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라이엘 : 역사를 고쳐 쓰려고 했던 사람

찰스 라이엘 : 역사를 고쳐 쓰려고 했던 사람

(Charles Lyell: the man who tried to rewrite history)

Russell Grigg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지질학 원리, Principles of Geology>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1] 다윈은 그 유명한 HMS 비글호(His Majesty’s Service Beagle) 여행 기간에 <지질학 원리> 세 권 중에 첫 두 권을 읽었다. 다윈은 이때 장구한 지질학적 연대를 믿게 되었으며, 자신의 진화론이 작동하는데 필요한 오랜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찰스 라이엘은 ‘과학을 모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 지질학 체계(동일과정설)를 고안했다.


교육

찰스 라이엘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열 명의 자녀 중 첫째 였다. 그는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녔으며, 1819년에 학사 학위를, 1821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찰스 라이엘은 윌리엄 버클랜드(1784~1856)의 지질학 강의를 들었으며, 또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지질학 탐사도 했다. 라이엘은 후에 유럽에서 지질학과 화석수집 활동을 계속했다.[2]   

라이엘의 목적은 과학을 모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라이엘은 법학을 공부했으며, 1825년에 법정변호사에 임명되었지만[3], 시력이 약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1827년에는 법조인의 삶을 포기하고, 지질학에 몰두했다. 라이엘은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런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서 지질학 교수로 있었다.


19세기의 지질학

19세기 초의 지질학에는 두 주류 학파가 있었다. 선도적 지질학자들은 격변론자(catastrophists)들이었는데, 말하자면 그들은 지질학은 격변의 결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 중 다수는 오랜 시간과 다중격변(multiple catastrophes)을 믿는 격변론자들이었지만, 창세기에 기록된 것처럼 노아 홍수가 전 세계적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격변적 사건이었음을 믿는 성경적 지질학자들도 많았다. 

이와 다른 견해는, 지질학의 모든 것들은 현재 지구상에서 작동 중인 과정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4] 이러한 믿음은 성경을 거부하며, 따라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의 창조와 노아 홍수의 중요성을 거부한다. 이러한 견해의 주창자들은 은밀한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거나, 자연신론자(自然神論者)들이었데, 그들은 이 땅에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원인을 성경의 하나님께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찰스 라이엘은 그와 같은 자연신론자였다. 라이엘은 자신의 <지질학 원리>에서 ”통찰력과 지혜와 권능”을 가진 ”창조의 신(神)”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5]가 실제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부정했다.   

라이엘은 반대 증거를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격변적 사건이라도 연구조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지구 역사상의 격변적 사건들을 반대했다.[6] 그러나 똑 같은 연구조사의 어려움은 라이엘이 주장하는 조용한 과거에도 적용해야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확증하는데 필요한 것은 목격자의 증언이다. 그러나 라이엘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의 노아 홍수에 대한 증언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 여행 기간 동안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읽고, 자신의 진화론이 작동되는데 필요한 오랜 시간을 확보했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라이엘이 쓴 세 권의 책(1830-33)의 목적은 ”과학을 모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7] 다시 말하자면, 지질학을 창세기의 시간 틀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성경의 초기 역사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라이엘은 Quarterly Review 지에 실렸던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1권에 대한 논평을 준비하고 있던, 그의 친구이며, 지질학자이며, 동료 자연주의자인 조지 스크로프(George Poulett Scrope, 1797-1876)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속셈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었다. (※ 역자 주: Quarterly Review는 1809년 3월에 시작하여 1967년에 폐간된 정기 간행물이다.) :  

”나는 당신이 '과학을 모세로부터 해방시켜 줄 이 논문'을 Q.R. 지에 실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나는 5~6년 전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격을 가함 없이 모세의 지질학이 폐기될 수 있다면, 그것(창세기)은 역사적 스케치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논문을 요약 게재해주어야만 합니다”[8]

그리고 라이엘은 또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이 역사 기록으로부터 이론을 만들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8] 말하자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창조 역사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인 노아 홍수로부터 어떤 이론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질학 원리>의 부제는 ”현재 작동하는 현상을 참조하여 과거에 일어난 지구 표면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1832년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에 의해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란 단어로 축약되어, 지질학 용어로 정착되었다.

스크로프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라이엘은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반대할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경멸감을 드러내었다.[8] ”당신이 그들을 이기지 못하고, 현 세대의 관용과 공정성을 핑계로 타협한다면, 주교들과 진보적 성도들이 우리와 합세하여 고대와 현대의 자연신학자들을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9]   


스티븐 굴드의 평가

작고한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 교수였으며 진화 고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는 이렇게 썼다. ”라이엘의 탁월한 업적은, 흔히 말하듯이, 주요한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교과서가 아니라, 훌륭하게 짜 맞춘 하나의 주장[동일과정설]을 표현하는 인상적이고 간결한 글귀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 진실은 논리적 주장과 풍부한 문서들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지, 수사적인 화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10]

굴드는 말했다 : ”찰스 라이엘은 직업적 변호사였으며 …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동일과정 견해를 유일하고 진실한 지질학으로 확립하는데 두 가지 작전을 사용하였다. 우선 그는 허물어 버릴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사실, 격변론자들은 라이엘보다 훨씬 더 경험적이었다. 지질기록은 격변론을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지층암석들은 부서지고 뒤틀려 있으며, 전체 생물상(faunas)이 파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백해 보이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라이엘은 창의적 상상력으로 증거를 보강하였다.”[11]              

굴드는 이렇게 요약했다 : ”라이엘은 사실(truth) 탐구와 현장연구(fieldwork)의 백마를 탄 기사는 아니었지만, 시간 순환의 지속적 상태(steady state of time’s cycle)에 뿌리를 둔 매력적이고 특별한 이론의 전파자였다. 그는 수사적(修辭的)으로 이 현실적 이론을 합리적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12]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라이엘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의 행적은 지질학계의 공식적 영웅전(英雄傳)이 될 정도였으며, 오늘날까지 교과서를 통하여 전파되고 있다. 물론 전문 역사학자들은 더 자세하게 알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단순하고 영웅적 이야기를 열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장 지질학자들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13]


라이엘과 다윈

다윈은 라이엘의 잘못된 가정인 오래된 지구에 근거하여 자신의 진화론을 만들었다.

다윈은 비글호에서 라이엘의 첫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그 결과 다윈은 라이엘의 잘못된 가정인 오래된 지구에 근거하여 자신의 진화론을 만들었다.[14] 1836년 9월 다윈이 영국으로 돌아 왔을 때, 주로 찰스 라이엘을 통하여 당시의 유명한 과학자들을 소개받았다.   

1858년 다윈이 자신의 이론과 유사한 적자생존 이론을 설명하는 편지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에게서 받은 후[15],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16]에서 아직 출판하지 않은 다윈의 1844년 논문의 요약문과 1857년의 다윈이 미국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1810-1888)에게 보냈던 요약문과 함께 이 편지를 발표하도록 제안했던 사람이 라이엘이었다. 라이엘은 다윈의 것을 먼저 발표하고, 다음에 후커, 그리고 월리스의 것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설득력 없는 년도 순과 알파벳 순으로 발표됐는데, 다윈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라이엘은 1875년에 사망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7년 후에 라이엘의 친구이자, 같이 성경을 부인했던 사람인 찰스 다윈이 뒤를 따랐다. 



나이아가라 폭포

1841년 찰스 라이엘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했다. 최초 정착민들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자신들이 살았던 40년 동안에, 1년에 약 1야드(91.44cm)씩 뒤로 후퇴하는 것을 관측해왔다. 이 속도에 의하면, 전체 협곡의 침식은 1만 년 이내에 일어났을 것이다.[1] 이 연대는 창세기를 부정하는 라이엘의 세계관에 비추어 보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출판된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9판에서 라이엘은 (후퇴 속도와 관련하여) 1년에 1피트(30.5cm)가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추측(conjecture)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퀸스타운의 절벽으로부터 현재 장소까지 폭포가 후퇴하는 데, 35,000년이 필요했을 것이었다.[2]

이것은 라이엘에게 책임이 있는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현재 작동 중인 1년에 1야드의 침식속도를 사용하지 않고, 과거에 다른 속도를 적용한 것은 (자신의) 동일과정설을 자신이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폭포의 첫 거주자가 40년 동안 목격한 증거를 반박하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함 없이, 라이엘은 오만하게도, ”폭포 지역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무르고 침식에 취약한 물질이 아니라, 전에는 단단한 암석층이 소용돌이 바로 아래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 단단한 암석층에 의해 폭포 절벽의 침식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선언했다.[2] 

.7마일(11.3km) 길이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지난 3,800년 이상에 걸쳐 아메리칸 폭포(American Falls, 왼쪽)와 호스슈 폭포(Horseshoe Falls, 오른쪽)의 물에 의해 침식되었다. 

어딘가에 침식에 저항하는 단단한 장애물이 있었다는 가정이 왜 항상 필요했는가? 오로지 성경 연대기와 역사를 훼손하려는 목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라이엘의 속임수에 불과한 35,000년이라는 연대는 지질학 문헌에서 오래 전에 폐기되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시켰고, 창세기 연대기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든 후에 폐기되었다. 노아 홍수에 의한 영향들, 즉 엄청난 량의 물과 퇴적부하, 그리고 홍수 후 빙하기의 얼음과 얼음이 녹은 물들에 의한 침식 등을 고려한다면, 나이아가라 폭포의 연대는 약 3,800년 전쯤 얼음덮개가 퇴조했을 때의 기간으로 줄어든다.[3]


References
1.With the strong possibility that the rate was more rapid in the past when the gorge was narrower, and hence the water-flow rate greater.
2.Lyell, C., Ref. 1, 9th Ed., Little, Brown & Co., Boston, USA, 1853, p.214–218. Note: Queenstown is now called Queenston.
3.See Pierce, L., Niagara Falls and the Bible,Creation 22(4):8–13, 2000; creation.com/niag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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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Lyell, C., Principles of Geology, Editions 1–8 & 10–12, John Murray, London, 1830 to 1875; 9th Edition, Little, Brown & Co., Boston, USA, 1853.
2.One of these, along the Rhine and across Switzerland, was on an extended honeymoon following his marriage to Mary Honer on 12 July 1832. They had no children. (Encyclopaedia Britannica).
3.In Britain, a lawyer who has the right to argue in higher courts of law.
4.James Hutton (1726–1797), who declared there to be 'No vestige of a beginning,—no prospect of an end” in the earth’s geology was then chief proponent. See Grigg, R., James Hutton: the man who warped time, Creation 36(3):20–23, 2014; creation.com/james-hutton. See also the more technical Reed, J., St Hutton’s Hagiography, J. Creation 22(2):121–127, 2008; creation.com/st-huttons-hagiography.
5.Lyell, C., Ref. 1, 1st Ed., Vol. III, pp. 384–85.
6.Gould, S.J.,Time’s Arrow, Time’s Cyc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p. 124.
7.Catchpoole, D., and Walker, T., Charles Lyell’s hidden agenda—to free science 'from Moses”. creation.com/lyell, 19 August 2009.
8.Letter of Charles Lyell to George Poulett Scrope, June 14, 1830, Life, Letters and Journals of Sir Charles Lyell, Edited by his Sister-in-law, Mrs Lyell, John Murray, 1881, Vol. I, pp. 268–71.
9.I.e. those who claim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God from things seen in nature (such as purpose and design).
10.Gould, S.J., Ref. 6, pp. 104–105, 107.
11.Gould, S.J., Catastrophes and steady state earth, Natural History, 84(2):15–16.
12.Gould, S.J., Ref. 6, p. 115.
13.Gould, S.J., Ref. 6, pp. 111–112.
14.Lyell also believed that a ‘creative force’ had made species in their present form in their current location. This was contrary to the biblical view of dispersion and variation after the Ark landed in the mountains of Ararat. Such antagonism to Genesis would have encouraged Darwin in his rejection of Genesis.
15.See Grigg, R., Alfred Russel Wallace: ‘co-inventor’ of Darwinism, Creation 27(4):33–35, 2005, creation.com/alfred-wallace.
16.Note: named after the ‘father of taxonomy’, Carl von Linné (1707–1778) aka Linnaeus.

 

번역 - 홍기범

링크 - http://creation.com/charles-lyell 

출처 - Creation 36(4):36–39, Octo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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