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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11-14

창세기 사건들과 관련된 족장들의 연대와 나이에 관한 연구

이강래


      주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기록의 진실성과 역사성에 대한 신뢰는 한 번의 믿음(요20:29)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을 더욱 연구하고 알리는 것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Larry Pierce가 쓴 ‘벨렉의 시대에(In the days of Peleg)’[1]는 성경의 기록들이 진실된 역사들임을 굳게 믿는 신앙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교회까지도 진화론의 영향을 받는 이 시대에 올바른 믿음을 견지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큰 빛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성경에서는 하나같이 창10:21에서 노아의 아들 ‘셈’을 ‘야벳의 형’으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그를 세 아들 중에서 장남으로 알고 있는 성도들이 많다.[2] 이것은 창5:32에서 노아의 아들들을 소개할 때 셈을 가장 먼저 기록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장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몇 군데를 더 살펴보면, 셈이 장남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 번역된 부분들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난할 때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지금이라도 잘못 번역된 부분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성경공부를 할 때나 설교를 할 때, 창세기의 나이와 관련된 기록들에 대하여 이해가 잘 되게 설명을 한다면,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인식시키게 되므로 개인의 신앙을 굳건히 하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창세기의 나이 문제에 관하여 두 부분으로 정리하였는데, 첫 부분은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 나와 있는 족장들의 나이를 계산하여 창조를 시점으로 한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를 표로 정리하였으며, 두 번째 부분은 12장부터 창세기 나머지 부분에 산재해 있는 나이들과 사건들을 서로 연결이 되도록 정리하였다.

 

Ⅰ.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타난 족장들의 연대

 

1. 노아의 아들 셈의 정확한 출생 시기

(창5: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이 말씀은 노아가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고, 셈이 장자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는 구절이다. 히브리어에서 ‘오백세 된 후에’라는 표현은 ‘오백세 되는 해에’라는 말과 같다.

(창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한글 개역성경에 나타난 위의 두 말씀에 의하면 ‘함’은 막내아들임에 틀림이 없고, ‘셈’이 장자가 되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어의 모호한 구조는 21절에서 ‘셈’과 ‘야벳’이 어느 쪽이 형인지 잘 알 수는 없게 되어 있으므로, 21절에 대한 올바른 번역은 ‘야벳의 형’이 아니라 ‘야벳의 형제’라고 하여야 한다. 새로 나온 성경들도 여전히 고쳐지고 않고 있다.

(창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위의 말씀에서 셈은 홍수 후 제 2년에 100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노아가 600세 되는 해에 홍수가 발생(창7:11)하였다는 것은 셈의 나이 98세에 해당되는 해였으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되는 해에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아 나이 500세 때에 태어난 장자는 다름 아닌 야벳이었다. 셈과 야벳의 서열이 이렇게 분명한 이상 우리나라 거의 모든 성경에서 보이는 창10:21의 ‘야벳의 형이라’를 영어성경 NIV, KJV과 같이 ‘야벳이 그의 형이라’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면 5장 32절의 정확한 진술은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야벳과 셈과 함을 낳았더라”라고 해야 한다. 셈이 세 아들 중 첫째로 언급된 것은 홍수 후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의 중요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2. 천지창조에서부터 노아홍수가 발생한 시기

(창7:11~12)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경은 노아가 1056년에 태어났으므로 천지창조 이후 1,656년에 노아홍수가 발생한 것으로 계산된다.[3]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앞으로는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홍수 직후에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120년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사실과 모순이 된다. 이 말씀은 홍수 전 모든 인류의 극심한 타락에 대한 심판에 대한 예고로서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과 인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120년 후에 대홍수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오래전부터 에녹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 시기까지 알려주심으로 온 인류가 회개하고 돌아올 충분한 시간을 주신 것이다. 노아가 그 말씀을 받들고 지켜 나갔던 시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노아는 오늘날 우리들의 수명보다 더 긴 시간동안을 전보다 더 경건한 생활을 하며,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을 것이며, 방주를 만드는 일에 모든 준비를 다하였을 것이다.


3. 바벨탑은 언제 쌓았는가?
앞서 소개한 Larry Pierce가 쓴 ‘벨렉의 시대에(In the days of Peleg)’라는 글에서 대홍수는 B.C. 2349-2348년에 일어났으며, 벨렉은 약 백년 후인 B.C. 2247년에 태어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부록에 나타난 연대표에 의하면 벨렉이 태어날 때가 천지창조 이후 1757년이므로 홍수 후(노아 나이 600세가 되던 해가 1656년이 됨) 101년 정도가 될 때였다. 노아는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으므로, 바벨탑의 사건과 그 이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4]


4. 데라는 칠십 세에 누구를 낳았는가?

(창11:26)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22: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11장 26절의 기록은 데라의 세 아들들이 세쌍둥이인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고, 아브람이 장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2장 20절의 ‘동생 나홀’은 11장 26절에 기록된 순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기에 기록된 ‘동생’이란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아브라함이 나홀의 ‘형’이라는 증거가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 원문에 충실하여 외국의 대부분의 성경들은 ‘동생’이 아닌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다.[5] 그러나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상고하면 아브람은 오히려 막내에 가까운 것을 알 수가 있다.

(창11: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행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위의 세 구절의 말씀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가나안으로 떠날 때는 아버지 데라가 죽고 난 이후였으며 그 때의 나이는 75세이었다는 것이었다.[6] 그러므로 데라는 아브람을 낳을 때 적어도 130세 이상이었을 것이다. 11장 26절의 말씀은 데라가 70세부터 아들을 낳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하는데, 아브람을 가장 먼저 기록하는 것은 히브리인의 조상으로서 그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창11: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창11: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위 말씀들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은 하란으로서 그가 장자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Ⅱ. 창세기 12장 이후의 연대


1.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에 관한 이야기

(가나안에서의 생활)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창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20:12)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7]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창20:12에 의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딸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누이로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기 위하여 한 가족 내에서 형제자매들과의 결혼이 아브라함 때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근친간의 결혼은 후에 모세의 율법시대(레18:6,9,14)부터는 철저히 금지 된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살이나 적었으므로, 부친인 데라는 적어도 140세에 딸 사라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로의 궁으로 간 사라)
(창12: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23:1)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가나안으로 이주한 그 해에 바로 기근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사라가 심히 매력적인 까닭으로 강제적으로 바로의 궁으로 끌려갈 때의 나이는 65세 이상일 때였다. 이 기록은 오늘날의 경우와 비교하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부친 데라가 205세까지 살았고,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으며, 사라 자신은 127세까지 살았으므로, 당시의 수명은 오늘날의 2배는 족히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라의 65세 매력은 오늘날 30~40대의 나이에 해당하는 젊음을 가졌다고 보여 진다. 사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도 있었겠으나, 65세 사라의 매력에 관한 이야기는 오히려 노아홍수 직후 5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늘날보다 두 배 이상 장수할 수 있었던 지구환경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노아 방주로 구원받았으나 지금은 멸종한 많은 종류의 공룡들이 그 시대까지는 살아남아 있었다는 증거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8]

(이스마엘의 출생)
(창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

창세기 16장은 아브람과 사래가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 동안 유지되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할례의 명령과 개명)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창17:15)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17: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창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창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6장의 아브람과 사래의 실패에 대하여 17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심히 번성케 하시는 복을 주시되,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각각 의미 있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으며, 할례를 명하시므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굳은 믿음을 갖도록 하셨다. 그러나 18장에서 보인 사라의 반응으로 볼 때, 그녀는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 때 되던 이야기이다. 단순하게 그들의 나이로만 생각한다면 완전하게 생각이 굳어버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끝없는 노력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아브라함 99세, 사라 89세 때에는 자식에 대한 소망이나 열정이 완전히 식어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에 나타나셨으며, 이름을 바꾸게 하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그들의 나이에 관계없이 다시금 용기를 주시고 사명을 부여 하셨다. 우리들도 때로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을 만한 영적인 침체 상태를 들어갈 때가 있다. 그럴수록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 이삭의 연대

(이삭의 출생과 순종)
(창 21: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창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 약속된 아들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는 때에 마침내 태어나게 되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나이는 3세라고 보여 진다.[9] 그런데 이 날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므로 사라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하갈과 이스마엘은 결국 쫓겨나게 된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03세 때의 일이다.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므로 17세에 그가 쫓겨난 셈이 된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는 아브라함의 결단은 물과 불을 통과할 믿음의 순종이었다. 높은 산을 향하여 자신을 태울 그 무거운 번제 나무를 지고 올라갈 수 있는 나이는 15세 이하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때의 이삭의 나이를 대략 20세 전후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나이는 120세 전후로 판단된다.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피 쉬며 "내 아버지여,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물었을 때, 100세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이삭이 드디어 결박을 당하고 단 나무 위에 뉘인 상태에서 아버지의 칼이 목을 내려치려고 할 때까지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늙은 아브라함은 이삭의 반항을 당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삭의 순종은 골고다를 향하여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말없이 걸어 가셨던 예수님을 예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정말 죽게 하셨다. 예수님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에 감동하여 순종(마 26:39)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분이 가장 귀한 인격을 소유하신 탓이리라.

(창23:1)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창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창23:3)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삭의 나이 37세 때였으며, 남편 아브라함이 137세 때였다. 사라는 살아생전에 이삭이 결혼하여 낳은 손자를 안아 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삭은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왜 미리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길만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 나서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매장지를 급하게 마련한 것을 보면 사라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느낌을 받는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이나, 아들인 이삭만큼 오래 살지 못한 이유는 90세에 이삭을 낳는 목숨을 건 출산 때문일지도 모른다. 늙은 사라에게 있어서 이삭을 얻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소망이었을 것이다. 사라는 그래도 오늘날의 우리들보다는 훨씬 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이삭과 리브가)
(창24:24)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창25: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창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창25:17)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 삼십 칠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창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이삭은 어머니 사라의 사망 후 3년 만인 40세에 5촌 조카인 리브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나이 140세일 때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75세 때에 175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에 애굽 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89세였으며(창16:16), 아브라함의 귀여운 손자 야곱과 에서의 나이는 15세였다.

(창26:34)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창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창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삭과 리브가에 있어서 큰 아들 에서의 결혼은 근심이었다. 에서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나안 지방의 딸과 결혼할 때, 이삭의 나이는 100세였다.[10]


3. 야곱의 연대

(야곱의 도망)
(창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35:28)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창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세기 27장은 이삭은 눈이 너무나 어두운 관계로 자신이 곧 죽을 것만 같아 죽기 전에 큰 아들 에서에게 모든 축복을 하게 하려 할 때,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계략으로 그 축복을 가로채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이 나던 때는 이삭이 137세 때였는데, 그가 18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는 아직도 43년이나 남아 있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로부터 벗어나 사는 길은 하란에 있는 삼촌의 집으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야곱이 길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에 해가 저물어 유숙하려고 한 돌을 취하여 베게하고 잘 때, 땅과 하늘을 통하는 사닥다리 꿈을 꾼 이야기를 할 때는 청년 야곱을 상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곱의 도망할 때, 아버지 이삭의 나이가 137세였다면 야곱의 나이는 77세 때(창25:26)의 일이었다. 이 나이의 계산은 다음 말씀들에서 가능하다.

①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때 그의 나이는 130세였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고”

② 요셉이 바로를 섬기기 시작할 때 30세였다.

(창41:46)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③ 요셉이 형들에게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을 데려오도록 하여 아버지를 만날 때의 나이는 39세였는데, 이것은 30세 때에 바로를 섬기기 시작하여 7년간의 풍년과 2년간의 흉년이 지나갔다는 다음 기록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요셉이 태어날 때 야곱은 91세였다.[11]

(창41:53-54) "애굽 땅에 일곱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창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④ 요셉이 태어날 때는 라반의 집에서 봉사한 14년의 끝 무렵이었다. 따라서 야곱이 집을 떠날 때의 나이는 77세(91세-14년)였고, 아버지 이삭의 나이는 137세(창25:26)가 되는 것이다.

(창29:18)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창29:27)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찌니라”

(창30:25)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하란에서의 야곱)
(창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창29: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창31: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야곱이 77세에 부모를 떠나 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며, 라반의 두 딸과 결혼 한 때는 84세였으며, 그때부터 무려 13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이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거의 비슷한 나이인 84세나 85세경에 첫아들 르우벤을 레아를 통하여 낳은 셈이다. 요셉이 태어난 것은 야곱이 91세 때였으며, 이삭의 나이 151세 때였다. 야곱이 라반의 집을 떠나 귀향할 때는 무려 20년이 지난 97세일 때였으며, 이삭의 나이는 157세였다.

(야곱의 귀향 후 10여 년 동안의 일들)
(창30: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창30:25)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창34: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세기 29장 후반부와 30장 전반부까지는 야곱이 자매인 레아와 라헬과의 결혼 생활에서 자녀들이 태어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의 기록들이 자녀를 낳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라헬이 요셉을 낳을 때까지 레아는 무려 7년 동안 7자녀를 낳게 되는 셈이다.[12] 이러한 무리한 가정에서 벗어나자면 레아의 딸 디나는 라헬의 아들 요셉보다 뒤에 태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야곱이 하란을 떠날 때에 외동딸 디나는 4, 5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디나가 세겜에게 봉변을 당했을 때는 그 땅의 여자 친구들과 놀기 위하여 혼자 돌아다녀도 간섭하지 않는 14, 15세 이하의 나이로 짐작이 된다. 그것은 요셉이 그 형제들에 의하여 강제로 노예로 팔려나갈 때가 17세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지 대략 10년 전후의 일이라고 추측된다. 동생 디나가 봉변을 당함으로 20세 초반에 불과한 시므온과 레위는 자제력을 상실하고 엄청난 피의 보복을 감행하였고, 야곱은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된다. 야곱과 요셉의 나이 차이는 91세이므로, 요셉이 17세의 나이로 노예로 팔려갈 때, 야곱은 108세였다. 이 당시에 야곱과 같이 살던 이삭은 168세였으므로 야곱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이삭은 이 사건 후에도 12년을 더 살았다.


(유다와 요셉의 나이 차이)
(창35:28)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세라”

(창41:46) "요셉이 애굽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하고”

아버지 이삭이 180세에 사망할 때에 야곱의 나이는 120세였다. 야곱은 97세에 고향으로 돌아 왔고, 그 후 그가 바로와 만난 것은 130세일 때이므로, 고향 가나안에서 아버지 이삭과 23년의 세월을 함께 지냈다.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지 13년만인 30세에 총리가 되었을 때, 야곱은 121세였고 이삭은 1년 전에 사망하였다.

(창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창29: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창30:9)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창30:17)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창30: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창30:25)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창46: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라헬의 언니 레아가 낳은 자녀들은 아들 6명과 딸 1명이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아들인 유다를 낳고 난 이후에 일시적으로 생산이 멈추었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서 첫 아들인 르우벤부터 유다까지는 연년생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현대에도 형이 돌이 되기 전에 동생이 태어나는 경우가 흔히 보고되고 있으므로, 유다는 레아가 결혼한 후부터 4년 동안의 기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루우벤부터 유다에 이르는 4형제가 연년생이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유다는 요셉보다 3년 먼저 태어나게 된다.[13] 따라서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할 때 유다는 42세[14]가 되며, 쌍둥이 아들들을 비롯하여 손자들도 함께 도착하게 된다. 이 기간이 22년 밖에 안 되므로, 어쩌면 증손자가 될 수도 있었던 유다의 손자들이 생길 수 있는 최대한의 나이가 되기 위하여 르우벤부터 유다까지는 연년생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요셉의 고난)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창38: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창38: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46:12)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창세기 38장의 기록은 유다 지파의 기원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가 언제 결혼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창38:1의 ‘그 후에’라는 문구를 ‘요셉이 팔린 때 이후’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앞서 언급한 대로 야곱의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할 때에 42세의 유다에게는 헤스론과 하물이란 손자가 있었으므로, ‘그 후에’라는 말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귀향하여 생활한 전반적인 기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요셉이 팔릴 때에 17세가 되므로 유다의 나이는 20세가 되는데, 애굽으로 이주할 때까지 유다가 겪은 파란만장한 22년의 기간 동안에 결혼하여 손자까지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다의 손자 2명이 태어나기 위하여 적어도 3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며, 다말에게서 유다의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날 때 장자인 엘이 죽은 후 2년 정도의 기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22년에서 5년을 뺀 나머지 17년의 기간 동안은 다말과 결혼한 엘과 다말이 낳은 유다의 아들 베레스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균등하게 배분한다면 엘과 베레스는 태어난 지 8년 반 만에 자녀를 낳았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15] 만약 이 당시의 결혼 적령기를 13세 전후로 생각한다면 유다가 결혼한 나이를 역산할 수가 있다.

유다가 결혼 한 나이 = 42세(애굽으로 이주) - 2년(유다의 아들 베레스가 낳은 장남의 나이) - 13년(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결혼 적령기) - 2년(엘이 죽고 다말에게서 베레스가 태어날 기간) - 13년(유다의 장남 엘의 결혼적령기) = 12세

위의 계산에서 베레스의 두 아들이 헤스론과 하물이 쌍둥이가 된다면 유다가 결혼 한 나이는 13세가 될 것이다. 유다는 14세 이전에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8장의 기록을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요셉이 팔려갈 때에 유다는 이미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창37:2에서 요셉이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한 것은 일종의 고자질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품성을 닦는데 게을리 하여 큰아버지 에서처럼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방 여인들과 함부로 결혼하는 잘못된 삶의 방식을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요셉은 다른 형제들이 조상들을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삶을 회복하도록 기도하며 노력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요셉의 팔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순수한 신앙을 고수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고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요셉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의 예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조
1)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3372&orderby_1=editdate desc
2) 영어 성경 NIV와 KJV(한글 번역본 포함)에서는 한국 성경들과는 반대로 야벳을 셈의 형으로 소개하고 있다.
3) ‘사마리아 오경’은 야렛과 므두셀라와 라멕의 나이를 줄임으로써 1307년 만에 노아홍수가 발생한 것으로 계산되며, ‘70인역’의 다양한 사본에서는 아담에서부터 에녹에 이르기까지 자녀를 낳은 나이를 약 100년 씩 더하므로 2242년~2262년으로 계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참고만 할 뿐이다.
4) 벨렉이 출생한 해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때는 노아,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등 모든 조상이 모두 살아 있었다.
5) 한글성경 공동번역은 ‘아우’로, 표준새번역도 ‘동생’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형제’로, 영어성경은 모두 ‘brother’로 표기되어 있고, 일본과 중국 성경도 ‘兄弟’로 표기하고 있다.
6)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2754&orderby_1=editdate desc
7) (Genesis 20:12) Besides, she really is 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though not of my mother; and she became my wife.(NIV)
8) 성경의 증거로는 욥기 40장에 나오는 ‘하마’와 ‘악어’는 각각 ‘베헤못’과 ‘리워야단’이라는 특이한 모습을 한 동물들을 번역한 것인데, 그것들은 노아 홍수 후까지 살아남은 공룡들의 후손이라고 보아야 한다. 1997년 일본의 한 저인망 어선이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바다공룡인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us)’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증거들로 노아 홍수 직후부터 오랫동안의 자연환경은 최근보다는 훨씬 양호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많은 증거들을 보기 원한다면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길 바란다.
9) 유대인 어머니들은 대개 3년 동안 아기에게 젖을 먹였다고 보여진다. 대하31:16, 삼삼1:22~28, 마카베오하 7:27.
10) 창25:26과 창26:34에서 이삭의 나이 60세와 에서 40세의 나이를 더하면 이삭의 나이는 100세가 된다.
11) 130세(야곱이 바로 왕을 만날 때) - 39세(요셉이 태어나서 아버지 야곱을 만날 때, 30+7+2).
12) 요셉은 7년 봉사가 끝나는 시기에 태어났으므로 창29:31~창30:25의 자녀들의 출생이 7년간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레아는 이 기간 동안에 4째 아들 유다를 낳고 잠시 생산이 멈추었기 때문에(29:35, 30:9) 쌍둥이가 아닌 자녀를 7년 만에 7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3) 야곱의 결혼 첫 해부터 레아의 네 아들이 연년생으로 출생하였으며, 요셉은 결혼 생활 7년 말미에 태어났다.
14) (창41:46, 창45:6) 요셉이 총리가 될 때 30세였고, 아버지와 재회할 때는 풍년 7년과 흉년 2년이 지났으므로 그의 나이는 39세가 된다. 유다가 요셉 보다 3년 위가 된다면, 이때 유다의 나이는 42세가 되는 셈이다.
15) 유다의 장남 엘이 살아 있던 기간과 엘의 사후에 엘의 처 다말로부터 낳은 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결혼 적령기의 기간은 중복되지 않는다.

 

*참조 :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Who Begat Whom? : Closing the Gap in Genesis Genealogie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who-begat-whom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3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출처 - 창조 147호, 2006년 10-12월호

구분 - 5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707

참고 : 1922|2016|2138|2638|2797|2936|2982|3020|3024|3331|3589|3640|3689|3731|3901|4297|4351|4440|4487|4492|4540|4869|5033|5035|5084|5265|5275|5381|5394|5542|5628|5627|5969|5870|5923|6044|6107|6110|6135|6146|6152|6153|6283|6285|6360|6414|6477|6480|6491|6581|6512

미디어위원회
2006-10-30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망이 있었는가? 

(Was there Death Before Adam Sinned?)

Kent Hovind 


사망(death)은 사람의 죄(man's sin) 때문에 이 세상(the world)에 들어왔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로마서 5:14)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1-22)

일부 기독교도인들은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래된 지구 연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죄 이전에 사망이 있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오래된 연대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아담이 식물(plants)을 먹었을(죽였을) 것이기 때문에, 죄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식물이 성경적 의미에서 살아있는(alive)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많은 성경 구절들에서, 식물은 사람과 동물이 죽는 것과 같은 의미로 죽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는 복잡한 기계로서 자판을 누르는 것으로 가동될 수 있는 것처럼, 식물들은 하나의 복잡한 자체가 재생되는 음식물 근원(self-replicating food source)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는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 엔진도 정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이 죽는 것처럼 죽는 것이 아니다. 식물들은 호흡을 하지 않고(no breath), 피도 가지고 있지 않다(no blood). 아래의 구절들에서 식물과 살아있는 것들의 차이가 뚜렷함을 주목하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창 1:11-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 1:20-23)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4)

식물들은 셋째 날에 창조되었고, 살아있는 것들은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9-30)

푸른 풀(green herbs)을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식물(food)로 주셨음을 주목하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3)

사람은 나무 또는 실과와 같지 않게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3-5)

가인의 제물은 피(blood) 또는 생명(life)이 들어있지 않았고,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 당신은 감자에서 피를 얻을 수 없다. 가인의 제물은 아름다울 수 있었고, 그것을 드리기 위해서 가인이 열심히 일했을 수 있었지만, 거기에 죽음(희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으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7)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창 6:19-21)

여기에서 살아있는 것(living things)과 먹기 위한 음식(식물)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창 7:14-15)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창 7:2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 9:1-4)

이제 사람은 식물처럼 고기를 먹는 것까지 허락되었다. 여기에 다시 한번 우리는 살아있는 것과 식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자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나 물론하고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 정하려니와” (레 17:10-15)

식물들은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과일과 열매들은 나무로부터 떨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먹는다. 만약 그것들이 나무 위에 있는 동안은 살아있는 것이고, 땅에 떨어질 때 죽는 것이라면, 금지되었을 것이다. 식물들은 마르고, 시들고, 쇠잔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사망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렘 8: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편 37:2)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시편 102:4)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시편 102:11)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찌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시편 129:6)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이사야 1:30)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이사야 15:6)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 시냇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달과 갈이 시들겠으며” (이사야 19:6)

”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과 나일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아 없어질 것이며” (이사야 19: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이사야 40:7)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이사야 40:24)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이사야 64: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예레미야 8:13)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예레미야 12:4)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실과를 따며 그 나무로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로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볼찌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17:9-10)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베드로전서 1:24)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3:2)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식물은 뽑혀진다. 내가 발견한, 식물이 죽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은 욥기 14:8절이다.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찌라도” (욥기 14:8)

이 장에서 말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욥이다. 그리고 욥은 이 문장에서 사람이 죽을 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중이다. 욥기가 가르치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욥(또는 그의 친구들)이 욥기에 기록된 것들을 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성경은 사탄이 말한 거짓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욥기에 기록된 이 한 구절로 성경이 식물들도 죽는다고 말했다고 볼 수는 없다.     


요약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이 6일(six days) 동안에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11).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애굽기 31:17).

지구의 나이가 성경이 허락하고 있는 약 6,000 년 보다 더 오래되었기(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주 간격이론(gap theory),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 등으로 타협하며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 한다. 이러한 비성경적 견해들은 모두 죄 이전에 사망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항상 식물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식물들은 사람과 동물이 죽는 것과는 다른 경우임을 살펴보았다. 죄 이전에 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필요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죽음과 고통과 질병과 서로 잡아먹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보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그대로 정확하다.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에 어떠한 죽음도 없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많은 사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죄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선물로 주신 영생을 받지 못했다면(로마서 6:23), 지금 용서를 구하고 창조주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관련기사 : '공룡도 암에 시달렸다'…공룡 화석서 골육종 흔적 첫 확인 (2020. 8. 4.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00804111100009?input=1195m

*참조 : Was There Death Before Adam Sinned?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was-there-death-before-adam-sinned/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drdino.com/articles.php?spec=49 

Henry M. Morris
2006-10-02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The Most Important Verse in the Bible?)


       성경의 첫 번째 절은 성경의 기초가 되는 구절이다. 사실상 창세기는 성경의 기초가 되는 책이며, 또한 전 세계와 모든 민족들을 다루고 있는 창세기의 처음 11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창조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요약하고 있으므로, 처음 11장의 기초가 된다. 결국 창세기 1:1절은 이들 기초가 되는 장의 기초가 되는 절로써, 우주 자체의 최초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 그 절은 모든 기초들 중의 기초이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절은 기록된 단어 중 최초의 단어들을 담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책의 시작 문장이므로, 이 단어들은 기록된 것들 중에 가장 널리 읽혀진 단어들이다. 서양 문명의 사람들은 최소한 성경을 읽으려 했을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는 경우라도 최소한 성경의 시작 문장들은 읽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 1:1절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나머지 어떤 부분이라도 믿기 어렵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즉, 하나님이 정말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분은 만물을 지배하시며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더욱이, 이 한 절은 세상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인간의 잘못된 모든 철학들을 반박한다.

1. 그것은 무신론(athe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범신론(pantheism,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는 믿음)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것들을 초월(물질적인 우주와 독립적이시고 그것들과 떨어짐)하시기 때문이다.

3. 그것은 다신론(polythe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그것은 물질주의(materialism)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물질은 시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5. 그것은 이원론(dual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홀로 계셨기 때문이다.

6. 그것은 인본주의(humanism)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며, 궁극적인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7. 그것은 진화론(evolution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러한 모든 잘못된 철학들은 단지 같은 믿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각각의 철학들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실체는 영원한 우주 자체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우주가 현재의 형태로 발달한 것은 단지 그 자신의 성분들이 본질적으로 갖는 성질들에 의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질에 있어서, 위의 철학들 각각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용한다. 예를 들면, 이원론은 다신론의 요약된 형태이고, 다신론은 범신론의 통속적인 표현이며, 범신론은 물질주의를 전제로 하고, 물질주의는 그 기능이 진화론으로 이루어지며, 진화론은 인본주의 안에서 완성되어지며, 인본주의는 무신론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위대한 진리에 대항하다

위의 모든 철학 체계들은 무신론적 진화론적 인본주의 체계(system of atheistic evolutionary humanism)라고 말할 수 있다. 기타 철학 개념(자연주의,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이신론(d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일원론, 결정론(determinism), 실용주의(pragmatism) 및 기타)들은 그와 같은 기괴한 구조 속에 합병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놀랍도록 단순하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무진장 심오한 위대한 진리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대해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다.

고대나 현대나 유신론에 반대하는 수많은 철학들이 있어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왔지만, 하나님의 책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창세기의 첫 번째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사실은 아주 명확하여,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시 14:1)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만
그러한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반대편에서 바라볼 때 분명해진다. 즉, 현대의 모든 철학들처럼 고대의 모든 종교 책들과 종교 체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나 에너지로부터 시작한다. 태고의 혼돈(물이든 불이든 기타 무엇이든)에서, 자연의 힘(또는 그것들을 인격화해 주는 신과 여신)이 우주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해서 세상을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대 민족들 가운데, 그러한 범신론적 진화론적 우주기원론이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을 받은 창세기의 기록은 그것들을 반박하거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침묵의 이유는 대개, 창세기 기록이 이들 다른 체계들이 발달되기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창세기의 진실한 기록을 대치하거나 반박하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나중에 발전된 것들이다. 성경은 원래 천지창조 직후에, 하나님 자신에 의해(‘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4) 창조주간의 실제 사건을 단순한 이야기 형태로 시작하면서 쓰여졌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존재하심(reality of God)과 창조(Creation)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있는 것들이나, 혹은 일반적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창세기 1:1절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중요한 선언에 들어있는 단어들을 고찰해 보자.

◈ ‘하나님 (God)’.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으로써, 그분의 장엄하심과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 내내 사용되는 이름이다. 마지막의 ‘임/im'은 히브리어의 복수어미이므로, 엘로힘은 실제로 ’신들(god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방인의 신들에 관련된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번역되었다 (예로써, 시편 96:5). 그러나, 여기서는 장엄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분명히 단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런 방식으로 사용된 2,000번 이상의 경우 중 첫 번째이다. 이와 같이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형 이름, 즉, ‘단-복수’ 명사로써, 신격(Godhead)의 단-복수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이시다.

◈ ‘창조하시다 (Created)’. 이것은 놀라운 단어 빠라(bara)로써, 항상 하나님의 사역에만 사용된다.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에 명령하여 존재하도록 하실 수 있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

사람은 사물을 ‘만들거나(make) 조성할(form)’ 수 있지만, 창조하지는 못한다. 하나님도 역시 사물을 ‘만들거나 조성할’ 수 있으신데(히브리어로 각각 아사(asah)와 야싸르(yatsar)), 사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빨리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만들거나 조성하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보다 복잡한 체계로 구성하는 것인데 반해, 창조의 활동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만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 가운데만 있었던 것이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창세기 1:1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다음의 정보를 주고 있다. 즉, 물리적인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활동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 한 분만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다. 또한 그분은 전능하시므로, 그분이 말씀으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영원한 초월적인 하나님에 관한 이 개념을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alternative)인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eternal self-existing universe) 개념도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영원한 하나님(Eternal God)이냐, 혹은 영원한 물질(eternal matter)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현재의 원인-결과에 관한 과학법칙이 유효하다면, 영원한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작위적인 물질 입자들이 복잡하고, 질서 있고, 지성적인 우주를 저절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만이 그러한 결과(effects)를 산출해 내실 수 있는 적합한 단 하나의 원인(Cause)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참조 : 자료실/성경과 기독교/창세기
http://www.creation.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B04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 교수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dbnyKYN_F8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4/i2/verse.asp 

출처 - Creation 14(2):20-21, March 1992

구분 - 5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54

참고 : 4868|4870|4872|4878|4982|4985|5094|5271|5275|5332|5394|5395|5402|5415|5440|5463|5514|5578|5625|5627|5628|5711|5723|5741|5753|5852|5861|5870|5882|5886|5889|5910|5985|5986|6044|6017

Clifford A. Wilson
2006-09-21

창세기와 잃어버린 점토판들 

(Genesis and the Lost Tablets)


    나의 이전 학생 중 한 명이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들이 문자 그대로 사실인지에 대한 나의 설명과 확실성을 물어왔다.

다른 민족들도 창세기 1-11장의 내용들과 비슷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로서 알려져 있는 바빌로니아의 서사시(Babylonian epic)에는 창조(creation)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마르두크(Marduk) 신은 괴물인 악어 신 티아마트(Tiamat)를 둘로 잘라서, 하나로부터 하늘(heavens)을, 다른 하나로부터 땅(Earth)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은 한쪽 눈으로부터 흘러 나왔고, 다른 한쪽 눈에서는 티그리스(Tigris) 강이 흘러 나왔다.

이 점토판(tablet)의 한 복사본이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오스납발, BC 625년에 죽음)의 궁전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창조 점토판(original creation tablet)이라고 주장되어졌었다. 그래서 창조는 그때 이후 성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에스라(Ezra)는 그보다 1000년을 더 일찍 살았던 모세를 대신하여 창세기 기록에 대한 신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바빌로니아 서사시의 다른 (수백년 더 초기의) 복사본들이 발견되어오고 있다.


성경적 기록의 우수성

또한 아시리아의 궁전에서 길가메쉬 서사시(Epic of Gilgamesh)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발견된 12 개의 단편적인 점토판(fragmentary tablets)들 중에서 11번째 점토판은 왜곡되었지만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성경적 기록에 비해서 매우 열등함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신들은 홍수물들이 점점 올라가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신들은 자신들이 하늘 밖으로 씻겨져 나갈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홍수가 끝났을 때, 신들은 바빌로니아의 노아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이 제공한 희생 제물에 파리 떼처럼 모여 들었다. 배고팠던 불쌍한 신들은 그들을 먹여줄 사람들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바빌로니아의 이야기에서, 사람은 존엄한 신들 아래에서 천한 일을 떠맡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창조되었다.

최근에 아트라하시스(Atrahasis)의 단편 서사시가 번역되었는데, 이제 거기에는 창조, 사람의 역할, 홍수가 하나의 연속적인 기록으로서 함께 모아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성서고고학의 세계는 창세기의 (극적으로 우수한) 기록이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을 떠난 유명한 알브라이트(W. F. Albright) 교수는 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상세한 설명들은 다른 어떠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라고 썼다.

또 다른 유명한 고고학자인 크라머(Samuel N. Kramer) 교수에 의해서 잘 정리된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바벨탑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기록을 성경의 기록에 비유하였다.


성경적 설명이 인정되다.

과거 사람들이 오랜 수명을 가졌었다는 사실은 키쉬(Kish, 오늘날 바그다드 남쪽)에서 발견된 수메르 왕들의 목록(Sumerian king list)에 의해서 인정되어졌다. 최근에 학자들은 왕들의 나이에 대한 수만 년이라는 숫자를 잘못 번역했었음을 밝혀내었다. 이들 수메르인들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60진법이 아니라 십진법을 사용했었다. 따라서 이제 수메르인 목록에 있는 전체 연대는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전체 연대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홍수 이전에는 환경이 매우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입심 좋게 말해지던 오래된 연대를 던져버리게 한다)  

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표는 단순한 전설로 간주되었었다. 다시 한번 알브라이트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그는 이들 표들이 '놀랍도록 정확하게(astonishingly accurate)” 쓰여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참조 :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12)

소위 세속적 고고학에서도, ‘전설(legends)’들은 오늘날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예는 아시리아 왕의 목록(Assyrian king list)으로, 여기에는 그들 왕들이 텐트에서 살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 중 최초의 왕은 투디야(Tudiya) 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는데, 그 왕의 실존 여부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왕은 BC 2200년에 에블라(Ebla, 오늘날 시리아)의 왕과 동맹을 맺었던 실제로 존재했었던 왕으로서 밝혀졌다. 에블라 왕의 또 다른 동맹은 이집트 기록에서 알려진 것처럼 이집트의 바로인 페피 1세(Pepi I)와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 기록들이 땅 속에서 파낼 필요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왔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창세기는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단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시(poetry)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기록인 것이다.


* Clifford A. Wilson, Ph.D.
Dr. Wilson is known for his archaeological work and his book refuting Erich von Däniken's 'gods from outer space' theory. He has been in charge of Psycholinguistics at Australia's Monash University and was Professor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참조 :  How was Moses able to read pre-Tower of Babel texts?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eedback/2006/1027.asp

The development of languages is nothing like biological evolution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4/i2/languages.asp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oes-archaeology-support-the-bible

On the origin of language—Part 1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i4/language.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7/i1/tablets.asp

출처 - Creation 17(1):50–51, December 1994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41

참고 : 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640|886|887|3249|3233|2323|1412|1413|629|2746|1805|528|2545|2515|2458|522|521|3148|3289|3372|4148|4100|4071|3974|3945|3872


Larry Pierce
2006-06-30

벨렉의 시대에 

: 고대문헌은 성경의 연대기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In the days of Peleg)


      창세기 10:25에서는 노아로부터 네 세대 후에 벨렉(Peleg: 나뉨(division))이라는 의미)의 출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세상(the earth)이 나뉘었음이요.” 어떤 사람들은 그 때에 지구의 대륙들이 나뉘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은 매우 제한된 시간 간격 이내에 일어났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생기는 지질학적 격변은 굉장한 재앙이 될 것이며, 이것은 또 다른 노아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대륙이 나뉘는 것과 같은 사건은 노아의 대홍수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다.[1]
 
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구절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때에 민족과 나라들이 나뉜 것과 관련짓는다. (영어에서 ‘earth’ 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히브리어의 ‘erets’도 나라(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 따라서 ‘erets Yisrael’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땅, 나라, 민족 등을 의미한다.) 어셔(Ussher) 대주교가 추론한 성경 연대기에 따르면, 대홍수는 B.C. 2349-2348 년에 일어났으며, 벨렉은 약 백년 후인 B.C. 2247년에 태어났다. 이것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대의 작가들이 밝혔던 적이 있는가? 그 대답은 틀림없이 ”그렇다”이다.


바빌론이 시작되다

때는 BC 331년이었다. 알렉산더 대제가 아르벨라(Arbela, 앗시리아의 고대 도시) 근처의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다리오(Darius) 왕을 쳐부순 후에, 그는 바빌론(Babylon)으로 여행을 했다. 거기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Chaldeans)이 1903년 동안 천문 관측을 한 자료들을 받았는데, 갈대아 사람들은 그것이 바빌론의 창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맞다면 바빌론의 창시가 BC 2234년이 되며, 벨렉의 출생 후 13년 뒤이다. 이것은 AD 6세기에 라틴의 작가였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가 쓴 ‘하늘에 관하여(De Caelo)’의 여섯 번째 책에 기록되어 있다. 포피리(Porphyry, 비기독교인 그리스 철학자, AD 234-305경)도 역시 같은 숫자로 추론했다.[2]


이집트가 등장하다

비잔틴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티누스 마나세(Constantinus Manasses, 1187년 사망)는 이집트인의 국가가 166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맞다면, 페르시아의 왕인 캄비세스(Cambyses)가 이집트를 정복한 BC 526년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면, 이집트의 창시는 BC 2188 년이 되는데[3], 이는 벨렉의 출생 후 약 60년이 되는 시기이다. 이때쯤 함(Ham)의 아들인 미스라임(Mizraim)이 그의 집단을 이집트로 인도했다. 그래서 히브리 단어로 이집트가 미스라임이다 [4]. (또는 때때로 ‘함의 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시편 105:23,27).


.미술가에 의한 바벨탑(Tower of Babel)의 복원. 고대의 지구라트(ziggurats)를 모델로 한 이러한 그림은 실제의 바벨탑과 유사할 가능성이 있다. 바빌론을 여행하는 길에 그것을 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5세기 경)는 그것은 8층을 가지고 있었으며, 60m 높이로 거대하게 서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리스가 출발하다
 
4 세기에 가이사랴(Caesarea)의 감독이며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에 있는 고린도(Corinth) 서부의 그리스 도시 시키온(Sicyon)의 왕이었던 에지알레우스(Egialeus)는 그의 통치를 BC 2089년에 시작했는데, 이는 첫 번째 올림픽(Olympiad)이 열렸던 BC 776년 보다 1313년 전이다.[5, 6] 만약 유세비우스가 맞다면, 이 왕은 벨렉의 출생 이후 160년 뒤에 그의 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바빌론과 이집트와 그리스는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함을 주목하라. 이들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히브리인들의 성경에서 발견하는 성경적 계보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바벨탑 사건은 이들 다른 왕국들이 창시되기 이전에 생겼어야 할 것이다. 그 탑과 같은 지역에 있었던 바벨(바빌론)은 물론, 최초의 왕국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왕국들 중에서, 바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왕국이 가장 늦게 창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들 작가들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첫 번째가 바빌론이고, 다음이 이집트이며, 그 다음에 그리스가 창시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성(human nature)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도 한다. 바벨탑 사건이후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언어에 따라서 강제로 그룹이 나뉘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르다. 그들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부득이 할 경우에만 바벨에서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군사적 위협, 혹은 더 푸른 목초지를 찾고자 하는 열망 등은 그들로 하여금 더 멀리 이동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주기적인 이동에 의해 느리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역사가들은 바벨탑과 대홍수의 사건을 무시하고 있지만, 문명이 바벨탑이 있었던 부근의 중동에서 시작하여,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퍼져나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 연대기에서 추론한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시간 틀(time frame)을 사용하고 있다.
 
B.C. 3세기에 이집트의 역사를 기록했던 마네토(Manetho)로부터 흥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바벨탑 사건이 벨렉의 출생 이후 5년 뒤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7] 이것이 맞다면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이동이 어떤 기간을 두고 일어났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들 여러 나라의 확실하게 알려진 지도자들이 매우 어린 아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성경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를 재건했을 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건 하지 않건 간에, 그것이 성경의 정확도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인 연대기를 이용하여 세속주의자들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결정해야 하며, 역사에 관한 최근의 세속적 고찰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고쳐서는 안된다. 이 연구 영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가장 최근에 재건된 세속적인 인류 역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앞다투어 조작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무시해 왔다.
 
최근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4장과 6-9장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훌륭한 과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창세기 5, 10, 11장(및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연대기 부분)의 계보에 대해서는 세속의 역사학자들의 영향권에 조용히 복종해 버렸다. 이들 연대기에 관한 그들의 파괴적인 작업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거꾸러뜨렸다. 이제 성경적 배경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성경의 연대기에 들어있는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그 숫자들 사이에 들어 있는 말씀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불신앙을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


*Larry Pierce is retired and publishes biblically related material as one of his hobbies and enjoys the study of ancient history. He and his wife, Marion, live in Winterbourne Ontario



References and notes

1. Baumgardner, J., Probing the earth’s deep places, Creation 19(3):40–43, 1997; Snelling, A.A., Plate Tectonics: Have the continents really moved apart? TJ 9(1):12–20, 1995.
2. Ussher J., Annales Veteris Testamenti, Flesher and Sadler, London, p. 5, 1654. (This work is in Latin. I am preparing a new English translation, which is scheduled to be published in September 2000. The paragraph number for this footnote is 49 in that revised work.)
3. Ref 2, p. 5, or paragraph 51 in the revised work.
4. Even now, Egyptians call their country Mizr.
5. Ref. 2, p. 6, or paragraph 54 in the revised work.
6. Eusebius, Chronici Canones, Humphredurn Milford, London, Preface pp. 1–14, 1923. (This Latin copy was prepared by Johannes Knight Fotheringham.)
7. Manetho, The Book of Sothis, Harvard Press, Cambridge, MA, p. 239. (Loeb Classical Library 350). Manetho was the victim of many Egyptian fairy tales in constructing his chronology of Egypt. The Egyptians would place the Flood and Peleg’s birth much earlier than the Bible, but still they linked the Babel incident with Peleg's birth.
8. Ussher deduced that the division of the earth at the time of Peleg’s birth was Noah dividing the land among his grandchildren. They subsequently moved to Shinar, where they conspired to hinder this dispersion of them as commanded by God and begun by Noah, building the city and tower of Babylon (Babel). God frustrated this project with the confusion of languages, which was then followed by the dispersion of nations.


부록 : 성경과 연대기

오늘날 성경의 연대기를 대하는 세 가지 잘못이 있다. 하나는, 성경을 열등하게 보아서 거기에 나오는 연대기적 자료들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위의 기사에서 인용한 고대의 세속 작가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성경에 있는 자료의 정확성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신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분열왕국의 기간을 줄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한 주요 지지자로 에드윈 틸레(Edwin Thiele)가 있다.[1] 틸레는 단편적인 앗시리아의 연대기를 사용하여 분열왕국의 기간을 약 50년 가량 줄임으로써, 앗시리아에서 어림짐작으로 만든 자료와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바빌론은 벨렉이나 바벨탑보다 이전에 창시되었어야 한다.

세 번째 그룹은 성경의 연대기를 늘리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초기의 사람으로는, BC 3세기에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70인역(LXX)을 만든, 이집트의 랍비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마네토의 연구와 일치시키기 위해,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기간에 대한 성경 연대기에 700년 가량을 임의로 더했다. 그들이 행한 것이 옳다면, (나라들이 나뉠 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도 그렇고) 벨렉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죽어 없어진 것으로 된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성경적 고고학자들은 오늘날에도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이집트 사제들의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듯이, 현대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바빌론과 이집트의 창시를 수천 년 이전으로 되돌린 세속의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2]


References and notes

1. Thiele 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Kregel, Grand Rapids, MI, 1994. The most mysterious thing about his work is the way he handled the Hebrew numbers to make them conform to Assyrian chronology. Little attempt was made to make Assyrian chronology fit the biblical chronology.

2. Merrill F. Unger,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Zondervan, Grand Rapids, MI, 1954. On page 84 he states Egypt dates back to about 5000 BC. On page 97 he states that Susa near Babylon dates back to about 4000 BC. Since the biblical date for the Flood is 2349 BC, how long could these people tread water? Although this book was published in 1954, its opinions are reflected in newer works dealing with biblical archaeology. If anything the situation has become worse, not better, in the last fifty years. Unger is a very conservative and well-respected Bible scholar. If he could be deceived, how much more careful should we be today when so many more errors are afoot?

 

*참조 :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Biblical chronogenealogi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06/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20-23.pdf

‘In Peleg’s days, the earth was divided’: What does this mea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20/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2/i1/peleg.asp ,

출처 - Creation 22(1):46–49, December 199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72

참고 : 3148|3233|303|1412|1413|568|2545|2405|1395|528|512|3974|3945|3898|3872|2525|2323|1805|4148|4100|4071|4868|4870|4872|4878|4982|4985|5094|5271|5275|5332|5394|5395|5402|5415|5440|5463|5514|5578|5625|5627|5628|5711|5723|5741|5753|5852|5861|5870|5882|5886|5889|5910|5985|5986|6044|6017

Carl Wieland
2006-01-27

900년의 수명 

: 홍수 이후 단축된 인간 수명의 원인은? 

(Living for 900 years)


       소수의 사람들만이 120년 정도까지 산다. 우리가 (수명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가고 있지만, 과연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노화에 관한 놀라운 새로운 정보는 대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long lifespans)에 관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창세기는 오늘날의 경험에 비추어 말도 안 되는 긴 인간의 수명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930 년(아래 그래프 참조)을 살았고 ,노아는 더 긴 950 년을 살았다. 이 긴 수명은 아무렇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노아의 홍수 전에는 길었고 홍수 이후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홍수이전 족장들에서부터 (출생년도에 따라 표시) 성경기록에 나타난 수명을 살펴보면, 홍수 후에 수명이 급격히 짧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극적인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된다.

성경은 이러한 긴 수명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긴 수명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쉽게 비웃는다. 모든 치명적인 질병을 피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인간은 일반적으로 100세를 얼마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도 120세를 많이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노화(aging)에 관한 증거에 의하면, 오늘날 평균 수명의 상한선은 사람이나 다른 다세포 생물의 예에서 보듯이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어떤 것 때문은 아님을 제시하고 있다, 

질병, 음식, 부상과 여러 환경 요인들은 물론 우리의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의 저변에는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 어떻게든 기록되어 있는 유전정보가 수명의 상한선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정말로 놀라운 것이 아님은, 우리들은 어떤 가계는 대부분이 고령까지 살며, 또 어떤 가계는 그 반대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비록 평균 수명의 상한선이 각 종마다 프로그램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종 실험은 이 한계가 바뀔 수 있음을, 심지어 극적으로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초파리(fruitflies)와 벌레(worms)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이 개체군에 수명연장을 발현시킬 수 있기도 하고 제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로 같은 종류의 초파리 군에서 한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보다 평균 몇 배나 더 오래 살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수명과 관련되는 유전자 스위치(genetic switch)가 벌레의 한 종에서 확인되었다.


우리는 왜 노쇠해 가는가?

왜 모든 다세포 생물은 (인간처럼) 결국 노쇠하여 죽게 되는가? 모든 고정된 구조들은 결국 마모되어 없어진다는 물리법칙을 단순히 인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생물학적 조직체는 그 자체를 스스로 수리하는 능력인 내재된 지능(DNA에 정해진 대로)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 동물들은 노쇠로 죽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은 단지 2개의 복제품으로 분화되고 각각이 다시 두개로 분화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간과 같은 생물체에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조직기관이 있다 (예: 간, 콩팥 등). 이 세포들은 왜 계속 나누어지고, 수리하여, 영원히 그 장기를 새롭게 하지 않는가? 만일 노쇠한 세포를 새 세포로 교체하여 새로운 조직기관이 만들어진다면, 인간의 신체도 노쇠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넘어지는 나무에 깔려죽거나 감염으로 죽을 수는 있겠지만, 늙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는 되지 않고, 우리의 각 기관은 노쇠하게 된다. 기관 내의 세포들은 일정기간 동안은 증식하지만 영원히 계속하지는 않는다. 몇 번의 분화(dividing)를 거친 후에, 이 세포들은 분화를 멈춘다. 보통 인간의 세포는 단지 약 80–90 회 분화를 하면, 그 이상은 분화하지 않는다.

우리 염색체들 각각의 끝에는 텔로미어(telomere)라고 불리는 구조가 있다. 이것은 끝에 많은 구슬(beads)이 달린 계수장치(counting device)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포가 둘로 나뉘어 질 때마다 구슬 하나가 잘라져 나가서 텔로미어(아래의 그림 참조)가 짧아진다 [1]. 구슬이 모두 없어지면 세포 분열이 더 이상 발생할 수 없다. 그때부터는 각 세포는 쇠약해지더라도 새 세포로 교체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당신이 치명적인 사고나 질병을 피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기관의 고장으로 죽게 된다.

세포가 나누어지는 작용은 DNA에 기록되어 있는 유전정보의 지시에 의해 통제된다. 그래서 노화를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미리 정해진 유전적 한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만일 그 유전적 한계가 다른 수명을 정해두었다면, 900년 이상의 수명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할 어떠한 알려진 생물학적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 유전적 수명한계에 정말로 큰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단순히 초파리에서 육종 선택을 통하여 유전자 순서를 뒤섞어서 그들의 수명을 현저하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진짜 문제는 홍수이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는가’이다. 


노아의 새로운 환경

홍수 이후 수명 감소를 보면서, 그것이 현저하게 변화된 세계와 관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화석 기록의 증거는 홍수이전 세계에서 탄산가스 (아마 산소도) 농도가 더 높았음을 시사한다. 많은 학자들이 대기의 수증기층이 홍수이전 세계를 우주방사선(cosmic radiation)으로부터 보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로 인해 노화가 크게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홍수 후의 환경이 엄청나게 유해하게 변화되어 수명이 800년이나 줄어들어 1/9로 되었다고 보는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에 그는 벌써 600 세가 넘었다. 그러나 훨씬 유해한 환경으로 인해 그가 빠르게 노화하여 20-30 년 만에 죽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350 년을 더 살아 심지어 그의 조상 아담보다도 오래 살았다.

우리는 환경적 요인들이 인간 삶의 발달 단계에서만 문제를 초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아가 여전히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쉬운 설명은 노아의 유전적 구성상태가 그에게 긴 수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홍수 이전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정해진 수명보다 매우 긴 수명을 가지도록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나? 전 세계의 인구가 단지 몇 사람으로 줄어버린 점을 상기해 보자. 긴 수명을 결정하는 정보가 포함되었을지 모르는 특정 유전자가 (대립형질(alleles)로 알려짐) 인류가 사실상 8명만 남고 멸절되는 과정(병목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글 참조)


다른 요인들

비록 그런 유전정보의 손실이 수명감소의 원인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유해한 돌연변이가 더 많이 발생한 것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돌연변이의 일부는 텔로미어 길이의 손실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홍수 이후에는 음식물로 사용 가능한 식물군이 급격히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서 사람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한 하나의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열렬한 건강식품 예찬론자라도 우리가 단순히 음식을 바꿈으로서 오늘날 다시 950년이나 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 다른 요인들 일부는 수세기 동안 계속되는 지속적인 수명감소의 이유였을 것이다.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고, 모세는 120세, 다윗왕은 단지 71세까지 살았다. 흥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는 환경요인으로 인해 수명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노아의 수명에 가깝게 살기 위해서는 그의 유전적 인자들의 일부가 있어야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노화와 죽음의 궁극적인 이유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저주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아담은 영적으로는 즉시 죽었고, 육적으로는 오늘날 우리들처럼 바로 그날부터 죽어가기 시작했다. 

현대의 유전학 연구는 우리 모두가 노쇠와 죽음의 필연성을 타고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로 우리 얼굴에 생기는 주름살을 볼 때, 신성한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죄가 참으로 무거움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정죄함으로부터의 피할 길을 주셨음을 한없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수명의 차이

사고나 질병에 의한 사망을 무시하면, 여러 생물들은 상이한 평균수명을 가지도록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정된 수명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점점 축적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생물에서는 선택적인 육종이 평균 수명을 크게 늘렸다.


가진 것 이상으로 사는 방법

약 30 년 전에, 프랑스의 어느 중년 변호사는 90대의 여성 고객과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이 변호사는 그녀에게 상당한 월급을 주기로 하고, 그녀의 아파트 소유권을 양도받았다. 그녀는 그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지 않고 평생 살수 있도록 합의가 되었다. 이 합의는 명백히 양쪽에게 다 유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나이가 워낙 많았으므로 그 변호사는 아파트를 매우 싼값에 사는 셈이었고, 고객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여생을 충분한 수입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에게는 아주 불운하게도 그의 고객 칼멘트(Jeanne Calment)는 현대 역사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 되었다. 1997년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는 122세 하고도 164일을 살았다.  그녀의 변호사는 그녀가 죽기 훨씬 이전에 노환으로 죽었다. 그는 결국 그녀에게 아파트의 가격의 몇 배를 지불하게 되었다.

최근 두 명의 프랑스 학자가 칼멘트의 양쪽 가계 5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를 했다. 그녀의 조상들은 모두 같은 지역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 비하여 무려 10.5년을 더 오래 살았다. 그 학자들은 그녀의 생활양식이나 음식물은 장수에 큰 요인이 아니었으며, 희귀한 장수 유전자들의 집합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분명히 그녀는 더 일찍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불운도 겪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수명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는 우리의 논제와 일치한다. 홍수 이전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가지 장수하는 유전적 요인이 있었던 것이 그들이 장수한 이유였고, 그 이후 이들 유전요인을 잃어버린 것이 수명감소의 원인일 수도 있다. 


홍수 이후의 유전적 손실이 수명 감소의 원인?

여러 형태의 유전자들(대립 형질로서 여러 특질을 나타내는 DNA 정보 사슬)이 소수의 개체군에서는 소멸되는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이라고 알려진 단순한 현상이 있다.

유전자들은 쌍으로 존재하며,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또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위의 그림에서 보여준 것처럼 유전자의 G 형태는 아버지에게 있고 어머니에게는 없다. 그들의 아이들은 각각 G 형태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다. 그러므로 후손의 누구도 이 유전자를 계승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렇게 낮은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단지 3명의 자녀를 가졌다면, 확률은 1/8이다). 전체 인류가 노아와 그의 3명의 아들과 3명의 며느리로 감소되었던 상황에서, 노아의 유전자 중 일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지금 노화가 대부분 유전적 요인인 것으로 보이므로, 장수 유전자들의 일부 손실이 홍수 이후 수명감소의 이유일 수 있다. 아마 그 이후의 개체군 분리가(바벨에서) 이 유전자 제거에 더 한층 기여했을 것이다.[2]


자손에게 전달되는 유전적 조합의 가능성


죽음으로의 초읽기

각 염색체(텔로미어(telomere)로 불리는)의 끝에 있는 ‘덮개(capping)’는 운동화 끈의 끝에 있는 덮개처럼 말단이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짧아지다가 한계에 이르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수명이 결정되는 단지 하나의 방법이다. 만일 사람들이 적절한 유전적 구성(genetic makeup)을 가진다면, 그들이 현재보다 훨씬 오래 살지 못할 어떤 생물학적 이유도 없다.

인간의 세포 중에서 영원히 분열을 계속할 수 있는 세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암세포이다. 이들에게는 분열을 멈추게 명령하는 스위치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간의 세포를 필요로 하는 의학 실험실은 어느 불행한 암환자의 암세포에서 키운 세포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 (이것을 헬라 세포(HeLa cells)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포가 바로 Henrietta Lacks라는 여성의 암세포이기 때문이다). 헬라 세포는 실질적으로 영생한다 (기존의 헬라 세포를 전부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한).

최근, 텔로미어의 복제와 관련된 효소에 의한 실험 결과는 많은 흥분을 초래했다.[3] 인간의 세포라인을 변화시켜 그들의 한계보다 많은 횟수로 분열하게 만들었다. 일부는 그런 조작에 의해 사람들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지 않는 한 매우 오래 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화라는 것은 분명 이러한 기초적인 결과로 단순화한 논의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증거로 보아 유전적 요인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음이 강력히 제시되고 있다.


*참조 : Temporal changes in the ageing of biblical patriarch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51/

Did People Like Adam and Noah Really Live over 900 Years of Ag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06/04/did-people-live-over-900-years

 

Bibliography/further reading

New Scientist: November 22, 1997, p. 7; January 3, 1998, p. 6; February 7, 1998, p. 14; February 28, 1998, p. 23.
▷ ‘Can science beat the body clock?’ Sunday Times (London) January 18, 1998, p. 15.
▷ ‘Extraordinary lifespans in ants: a test of evolutionary theories of aging’, Nature389:958–960, 1997.
▷ ‘Why do we age?’ U.S. News & World Report, August 18–25, 1997, pp. 55–57.
▷ ‘Genetics of Aging’ Science 278(5337):407–411, 1997.


References and notes

1. Simplified for brevity — there is a fluctuation in length, with a net shortening. In our brain cells, the telomere does not shorten.

2. This assumes that there was probably considerable variation in lifespans in the pre-Flood world, with some only programmed to live a maximum of say, 400 to 500 years. This may be why Noah’s sons failed to match his great age.

3. This enzyme, called telomerase, was discovered in 1980 by the winner of the 1998 Australia Prize, Prof. Elizabeth Blackburn. Without telomerase, cells cannot copy their ‘caps’. 


*관련기사 : 동물의 노화 늦추는 새로운 유전자 발견 (2007. 11. 5. 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com/article/articleview.asp?id=414501


*참조 : 아담은 정말 930년을 살았는가? : 사람 수명의 감소곡선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가리킨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29&bmode=view

노아 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에 관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83&bmode=view

조상들과의 만남 : 창세기 연대기의 정확성과 족장들의 긴 수명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65&bmode=view

홍수 이후 단축된 인간의 수명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796&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4/years.asp 

출처 - Creation 20(4):10-13, September 1998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01

참고 : 4067|3783|2936|77|491|489|4982|5969

Ken Ham
2005-12-14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동일하게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 지구 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 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24

참고 : 548|2864|2346|540|2313|2638|888|2016|1922|2982|2942|2797|3689|3640|4345|3589|3931|4375|4380|3812|4440|3612|4516|5394|5381|5265|5275|5035|5033|4869|4540|4492|4487|6581|6577|6265|6188|5542|5628|5627|5870|5923|5969|6044|6064|6066|6071|6107|6110|6135|6146|6152|6153|6189|6283|6351|6360|6414|6477|6480|6491|6512|6639|6642|5395|5415|5402|5463|5514|5638|5741|5852|5861|5985|6017|6089|6179|6205|6235|6387|6401|6432|6446|6458|6529|6533|6285|6332|6452|6553|6582|6614|6617|6620|6640|6652|6676|6680

Frank Sherwin
2005-11-29

창조, 타락, 그리고 콜레라

(Creation, Corruption, and Cholera)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toxin)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alterna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 과학 분야의 공헌들에 의해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창조 모델은 많은 비진화론적 시각으로 분석되어왔다. 창조과학자들은 오늘날의 병원성 세균과 기생충들은 사실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는 유익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때때로 유해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의 대장에 있는 대장균(E. coli)과 같은 것들은 유익한 세균이다. 이 복잡한 유기체는(Back to Genesis No. 146을 보라) 비타민들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질병을 예방하기까지 한다. 또한 분선충(Strongyloides stercoralis)이라고 불리는 실처럼 생긴 벌레가 있다. 그것은 독립 생활과 기생 생활을 같이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벌레는 사람 밖의 환경에서 잘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에게 감염되었을 때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생충 감염과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타락과 우주적 저주의 결과였다고 제안되고 있다.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하와이산 짧은 꼬리 오징어(Hawaiian bobtail squid)에 공생(symbiotic)하고 있는, 기묘한 빛을 내고 있는 발광 박테리아(V. fischeri)는 이 독소와 매우 유사한 독소를 만든다. [1] 짧은 꼬리 오징어는 먹이가 있는 맑은 물에 사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박테리아의 발광 특성( luminescent properties)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는 좋은 사냥꾼이지만, 커다란 야행성 포식자들에게는 맛있는 간식이 된다. 물 아래에서 보면, 어두운 오징어는 달빛(moonlight)에 의해 신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목표물이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징어의 배 쪽(ventral side)에는 카메라의 조리개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되는, V. fischeri을 포함한 잉크 주머니(ink sac)에 의해서 둘러싸인 빛을 내는 장기(a light organ)를 가지고 있다. 세균이 내는 빛은 반사체에 의해서 증강되고 달빛과 같이 아래쪽으로 비춰지게 되면서, 오징어는 은밀한 잠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균들이 배가 고파지면, 그들은 콜레라균과 비슷한 독소를 분비한다. 이 독소는 오징어를 병들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먹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는 먹이를 제공한다.


한 진화론자는 제안했다 : ”아마도 우리가 콜레라의 병인을 연구해오고 있었을 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2] 창조과학자들은 이것은 저주(Curse)의 결과일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학자인 조 프란시스(Joe Francis)에 의해서 제안된 한 창조 이론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바이러스와 미생물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미생물들은 화학적으로 풍부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질 환경(physical environment)과 거대한 유기체 사이(macro-organisms)의 연결 고리로서 하나의 유기적 기질(organosubstrate)로서 창조되었다. 이들은 다세포 생물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기질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


정말로 많은 박테리아 세포들은 하나의 공생적 군집(symbiotic community)으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은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병원성은 최초의 창조 의도로부터 벗어난 것일 수 있다. 미생물 V. fischeriV. cholerae가 그 예이다.



1. http://whyfiles.org/022critters/light2.html (사진을 볼 수 있음)
2. Ibid.
3. Francis, J. 'Organosubstrate of Life,' The Fifth International Conference

 


*참조 :

1. 병원균과 같은 미생물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습니까? 노아의 식구들이 각종 병원균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홍수 시에 모두 사라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508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98

참고 : 2365|699|1406|2996|2245|495|4677

David Catchpoole
2005-11-28

회의론자들의 도전 : 사랑의 하나님은 왜 킬러 해파리를 창조하셨는가? 

(Skeptics challenge : a ‘God of love’ created a killer jellyfish?)


     눌러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고... 왜 생물체들은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고, 죽이고, 먹는 기관들을 가지고 있을까?

크리스천들이 설계자(하나님)가 계시다는 증거로서 살아있는 생물체들의 복잡성을 지적할 때, 조롱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설계된 모습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먹이를 사냥하고, 사로잡으며, 포식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을 즐겨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장 유독한 바다생물 중 하나인 상자해파리(box jellyfish)의 경우에 대해서, 한 반창조론자(비과학자인)는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리고 그가 사랑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모든 생물 종들을 창조하셨다면, 왜 그러한 쓸데없는 그리고 정교한 잔학성을 가지도록 생물체들을 창조하셨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해파리에 의해서 죽기를 원하겠는가?” [1] 그는 ”이것보다 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물체들이 갖고 있는 방어-공격 구조(defence-attack structures, DAS)들에 대한 유사한 도전들에 대해 답을 할 때, 성경은 사람과 동물 모두 태초에는 채식을 했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기억해야만 한다.(창세기 1:29-30).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nephesh chayyah 라 불리는 척추동물이나 사람에게 처음에는 죽음이 없었다. 그러나 식물들과 무척추동물들은 그와 같이 기술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은 성경적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창조물(living creatures)‘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전체 창조를 저주하셨던 아담의 타락(Fall of Adam)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창3:19, 롬8:20-22).


성서적 구조 틀로부터 답을 한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조롱자의 도전에도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특별한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인 범주 내에서 설명될 수 있다.[2]

(a) 현재 DAS로서 사용되어지는 것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설계되지 않았으며, 타락 이전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것들은 퇴화(degeneration), 즉 돌연변이에 의해서 현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b) DAS를 위한 설계 정보는 이미 타락 이전에 아마도 잠재적이거나 숨겨진 형태로 존재했을 수 있다. 하나님은 타락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타락된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창조물들에 미리 프로그램 해 놓으셨다. 


해파리는 약간의 거리에서도 특별한 먹이를 독으로 공격하는 메커니즘을 시발하는 극적인 효율성을 가진 자세포(stinging cells)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나님은 아마도 이 자세포에 대해서 타락 이후에 스위치가 켜질 복합적인 정보를 설계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해파리는 타락 이전에는 무엇을 먹었을까? 아마도 오늘날의 해파리들에서 관찰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우리들에게 타락 이전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 일부 해파리들은 식물성 플랑크톤(phytoplankton, 즉 동물이 아니라 식물로부터)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고 말해진다. Scientific American 웹사이트에서 해파리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일부 해파리(전도된 해파리(upside-down jellyfish)와 같은, Cassiopeia xamachana)들은 채식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먹이를 키우고, 그것들을 운반한다. 이들 해파리는 그들의 갓 안쪽에 조류들을 모은다. 그들은 대양에서 떠다닐 때 먹이 근원으로서 그들을 데리고 다닌다.” [3]

▶ 많은 물고기들은 해파리의 갓(bells) 아래에서 촉수(tentacles) 사이를 자유롭게 수영하면서 피난을 한다. 그들의 접촉은 자포의 발포를 시발하지 않는다.

▶ ‘독(poison)’의 개념은 양(amounts)에 달려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독들은 적은 양에서는 유익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치명적인 보툴리늄 독소(botulinum toxi)도 현대 미용술(botox)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산소(oxygen)와 같이 좋은 것도 많은 양에 노출되면 독으로서 작용된다. [4]


사실, 문제는 진화론자들이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너무도 많다. 이것이 그들이 과학적인 것보다 의사-이론적 주장들에 호소하고 있는 이유이다.[1]

1. 해파리의 진화론적 기원과 다른 동물과의 추정되는 진화론적 관계는 자주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생물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묘사되고 있다. [5]

2. 해파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그리고 보통 원시적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도 자포(nematocysts)는 가장 복잡한 동물성 구조 중에 하나라는 것과 침의 발사(the firing of the dart)는 아마도 알려져 있는 가장 빠른 생물학적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6]

3. 해파리 여러 종들은 주입하는 독소(toxins)들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연구자들은 해파리를 계통발생적 관계(phylogenetic relationships)보다 자포의 형태와 행동 방식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러한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효율적인 자세포의 메커니즘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진화론자에 있어서의 거대한 어려움이다.)

4. 상자해파리(box jellyfish)가 맹독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한 2 가지의 주요 진화론적 이론은 (a) 그들은 부서지기 쉬운(fragile)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그들의 먹이를 제압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b) 그들 자신을 거북이와 같은 약탈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강력한 독소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두 이론이 모두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서지기 쉬운 종들은 단단한 종들보다 더 적은 독을 가지고 있으며, 거북이와 여러 물고기 종들은 독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해파리를 먹어치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7]


만약 해파리들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주변에 있었다면, 원래에 자세포는 무엇을 위해 사용됐었을까? 한 진화론자는 해파리와 같은 커다란 포식 생물체(predatory organisms)가 그들 주변에 먹이감이 아무 것도 없었던 시기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8] 말하고 있다. 동일하게, 해파리는 약탈자에 대항하기 위해 자세포를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에 의하면 아직 약탈자가 진화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는 타락(the Fall)이 모든 생물체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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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lyfish : Creation 25:4 (September 2003)
Hundreds of jellyfish fossils! : Creation 25:4 (September 2003)


References

1. Davis, R.G., Killed by a jellyfish, Freethought Today, <www.ffrf.org/fttoday/nov96/davis.html>, 1 July 2003 (‘freethought’ is a pretentious self-description of some of the most dogmatic-thinking atheists).
2. See also Batten, D. (Ed.), Ham, K., Sarfati, J. and Wieland, C., The Answers Book, Master Books, Arkansas; Triune Press, Brisbane, Australia, 1999; and Q&A: Genesis—Curse.
3. Scientific American <www.sciam.com/print_version.cfm?articleID=00031A14-67F1-1C72-9EB7809EC588F2D7>, 1 July 2003.
4. Bergman, J., Understanding Poisons from a Creationist Perspective, TJ 11(3):353–360, 1997.
5. FAQ—Where do the jellyfish come from? <www.odc.ucla.edu/html/body_faq.html>, 2 July 2003.
6. 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The Venoms Lecture Series,
<www.calacademy.org/publications/course_catalog/fall_winter_2000-2001/lectures.html>, 1 July 2003.
7. Why are Box Jellyfish toxic? <www.jcu.edu.au/interest/stingers/biology 4stings.htm>, 30 June 2003.
8. Phylum Cnidaria, <www.palaeos.com/Invertebrates/Coelenterates/Cnidaria.htm>, 1 July 2003.


*참조 :

모든 동물이 창조시에 초식을 하였다면 육식에 필요한 송곳니는 왜 만들어졌습니까? 

Creation, suffering and the problem of evil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0_3/j10_3_391-404.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5/i4/killer.asp

출처 - Creation 25(4):34–35, September 200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96

참고 : 2245|2200|2202|2777|1661|4265|4246|4064|3857|3977|2365|2998|4677|6035|5723|4685|4618|4351

Russell Grigg
2005-11-14

창세기의 하나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 삼위일체의 하나님

 (Who really is the God of Genesis?)


      창세기의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지 않는 오늘날의 유대교, 힌두교, 여호와 증인, 유니테리언파(삼위일체론을 부인하고 유일 신격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기타 다른 신앙 체제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들과는 달리, 창세기는 기독교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인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절은 이렇게 써 있다. ”태초에 하나님(복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단수)”(창세기 1:1).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로서 단수인 (el) [3] 또는 단수의 시적인 형태인 엘로아(eloah)를 사용하지 않고, 복수 용어인 엘로힘(elohim)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사에 대해서는 단수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엘로힘 이라는 단어 이외에도 모세는 창세기의 하나님에 관련하여 다른 복수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다. 창세기 1:26은 다음과 같이 써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복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복수)” [4]. 여기서 모세는 ‘가라사대’ 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복수 대명사와 복수의 동사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1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모세는 이들 복수 형태를 사용했는가?

어떤 사람은 이 복수가, 오늘날 왕이나 여왕 및 기타 다른 사람들이 당당하게 사용하는 ‘짐(朕)’(royal we)이라는 말과 같이 단순히 장엄 복수일 뿐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성경 기사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단수로 부르고 있다. 언어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말하기를, ”모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왕이나 왕자를 복수 형태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상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증거는 없다.” [5]

또 다른 사람들은 좀더 나아가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복수의 능력과 속성과 인격을 포함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 명사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 단어를 2,500회 이상 사용했는데, 통상적으로 (창세기 1:1에서처럼) 단수의 동사나 형용사와 함께 사용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한 분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신격의 ‘단일복수(uniplurality)’ 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단일복수’ 혹은 ‘인격(personhood)의 복수’가 삼위일체(trinity)를 말하는가?


두 번째 위격 : 하나님의 말씀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약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부록을 보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요한복음 1:1-14에서 그분의 명칭 중의 하나가 ‘말씀(the Word)’ (헬라어로 ‘로고스(logos)’)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the Word was God)” (요한복음 1:1)의 구절을 주목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제1장을 다시 읽으면, 창조주간 6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His Word)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날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공식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 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창세기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활동이 밝혀져있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16절은 다음과 같다. ”만물이 그에게(by Him, 14절; 그 아들) 창조되되...” [7]. 따라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작용(self-causation)이나 진화론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고, 능력 있고, 지성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작동하였다. 거기에다가, 그 동일한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히1:3, 골1:17 참조).


세 번째 위격 : 하나님의 성령

창세기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모세가 사용한 히브리 단어 루아흐(ruach)는 문맥에 따라서 ‘영(spirit)’, ‘바람’, ‘숨(breath)’ 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는 바람이 물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특별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8] 창조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 ‘운행하시니라(hovering)’ 라는 분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단지 창조주간의 중요한 사건을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결론짓는다 [9].


결론

우리는 저자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성경구절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창세기의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성령에 관하여 나중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으로 사용한 단어들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관하여 성경에서 나중에 완전하게 드러난 것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록 참조).

창세기는 성경의 맨 첫 구절에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 확증한다. 신명기 6:4의 유명한 쉐마 (Shema, ‘들으라(hear)’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one)인 여호와시니.”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one)’에 대한 단어 에하드(echad)는 종종 단일성 안에서의 복수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19:5과 마가복음 10:8에서 인용하셨던) 창세기 2:24에서 남편과 아내(두 사람)가 '한(echad) 몸을 이룰지로다” 와 같은 것이다 [10].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한 분의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임을 드러낸다. 세 구별된 위격이 하나의 영원하고 거룩한 본질 혹은 실재 안에 있다. 따라서 실제로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 유일하고 삼위일체이신 -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창세기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율법을 주셨으며, 우리의 구원자와 심판자가 되신다.



References and notes

1. Modern-day non-Messianic Jews might believe that God created as per Genesis, but they reject God’s uniplurality.
2. The first of some 2,570 times elohim is used of God in this way in the Old Testament. Although it usually refers to the Living God, it is also used occasionally in the Bible to refer to pagan deities (in the plural), as in: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elohim] before me’ (Exodus 20:3; cf. Joshua 24:16; Jeremiah 5:7).
3. Corresponding to the Greek theos, the Latin Deus, and the English God.
4. Some antitrinitarians try to claim that God is conversing with angels here. But there is no indication anywhere in Scripture of angels being involved in creation, or having such creative power. And more importantly, mankind was made in the image of God, not in the image of ‘God plus angels’—see also Hebrews 2.
5.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6. E.g. Morris, H.,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 39, 1976.
7. See also John 1:3; 1 Corinthians 8:6; Hebrews 1:2.
8. Whom the Bible tells us is eternal (Hebrews 9:14), omniscient (1 Corinthians 2:10–11) and omnipresent (Psalm 139:7–10).
9. Kelly D.F., Creation and Chang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Ross-shire, UK, p. 91, 1997, who references Young, E., Studies in Genesis One,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Philadelphia, USA, p. 36, 1964.
10. Paul, thoroughly educated in Judaism and writ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understood this. In 1 Corinthians 8:6, he wrote: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Here, Paul is applying the Shema, using the key phrase ‘one Lord’, and applying it to Jesus Christ, thus including Jesus in the identity of the one true God!                 


부록 1 :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elohim)의 근본적인 의미는 ‘능력 있는 분(the powerful one)‘이므로,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모세가 창조주간의 창조주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주 적절하였다. ”길고 잡아 늘려진 진화론의 시간표 동안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다양한 물체와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직함(title) 혹은 서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정말로 개인적인 이름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분이 드러내신 이름(출애굽기 3:15), 즉 YHWH로서 종종 야훼(Yahweh)로 음역하며, 영어로는 ‘Jehovah(여호와)‘와 대문자 ‘LORD(주)‘로 쓴다. 그 의미는 ‘나는 나다(I am that I am)'이며 ‘스스로 있는 자‘ 혹은 ‘있게 하는 자‘를 뜻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2]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모세는 결합된 용어인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 야훼 엘로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번역가들이 영어로는 ‘주 하나님(the LORD God)‘으로 번역했다.


References and notes

1.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2. As well as of God’s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s people.



부록 2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격의 하나됨(unity) 안에 영원하고도 서로 동등한 세 위격(persons)이 존재함을 말한다.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역할이 다른 세 위격(혹은 의식의 세 중심)이시며 하나의 존재(being)이시다 (그림을 보라). 이 교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존재에 관해 성경에서 드러내신 것이므로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예로써,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아들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으며,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마태복음 3:16-17). 그리고 예수님이 대 위임(great commission)을 주실 때에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태복음 28:18-20).


하나 됨(oneness)과 셋 됨(threeness)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교리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리에 있어서, 해군과 육군과 공군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전투 집단이지만, 또한 하나의 군대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주 : 이것은 세 위격이 하나님의 ‘부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각의 위격은 신격의 충만을 갖고 있다(골로새서 2:9). 보다 나은 비유는, 공간이 세 개의 차원(길이, 폭, 높이)을 갖고 있지만, 그 차원들은 ‘부분들‘이 아닌 것과 같다. 즉, 세 개의 모든 차원이 없다면 ‘공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삼위일체와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라고 말한다(요한일서 4:8,16).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특이한 것이며, 아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랑은 하나님 본질의 일부이다. 그런데 사랑은 최소한 두 사람을 필요로 하며, 자기 사랑은 전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신격 안에는 최소한 둘의 위격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하나의 위격이라면, 사랑은 그분의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로 제한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지향할 때 그 사랑은 더 위대하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즉,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사랑이 연합하여 그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충만함의 견지에서 사랑을 나타내려면, 세 위격이 있어야만 하며, 개별적인(individual) 사랑과 집합적인(collective) 사랑이 모두 있어야 한다. 집합적인 사랑을 위해 셋 이상은 불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위격의 수만 증가시킬 뿐, 사랑의 본질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7/i3/genesis.asp

출처 - Creation 27(3):37–39, June 200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70

참고 : 2797|2130|1430|938|887|886|666|640|638|572|543|4462|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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