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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7-10-04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칼뱅은 말했다. 

(Calvin said : Genesis means what it says)

Jonathan Sarfati 


      자칭 복음주의적이라는 어떤 크리스천들은 창조론자들이 창세기를 순수하게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literalistic view)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론(creationism)은 20세기의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보다 진리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창세기를 쓰여진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는 모세(출 20:8-11), 바울(롬 5:12, 고전 15:21-22,45, 딤전 2:13-14), 베드로(벧후 3:3-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마 19:3-6, 막 10:6-9, 눅 17:26-27)의 견해였다. 그것은 또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실한 방어자였던 바실 대주교(Basil the Great)를 포함하여 수많은 교부(Church Fathers)들의 견해이기도 했다. (Genesis means what it says: Basil (AD329–379)을 보라) [1].


성경의 권위로 되돌아 간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도 창세기에 대한 쓰여진 그대로의 문자적 견해를 수용했다. 이러한 견해는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가지고 있었다. (What was Martin Luther’s stand on Creation/Evolution?을 보라).[2]. (아래 글 참조).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람은 프랑스의 법률가요 신학자였던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이었다. 그는 6,000여명의 개신교도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칼뱅(칼빈)은 1559년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제네바 대학(University of Geneva)을 설립했고, 많은 외국의 학자들을 영입했다.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59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선포했다. 그는 또한 창세기를 포함하여 성경 각 권들의 노련한 주석가이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은 많은 신앙고백, 교리문답서, 설교자들, 현대 기독교부흥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청교도단(Pilgrim Fathers)에 의해 미국으로 이전되었다.[3].

칼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고 있었다 :

지구의 나이는 젊다 :

”그들은 우주가 창조된 지 불과 5,000년이 조금 더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4].

하나님은 6일 간의 연속적인 정상적인 날(days, 24시간)들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 

”여기에서 우주가 한 순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분명하게 논박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6일(six days) 동안에 완벽하게 이루셨던 일을 모세가 단지 명령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6일로 배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약적인 억지 이론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의 능력으로 수용케 할 목적으로 그가 친히 6일이라는 기간을 취했다고 결론을 내리자”.[5]. ”나는 이 세계가 형성되는 데에 6일이 걸렸다고 위에서 말했다. 한 순간이 천 년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묵상하는 데에 우리를 참여시키셨는지도 모른다”[6].

▶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인 첫째 날부터 밤과 낮의 주기가 이루어졌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창세기 1:3절 말씀의 주석에서) :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의 바로 그 명령에 의해, 해와 달이 없이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빛을 그의 장중에 가지고 계셨다. 더욱이 문맥으로 보아 빛이 그렇게 창조되어 어둠과 교대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밤과 낮의 순서가 계속 교대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7].

▶ 해와 달과 별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고 (지구가 창조된 후), 지구에 빛의 분배자로서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는 창세기 1:15절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은 먼저 빛을 만드셨다. 그러나 지금의 태양이 낮 동안 빛의 분배자가 되고, 달과 별들은 밤하늘을 비추어야한다는 새로운 자연 질서를 만드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를 수행해야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그것들에게 그런 임무를 할당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전에 창조하셨던 빛과 교대하여 온 지구에 빛을 발하는 특정한 도구(태양)를 임명하셨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일한 차이는 이것이다. 즉 빛이 먼저 비추었으나, 지금은 육안으로 보이는 물체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8]. (또한 아래 관련자료 링크 2번의 글, ”태양이 4일째까지 창조되지 않았다면,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 그대로의 하루인가?”를 보라).

최초의 창조는 어떠한 악도 없었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창세기 1:31절의 주석에서) : 

”각각의 창조 날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칭찬(”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만 주어졌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가 모든 부분에서 완성되고, 그리고 마치 최후의 손질처럼 마무리를 다 마치시고 난 후에, 하나님은 완벽하게 좋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조화성은 거기다가 아무것도 더 추가할 수 없는 최상의 완성품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9].

지구상의 고통(suffering)은 죄의 결과이다. (창세기 3:19절에 대한 주석에서) :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나쁜 것들이 생겨났을 지라도, 그것들은 땅의 자연적 열매들이 아니라, 죄로부터 기원한 타락의 열매들임을 알 수 있다.”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은 죄의 결과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에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영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 그래서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그의 육체는 영혼과 분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는 바울의 선포에서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죽음은 죄로 인해 부과되었다···· 진실로 첫 번째 사람(아담)이 바르게 서 있었더라면, 더 나은 삶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분리, 쇠퇴, 어떤 종류의 파괴, 격렬한 변화 등은 없었을 것이다.”[10].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5장의 주석에서) :

”·····(모세는) 우리의 최초의 조상(아담과 하와)과 여타 인간들을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아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11].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규모였다. (대홍수와 방주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 중에 한 작은 부분으로 언급하면서) :

”그리고 그 강수는 40일간 지속되었다. 모세는 온 세계가 다 물에 잠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사실을 자세히 강조하였다.”[12].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창세기는 쓰여진 그대로 명백하고 평이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대한 외부적 사상과 이야기들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점진론적 창조론자’인 패틀 펀(Pattle Pun)이 솔직하게 시인함으로써 보여주었다 :

”창세기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이해는 과학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성경해석학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6 일(24시간으로 된 하루)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은 제 6일째에 창조되었으며, 죽음과 혼돈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화석들은(창조론자들은 ‘대부분’의 화석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 수세기 동안 지속된 산발적인 격변들도 일부 화석들을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가족과 방주에 함께한 동물들만 살아남았던 격변적 대홍수의 결과였다는 것이 분명하다.”[13]. 

칼뱅 자신은 그런 모든 타협들에 반대했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 대학들은(심지어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드에 있는 칼뱅대학 같이 칼뱅의 이름을 딴 대학들을 포함하여) 반창조론, 유신진화론/오래된 연대 사상들의 온실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오류투성이의 추측과 추정을 신뢰하기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References
1. Batten, D., Genesis means what it says: Basil (AD 329–379), Creation 16(4):23, 1994.
2. Citing Martin Luther, in Jaroslav Pelikan, editor, ‘Luther’s Works,’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1:3,6, Concordia, St. Louis, MO, USA, 1958.
3. Packer, J.I., John Calvin and Reformed Europe; in: Great Lead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 Woodbridge, J.D., Moody Press, Chicago, IL, USA, pp. 206–215, 1988.
4.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925, ed. John T. McNeill, Westminster Press, Philadelphia, PA, USA, 1960.
5. Calvin, J., Genesis, 1554; Banner of Truth, Edinburgh, UK, 1984, p. 78.
6. Calvin, Genesis, p. 105.
7. Ref. 5, pp. 76–77.
8. Calvin, Genesis, p. 83.
9. Calvin, Genesis, p. 100.
10. Calvin, Genesis, p. 180.
11. Calvin, Genesis, p. 227.
12. Calvin, Genesis, p. 272.
13. Pun, P.P.T., Journal of the 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39:14, 1987; emphasis added.


창조와 진화에 대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견해는 무엇이었는가?

성경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창조를 믿고 있었고, 이 세계는 매우 젊음을 가르쳤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

”우리는 모세의 기록으로부터 이 세계는 6,0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루터는 모세가 보통의 문자 그대로의 언어로 창조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

”그(모세)는 꾸미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즉, 우리가 관례적으로 모세가 문자적 의미로 말했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그는 날(day)과 저녁(evening)이라는 단어를 비유나 은유 없이 사용했다. 즉, 이 세계와 모든 피조물들은 기록된 말씀 그대로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학생으로 남아있어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도록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Reference
Martin Luther in Jaroslav Peliken, editor, 'Luther's Works,' Lectures on Genesis Chapters 1-5, Vol. 1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8), pp. 3, 6.

 

*참조 :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736/

Is Genesis poetry / 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50/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2/i4/calvin.asp 

출처 - Creation 22(4):44–45, September 2000.

미디어위원회
2017-10-02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왔던 문제들

김홍석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I. 서론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창세기의 ‘역사성’이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근저에는 크게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첫 번째는 창세기 1~11장에 나타나는 내용이 신화적이며 근동의 설화들과 유사하므로, 이 내용은 고대 근동의 설화들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창세기 기록이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점이 발견된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는 인간이성주의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II.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의 설화들

먼저 창세기 1~11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유사한 설화들에 대하여 살펴보자.[1] 창세기 1~9장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수메르 홍수설화에서 창조로부터 대홍수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의 윤곽을 서술하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창세기 6~9장의 홍수에 관한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기의 기자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듣거나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들은 고대 근동에서 그 시대 지식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나 근동의 설화들이나 모두 다음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존재하며, 어떤 한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이 존재하며, 그들은 인격적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인간사를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물질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도 공통의 인식을 보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사람이 진흙의 혼합과 죽은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애굽의 문헌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빛과 어둠, 땅과 바다 사이를 분리하는 행위로서의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고대 근동의 신학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주제의 유사성을 넘어 이면 즉 그 내용 면에 있어서,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르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 창세기”는 존재에 관하여 시종 긍정적이며 낭만적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본다. 사물들은 점점 더 좋아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사물들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창조되던 당시에 완전한 것이었으나,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점점 나빠져서 급기야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생물들 외에는 모두 물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점점 더 나빠졌다. 이는 수메르 설화의 취지와 다르다. 창세기는 메소포타미아의 인본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바벨론사람들과 가나안사람들은 신들이 여자들과 성적인 결합을 맺는 것은 풍요의 의식으로서 제의적 매음과 결혼 의식을 행하여 토양의 비옥함과 국가번영을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창세기 6:1~8은 그런 관습들을 절대적인 공포로 여긴다. 오히려 그런 관습들은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물 심판을 초래한 행위들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들은 홍수가 사람들의 소란과 땅의 과잉 인구에 화가 난 신들에 의하여 보내졌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노아는 우연히도 홍수를 지지하지 않는 신을 경배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일단 홍수가 시작되자 그것은 신들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들은 홍수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신인 엔릴이 희생제사에 나타나서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음에 놀란다. 홍수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인구증가를 억제할 대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는 신과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어있다.

고대 근동의 다신론에 비하여 창세기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특히 해, 달, 별들은 고대 근동의 신관에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운행되는 것들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였다. 반면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창세기 1~11장은 다신론에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정의, 전능하심, 사람을 돌보심을 강조한다. 메소포타미아가 사람의 지혜에 집착하고 있는 반면에, 창세기는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

창세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창세기 1~11장은 족장과 그들의 소명에 대한 근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기사는 우리가 창세기 1~11장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좀 더 부연하면, 창세기 3~11장은 사람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창세기 1~2장은 세계의 원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족장들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구속이라는 목표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고대 근동의 설화들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주제들과 사건들에 대하여 비록 왜곡되긴 했지만,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창세로부터 홍수까지의 주제와 일부 피상적 내용에 있어서 유사성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용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창세기 자체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

다음으로, 창세기 기록들 가운데 성경 자체 내에서 모순된다는 이유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제시해온 주장들을 분석하여보자. 다만, 시간에 대한 문제는 지면 관계상, 그리고 주제 자체가 다른 여러 주제에 비하여 살펴볼 내용이 너무 많으므로 차후에 별도로 다루려 한다.[2]

첫째, 창세기 1:14~18과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자. 이 구절들의 이해에 있어서 궁창이 오늘날의 대기권이라면, 궁창에는 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창세기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역사성을 가진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3] 그저 막연한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의 궁창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의미가 있다.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들도 하늘의 궁창에 와 닿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와 같은 어린 시절이 없이 갑자기 성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이 우주의 천체들도 성숙하고 그 빛들이 넷째 날에 이미 지구의 땅을 비추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창세기 1장에서 식물과 사람의 창조순서가 창세기 2장에서는 바뀌어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통해 각각 다른 문서들의 조합이라는 문서설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또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2:5에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이 투여되어 경작되는 농작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앞에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또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농작물의 부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 경작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선악과사건 이전으로, 땅에 식물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반면 농작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왜 이렇게 농사를 힘들게 지어야만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선악과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순서와 창세기 2장의 순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셋째, 선악과 사건 이전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동물들은 식물들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식물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선악과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은 사람과 동물들에게 있는 것이다. 식물들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히. ‘네페쉬 하야’)이 아니라, 그저 환경과 음식의 역할을 하는 배경적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식물들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경우 성경이 의미하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사건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것과 식물을 먹었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상은 사람이었다.

넷째, 창세기 3:14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흙을 먹고 살도록 지시하셨다. 그러나 뱀은 흙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런 근거로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9:3에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노아방주에 태워졌던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생각해보자. 방주에서 육식하는 동물들이 있었다면, 그 정확한 수의 동물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정황에 따르면, 노아홍수 이전까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뱀의 경우 노아홍수 이전까지 흙을 먹고 살다가, 노아홍수 이후에 먹을거리의 질서가 변경되면서 사람과 동물들의 육식이 허용되고, 이때 뱀도 먹는 것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천년왕국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사야 65:25을 주목하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라는 구절은 동물들의 육식이 사라지고,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게 된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을 당시까지 성경에는 아담, 하와, 가인, 아벨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인은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창세기의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골격가설적인 서술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창세기의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은 후에 800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이후 807년 동안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이름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후에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는 창세기 4:3에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서술을 통하여, 그들이 장성했으며,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창 4:25). 이러한 기록과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담과 셋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도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이 태어난 것이 아담 130세였으니까 가인의 살인사건은 아담 129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가인이 장남이라면 성년으로 창조된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나이가 1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3살에 아벨을 낳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벨이 죽임을 당할 당시 나이는 126세 정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벨에게는 이미 많은 자녀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아벨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날 사람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서는 살인자를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인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창세기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기사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천사와 기적과 하늘의 일들과 땅의 일들의 연대성은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바이다. 창세기 6:2의 하나님의 아들들(히. ‘베네 하엘로힘’)은 욥기 1:6과 2:1, 38:7에 동일한 단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천상의 존재들을 의미한다.[4] 유다서 6~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처럼 동일한 행동으로 음란하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벧후 2:2~7의 내용도 호색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호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대등하게 불경건의 예시로 들고 있다. 천사가 육신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창세기 18:1~8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대접한 젖과 우유와 송아지요리를 먹었음이나, 이에 유사한 모습이 창세기 19:3-15에서도 언급됨으로부터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32:24-30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곱째, 네피림(창 6:4)은 노아홍수 때 모두 사라졌어야 함에도, 민수기 13:33에서 네피림의 후손이 등장하기 때문에[5], 창세기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네피림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거인, 장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네필’이라는 일반명사의 남성복수형이다. 그러므로 민수기 13:33의 네피림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여덟째, 창세기 7:2~3에서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방주에 실어서 보존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7:15에서는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의 수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창세기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일곱 수 암’, 부정한 짐승은 ‘둘 수 암’, 공중의 새는 ‘일곱 일곱 수 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7쌍씩, 1쌍씩, 7쌍씩 방주에 태워졌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창세기 7:14~15절은 노아가 그들을 선별해서 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주로 보내셨고, 노아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창세기 7:16에서 문을 닫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물들은 노아에 의해 선별되어 실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아는 심지어 다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아는 모든 동물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방주로 들어감과 그것들이 암수였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창세기 7:15은 어떤 동물들이 모두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아니라, 방주에 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7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1쌍씩 들어간 동물들이나 방주에 타는 모습은 모두 둘씩 암수가 짝을 지어서 탔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내에서 방주에 탄 동물들의 수에 대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다.

 

IV. 인류 지성과의 마찰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지식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과 창세기의 기록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창세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성을 가진 기록으로 보지 않고, 교훈을 담고 있다는 골격가설로 이해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물들이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유신진화론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피조된 개인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유인원에서 발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개발시키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의 원인(ape-man)이 바로 아담부터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따른 생물진화의 순서나 생물진화에 필요한 시간은 창세기 1장의 하루의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유신진화론은 창세기의 기록이 진화론과 다르므로, 창세기를 골격가설로 이해한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창조(창 2:7), 하와의 창조(창 2:22),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창1:26~27; 5:1~2), 또한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선악과사건, 원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 등 창조에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진화가설(evolutionary theory)이라는 이 시대의 하나의 주장이다. 생물들이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 화석들의 증거를 비롯하여, 환경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미 유전자 속에 그 적응능력이 존재하고 있다가 발현된 것이라는 내용과,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많은 증거들은 진화론을 반박한다. 창세기에는 17번의 ‘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기 종류대로”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시에 10번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7번은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각기 종류대로” 방주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별된 기록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V. 결론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다. 견해가 다른 이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 결과, 필자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인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미주
1.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64-73
2. 김홍석, '창세기의 창조, 아담, 셈 톨레도트에 나타난 시간 연구”, 학위논문(2014)
3.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마오르’를 '광명체”로 번역하였으나, 이전의 개역성경은 "광명”으로 오히려 잘 번역되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모든 영어역본들도 'lights'로 번역하고 있음.
4. ‘Gordon J. Wenham, WBC 주석 「창세기 (상)」, 박영호 역(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6), 290-293 참조.
5. 민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처 - 창조 188호

미디어위원회
2017-08-22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창조와 십자가 

: 유신진화론자들의 죽음에 대한 왜곡 

(What Is the Scriptural Understanding of Death? Creation and the Cross)

Andy Mcintosh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견해(유신진화론)는 점차 우리 복음주의 교회내로 스며들고 있다. AiG의 연사 중 테리 몬테슨(Terry Mortenson) 박사와 나다니엘 진슨(Nathaniel Jeanson) 박사는 최근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신학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15년 전에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같은 논문들이 올해에는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아담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일부 논문들이 여전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심각하다.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 스토트(John Stott) 조차도 하나님이 유인원과 같은 생물체를 사용하셔서, 그중 하나를 택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영적 존재(아담)가 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스펄젼(Spurgeon)은 당시 ‘내리막길 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특히 창세기의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창세기가 왜 신학적으로 중요한가?를 물었는데, 창세기는 죽음(death)이 타락의 결과로 온 것이지,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음 내용에서 우리는 죽음이 분리(separation)를 포함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죽었다.

창조에 대한 타락과 저주의 영향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사람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었다. 이전까지 사람은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죽음(사망)에 대한 기원이 확실히 영적이란 것은 로마서 6:23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히브리서 2:14절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것이다(dying, thou shalt die)”를 의미한다. 창세기 저자의 관점에서 창세기 2:17절은 두 가지 사망을 가리키고 있다.(이것은 나중에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분명해진다.) 히브리어 단어의 반복 사용은 종종 강조를 하기위해서 사용된다.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에 창세기 3: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의 끔찍한 사건을 읽을 때,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보게 되는데, 바로 분리됨(separation)이다. 첫째로 영적 사망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에 죄 이전에 그들은 그분과 완전한 교통을 누렸다. (일부 사람들은 창세기 3: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담과 동행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계셨지만, 9절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확장하여 로마서 5:18절을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류 전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은 시들어버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으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와와 함께 숨으려고 애쓸 때에, 그는 이미 영적인 분리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그리고 약 9백년 후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겪게 된다.(아담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사이에 얼마의 기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타락의 즉각적인 결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즉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다룰 때, 중요한 점이 된다. 그들의 말대로 저주로 인해 아담은 육체적으로 바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유신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따라서 저주로부터 온 죽음은 오직 영적인 죽음만을 의미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2:17절에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은 하나님과 즉각적인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영적 사망이 타락의 유일한 결과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는 유신진화론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음 세 부분을 살펴볼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가죽옷을 입히신 것의 의미

안타까움 속에 나무 잎으로 가린 것을 하나님께서 동물 가죽으로 대체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염소/양의 종류로 동물(아마도 두 마리)을 죽였을 것이다. 죽음의 첫 번째 기록은 하나님 자신이 수행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다가올 구속 사역은 이미 에덴동산을 가로 질러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한 죄에 대한 저주는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땅에도 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3:17 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지옥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분리)으로 곧 바로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피의 희생제물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후,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가인의 것이 아니라, 아벨의 희생제물을 받으셨던 중요한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뱀을 저주하시지만, 이 시점에서 저주는 아담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타락과 인류에게 온 두 죽음

두 가지 죽음(영적 및 육체적)의 신학적 중요성은 성경 말미에 있는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이처럼 둘째 사망은 또한 요한계시록 20:6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또한 요한계시록 2:11절도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돌이킬 수 없는 형벌, 둘째 사망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8). 다음 섹션에서 보겠지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에 대한 아버지의 진노를 경험하며, 참혹한 둘째 사망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셨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21)

성경은 끝부분에서 두 차례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듯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결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12 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영적 재앙 이전까지, 육체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1~22절에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다시 요약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육체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과 로마서 5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육체의 죽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치루셨다.

죄에 대한 형벌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는, 이중 처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을 통해서, 이 두 사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처벌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총 6시간 동안 달려계셨다. 그는 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마가복음 15:25) 제 육시에서 제 구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임했다.(마태복음 27:45; 누가복음 23:44). 대부분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시고, 성경에 기록된 처음 세 번의 발언을 앞의 3시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 1 참조) 이제 그리스도는 제 구시에(막 15:34) 마지막으로 네 번의 말씀을 차례로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정말 강력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22:1절을 인용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던 ”아버지”와 다르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거리가 있고, 분리되어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지옥이 되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 번째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경험을 하신 것이다. 아마도 십자가의 신학에 관한 가장 심오한 진술은 이 두 구절에 있는 것 같다 :

”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린도후서 5:19)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2)

그런 다음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후에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 단어는 ”끝내다/마치다 (Complete/Done)” (의무가 이행됐거나 끝이 남)을 의미하는 법률적 용어이다.  지불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죄의 유일한 대가가 영적 사망뿐이라면, 왜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 하나님이 먼저 살고 있던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 이유가 없으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육체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9:30절에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리스어: ”그가 그의 영을 넘겨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제는 능동태이며, 수동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셨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요한복음 10:17~18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창조세계에 생명을 주신 분이 이제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부활을 모두 통제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모두가 관여하신 것이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행전 17:31). 로마서 8:11 절에 따르면, 성령님께서도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림 1.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

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죽으셨는가? 그것은 참으로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영광의 부활은 결국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받게 될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는 육신 안에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영광스럽고 부활한 새 몸으로 말이다. 이 부패하고 썩을 몸이 변하여, 불멸하고 썩지 않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15:53).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높이와 크기와 깊이를 이해할 때, 아담의 죄 이전에 죽음을 허용하고, 유인원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아담(사람)을 만드셨다는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과 하나님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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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But my acceptance of Adam and Eve as historical is not incompatible with my belief that several forms of pre-Adamic 'hominid” may have existed for thousands of years previously. These hominids began to advance culturally. They made their cave drawings and buried their dead. It is conceivable that God created Adam out of one of them. You may call themHomo erectus. I think you may even call some of themHomo sapiens, for these are arbitrary scientific names. But Adam was the firstHomo divinus, if I may coin a phrase, the first man to whom may be given the biblical designation ‘made in the image of God.’” John R. W. Stott, Understanding the Bible: Special Edition(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43.
2. Some have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 saying of Jesus recorded inLuke 23:34might have been said toward the end of His crucifixion (because ofJohn 19:28following immediately after the record ofJohn 19:27, 'Woman, behold thy son.”). In this interpretation, Jesus would have asked the Father to forgive them just before He says, 'It is finished.” This author would not subscribe to that view because of the statement inLuke 24:34band35which describes the soldiers casting lots over Jesus’ garments and people looking at Him with some speaking to Jesus on the Cross—all suggestive of the initial three hours of light. So the cry, 'Father, forgive them,” inLuke 23:34aseems to be just prior to this (see alsoJohn 19:23–24). Whichever order one takes, the argument concerning Christ’s atonement and taking both aspects of death as the penalty for our sin does not rest on the suggested order of Figure 1.


번역 - 류지열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scriptural-understanding-of-death/ 

출처 - AiG, 2016. 5. 23.

미디어위원회
2017-07-11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유신진화론 

: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담이 없다 하느냐? 

(How Do Some Among You Say There Is No Adam? 

: 1 Corinthians 15: Adam and the Gospel)

Simon Turpin 


서론 : 그리스 철학, 아담을 거부함

사도 바울은 종종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반대들에 대처해야만 하는 문화 속에 자신이 속해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미래에 믿는 자들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린도전서 15:12).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육체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그들의 문화나 세계관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고린도 도시에는 그리스 철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사색적인 철학을 사랑했으며, ”사람의 지혜”를 추구하고(고린도전서 1:22, 2:5) 신뢰하면서, 그들의 지혜를 자랑스러워했다. 자신들의 지혜에 스스로 빠져서,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 일부는 육체와 분리된 혼의 불멸에 관한 그리스 철학으로 인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물질)가 썩는 것을 보았으므로, 불멸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그것이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을 조롱했다.(사도행전 17:32).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바울 시대의 문화에 그리스 철학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렇다. 다윈의 진화론에 기초한 세계관은 그 핵심이 근본적으로 그리스 세계관인 것이다.[1]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혼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거기에 철학이라는 이름 대신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바울이 특별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물었지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담이 없다 하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스식의 사고가 성경적 사고와 혼합되었기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역사적 아담(a historical Adam)을 거부하는 것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2] 유신론적 진화론자(진화적 창조론자)인 데니스 라무뤼(Denis Lamoureux)는 아담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1~7절에 관한 주석을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며, 여기에는 아담에 관한 어떤 언급도, 그의 존재 여부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아담이 아니라, 예수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분의 죽으심과 육체의 부활을 연결시키지 말고, 분리시켜야 한다.”[3]

라무뤼는 사도 바울이 아담을 실재했던 사람으로 이해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담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고대의 과학관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또한 역사적 아담을 믿어야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면서, 이것을 거부하였다.[4]

부활이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실재했었다는 개념은 복음 및 복음에 근거한 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5절

기독교는 유일하게도 역사(history)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설명처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전서 15:1~5).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시고 계시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 사건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는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주장했다(로마서 5:12~16). 아담이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속죄하셨듯이(창세기 3:21)[5], 우리는 ”아담 안에”(고린도전서 15:22)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이셨다.

속죄에는 폭력과 죽음을 암시하는 피의 제사(히브리서 9:22)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과 죽음이 수억 수천만 년에 걸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의 일부분라고 말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세계관에서 이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 이전에 수백만 년 동안 동물들과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역사에 대한 가르침이 손상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단지 창세기와 아담의 초자연적 창조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까지도 훼손시키는 것이다.[6]

더욱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5절에서 아담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아담이 기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교도 문화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창조에 대한 성경적 이해(사도행전 14:15~17, 17:24~28)로부터 시작하는데, 특히 한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사도행전 17:26). 그리고 나서,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비추어 모든 사람이 회개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사도행전 17:30~31).


고린도전서 15:20~22절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창세기 1~3장의 기초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사건들의 역사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22)

2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죽음은 한 사람, 즉 아담을 통해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아담-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론을 사용하여, 부활의 이유를 설명한다. 2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사망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부활할 것이다.[7].

아담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행적 언급이 너무도 가까워서, 하나는 역사적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더욱이, 아담이 신화적 인물이라면, 어떻게 신화적 인물이 그러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인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의 부활, 즉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육체적인 부활에 맞춰져 있다. 아담이 세상에 가져온 죽음이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육체적으로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초자연적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계시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육체적인 죽음이 왔다는 것도 거절해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 속죄,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정말로 필요 없게 된다. 성경적으로, 창세기 3장(로마서 5:12~21, 8:19~22, 요한계시록 21:4, 22:3)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창조세계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6절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아담을 통해서이고, 죽음이 정복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사망을 ”원수”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원래의 창조 상태의 일부분일 수 없다. 로마서 5:14절에서 바울은 아담의 때로부터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다고 말하며, 로마서 5:21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이래로 사망의 지배가 죄의 지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것은 아담의 불순종이며(창세기 2:17, 3:6~19), 그래서 바울은 사망을 멸망 받아야할 원수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원수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에 생물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부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사망에 대한 승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나사로의 육체적인 죽음에 대해 분노하신 것을 볼 수 있다.(요한복음 11:35). 3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리스어 동사 ‘엠브뤼마오마이(embrimaomai)’는 ”항상 깊이 자리잡은 분노를 말하고, 단순한 감정의 기복을 뜻하지 않는다.”[9] 예수님은 왜 화가 나셨는가? 죄와 사망의 권세가 세상에서 왕노릇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을 이기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에 비추어 살아갈 필요가 있다.


고린도전서 15:45~49절

42~4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새로운 몸은 현재의 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광을 갖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필요한 이유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의 결과이다.(창세기 3:19). 그러나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우리의 미래 몸이 영(spirit)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몸(body)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바울은 전형적으로 성경에 호소한다. 45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2:7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땅의 흙으로부터 만드시고, 그에게 혼을 주셔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49)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람” 앞에 ”첫 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창세기 2:7절에 나오는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사람으로 아담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인류에 관한 순서의 관계에서 첫 번째 사람으로서의 아담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다. 더욱이 바울이 아담을 첫 번째 사람이라고 언급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종족의 우두머리”[11], 또는 ”신석기 시대의 농부”[12]였다는 개념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은 모두 아담 이전에도 인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재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바울의 ”육적인”에 대한 언급은 아담을 가리키는 것이고, ”영적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이 사용한 대구법은 아담의 육적인 존재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에 관한 것이다.[13]

47절에서 바울은 ”육”과 ”영”의 대조에서, ”땅”과 ”하늘”의 대조로 옮겨간다. 이것은 두 사람의 기원을 강조함으로써, ”육적인”과 ”영적인”이라는 말에서 바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정의하게 해준다. 아담이 땅에서 났으므로 인류의 원조가 되었듯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원조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류의 구속과 창조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로마서 8:19~22)을 아담의 불순종과 분리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5:21~22, 45~49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과 부활의 기초를 창세기 역사의 실제성에 두고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에(창세기 1:31) 육체의 죽음과 타락을 가져왔던 것은 실제의 사람 아담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첫 번째 사람의 일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실제의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초자연적인 아담의 창조를 거부한다면, 장차 죽음으로부터의 초자연적인 부활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아담의 초자연적인 창조를 거부하면서도, 모순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죽은 자들의 육체의 부활은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초자연적인 부활도 부인하는 다수의 세속적 과학자들의 주장과 충돌된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 주장이 실패라는 표시이다.

 
결론

역사적 아담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를 하나님의 계시보다 높은 위치에 두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는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보다 앞서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고린도전서 1:20~25, 3:19).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24, 골로새서 2:3)가 어떤 철학보다 훨씬 우월함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런 도전을 받았을 때,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심오한 지혜를 그들의 지혜로는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창조에 관한 진리는 참된 지혜, 즉 시대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Footnotes
1. Jerry Bergman, 'Evolutionary Naturalism: An Ancient Idea,” Answers in Genesis, August 1, 2001, https://answersingenesis.org/theory-of-evolution/evolutionary-naturalism-an-ancient-idea/.
2. For example, see influential evangelical theologian Alister McGrath, 'What Are We to Make of Adam and Eve?,” BioLogos, March 31, 2010, http://www.biologos.org/blog/what-are-we-to-make-of-adam-and-eve/.
3. Denis Lamoureux, 'Was Adam a Real Person? Part 3,” BioLogos, September 17, 2010, http://biologos.org/blog/was-adam-a-real-person-part-iii/P60.
4. Denis Lamoureux, 'Evolutionary Creation View,” in Four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3), 61–62.
5. Since Adam and Eve were the only humans at this point, the skin God used to clothe them must have been that of an animal. Although Genesis 3:21 does not explicitly say that the skins were from animals, it is a reasonable implication and one that would make sense to the original audience(Mosaic Community) where the skin of an animal was offered to make atonement for sin (Leviticus 7:8).
6. The Biologos website had many different authors present various ways to understand the atonement in light of evolution. See Joseph Bankard, 'Substitutionary Atonement and Evolution, Part 1,” BioLogos, June 9, 2015, http://biologos.org/blogs/archive/substitutionary-atonement-and-evolution-part-1. See AiG’s response, Tim Chaffey, 'Evolution and the Atonement of Jesus Christ,” Answers in Genesis, August 28, 2015, https://answersingenesis.org/jesus-christ/evolution-and-atonement-of-jesus-christ/.
7.It is important to note that Paul is not teaching universalism here, as the 'all” who are made alive in verse 22 is qualified in verse 23 as 'those who belong to him.” Paul clearly believed in a final judgement for unbelievers: Romans 2:5; 2; 1 Corinthians 1:18; 2 Thessalonians 1:9.
8.Romans 5 and 1 Corinthians 15 are dealing with human death. For an explanation of how all animal death is a result of Adam’s sin, see Bodie Hodge, 'Biblically, Could Death Have Existed before Sin?,” Answers in Genesis, March 2, 2010,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biblically-could-death-have-existed-before-sin/.
9.Grant Osborne, Cornerstone Biblical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Carol Stream, Illinois: Tyndale House, 2007), 171.
10.The Greek word for corruption, phthora, (1 Corinthians 15:42) is the same word used in Romans 8:21 where Paul refers to the creation’s bondage to decay.
11.See C. John Collins, Did Adam and Eve Really Exist? Who They Were and Why You Should Care (Wheaton, IL: Crossway, 2011), 120–121.
12.See Denis Alexander, Creation or Evolution: Do We Have to Choose? (Oxford, UK: Monarch Books, 2008), 236, 243. Alexander acknowledges that this is his view on page 243.
13.Paul does this in order to make the point that '(1) there are two very different kinds of bodily existence; (2) so far they [the Corinthians] have experienced only the one that is common to all Adam’s children; thus (3) they should look forward to the bodily existence that comes only after this first one (and is experienced only by God’s own people).” Roy E. Ciampa and Brian S. Rosner,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Nottingham, England: Apollos, 2010), 821.

 

*관련기사 : '아담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 (2015. 2. 2.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385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characters/adam-and-eve/how-do-some-among-you-say-there-no-adam/

출처 - Answers, 2017. 3. 2.

Jake Hebert
2017-03-13

영화 ”창세기는 역사인가?“에 대한 감상 후기 

(Reviewing 'Is Genesis History?')


      2017년 2월 23일, 미국의 몇몇 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창세기는 역사인가?(Is Genesis History?)”에 대한 특별 일일 상영이 있었다.[1] 이 영화는 ‘Focus on the Family’의 변증론 시리즈인 ‘진실 프로젝트(The Truth Project)’에서 사역하고 있는 델 태킷(Del Tackett) 박사가 주관하여 제작했다. 우리는 달라스 지역의 많은 관객들과 함께 ”창세기는 역사인가?”를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 영화는 창세기의 처음 11 장을 실제 역사로 이해해야한다는, 사려 깊고, 설득력 있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종종 진화론과 수억 수천만 년의 증거로 잘못 주장되고 있는 지층암석과 화석들은 노아 시대에 있었던 전 지구적 홍수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제시된 정보의 질과 제작 가치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주제들에 대한 창조과학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창세기에 정통한 성경 전문가들에게는 참여한 과학자들의 진술에 애매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과학자들은 창세기가 실제 역사라는 것을 통합적으로, 강하고, 설득력 있게,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는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 화석학, 성서학... 등의 전문가를 포함하여, 13명의 박사(Ph.D.)들과의 인터뷰가 포함되어있다. 델 태킷(Del Tackett)은 이들 전문 연구자들과 함께, 그랜드 캐니언, 와이오밍의 공룡 발굴지, 박물관, 심지어 바다 밑까지도 동행했다. 각 장소들은 최근 창조(recent creation) 및 최근의 전 지구적 홍수(a recent global Flood)에 대한 새로운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의 여러 장면들이 두드러졌다. 영화가 현미경 하에서 아직도 부드럽고, 탄력 있는 공룡의 연부조직 사진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공룡의 연부조직 발견 영상은 여기를 클릭!).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최근 창조에 대한 이 강력한 증거를 보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ICR은 2013년에 Acta Histochimica 지에서 이 연부조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고했었다.[2] 카터 박사(Dr. Carter)가 DNA 유전정보가 4차원적으로 극도로 복잡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했을 때(관련자료는 여기를 클릭!), 델 타켓이 놀라는 장면에서, 그리고 우드 박사(Dr. Wood)가 동물원에 남아있는 원숭이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사이에 유전적 차이를 익살스럽게 설명했을 때, 관객들은 경악했다.


태킷 박사와 Compass Media는 창세기가 실제 역사라는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는 고품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그 영화를 보았던 ICR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그것을 지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ICR 및 여러 창조과학 단체들의 자료들과 함께, 이 영화를 사용하여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 영화와 많은 자료와 영상물들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 또는 비유라고 주장하며, 일축하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일부 크리스천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영화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3월 2일과 3월 7일에 두 번의 앙코르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티켓은 웹 사이트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1]



References
1. For more information: www.IsGenesisHistory.com
2. Thomas, B. Triceratops Horn Soft Tissue Foils 'Biofilm' Explanation. Creation Science Update. Posted on ICR.org March 18, 2013, accessed February 26, 2017.

*Dr. Hebert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Mr. Thomas is Science Writer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M.S. in biotechnology from Stephen F. Austin State University.

 

*추천 : 성경의 역사성을 밝혀주고 있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1) ‘Patterns of Evidence: Exodus’
 https://www.youtube.com/watch?v=2skx69TxLXk

2) ‘The Exodus Revealed: Search for the Red Sea Crossing’
https://www.youtube.com/watch?v=9BQ_x0kaw7o
https://www.youtube.com/watch?v=yTnqRpXKcaQ

 

*Genesis Hits the Big Screen (CEH, 2017. 2. 23.)  
http://crev.info/2017/02/genesis-hits-the-big-screen/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868

출처 - ICR News, 2017. 3. 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564

참고 : 5275|6477|3249|6360|6351|2942|6254|6255|4198|6066|6044|5686|5094|5035|5033|4440|4375|3945|3783|3654|2982|2797|6387|6283|6133|5969|6064|5753|5723|5882|6639

미디어위원회
2016-11-17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 순서에 모순이 있는가? 

(Genesis contradictions?)

Don Batten 


      창세기 1장과는 다르게, 창세기 2장에서의 창조 순서는 아담이 창조되고(2:7), 동물들이 창조되는(2:19)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성경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것인가?

아담의 창조와 하와의 창조 사이에 있었던 일로, KJV/AV 성경은 창세기 2:19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out of the ground the LORD God forme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air)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 문장은 각종 들짐승과 새들이 아담과 하와 사이에 창조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대 학자들은 아담과 하와는 각종 들짐승과 새들이 창조된 이후에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설명과 어떠한 모순도 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정확한 시제(tense)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동물과 새들은 아담 이전에 창조되었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유대 학자들은 창세기 2:19절의 동사 ‘지으시고(formed)’를 '지으셨던(had formed)‘ 또는 ”지어오시고 있었던(having formed)’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2:19절을 (널리 사용되는 번역처럼[1], NIV 성경은 ‘had formed(과거완료)’로 번역되어 있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던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로 번역한다면, 창세기 1장과의 불일치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 의문은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창조와는 다른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명백히 창세기 2장은 창조에 대한 ‘또 다른(another)’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는 천, 지, 궁창, 바다, 육지, 태양, 별, 달, 바다생물 등의 창조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은 단지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직접 관련된 것들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던 에덴 동산에서의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 관점(God’s perspective)에서의 창조에 대한 개관(overview)으로, 전체 창조에 대한 ‘큰 그림(big picture)’ 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은 사람의 관점(man’s perspective)에서 중요한 면들을 좀더 자세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2: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이것은 창세기 1장에 대한 단락(a break)의 표시이다. 이 어법(phraseology)은 다음 창세기 5:1절에서도 나온다. 그곳에서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This is the book of the generations of Adam.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라고 되어있다.


‘Generations(대략, 세대, 후예)’ 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톨레돗(toledoth)’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기원(origin)’ 또는 ‘기원에 관한 기록(record of the origin)’을 의미한다. 그 단어는 사건들에 대한 설명 또는 기록을 확인하는(identifies) 것이다. 이 어구는 창세기에서 각 단락(section)의 끝에서[2], 주로 언급되었던 족장(아담, 노아, 노아의 아들들, 셈 등)들을 확인하는 데에 명백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록에 대한 책임을 지고있을 가능성이 있다. 창세기에는 그러한 구분(divisions)이 10군데나 있다. 


각 기록은 원래에는 아마도 돌(stone) 또는 점토판(clay tablet)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천지의 기원(창세기1:1–2:4)에 대한 설명을 확인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어떤 사람이 아닌, 전 우주의 기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 아담과 이브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 사건을 알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건을 아마도 그것을 기록했던 아담에게 나타내셔야만 했다.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성령의 감동 하에 설명들을 추가하면서, 여러 단락들에 대한 편집자 또는 편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톨레돗(toledoths)은 모세가 사용했던 역사적 기록들에 대한 출처(sources)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창세기(Genesis)와 그 기록의 지위(status)에 대한 역사적 본질이 실제 목격되었던 역사(eyewitness history)였다는 사실로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학대학들에서는 아직도 잘못된 ‘문서가설(documentary (JEDP) hypothesis)’이 가르쳐지고 있다. (이 폐기된 그리고 반기독교적인 이론에 대한 비판은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을 보라. 번역글은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를 보라).


창세기 2:4절과 5:1절의 문장에서 톨레돗의 차이는, 창세기 1장은 ‘천지(heavens and earth)’의 기원에 대한 개관이나 (2:4), 창세기 2장은 아담과 하와와 관계된 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임을(5:1,2) 확언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2:4절의 표현(wording)은 강조점이 변동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4절의 앞 부분에 ‘천지(heavens and earth)’ 라는 단어가 있는데, 절의 끝 부분에도 ‘천지(heavens and earth)’ 라는 단어로 되어있다. 성서학자들은 4절의 앞 부분에 있는 ‘천지’는 우주의 기원을 기록한 돌판이나 점토판의 마지막에 있었던 단어로, 그리고 절의 뒷부분에 있는 ‘천지’는 특별히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땅의 사건을 설명하는 두 번째 점토판(창2:4b-5:1a)의 시작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또 다른 반대에 적용해 보자. 일부 사람들은 창세기 2:5절의 초목(plants)과 채소(herbs), 그리고 창세기 2:9절의 나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2장은 일반적인 창조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목할 것은 초목과 채소는 창세기 2장에서는 ‘들과 밭’과 관련되어 기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것들을 경작할 사람이 필요했다 (창2:5). 이것들은 분명히 일반적인(in general) 식물들이 아닌 경작될 식물들에 관한 기술이다. 또한 나무들도(창2:9) 일반적인 나무들이 아닌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다.


창세기는 가장 관심있었던 결과를 유발하였던 여러 사건들을 개관(overview)하는, 또는 요약(summary)하는 역사적 설명처럼 쓰여져 있다. 거기에는 개괄된 사건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자주 뒤따라졌다. 큰 그림인 창세기 1장은 명백히 사건들의 순서에 관심이 두어졌다. 사건들은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서 첫째 날, 둘째 날, 저녁, 아침 등에 따라 기록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사건의 순서가 주 관심사가 아니다. 다시 보충 설명되는 사건에서 연대기적인 순서는 언급될 필요가 없다. 단지 가장 집중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2장에서 동물들은 아담이 창조된 후에, 2:19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담이 창조된 후였다. 동물들은 아담이 창조되고 그 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 사건에 대해서 서로 모순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은 ‘큰 그림(big picture)’이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여섯째 날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말은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19:4-5절에서 결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주목해야할 것은, 같은 문장 안에서 예수님은 창세기 1장의 말씀(27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과 창세기 2장의 말씀(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을 같이 한 번에 인용하셨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양쪽을 결합함으로서, 예수님은 분명히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분리된, 그리고 서로 모순된 설명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Reference and notes

1. The NIV.
2. Charles Taylor, Who wrote Genesis? Are the toledoths colophons? TJ  8(2):204–211, 1994.

 

*참조 : An understanding of Genesis 2:5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11_1/j11_1_106-110.pdf

Genesis - Alleged Discrepancies

https://apologeticspress.org/bible-book/genesis/

*관련기사 : 성경의 오류? - 창세기 1장과 2장에 모순이 존재하는가? (2017. 1. 1.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8/i4/genesis.asp

출처 - Creation 18(4):44–45, September 1996.

창조과학미디어
2016-07-01

예수님은 최근 창조를 가르치셨다.

(Did Jesus Teach Recent Creation?)

by Henry M. Morris, Ph.D. 


   편집자 주 : 이 글은 최초 발행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가 있다. 아마도 최근 창조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믿고 계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 시절을 통하여 지구, 생명체, 동물, 사람은 장구한 세월 동안에 자연적 과정을 통하여 원시적인 상태로부터 진화되어 왔다고 배워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진화론적 개념에 오랫동안 세뇌당해 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과정으로서 진화를 사용하셨다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또는 수십억 년의 연대를 받아들이는 점진론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을 주장하기도 한다.

만연해있는 이러한 타협적 주장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도 진화론적 세계관에, 특별히 진화론에 필수적인 장구한 시간 개념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적설계 운동의 한 존경받는 지도자가 최근 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젊은 지구를 믿는 것을 선호하지만, 과학이 지구 나이는 매우 오래됐음을 입증했기 때문에, 그는 과학과 함께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적설계 운동의 두 지도자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들은 젊은 지구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 들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지적설계 이론을 대학생들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킬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근 창조와 젊은 지구를 믿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짧은 글을 쓰게 되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성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크리스천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순간적으로 창조하시고 완성하셨다는 것을 믿고 계셨고, 가르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시편 33:9)


1. 장구한 연대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화와 장구한 연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기록에 대해서 마태복음 5:18절에서,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 22:18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가 사람들의 추정이나 이론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길을 남겨놓지 않으셨다.


2. 성경은 창조가 어떻게 일어났으며,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날"(day)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란을 벌여 왔지만, 성경 기록의 문맥을 살펴볼 때, 임의적인 해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예수님 자신도 어떤 종류의 불확정한 기간으로 해석하지 않으셨다. 날(day, 히브리어로 욤, yom)은 그 문장 안에서 최초로 정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로 수식되고 있으며(첫째 날, 둘째 날...), 그 범위를 정하고(‘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있는 것으로 인해, 글자 그대로 하루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제한해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을 가지고 쓰여진 ‘날’은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제나 문자적 의미의 24시간의 하루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돌판에 친히 쓰셨다는 것에서 더욱 확증될 수 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 31:16~18).

그러므로 우리의 일곱째 날의 안식은 창조주간에 있었던 날들에 기초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막 2:27)라고 말씀하시면서, 일곱째 날에 노동으로부터 휴식이 필요함을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가 창조 순간부터 존재했음을 확인해주고 계셨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우주는 138억 년 전에 지구는 46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말한다. 원시 생명체는 약 30억 년 전에, 인류는 100만 년 전에, 진화로 출현했다고 말한다. 한편 (창조 때에 계셨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던, 요 1:1-3)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는 우주가 만들어진 시기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But at the beginning of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막 10:6). ‘창조 때로부터’는 분명 창세기 1:1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창세기 1:27절을 인용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아담의 아들 아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창세 이후로(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눅 11:50-5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벨이 창세 이후의 최초의 선지자였으며, 첫 세대의 순교자였음을 말씀하고 계셨다. 창세 이후 46억 년이 지난 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예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을 사용하셔서 사탄에게 “...그는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요 8:44) 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since the world began, KJV)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눅 1:70)라고 예언하면서, 예수님을 ‘세상이 시작된 이후’ 오시는 구세주로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도 다시 오실 예수님과 죄에 대한 저주를 해방시킬 것을 말씀하면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since the world began. KJV)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행 3:21)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영원 전부터(= 세상이 시작된 이후)’라고 말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증거들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져 알 수 있다고 말씀하면서, “창세로부터(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1:20)


따라서 오늘날의 진화론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젊은 지구 창조론자(young-earth creationist)’이셨음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모든 신실한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장구한 지질학적 연대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성경 말씀이 오늘날에 유행하는 과학과 다를 때에 말이다. 불행하게도, 자신이 성경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 다수가 성경을 왜곡하는데 가담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님과 사도들이 한 말씀도 진화론과 다를 경우 그 이론에 꿰어 맞추려고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6-17).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수십억 년, 수천만 년에 대한 개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이 지구와 우주의 연대가 단지 1만 년 이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성경이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불일치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사람의 이론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인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정규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한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최근 창조와 젊은 지구 및 우주를 확실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숫자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또한 대진화(macroevolution)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들뿐만 아니라, 소위 수억 수천만 년의 장구한 연대가 허구임을 가리키는 과학적 데이터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창조 지질학자들은 지질 역사에 있어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대신에 전 지구적 대격변이 있었다는 과학적 증거들을 빠르게 축적시키고 있다. 따라서 지구 지각의 화석을 포함하여 두텁게 쌓여져 있는 퇴적지층에 대한 설명으로써,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장구한 지질시대 동안에 천천히 점진적으로 쌓여졌다는 해석 대신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전 지구적 대홍수로 퇴적되었다는 해석이 점점 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동일과정설적 가정들을 사용하고서라도, 자연적 과정으로 이 세계의 것들을 설명하기에 너무도 연대가 젊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생겨나고 있다.(예로, 바다의 염분 축적). 그러한 짧은 연대로는 진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성경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근 창조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과학에 의해서 지구의 정확한 나이를 측정할 수 없다. 물론 여러 연대측정 방법들이 여러 다른 연대들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진화론이 성립하기에는 너무도 적은 연대임이 입증되고 있다.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radiometric dating)도 마찬가지이다. 우라늄에서 납으로의 붕괴, 루비듐에서 스트론튬으로의 붕괴, 다른 몇 가지 과정들도 극도로 오래된 연대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지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그래서 방사성동위원소 붕괴 과정은 진화론자들에 의해서 수십억 년을 나타내는 확고한 증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다른 모든 것처럼 그러한 계산은 임의적인 동일과정설적 가정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가정들은 입증될 수도 없고, 성경과도 반대된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일부러 잊으려 함(willing ignorance)’이라고 불렀다.(벧후 3:3-6). 그러한 가정들은 태초에 만물들을 특별 창조하실 때의 전 우주적 변화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고, 노아 시대에 전 지구적 파괴를 일으켰던 전 세계적인 지질학적 영향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ICR/CRS에서 실시했던 RATE 프로젝트에 의하면, 방사성동위원소의 붕괴 과정까지도 정말로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이 아니라, 수천 년에 불과함을 나타내는 강력한 과학적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1, 2]

그러므로 우리는 크리스천인 유신론적 진화론자, 점진론적 창조론자, 오래된 연대 창조론자, 지적설계론자들에게 그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있어서 성경으로 돌아올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고하게 믿어야만 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믿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References

1.Vardiman, L., A. A. Snelling, and E. F Chaffin, eds. 2005. Radioisotopes and the Age of the Earth: Results of a Young-Earth Creationist Research Initiative.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Chino Valley, AZ: Creation Research Society. See ICR.org/rate for more information on this eight-year study.

2.ICR Research Associate Dr. Vernon Cupps wrote an eight-part series on radioactive dating in Acts & Facts between October 2014 and June 2015. Visit ICR.org to read his conclusions.

Adapted from Dr. Morris’ article “Did Jesus Teach Recent Creation?” in the June 2005 issue of Acts & Facts.

* Dr. Morris (1918-2006) was Founder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ite this article: Henry M. Morris, Ph.D. 2016. Did Jesus Teach Recent Creation?. Acts & Facts. 45 (7).


출처 : ICR, 2016. 6. 30.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39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16-04-06

창세기 1장의 하루는 여섯 번의 태양일(24hr의 하루)을 

가리킨다고 히브리어 교수는 말한다! 

(Hebrew professor: Genesis teaches six solar days!)

Jonathan Sarfati interviews Dr Andrew Steinmann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는 신시내티 대학의 화학공학 이학사, 콩코디아 신학대학의 신학석사(Ft. Wayne, IN), 미시건 대학의 근동학(Near Eastern Studies)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교회와 은퇴자 시설 두 곳에서 목사로서 근무했다. 현재 스타인만 박사는 시카고 콩코디아 대학(Concordia University Chicago)의 학장이며, 신학과 및 히브리어학과 석좌교수이며, 구약성경에 대한 해설집을 포함한 십여 권의 저서들과 많은 신학 논문들을 남긴 저자이고, 국립 히브리어 교수 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ors of Hebrew)의 멤버이다. 스타인만 박사는 어린이병원의 간호사이자, 널리 사용되는 ‘응급간호학(Sheehy’s Emergency Nursing)‘의 공동저자인 레베카(Rebecca)와 결혼했고, 그의 아들은 루터교 고등학교의 교장이며, 딸은 회계사이다.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학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주간의 하루는 문자적인 하루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비단 고대 히브리 학자들만이 아니다. 현대의 히브리어 학자들 대부분 역시 창세기의 저자는 문자적인 ‘하루’를 알려주기 위해 의도했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옥스포드 대학의 히브리어 흠정교수(Regius Professor)였던 제임스 바르(James Barr, 1924~2006)는 말했다 : 

”아마도 내가 아는 한,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에 있는 히브리어 혹은 구약학 교수들 중에서, 창세기 1-11장의 저자가(혹은 저자들이)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24시간의 날(日)들로 연속된, 여섯 날들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서술되었다는 것과, 창세기 족보에 포함된 숫자들은 세상의 시작부터 성경 기록의 후반부까지 단순한 합산을 통해 연대기로 제공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홍수로서,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인간들과 동물들은 멸절한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1]

제임스 바르 박사는 신학적으로 꽤 자유주의 성향이었던 만큼, 그는 창세기를 믿지 않았지만, 창세기가 가르치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창세기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 (또한 그것을 믿는) 한 히브리어 학자가 콩코디아 대학의 앤드류 스타인만 박사이다.


맥락과 저자의 의도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구절은 명백하게 첫째 날의 빛의 창조와 함께 낮-밤 순환이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다섯 번이나 더 반복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동안의 여섯 번의 연속적인 태양일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1:8, 13, 19, 23, 31).

일부 사람들은 ’날(day)’ 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욤(yôm, יום)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의 날은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유사하게, 영어에서도 ‘내 아버지의 날에(in my father’s day)’라는 표현은 문자적인 하루를 의미하지 않는다. 스타인만 박사는 영어와 히브리어 모두, ”맥락과 저자(혹은 화자)의 의도가 의미를 결정한다”고 답했다. 확실히 ‘내 아버지의 날에’라는 구절은 날의 의미에 대해 맥락적인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의 단서는 전치사 in(~중에)의 사용인데, 이는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시간(예로, 시대)을 암시하는데, 이와 대비되게 전치사 on(~때에) 등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의 한 시점, 특정한 날(예로, 주의 첫째 날)을 암시한다. 또 다른 하나의 단서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아버지의)의 사용이며, 마찬가지로 과거의 시대를 암시한다. 이러한 단서들은 그 언어의 원어민에게는 분명하지만, 해당 언어의 원어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창세기에서, 우리가 맥락적인 단서들을 찾을 때에는, 오늘날의 어느 누구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원어민이 아님으로, 매우 신중해야 한다.”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와 그의 아내 레베카(Rebecca). 런던 아이에서 빅벤(Big Ben)을 배경으로.


창조의 날들

그렇다면 이제, 창세기 1장의 맥락은 무엇인가? 창세기 1장의 날은 ‘내 아버지의 날에’와는 매우 다르다. 여섯 번의 모든 창조의 날들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날-시대(Day-Age)’ 이론가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이러한 창조의 날들이 수백만 년의 시대가 될 수 있겠는가? 스타인만은 ”절대적으로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주장하기를, ”이 맥락에서 사용된 이러한 구절은 명백하게, 첫째 날 빛의 창조와 함께 낮-밤 주기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 구절은 다섯 번이나 더 반복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동안 여섯 번의 연속적인 태양일이[3]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창세기 1:8, 13, 19, 23, 31)”.

전문적 논문에서 스타인만은, 이 구절은 24시간의 하루 전체를 의미하는 메리즘(merism, 양단법)이라고 주장했다.[4] 메리즘은 전체를 의미하기 위해서 두 개의 상반되는 것을 사용하는 언어적 기법으로, 예를 들어, ‘open day and night’은 새벽과 황혼을 포함하여 항상 문을 연다는 것을 의미하며, ‘searched high and low’는 것은 ‘모든 곳을 찾아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 날들은 숫자를 가지고 있다. 창조주간(Creation Week)의 시작 날은 ”한 날(Day one)”이다. (히브리어로는, yom echad, יום אחד). 이것은 24-시간의 하루를 더욱 지지한다.[5, 6] 스타인만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는 분명히 ‘저녁 + 아침 = 한 날(evening + morning = one day)’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날은 명확하게 보통의 (정상적 길이의) 날(day)로써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낮 기간 동안을 의미하는 날도 아니고, 시대를 의미하는 날 또한 아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과 관련된 시간적 경과는 날(day)이라는 단어가 빛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측정되는 시간의 경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결정적인 맥락적 단서가 된다.”

역사에 어떠한 다른 날(days)들이 있기 전에, 누구도 ‘첫째 날(a first day)’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서수(첫째, 둘째, 셋째 등)를 사용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한 날(Day One)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기수(하나, 둘, 셋, ……)가 사용되었다. 한 날(Day One)이 있은 후에는, 서수를 사용하여 둘째 날, 셋째 날...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다.

”첫째 날을 ‘한 날’로 정한 이후에는(개역 성경은 ‘첫째 날’로 번역함), 다음 날들은 순차적으로 세어졌다. 창세기는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은 창조주간의 마지막 이틀에서는 약간 변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히브리어 관사 'ha (the, 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인만은 이유를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은 특별한 날로서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지구를 다스리도록 사람을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셨던 날이라고 선포하고 계셨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들 날에 대한 표현은 다소 흔치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상적인 히브리어 문장 형태인 ‘the sixth day’과 ‘the seventh day’로 쓰여 있지 않다. 대신, 그 문장은 ‘day, the sixth one’ 과 ‘day, the seventh one’으로 쓰여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간에서 중요한 이 두 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는 역사인가?

만약 아담이 문자 그대로 첫 사람이 아니고(창세기 2:7), 첫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지시는 위해서,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 (고린도전서 15:21-22, 45-47)

창세기의 날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회피하려는 한 방법은 1924년에 아리 누르체(Arie Noordtzij)에 의해 착안된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구조가설은 창세기 1장이 문자적인 창조의 날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날들은 역사적 날들이 아닌, 문학적인 구조라고 주장한다. 스타인만 박사는 물론 그 가설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이렇게 요약하고 있었다 : 그 구조는 ”두 세트의 세 날들, 즉, 첫째 날-빛의 창조, 둘째 날-궁창들과 하늘, 셋째 날-땅, 넷째 날-하늘의 빛, 다섯째 날-바다생물과 조류, 여섯째 날-육상생물과 인간”이라는 것이다.

스타인만은 기초적인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었다 : ”이것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논리적으로 오히려 그것은 문학적이며, 동시에 역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

”설령 그곳에 어떠한 타입의 구조(framework)가 있었다 할지라도, 이 관측되는 구조는 창세기 1장의 글 밖에서 온 것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한 일반적 관측이며(어떤 특별한 경우에만 진실인 것이 아닌), 저자(모세)가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 날들이 실제로 역사적인 날들임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문학적 구조를 이끄신 방법으로 창조하신 질서정연한 창조주시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분명하다.[1]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시기에 시간을 창조하셨고, 6일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더욱이, 문맥에서 창세기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가르치길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 역사와 연대기에[8] 저명한 전문가이기도 한 스타인만 박사는 말하기를 :

”창세기의 여러 장(chapters)들은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들에 대한 서술을 포함할 뿐 아니라, 족보학적 설명을(예로 창세기 5, 10, 11:10–32) 통해 개인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족보들은 이야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더욱이, 창세기 1-11장은 창세기 12-50장으로 빈틈없이 섞여 들어가며, 후자는 이전의 역사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스타인만은 상술하기를 :

”창세기의 서술은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생애의 사건들을 더 자세하게 설명을 위해서 다소 느려지지만, 이런 설명 속에서도 족보들(예를 들어 창세기 25:12-18에 있는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함께 기술되어 있다. 사실, 창세기 후반부의 여러 장들에서 사건들은 성경에 아주 잘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생애 중에 많은 사건들을 확실하게 연대를 매길 수 있도록 해준다.”


기독교에서 문자적 창세기의 중요성

진화론과 장구한 연대 개념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너무도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가 그것을 너무도 깊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보수적 성경주석가들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든 널리 인정된 진화론과 조화를 이루며,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제공해야 할 필요를 느껴왔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믿고 있는 (진화론에 반드시 필요한) 수십억 년의 연대와 조화시키려는 설명들은, 어쩔 수 없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게 된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문자적으로 창세기의 날들을 이해하는 것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스타인만 박사는 목사로서, 그리고 신학 교수로서의 풍부한 경험과 함께, 이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

”창세기는 매우 중요한데, 이는 복음 자체의 성패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인간집단이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명확하게 죄가 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들어 왔으며, 죄에서의 구속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다(로마서 5:12-15). 만약 아담이 문자 그대로 첫 사람이 아니고(창세기 2:7), 첫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지시는 위해서,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 (고린도전서 15:21-22, 45-47) [10]

그러면 생물학적 진화는 부정하지만, 수십억 년의 우주 진화와 지질시대를 수용하고 있는 ‘점진론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스타인만이 말하는 것처럼, 그 개념도 또한 해로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오래되었다고 주장되는 지층암석들은 동물들과 심지어 사람의 화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 이전의 수백 수천만 년 전부터 그들이 살았고, 죽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성경은 명백히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만약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에도, (오래된 연대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물들이 살았었고 죽었다면, 성경은 틀렸고, 사망을 물리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아담의 범죄에 대한 회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그렇게 명확하다면, 어째서 많은 신학자들이 창세기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가? (그것은 골로새서 2:8절과 반대되는,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대한 일종의 항복이다). 스타인만 박사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

”진화론과 장구한 연대 개념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너무도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가 그것을 너무도 깊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많은 보수적 성경주석가들은 창세기의 창조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든 널리 인정된 진화론과 조화를 이루며,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제공해야 할 필요를 느껴왔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믿고 있는 (진화론에 반드시 필요한) 수십억 년의 연대와 조화시키려는 설명들은, 어쩔 수 없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설명들은 창세기의 분명한 의미들을 부인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와 같은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이들은 종종 창세기를 비문법적이고, 불합리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기독교인의 믿음

마지막으로, 위의 문제도 스타인만 박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시점부터 그를 교회로 이끌었고,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모가 자식에게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다. 사실, 나는 이러한 방식의 믿음을 가진, 적어도 1695년 독일 북부의 팔라틴 지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루터교도(Lutheran Christians)의 긴 계보 가운데 태어났다. 오래된 루터교인의 전통으로, 부모는 자녀들이 기초적인 기독교의 진리들(종종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사용한다)을 배울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집에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친다. 부모는 또한 그들의 자녀를 교회로 이끌고, 그곳에서 자녀들은 성경과 예배드리는 삶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창조과학 단체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는 스타인만 박사와 같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가장 고차원의 수준에서 변증해주는 전문가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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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Genesis Questions and Answers


References and notes
1. Barr, J., letter to David C.C. Watson, 23 April 1984.
2. For another explanation of this, see Catchpoole, D., and Sarfati, J., In my father’s day … ’: To determine whether ‘day’ means a long period of time, the hours of daylight, or a 24-hour period, you need to look at the context, creation.com/fathers-day, 26 March 2013.
3. A common meaning of ‘solar day’ is 'a division of time equal to 24 hours and representing the average length of the period during which the earth makes one rotation on its axis,” thefreedictionary.com/solar+day. This is what is meant here; these were normal-length days. Before God created the sun, the 24-hour day-night cycle was provided by the rotating earth and the light God created on Day 1. See Sarfati, J., How could the days of Genesis 1 be literal if the Sun wasn’t created until the fourth day? creation.com/daysbeforesun, 13 May 1998.
4. Steinmann, A. Evening and Morning, The Bible Translator 62(3):145–150, 2011.
5.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5(4):577–584, 2002.
6. Sarfati, J.,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Does it mean the days are non-literal? J. Creation 17(2):60–61, 2003; creation.com/numbering, based on Steinmann, אחד as an ordinal number, Ref. 5.
7. For example, the luminaries (Day 4) were placed in the raqia‘ (expanse, firmament) created on Day 2; whales and fish (Day 5) in the seas (Day 3).
8. Steinmann, A., From Abraham to Paul: A Biblical Chronology,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11.
9. Cosner, L., Romans 5:12–21: Paul’s view of literal AdamJ. Creation 22(2):105–107, 2008; creation.com/romans5.
10. Cosner, L., Christ as the last Adam: Paul’s use of the Creation narrative in 1 Corinthians 15, J. Creation 23(3):70–75, 2009; creation.com/1-corinthians-15. 


번역 - 박수빈

링크 - http://creation.com/steinmann-hebrew-professor-interview

출처 - Creation 36(1):48–51, January 2014.

미디어위원회
2016-03-28

3000년 전 가장 초기의 중국 갑골문자의 3D 모델 제작 

: 한자와 창세기의 관련성이 확인될 것인가? 

(Earliest Chinese Language Revealed)


      학자들은 연구를 위해,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문자로 새겨진 명문(inscriptions)에 대한 3-D 모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초기 중국의 문화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초기의 한자로서 갑골(oracle bones)에 새겨진 문자들에 대한 3차원 이미지이다. 케임브리지 (2016. 3. 21) 대학은 웹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3-D 이미지로 스캔된 이 갑골문자의 숨겨진 형태를 공개하였다.(클릭하면 3D 사진을 볼 수 있음) 이것은 학술 연구자들에게 제공된 후에,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처럼 온라인으로 검색 가능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올해로 600주년이 되는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은, 갑골문자로 새겨진 614자의 한자들에 대한 수집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 글자들은 BC 1339~1112년 사이로 평가된, 한자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기록물이다. 소의 어깨뼈(견갑골)와 거북 껍질의 평탄한 아래 면(배딱지)에 새겨진, 그 글자들은 당시 중국 북중부를 지배하고 있던 상(Shang) 왕조의 궁정에서 예지(divination, 신의 뜻)를 얻으려는 질문들과 구해진 답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뼈에 새겨져있는 명문은 초기 중국 사회의 여러 측면들, 가령 전쟁, 농업, 사냥, 의료 문제, 기상학, 천문학 등에 관한 많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BC 1192년 명문에는 일식(solar eclipse)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자들은 3-D 이미지를 회전시키면서 어느 각도에서도 그 유물을 볼 수 있다.

이미지는 뼈의 표면에 미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질문뿐만 아니라, 거꾸로 새겨진 점괘, 그리고 균열을 만들기 위해 열로 인해 그을려진 자국들을(영적 세계로부터의 대답으로 해석되는) 자세히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실제 사물을 보는 것보다, 원래 뼈를 다룰 때의 손상 위험 없이, 더 명확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지 하나의 뼈만 스캔되었지만, 대학은 연구자금이 조달되어 더 많은 뼈들을 스캔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많은 창조론자들은 ‘창세기의 발견(The Discovery of Genesis)’이란 책을 쓴 에델 넬슨(Ethel Nelson)의 연구로 인해(C. H. Kang의 도움을 받아) 매료되어 왔다. 그 책은 초기 중국의 상형 문자에는 에덴동산과 노아 방주를 포함하여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ICR article을 참조 하라). 그 주장은 논란 중이었고(AiG), 자주 무신론자 및 안티창조론자들에 의해서 조롱당해 왔다. 그 주장이 맞는지 아니지를 확인해줄 수 있는 고대 자료(raw data)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학자들이 이 고대 갑골문자를 연구하여, 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아는 한 중국인은 창세기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고 있는 한자는 여전히 홍콩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모택동 정권 하에서 한자는 간체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간체 이전의 한자로 돌아가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3000년 전에 쓰여진 갑골문자는 20세기에 사용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 문자들이 창세기의 내용과 가까운 상관관계를 보여줄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상관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상나라(Shang Dynasty) 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특별히 글자를 새겨 넣은 사람이 그 뼈를 점괘를 얻기 위해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변형이 있을 것이다. 글자를 새겨 넣은 사람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창세기의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이전 조상들에 의해서 디자인된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 추론될 수 있다. (가장 초기라는 BC 1339년도 출애굽 이후의 연대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세의 기록과 분리된, 중국 문자에서 창세기와 관련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한 독립적인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인들이 아담과 노아의 기억을 가지고, 바벨로부터 이주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유일한 가능성은 BC 2000년 경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중국으로 그 이야기를 가져온 이주자들이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글자에 서양의 이야기를 집어넣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이제 그 원본 글자들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보고될 새로운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관련 도서 : 설문해자에 나타난 창세기 - 임번삼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9352042

지명 속에 숨겨진 창세기 - 임번삼

http://www.yes24.com/Product/Goods/26076057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 에델 R. 넬슨, 리차드 브로드베리

https://mall.godpeople.com/?G=9788986332674&r

한자에 담긴 창세기의 발견 - C.H. Kang, E.R. Nelson

https://www.lifebook.co.kr/goods/detail.asp?gno=37680&cate=85

성경이 만든 한자 - 박재성

 https://mall.duranno.com/detail/detail.asp?itm_num=3220700000


*참조 : The Lamb of God hidden in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s

https://www.semanticscholar.org/paper/The-Lamb-of-God-hidden-in-the-ancient-Chinese-Gu-Zhuan/b9fb7c36489f52d4dd2c37bb529e1646ea583fb6

The Lamb of God Hidden in Chinese Characters

https://answersingenesis.org/jesus/the-lamb-of-god-hidden-in-chinese-characters/

Noah’s Ark hidden in the ancient Chinese characters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19_2/j19_2_96-108.pdf

Genesis in Chinese Pictographs 

https://www.icr.org/article/genesis-chinese-pictograph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6/03/earliest-chinese-language-revealed/ 

출처 - CEH, 2016. 3. 24.

미디어위원회
2015-12-07

역사적 아담을 지지하는 과학적 사실들

(Was Adam a Real Person?)

by Brian Thomas, Ph.D.


      오늘날의 반-성경적 세계는 아담(Adam)이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다. 또한 (유신진화론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기독교인들도 아담의 실존을 의심하고 있다. 구약학 교수인 존 왈튼(John Walton)은 최근 아담과 하와는 아마도 ”하나님이 초기 호미니드(hominids) 중에서 한 쌍을 선택하셨다”라고 썼다.[1] 우리는 유인원의 후손인가? 아담의 후손인가? 아담과 역사 사이에 두 연결고리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의 실존에 대한 타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기독교 외부와 내부에서 진화론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입증됐기 때문에, 역사적 아담은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권위로 아담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멸종된 유인원 같은 생물이 자신보다 인간의 특성을 조금 더 닮은 아이를 낳았다. 다음 세대에도 그랬고, 점차적으로 계속 변화되어, 수많은 세대가 흘러간 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을 낳았다는 것이다. 진화론적 인류 역사에 의하면, 우리는 유인원과 연결되어 있지, 아담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적 역사에 의하면 우리는 아담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각 사람은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고, 죽음을 형벌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 것이다.[2] 만약 아담이 역사적으로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을 이유가 없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중요하다! 진화론자들에게 아담은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간과 물질도 하나님의 창조로 생겨났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에서 아담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무덤에서의 부활은 완전히 쓸모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last Adam)'으로 표현된 것은[3] 최초의 아담에 관한 타당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지지하는 세 가지 과학적 사실들이 있다.

첫째,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원숭이 같은 생물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진화 이야기는 해부학을 위반하는 것이다. 원숭이는 두 다리로 걸을 때 서투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뼈를 네 다리로 걸으며, 나무에 매달리는 데에 적합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가 이들 뼈들을 조금씩 조정하여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면, 그것은 단지 기형을 가진 유인원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들의 친척보다 살아남기 어려워 빠르게 도태되었을 것이다.      

둘째,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제시된 인간 조상 화석들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호모 나레디(Homo naledi)라 명명된 이상하게 보이는 화석이 최근의 사례일 것이다. 사람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진 것과 관계없이, 고인류학자들은 그 화석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4] 앞으로의 연구에 의하면, 나레디 화석은 사람과 멸종된 원숭이 뼈들의 단순한 혼합으로 간주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전학은 아담을 확인해주고 있다. 사람은 매 세대마다 약 100개 정도의 새로운 돌연변이들이 축적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매우 많은 유전적 '오타(typos)'들을 보유하고 있다.[5] 돌연변이들은 천천히 정보들을 지워버린다. 손상된 유전정보의 축적으로 인해 인류는 수천 년 내에 멸종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돌연변이 속도에서, 왜 우리 인류는 오래 전에 멸종되지 않았는가? 인류는 유전체 내에 단지 수천 년에 해당하는 돌연변이 축적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기록처럼, 우리의 조상이 아담이었다는 것과 일치한다.

해부학, 고생물학, 유전학은 우리가 동물이 아닌, 아담과 하와로부터 후손되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실자의 모형이신, 아담의 역사적 실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6]   



References

1.Walton, J. H. 2015. The Lost World of Adam and Ev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77.
2.1 Corinthians 15:22.
3.1 Corinthians 15:45.
4.For example, see Chris Stringer’s comments in Ghosh, P. New human-like species discovered in S Africa. BBC News. Posted on bbc.com September 10, 2015, accessed October 7, 2015.
5.Kong, A. et al. 2012. Rate of de novo mutations and the importance of father’s age to disease risk. Nature. 488 (7412): 471-475.
6.Romans 5:14.


*참조 : 유전적 엔트로피 - 진화가 아닌 퇴화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NF5GPcdmS0

과학이 발견한 아담과 이브 (2017. 1. 3.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007

출처 - ICR, Acts & Facts. 44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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