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나님적 철학과 과학 : 그 역사적 고찰

미디어위원회
2004-04-30

반하나님적 철학과 과학 : 그 역사적 고찰

(Anti-God Philosophies and Science:an Historical Survey)

Ian scott 


I. 철학의 기원 (The Beginning of Philosophy)

초기 희랍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순전히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부언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롭고 자주적인 의지에 근거한 이해력 탐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free-thinking)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하겠다.

철학서적들 안에서 제일 먼저 거명되는 사람은 BC 600년 경에 살던 탈레스(Thales)가 상식이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 가운데 일식에 대한 예언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 다행하게도 예언된 일식 날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태양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 神들의 진노를 걱정한 나머지 양진영의 군대는 전투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탈레스는 또한 바다에서의 배를 위한 거리측정법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기상예보기술도 그가 발견한 과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발견들에 대한 반대자들의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철학은 시간낭비다.” 그러므로 ”철학자라는 족속들은 보다 더 실용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이라고 일갈했다. 탈레스가 실용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가오는 해의 기상조건이 올리브 수확에 최적이 될 것임을 예언하면서, 그는 치오스 섬의 모든 올리브에 대한 압착(壓搾)권을 받아냈었다. 다음 해 가을 과연 올리브는 대풍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올리브를 추수도 않고 판매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철학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축재할 수 있으나, 그런데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었다. 후대에 와서 초기 크리스천들이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가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걷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탈레스를 좀더 전문적으로 고찰하려면, 우선 그가 자기 주변 사물들을 상당히 자연스러운 시각에서 설명하려 애썼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은 물밑에 있다”라는 명제를 견지하였다. ”사실상 모든 것은 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와 같은 단언(斷言)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도 ”모든 것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물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희랍인들은 올림퍼스 산 위에 살고 있는 제신(諸神)들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자기네 마음대로 이런저런 일들을 일으킨다는 전통(傳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 철학자가 그들의 신화와 전설을, 그리고 제신의 이야기들을 감히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에 대고, ”모든 것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실험은 합리적이었다. 민더 강 (River Meander; Miletus 근처를 흐르는) 물이 상류에 있는 석회암 언덕에서 흘러내리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그 강물을 떠다 용기에 넣고 없어질 때까지 끓였다. 그 물이 전부 공기로 변하였다고 말한 그의 결론은 그런대로 정확하였다. 물이 다 없어진 다음 용기 바닥에 남은 흰 잔류물이 관찰되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흙탕도 섞여있었다. 이런 잔류물을 제외하고는 그 용기 안에 있던 물체가 전부 없어져 버린 것을 보니 모든 물체는 물로 되어있음이 틀림없었다. 건조한 토양을 난로 곁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돌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던 탈레스는 그 토양에서 습기가 서서히 스며 나오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얼음이 물보다 더 압축된 형태라는 것 말고는 물과 동일한 물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눈(雪)과 안개의 관계도 얼음과 물의 관계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바위덩어리도 얼음덩어리와 유사한 물체로 생각하였다. 바위는 얼음보다 더 압축된 물체라는 것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쩌면 바위도 얼음과 마찬가지로 물로 환원시킬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추론이 듣기보다는 바보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요점은 그의 연역(演繹)은 자연스러운 설명으로서 상당히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설명이 원소 단계에 있는 물체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질문이 원칙적으로 기대하는 대답은 합리적인 사람이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이다.

BC 5세기경 희랍의 떠돌이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프로타고라스는 자기가 체득한 인생체험들을 재치 있게 요약하여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의 이성이 궁극적인 시금석) 이라고 말하였다. 이 화두야말로 그때부터 현재까지 철학사조(哲學思潮)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명제로 남아있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사안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여하한 명제도, 여하한 신념체계도, 그리고 여하한 사상도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철학은 초기 단계서부터, 난삽(難澁)한 문제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두 합리적인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상반되는 의견을 들고 나온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는 쪽이 더 합리적인 의견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판관은 누구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였기에 그 때부터 두고두고 철학자들을 애먹였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창조주의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에게 책임을 지고 있으며, 창조주는 인간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었다는 전제를 견지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로마서 1장), 바울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반항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야말로 철학사조를 꿰뚫고 있는 기본적인 본질이라고 지적하였다.

 

Ⅱ. 현대 과학의 대두 (The Rise of Modern Science)

현대 과학이 부상할 즈음에 (17 세기의 벽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과학적 신발견들이 폭발하였다. 그 때가 갈릴레오의 시대였고, 조금 나중에는 뉴턴의 시대였다.

1600년대까지는 혈액의 순환현상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냥 혈액은 조수처럼 끌어올려졌다가 밀려나간다고 생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동맥이 절단되면, 혈액이 고르게 새어나가지 않고 내뿜질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혈액은  끌어올려졌다가 밀려나간다는 것이 분명하다.” 라고 말하였다. 당시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화살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는 어떤 물체가 한 곳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경우 더 세게 끌면 더 빨리 간다는 사실과 사람이 움직이는 그 물체에 제동을 가하면 그것이 멈춘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공학적인 원리에 대한 단순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새로운 신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바위덩어리를 끌고 올라간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그 바위를 끌면 그것은 움직일 것이며, 우리가 멈추면 그 바위도 멈춘다!? 그러므로 속도는 힘에 정비례한다는 원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라는 이론을 폈다. 아크로폴리스로 바위를 끌어올리던 노예는 모두 다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화살은 어떻게 되었을까?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뒤를 밀어주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움직인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마침내 그는 화살 끝이 옮겨놓은 공기가 화살 뒤끝을 부채질하면서 화살을 밀어붙이고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말대로라면 화살은 영원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말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착상이라 하겠다. 중세 유럽에 와서 이 주제에 대한 최선의 해설은 프랑스의 철학자/과학자 쟝 베리당 (Jean Buridan 1300-1358)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는 잡아당겼던 활줄을 놓아주면, 운동량(impetus)이라는 무게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유동체가 활줄로부터 화살로 옮겨갈 것이며, 그렇게 된 그 화살은 혼자서 속력을 내며 날아간다고 생각하였다. 날아가는 동안 화살은 그 자체 안에 옮겨온 운동량(impetus)이 서서히 빠져나간다고 보고, 운동량이 다 빠져나가는 순간 화살도 운동을 멈추고 떨어진다고 했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 와서 들어보면 가소롭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운동량 (impetus)라고 하는 호칭과 어떤 유동형태라는 생각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운동에너지(kinetic energy)의 개념과 큰 차이가 없다.

17세기에 들어서서 신과학의 대두와 더불어, 인간 지식의 진보의 속도가 한 층 더 빨라졌다. 1700년에 케플러(Kepler)는 화성궤도의 상세도를 그려냈다.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학 이론을 본격적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뉴턴은 미적분학에 관한 자기 자신의 새로운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이용하여 천문학과 공학 분야를 전반적으로 재정립하였다. 독일의 기레크(Gierech)는 공기 펌프와 진공상태의 지구의(地球儀)를 가지고 역학실험을 공개하였다. 공기를 뺀 지구의의 반구에 각각 팀을 짠 몇 필의 말이 두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겨 보았으나 두 반구를 분리시키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파스칼이 파스칼의 원리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다음에 당신의 발이 자동차의 제동기 위를 밟을 때면, 그의 원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데 감사하십시오. 그의 원리는 수압기 체계의 기초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리첼리(Torricelli)가 기압계와 기압측정법을 개발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다. 얼마 후에 영국에서는, 보일(Boyle)이 보일의 법칙이라는 기체에 관한 기본적인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부피와 압력의 상관관계의 법칙이다. 그리고 뉴턴의 경쟁자로 알려진 후크(Hooke)는 탄력의 기본법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로는 이 법칙을 이용하여 스프링과 균형의 비율을 계산할 수 있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스프링의 균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후크과 뉴턴의 또 다른 친교자인 헬리(Halley)는 혜성의 반복적 출현을 식별하는 일을 하였다. 혜성 헬리는 그가 확인하고 재출현을 예언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제 2부 (Part Two)

아이작 뉴턴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예언에 관한 자기 저서와 주화 가장자리를 까칠까칠하게 하는 기계를 발명한 공로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다. (부정한 사람들이 금을 모을려는 목적으로 1파운드 금화의 가장자리를 줄로 쓸어내지 못하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전적으로 다른 이유 때문에 그는 과학자로 기억되었다. 첫째로 매우 단순한 힘의 시각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능력은 그의 공로로 귀속된다. 사과나무 밑에 앉아있던 뉴턴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런던의 대역병(大疫病) 기간에 그는 안전을 위해서 케임브리지를 떠났었다! 그의 머리에 떨어진 사과를 맞고 갑자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우쳤다든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는 떨어지는 사과에 작용하는 힘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 무엇을 연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는 그런 힘이 수많은 현상을 발생시키는 힘들과 연관이 있는 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어쩌면 바람이 불고 있었는지 모른다. 불어오는 바람의 힘 때문에 사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떨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가령, 보다 더 강한 바람이나 허리케인이 불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과의 낙하는 지구의 곡률(曲律)에 의해 야기되는가? 지구 둘레를 돌 정도일까? 뉴턴은 정확한 계산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달의 영향력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사실상 달은 인력을 지구에 보내고 그 힘은 지구 둘레에 미치고 있다.

그런 것이 로켓이 정확한 방향으로 띄워 보낸 위성들한테 일어나는 현상이다. 로켓은 위성을 밖으로 내보내면 위성은 로켓을 떠나 빙빙 돌겠지만 결코 떨어지지는 않는다.

과학자 뉴턴은 모든 현상을 하나로 묶었다━지구 주변을 도는 달,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 조수의 힘,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이런 현상들을 매우 기본적인 원리로서 설명하였다.

17세기 말엽에 이르자 신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과학적 사고로 충만한 신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인간 지식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팽대하고 있는 세계였다. 지식은 두 분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신학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들. 그리고 과학 분야이다. 후자의 경우 아무런 전제도 없이 오로지 실험만이 인정되는 분야로서, '실질적인' 발견이 인간의 지적능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분야이다.

18세기의 세계는 여러 방면에서 낙관적인 시대였다. 특히 프랑스가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이 시대를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렀다. (계몽 [Enlightenment]이라는 용어는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답게 사고할 수 있다!” 라는 뜻을 내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볼테르(Voltair)는 그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그밖에 어떤 것에도 우리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수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벌어질 때 로베스삐에르 (Robespierre)는 실질적으로 이성의 여신을 공식적으로 경배하는 기구를 설치하려고 기도하였던 적도 있었다.

합리적 유신론을 지향하던 볼테르의 태도는 가히 주목을 끌만큼 흥미롭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음은 물론, 신학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이 18세기 초엽에 주장하던 내용을 고려하여보면, 그가 하나님이나 신학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풍자한 내용을 들어다 보면, 이 '자주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정면을 대하면서 사실상 비웃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예가 있다. 그의 기도문을 살펴보자, ”나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나의 모든 적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들뿐일까! 프랑스 디데로(France Diderot)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디데로가 실질적인 지식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은 일차적으로 감각기관의 경험과 이성, 즉 과학의 새로운 지식에서 도출되는 지식을 뜻하였다. 계몽시대는 이성이 온전하고도 진정으로 궁극적인 왕좌에서 군림하던 시대였다.

뉴턴과 여러 과학자들이 제기하였던 이론들은 두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로 인간이성의 능력에 대한 엄청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어두운 밤에 숨겨있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뉴턴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다.”

라는 시구는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나, 뉴턴의 충격이 얼마나 장대하였는가를 묘사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둘째로, 뉴턴은 비록 삼위일체를 부정하였지만 유신론자였다고 알려진다. 그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비스듬하게 끌어대는 달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자로서 그는 계산과 관찰에 근거하여 이론전개에 집중하였다. 과학자로서의 뉴턴은 이 원칙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서는 그의 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는 그 피조물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설명한다.”라고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의 좌우명으로, 'Hypothesis non fingo,' 즉, ”나는 가정을 세우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할 따름이다.” 이라는 구절을 택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한 시계공이었으며, 뉴턴은 그 시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찾아내는 사역을 맡고 있었다고 하겠다.  

뉴턴이 살았던 한 세기 중에 과학은 한 단계 도약하였다. 1800년에 이르러서는, 우주 밖에 서 행사하시는 창조주의 힘에 의지함이 없이 우주를 설명하려 기도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 수학자 삐에르 라쁘라스(Pierre Laplace)는 네불라 가정(Nebula Hypothesis)이라고 알려진 이론을 세웠다. 뜨거운 기체단(氣體團; gas mass)이 원형운동을 그리다가 마침내 그 속에서 행성들이 자라서 나와 식어가면서 태양계를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최대의 대상, 즉 태양이 근접한 작은 대상들과 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대상들의 중심에 있다는 설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상당히 합리적인 이론으로 생각되었다.

라플라스가 나폴레옹에게 소개되었을 때, 수학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던 이 프랑스 황제는 이 이론에 매료되었었다. 나폴레옹이 물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리를 잡고 계시는 곳은 어디쯤인가?” 라플라스는 ”폐하, 저로서는 그 가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플라스는 결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물을 관찰되는 한에서만 설명하려하였던 것이다. 그는 알고 있는 물리학적인 법칙들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은 우주의 내용을 설명하려 하였던 것이다. 뉴턴과 그를 좇던 과학자들의 과학이론은 당시 관찰되어 알려진 법칙들을 최대한으로 설명하면서 이 충(衝; opposition)의 이론을 격려하였다.

 

Ⅲ. 신 지질학 (The New Geology)

18세기 말엽에 스코틀랜드의 버위크에 살고 있던 농부 출신 제임즈 허튼(James Hutton)은 지질학자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과정론(Uniformitarianism)으로 알려진 원리를 개발하였다. 그것은 지구가 지질학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이 되는 데는 반드시 현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힘과 유사한 힘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서 설명될 수 있으며, 세계는 현재 작동하고 있는 힘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구가 탄생하였을 때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대답들 중의 하나는 대충 이랬다. ”풍화작용과 굽이진 강의 예를 들어보자. 풍화된 바위들을 관찰해 보라. 대륙의 해안선들의 완만한 융기를 주목하라. 이런 것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설명해줄 것이다. 그것이 세계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과거는 현재의 자연의 힘의 시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허튼의 말년에 이르러 그의 생각이 지향하는 곳이 어떤 곳이 될 것인가를 인식한 사람들로부터 그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Royal Irish Academy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허튼을 소위 '실천적 무신론자'로 매도하였던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허튼은 그의 이론이 자기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너무 혼란스러워 마침내 신경파탄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고 말았다. 허튼이 말하고자 하였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이것을 끝까지 생각해 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현재 작동하고 있는 힘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힘들이 세계가 오늘과 같은 세계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부언하여 설명해보자. 당구공들이 어떤 정해진 위치에 놓여있는 당구대를 상상해 보자. 누군가 당구를 친다고 가정한다. 그는 ”저 공들은 어쩌면 그렇게 이상한 위치에 놓였는가! 큐 끝으로 이 공의 여기를 이렇게 치면 그 공은 저기를 가로질러 가서 저 뒤로 갈 것이다! 이 공이 저 구석으로 가는 데는 이 길만이 가능한 길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당구 게임을 하는 사람이 하는 가정이다. 그러나 그 공들은 어떤 침입자를 당황하게 할 생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놓았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어떤 어린아이가 게임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공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정상적인 당구나 스누커 게임) 에서 알려진 힘은 당구대 위에서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결과된다. 그러나 이 가정이 정확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허튼의 이론은 찰스 라이엘 (Charles Lyell)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의 책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가 1830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가 내다본 예측 때문에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유용하게 쓰인다. 라이엘이 이 책을 집필할 때, 그는 동일과정론의 원리를 그냥 수용하고 있었다. 그는 보드라운 진흙으로 된 125cm 두께의 앙금을 예로 들었다. 거기서 그는 진흙이 얼마나 빠르게 호수 안에서 침전될 수 있는가를 계산해보려 기도하였던 것이다. 일년에 1mm 씩 침전되어 125cm가 되려면 약 100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19세기 초엽에 다른 과학자들이 이와 비슷한 계산을 기도하였다. 레이레이 경(Lord Rayleigh)은 지구의 나이를 추산하려 하였다. 그는 ”바다는 담수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바다의 염분은 풍화된 바위들로부터 연유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몇몇 강을 선정하고 거기서 바다로 흘러갔을 염분의 양을 측정하려 하였다. 거기에 근거하여 전 지구에 있는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총량을 추산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 그는 지구의 나이를 대략 3000만에서 5000만년으로 추산하였다. 이 나이는 진화론자들이 이용하기에는 태부족한 나이였다. 어쨌거나 이것이 그가 계산해 낸 숫자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NB: 이 숫자는 나이로서는 상한선이지, 지구의 실질적인 나이는 아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염수로 생존하는 어류에 유익한 염수 바다를 가진 지구를 창조하였다면, 지구 나이의 최대한의 상한선은 훨씬 적을 것이다. 물론 대홍수로 해서 바다의 염도가 상당히 희석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로 최대한의 상한선은 더욱 적을 것이다. 편집자 주]

 

제 3부 (Part three)

지구 나이 측정의 또 다른 방법은 납으로 변질하는 우라늄의 매장량을 알아내는 일이다. 우라늄은 어떤 특정한 율로 퇴화한다고 전제되어있다. 그 물질은 모두 우라늄으로 시작되었으리라고 가정하고 있으며, 납의 매장량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라늄이 퇴화에 소요된 시간이 추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원리는 언제나 유효하겠지만, 잠재 오류를 무시할 수 없다. 잠재오류라 하면, ”현재에 관찰되는 힘만이 과거에도 작용하고 있었으리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명제이다. 현재의 증거만을 가지고는 과거에 현재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개연성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새롭게 ”붐을 이루고 있는” 광산 부락을 상상해보자. 그 광산 마을의 아침 한참 분주한 거리를 자동차로 지나가다 보면,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 거리엔 아무 것도 없었으며, 지금 저토록 붐비는 곳이 최근까지는 조용한 두메였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 곳이 이렇게 번창하는 마을로 되기까지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저 나무숲과 탐스러운 관목 숲이 이만큼 자라는 데는 수년이 걸렸어요.” 그 관목 숲이 저기 두 그루 거목처럼 이곳에 옮겨 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놀랠 것이다. 이곳에 사는 친구네 집의 나이를 그 집 정원의 잔디를 보고 추측하다가, 그 잔디밭은 두루마리 잔디 세트를 사다가 펼쳐놓은 것이란 사실을 알면 결국 황당할 것이다. 이러한 실례들을 지적하려 들면 한 두 곳이 아닐 것이다.

 

Ⅳ. 다윈 (Darwin)

19세기 중엽에 다윈이 생물학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는 지질학 분야에서 허튼과 라이엘이, 물리학에서는 뉴턴이 이룩한 성과와 비교된다 하겠다. 예컨대, 다윈은 현재적으로 알려진 힘의 시각에서 사물을 설명하였다. 그는 유명한 세계 일주 여행기 The Beagle에 자기가 관찰하였던 여러 섬들과 핀치새들과 같은 대상들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바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정원에 잡초들의 자라는 양상을 관찰하였다. 잡초의 생태계에서는 다른 잡초를 질식시키고 생존한 잡초의 개체군(個體群)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적 모델은 두 가지 핵심 본질에 근거한다. 첫째로, 어떤 개체군에서도 변화와 변이는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로 어떤 형태로건 적자생존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는다. 즉, 개체군들은 각기 그 자체 내부에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적자가 생존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적자생존이 후손 생산을 잘 하려는 능력이라면, 이도 또한 사실임은 당연하다.

당시 다윈의 이론은 현재 관찰될 수 있는 힘의 시각에서 설명하려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이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 현재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내용의 지지를 받아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웠다.

다윈의 이론이 초래한 결과는 어찌 보면 뉴턴의 이론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관념을 확립하는 측면에서는 뉴턴의 충격과는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일 수는 없다.

다윈 이론이 초래한 결과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크게 우려되었다. 첫째로 기원에 대한 믿음에 미친 영향이다. 인생과 세계, 그리고 우주 기원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끼친 다윈의 충격은 의심할 바 없이 크다. 1895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우주생성에 관한 창세기 1장의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1859년 이후, 창세기 초두의 章들의 기사 내용의 진실성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세기 기사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있었지, 어떤 알레고리나 시, 또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창조하셨다는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구전진술(口傳陳述)로는 믿지 않았었다.

둘째로 다윈이 제기하였던 인간관은 더욱 의미심장하였다.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은 사실상 인간기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는 나중에 가서 취급한 것이다. 그의 관점으로는,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로서 원숭이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과의 사이에 있는 간극이 그리 광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윈이 그의 만년에 또 다른 하나의 저서,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 (The Expression at the Emotions in Animals and man)'을 탈고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저서는 여러 측면에서 종의 기원 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서 그는 생명체의 생존의 가치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생명체의 신체적 구조보다는 그 생명체의 행동 양식에 더 많을 역점을 두었다. 다윈은 기원에 관한 그의 최초의 이론에서 생명체의 외적 구조가 생존환경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유리한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정서표현에서 생명체가 취하는 어떤 특정한 행동 형태의 표현에 주목하였다. 인간은 왜 어떤 특정한 행동 특징들을 가지는가? 그런 특징들은 진화에 유리할까?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생존환경 적응에 불리했을까? 예컨대 인간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또 무시무시한 얼굴 표정을 지을까? 여기서 그는 그의 종전의 이론의 시각으로, ”그런 능력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라고 물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인의 동굴주거지에 송곳니를 세우고 호랑이가 기어들었다고 상상하자. 거기 살던 사람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사람이 생존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지 않았을까?

이 저서에서 찰스 다윈은 역시 인간의 감정표현을 얼굴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의 감정표현과 연관하였다. 개코원숭이의 군서지의 생활양태를 필름에 담은 것이 있다. 그들은 군서지에 접근하는 대상이 있으면 사람이건 동물이건 상관 않고 무작정 진흙이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고 먹던 찌꺼기를 흩뿌린다. 인류의 제반 종족들은 거의 다 흙덩어리나 나무 조각들을 집어던지던 단계를 지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으르렁거리는 단계에 있는 부류도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얼굴 표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행동 특징이 다른 행동 특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더욱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할 것 같다. 과학자들은 동물에 관한 수많은 실험과 거기서 얻은 심리학적 발견들이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 발견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학교 교실내의 수업태도와 수업관리에 관한 많은 증거들은 쥐와 비둘기에게 실시하였던 실험에 근거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교사양성 사역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들 몇몇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나 자신은 이 교육자들이 뭔가 매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동물의 행동수정기술을 개발한 하버드 대학교의 B.F. Skinners는 한 쪽 구석에 버튼을 단 상자 안에 쥐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 쥐에게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우선 그 쥐에게 밀 알갱이나 치즈 조각을 던져놓은 위치로 눈을 옳게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 쥐는 그 방향을 바라본 대가로 먹이를 먹도록 하지 않고, 그 버튼이 설치된 위치로 다가섰다는 이유로 먹이를 먹게 하였다. 이렇게 반복하여 그 일에 익숙하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한 조각의 먹이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여 그 쥐는 보상을 받는 습관에 길들게 되어 마침내 먹이를 원할 때면 언제나 그 버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결국 버튼을 눌러대게 되었다. 보상을 주는 방법을 매우 용의주도하게, 언제는 간헐적으로 다른 때는 무작위로 하여, 그 가련한 놈이 버튼 누르는 일에 중독 들게 만들었다. 사실상 그 놈은 버튼을 하루 종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비둘기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주둥이를 계속 찍어대어 어쩔 수 없이 새장에서 끄집어 낼 만큼 중독증세를 보이는 단계까지 실험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나 연예(演藝) 분야에서는 인간을 단시간 내에 일반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외팔의 밴디트라는 포커 기계는 이 실험에 놀랄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실험은 사람이 이 기계 조작에 습관 들게 하는 방법이다. 지불 기능을 꺼버리고, 그 사람이 기계 조작을 중지하기 전에 그 기계 안에 약 800 개의 10전 짜리 주화를 집어넣었다. 그 실험에 그 사람이 반응하는 것을 주목해보자. 만약에 그 실험을 쥐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은 학교 수업 관리의 원리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한 줌의 젤리 빈(콩 모양의 사탕과자)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키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시끄러운 교실에 교사가 들어선다. 순간 한 아이가 잠깐 조용해진다. 그리고 그에게 젤리 빈 한 톨을 건네준다. 이 행위가 그의 정숙을 더욱 북돋운다. 그리고 뒤따라 나머지 아이들도 조용해지다가 마침내 반 전체 어린아이들은 선생의 통제에 순순히 응하게 된다! 이 이론은, 만약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면, 그 선생은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신경질환 병자나 정신지체 아동에게 적용하고 있는 행동수정기술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그리고 쥐와 비둘기에 대한 조사에서 발견된 내용들이 교생실습 중인 예비교사들을 위한 교재에 포함되었다. 행동은 어떤 경우에는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총체적 연속성에 대한 가정은 억지 가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것을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쥐와 인간 사이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Skinner의 상자 안에 든 쥐에 관해서 농담 하나를 만들었다. 쥐 한 마리가 다른 쥐에게 말을 건다. ”어이, 이거 봐, 내가 Skinner 실험에 길들어졌나봐! 저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는 내게 먹이를 주거든!” 이 농담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사람들이 쥐를 ”생각하는” 동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물 실험 모델을 얼마나 빨리 인간의 사고 행동에 사용하는가를 알면 진정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만치, 우리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야만 하겠다. 즉, ”이러한 실험결과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어디까지 적용하려 하는가?” 라고.

과학(science)이 반-하나님적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의식 또는 무의식적인 골격 안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하면, 더 이상 '이성'에 대한 수긍할 만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우리 생명을 유지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서 인정하고 영접할 때만,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고 무엇이 이성을 구성하지 않는가에 대한 유효한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4/anti_god.asp 

출처 - Creation 3(4):28–37, November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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