 경이로운 대기권과 수계(水界)를 마련하셨다. 나중에 대기권과 수계 안에는 조류와 어류가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물론, 지구를 제외하고는 어떤 행성도 그토록 풍족하게 대기와 물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이 지구가 유일하게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수계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분리되었다. 궁창 (히브리어를 직역은 “펼쳐진 공간” 이라는 뜻이다) 위의 물은 아마도 광대한 투명성 수증기 융단을 이루고 있어서, 전 세계의 기후를 완벽하게 유지하여 인명 장수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태초에 생명유지에 필요한 대기와 물을 마련하신 사역과 유사하게도, 구속주간의 둘째 날에 그는 (베다니에서 그날 밤을 보낸 다음) 수도로 다시 입성하고 성전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도시 가까이 당도하셨을 때에,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내리셨다(마가복음 11:12-14). 그리고 성전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셨다 (마가복음 11:15-19). 그가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쫒았던 것이 이번이 이틀 동안에 두 번째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병행 비교하여 보면 그가 예루살렘 입성 첫째 날에도 그렇게 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을 청소하신 일,” 이 두 행동은 창조주의 왕국에 번지고 있던 불모와 부패의 현상에 대한 숙청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는 생명을 위한 세계 (호흡을 위한 대기와 생명의 모체를 위한 물)를 창조하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들까지도 그 세계를 척박(瘠薄)하고 불결(不潔)하게 만들어버렸다. 육신의 생명은 무엇보다 먼저 순결한 대기와 물이 있는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참된 영혼의 생명의 세계를 위한 조건은 영적호흡을 위한 순결한 대기와 정화된 말씀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영혼의 참 열매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참 성전을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예비하는 일이다.
(3) 셋째 날
그 다음 날 아침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마가복음 11:20-24). 이에 견줄만하게,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산이 바다에서 드러나게 하셨다 (창세기 1:9-10).
그리고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사두개인들하고 맞대결한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대결이 바로 이 날에 있었다. 그는 그들을 논박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공모하였던 것이다. 이 날 벌어졌던 그들에 대한 그의 도전이 포도원을 다루는 두 가지 우화를 가지고 시작하였던 것은 적절하였다 (마태복음 21:28-32, 마태복음 21:33-43; 마가복음 12:1-11; 누가복음 20:9-18). 그 우화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관리 책임을 맡겼으나, 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무화과나무의 경우처럼 그들의 책임 하에 있는 포도원에는 하나님에게 드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음으로, 그들은 곧 관리책임에서 물러나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온 지구는 창조의 셋째 날에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어 거기에는 모든 생물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 있는 열매로 풍요로웠다 (창세기 1:11-12), 그리고 그 정원은 인간의 관리에 맡겨졌었다 (창세기 1:28-30; 2:15). 그러나 전체 인간이, 특히 선택된 인간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요한계시록 22:2), 지구는 정화되어야 하며, 믿음이 없는 포도원 관리자는 갈아 치워야만 한다.
구속주간의 셋째 날은 감람산에서 행하신 주님의 위대한 설교가 그 절정을 이룬다. 주님은 그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이 반드시 파괴되어야하며, 그 연후에라야 그가 권능과 영광 속에 돌아오시어 새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24, 25;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 그런 다음 그 셋째 날 다음 날 밤에 아직도 신실한 몇 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는 감람산에서 지내셨던 것은 적절하였다(누가복음 21:37). 그것은 바로 그 산이 오래오래 전에 있었던 창조주간(週間)의 셋째 날 그가 바다에서 끌어올렸던 모든 산들을 연상시키고, 감람산 산비탈에 펼쳐진 자그만 포도원이 있는 겟세마네 정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창조주간의 바로 그 셋째 날에 육지 곳곳에 그가 심어놓으신 짙푸른 세계를 연상시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막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차비하시는 사역(누가복음 9:31)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이 땅에 내려진 저주가 깨끗이 씻겨지고, 모든 것은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4) 넷째 날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주 예수님은 태양과 달, 그리고 모든 별들을 하늘에 지으셨다. 처음 사흘 동안에도 “빛”은 있었으나, 지금에 생긴 것은 실질적인 빛들이다! 지구와 그 푸른 초원만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인간에게 자양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그 빛들까지도 인간에게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더욱이 그 빛들은 인간에게 길을 인도해주고 시간을 보전해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사상과 애정을 그의 창조주한테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대신에 부패된 수많은 거짓 신들과 여신들로 둔갑되어 버렸다. 더욱이, 별들은 모든 천체들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자아내지 못하고, 그 대신에 광대하고 진화하는 우주(cosmos) 안에서 지구는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간들의 믿음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날 밤 그 산 위에 누워 오래 전에 자신이 어둠을 쫓기 위해 만든 별빛들을 올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쓰였을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엔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성전 안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누가복음 21:37 38).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에는 그의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 결손은 제 4의 복음서(요한복음 12:20-50)에 있는 성전 안에서 행한 그의 가르침에 관한 삽입구적인 기록으로 명백하게 채워질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은 두 번에 걸쳐 스스로를 자신이 만드신 빛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2:46, 35). 참 빛이었던 그가 어두움이 되어야만 함은 새 세상에는 다시는 밤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섯째 날
구속주간의 다섯째 날에 관한 정보가 복음서들 안에는 거의 없다. 셋째 날에 서기장들과 제사장들하고 신랄한 대결을 치른 후, 그리고 아직은 “유월절이 이틀 앞에” (마가복음 14:1) 다가온 날에, 제사장들은 실질적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씌워 처형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유월절 축제(마가복음 14:2)를 지켜야 하는 날이었기에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음모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 날은 아마도 넷째 날이나, 혹은 다섯째 날이었을 것이다. 그 축제일에 유다가 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배반하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견책당한 날 밤부터 이 배신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바로 전날인 안식일 밤에 베다니에 있는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 12:1-8).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에 감람산에서의 설교 이후에 일로 삽입된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는 바로 그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이 만찬과 유다가 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결심과의 사이에 직접적으로 생긴 우발적 관련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이 유월절 날에 주 예수는 그의 두 제자를 시켜 그 날 밤에 그들만의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마가복음 14:12-17). 성전에서 행하신 그의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 그날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누가복음 21:37, 38), 기록된 바로는 이것이 그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 다섯째 날에 대한 기록에서 이 이상한 침묵은 아마도 그 유월절을 위한 예비 과정에 생긴 일들이 갖는 의미의 더 큰 중요성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그날을 유월절의 예비일 (요한복음 19:14)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을 보낸 날 다음 날에 제일로 삼고 있었다는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수 세기동안 엄청난 수의 양과 여러 동물들이 도살되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마지막으로 봉헌되는 제물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님의 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1:29). 그는 죄를 단번에 씻는 한번의 제물로 봉헌될 것이다 (히브리서 10:12). 그는십자가에서 흘린 자기 피로써 이 땅 위에 위대한 화평을 이루어 만물의 창조주에게 만물을 돌려드리고 화목하게 하셨다 (골로새서 1:16, 20).
성주간(聖週間)의 다섯째 날에 바로 그 마지막 유월절 희생양의 피를 흘려야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틀림없이 자신이 최초로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였던 창조주간의 다섯째 날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움직이는 모든 생물(히브리어 nephesh)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21). 이것은 그의 창조사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창조행위였다. 그 때 그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생명의 실체를 창조했던 것이다. (처음 것은 물리적 원소들이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살아있는 동물들한테는 그 육체의 “생명”이 그들의 피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속죄의 대가(atonement)로 지불하는 것이 그 피였다 (레위기 17:1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물(creature),” '영혼(soul),' 그리고 “생명(life),' 이 모든 단어들이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nephesh 에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날에 양의 순결한 피를 흘리는 일은 확실히 그 피의 ”생명“이 창조되었던 아득한 옛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이신 그는 우리들의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려는 참이었기 (고린도전서 5:7)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곧 승리와 생명 안에 삼켜질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54).
(6) 여섯째 날
여섯째 날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이고 목표였다 (창세기 1:26, 27). 그런데 이번의 여섯째 날에 인간의 모양대로 육화되어 오신 하나님이 보다 더 위대한 구속 사역을 끝내셨던 것이다.
엄청난 저주 아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받아 왔었다 (로마서 8:22). 그러나 이제 창조주 그 자신이 저주를 받은바 되어 (갈라디아서 3:13, 이사야 52:14), 마침내 그 창조주도 또한 죽어야만 했던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나, 이제는 그도 땅에서 들려야만 했다 (요한복음 3:14), 그리고 온 하늘은 침묵하였다 (마태복음 27:46). 비록 그는 둘째 날에 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요한복음 4:14)이었으나, 목말라 죽어갔다 (요한복음 19:28).
셋째 날에 그는 마른 땅을 창조하셨으나, 구원의 바위가 강타 당했기 때문에 (출애굽기 17:6), 지금은 “그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있다” (마태복음 27:51). 그는 또한 바로 그 셋째 날에 나무와 포도넝쿨로 이 땅을 덮었으나, 지금은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1)가 꺾이고 푸른 나무(누가복음 23:31)가 잘려나갔다. 그는 넷째 날에 해를 창조하셨으나, 지금은 그 해가 빛을 잃었다 (누가복음 23:44). 그리고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은 다 소진되었다. 다섯째 날에 그는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명이었다 (요한복음 11;25,; 14:6).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의 생명인 고귀한 피가 십자가 밑의 땅바닥에 쏟아지고 그는 “사망의 진토로” 끌어내려졌다 (시편 22:15). 여섯째 날에 그는 인간을 짓고 생명을 주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인자를 죽음에로 들어올렸다.
(7) 일곱째 날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사도행전 2:23) 되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세기 2:2). 더욱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완벽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속사역 또한 그랬다! 이 일이 특별히 요한의 말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니시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28, 30). (강조된 단어들은 모두가 그리스어로는 동일한 어원이다). 예수께서는 하셔야했던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성경의 선지자의 마지막 말씀을 이루셨다. 그 다음에야, 오직 그런 연후에 가서야, 구속의 사역이 완성됐으며, 화목의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음을 알고 그는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 라고 위대한 최후 승리의 외침을 외칠 수 있었다.
창조의 기록은 창조의 전체 사역이 그리고 만물의 창조가 이루어졌음 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3). 이와 같은 태도로 요한의 기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업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루어진 창조의 사역이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것과 같이, 이루어진 우리의 구속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사역은 “아주 크며 (큰 구원)” (히브리서 2:3), “영원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5:9). 그래서 그 소망은 “좋은”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
끝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일곱째 날에는 쉬시었다. 그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서 잠이 드셨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신속했었다. 그리고 장사준비도 또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누가복음 23:54-56). 그것은 그의 시신이 안식일 전에 매장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조의 사역을 이룬 후 안식에 들어갔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가 다시 한번 더 안식하고 있었다.
장사한지 삼일 만에 (그 날은 새 주간의 첫 날이었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6:21 et al). 그의 시신은 안식일 온 종일과 그 전날 일부와 다음날 내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관용구의 용도에 따르면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이다 (마태복음 12:40).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매어 놓지 못했다. 그는 죽음에서 깨어나서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신다. (요한계시록 1:8).
*헨리 모리스 박사는 ICR의 창시자이며 명예회장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34.htm
출처 - ICR, Impact No. 34,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