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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10-02-12

요셉의 원래 무덤의 발견? 

: 성경 기록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살았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ChristianAnswers.net


       성경은 야곱(Jacob)과 그의 가족이 아시아로부터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했을 때, 라암셋(라암세스, 람세스, the land of Rameses)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생업을 얻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47:11, 27). 이스라엘 자손들은 결국 라암셋 성을 건축하는 노예 일꾼들로서 사용되었다.(출 1:11) 그리고 430년 후에 출애굽을 할 때(출 12:40), 그들은 라암셋에서 출발하였다.(출 12:37). 이러한 기록들로부터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라암셋과 그 주변 지역에 살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실 라암셋 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주보다 나중에 생겨났다. 그 이름은 위대한 왕 람세스(람세스 2세, Rameses II)에 의해서 BC 13세기에 나일강 삼각주 동쪽에 지어진 한 도시에 주어진 이름이었다. 이 친근한 이름은 후에 성경 본문을 필사할 때 필사가들에 의해서 소급되어 사용되었다. 라암셋의 위치에 대해 수년 동안 논란이 있어왔지만, 그 논란은 이제 불식되었다. 우리는 라암셋의 위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장소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이다. 

1966년 이후로 광범위한 발굴이 카이로의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소(Austrian Archaeological Institute)의 맨프레드 비텍(Manfred Bietak)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for previous reports, see Shea 1990: 100-103; Wood 1991: 104-106; Aling 1996: 20-21). 비텍 교수는 이집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았었다는 물리적 증거를 최초로 발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고학은 라암셋의 역사를 밝혀내고 있다.

고대 라암셋은 카이로(Cairo)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100km 정도 떨어진,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텔 엘-다바(Tell el-Daba)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대에 이곳은 나일강의 지류인 펠루시악(Pelusiac) 강이 흐르고 있어서, 지중해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곳은 가나안으로 나가는 육상 경로인 유명한 호러스 로드(Horus Road)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그곳은 상업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출 1:8)

우리는 그 장소의 역사를 힉소스 이전(pre-Hyksos), 힉소스(Hyksos) 왕조, 힉소스 이후(post-Hyksos)의 세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힉소스는 나일강 삼각주의 북동쪽에 거주했었던 시리아-팔레스틴으로부터 온 셈족 사람(Semitic people)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108년 동안(BC 1663-1555, 15th Dynasty) 이집트 북부를 지배했다.[1] 이스라엘 백성들은 BC 1450년 경에 출애굽을 하였음으로, 야곱과 그의 가족은 (430년 전인) BC 1880년 경에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힉소스 이전 시기로서, 그 마을의 이름은 ”두 도로의 문(the door of the two roads)”이라는 뜻의 로와티(Rowaty) 였다. (Bietak 1996: 9,19). [2]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일 수 있을까?

로와티(후에 라암셋이라 이름 붙여진 도시)에 아시아인들이 살았다는 최초의 증거는 12대 왕조(12th Dynasty) 말에 (BC 19세기 중반) 나타난다.[3] 그 시기에 한 시골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거기에 많은 담장들이 있었지만, 요새화되지는 않았는데, 이것들은 동물들을 키우기 위한 것으로 보여졌다. 살았던 집들은 모래 벽돌(sand bricks)로 지어진 직사각형의 오두막(rectangular huts)들로 구성되어 있었다.(Bietak 1986: 237; 1991b: 32). 그것은 이집트에 이스라엘인들이 살았다는 최초의 구체적인 증거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아시아인 정착지인 텔 엘-다바의 모든 주민들이 오두막에 거주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작은 저택(small villa)에서 살았는데, 분명 중요한 고위 관리로 보였다. 성경은 요셉이 바로(pharaoh)의 꿈을 해석해준 이후에 총리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창 41:39-45).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서 일하는 동안 어디에 살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흉년과 관련된 그의 직무를 잘 마친 후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고 있었던 라암셋으로 내려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이 저택이 요셉의 집이었을 수 있을까? [4]

그 저택은 크기가 10×12m 로서, 12×19m 의 울타리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집은 뜰(courtyard) 주변으로 6 개의 방들이 말굽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집의 평면도가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후기 철기시대(later Iron Age)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살았던 ‘4개 방의 집(four-room house)’과 동일했다는 것이다.(Holladay 1992a). 이러한 형태의 집은 2개의 옆방과 하나의 뒷방이 중앙 공간 또는 뜰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5]

근처 저택 옆에는 반원 형태로 정렬된 2개 방으로 된 빈약한 집들이 있었는데, 대략 6×8 m 크기의 것이었다. 만약 그 저택이 요셉의 집이었다면, 주변 오두막들은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의 집들일 수도 있다. 그 정착촌에서 발견된 조각난 도자기(pottery)들의 대략 20%는 팔레스타인의 중기 청동기시대(Palestinian Middle Bronze Age) 형태의 것이었다. 그 저택의 남서쪽 열려진 공간에는 정착민들의 묘지가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놀라운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히브리인들의 무덤?

무덤들은 이집트에서 많이 발견되는 진흙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의 내용은 철저히 아시아식이었다. 비록 그 무덤들은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매장된 남자들의 50%는 아직도 팔레스타인 타입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으로 죽은 남자들은 2 개의 창(javelins), 전투 도끼(battle-axes), 단도(daggers) 등을 갖고 있었다. 무덤 8(Tomb 8)은 세련된 오리부리 도끼와 양각된 청동 벨트를 포함하고 있었다. (Bietak 1996: 14). 그러나 그 무덤들 중 하나는 완전히 독특했고, 이집트에서 일찌기 발견된 그 어떤 무덤과도 같지 않았다.  


요셉의 무덤?

집들이 있는 곳에서 83m 정도 떨어져있는 매장 지역의 남서쪽 끝에는, 한 기념비적 무덤인 무덤 1(Tomb 1)이 있었다. 그것은 주 묘실(main burial chamber)과 한 부속 장례실(chapel annex)을 포함하고 있는, 거의 사각형의 커다란 구조였다. 도굴꾼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장례실 안에 나있었는데, 발굴자들은 한 아시아인 고관을 조각해 놓은 한 거대한 상(statue)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실물 크기의 앉아있는 고관 1의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석회암으로 되어있었고, 탁월한 솜씨의 것으로 보였다. 피부색은 이집트 미술에서 아시아인들의 고유 색깔인 황색이었다. 그리고 버섯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집트 미술에 등장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외국인을 가리키는 이집트식 상형문자인 내던져진 막대기(throwstick)를 오른쪽 어깨 위에 가지고 있었다. 그 상은 고의적으로 부서져있었고, 얼굴이 박살나 있었다.(Bietak 1996: 20-21).    

데이비드 롤(David Rohl)은 그의 책 '파라오와 왕들: 성경적 탐색(Pharaohs and Kings: A Biblical Quest)‘에서, 이 무덤은 요셉의 무덤(tomb of Joseph)이라고 제안했다(1995: 360-67).[6] 증거들은 이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무덤 1에 묻힌 사람이 그 저택의 소유주였다고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요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매우 특별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 50:26)

모세는 출애굽을 할 때, 요셉의 뼈들을 가지고 나왔다. 왜냐하면 요셉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단단히 맹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출 13:18,19) (비교, 창 50:25)

묘실 내부에서, 발굴자들은 글씨가 새겨진 석회암 석관(sarcophagus)의 파편들과 약간의 뼈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묘지의 다른 무덤들과 같지 않게 완전한 뼈들이 없었다.(Bietak 1991a: 61). 매장 후에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 구덩이가 장례실 끝쪽에 파여져 있었고, 묘실 안으로 터널이 나있었다. 그리고 관(석관)은 깨어져 있었고, 이들 ‘무덤 도굴꾼’들에 의해서 죽은 사람의 유골이 강탈당했다.(Rohl 1995: 363). 도굴꾼들에 의해서 무덤에 있던 골동품이나 귀중품들이 없어지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사체를 가져가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상이 부서진 시점에 뼈들이 없어졌는지, 또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인지는 고고학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상은 힉소스가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던 정치적 혼란기 동안에 부서졌을 것으로 보인다.(Bietak 1996: 21).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출애굽기에 기록된 새 왕은 BC 1663년 경의 최초의 힉소스 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 그 시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과도한 압제 속에 지내게 된다.(출 1:9-11). 아마도 힉소스 왕은 이집트의 지역 세력들을 타도할 때, 그 상을 파괴하였을 것이다. 무덤에 있던 유해도 위험에 처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신실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시기에 요셉의 유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힉소스가 지배했었다는 증거

점령의 다음 단계로는 누추한 집들은 정리되고 거대한 궁전(성)들이 건축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복자들은 아시아인들이기는 했지만,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랐다.[9]

궁전은 이집트 형식의 여러 거대한 건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여러 층들, 지붕이 있는 현관(porticos), 뜰, 연못, 정원, 묘지 등을 포함했다.(Bietak 1996: 21-30). 이러한 면들은 점령자들이 외국 무역에 종사했던 고위 관료였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그 지역에 힉소스가 정착하게 되면서 일어났던 초기 단계에 나타났던 것이다.[10] 힉소스 인들의 도래로 야곱의 후손들은 힘든 시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출 1:8-12a)         

비문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초기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11]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들에 대한 동시대의 참고 자료들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제외하고 양치는 목동들이었기 때문에, 고대 기록들에서 발견될 것으로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12]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따라 불려졌던 여러 이스라엘 족속들이 존재했었다는 고대 자료들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암셋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이 발견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살았었다면 예측될 수 있는 발견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Notes

[1] The Egyptian word Hyksos means 'foreign rulers.” In common usage, however, the term is used to refer in general to the Asiatics who settled in the eastern Delta of Egypt in the Second Intermediate Period. The dates for Hyksos rule are not known precisely. Those used here are based on the following:

a. Expulsion of the Hyksos in approximately the 15th year of Ahmose (Bietak 1991b: 48)

b. A total of 108 years for the rule of the Hyksos according to the Turin papyrus (Bietak 1991b: 48)

c. The chronology of Wente and Van Siclen for the 18th Dynasty (Wente and Van Siclen 1977: 218). This chronology gives a death date for Tuthmosis III of 1450 BC, which correlates with the Biblical date for the Exodus. According to Scripture, the Pharaoh of the Exodus perished in the Yam Suph (Exodus 14:5-9,18,28; 15:4,7; Psalm 106:9-11; 136:15), therefore, we correlate the date of the Exodus with the death date of the Pharaoh of the Exodus. The chronology of Wente and Van Siclen also incorporates the low date of 1279 BC for the accession of Rameses II accepted by most scholars today.

[2] In the 14th Dynasty, toward the end of the 18th century BC, the name of the town was changed to Avaris, 'the (royal) foundation of the district' (Bietak 1996:40). When the Hyksos later established their capital there, they retained the name Avaris. It was probably the Hyksos rulers who forced the Israelites to build the store cities of Pithom (= Tell el-Maskhuta) and Rameses (= Tell el-Daba = Avaris) (Exodus 1:11). When Rameses II rebuilt the city in the 13th century in the post-Hyksos period, and long after the Israelites had left Egypt, the name was changed to Rameses.

The location of Pithom has also been a matter of some debate. Now, however, it seems quite certain that it should be located at Tell el-Maskhuta at the eastern end of the Wadi Tumilat, 15 km west of Ismailiya. Asiatic remains similar to those found at Tell el-Daba have been found there and attributed to the Hyksos (Holladay 1992b: 588-89; 1997:332-34). According to Holladay, the Hyksos occupation at Tell el-Maskhuta took place ca. 1750-1625 BC. It would have been sometime during this time period, then, that the Israelites built the store city of Pithom.

[3] Area F/I, Str. d/2, and Area A/II, Str H

[4] Str. d/2 at Tell el-Daba

[5] In Palestine, the side rooms were usually delineated by stone columns. With the scarcity of stone in Egypt, this feature would not be expected. Holladay suggests that the ground floor of such a house was primarily utilized for the economic aspects of family life such as the storage of food, tools and supplies, and the housing of animals. The family living space, on the other hand, was most likely on the second floor.

[6] As a result of his nontraditional chronology of ancient Egypt, however, British historian David Rohl dates Tomb 1 to the late 17th century BC (1995: 339), rather than the mid-nineteenth century as determined by the excavators. Since Rohl believes the Sojourn to be only 215 years based on the Septuagint (1995: 329-32), Joseph and Tomb 1 end up being approximately contemporary by his chronology. The present author, however, disagrees with both of these views and holds to conventional Egyptian chronology and a Sojourn of 430 years (Ex 12:40) as recorded in the Masoretic text of the Hebrew Bible. Moreover, Rohl places Joseph and Tomb 1 in Str. d/1, while the present author accepts the excavators' dating of Tomb 1 to Str. d/2, and believes Str. d/2 to be a more compatible context for Joseph and the Israelites.

[7] We are not certain of the name of the first Hyksos king. Redford suggests Salitis/Saites based on literary references (1992: 342), while Ward suggests Khyan based on inscriptional evidence (1984:162-72).

[8] Str. d/1 dating to the early 13th Dynasty (early 18th century BC)

[9] Str. d/2

[10] Str. d/1

[11] Str. d/2

[12] There is a canal connecting the Nile with the Faiyum in the western desert named Bahr Yusuf, the 'canal of Joseph.” Development of the Faiyum is associated with Dynasty 12, the time when Joseph was in Egypt carrying out land reforms (Genesis 41:46-49; Gardiner 1961: 35-36). Whether the name of the canal is ancient or from a relatively modern tradition is not known. Otherwise, the name of Joseph has not turned up in Egypt (see Aling 1996).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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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Bietak, Avaris and Piramesse: Archaeological Exploration in the Eastern Nile Delta, (London: The British Academy, 1986); 'Der Friedhof in einem Palastgarten aus der Zeit des spten Mittleren Riches und andere Forschungsergebnisse aus dem stlichen Nildelta (Tell el-Daba 1984-1987),' Agypten und Levante 2 (1991a), pp. 47-109; 'Egypt and Canaan During the Middle Bronze Age,'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281 (1991b), pp. 27-72; Avaris: The Capital of the Hyksos, (London: British Museum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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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Shanks, 'Strata,”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3/2 (1997),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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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 Wood, 'Recent Discoveries and Research on the Conquest,' Archaeology and Biblical Research, 4 (1991), pp. 104-110; 'Mesha, King of Moab,' Bible and Spade, 9 (1996), pp. 55-64.

▶ G.E. Wright, Shechem: The Biography of a Biblical City (London: Gerald Duckworth, 1965).

▶ Author: Dr. Bryant G. Wood of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dapted from the ABR article: 'The Sons of Jacob: New Evidence for the Presence of the Israelites in Egypt'


*관련자료 :  Has Joseph’s Tomb Been Found in Egypt?
https://www.levitt.com/essays/joseph

Patterns of Evidence: The Exodus - Full Trailer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2assFIyLInE

Strong evidence for Joseph's Tomb and Palace in Egypt!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m9ATLhkujY

Joseph was Imhotep of Egypt
http://www.arkdiscovery.com/joseph.htm

JOSPEH was IMHOTEP in EGYPT, 1st after Pharaoh 'cause HE KEPT HIS FAITH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mlyhvVfBI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Gary Vaterlaus
2009-10-27

뱀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흙을 먹는가? 

(Contradictions : Left in the Dust Do snakes really eat dust like Genesis says?)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3:14절에 기록된 것처럼 뱀은 흙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창세기 말씀을 훼손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후에,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면서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에 언급된 뱀(serpent)이 오늘날의 뱀(snake)과 같은 모습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이유로서 이 구절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뱀은 흙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뱀의 입천장 앞쪽에 있는 화학물질 감지기관인 야콥슨기관(Jacobson’s organ)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응답한다. 야콥슨기관은 뱀이 냄새를 맡는 것을 도와준다. 뱀의 갈라진 혀는 뱀의 주변을 감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내밀어지면서, 간혹 땅을 핥고, 먼지 입자들을 채취해서 입속으로 가져온다. 뱀은 혀를 끌어당겨, 갈라진 혀의 끝을 야콥슨기관의 두 구멍 안으로 삽입한다. 그곳에서 입자들은 분석되어지고 확인되어진다. 뱀의 뇌는 그 냄새를 읽을 수 있고, 혀를 통해 맛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방법으로 뱀은 정말로 흙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셨을 때 염두에 두셨던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창세기 3:14-15절의 본문을 살펴보자 :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의 저주는 배로 다니고, 흙을 먹으며,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3:15절을 원복음(protoevangelium, 최초 복음)으로서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탄을 패배시키실 메시야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셨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위대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 분명히 상징적 언어이다. 그러나 이것이 창세기가 역사적 장르의 기록임을 위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징적 언어는 대부분의 문자적 구조틀 내에서 들어있을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동물을 저주하신 것인가, 사탄을 저주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그 둘을 함께 저주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흔히 사람에게 말씀하시며, 사탄에게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

1. 에스겔 27-28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두로(Tyre) 자체에 대해서(겔 27:2), 그리고 두로의 지배자(ruler of Tyre)에 대해서 말씀하셨고(겔 28:2), 28:11절에서는 ‘두로의 왕(King of Tyre)’에 대해서 한탄하시기 시작하신다. 이것은 특별히 두로 왕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존재인 사탄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마가복음 8:33절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3. 이사야 14장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왕에게 말씀하시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이러한 개념은 흔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시면서 사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창세기 3:14절은 뱀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3:15절에서 하나님은 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흙을 먹을 것이라는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이제 흙 속을 배로 다니는 결과를 가져왔다. 뱀은 들짐승이나 가축 중에 하나와 같았을 것이다.(창 3:1, 14). 그러나 이제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흙을 먹는다는 이러한 묘사는 천하고, 비열하고, 혐오스럽고, 타락한 한 생물체에 대한 상징이다. 미가 7:16-17절에서 하나님은 여러 나라들이 여호와 앞에 두려워 떠는 시기가 올 것에 대해 예언하셨다 :  

”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문맥에 대한 적절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셨을 때에 의미하셨던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오히려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승리를 약속하고 계셨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4/06/contradictions-left-in-the-dust

출처 - AiG–U.S. April 6, 200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52

참고 : 3170|4247|3396|3336|1904|3945

미디어위원회
2009-10-13

요셉 시대의 동전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Archeologists Find ‘Joseph-Era’ Coins in Egypt)

AiG News 


    고고학자들은 이집트에서 창세기의 요셉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도 있게 되었다. (The Jerusalem Post. 2009. 9. 25).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 지는 이집트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보관되어 있던 동전(coins)들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뉴스는 이집트의 알-아흐람 신문이 보도했던 것으로, MEMRI(2009. 9. 24. 동전들을 볼 수 있음)에 의해서 해독되었다.

발견된 모두 5백여 개의 동전들은 이집트 박물관의 소형 유물 그룹에 속해있던 것으로서, 장신구류로 잘못 분류되어 있었다. 연구 팀의 리더인 무하마드 타베트(Sa‘id Muhammad Thabet)는 요셉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동안에 여러 지하실에서 그 동전들을 발견했다.

그 발견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은 동전을 친숙하지 않았고 주로 물물교환에 의존했다는 이전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타베트는 나일강 다리 공사의 감독관으로 있었던 한 고대 이집트인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에 그러한 생각에 의문을 품었었다. 토트-네헤트(Thot-Nehet) 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동전과 농산품들로 교환하는 임대 토지들에 대해서 기록했었다.     

장신구로 분류됐던 동전들은 사실상 둥글었는데(또는 거의 원형), 한 쪽 면에는 문자가, 다른 쪽 면에는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타베트는 주목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것을 포함하여 수세기를 통하며 만들어졌던 동전들과 같은 형태이다. 동전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면은 이집트 이름, 날짜, 값어치가 새겨져 있었고, 반면에 다른 쪽 면은 이집트 파라오의 얼굴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동전들은 여러 크기였고, 비싼 물질로 만들어졌다. 또한 유사한 동전들이 여러 고고학적 장소들에서 발견되어 왔는데, 그것은 그 물체들이 장신구가 아니라, 동전들이라는 타베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동전들은 이집트 역사의 여러 시대들의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요셉의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41장의 기록과 일치하는 한 동전이었다. 그 동전에는 ”바로가 꿈에서 보았던 살진 일곱 암소와 파리한 일곱 암소들을 상징하는 한 암소의 형상과 충실한 일곱 이삭과 마른 일곱 이삭에 대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구자들은 동전에 새겨진 문자들을(초기 알려진 상형문자와 대조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셉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요셉의 이집트식 이름을 판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타베트의 연구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창세기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또 하나의 매력적인 증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연구는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리뷰되거나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의 정확성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Baptist Press 지는 ”요셉의 동전들에 대해 회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타베트의 주장을 의심하고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나의 첫 반응은 동전들에 대한 해석이 꽤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전문가인 멤피스 대학의 로버트 그리핀(Robert Griffin)은 설명했다.

남서부 침례 신학교의 고고학자인 스티븐 오티즈(Steven Ortiz)는 타베트 팀이 그 발견으로 코란의 특별한 구절들을 입증하고자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물론 타베트의 연구 동기가 그 발견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견 내용이 학술지에 게재되고 정확하게 검토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할 것이다. 이제 계속되는 고고학적 발견들로 창세기(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나머지 책들) 기록의 신뢰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참조 1 : 성경의 요셉 이름 형상 동전 이집트서 발견 (2009. 9. 25.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9/09/25/0601170100AKR20090925201800079.HTML

Egyptian coins in the time of Joseph

http://creation.com/images/pdfs/tj/j26_3/j26_3_85-91.pdf

 

참조 2 : Is the story of Joseph in the Bible a true story?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16.html

Is there evidence that the Israelites once lived in Egypt as the Bible says?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For more information
Chapter 11: The Glorious Middle Kingdom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Get Answers : Archaeology,  Bible,  Genesis,  Histor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10/10/news-to-note-10102009 

출처 - AiG News, 2009. 10. 10.

미디어위원회
2009-07-31

하나님은 공격적인 행동도 창조하셨는가? 

(Did God Create Aggressive Behavior?)

by Brian Thomas, Ph.D.


      성경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창조 주간의 사역을 마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고 기록하고 있다.[1]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에서 보여지는 공격적인 행동과 같은 몇몇 일들은 부정적이고, 위험하며, 파괴적이다. 만약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한 새로운 연구는 이러한 궁금증에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의 트루디 맥케이(Trudy MacKay)가 이끄는 연구팀은 초파리(fruit flies)들의 어떤 유전자의 영향을 조사하다가, 공격적 행동(aggressive behavior)을 야기시키는 특별한 돌연변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57개 유전자들에서 59개 돌연변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들의 32개는 공격성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반면에, 27개 돌연변이들은 초파리들이 더 평온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2] 그 연구 전까지 57개 유전자들 중에서 어떠한 것도 공격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BMC Biology 저널에 게재된 그 연구의 결론 중 하나는 ”사람을 포함하여 다른 동물 종들 사이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미래 연구에 있어서, 이들 유전자들이 새로운 후보 유전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공격적 행동들은 창세기 1장이 아니라, 창세기 3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우주적인 비극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세계에는 타락, 고통, 질병, 죽음이 들어왔다.[4] 일부 동물들의 공격적인 행동들은 하나님의 원래의 완벽한 창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는 것이다.[5]       



References

[1] Genesis 1:31.
[2] 'Cross' breeding: What makes an angry fly? BioMed Central press release, via EurekAlert!, June 24, 2009.
[3] Edwards, A. C.. et al. 2009. Mutations in many genes affect aggressive behavior in Drosophila melanogaster. BMC Biology. 7: 29.
[4] Genesis 3:17-19.
[5] Romans 8:2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778/ 

출처 - ICR News, 2009. 7. 16.

Brian Thomas
2009-07-21

보톡스 : 독물도 치료약이 될 수 있다. 

(Botox : Toxin Becomes Treatment)


      보톡스(Botox) 치료는 얼굴의 주름을 줄여주는 화장품처럼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또한 눈 근육(eye muscles) 장애를 치료하는 데에도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발견에 의하면, 과민성 방광(overactive bladders)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보톡스를 주사하여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톡스는 ”보툴리눔 톡신(botulinum toxin)”의 줄인 말로서, 의학적 치료 시에 사용되는 상품명이다. 독 물질로 간주되는 그것의 활성 성분은 어떤 박테리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단백질들이다. 보툴리눔 톡신은 매우 소량이라 할지라도, 보툴리누스 중독(botulism)을 일으킨다. 특별히 유아들에게 이것은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 보툴리누스 중독은 보통 약물 사용, 부적절한 통조림 제품, 비위생적인 접시의 재사용 등으로 일어난다. 

최근 실시한 한 연구에 의해서 영국 구이스 병원과 런던 킹스 컬리지의 비뇨기과 의사들은  방광조직 안으로 보톡스 주사가 과민성 방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의 배뇨 빈도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1] 이것은 16명의 환자들에서 치료 후 적어도 24주 동안 더 안락한 삶과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자연의 해로운 물질들의 경우에서처럼, 보톡스가 병을 일으키는 잠재력은 대게 부주의함과 오용 때문에 기인한다. 그러나 어떤 물질의 나쁜 영향만을 보고 그 선천적 잠재성을 무시해 버린다면, 보톡스의 의학적 장점은 이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주의 깊게 조절되고 정확하게 사용된다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단백질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물질의 잠재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연구하고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명령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청지기로서, 과학적 탐사와 발견의 역할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행 17:28) 창조주의 작품들에 들어있는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References

[1]Botox injections can significantly improve quality of life for people with overactive bladders. Wiley-Blackwell publisher press release, June 9, 2009, reporting research published in Sahai, A. et al. 2009. Improvement in quality of life after botulinum toxin-A injections for idiopathic detrusor overactivity: results from a randomized double-blind placebo-controlled trial. BJU International. 103 (11) 1509-151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766/ 

출처 - ICR News, 2009. 6. 2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77

참고 : 2365|2998|699|2996|2245|3046|4606

Stacia McKeever
2009-07-03

하나님은 마음이 변하시는 분인가? 

(Contradictions : A Change of Heart. Does God change His mind?)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이것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분의 본성과 성품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나 아래와 같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중보자의 탄원이나 백성들의 회개가 있었을 경우 하나님이 한 국가나 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돌이키시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 32:14)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 26: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렘 26:13)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렘 26:19)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sin)를 벌하셔야만 한다는 것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 2:15-17, 롬 6:23).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고 죄를 회개한 자들에게 자비와 용서가 한량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 두 특성 사이의 균형은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렘 18:7–10)


표현된 감정들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분으로 비난될 때 인용되곤 한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1)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감정(emotions)이 없는 분이심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사실, 감정은 자주 의인화된 언어로, 또는 인신동감론적(anthropopathic, 신의 감정을 사람의 감정처럼 표현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동과 감정을 사람의 행동과 감정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던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가지셨던 감정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절들은 ”나는 그것을 처음에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은 불순종과 사악함에 대해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가져야만 하는 반응으로, 한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또는 특성이 변하시는 분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슬픔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하신 본성이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결정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성을 알고 있다.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서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 많은 인간들에 대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개인 또는 국가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선택하시는 데에는 변하실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05/contradiction-a-change-of-heart

출처 - AiG, 2009. 1. 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63

참고 : 4492|4608|4578|4540|4043|4480|4488|4452|4451|4450|4416|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

미디어위원회
2009-04-29

노아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이후에도 나타나는 것은 

홍수가 전 지구적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가?

(Contradictions: Location, Location, Location)

Bodie Hodge 


      창세기 6~9장을 읽을 때,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홍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지명이나 인명으로 등장하는 것은 성경의 모순인가? 예를 들어 표1은 가장 흔한 사례들을 나타내었다 :  


표 1.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의 명칭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꽤 간단하다. 몇몇 실례를 사용하여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 자주 지명들은 전해져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일리노이 주의 베르사유(Versailles)는 정착민들이 켄터키로부터 일리노이로 이주하여 왔을 때, 켄터키 주의 베르사유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이전의 켄터키의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베르사유로부터 따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베르사유에서 만난 적이 있었죠? 라고 묻는다면, 어느 베르사유입니까? 라고 물어봐야할 것이다.

2. 지명들은 자주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붙여지곤 한다. 가나안(Canaan)이라는 지명은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에서 유래하였다. 미조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St. Louis)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King Louis IX)로부터 그 지명이 유래했다.    

3. 간혹 사람들의 이름은 지명으로부터 유래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런던(London)이 들어간다. 이 이름은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부터 유래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볼 때, 어떻게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쉽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의 손자는 하윌라(Havilah) 땅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스(Cush)는 함의 아들이다. 그리고 앗수르(Asshur)는 셈의 아들이다. 노아, 함, 셈은 홍수 이전에 살았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이름들은 바벨탑 분산 이후에 이들 일부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의 지명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Ethiopia) 지역이고, 앗수르는 앗시리아(Assyria) 제국이 발원하였던 지역이다... 등등. 

예를 들어, 만약 내가 템즈 강(Thames River)을 언급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즉시 영국 런던에 있는 유명한 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코네티컷 주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도 같은 이름의 템즈 강이 있다. 정착민들이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만나게 된 강들을 그들이 친숙했던 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던 것이다. 노아와 그의 후손들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 예상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도 에덴동산에 있었던 유명한 강들을 따라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어떠한 모순도 없다. 단지 새로운 장소, 강들, 민족들을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들을 다시 사용하여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23/contradictions-location-location-location 

출처 - AiG, 2009. 3. 23.

미디어위원회
2009-03-28

아르박삿을 낳을 때의 셈의 나이에 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My Three Sons. Were Noah’s sons born when he was 500 

as Genesis 5:32 says or not as stated in Genesis 7:6 and Genesis 11:10?)

Bodie Hodge 


     노아(Noah)는 홍수 이전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 6:10). 노아의 아들들은 모든 같은 나이가 아니었다. 창세기 5:32절부터 시작하여 보자.

”After Noah was 500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Shem, Ham and Japheth.” (Genesis 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 5:32)

이 구절은 노아가 그의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 500세, 또는 그 이상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노아가 500세 된 이후부터 아이들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주 자녀들의 목록은 가장 중요한 자녀로부터 시작한다(예. 창 11:26). (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가계가 이어진다). 우리는 창세기 10:21절과 9:24절로부터 각 자녀들의 상대적 나이(서열)를 알 수 있다.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Genesis 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창 10:21)  (개역개정, 개역한글 등의 한글 성경은 야벳이 셈의 형이 아니라, 셈이 야벳의 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When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found out what his youngest son (Ham)had done to him.” (Genesis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4)

창세기 10:21절은 야벳이 가장 나이가 많은 자녀였고, 노아가 500 살이었을 때 태어났던 자녀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9:24절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함은 가장 나이가 어린 자녀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자녀였다.

그러므로 셈은 야벳과 함 사이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창세기 7:6절과 창세기 11:10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셈은 노아가 500살 때에 야벳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또는 세쌍둥이가 아니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창 7:6)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 11:10)

따라서 노아는 (500세에 야벳을 낳았고) 홍수가 땅에 일어났을 때 600세 였고, 셈은 홍수가 일어난 2년 후에 100세 였다. 그러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였을 때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셈은 백 세(노아 나이 602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는(창 11:10) 성경 기록은 오류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함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함은 셈 이후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창세기 5:32절은 노아의 모든 아들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은 그들의 탄생 순서와 나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02/contradictions-my-three-sons 

출처 - AiG–U.S. 2009. 2. 2.

미디어위원회
2009-02-13

창세기 1장의 수 패턴

 : 날(day, 욤)의 길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 Does it mean the days are non-literal?)

Jonathan Sarfati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은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있는 패턴(형태)을 가지고 있는데, 영역본에는 종종 잘 반영되어있지 않다. 그 최초 날에 사용된 수사는 기수(cardinal number, 예를 들면 하나, 둘, 셋 ...)로서, יום אֶחָד (yôm echad, 욤 에하드, Day One)는 한 날(하루)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날들은 서수(ordinal numbers, 둘째, 셋째, 넷째 ...)로 수식되어 있다. 또한,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에는 정관사(ה, ha, 하, the)가 없고, 반면 여섯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정관사가 붙여져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간의 문자적 번역은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그 여섯째 날’, ‘그 일곱째 날’이 된다.

이 패턴은 문자적 날(literal days)들에 반대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 중의 선두주자인 휴 로스(Hugh Ross)가 제기한 논증들 가운데 하나를 무력화하는데 충분하다 :

”특별한 창조의 날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 있어서 문장들의 색다른 배열이 존재한다. 히브리어를 낱말 대 낱말로 번역한 텍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어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저녁이었고 아침이었다. 몇째 날” ... 그 낱말의 배열은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을 분명히 벗어난 것이다. 이 구문론적 불분명함이 어떤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날(day)'이 여기에서는 어떤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1]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휴 로스는 그 구문에 대해 틀렸으며, 따라서 그의 논증은 붕괴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러한 주장은 히브리어에 대해 학식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무모하게 해석했던, 그리고 허위인 것으로 판명된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2] 

호주 장로교회의 교회사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던 목사인 로렌드 와드(Rowland Ward) 박사는 창세기가 쓰여진 그대로의 역사라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책인, 무신론자인 이안 필머(Ian Plimer, 호주의 지질학자)가 쓴 책 ‘신을 위해 거짓말 말하기(Telling Lies...)‘에 대해서도 신뢰를 부여하고 있었다.[3] 와드는 휴 로스보다 더욱 궤변적이다. 그리고 정확한 패턴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창세기의 기록된 그대로의 해석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에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설은 세속적 과학(진화론)에 비굴하게 항복하여 변형시킨 견해이며, 또한 빈약한 해석에 의한 불일치로 와드 자신이 썼던 것처럼,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실제로는 시대(ages)들로 해석되어야함을 요구하고 있는 이론이다.[4] 그러나 골격가설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있는 중이며[5, 6], 따라서 이 글은 오직 수 패턴(number pattern)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들 특징들은 단지(mere)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강조했다면 기대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cf. 민수기 29:17, 20, 23, 26, 29, 32, 35).”[7]

성경(cf. 눅 3:1-2)에 기록되어 있는 연대기(chronology)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기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면, ‘단지(mere)’라는 단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서 아래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와드와 같지 않게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그 패턴이 실질적으로 문자적 날들의 경우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콩코디아 대학(Concordia University)에서 신학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는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는 창세기의 패턴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그는 ‘욤 + 수 = 문자적 날’이라는 규칙에 예외는 없으며, 그 패턴은 창세기의 날들은 24시간의 날들임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

”만약에 אחד (에하드는 first가 아니라 one이라는 의미)가 기수로 사용되었다면, 창세기 1:5절의 설득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밤’, ‘낮’, ‘저녁’, 그리고 ‘아침’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을 것이다. 창세기 1:5절은 그 날의 주기를 시작하고 있다. 빛이 창조됨으로써 빛과 어둠은 하나의 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낮'과 '밤'이라는 명칭을 주셨다. 저녁은 빛/낮으로부터 어둠/밤으로의 전환이다. 아침은 어둠/밤으로부터 빛/낮으로의 전환이다. 하나의 저녁을 가지고 하나의 아침을 가지는 것은 온전한 하루를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창세기 1:5절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저녁 + 아침 = 하루(evening + morning = one day). 

그러므로 매우 비범한 문법적 구조의 사용에 의하여, 창세기 1장은 하루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구절에서 특별히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 한 절 내에서 '날(day)'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나타난 의미는 하루의 주기 동안에 일광(밤의 대비로서)에 의하여 조명되는 시간(낮)이다. 그 두 번째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광과 어둠의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기간(날)이다.

그것은 그 본문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져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에, 정관사의 생략에 의하여 그것은 '하루'라고 읽혀져야 하며, 그것에 더하여, 비록 넷째 날 이전까지 태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 그리고 낮과 밤의 전환을 가진 태양력의 24시간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정관사가 없음을 설명해준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a)'('the'가 아니라) 둘째 날을 성립시켰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 셋째 날을 만들었고, 그리고 넷째 날도 그런 식이었다. 그 여섯째 날에, 마침내 그 관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조차, 문법은 이상한데, 왜냐하면 기대되는 바와 같이 욤(יום)에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여섯째 날이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창조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와 같이, 그 일곱째 날은 욤(יום)에 관사가 없는 채로, 욤 하쉬브아(יום השביעי, 날 그 일곱째)(창세기 2:3)라고 서술되어있다. 이것은 또한 서술자가 부여한 것이며,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8]

그 일곱째 날에 대한 맨 마지막 부분은 그 일곱째 날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휴 로스와 같은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주장하는) 점진적 창조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저속한 주장을 논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9] 그러한 주장도 다른 타협안들처럼 불신되어지고 있다.[10, 11]  

그리고 스타인만은 특별한 문맥보다 전반적인 의미론적 범주에 의해 한 단어를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12], 히브리어는 명백하게 24시간 하루(24-hour days)들임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

‘욤(יום)’은, 영어 단어 ‘날(day)’과 같이, 그 의미가 다양하다. 그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24시간 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ref]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의 길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5절에서 에하드(אחד, one, 하나, 기수)가 사용되고, 그 이후 다른 날들에 대하여는 서수들이 사용된 독특한 용례는 그 본문 자체가 통상적인 태양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3]


결론

창조론자들은 서수와 기수의 패턴들, 그리고 어떤 날들에는 정관사들이 있고 다른 데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패턴은 창조에 대한 사실과는 관련이 없지만, 사용되어진 날(욤)을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References
1. Ross, H., Creation and Time, NavPress, Colorado Springs, p. 48, 1994.
2. For examples, see Sarfati, J., Shame on Charisma! 29 May 2003.
3. For thorough refutation, see Plimer Files.
4. Ward, R.S., Foundations in Genesis: Genesis 1–11 Today, New Melbourne Press, Melbourne, Australia, p. 44, 1999.
5. Pipa, J.A., From chaos to cosmos: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13 January 1998.
6. Kulikovsky, A.,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37(4):237–244, 2001.
7. Ward, Ref. 4, p. 45.
8.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JETS) 45(4):577–584, 2002; quote from pp. 583–584; italics in original, bold added.
9. Ross, Ref. 1, pp. 48–49.
10. Is the seventh day an eternal day, Creation 21(3):44–45, 1999.
11. Kulikovsky, A.S., God’s rest in Hebrews 4:1–11, Journal of Creation 13(2): 61–62, 1999.
12. New Testament scholar Dr Don Carson referred to the exegetical fallacy of ‘Unwarranted adoption of an expanded semantic field. The fallacy in this instance lies in the supposition that the meaning of the word in a specific context is much broader than the context itself allows and may bring with it the word’s entire semantic range.’ Exegetical Fallacies,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2nd Ed., p. 60, 1996.
13. Steinmann, Ref. 8, p. 584, italics added. He has a footnote, ‘Whether or not one believes in the veracity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 six solar days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As the ETS accepts biblical inerrancy, we can presume that the author himself doesn’t intend to advocate error in Genesis. Rather, he is pointing out that it is more honest to say that Genesis teaches 24-hour days but is wrong, than pretending that it’s right but teaches something else.

 

*참조 1 :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 교수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o6SaewoYLw

The Ultimate Assertion : והארץ :הארץ ואת השמים את אלהים ברא בראשית

Evidence of Supernatural Design in the Divine Prologu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07_2/j07_2_184-196.pdf


*참조 2 :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Good approach misapplied to get ‘analogical days’ : A review of Genesi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35-39.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70/ 

출처 - Journal of Creation 17(2):60–61, August 2003.

미디어위원회
2008-12-29

‘충만하라’ 인가, ‘다시 충만하라’ 인가?

 (Contradictions: Full of Meaning Replenish or fill?)

 Stacia McKeever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Genesis 1:28, KJV)

어떤 사람들은 킹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에서 이 구절이 아담과 하와가 지구 행성을 ‘다시 채우는(refill)’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두 번째 창조(second creation)’의 부분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간격이론(Gap theory)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뉴킹제임스 역본(New King James Version)에서 같은 구절을 읽어보라.

”Then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fillthe earth and subdue it;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Genesis 1:28, NKJV)

킹제임스 역본에서 사용된 단어 ‘replenish’는 17세기(King James Version이 번역될 당시)에 단순히 ‘fill(채우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킹제임스 역본에 참여했던 번역가들이 살던 그 당시에 단어 ‘replenish‘는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비축하다(stock), 채우다(fill), 공급하다(supply), 거주하다(inhabit)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Fill‘과 ’refill‘의 단어 관계처럼 ’plenish‘와 ’replenish‘ 관계는 성립하지 않음을 주목하라(plenish 라는 단어는 영영사전에 없다). ’Replenish‘라는 단어는 ‘replete(충만한)’이라는 단어로부터 왔다. 행복으로 ‘replete’하게 되었다는 것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어 ‘replenish’가 ‘to fill again(다시 채우다)’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1612년에 있었다. 이 해는 킹제임스 역본이 발간된 그 다음 해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하나의 시적인 의미(a poetic sense)로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28절은 시가 아니다. 영어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서 의미가 변하면서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replenish 단어는 일반적으로 ‘refill’을 의미하게 되었다.

창세기 1:28절에 ‘replenish’ 단어에 대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male’ 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fill’을 의미한다.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의 다른 모든 곳들에서(예로 창 1:22) 그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그 단어는 히브리 단어에서도,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 번역자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그 당시 단어에서도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번역가들이 ‘replenish’ 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fill up(가득 채우다. 즉 make replete(full))’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지구를 다시 채우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뉴킹제임스 역본(그리고 몇몇 다른 번역본들)은 그 단어를 정확하게 오늘날의 말투인 ‘fill’로서 번역하고 있다. 이 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모순은 원본 사본들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히 번역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번역 - IT 사역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2/contradictions-full-of-meaning 

출처 - Answers, 2008.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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