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김홍석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I. 서론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근저에는 크게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11장에 나타나는 내용이 신화적이며 근동의 설화들과 유사하므로, 이 내용은 고대 근동의 설화들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창세기 기록이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성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II.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의 설화들
먼저 창세기 1~11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유사한 설화들에 대하여 살펴보자.[1] 창세기 1~9장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수메르 홍수설화에서 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의 윤곽을 서술하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 6~9장의 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들은 고대 근동에서 그 시대 지식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나 근동의 설화들이나 모두 다음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한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이 존재하며, 그들은 인격적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인간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보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사람이 진흙의 혼합과 죽은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애굽의 문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사이를 분리하는 행위로서의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고대 근동의 신학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주제의 유사성을 넘어 이면 즉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창세기”는 존재에 관하여 시종 긍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본다. 사물들은 점점 더 좋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던 당시에 완전한 것이었으나,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생물들 외에는 모두 물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점점 더 나빠졌다. 이는 수메르 설화의 취지와 다르다.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인본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바벨론사람들과 가나안사람들은 신들이 여자들과 성적인 결합을 맺는 것은 풍요의 의식으로서 제의적 매음과 결혼 의식을 행하여 토양의 비옥함과 국가번영을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창세기 6:1~8은 그런 관습들을 절대적인 공포로 여긴다. 오히려 그런 관습들은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물 심판을 초래한 행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홍수가 사람들의 소란과 땅의 과잉 인구에 화가 난 신들에 의하여 보내졌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노아는 우연히도 홍수를 지지하지 않는 신을 경배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홍수가 시작되자 그것은 신들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들은 홍수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신인 엔릴이 희생제사에 나타나서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음에 놀란다. 홍수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인구증가를 억제할 대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는 신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어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에 비하여 창세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특히 해, 달, 별들은 고대 근동의 신관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들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였다. 반면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창세기 1~11장은 다신론에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정의, 전능하심, 사람을 돌보심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사람의 지혜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창세기는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족장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근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기사는 우리가 창세기 1~11장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좀 더 부연하면, 창세기 3~11장은 사람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창세기 1~2장은 세계의 원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족장들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구속이라는 목표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고대 근동의 설화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창세로부터 홍수까지의 주제와 일부 피상적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창세기 자체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
다음으로, 창세기 기록들 가운데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된다는 이유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제시해온 주장들을 분석하여보자. 다만, 시간에 대한 문제는 지면 관계상, 그리고 주제 자체가 다른 여러 주제에 비하여 살펴볼 내용이 너무 많으므로 차후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2]
첫째, 창세기 1:14~18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구절들의 이해에 있어서 궁창이 오늘날의 대기권이라면, 궁창에는 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창세기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역사성을 가진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3] 그저 막연한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궁창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들도 하늘의 궁창에 와 닿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와 같은 어린 시절이 없이 갑자기 성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이 우주의 천체들도 성숙하고 그 빛들이 넷째 날에 이미 지구의 땅을 비추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창세기 1장에서 식물과 사람의 창조순서가 창세기 2장에서는 바뀌어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통해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문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2:5에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이 투여되어 경작되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농작물의 부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 경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선악과사건 이전으로, 땅에 식물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반면 농작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왜 이렇게 농사를 힘들게 지어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선악과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창세기 2장의 순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선악과 사건 이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식물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다. 식물들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히. ‘네페쉬 하야’)이 아니라, 그저 환경과 음식의 역할을 하는 배경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경우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사건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것과 식물을 먹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상은 사람이었다.
넷째, 창세기 3:14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뱀은 흙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런 근거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9:3에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아방주에 태워졌던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방주에서 육식하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그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노아홍수 이전까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뱀의 경우 노아홍수 이전까지 흙을 먹고 살다가, 노아홍수 이후에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면서 사람과 동물들의 육식이 허용되고, 이때 뱀도 먹는 것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년왕국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사야 65:25을 주목하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구절은 동물들의 육식이 사라지고,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을 당시까지 성경에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골격가설적인 서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창세기의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후에 800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이후 807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이름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후에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는 창세기 4:3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서술을 통하여, 그들이 장성했으며,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창 4:25). 이러한 기록과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담과 셋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도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이 태어난 것이 아담 130세였으니까 가인의 살인사건은 아담 129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가인이 장남이라면 성년으로 창조된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나이가 1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3살에 아벨을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벨이 죽임을 당할 당시 나이는 126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벨에게는 이미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벨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살인자를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와 기적과 하늘의 일들과 땅의 일들의 연대성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바이다. 창세기 6:2의 하나님의 아들들(히. ‘베네 하엘로힘’)은 욥기 1:6과 2:1, 38:7에 동일한 단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4] 유다서 6~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처럼 동일한 행동으로 음란하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벧후 2:2~7의 내용도 호색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호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대등하게 불경건의 예시로 들고 있다. 천사가 육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18:1~8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대접한 젖과 우유와 송아지요리를 먹었음이나, 이에 유사한 모습이 창세기 19:3-15에서도 언급됨으로부터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32:24-30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네피림(창 6:4)은 노아홍수 때 모두 사라졌어야 함에도, 민수기 13:33에서 네피림의 후손이 등장하기 때문에[5], 창세기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거인, 장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네필’이라는 일반명사의 남성복수형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33의 네피림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창세기 7:2~3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실어서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7:15에서는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창세기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일곱 수 암’, 부정한 짐승은 ‘둘 수 암’, 공중의 새는 ‘일곱 일곱 수 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7쌍씩, 1쌍씩, 7쌍씩 방주에 태워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7:14~15절은 노아가 그들을 선별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로 보내셨고, 노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 7:16에서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물들은 노아에 의해 선별되어 실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아는 심지어 다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아는 모든 동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방주로 들어감과 그것들이 암수였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7:15은 어떤 동물들이 모두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방주에 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7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1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방주에 타는 모습은 모두 둘씩 암수가 짝을 지어서 탔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내에서 방주에 탄 동물들의 수에 대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다.
IV. 인류 지성과의 마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성을 가진 기록으로 보지 않고, 교훈을 담고 있다는 골격가설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물들이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피조된 개인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유인원에서 발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개발시키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의 원인(ape-man)이 바로 아담부터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른 생물진화의 순서나 생물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창세기 1장의 하루의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의 기록이 진화론과 다르므로, 창세기를 골격가설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창조(창 2:7), 하와의 창조(창 2:22),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창1:26~27; 5:1~2), 또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선악과사건, 원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 등 창조에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진화가설(evolutionary theory)이라는 이 시대의 하나의 주장이다. 생물들이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 화석들의 증거를 비롯하여, 환경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미 유전자 속에 그 적응능력이 존재하고 있다가 발현된 것이라는 내용과,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많은 증거들은 진화론을 반박한다. 창세기에는 17번의 ‘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기 종류대로”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시에 10번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7번은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기 종류대로” 방주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별된 기록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미주
1.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64-73
2. 김홍석, '창세기의 창조, 아담, 셈 톨레도트에 나타난 시간 연구”, 학위논문(2014)
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마오르’를 '광명체”로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개역성경은 "광명”으로 오히려 잘 번역되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영어역본들도 'lights'로 번역하고 있음.
4.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290-293 참조.
5.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처 - 창조 188호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김홍석
I. 서론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근저에는 크게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11장에 나타나는 내용이 신화적이며 근동의 설화들과 유사하므로, 이 내용은 고대 근동의 설화들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창세기 기록이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성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II.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의 설화들
먼저 창세기 1~11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유사한 설화들에 대하여 살펴보자.[1] 창세기 1~9장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수메르 홍수설화에서 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의 윤곽을 서술하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 6~9장의 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들은 고대 근동에서 그 시대 지식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나 근동의 설화들이나 모두 다음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한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이 존재하며, 그들은 인격적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인간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보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사람이 진흙의 혼합과 죽은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애굽의 문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사이를 분리하는 행위로서의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고대 근동의 신학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주제의 유사성을 넘어 이면 즉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창세기”는 존재에 관하여 시종 긍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본다. 사물들은 점점 더 좋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던 당시에 완전한 것이었으나,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생물들 외에는 모두 물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점점 더 나빠졌다. 이는 수메르 설화의 취지와 다르다.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인본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바벨론사람들과 가나안사람들은 신들이 여자들과 성적인 결합을 맺는 것은 풍요의 의식으로서 제의적 매음과 결혼 의식을 행하여 토양의 비옥함과 국가번영을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창세기 6:1~8은 그런 관습들을 절대적인 공포로 여긴다. 오히려 그런 관습들은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물 심판을 초래한 행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홍수가 사람들의 소란과 땅의 과잉 인구에 화가 난 신들에 의하여 보내졌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노아는 우연히도 홍수를 지지하지 않는 신을 경배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홍수가 시작되자 그것은 신들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들은 홍수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신인 엔릴이 희생제사에 나타나서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음에 놀란다. 홍수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인구증가를 억제할 대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는 신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어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에 비하여 창세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특히 해, 달, 별들은 고대 근동의 신관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들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였다. 반면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창세기 1~11장은 다신론에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정의, 전능하심, 사람을 돌보심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사람의 지혜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창세기는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족장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근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기사는 우리가 창세기 1~11장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좀 더 부연하면, 창세기 3~11장은 사람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창세기 1~2장은 세계의 원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족장들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구속이라는 목표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고대 근동의 설화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창세로부터 홍수까지의 주제와 일부 피상적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창세기 자체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
다음으로, 창세기 기록들 가운데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된다는 이유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제시해온 주장들을 분석하여보자. 다만, 시간에 대한 문제는 지면 관계상, 그리고 주제 자체가 다른 여러 주제에 비하여 살펴볼 내용이 너무 많으므로 차후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2]
첫째, 창세기 1:14~18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구절들의 이해에 있어서 궁창이 오늘날의 대기권이라면, 궁창에는 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창세기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역사성을 가진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3] 그저 막연한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궁창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들도 하늘의 궁창에 와 닿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와 같은 어린 시절이 없이 갑자기 성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이 우주의 천체들도 성숙하고 그 빛들이 넷째 날에 이미 지구의 땅을 비추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창세기 1장에서 식물과 사람의 창조순서가 창세기 2장에서는 바뀌어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통해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문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2:5에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이 투여되어 경작되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농작물의 부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 경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선악과사건 이전으로, 땅에 식물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반면 농작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왜 이렇게 농사를 힘들게 지어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선악과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창세기 2장의 순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선악과 사건 이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식물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다. 식물들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히. ‘네페쉬 하야’)이 아니라, 그저 환경과 음식의 역할을 하는 배경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경우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사건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것과 식물을 먹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상은 사람이었다.
넷째, 창세기 3:14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뱀은 흙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런 근거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9:3에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아방주에 태워졌던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방주에서 육식하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그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노아홍수 이전까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뱀의 경우 노아홍수 이전까지 흙을 먹고 살다가, 노아홍수 이후에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면서 사람과 동물들의 육식이 허용되고, 이때 뱀도 먹는 것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년왕국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사야 65:25을 주목하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구절은 동물들의 육식이 사라지고,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을 당시까지 성경에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골격가설적인 서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창세기의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후에 800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이후 807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이름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후에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는 창세기 4:3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서술을 통하여, 그들이 장성했으며,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창 4:25). 이러한 기록과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담과 셋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도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이 태어난 것이 아담 130세였으니까 가인의 살인사건은 아담 129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가인이 장남이라면 성년으로 창조된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나이가 1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3살에 아벨을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벨이 죽임을 당할 당시 나이는 126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벨에게는 이미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벨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살인자를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와 기적과 하늘의 일들과 땅의 일들의 연대성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바이다. 창세기 6:2의 하나님의 아들들(히. ‘베네 하엘로힘’)은 욥기 1:6과 2:1, 38:7에 동일한 단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4] 유다서 6~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처럼 동일한 행동으로 음란하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벧후 2:2~7의 내용도 호색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호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대등하게 불경건의 예시로 들고 있다. 천사가 육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18:1~8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대접한 젖과 우유와 송아지요리를 먹었음이나, 이에 유사한 모습이 창세기 19:3-15에서도 언급됨으로부터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32:24-30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네피림(창 6:4)은 노아홍수 때 모두 사라졌어야 함에도, 민수기 13:33에서 네피림의 후손이 등장하기 때문에[5], 창세기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거인, 장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네필’이라는 일반명사의 남성복수형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33의 네피림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창세기 7:2~3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실어서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7:15에서는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창세기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일곱 수 암’, 부정한 짐승은 ‘둘 수 암’, 공중의 새는 ‘일곱 일곱 수 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7쌍씩, 1쌍씩, 7쌍씩 방주에 태워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7:14~15절은 노아가 그들을 선별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로 보내셨고, 노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 7:16에서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물들은 노아에 의해 선별되어 실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아는 심지어 다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아는 모든 동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방주로 들어감과 그것들이 암수였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7:15은 어떤 동물들이 모두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방주에 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7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1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방주에 타는 모습은 모두 둘씩 암수가 짝을 지어서 탔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내에서 방주에 탄 동물들의 수에 대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다.
IV. 인류 지성과의 마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성을 가진 기록으로 보지 않고, 교훈을 담고 있다는 골격가설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물들이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피조된 개인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유인원에서 발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개발시키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의 원인(ape-man)이 바로 아담부터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른 생물진화의 순서나 생물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창세기 1장의 하루의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의 기록이 진화론과 다르므로, 창세기를 골격가설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창조(창 2:7), 하와의 창조(창 2:22),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창1:26~27; 5:1~2), 또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선악과사건, 원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 등 창조에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진화가설(evolutionary theory)이라는 이 시대의 하나의 주장이다. 생물들이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 화석들의 증거를 비롯하여, 환경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미 유전자 속에 그 적응능력이 존재하고 있다가 발현된 것이라는 내용과,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많은 증거들은 진화론을 반박한다. 창세기에는 17번의 ‘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기 종류대로”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시에 10번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7번은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기 종류대로” 방주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별된 기록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미주
1.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64-73
2. 김홍석, '창세기의 창조, 아담, 셈 톨레도트에 나타난 시간 연구”, 학위논문(2014)
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마오르’를 '광명체”로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개역성경은 "광명”으로 오히려 잘 번역되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영어역본들도 'lights'로 번역하고 있음.
4.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290-293 참조.
5.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처 - 창조 1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