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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창조와 십자가 : 유신진화론자들의 죽음에 대한 왜곡

미디어위원회
2017-08-22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창조와 십자가 

: 유신진화론자들의 죽음에 대한 왜곡 

(What Is the Scriptural Understanding of Death? Creation and the Cross)

Andy Mcintosh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견해(유신진화론)는 점차 우리 복음주의 교회내로 스며들고 있다. AiG의 연사 중 테리 몬테슨(Terry Mortenson) 박사와 나다니엘 진슨(Nathaniel Jeanson) 박사는 최근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신학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15년 전에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같은 논문들이 올해에는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아담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일부 논문들이 여전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심각하다.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 스토트(John Stott) 조차도 하나님이 유인원과 같은 생물체를 사용하셔서, 그중 하나를 택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적 존재(아담)가 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펄젼(Spurgeon)은 당시 ‘내리막길 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특히 창세기의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창세기가 왜 신학적으로 중요한가?를 물었는데, 창세기는 죽음(death)이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지,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내용에서 우리는 죽음이 분리(separation)를 포함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죽었다.

창조에 대한 타락과 저주의 영향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사람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었다. 이전까지 사람은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죽음(사망)에 대한 기원이 확실히 영적이란 것은 로마서 6:23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히브리서 2:14절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것이다(dying, thou shalt die)”를 의미한다. 창세기 저자의 관점에서 창세기 2:17절은 두 가지 사망을 가리키고 있다.(이것은 나중에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분명해진다.) 히브리어 단어의 반복 사용은 종종 강조를 하기위해서 사용된다.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에 창세기 3: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의 끔찍한 사건을 읽을 때,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보게 되는데, 바로 분리됨(separation)이다. 첫째로 영적 사망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에 죄 이전에 그들은 그분과 완전한 교통을 누렸다. (일부 사람들은 창세기 3: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담과 동행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계셨지만, 9절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확장하여 로마서 5:18절을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은 시들어버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으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와와 함께 숨으려고 애쓸 때에, 그는 이미 영적인 분리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그리고 약 9백년 후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겪게 된다.(아담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사이에 얼마의 기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타락의 즉각적인 결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즉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다룰 때, 중요한 점이 된다. 그들의 말대로 저주로 인해 아담은 육체적으로 바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유신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따라서 저주로부터 온 죽음은 오직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2:17절에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은 하나님과 즉각적인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영적 사망이 타락의 유일한 결과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는 유신진화론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세 부분을 살펴볼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가죽옷을 입히신 것의 의미

안타까움 속에 나무 잎으로 가린 것을 하나님께서 동물 가죽으로 대체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염소/양의 종류로 동물(아마도 두 마리)을 죽였을 것이다. 죽음의 첫 번째 기록은 하나님 자신이 수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다가올 구속 사역은 이미 에덴동산을 가로 질러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한 죄에 대한 저주는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땅에도 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3:17 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지옥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분리)으로 곧 바로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피의 희생제물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후,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것이 아니라, 아벨의 희생제물을 받으셨던 중요한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뱀을 저주하시지만, 이 시점에서 저주는 아담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타락과 인류에게 온 두 죽음

두 가지 죽음(영적 및 육체적)의 신학적 중요성은 성경 말미에 있는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이처럼 둘째 사망은 또한 요한계시록 20:6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또한 요한계시록 2:11절도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돌이킬 수 없는 형벌, 둘째 사망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8). 다음 섹션에서 보겠지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아버지의 진노를 경험하며, 참혹한 둘째 사망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셨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21)

성경은 끝부분에서 두 차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듯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결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12 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영적 재앙 이전까지, 육체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1~22절에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다시 요약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육체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과 로마서 5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육체의 죽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치루셨다.

죄에 대한 형벌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는, 이중 처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을 통해서, 이 두 사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처벌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총 6시간 동안 달려계셨다. 그는 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마가복음 15:25) 제 육시에서 제 구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임했다.(마태복음 27:45; 누가복음 23:44). 대부분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시고, 성경에 기록된 처음 세 번의 발언을 앞의 3시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1 참조) 이제 그리스도는 제 구시에(막 15:34) 마지막으로 네 번의 말씀을 차례로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정말 강력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22:1절을 인용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던 ”아버지”와 다르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리가 있고, 분리되어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지옥이 되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 번째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경험을 하신 것이다. 아마도 십자가의 신학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술은 이 두 구절에 있는 것 같다 :

”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린도후서 5:19)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그런 다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후에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 단어는 ”끝내다/마치다 (Complete/Done)” (의무가 이행됐거나 끝이 남)을 의미하는 법률적 용어이다.  지불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죄의 유일한 대가가 영적 사망뿐이라면, 왜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 하나님이 먼저 살고 있던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 이유가 없으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육체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9:30절에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리스어: ”그가 그의 영을 넘겨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제는 능동태이며, 수동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셨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요한복음 10:17~18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창조세계에 생명을 주신 분이 이제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부활을 모두 통제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모두가 관여하신 것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행전 17:31). 로마서 8:11 절에 따르면, 성령님께서도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림 1.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죽으셨는가? 그것은 참으로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영광의 부활은 결국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받게 될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는 육신 안에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영광스럽고 부활한 새 몸으로 말이다. 이 부패하고 썩을 몸이 변하여, 불멸하고 썩지 않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15:53).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높이와 크기와 깊이를 이해할 때, 아담의 죄 이전에 죽음을 허용하고,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사람)을 만드셨다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과 하나님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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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But my acceptance of Adam and Eve as historical is not incompatible with my belief that several forms of pre-Adamic 'hominid” may have existed for thousands of years previously. These hominids began to advance culturally. They made their cave drawings and buried their dead. It is conceivable that God created Adam out of one of them. You may call themHomo erectus. I think you may even call some of themHomo sapiens, for these are arbitrary scientific names. But Adam was the firstHomo divinus, if I may coin a phrase, the first man to whom may be given the biblical designation ‘made in the image of God.’” John R. W. Stott, Understanding the Bible: Special Edition(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43.
2. Some have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 saying of Jesus recorded inLuke 23:34might have been said toward the end of His crucifixion (because ofJohn 19:28following immediately after the record ofJohn 19:27, 'Woman, behold thy son.”). In this interpretation, Jesus would have asked the Father to forgive them just before He says, 'It is finished.” This author would not subscribe to that view because of the statement inLuke 24:34band35which describes the soldiers casting lots over Jesus’ garments and people looking at Him with some speaking to Jesus on the Cross—all suggestive of the initial three hours of light. So the cry, 'Father, forgive them,” inLuke 23:34aseems to be just prior to this (see alsoJohn 19:23–24). Whichever order one takes, the argument concerning Christ’s atonement and taking both aspects of death as the penalty for our sin does not rest on the suggested order of Figure 1.


번역 - 류지열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scriptural-understanding-of-death/ 

출처 - AiG, 2016.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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