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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창세기와 21세기의 대화

미디어위원회
2017-10-09

창세기와 21세기의 대화

임용철 


창세기와 현재의 대화, 가능할까?

창세기[1]가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의 문제는 창조과학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핵심 가치 중 하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학회존립의 문제를 넘어서, 기독교의 존립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창립 이래 지금까지 창세기의 역사성을 수호하고 전파하는데 본 학회는 최선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류 신학계와 교계에서는 이 사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오히려 유신진화론을 필두로 골격가설, 날-시대 이론, 다중격변론 등 창세기의 기록을 왜곡하는 이론들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잘못된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함으로, 필자는 창조과학회의 일원으로써, 이런 분위기를 전환하는데 미력하나마 보탬이 되고자 펜을 들게 되었다.

사실 창세기의 기록이 기독교 내에서조차 역사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분명 실제 했던 인류의 역사이며, 그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접근방식이 보다 효과적일까에 대해 고민하여 보았다. 그 결과 다음 두 가지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일반 역사가들이 어떻게 역사를 정의하는 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면 인류에게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 가운데, 어떤 사건이 역사로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또한 역사와 신화를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과정은 역사가들이 내린 역사의 정의에 비추어, 지금까지 창조과학회에서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근거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창세기의 역사성에 대해 피력해온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아니면 새로운 접근방식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먼저 일반 역사가들이 역사의 정의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가들 사이에서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는 『역사란 무엇인가』[2]를 저술한 E. H. Carr에 따르면, 이 정의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Carr(카)는 그의 책에서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라는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에 의한 주관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Carr에 의하면, 이 두 이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인 ‘해석’과 그의 해석에 따라 선택된 ‘역사적 사실’의 필연적인 상호작용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의 책 1장 말미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란 역사가(historian)와 그의 사실들(his 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3]

여기서 Carr가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들’이라 하지 않고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주체가 바로 역사가이며, 특정 사건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개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역사란 단순한 사실들의 기록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역사에 대한 Carr의 주장을 ‘성경’에 적용해 보자. 성경은 진정한 역사가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탄생부터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적 사건(사실)들 가운데, 오직 성경의 기록 목적에 부합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주관적(절대적) 해석에 의해 선택되어 기록된 것이다.[4]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기록자이신 동시에, 인류역사에 끊임없이 개입(Carr의 말에 따르면 상호작용)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관자이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세기가 역사로 인식되기 위한 첫걸음은 그것을 기록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창조과학회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이기도 하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다음으로,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Croce(크로체, Benedetto Croce) 역시 '모든 역사는 현대사(혹은 당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했다.[5[ 이것이 말하는 의미에 대해 Carr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자.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6]

위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역사는 마치 ‘현재’와 ‘과거’라고 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로 비유할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몰랐던 점을 배우게 되며, 대화가 잘 통하고 그 내용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기능과 두 시대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의 기능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Carr가 제시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간단명료한 정의를 창세기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입해 보자. 그러면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창세기를 신화나 설화로 보는 견해는, 마치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같이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주된 이유는 현재의 주류과학인 진화론적 해석과 주장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한다거나, 혹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창세기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반면, 유신진화론 및 오랜 연대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현재와 창세기 사이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창세기를 신화로 취급하는 입장보다 그나마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입장 역시 Carr의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를 역사로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의 주장이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진화론적 해석을 가미한 현대 과학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사실성’에 강조를 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역사란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이론이 창세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유신진화론이 문제를 야기시키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신진화론은 현재의 진화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려고만 하는 일방적인 시도를 한다. 결국, 창세기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므로, 쌍방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도 역시 창세기를 역사로 보는 입장이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없다.

 

창세기가 역사인 이유 : 창조과학회의 입장

이제 점검할 사항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해온 창조과학회의 접근방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그 접근방식을 앞서 소개한 역사에 대한 정의와 비교하는 것이다. 필자는 본 학회가 지금까지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 내용을 살펴보고 종합한 결과, 그 내용들을 크게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성경 안에서 찾는 것이었다. 성경은 기록자와 기록된 시대를 초월하여 놀라우리만큼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는 특징을 지닌다. 창세기의 기록은 다른 책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거나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더욱이 창세기의 사건들이 실제 일어난 것임을 강력히 지지하는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가 역사임을 주장하는 두 번째 범주는, 다양한 학문적 자료들을 통해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드러내고, 현재까지 알려진 과학적 발견들이 오히려 창세기에 기록된 그대로의 창조를 지지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정리하자면, 창조과학회는 ‘성경 그 자체와 과학에 입혀진 진화론적 해석의 제거’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창세기가 역사라는 점을 강변해 왔다.[7]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 역시 창세기가 역사임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앞에서 역사란 ‘사실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다’는 Carr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접근방식 또한 창세기가 온전한 역사의 지위를 얻도록 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창세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접근방식을 계속 유지한다면[8] 앞에서 지적한 유신진화론이 갖는 것과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9]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여러 이론들의 주장을 압도하거나 허물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진정한 역사의 지위를 회복하려면, 이 기록이 사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이것을 기록한 기록자의 해석과 그 의도를 파악하여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두 시대 모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진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창세기를 통해 대화하려는 누군가를 찾고 계시며,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창세기는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하는 그 사람에게 역사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로, 이 문제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섣불리 시도하기 어렵고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창세기를 역사라고 믿는 한 성도로서 직무유기라는 죄책감에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해 본다.


창세기와 현재 사이의 대화-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우다.

서로 알지 못하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마도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의 관심사가 같거나 유사하다면, 대화가 더욱 깊어지고 둘의 관계도 깊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와 현재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먼저 창세기(여기서는 1장)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오래된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에는 시공간 속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형성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장에 기록된 내용 중에는 ‘하나님’이 32차례, 다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7차례 등장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창세기 1장을 기록한 역사가의 주요 관심사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며 그 모든 과정과 결과물이 ‘좋았다(Good)’라는 것이다. 이 두 단어 중에 필자가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단어는 하나님에 비해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좋았다(Good)’[10]이다. 먼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Good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날 지으신 결과물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결과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날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창조하실 필요 없이 단숨에 모든 것을 만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Good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하루’라는 정해진 시간과, 그 시간 안에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 모두를 포함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11] 이렇게 피조물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하루라는 시간,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결과물이 모두 합쳐진 것을 표현한 단어가 Good이라고 할 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시공간 속에서 창조되지 않아 어떤 것이 없는 상태의 ‘하루’[12] 역시 Good이라는 점이다. 사실 창조의 6일 과정 대부분은 피조물 중 무언가가 빠져있는 부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루라는 시간과 그 안에 이루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창조의 6일 동안 하루하루 지나면서 전날의 부재 상태가 하나씩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전날보다 ‘더 좋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Good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 1장에 등장하고 있는 Good의 정의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Good의 정의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필자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Good에 대해 지금까지의 내용과 이 장의 또 다른 핵심어인 ‘하나님’으로부터, Good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보았다. Good이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내에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물’이다.[13]

개인적으로, 창세기 1장의 내용을 근거로 내린 Good에 대한 정의가 창세기와 현재 대화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하루를 살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목적하신 바가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가 실현되는 삶을 말한다. 이 하루가 21세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Good의 정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던 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갖는 의미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묵상하여 보길 권한다.


현재에 비추어 창세기를 배우다.

앞서 창세기 1장에 비추어 현재를 바라보고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제 현재를 통해 창세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대화의 시작은 역시 21세기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찾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 단어에 대해 힌트를 드리면, Good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듯이, 세상 나라의 시작이 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시점부터 지금까지 세상 나라14)를 대표해온 단어로, 세상 나라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Good의 정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악(Evil)’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운 껍질로 갈아입듯, Evil의 사전적 의미와 발음이 완전히 바뀐 그런 단어이다. 아마 이 단어가 제시되는 순간,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의아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단어의 정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좋은(Better)’이다. 이제 왜 Better가 현재의 세상(나라)을 대표하는 단어이며, Evil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Better를 통해 어떻게 창세기를 더 깊이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로 Better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존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Better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Better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자신, 그리고 가족의 삶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자녀들은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일 것이다. 부모세대는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조직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늘 Better가 되었다고 내일 Better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 대부분은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경쟁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Better는 현재를 대표하며, 생존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동시에, 겉보기에는 ‘더 좋은’의 뜻이 있지만, 그 본질은 인간의 삶을 피폐함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Evil이다.

이제 현시대를 대표하는 Better라는 단어를 통해 창세기의 한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후(Good의 상태가 깨어진 후), 그들에게 일어난 여러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처음 나타난 변화는 자신들이 벌거벗었으며, 그 상태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7절).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8절, 10절)이 엄습했으며, 서로에 대한 원망과 책임의 전가(12절, 13절)로 관계가 깨어졌고, 해산의 고통(16절)과 수고함(17절), 그리고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쫓겨남(23절)과 죽음(19절)이었다. 이러한 변화들과 현재 Better가 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으로 생긴 개인과 사회 문제들을 한번 떠올려 보자. 놀랄 만큼 흡사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이 변화의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존재할까? 솔직히 말하면, 이 변화 중 절반 이상이 필자의 삶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의 결과와 21세기 경쟁사회에서 Better를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오늘날 Better의 정체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Evil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창세기의 Evil이 곧 현시대의 Better인 것이다. 이 관점으로 창세기 3장을 재해석하면,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을 경쟁상대로 본 것이며, 그 열매를 먹는 순간, 그들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경쟁사회에서 나타나는 불안과 고통 등, 앞에서 나열한 문제점들이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끝으로, Better에 대한 정의를 내려 봄으로써 지금까지의 주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단어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Good의 정의에서 ‘하나님’ 대신 ‘내’가 들어가면 된다. Better란 ‘내가 목적한 바가[15] 내가 정한 시간 내에 나의 열심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Better의 또 다른 표현은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다. 현재를 대표하는 단어 Better를 통해 창세기 3장의 범죄 사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Good과 Better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역사를 공부한 전공자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아닌, 평신도로 글을 쓰다 보니, 역사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인용에 의존해 창세기를 역사로 바라보고자 하는 필자의 시도에 여러 실수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Carr가 말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는 이런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는 철퇴를 내릴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이 글을 써 내려 가는 내내 필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고 온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필자 스스로가 21세기를 사는 범죄한 아담임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성도의 목적이 경쟁에서 이겨 내가 보기에 좋은 하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그 하루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루를 사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주
1. 여기서의 창세기는 주로 논란이 되는 1장부터 11장까지를 지칭함.
2.『역사란 무엇인가』 Edward Hallett Carr, 까치.
3. 같은 책, 46쪽.
4. 참고로 E. H. Carr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물론 초월자의 존재나 그의 역사개입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은 책, 71쪽과 105쪽 참고)
5. 같은 책, 34쪽.
6. 같은 책, 96쪽.
7. 이 주장은 학회 전체의 입장이 아닌, 필자 개인의 소견임을 독자 여러분께 밝힌다.
8. 기존의 시도에 오류가 있다거나 잘못이 있어서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밝혀둔다.
9. 창세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거나 두 시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기 어렵다는 점.
10. 글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 ‘좋았다’라는 표현 보다는 ‘Good’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Good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후 언급될 ‘Better’와 ‘Evil’ 등의 단어도 같은 이유에서 영문으로 표기하였다.
11. 이미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2. 예를 들어, 첫째 날에는 동물이나 식물, 해와 달과 별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
13. 이 내용 역시 학계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면, 필자의 무지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14. 여기서의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분의 통치 대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5. 예를 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출처 - 창조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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