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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4-08-05

창세기 1장 (2) - 1절의 믿음

이재만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먼저 몇 가지 기본 방해 요소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지질계통표, 즉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하는 진화론적 역사를 머리 속에서 제거해야 한다. 실제로 지구상에 이러한 지층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수억 년 되었다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연대측정 결과에서도 자유해야 한다. 결과가 숫자로 나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진화론과 지질계통표의 신뢰 하에 얻어진 무의미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그 동안 많이 지적되었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졌다면 창세기 1장으로 들어갈 최소한의 준비작업은 마쳤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인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보려면 비진리인 어떠한 개입도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진화론, 지질계통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난 상태라야 창세기 1장을 읽을 사전작업이 되었다 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 1:1). 성경 66권 중에 첫 번째 책인 창세기, 그 중에서도 첫째 장 첫 문장이다. 이 첫 번째 구절은 "시작(beginning)”, "하늘(heaven)”, "지구(earth)”를 동시에 "창조”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바로 시간, 공간, 물질을 동시에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 중 첫번째 물질이 바로 우리가 거하는 지구인 것이다. 어려운 물리이론을 펴지 않더라도 시간 없이 공간과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 하다. 공간 없이 시간과 물질이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물질이 없이 시간과 공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 첫 행위가 '시간”, '공간”, '물질”을 동시에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세 가지 중에 공간에 대하여만 나누어보자. 공간이라는 것은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인력이라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 존재에 필수 불가결한 매개 기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38:38). 누군가가 처음부터 그 공간의 기능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우주의 물질은 그 모양도 갖출 수 없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동시창조라는 의미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말한다. 실제로 "창조(bara)” 라는 단어는 항상 하나님의 일에만 사용되는 단어인데, 존재하지 않는 것(no existence)에서 존재하는 것(existence)으로의 무에서의 창조(ex nihilo)를 의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가? 무에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Nothing impossible”로 다가온다. 우리는 Nothing impossible 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며, 더 나아가 그의 6 일간의 모든 창조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출 수 있다.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이적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사역까지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창세기 1장 1절은 믿지만 연이어 행하신 6일간의 창조는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창세기 1장 1절을 확실히 이해한 것이 아니며, 1장 1절 그 자체도 바르게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바로 직결된다. 눈 앞에 응답이 없이 보일 때도,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기에 참으시거나 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이 사실이라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주관하심을 믿는 것이다. 순서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지, 나의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재만
2004-07-30

창세기 1장 (1) - 진화론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정말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창세기를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진화론은 안 믿어” 라고 하는 말이 진화론적 사고를 벗어났다는 의미일까?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학교에서 진화론적 교육만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진화론이란 무엇인가? 기원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생각하는 것이 진화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기원에 관하여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앞선 장에서 1절을 나눌 때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읽으려면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로 가능하냐 말이다. 실제로 우리 스스로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완전히 믿어야만 진화론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만약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큼 진화론적 사고가 남아있다는 것이 거의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의 한정된 사고로는 도저히 완벽한 창조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만물의 창조하던 모습을 말하는 창세기 1장을 통해서다. 이러한 사고로 2절을 대하여 보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2)”  1 절에는 지구를 地 한자로, 2 절에서는 한글인 땅으로 번역을 하여 마치 다른 대상으로 느낄 수 있지만, 영어번역과 원어는 모두 Earth(erets, 에레츠)로 번역되어있다. 즉 1 절 지구에 대한 묘사를 보여준다. 그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어와 원어는 formless(tohu,토후) and void(bohu, 보후), 즉 형태를 정할 수 없고 비어있다는 물리적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chaos)와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적 순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인간의 타락으로 무질서하게 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무질서를 먼저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무질서의 과정을 사용하셨다는 것도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대치되는 것이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롬 3:8)” 즉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기 위하여 혼돈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묘사는 아직까지 빛의 창조 이전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깜깜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한다. 다음 구절이 재미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surface of water)에 운행하시니라” 이다. 처음으로 특정한 물질인 “물(水)”이 언급된다. 과학자로서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물의 지구(Watery Earth)였다는 것이다. 물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화학식으로 H2O 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처음 언급된 물질이 물질 중에 가장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보다 더 단순한 것들이 많이 있다. 수소, 산소, 핵, 소립자, 미립자….  만약에 우주의 시작이 이와 같은 물보다 더 단순한 물질로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한 답은 그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소나 산소에서 시작했다면 폭발만 일어났을 것이고, 핵에서 시작했다면 더욱 말이 안되고, 소립자에서 시작했다면? 미립자에서 시작했다면…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분명한 것은 시작이 단순한 것부터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창조방법과 위배된다. 진화론자들은 자꾸만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기원에 대한 인간 생각의 한계인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자신의 좁은 사고를 통해서 나올 때 갖게 되는 한계이다.


여러분이 지구는 처음에 뜨거운 불덩이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아직도 진화론적 지질학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마치 태양이 뜨겁기 때문에 지구도 처음에는 뜨거웠을 것 같은 “느낌”일 뿐이다. 아직도 진화론적 별의 기원에 영향을 받았던지, 지구가 원시 태양에서 분리되었다는 지 하는 상상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처음에 뜨거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서 나타났다고 믿는(히 11:3) 믿음이 없는 인간들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지구는 처음에 불이 아닌 물이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불은 지구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한다.


진화론은 처음부터 완벽한 것들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결국에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논리에서도 사실인 성경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결국에 성경을 통하는 것이 진화론의 근본적인 허점을 발견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 한 우리는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만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창조사실을 믿고 배우는 것이지, 우리의 경험과 한계 있는 지식을 통하여 완전한 창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29

참고 :

이재만
2004-06-30

가인의 아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창4:16,17) 

   가인은 아내를 어디서 얻었을까?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 중에 하나이다.  많이 나오는 질문이니만큼 궁금한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는 질문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가인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다 (또는 다른 가까운 친척).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sons and daughters)를 낳았으며” (창5:4) 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사람은 구백년 가까이 살았을 뿐 아니라, 노아를 보더라도 오백 살이 지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5:32)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간이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가까운 친척과 결혼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이런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직후 그들의 배우자 관계를 보면 지금 우리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배다른 동생(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but not the daughter of my mother)인 사라를 아내로 삼고 있었다 (창20:12).  이삭은 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즉 오촌하고 결혼을 한다 (창24:15, 24).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필을 찾을 때 자신의 친족(relative)에게 가서 결혼을 하라고 명한다 (창24:4).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 즉 사촌과 결혼을 한다(창29:12, 24, 25). 더군다나 두 아내가 서로 자매 아닌가! 여기서도 이삭이 직접 야곱에게 사촌과 결혼할 것을 명한다 (창28:2).  바벨탑 사건 직후에 이들은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했고 그러기를 장려했음을 알 수 있다. 홍수 직후의 배우자 관계를 이해하면, 또한 더 소급해 올라가 홍수 이전의 배우자 관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할 때 친척끼리의 성 관계를 금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골육지친(blood relative)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레18:6).  어쨌든 성경적으로 배우자가 relatives에서 no relative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볼 때 근친결혼일 경우 서로 유전자 상태가 비슷하며 유전자 결손 상태도 유사하게 된다.  근친결혼이 서로의 유전자 결손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기형아, 저능아, 또는 병약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므로 유전적 결함인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가인이 누이동생과 결혼한다 할지라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될 리 없다.


더군다나 노아홍수 이후에 궁창 위의 물이 제거되는 사건으로, 몸에 해로운 빛이 직접 지구상에 도달하여 체내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더 심하면 유전자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홍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즉 유전자 돌연변이가 덜 축적되었던 족장시대는 한동안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행17:26) 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지구상에 살았던 적이 없다. 가인도 역시 이들의 후손에서 아내를 취하였을 것이고, 첫 아들 가인은 당연히 누이동생 중에 하나를 아내로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우리와 맞지않는 윤리의 문제이지, 과학적으로 문제되는 얘기는 아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74

참고 : 2530|91|5895|4878|4872|4870|4868|4726|4725|4723|4718|4714|4713|4599|4578|4540|4514|4492|4488|4480|4463|4452|4451|4450|4416|4414|4413|4400|4399|4394|4391|4390|4385|4383|4387|4376|4375|4329|4685|4237|4148|4100|4071|4043|3945|3932|3872|3707|3689|3641|3633|3628|3311|3302|3249|3233|3218|3208|3166|3162|3148|3020|3022|2321|2805|2688|2525|1756|1793|1790|720|721|4819|2330|5861|5852|638|5753|5741|5723|5638|5628|5625|5578|5555|5514|5094|5463|5415|5402|5395|5275|5271|5035|5034|5033

Charles V. Taylor
2004-04-30

언어학과 창세기, 그리고 진화론 - 제 1부

(Linguistics, Genesis and Evolution - Part 1)


     수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을 주장할 때 대개는 의인화한 언어를 (사물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한) 사용한다. 예컨대, 과학자들의 주장들은 이렇다. 즉, "... 그래서 깃털은 이중목적을 가진 물갈퀴 발톱으로 진화되었다", 라든가, "...인간이 허리를 굽히고 살던 조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등등. 그들은 또한 각각의 유기물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작동하고 있다고 가끔씩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사물이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생기도록 정해졌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념의 패턴을 사회학자들은 물활론적(animistic) 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만 자기 나름의 주의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성경도 또한 수천 년 전부터 있었던 주장들을 담고 있다. 성경의 주장들도 매우 인간화된 것임을 또 한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인간화된 대상이 실질적으로 인격적인 대상이란 사실이다. 그 어떤 맹목적인 힘이나, 또는 당연히 변화하는 유기체가 아니다. 더욱이 이 인격은 사물이 생기라고 말씀하는 하나님이시다. 소위 진화론이라는 운명론이 믿기 어려운 관념인 것처럼,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관념도 역시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거부하도록 세뇌된 사람들한테는 더욱 믿기가 어렵다. 그것은 성경이 담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전혀 과학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성경의 말씀이 담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언어학이, 즉 인간의 말을 연구하는 학문이 풀어야 할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지금 고찰하고자 하는 주제가 언어학적 측면에서 관찰하는 성경의 문제들이다.


창세기1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언어학적 문제는 창조의 '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날들 (days)' 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의 날들 (days)로 이해하여야 할까, 아니면 시적이든가 은유적으로 표현된 시대(epoch)로 이해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은 창세기가 시로 쓰인 글이기 때문에 상징적인가? 아니면 그냥 서술문체이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인가를 판단하면 얻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창세기가 시로 쓰인 글인가 아니면, 서술문으로 쓰인 글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창세기 장(章)1은 히브리어로 쓰였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서술문구조와 시문(詩文)구조는 일관되게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다.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언어들을 문학적 표현 방식과는 다른 보통의 실용언어구조에 따라서 언어학적 집단(groups)으로 구분한다. 모든 언어는 문장(sentence)을 가진다. 문장을 가지지 않는 언어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모든 문장은 우리가 주어(S), 동사(V), 그리고 목적어(O) 라고 부르는 문법적인 기능부분(bits)들을 가지고 있지만, 문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이 세 부분을 반드시 동시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언어도 내부에서 이것들이 끼어 맞춰져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언어들 간에는 매 기본적인 문장 속에 이 문법적인 기능부분들의 배열 순서에 따라서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영어는 SVO 언어라고 불리는가 하면, 히브리어는 VSO 언어로, 일본어는 SOV 언어라고 불린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Our cat caught a mouse". 이 문장을 표현하는 세 언어들 사이에 형식이 이렇게 다르다. 즉' 영어 ━ our cat (S) caught (V) a mouse (O); 히브리어 ━ caught (V) our cat (S) (a) mouse (O); 일본어 ━our cat (S) (a) mouse (O) caught (V).....

어느 누구도 위 문장들에 나오는 our cat 는 주어(subject)임을 말하면서, 이 세 언어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왜 VSO 언어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S) 하였다(V) 무엇을(O)?' 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내용을 꿰맞춰보면 이 세 언어 간에 외형적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는 언제나 위에서 예시한 어순으로만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어는 VSVO 언어이기도 하다. 'Did our cat catch a mouse?' 또 멋스러운 문장이나 시(詩),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서 쓰이는 그 많은 환상적인 표현에서 어느 나라의 언어이건 예외 없이 어순을 한결같이 다 바꾼다. 히브리어는 서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VSO 어순을 사용했는데, 성경 시편의 저자 다윗처럼 히브리어 시인들은 영어의 어순처럼 SVO구조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장이 SVO 구조인 경우는 시적 구조라고 하겠다.


창세기의 문장1:1은 어떤가? At start created God the heavens and the earth / created(V) subject(S) object(O), (태초에 창조 하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이 순서가 표본적인 VSO 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시가 아니라 서술문이다. 창세기에서 각 날에 따라 창조하신 피조물에 관해 언급할 때 이 문장 패턴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술문으로 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창세기 편찬자가 그냥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는 문장에 멋을 부리기도 하였을 것이며, 그밖에도 많은 기교를 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어학자로서 나는 이 창세기 기사는 역사라고 이해한다. 내 말은 창세기 문장들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고, 글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히브리어 'Yom' (day, 날)의 뜻을, 우리가 이웃한테서 'day, 날' 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이해하는 뜻으로의 'day, 날'과 같은 뜻으로 취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yom (히브리어의 'day'라는 뜻)을 단연코 가장 빈번하게 번역되는 뜻이 'day' 라는 사실이 빈번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 단어가 압도적으로 자주 쓰이는 뜻은 하나의 'earth-day (지구의 날)' 이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나는 하나의 '2 hour day (2 시간짜리 날)'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지구의 날' 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가 꼭 한번 자전하는 시간을 의미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아의 홍수가 지구의 자전을 뒤흔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기에, 오늘날의 24 시간인 지구의 날이 아담의 시절에 하루의 길이와 정확하게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지질연대적인 한 시대와 같은 장구한 기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물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제기 된다.

1. 히브리어 Yom (day)은 상징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2. Yom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내용은 알아보기 쉬웠을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 이다.


사람들이 어휘사용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매우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 단어가 이미 글자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결코 상징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단어나 영어 단어의 '날'이라는 단어는 이미 글자그대로의 뜻이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추상적인 뜻으로는 물론 상징적인 뜻으로도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성경의 저자가 창세기 2장과 민수기 7장에서 단어 Yom (day)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 2:4-5, "in the day that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every plant of the field before it was in the earth.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에.....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민수기 7:10, "단에 기름을 바르던 에, 족장들은 단의 봉헌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히브리어 저자는 민수기 7장 나머지 부분을 서술하면서 족장들이 예물을 봉헌하는 데 글자그대로 열두(12) 들이 소요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장에서는 그 열두 들을 총괄하여 'Yom'(day, 날) 이라고 부르는데 만족하면서, 그 날들 간에 개재한 공통분모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그룹을 구성하는 각기 분리된 날, 즉 Yom(day)에 벌어진 일을 명시하면서 총괄적으로 'Yom'(day; 날) 이라고 불렀다.

이와 유사하게, 창세기 2장에서 글자그대로의 엿새 (6 days) 동안 각 날마다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는 공통분모에 근거하여 'Yom' 즉,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신 그 날 (day)'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문체 (style)는 일반적인 영어 독자들은 물론 심지어 전문 언어학자들한테까지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사역에 임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말씀을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근래에 와서 대두하는 창조 신화들과는 사뭇 다른 문체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3569.asp

출처 - Creation 4(1):18–20, March 198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09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3-11-25

창조와 십자가

: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Creation and the Cross)

Dr. Henry M. Morris 


    전 인류역사를 통해서 두 번의 위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세계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의 구속이다. 이 두 사건은 각기 거룩한 창조 사역의 위대한 한 주간(週間)과 하루의 쉬는 날을, 그리고 구속의 한 주간과 하루의 쉬는 날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주간은 인간창조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성주간(聖週間), 또는 고난주간(아마도 구속주간이 보다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은 인간구속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창조주간에는 완벽한 세계(창세기 1:31)의 창조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뒤이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세상에 내려졌다 (창세기 3:17). 완벽한 세상을 지으신 이를 죽이고 장사하였던 구속주간은, 인간의 구속과 이 세상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저주가 궁극적으로 걷히는 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2:3). 나무 한 그루(창세기 3:6)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든 매개물이었는데,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베드로전서 2:24)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매개물이었다.


창조주간과 구속주간 (The Two Weeks)

창조주간의 일곱 날들과 고난주간의 일곱 날들을 각기 대조하고 비교하여보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구속주간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학적 순서 매김은 학자들 사이에 크게 의견 차이가 있었던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확실히 매김 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래에 전개될 토론은 어떤 교의(dogma)를 펼쳐 보이자는 뜻에서가 아니고, 다만 그 세부 내용들을 이해하고 조화시키는데 도움이 될만한 추가적인 영역을 제공하자는데 있다. 예컨대, 금요일이 십자가형의 집행일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이 연구에서 제공되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더욱 굳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첫째 날 

바로 창조의 그 첫 날에 우주(universe) 자체가 창조되었다 (창세기 1:1). 우주질서(cosmos)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의 창조의 엄명(嚴命)에 응답했다. 태초에 공간-물질-시간 (즉, 하늘, 땅, 시간의 시작)의 연속체가 오직 기본적인 원소의 형태로 창조되었으나, 그 구조는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창세기 1:2), 펼쳐진 물로 된 모체(母體)만이 정적(靜的) 정지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후서 3:5). 하지만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주질서(cosmos) 안에 인력작용(引力作用)과 전자기력(電磁氣力) 체계가 활성화되었다. 물과 정지상태에 있는 모체는 거대한 구형의 행성으로 유착되었다. 그리고 전자기력의 힘의 스펙트럼 중심부에 가시적(可視的) 발광체(發光體)가 불빛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1:3).

아래의 유추(analogy)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고난주간의 첫째 날에, 우주(universe)의 창조주이신 왕은 그의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수도로 입성하였는데 (스가랴서 9:9-10; 마태복음 21:1-9), 이것은 오래 전에 그가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로 등장하신 것과 같다. 그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심지어 그가 창조한 바로 그 원소(元素)(누가복음 19:39, 40)들은 그의 권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2) 둘째 날 

지구를 창조하시고 가동시키신 다음, 하나님은 거기에 경이로운 대기권과 수계(水界)를 마련하셨다. 나중에 대기권과 수계 안에는 조류와 어류가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물론, 지구를 제외하고는 어떤 행성도 그토록 풍족하게 대기와 물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이 지구가 유일하게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수계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분리되었다. 궁창 (히브리어를 직역은 “펼쳐진 공간” 이라는 뜻이다) 위의 물은 아마도 광대한 투명성 수증기 융단을 이루고 있어서, 전 세계의 기후를 완벽하게 유지하여 인명 장수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태초에 생명유지에 필요한 대기와 물을 마련하신 사역과 유사하게도, 구속주간의 둘째 날에 그는 (베다니에서 그날 밤을 보낸 다음) 수도로 다시 입성하고 성전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도시 가까이 당도하셨을 때에,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내리셨다(마가복음 11:12-14). 그리고 성전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셨다 (마가복음 11:15-19). 그가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쫒았던 것이 이번이 이틀 동안에 두 번째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병행 비교하여 보면 그가 예루살렘 입성 첫째 날에도 그렇게 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을 청소하신 일,” 이 두 행동은 창조주의 왕국에 번지고 있던 불모와 부패의 현상에 대한 숙청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는 생명을 위한 세계 (호흡을 위한 대기와 생명의 모체를 위한 물)를 창조하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들까지도 그 세계를 척박(瘠薄)하고 불결(不潔)하게 만들어버렸다. 육신의 생명은 무엇보다 먼저 순결한 대기와 물이 있는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참된 영혼의 생명의 세계를 위한 조건은 영적호흡을 위한 순결한 대기와 정화된 말씀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영혼의 참 열매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참 성전을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예비하는 일이다.

 

(3) 셋째 날 

그 다음 날 아침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마가복음 11:20-24). 이에 견줄만하게,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산이 바다에서 드러나게 하셨다 (창세기 1:9-10).

그리고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사두개인들하고 맞대결한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대결이 바로 이 날에 있었다. 그는 그들을 논박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공모하였던 것이다. 이 날 벌어졌던 그들에 대한 그의 도전이 포도원을 다루는 두 가지 우화를 가지고 시작하였던 것은 적절하였다 (마태복음 21:28-32, 마태복음 21:33-43; 마가복음 12:1-11; 누가복음 20:9-18). 그 우화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관리 책임을 맡겼으나, 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무화과나무의 경우처럼 그들의 책임 하에 있는 포도원에는 하나님에게 드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음으로, 그들은 곧 관리책임에서 물러나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온 지구는 창조의 셋째 날에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어 거기에는 모든 생물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 있는 열매로 풍요로웠다 (창세기 1:11-12), 그리고 그 정원은 인간의 관리에 맡겨졌었다 (창세기 1:28-30; 2:15). 그러나 전체 인간이, 특히 선택된 인간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요한계시록 22:2), 지구는 정화되어야 하며, 믿음이 없는 포도원 관리자는 갈아 치워야만 한다.

구속주간의 셋째 날은 감람산에서 행하신 주님의 위대한 설교가 그 절정을 이룬다. 주님은 그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이 반드시 파괴되어야하며, 그 연후에라야 그가 권능과 영광 속에 돌아오시어 새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24, 25;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 그런 다음 그 셋째 날 다음 날 밤에 아직도 신실한 몇 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는 감람산에서 지내셨던 것은 적절하였다(누가복음 21:37). 그것은 바로 그 산이 오래오래 전에 있었던 창조주간(週間)의 셋째 날 그가 바다에서 끌어올렸던 모든 산들을 연상시키고, 감람산 산비탈에 펼쳐진 자그만 포도원이 있는 겟세마네 정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창조주간의 바로 그 셋째 날에 육지 곳곳에 그가 심어놓으신 짙푸른 세계를 연상시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막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차비하시는 사역(누가복음 9:31)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이 땅에 내려진 저주가 깨끗이 씻겨지고, 모든 것은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4) 넷째 날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주 예수님은 태양과 달, 그리고 모든 별들을 하늘에 지으셨다. 처음 사흘 동안에도 “빛”은 있었으나, 지금에 생긴 것은 실질적인 빛들이다! 지구와 그 푸른 초원만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인간에게 자양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그 빛들까지도 인간에게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더욱이 그 빛들은 인간에게 길을 인도해주고 시간을 보전해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사상과 애정을 그의 창조주한테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대신에 부패된 수많은 거짓 신들과 여신들로 둔갑되어 버렸다. 더욱이, 별들은 모든 천체들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자아내지 못하고, 그 대신에 광대하고 진화하는 우주(cosmos) 안에서 지구는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간들의 믿음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날 밤 그 산 위에 누워 오래 전에 자신이 어둠을 쫓기 위해 만든 별빛들을 올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쓰였을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엔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성전 안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누가복음 21:37 38).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에는 그의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 결손은 제 4의 복음서(요한복음 12:20-50)에 있는 성전 안에서 행한 그의 가르침에 관한 삽입구적인 기록으로 명백하게 채워질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은 두 번에 걸쳐 스스로를 자신이 만드신 빛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2:46, 35). 참 빛이었던 그가 어두움이 되어야만 함은 새 세상에는 다시는 밤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섯째 날

 구속주간의 다섯째 날에 관한 정보가 복음서들 안에는 거의 없다. 셋째 날에 서기장들과 제사장들하고 신랄한 대결을 치른 후, 그리고 아직은 “유월절이 이틀 앞에” (마가복음 14:1) 다가온 날에, 제사장들은 실질적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씌워 처형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유월절 축제(마가복음 14:2)를 지켜야 하는 날이었기에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음모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 날은 아마도 넷째 날이나, 혹은 다섯째 날이었을 것이다. 그 축제일에 유다가 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배반하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견책당한 날 밤부터 이 배신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바로 전날인 안식일 밤에 베다니에 있는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 12:1-8).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에 감람산에서의 설교 이후에 일로 삽입된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는 바로 그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이 만찬과 유다가 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결심과의 사이에 직접적으로 생긴 우발적 관련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이 유월절 날에 주 예수는 그의 두 제자를 시켜 그 날 밤에 그들만의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마가복음 14:12-17). 성전에서 행하신 그의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 그날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누가복음 21:37, 38), 기록된 바로는 이것이 그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 다섯째 날에 대한 기록에서 이 이상한 침묵은 아마도 그 유월절을 위한 예비 과정에 생긴 일들이 갖는 의미의 더 큰 중요성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그날을 유월절의 예비일 (요한복음 19:14)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을 보낸 날 다음 날에 제일로 삼고 있었다는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수 세기동안 엄청난 수의 양과 여러 동물들이 도살되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마지막으로 봉헌되는 제물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님의 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1:29). 그는 죄를 단번에 씻는 한번의 제물로 봉헌될 것이다 (히브리서 10:12). 그는십자가에서 흘린 자기 피로써 이 땅 위에 위대한 화평을 이루어 만물의 창조주에게 만물을 돌려드리고 화목하게 하셨다 (골로새서 1:16, 20).

성주간(聖週間)의 다섯째 날에 바로 그 마지막 유월절 희생양의 피를 흘려야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틀림없이 자신이 최초로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였던 창조주간의 다섯째 날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움직이는 모든 생물(히브리어 nephesh)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21). 이것은 그의 창조사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창조행위였다. 그 때 그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생명의 실체를 창조했던 것이다. (처음 것은 물리적 원소들이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살아있는 동물들한테는 그 육체의 “생명”이 그들의 피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속죄의 대가(atonement)로 지불하는 것이 그 피였다 (레위기 17:1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물(creature),” '영혼(soul),' 그리고 “생명(life),' 이 모든 단어들이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nephesh 에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날에 양의 순결한 피를 흘리는 일은 확실히 그 피의 ”생명“이 창조되었던 아득한 옛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이신 그는 우리들의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려는 참이었기 (고린도전서 5:7)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곧 승리와 생명 안에 삼켜질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54).

 

(6) 여섯째 날

여섯째 날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이고 목표였다 (창세기 1:26, 27). 그런데 이번의 여섯째 날에 인간의 모양대로 육화되어 오신 하나님이 보다 더 위대한 구속 사역을 끝내셨던 것이다.

엄청난 저주 아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받아 왔었다 (로마서 8:22). 그러나 이제 창조주 그 자신이 저주를 받은바 되어 (갈라디아서 3:13, 이사야 52:14), 마침내 그 창조주도 또한 죽어야만 했던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나, 이제는 그도 땅에서 들려야만 했다 (요한복음 3:14), 그리고 온 하늘은 침묵하였다 (마태복음 27:46). 비록 그는 둘째 날에 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요한복음 4:14)이었으나, 목말라 죽어갔다 (요한복음 19:28).

셋째 날에 그는 마른 땅을 창조하셨으나, 구원의 바위가 강타 당했기 때문에 (출애굽기 17:6), 지금은 “그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있다” (마태복음 27:51). 그는 또한 바로 그 셋째 날에 나무와 포도넝쿨로 이 땅을 덮었으나, 지금은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1)가 꺾이고 푸른 나무(누가복음 23:31)가 잘려나갔다. 그는 넷째 날에 해를 창조하셨으나, 지금은 그 해가 빛을 잃었다 (누가복음 23:44). 그리고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은 다 소진되었다. 다섯째 날에 그는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명이었다 (요한복음 11;25,; 14:6).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의 생명인 고귀한 피가 십자가 밑의 땅바닥에 쏟아지고 그는 “사망의 진토로” 끌어내려졌다 (시편 22:15). 여섯째 날에 그는 인간을 짓고 생명을 주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인자를 죽음에로 들어올렸다.

 

(7) 일곱째 날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사도행전 2:23) 되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세기 2:2). 더욱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완벽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속사역 또한 그랬다! 이 일이 특별히 요한의 말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니시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28, 30). (강조된 단어들은 모두가 그리스어로는 동일한 어원이다). 예수께서는 하셔야했던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성경의 선지자의 마지막 말씀을 이루셨다. 그 다음에야, 오직 그런 연후에 가서야, 구속의 사역이 완성됐으며, 화목의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음을 알고 그는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 라고 위대한 최후 승리의 외침을 외칠 수 있었다.

창조의 기록은 창조의 전체 사역이 그리고 만물의 창조가 이루어졌음 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3). 이와 같은 태도로 요한의 기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업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루어진 창조의 사역이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것과 같이, 이루어진 우리의 구속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사역은 “아주 크며 (큰 구원)” (히브리서 2:3), “영원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5:9). 그래서 그 소망은 “좋은”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


끝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일곱째 날에는 쉬시었다. 그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서 잠이 드셨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신속했었다. 그리고 장사준비도 또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누가복음 23:54-56). 그것은 그의 시신이 안식일 전에 매장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조의 사역을 이룬 후 안식에 들어갔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가 다시 한번 더 안식하고 있었다.

장사한지 삼일 만에 (그 날은 새 주간의 첫 날이었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6:21 et al). 그의 시신은 안식일 온 종일과 그 전날 일부와 다음날 내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관용구의 용도에 따르면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이다 (마태복음 12:40).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매어 놓지 못했다. 그는 죽음에서 깨어나서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신다. (요한계시록 1:8).

 

*헨리 모리스 박사는 ICR의 창시자이며 명예회장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34.htm 

출처 - ICR, Impact No. 34, 1976.

정순량
2003-11-1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 빛과 소금의 역할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 이라 하겠고, 그리스도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본말로는 '빛과 소금’ 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빛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주위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떤 대상물을 본다는 것은 두 가지의 경우를 통해서이다.

 

화성의 소저너, 빛에너지로 작동

   첫 번째는 태양, 전등 혹은 불꽃처럼 빛을 방출하는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더 일반적인 경우로서 태양이나 불꽃과 같은 1차 광원에서 방출되는 빛이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빛이 물체의 표면을 비출 때 이 빛은 진동수가 변하지 않은 상태로 재방출되거나 흡수되어 열로 바뀐다. 보통 이러한 과정은 각 물체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재방출된 빛이 처음에 입사했던 매질로 돌아가면 이 과정을 반사라 하고, 재방출된 경로가 휘어지게 되어 투명한 물질 속으로 진행한다면 이 과정을 굴절이라 한다.

   조용한 웅덩이에 돌을 던지면 물의 표면에 파동이 생겨 번져나가는 것을 본다. 빛도 파동적 특성이 있어 성냥불을 켜면 모든 방향으로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퍼져나간다. 이러한 파동적 성질을 니타내는 것으로 회절, 간섭, 편광의 원리를 설명한다.

   빛은 어둠을 밝힐 뿐 어둠과 공존할 수 없다. 빛은 필연적으로 어둠을 밝게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 빛은 에너지 덩어리 그 자체이다. 신문지 위에서 볼록렌즈의 초점을 맞추면 햇빛이 모아져 발화하는 것을 본다. 광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변환된 것이다. 지난7월 4일 화성에 도착한 미국 우주선 패스파인더의 탐사로봇인 소저너가 화성표면에서 계획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태양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 장치 덕분이다. 이 전기 에너지에 의해서 모든 실험기기가 작동되었다.

 

첫째날 빛을 만드신 이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6일 중 첫째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때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3~4).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빛의 창조 경위다. 또한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면서 빛과 어두움을 대응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빛은 생명의 원천인 바 모든 식물은 빛에너지를 이용해서 성장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영양분을 저장한다. 이를 미루어보면 첫째날에 빛을 만드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는 또한 하나님이 빛으로 묘사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요3:19),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요12 :4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살전5:5),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빛으로 묘사된 데는 빛의 특성 중 광원, 즉 빛의 발원체로서 니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빛이 에너지 덩어리란 말을 했는데, 이 에너지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요소임을 알게 한다. 즉 생명의 근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재된 에너지란 곧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사랑이시다. 빛의 특성은 어두움을 사루어 밝게 한다는 점이다. 어두움을 악이라 한다면 선이요 진리를 나타내고, 어두움을 거짓이라 하면 빛은 참이요 진실이다. 어두움을 불안과 공포라 한다면 빛은 평화요 평안이다. 어두움을 세상이라 한다면 빛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몇 군데 인용해 본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사59:9),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렘13:16),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암5:18),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요1:5),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 (요3:19),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요3:20),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요3:21),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4).

   마태복음 5장14~16절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빛처럼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 빛이 그리스도인의 표본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빛을 생명의 원천이라 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처럼 생명의 원천이 되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세상에서 희생하여 생명을 되살리고 구원시키는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소금의 염소 성분, 독가스로 사용되기도

   소금의 화학명은 염화나트륨(NaCl) 이며 결정구조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바 각 염소 원자는 6개의 나트륨 원자로 둘러 싸여 있고, 역시 각 나트륨 원자도 6개의 염소 원자로 둘러싸여 있다(그림 참조). 이와 같은 화합물은 구성 원소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염화나트륨을 구성하고 있는 각 원소를 살펴보면, 나트륨은 반응성이 큰 금속으로서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연하며 물과 강렬하게 반응하고 공기 중에서도 쉽게 반응하여 석유 속에 보관한다. 염소는 녹황색 기체로 수돗물과 수영장을 소독할 때 쓰이며, l차세계대전중 독가스로 사용되었을 만큼 독성이 강하다.

   한편 염소 가스가 들어있는 플라스크 안에 나트륨 조각을 떨어뜨리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흰색의 고체가 생기는데, 이 물질이 짠맛을 갖고 있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소금은 신체 내에서 이온평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본적인 재료로 쓰인다. 한국요리에서는 간장이나 된장 등 장류를 사용하여 간을 하고, 서양요리에서는 소금을 사용한다. 음식의 맛은 간을 잘 맞추는 것이 으뜸이다. 또한 소금은 젓갈을 담글 때 새우나 기타 어류를 부패시키지 않고 발효시키는 데 사용한다. 어물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도 소금으로 간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염장식품에서는 소금 결정이 녹아 부패가 방지된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역할을 다할 것을 말씀하셨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한다. 소금의 조화로 맛을 내듯 대인관계에서 화평과 조화를 이루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막9:50).

   소금의 결정구조를 살펴보면 나트륨 양이온과 염소 음이온이 이온 결합으로 안정된 화합물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져 살면서 평안함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또한 소금이 결정을 녹여 희생하며 부패를 막듯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희생하여 부정과 부패를 막는 소임을 다해야 한다.

   또한 구약에서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레2:13),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삿9:45),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출30:35) 라는 말씀에서 보듯 소금이 성결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하였는데, 헬라인들은 말의 재치를 뜻하는 데 소금을 사용했다. 즉 여기서는 신선하고 시기적절한 말로 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어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날로 부정과 부패 등으로 혼탁해가고, 도덕 불감증으로 청소년들의 장래가 걱정스럽다는 분위기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의 빛과 소금된 그리스도인의 참된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하신 책무라고 생각한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4/b14o4.htm

출처 - 기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7

참고 :

이종헌
2003-11-18

지각의 변동


 노아의 홍수때에 지각의 대격변이 있었다. 


언젠가 어느 선교단의 집회에서 [천지창조]라는 제목의 무용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느 선교단과는 다르게 찬양 및 율동 뿐 아니라 전문적인 안무를 받은 듯한 무용극을 공연함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은혜를 끼친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부분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이 묘사되고, 그들 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 기독교 문화라고 할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 무용극과 더불어 그 선교단의 모든 공연은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아담과 하와둘 뿐이며, 그들에게서 죄가 시작된 것이지 처음부터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구별되어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그나마 불모의 지대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교 무용극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되지 왜 안무를 가지고 따지느냐고 반문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여러 부분에서,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 가끔씩 삽입됩니다. 극에서는 약간의 변형이 허용될까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미화시켜 예술작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예를 들면 Ben Hur 처럼), 성경의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 줄거리를 가진다면 그것은 믿음에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을깊이 잠들게 하신 것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실 때 아플까봐 그랬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때는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이므로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잠들게 하신 것은 분명 마취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성경을 일부 사람들이 해석한대로 지나치지 말고 저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서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문학 비평의 전통적 방법은 저자가 작품을 쓴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그 런데 계몽시대에 들어서면서「새로운 비평」또는「구조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책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이나 글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작가는 그가 살고 있는 문화 안에서 영향을 받으므로, 작가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들을 이해하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텍스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텍스트에서는 언어의 표시 외에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고, 작가의 의도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독자의 반응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저자의 의도나 글이 쓰여졌던 문화적 배경이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태의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발전이라고 봅니다. 아예 진화라는 표현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결과 객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인식론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성과 권위가 거부되고, 도덕적 상대주의에 빠져 사회윤리에 기준이 없어진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문화전쟁, 즉,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 밖에 다른 해결책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새로운 이즘을 만들어 내더라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성경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경의 해석은 결국 말씀의 기갈을 가져오게 됩니다.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지각의 변동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는 처음 창조된 모습과 다릅니다. 태초에 창조된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without form and void). 즉,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말 그대로 흙과 물이 모두 아무런 형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므로 에너지가 나와서, 형태가 없던 지구는 아름다운 구체(球體)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둘레의 물도 응집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째 날의 일입니다.

셋째 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위로 땅이 드러나라 하실 때에 약간의 지각 변동이 있었습니다. 이 때의 땅은 아직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 같은 것은 없었고, 아담과 하와가 뛰어 놀기에 부담없는 낮은 구릉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궁창 위의 물이 있어서 온실효과도 있었지만,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기압의 차이나 온도의 차이가 없었고, 따라서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에 지각의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질 때에, 지각이 빠른 속도로 움직여 오늘날 히말라야 같은 산맥이 올라가고 골짜기는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신화에 근거한 말을 과학에 적용하려 한다고 비웃지만, 그들은 진정한 과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라는 신앙에 미혹되어 눈을 올바로 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허락하신 음식도 처음에는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였습니다.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격변적인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산 동물을 채소와 함께 우리의 식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았고, 대홍수를 겪을 때 궁창 위의 물이 없어지므로 환경은 더욱 더 나빠졌습니다. 더욱이 바벨탑 사건 이후 근친결혼이 유전자의 열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에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구별되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되어 있으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언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인간이 한가지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바벨

탑 사건 때에 언어가 갈라져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이동을 하여 오늘날과 같이 지구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종족과 인종도 이 바벨탑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모든 것의 시작에 관한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죄의 시작과 사랑의 시작 등등.

오늘은 앞으로 풀어 쓸 창조이야기에 필요한 배경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언적으로 씌어 있는 창세기의 사건들은 결코 신화나 설화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4/b14c6.htm 

출처 - 창조지, 제 102호 [1997. 3~4]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9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3-10-04

줄기세포와 창세기

Jonathan Sarfati 


      근래 줄기세포연구가 미 상원과 언론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최근 한 상원의원은 창세기를 들먹이며 배아에서 유래된 줄기세포가 파괴되긴 하겠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를 정당화했다. 어떤 면에서는 고의적으로 눈감아 주었던 친숙한 과학으로 인해 논쟁이 불필요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논쟁이 1920-40년대 독일 이래로 서구사회에 끔직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태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특히 일부 논쟁의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창세기를 도용하기 때문에 AIG(Answers in Genesis)이란 단체에서 화제거리가 되었다.

 

줄기세포란 무엇인가?

줄기세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개체의 발생을 간략히 요약할 필요가 있다. 각 개체는 단일세포인 접합체 혹은 정자로 수정된 난자로서 시작한다. 수정된 난자는 DNA속에 모든 정보들을 지니고 있으며 적절한 환경조건이 되면 현재의 우리 몸을 만들 수 있다.

배아가 자라면서 세포들은 다른 위치에 놓여지고 그곳에서 전문화되어 특정 정보만이 실행이 되는데 이를 세포가 분화된다고 한다. 다른 정보들도 함께 있긴 하지만 꺼져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유전적 스위치가 있고, 또한 메틸화라고 하는 과정-정보를 지니고 있는 DNA에 메틸기를 결합시켜 발현하지 못하게 함도 있다.

모든 스위치가 작동하려면 정확한 순서에 의해 차례대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순서의 정보가 부분적으로 DNA속에 들어있고 유전자 외부에도 조절할 수 있는 요인들이 있다. 그래서 이 현상을 '후성적' -여러 요인들이 함께 작용- 이라고 한다. 때문에 온전한 DNA가 있어도 공룡과 맘모스를 재생시키지는 못한다.

이렇듯 교묘하게 설계된 스위치 순서 때문에 뼈세포들은 뼈가 가지는 정보만을 실행시킨다. 혈액, 신경, 피부 등이 되게 하는 정보가 여전히 뼈세포의 DNA 속에 있지만 발현이 꺼져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줄기세포는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배아세포처럼 미분화되어 있어서, 어떤 종류의 조직으로도 자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는 데에 이 줄기세포를 사용할 수 있고,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파킨슨병, 인슐린 의존형(유형 1) 당뇨병, 심장질환, 치매와 척추부상에 의해 손상된 신경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줄기세포가 발견되는 장소는?

주요 논쟁의 대상은 낙태된 아기 혹은 특별히 재생된 배아의 사용-즉,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있다. 줄기세포는 수정 후 수일 후에 발생하는데, 장애나 질병을 가진 일부 유명인사들이 줄기세포 연구를 재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지가 마비된 전 슈퍼맨 배우였던 크리스토퍼 리브,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을 앓고있는 메리 타일러 무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마이클 제이 폭스 등이 있다.

그러나 배아에서 유래되지 않은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도 많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전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이로 인해 생명중시 여론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연구를 방해한다는 감성적 호소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의제가 제시되고 있다. 

 (그림. 1) 줄기세포들은 신생아들 (제대혈) 이나 성인으로부터 추출, 배양될 수 있다.

* 성인의 줄기세포들은 ”우리의 뇌, 골수, 모낭의 구석구석에 감춰져 있다.” 2

*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 대학 의료센터 심흉부 외과의 치우(C. J. Chiu) 교수는 기저부 세포라는 일종의 골수 줄기세포를 쥐의 심장에 주입하였다. 주입된 세포들은 새로운 심장근육으로 분화하여 주위의 세포들과 정확히 연결되어 함께 박동할 수 있었다.3

* 쥐에서 뇌의 해마부위에 있는 줄기세포를 눈에 이식하였다. 이 세포들은 망막의 손상된 부위로 이동하여 신경연결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퇴행성 망막반점퇴화, 망막염 색소증, 망막박리, 당뇨성 망막병변을 앓고 있는 환자의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대두되었다.4

* 모낭의 외근피에서 발견되는 줄기세포와 다른 다양한 '잠정적 증식세포'는 피부세포로 전환될 수 있어서 피부이식에 사용될 수 있다.5

* 플로리다 대학의 면역학자 암몬 펙(Ammon Peck)이 이끄는 연구팀은 쥐에서 성인의 췌장도관 줄기세포로 영구적으로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IDD)을 치료했다. 줄기세포는 시험관 속에서 분화하여 인슐린을 생산해내는 구조인 랑겔한스섬이 되었고, IDD를 앓고 있는 성인 생쥐의 피부 밑에 주입되어 췌장의 기능을 나타내어 인슐린을 생산하였고, 혈관이 연결되었다. 일주일이 지나 생쥐는 혈당량을 다시 조절할 수 있었다.

펙 박사는 ”우리는 첫 번째 관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하나의 줄기세포를 자라게 하여 외분비성 췌장에서 발견되는 분화된 마지막 상태 세포들을 가진 전기능적인 기관으로 분화시킬 수 있다” 6고 했다.

* 복제양 돌리를 만든 영국 PLC사는 역분화(분화를 원상으로 돌리는 과정)라고 하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려 한다. 성인 피부세포를 배아 상태로 되돌리길 원한다. 그리고 이미 젖소로 성공했다고 주장한다.7

* 줄기세포가 많은 곳은 제대혈인데 이미 백혈병치료에 사용되었다. 제대혈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를 뇌졸중을 겪은 쥐에 주입하였고 뇌 조직의 50%가 회복되엇다. '유전학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보고된 바에 의하면 '제대혈의 줄기세포들이 태아의 줄기세포들만큼 유용하다'라고 미국과학발전 협회 연례 학술대회 참석자들이 발표했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이 줄기세포연구를 둘러싼 분란을 잠재우며 궁극적으로 뇌 손상 및 질병 치료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제대혈에 줄기세포가 많이 있고 이미 유아 백혈병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앞으로 몇 년 안에 뇌일혈 환자의 치료에 이 제대혈 줄기세포가 쓰일 것이라고 관망한다.

* 세계적으로 비만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흡입된 지방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줄기세포의 가장 좋은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지방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들은 다양한 영양환경에 따라서 연골, 근육, 더 많은 지방세포로 성장했다.

매사추세츠 대학 의료센터 원장이며 <조직공학(Tissue Engineering)>이란 과학잡지의 공동편집자인 찰스 바칸티(Charles Vacanti) 교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이 같은 발견들은 여러 이유로 무척 중요하다. 성인의 몸에서 추출한 줄기 조상세포들이 태아로부터 유래된 줄기세포들보다 우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거부현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조직으로 분화시키는 것이 더 용이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태아세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므로 윤리적인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10

* ”피부 줄기세포들이 뇌 조직으로 성장한다”라는 제목의 논문은 더 많은 증거를 제공하였다. 캐나다 맥길 대학 부설 몬트리올 신경연구소의 진 토마(Jean Toma)와 프레다 밀러(Freda Miller) 연구팀은 진피로부터 추출한 줄기세포를 평활근세포, 지방세포, 뇌세포 등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생쥐의 피부와 사람의 머리가죽에서 얻은 줄기세포들도 성공적으로 사용하였다.

논문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네이처 세포생물학잡지>(Nature Cell Biology)에 월요일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12로 말미암아 피부에서 발견되는 줄기세포는 쉽게 공급할 수 있는 좋은 대체줄기세포가 될 것이다. 자신의 피부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성장시켜 얻은 조직을 이식 받은 환자는 배아에서 얻은 줄기세포를 이식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거부반응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11

* '뇌세포 질환에 희망'13이란 제목의 논문은 ”배아 줄기세포만이 새로운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줄기세포가 아니다. 호주 멜버른에 있는 '월터 앤드 엘리자 홀(Walter and Eliza Hall) 의학연구소'의 연구팀이 성인 생쥐 뇌세포의 신경줄기세포로부터 뉴런세포를 성장시켰다” 14라고 쓰고 있다.

논문의 저자는 또한 ”성인 뇌의 뇌실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기능적인 줄기세포는 신경, 비신경계의 세포로 변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인간에게 적용이 가능하고 치매와 파킨슨 질병 치료에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했다.

앞의 예들은 확실히 성인 줄기세포 연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윤리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래에 언급된 유명인사들의 발언은 실제 실험증거에 의해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유전학자인 데이비드 프렌티스(David Prentice) :

 ”성인 줄기세포 연구는 이미 심장병, 뇌일혈, 파킨슨, 치매, 당뇨병 등과 같은 여러 퇴행성질환에 아주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물 모델에서도 심장손상을 복구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뇌일혈, 당뇨병 치료에 대안이 되고 있다. 인간 환자에서도 낭창, 다발성경화증, 관절염 등을 완화시키는 데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15

-오레곤 보건 대학의 분자의료유전학과 마커스 그롬페(Markus C. Grompe) 교수:

”이제는 더 이상 태아의 줄기세포는 필요치 않고, 우리의 성인 몸이 계속 줄기세포를 공급할 것이다” 16

-미시간의 '생명의 권리' 협회의 조셉 킨케이드(Joseph Kincaid) 부회장:

”파괴적인 배아연구 지원을 둘러싼 워싱턴에서의 논쟁이 이런 윤리적이고 전망이 좋은 연구를 어둡게 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언론보고는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아직도 단 한 건의 치료도 성공시키지 못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17.

캠브리지 화이트헤드 연구소의 루돌프 제니스(Rudolf Jaenisch) 연구팀이 최근 <사이언스> 잡지에 발표한 연구18가 킨케이드 부회장의 이 말을 지지하고 있다. 이 논문을 보면 쥐를 복제하는데 사용된 배아 줄기세포가 심각한 기형을 유발시켰다.

그 이유는 이 세포 유전체의 후성적 상태가 지극히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즉, 유전자 자체는 괜찮은데, 세포가 많은 스위치 정보를 손실했고 그래서 더 이상은 제때에 정확한 지시명령을 켜고 끄질 못 한다는 것이다.

성인 줄기세포보다 배아세포가 낫다고 주장하는 장점은  배아세포가 가장 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조직들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잠재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배아세포가 너무 미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인간의 배아 줄기세포에서도 이 현상이 보인다면 다양한 퇴행성질환의 치료에 이 논란의 세포들이 사용되어 예상치 못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19. 정치적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래서 공평무사한 과학자들이란 평가를 뒤엎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이 문제점을 언급하는 문장을 빼고, 대신 배아 줄기세포의 치료적 전망만을 강조하는 문장을 집어넣었다. 왜냐하면 '만약 논문에 문제점들을 언급하기만 하면 종교와 윤리에 바탕을 둔 정치집단들이 문제점들을 과장하여 배아 연구에 반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험적으로 증명이 된 배아세포 사용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 왜 '과장'이 되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왜 배아 연구가 잘못된 것인지 그 많은 이유들을 다음 섹션에서 보여주기로 한다.

 

배아줄기세포가 무엇이 문제인가?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비 배아 줄기세포들은 우리 몸 전체에서 쉽게 얻을 수 있고 우수하기 때문에 이 연구는 심각한 사건이 될 수 없다. 진정 사건이 되는 것은 뒤에서 논의하려고 한다.

배아 줄기세포를 둘러싼 논쟁은 어느 쪽이든 간에 중요한 윤리적 문제를 대두시키는데, 거기에는 감성적 화법이 동원된 엉성한 사고방식이 난무하고 있다. 질문인즉, 대안이 없다고 해서 심각한 질병을 완화시키기 위해 배아 줄기세포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AIG는 모든 면에서 성경을 생각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항상 강한 생명중시 입장에 서 왔다. 즉 무방비상태의 생명체는 수정되었을 때부터 자연사하기까지는 고의적으로 해를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20.

그 이유는 AIG 홈페이지의 낙태 코너에서 설명된 것처럼, 죄 없는 사람을 고의로 죽이는 살인은 잘못된 것(출애굽기 20:13, 마태복음 19:18, 로마서 13:9)이고, 생명은 수정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51:5).

시편의 저자는 여기서 수정으로 인해 바로 '내(me)'가 존재하는 것이지 일부 세포덩어리들이 후에 '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논조는 생물학적인 생명이 시작하자마자 인간이라는 것이고 생물학적인 생명이 시작된 후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이차적인 사건은 없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성경이 비록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명백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수정은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각 개인의 생명의 시작이다. 이 말은 성경의 충분성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실험적 과학을 사용한다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교회사를 통틀어 신학자들은 이 원리를 적용하여 자궁에서 새로운 개체가 생기기 시작한 때부터 낙태를 반대하였다22.

동물들이 '종류대로' 번식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은 피조물의 경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교배연구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가짜)킬러고래와 돌고래의(번식력을 가진!) 잡종인 홀핀(wholphin)은 비록 인간들이 다른 속(genera)으로 분류를 하긴 했으나 같은 피조물의 구성원임을 보여준다23.

이는 약 6천년 전에 문자상의 6일 동안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평범한 성경적 가르침에 반대하기 위해 '과학'(과거에 대해 균일론적인 가설)을 사용하는 나이든 사람들이나 '그 종류대로'라는 가르침에 반대하고 한 종류가 다른 종류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는 아주 다르다24.

인기에 영합하려는 '프로-초이스(선택적인 낙태) 운동'의 말장난은 중심 화두(문제가 되는 존재가 무엇인가)로 돌아가면 산만해진다. 사람의 경우라면 '아기 살해범'이란 용어에 감정이 상한 사람들에게 모든 '낙태-찬성' 논란에서 '미 출생 유아' 대신 '2년 된'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일부 중요한 장기들을 만들기 위해 2년 된 것을 살해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대두와 함께 많은 낙태 찬성론자들도 아기가 인간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단순히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순진한 생명을 없애는 것이 잘못됐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믿는 어떠한 근거도 부정한다.

피터 싱거(Peter Singer)와 같은 무신론 철학자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부터 신생아와 노인들까지 부정하였다. 또한 이를 공공연히 진화의 '사실'과 연계시켜 그로 인한 당연한 결과인 윤리적 절대가치를 정하신 창조자를 부인하였다.

그는 과거 연합국들의 학계에서 인기를 누렸는데, 이는 한 사회가 진화론에 근거한 윤리관을 가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과거 나치 독일의 교훈에서 배우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독일인들은 그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에, 싱거는 독일에서 그의 신나치주의를 퍼뜨리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싱거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한 기독교적 신학 없이 기독교적 윤리관을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깨닫게 된다.

 

복제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미 하원이 인간복제를 금지했을 때 이 연구에 관계된 회사들의 주가가 급강하한 것으로도 알 수가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복제에 관련된 과학적이고 윤리적인 논쟁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이 논쟁을 요약할 가치가 있다

인간복제가 잘못되었다는 주요 이유는 생명이 수정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복제실험은 작은 인간들인 배아를 필연적으로 형성시키고 고의적으로 파괴한다. 첫 번째 포유류 복제물인 그 유명한 복제양 돌리를 얻기 위해 이안 윌멋(Ian Wilmut) 박사는 277번이나 시도했다.

만약 인간의 경우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생명체의 파괴이며, 펜실바니아 대학 생명윤리학자인 아트 카플란(Art Caplan)이 명명하듯 '야만적인 인간실험'인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잘 되지 않는 실험을 인간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윌멋 박사 자체도 인간복제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인간복제계획을 선언한 전 켄터키대학의 파노스 자보스(Panos Zavos) 박사는 인간복제가 ”인간진화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29. 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복제물은 동일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데 반해 진화는 정보의 증가를 반드시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의도했던 방식은 아니지만 그의 말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기는 한다. 무신론자인 라니에(Lanier)와 도킨스(Dawkins)가 인정한 것처럼 진화는 윤리의 상실을 일으키고 인간복제는 이 현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을 삼가는 대신 인간복제는 일부 형태의 인간체를 일회용으로 전락시킨다.

 

창세기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는가?

”상원의원들이 줄기세포 논쟁에서 생명에 대한 개념을 찾기 위해 성경을 사용한다”라는 최근의 신문 제목 때문에 이 놀라운 질문이 대두되고 있다31. (당연히) 낙태를 반대하는 오레곤주의 몰몬교 공화당 상원의원인 고든 스미스(Gordon Smith)는 창세기 2:7 말씀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렸다:

성경구절을 읽은 후에 그는 인간창조가 '2단계의 과정'으로 묘사된다고 말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그런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 스미스는 ”세포들은 흙과 같아서 사람에게 형태만 제공할 뿐 생기는 아니다. 영(spirit)을 얻기 위해서 세포들은 모친의 자궁에 자리잡아야 한다. 내 생각에는 생명은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모친의 자궁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 역시 이 구절을 사용(오용)하여 그 자신이 일원이었던 어수룩한 복음주의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생기를 언급하면서 아기가 숨을 쉬기 전, 즉 태어나기 전에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이로써 그는 ”부분적인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해서 몇 가지 사항들이 확인되어야 한다:

 

*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특별한 경우였다. 둘 다 모친이 없었고 배아에서 출생하지도 않았으므로 이들의 예를 비약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마치 '이들이 성인으로 생을 시작했으므로 오늘날 인간의 생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고 억지를 쓰는 격이다32, 33

* 같은 맥락에서 성경구절은 배아가 모친의 자궁에 착상했을 때에 영을 갖게 된다고 하는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궁이 배아와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 스미스의 주장은 아기가 자궁에 있을 때에는 살인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낙태론자들과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즉 양쪽 주장들은 존재의 위치가 존재 자체와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스미스는 낙태론자들의 주장을 거부하지만 그 자신의 입장이 모순에 빠진 것은 보지 못하는 듯하다.

* 성경구절은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became a living soul)” (히브리어로 nephesh chayyah)라고 말함으로, 언뜻 생명과 혼(soul)이 함께 생기는 것으로 의미하는 듯하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시작한 후 어느 때에 혼이 들어간다고 가르치려는 의도로 이 구절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사실 문맥상으로 보면 혼은 육체적 죽음 후에도 존재하는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을 뜻하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창세기 35:18의 nephesh와 마태복음 10;28의 헬라어 동격인 psyche의 의미를 갖는다. 차라리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서 nephesh chayyah는 생명체 (living creature)를 뜻하고 육상 동물, 바다 동물, 인간까지를 망라한 척추동물에 적용된다.

 

기타 낙태론을 옹호하는 합리화들

비록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최근 부상하고 있는 여러 다른 낙태옹호 주장들이 있다.

1) 쌍둥이들

참고문헌 31에서는 14일까지의 배아를 연구하면 윤리적이라고 한다. 이는 쌍둥이 형성의 가능성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두 사람이 될 수 있는 한 배아를 한 개체로 취급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라는 것이다. 소수 로마 카톨릭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의 특징인 혼이 두 개체로 분열할 수 있는 배아로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류이다. 쌍둥이 형성은 한 배아가 둘로 분열하는 무성생식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분열 전이라도 여전히 한 개체임을 뜻한다. 오히려 이런 배아는 무성생식을 할 수 있는 희귀한 개체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배아 대신에 10대의 청소년들을 예로 든다면 논점이 확실해진다. 만약 배아가 인간이고 소수의 10대들이 16세 생일에 쌍둥이로 나뉘어진다면 윤리적으로 적절한 대체가 될 것이다. 이 경우, 10대들이 분열되기 전에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혹은 16세 전에는 생명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34.

2) 초기 배아의 모습은 인간답지 않은가?

<뉴스위크>지는 3일된 배아의 그림을 보여주며 인간의 모습이 아님을 확인시키려 한다. 사실 인간의 모습은 아니지만 외형으로 논쟁하는 것은 종종 속임수이다.

* 동상이나 진열장의 마네킹은 인간의 모습 같지만 인간은 아니다; '코끼리 인간'과 같은 기형인들은 그래도 인간이다. 중요한 점은 코끼리 인간은 (인간이 만든 Homo라는 속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단일 피조물로서 인간성을 가진 (아담과 이브의 후손) 개체들이다.

* 따라서 아담의 후손으로서 3일된 배아는 마치 3일된 인간이 인간처럼 보여야 하듯이 인간처럼 보인다. 5년 된 인간이 성인 인간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5년 차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을 보인 것뿐이다36.

3) 대부분의 접합체 (수정체)들은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는가?

최근 BBC 연재 방송물 '인체'에서는 수정과 배아 성장의 생생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르면 수정된 6개의 배아 중 단 1개만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이는 마치 인간과 침팬지의 DNA 유사성을 가지고 96%인가? 아니면 99%인가? 하며 여러 수치를 들먹이는 것과 같다.37 다른 수치들은 매우 차이가 있는데, 50%에서 80%까지의 생존율을 가지고 있다38.

그러나 이것은 배아의 인간다움과는 무관하다. 지구 어떤 곳에서는 유아 사망율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유아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인간들은 실제로 100%의 사망률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죽는다고 해서 살인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망률이 높다고 해서 고의적으로 배아를 파괴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언론의 거짓말

2001년 7월 1일자 <뉴스위크>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었다. '배아 줄기세포 전쟁들: 배아 연구 대 생명중시 정책들: 치매, 심장병, 당뇨병에 희망이 있다. 부시가 지원을 끊을 것인가?'22, 39

불행하게도 이는 생명중시론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언론의 매도이다. '낙태를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는 그 어떤 운동에 대해서 항상 감정적인 여론이 있다.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뒷골목 낙태의 공포를 허위로 조장하고40, 최근에는 몇 장의 낙태론자들의 사진을 가지고 이를 마치 수백만의 생명중시론자들과 같은 규모로 부풀리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번에 언론은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을 꺾은 것에 대해 생명중시론자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연달아 기획하려고 한다. 앞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사기이다. 왜냐하면 절명 당하는 진정한 인간생명을 가볍게 여기며 비 배아 줄기세포들로도 많은 성공적인 사례가 있음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라는 미명아래 배아를 폐기 처분하는 것이 괜찮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배아에게는 결코 인간성이 없다는 입장과 국법을 대중들의 마음에 공고히 하려는 듯하다. 또한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해 일부 형태의 인간체를 죽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을 북돋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낙태론자들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기는 아무런 본성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논쟁에서 전부 승리하게 될 것이다. 모든 미출생아들이 유일한 인간 개인이라기보다 1회용 휴지처럼 여겨지도록 하는 교활한 술수를 쓰고 있다.

피터 싱거가 보인 것처럼, 이 교활한 술수는 계속될 것이다. 만약 한 사회가 기독교적 윤리를 폐기한다면, 진보된 과학적 지식은 재앙을 막지 못할 것이고 더욱더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그 예로 나치시절 독일은 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국가였다.

 

언론과 신조

낙태 반대론자들을 위협하는 언론은 종종 종교를 신조와 분리시키라고 큰소리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강요하고 성경이 윤리적인 질문에 결론을 내려주는 중요한 판단근거라고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한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두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세속적인 언론에 대해서 정치와 얽혀 있고 도덕성을 강요하는 신조에 반대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중요한 질문은 ”어떤 신조가 반드시 정치와 얽혀있어야 하는가?”와 ”강요되는 도덕성의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것들이다.

인본주의자은 사회에, 특히 공교육계에 인본주의 신조를 강요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물론 모든 법률도 도덕성을 강요한다. 살인과 강간을 반대하는 법은 살인과 강간이 나쁘다는 윤리적 입장을 살인범과 강간범에게 강요한다.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윤리성만을 강요하는 듯하다. 확실히 강요란 용어가 적절하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미출생아를 죽일 수 있는 '선택'을 원할 뿐만 아니라 이 '선택'을 지원하도록 납세자들을 몰아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 언론은 성경구절 인용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적 윤리라고 이해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성경구절이 사용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개방적이라고 인정된 문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구절을 곡해하는 것은 괜찮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언론은 남을 판단치 말라는 구절을 곡해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성경구절의 정황은 항상 위선적인 판단에 반대하는 반면, 공의로운 판단은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요한복음 7:24)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인사들이 인정하는 행위들-낙태, 동성애, 간통 등-의 '비 판단적'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창조론자들을 판단하는 것도 물론 괜찮다.

(그림. 2) 인간생명의 초기단계들 (실제 크기가 아님).  좌에서 우로: 정자와 난자의 수정 (접합체 형성), 유사분열 (세포분열), 계속된 유사분열 (배낭의 형성), 자궁벽에 착상하고 배아의 계속적인 성장.

 

요약

1) 과학적인 논제들

* 배아 줄기세포는 많은 다른 유형의 조직들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유형의 질병,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 줄기세포는 배아 뿐만 아니라 많은 형태의 비배아성 조직, 심지어 성인조직에서도 발견된다.

* 현재 비배아성 줄기세포가 가장 좋은 재료였고, 그 원천은 지질이 흡입된 지방조직이다.

* 반대로 배아세포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실험 중 위험가능성이 확인되었다.

*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복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 인간생명은 수정과 더불어 시작된다.

*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는 필연적으로 작은 생명체의 죽음을 수반한다.

2) 윤리적 논제들

* 생물학적 삶이 시작될 때  인간이 시작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 인간생명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나쁘기 때문에,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 인위적인 낙태는 잘못된 것이다.

* 창세기 2:7은 인간배아가 혼이나 인간성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 세속적인 언론은 전반적으로 낙태선호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 세속적인 언론은 인본주의적 신조나 도덕성 강요는 반대하지 않는다.

* 비배아 줄기세포 치료의 성공담들이 전반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 연구나 의료혜택 때문에 배아 살인을 정당화하면 배아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되고, 어떤 형태의 인간도 소모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것이다.

* 그전의 문제점이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충동질하는 배후원인이 되는 듯하다.

 


참고문헌

2. Hall, A., Awaiting the Miracles of Stem-Cell Research, Business Week Online, 29 November 2000.

3. Cited in Hall, re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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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ell Therapy: Stem Cells Reverse Diabetes in Mice, Applied Genetics News, March 2000.

7. New Technique May Create Embryonic Stem Cells Without Using Embryos, Wall Street Journal, 3 August 2001.

8. Umbilical Cord Stem Cells: Hope for Millions?  21 February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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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Liposuctioned Fat Is Good Source of Stem Cells, Say Researchers in Tissue Engineering, Mary Ann Liebert, Inc. (Biotechnology publishers). 

11. The Washington Times, 14 August 2001.

12. Toma, J.G. et al., Isolation of Multipotent Adult Stem Cells from the Dermis of Mammalian Skin, Nature Cell Biology 3(9):778-784, September 2001.

13. <news.ninemsn.com.au/health/story_17102.asp>, 16 August 2001.

14. Rietze, R.L. et. al., Purification of a pluripotent neural stem cell from the adult mouse brain, Nature 412(6848):736-739, 16 August 2001 ; see online abstract. 

15. Interview With Genetics Prof. David Prentice on Stem Cell Research, National Review, 8 June 2001.

16. Fumento, M., Embryonic stem cell research alternatives exist: Use them, Washington Times, 31 July 2001.

17. Right to Life of Michigan, 27 July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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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Weiss, R., Clone Study Casts Doubt on Stem Cells: Variations in Mice Raise Human Research Issues, Washington Post, 6 July, 2001.

20. See Answers in Genesis Website, Human Life: abortion and euthanasia.

21. <www.answersingenesis.org/docs/4214pnl1_1999.asp>, first published in Prayer News (Australia).p. 4, May 1998.

Ying, Q.-L. et al., Changing potency by spontaneous fusion, Nature (416(6880):545?548, 4 April 2002. See also commentary on these two papers, same issue, pp. 485?487. Return to text.

22. Beckwith, F.J., Politically Correct Death: Answering the Arguments for Abortion Rights, pp. 140-141, Baker Books, Grand Rapids, MI, USA, 1993. This is the most comprehensive demolition of pro-abortion arguments, covering science, ethics, law and Scripture. See my review, Antidote to abortion arguments.

23. Batten, D., Ligers and wholphins? what next? Creation 22(3):28-33, 2000.

24. See refutations of Progressive Creaionism and Theistic Evolution on the AIG Website.

26. Smith, W.J., Cloning Debate Proves ESCR 'Bait and Switch”, National Review, 3 August, 2001.

27. Christian Medical Association; 2 August 2001.

28. For more information on cloning visit the AIG Website. 

29. Human cloning attempt to be outlined Tuesday, CNN.com, . 7 August 2001

30. From a debate between two evolutionists. Lanier is a computer scientist; Dakins is a Professor at Oxford and an ardent atheist. Jaron Lanier: 'There`s a large group of people who simply are uncomfortable with accepting evolution because it leads to what they perceive as a moral vacuum, in which their best impulses have no basis in nature';Richard Dawkins; 'All I can say is, That`s just tough. We have to face up to the truth', Evolution; the dissent of Darwin, Psychology Today, p.62, January/February 1997; Quoted in;Creation  

31. Zitmer, A., Senators use Bible for lessons on life in stem cell debate, The Greenville News, 19 July 2001.

32. Beckwith, Ref. 23, pp. 145?146. .

33. Geisler, N.L., Christian Ethics, pp. 138?139, Baker Books, Grand Rapids, MI, USA, 1989. This is a good presentation of Biblical Christian ethics both in theory and in practice (see also his online article Any absolutes? Absolutely!), and Ch. 8 covers the abortion debate well. Both this and Ref. 30 refute the argument used by Clinton, but I don’t think anyone had thought of Smith’s outlandish argument when either of those books were written.

34. Beckwith, Ref. 23, p. 97.

35. The Stem Cell Wars, Newsweek Cover, 1 July 2001.

36. Beckwith, Ref. 22, pp. 97-98.

38. Beckwith, Ref. 22, pp. 96-97.

39. See also the critique of Ref. 34, Miller, J.J. and Ponnuru, R., Cell Games: Newsweek vs. pro-lifers, Washington Bulletin, National Review Online, 3 July 2001.

40. Beckwith, Ref. 22, pp. 54-59 documents the deceit of pro-abortionists in inflating statistics of deaths from illegal abortions. Sometimes they were so absurd that the quoted numbers turned out to exceed the deaths of woman of childbearing age from all causes! Most importantly, this appeal to pity is totally irrelevant?because abortion kills innocent humans, it amounts to claiming that murder should be legal and safe, because people will murder anyway, and if it’s not safe they could get hurt unnecessarily.

41. What is secular humanism? <www.christiananswers.net/q-sum/sumr002.html>

 

*저자소개 :

뉴질랜드 웰링턴의 빅토리아 대학에서 화학박사학위 취득, 고온 초전도체와 셀레늄이 함유된 고리와 덮개 모양의 분자들에 관한 다수의 논문 발표. 현재 AIG의 staff로 있으며, 과 지에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진화를 반박하며(Refuting Evolution)>란 책의 저자이다 (25만부 인쇄). 전 뉴질랜드 체스 챔피온.


번역 - 이재영 교수

출처 - 창조지, 제 135호 [2003. 1~3]


미디어위원회
2003-10-04

내가 6일 창조를 믿는 이유

김무현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이사야 42:5)

나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까지도 성경 말씀이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깊이 있고 윤리적인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으며 그 중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도 있다. 성경이 그런 경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일까? 물론 성경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디모데후서 3:16)고 증거한다. 하지만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성경구절로 증명한다는 것은 순환논리이므로 설득력이 없었다. 


미국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나는 항상 짐이 되었던 위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도전해 보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한시간씩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묵상이 몇 년 동안 계속되는 가운데 참으로 많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깨달음이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때까지 막연히 품고 있었던 성경에 관한 많은 의심과 회의가 걷히고 성경이야말로 결코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평범하고 필요없는 것같이 생각되던 내용 가운데도 심오한 진리가 숨겨져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역시 예언의 성취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완벽한 일관성에 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후에도 한가지가 찜찜했는데 그것은 창세기 1-11장의 내용이었다. 학교에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배운 내용들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6일 창조와 노아 홍수가 특히 그러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창세기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에도 과학을 전공한 교우들이 말도 안 된다고 우길 때에는, 믿기 힘들면 그냥 상징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하라며 어물쩍 넘어가곤 하였다. 그러던 중에 창조과학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특히 헨리 모리스 박사님의 책들과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과 AIG(Answers In Genesis)의 여러 자료들이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적 진화론으로 너무도 철저히 세뇌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진화론이란 것이 증명할 수 있는 참과학이 아니라 추론에 불과한 유사과학임을, 실제로 진화론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들도 별로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화석마저도 진화론의 가장 큰 장애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조나단 웰스 박사가 밝혔듯이 진화론에 관한 한, 과학 교과서들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철학적(자연주의에 관한 맹신)인 내용들로 가득 찼는지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 들어 DNA연구와 정보이론, 지적설계 이론들을 접하며 창조와 지적설계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에 관해 찜찜했던 마지막 짐이 벗어진 것이다. 이후에야 모든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하시며 모세를 믿지 못한다면 나 또한 확신으로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요한복음 5:46-47). 모세오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신화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만큼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것도 힘들다는 말이다.


이후로 나는 확신을 갖고 한국창조과학회(KACR)와 미주창조선교회(ACTS)의 남부 지부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귀하고 보람된 일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창세기 중 진화론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공격받는 부분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간의 천지창조 내용일 것이다. 전능자를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기원과정을 수십 억 년에 걸친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이라 주장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아성이 바로 지질학적/우주적 오랜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오랜 연대는 우주/지구/생명의 진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전제이다. 


그들은 지난 200여 년에 걸쳐 과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 전능하고 초월적인 창조주의 존재나 지적설계 개념을 철저히 배제해 왔다. 모든 기원이론은 자연주의 관점에서만 설명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그 체계 안에서만 학문의 탑들을 쌓아 나갔다. 그 결과 현대과학은 모든 자연의 현상 및 기록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대신, 전능자의 지적설계 및 초월적 창조를 철저히 배제한 학문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은 오랜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격변의 상황은 없었고,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균일론의 가정 하에서 성립된 추론일 뿐이다. 실제로는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라는 배경신념과 모순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성경적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은 철저히 소외를 당하며 지적인 조롱과 핍박 속에 놓이게 되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로마서 15:3)

이러한 과학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도그마(dogma) 때문에 많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창세기의 해석을 애써 현 과학의 패러다임(paradigm)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와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다.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간격이론(gap theory),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그리고 점진적 창조이론(progressive creation)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그 중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 자체가 초월적 창조주가 없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복음적 신앙과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나 힌트조차 없기 때문이다. 간격이론 및 날-시대 이론은 창세기 1장을 현 과학의 오랜 우주/지구 패러다임에 맞추어보려는 노력인데, 성경적 해석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현 과학의 패러다임인 진화론과도 병행하기 쉽지 않은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신명기 4:2)

나도 한때 날/시대이론이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그 모든 창조를 수십억 년에 걸쳐 철저히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에 의존해야만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증거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후에는 다시 한번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게 되었다. 특히 재림 후에 이루어질 전 우주적 재창조는 수십억 년이 아닌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주님 재림 후의 재창조가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면 태초의 창조도 수십억 년이 걸려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전능적/초월적 창조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고 과학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전능한 창조의 흔적들을 이 자연세계에 남겨 놓으시며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그것을 탐구할 기회를 주셨다. 또한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창조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도 간략하게 그 대략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여 주셨다. 진화론적 세계관과 과학주의로 철저히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6일 창조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주위사람들이 지성인이 아닌 맹신자라고 놀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오히려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와 현상들도 많이 존재한다. 나 자신이 그랬듯이 그것들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성경적 창조가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인류의 모든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들은 진화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질학적 세월에 걸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노아 홍수를 전후하여 갑자기 나타난다. 세계 모든 종족과 언어의 기원도 성경에 기록된 노아 홍수와 바벨탑 사건으로 더 잘 설명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창조란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데에 있어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가지 관점만 절대로 옳다고 주장하며 법칙(Doctrine)화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성경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며, 그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참으로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3:12 말씀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처럼 창조의 자세한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계시록의 24장로들과 같이 전능하신 창조주를 다음과 같이 찬양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11)

한편, 창조와 타락의 중요한 신학적 기초가 창세기 1-3장에 있기 때문에 그 내용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절대적 진리임을 믿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모세오경을 신화로 보려는 자유주의적 입장은 근거도 희박하며, 오히려 우리 믿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가장 좋은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누구든지 이 계명(구약 특히 모세오경)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19)

인간의 머리에서 추론해낸 진화론이란 가설에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애써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다음에는 6일 창조 외의 타협적 성경해석을 도입하는 것이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예를 날/시대 이론을 통해서 살펴보려 한다. 날/시대 이론은 진화론이 거세게 과학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던 19세기에 휴 밀러(Hugh Miller) 등에 의해 제안되기 시작했다(1869). 지금은 휴 로스(Hugh Ross)등의 Reasons To Believe라는 단체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이 이론은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욤'(yom)이 성경에서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로도 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느 불특정한 기간'으로도 쓰일 수 있음에 주목하였다(창세기 2:4(창조하신 때), 시편 20:1(환난날), 욥기 20:28(진노하시는 날), 전도서 7:14(형통한 날)). 그리고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순서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 순서가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에 착안하였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순서대로 점진적 창조(Progressive Creation)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한 날은 역사지질학의 한 시대 만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층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균일적으로 다 만들어졌으므로, 노아의 홍수를 지역적 홍수(local flood)로 본다(이는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가 결코 지역적 홍수가 아니라고 하신 것에 위배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성경적 문제점들이 있다. 히브리 원어 상으로도 욤(yom)이 숫자를 나타내는 제한적 형용사(either numeral or ordinal) 뒤에 쓰인 경우에는 전체 성경을 통하여 한번의 예외도 없이 문자 그대로의 날을 의미한다(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부연설명까지 있음). 또한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창조의 6일(six days)에 해당하는 욤(yom)의 복수형 야민(yamin)이 쓰였는데 이처럼 복수형이 쓰인 경우에는 한번도 예외 없이 문자적인 날을 의미한다.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출애굽기 20:11)

특히 사람을 창조하여 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 없이 오랜 지질학적 연대에 걸쳐, 고생대 생물을 만들고 다 죽이고, 공룡을 만들고 다 죽이고 하는 과정을 밟으셨냐 말이다. 이것은 바로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하던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던 아들의 질문이기도 하다. 날-시대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병과 고통과 살생과 싸움과 죽음이 아담의 첫 범죄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낭비해 가며, 이유 없이 수많은 생물들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등 가장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끄시며 아담까지 오게 하셨겠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또한 인간이 불순종의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피조세계에 질병과 고통, 죽음과 파괴 등이 진행되었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창세기 3:17-19)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19-23)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린도전서 15:21-22)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진화론이나 역사지질학이란 유사과학에 성경 해석을 애써 끼워 맞추려다 보니 오히려 창조-타락-구속-심판 및 완성으로 요약되는 성경의 큰 물줄기에 큰 흠집을 내게 된다. 그 엄청난 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듯 진화도 단지 추론이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우리 피조물이 초월자가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개미들이 사람이 컴퓨터를 만들고 달나라에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과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바란다. 진화는 종교이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6일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바라보기 바란다.


출처 - 창조지, 제 135호 [2003. 1~3]

미디어위원회
2003-10-04

창세기로 돌아가기

(Back To Genesis)

Dr. Henry M. Morris 


세상의 빛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1] (요 1:9)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언(宣言) 중 가장 경이로운 것 중 하나를 고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래 전 어느 날 아침,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를 비난할 근거를 찾기에 혈안이 된 편협한 종교주의자 들에게 한 주장일 것이다. 이 주장으로 인해 그는 정신 나간 미치광이 혹은 기만적인 사기꾼 아니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세가지 가능성 중 하나로 귀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이로운 선언

그가 한 선언이란 바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이다. 이 주장을 들은 사람 중에는 이러한 질문을 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이봐요, 세상을 밝히는 것은 저 위대한 태양이지 갈릴리 출신의 거처도 없는 별볼일 없는 설교자일 리가 없지 않겠소? 하늘 높이 운행하는 저 태양이야말로 빛을 발하여 사람들이 어두움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저 태양이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이오? 또 태양은 생명을 낳는 역할을 하죠. 에너지를 방출하여 식물을 자라게 하고 강물이 흐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태양이야 말로 ‘생명의 빛’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오. 그런데 피조물에 불과한 당신이 어떻게 생명의 원천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이말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단지 은유적인 표현을 쓴 것 뿐입니다. 그는 영적인 빛이요 영적인 어두움을 밝히는 영적인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이지요. 태양광선을 복사(輻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대답 또한 문제 제기자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정식 교육도 못 받고 망상에 빠진듯한 추종자들이나 거느린 한 시골 설교자를 생각해 보라! 그가 전세계를 위한 영적, 도덕적, 지적 지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 그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이라곤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사렛 출신의 이 예수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의 터무니 없는 이 주장을 사람들이 받아드리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놀라운 실현

그러나 놀랍게도 지난 이천년 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삶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단지 개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총체적으로 변화되었다. 수많은 교회와 여러 사역 단체들이 세워졌음은 물론이고 많은 훌륭한 학교가 그의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병원과 자선기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를 위해 국가가 세워지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이었고 과거의 위대한 의학자들도 그러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경멸 당하고 지도자들에 의해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사형에 처해졌지만 현재까지 영적, 도덕적, 지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빛이 되고 있다. 그를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생명의 빛을 얻었다는 기쁨의 간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리!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육신으로 무덤에서 살아나셔서(역사상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사실로서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사건) 그는 하늘 아버지와 동일한 신분을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증명하셨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그의 권위를 기대어 만물을 창조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증거 하였다. 그는 태양은 아니지만 태양보다 위대한 분이시다. 그는 바로 태양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골 1:1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요 1:3).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 (엡 3:9)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물리적 빛의 근원인 태양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태양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보존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서부터 이며” (미 5: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히 1:3). 과학자들은 태양이 계속해서 빛을 복사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직도 확신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많은 과학자들이 태양의 핵융합 이론을 신봉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이론으로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숙제들이 남아 있으며 어느 누구도 정확한 해답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빛의 힘

그런데 성경을 믿으면 창조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존자이기도 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힘으로 세상을 지탱하고 계신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7). 사실상 그는 우리가 속한 태양계의 태양뿐 아니라 전 우주의 모든 태양을 운행하고 계신다. 그는 이 작은 태양계의 빛일 뿐 아니라 전 우주의 빛이시다. 장래에 약속된 새 땅의 거룩한 성에서는 태양도 필요치 않으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이러한 성경 구절은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라는 현대 과학의 개념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만물이 힘에 의해 서있다. 그런데 그 힘은 바로 예수님의 힘인 것이다. 그 안에서 만물이 보존된다. 온화하며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만물을 운행하시며 언젠가 이 모든 것을 태초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를 믿는 자마다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주장하시며 물리적인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현대 물리학 (적어도 고전 물리학)은 전자기대(電磁氣帶, electro-magnetic spectrum)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졌다. 전자기대는 자연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힘과 에너지를 포함하는데 빛, 열, 소리, 전기, 자력, 화학 에너지 등 중력과 핵에너지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해당된다. 빛에 대한 연구는 물론 그 중심부를 차지하는 가시광선 대를 포함하여 장파인 적외선에서 단파인 자외선의 복사까지 전 대역을 다룬다. 이와 같이 빛 에너지는 모든 에너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에 속한다. 성경에 기록된 첫 구절 중의 하나가 “빛이 있으라” (창 1:3)인 것이 그리 놀랍지 만은 않다. 태초에는 빛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광명이 있어”(창 1:14)라고 빛의 창조를 명하신다. 그 즉시 하늘에는 땅을 위한 두 개의 광명이 생겨나고 “또 별들이” (창 1:16) 전 우주에 흐드러지게 생겨난다. 이 모든 빛은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창 1:14) 이루고 땅의 생명체를 위한 여러 놀라운 현상(광합성 작용 등)을 가능케 하여 생명을 유지시킨다. 

성경은 “그(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라고 증거하고, 또한 그리스도는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요 1:9) 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적용되는 사실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27).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세포 하나 하나를 포함한 존재 여부가 바로 예수님의 보존능력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다면 정신이 번쩍 나는 경험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힘을 회수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존재는 무(無)로 몰락(沒落) 되는 것이다. 

영적인 관점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 (요 1:9)을 각성(覺醒)시키는 분이다. 이방의 땅에서 태어났거나 평생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자연, 양심, 역사 등의 테두리 안에서 빛에 노출되며, 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점점 더 강한 빛에 노출되어 종래에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성경의 본보기가 있다면 로마 사람 고넬료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베드로를 보내신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 (행 10:34,35) 

반면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고도 있으니 이러한 빛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핑계치 못하고” (롬 1:20) 예수님을 믿지 않은 고로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 (요 8:24) 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대하 16:9).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딤전 2:4)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기를” (행 26:18)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의 빛을 전달하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라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서는 영적인 빛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아니 하시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빛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듯이 그의 빛의 각성 운동은 믿는 이를 매개체로 지속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이자 창조자로 여기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사명과 과제는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빌 2:15,16) 일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1] 개역 한글 성경에서 인용함. 이하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서 가져옴.


출처 - ICR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back-genesis

          https://www.icr.org/article/6203/

번역 - 박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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